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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Rain drop (11/28)

10. Rain drop

가는 목을 수놓은 검붉은 화상 자국과 그 주변을 아프게 긁어내린 손톱자국. 나신 위의 상처와 곳곳의 멍을 의사, 간호사 모두 못 본 체했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차치하고서, 의사는 조심스레 나언의 상태를 기원에게 설명했다.

위궤양으로 인한 위경련이 복통의 주원인이었다. 음식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토하고 마는 것은 거식증과 같은 섭식 장애로 번질 수 있는 영양실조의 초기 증상이었다. 급하게 영양제를 투여하며, 부어오른 손목도 뒤늦게 발견했다. 뼈에 금이 간 손목 위로 두꺼운 깁스가 둘렸다.

의사는 제 설명에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 기원의 차가운 낯을 흘끔 살핀 후, 환자가 많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는 주제넘은 소리를 덧붙였다. 여전히 아무런 감정을 담아내지 않는 회색의 눈이 환자에게서 자신으로 향한 순간, 의사는 멋쩍게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피했다.

기원은 의자를 빼고 나언의 곁에 앉아 턱을 괬다. 아무도 없는 공간이 되고 나서야 기원이 짙은 한숨을 뱉었다.

조용한 병실에 수액이 떨어지는 소리가 공허했다. 기원은 얇은 눈꺼풀을 감은 채 얌전하게 잠들어 있는 나언의 얼굴을 싸늘한 시선으로 훑었다. 하얗게 뜬 입술 위의 붉은 생채기가 유독 눈에 띄었다.

가벼운 반항은 맞고 나면 순해지긴 했으나, 먹는 것으로 일을 치를 때면 기원의 심사가 유독 뒤틀렸다. 어울리지 않게 욕을 한다거나, 대답을 망설이며 은근히 불온한 시선을 흘릴 때면 마냥 귀엽기만 했다. 하지만 먹지 못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다 괜찮다며 고분고분 굴면서도 몸은 점점 말라 가고 수척해지는 꼴이, 속을 감춘 채 기쁘게 죽어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언에겐 필사적이었던 적응이, 기원에게는 거센 불응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오늘 역시 배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것을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러다 나언이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복도 끝에서 등을 들썩이는 꼴을 봤을 때는 불시에 새빨간 충동이 치밀었다. 굶어 죽을 때까지 가둬 놓고 기어코 바닥에 고인 빗물이라도 핥아 먹게 해야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으니 말이다.

나언이 평소보다 조금 더 보챈다 생각했던 기원은 결국 나언이 쓰러지고 나서야 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텅 빈 거실에서 죽은 사람처럼 미동 없이 늘어진 나언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기분에 잠겼다.

순간적으로 지원의 곁에서 고개를 젖히며 웃던 해맑은 낯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병실은 짙은 어둠에 잠겨 들었다. 말갛던 얼굴 위로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열에 달뜬 신음이 미약하게 새어 나왔다. 나언은 뒤척이면서도 정신을 쉽게 차리지 못했다. 두꺼운 바늘을 꽂고 있는 손등 아래로 길게 뻗은 손가락이 잠시 이불 위에서 움질댔다.

그러고도 몇십 분이 흘러서야 핏줄까지 보이는 눈꺼풀이 얕게 떨렸다. 이윽고 작은 칭얼거림과 함께 닫혀 있던 눈이 힘겹게 뜨였다. 멍하게 병실 한곳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천천히 주변을 맴돌았다.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눈이 기원을 향했다. 기원 역시 나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끔뻑, 끔뻑.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며 나언은 조금씩 기원을 읽어 갔다.

“…….”

찰나의 시간이 흐르며 생기 없던 눈동자에 서서히 공포가 깃들기 시작했다. 힘없이 기원에게 닿았던 눈동자가 점차 흔들렸고, 이내 진정제를 맞고 풀어졌던 얼굴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쓰러진 저를 걷어차던 아픈 발길질이 떠오르며 점점 두려워졌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나언이 잠시 입을 달싹이다 작게 사과를 읊조렸다.

“죄…송해요.”

성대가 망가져, 자신에게도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언이 창백한 얼굴로 다시 한번 사과하려 하자, 기원이 그의 말을 끊었다.

“몸은 어때요?”

“……괜찮습니다.”

긴 고민 끝에 나언은 거짓을 말했고, 기원은 나언의 말에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궤양에 영양실조예요. 손목은 금 갔고요. 나언 씨한테 이 정돈 괜찮나 보네요.”

잔뜩 날이 서 저를 비꼬는 말에도 나언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결국 쓴 것을 문 아이처럼 모호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기원은 나언의 눈 가까이를 비춘 조명의 조도를 낮추며 이어 말했다.

“2주 정도 입원하고 손목은 차도 보고 반깁스나 보호대를 착용할 겁니다. 최대한 움직이지 마세요.”

“네.”

“더 자요.”

기원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얀 뺨 위로 높은 코와 긴 속눈썹이 길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작고 높은 코끝과 아래로 이어진 봉긋한 입술 선이 유려했다. 마르고 수척한 낯빛에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잘 빚어진 얼굴이었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는 굳은 뺨과 상처 난 입가를 찬찬히 눈에 담던 기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 조금 전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큰 눈으로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언은 눈을 굳게 닫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기원이 눈썹을 아슬하게 덮은 앞머리를 손으로 걷었다. 긴 머리에 덮여 있던 하얗고 매끄러운 이마가 드러났다. 살이 많이 내려 더 작아진 얼굴은 한 손을 올렸을 뿐인데도 거의 가려지려 했다. 얄궂게 얼굴을 건드려도 기척 하나 없이 잠든 모습이 어쩐지 애가 탔다. 기원이 손가락을 들어 오똑한 코끝을 살짝 두드렸다.

“…백나언.”

나언이 깨길 바라면서도 깨어나질 않길 바랐다. 물에 빠진 시체처럼 잠든 모습을 멍하게 내려다보던 기원이 침대 시트에 손바닥을 짚고 허리를 숙였다. 마른 뺨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댔다. 코 아래로 흩어지는 아주 희미한 숨결과 체온이 빚은 작은 온기를 느끼고 나서야 기원은 몸을 일으켰다.

시작부터 파탄이 난 관계였기에 백나언이 행복하게 지내길 기대하진 않았다. 그러나 저를 원망하고 혐오해도 좋으니, 잘 입히고 잘 먹여 겉이라도 반질반질 윤을 내고 싶었다. 거울을 보며 예쁘게 살이 오른 제 모습에 통통한 입술을 짓씹고, 최지원 없이도 여전히 멀끔한 제 주제를 깨닫고 자괴감에 서글퍼하는 것도 나름 보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언은 조용히 시들어 갔다. 몇 년을 돌아 겨우 제 손아귀에 들어오고 나서도 여전히 어려운 백나언은 끝내 말을 곱게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의자에 앉은 기원이 주머니 속의 팔찌를 꺼내 들었다. 나언에게 선물했던 은빛 팔찌는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손목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엑스레이 촬영을 해야 했고, 부득이하게 팔찌를 절단했다. 풀기 위해선 별도의 나사가 필요한 팔찌였다. 팔찌가 부서지며 그 속의 위치 추적기까지 함께 망가졌다. 당장 같은 것으로 주문해야 하는 게 맞는데도, 문득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팔찌도, 나언도 생각보다 빠르게 망가졌다. 기원은 팔찌의 절단면을 매끄럽게 문지르며 건조한 눈을 감았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다.

***

오후부터 시작된 겨울비가 밤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폭우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쉬이 그치지도 않는 비였다. 제법 묵직한 빗방울은 창가에 맺혔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굴러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먼저 맺힌 물방울이 길게 남긴 자국을 가르며 새 빗방울도 점점이 흩어졌다.

나언은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타닥대는 빗소리에 몽롱한 눈을 뜨고서도 한참을 숨을 죽여야 했다. 침실 맞은편 소파에 최기원이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

눈을 뜨자마자 바로 보이는 소파였다. 갈증도 일었고, 화장실도 가고 싶어 깨어났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문득 기원이 어제 입었던 옷과 똑같은 옷을 입은 채로 졸고 있다는 걸 깨닫자 그를 깨우기 망설여졌다. 아마 자신이 깨길 기다리다 잠시 눈을 붙인 것 같았다.

나언은 기원을 깨우는 대신, 고개를 살짝 틀어 먹구름이 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겨우 집으로 돌아가나 싶었는데 다시 병원 신세였다. 아프기 전후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희뿌옇게 안개가 낀 것처럼 잘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검은 구름과 빗방울이 시야를 가린 바로 이 차창처럼 말이다.

공포스러운 기억을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기에 나언은 금세 생각을 그만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움직이며 퍼진 시트의 작은 마찰음에 기원이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조금은 예민하기까지 한 기원의 반응에 나언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설핏 든 잠에서 깨어난 기원이 눈을 가늘게 떠 하얀 인영을 응시했다. 겁을 집어먹고 도록도록 구르는 큰 눈이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젠장, 하고 작게 욕을 뱉은 기원은 자리에서 일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뻐근한 어깨를 돌리자 우득 하는 뼈 소리가 나언에게까지 들렸다.

기원은 손을 뻗어 나언의 이마를 짚었다. 기원이 손을 올리자 나언이 본능적으로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시트 끝자락을 꾹 쥐었다. 하지만 차가운 손이 뺨을 치는 것 대신 이마를 가볍게 짚어 내자 나언은 참은 숨을 작게 터뜨리며 기원을 올려다보았다. 펄펄 끓었던 이마의 열도 어느 정도 내려가고, 썩은 생선처럼 혼몽하기만 했던 눈동자에도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았다. 기원이 동그란 이마에서 손을 떼어 내고 너스벨을 눌러 의사를 호출했다.

간단한 검진과 함께 의사는 건강상에 유의할 점을 길게 설명했다. 나언은 얌전히 들으면서도 이불 밑으로 줄곧 손톱 옆을 긁었다. 아까부터 묘하게 악취가 나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이틀을 씻지 못해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의사도 간호사도, 그리고 최기원도 너무 가까이 서 있었다. 저를 둘러싼 사람들의 가라앉은 표정과 무덤덤한 말투가 어쩐지 제게서 냄새가 풍기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식사는 미음부터 제공됩니다. 반찬 없이 밍밍하겠지만 소량은 의지를 갖추고 섭취를 해 보시는 편이-,”

“나언 씨, 듣고 있어요?”

아까부터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자꾸만 몸을 뒤척이고, 고개를 돌렸다 숙였다 거슬리게 구는 나언을 비딱하게 바라보고 있던 기원이 결국 의사의 말을 매섭게 끊었다. 멍하게 이불 아래를 응시하다 화들짝 어깨를 떤 나언이 기원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네?, 네…….”

“뭐라고 했는데요?”

“소, 손목, 움직이지… 말라고.”

“아니잖아.”

냉정한 말투에 풀이 죽어 입을 다물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시트 아래에서 조급하게 다리를 살짝 떨다 고개를 든 나언이 의사와 수간호사의 눈치를 살피곤 다시 입을 열었다.

“약……. 아니, 링거…….”

“야.”

말을 끝맺지 못하고 허둥대다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는 나언을 보던 기원이, 갸름한 턱을 붙잡아 힘으로 끌어 올렸다. 턱이 쪼개질 것 같은 아픔에 나언이 버둥대며 깁스한 팔로 기원의 손목을 붙잡았다.

“살 만한가 봐? 덜 아팠던가.”

“아, 아니요……. 죄송, 죄송해요….”

“…저 대표님,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한 환자입니다.”

결국 의사가 기원을 말리고 섰으나 기원은 울망하게 부푼 나언의 눈동자를 곧게 바라보며 짓씹듯 물었다. 말끝마다 턱을 붙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또 뭐가 문제지? 그냥 좀 쉽게 가면 안 될까, 나언아?”

“네, 네에……. 잘못했어요.”

아물아물 사과를 뱉는 나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꼬리가 발그스름해졌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한마디라도 더 해서 기어코 울리고 싶은 기이한 욕구가 차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타인과 함께 있기에 기원은 극한의 인내심으로 폭력적인 충동을 억눌렀다.

잡았던 턱을 아프게 놓자 악력에 쉽게 붉게 물든 턱이 울음을 삼키느라 잘게 떨렸다. 고개를 조아리며 움츠린 나언을 바라보며 의사와 간호사가 잠시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의사는 잘게 헛기침을 하고 다시 처음부터 나언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쉽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의사의 설명 사이사이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언을 기원이 차갑게 응시했다.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을 떠나고, 나언은 서럽게 울먹였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다시 안정을 찾았다. 눈에 물기를 매달고 소매 끝을 끌어 올려 자꾸만 냄새를 맡는 행동을 보이긴 했으나 기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 매섭게 타이르고 나니, 나언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을 잘 들었다. 저녁으로 나온 미음 역시 의사가 일러 준 대로 천천히 다 비웠다. 오래 걸리기는 했으나 토하지 않고 끝까지 먹어 냈다. 제법 기특한 행동에 기원이 불쑥 반가운 제안을 건넸다.

“백주언 곧 항암해요.”

동생의 이름에 나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나언 씨 괜찮아지면 동생 보러 가요.”

“……?”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나언을 보며 기원이 병원복에 적힌 병원 이름을 가리켰다.

“여기 병원. 동생도 입원해 있잖아요.”

나언의 눈이 커졌다. 그제야 병원복에 적혀 있는 병원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더듬더듬 글자를 읽던 나언은 그제야 이곳이 주언이 입원한 병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이걸 잊을 수 있을까. 머리가 점점 멍청해지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설렘을 크게 티 내지 않으려 애쓰는 나언을 두고 기원이 몸을 일으켰다. 말간 시선이 그새 따라붙는 걸 보며 기원이 코트를 걸쳤다.

“잠깐 병원 앞에서 조 실장님 만나고 올게요.”

“…네.”

수척한 얼굴에 수채 물감처럼 웃음이 번졌다. 기원은 그런 나언을 잠시 바라보다 자연스레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원은 조익현 비서실장에게 갈아입을 옷과 노트북 등을 받기 위해 잠시 병실을 비웠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와 회의 안건에 대해 간단하게 보고까지 받느라 시간이 제법 흐르고 나서야 병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

행여 잠을 깨울까 싶어 조용히 병실 문을 연 기원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나언이 누워 있어야 할 병상이 휑했다. 묘한 위화감에 표정이 굳은 기원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너른 보폭으로 병실을 빠르게 훑은 기원은 곧장 병실 안쪽의 화장실을 향했다. 굳게 닫힌 화장실 문 너머로 요란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기원이 한쪽 눈썹을 잘게 꿈틀했다. 세수하는 것인가 싶어 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울음과 신음이 묻은 헐떡임이 물소리 사이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속이 싸늘하게 식으며 기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5층 높이에서 결사적으로 몸을 던지려던 것이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놈을 지나치게 오래 혼자 두었다.

“백나언?”

목소리에 감추지 못한 다급함이 묻었다. 기원이 작게 욕을 씹으며 문고리를 붙잡아 돌리자 뿌연 수증기가 기원의 시야를 아득하게 가렸다.

기원은 화장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마른 팔뚝을 당겨 돌려세우자 나언이 울먹이며 휘청댔다. 나언의 꼴을 확인한 기원의 언성이 순식간에 높아졌다.

“뭐 하는 짓이야?”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나언이 눈을 크게 뜨며 기원을 올려다보았다. 기원은 기가 차서 이를 꽉 깨물었다. 나언은 욕조 안에서 샤워 타월로 목을 문지르고 있었는데, 가는 목 주변에 상처가 낭자했다. 화상 흉터를 덮은 거즈는 끝이 젖어 말려 올라갔고 다시 피와 진물이 터져 목 아래로 뚝뚝 흐르고 있었다.

나언의 눈에서 굵은 눈물 줄기가 주르륵 떨어졌다. 수증기 때문에 빨갛게 익은 얼굴이 불안에 젖어 있었다. 나언이 어딘가 혼곤한 시선으로 중얼댔다.

“아무래도… 저…. 주언이 못 보러 갈 거 같아요.”

고개를 돌린 나언이 타월을 들어 목을 한 번 더 문질렀다. 나언을 살피던 기원의 눈썹이 무언가를 보고 꿈틀했다. 몸 곳곳에 피가 맺힐 정도로 쓸린 상처가 선연했다. 여린 살결 위로 거칠한 타월이 몇 번이고 지나간 자리였다. 기원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신경질적으로 나언을 노려보았다. 나언은 그런 기원을 신경 쓰지 않고 제 몸을 문지르는 것에만 열중했다. 울음을 애써 참느라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어깨가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오른손은 링거가 꽂혀 있고, 왼손은 깁스가 둘려 있어 제대로 씻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상처 난 몸 곳곳에 씻겨 나가지 않은 비누 거품이 잔뜩 묻어 있었다. 깁스 안의 붕대는 이미 물에 흠뻑 젖어 버렸고 기우뚱하게 세워져 있는 링거대가 나언이 움직일 때마다 불안정하게 끼익댔다.

참다못한 기원이 손을 뻗어 피 맺힌 타월을 뺏어 들었다. 나언이 기원을 황망하게 올려다봤다. 굵은 눈물 줄기가 쉼 없이 흘러내리는 눈은 실핏줄이 터져 시뻘겠다. 기원은 세면대에 타월을 던지고, 샤워기를 빼 들어 나언의 정수리 위로 차가운 물을 쏟아 냈다. 여기저기 묻은 비누 거품을 씻어 내는 동안 나언은 잠자코 몸이 얼 듯한 냉수를 맞았다. 기원이 들어오며 외부의 찬 기운까지 몰고 들어온 탓에 알몸 곳곳에 소름이 피어났다.

기원은 선반에 놓인 흰 수건을 펴 나언의 젖은 머리를 털었다. 젖은 몸도 대충 닦아 내는 동안 나언은 팔을 올려 팔뚝의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어떡해.’ 하고 작게 혼잣말을 뱉었다. 나언의 등을 닦던 기원이 그런 그를 삐딱하게 내려다봤다.

“저……. 다시 씻어야겠어요.”

아주 작고 볼품없는 목소리였다. 힘없이 중얼거린 나언이 무심코 샤워기 쪽으로 손을 뻗는 순간 기원이 나언을 제지했다. 나언이 입술을 꾹 깨물다 작게 반항했다.

“냄새나요.”

“무슨 냄새.”

대답 대신 살이 너무 내려 앙상해진 팔을 들어 올린 나언이 팔뚝에 코를 묻었다.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숨을 들이마시더니 이내 미간을 왈칵 찌푸린다.

생선 썩는 것 같은…. 중얼대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힐끔, 기원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조용한 기원의 눈치를 살피더니 괜히 욕조에 붙은 수도꼭지를 한 번 만지작댔다. 기원이 없었다면 당장이고 틀었을 것처럼 미련 가득한 손가락이 매끄럽게 젖은 레버 위를 쉽게 떠나지 못했다.

그러다 은근하게 팔을 기원의 쪽으로 내민다.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의문을 숨기지 못한 동그란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저……. 내, 냄새나지 않아요?”

자그만 목소리로 질문한 나언이 기원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주 잠깐, 화장실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뚜욱, 뚝. 샤워기 레버와 젖은 호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났다. 추운지 몸을 가볍게 떤 나언이 뻗었던 팔을 끌어와 다시 한번 냄새를 맡았다.

기원은 그런 나언을 무감하게 내려다보며 턱을 세게 물었다.

아주 잠깐, 나언이 나쁜 생각을 했을까 피가 차게 식었던 순간과, 지금 구질구질할 정도로 성가시게 구는 나언의 모습이 뒤섞이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었다.

긴 손가락 끝이 살짝 움츠렸다 펴졌다. 정신 차리라며 뺨을 올려붙이고 싶어 손이 근질댔다. 그렇게 아프게 뺨을 맞고 나면, 깜짝 놀란 나언은 생기 없는 눈을 크게 뜨며 원망에 차 자신을 바라보겠지. 그렇게라도 해서 저런 정신 나간 망상을 그치게 해야 하는 게 맞는 걸까.

이 와중에도 나언은 기원의 침묵이 불안한지 젖은 발바닥을 내버려 두지 못했다.

생각을 이어 가던 기원이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나언을 닦은 수건을 욕조에 던지듯 팽개친 기원이 나언의 뒤통수를 붙잡았다. 머리채를 살짝 당겨 고개를 비스듬하게 내린 후, 드러난 목덜미에 코를 묻고 티 나게 숨을 들이켰다. 과일 우유 향뿐인 보드라운 살갗 위로 콧대를 문지르던 기원이 얼굴을 떼어 내며 나언을 바라보았다.

“듣고 보니까. 정말 냄새가 나는 것 같네요.”

“아…….”

나언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며 허둥지둥 기원에게서 몸을 떨어뜨리려 애썼다. 팔에 힘을 주고 손바닥으로 돌덩이 같은 어깨를 꾹 밀어냈지만 밀려날 리 없었다. 기원은 버둥대는 나언의 등 뒤로 손을 둘러 나언을 더 세게 껴안았다.

온수에 빨갛게 익은 귓불을 아프게 씹었다 놓은 기원이 나언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살댔다.

“큰일이네요.”

“내, 냄새가……. 왜 나는 걸까요……. 저는, 늘 깨, 깨끗하게……. 씻는데.”

“그러게요. 어떡하면 좋을까.”

의사한테 물어볼게요. 달래는 척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니 나언이 작게 헐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운 호흡에 섞여 든 울음소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숨겨지지 않았다. 결국 나언이 기원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작게 말했다.

“이 꼴로는……. 주언이 보러 모, 못 가겠어요…….”

스스로를 책망하는 말에 기원이 소리 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나언을 끌어안은 채로 뺨과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쪽, 쪽, 뽀뽀치고 제법 진득한 소리가 욕실에 낯간지럽게 울렸다. 나언은 기원의 스킨십이 부담스러워 자꾸만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결국 나언이 기원의 입술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 냄새날 건데…….”

“뭐 어때요. 괜찮아요.”

“……더러운데.”

“흥분되지 않아요? 이런 더러운 몸에도 발정 나서 덤비는 꼴이.”

기원이 나언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고 집요하게 말했다. 말은 잔뜩 날이 서 있으면서도 안아 주는 손은 어울리지 않게 다정했다. 기원은 나언의 볼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가 다시 입술 아래를 진득하게 핥아 올리기를 반복했다. 나언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악취가 난다며 비난하고 괴롭혀야 마땅할 최기원이 자신을 안고 달래며 물고 핥아 대고 있었다.

순간, 갤러리에서 자신을 타인에게 소개하려 했던 기원의 순수한 목소리가 떠올랐고, 기다렸다는 듯 나언의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흩트려 놓는다. 그게 기원이 말하는 사랑이라면 너무나 이기적이다. 기원이 이토록 제멋대로 굴 때면 나언의 예상과 확신은 거듭 무너졌다. 기원의 앞에선 아무런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기원이 그렇다면, 그런 것일 거라는 바보 같은 순종과 맹목적인 두려움만 커졌다. 그 간극에 지친 나언이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도톰한 입술의 곡선을 장난스레 할짝이던 기원의 혀가 나언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뾰족한 혀가 뜨거운 입 안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나언의 입가에 고인 침이 턱을 따라 흐를 정도로, 기원은 게걸스럽게 입술을 핥고 빨았다. 기원의 무게에 밀려 나언이 뒤로 넘어지려 하면, 단단한 팔이 등허리를 옥죄며 몸을 추슬렀다.

입 안 곳곳을 집요하게 누비던 긴 혀가 천장의 돌기를 매끄럽게 문지르는 순간, 순식간에 배 안이 당겨 왔다. 예기치 못한 성감에 나언이 작게 헐떡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혀가 목구멍까지 닿을 기세로 파고들었다. 나언이 본능적으로 팔을 올려 기원의 옷자락을 붙잡았으나 기원은 그치지 않고 기어코 혀뿌리까지 혀끝을 미끄러뜨렸다.

춥춥대는 침 소리에 머리가 멍해지고, 허벅지와 배 안쪽도 저릿하게 힘이 들어갔다. 차갑게 식어 가던 몸도, 기원의 몸과 맞닿아 비벼지자 점점 달궈지며 제 온도를 찾아갔다.

힘을 빼고 기원의 입술을 받아 내기만 하던 나언도 결국 고개를 비틀어 기원의 아랫입술을 물고 혀를 빨았다. 뇌까지 질척하게 녹아 버릴 것 같은 순간 찾아온 짐승 같은 본능이었다. 기원의 호흡 역시 미세하게 거칠어지고, 겹쳤던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나언의 뒷머리를 헤집어 당기며 다급하게 입술을 붙였다. 기원은 한참 나언과 혀를 섞고, 몸 이곳저곳을 지분거리다 입술을 느리게 떼어 냈다.

“하아…….”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언을 내려다보며 헐떡이던 기원이 힘 빠진 나언의 몸을 가뿐하게 들어 안았다. 몰려든 현기증에 넘어질 것처럼 잠시 비틀대던 나언도 서둘러 기원의 목을 감으며 안겼다. 기원은 그대로 나언을 침대에 눕혔다. 새로 입을 병원복을 꺼내 건네주고, 간호사를 호출해 젖은 깁스도 갈아 끼웠다. 입가가 빨갛게 부르튼 나언은 다시 흐려진 눈빛으로 병실을 오가는 사람들을 반 박자씩 늦게 응시했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던 병실은 다시 적막에 젖었다. 그칠 듯 그치지 않는 빗소리를 들으며 멍하게 바깥을 응시하던 나언은 어느새 옆으로 누워 잠에 빠졌다. 어둑한 병실에서 나언의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며, 기원은 새근대며 자는 연인의 모습을 구경했다.

“…….”

기원은 손을 내려 나언의 코밑에 가져다 댔다. 따뜻한 숨이 흩어지는 작은 코의 아래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린 기원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잠에 빠져 한없이 순해진 얼굴이 참 바보 같았다.

작업실에 가둬 놓았던 날. 있지도 않은 벌레를 두려워하고, 몸을 섞는 동안 경기하듯 소리쳤던 나언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렇게 당해 놓고 미치기로 한 것이라면 칼이라도 쥐고 휘둘러 볼 것이지. 겨우 한다는 것이 자책 어린 망상에 젖는 것이라니.

“착하긴.”

착해 빠졌다. 원망하고 혐오할 놈들이 주변에 가득인데도, 결국 칼끝으로 스스로를 겨눈다. 평생을 뻔뻔하게 살아온 기원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참으로 약하고, 볼품없고, 하찮다. 이대로 목을 졸라 비틀어도 조금만 버둥대다 금방 목을 축 늘어뜨리고 기꺼이 죽을 것 같다. 기원이 나언의 메마른 입술과 갸름한 턱 끝을 살짝 건드리다, 이내 손을 내려 가는 목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가여울 만큼 짓무른 상처 위에 두꺼운 거즈가 새로 붙었다. 원래라면 목걸이가 걸려 있어야 할 자리 위를 조심스럽게 더듬던 기원이 나언의 목을 살짝 쥐었다. 따뜻하고 연약했다. 조금 더 힘을 주자, 경동맥 아래로 약하게 할딱이는 맥박이 느껴졌다.

“…….”

조금 더 손에 힘을 준 순간, 색색대며 잠들어 있던 나언의 눈꺼풀이 잠깐 꿈틀거렸다. 괴로운 꿈을 꾸는 아이처럼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목을 짓누르던 손을 떼어 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다시 잠에 빠져든 나언은 미약하게 끊어질 것 같은 숨을 뱉었다.

기원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다시 나언의 하얀 얼굴을 마주했다. 냄새나도 괜찮다는 말에 묘하게 안도한 표정을 짓던 찰나의 얼굴은, 마치 사정할 때처럼 짜릿해 잊히지 않는다. 결국 기원이 입술을 비틀며 씁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아무래도 조금만 더 망가지면 좋겠다.

갈무리하지 못한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로 기원은 병상에서 떨어진 보호자 침실이 아닌, 나언이 가시거리 안에 들어오는 소파로 걸어갔다. 깊이 자지 못해 뿌옇게 흐려진 머릿속에는 나언의 상처 입은 표정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나도 정상이 아니다. 혹여 나언과 함께 미쳐 가는 중이라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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