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Loathe
나는 핏발이 선 눈꺼풀을 부스스 들어 올렸다. 새벽녘까지 뒤척이다 잠깐 잠이 들었고, 두 시간 만에 선잠에서 다시 깨어났다. 이제 다시 잠들 것 같지 않았다. 잠시 베개에 이마를 파묻고 눈을 깜빡이다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목걸이를 풀어 세면대 위 선반에 툭 던지듯 놓았다. 차가운 물로 머리부터 적시기 시작하니 이제야 정신이 조금 또렷해졌다. 어제부터 로션 옆에는 화상 연고가 하나 더 놓였다. 목의 화상 상처에 진물이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신에 꼼꼼하게 로션을 바른 난 면봉에 연고를 묻혀 발갛게 벗겨진 상처 위로 가져갔다. 상처에 연고를 바를 때마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일었으나 견딜 만했다.
목걸이를 다시 했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괴이한 목걸이가 건넨 충격과 공포는 처음만큼 강렬하지도 않았고 어차피 바깥 외출을 할 일이 없기에 굳이 목소리를 낼 일도 없었다. 목이 아프다는 핑계로 일주일가량 한마디도 하지 않다 보니 솔직히 편한 구석도 있었다. 최기원도 부러 말을 걸지 않았고 나도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그와 나 사이에서 가끔씩 오갔던 일상의 대화가 모조리 사라졌다.
그럼에도 목에 상처가 낫지 않는 이유는 최기원과의 자비 없는 관계 때문이었다. 아무리 신음을 참으려 애써도, 최기원은 기어코 폭력적으로 사람을 몰아붙여 목소리를 내게 했다. 고통과 쾌락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속절없이 신음이 터져 흘렀고, 그 소리는 곧장 상처를 후벼 팠다. 반복적으로 짓눌린 화상 자국은 낫기도 전에 덧나 버렸다.
손을 들어 흉이 될 상처 위를 꾹 눌러 보았다. 통증에 조금 익숙해져 견디려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더 아픈 상처가 그 위로 새겨졌다. 나을 틈이 없었다. 여기는 아마도 눈살 찌푸려지는 흉이 남겠지. 목을 가리기 힘든 여름엔 고역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고 뽀얀 편이었던 살갗은 불그스름하게 죽어 제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목걸이를 차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춰 다이닝룸으로 내려가 의자를 빼 앉았다. 조용히 식사를 시작하는데 최기원이 말을 붙여 왔다.
“오늘 수업이죠?”
수업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눈가가 시큰거렸다. 경호원과 마주쳐야 하는 지옥 같은 시간. 망가져 가는 정신 속에서도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던 문제였다. 속이 아득하게 부대꼈으나 마른침을 삼키고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머뭇대던 난 그가 식사를 거의 끝냈을 즈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수업…. 빠져도 돼요…?”
뻐끔뻐끔 더듬대며 간신히 문장을 완성했다. 쉬어 빠진 공기로 찬 목소리를 뱉은 난 가슴을 시근덕대며 상처 위를 옅게 파고드는 진동의 아픔을 참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최기원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왜요?”
고압적이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정말 이유가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간 금세 손이라도 올릴 것같이 날이 선 목소리에 혀가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솔직하게 대답을 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이대로 그냥 아니라고 하는 게 맞는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제멋대로 떨리는 손을 꾹 쥐고 작은 목소리로 의견을 냈다.
“모, 몸이, 안 좋아서…….”
그가 낮게 비웃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역시나 괜히 말했다 싶어 입이 바짝 말랐고, 눈을 마주치지 못한 내 시선은 식탁 위로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언젠 몸이 좋았어요?”
“죄송…합니다….”
빈정대는 말투에 놀라 목소리를 내어 사과하자, 기다렸다는 듯 목에 고통이 일었다. 손으로 목걸이 위를 꾹 눌렀다.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죽인 채 앉아 있는 나에게로 다가온 그가 한쪽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물었다.
“목걸이 때문에 나가기 쪽팔려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앉은 채로 고개를 젓자 그가 낮게 웃으며 손을 뻗어 내 뺨을 살살 두드렸다. 차가운 손가락으로 볼을 꼬집어 보기도 하고 쓱 뺨을 문지르기도 했다. 간간이 뺨을 약하게 내려치는 세기로 때리기도 했다. 한참을 볼을 가지고 놀던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뺨에는 제법 열이 올라 얼얼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듯 속삭였다.
“울지 말고. 꼴리니까.”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손등으로 볼 위를 문질렀다. 어느새 툭툭 터져 나온 눈물에 속눈썹이 푹 젖었다.
“다 먹어요.”
그는 간단한 요구만 남긴 채로 출근했다. 난 멍하게 앉아 있다, 식은땀이 찬 손에서 숟가락을 한 번 문지르고 다시 죽을 퍼먹었다. 음식물만 들어갔다고 하면 위가 따끔거려, 식탁 아래로 내린 한 손으로는 위를 꾹꾹 문질렀다.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해졌다. 수업을 빼 달라 말하기 전까지 최기원의 눈치를 보느라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해답을 찾자마자 차갑게 식어 고요해졌기 때문이다.
‘괜히 말했다…….’
식어 버린 죽을 뒤적대다 다시 한 입 머금고 씹었다. 그냥… 최기원이 시키는 대로. 그가 정해 놓은 대로 해야 할 일을 멍청이처럼 되묻는 실수를 해 버렸다. 이 비려 빠진 죽을 다 먹고, 얌전히 쉬다가 수업을 듣고 와야 한다. 그게 정해진 할 일이었고 내 의사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씻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가방을 들고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1월도 중순에 접어들며 점점 날씨가 매섭게 차가워졌다. 윤기가 흐르는 코트를 입고 두툼한 목도리를 둘러도 바람은 곧장 몸 안을 관통하는 듯 몰아쳤다. 실내에서만 활동해서인지 추위를 견디는 힘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고작 정원을 걷는 동안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고 뼈가 묵직하게 아렸다.
“안녕하십니까.”
문을 열며 인사하는 경호원을 애써 무시하고 차에 올라탔다. 어차피 목걸이를 하고 있기에 대답할 수도 없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경호원도 입을 다물고 차를 출발시켰다.
아무 일 없이 차가 대학동에 도착했을 땐 무릎 위에 얌전히 올린 손바닥이 흠뻑 젖어 있었다. 식은땀을 바지에 한 번 문지르고 문고리를 당겨 차에서 내려섰다. 차는 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묵직한 엔진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히터로 데워진 공기로 가득 찬 강의실에 들어서자 교수님이 나를 향해 먼저 알은체를 했다. 목 티를 입었으나, 차마 목도리를 풀지 못해 머뭇대는 나를 향해 눈썹을 늘어뜨린 그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을 붙여 왔다.
“나언 군, 실장님께 들었습니다. 목감기에 걸렸다면서요?”
“…….”
“이번 겨울 감기가 유독 독하다고 하더군요.”
아둔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기억에 오래 남지 못할 어려운 내용의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평소엔 좀이 쑤실 정도로 지루하기만 한 수업은 생각보다 훨씬 이르게 끝이 났다. 착잡한 표정으로 외투를 입고 가방에 책과 필통을 넣는 나를 흘긋 바라본 교수님이 망설이다 말을 걸었다.
“그……. 백나언 군.”
고개를 들자 교수님이 흩어 놓은 전공 책과 파일을 옆구리에 끼웠다.
“처음 봤을 때보다 안색이 많이 어두워요. 어디 크게 아픈 건 아니죠?”
가방의 지퍼를 닫던 손이 멈칫 떨렸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병원 꼭 가세요.”
교수님의 죄책감을 덜어 준 나도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걸음을 옮기기 싫은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1층에 도달했을 때엔, 세단은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
“으, 윽…!!”
콰악, 목에서 울리는 진동에 고개를 젖히며 신음했다. 니트와 목 티를 끌어 올린 경호원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혀가 닿는 곳을 마구잡이로 핥아 댔다. 역겨울 정도로 뜨거운 숨이 맨살에 닿자 몸서리가 쳐졌다. 발버둥을 치며 경호원의 배와 허벅지를 마구 걷어찼다.
“가만히 좀….”
“으, 하지, 마… 들켜, 들켜요….”
차가 공사장 부지에 멈춰 선 건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경호원이 한 번 입을 쓴 것으로 만족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지난주처럼 뒷자리로 옮겨 와 바지를 내린 그를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본 난, 군말 없이 샅에 고개를 처박고 성기를 입에 물었다. 평소보다 반항이 적었기에 경호원의 절정이 일렀다. 최기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선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어서 숨을 참고 열심히 입을 썼다.
그러나 경호원은 그걸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다짜고짜 힘으로 몸을 깔아뭉갰고,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과 배를 마구 만지기 시작했다. 사색이 된 내가 몸을 마구 뒤흔들며 악을 내질렀다. 이미 고통이 점철된 목에서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왔다. 그는 반항하는 나를 짓뭉개며 아래로 손을 뻗어 속옷을 벗기려 애썼다. 난 이를 악물고 배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하지, 말라고…!”
“윽!”
날 선 손톱이 그의 살갗을 파고들며 순식간에 피가 비쳤다.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든 그가 험악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난 눈을 질끈 감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눈에 그렁그렁 매달렸던 눈물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시트 위로 떨어졌다.
“하…….”
지난번, 최기원이 팔뚝에 남은 상처도 기민하게 알아챘던 전적이 있었기에 그는 차마 나를 내려치진 못했다. 대신 손을 내려 내 입을 틀어막았다. 코와 입이 한 번에 막힐 만한 큰 손이 얼굴을 빈틈없이 감싸자, 그러잖아도 울음 때문에 불안했던 호흡이 엉키며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씨발, 얌전히 굴어야, 얼른 출발하죠. 네?”
“으, 으읍……. 으!”
아무리 힘에 차이가 나더라도 나도 엄연한 남자였다. 반항하는 성인 남성을 힘으로 눌러야 하는 경호원의 숨도 점점 가빠졌고 그의 손길은 더욱 우악스러워졌다. 난 그의 손목을 마구잡이로 긁으며 고개를 저었으나 한껏 거세진 그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힘이 빠져 갔다.
경호원은 결국 한 손으로 내 속옷과 바지를 끌어 내렸다. 시트에 맨살이 닿고, 그는 몸을 숙여 무게로 나를 더 강하게 옭아매며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치미는 무력감과 절망감에 울음 섞인 숨이 경호원의 손바닥 아래로 터져 흘렀다.
엉덩이 살 아래로 질척한 성기 끝이 비벼졌다. 울기 시작하자 숨을 쉬기가 더 힘들어졌다. 이제 목을 울리는 진동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신을 놓을 것처럼 눈앞이 흐려지고 구겨진 몸이 비명을 질렀다.
“으, 읍…… 흑….”
주먹을 쥐고 어깨를 밀었다. 어떻게든 허리를 비틀며 곧추선 성기가 구멍에 닿지 않게 미친 듯 버둥댔다.
“제, 발, 흐윽…….”
뭉개진 발음으로 애원했다. 마지막 발악으로 몸을 뒤틀며 다리를 오므린 순간, 갑작스럽게 차가 거세게 뒤흔들렸다.
“……!”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서 무언가가 치받는 느낌이 들었고,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내 위에 웅크리고 있던 경호원이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누워 있던 나도 충격과 함께 좌석 밑으로 구를 뻔했으나 겨우 시트를 붙잡고 버텼다.
타이어가 지면과 마찰하며 내는 쇳소리와 함께 밀려나던 차가 움직임을 멈췄다. 쓰러졌던 경호원이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고 나도 후들후들 떨리는 팔로 시트 바닥을 짚고 겨우 구겨진 몸을 폈다.
“아, 씨발…. 뭐야.”
경호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바지를 추켜 입었다. 최기원의 차를 운전하며 교통사고에 휘말린 것 자체가 문제였다. 이 사고가 최기원 귀에 들어갔다간, 왜 여기에 멈춰 있었는지, 사고가 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무엇을 했던 것인지 모조리 들통나고 말 것이다. 그냥 넘어갈 인간이 아니었다.
“…….”
“…….”
경호원과 내가 동시에 백미러를 바라본 순간, 돌연 차에는 아득한 정적이 흘렀다. 뒤에서 은색 세단을 거세게 들이받은 차는 흔하지 않은 브랜드의 검은색 SUV였다.
-급해 보이네요.
-…….
-안 탑니까?
주언이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병원으로 향했던 날.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멈춰 섰던 최기원의 차를 잊을 리 없었다. 숨이 멎을 듯한 경악에 안색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경호원이 차에서 빠르게 내려섰다. 나는 그대로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숨이 제멋대로 꼬이고 손가락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져 생각이 이어지질 않았다. 입술로 손톱 끝을 잘근대다 고개를 들었다.
백미러를 살피니,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려서는 최기원이 보였다. 경호원은 그의 앞으로 뛰어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그가 입술을 벙긋대며 무언가 말을 했고, 최기원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점점 세단으로 가까이 걸어왔다.
이제 최기원의 인영은 창문 바로 너머로 보였다. 따닥, 따닥 뜯어지던 손톱이 벌어져 붉은 살이 드러났다. 최기원은 창문을 손가락으로 두 차례 두드렸다. 최기원은 내가 내려간 바지를 추켜올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을 세워 빗는 동안 짝다리를 짚고 선 채 기다렸다.
헛손질을 하며 문고리를 부여잡고 겨우 문을 열자 최기원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아래에서 위로 훑었다.
“왜 여기 있어요?”
“백나언 씨가 잠깐 멀미를 해서-,”
“백나언.”
“…….”
“한테 물어봤는데.”
뚝뚝 끊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잘 벼려진 칼같이 날카로웠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숨만 시근덕대고 있는 나에게로 최기원이 한 발 가까이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 익숙한 향이 풍겼다. 이젠 공포로 느껴지는 그 특유의 체취에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주춤대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최기원이 손을 뻗어 내 턱을 붙잡아 올렸다. 강제로 눈이 마주치고, 그의 회색 눈동자가 나를 또렷하게 눈에 담았다.
“멀미가 났어요?”
“…….”
자꾸만 가슴이 뻐근해져 내뱉는 숨소리가 처참하게 떨렸다. 턱이 점점 아프게 조여 왔다. 그는 그대로 뼈가 박살 날 것처럼 강한 악력으로 얼굴을 눌렀고, 나는 주먹을 꾹 쥐며 그 고통을 참았다. 최기원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나긋하게 다그쳤다. 손짓과 말투에 억지로 화를 눌러 참는 느낌이 선연했다.
“말 씹지 말고.”
결국 가까스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앞에서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얼핏 웃음을 지은 듯한 최기원이 턱을 놓고 빙글 뒤돌아 경호원을 마주 봤다.
“아니라잖아.”
“…….”
“왜 애를 팔아, 씨발아.”
정신 나간 듯한 목소리에 더욱 공포가 밀려들었다. 최기원이 다시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등을 살짝 숙이고 아래에서 위로 눈을 맞추며 다정하게 물어 왔다. 그가 이 상황에서 왜 자꾸 미미한 웃음을 짓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여기 서서 뭐 하고 있었어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는 사이, 공사장으로 검은색 세단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차에서 내려선 경호원들이 부딪힌 차 주변을 둘러싸자 분위기는 한층 더 험악해졌다. 눈물 때문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최기원은 내 대답을 기다리다, 경호원 중 하나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모리 카드 가져와.”
가까이 서 있던 경호원 한 명이 은색 세단의 운전석 문을 열어젖혔다. 뒤이어 블랙박스에서 뽑아낸 작은 칩을 최기원에게 건네고 최기원은 그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보기 귀찮아서 그런데. 그냥 말해 주면 좋겠어요.”
“…….”
“너라도 살아야지, 나언아.”
낮고 온화하게 채근하는 목소리가 마치 뱀의 유혹처럼 귓가에 똬리를 틀었다. 할딱이던 내가 눈을 굴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흐, 으……. 저, 저 사람이……. 윽, 저, 전부터, 계속……. 마, 음대로 마, 만지고……. 더듬, 막……. 협박…….”
목에는 목걸이가 칼로 후벼 파는 듯한 진동을 울리고 눈앞에는 싸늘한 낯의 최기원이 버티고 있으니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최기원이 미간을 옅게 찌푸리며 턱을 잡은 손을 잘게 흔들었다.
“아… 뭐라는 거야. 처맞아야 똑바로 말해?”
“아, 흐윽, 아, 아니요…. 즈, 저, 사람이…,”
결국 최기원은 내 말을 끊고 줄 맞춰 서 있는 경호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들은 일을 저지른 경호원을 양쪽에서 단단히 결박해 차에 구겨 넣었다. 경호원을 실은 검은 세단이 먼저 공사장 부지를 빠져나가고, 최기원은 귀찮음이 잔뜩 묻은 표정으로 내 손목을 끌어당겨 여러 대의 차 중 멀쩡한 것에 태웠다.
가만히 앉아 얼어 있는 내 어깨 뒤로 손을 뻗어 벨트를 채워 준 그가 조수석 문을 세게 닫고 운전석에 올랐다.
어느새 사위가 어둑해졌다. 시간에 충실해 해가 빨리 떨어진 겨울 도로를 최기원의 차가 내달렸다. 벨트를 말아 쥔 채 숨을 죽이고 있던 나는, 차가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서울 톨게이트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불안한 예감이 들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옆모습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단단하게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 어디로 가요?”
목을 가르는 진동을 참고 물었으나 최기원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늘 빠른 속도로 운전하기에 이대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초조했다. 조용하게 운전만 하고 있는 최기원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폭발할지, 또 그에게서 어떤 상처를 받게 될지. 차라리 얼른 욕이라도 뱉었으면, 아프게 손이라도 올렸으면 했다. 이렇게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눈치를 살피고만 있는 건 마치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불안하게 잰걸음을 옮기는 기분이었다.
차는 서울 외곽과 경기도가 맞닿아 있는 곳에서 멈추었다. 이미 오가는 차 없이 한적한 도로가 나온 지 오래였다. 제대로 된 간판이 붙어 있지 않은 상가와 붉은 벽돌로 마감된 주택 건물이 혼잡하게 얽힌 동네에서 차는 익숙한 듯 좁고 한적한 골목으로 깊숙이 진입했다.
기어를 주차에 놓고 시동을 끈 그가 먼저 내렸다. 그림자가 진 골목은 가로등의 한 줄기 빛 아래 말고는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작아져 가는 최기원의 인영을 눈으로 좇다 다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최기원이 고갯짓을 해 건물 하나를 가리켰고, 나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 건물 유리문을 열고 들어섰다.
건물 밖과 안은 별세계처럼 달랐다. 겉은 그대로 두고 안쪽만 리모델링을 했는지, 미술관에서나 볼 법한 깔끔한 흑색의 대리석으로 마감된 고급스러운 계단이 위를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뒤에서 최기원이 등 가까이 다가왔고 결국 난 주춤대며 핸드 레일을 붙잡고 계단 위로 걸음을 옮겼다.
길게 이어진 계단에는 정확한 층의 명칭도, 구분도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내부를 슬그머니 살펴보았지만, 실내엔 불이 모두 꺼져 있어 그저 뻥 뚫린 어둠처럼 보였다. 몇 층인지 가늠하지 못한 채 바짝 긴장한 채로 더듬대며 계단을 올랐다.
“안으로 들어가요.”
숨이 옅게 차오르기 직전. 등 뒤에서 낮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마른침을 삼키고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기자, 최기원이 뒤에서 손을 뻗어 조명을 켰다.
반사적으로 찌푸린 시야로 갑작스러운 빛이 쏟아졌다. 이내 초점이 맞으며 휑한 내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넓고 단조로운 모노톤의 공간에는 비슷한 색감의 소파와 책상이 휑뎅그렁하게 놓여 있었다. 식은 커피가 든 컵, 반쯤 찬 재떨이, 바닥에 뒹구는 담요와 쿠션 등에서 생활감이 언뜻 엿보였다.
그 외에 가구가 있어야 할 공간에는 미완성 캔버스들과 물감, 붓, 팔레트 그리고 갖가지 도예 작품과 도록들이 난잡하게 쌓여 있었다. 개중에 몇 개는 이젤에 올려져 있고,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카메라와 스피커, PC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은 최기원의 스튜디오이자 작업실인 듯했다.
그가 잠을 자는 본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훨씬 정제되지 않고, 제멋대로인 날것의 공간. 나는 왠지 모르게 더욱 긴장되어 주먹을 말아 쥐며 그를 올려다봤다. 온기 하나 없는 냉골의 추위 때문에 이가 따닥, 따닥 부딪혔다.
최기원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후, 코트를 벗어 소파에 툭 던지듯 놓았다. 그는 멍청하게 서 있는 나를 앞서가 의자를 빼 앉고 컴퓨터를 켰다. 담뱃갑을 흔들어 얇은 담배를 잇새에 물고 불을 붙인 그가 입술 사이로 연기를 뱉었다. 언뜻 듣기엔 느른한 한숨처럼 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블랙박스의 메모리 카드를 본체에 꽂았기 때문이다.
“…….”
“…….”
그가 마우스를 움직였을 때. 고요한 실내에는 경호원과 내가 헐떡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면 유리만을 찍고 있는 잔잔한 영상과는 반대로 내가 경호원을 밀어내는 소리, 시트에 등이 거칠게 파묻히는 소리, 얌전히 있으라며 나를 윽박지르는 남자의 갈라진 목소리가 수치스럽게 오디오를 채웠다.
최기원은 몇 번이고 영상을 반복적으로 되돌렸다. 점점 예전 날짜로 거슬러 올라간 블랙박스는 결국 경호원이 나를 처음으로 협박했던 날의 음성도 고스란히 읊었다.
최기원은 만족할 만큼 영상을 곱씹은 후에야 재생을 멈추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의자를 돌려 내 쪽을 향한 그의 시선이 나를 꿰뚫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으나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교차해 부여잡고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
“걸레 다 됐네.”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로 뱉은 신랄한 비판이었다. 모멸감에 이를 악물었다. 울컥 눈물이 차올라 순간적으로 변명이 튀어나오려 했다. 최기원이 그냥 넘어갈 리 없는 문제라는 건 알지만, 그 상황이 강압적이었다는 건 누가 들어도 분명했다. 최기원은 내 숨이 미세하게 거칠어진 것을 눈치채고는, 제 턱을 매만지며 낮게 읊조렸다.
“알아. 그래도 말을 했어야지.”
“…….”
“어떻게 굴어야 네가 덜 손해 볼지…. 이제 머리 굴릴 때도 됐잖아.”
그때 아래층에서부터 희미하게 들리던 소음이 점차 선명해졌다. 무언가 턱에 툭, 툭 받히며 나는 묵직하고도 기묘한 소리였다.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입을 벌리며 다급하게 시선을 흩뜨렸다.
남자 두 명이 이미 혼절한 것으로 보이는 경호원의 팔을 붙잡고 계단에서부터 끌며 가까이 다가왔다,
물에 젖은 포대 자루를 끄는 소리와 함께 최기원의 발치 곁으로 쓰러진 경호원이 버려졌다. 그들은 경호원을 버려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유히 자리를 떴다.
모로 쓰러진 몸뚱이는 얼핏 봐도 성한 피부색이라곤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의식이 없는 것으로 보였으나, 지금은 그가 살아 있는 것인가 하는 섬뜩한 의문이 피어올랐다.
“흐….”
점점 숨이 가빠 와 호흡하기가 버거워졌다. 내가 맞을 것이 겁나는 게 아니었다. 몇 시간 전까지 멀쩡하게 일하던 건장한 남자가 저런 몰골로 나뒹굴고 있는 현실이 두렵고 무서웠다. 최기원은 블랙박스를 확인하고, 상황을 파악한 뒤에 저 남자를 해한 것이 아니었다. 무조건적인 폭력, 최기원 특유의 비이성적인 해결 방식이었다.
“긁지 말래도.”
최기원이 목걸이 주변을 벅벅 긁고 있는 내 손을 움켜쥐고 내렸다. 자각하지도 못한 채 목을 죽죽 긁어내리고 있었던지, 뒤늦게 목 주변으로 화끈대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그대로 내 손을 끌어, 기어코 경호원 앞으로 나를 데려다 놨다. 몸에 힘을 주고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엇을 하든, 제발 그쳐 달라는 마지막 부탁이었다.
“차 안에서처럼 해 볼래?”
“흐, 윽….”
“너 기다리잖아.”
그가 구둣발로 경호원의 몸을 툭 치자, 마치 시체처럼 몸이 기괴하게 반동했다.
“왜? 피 묻은 건 싫어?”
“그, 그만….”
견디다 못해 작은 목소리로 반항하는 순간, 최기원은 내 뒷덜미를 강하게 눌러 힘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게 했다. 고개가 확 처박힘과 동시에 경호원의 몸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고, 비릿한 피와 땀 냄새가 코끝까지 치밀어 올라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아까처럼 고분고분 빨아 봐. 알아? 얘가 좋아서 일어날 수도 있잖아.”
“으, 윽……. 욱…….”
헛구역질이 일었다. 몸서리치며 등을 들썩이는 나를 보며 혀를 짧게 찬 최기원이 뒷덜미를 누르던 손을 떼어 냈다. 다리가 풀린 난 그대로 옆으로 주저앉으며 멀겋게 떨어지는 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냉골처럼 차가운 바닥을 짚고 겨우 앉아 있는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최기원이 앉아 있는 나를 내버려 두고 걸음을 옮겼다. 소파에 앉아 다시 담배를 문 그가 짓뭉개진 발음으로 나에게 말했다.
“너를 이렇게 팼다간 아마 죽겠지?”
“…….”
“…그건 싫은데.”
쓴 담배 연기가 그의 주변으로 희뿌옇게 퍼졌다. 돌연 최기원이 테이블 위의 유리 재떨이를 집어 들더니 벽을 향해 강하게 내던졌다. 차캉, 하고 깨지는 파열음에 몸을 파르르 떨며 어깨를 말았다. 최기원이 한쪽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낮게 욕을 짓씹었다.
“씨발, 화가 안 풀려.”
다시 한번, 버거울 정도의 정적이 시작되었다. 아무 말 없이 장초를 반쯤 피우고 책상 위에 제멋대로 비벼 끈 최기원이 고개를 뒤로 젖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최기원이 화를 가라앉히려 애쓰는 동안, 볼 위로 흘러내린 눈물이 조금씩 말라 갔다.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최기원이 미약하게 할딱이는 나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벗어. 입고 있는 거 전부.”
차갑게 얼어 있는 목소리였다. 조금은 날 선, 그리고 하얗게 예민해진 그의 얼굴을 한 번 눈에 담은 난 싸늘한 바닥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목도리, 두꺼운 코트, 니트와 바지가 차례대로 바닥 위에 떨어졌다. 자칫하다간 눈물이 터질 것 같았으나 애써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정돈했다. 망설일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행여 최기원이 화를 가라앉히지 못해 괜한 불똥이 주언이에게 튈까 두려웠다. 맞고, 벗고, 깔아뭉개어지는 일들에 무의미한 거부감을 표했다간 괜히 그를 자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면 처음보다 크게 화가 나거나 힘들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아릿하게 쓰리고, 조금 서러울 뿐이었다.
드디어 미쳐 가는 걸까. 하지만 여기엔 정상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경호원이고 최기원이고 전부 미친놈투성이니까, 나도 얼른 미쳐야 그나마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추악한 악취야 처음에나 토악질이 일 뿐, 자의와 타의에 묻혀 뒹굴대다 적응하고 나면 끝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팔을 교차해 목 티를 벗었고, 양말과 속옷까지 벗었다. 냉기를 머금은 공기 때문에 전신이 후들거렸다. 최기원의 손짓을 따라 하얗게 질린 발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갔다. 최기원은 소파 앞 바닥을 가리켰고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으…웁.”
최기원은 내 뒷머리를 낚아채 사타구니로 얼굴을 끌어당겼다. 벨트와 지퍼의 딱딱한 부분이 코와 입술을 무자비하게 긁고 눌러, 생리적인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 그가 휘둘리는 대로 움직였다. 그는 그렇게 나를 끌어 아래에 파묻은 채 작고 긴 숨을 뱉어 냈다. 입술 끝과 뺨에 두툼하게 발기한 남성이 고스란히 닿았다.
그가 뒷덜미를 누르던 손을 떼어 내고, 나는 천천히 숙였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가 손을 내려 내 귓불을 천천히 만졌다. 부드럽게 귓바퀴를 쓰다듬고 뺨으로 내려온 손이 붉게 튼 광대뼈와 코끝, 입술을 차례로 문질렀다. 나를 뜯어보듯 자세하게 관찰하는 눈동자가 너무나 버거웠다.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흩뜨리자마자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입술 안으로 푹 들어왔다.
“…….”
긴 손가락 두 개가 입술을 꾹 누르고 혀를 동그랗게 돌리며 입 안 곳곳을 휘저었다. 입을 벌리고 숨을 내뱉으며 간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손가락은 혀뿌리와 목구멍을 쿡, 찔렀다 혀를 눌렀다 하며 마치 키스를 하는 사람처럼 입 안을 애무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무릎을 꿇은 채로 그의 손가락을 빨고 있는 내 고개가 더 젖혀지며 목구멍이 좁아졌다. 그 주변을 손끝이 무심하게 찌를수록 점점 숨결이 불규칙하게 튀고, 오래 다물리지 못한 입가로는 말간 침이 턱으로 흘렀다.
“흐, 크…읍.”
헐떡임을 숨기지 못할 무렵 돌연 손가락이 입 안을 빠져나갔다. 최기원은 쿨럭대는 내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는 소파 바로 앞의 테이블에 나를 앉히고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대고 파묻히듯 앉았다.
“제대로 올라가.”
겨우 엉덩이 끝을 붙이고 있던 상태에서 아예 올라간 뒤 무릎을 꿇었다.
“다리 벌리고. 내 쪽으로.”
잠시 입술을 떨고, 천천히 다리를 풀어 엉덩이를 테이블에 대고 앉았다.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의 온도가 그대로 살갗에 닿자 허벅지에 소름이 돋아났다. 주춤대며 다리를 벌렸다. 말라비틀어진 몸과 축 늘어진 성기가 그에게 가감 없이 드러났다. 잊었던 모멸감이 다시 피어올라 귓가가 말릴 새도 없이 뜨거워졌다.
“혼자 해 봐.”
무감한 얼굴에서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이렇게 종종 내가 혼자 하는 모습을 즐겨 보곤 했다. 강간하는 기분 들게 하지 말라는 싸늘한 윽박질과 함께였다. 나는 손을 내려 힘을 잃고 축 늘어진 성기를 쥐었다. 차가운 손가락에 힘을 주고 미지근한 살덩이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
그러나 지금 상황에 쉽게 발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애써 문지르고 비벼 보았지만 성기는 반쯤 힘을 받았다가도 다시 볼품없이 늘어졌다. 속이 타들어 가 손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눈을 들어 최기원을 흘긋 살폈으나 그는 무덤덤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구멍도 써야지.”
차가운 지시에 입술 안쪽을 깨물며 쥐고 있던 성기를 내려놓았다. 떨리는 손을 더 뻗어 내려 엉덩이 아래로 가져갔다. 대충 위치를 더듬어 검지를 집어넣으려 힘을 주고 구멍을 눌렀다. 그러나 바짝 말라 좁아진 구멍은 손가락 하나도 버거운지 두 마디가 채 들어가지 못하고 뻑뻑하게 멈췄다.
난 미간을 찌푸리며 손목에 더 힘을 주고 손을 밀어 넣었다.
“윽…….”
살이 밀려 들어가는 마찰이 심했고 아릿하게 아프기까지 해 작은 신음이 터졌다. 결국 몇 번 더 애써 손가락을 욱여넣어 보다 더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을 빼냈다. 이렇게 우물쭈물 시간을 허비하다간 최기원에게 혼날 것 같았다.
잠시 숨을 고른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입 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동시에 최기원이 낮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목과 귀에 피가 몰려 뜨거워진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젤도 로션도 없다면 침이라도 써야 했다.
혀가 손가락을 쭙쭙 빠는 낯부끄러운 소리가 넓은 공간을 울렸다. 나는 두 손가락을 충분히 적신 후에야 다시 손가락을 내려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하나를 집어넣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다시 꾹 다물린 구멍을 더듬고, 침으로 미끌미끌해진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여전히 좁고 빠듯했으나 아까보다는 수월하게 손가락이 구멍을 벌렸다. 인상을 조금 쓰고 손목에 힘을 더 주니, 마디가 툭툭 걸리던 손가락이 어느새 뿌리까지 쑥 들어갔다.
“아….”
매번 힘 빼라며 허벅지 안쪽과 엉덩이를 아프게 때렸던 최기원의 말이 떠올렸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 구멍은 두 개의 손가락을 ‘끊어 먹으려는 듯’ 조였다. 나도 머릿속으로 제발 힘 좀 빼라고 애원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손가락이 더 마르기 전에 얼른 손목을 둥그렇게 굴렸다. 엉덩이 안쪽 살이 꾸물렁 손가락을 감아 오고 허벅지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구멍 안쪽을 열심히 돌려 가며 최대한 빨리 성기를 세우기 위한 지점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엉덩이 사이로 이물감이 들어온 느낌만 날 뿐 좋지 않았다. 그저 뜨끈하고 미끄덩한 감각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성감대는 고압적인 분위기와 낯선 환경에 꽁꽁 자취를 감춰 나를 더 애먹게 만들었다.
발기를 하다 만 성기는 여전히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반대 손을 들어 성기를 쥐었다. 귀두도 문지르고 고환도 쓸어 보았다. 구멍을 서툴게 늘리는 손은 다급함이 묻어 점점 행동이 거칠어졌다.
춥고, 긴장되고 수치스러웠다. 정작 이런 짓을 시키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최기원은 아래위로 꼼꼼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고, 뒤에는 시체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사람이 널브러져 있었다. 평상시에 최기원과 몸을 섞어도 붓기 일쑤였던 뒤였는데, 이러한 상황에 강제로 쑤셔 대자 결국 구멍에서 피가 비어져 나왔다.
침과 피가 뒤섞여 더럽혀진 구멍을 바라보던 최기원이 결국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고통을 느끼지도 못한 채 정신없이 구멍을 들쑤시고 있던 내 손목을 낚아채 구멍에서 빼내고 나서야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아, 흐, 으, 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차올라 속눈썹을 깜박이는 것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볼 아래로 떨어지며 최기원이 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반쯤 내리깐 그의 눈동자가 그림자에 가려 쉬이 읽히지 않았다.
내 손목을 잡은 최기원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는 미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가 징그러운 것일까. 그렇지만…. 그와 할 때는 거의 찢어졌다. 더한 꼴도 많이 봤으면서 왜 나를 저런 식으로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오해하기 좋은 표정이었다. 설핏 살피면 화가 난 것 같기도 하지만, 그의 무감한 얼굴에 깃든 미묘한 당혹스러움은 나를 딱하게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최기원은 나를 밀어 테이블 위로 눕혔다. 차가운 바닥에 뒷머리가 살짝 부딪히고, 등까지 서늘하고 매끄러운 테이블의 감촉이 와 닿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팔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너 일부러 그래? 시위하는 거야?”
그가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허벅지에 꽉 껴 더 내려가지 않고, 살짝 벌어지기만 한 정장 바지에서 퉁퉁한 성기를 꺼낸 그가 아래위로 성기를 쓸며 물었다. 일부러 한 행동은 없었다. 그가 또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으나 목걸이 때문에 변명할 수도 없어, 그저 멍청이 같은 소리만 내며 입술을 달싹대고 말았다.
그가 몸을 숙였다. 테이블 위로 늘어진 내 무릎 뒤를 잡고 끌어 올린 그가 곧장 부어오른 입구에 귀두 끝을 맞췄다. 그의 성기가 자비 없이 구멍을 벌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휘저을 때는 이물감이라고만 느껴졌던 사소한 아픔이, 이제는 생살을 뜯고 근육을 벌리는 둔통이 되어 엉덩이를 쪼갤 듯 덮쳐 왔다. 본능적으로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어딘가 핀트가 나간 최기원에게 더는 반항하지 않고 싶었으나 팔다리가 벌레처럼 버둥거렸다.
“아, 흐윽!”
성기가 힘겹게 안쪽을 파고들었으나 기둥의 중간 이후부턴 빡빡하게 조여든 안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파들파들 떨렸고 나는 어떻게든 깊은 삽입을 피하고자 어깨를 말고 발끝으로 테이블을 밀며 꾸물꾸물 움직였다. 신음을 참지 못하자 목걸이가 웅웅 아프게 진동했다. 숨이 뒤엉켜 괴로웠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한 공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씨발…….”
몇 번 허리를 앞뒤로 움직여 보던 최기원은 낮게 욕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허리와 골반이 이어진 부분을 세게 붙잡았다. 제 몸을 밀어붙이며 동시에 잡은 허리를 아래로 당기자, 몸이 힘없이 아래로 딸려 가며 성기의 끝부분까지 안쪽으로 퍽 쳐들어왔다. 부릅뜬 눈에 핏발이 서고 눈물이 핑 돌았다.
“끄으…흑!”
서서히 빠져나간 성기가 다시 처박혔다. 강제적으로 벌어진 구멍에서 성기가 오가는 동안 나는 주먹을 꾹 쥐어 입으로 가져갔다.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주먹 쥔 손을 깨물었다. 핏줄이 비치는 손등에 피 맺힌 잇자국이 남았다. 최기원이 얼른 사정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작업실에 테이블이 삐걱대는 소리만 들렸다. 어느새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고 최기원은 땀이 맺힌 가슴과 배를 문지르며 아무 말 없이 허릿짓을 이어 나갔다. 아래의 아픔은 이제 무뎌졌고 다리와 팔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움직임에 맞춰 흔들댔다. 그가 성기를 빼내고 나를 뒤집었다.
초점이 흐릿한 시야가 휙 뒤집히고, 나는 생선처럼 뒤집혀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최기원이 내 허리를 붙잡아 끌어 올리자, 엉덩이만 위로 내민 수치스러운 자세가 되었다. 피떡이 된 구멍이 채 다물리기 전에 다시 성기가 그 빈틈을 채우고 들어섰다. 귀두와 울퉁불퉁한 핏줄이 구멍을 지났고, 자세 때문에 귀두는 더 깊은 곳까지 들어와 기어코 전립선을 자극하는 위치를 누르기 시작했다.
“으, 으흑.”
“어, 소리가 아까랑 다르네.”
“흐, 응, 읏. 윽.”
“그래. 여기?”
철퍽대며 흔들리기만 하는 나를 어르고 달래며 그는 집요한 삽입을 이어 나갔다. 성기가 휘저은 배 안쪽이 잘게 떨리며 그의 기둥을 물고 딸려 나가기 시작했다. 엉덩이 살 사이로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등허리가 제멋대로 꿈틀대며 비틀리고 휘었다. 파르르 경련하는 몸은 곧 한계에 임박한 듯 움찔댔고, 힘없이 늘어지기만 했던 성기는 어느새 배 아래에 올라붙어 있었다.
최기원이 배 앞으로 손을 집어넣어 단단해진 귀두 끝을 뭉개듯 흔들자 결국 참고 참던 신음이 울음처럼 터져 나왔다.
“좆이 섰네.”
“건, 드리지 말아, 흑, 말아, 아으, 주세요, 흐…윽.”
목이 타는 것 같아 더는 소리 내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그에게 빌고 빌었다. 지금도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배 안을 주먹으로 때리는 듯한 폭력적인 성감을 버텨 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의 손이 성기까지 자극하자 이젠 두렵기까지 했다.
“제, 발 으흑. 으….”
아픔이 두려운 것은 전혀 아니었다.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쾌감이 너무나 치욕스러웠고, 믿기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이런 몰골로, 다른 사람이 쓰러져 있는 공간에서까지 수치스럽게 신음하고 싶지 않았다.
“아, 아, 제흐, 제발, 하아, 악….”
그러나 최기원의 큰 손은 귀두부터 기둥까지를 단번에 붙잡고 능숙하게 자극했다. 앞에는 곧 쌀 것 같은 사정감이, 뒤로는 배 안쪽을 경련하게 하는 뜨거운 자극이 동시에 나를 덮쳤다. 숨이 간헐적으로 끊기기 시작하고 몸에 바짝바짝 힘이 들어갔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늘어진 손이 미끄러운 테이블 위를 손톱으로 긁고 쥐어짰다.
“아, 안 돼….”
그리고 다급하게 손을 내려 최기원의 손목을 붙잡는 순간 내벽 안에서부터 시작된 절정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발가락이 곱아 들고 전신이 뻣뻣해졌다. 결국 빨갛게 피가 몰린 귀두 끝에서 묽은 액이 속절없이 터져 나왔다. 머리맡에서 최기원의 흐뭇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터져 흐른 정액은 그의 손을 모두 적시고도 테이블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는 힘이 풀려 자꾸만 테이블로 쓰러지려는 나를 붙잡아 일으키며 허리를 쳐올렸다. 깜빡깜빡 의식이 흐려지려고 해 최기원이 무어라 말을 걸어오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리질 않았다. 사정 이후의 자극은 그저 핏줄 하나하나를 서게 만드는 예민한 고통뿐이었다. 정신을 잃을 때는 죽은 이처럼 몸을 늘어뜨렸다가 정신이 들 땐 자지러지듯 몸을 뒤틀었다. 최기원은 뒷덜미와 날개 뼈에 차례로 입술을 묻고 안쪽 깊이 성기를 쑤셔 박았다.
“하…….”
배 안쪽에 뜨거운 것이 확 번졌다. 사정 이후에도 성기는 몇 번 더 느리게 구멍을 드나들었다. 그가 사정한 정액이 구멍을 빠져나오는 기둥에 묻어 밖으로 역류했다. 배 안을 꽉 채우던 그의 것이 다 빠져나가자 엉덩이 사이로 액이 주르륵 불쾌하게 흘러나왔다. 난 그대로 테이블 위로 엎어져 가쁜 숨을 색색댔다.
최기원은 테이블 위의 휴지를 뽑아 제 성기를 닦고 아래를 정리했다. 그는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지고, 목덜미에 땀이 조금 맺혔을 뿐, 방금 관계를 맺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반면 나는 온갖 체액을 뒤집어쓴 채로 테이블 위에서 눈만 깜빡이며 늘어져 있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았다. 나는 겨우 테이블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배와 허리에 힘이 들어가자마자 구멍에서 다시 정액이 주륵 흘러나왔다. 담배에 불을 붙인 최기원이 재를 털며 웃음을 터뜨렸다.
“닳아 빠져선 이제 남의 좆 아니면 서지도 않아.”
이제 그의 비딱한 말에 화를 낼 의지조차 사라졌다. 테이블 끝으로 손을 뻗을 힘이 없어, 최기원이 쓰고 바닥에 떨어뜨린 휴지를 주워 배와 허벅지에 묻은 액체를 닦았다. 자꾸만 몸이 제멋대로 휘청댔다.
“아….”
고통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른 후유증도 컸다. 목을 뜨거운 칼날로 난도질한 통증이 지속됐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와 진물이 쇄골까지 흘렀다. 불그스름한 고름의 흔적도 손등으로 문질러 지웠다. 전신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직 쓰러져 있는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미동도 없다. 혹시 죽은 것 아닐까, 괜히 이 범죄 행위에 나까지 얽혀 들까 신경이 곤두섰다.
“그나저나. 너 왜 사과 안 해?”
최기원이 담배를 비벼 끄며 물었다. 나는 잠시 멍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최기원은 특유의 비딱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이제 내 목소리라고 할 수도 없는, 잔뜩 쉰 목소리로 사과를 남겼다. 최기원은 내가 남긴 무성의한 사과를 듣자마자 이를 꽉 깨물었다. 턱의 근육이 움찔하는 모습을 보니 단단히 심사가 뒤틀린 듯했다. 하지만 진심을 담을 수 없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었다.
“뭘 잘못했는데?”
학생을 세워 놓고 훈계하는 선생처럼 다그친다. 그 모습에 돌연 웃음이 터져 버렸다. 피식 헛웃음을 짓는 나를 바라보는 최기원의 표정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반반한 얼굴을 보며 멍하게 웅얼댔다.
“걸레같이… 굴어서.”
아마 최기원이 원하는 대답이리라. 진동이 왕왕 울렸지만 이제 조금은 익숙한 고통이었다. 눈가를 찌푸리고 말았다.
“저……. 좀 씨, 씻고 싶어요.”
난 그 말을 끝으로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핑핑 돌고 위는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걸을 때마다 부어오른 구멍은 화끈거렸고 후들대는 다리는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꺾일 것처럼 위태롭게 몸을 지탱했다. 난 발치에 떨어져 있는 옷 몇 개를 주웠다. 무작정 니트를 꿰어 입고 속옷 없이 바지를 입었다. 추웠다. 너무나도.
계단 쪽에는 여전히 경호원이 있어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나는 커다란 작업실 구석에 있는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닫고 잠근 뒤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콸콸 쏟아지는 냉수를 손바닥으로 받아 연거푸 얼굴을 씻었다. 눈물과 침으로 범벅 된 얼굴이 물에 흠뻑 젖었다.
니트를 끌어 올려 배에 묻은 액체의 흔적도 씻었다. 바지를 내린 뒤 아래에도 물을 묻혀 벅벅 닦았다. 조금 난 음모 위로 내가 싸지른 정액이 엉겨 붙어 지저분하게 얽혀 있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최기원의 말마따나 그의 손을 타고서야 사정했다. 이런 곳에서도 최기원의 손길에 흥분해 아래를 세웠고, 오르가즘에 겨워 울부짖었다니.
‘병신 같은 걸레 새끼….’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다. 깨끗한 물로 씻어 내도 특유의 썩은 내가 가시질 않았다. 최기원도 나를 보자마자 악취를 어떻게 좀 하라고 그랬었다. 그는 처음부터 알아본 것이다. 내가 이 추잡한 관계를 받아들일 구제 불능이라는 걸.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 앙상하고 메마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는데, 내가 최기원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일도 그랬다. 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모든 건 끝이 있다는데, 나는 이 거래의 끝을 지켜보는 것에 두려움이 생겼다. 암담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회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었다.
분명 예전엔 행복했는데, 이제 그게 뭔지도 어렴풋해졌다. 점점 내가 망가져 가는 걸 보고 있기가 무서웠다. 마치 결말이 뻔한 공포 영화를 느리게 재생해 놓은 것 같다. 뾰족한 턱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세면대를 짚고 선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힘이 바짝 들어갔다.
‘집에 가고 싶어.’
문득 깃든 생각이 순식간에 몸집을 키웠다. 한번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빠지자 목이 미친 듯이 가렵기 시작했다. 나는 손으로 목을 벅벅 긁으며 버겁게 숨을 내쉬었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고 다시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저 문을 열고 나가면 펼쳐질 현실이 끔찍하게 두려웠다.
쓰러진 경호원과 나를 벼르고 있는 최기원.
더는 어떤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옛날처럼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붙이고 싶을 뿐.
“하아, 하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급격하게 어지러웠다. 콸콸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화장실 주변을 두리번댔다. 변기 하나와 세면대뿐인 넓고 깔끔한 화장실이었다. 그리고 변기가 놓인 구석의 벽 위로 환기를 위해 뚫린 조그만 창문이 보였다.
까맣게 어두운 밤하늘을 그림처럼 담고 있는 네모난 창. 그걸 보자마자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저기가 나의 유일한 숨구멍이자 탈출구다. 나는 그곳을 향해 절뚝대며 걸음을 옮겼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를 밟고 올라섰다.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 창문의 잠금 레버를 끌어 내렸다.
“흐, 으…….”
손가락 끝으로 창문을 밀자 뽀득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잠시 숨을 고르며 동향을 살폈다. 여전히 물 쏟아지는 소리가 났고, 최기원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껏 팔을 뻗어 창틀을 붙잡아 매달렸다.
발로 변기의 상부 물탱크를 부분까지 밟고 올라섰다. 팔뚝이 창틀에 걸쳐지고 나는 발을 버둥대며 창문을 넘어가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다시 한번 변기 물탱크를 힘껏 박차고 창틀에 상체를 걸친 순간, 발끝에 밀린 물탱크 뚜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와장창하는 파열음이 귀를 때렸다. 타일에 부딪힌 도기가 산산조각이 났다.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더 버둥댔다. 창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어둑해서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몸을 내밀었다. 숨이 그대로 넘어갈 것처럼 헐떡댔다. ‘제발, 제발’ 하는 혼잣말 때문에 목에서는 다시 피 맛이 솟구쳐 올랐다.
쾅쾅쾅.
그리고 화장실 문이 강하게 흔들렸다. 잠긴 고리가 달칵대며 돌아가다, 다시 쾅쾅쾅 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문 열어.”
“으, 시, 싫어…….”
들려도 그만,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나갈 것이다. 어딘지도 모르는 이런 곳에서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혼자 있고 싶었다.
누구를 거절하고 또 누구에게 애원하는지도 모를 ‘제발, 싫어’라는 말만 반복하며 창문에 매달렸다. 발로 벽을 밀며 올라타려 했지만 젖은 발끝은 자꾸만 타일 아래로 죽죽 미끄러지기만 했다. 쾅쾅쾅쾅, 부서져라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최기원의 싸늘한 목소리가 틈새를 비집고 들려왔다.
“부수고 들어가기 전에 열어.”
“흐으, 윽. 싫, 아, 싫어…….”
눈을 질끈 감으며 팔에 더 힘을 줬다. 전신이 땀에 젖어 미끄덩댔고 점점 손아귀에도 힘이 풀려 갔다. 이대로 떨어지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벽을 박차고 창문으로 몸을 밀어 넣으려 버둥대는 순간,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거센 소리가 문을 때렸다.
쾅, 쾅, 쾅.
결국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거세게 흔들리던 문고리가 덜컥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자 최기원이 소화기를 내던지고 화장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으, 흑… 으흑!”
나는 발을 버둥대며 몸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원래라면 바깥을 잘 살펴, 실외기 같은 밟을 것을 찾을 생각이었으나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결국 몸이 반쯤 창문 밖으로 벗어났고, 무게에 아래로 휘청 쏠리기 시작했다. 흠뻑 솟아난 식은땀은 어느새 등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갈… 흑, 저리, 가….”
“백나언…!”
2층 정도 올라왔으니 떨어져도 죽지는 않겠지. 몸을 바깥으로 내던지려는 요량으로 다리를 박찬 순간, 거세게 발목을 움켜쥐는 악력과 함께 몸이 사정없이 딸려 내려갔다.
“아윽!”
쿠당탕 소리와 함께 최기원과 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바닥을 짚은 손목이 기괴하게 꺾였고, 대비 없이 떨어진 머리와 몸이 차례로 타일에 거세게 부딪혔다. 최기원은 옆으로 쓰러져 바르작대는 나를 거센 손길로 일으켜 세웠다.
“장난해? 너 지금 여기가 몇 층인 줄 알고 그렇게…!!”
최기원이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나는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눈을 끔뻑였다. 난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파악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그저 겁에 질리고 두려움에 절여져 눈물을 뚝뚝 흘리며 파르르 떨었다.
“하아, 집에… 집에…, 가려고…….”
최기원이 붙잡고 있는 팔뚝이 으스러질 것같이 아팠다. 나는 그가 붙잡고 있는 팔을 빼려 몸을 뒤틀었다.
“씨발 새끼가 정신 안 차리지.”
잔뜩 뒤틀린 최기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젖은 눈꺼풀을 들어 올려 겨우 눈을 맞추니, 최기원은 난생처음 보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눈빛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뒤지고 싶어서 그래?”
“아, 흐, 으으, 아니, 아니……. 집에…….”
“네가 나 없이 집에 어떻게 가. 어?”
“으, 흐윽……. 나, 갈래…….”
“그러잖아도 참고 있는데. 죽여 줘?”
평소와 달리 여유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와 눈빛이었다. 최기원이 불시에 손을 뻗어 가슴을 거세게 밀었다. 쿵, 소리를 내며 몸이 벽에 부딪혔고 큰 충격에 잠시 헐떡이는 사이 최기원의 한 손이 목을 감싸 왔다. 턱 아래와 목걸이 바로 위 사이의 옴폭한 지점을 꾹 누르는 순간 숨통이 틀어 막혔다.
“컥!”
“너는 꼭 사람을 쓰레기로 만들더라.”
“크읍, 크억…….”
손아귀의 악력이 목을 조르는 것이 아닌 부러뜨릴 것처럼 세게 조여 왔다. 입이 벌어지고 몸이 경련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나는 본능적으로 최기원의 손목을 붙잡았다. 떨어지며 잘못 짚은 왼손은 끌어 올리지도 못하고, 오른손만 들어 올려 그의 손을 힘껏 밀어냈다.
하지만 최기원은 정말 나를 죽일 작정인지 손에 힘을 빼 주지 않았다. 산소가 차단되며 눈앞이 점점 거멓게 물들어 갔다. 심장이 쿵쾅쿵쾅 조여 오고 언뜻 최기원의 표정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목을 조르고 있는 건 그면서, 최기원은 제가 더 아픈 것같이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아무리 손을 밀어내도 놓아주지 않자 나는 어느새 최기원의 손목을 피가 날 정도로 긁고 있었다. 하지만 최기원은 다른 손까지 들어 올려 내 목을 졸랐다. 이제 한계였다. 발밑이 아득해지고 최기원의 손목을 붙잡은 내 손에도 점점 힘이 풀렸다.
“끄…….”
죽죽 손목을 긁던 손이 툭 아래로 떨어지고 눈꺼풀 위로 눈동자가 넘어가기 직전, 최기원이 낮게 욕을 뇌까리며 목을 옥죄던 손을 풀었다. 난 그대로 다리가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쿨럭, 쿨럭. 끄으, 으헉… 쿨럭.”
미친 사람처럼 쿨럭대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시야가 핑핑 돌아 허우적대며 바닥을 긁던 중, 너덜해진 그의 손등에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았다. 이내 나는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그렇게 깜빡깜빡 정신을 잃고 다시 의식을 찾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머리채를 잡혀 화장실에서 끌려 나왔고, 정신 차리라며 몇 번 뺨을 아프게 얻어맞기도 했다.
잠깐의 도피는 마치 꿈같이 아득했으며 내 정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다시 작업실 한가운데로 끌려 온 나는 쓰러진 경호원을 보고 기겁해 무릎걸음으로 화장실을 향해 도망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간도 못 가서 최기원에게 붙잡혔다.
이번에는 정말 억울해서 눈물이 터져 흘렀다. 너무 늦어 버렸지만 그의 말대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 털어놓았다. 목걸이가 왕왕 울려 목을 헤집기에, 그걸 손으로 벅벅 긁으며 쉬어 빠진 목소리를 짜냈다. 저 사람이 나를 괴롭혔다고, 전부 저 사람 잘못이니까 제발 치워달라고, 그간 너무 무섭고 힘들었다고 빌었다.
그럼에도 그가 무언가 날 선 말을 뱉어 내 나는 손을 모아 빌었다. 죄송하다고 빌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온전히 믿어 주지 않는 그에게 작게 욕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나하나 기억하기엔 너무나 버거웠다. 다시 점멸하는 셔터처럼 툭 기억이 끊어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눈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뿐이었다.
“……으읍.”
눈에 이어 입도 틀어 막혔다. 팔 역시 뒤로 결박되어 있었고, 두 발목도 무언가로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보이는 것이 없음에도 두리번대던 나는 숨을 시근덕대며 최기원을 불렀다. 하지만 틀어 막힌 입술 사이로는 단어가 되지 못한 어그러진 소리만 뭉개졌다.
-네가 나를 못 믿는데.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정신을 잃기 직전, 또렷하게 들려왔던 최기원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말고 차가운 바닥에 옆으로 몸을 뉘었다. 목에서 올라오는 피 맛도, 버겁게 조여 오는 가슴도, 누군가 쥐어짜는 듯 아파 오는 배도. 모두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흐, 윽…….”
눈을 가리고 있는 부드러운 천이 무겁게 젖어 갔다. 속절없이 터져 버린 눈물에 숨이 모자랐다. 가슴이 울렁 부풀어 오를 만큼 시근덕대다 이를 악물고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최기원이 이런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 아니면 정말 이곳에 나를 내버려 두고 간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너무나 춥고 무섭다는 감정만 선연했다.
몸을 뒤척이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다. 여전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춥고 서늘한 바닥은 밤을 지새우며 더욱 싸늘하게 식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워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추위를 못 견딘 난 애벌레처럼 몸을 꿈틀대며 일어나려 애썼다. 뒤로 돌려 묶인 팔을 바닥에 짚는 순간 몸서리가 쳐졌다. 뼈와 근육이 비명을 질러 울음 섞인 숨이 터져 흘렀다. 아무래도 왼쪽 손에 탈이 난 것 같다. 오른손으로 아픈 손목을 더듬어 보자 건드는 곳 모두가 욱신대며 통증을 뱉어 냈다. 고개를 잘게 저은 후 오른손으로 땅을 밀어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깐의 움직임에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한참을 헐떡였다.
‘추워, 추워….’
열심히 다리를 휘저어 보았지만 발끝에 걸리는 게 없었다. 코트를 어디에다 벗어 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뭐라도 덮고 싶었다. 여긴 난방이 없는 걸까. 너무 추워서 이대로 잠에 빠져들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으, 이읍….”
목걸이의 진동을 참으며 최기원을 불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무릎을 세우고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조금이나마 남은 체온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졸았던 모양이다. 앉은 채로 잠시 꾸벅이다 정신을 차린 난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작게 바스락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감각 중 온전한 것은 청각뿐이었다. 분명 소리를 들었다. 미미한 소리를 향해 귀를 기울이며 숨을 죽였으나 이젠 그 어떤 것도 들리지 않는다. 누가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기가 무서워 입도 달싹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피비린내도 살짝 나는 것 같다. 순간 뒷골이 쭈뼛 서며 머릿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경호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인간. 설마 최기원이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간 걸까, 지금 이 공간에 경호원과 단둘이 버려진 것일까. 덜컥 가슴이 조여 왔다. 최기원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몸을 잘게 떨며 엉덩이를 뒤로 밀었다. 어디에 경호원이 쓰러져 있는지 방향을 가늠하지 못했으나 그저 멀어지고 싶다는 공포감에 뒷걸음질을 쳤고,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숨을 헐떡이며 무릎을 세워 쭈그렸다. 두려움에 떨리는 숨이 코로 색색 흩어졌다.
차라리 정신을 잃기 바랐으나, 나는 잠들지 못했다. 조용한 공간에 눈이 가려진 채 깨어 있는 건 너무나 잔인한 벌이었다. 까맣고 고요한 공간에서 나는 모든 소리와 냄새, 얼핏 떠오르는 형상들과 싸우며 속절없이 시간을 죽여야 했다.
자꾸만 시체 썩는 악취가 나서 숨을 참아 보았다. 하지만 입이 막혀 있어 밭은 숨을 뱉어 낼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 다시 물밀듯 썩은 내가 밀려왔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를수록 손목은 더욱 욱신댔고, 위통은 허리를 펼 수도 없을 만큼 심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몸이 덜덜 경련할 만큼 극심했던 추위는 다른 통증에 가려져 이제 잘 느껴지지 않았다. 발가락을 둥그렇게 움츠리고 열이 오른 이마를 무릎에 기대었다. 코로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이, 내가 느끼기에도 점점 옅어져 갔다.
그때 누군가 바닥을 갉작댔다. 아까부터 잊을 만하면 나는 괴이한 소리다.
“흐, 으으…….”
무릎에 이마를 박고 떨었다. 아무래도 경호원이 있는 것 같다. 아니, 그는 여기에 있다. 살려 달라고 말을 못 해 나를 보며 바닥을 긁고 있는 것이다. 뒤로 꺾인 채로 피로 물든 손톱이 대리석 바닥을 죽죽 긁는 모습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다며 웅얼웅얼 말을 건넸다. 하지만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옆으로 쓰러져 있던 나는 끙끙대며 눈을 떴다. 배가 아팠다. 먹은 게 없는데 왜 이렇게 배가 아픈지 모르겠다. 다시 일어설 힘이 없어 바르작대며 뒤척였다.
다친 손목은 끈이 꽉 낄 정도로 부어올라 가만히 있어도 아팠다. 지금이 몇 시인지, 도대체 최기원은 언제 다시 올 것인지 몰라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서러움에 울음이 왈칵 터졌다. 옆으로 누운 채 소리를 죽이고 울먹였다. 그러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을 긁는 손톱 소리가 났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젠 경호원이 얼른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꾸만 바닥을 긁어 대는 손을 잘근잘근 짓밟는 상상을 했다.
***
“으… 우?”
누군가 열이 오른 몸뚱이를 건드렸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 바지가 벗겨졌다. 발목이 묶여 있어 무릎까지만 내려가고, 엉거주춤 웅크린 맨살에 차가운 공기가 고스란히 닿았다. 발을 버둥거려 보았지만, 물속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움직임이 더뎠다.
묶인 발목째로 하체가 들어 올려져 다리가 높게 쳐들렸다. 아래를 훤히 내보이고 있는데, 아직 부어 있는 엉덩이 사이로 차가운 것이 후드득 떨어졌다. 줄줄 흐르는 진득한 액체가 고환과 바닥까지 미끈하게 적셨다.
“읏, 흐으.”
차가운 손가락이 젤 범벅이 된 사타구니를 뭉근하게 문지르다 도톰하게 부어오른 구멍 주변을 꾹꾹 눌렀다. 뻐끔대는 구멍 사이로 쉽게 손가락 하나가 들어왔고, 몇 번 아프게 푹푹 쑤시고 빠져나간 자리를 뭉툭한 귀두가 빠르게 꿰뚫었다.
“우, 윽!”
소스라치게 놀라 다리에 힘을 주고 뻗댔다. 하지만 성기는 망설임 없이 뿌리 끝까지 치밀고 들어왔다. 바닥에서 등이 떠오를 정도로 충격이 컸다. 생리적인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잠시 내벽을 느끼는 듯 가만히 있더니 이내 허릿짓이 시작되었다. 사정없이 흔들릴 때마다 바닥에 퉁퉁 짓눌리는 손목이 아파 몸을 버둥거렸으나 위에서 누르는 무게를 피할 길이 없었다.
“흐, 읏, 윽, 읍….”
최기원일 것이다. 분명 최기원인데 아무런 말이 없다. 비아냥대는 조롱이라도 좋으니, 그가 걸레라고 한 마디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 우느라 코가 막히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지금의 난, 내 위에서 헐떡이는 사람이 최기원인지 경호원인지 그게 아니면 모르는 누군가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흐으, 으, 읏… 흑!”
최기원이 당연하겠지만 가려진 눈앞에 펼쳐진 자극적인 상상이 이성을 흐리게 만들었다. 피투성이가 된 경호원이 피에 젖은 성기를 아래에 처박고 있는 것 같다. 그 상상에 잠식되어 갈수록 맞닿은 살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내벽의 이물감도 최기원의 성기가 아닌 것 같았다. 바닥에 뺨을 비벼 묶인 천을 끌어 내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피비린내와 손톱 갉작이는 소리가 자꾸만 커져 갔다. 결국 난 무너졌다. 입이 틀어 막힌 채로 악을 내질렀다. 목구멍이 찢어지든 말든 욕을 씹어뱉고 꺼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욕을 하다가도, 문득 최기원이라는 생각이 들면 급작스럽게 죄송하다고 풀어 달라 애원했다.
그러나 막힌 입과 성대를 짓누르는 목걸이 때문에 목소리가 망가져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푹푹 아래에서 찔꺽이며 나는 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소리를 내질렀다.
철퍽, 허리를 쳐올리던 움직임이 멎더니, 제멋대로 늘어나 헐렁해진 니트를 끌어 올렸다. 이내 니트의 아랫단이 얼굴을 뒤집어 덮었다. 차가운 손가락은 드러난 배와 가슴을 매만졌다. 땀에 젖은 유두 끝을 비틀다 아플 정도로 꾸욱 누르기도 했다. 이미 땀범벅이 된 맨살이 차가운 손바닥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절정이 다가오는지, 허릿짓은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더욱 격렬해졌다.
“흐읏! 으응, 으흑!”
짧은 탄식과 함께 몸이 접히고 음습한 혀가 가슴을 간지럽게 핥았다. 접합부로 기둥이 끝까지 들어와 고통 어린 신음을 뱉자 따뜻한 혀가 예민한 돌기를 달래듯이 빨아 주었다. 상대는 내 가슴을 할짝이며 배 안에 정액을 싸질렀다.
얼굴에 벌겋게 열이 올랐고,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혀 올랐다. 이 와중에도 내벽에 퍼지는 정액이 뜨겁게 선명했고, 잠깐 힘이 빠졌던 성기는 다시 구멍 안에서 서서히 발기했다. 성기가 슬슬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하며 지옥 같은 성행위가 재개됐다. 한 번 했다고 녹진하게 풀린 구멍은 떡처럼 성기를 따라 쭉 딸려 나갔다 다시 배 안으로 달라붙었다. 그때마다 작게 욕을 씹는 목소리가 들렸다.
숨이 모자랐다. 코 하나만으로도 들숨 날숨을 뱉느라 힘든데, 두꺼운 니트까지 얼굴을 덮으니 숨이 까딱까딱 넘어갔다.
저, 숨, 쉬고, 있어요?
물었지만 미약한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뚝, 가위로 끊어지는 것처럼 눈동자가 뒤로 넘어갔다. 누군가가 축 늘어진 내 다리를 추켜올리자 의지와 달리 몸이 쉽게 딸려 갔다. 바닥을 파내는 손톱 소리와 비릿한 피 냄새가 점차 흐려졌고, 슬슬 움직이는 성기의 둔탁함도 무뎌졌다. 지금이 몇 시나 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니 온몸에는 정액 냄새가 가득했다. 니트는 내려가 있었으나 바지는 입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젤과 정액이 차갑게 굳어 전신에 버석하게 굳어 있었다. 엎드린 채 쓰러져 있던 나는 멍하게 숨을 뱉었다. 지금은 새벽인가? 파란 해가 뜬 낮일까? 혹은 며칠이 흘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추워졌다. 냉기가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어 몸을 웅크렸다. 몸을 일으켜 차가운 바닥에 닿는 면적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닥일 힘도 없이 덜덜 떨리기만 했다.
갉작.
소리가 들리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빨간 분노가 치밀었다. 저 씨발 새끼가 또 바닥을 긁는다. 안 죽었나? 벌레 새끼가 정말 끈질기다. 저 개새끼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냥 바로 일러바쳐 버렸어야 했는데. 괜히 덮어 주겠다는 개소리에 속아서 이 꼴이 났다.
고개를 젖히며 씩씩댔다. 난 왜 창문을 넘어가려 했을까. 도망갈 게 아니라 울면서 빌었어야 했다. 그러면 불쌍해서라도 이렇게 묶어 두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경우의 수에서 가장 최악의 수만 선택했다. 어떻게 굴었어도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 텐데. 하다못해 창문에서라도 제대로 뛰어내렸어야 했다. 머리부터 떨어져서 개박살이 났었어야 했는데.
갉작.
다시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직 살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순간 소름이 돋아, 천 아래로 눈알을 열심히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미 경호원은 죽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면 자꾸만 무언가 바스락대는 소리는 뭘까.
씨발. 시체에 벌레가 꼬인 것 같다. 어깨가 흠칫 떨리고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사람이 죽고 나면 파리가 꼬이고 알을 까지 않는가. 벌레가 경호원의 썩은 몸을 파먹으며 자꾸 쩝쩝대는 소리를 내는 것 같다. 인제 보니 갉작이는 게 손톱 소리가 아니라 벌레가 빠르게 기는 소리 같기도 했다.
“흐으, 으.”
징그럽고 싫었다. 행여 벌레가 여기까지 기어 올까 나는 몸을 옹송그리고 더 벽으로 바짝 붙었다. 아찔하게도 지금 난 바지가 내려가 있었다. 다급하게 손을 뻗어 바지를 끌어 올리려 했으나 발목에 걸쳐진 옷자락에 손이 닿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엉덩이 사이를 매만졌다. 행여 걸레처럼 구멍이 벌어져 있어, 그 안으로 벌레가 들어오면 큰일이다. 다행히도 최기원이 마음껏 헤집어 놓아 잔뜩 부어오른 탓에 틈 없이 다물려 있었다. 그렇지만 혹시 내가 쓰러져 있는 사이에 벌레가 들어온 건 아닐까, 끔찍한 걱정이 들며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이젠 쓰러지면 안 된다. 아물아물 졸음이 밀려올 때마다, 나는 일부러 왼손을 아프게 비틀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대로 정신을 잃었다가 코나 아래 구멍으로 벌레가 꼬여 들었다간 낭패였다. 다행히도 갉작대는 소리는 가까이서 들리진 않았다. 아직 벌레는 경호원 주위에만 득실대는 것 같다.
색색대며 눈을 깜빡이던 나는 창문에 매달린 날 끌어 내리던 최기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최기원은 어떤 얼굴이었더라. 눈썹을 찌푸리며 찬찬히 더듬어 보아도 또렷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최기원은 왜 나를 꺼내 주지 않고 여기에 두는 걸까. 너무했다.
비참한 생각은 꼬리를 물었고 결국 숨어 있던 해답을 찾아냈다. 나는 ‘아.’ 하고 탄식 어린 숨을 뱉어 냈다. 최기원이 나를 여기에 버린 것이다. 그가 재떨이를 집어 던지고, 화가 풀리지 않는다고 읊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나에게 너무나 화가 나고 실망해서, 또 말을 듣지 않는 나에게 질려서 우리의 계약을 모두 끝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아득함에 이를 꽉 깨물자 까득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내가 저 경호원이 죽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내가 얼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래서 집이 아닌 이런 곳에 나를 두고 성욕 처리 기구처럼 제 욕구만 채우고 떠나 버린 것일까. 아무도 모르는 이런 곳에서 죽으면, 사체를 처리하는 건 그에게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주언이 생각에 호흡이 가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을 만큼 잘못한 것 같지는 않았다.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서 다시 눈물이 왈칵 터져 흘렀다. 살려 달라고 중얼대며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극한의 공포에 다시 숨통이 조여 왔다. 쓰러지면 안 되는데,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 봐도 혀가 딱딱하게 굳고 꼴깍대며 숨이 넘어갔다.
‘쓰러지지 마, 정신 차려. 제발 좀….’
가슴을 뜨거운 돌덩이로 짓누르는 것 같았다. 불규칙하고 옅은 호흡을 뱉으며 경련하던 나는 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찌익, 소리와 함께 입을 막고 있던 테이프가 뜯어졌다. 피딱지가 앉았던 입술이 함께 뜯어지며 피가 터졌다. 통증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난 고개를 잘게 떨며 숨을 터뜨렸다. 얼굴에 와 닿는 공기가 생소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온전하게 되지 않았다.
이윽고 눈 주위를 둘둘 감고 있던 천의 매듭이 풀어졌다. 코와 입술 위로 천이 스르륵 부드럽게 떨어졌다. 굳게 닫혀 있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고, 젖은 속눈썹을 무겁게 들어 올리며 인영을 올려다보았다.
“잘 있었어요?”
최기원이 몸을 숙여 내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따라 입꼬리가 예쁘게 말려 올라갔다. 왈칵 울음이 터지려는 걸 참아 누르며 초조한 낯으로 그와 눈을 맞췄다.
“잘, 못… 했어요.”
목을 짓누르는 진동에 묻혀 스러지는 목소리가, 그의 귀에 닿았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대답 대신 낮고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큰 손이 옆으로 쓰러져 있는 나를 가볍게 끌어 올렸다. 휘청대며 앉자 등 뒤로 팔을 뻗은 그가 손목을 묶고 있던 노끈을 풀어 주었다. 왼손이 땅에 닿는 순간 얼얼한 통증이 손목에서 피어올랐다.
아픔조차 잊은 채 작업실을 바쁘게 살폈다. 경호원이 없다. 갉작대며 살을 파먹는 구더기도 없다. 내가 묶인 곳 주변은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며칠 전 종일 나를 괴롭힌 잔상이 꿈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최기원은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던 내 턱을 붙잡았다. 한 손으로 턱 아래를 쥐고 내 고개를 제 얼굴 쪽으로 고정한 최기원이 한쪽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난 나언 씨 만나서 반가운데. 뽀뽀는 못 해 줄망정 또 한눈을 팔아요?”
“아…. 벌레가, 벌레…….”
사색이 되어 퍼뜩 고개를 조아렸지만, 턱이 세게 잡혀 고개가 완전히 수그러지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얼굴을 맡긴 채 정신없이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거듭된 사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갑게 손을 떨어뜨렸다. 휘청 무너지려는 몸을 간신히 버티고 서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허벅지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난 최기원이 뒤를 돌았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 때문에 그의 형상이 일렁였다. 그가 이대로 나가 버릴까, 심장이 발아래까지 떨어지는 초조함이 나를 잡아먹었다.
“…….”
얼른 손을 뻗어 멀어지는 바지 자락을 붙잡았다. 매끈한 구두코가 가던 길을 멈추자마자, 나는 스스로 한 행동에 놀라 슬그머니 옷을 움켜쥔 손을 놓았다. 그대로 내 손을 밟거나 뺨을 내려칠 걸 각오하고 고개를 푹 떨어뜨렸으나 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 사이에서 얼핏 최기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콧노래, 흥얼거림처럼 들리는 작은 목소리가 어쩐지 들뜬 사람 같았다.
왈칵 눈물이 솟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묶인 손이 풀렸으니 발을 묶은 노끈을 풀어 어떻게든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 될 일인데도, 학습된 공포에 적응한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기만 할 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파르르 떨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때 멀어졌던 구두 소리가 점차 가까이 다가왔다. 옅은 호흡을 불규칙하게 뱉던 나는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겨우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자꾸 울지?”
“사, 살려, 주세요…….”
“나는 너 안 죽이는데. 뛰어내리려 한 건 나언 씨였잖아요.”
한숨과 함께 느른하고 여유로운 목소리가 흘렀다. 그가 귓바퀴를 어루만지고 차갑게 식은 뺨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 끝에, 소리 없이 뺨을 적셨던 눈물이 가로로 번졌다.
예전 같으면 나를 더듬고 매만지는 손길이 고통스러웠겠으나 지금은 기꺼웠다. 그가 나를 봐주고 있는 것 같아서, 나를 안쓰럽게 보는 것만 같아서 그 불안한 애정에 몸을 기대게 된다. 괜한 안도감에 마음이 순식간에 약해지며 서러운 눈물이 다시금 쏟아졌다. 그는 가져온 500ml 물병의 뚜껑을 한 손으로 열었다.
“이틀 내리 물 한 모금 못 마셨잖아요. 마셔요.”
턱을 살살 쥐고 입을 벌린 그가 물을 입술 사이로 흘려주었다. 차갑고 맑은 생수가 혀에 닿자마자 잊고 있던 갈증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울음에 헐떡이며 물을 급박하게 넘겼다. 반은 흘리고 반은 울컥대며 넘어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레와 함께 기침이 터졌다.
컥컥대며 물을 뱉어 내고 목이 벌겋게 될 정도로 기침했다. 그는 가만히 앉아 내가 뱉은 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묘하게 굳은 얼굴에 지레 겁먹은 나는, 니트를 손목 아래로 끌어 내려 바닥에 흩어진 물을 문질러 닦았다. 죄송하다고 중얼댔는데 들렸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주는 거 흘리지 마요.”
단호한 말씨 끝에 그가 손을 올렸다.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어금니를 물었는데, 올라간 손은 뺨을 내려치는 대신 어깨에 가볍게 닿았다. 그는 아직도 간헐적으로 기침하는 내 어깨와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갑작스러운 토닥거림에 당황한 내가 고개를 살짝 들어 최기원의 눈치를 살폈다.
“대답은.”
“아, 네.”
허둥대며 대답하느라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1초의 여유도 없이 진동이 울려 목이 콱 막혔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목을 틀어쥐자 최기원이 쯧, 하며 낮게 혀를 차며 목걸이를 풀어 주었다. 턱에 들어간 힘이 풀리며 잇새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최기원은 내친김에 손을 뻗어 발목을 감은 노끈도 마저 풀어 주었다. 아이가 쉬이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이틀 만에 나를 대하는 태도를 바꾼 그를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집에 가고 싶어요?”
그가 물었다. 나는 눈을 끔뻑이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실 웃던 최기원이 나를 내려다보며 혀로 볼 안을 밀었다. 그의 표정에 숨기지 못한 장난기가 깃들자 금세 얼굴이 앳되어 보였다.
“나 안아 봐요.”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묻고 싶었으나 혼날까 싶어 눈치만 살폈다. 겁을 집어먹고 불안해진 내 표정을 읽은 그가 투정 부리듯 말을 덧붙였다.
“맨날 내가 매달리잖아. 네가 좀 엉겨 보라고.”
뒤늦게 말을 온전히 이해한 나는 무릎을 세워 앉은 후 천천히 팔을 뻗어 최기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잠시 힘주고 버티던 커다란 몸이 손쉽게 끌려왔다. 그의 따뜻한 귓가에 차가운 뺨이 닿았다. 이래도 되나 싶어 숨이 떨려 와 작게 뱉어 냈다. 그의 뺨과 목덜미의 온기가 나에게 간지럽게 옮겨 붙고, 익숙한 체취가 코밑으로 번졌다.
“뽀뽀도 해 봐요.”
두 번째 요구에 나는 더욱 당황했다. 눈을 굴리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비스듬하게 돌렸고, 눈에 보이는 매끄러운 피부 위에 망설이다 입술을 찍었다. 내가 입을 맞추었는데도 쪽, 소리에 놀라 얼른 입술을 뗐다. 그가 옅은 미소를 짓자 뺨이 살짝 올라붙었다.
“한 번 더.”
재미가 들렸는지, 목소리에 웃음기가 마구 묻어 있었다. 화를 내지 않는 모습에 안심한 나는 이번엔 조금 더 입에 가까운, 그렇지만 입술은 아닌 입꼬리 부근에 꾹, 입술을 묻었다 떼어 냈다. 맞닿은 가슴팍에서 두근두근 뛰는 심장이 느껴졌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어설프긴.”
그는 피식 웃으며 먼저 몸을 일으켰고, 동시에 팔뚝을 붙잡아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비틀대며 땅을 디디고 섰다. 휘청대는 동안 무릎에 걸려 있던 바지가 툭, 발목까지 떨어졌다. 최기원은 그대로 등을 돌려 먼저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고 나는 얼른 흘러내린 바지춤을 붙잡아 올리고 버클을 채웠다. 왼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데다 최기원을 놓칠까 허둥대느라 한참을 버벅대야 했다.
이틀 만에 걸으려니 다리가 후들댔다. 경사가 가파른 계단을 절뚝대며 위태롭게 내려갔다. 2층 정도인 줄 알았던 계단이 실은 5층 가까이였다. 그제야 왜 최기원이 화장실에서 나를 끌어 내릴 때 사색이 되었는지 이해가 됐다.
절뚝대느라 층을 내려가며 최기원과 거리가 더 벌어졌고 결국에는 휙 돌아 내려가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불안감에 희뿌옇게 흐려진 눈동자는 내가 디뎌야 할 땅이 아닌 최기원의 그림자만 애타게 쫓았다.
그와 거리가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댔다. 티 나지 않게 보폭을 넓히며 최기원과의 거리를 조금씩 좁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최기원의 발끝만 절박하게 따라갔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팔목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1층에 다다랐을 때는 전신이 땀범벅이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쏟아지는 햇살에 눈가를 찌푸렸다. 오랜만에 보는 밝고 하얀 볕이었다. 잠시 멍하게 바깥을 눈에 담던 난 익숙한 담배 연기에 고개를 돌렸다. 건물 외벽 앞에서 흐린 연기를 뱉고 있는 최기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턱짓으로 차를 가리켰고, 나는 절뚝이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찬 겨울바람이 니트 사이를 매섭게 파고들어 절로 소름이 일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경호원은 어디에 있는지, 벌레들은 어떻게 했는지. 하지만 언제 뒤틀릴지 모를 최기원을 자극할 배짱이 없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따뜻한 히터의 훈기와 푹신한 의자의 감촉을 느끼자마자, 이틀 동안 긴장했던 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며 급격하게 피로해졌다. 나는 건조한 눈에 힘을 주며 최대한 버티려고 노력했다. 이대로 차가 안전하게 집까지 향하는 것을 꼭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 피로…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어쩌면 정신을 놓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득한 현기증이 몰려들었다. 아물아물 흐려지는 눈을 가만히 깜빡이다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차가 덜컹대는 느낌에 퍼뜩 눈을 떴다. 벨트를 쥐고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차가 들어선 곳이 최기원 집의 차고라는 걸 깨닫는 순간 안도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능숙하고 거칠게 주차를 마친 최기원이 차에서 내려서고, 나도 얼른 문을 열고 땅을 디뎠다. 니트 하나에 바지 하나만 입고 걷기에는 너무나 추운 날씨였다.
“씻고 내려와요. 점심 먹게.”
최기원은 계단을 올라가는 내 뒤에 대고 말했다. 마치 이틀간의 감금이 아예 없었던 일인 것 같은 자연스러운 목소리였다. 희미한 미소까지 띤 얼굴을 마주하며 나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의 이틀을 잊은 사람처럼.
방에 들어오자마자 옷을 벗었다. 아직 허벅지 사이에는 말라붙은 정액이 하얗게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비틀대며 샤워 부스로 들어가 따뜻한 물로 몸을 적셨다. 왼손은 퉁퉁 부어올라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나마 지난 이틀이 남긴 흔적을 서툴게 씻어 냈다. 발바닥 아래에서 회색 흙먼지가 묻은 물이 번져 하수구 아래로 흘러갔다.
물기를 닦아 내고, 로션을 가득 짜서 전신에 펴 발랐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코를 팔뚝에 묻고 냄새를 맡아 댔다. 두 번이나 비누 거품을 내어 씻었는데, 자꾸만 썩은 내가 나는 것 같다. 이상한 일이었다. 살갗에 코를 대고 맡으면 나지 않는 냄새가, 손을 내리면 어디선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대로 엎드려 울음 섞인 숨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한참을 로션과 씨름하다, 반쯤 포기 상태로 새 홈웨어를 꺼내 입었다. 방문을 열고 조심스레 1층으로 내려가는데, 문득 느껴지는 의아함에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원래 고요하긴 했으나 오늘따라 유독 적막함이 맴돌았다.
어딘지 모르게 집 안이 낯설다 생각하며 걸음을 옮겨 다이닝룸을 향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빼어 살피니, 홈 바 뒤로 최기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무언가를 끓이느라 국자를 휘적대자 어깨까지 꽉 찬 근육이 꿈틀댔다.
“앉아요.”
내가 서 있다는 걸 알았던지, 그가 내 쪽을 보지도 않고 정 없는 목소리로 일갈했다. 나는 쭈뼛대며 식탁으로 걸어가 앉았다. 이제야 집이 유독 어색하고 조용한 이유를 찾았다. 집안일을 하는 사용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최기원이 얼떨떨하게 앉아 있는 내 앞에 멀건 야채 죽을 내려놓았다. 얼마 뒤 본인 몫의 점심 식사도 쟁반에 예쁘게 담아 맞은편에 놓았다. 의자를 빼어 앉고 밥을 떠먹는 최기원을 보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목걸이는 없지만, 이미 상할 대로 상한 목소리는 이제 내 것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뜩 헤져 있었다. 쇳소리 가득한 작은 목소리가 식탁 위로 힘없이 흩어졌다.
“일하시는 분들은요?”
“거슬려서요. 필요할 때만 부를 겁니다. 나언 씨도 그쪽이 낫지 않아요?”
“…….”
“또 누굴 꼬실지 모르잖아요.”
차가운 조롱에 고개를 떨구고 수저를 잡았다. 최기원은 농담이 아닌 듯 담담한 얼굴로 식사를 이어 갔다. 나도 얼른 고개를 숙여 음식을 살폈다. 그런데 냄새를 맡자마자 속이 메슥댔다. 분명 갇혀 있는 동안 먹은 것이 없어 몸에 힘이 없고 속이 쓰려 뭐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음식을 마주하니, 거부감이 갈수록 심해졌다.
하지만 토해도 끝까지 먹이는 사람이란 걸 알기에 나는 수저를 들어 죽을 퍼 입에 머금었다. 무식하게 뜨겁고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싱거운 죽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그렇게 몇 입을 버겁게 넘기던 중, 울렁대던 위가 순간적으로 꿈틀했다.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치미는 고통에 이를 악물며 허리를 움츠렸다. 다행히 최기원은 내가 바르작대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고통을 참고, 다시 죽을 퍼 입에 넣었다.
아픔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죽을 넘겼다. 오랜만에 먹는 음식이어서 그런지, 위가 불에 타듯이 아파 왔다. 자꾸만 가슴이 조여들고 식은땀이 났다. 숟가락을 쥐고 있는 손바닥이 축축해져 수저가 미끄러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
하지만 이번에는 신음을 참기 힘들 정도로 위가 아팠다. 뜨거운 쇠꼬챙이가 위를 푹 찌르는 느낌에, 결국 나는 숟가락을 떨어뜨리며 앓았다. 시끄러운 소리에 최기원이 고개를 들어 나를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얼른 식탁 위로 떨어진 수저를 다시 쥐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내가 준 거 흘리지 말라고 말했어요.”
“……죄, 죄송해요.”
본능적으로 거듭 머리를 조아린 내가 다시 한번 느껴지는 위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낭패였다. 이제 앞까지 아물아물 흐려졌다. 결국 난 띄엄띄엄 갈라진 목소리로 작게 읊조렸다.
“배, 가… 아파요.”
“수 쓰지 말고 입에 처넣어요. 얼른.”
잘 보이는 것도 없어, 겨우 쥔 숟가락으로 더듬대며 한 숟갈을 퍼 입에 넣었다. 씹지 못하고 그저 넘기기에 급급하던 내가 결국 등을 들썩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욱, 웩….”
입을 막고 복도까지 내달렸으나 결국 복도 바닥 위로 후드득 토사물이 흩어졌다. 나는 사색이 되어 얼른 손으로 그걸 그러모았다. 망했다. 또 토해 버렸다. 다시 목걸이를 하려나, 그것도 아니면 말을 안 듣는다고 다시 그 작업실에 가둬 놓는 것은 아닐까. 어쩔 줄을 몰라 미친 듯이 떨리는 손으로 토를 닦았다. 하지만 드르륵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죄송, 죄송해요……. 속이, 좀 이상, 아파서…….”
식은땀이 턱 아래까지 송골송골 맺혔다. 스스로도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들을 혼잣말을 마구잡이로 더듬댔다. 아파서 죄송하고, 토해서 죄송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손으로는 바닥을 더럽힌 멀건 토를 열심히 모아 닦고 있었다.
“아, 아아…….”
이상했다. 토하면 조금 나아져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배가 점점 뒤틀렸다. 이젠 위가 아니라 명치와 아랫배까지 모조리 불에 타는 것 같았다. 신음도 목구멍에서 턱 하니 막힐 정도로 아파서, 무릎을 꿇은 채로 배를 감싸 쥐며 몸을 웅크렸다. 최기원은 내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향해 짜증스레 물었다.
“도대체 언제쯤 안 아플래?”
“……아으, 나 배….”
“나랑 겸상하는 거 좆같다고 말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그치?”
날 선 최기원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들렸다. ‘배가 이상해요’, 라고 뻐끔댔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배를 쥐고 신음하는 내게 그가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와서 마저 먹어.”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벽을 짚고 무릎에 힘을 줘 일어섰다. 그가 오라고 했으니 얼른 가야 했다. 이젠 흐릿하게 보이는 최기원의 인영을 향해 비틀대며 걸음을 옮겼다.
“하으….”
절뚝대는 발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갈지자로 휘청댔다. 몇 걸음도 채 걷지 못해 순식간에 무릎이 꺾이며 바닥으로 다시 주저앉았다. 배를 감싸 쥔 내가 끊어질 정도로 미약해진 숨을 겨우 뱉다, 결국 옆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쿵 소리가 나게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인형처럼 늘어졌다. 심상찮은 소리에 눈썹을 꿈틀한 최기원이 넓은 보폭으로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툭.
그가 발로 옆구리를 쳤다. 최기원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 가는 듯했다.
“지랄 그만하고 일어나.”
나직하게 씹어뱉는 목소리에 감기려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으나, 이젠 한계였다. 엎어진 나를 최기원이 돌려세우자, 빙글 앞이 돌아갔고 희미한 시선 끝에 미간을 일그러뜨린 최기원이 닿았다. 그의 차가운 손이 뺨을 아프게 내려쳤다. 죄송하다는 사과를 끝으로 천 근 같던 눈꺼풀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