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Break away
나는 순조롭게 회복해 갔다. 입원 일주일 차에 접어들고, 단조로운 생활에 제법 적응한 나는 점심시간에 맞춰 간이 식탁을 내려 주는 최기원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내가 식탁을 꺼내 보려다 최기원에게 구박을 들었고, 세 번째까진 불편한 눈으로 엉덩이를 달싹거렸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적응을 했고, 이젠 밥시간이 되면 와서 식탁을 내려 달라는 뜻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식탁에 맞춰 침대의 각도를 세워 준 그가 식탁 위를 손톱으로 두드렸다. 멍하게 있던 내가 그를 바라보자 최기원이 침대 시트 위에 기대앉으며 나를 옆으로 바라봤다.
“내일 항암 들어가는데. 동생 정말 안 봐요?”
대답이 선뜻 나오질 않는다. 아이는 너무나 보고 싶었다. 밝고 큰 눈을 마주하며 따뜻한 볼을 보드랍게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이번 항암도 잘 견딜 수 있다고 용기도 북돋아 줘야 했다.
하지만 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하게 눈치가 빠르고 보기보다 마음이 여린 아이에게 지금 내 꼴은 짐을 얹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안 좋은 쪽으로만 이어지는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곪게 만드는 생각의 등허리를 최기원의 중저음 목소리가 끊어 냈다.
“그래요. 나언 씨가 불편하다면.”
최기원이 대답과 동시에 손을 뻗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나도 모르게 굳은살을 뜯어내 엄지에 피가 비치고 있었다. 상처를 보고서야 뒤늦게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최기원은 자리에서 일어서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미음이 담긴 점심 식사가 병실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가 일주일째 병실을 떠나지 않는다. 웬만한 용무는 조익현 비서실장님을 병실까지 불러 해결했고, 급하거나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러 회사에 가야 할 때는 꼭 간병인을 불러 나를 혼자 있지 않게 했다.
이틀에 한 번 전신을 씻는 것 또한 최기원이 직접 했다. 죽을 먹게 되면서 수액 바늘도 제거했기에 크게 불편한 것이 없어서 혼자 씻겠다고 말해 보았는데, 최기원은 피식 웃으며 깁스 젖는 날엔 다른 쪽도 마저 부러뜨리겠다는 협박을 했다. 그냥 씻겨 주겠다고 하면 될 일을, 같은 말이라도 꼭 무섭게 했다. 하는 수 없이 그에게 몸을 맡겨야 했다.
최기원이 남을 씻겨 본 경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제법 거친 손길로 몸을 닦았고, 샤워 헤드의 방향도 능숙하게 조절하지 못했다. 샤워가 끝나 내 몸을 닦아 줄 때면 그의 옷 또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아 했다. 젖는 것 따위 상관없다는 듯 나를 씻기며 몇 번이고 목덜미와 귀뺨에 입술을 묻고 깊숙이 끌어안았다. 나는 그가 젖는 것보다, 냄새가 나지 않을까 괜히 다급해졌다. 다행히도 최기원은 의외로 비위가 좋은 사람이었다.
겨울비가 그치고 하늘이 제법 맑아졌다. 앙상한 나뭇가지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려 했다. 병실 안으로 퍼진 노란 햇볕이 먹색의 그림자를 길게 그려 냈다. 오늘도 일과처럼 나를 씻겨 준 최기원은 드라이기를 연결해 젖은 머리를 말려 줬다. 따뜻하면서 세지 않은 바람이 두피 가까이 쏟아졌고, 최기원은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살살 흔들어 풀어 주었다.
씻었음에도 은근하게 퍼지는 이상한 냄새가 정말 최기원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걸까. 몇 번이고 팔을 끌어 올려 냄새를 맡고 싶었으나, 그럴 때마다 유독 차가워지는 그의 눈빛 때문에 애써 충동을 눌러 담았다.
오늘 오후에는 손목의 경과를 살폈다. 의사는 다행히도 손목이 잘 회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두껍고 불편했던 깁스 대신, 꽤 유연한 손목 보호대를 차게 됐다. 움직임이 가벼워져서 좋았다. 하얀 시트 아래에 생긴 그림자를 따라 손가락을 꼼지락대자, 최기원이 드라이기 선을 정리하며 차갑게 말했다.
“의사가 손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슬그머니 움직임을 멈추고 이불 아래로 손을 감췄다. 그는 보호자용 의자를 빼어 앉으며 물었다.
“밤에 동생 보러 가는 건 어때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 밤이요?”
“네. 마주하기 불편하면 잘 때 얼굴이라도 보고 와요.”
“지금은 조금……. 냄새만, 그것만 나으면 바로…….”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최기원이 느리게 다리를 꼬며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간병 이후, 머리를 세팅하거나 정장을 입지 않은 탓인지 그는 주말에나 볼 법한 헐렁한 모습이었다. 팔걸이에 기대어 턱을 괸 그가 나를 삐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 안 보면 이젠 한 달 뒤예요. 지금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동생 면회 시기는 나언 씨가 정하는 게 아니에요. 보고 싶다고 면회 잡아 주고, 싫다고 시기 조율해 줄 생각 없어요.”
그럴듯한 지적이었다. 주언이를 만나는 건 이렇게 밀고 당길 일이 아닌데도 나는 그의 제안을 거듭해서 거절하고 있었다. ‘주언이를 위해서’라는 막연하고 맹목적인 목표 하나로 최기원의 곁에서 버티고 있었으면서, 망가져 가며 버텨 낸 한 달의 보상을 스스로의 덫에 파묻혀 애써 거절하고 있었다. 최기원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을 행동일 것이다. 난 스스로가 더 싫어져 주눅이 든 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주언이 안 보여 준다고 뭐라더라, 좀생이? 아무튼, 답지 않게 욕까지 했으면서. 기껏 만나라니까 또 어깃장 놓는 건 뭐야. 신종 반항인가?”
“그, 그런 건 아니에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최기원이 정 없이 말하긴 했지만 곱씹어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시 한 달 뒤, 그가 순순히 주언이를 보여 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이가 밤에 잠들어 있다면 몰래 보고 와도 괜찮을 것 같다. 주언이가 나 없이 항암 받는 걸 무서워하니 작게 편지를 남겨도 되겠다.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레 대답했다.
“네. 그러면 밤에, 밤에 갈게요.”
최기원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맞은편 소파나 보호자용 휴게실에 가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 그를 불렀다.
“저기…….”
그가 고개를 돌렸다. 필요한 것 있냐는 듯 눈썹을 끌어 올리는 그를 향해 쭈뼛대다 말했다.
“저…. 도, 돈 좀 빌려주세요.”
“…….”
“많이는 아니구요…. 오, 오천 원 정도….”
그가 대답을 않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생각해도 제법 갑작스럽고 황당한 부탁이었기에 불쑥 돈이 필요한 이유를 덧붙였다.
“젤리, 젤리 사게요. 주언이 줄 거요.”
여전히 침묵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어느새 나는 귀가 조금 달아오른 채로 그에게 젤리를 꼭 사야 하는 이유를 주섬주섬 늘어놓고 있었다.
“주언이가 조, 좋아해요, 젤리. 항암 끄, 끝나면……. 많이는 안 되고, 그런 거 조금 먹어야, 이, 입맛이 살아나서요…. 하, 항암 끝나고도 모, 못 보니까, 미리 주려고요.”
“이유는 별로 안 궁금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린 최기원이 손을 뻗어 병실의 조명을 내렸다. 보호자용 의자를 빼어 털썩 앉은 최기원이 피곤하다는 듯 눈을 비볐다.
“부탁할 거면 여기로 와요.”
나른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느릿느릿 흩어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의자 앞의 바닥을 가리켰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 상황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고, 민망함에 달아올랐던 얼굴이 차게 식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제 주제를 파악했다. 조금은 무감해진 얼굴이 된 나는, 이불을 걷고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슬리퍼에 발을 끼울 필요도 없었다. 그대로 무릎을 꿇고 그의 다리 사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는 피곤한지 지퍼조차 내려 주지 않았다. 오른손을 그의 허리춤을 향해 뻗었고, 진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왼손을 사용하지 못해 답답하게 구는 나를 최기원은 그저 노곤한 눈으로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권태로운 모습과는 달리 아래는 이미 단단하게 서 있었다. 속옷 위로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는 것을 꺼냈다. 호흡이 희미하게 떨렸다. 뜨겁고 두꺼운 성기가 오늘따라 버거울 정도로 크게 보였기 때문이다. 입원한 뒤로 그의 아래를 본 적이 없었던지라 기억 속에서의 모습보다 훨씬 흉포하게 느껴졌다.
마음의 준비라도 하듯 기둥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내리며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최기원은 기다리기 싫은 듯, 내 뒷머리를 끌어당겨 성기 가까이에 뒀다. 최기원은 성기를 쥐고 있는 내 손을 떼어 내고, 바닥을 짚으라 말했다.
툭, 툭. 최기원은 제 성기를 잡고 귀두로 내 뺨을 성의 없게 두드렸다. 입술 새를 꾹 누르기도 하고 넣을 것처럼 힘을 주다 방향을 틀어 입가로 죽 미끄러뜨렸다. 언제 성기가 입술 새를 치고 들어올지 몰라 심장이 두근거렸고, 땅을 짚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몇 번 더 얼굴 위를 오가던 귀두 끝이 입술을 벌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일 여유도 없이, 두꺼운 귀두가 혀를 꾹 눌렀다. 절로 눈가가 찌푸려지고 아래를 짚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대가를 치르듯 성기를 빠는 행위는 다행히도 처음보다 거부감이 덜했다. 돈이 필요해 남의 욕구를 입으로 해결해 줘야 한다는 건 굉장히 역겹고 자존심 또한 갉아먹는 짓이지만, 두 번째가 되니 나름의 면역이 생긴 모양이다.
“우, 으…….”
“힘 빼.”
찰싹 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뺨을 내려쳤다. 아프지 않은 세기였으나 놀라서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니, 그가 뒷덜미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으욱!”
코끝이 순식간에 음모 가까이 처박혔다. 목구멍까지 한 번에 밀고 들어온 성기가 입 안을 꽉 채우고 혀를 누르자 반사적으로 구역질이 치밀어 등을 들썩였다. 손을 들어 그의 허벅지를 붙잡아 약하게 밀었으나 그는 한 손으로 내 손을 가볍게 떼어 냈다.
숨을 쉬기 위해 다급히 입을 벌렸고, 틀어 막히는 숨소리와 삼켜 내지 못한 침이 그 틈 사이로 마구 쏟아졌다. 최기원은 손에 더 세게 힘을 주며 뒤통수를 다리 사이로 지그시 눌렀다. 부르르 떨리는 손이 뭐라도 쥐려 바닥을 헤매다 병원복 하의를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얼굴에 피가 몰리고, 눈알이 뜨거워졌다. 구역질을 억지로 넘기며 처박힌 성기를 인내하려 했으나 점점 한계에 내몰렸다. 입에서 끅끅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바르작대느라 꿇었던 무릎이 옆으로 쓰러졌다. 다리로 바닥을 뒤치며 고개를 젓는 순간 최기원이 움켜쥔 머리카락을 당겨 성기를 빼 주었다.
“후, 하아, 흐우, 쿨럭, 하윽….”
눈물 콧물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최기원은 머리칼을 더 아래로 당겨 고개를 뒤로 젖히게 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힘들어요?”
“흐윽….”
턱 아래로 흐른 침을 손등으로 걷어 내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조금만 더 숨 쉴 시간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형이 이렇게 개고생을 해서 사 준 젤리라는 거. 주언이는 알까 몰라.”
성감이 올라 예민해진 목소리가 나를 비웃었다. 그를 올려다보던 시선이 순식간에 불온해졌다. 눈물에 젖은 눈을 치켜뜨고 그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최기원은 그런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손을 내려 꺼덕거리는 기둥을 감싸 쥐었다. 침이 범벅 되어 번들거리는 성기를 큰 손으로 쓸어 올렸다 내릴 때마다 굵게 선 핏줄이 그의 손아귀 아래에 터덕터덕 소리를 남겼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예고 없이 귀두 끝이 쿡 들어왔다. 그는 내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아 고정하고 허릿짓을 시작했다. 박혀 있기만 해도 힘든 것이 식도 안까지 오가며 움직이기까지 하자 더욱 괴로웠다.
“끄, 욱, 으흐, 윽, 욱.”
입 안에 가득 고인 침을 성기가 마구 휘저으며 오가느라 쿨쩍이는 소리가 났다. 그가 점점 힘을 실어 오는 탓에 내 몸도 무게를 따라 점점 뒤로 젖혀졌다. 결국 격한 허릿짓과 함께 몸이 뒤로 넘어가며 목덜미가 병원 침대 시트에 파묻혔다. 그는 내 얼굴을 침대에 고정한 채, 마치 구멍에 대고 좆질 하듯 허리를 마구 움직였다. 다리가 바닥을 긁고 떨리는 손가락이 그의 허벅지를 마구 문질렀다.
“하아……. 씨발, 좀, 참아 봐요.”
“흐…으욱! 끄윽, 욱!”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에 마구 들러붙었다. 볼과 턱이 으스러질 것처럼 나를 꼭 붙든 최기원의 움직임이 더욱 격렬해졌다. 성기가 목구멍까지 쑥 들어오면 등이 절로 빳빳하게 굳고, 빠져나올 때면 모두 게워 낼 것처럼 속이 울렁댔다. 뒤는 침대, 앞은 최기원의 두툼한 몸이 버티고 있었다. 허우적대는 나를 붙잡고 퍽퍽 허리를 쳐올리던 최기원은, 내가 토악질을 참으며 목구멍을 쿨럭일 때마다 낮게 신음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점점 다급하다시피 빨라지던 추삽질은 한참 뒤 뜨거운 파정과 함께 끝이 났다. 입 안에 성기를 뿌리 끝까지 파묻은 최기원이 목을 긁는 신음을 뱉으며 사정했다. 성기가 움찔대며 비릿한 액체가 툭툭, 입 안에 쏘아졌다. 그와 몸을 섞은 것이 오랜만이었기에 그만큼 정액은 양이 많고 진득했다. 대부분은 강제로 식도를 타고 넘어갔고 삼키지 못한 것은 역류하며 아랫입술과 턱을 따라 흘렀다. 성기를 몇 번 더 느리게 움직이던 최기원은 기둥을 붙잡고 내 얼굴 위로 가져다 댔다.
마저 사출되지 않은 액들이 눈가와 광대에 치덕치덕 흐르거나 묻었다. 속눈썹에 엉겨 붙은 정액 때문에 왼쪽 눈은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다. 종이 위를 오가는 붓처럼 얼굴 위를 헤집고 다니던 성기는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곧게 서 있었다. 그는 그대로 널브러져 헐떡이는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깨끗하게 핥아 봐요.”
다정한 명령에 허우적대며 기둥부터 붙잡고 혀를 가져다 댔다. 구멍 아래에서 늘어진 하얀 정액을 혀로 감아올리며 귀두 끝까지 핥아 올렸다. 귀두 주변으로 모인 정액은 입술로 머금어 사탕 빨듯 쭉 빨았다. 풀린 눈으로 아래를 빨아 닦아 주는 동안 최기원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낮고 느른하게 한숨을 뱉어 냈다.
최기원은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가 씻었다. 고개를 매트리스에 기댄 채로 늘어진 나는 지친 듯 눈을 감아 버렸다. 병실 안의 공기가 답답하고 눅진했다. 눈을 감았음에도 기우뚱하게 말려드는 눈앞이 어지러웠고, 미열이 오른 전신은 뜨거운 물에 담갔다 뺀 걸레처럼 축 처졌다.
먼저 씻고 나온 그가 침대에 기대어 졸고 있는 내 손을 잡고 몸을 이끌었다. 가볍게 딸려 올라간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화장실까지 떠밀려 갔다. 최기원은 잠이 덜 깬 나를 세면대 앞에 세우고, 물을 틀어 얼룩진 얼굴을 씻겼다.
차가운 물을 배려 없이 맞고 나서야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는 차가운 물에 발갛게 언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침대에 앉아 물기가 덜 닦인 얼굴 위로 로션을 대충 뭉개 바르는 동안, 그는 제 패딩을 가지고 왔다.
최기원은 검정색 패딩을 펼쳐 내 어깨 위에 둘러 주었다. 얼결에 자리에서 일어서 팔을 끼우자 소매가 넉넉하게 남았다. 그에겐 적당한 여유를 두고 맞는 옷이 나에겐 품이 너무 컸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툭 떨어진 소매 끝을 접어 준 최기원은 지퍼도 목 끝까지 채워 주었다.
“젤리 사러 가요.”
최기원의 붉은 입술이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특유의 싸늘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직전의 폭력적인 행위를 잊은 듯 금세 다정해진 그의 모습을 마주하자, 불현듯 혼란스러운 기분에 젖어 버렸다. 행여 고맙다는 말이 불쑥 나오지 않도록, 이건 화대와 같은 호의일 뿐이라는 현실을 끊임없이 되뇌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병동 1층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매대 곳곳에 사람들이 꽤 있었다. 버릇처럼 손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다행히도 최기원의 패딩은 그가 즐겨 뿌리는 향수와 옅은 담배 향으로 흠뻑 물들어 있었다.
“젤리는 여기 있네요.”
조금 앞서 걷던 최기원이 고개를 돌리며 손가락으로 매대 한 곳을 가리켰다. 나는 퍼뜩 손을 내리고 젤리가 걸려 있는 곳 앞에 섰다. 주언이가 먹던 젤리는 복숭아 맛뿐이었는데, 그새 사과 맛이 새로 출시되었다. 고리에 매달려 있는 두 종류의 젤리 앞에서 고민하다 원래 먹던 복숭아 맛을 하나 쥐어 꺼내자, 최기원은 매대에 걸려 있는 다른 젤리까지 몽땅 꺼내 바구니에 우르르 쏟아 버렸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다, 전부 다 사요……?”
“종류가 다르잖아요.”
“마, 많이 먹으면 안, 되는데.”
“다 먹어도 될 만큼 얼른 건강해져야죠.”
최기원은 더듬더듬 이어지는 작은 목소리도 용케 알아듣고 여유로운 대답을 남겼다. 5,000원을 훌쩍 넘긴 것 같은 젤리 양에 입술이 달싹댔으나 나는 끝내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미 그가 결정한 것이기에 이젠 무를 수 없었다. 수북한 젤리 더미를 흐린 눈으로 보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때, 시선 끝에 문구 용품 코너가 들어왔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포스트잇 하나와 볼펜 하나를 들었다.
“이, 이것도 사도 돼요?”
그에게 물으며 눈으로 빠르게 가격을 훑었다. 포스트잇 메모지가 1,900원, 볼펜이 1,200원이었다. 젤리 서른 개 정도에 포스트잇 가격과 볼펜 가격을 더하려는데 머리가 점점 둔해졌다. 젤리 서른 개의 가격을 어림했다가 메모지 가격을 더하려면, 기억해 둔 숫자가 뒤엉키며 머릿속에서 정돈되지 않았다.
“이, 이천, 아니…, 사, 만 오천 원에….”
눈알을 굴리며 작게 중얼대는 나를 내려다보던 최기원이 빙긋 웃으며 내 손에 들려 있는 메모지와 펜을 뺏어 바구니에 툭 던져 넣었다.
“이건 뭐 하려고요?”
“쪽지, 써 주, 주려고요.”
다행히도 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기원은 커피와 담배 껌 등 자신이 먹을 것 몇 가지를 더 담아 계산대에 놓았다. 직원이 바코드를 찍을 때마다 물건의 가격이 포스기에 떴다. 난 포스기 앞에 서서 차례로 더해지는 숫자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눈앞에 가격이 적혀 있는데도 돈이 한 번에 읽히지 않았다.
오기가 생겨 숫자들을 노려보다시피 했다. 패딩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받아 올림까지 손가락으로 했지만, 중간쯤에서 숫자가 마구 헤집어지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계산이 끝나 반짝하며 화면이 꺼졌다. 봉투에 젤리를 담고 먼저 편의점을 나서는 최기원을 얼른 뒤따라갔다. 패딩 안으로는 계속 손톱 옆의 살을 툭툭 건드렸고 머리로는 계속 젤리의 가격을 되뇌었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상한 채로 병실에 들어온 나는 바구니 속에서 펜과 메모지를 꺼냈다.
볼펜을 뜯고 메모지 위에 ‘주언아’라는 글씨를 썼다. 오랜만에 글씨를 쓰려니 펜을 쥔 손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펜 아래로 자꾸만 땀이 스며들어 몇 번이나 손바닥을 병원복 바지에 대고 문질렀다.
막상 펜을 쥐니 뭐라고 써야 할지 막막했다. ‘항암’이라는 글자를 꾹, 꾹 눌러쓰고 한 번 쉬었다. 볼펜 뚜껑을 깨물고 잠시 머뭇대던 나는, 이제 힘내서 받으라는 글씨를 쓰려 펜을 고쳐 쥐었다. 그런데 갑자기 받으라는 단어 중 ‘받’ 아래에 오는 받침이 헷갈렸다.
입술을 깨물고 펜을 또 한 번 고쳐 쥐었다. ‘받아’라고 혼잣말도 해 보았지만 선뜻 펜촉이 종이 위로 내려앉질 못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종이 위를 헤매고 있자 최기원이 고개를 들며 보던 책을 덮었다.
“왜요?”
“아…….”
차마 글씨를 못 쓰겠다는 말을 하진 못해 침만 그러모아 삼키며 눈을 피했다. 파르르 떠는 손을 바라본 그가 재차 물었다.
“손 아파요?”
“……네.”
다친 쪽 손도 아니면서 거짓말을 해 버렸다. 그가 입꼬리를 희미하게 끌어 올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옆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그가 펜을 쥐고 있는 손 위를 제 손으로 덮어 잡았다.
“항암 뒤에 뭐라고 써요?”
“힘내서… 받아, 라고.”
그가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냄새가 전해질까 싶어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힘을 주고 천천히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헷갈렸던 글씨가 순식간에 바르게 써지는 모습을 보자 입 안에 씁쓸한 기분이 고였다.
“다음은?”
“혀, 형이 자주 못 가서 미안하다고…. 형은 하, 항상 주언이… 생각한다고 써, 주세요.”
슥슥, 그가 손을 움직이자 마치 내가 쓰는 것처럼 내 손도 따라 움직였다. 네모반듯한 포스트잇 위로 정갈한 글씨가 채워졌다. 처음 주언이의 이름을 썼던 글씨와는 다르게 삐딱하지도 않고, 들쭉날쭉하지도 않았다.
“다 됐어요?”
끄덕임에 그가 손을 떼어 냈고 나는 물끄러미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젤리 구매도, 편지 쓰기도 결국 최기원의 도움으로 끝마쳤다. 몇 줄 쓰지 못한 단출한 문장과 봉지 가득한 젤리를 바라보는데 어쩐지 조금 허무했다. 손끝으로 종이 끝을 매만지며 울렁대는 속을 달랬다.
저녁 식사 후 시간을 죽이며 완연한 밤이 되길 기다렸다. 열 시쯤이면 주언이가 자는 걸 알지만,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열두 시가 넘기를 기다렸다. 미적대며 시간을 끄는 내 마음을 이해하는 듯, 최기원도 병실에서 밀린 업무를 보았다. 시계를 확인한 내가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서서 쪽지와 젤리 봉지를 챙기자, 그가 노트북을 덮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주언이의 병동을 가기 위해선 바깥을 조금 걸어야 했다. 그는 다시 제 패딩을 펼쳐 주었다. 지퍼를 채우고 잠시 나를 훑어보더니, 서랍을 열어 두툼한 검정 목도리까지 꺼내 둘러 주었다. 검고 뚱뚱한 김밥이 된 나와 달리, 최기원은 가벼운 니트 차림으로 병동을 나섰다.
소아암 병동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서자 훈기가 몰아닥쳤다. 잘게 몸을 떤 나는 오랜만에 찾은 병동 내부를 벅찬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병원 특유의 음울함이 깃든 이곳은 어둑하고 고요했다. 왜인지 모르게 긴장이 되어 숨소리가 조금씩 불안정해졌다. 당직을 서는 직원에게 받은 출입증을 쥐고, 주언이의 병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최기원은 병실 앞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아 눈짓으로 다녀오라고 말했다.
마른침을 삼키고 문고리를 조심스레 밀어 문을 열자 이미 조명이 모두 내려 어두컴컴한 병실 안이 언뜻 보였다. 숨을 죽인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작은 인영을 향해 걸어갔다.
“…….”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에 눈이 적응하며 서서히 아이의 얼굴이 눈에 담기기 시작했다. 말간 얼굴로 자고 있는 순한 모습을 보자 말릴 새도 없이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만지고 싶었다. 깨워서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되뇌고 싶었다. 하지만 난 아무런 기척도 내지 못하고 숨을 죽인 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젤리가 가득 든 봉지를 사이드 테이블에 올리고, 써 온 포스트잇을 뜯어 옆에 붙였다. 잘 자고 있는 것을 보았고 편지도 놓았으니 이제 떠나야 하는데도, 살이 내려 조금 더 앙상해진 아이의 얼굴이 자꾸만 발걸음을 얽어 붙잡았다.
불현듯, 꾹 감겨 있던 아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게슴츠레하게 뜨이기 시작했다. 기다랗고 풍성한 속눈썹이 위로 솟아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빛을 머금어 반짝대는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 내 쪽을 향했다.
“…….”
“…….”
아이가 선잠을 자고 있던 모양이었다.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잠시 눈을 끔벅이며 내 쪽을 응시하던 아이가 천천히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조명을 건드렸다.
탁, 하고 옅은 조명이 켜지고 나는 당황해서 아이를 바라본 채로 굳었다. 처음에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의 얼굴이 점점 싸늘해졌다. 눈가가 조금 붉어진 채 숨을 거칠게 쉬던 주언이가 마른 입술을 열었다.
“형, 지금 온 거야?”
“어, 어……. 내일, 하, 항암이라며.”
대답하며 목소리를 크게 낸다고 냈지만, 제멋대로 갈라지고 뒤집어지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볼품없었다. 문장을 끝맺을 때는 소리가 거의 사그라질 정도였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 사이드 테이블 위의 봉지를 쳐다봤다. 그 옆에 적힌 쪽지를 떼어 가져가더니 시선을 내려 글자를 읽었다.
“뭐야. 진짜 자는 거만 보고 가려 그랬어?”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아이가 재차 이유를 물었다.
“왜?”
“…….”
“형 왜 나 보러 안 와? 아무리 바빠도, 전화 한 통도 못 해 줘?”
“미안. 형이 진짜 바, 바쁘고, 폰, 폰도 잃어버리고….”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나 엄청 아팠어, 얼마 전에. 그건 알아?”
뾰족뾰족한 목소리가 아프게 꽂혀 들었다. 아이는 장염에 걸려 이번 항암 차수가 밀린 일을 말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그렇다고 몰랐다고 잡아뗄 수도 없어 입술만 꾹 깨물었다. 어느새 할딱이던 아이는 굵은 눈물을 툭툭 흘려 대고 있었다.
주언이가 손을 들어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이젠 참기 힘든 듯 울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아이는 온 힘을 다해 서운함을 토로했다.
“이렇게 나, 버려둘 거면, 나, 나는 여기 입원, 안 해도 돼. 그, 냥 형이랑, 흑…. 그냥 작은 방이라도 형이랑 같이, 있는 게 나아…!”
“우, 울지 마, 주언아.”
“그냥 퇴원할래. 형 일하고 오는 동안 얌전, 흐윽, 얌전하게 있을 테니까…. 집에 갈래. 흐엉….”
옆에 놓인 휴지를 뽑아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를 달래고 싶었지만, 더듬느라 변명조차 제대로 뱉질 못했다.
“미안해. 미안한데, 다 너 빠, 빨리 나, 나으라고 형이….”
“아무도, 안 오잖아! 옆에 흑, 병실엔 계속, 아빠가 오고, 엄마도 오고…. 가끔 친구들이랑 영상 통화도 하고…. 흐윽, 나는 엄청, 아픈데도 흑, 흐엉, 혼자….”
아이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휴지 뭉텅이를 들어 아이의 얼굴에 가져갔다. 미안하다는 말을 정신없이 뱉었다. 아이가 짜증을 내며 내 손을 툭 밀어냈다. 다행히도 병실이 어둡고 위에 입은 외투가 두꺼운 탓에 아이는 보호대나 하의로 입은 병원복을 보지 못했다.
“됐어, 흐윽, 형은 내가 귀찮은 거잖아!”
“뭐? 무, 무슨 말을 그, 그렇게 해……!”
아이가 무릎을 세워 말고 이마를 쿡 처박고는 가시 돋친 말을 우르르 쏟아 냈다.
“내가 점점 아프니까, 흑 형 나 싫잖아, 내가 짐이잖아!”
“배, 백주언!”
“이런 거 적어 두지 말고, 그냥 흑, 깨우라고. 깨워서 말을 걸어 달라고! 젤리 같은 거 필요 없다고!”
“옆방에 깨겠어, 소, 소리 그만 질러….”
“흐, 윽. 가. 이렇게 몰래 흑, 속일 거면 다신 오지 마…!”
“투, 투정 그만 부려. 너 형이, 형이 너 치료, 바, 받게 하려고, 얼마나, 얼마나.”
아이의 큰 눈이 나를 향한다. 어느새 분노가 조금 가라앉고, 슬픔이 넘실넘실 차오른 눈동자에 원망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형이, 이렇게 몰래 온 거 알았으니까…. 나는 이제 밤에 잠 못 자. 낮에도 형 계속 기다리는데, 이젠, 밤까지 형 계속 기다리게 생겼어.”
“그거 고, 고집이야. 오늘도, 형, 시간 겨, 겨우 내서….”
“핑계 대지 마.”
아이가 휙 뒤돌아 이불을 뒤집어썼다. 기를 쓰고 울음을 참는지 악문 잇새로 질질 울음이 새어 나오고, 이불 아래의 몸이 작게 들썩였다. 손을 들어 아이를 부르려다 마른세수를 하고 내려 뒀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 주언아….”
“…….”
“항암 잘 받아. 미안해.”
“…….”
“미안.”
손을 들어 조명을 꺼 주었다. 이불을 뒤집어써 동그랗게 부푼 인영을 한 번 더 눈에 머금고 천천히 병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최기원이 인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나는 그를 지나쳐 멍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조금 다급하게 걸음을 붙여 왔다. 최기원이 휘청대며 걷는 나를 붙잡아 세우자, 한계까지 차올랐던 눈물이 볼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주언이를 보지 못하게 하는 건 최기원이니, 어쩌면 아이의 말이 그에게 공격적으로 들렸을 수 있다. 최기원이 주언이까지 미워하는 건 싫기에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을 건넸다.
“주, 주언이가 저런 애, 애가 아닌데……. 마, 많이, 속, 상했나 봐요.”
“…….”
“죄송, 해요….”
비틀대며 걸음을 다시 떼자, 팔뚝을 약하게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이 떨어졌다. 잊고 있었던 위통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불에 타는 듯이 쓰려 오는 배를 붙잡고 절뚝대며 걸음을 옮긴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질끈 감으며 복도 끝에 주저앉았다. 작은 한숨과 함께 나에게로 걸음을 옮긴 그가 나를 들쳐 업었고, 희미하게 이어지던 의식도 전원을 내린 것처럼 한순간에 끊어졌다.
새벽녘, 때아닌 소란이 일었다. 중간중간 간호사의 부름에 대답을 하면서도 몇 번이나 의식을 잃었다. 꿈속에선 주언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이 끊임없이 반복됐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도 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언이에게 되레 화내기도 했다.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잠에 드니, 나는 또 주언이의 침대 앞이었다. 계속 반복되는 꿈에 지쳤다. 뚱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아픈 말을 쏟아 내는 아이를 멀거니 바라보다, 이번에는 주언이의 손을 붙잡았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던 내가 ‘그래, 도망가자.’라고 말했다. 주언이는 눈물을 매달곤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언뜻, 창백한 낯에 걸린 입꼬리가 올라간 것 같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이 최기원이 병실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섰다. 아이의 앞에서 팔뚝이 잡혔고, 순식간에 끌려 나가 작업실 구석에 내팽개쳐졌다. 시체 썩은 내와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소리에 기겁을 하며 몸을 웅크렸다. 난 앞으로 이어질 끊임없는 추위와 고독을 떠올리며 뱉은 말을 후회했다. 같이 죽자, 라고 할걸.
“…….”
눈이 뜨였다. 하얀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흐려지는 초점을 붙잡았다. 다시 잠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서 꿈과 현실이 자꾸 섞여 들었다. 멍한 머리를 겨우 굴려 꿈이 아닌 실제의 기억을 되짚었다. 주언이랑 이야기를 했고, 아이가 울었고, 거기서 난 뭐라고 대답했더라. 홧김에 죽자고 말했던 건 정말 꿈이었을까. 잠깐 주언이를 보고 온 기억이 젖은 종이로 감싸듯 점차 텁텁하게 흐려진다.
“깼어요?”
건조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최기원이 앉아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어쩐지 눈을 바로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새벽 다섯 시예요. 조금 더 자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건너갔다. 그도 주언이를 만나고 온 것에 대해 아무런 말을 건네지 않았다. 병실엔 고요하고 서늘한 공기가 가라앉았다. 하얀 천장이 빙글, 돌아가는 것 같은 현기증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겁게 삶아진 것 같은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
잘 먹던 미음을 다시 게워 낸 이후, 약이 조금 더 독해졌다. 손등에 꽂힌 진통제와 영양제 덕분에 크게 몸 상태가 안 좋아진 건 자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원래 퇴원 예정일보다 사흘이 지나서야 퇴원 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그는 퇴원에 맞춰 새 옷을 준비해 주었다. 늘 내 사이즈보다 크게 사 오는 그는 허리가 남는 바지를 보고 혀를 낮게 찼다. 나는 그의 싸늘한 눈초리를 피하며 스웨터에 머리를 끼웠다. 손목은 거의 나았으나 아쉽게도 보호대는 아직 착용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의 차에 올랐다. 나와 그 사이에 자연스레 자리 잡은 침묵을 깨고, 그에게 물었다.
“주언이…. 항암 잘 받, 았대요?”
“네.”
더듬지 않기 위해 한 글자 한 글자 느리게 뱉은 질문에, 그는 핸들을 가볍게 돌리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열은 오르지 않는지, 식사량은 어떤지 물어보고 싶은 게 가득했지만 묘하게 고압적인 그의 태도에 되물을 수 없었다. 손톱 거스러미를 살짝 뜯으며 시선을 차창 바깥에 고정했다. 멍한 눈동자가 쉽게 초점을 잃고 흐려졌다.
언제까지 이 짓을 이어 나가야 할까.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울컥 치받혔으나 울음이 나려는 것인지, 멀미가 나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정말 소화가 안 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유를 생각하려 하면 머리에 희뿌옇게 안개가 차올랐고, 갑작스레 잔인한 기억이 툭툭 떠오르며 생각을 잃게 했다. 그럴 때면 이유 없이 소름이 일고, 가빠진 숨이 잇새로 바삐 흘렀다.
머리를 잘게 털어 생각을 그치고 멍하게 바깥을 바라봤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2월의 풍경을 분주하게 눈에 담는 건 살기 위한 나름의 발악이었다. 차창 너머로 슬슬 익숙한 건물들이 보였고, 이내 등 뒤로 빠르게 지나쳐 갔다. 점점 그의 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주차를 마친 그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나는 정신을 빼 놓고 있다가 뒤늦게 문고리를 잡아 열고 그를 뒤따라 걸었다. 너른 등을 흘긋 쳐다보고 다리를 빨리 움직이기 위해 애썼다. 마음먹은 대로 다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아 더욱 조급해졌고, 절뚝이는 다리가 하얀 자갈밭을 힘겹게 가로질렀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내가 걸어오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앞머리 사이에서 회색의 눈동자가 노을빛을 머금고 빛났다.
오랜만에 들어선 집은 이 주 넘게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공간임에도 훈기로 가득했다. 조금 갑갑한 느낌에 목을 꽉 맨 목도리를 풀었다. 토하며 쓰러졌던 복도 바닥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장식장 곳곳에는 작은 먼지 하나 없었다. 코트를 벗어 소파에 걸쳐 둔 최기원을 따라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식탁에 가까워질수록 고소한 냄새가 짙어졌다. 식탁 위는 이미 저녁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손 씻고 와요, 저녁 먹게.”
고개를 끄덕이고 1층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 보호대를 살짝 풀어 옆에 두고 손 세정제를 왕창 풀어 손을 씻었다. 내친김에 팔뚝까지 거품을 묻혀 씻어 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후 버릇처럼 냄새를 한 번 맡았다.
“…….”
닫혀 있는 화장실 문을 한 번 더 살피고 다시 레버를 돌렸다. 쏟아지는 물에 손과 팔뚝을 빠르게 적시고 한 번 더 씻었다. 최기원이 새로 사 준 니트 소매가 척척하게 젖어 들 때까지 씻는 행위는 몇 번이고 반복됐다.
조금 상기된 얼굴로 식탁에 도착하니 최기원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래 씻네요.”
“……내, 냄새가 올라와서요.”
“씻는다고 달라지는 거 없으니까 괜한 애 쓰지 말아요.”
“죄, 죄송해요.”
그는 수저를 들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코를 한 번 훌쩍인 나도 숟가락을 들어 죽을 펐고 이로 긁으며 삼켰다. 그저 흰죽인데도 최기원이 이것저것 넣어 끓인 이상한 죽보다 훨씬 고소했다. 물론 그때의 몸 상태가 말이 아닌 탓도 있었지만. 그의 기분이 썩 괜찮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나는 기계처럼 수저를 들어 담긴 것을 모두 입에 넣고 넘기기를 반복했다. 다행히도 아직 약 기운이 돌아 위가 따끔거리기만 할 뿐, 참을 수 없는 토기가 일진 않았다.
먼저 식사를 마친 그는 나를 기다렸고 내가 수저를 내려놓자마자 나를 소파로 끌었다. 2층까지 갈 것도 없이, 소파까지 향하는 길목에 바지와 니트가 하나씩 벗겨졌다. 사용인이 없는 너른 집 안에선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뜨거운 혀가 몸을 핥고 단단한 것이 예고 없이 파고들었다. 내 것과 그의 것이 뒤섞인 희뿌연 액을 몸 곳곳에 뒤집어쓰는 동안 나는 별생각 없이 이끄는 대로 흔들렸다. 차라리 이 편이 나았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좋지 않은 생각이 이어졌다. 가장 끔찍했던 순간이 느리고 진득하게 머릿속을 채우다가, 마치 영화에서 장면이 전환되듯 또 다른 기억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
성기를 넣은 채로 잠시 호흡을 고르던 그가 가슴을 간지럽게 핥았다. 아프지 않으니 이상한 생각이 반사적으로 튀어 오른다.
피투성이가 되어 썩어 가던 경호원, 그의 살을 파먹던 구더기, 바닥에 쏟아지던 토, 뾰족한 볼펜과, 내가 쓰지 않은 글씨로 채워진 쪽지, 말간 죽의 맛, 비릿한 냄새, 주언이가 젤리는 먹었을까, 주언이의 우는 얼굴, 목걸이, 진물, 아이를 윽박지르던 내 목소리, 경호원, 구더기, 볼펜, 쪽지, 토, 냄새, 벌레, 목걸이, 팔찌, 젤리.
잔상과 잔상 사이의 시간이 점차 짧아지고, 마치 셔터처럼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점차 눈앞이 흐려졌다. 속이 싸하게 가라앉으며 금방이라도 숨이 쉬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든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은 나는 눈앞의 사람을 끌어안고 버텼다. 단단한 몸에 이마를 비비고 다리를 들어 그의 하체에 옭아매니 그가 고개를 비틀며 바들바들 경련하는 나를 내려다봤다.
“아……. 얼른.”
다른 생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얼른 그가 다시 움직여 주었으면 했다. 작게 허리를 달싹이며 그의 어깨에 손톱자국이 남도록 그에게 매달렸다. 최기원이 기꺼이 몸을 낮춰 준 덕분에 귓가에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미미하게 번졌다.
“얼른 뭐요?”
“흐으, 빨리, 우, 움직여, 요…….”
“아… 걸레 같아서 좋네요.”
찰싹, 세지 않은 손길이 뺨을 내려쳤다. 따끔거리는 통증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 아픔 덕분에, 머릿속에서 태어난 단어들을 먹으며 몸집을 키우기 시작한 우울감과 불안함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그가 허리를 세게 쳐올리자 아랫배의 묵직하고 찌릿한 통증에 다시 머리가 새하얗게 녹았다.
눈을 질끈 감고 그저 망가져 가는 선연한 감각에만 집중했다. 다행히도 그는 내가 전신에 힘이 빠져 색색댈 때까지 나를 괴롭혔고, 나는 그의 몸을 동아줄처럼 끌어안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땐 나는 여전히 소파 위에서 엎드린 채였다. 소파를 짚고 일어서며 시간을 살피니 새벽 한 시 반이 넘었다. 바닥에 떨어진 속옷, 바지, 니트를 하나씩 주우며 비틀댔다. 계단 손잡이를 붙잡고 겨우 다리를 끌자 다물리지 못한 구멍 사이로 그가 싸지른 미지근한 액이 주르륵 흘렀다.
“추운데…….”
그냥 까무룩 잠에 빠져들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샤워를 또 해야 했다.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을 맞으며 몸 곳곳을 비누칠했다. 오랜만에 잔뜩 헤집어져 부어오른 아래에 손가락을 넣어 빼내지 못한 그의 흔적도 모두 끄집어냈다.
비척대며 몸을 닦고 파우더룸 의자에 앉아 로션을 전신에 펴 발랐다. 언뜻언뜻 떠오르는 기억들과 묘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한 냄새를 무시하며 몇 번이고 로션을 짜서 문질렀다.
벗어 두었던 손목 보호대를 차려고 손을 뻗었는데, 불현듯 화장 솜과 면봉이 담긴 작은 유리 캐비닛에 눈길이 닿았다. 손가락이 오므라든다. 단 한 번도 쓰지 않아 처음 모습 그대로 담겨 있는 용품 중 하나가 유독 시선을 끌었다.
“…….”
가지런하게 정리된 물품 사이, 플라스틱 눈썹 칼이 꽂혀 있었다. 잠시 눈을 깜빡이다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홀린 듯 반투명한 캡을 열고 얇은 칼날을 살폈다. 날이 바짝 선 새 칼날이 제법 예리해 보였다. 칼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닫힌 방문을 확인하고 다시 파우더룸 의자에 앉았다. 그저 생각만 한 것인데도 괜스레 가슴이 두근대고 손아귀에 식은땀이 맺혔다.
다시 떠오르는 경호원의 목소리와 갉작대는 손톱 소리에 퍼뜩 칼을 고쳐 쥐었다. 반대쪽 손목을 바라보며 칼끝을 하얀 살갗 위로 가져갔다.
손목의 피부 아래로 파란 핏줄이 언뜻 보였다. 무서웠지만 어쩐지 얼른 그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푹푹 가슴을 찔렀다. 귓구멍엔 내 터질 듯한 심장 박동 소리가 한계까지 차올랐다. 칼을 쥔 건 나인데 겁을 먹은 것도 나다. 기묘한 아이러니 속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숨을 참고 약하게 칼끝을 움직였다. 얇고 예리한 칼날이 손목 위를 지나며 붉은 실 같은 상처를 남겼다.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그런 얄팍한 사실에 안심하며 한 번 더 손목을 그었다. 이번에는 조금 깊이 들어간 부분에서 피가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점점이 솟아오른 붉은 방울을 보며 작게 숨을 뱉어 냈다. 손에서 툭 눈썹 칼을 떨어뜨린 내가 티슈를 뽑아 손목을 문질렀다. 따끔거리는 상처는 깊지 않아 금세 피가 멎었다. 티슈로 칼날까지 닦아 캡을 씌웠고,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두었다.
손을 뻗어 손목 보호대를 가지고 왔다. 얇은 두 줄의 상처 위로 보호대를 둘렀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이젠 낯설게 느껴지는, 메마른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머리가 어중간하게 길었다. 눈가와 코끝도 붉게 텄고 눈 밑은 음울하게 그림자가 졌다. 입술은 생기를 잃었고 목덜미는 내놓지 못할 만큼 지저분한 흉터가 남았다.
“…괜찮아.”
불쑥 혼잣말이 튀었다. 불과 이 개월 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몰골이었으나, 어제와는 별반 다를 게 없다. 자연스럽게 망가져 간 몸은, 이제 가느다란 상처 두 줄 정도가 더 생겼다고 해서 별반 티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것도 변한 것 없는 셈이다.
***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스며든 방은 적당하게 따뜻했다.
바닥에 흩어진 퍼즐 조각을 바라보다, 십 분 전부터 손 속에서 만지작대던 조각 하나를 들어 끼웠다. 모양은 연결되긴 하지만, 정작 그림이 연결되지 않아 다시 뺐다. 주변 조각을 손가락으로 휘저어 보다 그림도 모양도 얼추 맞는 것 같은 조각을 들어 다시 끼웠다. 이번엔 정답이라는 사실에 안도의 숨이 터졌다.
러그 위에 배를 대고 엎드려 있던 나는 그대로 팔뚝에 이마를 묻고 눈을 감았다. 조금만 쉬어야겠다 싶어 작게 숨을 고르던 중, 불쑥 주언이가 울먹이던 얼굴이 떠올랐다.
“아…….”
또 악몽 같은 기억이 폭죽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안해진다.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고 아프게 조여들었다.
“하, 으.”
건조하게 갈라진 입술을 꾹 깨물며 최대한 버텨 보려 했지만 무리였다. 가슴께를 붙잡고 비틀대며 일어난 나는 절뚝이며 파우더룸으로 뛰어갔다. 눈썹 칼의 캡을 벗긴 후 손목 보호대를 풀어 칼로 손목을 그어 버리는 것까지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송골송골 맺힌 피를 보고서야 진정됐다. 그렇게 날이 갈수록 손목 위에 그어진 상처가 점점 많아졌고 이젠 보호대로 가려지는 부분을 그으려면 상처 위를 다시 그어야 했다. 다만 절대 깊거나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잠깐 피가 비어져 나오다 금세 그치는, 별거 아닌 행위일 뿐. 하지만 왜 최기원의 눈을 피해서 이런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알아서 뭐 해. 끊임없는 합리화를 중얼대며 손목 보호대를 다시 단단하게 둘렀다.
바닥에 널브러진 퍼즐 조각은 그대로 둔 채 책상에 앉았다. 책상 역시 색연필과 만년필이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었다. 할 것이 산더미였다. 수업도 운동도 취소한 최기원이 툭툭 던져 놓고 가는 숙제 때문이었다.
열 페이지 정도 따라 써야 하는 미술 서적이 펼쳐져 있었다. 공책에 몇 자 따라 쓰다 그만두고 아무 색연필을 쥐었다. 나무에 걸린 사과 하나를 칠하고 보니 이제야 보라색으로 칠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좌절이 물밀듯 밀려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탄식했다.
책상 위에 올려진 휴대 전화가 울렸다. 퍼뜩 손을 내린 나는 전화로 손을 뻗었다. 그의 전화를 놓치면 큰일이 나기에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고, 금세 화면이 떴다. 깔끔하고 세련된 집무실에서 턱을 괸 채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는 최기원의 얼굴이 떴다.
[안녕?]
짙은 눈썹 아래로 곧게 뻗어진 콧날, 끝이 말려 올라간 도톰한 입술이 화면을 빤히 응시한다. 잇새로 문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가 말했다.
[잘 안 보이니까 핸드폰 좀 뒤로 해요.]
웅얼대며 느리게 짓씹는 발음도 어쩐지 그답게 날카로웠다. 대충 코와 입만 보이던 화면에 내 얼굴이 들어섰다. 퀭하고 어두운 눈이 불안한 듯, 화면 언저리를 정처 없이 옮겨 다녔다. 그는 뭐가 재밌는지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안경을 벗으며 카메라를 바라보자 쌍꺼풀이 없는 큰 눈이 바로 앞에서 나를 응시하는 것처럼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뭐 해요?]
“그, 그냥 있, 어요.”
[그래요? 퍼즐은 아직도 못 했어요?]
“어, 어려, 어려워서…….”
[이상하다. 아동용인데.]
혼나려나. 대답하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자 최기원이 수화기 너머로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달랬다.
[괜찮아요. 나중에 나랑 같이해요. 글씨는 잘 써져요?]
다급하게 만년필을 붙잡으며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고 그냥 따라 쓰고 있다고 대답하자 최기원은 그것 또한 괜찮다고 해 주었다. 내가 글 쓸 일이 뭐가 있겠냐며, 연기를 뱉으며 살짝 웃는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어물쩍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어색한 영상 통화는 그가 출근을 재개한 이후,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퇴원 후 일주일가량은 그와 함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더 회사를 비울 수 없었던지 최기원은 이번 주부터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나흘째. 그는 나른한 오후만 되면 한 차례 영상 통화를 걸었고 지금이 벌써 네 번째 통화였다.
[점심은?]
“먹어, 었어요.”
[다 먹었죠? 안 남기고.]
다 먹은 것을 알면서 묻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출근한 사이 두 명의 사용인이 저택을 관리했다. 40대 정도의 아주머니 두 분은 최기원과 내가 어질러 놓은 물건들을 제자리에 놓고, 너른 저택을 청소하느라 바빴다. 두 분 중 나이가 더 있는 분이 시간에 맞춰 점심을 차려 주거나 시간마다 간식거리를 들고 방을 찾아 주었는데, 아주머니는 내가 그릇을 다 비워 낼 때까지 곁에 서 있었다.
한 번은 밥을 먹다 등을 들썩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토하고 와서 다시 앉아서 수저를 드니 아주머니가 안절부절못하며 서성댔다. 최기원이 말을 건네지도 못하게 한 듯했다. 나 역시 아무런 대꾸 없이 다시 그릇을 비웠다. 다행히도 그 뒤로 양이 조금 줄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전부 최기원에게 전달되는 건 당연했다.
[약도 먹고?]
나는 아무런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건 거짓말이었다. 약은 무조건 화장실에 숨겨 놓고 있었다. 늘어놓은 사실 속에 은근하게 끼워 넣은 거짓을 그는 눈치채지 못했고, 장난스러운 요구가 이어졌다.
[펜 내려놓고. 옷 들어서 물어 봐요.]
고개를 돌려 닫힌 방문을 확인한 난 보호대를 착용한 손으로 홈웨어를 끌어 올려 입술로 물었다. 화면에 마른 가슴과 배가 가득 찼다.
[핸드폰 앞에 세우고, 유두 만져 봐요.]
“…….”
독서대에 휴대 전화를 놓고 손가락 끝으로 한쪽 유두를 더듬거렸다. 흥분 따위 될 리가 없었다. 음울한 낯으로 만지작대는 모습이 뭐가 좋은지, 최기원은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의 눈을 바라보기도, 화면 가득한 내 몸을 보기도 불편해 시선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바지랑 속옷 벗어요.]
“…….”
[자위해 볼래요?]
그의 화면에 번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손을 아래에 넣어 늘어진 성기를 쥐었다. 살덩이를 쥐고 몇 번 움직여도 발기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혀로 축이고 다시 한번 주물렀다.
[음, 곧 이 방에서 회의 시작하니까 빨리 사정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보니 ‘얼른.’ 하며 씩 웃음을 짓는다.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 입술이 움찔거렸으나, 애써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언 씨 화면에 잘 보이게 해요.]
수치심을 자극하는 심드렁한 협박 뒤에 다정한 목소리의 부탁이 흘러들었다. 의자 시트 위에 발바닥을 올리고 허벅지를 벌려 렌즈에 아래가 잘 보이도록 고쳐 앉았다. 오랫동안 빛을 받지 않아 더욱 새하얗게 질린 다리와 사타구니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
오싹한 낯의 최기원과, 볼품없는 몸뚱이를 담고 있는 카메라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개를 더 아래로 처박은 나는 손아귀에 힘을 주고 기둥을 붙잡아 위아래로 빠르게 흔들었다. 다행히 학습된 흥분이 고양되며 성기가 조금씩 힘을 갖고 서기 시작했다.
귀두 끝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따뜻하기만 했던 방 안의 공기가 불쾌하게 후덥지근해졌다.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허벅지가 간헐적으로 움찔댔다. 배꼽 아래가 빠듯하게 당겨 오며 눈알이 뜨거워졌다. 잇새에 물고 있는 미끄럽고 얇은 재질의 상의는, 신음을 참으며 오물댄 통에 침에 젖어 축축해졌다. 그 위로 울음이 섞여 가빠진 숨이 먹먹하게 흩어졌다.
“흐, 으.”
이런 수치에도 적응하고 발기한 내가 신기했다. 아무 생각 없이 정액을 빼려 애썼으나, 성감이 고조된 순간마다 최기원과 몸을 섞으며 한계까지 내몰렸던 자극이 떠올랐다. 나를 짓뭉개며 안을 가르고 들어오던 무게, 뜨거울 정도로 굵은 성기의 촉감, 난폭한 아래를 버티며 받던 미끄럽고 야트막한 키스, 사정하는 순간 한쪽 눈을 괴롭게 찌푸리며 습한 숨을 터뜨리던 얼굴까지.
“아.”
배 아래에서부터 소름이 일며 발바닥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어느새 눈물이 맺혀 더욱 무거워진 속눈썹을 질끈 감았고, 발가락이 동그랗게 곱아든 순간 귀두 끝에서 하얀 액이 터져 흘렀다.
“아, 으읏….”
무릎이 벌벌 떨리며 다리가 반사적으로 오므라들었다. 귀두와 기둥 사이를 꾹 쥔 손가락 위로 묽은 액이 흘러내렸고, 흠뻑 젖은 아래는 커튼 사이로 흩어진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하아, 하아…….”
숨을 가쁘게 내쉬자 물고 있던 상의가 툭 떨어지며 정액이 묻은 배와 손 위를 덮었다. 힘이 빠져 제대로 겨누지 못한 고개를 휘청이며 눈을 떴고, 그 순간 카메라 너머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최기원의 낮고 평온한 목소리가 이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 종이 넘어가는 소리, 그리고 단단한 바닥을 짓이기는 구두 굽 소리, 낯선 이의 말소리가 마구잡이로 들렸다. 사정 후 붉게 익었던 뺨이 순식간에 열감을 잃고 식었다. 나는 파르르 떨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는 굳어 버린 나를 향해 담백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저녁에 봐요.]
‘사장님, 통화 중이셨습니까?’ 하는 목소리가 들리며, 그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멍한 얼굴로 헐떡이던 나는 비틀대며 의자에서 내려섰다. 경악이 서렸던 눈동자가 점차 빛을 잃고 어두워졌다. 기계적으로 몸을 씻고 로션을 바르고 손목을 긋고 퍼즐을 맞췄다. 가슴이 조금 답답해 가쁜 숨을 내쉬었지만 무언가 체한 것처럼 고여 있는 덩어리는 뱉어지질 않았다.
***
간지러운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밤새 괴로웠던 것 같은데,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무거워진 속눈썹을 들어 올리자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인영이 언뜻 보였다.
“…….”
분명 어젯밤에 가운을 걸친 채로 방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봤다. 그렇다면 새벽녘에 다시 방을 찾은 것일까. 그는 언제부터 나를 껴안고 잤던 걸까. 잠에 취한 얼굴이 평소보다 나른하게 풀어져 있었다.
아직 씻지 못했다. 냄새가 날까 퍼뜩 몸을 굳히고 티 나지 않게 몸을 멀리 물리니, 기다렸다는 듯 단단한 팔이 몸을 더 꽉 껴안았다. 그의 품속에서 할랑한 홈웨어가 겹겹이 주름졌다.
“좀 안고 있을게요.”
그가 말할 때마다 목에서 숨결이 흩어져 간지러웠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그가 몸을 떼어 낼 때까지 기다렸다.
“아침 먹고 같이 나가요.”
혀가 귓바퀴를 할짝댄다. 눈만 굴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였다. 그제야 방에 스며든 빛이 평소보다 밝다는 걸 깨달았다. 보통 그의 출근 시간에 맞춰 푸르스름한 아침에 일어나 일찍 밥을 먹었다. 지금 이건 평일답지 않은 풍경이었다.
“추, 출근은요?”
“오늘은 데이트하는 날. 설마 까먹었어요?”
“그, 그랬, 어요?”
눈에 띄게 당황하니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내 볼을 깨물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볼살을 꽉 누르자 따끔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장난인지, 정말 그가 그런 약속을 했었는지 도통 모르겠다. 집 안에만 있다 보니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기억이 은근하게 섞여, 있었던 일이나 최기원이 했던 말을 잊거나 떠올리지 못했다. 그냥 그러려니 하며 코를 훌쩍였다. 그는 이제 내 머리를 헤집으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씻은 난 최기원의 차를 타고 나섰다. 오랜만에 보는 바깥이기에 조금은 들뜰 법한데도 가슴 한편이 줄곧 불안해서 풍경이 제대로 눈에 담기지 않는다. 여차하면 이 차가 서울을 떠나 그의 작업실을 향하지 않을까, 바퀴가 밟는 행적 하나하나를 기민하게 살피다 보니 미약한 두통이 일기까지 했다.
검은 SUV는 잎 하나 없이 파랗게 질린 겨울의 심심한 풍경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다행히 차는 익숙한 곳에서 멈춰 섰다. 예전에도 한 번 들른 적이 있는 숍에서 머리를 잘랐고, 교외 카페에서 빵과 음료를 먹었다. 남은 크림을 포크로 뭉개고 있는 나를 부른 최기원은 카페 옆으로 길게 이어진 산책로를 소개하며 조금 걷자고 말했다. 긴장한 채로 그와 반나절을 보내느라 조금 지쳤지만, 거절할 수 없어 외투를 챙겨 입었다.
하지만 얼마 걷지 못해 걸음이 조금씩 뒤처졌다. 춥고 어지러워서 비틀대는 내 팔뚝을 붙잡은 최기원이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아파요?”
이내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이 이마를 불쑥 덮었다. 열은 없지만 식은땀이 솟아난 이마를 매만진 손이 뺨으로 내려와 고개를 끌어 올렸다. 두려움에 눈을 피하려 애썼지만, 몸이 정말 힘들긴 했다. 집에 있을 땐 몰랐는데 아직 체력이 완전하게 회복되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러다 쓰러지기까지 하면 정말 민폐이기에 난 용기를 내서 몸 상태를 피력했다.
“조, 금……. 히, 힘, 들어요.”
“이런. 모처럼 시간 냈는데.”
턱을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볼이 눌려 입술이 살짝 튀어나왔고, 잡힌 턱이 아릿하게 저려 왔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나직한 아쉬움을 머금었다.
“볼 영화도 정해 뒀고, 레스토랑도 예약해 뒀어요.”
“…….”
“많이 아파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그가 원하는 답을 말했다.
“괘, 괜찮, 아요.”
“다행이에요.”
빤히 나를 응시하던 큰 눈이 스륵, 접히며 손이 풀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나를 이끌고 차로 돌아간 그가 팔을 뻗어 벨트를 채워 주었다. 주차한 사이 냉기가 스며든 시트가 차가워서 작게 움찔대자 그가 좌석 시트의 온열 버튼을 눌러 주었다. 그는 아이처럼 신난 얼굴로 휴대 전화에 영화 포스터 하나를 띄워 나에게 보여 주었다.
“이거, 평 좋더라고요.”
아, 같은 의미 없는 대꾸를 하며 슬쩍 포스터를 봤다. 영화를 본 게 도대체 언제인지. 문득 지원이 형과 함께 오피스텔 소파에 파묻혀 영화를 보며 잠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예산이 어떻고, 연출이 어떻고…. 흐릿해진 눈으로 멍하게 최기원의 설명을 듣는데, 돌연 그의 휴대 전화 화면이 전환되며 착신 전화가 울렸다. 말을 멈춘 그가 약간 김이 샌 듯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얌전히 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 평소보다 조금 냉랭하고, 채도 낮은 목소리가 차를 가득 채웠다. 여기까지 느껴지는 날 선 기운에 괜히 내가 긴장되어 손톱을 꾹꾹 눌렀다. 전화에 대고 급한 건이냐고 한 번 되물은 그가 한숨을 쉬며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미안해요. 잠깐 회사 좀 들러야겠어요.”
내 사정은 전혀 고려해 주지 않으면서, 본인 일에만 재빠르게 일정을 수정하는 뻔뻔함이 얄미웠으나 대꾸할 힘도 없었다. 그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의미를 모르겠는 웃음을 피식 터뜨렸다.
차는 다소 빠르게 서울로 돌아갔다. 높고 세련된 건물 현판에 적힌 ‘세원’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괜히 머리가 더 무거워졌다. 새삼 그가 지원이 형의 동생이며 세원 그룹의 차남이라는 마땅한 사실이 선연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금방 끝나니까 차에서 쉬고 있어요.”
“……네.”
그가 내리자마자 눈을 감으며 창문에 머리를 박았다. 원래도 난폭하지만 평소보다 더 거친 운전 덕분에 속까지 제대로 울렁거렸다.
‘속, 안 좋아…….’
어떻게든 구역질을 달래려 했지만 도저히 참아지지 않았다. 이러다 고급 차 시트에 토를 하는 일이 생길세라, 결국 가슴을 짓누르는 벨트를 풀어 헤치고 무작정 차에서 내려섰다. 최기원의 차만 덩그러니 주차된 너른 주차장은 보이는 입구가 하나뿐이었다. 건물에 딸린 화장실에라도 갈 생각으로 무작정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출입구 의자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벌떡 일어나 걸음을 막아섰다.
“누구시죠?”
“……네?”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아, 아……. 죄송,”
커다란 몸과 특유의 딱딱한 말투. 나를 괴롭혔던 사람은 아니지만 익숙한 체형에 본의 아니게 두려움을 느끼고만 내가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자, 그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나를 붙잡아 세웠다.
“이 주차장은 어떻게 들어오셨죠?”
“아, 그…, 자, 잠, 깐 화장, 실….”
“뭐라고요?”
차분하게 설명하면 되는 일도, 괜한 위압감에 혀까지 오그라드니 단어가 머릿속에서 마구 뒤섞이기만 했다. 뜨거운 숨을 할딱이며 고개를 저은 내가 내 팔뚝을 붙잡고 있는 경호원의 손등을 떼어 내려 붙잡았다.
“아, 느, 놔, 주세요…….”
몸이 아픈 탓인지, 그게 아니면 경호원의 악력이 센 것인지 그저 붙잡는 것만으로 몸서리 처지게 불쾌했다. 억센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그는 쉽사리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를 잡아끄는 지금 이 경호원의 모습이, 피투성이가 된 채 나를 원망하던 경호원의 모습과 겹쳐 보이며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느새 심장 뛰는 소리가 귀까지 가득 채우고, 점차 호흡이 가빠진다. 미칠 노릇이었다. 애써 참아 오던 발작이 터지기 직전의 두려움이 발끝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허, 억……. 잠, 시만…….”
“백나언 씨…?”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는다. 경호원은 팔뚝을 놓지 않은 채 내 곁에 선 남자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하며 아는 체를 했다.
“실장님.”
“제가 아는 분입니다. 놓으세요.”
그제야 팔뚝을 옥죄던 손이 풀어졌다.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에 파르르 경련하던 몸이 움직임을 멈췄다. 겨우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내 눈이 한계까지 벌어졌다.
“백나언 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뻘의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 그는 지원이 형의 비서이자 나와 형의 관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
핏기가 가신 얼굴을 한 채로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했다. 잊고 지내던 이를 마주하자마자 당혹감과 수치심이 개떼같이 나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뭐라 설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비틀대며 멀어지는 나를 보며 나보다 더욱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안색이 안 좋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하으, 아, 아니, 아니에요…….”
실례했다며 무작정 뒤를 돌려던 난, 결국 다리가 엉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귀와 목덜미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퍼뜩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강한 힘이 나를 붙잡아 훌쩍 세웠다.
“어떻게 십 분도 얌전히 못 있지?”
최기원이 귀찮은 듯한 목소리로 나를 채근했다. 그리고 그는 상체를 숙여 내 무릎과 정강이에 묻은 먼지를 손바닥으로 탈탈 털었다. 잠시 최기원을 바라보던 비서님이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불시에 눈이 마주쳐 버렸다.
“…….”
그리고 비서님의 눈에 깃들기 시작한 날것 그대로의 경악이 나에게로 가감 없이 전해졌다. 의문감, 당혹스러움 그리고 상황을 이해한 직후 얼굴에 퍼진 혐오감. 비서님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미간을 일그러뜨렸다가, 이내 나에게서 다급하게 눈을 뗐다.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헐떡이던 나도, 눈알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가까스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원래의 인자한 낯빛으로 얼굴을 정돈한 비서님은 짝다리를 짚고 선 최기원에게 목례했다. 최기원은 흐트러진 내 옷매무새를 마저 정돈해 주며 비서님에게 물었다.
“혹시 나언 씨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아닙니다, 사장님. 입구에 계시던 중에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눈치를 살피던 경호원이 최기원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정을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사장님 손님이신 줄 몰라뵙고, 출입을 막았습니다.”
최기원은 대답 대신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며 비서님을 향해 물었다.
“아참, 실장님은 백나언 씨랑 구면이죠.”
가벼운 미소가 깃든 묘한 말투에 비서님이 대답을 머뭇댔다. 최기원은 나를 붙잡은 팔을 끌어당겨, 더욱 지척으로 나를 세웠다.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비서님을 내려다보며 빈정댔다.
“아직 못다 푼 회포라도 남았나?”
“아닙니다, 사장님.”
“그치. 이제 실장님이랑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
“…네.”
“살아 있을 땐 그렇게 숨겨 두곤. 이제야 말 섞는 거 웃기잖아.”
쿵쿵. 끔찍할 만큼 밀려오는 수치심에 입술이 떨렸다. 이미 바닥까지 다 내보였다. 그가 굳이 되짚지 않아도, 나는 이미 죽은 애인의 동생과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고 두꺼운 낯짝으로 회사까지 드나드는 사람이었다. 그가 비서님과 나를 모욕하며 쓸데없이 모진 말을 뱉을 필요 없었다.
“가, 가요….”
결국 최기원의 팔꿈치를 살짝 붙잡으며 작게 말했다. 내 목소리에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최기원이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짝 소리와 함께 내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귀뺨에 벌건 손자국이 남았다. 완전히 후려치진 않아, 넘어지진 않은 내가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가리며 옅게 헐떡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경호원, 그리고 비서님까지 숨을 죽였고 순식간에 공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최기원이 목뒤를 주물대며 본연의 나른한 목소리로 비서님께 말했다.
“경호 지원팀에게 전달해요. 앞으로 백나언 출입 막지 말라고.”
“…네.”
그는 여전히 멍청하게 서 있는 내 팔목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조수석 차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고, 발을 질질 끌며 끌려간 나를 시트에 앉힌 후 벨트를 채웠다.
영화를 예매하고 레스토랑을 예약했던 것은 모두 없던 일이 됐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차는 그의 저택을 향해 질주했다. 덜컹대며 흔들리는 차 안에서 나는 어깨를 잘게 떨며 입술을 꾹 깨물고 울음을 삼켰다.
“나언아.”
“…….”
“네가 지금 울면, 나 정말 너 어디 하나는.”
잠시 말을 멎고 가죽 소리가 날 만큼 핸들을 꾹 쥔 그가 낮게 읊조렸다.
“망가뜨릴 것 같아.”
그 말이 무색하게도 뺨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흘렀다. 순식간에 턱에 고인 눈물이 툭, 툭 허벅지를 무겁게 적셨다. 뺨을 맞은 이후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나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절망 속으로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경호원에게는 더 심한 수모를 입었고, 최기원에게는 훨씬 아프게도 맞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끔찍한지 모르겠다.
지원이 형의 동생과 몸을 섞었고, 그에게서 충분한 대가를 받았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내가 너무 싫어서 스스로를 파렴치하다 욕했고, 충분히 괴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부끄러울까, 무엇이 이렇게 절망적일까.
아무래도 나는 아직 나를 놓고 있지 않았었나 보다.
아버지의 빚이라는, 그리고 주언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가 있으니까 나는 나를 쉽게 비난하면서도 어떻게든 최기원과의 관계를 버텨야 한다고 자위했다. 일말의 죄책감이 있다면, 내가 사람이라면 끊임없이 최기원을 원망하고, 나를 혐오했어야 하는데도 나는 결국 은근하게 나를 감싸 안고 있었다.
내가 너무 아프고 힘들다는 변명에 기대어 쌓아 올린 모래성은 마음 안에 스며든 추악한 본심을 감췄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것에 눈이 멀어 그가 가끔 건네는 논리 없는 애정에 안심하기도 했다.
‘못 견디겠어.’
아니.
‘견디면… 안 되는 건데….’
하지만 이로써 겨우 붙잡고 있던 끈이 잘려 나갔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던 비서님의 그 황망한 눈빛 속에서 나는 형을 읽었다. 지원이 형이 실망하며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선명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타인의 앞에서 발가벗겨지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더는 나락으로 빠지기 전에 모든 것을 그만둬야 했다.
***
결정을 내리자 가슴이 뛰었다.
조마조마해서? 불안해서? 아니, 긴장은 되지만 흥분됐다. 그간 우울감에 취해 굳어 있던 머리가 쇳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물론 뺨으로는 계속 눈물이 흘렀다. 최기원의 과격한 운전에 몸이 덜컹댈 때면 턱 아래에 고여 있던 눈물이 떨어졌다. 이런 건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차고에 삐딱하게 차를 세운 최기원이 차에서 내렸다. 벨트를 풀며 따라 내리려는데, 그가 먼저 조수석 문을 벌컥 열어젖혔고, 난 옷깃이 잡혀 끌려 내려졌다. 정원을 개처럼 끌려가다시피 하였고 문이 열리자마자 너른 현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윽….”
나아 가던 손목이 바닥에 부딪히며 다시 통증이 일어났다. 쓰러져 있던 몸을 겨우 일으켜 벽을 붙잡고 섰다. 울음 섞인 숨이 터졌다. 최기원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울지 말라 했잖아.”
그가 손을 올렸고 다시 한번 뺨을 맞았다. 고개가 휙 돌아가며 몸이 휘청댔다. 시큰한 통증과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코에서 뜨뜻미지근한 피가 흘렀다. 손등으로 코피를 걷어 내며, 뺨을 적신 눈물도 문질렀다. 눈을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빛을 등진 회색 눈동자가 잘 읽히지 않는다.
“왜 우는데?”
“…왜 때려요.”
이유 따윈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시비를 걸기 위해 묻는 그의 질문에 시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되물었다. 그리고 최기원과의 모든 것을 정리하기 위한 첫 운을 뗐다.
“저 최지원 생각 아, 안 했는데.”
“뭐?”
더듬지 않고 싶어 최대한 느리게 꾹꾹 눌러 말했지만 쉬어 버린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내가 먼저 뱉어 낸 형의 이름이 낯선 듯, 최기원이 짐승 같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미간을 짙게 찌푸렸다.
“저는, 저는. 다 저, 정리하고. 잊어 가고 있, 어요.”
모두 거짓은 아닌, 그렇다고 진실도 분명히 아닌 말을 뱉었다. 그의 마음을 흔들어야 했다. 그 생각 하나로 모든 말을 세고 골라서 한 자씩 입에 올렸다.
“오히, 려 형한테서 벗어나지 모, 못한 건. 그쪽 같아요.”
담담한 척 애쓰는 말이 제대로 전해졌을까. 최기원의 낯에서 순식간에 여유가 사라진다.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는 찰나를 보았고, 그는 어금니를 짓씹으며 다시 손을 올렸다. 그리고 난 눈을 질끈 감으며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붙였다.
당황한 듯 최기원의 움직임이 멎었다. 귀뺨이 그의 단단한 가슴에 파묻히고 그의 심장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알, 잖아요. 저, 저는 이제 최기원 씨 없으면 아, 안 돼요.”
“…….”
“마, 말도 더듬고 냄새도 나고, 자, 자주 아파요. 추, 충분히 병신 같으니까….”
숨이 가빠 온다. 여우처럼 굴어야 하는데 자꾸만 서러움이 목소리에 섞여 든다.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갈구하는 말을 뱉어 내는 내가 가증스러워서, 정말 너무 싫어서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내 울먹이는 목소리 때문에 내 말을 조금이라도 더 믿는 것 같았다.
“최기원 씨까지 저, 버리, 버리면. 나는… 아무도 없는데…….”
“…….”
“그러니까, 나, 나한테 화 좀… 내지 마요.”
어느새 그의 셔츠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나를 내려치기 위해 들어 올렸던 손을 떨어뜨린 최기원이 내 어깨를 붙잡아 밀어냈다. 다시 등이 벽에 세게 부딪혔다. 긴장했던 몸이 뒤늦게 파르르 떨리며 발아래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최기원의 표정을 볼 용기가 없어, 그의 셔츠에 묻은 내 코피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는 히끅거리는 나를 그저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복도를 지나 제 방으로 걸어가는 최기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친 새끼, 씨발 새끼.
구역질 나는 악취 속에서 몇 번이고 욕을 되뇌었다. 비틀대며 내 방으로 올라가 문을 닫았다. 비서님이 나를 바라보던 표정이 떠오른 순간, 곧장 파우더룸으로 들어가 손목 보호대를 풀어 던졌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눈썹 칼을 들었고 손목 위를 빠르게 그었다.
“아…!”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고, 생각보다 깊이 칼이 파고들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퍼뜩 칼을 떼어 냈지만 이미 손목을 깊게 긋고 지나간 자리 위로 평소와는 다른 수준의 피가 터졌다. 빨갛게 벌어진 생살에서 울컥대며 흘러내린 핏줄기가 곧장 테이블 위로 떨어져 고였다.
“하…….”
휴지를 뽑아 손목 위를 눌렀다. 얇은 휴지가 금세 붉은색으로 젖어 들었다. 상처 위에 들러붙은 휴지를 떼어 내고, 다시 새 휴지 뭉텅이로 상처를 눌렀다. 벌어진 생살이 쓰라렸지만, 꽤나 후련했다. 나를 수놓은 괴로운 생각들이 피에 섞여 빠져나가고 있는 것 같다. 괴로움과 수치심에 흐려졌던 머리도 천천히 식어 갔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떠날 것이다, 최대한 빨리.
구체적인 계획은 최대한 이른 시일 내로 세울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대문 열쇠였다. 안쪽에서 최기원의 지문으로 열리는 대문을 열 방법이 필요하다. 담을 넘기엔 높았으며 문을 강제로 열다간 경호 업체에 들킬 것이다. 기회를 봐서 아주머니의 키를 훔칠 생각이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
불현듯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슬리퍼를 끄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최기원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떤 난 당혹스러운 얼굴로 얼른 보호대를 찼다. 그저 생각한 것뿐인데도 그에게 들켰을까 봐 심장이 조여들었다.
아직 피가 멎지 않은 상처 위에 검은색 보호대가 닿아 쓰렸으나 하얗게 질린 낯을 얼른 가다듬었다. 피를 닦은 휴지를 모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조명을 내린 후 파우더룸을 나섰다.
“네…?”
어둠 속에서 그의 모습이 설핏 보였고, 이내 그는 넓은 보폭으로 나에게 다가와 두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 끌어 올리며 얼굴을 비틀었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아….”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라 입술을 벌리자 그의 혀가 아랫입술을 누르며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그를 밀어내려던 나는 애써 주먹을 쥐고 손을 내렸다. 입 안을 헤집는 그의 말캉한 혀와 내 것이 섞였고 그는 내 니트를 끌어 올려 벗겼다.
입맞춤이 끊어지지 않은 채로 침대로 넘어졌다. 이내 그의 손길에 금세 바지까지 벗겨졌다. 잠깐씩 입술이 떨어질 땐 갈무리하지 못한 뜨거운 숨결이 틈새로 터져 흘렀다. 서로의 다리가 얽혔고 그의 차가운 손이 바지와 속옷까지 끌어 내렸다.
무릎 사이에 나를 가두고 몸을 일으킨 최기원이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풀어 벗었다. 그는 제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넣어 진득하게 핥은 후 곧장 다리 사이로 집어넣었다.
“으, 읏.”
다물린 구멍을 두 손가락이 둥글리듯 쓸더니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구멍 안쪽을 비집고 들어갔다. 몇 번을 해도 적응되지 않는 거북스러운 이물감에 숨이 막히고 속이 울렁거렸다. 게다가 미끄러운 젤이 아닌, 축축한 침이 윤활제를 대신하려 하니 마찰되는 부분이 더 뻑뻑하게 느껴졌다. 시트를 그러쥐며 떨리는 숨을 뱉어 내자 곧장 그의 입술이 나를 달래듯 겹쳐졌다.
구멍을 느리게 오가던 손가락이 길을 트는 듯 안을 꾹꾹 눌러 댔다. 이내 최기원은 손목을 둥그렇게 돌리며 손 뿌리까지 자연스럽게 집어넣고 조금 더 빠르게 쑤셨다.
“으, 흑. 으읏.”
오늘 같은 날에는 정말, 정말 하기 싫은데. 마음가짐이 아래에도 영향을 미치듯, 오늘따라 두툼하게 부어오른 안쪽이 그의 손에 자꾸만 거칠게 엉겨 붙었다. 배에 힘을 주고 신음하자 꽉 물린 그의 손가락 굴곡까지 선명하게 느껴졌고, 그도 그것을 아는지 평소보다 구멍을 푸는 것에 더 시간을 할애했다.
하지만 긴장에 수축된 아래가 더 부어오르기만 하자 그가 희미하게 인상을 쓰며 손을 뺐다. 콘솔에서 젤을 꺼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내 허리를 붙잡고 몸을 가볍게 뒤집었다. 난 시트 위에 배를 대고 엎드린 자세가 되었고, 그는 내 허리를 뒤에서 붙잡아 끌어 올렸다.
엉덩이만 들어 올린 개처럼 엎드린 내가 잠시 허둥대는 사이, 그가 양손으로 볼기를 벌렸다. 불을 켜지 않아 사위는 어둑했지만, 무릎을 꿇은 그의 시선이 곧장 구멍에 꽂혀 들 것이라 생각하니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팔을 뒤로 뻗어 엉덩이를 가리려 하자 그가 내 손을 가볍게 쳐 냈다.
손등이 찡하게 울릴 만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린 순간, 엉덩이 골 사이로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머리털이 쭈뼛 서고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 내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렸다.
“무, 무슨……!”
구멍을 핥아 올린 매끄럽고 말캉한 살덩이. 다름 아닌 혀였다. 그는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뾰족하고 뜨거운 혀가 구멍을 핥았고 곧장 입술이 핥아 올린 구멍 주위를 덮어 빨았다.
미칠 것 같았다. 그가 내 악취를 견디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하고 믿기지 않는데, 지금 혀로 아래를 핥고 있었다. 내 성기조차 빤 적 없는, 아래가 찢어지든 말든 그저 제 욕구만 배설하기에 급급했던 그가 내 구멍을 풀기 위해 아래에 입을 댔다. 나를 망가뜨리겠다고 협박했던 그의 말이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일부러 침을 삼키지 않는지 엉덩이 사이에서 질척대는 소리가 났다. 밥을 먹을 때 씹는 소리, 삼키는 소리 하나 내지 않는 사람이 내 아래에 얼굴을 처박고 게걸스러운 소리를 내고 있다. 이제 혀끝이 구멍을 쿡쿡 찔러 댔다. 가만히 뒀다간 구멍 안쪽까지 혀를 집어넣을 기세였다. 결국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경기하듯 소리를 질렀다.
“아, 으흑! 하, 하지, 마요!”
“…….”
“싫, 흐, 으읏. 흑. 아, 읏….”
혀가 아래를 빨고 짓누를 때마다 하체가 모조리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버둥거리던 나도 점점 몸에 힘이 풀려, 시트에 뺨을 비비적대며 우는 소리만 냈다. 주저앉으려는 허리를 추켜올리며 그는 아래의 구멍이 흐물흐물하게 느껴질 때까지 혀를 썼다.
“하아…….”
그의 표정에 평소보다 더 짙은 흥분이 스며 있다. 왜 그가 이토록 핀트가 나갔는지는 모르지만, 젖은 숨을 뱉어 낸 최기원이 나를 다시 똑바로 돌려 눕혔다. 힘이 풀린 다리를 벌리며 침으로 범벅 된 구멍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이전보다 훨씬 말랑해진 구멍이 손가락 두 개를 부드럽게 물어 삼켰다. 그의 손가락이 내벽을 뭉근하게 쑤시자, 아프기만 했던 아까와는 달리 아래가 저릿하게 당겨 왔다. 끔찍했지만 이미 내 성기는 단단하게 발기했다.
“그, 흑, 그으, 만.”
대답 대신 그가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숨 쉬기 어려울 정도로 빈틈없이 키스를 퍼붓는 그는 성기를 박는 것처럼 손가락을 푹푹 처박았다. 안쪽을 질척하게 넓히기 위해 그저 깊고 둥글게 파고들기만 하던 손가락이, 돌연 방향을 위로 틀었다. 두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굽히고 내벽 위쪽의 도톰한 부분을 꾹, 짓누르는 순간 나는 등을 살짝 말며 앓았다.
“흐읏…!”
“응.”
입술을 붙인 채로, 내가 뱉은 신음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최기원이 말했다. 맞닿은 입술로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는 손으로 계속 그 지점을 건드리고 누르고 문질렀다. 그때마다 발가락이 곱아들고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결국 난 고개를 비틀어 그의 입술을 피한 채로 그에게 매달렸다.
“아, 그, 그만. 거기, 흑.”
최기원이 고개를 돌려 끙끙대는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손을 계속 움직였다. 결국 나는 오른손을 내려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 흐윽, 그만, 손, 그, 그만…….”
“아. 손으로 그만하라고?”
아래를 제멋대로 들쑤시던 손이 구멍을 쓱 빠져나가더니, 그가 속옷을 끌어 내려 제 성기를 몇 번 문질렀다.
“혀도, 손도 감질나니까 좆으로 쑤셔 달라는 거지.”
“하, 으…윽.”
빈정대는 말소리 끝, 벌어진 구멍의 틈을 두툼한 귀두가 꾹 눌렀다. 살이 벌어지는 느낌이 생경했다. 귀두와 기둥으로 이어진 굴곡을 따라 구멍과 내벽이 차례로 이완됐다. 끝을 모르게 비집고 들어오는 성기가 배를 뚫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아…….”
“으, 흐으읏.”
숨을 뱉을 타이밍을 놓친 내가 볼썽사납게 헐떡이며 몸을 비틀었다. 단단한 성기는 왜 이렇게 뜨거운지, 굵고 기다란 기둥이 배 안을 절절 끓게 했다. 뿌리 끝까지 성기를 박아 넣은 그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느른한 숨을 뱉었다. 이윽고 그가 아래를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 아! 으읏, 아!”
턱턱, 그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벌어진 다리가 힘없이 달랑거렸다. 그와 살이 부딪힌 곳이 얻어맞은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까 손으로 건드려 놓아 예민해진 지점을 귀두 끝이 짓누르는 순간 나는 허리를 살짝 띄우며 입술을 깨물었다. 몸을 잘게 떨며 히끅대자 그는 허릿짓을 느리게 하며 내 반응을 살폈다.
치밀었던 배뇨감과 사정감은 그가 성기를 천천히 빼는 동안 해소되지 못하고 다시 수그러졌고, 그는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성기를 세게 쳐올렸다. 사정은 하지 못하면서 자극만 끊임없이 받으려니 안은 점점 예민해져 갔다.
“흐, 읏, 아! 흑, …아!”
“나는, 네가 이 조그만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아.”
“흐, 윽, 하으….”
“나밖에 없다고…? 버리지 말라고…. 하, 씨발.”
콱, 짓씹는 말과 함께 그의 성기가 아래를 때려 박듯 강하게 처박혔다. 나는 숨도 못 쉰 채로 몸을 파르르 떨며 자지러졌다. 그가 누워 있는 내 어깨 뒤로 손을 넣어 나를 둘러 안았다. 그대로 몸을 일으킨 그는 파우더룸으로 걸어갔다.
“아, 으, 뭐, 하는 흐윽!”
구멍으로 연결된 성기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안을 기묘한 각도로 푹푹 찔렀다. 전신이 땀에 젖어 자꾸만 미끄러지려 했기에 그의 어깨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그가 팔을 놓으면, 성기가 배 안을 뚫고 위장까지 쑤셔 버릴 것 같았다.
파우더룸에 온 그가 나를 거울 앞에 내려놓았다. 몸을 뒤집자 내 얼굴과 몸이 거울에 비쳤다. 다리가 풀리려 해 겨우 화장대를 잡고 버티는 순간 그의 성기가 뒤에서 안을 파고들었다. 그는 내 얼굴을 붙잡아 들고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으며 속삭였다.
“봐.”
“…….”
“네가 보기엔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둘 중에 어느 쪽 같아?”
그가 파우더룸의 불을 켰다. 어둑한 방 안에 갑작스레 불이 켜지자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내 환한 조명 아래 뒤엉킨 우리가 거울에 고스란히 비쳤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 짓씹어서 피가 비어져 나오려는 입술, 말라붙은 코피. 내 멍한 낯은 열병 환자처럼 얼룩덜룩했지만 아무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낯설도록 예민해진 표정으로 나를 다그치는 쪽은, 창백한 얼굴을 한 최기원이었다.
그가 눈치채선 안 된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올려 그의 얼굴을 감싸 안아 내 쪽으로 당겼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쳤다.
그는 서늘한 눈으로 거울 속의 내가 먼저 입을 맞춰 오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희미한 웃음을 틔웠다. 끝까지 눈을 감지 않은 채로, 그는 내가 입술을 겹치고 그의 입술 새로 혀를 밀어 넣는 모습을 기꺼이 살피며 피스톤질을 재개했다.
“흐, 윽, 으읏, 아!, 읏, 아!”
“아…. 난 너 버릴 생각 없어.”
절정은 빠르게 찾아왔다. 내벽을 짓이기며 오가던 성기가 안을 푹푹 찍어 누르며 정액을 배출했다. 쾌감에 겨워 몸부림치는 스스로를 거울로 마주하기가 힘들었으나 그는 내 뺨을 잡아 거울을 보도록 고정했다. 결국 울컥 달아오른 눈을 감아 버린 나는 그의 어깨에 뒤통수를 비비적대며 앓았다. 그는 사정한 후에도 구멍에서 허연 정액이 역류할 때까지 허리를 쳐올렸고, 그사이 난 화장대 위에 나도 모르게 멀건 정액을 흘렸다.
“하아……. 후.”
“흐, 으윽….”
그의 성기가 주륵 빠져나갔다. 그대로 주저앉으려는 나를 끌어안은 그가 내 몸을 추켜올리다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 그를 살피니 그가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인 채 화장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
“…….”
하얀 화장대 위에 쓸린 듯한 핏자국이 가득했다. 그제야 아찔한 기분이 들며 정신이 돌아왔다. 아까 깊게 베였던 손목의 상처를 지혈하지 못한 상태에서 관계를 시작했다. 그치지 않은 피가 보호대를 흠뻑 적셨고, 다 머금지 못해 틈새로 흘러나온 피까지 화장대에 마구잡이로 묻었다. 아직 피의 근원을 찾지 못한 그의 말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씨발, 이 정도로 피가 났는데 참고 있어?”
“…….”
“저번에도 그랬어. 너 시위하는 거 맞잖-,”
보기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나를 의자에 앉힌 그가 내 몸 이곳저곳을 살폈고 이내,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가득한 팔뚝을 발견하곤 말을 멎었다. 다급하게 팔을 잡아 빼려 했지만, 그는 사나운 얼굴로 손목을 낚아챈 후 보호대를 풀었다. 조명 아래에서 드러난 손목은 내가 보기에도 끔찍했다.
“…….”
“…….”
난자된 손목 위, 유독 깊게 벌어져 피가 맺힌 속살이 드러난 상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최기원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관계를 맺으며 아래가 찢어지거나 쓸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스스로 손목을 그은 상처라는 것을 알아챈 그의 낯이 점점 차갑게 굳어 갔다.
“아니…, 그, 그게…….”
애초에 눈썹 칼로 살짝 그은 것이기에, 피딱지가 앉은 여러 줄의 상처가 징그러워 보이더라도 깊진 않았다. 오늘 것은 나도 모르게 깊게 긋긴 했으나 피만 많이 났을 뿐,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상처 역시 아니었다. 나는 팔목을 빼려 낑낑대며 눈을 피했다.
“그, 냥……. 괘, 괜찮아요.”
“이 지랄이 났는데. 괜찮다고?”
“조금 가, 갑갑해서 그랬, 그랬는데….”
날카로워진 그의 목소리엔 면역이 없다. 볼품없이 작아진 목소리 끝에 점점 울음이 섞여 들었다. 하지만 그는 손목을 놓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붙든 손아귀에 힘이 점점 들어가, 상처 난 손목이 저릿하게 아파 오기 시작했다. 통증을 참아 보려 했으나 잇새로 작은 신음이 터져 흘렀다. 어깨를 떨며 작게 웅크리자 그가 잡고 있던 손목을 휙 던졌다.
그는 그대로 보폭을 넓혀 벽에 걸려 있는 가운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거친 손길로 내게 입히고, 다른 하나는 본인이 둘렀다. 그는 내 오른 팔뚝을 붙잡고 파우더룸에서 끌어냈다. 목적지를 알려 주지 않고 무식하게 당기기만 하는 통에 본능적으로 발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왜, 아니, 죄, 죄송해요….”
몇 주 전, 잠시 이성을 잃고 건물에서 뛰어내리려 했던 날. 그는 내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어 작업실에 며칠 동안 내버려 뒀었다. 지금 이 꼴을 봤으니 그는 절대 순순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다시 그곳에 나를 가두고 묶어 두기라도 한다면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된다.
“아….”
끌려가지 않기 위해 헐떡이며 닥치는 대로 붙잡았다. 화장대 위의 물건이 엎어지며 깨졌고, 손에 닿는 가구를 닥치는 대로 붙들었으나 식은땀에 젖은 손이 금세 미끄러졌다. 그러나 그는 나를 가차 없이 당겼고, 그에게 힘으로 반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방 바깥까지 끈 떨어진 인형처럼 끌려 나갔다.
“흐, 윽.”
작업실의 구더기, 냄새, 소리, 피.
걸음마다 떠오르는 순간들은 모두 새빨간 지옥이었다.
또 발작이 시작됐다. 추웠던 작업실과 벌레가 시체를 파먹었던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속이 메슥대고 눈앞이 어두워졌다. 최기원이 무어라 말하는 것 같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내 팔뚝을 붙잡은 채 앞서 걷던 최기원이 1층 계단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하, 으으, 시, 싫….”
상처와 말라붙은 피로 더럽혀진 손이 더듬대며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난간 기둥을 팔뚝으로 끌어안고 몸을 아래로 웅크려 다리까지 한 짝 걸었다. 죽을 만큼 맞더라도, 그곳으로 가긴 싫었다.
“왜, 어디 가요, 저, 진짜, 안, 할, 죄송해요….”
목걸이를 착용한 뒤, 소리를 크게 내는 법을 잊었던 내가 비명을 질렀다. 방언이 터진 것처럼 주절대는 모습에 드디어 최기원이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시, 시, 싫, 어요. 제, 발. 흐윽, 시, 싫어, 거기 가기, 싫어, 흐윽 싫어요.”
최기원이 팔뚝을 놓고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천장을 보며 잠시 눈을 감고 끓어오르는 화를 식히는 것 같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무릎이 바깥으로 향하도록 쭈그려 앉았다. 아까부터 그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이명과 구더기가 살을 파먹는 소리에 기겁하며 몸을 웅크렸다. 이 난간을 놓쳤다간, 나는…, 내 삶은 끝이다.
“컥…!”
순간 너무나 강한 통증에 눈앞이 번쩍였다. 가차 없이 머리통을 후려갈긴 그 때문에 얼굴이 옆으로 처박혔고, 난간에 옆얼굴을 세게 부딪쳤다.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파르르 떨었다.
“야, 정신 차리라고.”
물속에서 웅얼대는 잡음처럼 전달되지 않던 그의 목소리가 그제야 귀에 바늘처럼 꽂혀 든다.
“…네에.”
뻐근하고 열이 오른 광대를 손으로 가리며 기계처럼 고개를 주억댔다. 끊어질 것 같은 뜨거운 숨이 입술 새로 터졌다. 머리를 부딪친 충격에 잠시 머리가 멍하게 멈췄다. 눈을 감을 때마다 맺혀 있던 눈물이 볼 아래로 뚝 흘렀다.
“일어나.”
“저, 흐윽, 숨….”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곧 쓰러질 것 같다. 살갗에 닿는 모든 감각이 한 칸 더디게 느껴지는 메스꺼운 기분. 그 찰나의 순간에도 아픔보다 공포가 전신을 휘감았다. 지금 눈을 감으면 다시 기억에 끔찍한 잔상을 남긴 곳에서 눈을 뜰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나에게로 뻗어지는 그의 하얀 손에 놀라 머리를 손으로 가리며 몸을 웅크리고 마는 순간, 어지럽게 흔들리던 시야가 순식간에 옆으로 고꾸라졌다.
***
열세 살 터울의 내 동생 백주언. 나에 비하면 주언이는 나보다 세상을 반절도 못 살아 본 까마득한 아기다.
주언이는 엄마의 얼굴을 기억하기도 전에 엄마라는 존재를 잊어야 했고, 고작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아빠마저 잃었다. 내가 한 달 후면 성인이 되던 해의 겨울,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들어오자 셋이 살기에 비좁았던 집의 공기가 유달리 시리고 휑했다. 주언이에게 ‘아빠 어디 가셨어?’라고 물었고, 주언이는 아무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아이는 보일러를 켜지 못해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바닥 위에서 닳고 닳은 양말을 던지고 놀며 괜히 부산스럽게 굴었다. 아이에게 우리 먼저 저녁 먹자, 라고 말한 뒤 냉장고에 있던 반찬을 꺼내 먹었던 늦은 밤. 꾸덕꾸덕한 밥 덩이를 씹으면서 무언가 속에서 얹히는 느낌이 들었고, 잠깐 외출했을 거라 여겼던 아버지는 그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무책임한 편지 한 통 남긴 것 없었다.
아빠가 사라진 집 안을 괜히 뽈뽈대며 돌아다니던 주언이는 내 눈치를 살피며 옆에 털썩 누워 얌전히 눈을 감고 잤다. 주언이는 아빠를 찾지도, 기억에 없는 엄마를 부르지도 않았다. 고작 여섯 살 먹은 주제에, 궁금한 것쯤은 마음껏 물어볼 만도 한데 말이다.
주언이를 생각하면 늘 가슴 한편이 짠하게 저렸다. 형제기에 마땅히 나눠 가져야 할 시련을, 아이는 늘 너무 어린 나이에 쥐어야 했다. 그래서 그 조그만 놈을 어떻게든 책임져야 했는데, 나는 그것조차 제대로 못했다.
자꾸만 열이 오르고 살이 빠지는 주언이에게 아스피린 같은 진통제만 사다 먹였다. 게다가 오전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주언이의 학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면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열이 많이 난다거나, 속이 안 좋아서 힘들어한다는 연락에 난 손톱을 물어뜯으며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있다가, 교대 시간까지만 학교에서 봐 달라고 말해야 했다.
아픈 주언이는 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아이는 보건실에 누워 있다가, 혹은 자리에서 엎드려 버티다가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코피를 왈칵 쏟으며 쓰러졌고, 그날 이후 주언이는 학교 대신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둘이서 살던 좁은 원룸에 아이가 바닥에 앉아 칭얼댔다. 또 머리가 아프다고 중얼대는 아이에게 말없이 어른용 아스피린 하나를 반으로 갈라 내민다. 나는 그걸 보며 소리쳤다. 빨리, 병원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하지만 꿈속의 나는 힘없이 물을 먹는 아이의 가방을 챙겨 손에 쥐여 주었다. 느린 걸음으로 운동화를 신는 아이의 작은 등에 대고 학교 잘 가라는 말을 던져 놓곤, 피곤한 얼굴로 아침을 먹은 상을 정리했다. 갑갑해서 눈물이 터져 흘렀다. 등신이 따로 없다.
‘왜, 이런, 꿈을….’
깜빡, 눈을 뜨니 눈꼬리를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두운 천장이 보인다. 난생처음 보는 벽의 색깔에 가슴이 콱 조여들었다. 퍼뜩 몸을 일으켜, 가슴을 덮고 있던 무거운 이불을 걷어 냈다. 밀려드는 어지럼증을 참으며 다급하게 눈알을 굴렸다. 어둠이 깔린 방 안, 소파에 앉아 태블릿 PC를 보고 있는 최기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던 눈에 안도가 깃들었다. 다행히도 작업실이 아니었다. 추측이 맞는다면, 이곳은 1층 최기원의 방인 듯하다. 그는 내가 부스럭대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은땀에 젖은 채 홀딱 벗고 있는 나와 달리, 그는 아래위로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눈길이 갈 만큼 빛나는 은색 시계를 찬 그가 손목을 가볍게 털며 침대로 가까이 걸어왔다. 침대 헤드에 겨우 기대어 앉은 나를 향해 그가 손을 올렸다. 맞을 각오를 하고 눈을 감으며 이를 악물었으나, 최기원은 뺨을 내려치는 대신 젖은 앞머리를 들어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열을 잰 그의 서늘한 손이 떨어져 나가고, 나는 겨우 눈을 뜨고 이불을 그러쥐었다. 그제야 내 손목에 감긴 붕대와 콘솔 위에 놓인 가정용 구급상자에 시선이 닿았다.
급한 대로 그가 제 방으로 나를 데려왔나 싶었다. 두 달 가까이 동거하며 그의 방으로는 나를 절대 데려오지 않았기에, 나는 비틀대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오, 올라가 볼, 게요…….”
“아침 먹어야죠.”
태연한 대답과 함께 콘솔 위의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블라인드가 걷혔다. 이제야 방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미 허무하리만큼 밝은 해가 뜬 아침이었다. 최기원은 부신 눈을 뜨지도 못하고 얼굴을 숙여 버린 나에게 옷가지를 툭 던지고 먼저 방을 나섰다.
손등을 푹 덮고, 허리는 질질 흘러내릴 만큼 큰 트레이닝복 세트를 입은 난 그를 따라 다이닝룸으로 걸어갔다. 식탁 위는 샌드위치와 토스트, 그리고 커피와 과일 주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
“…….”
너무나 조용해서 심장이 발딱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식탁에서, 난 최기원의 눈치를 온몸으로 살피며 눈칫밥을 먹었다.
손목을 잔뜩 그어 놓은 것을 분명 봤을 텐데, 최기원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멀끔한 낯은 분노로 일그러지지도 않고, 언짢은 기색조차 없다. 회색 눈빛이 평소보다 조금은 쌀쌀맞아진 것 같지만, 욕을 하지도 않고 빈정대거나 협박하지도 않은 채 그는 빵을 깔끔하게 씹어 먹고 출근해 버렸다.
머리 한 번 세게 맞은 게 다행이라고 해도 될 건지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이번 소동은 그가 넘어가 주기로 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떠난 식탁에서 꿋꿋하게 식사를 마친 후, 먹어야 할 약을 숨긴 뒤 자해 충동을 꾹 누른 채 세수를 했다.
광대에 멍이 시퍼렇게 들고 그 주위가 동그란 공처럼 부었다. 왼쪽 눈이 티 나게 찌그러진 만신창이 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흘렀다.
푹 젖은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았다. 평소 같으면 멍하게 퍼즐을 뒤적이다 깜빡 잠에 빠졌을 테지만, 지금은 괜한 조급증이 일었다. 연습장 한 장을 찢어 펼치고 펜을 들었다.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 애썼다.
‘돈이 필요해.’
한두 푼이 아닌, 묵직한 목돈이 필요했다.
“하, 할 수 있, 는 일.”
‘할 수’까지는 썼는데 ‘있는’을 쓰려니 손이 자꾸만 떨렸다. 펜촉을 움직이지 못하자 종이 위로 잉크가 거멓게 번졌다. 결국 쓰다 만 글자 위에 까맣게 줄을 그어 버리고, 알고 있는 한 글자만 썼다. 이제 막 한글을 익힌 어린애처럼, 글씨가 제멋대로 춤을 췄다.
「할 수 인 일」
이런 멍과 악취를 달고선 당장 일을 구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구해도 문제다. 돈 계산도 못 하겠고, 글을 읽으려 하면 눈이 핑핑 돌아 마구 더듬게 된다. 이런 꼴로는 번듯한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얻지 못할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못 구하면 택배 상하차, 그것도 버거우면 일용직이라도 간간이 뛰어야 하는데. 과연 내 체력이 그 일들을 버텨 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병신, 병신. 무능한 새끼…….”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종이 위에 뾰족한 선을 마구잡이로 그었다.
나 혼자라면 길거리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 나가면 그만이지만 이 겨울 날씨에 주언이까지 그렇게 둘 순 없다. 넓진 않더라도 아이가 위생적으로 지낼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에서 일을 구할 때까지 버텨야 한다. 그리고 주언이가 기본적으로 먹어야 하는 약과, 생필품, 음식들을 살 돈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 미간을 왈칵 찌푸리며 펜을 집어 던졌고, 그대로 이마를 문질렀다. 최기원과 데이트를 할 때 그가 테이블에 툭툭 올려놓는 두꺼운 지갑이 떠오르며 탄식이 터졌다. 기회를 봐서 오만 원이라도 훔쳤어야 했는데.
최기원이 출근했으니,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 훔칠 물건이 없을지 살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머리로 그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뛰고 귀 끝에 피가 몰려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던졌던 펜을 다시 쥐고 해야 할 일을 적기 시작했다.
「할 수 인 일: 이ㄹ 공사장, 태 배」
「주언 약」
「열새 훔치기」
「현그 , 돈 ㅍ」
‘필요를 어떻게 쓰더라….’
기억나지 않는 글자들이 많아 나도 알아볼 수 없는 엉망진창인 계획표와 씨름 아닌 씨름을 해야 했다. 한참 글씨 쓰기에 집중하던 중, 조용했던 1층이 유독 소란스러워진 것을 깨달았다.
속이 차갑게 식는 불안한 예감이 든 나는 절뚝이며 계단까지 갔고, 목을 늘려 아래를 살폈다. 출근한 아주머니 두 분이 현관을 열어 놓고 사람들을 안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 안 곳곳에 파란 조끼를 입은 남자들이 공구함 같은 것을 들고 흩어졌다. 개중에 두 명은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입술을 깨물며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방에 계신가요? CCTV 설치하러 왔습니다.”
심장이 발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서툴게 채워 넣던 계획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나는 책상으로 달려가 삐뚤삐뚤한 글씨로 채워진 종이를 들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부스럭대는 발걸음 소리, 드릴 소리를 들으며 변기 위에 주저앉았다. 손안에 든 종이를 와작 소리를 내며 구겼다.
언제나 무엇 하나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나날의 연속이었으나, 나는 매번 하찮은 기대를 쌓아 올리며 가슴 뛰어 했고, 역시나 쉽게 밀려든 절망에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어느새 볼 위가 소리 없이 젖었다. 코를 먹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벅벅 문지르다, 멍든 광대를 건드려 흠칫하며 손을 뗐다. 구겨진 종이는 반의반으로 접어 약을 숨겨 놓는 파우치 안에 던져두었다. 카메라가 설치되면 전부 할 수 없는 일일 뿐이다.
‘…카드 없이 나갈 방법.’
카메라나 경호원에게 구애받지 않고 이 집을 나가는 방법이 필요하다. 초점이 흐려진 눈이 대리석 타일 바닥 위를 어지럽게 부유했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생각의 끄트머리에 이른 난, 하얗게 저린 발끝을 오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울어서 발갛게 익은 얼굴이 제 색을 찾고 나서야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한창 시공 중인 사람들을 지나 책상 옆 서랍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오랫동안 닫아 두었던 서랍을 열자 최기원이 나에게 선물해 줬던 시계 박스가 보였다.
“…….”
기사들의 눈치를 한 번 살폈다. 그들은 최고급 원단의 벽지와 마감재의 손상을 최대한 막기 위해 기계를 들여다보느라 나에겐 관심이 없었다. 다시 서랍으로 시선을 떨군 난 눈앞의 박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가 사 주고 단 한 번도 착용하지 않았던 새 시계. 웬만한 자동찻값보다 더 비싼 작은 박스를 낚아챘다. 자리에서 일어선 난 옷장을 열고, 자주 입는 패딩 안주머니에 시계 박스를 깊숙하게 넣은 후 지퍼를 잠갔다.
“하…….”
옷장 문을 닫는 손이 미세하게 경련한다.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방 안을 비추는 카메라 설치 작업이 막바지에 들어갔고, 기사 중 한 명은 파우더룸에 카메라를 하나를 더 설치하고 있었다.
이제 손목 긋기도 글렀다고 생각하자 벌써 속이 갑갑해졌다. 하지만 이 집에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핏발 선 눈을 내리깐 난, 퍼즐이 어질러진 러그 위로 걸어가 한 조각을 들었다.
어차피 맞추지 못할 퍼즐 위를 헤매며, 갑작스럽게 변경된 계획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더는 숨 쉬기 힘든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상쇄시켰다.
“다 됐습니다.”
눈알만 굴려 그들을 슬쩍 바라보다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돌리자, 기사님들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방을 떠났다. 어쩐지 내 얼굴에 퍼진 멍 자국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아 보였다.
느리게 고개를 들어 방을 둘러보았다. 너른 방을 위에서 아래로 비추고 있는 카메라뿐 아니라, 선반에는 탁상용 카메라도 하나 올려져 있다. 검은 렌즈가 다양한 각도에서 방을 담고 있으니 사각지대가 없었다. 나를 향한 동그란 검정색 렌즈가 최기원의 회색빛 홍채를 떠올리게 한다. 괜스레 뺨이 따끔거리고 속이 울렁거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더 막막해졌다.
엎드린 자세로 앞 머리칼만 한 번 쓸어 넘겼다. 무료한 척, 멍한 시선을 퍼즐에 고정했지만 머리는 굉장히 복잡했다. 색색 숨을 내쉬며 퍼즐을 만지작대던 중,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점심 식사하세요.”
콩나물국과 부드러운 두부조림, 백김치 등으로 간단하게 구성된 식사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아주머니께서는 내가 앉기 좋도록 의자까지 빼 주었다. 결국 제 자리를 찾지 못한 퍼즐을 바닥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내가 먹는 모습을 보기 위해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아주머니의 시선을 애써 못 느끼는 척하며 수저를 들었다.
병원의 환자들에게 나오는 식단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싱거웠다. 어차피 달아난 입맛이기에 맛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밥 몇 숟갈을 국물에 말아 대충 씹어 넘겼다. 하지만 식탁 아래에 내려 둔 반대 손은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손이 말려 주먹을 꾹 쥔 상태였다.
어차피 치밀하지도 않던 계획이었으나 최기원이 카메라를 설치해 버린 탓에 더욱 허술하게 바뀌어 버렸다. 나조차 백 퍼센트를 장담하지 못할 일을 실행하기 위해선 꽤 굳건한 다짐이 필요했다.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난, 반쯤 밥을 비우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아주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네?”
식사 중에 그녀를 호출한 것은 처음이었다. 눈썹을 살짝 위로 띄우며 나에게 다가온 그녀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티를 냈다.
“그, 구, 국이……. 마, 맛있어요. 그, 그런데.”
긴장이 되어서 그런지 말이 자꾸만 혀 위를 헛돌았다. 침착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 최대한 또박또박하게 말을 이었다.
“미, 미지근해서. 데, 워 주시면….”
“아, 네 알겠습니다.”
“그……. 뚜, 뚝배기 같은 거에 뜨겁게…….”
“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상냥한 미소를 보인 그녀가 국그릇을 들고 방을 나갔다. 혼자가 되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카메라에 얼 타는 모습이 담기면 큰일이었다. 티가 나지 않도록 고개를 틀어, 눈앞에 보이는 두부를 떠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슬리퍼 끄는 소리와 함께 방문 사이로 아주머니께서 들어오셨다.
뚝배기 안에서 바글대는 소리가 옅게 들려올 만큼, 국은 팔팔 끓여진 상태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일부러 테이블 위를 살짝 막는 위치에 손을 두자 아주머니께서 가까이 오며 말씀하셨다.
“뜨거우니까 비켜 주세요.”
짧게 호흡한 나는 아주머니가 테이블 위에 그릇을 내려놓는 순간을 기다렸다,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제가, 할-.”
“어머!”
팔꿈치 언저리에 부딪힌 뚝배기 그릇이 중심을 잃고 아래로 추락했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그릇은 쨍그랑 소리와 함께 반으로 갈라졌다.
“어머, 괜, 괜찮으세요? 어떡해, 어떡해.”
“윽…….”
팔팔 끓은 국이 모조리 허벅지를 적셨다. 각오한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고 비틀대며 테이블을 짚었다. 당황한 아주머니께서 물컵을 들고 얼른 다리에 부어 주었으나, 방금까지 끓었던 국은 왼쪽 다리를 넓게 적셨다. 한 컵 정도로 열감이 달아나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떡해요, 얼른, 얼른 흐르는 물로 씻어요!”
절뚝이며 화장실로 걸어간 나는 샤워기를 틀었다. 뜨거운 국으로 범벅이 된 바지를 끌어 내리자, 왼쪽 허벅지 전체가 벌써 빨갛게 달아올랐고 허벅지 중간 부분과 종아리엔 커다란 물집이 잡히고 있었다.
“아…….”
너무나 쓰라렸다. 문밖에선 아주머니께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괜찮냐는 물음만 반복했다. 현기증이 돌 만큼 아려 오는 통증 때문에 머리 밑과 등에 식은땀이 솟아났다. 하지만 붉은 화상 자국을 보자, 통증을 벗어난 안도감이 들었다.
의심을 벗어나 규칙적으로 밖을 나갈 방법이 필요했다. 지금 내 몸 상태에서 바깥 외출을 할 만한 곳이라곤 병원이 최선이었다. 외출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아야 하고, 주언이가 입원한 병원을 자주 들락날락하여 경계를 늦춰야 했기에 다른 어떤 것보다 화상 치료가 제격이었다. 조금 무모한 감이 있었지만, 이 수준의 상처라면 진료를 할 때마다 꽤 시간도 소요될 것이다. 나는 하얗게 질린 낯으로 아주머니를 불렀다.
“아, 아주머니……. 벼, 병원 가야, 할 것 같아요.”
“아, 네.”
“119 좀 으, 부, 불러 주세요.”
상처 부위를 물로 씻어 내린 후, 아주머니께서 가져다주신 짧은 바지로 갈아입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구급대원의 부축을 받으며 1층으로 내려갔고, 소란을 듣고 대문 바깥에서 들어온 경호원에게 간단한 상황을 설명한 후에야 구급차에 오를 수 있었다.
구급차 베드에 다리를 올리고 앉자, 구급대원들이 물집이 커다랗게 잡힌 상처 위에 투명한 생리 식염수를 부으며 소독했다. 아주머니는 나보다 더 사색이 되어 응급 처치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녀의 탓은 전혀 없는데, 최기원에게 깨질 모습을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미안해졌다.
그때 아주머니의 옷 주머니 안에서 전화 소리가 들렸다. 퍼뜩 휴대 전화를 꺼낸 아주머니가 발신인을 확인하더니 울상이 되어 전화를 받았다.
“네, 사장님.”
호칭을 듣자마자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시나 최기원은 이미 모종의 경로를 통해 내 상황을 전달받은 모양이었다.
“아 네…. 국을 내려놓다가 실수가 있었어요. 아유, 하필 그 뜨거운 게 쏟아져서, 네…. 죄송합니다.”
더듬대면서도 상황을 최대한 차분하게 설명하려 애쓰던 아주머니께서 전화를 나에게 건넸다.
“사장님이 바꾸시래요.”
나는 심장이 작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건넨 전화를 받아 들었다.
“…네.”
[많이 다쳤어요?]
“아, 아니요.”
[하…….]
수화기 너머로 진한 한숨 소리가 건너왔다. 벌써 그가 미간을 옅게 찌푸리고 눈을 내리깐 위압적인 모습이 떠올랐다. 그저 한숨 소리만으로도 위장이 꼬이는 것 같은 학습된 통증이 일었다.
[혹시 카메라 단 거 불만스러워서 그래요?]
“네……?”
[하루에 한 번씩 일을 쳐야 속이 시원하냐고. 집에 얌전히 있는 거, 그거 하나도 어려우면 어쩌자는 겁니까?]
신랄한 비판이었다. 많은 감정이 섞여 있는 목소리에 어쩐지 울렁대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행여 내가 일부러 그랬다고 의심했다면, 그는 이토록 감정을 투명하게 내비치는 실수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차갑고 느린 어조로 나를 떠보다, 스스로 진실을 자백하게끔 만드는 사람이었다. 나는 담담한 얼굴로, 원래의 멍청한 나라면 할 법한 당연한 말을 골라 뱉었다.
“죄, 송합니다…….”
[치료 끝나는 시간 맞춰서 차 보낼 테니까 타고 와요.]
역시나 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가 가차 없이 전화를 끊었다. 사이렌을 켠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 주위에 구급차가 갈 만한 가까운 응급실은 주언이가 입원해 있는 대학 병원뿐이었다.
응급실에 도착한 후, 베드 위에서 처치를 기다렸다. 나 정도의 상처는 이런저런 위중한 이유로 실려 온 사람들보다 뒤로 밀려야 했다. 혼자 신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아주머니께서 여기 좀 먼저 봐 달라고 간호사를 데리고 왔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부풀어 오르는 화상 상처는 내가 보기에도 징그러웠다. 하지만 간호사는 드러난 다리의 상처를 보고도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하얗고 차가운 연고를 가지고 와 상처 주변에 꼼꼼하게 덧바르고, 능숙한 손길로 붕대를 감았다. 가시지 않는 통증에 춥지도 않으면서 오한이 들어 턱 아래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환자분 많이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
내 얼굴을 흘끔 보고 기계적으로 묻는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 순서가 밀리며 통증은 더욱 극심해졌다. 손톱으로 베드를 꾹 누른 자리가 비어져 나온 땀 때문에 젖어 있었다.
간호사는 주사기 하나를 꺼내 내 손을 가져갔다. 토니켓을 묶고 팔뚝이 접히는 쪽의 도드라진 혈관에 주사를 놓으며 진통제라는 설명을 해 주었다. 주사를 다 놓은 후, 토니켓을 풀던 간호사가 손목 위에 묶여 있는 붕대를 발견했다.
“여기도 데였어요? 붕대 이렇게 감으면 안 되는데.”
말릴 새도 없이 허술하게 끼워져 있던 매듭이 풀어졌다. 최기원이 연고를 발라 두고 묶었던 붕대가 흘러내린 순간, 표정이 없던 간호사의 눈썹이 움찔했다.
“아, 그, 그냥 거, 거긴….”
잠시 움직임이 멎었던 간호사가 난자된 손목의 상처를 살펴보더니 소독제와 연고를 다시 가져왔다. 꿰맬 정도까진 아니지만, 감염이 생길 수 있으니 매일 소독하며 붕대 안쪽의 거즈를 바꾸라고 말했다. 거즈를 덧대고 붕대를 감는 손길이 부드럽고 신속했다. 순식간에 손목의 상처까지 말끔하게 처치한 그녀가 베드 위에 흩어진 연고와 면봉, 붕대 등을 정리하며 나를 불렀다.
“…저기, 환자분.”
“네……?”
“오늘 화상 상처 많이 아프셨죠?”
“아, 네…, 조, 조금….”
“아프면 아프다고 꼭 말씀하세요. 그리고…,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시다고 해도 망설이지 마시고 병원을 찾아 주세요. 약물이나 상담 같은 좋은 치료가 있으니 꼭 나을 수 있습니다.”
흐린 미소로 어물쩍 대답을 대신하자 그녀는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의사가 그녀를 부르자 간호사는 큰 목소리로 대답하며 뛰어나갔다.
“치료 다 끝난 건가요?”
줄곧 옆에 서서 불안하게 손을 조몰락대던 아주머니께서 조용히 물어 왔다. 붕대가 감긴 손목과 허벅지를 내려다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 손목에 이어 허벅지까지. 남들에게 드러난 곳마다 흉한 상처가 따라붙었다.
어떤 것은 최기원이, 어떤 것은 내가 스스로 새겨 넣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고통에 파묻혀 지냈던 두 달이 남긴 결과였다. 애초에 잘못된 선택을 한 내 탓이었고, 그 속에서도 어떻게든 버티려던 내 손짓이 남긴 발악이었다.
입 안에 쓴침이 고이는 기분을 느끼며 베드에서 내려섰다. 허벅지와 종아리에 감긴 붕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절뚝여야 했다. 응급실 수납 창구 앞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 온 조익현 비서실장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꽤 큰 고통과 맞바꾼 첫 번째 외출이었다.
오후는 거의 다리를 붙잡고 끙끙대며 보냈다. 어떻게 자리를 잡아도 다리가 욱신대고 화끈대는 통에 잠들지도 못했다. 어느새 저녁이 되어, 최기원이 차가 차고에 들어왔다는 알람 소리가 울렸다. 기진맥진한 몸을 일으켜 계단을 내려갔으나, 평소보다 훨씬 속도가 더뎠다.
“아…….”
1층 복도에 우두커니 선 그가 계단 난간을 붙잡고 내려오는 나를 삐딱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히 조급증이 일어 걸음을 빠르게 디디려 하자 그가 인상을 확 찌푸리며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와 한쪽 팔뚝을 낚아챘다. 가까이 다가선 그에게서 익숙한 향수 냄새가 뒤늦게 풍겨 왔다.
거의 그에게 들리다시피 1층으로 내려왔다. 최기원은 꽉 매었던 와인빛 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빈정댔다.
“카메라 연결되자마자 좋은 것 보여 줘서 고맙네요. 다른 남자한테 기대서 집 나가는 것 잘 봤어요.”
“…….”
“멀건 두부 새끼 같은 걸 쥐어 팰 수도 없고.”
이미 많이 때렸다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괜한 말대답을 꾹 참고 손톱 옆의 여린 살만 뚝뚝 뜯어냈다.
“좆같이 엉성한 자세로 계단 오르내리지 말고 1층 방 써요.”
“네….”
그는 혀를 낮게 차며 내 볼을 툭 건드렸다. 먼저 복도를 걸어가는 그를 따라 절뚝이며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내 멍청한 머리로 세운 헐렁한 계획이 다 잘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