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Obedience
내가 정신을 차린 건 끔찍한 복통에 무언가를 잔뜩 토하면서였다.
“우욱!”
단순한 욕지기가 아닌, 목구멍을 통해 이물이 역류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침대에서 머리만 빼어 바깥으로 냈다. 무언가 잔뜩 쏟아져 내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토사물이 흩어졌다. 토하면서도 속이 뒤집혀 괴로웠고, 나는 목을 붙잡고 꺽꺽대며 기침했다.
“하아, 으….”
손이 떨리고 식은땀이 솟았다. 스무 살 초반, 주량을 몰라 술을 많이 먹고 다음 날까지 숙취에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 숙취를 몇만 배 농축시켜 느끼는 기분이었다.
‘치워야 하는데….’
최기원이 알면 가만두지 않을 텐데…. 바닥의 냄새나는 흔적들을 빨리 닦아야 한다는 건 알지만 정말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렸다가 잃기를 반복했다.
“…….”
다시 눈을 뜬 건,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였다. 절대 몸이 괜찮아져서 눈을 뜬 것이 아니고, 몸 곳곳이 너무 아파서 깼다. 이러다가 정말 죽을 것만 같아서, 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흐으.”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사이에 토사물이 흩어져 있던 바닥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고, 사이드 테이블에는 식어 버린 죽이 올려져 있었다. 사용인들이 왔다 간 모양이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오려는 음식은 도저히 넘길 자신이 없어서 함께 놓인 미지근한 물만 들이켰다.
‘무책임한 쓰레기 새끼.’
이상한 약을 먹였으면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닌가. 약에 취해 쓰러진 사람을 이대로 방치해 놓은 모습에 이가 갈렸다. 나의 마지막 기억은 드문드문 끊어져 있었다. 식탁에서 밥을 먹던 중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껴 다급하게 빠져나오려 했고 결론적으로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최기원에게 들려 방까지 갔고, 그가 내 옷을 벗겼다. 뒤로는 점점 약 기운이 퍼져 기억을 되짚기 힘들어졌으나 그의 거칠었던 손길과 성급했던 삽입의 순간은 잊을 수 없었다. 이런 이상한 약까지 먹이지 않아도, 그가 몸을 섞자고 했으면 그러자고 했을 것이다. 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힘들었고, 이해해 주고 싶지도 않았다.
“…….”
떠올리기 싫다.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움직이려 하니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두통, 복통에 정신까지 혼미해져 진통제라도 먹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에서 엉덩이를 조금 옮기는 동안에도 찢어지고 부은 아래에서 아릿한 둔통이 올라왔다. 옷장에 들어 있는 새 홈웨어를 뜯어 입고 어기적대며 1층으로 내려가자 전신이 식은땀 범벅이었다.
오전이나 식사 시간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생활 소음이 종종 들려왔는데 지금은 고요하기만 했다. 말끔한 대저택에는 한가로운 햇살만 가득하고 아무도 없어,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들려오는 새소리가 유독 선명했다.
살짝 고개를 돌리니 1층 유리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에는 사다리 위에서 물을 주는 정원사가 조그맣게 보였고, 본집과 사택 대문 앞을 지키는 경호 인력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래도 나는 까치발을 들고 복도를 움직였다.
‘여기 어디 있는 것 같은데….’
살금살금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찬장 부근에서 알약 통을 흘긋 본 기억이 있었다. 유리로 된 찬장들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끼익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살펴보다 갖가지 약을 보관해 놓는 유리 상자를 발견했다.
‘두통약…, 소화제도 괜찮은데.’
두통은 물론, 배도 아릿하게 쓰렸다. 근육통과 오한도 있어 아무 약이나 먹어도 효과가 있을 지경이었다. 아스피린 같은, 흔히 알고 있는 진통제를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뒤져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조그만 상자나 플라스틱 통에는 영어, 일본어 등의 글자들만 가득 적혀 있었고 아무런 표기도 없이 작은 유리병에 들어 있는 물약도 있었다.
‘헉.’
아직 약을 찾지 못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멀리서 여자들의 웃음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약상자로 손을 뻗어 이마를 짚고 있는 사람이 그려진 박스 안의 알약 하나와 작은 물약 하나를 챙겼다. 노란 알약을 입 안에 넣고 물약을 입 안 가득 머금으며 부엌을 빠져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2층의 방으로 걸어 올라가는 동안, 입 안의 약이 물약에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방으로 돌아와 얼른 죽 옆에 놓인 물을 들이켜 혀끝에 남아 있는 쓴맛을 마저 씻어 넘겼다.
그렇게 진통제를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머리든 배든 전신을 두들기는 것 같은 통증 하나라도 덜어 주면 고마울 지경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부엌을 빠져나오기 위해 애써서인지, 아직도 간헐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몸을 얕게 뒤척이며 얌전하게 누워 눈을 감았다.
처음엔 근육통이, 그다음엔 복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약 기운이 돌아 나른해져 곧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가쁘게 뛰던 심장이 점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두근대고, 이불 안의 공기가 후끈하게 더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한 건, 내가 뱉어 내는 숨이 내가 느끼기에도 지나치게 뜨거워졌을 때였다.
“허억….”
비틀대며 시트를 짚고 일어섰다. 현기증에 앞이 핑 돌고, 눈앞이 까맣게 흐려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아…. 뭐, 야 이거?”
정말 끔찍하게도 지금 이건, 어제 저녁 식사를 하고 나자 스멀대며 올라오던 기운과 흡사했다.
이렇게 운이 없을 수가 있을까? 하필 그 많은 약 중에 어제 먹었던 그 흥분제를 또 먹은 모양이었다. 지난밤에 먹었던 약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어서일까, 아니면 진통제와 함께 그 약을 복용해서일까. 어젯밤보다 몇 배는 빠르게 몸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토해야 해.’
하얗게 굳어 가는 머리로 유일한 방법을 겨우 떠올렸다. 이 약에 취하면 사리를 분별할 수 없었다. 몰래 약을 주워 먹고 이런 꼴이 난 걸 최기원에게 들켰다간 또 어떤 수모를 당할지 모른다.
다행히 최기원이 퇴근하려면 멀었으니, 그 전에 얼른 약을 토해 내야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방에 딸린 화장실을 향해 뛰었다. 사실 뛰려고 마음먹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거의 기다시피 갔다. 변기 커버를 올리고 손가락을 혀뿌리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우웩, 우, 흐윽.”
등을 들썩였으나 한참 전에 녹아 버린 알약이 나올 리 없었다. 먹은 것도 거의 없어 시큼한 위액만 멀겋게 떨어져 내릴 뿐, 헛수고였다. 시간이 흘러가며 괴로울 만큼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눈가가 발갛게 뜨고 자꾸만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 으.”
특히 견디기 힘든 것은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뜨거움이었다. 아랫배를 꾹꾹 누르며 배 속에 고이는 자극적인 기분을 피하려 했으나 점점 열기가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번지기 시작했다.
미식거리는 복통 같기도, 오줌이 마려운 느낌 같기도 한 초조함 사이에서 희미한 흥분이 일기 시작했다. 경악에 물들어 앞을 내려다보니 피가 몰린 성기가 잔뜩 일어서 얇은 홈웨어 아래에서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당해 놓고 또 서…? 미쳤냐고…….’
나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물이 핑 돌아 눈알까지 달아올랐다.
마구 만져 아래에 가득 찬 것을 싸 버리고 싶었으나 어제 겪어 보아서 안다. 한번 자극을 받기 시작하면 그 뒤론 이성을 아예 잃어버리게 된다. 나는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웅크린 채 몸을 뉘었다. 그나마 차가운 화장실 타일이 살갗에 닿으면 조금씩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쿵쿵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또 이상한 약을 먹었다.
이대로 죽으면 어떡하지.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으나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제대로 먹은 기억도, 편하게 잠을 잔 기억도 없었다. 이런 독한 약을 내리 이틀을 먹었으니 몸이 한계에 달한 걸까.
서러운 기분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너무 무섭거나 괴롭지 않았다. 색색, 마른 입술 사이로 비집어 나오는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나는 죽은 듯 눈을 감아 버렸다.
***
“백… 씨. …나… 씨.”
소리 없이 헐떡이던 나를 누군가 살살 흔들었다. 파드득 몸이 본능적으로 경련하였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어느새 나는 바닥에 누워 몸을 비비적대고 있었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
“백나언 씨. 어디 편찮으십니까?”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아 엎드린 채로 낯선 이를 바라보았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낯선 얼굴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나를 둘러싼 남자 2명의 뒤로는 수군대는 사용인들도 보였다. ‘화장실 청소를 하러 왔는데 바닥에 쓰러져 계셨어요.’라며 남자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우선 안으로 옮기죠.”
“제가 들겠습니다.”
“아주머니께서는 내려가세요. 제가 사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야 남자 중 하나의 얼굴이 기억났다. 얼마 전 최기원과 미술관에 갔을 때, 관람하는 나의 뒤를 따라다니던 경호원이었다. 몽롱한 와중에 남자가 저벅대며 나에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가 쓰러져 있는 나를 들어 올리기 위해 뒷덜미와 무릎 뒤로 손을 넣었다. 그 순간 나는 크게 앓으며 허리를 뒤틀었다. 몸이 발작하는 사람처럼 굳으며 수치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지금은 나에게 닿는 모든 자극이 지나치게 버거웠다.
“하. 으….”
이성이 완전히 날아간 것은 아니었기에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심장 소리와 이명이 가득 채운 귓구멍으로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수군대는 것이 들렸다.
바닥에 토를 싸질러 놓고, 이젠 아래를 발딱 세우고 신음하고 있다.
분명 혐오스러운 놈이라며 욕하는 말소리일 것이다. 차라리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조차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나는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경호원에게 안겨 침대로 옮겨졌다.
“으, 으….”
사람의 손을 한번 타고 나니 온몸이 불에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화장실에서 침대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이성을 잃고 그 남자의 가슴팍과 배에 몸을 문질러 댔으니, 그도 내 상태가 께름칙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분 왜 이럽니까?”
“약…을 잘못 먹은 것 같은데. 어디서 난 거지?”
“약이요? 당장 병원에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백나언 씨 일은 무조건 사장님한테 선보고를 드려야 하는데.”
“오늘 주총이라 큰일 아니면 연락하지 마시라고….”
나를 눕혀 두고 고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최기원한텐 안 돼, 죽어도 안 돼.’
눈을 감은 채로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단어가 뱉어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나의 몸부림을 눈치채지 못했다. 미술관에서 나를 경호했던 남자가 경호원 둘 중 상사인 듯했다. 그를 향해, 그의 부하 직원이 의견을 냈다.
“아오, 지금 흥분제를 먹은 것 같은데요. 앞도 다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얼른 해결해 줘야 빨리 낫는 거 아닙니까? 아파하는 것 같은데요.”
“안 돼. 사장님한테 보고하지 않고 행동하는 건.”
부하 직원은 무언가 불만인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일단 내가 실장님께 연락드리고 올 테니까 상황 보고 있어.”
“알겠습니다.”
나는 흐느끼며 필사적으로 싫다는 의사를 내비쳤으나 상사 경호원이 방을 떠났다. 구둣발 소리와 함께 문이 끽 소리를 내며 닫혔다.
될 대로 돼라. 더는 신경 쓸 힘이 남지 않았다. 붉게 물들고 눈물에 젖은 뺨을 베개에 파묻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아랫배와 사타구니를 꾹꾹 누르며 흥분과 분투를 벌였다.
“흐, 윽.”
“많이… 힘드십니까?”
대답 대신 서러운 눈물이 먼저 흘렀다. 부하 직원은 상사보다 정이 많고 여린 사람인 듯했다. 그는 우느라 들썩이는 내 등을 토닥였는데 그 순간 나는 크게 앓아 버렸다. 남자의 손길이 퍼뜩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을 뱉어 냈다.
“건, 드…리지 마요….”
“많이 힘드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흐, 읏….”
그냥 나를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는 내가 의지와 상관없이 앞을 세우고, 바지와 속옷을 흠뻑 적실 만큼 흥분한 것이 꽤나 불쌍해 보였나 보다. 쓸모없는 사명감에 휩싸인 남자는 몇 번 닫힌 문을 흘긋대더니 웅크린 채로 끙끙대는 나를 똑바로 눕혔다.
“빨리 끝내 드리겠습니다.”
“으, 흑. 싫-,”
이건 아니다. 나는 남자의 손길을 피하려고 다시 등을 보이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남자는 손쉽게 내 몸을 돌려 눕히고 바지와 속옷을 살짝 끌어내어 성기를 꺼냈다.
퉁.
뜨겁게 익어 가던 성기가 억눌려 있던 곳에서 빠져나오며 배에 부딪혔다. 차가운 공기를 맞이하자마자 몸에 소름이 끼치며 힘이 풀렸다.
남자는 내 아래로 손을 내렸다. 그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아랫배에 간지럽게 고여 있던 흥분이 순식간에 고양되었다. 나는 발끝으로 시트를 밀며 흥분에 겨운 몸에 지지 않기 위해 애썼다. 지금 이성을 잃었다간 난생처음 보는 사람의 앞에서 앞을 흔들고 섹스를 구걸할 것이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팔뚝을 밀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납으로 된 추를 매단 인형처럼 팔이 아래로 푹 처졌다. 그사이 남자가 내 기둥을 꾹 쥐고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 아. 으…읏.”
“조금만… 조용히 해 주십시오.”
속도가 붙는 건 순식간이었다. 남자는 줄곧 바깥을 응시하며 내 아래를 마구 흔들었다. 제대로 된 자극이 미치기 시작하자 초점이 흐려지며 눈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를 뒤틀면서 애처롭게 신음했다. 성기 끝에서는 이미 반쯤 정액이 흘러나와 배꼽 주변으로 말간 액이 고였다.
“흐, 으읏. …싫다…구….”
“…….”
“제, 발…. 으흑….”
미약하게 남아 있는 이성을 짜내어 애원하였으나 남자는 손을 떼어 내지 않았다. 몇 시간을 버텨 왔던 성감이었다. 한번 물꼬를 트기 시작하자 말릴 새도 없이 사정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허리를 뒤틀고 허벅지를 빼어 내려 하는 몸부림에도 굴하지 않고 남자는 기둥을 훑어 내리는 손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이미 프리컴이 진득하게 흘러내려, 남자의 손바닥과 기둥 사이에선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파르르 경련하는 눈을 겨우 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
“흐, 윽.”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의 앞섶이 팽팽하게 발기한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를 핑계 삼아 그는 뒤틀린 성욕과 호기심을 해소하려던 것이었다. 나쁜 새끼. 나는 잘하지도 못하는 욕을 마구 씹어 대려 했으나 꼬여 버린 혀 때문에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약을 주워 먹었으니 이건 내가 자초한 일인 것인가?
판단력이 흐려졌다. 전부 내 탓처럼 느껴진다. 수치심도, 곤혹스러움도, 끝없는 서러움도 서서히 마비되어 갔다. 오로지 아래에 와 닿는 지나친 자극에만 집중하는 순간, 쾅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너 뭐 하는 짓이야?”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비서에게 상황을 보고하러 갔던 상사였다. 그는 미간을 왈칵 찌푸린 채로 큰 보폭으로 이쪽으로 걸어왔다. 당황한 부하 직원이 성기에서 손을 떼어 냈지만 이미 한계까지 치달은 사정감에 나는 허리를 붕 띄웠다. 움찔, 움찔. 사정하기 직전의 성기가 불끈대며 솟아올랐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며 몸이 퍼뜩 굳었다.
“흐, 으윽!”
결국 귀두 끝에서 흰 정액이 튀어 올랐다.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 입술을 깨물었지만,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잇새를 비집고 흘렀다. 통제를 벗어난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전신이 수치스럽게 경련했다. 뒤늦게 들어온 경호원이 부하 직원을 윽박질렀다.
“누가 마음대로 손대라고 그랬어!”
“너무… 힘들어 보여서…. 죄송합니다.”
“흐윽, 하아….”
사정하고 나자 탈력감에 지쳐 버렸다. 나는 몸을 늘어뜨린 채로 간헐적으로 숨을 뱉어 냈다. 상사는 방문부터 잠갔다. 빠른 걸음으로 휴지를 가져와 늘어진 성기 주변과 배에 튄 정액을 훑어 냈다. 나는 가물거리는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곧 사장님 오신다고 하시니까. 없던 일로 해. 알겠어?”
“…네.”
“백나언 씨. 백나언 씨도 이 일은 들키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거 아시죠?”
사장님 성격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득했다. 그의 말에 틀린 것이 하나 없었다. 마음대로 약을 주워 먹고 흥분한 채로 다른 사람의 손에서 사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최기원은 나를 진심으로 해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이런 식으로 넘어갈 수 있는가.
“…….”
그러나 이 커다란 저택에서 내 편은 그 누구도 없었다. 저들이 입을 맞춰 그런 적이 없다고, 약을 먹은 나의 망상이라고 말한다면 최기원은 당연히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 일한 그들의 말을 듣지, 약에 취한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 차마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끊어질 것 같은 숨을 뱉어 내던 나의 눈꼬리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
실신인지 잠에 든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에서 겨우 눈을 떴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익숙한 향수 향이었다.
“…….”
참으로 이상했다. 지원이 형이 쓰던 달콤한 향수와는 전혀 다른 그 알싸한 잔향에 나는 왜 순간적으로 안도감을 느낀 것일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정말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최기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느리게 열고 닫히는 눈꺼풀 사이로 천천히 초점이 맞추어졌다. 침대의 왼쪽 곁에 앉아 태블릿 PC를 보고 있는 건 최기원이 맞았다.
“정신이 들어요?”
“……예.”
내 목소리라고 믿을 수 없는,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렀다.
차츰 기억이 선명해졌다. 이상한 약을 집에 가져다 놓은 최기원도, 다급한 마음에 뭔지도 모른 채 약을 입에 넣은 나도 그리고 나를 희롱했던 직원도.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참을 새도 없이 눈가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그렇게 최기원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최기원이 손을 뻗었다. 눈꼬리에서 관자놀이로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검지로 쓸어 올리며 낮게 웃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눈가를 더듬는 것이 시원하고 오묘했다.
“약은 혼자 주워 먹고. 왜 나를 원망하는 듯이 쳐다봐.”
“…….”
“존나 멍청한데 조금 귀엽네요.”
“…….”
“물론 나는 멍청한 것도 귀여운 것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신랄한 비판이었으나 목소리에서는 놀리는 뉘앙스만 느껴지지 별다른 분노는 묻어 있지 않았다. 그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지만 수치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이불을 끌어 올리기 위해 팔을 뻗었다. 순간 따끔, 하고 찔리는 통증이 피어올랐다. 시선이 물끄러미 통증이 이는 곳을 향했다. 이제야 손등에 링거가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섯 시간 잤어요.”
“…….”
“보초를 섰네, 아주.”
최기원이 태블릿 PC를 끄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쓰러져 있는 내내 그는 여기 앉아 있었던 듯했다. 여섯 시간이나 기절한 줄 몰라 눈이 조금 커졌다. 그사이에 의사가 다녀간 듯했다. 무언가 조치를 취해 준 것인지 미열은 남아 있었지만, 약을 먹은 다음에 느껴지던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이나 지나친 현기증, 메스꺼움과 같은 증상은 지나가 있었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슬쩍 찌푸리곤 입을 열었다.
“원래 가난한 애들은 아무거나 주워 먹어요?”
“…….”
“밥에 섞어 먹어도 정신줄 놓는 약을 빈속에, 그것도 아스피린이랑 같이 먹다니. 위세척할 뻔했어요.”
“…….”
“입 뒀다 뭐 합니까. 아프면 말을 하고, 이 집에 있는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최기원이 그대로 뒤돌아 방을 떠났다. 문을 꽉 닫고 나자 넓은 방은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암실이 되었다.
까만 그림자가 내린 벽지는 간이 영사기가 되어 몇 시간 전에 내가 겪었던 일부터 일주일 전 최기원과 처음 만났던 때까지를 차곡차곡 비춰 주기 시작했다. 머리는 차게 식어 가는데 쿡쿡 속이 뜨겁게 아렸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기에. 동생 하나, 내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이런 일들을 겪고 있는 건가.
원망할 사람은 많았다. 나를 버리고 떠난 무책임한 아버지. 말도 안 되는 모략으로 나를 구렁텅이에 끌고 들어온 최기원. 순간의 음욕에 못 이겨 나를 희롱한 낯선 남자.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전부 내 잘못이었다.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일도 아닌 스스로의 잘못. 이번 생은 이렇게 머저리처럼 살 운명이었나 보다.
이렇게 될 거였다면 지원이 형과 만나며 누렸던 행복들을 차라리 느껴 보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과거에 기대어 나를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그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사고방식 아래에서 나의 마음은 까맣고, 딱딱하게 굳어 가기 시작했다.
***
나는 최기원과의 감금 생활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밤 최기원의 향수 향에서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안도감을 느낀 이후 내 안에서 무언가가 정리되었다. 이유를 꼽아 말할 수도,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으나 희망을 어느 정도 포기한 것이다.
마음을 놓자 편한 것이 있었다.
최기원의 말과 행동에 크게 상처받지 않았고, 깊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최기원이 하는 말이 기분이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곱씹기도 전에, 그저 그의 말을 무조건 따르면 된다는 것을 깨우쳤다. 그 방법은 실로 간단하고 효율적이었는데, 최기원도 나에게 불필요한 화를 내지 않아도 되고 나도 쓸데없는 감정 소모로 나를 깎아 먹을 일이 없었다.
그저 차려 준 음식을 먹고, 때에 맞추어 잠을 잤다. 최기원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와 몸을 섞었다. 멀끔하게 출근 준비를 해 놓고는 넥타이를 끄르며 방으로 들어와 자는 사람에게 대뜸 성기를 물렸으며 가끔은 대낮에도 호텔로 불러내 일을 치르기도 했다.
최기원이 언제 어디서 나를 덮칠지 모르기에 나는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하며 뒤를 깨끗하게 준비해 두었다. 매번 찢어지는 아래는 아물 새도 없이 다시 그의 성기에 헤집어졌다. 처음에는 일상생활이 불편할 정도로 아팠으나, 매일 반복되는 고통에 몸도 서서히 적응해 갔다.
그와 섹스를 할 때면 목석같이 굴지 않기 위해 적당히 신음을 흘렸다. 눈물은 어쩔 도리가 없어 흐르게 내버려 두었다. 처음에는 우는 내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며 싫은 티를 냈던 최기원도, 최근 들어선 그 눈물을 혀로 핥아 올리며 행위를 계속했다. 최기원도 나처럼 적응한 것일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최기원과 생활한 지도 3주가 넘어섰다. 2주 차가 되자 먹고 자기만 하던 나의 단조로운 하루 루틴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 최기원이 말했던 교수님과 개인 수업 일정이 주 1회 잡혔고, 주 3회는 집에 있는 헬스장으로 트레이너 선생님이 오셔서 운동을 가르쳤다. 전자는 내년 대학교 편입을 위해 미리 준비하는 과정이었고, 후자는 관계할 때에 끝까지 버티지 못하는 나의 체력을 기르라는 이유였다.
처음에 최기원이 막무가내로 편입과 교수님과의 수업을 결정지었을 때는 무작정 거부감이 일었는데, 그것이 유일하게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자 그 하루가 너무나 소중해졌다.
물론 오롯이 홀로 하는 외출은 아니었다.
미술관에서 나와 동행하고, 부하 직원의 성희롱을 묻고 넘어간 문제의 경호원이 나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나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그 남자는 나에게 껄끄럽고 불편한 존재였으나 피차 잘못을 숨긴 공범이라 생각하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다른 무엇보다 하루 3시간이지만 최기원의 시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이 중요해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수업은 주 1회마다 주기적으로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교수님의 일정에 맞춰 날짜나 시간이 변동될 수도 있다고 했다. 교수님과의 일정 조정은 최기원이 준 휴대 전화로 이루어졌다.
조익현 비서실장님은 나에게 휴대 전화를 전달하며 이 기기는 교수님과의 수업 시간 조율에만 활용하고, 수업을 못 들을 상황이 아니라면 답장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일러 주었다.
휴대 전화를 받아 든 나는 그날 저녁 드레스룸으로 뛰어가 문을 잠그고 얼른 주언이의 번호를 눌러 보았다. 주언이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고팠다.
[이 전화기는 발신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차가운 기계음에 손을 툭 떨어뜨렸다. 이 전화는 통화 기능은 없이 오로지 문자만 주고받을 수 있었다. 문자는 언제 어떻게 답장이 올지 모르기에 주언이에게 함부로 보내 놓을 수도 없었다.
아쉽지만 마음을 접었다. 과욕에 허튼짓을 벌였다간 이 전화마저도 빼앗길 수 있었다. 나는 아쉬움이 뚝뚝 흐르는 눈으로 하루에도 여러 번 교수님이 보내 놓은 메시지를 읽어 보곤 했다.
그렇게 2번의 수업을 들었다. 편입을 ‘준비’하는 과정이라 들었기에 열심히 공부해야 그 과에 합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교수님에게 들어 보니 이미 3월 1학기 편입은 결정되었고, 이 개인 수업은 내년에 수업을 매끄럽게 듣기 위한 보충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했다.
수업 내용은 미술의 역사와 작품 감상의 관점과 철학적 고찰에 관한 어려운 설명이 주였다. 어이없지만 난 경제학 전공이었다. 미학이라니, 교양으로도 절대 선택하지 않을 내용을 꾸역꾸역 듣느라 머릿속이 아우성을 쳐 댔다.
게다가 그는 수업 중간중간, 최기원이 한국의 미술계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과 세느 미술관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길게 칭찬을 늘어놓았다. 난 흐린 동공을 하고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가 미술 분야에 몸담고 있는 것은 내가 그를 경멸할, 또 하나의 이유밖에 되지 못했다.
오늘은 교수님과 수업이 없는 평일이었다. 주언이 생각을 하다 가슴이 답답해진 나는 묘한 아쉬움에 창밖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윽.”
조금 있으면 운동할 시간이었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의 표정으로 드레스룸을 향했다.
‘참… 징그럽다.’
최기원은 운동복도 종류별로 사서 옷장에 넣어 두었다. 반팔, 긴팔, 아우터, 왜 있는지 모를 바이크용 타이즈 등등 숨 막힐 정도로 많은 기능복 사이에서 제일 무난한 무채색의 운동복을 골라 입었다. 발을 질질 끌며 1층에 있는 헬스장으로 내려가 몸을 미리 풀었다.
“안녕하십니까!”
키가 작은 근육질의 트레이너가 호탕한 웃음과 함께 운동 방으로 들어섰고, 대뜸 들어오자마자 큰 기합 소리를 내며 나를 다그쳤다.
“백나언 회원님! 오늘도 열심히 할 준비 되셨습니까!”
“네….”
“대답 크게 합니다!”
“네.”
“아잇!”
“네에…!”
최기원은 어디서 이런 사람을 구해 온 걸까. 밝은 성격과는 달리 수업은 스파르타 그 자체였다. 시키는 대로 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하고 나니 종내에는 몸이 흠뻑 젖을 만큼 땀이 흘러 있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에너지를 잃지 않는 선생님에게 꾸벅 인사를 한 나는, 목에 두른 수건으로 이마와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방을 나섰다. 고개를 숙이고 걷던 나는 어깨에 단단한 것이 툭 부딪히는 느낌에 순간적으로 휘청였다.
“…아. 죄송합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고개를 들자 경호원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볼이 달아오른 채 숨을 고르는 나를 바라보던 그가 뒤늦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늘은 대학교 수업이 없었기에 그가 이 시간에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최기원에게서 무언가 전언이 있는 것인지 묻기 위해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아, 수건 가져다드리려고.”
수건은 운동 방에도 차고 넘치도록 많았으며 정작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의문이 들어 그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시선이 내 목덜미와, 땀에 젖어 옷이 달라붙은 팔뚝에 머물렀다.
왜 그 순간 약에 취했던 오후, 내가 부하 직원의 손에 사정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 눈빛과 겹쳐졌는지 모르겠다. 불시에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감이 풍겨 왔다. 나는 대충 시선을 피하며 그를 피해 내 방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고, 끝에는 거의 2개씩 한 번에 걸었다. 숨을 고르며 다급하게 문을 닫아 잠근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
난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지 않고 그대로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밖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숨을 죽인 채 바깥의 동향을 느끼는데, 분명 발걸음 소리 하나 나지 않았던 문 앞에서 문고리가 미세하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그리고 반쯤 돌아가던 문고리가 잠금장치에 걸려 돌아가지 않고 달각이며 멈추었다. 묵직한 잠금 소리에 심장이 쿵쿵댔으나 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옷 갈아입는 중입니다. 누구세요?”
“…….”
청소를 하러 들른 사용인이면 나중에 올라오겠다고 대답을 할 법한데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렇게 바깥은 고요한 침묵뿐이었고 나는 긴장한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는 것에 확신이 들고 나서야 문을 조금 열고 바깥을 살폈다. 방문 앞에는 서늘하고 적막한 공기만 남았을 뿐 아무도 없었다.
그날 저녁, 최기원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이상하게도 그가 오자, 낮에 엄습했던 기묘한 불안감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는 식사 후 제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를 앞세웠다. 식사 후에 바로 달려드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당황한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는데 그는 계단참에서부터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무게에 휘청일 정도로 강한 힘에 반사적으로 몸을 버둥대게 되었다.
“왜….”
최기원은 대답 대신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고 깨물고 핥아 댔다. 행여 누군가 볼까 봐 목을 움츠리며 허리를 뒤틀었다. 하지만 그는 뒤에서 감싸 안은 팔을 풀어 주지 않고 한참을 계단에서 내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고 있었다. 뜨거운 숨이 목덜미에 번져 갔다.
다른 모든 곳은 체온이 낮으면서, 유독 그의 입술은 항상 뜨거웠다. 그의 입술이 닿고 비벼지는 곳마다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행여 사람들을 마주칠세라 나는 눈가를 찌푸리며 걸음을 빠르게 옮기려 애썼다.
“그, 만… 들어가서.”
그러나 그가 내 말을 들어줄 리 없었다. 턱 끝에서 자연스럽게 내 입술로 올라온 그의 혀가 말을 하는 사이 나의 입 안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말캉하고 뾰족한 살덩이가 치아를 훑고 들어가 천장의 높고 옴폭한 부분을 핥았다.
손을 파르르 떨며 그의 팔뚝과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는 자꾸만 밀어내고 피하려는 나를 속박하듯 뒷덜미와 허리를 감싸 안았고, 입술을 빨아 삼키며 혀를 매끄럽게 감아올렸다. 점점 무게를 실어 오는 그에게 밀려 등이 벽에 닿았고, 그는 손으로 벽을 짚은 후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겹쳤다.
정신없고 뜨거운 키스 탓에 점차 생각이 멈추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입술을 벌리고 몸을 늘어뜨렸다.
“…….”
맞닿은 입술 너머로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입술을 떼어 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게슴츠레 뜬 나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입술과 턱은 타액으로 흥건하게 젖어 축축해졌다.
“입천장만 쑤셨는데도 구멍 쑤셔진 것처럼 반응을 하네.”
“흐, 으.”
“들어가서 하자더니 밑은 다 세우고.”
그가 도톰하게 튀어나온 나의 아래를 손바닥으로 세게 쓸며 쥐었다 놓았다. 그의 조롱에 귓가와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가 낮은 웃음을 터뜨리곤 벙찐 나의 팔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침대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나의 홈웨어 단추를 모두 풀어 내리고 옷을 어깨 아래로 끌어 내렸다. 저항이 무의미한 것을 알고 있기에, 그가 당기는 대로 이끌려 침대 위로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늘 그렇듯 행위는 거칠었다.
관계를 맺은 건 두 명인데, 만신창이가 된 것은 나 하나였다. 하지만 항상 섹스의 끝 무렵에 정신을 놓고 마는 내가 오늘은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겨우 눈 뜨고 있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전신에 번진 탈력감에 물속에 잠긴 사람처럼 손가락 하나 까닥이기 힘들어 그저 색색대며 동태 눈깔을 껌벅이고만 있었다. 최기원이 내 얼굴을 흘긋 바라보더니 의외라는 듯 눈썹을 끌어 올렸다.
“오. 버텼네.”
“…….”
“트레이너 칭찬해 줘야겠다.”
침대 헤드에 기댄 최기원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은 그가 정액이 묻어 있는 내 볼을 손가락으로 쓸어 벌어진 내 입술 사이로 집어넣었다. 혀 위로 비릿한 맛이 느껴져 눈을 찌푸렸다.
“맛있는 것 먹는 표정.”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고 있는 내 머리칼을 그가 부드럽게 흩뜨려 놓았다. 천천히 땀이 식어 가며 소름이 일기 시작한 몸 위로, 그가 이불을 끌어 올렸다. 내가 항상 섹스 중간에 정신을 잃었기에 그가 관계 이후에 나의 곁에서 이렇게 시간을 죽이는 줄 몰랐다.
눈을 뜨고 나면 침대 곁은 언제나 휑했고, 절대 뒤처리를 해 주지 않는 최기원 덕분에 아침이 되면 온 얼굴과 몸에는 정액 냄새가 배 있었다. 고통스러운 섹스의 끝은 언제나 서늘하고 고요한 침대 위였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이 순간의 분위기가 기묘하게 따듯하고 다정했다.
“…….”
“…….”
나는 그의 눈과 코, 입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형제. 지원이 형이 남긴 5년의 기억을 난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오랫동안 부드러운 흔적을 남겼던 형의 모든 것을 이제 최기원이 잡아먹고 있었다.
그야말로 마구 씹어 발기고 있었다. 포효하듯 강렬하게 다가온 최기원은 지원이 형이 남겨 준 기억을 아프게 난도질해 찢었다. 충격을 실로 삼아 억지로 기워 넣어진 최기원과의 하루하루가 내 안에서 점점 몸집을 키워 갔다.
덕분에 형의 목소리를 떠올리려 애써도, 차갑게 가라앉은 최기원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형의 향 대신 최기원의 향수와 체취에 먼저 코가 반응했고, 섹스를 떠올리면 따뜻하고 섬세한 손길보단 목 끝까지 틀어쥐는 압박감이 먼저 느껴졌다.
형을 먼저 보내며 벌어진 상처를 위로하는 척 다가온 그는 뜨겁게 달궈진 낙인으로 상처를 지지며 나를 위하는 척한다. 너무나 뜨겁고 고통스러운데.
그러나 무섭기만 하던 최기원의 얼굴이 가끔 풀어질 때가 있다. 언뜻 형의 따듯함이 보여 나도 모르게 안도하게 되는 그 표정. 바로 지금 같은 얼굴이었다. 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쑥 입술을 뗐다.
“…주언이는 잘 지내고 있대요?”
쉬어 버린 목소리로 요 며칠 동안 신경 쓰였던 것을 물었다. 어쩌면 이건 그가 말한 여우 짓일지도. 섹스 직후에 기분이 조금 누그러지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베갯머리송사를 시도했다.
내가 알기로 다음 주면 주언이의 4차 항암 치료 날이다. 아이의 컨디션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에 날짜가 미뤄지기도, 당겨지기도 했다. 치료를 제때 잘 받고 있는지, 나 없이 혼자서 무서워하고 있진 않은지 궁금했다. 그는 고개를 먼저 끄덕이며 가볍게 대답했다.
“네.”
“…….”
“원하면 내일 영상 통화나 한 번 해요.”
“정말요?”
순간 눈이 커졌다.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광대를 비죽이 올리며 웃어 버렸다. 그리고 그가 아까와 달리 미세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순간, 나는 너무 좋은 티를 내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입꼬리를 정돈했다.
“죄송합니다….”
그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돌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둑한 방 안에서 그의 벗은 뒷모습이 보였다. 넓은 어깨에 빼곡하게 들어선 근육의 그림자가 금세 걸친 가운 아래로 사라졌다. 이대로 방을 나가려는 그에게 얼른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 손바닥으로 시트를 밀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버겁게 일어서는 나를 내버려 두고 나가 버렸다.
오전에 일어나 최기원과 아침 식사를 했다. 예전보다 식사량이 늘었다. 처음에 이 집에 끌려왔을 때는 충격에 아파 제대로 음식을 못 먹었고, 그 뒤로 잘못 먹은 최음제 때문에 소화 기관이 약해졌다. 점점 말라 가던 나를 못마땅해하던 최기원의 호화로운 사육 덕분에 다행히 먹는 양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는 출근했고 나는 수업에 가기 위해 씻고 준비했다. 가방과 필기구가 든 가벼운 가방을 들고 문을 열고 나갔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사이로 꽃과 풀 내음이 물씬 느껴졌다. 겨울과 꽃. 전혀 어울릴 리 없는 두 단어였지만 바로 이곳, 잘 가꾸어진 정원은 사계절 내내 꽃이 탐스럽게 피었다.
무슨 약품 처리를 했는지 한겨울에도 노랗게 말라 죽지 않는 푸른 잔디 위로 상록수가 늠름하게 서 있었다. 겨울에 피는 꽃들은 푸르른 나무들 사이사이에서 화려하고 풍성하게 자태를 뽐냈다. 겨울 특유의 황량함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한 편의 전시 작품 같은 정원이었다.
청량한 냄새를 맡느라 빼어 냈던 코를 목도리 안으로 파묻었다. 대문에 도착하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카드를 눌러 안에서 잠긴 문을 열어 주었다. 문 앞에는 학교를 오갈 때 타고 가는 은색 세단이 정차되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
평소 같으면 조그만 목소리로라도 인사했을 텐데, 어제의 불쾌했던 기억 때문에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꾸벅 고개를 숙이고 차에 올라탔다. 그는 개의치 않고 문을 닫아 주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차 안의 적막이 유독 어색하고 숨 막혔다. 히터의 후끈한 공기까지 답답하게 쌓여 가 기껏 매었던 목도리를 다시 풀어냈다.
그때 진동음이 낮게 울렸다. 코트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 전화를 꺼내 알림 팝업 버튼을 눌렀다.
「백나언 학생. 오늘 정부 초청 행사가 잡혀서 급하게 휴강합니다. 미리 전달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
메시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미 강의를 듣기 위해 대학교로 이동 중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이 수업이 취소된 것을 그 누구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운전하는 경호원의 등 뒤를 바라보던 나는 표정을 정돈한 채 휴대 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교통 체증이 없는 도로 위를 은색 세단이 여유롭게 지났다. 인문 대학에 차가 정차하고, 경호원이 룸 미러를 통해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2시간 뒤에 이곳으로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네.”
잠깐 눈치를 살핀 내가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기. 커피 한 잔 사 먹게 만 원만 빌려주세요.”
“예?”
평소답지 않은 부탁에 그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에는 능숙하지 않은 난, 손바닥 안쪽에 축축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귀 역시 열이 올라 빨개진 것 같은데, 아마도 부끄러워 그런 것이라 생각해 줄 것 같았다.
“최기원한테 말해서 갚을게요. 목이 너무 말라서 그래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는 차의 글로브 박스를 열어 현금 뭉치에서 만 원을 뽑아 주었다. 저기에 현금이 한가득 있는 건 또 몰랐다. 만 원을 꼭 쥐고 차에서 내려섰고, 경호원을 의식하며 수업을 듣는 동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건물 안까지 들어온 나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계단참 옆의 창문에 멈춰서 고개를 빼, 차가 정차해 있던 위치를 살폈다. 잠깐 정차했던 차가 인문 대학을 여유롭게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서 조심스럽게 계단을 다시 걸어 내려왔다.
“후…….”
미어캣처럼 열심히 좌우를 살폈다. 은색과 비슷한 차가 한 대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대학교 정문을 뛰어나왔다. 얼른 대로변으로 가 사람들 사이에 섞였고 빈 차로 대기 중인 택시에 올라탔다.
2시간의 자유 시간. 처음에 떠올린 것은 주언이였다. 그러나 주언이의 병동은 해당 층에서 출입증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특실 병동이었고, 주언이의 상태를 최기원에게 보고하는 간병인도 따로 있었기에 함부로 갈 수 없었다. 결국 내가 택한 다음 행선지는 조암산 인근의 묘역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형이 안치된 곳이었다.
“도착했어요, 학생.”
“…아, 네.”
묘지는 학교에서 20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현금으로 택시비를 치르고 내려섰다. 건물과 매연, 어깨를 치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산의 입구로 오니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평일이라 더욱 한산한 산의 끝자락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사로만 읽어서 대충 주소만 알고 있었지, 정확한 묘의 위치는 몰랐으나 무작정 걸었다. 높지 않은 산의 입구를 지나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니 작은 벽돌집 한 채가 보였다. 그 집 앞에는 한 남성이 분주하게 농기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이대는 아버지 또래로 보였는데, 얼굴이 그을리고 모자를 쓰고 있어 정확하게 가늠하긴 힘들었다.
묘지로 올라가는 오솔길을 걸어가기 위해선 그를 지나쳐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던 나를 그 나이 든 남성이 불러 세웠다.
“어이. 잠시만요, 학생. 어디 가십니까?”
“네?”
“뭐 때문에 여기 올라가냔 말입니다.”
사투리도 아닌 것이 오묘한 말씨였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잠깐 형만 보고 오고 싶었는데…. 잠시 뜸을 들이던 내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지원 씨 조문 왔어요.”
“으잉. 연락받은 거 없는데. 그쪽이 누군데요?”
그러자 그가 걸음을 옮겨 어디선가 종이와 펜을 들고 왔다. 내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인제 보니 묘역을 향하는 바로 앞에 지어진 집도 그렇고, 그냥 이곳에 사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조문 갈 때 꼭 적고 가야 하나요?”
“예에. 묘역 관리인입니다.”
“아….”
“이름 말해 주세요. 전화번호랑.”
아저씨가 펜의 흰 뚜껑을 입에 문 채로 웅얼대며 다그쳤다. 잠시 입 안쪽을 깨문 내가 주먹을 그러쥐고 아무 이름을 말했다.
“박…철수입니다.”
“오옹…. 요새도 철수라는 이름을 쓰는 젊은이가 있나 보네.”
“그러게요….”
한번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니 밑도 끝도 없다. 아저씨가 ‘박철수’라는 이름을 휘갈겨 쓰더니 번호 칸으로 손을 슥 옮겼다. 될 대로 되어라 싶어 숫자도 아무 숫자나 말했다.
“공일공에 이칠팔사에 삼육이오요.”
“이칠팔사에… 뭐요?”
내가 뭐라고 했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대답했다.
“삼육오이요.”
“…아까 이오라고 하지 않았남.”
“아, 그랬나요…? 삼육오이입니다.”
역시 거짓말엔 젬병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목이 잡히니 얼른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저씨는 숫자까지 휘갈겨 쓰고는 묘를 향하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주변의 다른 조경물은 절대 훼손하지 말라는 당부를 남긴 아저씨는 설핏 치밀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허술했다. 내 이름과 번호가 적힌 명부를 한편에 버려두고 다시 농기구를 정리하기 시작한 아저씨가 은근하게 말을 붙여 왔다.
“최 전 사장님이랑은 친구요?”
“…네. 저랑 친한 형이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참 안타깝게 됐어. 부모님 묫자리라고 알아봐 둔 곳에 자기가 먼저 묻혔으니까. 에휴.”
예의상 잠깐 웃어 보인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거짓말을 하느라 잠깐 쿵쾅대던 마음도 어느새 숲의 고요함에 짓눌려 점차 가라앉았다.
그의 말대로 참 얄궂은 인생이었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형과의 마지막 전화를 떠올렸다.
-나언이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가려 그러지.
차가운 겨울 공기가 내려앉은 조암산의 건조한 공기가 싸늘했다. 유독 따뜻했던 형의 목소리와 나긋했던 말씨를 떠올리니, 혼자서 이곳에 있기엔 너무 춥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뭐가 그렇게 급했어. 이렇게 늦게까지 오지도 않을 거면서.”
발끝에 작은 돌멩이가 걸려 도르르 굴러갔다. 작은 혼잣말을 뱉은 난, 나의 안식처이자 유일한 친구였던 소중한 사람이 있는 곳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멀리서부터 동그란 묘가 보였다. 시선이 닿는 순간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회색빛 겨울 하늘 아래에 홀로 자리 잡은 형의 묘. 줄곧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
얼굴을 가린 목도리를 풀어내며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다. 멀거니 서서 형의 이름과 반석의 매끄러운 결을 차례대로 눈에 담았다. 시선이 뿌옇게 흐려지며 후드득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발갛게 얼어 가는 손가락을 들어 눈물을 걷었다. 잠깐 분명하게 보이던 묘가 다시 차오르는 눈물에 가려졌다.
형의 죽음도 한 달이 다 되어 가기에 가슴이 먹먹할지언정 울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차갑게 언 공간 속에서, 난 허무하게도 형을 잃은 첫날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내가 형을 제대로 추모한 적이 있었나. 곱씹어 보던 가슴이 까맣게 철렁였다. 형에게 면목 없지만 단언컨대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형이 죽은 충격에 하염없이 울었고, 이후엔 스스로 한계에 내몰릴 때만 형과의 옛날을 끄집어내며 슬퍼했다.
오롯이 형을 생각하고 명복을 기리는 것이 아닌, 내가 살겠다고 형과의 기억에 기대었던 것뿐이었다. 제때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이제야 쏟아 내고 있는 것이었다.
“흐, 윽. 미안해…. 늦, 으헝, 늦으, 흑, 미안. 으헝.”
뻐끔뻐끔 입술 사이로 울음 반, 목소리 반이 흩어졌다.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 정말 엄마 잃은 7살처럼 엉엉 울었다. 가슴에 켜켜이 묵힌 많은 말들 중에서 내가 형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건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어제 밤에도 형의 동생 밑에서 개처럼 기었어.
우리의 5년을 망친 건 죽은 형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야.
떳떳하지 못한 사람을 마지막 연인으로 둬 버려서. 형을 보러 오는 것도 남의 눈을 피하고 시간을 쪼개야 했어.
평생 갚아도 모자랄 죄를 하루하루 짓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혀에 차가운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더러운 말들을 머릿속으로만 되뇌었다.
“왜, 왜 으흑, 왜 이러헝, 이렇게, 끅, 됐을까….”
겨울바람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차갑게 맺혔다. 히끅거리던 나도 서서히 울음을 그쳐 갔다. 속에 있던 울음까지 모조리 끄집어내서 울어서일까. 조금은 후련해진 마음으로 형의 묘 옆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흘러가는 구름, 혹은 흔들리는 풀잎 끝에 멍하게 시선을 두며 시간을 죽였다. 눈에 거슬릴 것 없는 너른 부지였다. 수피가 멋진 나무가 묘 주변을 둥그렇게 서 지키고, 소담한 언덕이 내려다보여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간간이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눈물에 젖고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식혔다.
휴대 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가볍게 몸을 일으키고 풀어놓았던 목도리를 단단하게 동여맸다.
“이제 갈게.”
말라 버린 입술을 윗니로 꾹꾹 누르며 동그란 묘에 대고 혼잣말을 이어 나갔다. 담담한 목소리 주변으로 작은 온기를 품은 입김이 하얗게 번졌다.
“또 언제 올지는 모르겠어.”
나에게 만약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게 어디든, 언제이든.
“…제일 먼저 올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여전한 내 안식처여서 고마워.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올라온 길을 거슬러 내려갔다. 다행히도 관리인 아저씨가 잠깐 자리를 비워 빠져나오는 것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산 입구에선 택시가 잡히지 않아 길을 따라 걷다 지나가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인문 대학동으로 들어선 나는, 원래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천천히 건물 입구로 내려갔다.
형을 보고 온 것이 아주 깊은 꿈이었던 것처럼 은색의 세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잠깐 눈을 붙였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다이닝룸에서부터 시끌시끌한 소리가 올라왔다. 선잠을 잤기에 눈을 뜨고 슬리퍼에 발을 꿰었다. 계단을 내려와 거실 소파에 미리 앉아 있었다. 차고로 차가 진입할 때 한 번, 그리고 최기원이 대문을 통과하고 정원을 지나 현관에 다시 도달할 때에 한 번, 총 두 번의 음성 알람이 울렸다.
“…오셨어요.”
그가 오는 걸 알고 있는데 앉아 있기가 뭣했다. 쭈뼛대며 일어나 복도 쪽으로 나아갔다. 최기원은 아래위로 검은색 셋업 슈트를 차려입고 셔츠 위엔 푸른색의 넥타이를 차고 있었다. 복도의 조명 빛을 받아 넥타이핀의 끝부분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느리지만 보폭이 넓은 최기원은 성큼성큼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네, 직접 확인하죠.”
“…….”
짧게 끊어지는 차가운 목소리가 가까이 들려오며 그가 내 옆을 지나쳤다. 그리고 순간 최기원의 서늘한 눈과 내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짙은 눈썹과 눈동자가 내 얼굴을 훑고 느리게 돌아갔다. 인사한 것이 머쓱하게도 그는 아는 체 한 번 없이 싸늘하게 내 앞을 지나가 버렸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코트 끝에서 묻어 나온 겨울의 냉기와 알싸한 향수의 잔향이 남았다.
오늘은 그의 퇴근이 조금 늦은 탓에 그는 옷만 편하게 갈아입고 식탁으로 왔다. 한쪽 이마가 보이게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있는 최기원은 오전에 마주 보며 식사를 했던 모습과는 또 다른 인상이었다.
그는 차로 가볍게 입을 적시고 곧장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도 역시나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는 푸짐한 식탁 앞에서, 포크를 허망하게 헤매다 샐러드부터 집어 먹었다.
메인 메뉴는 양 갈비 스테이크였다. 최기원이 하는 것을 한 번 보고, 그를 따라 부드러운 고기를 나이프로 조금씩 잘라 내어 소스에 찍어 먹었다. 가니쉬로 담아낸 새송이버섯의 고소함과 망고 샐러드의 상큼한 향도 양고기와 잘 어울렸다.
오늘도 참으로 조용하고 숨 막히는 식사 시간이었다. 단단한 그릇 위를 날카로운 나이프가 서걱서걱 지나치는 소리가 어쩐지 날카롭게 들렸다. 최기원이 칼집 낸 양고기를 썰어 내며 나에게 질문했다.
“오늘 수업은 어땠어요.”
교수님과의 수업이 있는 날이면 늘 최기원이 묻던 것이었다. 대답도 미리 생각해 두었다. 너무 빠르게 대답하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기에 나는 입 안에 든 것을 규칙적으로 씹으며 할 말을 되뇌었다. 원래 식사할 때에 눈을 잘 맞추지 않았기에 나는 눈앞에 놓인 노란 망고 조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유익했어요.”
“뭐가 유익했는데?”
“그냥… 재밌었어요. 미술 역사나 기법이나.”
평소에도 수업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했기에 늘 대답하던 것처럼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손 속에서 포크를 만지작대다 망고 조각과 양배추를 함께 찍어 입에 넣고 씹었다. 이쯤 되면 최기원이 한마디 할 법한데도 그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눈동자만 움직여 마주 앉은 최기원을 바라보았다.
“…….”
“…….”
그는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고기를 먹기 좋은 한 입 크기로 썰어 내는 소리가 끼긱, 끼긱 들렸다. 최기원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썬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요?”
되묻는 걸 싫어한다던 그가 웃으며 되묻는다. 홀린 듯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본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기원이 손 속에서 나이프를 빙글 돌렸다.
“나한테도 이야기해 봐요.”
“…?”
“네가 재밌게 들은 거. 나한테도 말해 보라고.”
꿀떡.
샐러드를 힘겹게 삼켰다. 까칠한 반말에 놀라 잠깐 얼어붙은 사이 불시에 시선이 얽혀 들었다. 나는 그 시선에 발이 매여 회색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뭐야.
뭐지.
지원이 형 보고 온 걸 아는 건가.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정말 아무에게도 들킬 일이 없는 두 시간이었다. 문자 메시지도 지워 버렸고, 경호원 또한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은 건가. 그래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나는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하는 거지.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발작적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입술은 웃고 있는데 가라앉은 눈동자는 하염없이 까맣기만 했다.
초조해진 낯빛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앞접시의 음식으로 시선을 떨구며 대답했다.
“기억이 잘….”
“몇 시간 전에 배운 게 기억이 안 난다고?”
서걱서걱. 그가 다소 거칠게 스테이크를 썰었다. 어이없네, 라는 말을 읊조리는 서슬 퍼런 목소리에 나는 주먹을 그러쥐며 떨려 오는 손을 감췄다.
최기원은 칼질을 하며 자꾸 웃었다. 처음 만난 날, 지원이 형을 입에 올리며 이죽거렸던 그 얼굴 그대로.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린 채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씹새끼가 노망이 났나. 도대체 뭘 가르친 거지?”
욕을 하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아직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단순히 수업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게 화가 난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설마 무언가를 알고서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 저런 어깃장을 두는 것인가.
대화의 맥을 잡기 위해 갈팡질팡하는 사이 그가 와인 잔을 들어 남은 레드 와인을 모조리 들이켰다. 침묵 속에서 식사가 멎었다. 식탁 한가득 차려진 갖가지 음식은 하릴없이 식어 가고, 겨우 먹은 것이 역류하며 목을 틀어막을 것 같은 무거운 분위기가 자욱했다.
최기원은 빈 잔을 내려놓고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았다.
“내가 부탁했는데 겨우 이 정도 수준으로 가르쳐 놓은 거면 그 새끼가 나를 무시하는 건데.”
“……아니,”
아무 잘못 없는 교수님이 노망 소리를 듣게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그의 말을 끊었다. 그가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며 나와 눈을 똑바로 맞추었다.
“왜? 혹시 네 쪽이 구제 불능인 건가.”
빈정거리는 목소리 끝이 나를 향했다. 참담한 기분이었으나 차라리 그가 나를 원색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나았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사과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 기억이 안 나는 것이지, 절대 교수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그가 더 폭발하기 전에 변명을 덧붙이려고 입술을 달싹이는데 최기원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가 식탁을 느린 걸음으로 돌아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몸을 살짝 뒤로 물리는 순간 우악스러운 손길이 팔뚝을 잡아챘다. 그는 그대로 나를 끌어당겼다.
“아…!”
엄청난 악력이었다. 내가 그보다 덩치가 작을지언정, 나도 성인 남성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한 손에 맥없이 식탁에서 끌려 나왔다. 바닥으로 수저가 떨어지며 쟁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왜, 왜 이래요…!”
“머리채 잡혀서 끌려가기 전에 입 다물어요.”
그렇게 그는 나를 붙잡아 복도와 거실을 가로질러 내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끌었다. 그의 넓은 보폭에 주춤대며 끌려가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허우적댔다. 그는 내가 바르작대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무작정 계단 위로 끌고 가는 탓에 몸의 균형이 무너지며 무릎과 정강이가 계단 면에 마구잡이로 부딪혔다.
“아. 아파요… 윽, 잠시만!”
질질 끌려가던 나는 가까스로 붙잡히지 않은 팔을 뻗어 계단의 기둥을 꾹 붙잡고 버텼다. 달달 떨리는 손끝이 노랗게 변할 만큼 힘을 주고 나무 기둥에 매미처럼 몸을 꾹 말았다.
지금이라도 털어놓아야 할까? 가슴을 들썩이며 머리를 굴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분노의 원인을 모르겠기에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정말 내가 머리가 안 좋아서 그가 화가 난 걸 수도 있다.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비난하고, 아파서 자는 것도 게으르다고 욕했던 사람이니까.
조금 속상하지만, 최기원은 단순히 내 멍청함에 화가 났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시답잖은 이유에 대고 내가 내 입으로 지원이 형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간 불난 집에 강풍기를 틀어 놓는 꼴이 될 수 있었다. 일단은 모른 척할 생각으로 잡아뗐다.
“왜 갑자기 화, 화내시는지 모르겠어요….”
“일어나.”
“왜….”
“또 약 처먹고 매달려서 갈래?”
짓씹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약…. 몇 주 전 겪었던 끔찍한 기억은 단 한순간도 흐려지지 않았다. 최기원의 앞에서 수치스럽게 허리를 흔들고, 낯선 경호원에게 희롱까지 당했다. 먹고 난 다음 날이면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고 속이 끔찍하게 뒤집어지는 그 약.
협박에 몸이 흠칫 굳고 눈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약을 먹는 건 끔찍하게 싫었다. 계단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기둥을 붙잡은 난, 멍한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그의 눈과 턱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일어나.”
그는 나에게 다시 한번 차갑게 경고했다. 마치 마지막 유예를 선고하는 듯한 서늘한 목소리였다. 난 구명줄처럼 붙들고 있던 기둥을 놓고 훌쩍이며 땅을 짚었다. 최기원이 문을 향해 건조한 턱짓을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들어 일어섰다. 계단을 비틀거리며 한 칸씩 겨우 올라가는 동안 최기원은 천천히 내 뒤를 따라 올라왔다.
“흐, 윽.”
닫혀 있는 방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숨을 시근덕거리며 문고리를 돌렸다. 잠깐 행동을 멈추고 뜸을 들이는 사이 그가 내 등을 떠밀었다. 주춤대는 걸음이 방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허망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나의 뒤로 최기원이 들어왔다.
문이 닫히고 달칵, 잠기는 소리가 났다. 저녁이 되어 커튼을 쳐 놓은 방 안은 암실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있는 쪽을 향해 뒤돌아서는 순간 큰 손이 다가와 내 턱을 틀어쥐었다.
“야 이 병신아.”
최기원이 턱을 잡은 손을 아프게 흔들었다. 심장이 마구잡이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할 거면 좀 성의 있게 해.”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마치 암흑 같은 이 방처럼, 내 머릿속도 까맣게 물들어 버렸다.
뺨을 붙잡은 손에 악력이 더욱 세게 들어갔다. 고통에 아래턱이 벌어지고, 나는 그의 손목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너무나 차가운 손목 위를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감싸 쥐었으나 그는 손에 들어간 힘을 풀어내지 않았다. 턱이 부서질 것처럼 아파 왔다.
발밑이 아득해진다.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혹시 교수님에게서 따로 연락이 간 건가. 하지만 분명 모든 연락은 나와 직접 한다고 들었다. 2주 동안 수업 시간이 조금씩 조정되거나 날짜가 옮겨졌을 때도 교수님은 다이렉트로 나에게 연락했지, 최기원이 그걸 일일이 알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최기원은 정확히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올렸다.
그가 눈치챈 이상, 그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차후의 문제였다. 숨이 가빠 오며 눈동자에 겁이 스며들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사죄했다.
“아, 윽 죄송…해요.”
눌린 볼 사이로 찌부러진 입술에서 어눌한 발음이 흘렀다.
내 사과를 듣자마자 최기원이 웃었다. 고개를 젖히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더니 턱을 붙잡은 손을 떼어 냈다. 턱이 박살 날 것 같은 고통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뺨이 돌아갔다.
“…!!!”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뺨을 맞았지만, 주먹으로 얼굴을 쥐어 터진 것 같은 통증이었다.
충격에 잠시 이명이 울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바닥을 짚은 채로 숨을 겨우 몰아쉬자 바닥에 무언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물씬 풍기는 비릿한 향에 그것이 코에서 흘러내린 피라는 것을 깨달았다.
맞으며 혀를 잘못 씹어 입 안에도 새빨간 피가 터졌다. 삼켜 내지 못한 것들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사채업자들에게 납치당해 얻어맞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트레이너가 지구력이 떨어지는 나를 향해 들으란 듯이 늘어놓는 최기원의 칭찬이 있었다. 야근이 끝나고 나서도 운동을 꼭 하러 와 몇 시간씩 MMA 스파링을 뛰고 간다고 했다. 여태껏 툭툭 뺨을 맞았던 건 그가 참 많이 봐주고서 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살면서 이렇게 아프게 맞아 본 적이 없어 순식간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내가 고개를 숙인 채로 헐떡이기만 하자, 최기원의 인내심이 다 닳은 모양이었다. 머리채가 잡혔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두피가 세게 당겨졌다. 그가 내 머리채를 당겨 강제로 눈을 맞추게 했다. 목이 과하게 꺾여 시선이 비틀렸다. 그가 이를 악다물고 짓씹듯 따져 물었다.
“뭐가 죄송한데.”
“거짓, 흑, 마알… 했, 어요….”
눈에선 눈물이, 코와 입에선 피가 뚜욱 뚝 흘렀다. 발음이 몽땅 젖어 버려 엉망이었다.
“갑자기, 휴강 돼서, 으, 혀, 형…한테 으흑, 가, 갔다 왔어요…….”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얼굴이 부어올라 눈 아래가 화끈하고 무겁게 차오르는 느낌이 선연했다. 최기원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채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다봤다. 그의 입매가 차갑게 비틀렸다.
“최지원이 보고 싶었어?”
“……으흑.”
“응? 걔가 그렇게 좋아?”
대답하지 못하고 울음만 쏟아 내는 나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과 코피를 문질러 닦았다.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맞은 눈가와 뺨이 욱신댔다. 아무래도 잘못 맞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기원은 숨죽이고 떨고 있는 나를 향해 잔뜩 빈정대는 목소리를 흘렸다.
“씨발 진작에 뒤졌잖아. 그래도 좋아? 보고 싶어 죽겠어?”
“으, 흐윽.”
“네가 오늘 갔던 그 무덤 파헤치면 다 문드러져서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 최지원이 들어 있을 거야. 가서 그거 껴안고 살지 왜 이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 뜨신 밥을 처먹고 있어. 가증스럽게.”
시근덕대던 내 숨이 가늘게 떨렸다. 다른 말은 들을 수 있었지만 저 말은 아니었다. 어떻게 지원이 형을 저런 식으로 모욕할 수 있는가. 나는 자꾸만 울컥, 울컥 쏟아지는 코피를 손등으로 걷으며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최기원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비딱하게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돈 필요하면 내 좆 빨고. 배고프면 내가 차린 밥 처먹으면서 무슨 낯짝으로 거기까지 갔는지.”
뻔뻔한 새끼. 그가 욕을 뇌까리며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툭, 툭 밀었다. 그의 손이 이마를 누를 때마다 고개가 뒤로 힘없이 꺾였다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뻔뻔하다는 그의 말에 도무지 할 대꾸가 없었다.
나는 그가 밀면 밀리는 대로, 그저 바닥에 쓰러져 피가 흐르는 얼굴을 내버려 뒀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눈물은 뺨 위로 길을 만들지도 못하고 방울져 바닥으로 하염없이 떨어졌다.
“이 앙큼한 머리통으로는 뒤진 최지원만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나는 또 좋다고 좆을 발딱 세웠네. 자존심 상하게.”
“…….”
“너 오늘 바람피운 거야.”
그의 목소리가 짐짓 가라앉았다.
‘바람….’
이질적인 단어를 듣자마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둠에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한 눈이 최기원을 천천히 담아냈다.
원래 눈꼬리가 올라가 차갑고 무서운 인상을 풍기는 그의 눈썹이 미묘하게 내려가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선 살벌하게 느껴지는 분노 대신,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처연함이 묻어 있었다.
정말 어이없게도 그는 나에게 상처받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우리 둘이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을 리 없음에도, 그는 왜 자꾸 나를 진심으로 연인처럼 대하는 것인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겠는 건 최기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는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 위로 불거진 핏줄이 어둠보다 더 짙은 그림자를 그려 냈다.
백나언. 그가 매듭진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야.”
“예…?”
“내가 네 동생한테 돈 퍼붓는 게 자선 사업인 줄 아느냐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가 빌어먹을 아버지의 채무 육천만 원을 갚아 주고 동생의 병원비를 책임지겠다고 말하던 순간, 조건처럼 내건 것이 있었다.
-말 잘 들으면 계속 예뻐해 줄 거예요.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 나는 미움받을 행동을 하고야 말았구나. 뒤늦게 4차 항암을 앞둔 주언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말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2주간 최기원과 큰 트러블이 없었기에 너무나 안일하게 생각했다.
내 주제도 모르고, 내가 어떤 각오를 가지고, 그의 말대로 무엇을 바라며 죽은 형을 배신하고 최기원의 집으로 들어왔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뒤늦게 가슴이 차갑게 저려 왔다.
나는 퍼질러 앉은 자세를 얼른 고쳐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열심히 조아리며 죄송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죄, 으흑, 죄송해요. 정말…, 다시는… 바, 바람… 안 피울게요…….”
이미 속눈썹이 푹 젖을 만큼 축축해진 눈에서 말릴 새도 없이 후둑 눈물이 터져 흘렀다. 고개를 아래로 숙일 때마다 부어오른 눈에 안압이 올라 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욱신거리는 통증에도 개의치 않고 나는 이마를 거의 땅까지 박아 댔다.
차가운 손이 이마와 바닥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는 내 얼굴을 부드럽게 들었다. 이마를 지난 손이 귀를 한 번 훑고 턱으로 내려왔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내 턱을 아래에서 위로 들어 올린 그가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참으로 표정을 읽기 힘든 얼굴이었다. 나는 히끅거리며 그의 손에 얼굴을 맡겼다.
“이번 달에 동생은 못 봐요.”
절망에 순식간에 미간이 일그러졌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눈앞의 최기원의 부드러운 압박에 한마디도 하지 못하겠다.
“흐….”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 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최기원이 엄지를 들어 부어오른 뺨을 문지르자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넓게 번졌다. 그는 한 손으로 내 얼굴을 받친 채, 조금 헐겁게 풀었던 넥타이를 마저 다 풀어냈다.
“개새끼는 잘못 없다, 프로그램 알죠?”
다시 부드러운 존대로 돌아온 최기원이 나에게 뜬금없는 것을 물었다. 이름이 조금 다른 것 같았으나 울음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기원은 마치 개의 턱을 간지럽히듯 내 턱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긁으며 말했다.
“개새끼가 신나서 바깥 구경하고 온 게 무슨 잘못이겠어요.”
“…….”
“주인이 목줄을 똑바로 채웠어야지.”
턱 아래를 간지럽히던 손을 아래로 내린 최기원이 내 손을 붙잡았다. 얼결에 그에게 손을 잡힌 나는 그가 하는 행동을 멍하게 바라만 보았다. 한쪽 눈썹을 장난스럽게 끌어 올렸다 내린 최기원이 땅을 짚고 있던 내 두 손을 한 손으로 가볍게 쥐었다. 손목 안쪽끼리 마주 보게 붙이고는 풀었던 넥타이를 부드럽게 감았다.
“……?”
손목 위를 두 번 돌아간 푸른 넥타이가 어느새 단단한 매듭을 만들었다. 겉면이 매끄러웠으나 손목이 꽉 조이며 묶여 피가 살짝 통하지 않는 아릿한 느낌이 들었다. 최기원이 굽혔던 한쪽 무릎을 세우며 천천히 일어섰다. 엉거주춤 따라 일어선 나는, 그가 묶인 매듭을 질질 끄는 동선에 따라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를 서랍이 딸린 책상 앞으로 데려갔다. 최기원이 서랍을 열었다. 원목 책상 서랍 안에는 서랍의 입구를 잠그는 용도로 보이는 자물쇠가 들어 있었다. 최기원이 제 손가락에 걸려 있는 넥타이 매듭을 서랍 가까이로 당겼다.
최기원은 넥타이 매듭을 책상 서랍의 자물쇠 구멍에 쑤셔 넣어 한 번 더 묶고, 내 손목을 옭아맨 매듭과 서랍 구멍에 동시에 자물쇠 고리를 걸었다. 총 세 번의 결박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내가 손목을 비틀며 저항하려 했으나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린 손목은 넥타이와 쇠고리에 아프게 부딪히며 발간 상처만 피어올랐다.
“아, 제, 제발…. 잘, 못했어요….”
“응. 네가 잘못한 거 나도 알아.”
달칵. 자물쇠 아가리가 꾹 눌리며 잠겼다. 묶인 손목을 마구 흔들었지만 커다란 책상에 눌려 있는 서랍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는 나올 것 같지 않던 눈물이 다시 터져 흘렀다. 이미 시퍼런 멍이 올라온 광대뼈 아래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흐으, 으으, 윽.”
“당분간 얌전히 있어, 벌이야.”
그의 말대로 정말 목줄 채운 개 꼴이었다. 어중간한 높이에 손목이 묶여 엉거주춤 허리를 굽히고 있던 나는 결국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서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니 아직 그의 얼굴에 서린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차가운 얼굴에서 느른한 만족감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도…, 저 진짜 으흑, 3주 동안 잘했잖아요. 네?”
“나야 모르지. 거짓말 잘하는 강아지가 또 어떻게 뒤통수쳤을지.”
“저어 흑, 진짜 잘했는데 으흑….”
그가 시키는 대로 음식도 최대한 많이 먹으려 노력하고, 운동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했다. 가끔은 정말 용기를 내서 출근하는 그를 배웅하거나 그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마중도 나갔다.
몸이나 아래에서 냄새가 나지 않게 항상 샤워도 꼼꼼하게 하고 코롱도 머리가 아플 정도로 뿌렸다. 교수님이 내 주는 논문 해석 숙제도 열심히 풀었고, 가끔 최기원이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나에겐 어렵기만 한 미술 서적 독서도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섹스할 때에는 싫은 티를 안 내려 노력했고, 3주 동안 다리를 벌리며 피가 비칠 때에도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그도 내가 얼마나 고분고분하게 굴었는지 잘 알 것이다. 그렇기에 분명 오늘 주언이와 영상 통화도 시켜 준다고 말했고.
“다음 주에 주언이, 주언이 보여 주기로 했잖아요……. 걔 저 없이 항암 치료 못 받아요. 제발… 진짜 다시는 다시는 지원이 형 생각 안 할게요. 말, 잘 들을게요…….”
쾅, 그가 주먹을 쥐고 책상을 내려쳤다. 어마어마한 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애원하던 목소리가 뚝 끊기고, 난 솜털이 곤두선 채로 바르르 떨었다.
“너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최지원 이름 올리지 마.”
일말의 온도도 남지 않은 얼음장 같은 목소리였다.
퉤. 최기원은 내가 앉아 있는 바닥에 침을 뱉어 버리고 뒤돌아 나갔다.
문이 닫혔다. 아무리 손목을 당기고 비틀어도 서랍에 매인 매듭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커다란 방은 내가 훌쩍이는 소리만 객쩍게 울렸다.
미친 새끼, 나쁜 놈…. 또라이 새끼.
쭈그리고 앉은 채로 무릎에 이마를 파묻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가슴을 마구마구 할퀴는 것처럼 아파 왔다.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악문 잇새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서러움이 비집고 나왔다.
“으헝, 으으, 주언아…, 으흑, 으흐엉 어떡해…….”
잘못을 저지른 건 난데, 형벌의 끝은 아픈 아이의 목숨줄을 가리켰다. 그 어떤 것보다 가혹하고 잔인한 선고였다.
손목이 묶인 지 두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짙고 어두운 밤이 되었다. 방에 남겨진 난 한 시간 내내 훌쩍였다. 조심스레 최기원의 이름을 불러 보기도 했고 쥐 죽은 듯이 눈을 감고 버텨 보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방을 찾지 않았다.
다시 한 시간이 흐르자 어느덧 눈물은 그치고, 코와 입에서 흘렀던 피도 멎어 얼굴 주변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매듭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손목을 열심히 비틀어 보았다. 그러나 묶인 매듭 위를 자물쇠가 다시 틀어 잠그고 있기에 찢어 버리지 않는 이상 자의로 풀 수 없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묵직하게 저려 왔던 손목 위는, 이제 빨갛게 쓸린 자국과 멍이 남아 쓰라린 통증을 피워 냈다.
몇 번 더 팔을 흔들어 보다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힘 빠진 시선 끝에 최기원의 파란 넥타이가 닿았다. 상처 하나 없이 길고 곧은 손가락이 유려하게 넥타이를 돌려 묶던 순간이 떠오르며 순식간에 자조적인 혼잣말이 터졌다.
“풀어서 뭐 해.”
최기원이 직접 묶었다. 그리고 당분간 얌전히 있으라고 말했다. 행여 온갖 방법을 써서 가까스로 이 매듭을 풀어낸다고 한들, 다음은 무엇인가.
저 방문을 열고 나간다?
최기원의 방으로 가 노크를 하고, 그의 침실에서 다시 한번 사과하는 것?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기에 저건 또 다른 이름의 반항일 뿐. 쭈그리고 있던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책상 서랍에 등을 기대고 앉아 저린 다리를 쭉 펴고 눈을 감았다. 어느새 눈물과 피에 젖은 얼굴이 무덤덤하게 가라앉았다.
“…….”
이제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가 가늠 가지 않는다. 여기서 포기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어떻게든 최기원에게 돌아가 그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애써 보아야 하는지. 하지만 그의 위압적인 얼굴 앞에서 나는 사과 한마디라도 제대로 뱉어 낼 수 있을까. 멍청하게 말이나 더듬는 모습에 괜히 그의 화만 더 돋울 것이다.
내가 내쉬는 숨소리를 들으며 몸에 힘을 빼고 늘어졌다. 어둑한 방 안은 상념이 몸집을 키우기 좋은 곳이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어디선가 들어 보았던 속설이 하나 떠올랐다.
유리병 안에 갇혀 사육된 벼룩은 병을 치우고 나서도 유리병의 높이까지밖에 뛰지 못한다는 이야기. 그 속설은 주로 도전하기 두려워하는 인간의 실패에 길들여진 모습을 비판할 때에 인용되곤 했다.
그런데 벼룩은 왜 거기까지밖에 뛰지 못할까.
갓 태어나 힘이 넘치는 벼룩은 처음에는 뛸 수 있다는 행복에 젖어 이곳저곳을 향해 도약해 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유리병 안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힘껏 뛰어 보았다가, 딱딱하고 차가운 벽에 부딪혀 아프게 떨어졌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추락은 벌레에게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이고, 머리 위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언제 어디서 자신을 강타할지 모르는 두려움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벼룩은 몇 번 더 뛰어 보았을 수도 있다. 이러면 아플 텐데. 혹시 이 정도는 다칠까 하며 한계를 가늠해 보다, 서서히 제 질긴 자신감이 어처구니없는 객기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타격과 실패가 반복된다면 언제까지고 행할 순 없다. 그러니까 병을 치우고 나서도 그 높이까지밖에 뛰지 못하는 벼룩은 바보가 아니다. 그저 유리 벽에 부딪히면 죽을 수도 있는, 머리에 상처를 달고 있는 작은 벌레일 뿐이다.
“…….”
벼룩은 최선을 다해 유리병의 높이를 가늠해 보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이곳에 묶여 몸을 웅크리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한심한 합리화였으나, 나는 잠깐이라도 아픔을 피해야 했다.
***
잠을 자기는커녕 편하게 졸 수조차 없는 자세였다. 조금만 몸을 움직이려 하면 묶인 손이 동선을 방해했다. 어제 최기원에게 끌려 올라오며 부딪힌 정강이와 무릎도 시간이 지날수록 파랗게 부어올랐다.
그가 시키는 대로 여기에 묶여 있을 생각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최기원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시는 거짓말 안 할 거야, 다시는….’
최기원이랑 마주 보고 양고기를 썰어 내던 순간의 숨 막히는 정적. 그의 무시무시한 악력과 도망칠 곳 없는 밀실에서 맞닥뜨린 폭력. 몇 시간 전을 생각하면 자꾸만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져 오며 숨이 턱턱 막혔다.
“후, 으….”
눈을 질끈 감으며 겨우 숨을 뱉어 냈다.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켜고 내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가 몰려들었다.
‘아, 안 돼……. 정신 차려.’
그리고 모든 걱정의 끝은 주언이를 향했다. 이대로 몇 날 며칠을 갇혀 있는 것이야 그래, 뒷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저지른 제 잘못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항암 치료를 앞두고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주언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멍청한 형 때문에 홀로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어스름한 새벽의 빛이 커튼 밑으로 번질 때까지 주언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겨우 눈을 붙였다. 찰나 동안 꾸벅꾸벅 졸던 난, 내 무게에 휘청이다 손목에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
“…씨.”
그리고 인상을 쓰며 빌어먹게 튼튼한 넥타이를 바라본 순간, 방문이 활짝 열렸다.
“일어났어요?”
최기원이 방을 찾은 건, 정확히 우리가 주말에 아침 식사를 함께 하던 시간이었다. 애초에 잠을 자지 못했으니 일어난 건 아니지만, 나는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육성과 묵직한 존재감에 다시 덜컥 목이 조여 왔다.
최기원은 짙은 갈색 테 안경을 끼고 편한 베이지색 니트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세팅하지 않은 검은 머리가 자연스럽게 이마를 덮었고 한쪽 손에는 머그잔, 다른 손에는 서류 한 뭉치와 회색 노트북이 들려 있었다. 느른한 입꼬리에는 희미한 미소도 딸려 있었다.
언뜻 보면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편안한 차림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남긴 그가 나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오늘 그에게선 익숙한 향수 향이 아닌, 내가 쓰는 보디 클렌저 향이 연하게 풍겼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를 지나쳐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착, 소리와 함께 겨울의 노란 햇살이 방 안으로 앞다투어 쏟아졌다. 밝아진 방 안은 어제의 흔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내가 끌려간 자리를 따라 방울져 떨어진 피와 흐트러진 침대보, 비틀린 서랍이 처참하게 늘어져 있었다.
태양의 낮은 고도 때문에 바닥 가까이까지 스며드는 햇살은 내 정수리와 눈가에 집중적으로 흩어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며 책상이 만들어 낸 그림자 아래로 꾸물꾸물 이동했다. 나를 내려다보며 최기원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들렸다.
무서운 것을 티 내지 않고 싶었으나 몸이 간헐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과 은근하게 풍겨 오는 커피 원두의 향, 조금은 누그러진 최기원의 표정은 어제 어둠 속에서 주먹을 휘두르던 미친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최기원은 저런 가식적인 모습은 언제든 벗어 버리고 어떻게 돌변할지 모를 정신 나간 인간이란 것을.
최기원은 내가 묶여 있는 책상 위에 짐을 내려놓고 의자를 꺼내 앉았다. 나는 그가 움직이는 데 거슬리지 않도록 다시 엉덩이를 옆으로 움직였다. 순간 팽, 하며 손목이 당겨져 깜짝 놀랐다. 혹시 그 움직임을 묶인 것에 대한 항의로 해석할까 싶어 얼른 최기원의 표정을 살폈다.
최기원은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 입 들이켰다. 그는 나에게는 시선 한 번 두지 않고 입을 열었다.
“뭘 자꾸 흘긋거려.”
“…….”
“눈치를 보는 거야, 눈치 본다는 티를 내고 싶은 거야.”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최기원이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나를 내려다봤다. 안경 유리알이 그의 비딱한 시선을 한 번 차단해 주었지만, 여전히 회색의 동공은 나에게 어렵기만 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떨구었다.
“반성은 좀 했고?”
밤사이에 내 잘못을 수천 번은 곱씹었다. 반성이라면 뼈에 사무치도록 했기에 다시 한번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소리 내서 대답을 해요.”
짓씹는 듯한 어조에 퍼뜩 어깨를 움츠린 나는 얼른 입술을 열었다. 피딱지가 말라붙은 입술이 버겁게 벌어졌다.
“네, 네….”
“…….”
그는 고개를 돌려 서류 더미 중 하나를 들더니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나는 용기를 쥐어 짜내 한 번 더 사과를 남겼다.
“다, 다시는, 안 그럴 거예요. 죄송해요.”
“그래요. 나도 예쁜 얼굴에 멍 자국 내고 싶지 않으니까 앞으로는 맞을 짓 하지 마요.”
“…네.”
차가운 옆얼굴에 대고 주언이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다 끝내 포기했다. 별다른 대화 없이 최기원은 노트북을 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발치에 앉아 그가 주기적으로 넘기는 종이 소리와 타닥대는 타자기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창 최기원이 일에 집중하고, 나도 바닥의 대리석 무늬를 열심히 세어 보던 중 머리맡에서 진동음이 들려왔다. 내 휴대 전화에서 나는 소리인가 싶어 잠깐 고개를 돌렸으나 이내 내 휴대 전화에는 전화 수신 기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의 진동이 더 울리고서야 몰두했던 일에서 겨우 빠져나온 최기원이 손을 뻗어 제 휴대 전화를 들었다. 발신인을 확인한 최기원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집중이 흐트러진 것이 거슬린 걸까, 그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한 것이 나도 아닌데 덩달아 숨을 죽였다. 방 안이 워낙 조용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통화 소리에 집중이 되었다.
[어제부터 설사를… 환자가 보호자를 찾는….]
환자라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들렸다. 최기원은 무감한 표정으로 서류를 읽으며 대답했다.
“보호자는 못 갑니다. 잘 설명해 주세요.”
[…데, 호흡기를 잠깐… 어린 환자라….]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몸 상태가 그딴 걸로 좋아지면 세상에 불치병이 왜 있겠어요?”
빈정대는 말씨에 아득한 불안감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쭈그리고 있던 몸을 편 나는 무릎걸음으로 최기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손목이 비틀릴 만큼 몸을 틀어 최대한 최기원이 들고 있는 전화기에 귀를 가까이 하려 애썼다. 서류를 보며 통화하던 그가 뒤늦게 나의 인기척을 느끼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는 무슨 짓이냐는 무뚝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뻔뻔한 얼굴에 기가 찼다. 누가 들어도 주언이에 대한 통화 내용이었다.
“주, 주언이예요…? 아프대요?”
그가 대답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책상 위에 엎었다. 나는 목을 빼어 끊어진 전화를 확인하려 애쓰다 허망한 시선을 그대로 최기원에게로 옮겼다.
“네…? 아프대요?”
“급성 장염 때문에 컨디션 난조가 왔대요. 큰일은 아니고.”
최기원의 대답에 속이 아득해졌다. 염증성 질환은 종종 아이를 괴롭히곤 했다. 하지만 안심할 것은 아니었다. 감염은 큰 병으로의 징검다리라고도 불렸다. 특히 항암을 앞둔 이 시기엔 건강과 정신력 관리가 최우선이었다.
“주언이가 저 찾는다고 하죠…?”
“네.”
무심한 대답과 함께 그는 손 속의 종이를 넘겼다. 나는 그의 모습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다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그… 다음 주에 항암 치료 받을 수 있대요?”
“나야 모르죠. 주치의가 이번 주까지 연락 준대요.”
무신경한 목소리에 가슴이 죽죽 긁혔다. 어찌할 줄 모르고 입술을 달싹이던 난 두려움을 잠시 잊고 그에게 부탁을 뱉어 냈다.
“아…. 주언이가 항암 치료를 무서워해서 이맘때 잘 아프거든요. 제가 없는 건 처음일 거예요. 제발 전화 한 통화만 하면 안 될까요? 십 분이라도-,”
“나 일하게 입 좀 다물어요.”
그러나 냉한 목소리가 내 말허리를 뚝 끊었다.
타닥타닥.
그리고 최기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타자를 쳤다.
타닥타닥.
타닥.
그 여유로운 소리를 듣고 앉아 있자니 속에서 부글부글 무언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밤새 얌전히 묶여 있었다. 반성도 이쯤이면 질리도록 했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도 했다. 내가 잘못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한 달에 한 번 주언이를 보게 해 준다는 건 그의 약속이었다. 면회는 차치하고서라도 아이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전화 한 번 정도는 시켜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계속 주언이를 보지 못할 수 있다.
쿵쾅쿵쾅.
심장이 뛰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차곡차곡 차오르기 시작한 분노가 머리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상태가 좋진 못해요. 무엇보다 보호자님을 잘 따르고 의지하니까 옆에서 계속 용기를 주셔야 합니다.
2, 3차 항암 치료를 힘겹게 이겨 낸 주언이를 보며 담당 교수님이 나에게 당부한 말이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아이의 상태가 나빠지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나으려는 의지를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나는 힘이 들어간 손가락을 꾹 말아 쥐었다. 더는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순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좀생이 새끼….”
타닥대던 타자기 소리가 일순 멎었다. 최기원이 느리게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러다 주언이 잘못되기만 해요.”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시선이 맞닿았다.
마주 본 얼굴 속 최기원의 표정이 묘했다. 티끌만 한 감정도 담고 있지 않은 회색 눈이 무감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시선이 얽혀 든 몇 초의 간격 동안 나는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어금니를 물었다. 어제처럼 무방비하게 여린 살을 씹어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찰나를 두고 그의 입꼬리가 소폭 솟았다. 웃은 것이다. 호선을 그린 입술 사이로 고른 이가 얼핏 보이는 미소였다.
“…….”
그가 웃는 모습을 보고 잔뜩 힘이 들어갔던 턱이 살짝 벌어졌다.
그 미소는 하찮은 나를 향한 비웃음도 아니었고 상대를 얕잡아 보려는 기선 제압도 아니었다. 함의 따윈 없이 그냥 웃겨서 짓는 웃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더 역겨웠다. 당장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담은 반항에 그가 무방비하게 비친 모습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순수한 웃음이라니.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내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재밌어요?”
“…….”
“멀쩡한 인간 여기에 묶어 두고 어린애 목숨으로 협박하고 살면 재밌냐고!”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이성을 잃고 아득바득 핏대를 세우자 퉁퉁 부은 혀와 입술에서 다시 비릿한 피가 터져 흘렀다. 분을 못 이겨 손목까지 마구 흔들었고 그러자 내 무게에 서랍장이 끼익대며 불안한 소음을 토했다.
최기원은 의자를 살짝 물리고, 내 쪽으로 빙글 돌아앉았다. 긴 다리를 느른하게 꼰 뒤 팔꿈치를 책상 끝에 대고 나를 내려다보는 눈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싸늘했다. 나는 이렇게 미쳐 가는데, 저 비딱하고 태연한 자세가 마치 영화관에 앉아 지루한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 같다. 하얀 벽, 조각상에 대고 애원하는 것만 같아 속이 턱턱 막혔다.
“내가 잘못했다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했잖아요!”
너른 방을 쨍하게 채울 만큼 소리쳤다. 목소리가 사정없이 갈라졌다. 악다구니 쓰는 모습은 싫은 모양인지 내 목소리가 뒤집히자마자 그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똑똑똑.
내가 가쁜 숨을 채 가누지도 못하고 있을 때에 돌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흠칫 어깨를 떨며, 최기원은 느리게 고개만 돌려 동시에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문으로 걸어가고 내 고개도 그의 움직임을 뒤늦게 따라갔다.
대리석 위를 매끄럽게 훑고 지나가는 슬리퍼 소리는 평소처럼 여유롭기만 했다.
“사장님, 접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닫힌 문 너머로 조익현 비서실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기원이 문고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 나는 당황해 그를 불러 세웠다.
“자, 잠깐만요….”
스스럼없이 문을 열어 버리려던 최기원이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내 눈에 진득한 두려움이 차올랐다.
설마 실장님 앞에서 문을 열려고?
돈 때문에 그 짓을 당하고 있는 나도 나지만, 그런 나를 유린하는 최기원도 초록 동색, 똑같은 인간이었다. 분명 직전까지 집이 떠나가라 고함을 쳤으니, 실장님은 방문 너머의 상황을 조금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정상이 아니다. 지금 사람을 책상에 묶어 두고 그 옆에서 태연하게 일하는 미친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 주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최기원이야 묶은 쪽이니 그렇다고 쳐도, 나는 뭔데?
겨우 몇 주를 굴렀다고 최기원의 모욕에는 적응했으면서 타인에게 내비치기는 거부감이 일었다. 수치스러웠던 건 경호원의 일로도 충분했다.
“왜요?”
최기원이 내 표정을 진득하게 살피곤 다 알면서 물어 왔다. 모르는 척 끝을 늘이는 질문에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초조하게 고개를 저었다.
“…열지 마-,”
최기원은 여전히 미소를 매단 채 나를 아래에서 위로 훑어보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철컥 소리와 함께 잠긴 문이 열렸다. 내 대답을 들을 생각 따윈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잠깐 열린 문틈 사이로 남성의 인영이 보였다.
“…….”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득하게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비스듬하게 숙이고 몸을 더 웅크렸다. 최기원은 늘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지고 놀았다. 이렇게 움츠린다고 보이지 않을 위치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 웅크림이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피였다.
움직임이 무색하게도 문이 열리자마자 가볍게 묵례한 조익현 비서실장님의 시선 끝이 나에게 향했다. 그는 멍투성이가 된 채 손목이 묶여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최기원에게로 멀끔한 시선을 옮겼다.
일말의 동요도 망설임도 없이, 그저 방에 놓인 화병이나 액자를 스치듯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아예 문을 닫고 들어와 작은 종이봉투를 최기원에게 건넸다.
시선을 떨구고 수치심에 귀 끝을 발갛게 물들였던 내가 잘못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할 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반응이었다. 실장님은 평소의 부드럽고 절제된 목소리로 최기원에게 말을 건넸다.
“말씀하신 물건 가지고 왔습니다.”
최기원이 한 손으로 봉투를 받더니 검은색 상자를 꺼냈다. 예쁘게 둘려 있는 은색 리본의 매듭을 천천히 풀어 내리자, 사락 소리와 함께 리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최기원이 상자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꺼냈다. 바닥에 떨어진 리본 뭉치와 종이봉투는 조익현 실장님이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실장님은 이제 나를 보지도 않고 방을 나갔다.
그렇게 허망하게 실장님이 나간 것도 잠시, 최기원은 손 속의 물건이 무언가 흥미로운 듯 골똘히 살피면서 나에게로 걸었다. 나도 절로 그 물건으로 시선이 갔다. 동그란 것이 가운데에 있고 그 주변에 길게 늘어진 줄이 마치 시계 같아 보였다.
손에 들고 있던 상자는 휙 책상 위로 던져 놓고, 그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갑자기… 선물?’
시계 선물이라면 받은 적이 있다. 푸는 고리를 찾지 못해 풀지 못한 팔찌와는 달리, 최기원이 선물해 준 시계는 집에 오자마자 빼서 상자에 보관했고 그 뒤로 한 번도 손대지 않았다. 그는 내가 그걸 차지 않는다고 뭐라 하지도 않았고 나도 굳이 그가 준 선물을 열심히 차고 다닐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설마 그걸 차고 다니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시계를 주문한 것인가, 가느다란 줄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의문이 둥실둥실 피어났다.
잘한 것도 없는데 시계를 선물하려는 최기원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폈다. 갑작스러운 조익현 실장님의 등장과 의뭉스러운 선물에 치솟았던 분노의 방향이 기세를 잃어버리고 붕 떠 버렸다.
그에게 욕을 해 버린 게 마음에 걸리면서도 주언이를 두고 협박을 했던 상황에 대한 분노도 가시지 않았다. 욕을 들어 먹고도 별다른 대꾸가 없던 최기원의 반응도 이런 혼란에 한몫을 더했다. 들쭉날쭉 꼬리를 내린 갈등 사이로 모호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그래도 시계 채우려면 손목 풀어 주겠다….’
이제 감각조차 무뎌진 손끝을 살짝 오므렸다가 폈다. 이걸 풀어 주면 우선 욕한 건 얼른 사과하고, 주언이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
차근차근 생각을 하던 찰나, 불쑥 크고 예쁜 손이 목 가까이 다가왔다. 시계의 몸체라고 생각했던 동그랗고 차가운 부분이 목젖에 닿는 순간 한쪽 눈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최기원은 집중한 표정으로 목덜미 주변으로 줄을 꽉 조였다. 처음엔 목을 조르는 줄 알고 어깨를 움츠렸는데 최기원의 손이 떨어져 나오고 나서야 시계와 비슷하게 생긴 것이 내 목 주변에 채워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여요?”
조금 졸리긴 했으나 크게 거슬릴 정도가 아니라 고개를 저었다. 최기원이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았다. 손을 뻗어 담뱃갑을 열어 흔들더니 얇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능숙하게 불을 붙인 그가 입술 새로 연기를 뱉었다.
“하던 지랄 마저 해 봐요.”
“…예?”
담배를 짓씹고 있는 그의 발음이 뭉개져 있기도 했고, 부드러운 중저음에 섞여 든 욕 때문에 주눅이 들어 되물었다. 아, 최기원은 되묻는 것 싫어하는데. 아차 하고 입을 다문 순간.
“아, 흑!”
목 주변으로 끔찍한 통증이 피어올랐다. 나는 비명을 뱉으며 고개를 무릎에 처박았다. 반사적으로 목을 감싸 쥐려 팔을 당겼으나 넥타이가 팽팽하게 늘어나며 손목에 매달린 자물쇠만 시끄럽게 잘각댔다. 그리고 찰나의 시간을 두고 아까보다 더욱 센 자극이 목을 후벼 팠다.
“으, 흡…!”
이번에는 가까스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고 억눌린 신음만 뱉었다. 일전보다 훨씬 작은 세기의 자극이 미미한 진동을 울렸다.
허억, 허억. 고통에 꼬여 버린 숨을 겨우 몰아쉬었다. 아직도 동그란 부분 아래 맞닿은 살갗이 화끈거리고 따가웠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울먹임이 숨 사이에 희미하게 섞여 들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따져 묻고 싶은데 무언가 소리를 내었다간 찌르는 통증이 목을 다시 할퀼 것 같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눈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최기원이 담배 연기를 발치로 흘렸다. 얼굴 앞으로 뿌연 연기가 흩어졌다.
“말하라니까 입을 꾹 다무네.”
“…….”
“재미없게.”
미친 새끼.
정말 잠깐, 조익현 실장님이 들어온다면 둘 사이의 얼어붙은 분위기가 환기되지 않을까, 그가 조금이라도 측은지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나의 도와 달라는 텔레파시에 조금은 부응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마음이 잔인하게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결국 실장님이 이 이상한 목줄을 들고 왔고, 내가 이런 꼴을 당할 걸 알기에 손목이 묶인 사람을 두고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바람피운 거라며 울적하게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떠올랐다. 정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표정을 짓고 목소리를 내던 그가 뺨을 아프도록 올려붙이고 목에는 괴상한 목줄을 채웠다. 어느 것 하나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없었다. 시근덕대던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목이 헐고 찢어지더라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왜 이런 짓까지 하는 거예요? 도대체 왜….”
기다렸다는 듯이 치미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제는 악이 받쳐 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걸 차고 여기에, 윽, 묶여 있는 건 주언이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러다 주언이 죽, 으윽…. 하으… 주언이 죽고 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요.”
“가만히 있는 동생을 왜 죽이고 그래.”
핀트가 어긋난 대답을 남긴 최기원은 책상 위에 던져두었던 상자를 뒤집어 흔들었다. 무언가 책상 위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언이 죽으면, 흐으, 저, 절대 그쪽 안 봐요.”
“…….”
“흐, 아윽….”
최기원이 조그만 컨트롤러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털실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당신 지금 주언이로 나 협박한다 생각하는데, 주언이 목숨으로 당신만 협박할 수 있는 거 아니, 악!!”
내가 말하는 걸 무감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최기원이 컨트롤러의 버튼을 꾹 돌리는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며 파르르 경련했다. 불시에 고통에 절여진 기침이 터져 나왔다. 목에 전기 충격기라도 꽂힌 듯한 충격에 사지가 마음대로 뒤틀리고 벌어진 입가에선 침이 새어 흘렀다. 참으려던 눈물이 순식간에 터져 흘렀다.
“크, 쿨럭, 크헉, 으흑…!”
“어떤 정신 나간 개 주인이 자기 개한테 이런 걸 채우나 했는데.”
리모컨을 툭 던진 최기원이 잇새에 물고 있던 담배를 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매캐하고 알싸한 향이 그의 손 주변에 퍼져 나갔다.
“개가 시끄럽게 짖으면 주인이 화가 나요. 잘해 주고 싶은 주인 마음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자꾸 밟고 싶잖아. 그런데 귀여우니까 진짜 밟을 순 없고. 말은 안 통하니까 한쪽 입이라도 다물게 해야지.”
“…….”
그가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나를 내려다봤다. 목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통증에 자꾸만 신음이 나오려 했으나 눈에 핏발이 서도록 신음을 눌러 삼켰다. 최기원이 슬리퍼를 신은 발로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진 무릎을 툭 건드렸다. 나는 부들부들 떨며 겨우 그와 눈을 맞추었다.
“너랑 연애 잘해 보고 싶다고 말한 거잖아. 왜 대답을 안 해.”
조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턱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던 눈물이 홈웨어 위로 떨어지며 짙은 자국을 남겼다.
“10단계까지 있는데 방금 그게 8단계예요.”
감사하다고 해야 맞는 걸까.
전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