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Cracks
원망과 분노, 경악이 물든 눈동자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나언은 눈물을 도록도록 흘리며 숨을 죽였다. 무릎을 세워 말고 최대한 책장에 기댔다. 기세 좋게 부풀었다 금세 쪼그라든 풍선 꼴이 된 나언은 목에서 피어오르는 미미한 통증을 외면하며 눈을 꾹 감았다.
기원 역시 일전의 소란을 지우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떨군 채 훌쩍이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는 작은 인영을 바라보고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토록 원하던 적막이 찾아왔으나, 나언이 핏발 선 눈으로 남긴 마지막 목소리가 자꾸만 두통을 일게 했다.
백주언 목숨으로 협박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 아니라는 사실. 기원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나언의 입으로 들으니 뒷골이 빡빡하게 당겨 왔다. 기원은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면서도 때때로 관자놀이를 손가락, 혹은 손바닥으로 눌러 댔다.
무심코 머그잔을 향해 손을 뻗은 기원은, 어느새 드러난 하얀 바닥을 응시했다. 커피라도 타 올까 싶어 컵을 들고 일어서니, 아래에서 반 박자 늦게 말간 시선이 따라왔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라 기원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나언은 잠시 머뭇대다 시선을 피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린 기원은 나언을 내버려 두고 방을 나섰다.
나언은 방을 나서는 기원의 등을 바라보며 솟아오른 무릎으로 이마를 툭 떨어뜨렸다. 꼭 쥔 나언의 주먹 끝이 하얗게 질렸다.
한참 뒤 다시 방을 찾은 기원의 손에는 나무 쟁반이 들려 있었다. 지난번, 나언이 아팠을 때 죽을 담아 왔던 그 쟁반이었다. 새로 내려 온 커피 향과 고소한 구운 식빵의 향이 미세하게 퍼졌다. 책상에 트레이를 내려놓은 기원은 나이프를 들고 식빵을 네모나게 썰었다.
자그만 조각을 포크 끝으로 찍어 나언의 쪽을 향해 돌아보았다. 어제 저녁을 먹다 말고 여기로 끌려왔으니 아무리 배가 작아도 지금쯤이면 허기가 질 때였다. 배고파서 울 때까지 나언을 내버려 두려 했던 다짐이 무너졌다. 기원은 나언의 쪽으로 팔을 뻗었다.
“먹어요.”
기원이 들어올 때부터 기원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나언은, 포크 끝의 노란 식빵과 기원을 번갈아 살핀 후 고개를 떨어뜨리며 무릎에 이마를 처박았다. 먹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에 기원은 두 번 묻지 않고 포크를 쟁반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일에 몰두했다. 묶인 지 꽤 오래 지났기에 간간이 몸을 뒤척일 법한데도 나언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나른한 오후의 햇볕이 책상 위로 부서져 내리며 기원의 얼굴에 짧은 그림자가 졌다. 미술관 세느가 후원하던 신예 작가의 갤러리 프로듀서가 보낸 메일을 검토하던 기원은 책장을 툭툭 건드리는 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렸다. 손은 닿지 않고, 목소리도 낼 수 없는 나언이 책장을 두드려 기원을 부른 것이었다. 기원이 나언을 향해 눈썹을 살짝 끌어 올렸다.
나언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눈빛을 한 채 규칙성을 잃은 숨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풀었다, 눈만 깜박이며 한참을 쭈뼛댔다. 결국 기원이 다시 고개를 돌리려 하자 나언이 입술을 겨우 열고 소리 없이 뻐끔댔다.
풀어 주세요.
기원의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나언의 얼굴이 더욱 초조함에 물들어 갔다. 까만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나언이 엉덩이를 조금 끌어 기원의 쪽으로 더욱 가까이 붙어 왔다. 소리만 내지 않을 뿐, 나언은 무언가 불편한 듯 현저하게 낑낑대고 있었다.
“말을 해야 알지.”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숨길 수 없는 기원의 고압적인 분위기에 나언이 눈치를 살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나언은 주먹을 꾹 쥐며 다시 입술을 열었다.
화장실… 가고 싶어요.
색색대는 숨소리가 옅게 흩어질 만큼 한 글자 한 글자를 열심히 뻐끔거렸다. 아침부터 미미하게 느껴지던 요의를 꿋꿋하게 참아 왔는데, 도무지 기원이 손목을 풀어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점심이 넘어가자 아랫배가 저릿할 정도로 소변이 급해졌다. 너무 수치스러워 끝내 입을 다물고 있으려던 나언은 결국 풀어 달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묶인 채로 실수할 것 같았다.
아, 하고 짧은 반응을 보인 기원이 태연한 표정으로 자물쇠로 손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자물쇠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을 보며 나언은 기원이 자신을 더 놀려 먹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와닿는 부끄러움은 배가 됐다. 사람을 묶어 둘 땐 언제고 옆에서 실례를 하는 건 더러우니 싫은 모양이었다. 나언의 귀 끝이 새빨갛게 물들고, 뺨과 목덜미까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달칵, 소리와 함께 자물쇠의 고리가 벌어졌다. 자물쇠 하나가 풀어진 것뿐인데도 손목을 옥죄던 압박이 조금은 해이해졌다. 푼 자물쇠를 책상 위에 올려 둔 기원이 나언의 넥타이 매듭을 책장의 구멍에서 빼냈다.
그러나 기원은 손목을 둘러싼 넥타이는 풀어내지 않고, 그대로 나언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마른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나치게 가뿐히 들리는 무게에 오히려 나언이 휘청대자 기원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손목이 마저 풀리든 말든, 나언은 무작정 화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래 참은 얼굴이 사색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오랫동안 쭈그린 채로 굳어 있던 다리는 갑작스럽게 내딛는 걸음에 힘을 지탱하지 못했다. 나언의 무릎이 휘청대며 바닥으로 세게 엎어지기 직전, 기원이 나언의 팔을 붙잡았다.
“아….”
휘청대며 뱉어 낸 앓는 신음에도 목에 걸린 목걸이에선 불쾌한 진동이 왕왕 울려 나언이 어깨를 움츠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손 많이 가네.”
기원은 나언을 거의 끌다시피 화장실로 데려갔다. 부축이라 부를 수도 없는 거친 손길에 나언은 그냥 손목을 풀어 주면 될 일을 왜 이렇게 어렵게 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언이 변기 앞으로 끌려가며 흘긋 화장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살폈다. 멀끔하고 화사한 기원의 얼굴과는 달리 자신은 경악할 만큼 꼬질꼬질했다. 이틀을 내리 씻지 못해 헝클어진 머리와, 퍼석하게 말라비틀어진 얼굴에는 푸른 멍이 올라와 더욱 지저분한 인상을 만들었다. 황급하게 고개를 돌리자 기원이 조그맣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까지 오자 참았던 요의가 더욱 하늘을 찔렀다. 얼른 변기 앞에 선 나언이 기원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나가지 않고 나언의 곁에 서 있는 기원에게 나가 달라는 말을 하려 입을 벌리는데 기원이 나언의 뒤통수를 툴툴 쓰다듬었다.
“그래, 손이 불편하죠.”
나언이 말릴 새도 없이 기원은 헐렁한 홈웨어 바지를 끌어 내렸다. 순식간에 발목 아래로 떨어진 바지를 추켜올리지도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원을 올려다봤다. 기원은 망설임 없이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힘없이 늘어진 성기를 꺼냈다.
“뭐, 하는 아, 윽….”
당황해 목소리가 튀어나오자마자 진동이 목젖을 날카롭게 괴롭혔다. 나언이 당황한 나머지 방심하고 몸을 웅크린 순간, 의식적으로 참아 온 소변이 선단에서부터 쪼록 새어 나왔다.
“아…….”
한 번 구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소변 줄기는 맥을 추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나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상이 되어 그저 기원의 손에 자신의 아래를 맡기고 있어야 했다.
한참을 변기 앞에 서서, 소변 줄기가 기세를 잃고 점점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던 기원은 휴지를 뜯어 나언의 아래를 닦아 준 후, 속옷과 바지를 추켜올려 주기까지 했다. 나언의 얼굴은 수치심에 푹 젖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 가까스로 울음을 참느라 정신이 없었다.
변기 뚜껑을 닫자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한층 텁텁하게 화장실을 울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나언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우자 나언은 지독스럽게 고개를 수그리며 회색빛 눈을 피했다.
기원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나언을 변기 위에 앉혔다. 달아오른 뺨을 손끝으로 약하게 건드리자 나언은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묶인 손을 불안하게 움찔대기만 했다. 엄지 옆의 여린 살이 다시 벌어지고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다 본 건데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
“정액 흘리는 건 음란하게 보여 줬으면서 오줌은 또 부끄럽나 봐?”
그건 자위하라고 강요했던 밤에 보여 주었던 모습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반박할 힘도 의지도 잃은 나언은 그냥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기원은 풀이 죽은 동그란 정수리를 빤히 내려다보며 달아오른 나언의 귀를 얄궂게 건드려 댔다.
미움받을 걸 알면서도 기원은 나언을 이렇게 궁지로 몰아넣는 것이 재밌었다. 파득파득 털을 세우다가도 조금만 다그치면 눈이 울망해져 바닥까지 가라앉는다. 그 모습을 볼 때면 묘한 성취감과 희열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서늘한 손가락이 살이 내린 턱선과 귓불 사이를 간지럽게 스쳤다. 나언은 예민한 살을 훑어 내리는 손길과 낯선 감각이 못 견디게 싫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뒤로 빼자 기원은 한 손에 옴폭하게 들어오는 나언의 볼을 붙잡아, 억지로 얼굴을 강하게 들어 올렸다. 고개를 숙인 채로 눈물을 겨우 참고 있던 나언의 목이 세게 꺾이고, 그 반동에 볼 위로 굵은 눈물 줄기가 주룩 흘러내렸다.
한 손으론 나언의 얼굴을 붙잡고, 남는 손으론 마른 어깨를 끌어안은 채 기원이 허리를 숙였다. 피딱지가 앉은 채 말라붙은 입술 위로 부드럽고 따뜻한 기원의 입술이 내렸다. 목석처럼 가만히 앉아 눈물만 죽죽 흘리는 나언의 입술을 애무하듯 정성스럽게 빨았다. 어느새 말라비틀어졌던 입술에도 침이 옮겨 가 축축하게 번들거렸다.
기원은 두 손을 나언의 목덜미로 가져다 댄 후 벌어진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목에 채워져 있는 짖음 방지 목걸이가 이미 지져진 상처 부위를 꾹 누르자, 나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비틀었다.
나언이 비튼 각도 그대로 기원이 고개를 더 틀어 굳이 혀를 집어넣었다. 기원이 점점 기대 오는 무게에 나언의 등이 변기 뒤편의 화장실 거울에 부딪혔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거울에 마구 비벼졌다. 나언은 묶인 손을 들어 단단한 기원의 어깨를 마구 치고 흔들었다. 하지만 돌덩이같이 딱딱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 싫. 으…!”
나언이 싫다는 말을 뱉자마자 목울대를 세게 뒤흔드는 진동이 기원의 손바닥 아래로도 전해졌다. 목이 지져져라, 싫다는 말을 되뇌는 나언을 향해 기원은 입술을 맞붙인 채 짓씹듯 말했다.
“그래. 너 좋을 짓 해 줄 일 절대 없으니까 기대하지 마.”
“으, 흐….”
“계속 싫고, 역겹고 혐오스러울 거야. 네가 적응해.”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는 연인의 모습이야 누가 흉내 내지 못할까. 그러나 그렇게 굴어 봤자 제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위치는 최지원의 대체품 자리, 그게 전부다.
자신의 다정한 모습에 최지원을 투영하고, 눈으로는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작은 머리통으로는 최지원을 그리고, 내 이름을 부르면서 최지원의 목소리를 추억하는 그런 빈껍데기 백나언을 가질 바에야 차라리 뼛속까지 자신만을 원망하고 싫어하고 증오하느라 최지원 따위는 떠올리지도 못하는 망가진 백나언을 곁에 둘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굴면 백나언에게는 진심 어린 사랑을 얻어 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 정도 각오도 없었다면 최지원이 죽은 다음 날에 백나언을 찾아가는 어이없는 짓거리는 하지도 않았을 테니.
그러니까 백경철, 백주언은 좆도 상관없다. 뒈지든 말든.
과거, 기를 쓰고 최지원의 것을 탐할 때마다, 저를 낳지도 않은 어미는 왜 그리 추한 욕심을 부리냐며 유학을 보내 버리거나 미술이나 호텔 경영 같은 곁가지 사업을 떠밀어 주었다. 그럼에도 아득바득 최지원을 따라가기 위해 시간을 허비했다. 하지만 최지원이 죽음으로써 이 무의미한 경쟁은 평생 진 상태로 끝이 나 버렸다. 그들은 이제 죽은 형과의 비교를 시작했으니.
하지만 기원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 개싸움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허무하게 튀어나온 백나언이야말로 제가 기쁘게 취한 유일하고 간절한 전리품이었다. 겨우 그 사실 하나로 그동안 자신을 지독하게 좀먹어 왔던 열패감이 모조리 사그라졌다.
그러니 이제 같은 실수는 없다.
기원의 탁한 회색 동공이 아래에 깔려 흐느끼는 나언을 찬찬히 담았다. 지금이야말로 제 것이었다. 제 아래에서 울고, 자신만을 기억하고 원망하는.
“흐, 으윽.”
이미 젖을 대로 젖어 버려, 더욱 까맣게 물들어 버린 속눈썹을 질끈 떨어뜨리며 나언은 미약하게 흐느꼈다. 너무나 춥고 적막한 화장실 속에서 숨결이 마구잡이로 엮여 든 나언과 기원의 주변만 거칠고 뜨거웠다.
기원은 나언의 묶인 팔을 들어 올려 제 뒷덜미에 두르도록 했다. 그대로 몸을 바짝 붙여 나언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렸다. 퍼석하게 마른 회음부과 엉덩잇살이 냉기가 도는 변기 뚜껑 위에 마구잡이로 비벼지자 나언의 하얀 허벅지와 살 하나 없이 올라붙은 아랫배에 소름이 돋았다.
기원은 그대로 손만 뻗어 거울장을 열고, 선반에 줄 세워진 일회용 바디 젤을 꺼냈다. 곧 닥칠 일을 예감이라도 한 듯 나언이 기를 쓰고 허리를 버둥댔으나 묶인 손과 기원의 무게에 짓눌려지는 몸이 빠져나오기엔 역부족이었다. 기원은 이로 비닐 팩을 뜯어 나언의 아래에 바디 젤을 모조리 끌어 부었다. 고환과 회음부를 적신 젤은 변기 뚜껑에까지 말갛게 고였다.
기원은 바지의 앞만 끌어 내려 이미 팽팽하게 일어선 성기를 꺼냈다. 젤로 흥건하게 젖은 구멍 주위를 귀두로 느른하게 문지르자 뻣뻣하게 굳은 구멍은 성기를 절대 받아 내지 않겠다는 듯 틈을 꾹 조였다. 그러나 기원은 조그만 틈 사이에 선단을 맞추고 느리게 허릿짓을 했다.
손으로 미리 풀지도 않고, 긴장으로 잔뜩 움츠러든 구멍이 억지로 침입해 오는 두툼한 귀두를 머금으며 빠듯하게 벌어졌다.
투둑, 툭.
내벽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 나언이 몸을 뒤틀며 목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목걸이에서 고통스러운 진동이 울려 나언은 어떻게 할지도 모르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 으윽… 그만, 하지, 마아… 찢어, 찢… 흑.”
기원은 허리를 뒤로 쭉 뺐다가 다시 한번 구멍으로 기둥을 쑤셔 박으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엉엉 울며 하지 말라고 하는 나언이 안쓰럽기는커녕 뱃속에서 잔뜩 고양되었던 분노가 점차 누그러졌다. 프리컴이 제멋대로 새어 나와 젤과 비벼지자 접합부에 치덕치덕 묻은 진득한 액이 하얗게 변하며 질척대는 소리를 냈다.
기원의 숨소리, 아래에서 나는 끔찍하고 더러운 소리, 목젖에서 가슴 안쪽으로 파고드는 무자비한 진동 소리.
헛구역질이 나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나언은 꽂혀 있는 칫솔로 제 귀를 마구 찌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기원의 팔뚝에 오금을 걸친 채로, 기원이 거칠게 허릿짓을 할 때마다 마른 다리가 맥없이 흔들거렸다. 한 자세를 고수하며 말뚝 때려 박듯 성기를 꽂아 넣던 기원은 아래의 근육이 그나마 조금씩 풀려 가는 걸 느꼈다. 잔뜩 힘을 주고 버티던 나언의 몸도 점차 힘을 잃어 가고, 기원이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나언의 고개가 이리저리 꺾이고 돌아갔다.
“으, 흑… 으응….”
그러다 특정 부위를 푹푹 찌를 때면 몸이 움찔 떨리며 나언의 미간이 찌푸려졌는데, 기원은 그 간질거리는 모습을 눈으로 꼭꼭 씹어 삼켰다.
온종일 물 한 잔 먹은 것도 없이, 위아래에 치미는 고통을 감내하기엔 나언의 체력이 지나치게 약해져 있었다. 한참을 흔들리던 나언의 시선이 뿌옇게 흐려지고, 가물대던 눈동자가 뒤로 넘어갔다. 어느새 나언은 의식을 잃고 간헐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기만 했다. 나언이 전신에 힘을 빼고 늘어지자 아플 정도로 꽉 조여 오던 내벽이 보드라운 탄력만 남긴 채 기둥을 맛좋게 감싸 왔다.
“후…….”
기원은 잠시 허릿짓을 멈추고 숨을 고른 채 다시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나언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갔다. 땀 냄새와 특유의 체취, 제가 사 주었던 바디 크림의 냄새가 섞여 오묘한 향이 났다. 나언의 목덜미와 귀뺨에 코와 입을 묻은 채로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던 기원의 입매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쓴웃음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