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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uction (3/28)

3. Auction

최기원의 말에 결국 몸이 얼어붙었다. 머리로는 얼른 몸을 움직여 그의 다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손발을 옭아맨 것처럼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망설임에 이름을 붙인다면 분명 모멸감일 것이다. 나는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최기원에게 물었다.

“질문이 있어요. 저희… 사귀기로 한 거 아니에요?”

“맞아요.”

그의 표정만큼이나 간결하고 시큰둥한 대답이었다. 나는 메마른 목구멍으로 억지로 침을 삼켜 넘기려 애썼다. 목소리가 자꾸만 볼품없이 갈라지고 떨렸다.

“이렇게 하는 게 사귀는 거예요?”

“그럼 뭘 기대했는데?”

“저번에 지원이 형 어디가 좋았냐고 물으셨죠….”

형의 이름이 다이닝룸을 울린 순간 최기원의 눈빛이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그는 소리 없이 나를 응시했다. 손이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피가 불거져 나오는 손톱 끝을 문질렀다.

“저는 지원이 형이 다정해서-, 아악!”

팟!

최기원의 손안에 있던 작은 잔이, 내 옆을 가로질러 날아가 다이닝룸의 기둥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깜짝 놀랄 만한 파열음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꾹 감으며 상체를 움츠렸다. 어두운 대리석 바닥 위로 연붉은색의 차가 사방으로 튀었다. 미지근한 찻물은 나의 종아리와 발도 적셨다.

“너랑 최지원이랑 만난 거 아니까 그만 이야기해도 돼요.”

“흐, 으….”

“그러니까 뭐 다정한 연애 같은 걸 생각했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차라리 창부 취급받는 편이 당신 멘탈에 좋지 않겠어요?”

감았던 눈을 뜨고 귀를 가렸던 손을 내렸다. 입술이 혼자서 꿈틀거렸다. 뱉을 말이 한가득하였지만 정제되지 않아, 입술 사이로 씩씩대는 소리만 비집고 흘러나왔다.

“돈 때문에 최지원 동생이랑도 붙어먹겠다고 제 발로 찾아온 주제에. 억지로 앉아 있는 티 내고 있는 거 엄청 웃기잖아.”

“…….”

“착한 내가 비련의 창부 취급이라도 해 줘야 죽은 최지원한테 면이 서지. 안 그래요?”

아직 놀란 기운이 가시질 않아 간헐적으로 떨고 있는 나를 보며 최기원은 식탁 한편에 올려 둔 담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작은 움직임에도 난 어깨를 움찔대기 바빴다. 라이터를 켜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인 기원은 고개를 돌려 연기를 뱉었다. 사채업자의 담뱃불 끝이 손등을 지졌던 감각이 떠오르며 속이 울렁거렸다.

“앉아서 자지 한 번 빨아 봐요. 그러면 백경철 빚은 갚아 줄게.”

그의 여상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의 충격적인 요구보다, 두 번째 문장이 더욱 거슬렸다. 섣부르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일, 알고 계신 거예요?”

“우와. 그것도 아빠라고, 아버지라고 불러 주네.”

“…어떻게 아셨는데요?”

섬뜩함에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들이 나를 찾고 압박을 넣기 시작한 건 겨우 며칠 사이로 벌어진 일이었다. 주언이의 병원 문제야 지원이 형이 도와준 정보가 있으니, 최기원이 자연스레 알게 되었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일을 그가 알고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최기원에겐 말도 하지 않은 집 주소를 알고 있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르며 속이 차게 식었다.

내가 뭐라고 사람까지 붙여 둔 건가. 최기원은 상황을 읽기 위해 눈만 도록도록 굴리고 있는 내 앞에서 담배 연기를 느른하게 뱉어 내며 짧게 혀를 찼다.

“그러게 진작 곱게 갔으면 괜히 백경철 빚까지 떠안을 일은 없잖아요. 나도 굳이 수고할 일 없고.”

얇은 담배가 물려 있는 잇새로 흩어지는 발음이 뭉개져 단번에 알아듣기 힘들었다. 아니, 사실상 발음의 문제라기보단 그의 말에 숨겨진 함의를 분명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백나언 씨가 저를 만날 때마다 자꾸만 이유를 찾길래. 이번에는 만들어 줬어요, 거절할 수 없는 이유.”

열이 올라 귀와 뺨이 불그죽죽해진 난 황망한 눈으로 최기원을 바라보았다. 거칠게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가 아직 상황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설마, 하는 불안을 안고 대답을 요구했다.

“동생 병원비, 백경철 빚. 여기에 더 얹을 게 필요한 거면 내가 조금 더 고민하고 다시 물어볼게요. 당신이 뭘 더 잃어야 자지 빨 힘이 생길지.”

“…무슨, 지금 무슨 말을.”

“병신처럼 더듬지 말고 잘 말해 봐요, 좀.”

최기원이 꼬았던 다리를 풀고 내 쪽으로 몸을 더 가까이 했다. 그러니까 지금 최기원의 말은, 내가 그를 찾을 수밖에 없도록 아버지의 채권자를 이용해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최기원이 다시 연기를 뱉어 냈다. 이번에는 희뿌연 연기가 나의 얼굴을 향했다. 최기원이 말한 연애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고 정의 내린 것과 매우 상이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에겐 육천만 원에 몸을 파는 기분을 느끼며 좆 빨아 주는 행위가 연애의 시작이었다.

“이제 곧 먹은 것 치우러 사람들이 올 겁니다.”

잠시 숨을 헐떡이던 난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자 살갗이 닿을 때마다 건조한 마찰음이 났다. 그러니까 여기서 또 어깃장을 놓으면 최기원이 무슨 방법으로 나를 이 집으로 끌고 올지 몰랐다. 잠시 숨을 고르고, 걸음을 옮겼다.

“…….”

차라리 최기원의 말이 맞았다. 돈 때문에 억지로 그의 가랑이 사이에 앉고 치욕적인 자세로 성기를 무는 것이,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편보다 나았다. 그는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한쪽 손등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더니 나를 향해 슬쩍 웃어 보였다.

“근데 잘 못 빨면 안 갚아 준다?”

최기원은 제가 한 질 나쁜 농담이 재미있는지 혼자서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난 입술을 꾹 깨물며 최기원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 흥미로운 것을 관전하는 표정으로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 올려다보는 거 싫어하는데.”

빈정대는 말투에서 그의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더는 지체하지 않고 그의 다리 앞쪽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긴 다리를 옆으로 뻗으며 벌렸다. 그의 다리 사이에 위치하게 된 나의 시선은 눈앞의 허벅지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 오갔던 대화의 어느 부분에서 육욕을 느낀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바지의 허벅지 위로 두툼한 성기 모양의 윤곽이 잡혀 있었다.

손으로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바로 보이는 속옷 밴드를 밑으로 살짝 당겨 성기를 꺼내는 것까지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꺼끌꺼끌한 음모와 핏줄이 서 있는 굳은 성기를 보자마자 무언가 목에서 울컥 치받혔다. 이를 악물고 속옷 사이로 손을 넣자 후끈한 사타구니의 열기가 시린 손으로 그대로 전달되었다.

찰싹. 그때 갑자기 내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의 중심에서 손이 떨어져 나가고 강한 힘에 몸까지 오른쪽으로 휘청였다. 뺨이 불에 타는 것처럼 아릿하게 아파 왔다. 최기원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낮은 목소리로 욕을 뇌까렸다.

“표정 씨발.”

“하, 으….”

맞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기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이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그게 못마땅한 모양이다. 하지만 표정 관리가 너무나 힘들어, 차라리 얼른 얼굴을 묻어 그에게 표정을 보이지 않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게 숨을 참은 후 다시 손을 뻗어 속옷 속에서 그의 성기를 꺼냈다.

“흐으….”

뜨겁고 단단하게 서 있는 성기를 꺼내자마자 숨이 흐트러졌다. 한 손으로 쥐어도 손가락이 맞닿지 않는 굵기에 양손으로 성기의 기둥을 붙잡았다.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얼른 귀두 끝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입술을 벌려 붉은 끝을 머금으려는 순간 뒤통수가 강한 힘으로 눌렸다.

“으읍!”

강한 힘에 귀두가 입술을 문지르듯 벌렸고, 성기가 입 안을 마음대로 들쑤시고 들어왔다. 천장을 죽 긁고 들어온 굵은 성기가 순식간에 혀뿌리 안쪽까지 찔러 왔다. 눈이 크게 떠지며 자연스럽게 손에 힘이 콱 들어갔다. 그의 배와 허벅지를 밀어내려 본능적으로 몸을 뻗댔지만, 뒤통수를 누르는 그의 힘에 순식간에 얼굴이 샅까지 파묻히고 말았다.

“크억, 큽!”

“하아….”

숨도 한 번 제대로 뱉지 못한 채로 성기를 물고 있던 나는 눈앞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탄식처럼 뱉어지는 그의 숨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렇게 그는 내 머리를 꾹 누르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폐부에 뱉지 못한 숨이 차올랐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허벅지를 미는 손끝에 점점 힘이 빠져 가기 시작했다. 어깨를 아무리 들썩이고 발버둥을 쳐도 그는 숨구멍을 틀어막은 성기를 뒤로 물려 주지 않았다.

결국 그의 허벅지를 쥐고 있던 손이 제멋대로 경련하며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무너져 내리기 직전에야 그가 나의 뒷덜미를 잡아채 고개를 빼 주었다.

“쿨럭, 쿨럭.”

목구멍을 침입했던 이물질이 빠져나가며 기침이 터져 나왔다. 서러워 맺혔던 눈물도, 숨이 막혀 뚝뚝 떨어져 내리는 생리적인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콧물과 침을 손등으로 걷어 내며 난 엎드린 자세 그대로 한참을 기침했다.

“다시 와요.”

“흐, 쿨럭, 네, 에. 쿨럭….”

“이번엔 손으로 잡지 말고 입으로만.”

후으, 후으. 내뱉는 숨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눈앞이 핑핑 돌았지만 초점을 얼른 그의 성기로 고정하고 무릎걸음으로 나아갔다. 그가 시키는 대로 바닥에 손을 짚고, 귀두 끝에 입술을 가져다 댄 후 기둥을 다시 물었다.

이미 걸쭉한 침이 범벅이 된 기둥이 번들거리고 있었고, 귀두 끝에서 흘러나온 액체 때문에 비릿한 향까지 코 아래에 맴돌았다. 처음부터 깊게 물기 위해 입 안에 성기가 다 들어찰 때까지 머리를 앞으로 당겼다. 울음이 터져 호흡이 더욱 불규칙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최대한 코로 숨을 쉬려 노력하며 머리를 더 앞으로 당겼다. 최선을 다해 성기를 머금은 나는 머리를 뒤로 살짝 물리며 앞뒤로 고개를 움직였다.

“참나.”

“우으……?”

“여기 못 먹고 남은 거 안 보여요?”

그는 성기의 아랫부분을 가리키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감았던 눈을 겨우 떴다. 그의 말대로 음모 아래 성기의 뿌리 부분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성기는 내 입 안에 다 담기엔 너무 길었다. 입술을 오물대며 조금 더 삼켜 보려 애썼으나 귀두 끝이 목젖을 건드리는 바람에 다시 헛구역질을 참느라 등을 들썩여야 했다. 그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참아.”

“후, 으 우욱.”

“아… 애새끼가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사나운 목소리의 끝, 그가 내 머리를 양손으로 붙들었다. 커도 너무 큰 손이었다. 얼굴 전체를 우악스럽게 감싼 손이 가볍게 나를 당긴 순간 나는 아까처럼 다시 그의 중심으로 처박혔다. 나는 바닥에서 손을 떼어 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혀뿌리를 누르며 지나간 성기가 목구멍 안까지 들어갔다. 그가 직접 움직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손으로 내 얼굴을 고정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릎을 꿇고 있던 나는 그의 힘에 떠밀려 엉덩이를 바닥에 댄 채로 주저앉게 되었다. 귀두가 쑤욱 쑤욱 목젖을 치고 지나갈 때마다 절걱대는 소리가 났다. 그의 것이 입 안을 빠져나갈 때마다 호흡이 흐트러지며 앓는 소리가 났다.

간간이 나의 구역질 소리가 섞여 들었지만 그의 움직임에는 일말의 여유가 없었다. 턱이 뻐근하게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그가 성기를 더욱 깊게 묻고 손바닥으로 내 뺨을 꾹 눌렀다. 그럴 때마다 그의 굵은 성기에 툭툭 불거진 핏줄이 볼 안쪽의 여린 살에 들러붙었다. 간간이 머리 위에선 낮고 깊은 남성의 숨이 터져 나왔다. 그의 흥분이 조금씩 선명해지니, 이 행위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안도가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감이 고조된 그의 허릿짓에 속도가 붙으며, 난 숨을 쉴 여유를 더욱 잃어버렸다. 그가 성기를 뒤로 물린 순간 입을 동그랗게 움직이며 성기와 입술 사이의 틈으로 차오른 날숨을 비집어 뱉었다. 동시에 뒷덜미의 머리채가 잡히며 고개가 뒤로 꺾였다. 입 안에 남아 있던 성기가 단번에 빠져나갔다.

“으윽!”

“이 세우지 마.”

철썩. 그의 손바닥이 다시 내 뺨을 짧고 빠르게 내려쳤다. 그가 뒷덜미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탓에 고개가 완전히 돌아가지는 않았으나 몸은 조금 휘청였다. 그리고 그 순간 허리를 숙인 그가 고개를 옆으로 비틀며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

뺨을 맞은 서러움을 잊을 만큼 놀란 내가 푸드덕댔다. 그는 아주 짧은 시간 입술을 맞붙였다가 다시 머리채를 뒤로 당기며 입술을 떼어 냈다. 난 입을 벌린 채로 멍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술에 미미한 웃음기가 달린 것을 본 순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재차 그의 성기가 치고 들어왔다.

다시 숨을 틀어막을 정도로 사나운 삽입이 이어졌다. 침과 그의 성기에서 흘러나온 백탁액이 지저분하게 입가로 흘러내렸다. 겨우 딱지가 앉았던 입가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점점 성기가 목구멍 깊숙이 처박히고, 더는 안 될 것 같아 도리질을 치려는 순간, 한계까지 목구멍을 찌른 성기가 입 안을 빠져나갔다.

툭, 투둑.

코 옆에서부터 눈가를 묵직하게 누르고 지나간 성기의 끝에서 액이 터져 흘렀다. 액체가 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양이 흥건했다. 선단과 문질러진 뺨에서부터 비릿한 향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흐윽, 하아, 하아….”

전신을 감싸는 탈력감에 팔다리를 푹 늘어뜨린 나는 반은 울면서 못다 쉰 숨을 몰아쉬며 헐떡였다. 어깨와 다리가 떨리고, 울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울컥, 울컥 굵은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정액 범벅이 된 채로 울고 있는 내 얼굴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네 인생도 참….”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내 옆머리와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식탁 구석에 놓여 있는 티슈를 잔뜩 뽑은 그가 내 뺨에 묻은 정액을 대충 훑어 냈다.

“제, 제가 할-,”

“그래요.”

그는 미련 없이 손에서 휴지를 떼어 냈다. 속옷과 바지를 정리한 그가 알몸으로 널브러져 있는 나를 두고 다이닝룸을 빠져나갔다.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흐, 으윽.”

소리 내어 울지 않으려 이를 꽉 물었다. 행여 누가 올세라 벗어 둔 홈웨어 바지에 발부터 동동대며 끼워 넣었다. 속옷은 대충 구겨 손에 쥐고 빠른 걸음으로 2층을 향해 걸었다. 눈물 때문에 희뿌옇게 흐려진 눈을 손등으로 비비려다, 입가에서 터져 나온 피가 말라붙은 흔적을 느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

고등학생 무렵 뒤늦게 자란 키는 남자 평균 즈음이었고 태생적으로 힘은 약했다. 생긴 것에 비해 악다구니는 있었으나 지구력이 약해 무슨 일을 하든 금방 뒤처졌다. 과한 스트레스를 받을 적엔 위가 자주 쓰리고 미열이 오르기도 했는데, 그마저도 딱히 앓아누울 만큼 크게 아픈 것은 아니었다.

비실거렸지만 은근히 면역력이 좋아서 스스로를 허약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 곁에는 누가 봐도 약한 주언이가 있었기에 나는 언제나 동생의 든든한 보호자여야 했다. 그 자리가 꽤 무거워, 나를 아프지 않게 북돋워 준 것 같기도 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다행인 일이었다. 구강성교 한 번으로 육천만 원의 빚을 탕감했다. 만약 그 빚을 갚지 못했다면 빚은 주언이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그들이 나를 때리고 위협해 지장을 찍게 한 각서 내용이 그랬다.

최기원의 호의 덕분에 나에게는 말미라는 것이 생겨났고, 주언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안락한 병원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너무나 아파야 했다.

혼이 나간 사람처럼 2층에 도착했다. 얼굴에 남아 있는 정액은 서둘러 닦아 냈으나 향이 미미하게 남아 계속 수치심을 풍겨 주었다. 2층에도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사용인들이 걸음 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윗옷의 단추를 거의 풀어 헤친 채로 힘없이 방으로 향한 나는 문을 열자마자 탄식했다. 방이 커도 너무 컸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은 걸음으로 화장실까지 도착했다. 옷을 마저 벗을 생각도 못 하고 곧장 샤워 부스로 들어가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물을 고스란히 맞았다.

얼마 가지 않아 묵직한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물이 송골송골 맺힌 차가운 타일에 등을 기대고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은 난, 바닥에 부딪혀 부서지는 물소리에 숨어 소리 없이 울었다.

요 며칠 사이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일이 나를 덮쳤다. 그 무자비한 홍수 속에서 내가 엉겁결에 쥔 최후의 지푸라기는 최기원이었다. 고통스러웠지만 치료를 이어 갈 수 있는 주언이를 생각하면 참을 만한 아픔이었다. 들끓는 수치심과 허탈감 속에서도 어느 정도 일을 해결했다는 미약한 안도감이 드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

“후….”

긴장이 풀리자마자 육체가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어떤 정신으로 옷을 갈아입고 침대까지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다음 날 아침 최기원의 비서인 조익현 실장님이 나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깨울 때였다.

“…백나언 씨.”

“으, 으.”

정신없이 앓고 있던 내가 겨우 눈을 떴다. 분명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전신이 축축했다. 뒤늦게 그것이 내가 흘린 땀이라는 걸 깨달았다. 침대 곁의 의자에는 조익현 비서실장님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에게로 겨우 시선을 옮겼다. 금방이라도 다시 닫힐 듯 가물거리는 눈을 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쳤다.

“열이 많이 나네요. 잠깐 이야기하실 수 있겠어요?”

“…….”

목이 타는 듯이 아파 대답을 하지 못했으나 조익현 실장님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자세한 것은 서류에 써 두었습니다만, 백나언 씨가 궁금해하실 만한 것들 위주로 간단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열이 너무 오르면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것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열에 부유하는 시선이 천장의 무늬를 따라 넘실거렸다.

“백경철 님의 빚은 오늘 오전 사장님께서 정리하셨습니다. 증빙 서류는 봉투 안에 들었으니 회복하시는 대로 찬찬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동생분의 입원비는 매달 진행되는 항암 치료에 맞추어 사장님께서 수납하실 예정입니다. 하지만.”

가지런한 설명 끝에 붙은 ‘하지만’이라는 말에 나는 힘겹게 눈동자를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백나언 씨는 병원비를 수납하는 한 달에 한 번만, 동생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

깜짝 놀라 되묻는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최기원의 것을 깊숙하게 받아 내느라 목구멍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헐어 버렸다. 목의 통증은 차치하고, 실장님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매일 주언이를 보러 가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기간이 길었다. 아이의 상태는 며칠 사이로, 아니, 며칠이 아니라 하루 안에도 몇 번을 오갔다. 오전에 좋았다가 오후에 심각해질 때도 있는 것이 소아암 환자였다.

그는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는지 천천히 설명을 덧붙였다.

“건강에 관련된 모든 부분은 간병인과 소통 중이며 비상시에는 당연히 보내 드립니다. 그 외에 사전에 허락을 맡지 않은 외출이나 사적인 연락 등도 삼가셔야 합니다.”

“…….”

“물론 저희가 백나언 씨를 감금한 것은 아니니, 뭐 마음먹는다면 나가실 수야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말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하아, 하아. 열에 달아올라 뜨거워진 숨만 내뱉었다. 머리에 엉켜든 생각이 많았으나 입 밖으로 뱉어지지 않았다. 좀 봐주실 순 없냐, 이 주에 한 번이라도. 부탁할 말을 고르고 골랐지만, 벌써 결과가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최기원을 설득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 내가 대거리를 포기하고 눈을 감아 버리자 실장님도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자 겨우 붙잡고 있던 정신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나는 그대로 어둑한 수면으로 빠져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몇 시간 동안 내리 잠만 잤다. 이번에는 낯선 손길에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뺨을 툭, 툭 건드려 댔다. 성의 없고 기분 나쁜 손길이라 느껴져 얼른 손을 치워 내고 싶었지만, 팔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문장이 되지 못한 소리가 입술 새로 힘없이 새어 나갔다.

“뭐라는 거야. 일어나요, 저녁 먹게.”

최기원의 목소리였다. 냉정한 목소리에 어룽지던 졸음이 본능적으로 달아났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 위를 덮고 있는 이불만 해도 너무나 무거웠다. 허우적대던 내가 힘 빠진 눈매로 그를 겨우 올려다보자, 그가 작은 한숨과 함께 팔을 뻗었다. 양손이 내 뒷목과 어깨 뒤로 들어와 나를 강제로 일으켜 앉혔다.

“내려와요, 밥 먹게.”

“…….”

“먹을 때마다 모시러 와야 합니까?”

최기원은 재킷을 벗으며 방을 나가 버렸다. 나는 어질어질한 몸을 겨우 가누며 매트리스를 짚고 일어섰다. 몸 상태는 자기 전보다 더욱 나빠져 있었다. 무언가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괜히 최기원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그에게 더 호되게 시달릴 것만 같았다.

그가 남기고 간 향수의 잔향이 미묘했다. 나는 팔을 들어 올려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았다. 분명 씻고 잤음에도, 식은땀을 잔뜩 흘려 왠지 쿰쿰한 향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또 냄새가 난다고 면전에서 구박을 받을까 봐 서랍을 열어 새 잠옷을 꺼내어 입었다. 힘이 없는 팔다리가 흐물대는 젤리같이 느껴졌다.

잠을 자는 사이에 해가 이미 졌는지 창문 사이로 새어 나오던 조금의 빛도 없이, 방 안은 어두컴컴한 상태였다. 최기원이 반쯤 열고 나가 버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따라 주춤대며 걸음을 옮겼다.

매끈한 계단 손잡이를 붙잡고 겨우 계단을 내려왔다. 다이닝룸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차고 손바닥과 등이 다시 축축해진 상태였다. 기껏 옷을 갈아입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등을 보인 채로 식탁에 앉아 있는 최기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셔츠를 벗은 그는 회색의 편한 니트를 입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자, 식탁 곁에 서 있던 남자가 가볍게 묵례하며 의자를 앉기 쉽게 빼 주었다. 두 번째에는 덜 허둥대며 빼 주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식탁 위에는 저번과 달리 나무로 된 수저와 식기 세트가 배열되어 있었다. 밝은 나무의 색상과 어울리는 테이블 매트도 내 것과 최기원 것이 세트로 놓여 있었다. 옛날에 지원이 형과 자주 갔던 고급 일식집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식탁 한가운데에 먹음직스러운 초밥이 일렬로 놓였다. 음식의 종류에 맞추어 식기를 바꾸는 듯했다.

어제저녁, 최기원이 던져서 깨 버린 티 포트 대신 다른 것이 최기원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그는 찻물로 입을 가볍게 적신 후 젓가락을 들어 샐러드를 집어 먹었다. 적당한 양을 떠서 씹고 부드럽게 넘기는 동안 소리 하나 크게 나지 않았다.

그가 한 입 먹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들었다. 손가락에도 힘이 없었으나 수저를 놓치지 않기 위해 꾹 쥐고 최기원이 먹었던 샐러드에 젓가락을 넣어 아무것이나 잡히는 대로 입에 넣었다.

입에 넣고 씹는 것까지는 했으나 목이 너무 부어 넘기는 것이 힘들었다. 목구멍으로 무언가가 넘어갈 때마다 고통이 이니, 자연스레 젓가락질이 느려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살점이 도톰한 생선 초밥 쪽으로는 젓가락이 가질 않았다. 작은 그릇에 담겨 있는 죽이나 계란찜 같은 것만 조금씩 떠서 먹었다. 최기원이 눈을 맞추지 않고 물었다.

“생선 못 먹어요?”

“아뇨. 머, 먹어요.”

“먹어 봐요. 맛있을 거예요.”

나는 대답 대신 미끄덩한 생선 초밥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도톰하고 윤기 있는 생선 살을 젓가락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앞접시를 들어 초밥 가까이에 놓고 젓가락을 이용해 옮겨 가는 동안 그는 정갈한 젓가락질로 초밥을 들어 입에 넣었다.

입을 크게 벌려 초밥을 한입에 욱여넣었다. 최대한 많이 씹어서 삼켰는데도 목구멍을 꾹 누르며 넘어가는 내용물 때문에 저절로 인상이 쓰였다. 문득 앞을 바라보니 최기원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서늘한 눈을 피하며 미지근한 온수로 입을 축였다.

“어때요?”

“맛있습니다.”

내가 맛있다고 하자마자 최기원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난 최기원의 표정을 살피며 물컵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최기원이 불시에 눈을 맞추며 물었다.

“맛있는 거 먹을 때 원래 표정이 그래요?”

“아….”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대자 최기원은 묘하게 생글대며 젓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내 것도 맛있었나 보네? 어제 인상 엄청 찌푸리고 빨았잖아요.”

순식간에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최기원의 저질스러운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최기원의 목소리가 들릴지, 안 들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최기원은 태연하게 초밥을 먹으며 말을 이어 갔다.

“어제는 기분 더러웠는데. 그게 맛있는 거 먹는 표정이라니까 기분이 풀렸어요.”

“…….”

속이 울렁거렸다. 급하게 남은 물을 들이켜 속에서 치받혀 오르는 토기를 겨우 눌렀다. 최기원이 맛있는 것 잔뜩 먹으라며 앞접시에 초밥을 놓아 주었으나 하나도 넘길 수 없었다. 무언가 입 안에 하나라도 더 들어왔다간 그대로 게워 낼 것만 같았다. 종류별로 쌓인 초밥이 다섯 개가 되자 최기원이 젓가락을 내려놓곤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젓가락을 놓고 먹는 것을 그만둔 최기원에게 묻자 최기원이 고개를 갸웃댔다.

“반찬 투정?”

“네…?”

이해되지 않는 질문에 내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되묻는 것을 싫어한다던 말이 정말인 듯, 최기원의 눈에 전과 달리 싸늘한 기운이 고여 갔다. 그는 장난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맛있는 게 먹고 싶어서 투정 부리는 거죠, 지금?”

“아, 아니요…. 사실 속이 별로 안 좋아서….”

“먹기 싫으면 식탁 밑으로 올래요? 뭐라도 배는 채워야지. 더 야위면 볼품없어요.”

변명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나는 아연실색해 얼른 초밥을 집었다. 이대로 그의 성기를 물었다간 조금 먹었던 음식마저 그의 앞섶에 죄다 토해 낼 것이다. 손이 떨려 와 젓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생선 살과 간이 된 밥이 분리되며 앞접시 위로 떨어졌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으로 초밥을 집어 입으로 밀어 넣었다.

눈을 피하며 초밥을 씹어 넘기는 나를, 최기원이 느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최기원이 보는 앞에서 앞접시 위의 초밥을 모두 삼키고 나서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헐떡이며 입 주변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고급 생선 요리에서 느껴질 리 없는 비릿한 향 때문에 욕지기가 일었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그날 밤 나는 거의 화장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변기에 먹은 것을 모조리 게워 내고 나서도 자꾸만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그날 차려진 음식이 고급 생선인 것을 알기에 소화되지 못하고 역류하는 음식물이 아까웠다.

변기 속을 더럽게 부유하는 음식을 보고 아깝다고 생각한 순간, 내가 게워 내는 것이 진정 억지로 먹은 음식 탓인지, 전날 그의 성기에서 배어 나온 비릿한 정액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헷갈렸다.

그날 꿈에 오랜만에 지원이 형이 나왔다. 형이랑 맛있는 초밥을 먹고 들어온 후, 체기 때문에 토한 꿈이었다. 현실과 비현실이 오묘하게 섞인 꿈속에서도 형은 여전히 다정했다. 부드럽게 어깨와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하염없이 따듯했다.

혀 위에 올려진 부드러운 크림처럼 형의 이름을 되뇌며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데, 문득 어깨가 욱신거렸다. 미간을 찌푸렸으나 형은 어깨를 그러쥔 손에 힘을 풀어 주지 않았다.

“형, 놔줘. 아파….”

지원이 형, 아프다고. 형은 가끔 짓궂은 장난을 치긴 하였으나 나를 아프게 한 적은 없었다. 짜증 어린 목소리로 형의 팔을 치워 내기 위해 팔을 세게 휘두른 순간 선연한 감각과 함께 눈이 뜨였다.

“……헉.”

내 어깨를 그러쥐고 있는 최기원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몸을 푸드덕대며 움직이자 그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는 제 손을 한 번 바라보곤 그길로 미련 없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삐딱한 자세로 선 최기원은 손에 나무 쟁반을 든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주변으로 음식 냄새가 풍겨 왔다.

속이 차게 식었다. 못 먹어 내는 걸 알면서도 계속 음식을 강요하는 식고문이었다.

순간 최기원에게 이상한 페티시가 있나 생각했다. 억지로 무언가를 먹이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보는 성적 취향 말이다. 그러고 보니 유독 구강성교가 지독했던 것 같기도 하고. 원래 입이 짧은 편인데 아직 몸 상태가 안 좋다 보니 무언가를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쟁반 위에는 스테이크나 파스타 같이 아침에 먹기 힘든 음식이 잔뜩 쌓여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 먹지 못하면 그걸 핑계 삼아 또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내 눈가가 일그러지는 것을 보자마자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사이드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치고 앉아요. 등 헤드에 기대고.”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가 침대 곁에 있던 버튼을 하나 누르자, 침대 헤드 뒤에서 위잉 하는 소리가 들리며 머리 위에서 가슴 앞으로 테이블이 내려왔다. 헤드에서 내려온 것은 주언이의 병실에서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침대용 간이 식탁이었다.

최기원이 리모컨을 누르자 식탁이 자동으로 내 가슴께의 높이에 맞게 조절되었다. 그는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쟁반을 식탁 위에 올렸다. 국그릇 정도 크기의 작은 사발에 든 것은 흰죽이었다. 물과 수저가 함께 놓여 있었고, 상아색의 작은 종지에는 간장과 동치미도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나는 곁에 서 있는 최기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최기원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다 먹고 한 시까지 1층으로 내려와요.”

“출근 안 하세요?”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와 말을 뱉고 나서도 내심 놀랐다. 그는 내 질문에 나를 빤히 바라보다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든 보내고 싶어서 안달이 났네.”

“그런 건 아니고….”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기에 눈을 피하며 작게 우물댔다. 문득 궁금증이 일었을 뿐이었다. 지원이 형이 죽은 뒤, 세원 그룹을 이끌어 갈 실질적인 경영자는 그의 하나뿐인 동생 최기원이라고 떠들어 대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할 그가 이 시간에 왜 여기에서 나에게 죽을 가져다주며 시간을 낭비하는지 의아했을 뿐이었다.

“오늘 토요일이에요. 게으르게 잠만 자니까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지.”

쌀쌀맞은 대꾸와 함께 그가 방을 나갔다. 나는 아직까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죽에 숟가락을 푹 파묻었다. 게으른 게 아니라 아파서 그런 건데…. 몸이 아프니 별스럽지 않은 말에도 상처를 쉽게 받았다.

눈 한가득 눈물을 매달고 잠자코 죽을 퍼먹었다. 쇠숟가락 위로 이가 지나가며 차락 소리가 났다. 그래도 먹기 좋을 정도로 쌀알이 갈려 있는 고소한 흰죽은 어제의 저녁보다 삼키기 쉬웠다.

샤워를 하면서도 현기증 때문에 계속 쉬어야 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있는 거울이 딸린 파우더룸 앞에 멈추어 섰다. 스킨, 에센스, 로션에 이어 보디로션과 코롱까지 모두 한 브랜드의 동일한 향이었다. 병들은 거울 앞에 일렬로 줄을 서 있었는데, 놓여 있는 순서대로 바르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느껴졌다. 겨우 씻은 것만으로도 벅찼던 난 하나하나 여닫기 귀찮아, 제일 끝에 놓인 로션과 코롱만 대충 얼굴에 문지르고 몸에 뿌렸다.

그러다 문득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며칠 사이에 얼굴 살이 많이 내렸다. 눈 밑은 시꺼멓게 죽어 있었고 표정은 떫은 감을 씹은 사람처럼 씁쓸했다. 손등에 동그랗게 남은 화상 자국은 물과 로션이 닿을 때마다 기분 나쁘게 쓰라렸다. 안락한 집에서 고급 음식을 먹으며 호강하는 것이 믿기지 않을 추레한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씻는 바람에 붉게 익어 버린 뺨을 문지르며, 덮고 나온 샤워 가운을 여몄다.

오전에 죽을 직접 가져다주었던 최기원의 호의를 떠올렸다. 내가 이틀 내내 아파서 고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였을까. 그런 것보단, 약국 약이나 독한 주사 한 방이면 지긋지긋한 몸살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어쩌면 오늘 외출은 병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옷장을 열어 아무 옷이나 골라 입곤 마지막으로 걸칠 패딩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다란 옷장을 아무리 뒤져도 지원이 형이 사 주었던 패딩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는 거야.’

그 옷 안에는 지원이 형과 내가 필담으로 말장난을 주고받았던 작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형이 부적처럼 지갑에 넣고 다니던 쪽지였고, 형이 나에게 남긴 유일한 유품이었다.

결국 한 시가 다 되어도 패딩을 찾지 못해, 나는 옷장에 걸려 있는 캐멀색 겨울 코트를 끄집어내어 팔뚝에 걸쳤다. 일 분이라도 늦을세라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가 1층에 도착하자 최기원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필 내가 고른 코트의 색과 그가 입고 있는 코트의 색이 같았다.

그가 말없이 앞장서고, 나는 그를 뒤따라 나갔다. 이 집에 들어오고 이틀 만의 외출이었다.

차고를 향한 최기원이 즐비하게 줄을 선 자동차 중에서 2인승 차를 골랐다. 문이 날개를 펴듯 위로 열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최기원이 운전석에 타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그대로 따라 조수석에 올랐다.

의자가 땅바닥에 닿을 듯이 낮았다. 차 문을 닫기 위해 엉덩이를 떼며 손을 들어 올렸으나, 문은 자동으로 닫혔다.

최기원은 히터를 제법 세게 틀었다. 그러잖아도 열 때문에 눈앞이 가물거렸는데 순식간에 몸이 노곤해지며 졸음이 쏟아졌다. 하지만 최대한 자지 않기 위해 버텼다. 조수석에서 잠에 빠져드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들은 적 있었다. 눈꺼풀에 힘을 주며 최대한 바깥의 풍경에 집중했다. 엔진 소리가 유달리 시끄러운 그의 차는 도로를 꽤 빠른 속도로 달렸다.

익숙한 서울의 풍경을 지난 차가 한적한 동네에 들어섰다. 주거용 단독 주택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카페나 개인 전시관이 들어서 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물들이 많았다. 골목을 능숙하게 가로지른 차가 커다란 창이 있는 하얀색 건물 앞에 다다랐다. 발레파킹을 해 주는 직원이 허리 숙여 인사하며 최기원이 건넨 키를 받아 들었다. 눈치를 살피던 나도 최기원을 따라 차에서 내려섰다.

“…….”

병원이 아닌 것을 확인한 내 표정이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최기원에게 기대를 한 것이 잘못이었다. 이곳은 마치 편집 숍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확히 무엇을 하는 곳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최기원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직원이 그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기다렸다는 듯한 인사를 보니 이미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직원은 나에게도 눈을 맞추며 인사했지만 밝게 웃는 직원의 미소를 정면으로 마주 보기가 괜히 힘들어 눈을 피하고 말았다.

1층은 미술 작품 몇 가지와 뜬금없는 마네킹, 옷 등이 드문드문 걸려 있었다. 은은한 선율의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어, 큰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최기원은 곧장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최기원의 구두 뒷굽을 바라보며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넓은 보폭으로 앞서 걸을 때마다 차갑고 달큼한 향수의 잔향이 코밑을 간지럽혔다.

최기원이 이미 이야기를 한 것인지, 한 여자가 나를 거울 앞의 의자에 앉도록 안내했다. 2층은 1층과 달리 연예인들이 이용하는 메이크업 숍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내가 의자에 앉자마자 여자는 의자의 높이를 조절하며 친절하게 인사했다.

여자는 남자 모델들의 얼굴 사진이 잔뜩 실려 있는 카탈로그를 나에게 보여 주며 전부 비슷해 보이는 헤어스타일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했다.

“피부 톤이 맑고 깨끗해서 이런 염색도 잘 어울릴-,”

“염색은 하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최기원은 이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등 뒤에서 들린 최기원의 차가운 목소리에도 여자는 개의치 않고 미소 띤 얼굴을 유지했다.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어색하게 앉아 있는 건 나 혼자였다.

“머리 색이 완전한 검은색이네요. 빛을 받아도 변하지 않을 정도로 짙은 검정 머리요.”

살면서 단 한 번도 빛을 받으면 머리 색이 어떻게 변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여자의 설명에 눈만 끔뻑였다. 머리 길이, 머릿결, 두피 상태 등등 여자가 빗과 가위를 들고 긴 분석을 이어 갔지만 귀담아듣지 않았다. 여자는 무뚝뚝한 내 반응에도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이 크고 피부가 깨끗해서 앞머리를 지금보다 짧게 하는 편이 얼굴을 돋보이게 할 거예요. 이렇게, 어머….”

이마 앞쪽으로 손을 넣어 앞머리를 올리던 여자가 당황해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손님, 열이 많이 나세요….”

최기원에게 아픈 사람이 온다는 전언을 들은 것은 아닌 듯했다. 나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 자르는 모습이 정면으로 보이는 소파에 앉아 있던 최기원은 보고 있던 카탈로그에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분명 그녀의 눈짓을 알아챘을 텐데도 그는 여유롭게 잡지를 넘기고, 커피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커트하겠습니다.”

결국 망설이던 여자는 몸을 돌려 내 머리를 살살 빗기 시작했다. 머리를 어떤 식으로 커트하겠다는 설명과 함께 가위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잘린 머리카락이 우수수 발밑으로 떨어지고, 나는 잘린 머리카락을 멍하게 내려다보다 눈을 감아 버렸다. 여자는 더는 귀찮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머리 하나 자르는 데 정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목 아래를 덮었던 가운을 풀어 내리는 느낌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머리가 짧아진 내 모습이 보였다. 형이 죽고 난 뒤로 지저분하게 길었던 머리가 산뜻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머리를 자르고 나자 이번엔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나를 다른 룸으로 안내했다. 앉아 있기도 힘든 나를 세워 두고 이번에는 옷에 대해 한참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남자의 설명을 흘려들었으나, 아까와 달리 최기원은 내 가까이로 걸어왔다. 남자의 설명을 듣더니 옷 몇 가지를 골라 옆에 딸린 행거 위에 차곡차곡 올렸다. 나를 세워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더니 남자가 옷을 선택해 나에게 안겨 주었다.

“탈의실은 저쪽입니다.”

정말 피곤했다. 옷을 받아 들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원룸보다 더 큰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고 나왔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최기원이 나를 아래에서 위로 훑었다. 턱 끝까지 올라오는 터틀넥 니트에, 허벅지에 적당한 여유가 있는 청바지였다.

군말 없이 옷을 갈아입은 나를 꼼꼼하게 살핀 남자는 특이한 색상의 코트와 무스탕을 내 어깨 위로 마구 걸쳐 댔는데 그때마다 옷 무게에 다리가 휘청였다. 최기원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무스탕은 다른 색도 있는지 물었다.

나는 멍하게 한곳에 시선을 두다가, 최기원이 마지막으로 고른 품이 크고 긴 회색 코트를 껴입었다. 신발도 다른 색의 운동화로 갈아 신으래서 잠자코 발을 끼웠다.

“저번에 제가 말한 것 꺼내요.”

“네.”

드디어 소파에 앉을 수 있게 된 난 거의 파묻히듯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최기원의 주문에 테이블 위로 시계 2개와 팔찌 하나가 놓였다. 최기원은 널브러져 있는 내 팔을 끌어당겼고, 나는 힘없이 끌려갔다.

왼쪽 손목에는 메탈 시계, 반대쪽 손목에는 은빛의 팔찌가 차례로 채워졌다. 팔찌의 버클을 채운 여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얀 피부에 제격이네요.”

여자의 말에 최기원이 언뜻 흠,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이 인형 놀이도 끝이 났는지 그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직원들이 건물 앞까지 나와 깍듯하게 인사했다. 드디어 차에 올라탔다. 너무나 노곤했던 난, 자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창에 이마를 기댄 채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눈에 담긴 것은 잘 꾸며진 마네킹이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던 1층의 전경이었다.

“일어나요.”

“으, 으응.”

“말을 까네.”

신랄한 어조에 잠이 달아났고, 아무 말 않은 척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나를 비스듬하게 내려다보고 있던 최기원이 보여, 죄송하다며 얼른 사과했다. 잠결에 말을 놓은 모양이었다. 말투와는 다르게 그의 입술 끝에는 미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차머리가 한 건물의 지하 주차장을 향했다. 하지만 차는 통상적인 입구로 진입하지 않고 최기원에게만 별도로 제공된 주차 공간으로 들어갔다. 최기원의 차가 들어서자 유니폼을 차려입은 직원이 다가왔고, 그는 직원에게 차 키를 넘겨주고 내렸다. 나도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차 문을 열어젖혔다. 자는 사이에 도착한 곳이라 주변을 두리번대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멍하니 숫자 판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최기원이 지갑에서 카드를 한 장 꺼냈다. 그 카드가 없는 사람은 이용하지 못하는 엘리베이터인 듯했다.

누를 수 있는 버튼은 단 세 개뿐이었는데, 이렇게 버튼 부분이 휑한 엘리베이터는 처음 보았다. 지하 주차장과 연결된 B2 버튼, L 버튼,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기원이 누른 S 버튼에 은은한 불빛이 반짝였다. 나는 L 버튼 옆에 흰색으로 음각 처리된 글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로비…?’

당황을 집어먹은 내가 등 뒤에 서 있는 최기원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뭐 하고 서 있어요.”

깊게 스며드는 낮은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문이 열리자마자 호텔 룸의 내부가 펼쳐졌다. 눈앞은 호텔 룸, 등 뒤는 최기원이 서 있어 도망칠 틈이 없었다. 터질 듯한 압박감에 숨통이 조여들었다.

최기원이 뒤에서 바짝 붙어 와 주춤대며 앞으로 걸어갔다. 나의 느린 걸음이 답답했는지, 그가 나를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커트 이후 말끔하게 드러난 목뒤를 주물대며 그를 따라 걸었다. 차라리 그의 등을 보고 걷는 편이 마음 편했다.

최기원은 이 룸이 익숙한 듯 행동했다. 넓은 보폭으로 소파와 테이블 사이를 가로지른 그는 어두운 나무 색의 문을 열었고, 그러자 그 너머로 커다란 방이 드러났다. 그리고 방 안에서 새하얀 시트가 깔린 커다란 침대를 발견한 순간, 긴장이 몰려오며 호흡이 꼬였다.

다행히도 최기원은 침대 쪽으로는 시선을 던지지 않고 코트와 재킷을 벗어 걸었다. 그가 벗는 것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던 나도 조심스럽게 코트를 벗었다. 원래 같으면 되는대로 벗어 의자에 걸쳐 둘 성격이었으나, 오늘 그가 새로 사 준 옷이기에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최기원이 코트를 걸어 두었던 자리 옆에 내 코트도 가지런하게 걸었다.

문득 옆에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최기원이 나를 내려다보며 미미하게 웃고 있었다. 오전보다 그의 기분이 누그러져 보였다. 내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서 그런 것 같았다.

“속은 어때요?”

“…안 좋습니다.”

괜찮은 척을 하려다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어차피 저녁을 잔뜩 먹이면 그의 앞에서 모두 게워 낼 것이 뻔했다. 그가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테이블 위의 전화를 들어 무언가를 말했다. 음식에 관한 내용인 것 같았는데, 긴장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멍한 시선 끝에 서울의 전경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창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어느새 해가 지고, 고층 빌딩에는 노란 불이 들어왔다. 도로 위를 점점이 수놓고 있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도 멀리서 보니 길게 연결된 알전구같이 귀엽고 예뻤다.

주말 저녁을 즐기러 떠나는 차들이 자유로운 새처럼 보여 부러웠다. 하지만 교통 체증의 한가운데에서 고층 호텔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중 하나는, 내가 있는 이 호텔의 꼭대기 층을 보며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를 꺼내 문 최기원이 테이블 위로 담뱃갑을 가볍게 던지며 물었다.

“나가고 싶어요?”

그의 물음에 창가에 머물렀던 시선을 거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머뭇대다, 그가 되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기억하고 고개를 저었다. 최기원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뿌연 연기를 뱉어 내며 나른하게 웃었다.

“거짓말을 못 하네. 그래도 대답은 마음에 듭니다.”

그가 두 번이나 웃었다. 어쩐지 그의 기분이 오늘따라 말랑해 보여 섣부른 부탁이 튀어나왔다.

“저…. 주언이한테 전화 한 번만 하면 안 될까요.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오래 병원에 안 간 건 처음이라…. 아마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그의 회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 은근슬쩍 고개를 내렸다. 최기원은 입꼬리에 웃음기를 매단 채로 말없이 담배를 몇 모금 더 빨았다. 그의 침묵이 견디기 힘겨워 손톱 옆을 꾸욱 꾹 눌렀다.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끈 최기원이 자리에서 일어서 다가왔다. 키가 큰 그를 자연스레 올려다보게 되었다. 최기원은 내 뺨을 툭 두드렸다. 아프게 친 것은 아니었으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갈 정도의 힘이었다.

“여우 짓을 다 하네.”

“예…?”

“예쁘게 가꿔 주고 호텔에 데려오자마자 애교 떠는 거. 어디서 배웠어요?”

의도하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물론 최기원의 기분을 살핀 것은 맞으나, 절대 그런 뜻은 아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작게 도리질했다.

“그래요. 계속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굴면.”

들이대듯 부탁했는데 최기원이 들어줄 줄 몰랐다. 깜짝 놀라 어깨가 솟고 눈이 크게 떠졌다. 나는 고개를 푹 숙여 감사의 뜻을 비쳤다. 얼마 지나, 벨 소리가 들렸다. 그가 전화로 말한 음식이 룸서비스로 제공되었다.

식사를 하는 공간은 또 따로 있었다. 호텔에 부엌까지 있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깔끔한 옷을 차려입은 버틀러가 음식을 놓아 주었다. 설명을 시작하려고 하자 최기원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는 금세 뜻을 이해하고 짧은 묵례와 함께 방을 떠났다. 두툼한 스테이크가 놓인 최기원의 접시와 달리 내 앞에는 고소한 향을 풍기는 수프와 묽은 리소토가 놓였다. 최기원이 능숙하게 고기를 썰어 먹고 나는 수프를 조금씩 떠서 머금었다.

식사는 주고받는 말 없이 침묵 속에서 이어졌다. 이제 그와 함께하는 침묵뿐인 식사에 조금씩 적응을 해 갔다. 나는 그의 식사 속도에 맞춰 느리고 천천히 수프와 리소토를 번갈아 가며 먹었다. 다행히 모두 자극적이지 않고 넘기기 부드러워 먹기에 편했다. 스테이크 한 접시를 비운 최기원이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으며 말했다.

“다 먹으면 씻어요. 수납장 열면 약 있으니까 그거 쓰고.”

고개를 처박고 수프를 먹던 내가 고개를 들었다. 약을 사다 준 건 고맙지만 굳이 화장실에 둘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아픈 사람을 위한 독특한 배려에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헉….’

화장실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민트 맛의 치약을 묻힌 난 칫솔질을 하며 내 원룸보다 큰 화장실을 구경했다. 바닥과 벽의 타일이 모두 반짝이는 화이트 톤이었고 커다란 창문 바로 앞에는 야경을 보며 거품 목욕을 즐길 수 있는 큼직한 욕조가 있었다. 새것 같은 세면대에 흠집이라도 날까 봐 조심스럽게 물을 흘려 보내 입 안의 거품을 씻어 냈다.

약을 먹기 위해 수납장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먹을 만한 약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의 수납장 안에서 출처가 약국임이 분명한 작은 약상자를 찾았다.

“…….”

상자에 적힌 글자를 본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애널 섹스를 하기 전 뒤를 준비할 때 쓰는 약이었다. 작게 헛숨을 들이켠 나는 눈을 깜빡이며 세면대를 짚고 섰다. 고분고분하게 굴라는 그의 말을 이제야 온전히 이해한 나는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겨우 참았다.

“하아….”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주언이를 위해서도 아니고 누가 등 떠밀어 강제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최기원과 만나기로 한 건 내가 선택한 일이었고, 그가 아버지의 빚을 해결해 준 건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내 능력으론 갚을 수도 없는 돈이기에, 변제할 방도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 책임을 져야 했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세면대를 붙잡은 손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고개를 들어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다.

사색이 된 남자가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런 표정이면 맞을 거야.’

벌써 젖어 버린 눈을 꾹 감고 최대한 마음을 비워 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의미 부여 하지 않기로. 무거운 눈꺼풀을 힘껏 치켜뜨고 볼 위를 적신 눈물을 손등으로 벅벅 문질렀다. 수납장에 고이 꽂혀 있는 약상자를 낚아챈 나는 화장실 안쪽의 샤워 부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최기원은 창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태블릿 PC를 보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은 것이 무색하게도, 가운만 입고 있는 최기원을 보자마자 작은 기침을 터뜨리며 눈을 피하고 말았다. 앞을 여미지도 않아 비스듬한 틈으로 가슴과 배가 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쿨럭대는 소리에 최기원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이쪽을 바라보았다.

“왔어요?”

심장이 버겁게 뛰는 나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느른하고 건조하기만 했다. 그가 유일하게 켜 둔 천장의 조명이 테이블과 가까웠던 탓에 어둠 속에서 유독 최기원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도 씻은 것으로 보였다. 물을 먹은 머리의 색은 더욱 짙은 검정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원래부터 좋았던 피부는 온천이라도 하고 나온 사람처럼 반질거렸다. 사선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콧날이 높아 조명의 반대편에는 길고 곧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내 시선이 복잡한 업무 자료를 띄운 태블릿 화면으로 향할 무렵, 최기원이 태블릿을 조용하게 덮었다. 그는 가까이에 올려 둔 양주잔을 들어 올렸다.

“술 한잔할래요?”

그의 손에 들어선 병에는 지난번과 같은 색의 술이 담겨 있었다. 양주 혹은 와인 중 어느 쪽이냐고 묻던 그의 질문이 희미하게 떠올랐는데, 그 질문에 대한 최기원의 대답은 양주 쪽인 듯했다. 아무튼, 최근 그가 나에게 던진 질문 중 제일 대답하기 좋은 질문이었다. 지금은 제정신으로 깨어 있고 싶지 않았다. 대답 없이 그가 들고 있는 술을 향해 돌진하자 그가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어떡하지, 잔이 하난데.”

“아….”

“내 잔 쓸래요?”

“괜찮습니다.”

아쉽지만 그와 잔을 나누어 쓰기엔 불편해 거절했다. 그는 눈썹을 한 번 끌어 올리고 말았다. 반쯤 담긴 술을 입에 한 번에 털어 넣은 그가 얼음만 들어 있는 잔을 빙글 돌리며 나를 빤히 응시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그의 표정이 생글대던 아까와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왜인진 모르겠으나 그의 심기가 꽤 불편해 보였다.

“백나언 씨. 지금 나랑 이러는 거, 없던 일로 하고 싶어요?”

“예? 아, 아뇨.”

“표정이 씹창이 났길래.”

탁, 소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은 그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매번 반듯하게 올려져 있던 앞머리가 젖어 눈썹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미지가 부드러워진 것이 아닌, 목줄이 풀려 버린 짐승같이 더욱 음험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얼른 표정을 정돈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표정이 어떤지 나도 알 수가 없어 무조건 입술을 다부지게 닫고 눈을 크게 뜨려 노력했다. 간간이 고개도 저으며 의지를 표했다. 오늘 말을 잘 들어야 주언이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제발 더 이상 그가 화가 나지 않길 바랐다.

“아니에요, 정말로….”

“그치? 싫으면 관두라고 난 말했어요.”

“…네.”

“앞으로는 쭈뼛대지 말고 벗으라고 하기 전에 다 벗고 침대로 가요.”

씻고 나서 다시 그대로 챙겨 입은 니트와 청바지를 벗었다. 군대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처럼 빠르고 신속하게 벗으려 애썼으나, 긴장 때문에 자꾸만 손이 툭툭 미끄러졌다. 버클이 다닥 대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유독 크게 들렸다. 열이 오른 얼굴이 터져 버릴 것처럼 붉어졌다.

속옷까지 모두 벗은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올라갔다. 어떻게 앉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지난번 식탁 아래에서처럼 무릎을 꿇고 최기원의 쪽을 바라보고 앉았다. 최기원은 옳다 그르다는 말도 없이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내 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휑한 느낌에 이불이라도 그러쥐려는 손이 자꾸만 주위를 더듬거렸다. 최기원이 심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관장은 깨끗하게 했어요?”

“네? 아, …네.”

“진짜? 한번 넣어 봐요, 손가락.”

아찔한 요구에 입이 툭 벌어졌으나, 얼른 다물었다. 빨리 끝내려면 그의 요구에 토 달지 않고 얼른 처리해 버려야 했다. 난 무릎을 꿇은 채로 엉성하게 엉덩이만 들고, 손을 회음 쪽으로 가져갔다. 차가운 손끝에 엉덩이 살이 스쳤다. 내가 내 살을 만지는 것인데도 시체를 만지는 것처럼 소름이 돋고 토할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다물린 살 사이로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안 보이잖아. 이쪽으로 다리 벌려요.”

“…네.”

야멸찬 지적에 꾸물대며 엉덩이를 시트에 붙이고 앉아 다리를 벌렸다. 손을 사타구니 앞으로 끌어 내리고 검지를 구멍 주변에 가져갔다.

“더 벌려요.”

“흐, 네.”

“한 번만 더 지적하게 하면 동생이랑 전화 못 해.”

고개를 끄덕이고 다리를 더욱 활짝 벌렸다. 허벅지와 늘어진 성기, 엉덩이 아랫부분까지 그에게 훤히 보이도록 눕듯이 앉았다. 마음을 다잡고 재차 구멍을 더듬었다. 하지만 싸늘하고 건조하게 식은 구멍은 긴장 때문에 더욱 꾹 다물려 있었다. 손가락을 집어넣으려고 애를 썼으나 쓰라리기만 할 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오른손에 채워진 은색의 팔찌가 허벅지와 사타구니에 닿을 때마다 차가운 기운에 소름이 돋았다. 끙끙대며 겨우 한 마디를 집어넣고는 식은땀이 왕창 났다.

“참나.”

낮게 혀를 찬 최기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가락 밀어 넣기에 집중하고 있던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나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중이었다.

“너 아다야?”

“으, 예?”

“뒤 한 번도 안 써 봤냐고.”

“아. 아니요.”

갑작스러운 반말이었다. 최기원의 큰 손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내 앞에 서서 뒷덜미를 붙잡아 뒤로 잡아당겼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짧은 신음과 함께 입이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최기원의 손가락 두 개가 예고 없이 비집고 들어왔다. 크고 긴 손가락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앞니를 지나 천장, 혀뿌리와 목구멍까지 손가락이 들쑤시고 들어왔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구역질이 올랐다. 그의 손목을 두 손으로 붙들고 다리를 버둥댔으나, 그는 손가락을 입 안에서 흉포하게 휘저어 댔다. 울지 않으려 몇 번이고 다짐했으나 눈물이 볼을 따라 주룩주룩 흘렀다.

“아다 새끼는 서툰 맛에, 걸레 새끼는 능숙한 맛에 좋은데. 존나 가증스러운 새끼가 뭔지 알아?”

“으, 으욱. 쿨럭, 흐, 으… 우욱…!”

“씨발, 닳아빠진 걸레 새끼가 서툰 척 구는 거야.”

“푸하!”

입에서 두 손가락이 빠져나가며 길고 가는 침 줄이 이어졌다.

“으흑!”

그대로 내 가슴팍을 눌러 침대로 쓰러뜨린 최기원이 힘없이 벌어진 다리 사이로 드러난 구멍을 향해 침에 젖은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생살이 빠듯하게 벌어지며 굵고 긴 손가락을 조금씩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멍이 바싹 마른 탓에 손가락이 쉽게 들어가지 않자, 최기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힘 빼.”

짝, 소리와 함께 허벅지 안쪽에 발간 손바닥 자국이 남았다.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리자 최기원은 낮은 목소리로 벌리라 으르렁댔다.

“흐, 으윽….”

결국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 우는 것이 절대 이 상황에 긍정적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음을 쉬이 참을 수가 없었다. 겨우 했던 다짐과 결심이 허투루 무너지지 않게 하도록, 난 이 모든 일을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며 강한 척했다. 하지만 생각과 현실은 달랐다. 눈앞에서 쏟아지는 그의 고압적인 눈빛과 사람을 얼릴 것 같은 신랄한 목소리에 가슴 속 깊이 숨겨 두었던 두려움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손가락의 마디가 구멍에 걸릴 때마다 몸에 바짝 힘을 주며 울음을 터뜨렸다. 꽉 붙어 버린 구멍을 강제로 벌리고 내벽을 짓누르며 진입하는 손가락의 이물감은 고통이며 혐오였다. 달아오른 분위기에 취해 사랑을 속삭이며 하는 섹스가 내 경험의 전부였다. 팔다리를 옴짝달싹하지 못 하게 짓누르고 욕을 뇌까리는 것은 관계가 아니라 강간이었다.

최기원이 낮게 지껄이는 욕설과 나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악력이 자꾸만 판단력을 흐려지게 만들었다. 최기원이 거칠게 굴수록 지원이 형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몸을 섞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와닿았고, 역설적이게도 그의 얼굴에서 언뜻언뜻 지원이 형과 닮은 구석이 보일 때마다 죽은 연인의 동생에게 알몸으로 범해지고 있다는 처지가 살갗으로 느껴졌다.

손가락이 결국 끝까지 들어섰다. 최기원의 손과 내가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울음 섞인 숨을 시근덕댔고 최기원은 누워서 바들대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나는 아프다는 말만 정신없이 내뱉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아, 아윽…, 아, 파요….”

“손가락 가지고 엄살은.”

“흐, 윽.”

최기원은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을 앞뒤로 움직였다. 터덕, 터덕 구멍을 지나가는 손의 굴곡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강제로 손가락을 집어넣은 것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대신 배 안쪽까지 깊숙하게 들어오는 손가락은 안쪽을 꼼꼼하게 만지고 나갔다. 숨을 헐떡이며 자꾸만 허리를 이리저리 뒤틀자 최기원이 남은 손을 뻗어 내 볼 양쪽을 아프게 붙잡았다. 그의 손가락에 볼살이 눌려 입술이 새 부리처럼 구겨졌다.

“눈 뜨고 나 봐요.”

“흐, 으, 네….”

“지금 내가 백나언 씨를 강간하는 거예요?”

“아, 아니요…. 아닌데…,”

“그런데 왜 이래. 제 발로 내 집에 걸어온 게 누군데.”

그가 턱을 쥔 손을 세게 흔들었다. 나는 다시 눈가를 찌푸렸고 맺혀 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향해 주룩 흘러내렸다. 최기원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하지만 겁을 먹은 나에겐 그의 말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흐 윽, 그쪽이 아버지 일에 저를 엮이게 만들, 었잖아요….”

“그래서? 갚아 줬잖아.”

그게 아니었으면 절대로 당신 같은 인간 만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말없이 눈을 감고 몸에서 힘을 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주언이와 통화를 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선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아야 했고.

“흐, 윽, 네…. 죄송, 해요.”

얼굴에서 최기원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가 낮게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하면 좆이나 좀 세워 봐요.”

나는 코를 먹으며 손을 뻗었다. 그의 중심을 향해 손을 뻗는데 그가 내 손목을 잡아채곤 내 성기 위로 가져갔다. 자연스레 시선이 닿는 곳에는 힘 하나 들어가지 않고 축 처져 있는 내 것이 보였다.

“나 혼자 발정 나서 덤비는 기분이라.”

“……싫,”

싫었다. 그의 앞에서 자위를 하다니. 거부감에 고개를 젓는 순간, 최기원이 삐뚤게 웃으며 손목을 세게 흔들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 끝이 배 안쪽을 깊게 찌르는 순간 나는 발가락을 오므리며 몸을 잘게 퍼득였다.

“도와줄 테니까 한 발 빼요.”

“…….”

“빨리.”

잠시 허억대며 밭은 숨을 고른 난, 입술을 깨물며 죽어 있는 성기를 약하게 붙잡았다. 무작정 주무르고 비벼 댔으나 성기는 쉽게 발기하지 않았다. 그때 최기원이 손목을 아래위로 느리게 흔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고 아프기만 했는데, 자꾸만 그의 손가락 끝이 한 지점을 스쳤다. 배 안쪽의 성감이 예민한 부분이 짓이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허리를 자꾸만 틀었다.

짝.

고개가 시트에 처박히듯 돌아갔다. 그동안 장난으로 뺨을 툭툭 건드리던 손길과는 차원이 다른 세기였다. 짜랑짜랑한 소리가 넓은 방을 공허하게 울렸다. 열이 올라 핑핑 도는 머리가 순간 징- 하고 울릴 만큼 강한 타격이었다. 얻어맞은 곳이 얼얼해 손등으로 뺨을 눌렀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볼이 끓는 듯 뜨거워져 있었다. 최기원이 나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맞아야 말 들어?”

“아, 아니요….”

정신을 붙잡으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얼굴 주변에서 흩어지는 최기원의 숨결과 구멍을 드나드는 손길을 느끼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꾹 감은 나는, 얼른 아래를 세워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귀두 인근을 붙잡고 빠르게 흔들었다.

살끼리 마찰하는 소리와, 구멍을 찔걱이며 들쑤시는 소리, 그리고 팔찌에서 나는 소음만이 적막한 방을 채웠다. 나는 신음을 최대한 꾹 참기 위해 입술을 짓씹고 애를 썼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성기가 잘 서지 않아 자꾸만 조바심이 났고, 그가 다시 손찌검을 할까 봐 겁이 나서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성기가 반쯤 딱딱해졌다고 생각한 순간, 구멍을 느릿하게 돌아다니던 중지와 약지가 조금 부풀어 오른 지점을 제대로 누르며 지나갔다. 나는 짧게 경련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 흣!”

나도 모르게 성마른 신음이 터져 버렸다. 허벅지와 배가 떨리며 순식간에 성기에 피가 몰렸다. 최기원의 남은 손이 움찔거리는 허벅지 주변을 느릿하게 쓸고 지나갔다. 한번 성감을 느끼기 시작한 성기는 쉽게 수그러지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내벽을 우악스럽게 짓누르는 손가락 끝에, 나는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으, 읏….”

“요령 피우지 말고 똑바로 해요.”

“흐, 윽. 네….”

더는 자비가 없었다. 도와주겠다던 최기원의 말이 헛된 것이 아니었는지, 그는 나의 배 안쪽까지 꿰뚫어 보는 듯이 느끼는 부위를 정확하게 눌러 댔다.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지는 이물감과 장벽을 지나치는 손길에는 전신에 힘이 빠졌고, 이후에 찌르르 울리는 극점을 누를 때에는 소름이 끼치며 몸이 바짝 굳었다. 근육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정신이 더 없어졌다. 가뜩이나 열이 올라 노곤했던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하, 으읏!”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정이 이르게 찾아왔다. 배뇨감에 전신에 힘이 바짝 들어간 순간, 성기 끝에서 액이 터져 나왔다. 오랜 기간 배출해 내지 못한 정액은 여러 번에 걸쳐 쏘아 올라졌다.

“으, 으읏.”

성기가 줄곧 죽어 있던 것이 무색하게도 손은 물론 허벅지, 배, 가슴까지 정액이 흥건하게 묻었다. 순식간에 몸에 힘이 빠져 헐떡이며 시트 위에 널브러졌다. 결국 그의 아래에서 성기를 세웠고 절정에 달해 사정했다. 그의 요구에 따라 준 것이었으나 자괴감이 치미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금 속에서 올라오는 서러움을 억지로 삼켜 내며 게슴츠레 눈을 떴다.

“…….”

그 순간, 최기원의 표정을 보자마자 당황하고 말았다. 최기원은 간헐적으로 헐떡이는 나를 삐딱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그의 직선적인 시선이 그대로 꽂혀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어이없게도 지금 최기원은 화가 난 듯 보였다. 냉기가 흐르는 차가운 표정 속에서 눈만 분노에 절절 끓고 있었다.

저 얼굴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마치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혐오감이 언뜻 비치기까지 했다. 나는 눈썹을 끌어 내리며 분노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 흑!”

구멍에서 손가락이 거칠게 빠져나왔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나는 고개를 젖히며 신음했다. 돌연 최기원이 내 상체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는 생선 가게의 죽은 고기를 뒤집듯이 내 몸을 우악스럽게 뒤집었다.

“좆같네, 진짜.”

“으, 왜, 왜요… 시키는 대로, 했는…,”

말이 채 이어지지 못했다. 최기원은 내 팔을 뒤로 잡아당겨 등허리에서 교차시킨 후 팔목을 한 손으로 잡아 눌렀다. 손 하나로 누르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센 악력에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마구 흔들었다. 배와 가슴팍이 시트에 처박히며 정액이 지저분하게 옮겨 묻었다. 동시에 최기원이 나의 엉덩이에 하체를 붙여 왔다. 묵직하고 뜨끈한 무언가가 둔부에 닿는 순간 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를 돌아보기 위해 애썼다.

“자, 잠시만…, 너무 갑자, 으, 윽!”

최기원이 아무 말 하지 않고 성기의 끝을 구멍에 맞추었다. 귀두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뭉툭하고 두꺼운 것이 엉덩이 살을 가르고 구멍을 밀었다. 손가락도 버겁다고 느꼈는데, 이걸 아무런 각오 없이 그대로 받아 냈다간 밑이 다 찢어져 버릴 것 같았다.

“아, 안 돼. 안 돼요. 아, 안 들어가.”

발작적으로 몸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최기원은 무게를 실어 나를 더욱 세게 짓누르기만 했다. 나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그에게 애원했다.

“자,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제발.”

“…….”

“왜 이렇게 아프게, 아, 으윽. 하지 마, 잠깐만요! 흐, 으윽!”

소리치고 빌었지만 결국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그의 것이 구멍을 꿰뚫었다. 아팠다, 너무나 끔찍한 고통이었다.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허억, 허억 하고 끊어지는 숨만 겨우 뱉어 냈다. 아래는 끓는 물을 부은 것같이 뜨거워졌다. 최기원이 허리를 더욱 붙여 왔으나 살끼리 뻑뻑하게 마찰한 탓에 귀두 언저리가 들어서고 나선 더는 진입하지 못했다.

“씨발, 진짜 장난 아니네.”

“아, 아파요… 잠시만, 흑.”

“힘 빼라고 했어요.”

지금 힘을 주는 건,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의 손아귀 아래 고정된 두 손으로 열심히 그를 밀어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힘으로 그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할 것을 알기에 나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울면서 소리쳤다. 안압이 몰린 눈은 속눈썹까지 몽땅 젖었고, 목에는 핏대가 섰다. 현기증이 나 쓰러질 것만 같았다.

“최기원 씨, 제발! 왜 이래요…!”

관계 중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떻게든 외면하고 싶은 이름, 형과 너무나 비슷한 이름을 결국 혀끝에 올리고 말았다. 나의 부름에 드디어 최기원의 허릿짓이 멈추었다. 나는 겨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제발, 밑에 조금만 준비할 시간을 주세요…. 찢어질 것 같, 흑, 아서….”

자칫하면 부러질 것같이 아프게 짓누르던 손목의 무게가 조금 느슨해졌다. 겨우 바라본 그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을 어둡게 채우고 있던 싸늘한 광기나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 그의 이성이 겨우 돌아온 것 같았다. 결국 스며든 안도에 서러움과 원망이 성마르게 터져 나왔다.

“누가 안 한다고 그랬어요? 왜, 이렇게 아프게…, 하는 거예요…. 흐윽.”

난 풀어진 양팔을 앞으로 당겨 와 엎드린 채 고개를 파묻고 울었다. 방금 느꼈던 강간의 공포와 두려움이 서러운 울음 사이로 흩어졌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죽이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으나 터져 나오는 것을 막기엔 부족했다. 그때 등 뒤로 손가락 끝이 닿았다. 서늘하고 낯선 감촉이 등허리의 옴폭한 뼈를 매만졌다. 언뜻 느끼기에 부드럽고, 다정하기까지 한 손길이 진득하게 척추를 따라 올라갔다.

“나도 모르겠어. 왜 이렇게 기분이 좆같은지.”

짓씹는 목소리가 낮게 퍼졌다. 그의 느린 손길이 목덜미에 닿았다. 우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목 주변을 차가운 손가락이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그리고 내 귓가에 갑작스럽게 말캉하고 따듯한 것이 닿아 왔다.

허리를 굽힌 최기원이 귓바퀴를 입술로 물었다. 도톰한 아랫입술이 귓바퀴 뒤쪽을 물고, 혀가 예민한 귀를 느리게 핥아 올렸다. 입술과 혀가 움직일 때마다 타액이 내는 축축한 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온도가 높은 숨이 귓가로 흩어질 때마다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울음이 가시지 않아 헐떡이는 숨 사이로 수치스러운 신음이 제멋대로 흘렀다.

“드디어 너를 안게 됐는데.”

“으, 읏….”

“최지원 밑에서 이런 얼굴로 울어 댔다고 생각하면. 당장이고 죽여 버리고 싶다고.”

치욕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원한 것이면서, 다 알고 그런 끔찍한 제안을 건넨 거면서. 나에게 그를 선택하는 것이, 굴복이나 다름없는 외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 거면서 왜 이토록 화를 내는 것인지 모르겠다.

돌연 위에서 짓누르던 무게가 떨어져 나갔다. 고개를 돌리니 침대에서 내려서 가운의 허리끈을 다시 묶는 최기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테이블 위의 휴대 전화를 들더니 나에게 건넸다.

“…….”

[여보세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썹을 끌어 올리며 그를 올려다본 순간, 전화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손을 뻗었다. 그는 뒤돌아 앉아 있던 의자에 다시 몸을 붙이고 앉았다. 차갑고 예민한 옆모습에선, 방금까지 성기를 단단하게 발기시켰던 남성의 흥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에 휴대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어, …주언아. 형이야.”

[형!]

아이의 목소리에 나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겨우 일으켰다. 움직임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걷어 내고, 최대한 평소 같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썼다.

[형, 왜 이렇게 안 와….]

“미안해. 형이 …일을 시작해서.”

[전화는 왜 안 받았어?]

“그것도 미안…. 고장 났어, 전화기.”

[그래?]

“응. 새로 시작한 일이 엄청 바빠. 주언이 어디 아픈 데는 없었어?”

상태가 괜찮아졌는지 재잘대는 아이의 목소리가 밝았다. 알몸으로 커다란 호텔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나는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비릿한 정액의 냄새와 뻐근한 아래가 자꾸만 목소리를 떨리게 만들었다. 주언이가 모를 걸 알지만,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하니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든다.

“그래. 형이 예전만큼 자주 못 가도 주언이 건강하게 있어. 알겠지?”

[응….]

풀 죽을 얼굴이 짠했으나 쫓기는 사람처럼 전화를 끊어야 했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그의 휴대 전화를 콘솔 위에 올려 두었다. 몸을 조금 씻고 싶었으나 갑자기 전신에 지독한 탈력감이 일었다. 결국 그대로 침대 위로 웅크리고 누웠다. 구겨진 이불을 끌어 올려 머리끝까지 덮고 나자 졸음인지 현기증인지 구분 가지 않을 까마득한 어둠이 몰려왔다.

설핏 잠을 깨기 시작한 나는 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시트에 뺨을 비비적댔다.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린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

‘호텔에 왔었지….’

아침에 본 뷰는 색달랐다. 트리의 꼬마전구를 산발적으로 흩어 놓은 것 같던 어제의 야경과 달리, 활기차고 밝은 서울의 오전이 네모난 창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멍하게 건물과 도로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그날 밤 최기원은 이 침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눈물 콧물을 쏟은 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에 빠져든 나에게 흥미가 떨어졌던 것인지 모르나, 어찌 되었든 최기원은 약속을 지켰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어이가 없어 작은 실소가 터졌다. 문득 고개를 떨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배와 가슴 위로 하얗게 말라붙은 사출의 흔적이 보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

어제 그를 밀어내기 위해 애먹은 허리와 다리 근육 곳곳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어떻게든 기억을 상기시키고야 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침실과 바로 연결된 화장실로 가 곧장 뜨거운 물로 전신을 씻어 냈다.

어제 잠이 들기 직전에는 다시 눈을 뜰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실없는 고민이 들었었다. 차라리 왕창 아파 그가 나에게 손대지 못했으면 좋겠단 생각까지 했으나 막상 그 정도로 몸이 망가지진 않았다. 아마 좋은 침구가 깔린 따뜻한 방에서 자고 일어난 덕분일 것이다.

다 씻고 나와 보송한 배스 타월로 몸을 닦았다. 최기원이 어제 했던 것처럼, 나도 가운을 꺼내 입고 나왔다. 보는 이도 없어 허리끈을 묶지 않았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온 순간, 룸으로 들어오는 최기원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는 씻고 나와 가운까지 챙겨 입은 나를 흘긋 쳐다보고 삐딱하게 섰다.

“적응 다 했네.”

“…….”

얼른 벌어진 가운을 여미고 허리끈을 꽉 묶었다. 꼭 씻어야 해서 씻은 건데도 비아냥대는 말을 보태고야 마는 그가 얄미웠다. 나는 아무 대답 없이 어제 내가 허물처럼 벗어 놓은 옷가지를 들었다. 최기원은 이미 아래위로 멀끔한 옷을 차려입은 채였기에 혼자 헐벗고 있기 민망했다.

“몸은 어때요?”

“…괜찮습니다.”

“입고 나와요. 아침 먹게.”

작은 대답과 함께 가운 끈에 손을 올렸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를 살피니 그는 나가지 않고 서 있었다.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 조심스레 말했다.

“저 옷 갈아입을 건데요….”

“내외는.”

최기원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젯밤 그의 기분대로라면 한 대 얻어맞았을 수도 있었는데,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나는 그가 걸어 나간 쪽을 한 번 더 살핀 후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방에서 걸어 나오자 거실에는 햇살이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호텔 룸이기에 거실이라고 표현하기도 민망했지만, 적어도 내 눈에 이곳은 하나의 고급 오피스텔처럼 보였다. 부엌으로 보이는 식사를 하는 공간 –홈 바에 와인 저장고까지 있어 작은 레스토랑 같았다–은 물론, 거실 너머로는 문이 닫혀 있어 용도를 알 수 없는 방들이 더 있었다.

특히 어젯밤에는 호텔로 나를 데려간다는 충격에 정신이 없어 이곳을 샅샅이 살피지 못했는데, 지금 눈에 닿는 모든 곳이 경악스러울 만큼 고급스러웠다.

다른 무엇보다도 호텔 빌딩의 최고층으로 보이는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바로 거실의 통유리였다. 너무나 넓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유리 아래로 펼쳐진 도심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마치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넋이 나간 나를 깨운 건 차가운 최기원의 목소리였다.

“집들이 왔어요? 더 기다리게 하지 말고 앉지.”

“죄송합니다.”

나는 수저와 테이블보가 놓인 위치를 보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식탁 위는 이미 갖가지 음식이 세팅되어 있었다. 종류가 다양해 호텔의 조식 뷔페 같았다. 최기원이 먼저 수저를 들고 나서 나도 생수를 따라 마셨다. 갈증이 가시자 미세한 허기가 졌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빵을 집어 베어 물었다.

“…….”

“…….”

어제 침대 위에서 있었던 소란이 마치 꿈인 것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다만 너무나 조용하여 내가 씹는 소리까지 고스란히 그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식사 예절이 뛰어난 최기원은 음식을 집거나 식기를 내려놓는 소리조차 전혀 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거의 빵을 혀 위에서 녹여 먹다시피 했다.

침묵이 불편하였지만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얼른 먹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야겠다고 다짐하였는데 마치 최기원이 내 속을 읽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미술관 좋아해요?”

미술관이라면 고등학교 때 수행 평가를 위해 한 번 들렀던 기억이 희미하게 났다. 작품도 제대로 보지 않고 입구 쪽 조형물 앞에서 대충 인증 사진을 찍었었다. 나는 눈앞의 샐러드 조각을 집어 먹으며 대답했다.

“…아무 생각 없습니다.”

“잘됐네요.”

눈만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가 유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원래 작품을 감상할 때엔 그렇게 바라봐야 해요. 익숙함이 작가의 고심을 가리기도 하니까.”

“아… 고심. …예.”

뭐라고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그는 어물쩍한 내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먹고 미술관 갈 준비해요. 새 옷은 버틀러가 곧 가져다줄 겁니다.”

잠시 손 속에서 포크를 돌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다 은근슬쩍 질문을 던져 보았다. 왠지 지금은 질문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미술관은 왜요…?”

“애인이랑 미술관 데이트 꼭 해 보고 싶었거든요.”

질문한 것을 후회했다. 얼마 전 표정 관리를 못 해 뺨을 아프게 맞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눈만 끔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기원의 시선이 느리게 나에게 흘러오더니 서서히 입매가 올라갔다. 불현듯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11시까지 참여해야 하는 회의 때문에 바로 가야 하는데, 백나언 씨 데려다주고 가기엔 시간이 부족합니다. 잠깐 일 처리하는 동안 관람하고 있어요.”

“네.”

이제야 이해가 갔다. 최기원이 미술관에서 진행되는 회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어렴풋이 형에게서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예전에 형과 저녁을 먹던 중 형이 미술 작품 복원 사업에 후원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었다. 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야라 궁금증을 비췄더니, 동생의 일 때문이라고 답했었다.

‘최기원…. 미술….’

그때엔 지원이 형이 미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눈앞의 냉혈한과는 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미술이란 훨씬 고급스럽고, 차분하고 또 세련된 그런 이미지였다. 창부니 발정이니 따위의 말을 하고 잠자리에서 쉽게 손을 올리는 야만인이 현대 지성의 산물인 미술관에서 일하는 건 정말 믿기지 않았다.

“여기.”

젖어 버린 머리끝에서 물이 자꾸만 흘렀다. 최기원이 종이 냅킨 하나를 뽑아 나에게 건넸다. 난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물을 찍어 닦으며 음식을 씹어 넘겼다.

어색하고 불편한 식사가 끝나자 버틀러가 새 옷을 가져다주었다. 어제의 것과 다른 스타일의 단정한 옷이었다. 셔츠와 니트, 슬랙스를 챙겨 입고 새 구두까지 신었다.

‘안 어울려.’

거울 속 어색한 이목구비를 가진 나를 억지로 외면하며 머리를 대충 털어 말렸다. 난방 덕분에 룸에는 기분 좋은 훈기가 가득해 코트를 팔목에 걸치고 나왔다.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나온 최기원과 마주쳤다.

나를 지나쳐 앞으로 지나가는 최기원의 발걸음 뒤로 쓴 담배 향이 물씬 풍겼다.

“정장을 입혀 놔도 교복 같아 보이네요.”

“죄송합니다.”

“사과는 왜 해요. 생긴 게 애 같은걸.”

최기원이 무덤덤하게 대꾸하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최기원의 등을 보며 입술을 작게 삐죽인 나는, 엘리베이터의 반질반질한 면에 비친 나의 모습을 살폈다.

애 같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정말 회색 교복을 차려입은 중학생 같았다. 목 끝까지 채운 단추 탓일까, 괜히 셔츠의 제일 첫 단추를 끌러 보았다.

주차장에는 처음 최기원과 마주쳤을 때 봤던 검은색 차가 정차하고 있었다. 기사가 인사와 함께 문을 열어 주었고, 쭈뼛대는 나에게 최기원이 먼저 턱짓을 했다.

통유리 창을 통해 내려다보던 서울의 도로를 질주했다. 차가 정차할 때마다 시선에 닿는 모든 곳을 관찰했다. 평소 같으면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나쳤을 풍경 하나하나가 생소했다. 특히 내 또래로 보이는 젊은이가 지나가면 유독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사람이나,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 걸어 나오는 사람들을 빤히 살폈다. 표정이 밝은 이도, 고개를 숙이고 있어 눈 코 입이 잘 보이지 않는 이도 있었다.

내 또래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과 고민 그리고 불안을 안고 사는지 궁금했으나 추측하기 어려웠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싶지 않았지만, 조용하고 따뜻한 차 안은 상념에 잠기기 좋은 공간이었다.

침묵 속에서 최기원은 간간이 일과 관련된 통화를 하기도 했고 기사에게 무언가를 보고받기도 하였으나 나에게 말을 걸진 않았다. 미술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 최기원은 티켓 한 장을 꺼내 쥐여 주었다.

“괜찮은 전시예요. 보고 있어요, 오래 안 걸립니다.”

“네.”

“서 있으면 수행 경호원이 붙을 겁니다.”

혼자 보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먼저 내렸다. 입구에서 경호원을 기다리는 사이 티켓을 살폈다. 네모반듯한 종이 위에는 전시의 이름과 예쁜 색의 조형 요소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백나언 씨 맞습니까?”

“네.”

경호원의 첫인상은 조금 무서웠다. 몸이 다부지게 크고, 목소리도 유독 낮고 허스키한 탓에 그저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중압감이 느껴졌다. 그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서 별다른 언질이 없기에 티켓에 적혀 있는 전시장으로 이동했다. 경호원은 조용히 내 뒤를 따라 걸었다.

검표 후 전시장으로 입장했다. 꽤 이른 오전 시간이어서 그런지 관람객이 많지 않았다. 내부를 둘러본 나는 제일 앞쪽의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서사, 추상….’

분명 한글로 설명이 되어 있는데도 매끄럽게 읽히지 않아 몇 번 다시 읽었다.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전혀 몰라서 일단 적혀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 읽어 봤다. 전시관 입구마다 적혀 있는 제목을 읽고 안으로 들어가 화살표를 따라 걸었다. 회전 초밥이 된 기분이었다.

“…….”

마지막 전시관에는 커다란 설치물이 많았다. 천장 끝까지 높은 것도 있어 고개를 젖혀 보았다. 의무감으로 보고 있었으나 재미는 없었다.

미술관은 정말 익숙하지 않았다. 나에게 미술이 가까울 리 없었다. 작품을 보고 감상할 정신 같은 건 살기에 바쁜 나에겐 사치와 비슷했다. 쫓기는 기분으로 하루를 겨우 버티고 나면, 무언가를 보고 즐길 에너지는 전부 소멸된 상태였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공간에서 타인의 의도가 숨은 듯 담긴 작품을 해석하고 파악하고 골몰하는 건 그럴 정신력과 여유가 존재하는 사람들의 유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무적으로 한 작품씩 보고 지나쳤다. 몇 걸음 떨어져서 함께 걷고 있는 경호원이 신경 쓰였으나 뒤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따금 사람들이 한 작품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는 걸 보고, 비슷하게 흉내도 내 보았다. 눈치를 살피다 조금 눈에 띄는 것 앞에서 괜히 조금 더 머물렀고 적당히 시간을 죽인 뒤 다음 작품으로 발을 옮겼다. 집중은 전혀 되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얼추 전시를 다 보았을 무렵, 뒤에서 경호원이 깍듯하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뒤돌자 최기원이 서 있었다. 그는 대답 대신 가벼운 손짓을 했고, 경호원은 인사와 함께 자리를 피했다.

올 때와 달리 이번에는 그가 직접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 그때까지는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차에 올라타고 나서, 창문을 연 최기원이 담배를 하나 물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그가 가벼운 투로 질문을 던졌다.

“전시 어땠어요?”

“음…. 멋있었어요. 되게 크고….”

“큰 건 지나가는 경비가 봐도 아는 거고.”

“…….”

“혼내는 거 아니니까 편하게 이야기해요. 뭐 제일 인상 깊었던 작품이라던가.”

주눅이 든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최기원의 말투는 항상 사나워 언제나 혼이 나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담배까지 물고 있어 발음이 더욱 짓이겨져 있었다. 인상 깊은 작품을 논하기 전에, 일단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보았던 것을 대답했다.

“네모난 상자가 있었는데 안이 잘 안 보였어요. 무언가 있는 것 같아 자세하게 살펴보았는데 나중에 보니 불투명한 유리 사이의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었어요.”

한 손으로 핸들을 조작하며 최기원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단단한 입매에 미소가 깃들어 나도 모르게 말을 덧붙였다.

“허무했어요. 한참 봤거든요. 뭐가 있는 것 같아서….”

“허무?”

“작품 일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제 모습이라 기분이 이상했어요. 허탈하다고 해야 하나….”

“객관화된 시각으로 자신을 응시하면 허무할 수 있어요. 관람객으로 존재하던 내가 불시에 관찰의 대상으로 전도된 순간이니까요.”

“전도…. 아….”

“백나언 씨가 한 말이랑 같은 말입니다.”

네, 라고 대답하고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귀 끝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애초에 이런 고급 전시를 이해할 머리도, 눈도 아니었다.

“관심 없다는 것치곤 열심히 봤네요.”

“…….”

“다음에는 같이 봐요.”

망설이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어차피 같이 보자고 강제로 끌고 간다면 거절할 수 없이 봐야 하기에 내 대답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최기원은 1층의 서재로 향하고, 나는 2층의 내 방으로 올라갔다.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는 방의 바닥에 허물처럼 벗겨진 옷가지가 흩어졌다. 홈웨어로 갈아입자마자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똑똑.

노크 소리에 설핏 들었던 잠에서 깨어났다.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자, 식사를 하러 내려오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잠에 빠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깊이 잠들었었다. 얼른 슬리퍼에 발을 끼우고 1층으로 내려갔다. 나를 기다리는 뒷모습에 뒷골이 쭈뼛 섰다.

“죄송합니다.”

“많이 먹어요.”

최기원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수저를 들었다. 나도 얼른 수저를 들었다. 저녁은 한식이었다. 개인 테이블보 위에는 반찬과 대나무 죽통 밥, 국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요즘 들어 소화가 잘 안 돼서인지 부드러운 채소 위주의 음식이 반가웠다. 뜨끈한 두붓국으로 속을 데우고 밥을 조금씩 떠서 반찬과 함께 씹었다.

“백나언 씨는 무양대학교 경제학과 휴학 중이죠.”

밥을 푸던 손이 멈칫했다.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이젠 소름이 끼치지도 않았다. 작은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가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리며 빈정댔다.

“영 공부를 못 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그냥 보통이었어요.”

사실 공부는 잘했다. 변명을 하자면 공부에 집중할 환경이 아니었을 뿐이다. 운 좋게 수능을 잘 봤으나, 내가 원하는 대학교는 입학 장학금이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2계단 정도 낮추었으나 서울권 내 대학 중에는 꽤나 유망한 곳이었다. 번듯한 직장을 잡아 가장 노릇을 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그마저도 주언이나 아빠 같은 핑계를 대며 멈추었다. 병간호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학점이 바닥을 쳤기에 대학 생활을 무리하게 이어 갈 수도 없었다.

“다음 주부터 주 1회 정도 시간 내서 교수님이랑 만나요.”

“어떤 교수님이요? 왜….”

“오늘 전시회 관람하는 백나언 씨 보니까. 어느 정도 이야기가 통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

“한국대학교 편입 준비예요. 이번 학년도는 곧 종강이니 내년 3월을 목표로.”

“아, 편입, 이요…?”

최기원의 말에 집중하려 했지만, 이상하게 점점 숨이 가쁘고 더워졌다. 식지 않은 국을 너무 빠르게 먹었나, 속이 울렁거리는 것같이 불편했다. 손을 들어 귀 옆에 맺힌 식은땀을 찍어 닦으며 고개를 잘게 저었다. 왜 갑작스럽게 편입을 준비해야 하는지, 교수님과 만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겨우 한 마디를 쥐어 짜냈으나 딱딱하게 굳은 혀가 이상할 정도로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목이 갑갑해 손으로 가슴께를 쥐며 냉수를 들이켰다. 문득 고개를 들어 최기원을 바라보니, 그는 수저를 놓고 턱을 괸 채로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더워요?”

“아… 조금.”

“내일 이야기해야겠네요.”

“이거, 뭔가 이상….”

불쾌한 현기증이 일어 식탁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 나를 올려다보며 최기원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대며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느새 입술 사이로는 색색대는 숨이 제멋대로 흩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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