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Illusion (1)
나언이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고, 기원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나언의 병원으로 향했다. 외과 병동과 암 병동 CCTV를 확인하며 동시에 휴대 전화를 추적했지만, 병원을 마지막으로 전원이 꺼져 더는 추적이 불가능했다.
화면 속의 나언은 필사적으로 보였다. 흐린 화질을 뚫고 나타난 나언은 병동을 빠르게 뛰어다녔다. 씁쓸하게도, 절뚝이며 복도를 가로지르는 나언은 기원이 요 근래 봤던 모습 중 가장 살아 있는 듯한 상태였다.
외과 병동을 뛰어나간 나언은 역시나 곧바로 백주언의 병실을 향했다. 기원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아무런 기척이 없는 복도를 비추는 카메라 화면을 몇 분간 뚫어지게 보며, 기원은 백주언의 병실에 들어간 나언의 심정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비어 있는 침상에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혼란스러웠을 것이고. 한참 뒤 다시 뛰어나온 백나언의 마지막 흔적은 1층 CCTV에서 언뜻 비친, 쫓기는 듯 뛰어가는 뒷모습뿐이었다.
그사이 백주언의 상태는 심각해졌다. 의미 없는 연명 치료를 연장하고 있는 건, 순전히 백나언 때문이었다. 최지원이 죽은 후 나언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용했던 존재였던 백주언이, 이제는 도망간 이의 자취를 쫓기 위한 마지막 희망이 됐다.
방법이 없어서 화가 났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무력함이었다. 나언이 먼저 전화를 주지 않았더라면, 아니.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덤덤히 마지막을 읊던 백나언은, 동생 백주언이 가느다란 생명을 이어 가고 있지 않았더라면 절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왔다. 빠르게 꺼져 가는 동생의 곁을 지키고 있는 백나언을 바라본 순간, 기원은 등허리부터 뒷골까지가 차갑게 당겨 오는 기분을 느꼈다. 백주언을 향한 커다란 눈에는 슬픔이 없었다. 그저 백주언이 일 분 일 초 죽어 가는 것을 담담하게 확인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백주언이 죽은 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듯 장례를 치르는 말간 낯을 바라보며 기원은 제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되돌려 놓기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언이 부서졌다.
몸과 정신, 겨우 붙들고 있던 옅은 이성까지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
죽을 힘조차 없어 보이는 마른 몸 때문에 창살을 달았고, 읽히지 않는 눈동자에 다시 속기 싫어 잠금장치를 걸었다.
깊은 공상에 빠진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제가 살아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인지. 깨어 있을 땐 그저 처연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만 본다.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는 나언은 백주언의 물건이 들어 있는 상자를 뒤적일 때면 잠시 웃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상태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밥을 잘 먹다가도, 선한 양 같은 얼굴로 퍼즐을 맞추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이 시작됐다.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듯 귀를 막고 주저앉아 버리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던지기도 했다. 차라리 제 곁에서 그럴 때면 괜찮았다. 문제는 한밤중 발작과 함께 자해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손톱을 세워 목을 파내듯 긁기도 하고 머리를 책상다리에 찧어 생살을 찢기도 했다.
잠을 잘 수 없었다. 웅크린 채 잠을 자는 어둑한 CCTV 속 인영이 벌떡 일어나 움직일 때면 핏발 선 눈으로 화면을 응시하다 곧장 2층을 향해야 했다. 제 잘못된 선택의 결과였기에 성가시지 않았다. 상처 난 몸을 끌어안고 달래 주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분고분 잠에 빠졌다. 제풀에 지쳐 눈을 감은 얼굴 위에 몇 번 입을 맞추다 보면, 초조함에 찢기는 것 같던 기분이 평온해졌다.
다만 다음 날 아침이면 제가 낸 상처를 기억하지 못한 채로 눈을 가물거렸는데, 그때마다 나언의 낯에 번지는 묘한 아쉬움이 거슬릴 뿐이었다.
여느 때처럼 퍼즐을 맞췄다. 나언을 기다려 주다 놓아야 하는 곳을 꾹 짚어 주면 나언은 못 본 척하며 그 위에 퍼즐을 맞추고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나언의 낯에 표정이 깃든 적이 거의 없었기에 그 사소한 변화가 귀여웠다.
놓아야 할 자리를 가르쳐 줬는데도 나언이 퍼즐을 쥐고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기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언은 커다란 조각을 든 채로 유리창 너머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
봄꽃이 만개한 이후 나언이 정원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기원은 재촉하지 않고, 바깥에 시선이 팔려 있는 애인을 구경했다. 온도가 높은 햇살을 받은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하얗게 반짝였다. 커다란 눈이 깜빡일 때마다 동그랗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작지만 콧대가 날카로운 코와 피가 맺힌 붉은 입술로 이어지는 곡선을 보며, 기원은 저 힘없는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그려 봤다.
바깥을 계속 응시하는 것을 보니 문득 나언이 외출하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뛰쳐나가 피를 내는 발작이 걱정되어 외출을 미루고 있었는데, 봄을 담고 있는 얼굴이 너무 예뻐 저도 모르게 들뜬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퍼즐을 어디에 둘지 가르쳐 주지 않고 장난을 쳐 봤고 역시나 나언은 몸을 경직한 채 당황하다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안타깝지만 사랑스러웠다. 나언의 토대를 무너뜨린 것은 본인이면서 나언이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벌을 받는 것 같았다.
결국 우는 몸을 쓰러트려 강제로 안았다. 검은 눈동자는 질리도록 바깥만 향했다. 차라리 격렬하게 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관계를 맺는 동안 나언의 낯은 빠르게 생기를 잃어 갔다. 으스러지게 껴안아도, 세게 허리를 쳐올려도 나언은 바깥만 끈질기게 바라보며 허망하게 흔들리기만 했다.
상념에 젖어 가는 눈을 가렸다. 작은 얼굴은 살이 더 빠져, 손 하나에도 전부 가려질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묻는 말에도 아무런 대꾸가 없다. 턱을 잡고 끌어당겨 눈을 맞추자 그제야 텅 빈 동공이 자신을 향해 왔다. 초췌한 얼굴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이내 눈동자가 까무룩 뒤로 넘어갔다. 기원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런 나언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나언아.”
기원은 나직하게 나언을 부른 뒤 그대로 몇 번 더 허리를 움직여 봤다. 시체 같은 하얀 얼굴에는 기대한 반응이 없으니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붉게 물든 눈꼬리를 찌푸리며 신음을 터뜨리는 나언을 생각하며 성기를 쑤셔 박았다. 힘이 빠져 벌어지는 다리를 옭아매며 다시 깊은 허릿짓을 했다. 버둥거렸던 다리를 떠올렸지만 한 손에 틀어 잡히는 두 발목은 쥐는 대로 달랑거리기만 했다.
의식을 잃고 늘어진 몸에 발정하는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기원은 나언을 아프게 깨우는 대신, 꽃잎같이 다물린 입술을 조심스레 할짝댔고 힘을 잃고 늘어진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껴 꽉 쥐어 봤다.
“백나언.”
대답이 없는 이를 한 번 더 부른 후 살점이 패여 검붉게 착색된 목덜미에 코를 묻고, 과일 향이 나는 체취를 들이마셨다. 파란 멍이 든 가슴 아래를 약하게 쓰다듬어 봤다. 나언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성기 주변에 들러붙는 끓는 것처럼 달아오른 내벽뿐이었다. 무의식중에도 끊임없이 성기를 밀어내는 아래를 도로 꿰뚫으며 도톰한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어 키스했다.
“흐흐.”
“……?”
맞닿은 입술이 꿈틀대더니, 별안간 해맑은 웃음소리가 터져 흘렀다. 기원은 미친놈처럼 허리를 처박던 움직임을 멈췄다. 잘못 들었나 싶어 느리게 시선을 옮기니, 나언은 누운 채로 활짝 웃고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웃는 얼굴이었다. 그 어떤 상상보다 아름다운 실재였다.
배시시 웃음을 터뜨리더니, 팔을 뻗어 제 목을 끌어안고 밭은 숨을 내뱉는다. 그 마른 팔뚝에 끌려가면서도 기원은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왜 웃어?”
물으면서도 가슴 한편이 시렸다. 다정한 물음에 나언이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아이 같은 웃음을 재차 터뜨렸다. 눈물 때문에 짓무른 눈가에 주름이 일고, 핏기 잃은 뺨이 동그랗게 올라붙었다.
“아, 그냥…….”
느른하게 대답하며 입꼬리를 움찔대는 나언을 보며 무언가 이상한 것을 재차 깨달았다. 나언이 저를 보며 웃을 리가 없으니까. 창밖 너머의 봄을 보며 넋을 놓았던 나언이, 지금은 꿈속에서 다른 무언가를 보며 웃고 있구나 싶었다. 역시나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설렘을 품고, 다른 이를 머금었다.
“형.”
“…….”
“너무 보고 싶었어.”
“…….”
아스러지는 듯한 작은 목소리에 기원의 손가락이 움찔, 했다. 나언은 목둘레를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줘 기원을 당겼으나, 이번에는 끌려가지 않았다.
“나 잘 끝냈나 봐.”
“…….”
“주언이랑 형이 너무 보고 싶은데……. 그런데 어떻게 해야 덜 아플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매번 망설였거든…….”
“…….”
“드디어-,”
짝.
거실에 매몰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죽은 것 같다며 해사하게 웃는 뺨을 내려쳤다. 영문도 모른 채 얻어맞은 나언이 놀란 가슴에 숨을 들이켜며 맞은 쪽 눈가를 찌푸렸다. 아직 빌어먹을 발작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혼란해진 얼굴에는 정돈하지 못한 웃음기가 애매하게 걸려 있었다. 정신 차리라며 재차 손을 들었는데, 나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더듬대며 입술을 열었다.
“아……. 미, 미안해…….”
예상치 못한 사과에 기원의 손이 우뚝 멈췄다. 하얀 낯의 눈동자가 길을 잃고 흔들리더니 당황을 머금고 금세 슬퍼졌다. 나언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죄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가……. 최기원이랑 그래서……. 그러지?”
“…….”
“미안…….”
일부러는 아니었다며 웅얼대는 말소리는 잠꼬대하는 것처럼 발음이 뭉개져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기원의 낯에 어둑한 그림자가 졌다. 기다란 눈은 감기지도 않은 채로 나언을 뚫어지게 내려다봤다.
나언이 ‘형, 형….’ 하며 몇 번 나지막이 최지원을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원은 아까보다는 약한 세기로 작은 뺨을 내려쳤다. 고개가 힘없이 휙 돌아가고, 하얀 볼이 러그 털을 눌렀다.
“너 살아 있어, 나언아.”
“…….”
무언가를 곱씹는 듯한 얼굴로 나언이 눈을 끔뻑였다. 꿈에서 생기를 찾고 반짝였던 까만 눈동자에 점점 그림자가 들어찼다. 웃음이 묻어 있던 입꼬리도 점점 처져 가고, 예쁘게 휘었던 눈도 멍하게 커졌다. 현실을 향해 강제로 끌려오며 나언의 행복이 겹겹이 벗겨졌다.
그리고 다시. 짝,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조금만 손을 대도 금세 핏줄이 터져 버리는 뺨이 붉게 부풀어 올랐다.
“너는 살아 있고, 죽을 리 없어.”
“…….”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
“살아서 나 원망해야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웃는 얼굴이었기에 헛소리를 지껄여도 그대로 내버려 두려 했다. 하지만 드디어 죽었다며 후련해하는 나언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꿈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끼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껍게 죽어 버릴까 봐. 그렇게 죽어서 최지원을 만나는 것까지 시샘해야 하는 걸까 봐.
최지원이 먼저 가졌단 이유로 나언에게 다정하지 못했다. 기원은 나언을 취하는 동안 자조적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내가 다정했다고 네가 최지원 대신 나를 사랑했을까. 하지만 인제 와서 너를 따라 죽어 주겠다고 한들, 먼저 죽은 최지원을 그리워하는 네가 나를 안타깝게 여겨 줄까. 전부 아니라면,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현실로 돌아온 희끄무레한 눈동자가 스르륵 유리창 너머를 향했다. 기원은 나언에게 따져 묻고 싶은 모든 것을 감추고 스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나갈까?”
“…….”
“놀러 가자. 꽃구경하고 바람도 쐬고.”
방금 봤던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눈에 담기에도 벅찰 만큼 선명하고 예쁜 웃음이었는데, 기억을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흐려진다. 기원은 쓰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얀 액으로 범벅이 된 아래에서 성기가 빠져나오자마자 다물리지 않은 구멍에서 울컥 정액이 흘러 바닥에 고였다.
나언을 끌어안고 화장실로 갔다. 널따란 욕조에 작은 몸을 앉히고 따뜻한 물을 받았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기원이 짙은 한숨과 함께 연기를 흘렸다. 순진한 얼굴의 콧방울을 툭 건드려 봤다.
어리석은 믿음 끝은 늘 허무한 배신이었다.
***
커튼을 모두 쳐, 일말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CCTV 화면을 비추는 태블릿이 밝게 빛났다. 기원은 턱을 괸 채 화면을 싸늘한 눈으로 응시했다.
몸을 씻겨 주는 사이 잠이 든 나언을 침대 위에 눕히고 왔다. 조금 얌전히 잔다 싶더니, 이내 마른 몸이 이불 아래에서 열심히 뒤척댔다. 결국 잠에서 깬 나언은 파우더룸으로 가 거울 앞에서 제 뺨을 한참 들여다봤다. 기원은 나언을 CCTV로 보며 길이가 줄어든 담배를 비벼 끄고, 새 담배를 꺼내 잇새에 끼워 넣었다. 파우더룸에서 방으로 걸어 나오는 나언의 낯에는 해소되지 못한 의문이 가득했다.
나언은 오늘도 동생의 유품이 들어 있는 상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상자 속 물건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사택에서 경호원을 호출해 다시 나언의 방을 지키게 했다. 기원은 의자를 뒤로 젖히며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얼마 만에 잠을 자는 것인지 모를 만큼 최악의 수면 상태였기에 기원은 속절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
잠깐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귓가에 들리는 희미한 소음에 눈을 떴다. 실제로 들리는 소란 같기도 하고, 꿈결에서 들린 것 같기도 하다. 실핏줄이 터져 빨갛게 변한 건조한 눈이 곧장 CCTV 화면을 향했다.
“…….”
방이 진창이었다. 기원의 예민해진 눈초리는 의자를 들고 비틀대는 나언이 아닌, 그런 그를 붙잡아 끌어당기는 경호원을 향했다. 그 사건 이후 경호원을 다시 집 안으로 불러들이기 싫었지만, 때를 가리지 않고 도망가거나 발작을 일으키는 나언을 가만히 둘 순 없었다. 자신이 가까이 없을 때 나언의 방 안에서 소란이 들리면 곧장 대처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본인이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신경이 곤두서는 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다.
자리에서 일어선 기원은 찌뿌듯한 목을 돌렸다. 조금은 지친 듯한 기분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나언은 방문을 연 기원을 보자마자 주눅이 들어 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바닥에 깔린 유리 조각들이 발치에서 날카롭게 반짝였다. 오늘 발작은 꽤나 위험했다. 나언이 빨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자칫 크게 다칠 수 있었다. 꽤 고심해서 골랐던 선물이 산산조각 난 모습을 바라보던 기원이 나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짧은 찰나, 기원의 머릿속엔 다양한 갈래의 상황이 시뮬레이션처럼 돌아갔다. 이미 멍이 든 뺨을 다시 쳐서 다시는 위험한 짓을 못 하게 혼내야 하는 걸까 싶었다. 어차피 기억도 못 할 발작이기에, 아픈 각인이라도 남겨 둬야 꼬리를 내리니 말이다.
그런데 나언이 웃었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 주인 눈치를 살피는 강아지처럼 슬금슬금 몸을 낮추더니 볼품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최지원에게 웃어 주던 얼굴과는 너무나 다른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그건 분명 자의적인 웃음이었다. 나언이 자신을 향해 웃었다. 착각도 발작도, 혼란도 아닌 기원에게로 향한 어그러진 미소에는 나름 절박한 사과가 매달려 있었다.
기이하게도 기원은 다시 속아 넘어갔다.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 마른 뺨에 입술을 묻으며 억지로 비춘 연인의 웃음을 씹어 먹듯 기억했다. 그 허상에 상상을 덧대는 동안, 나언은 주머니에 든 조각의 무게를 가늠하며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결말을 꿈꿨다.
***
화장실 벽에 등을 기댄 채 늘어져 있던 나언의 몸이 기울더니 이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안타깝게도 나언은 쉽게 의식을 잃지 않았다. 바닥이 위로 솟구치고 벽이 허물어지는 지독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끔찍한 오한과 구토감에 몇 번 등을 들썩이며 무언가를 토해 냈다. 머릿밑과 등은 식은땀에 젖었고, 무거워진 눈꺼풀 때문에 눈을 뜨고 감기 버거워졌다.
“하, 아….”
쇳소리 같은 신음이 작게 비어져 흘렀다. 다행히도 시간이 흐를수록 타는 듯한 손목의 통증이 점점 사라지고, 숨쉬기도 편해졌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쉽고 빠른 일이었는데. 왜 하루하루를 하릴없이 낭비했는지 모르겠다. 옆으로 쓰러진 나언이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어떻게 하다 이렇게까지 흘러오게 된 건지 정말 모르겠다.
처음에는 자신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최기원을 견뎌 내는 싸움이었다. 약점을 틀어쥐고 사람을 굴복시키는 그의 말과 행동에 언제나 숨이 막히고 괴로웠다. 하지만 그 견딤의 시간이 길어지며, 가끔 건네는 최기원의 솔직한 애정이 정말 사랑일까,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언이를 위해서라면 참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나언은 자신이 미쳐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는 스스로와 처절하게 싸워야 했다. 제 속을 좀먹는 우울은 가끔은 벌레로 가끔은 냄새로 나타나 자신을 공격했다.
그건 어쩌면 최기원을 미워하는 일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끝내는 버틸 힘 하나 없이 갉아 먹힌 자신이 외로운 승자이자 패자였다.
“…….”
나언이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것은 벌어진 손목의 생살 사이로 붉은 피가 왈칵 솟구치는 모습이었다. 그 막대한 양의 피를 보며 나언은 어느 정도의 후련함과 함께 공포도 느꼈다. 나 다시 살아날 순 없겠구나,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이 정말 마지막이겠구나 하고.
조금은 초라하지만 내 선택이었고 최선이었다. 그러니까 괜찮다고 다독였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아. 진짜 괜찮아. 괜찮다, 괜찮아.
설핏 헐떡이는 자신을 안고 귀에 속삭였던 스산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미련 없는 웃음이 작게 터졌다.
비릿한 향과 함께 시야가 거멓게 뭉개졌다. 남해에서 보았던 짙은 밤바다를 그리며 나언은 스스로 눈을 감았다. 잠겨 드는 기분이 꽤 편안했다.
***
씻겠다는 나언을 들여보내고, 기원도 씻었다. 꽃잎을 구경하던 하얀 얼굴을 떠올리며 비슷하게 밝은색의 카디건을 꺼내 입었다. 준비를 마친 기원은 소파에 앉아 나언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내려올 기미가 보이질 않자, 기원은 휴대 전화를 들어 CCTV로 나언의 방을 확인했다. 위험한 조각이 모두 치워진 방은 여전히 불이 꺼져 어둠에 잠겨 있었다. 손목을 털어 시계를 확인한 기원이 다시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 씻기엔 꽤 오랜 시간이었으나, 씻은 후에도 몇 번이고 냄새가 난다며 다시 몸에 물을 묻히는 나언을 생각하면 기다릴 법했다.
그렇게 다시 삼십 분을 기다린 기원이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널따란 거실을 가로지르는 보폭이 점차 넓어졌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한 칸씩 오르는 동안 기원의 낯빛에는 점차 여유가 사라졌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이 나언의 방문을 향했다.
갑작스레 올라온 기원을 보고 한 걸음 물러서는 경호원들 사이로 손을 뻗어 문을 열어젖혔다. 이젠 걷는 것이 아닌 뛰는 모양새가 되어 곧장 파우더룸을 지나 안쪽의 화장실로 향했다.
문고리를 쥐는 커다란 손이 살짝 떨렸다. 아주 찰나에 비친 망설임의 이유를 끝내 알아채지 못한 채로 기원은 고리를 잡아 돌렸다. 달칵, 잠긴 문고리가 반을 돌아가지 못하고 멈췄다.
똑똑.
주먹을 쥔 기원이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렸다. 그 너머로 희미한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씻는 걸까 싶은 순간의 안도와 여전히 발밑을 감도는 싸한 불안이 맥을 뛰듯 심장을 번갈아 두드렸다.
“백나언.”
조심스레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서서히 거세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쾅쾅 소리와 함께 주먹으로 문을 내려치게 됐다. 여전히 문은 굳게 잠겼고 안에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커다란 소리에 경호원 두 명이 화장실 앞까지 다가왔고, 기원은 파우더룸의 의자를 들고 문고리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두 번의 가격 이후, 잠겼던 고리가 떨어져 나갔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밝은 빛과 어울리지 않는 피 냄새가 설핏 풍겼다. 기원은 의자를 툭 떨어뜨리고 손바닥으로 문을 밀어 완전하게 젖혔다.
“…….”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원의 뒤에 바짝 붙어 있던 경호원 한 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다른 하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기원의 눈치를 살폈다.
나언이 마지막으로 본 것이 제 손목에서 엄청난 피가 쏟아지는 모습이었다면, 기원이 처음으로 본 것은 그렇게 쏟아진 피가 웅덩이처럼 고여 하수구로 흘러가고 있는 붉은 바닥이었다. 그리고 기원은 그 피가 흐르는 길을 거꾸로 따라가며 눈동자를 옮겼다. 새빨간 피의 근원은 벌어진 마른 손목이었고, 여전히 엄청난 양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나언이 갈아입었던 회색의 홈웨어 소매가 피에 젖어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리는 세면대의 물소리 사이에, 핏줄기가 하수구를 따라 내려가는 소리가 함께 화장실에 울렸다.
나언의 주변은 피와 근원을 알 수 없는 하얀 거품이 낀 토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옆으로 웅크린 채 쓰러진 나언은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기원 역시 나언을 발견한 이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처참한 현장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마네킹처럼 굳게 서 있었다.
“사, 사장님. 얼른.”
경호원의 당혹스러운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걸음을 내디딘 기원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언에게 가까워질수록 피 냄새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두터워졌다. 기원이 피 웅덩이 위에 무릎을 꿇고 나언의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돌렸다.
마른 몸이 종잇장처럼 똑바로 뉘어졌다. 힘없이 꺾이는 목뒤에 팔뚝을 끼우자,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건조한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입가에서부터 턱으로 길게 이어진 거품이 말라붙어있었다. 기원은 나언의 아래에서 녹다 말고 토해진 하얀 알약을 발견했다.
“…백나언.”
일그러진 미소를 띠었던 하얀 낯에는 이제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창백하다 못해 보랏빛이 되어 가기 시작한 뺨과 어둑한 눈가를 천천히 살피다 코 아래로 손을 가져다 댔다. 생의 온기를 품은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얀 뺨을 감싸 쥐자 손에 닿는 살결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기원은 인형처럼 늘어져 있는 나언을 멍하게 내려다봤다.
멍청한 백나언이라 생각해 왔지만 어이없게도 그에게 자주 속았다. 그리고 그때엔 늘 화가 났었다. 작게는 최지원의 묘에 몰래 찾아갔던 것이나, 혹은 경호원의 일이나.
두 달여 전, 자신은 잘 정리하고 있다며 제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려 왔던 날. 몸을 섞으며 발견한 나언의 손목 위는 피가 맺힌 상처가 가득했다. 깊게 긋지도 못해 어설프게 비어져 나온 그 피를 소매 위로 애써 감춘 채, 나언은 자신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거짓을 입에 올렸었다.
그 뒤. 함께 침대를 나눠 쓰고, 기원이 어슴푸레 꿈꾸던 일상을 나누던 여느 때. 고요한 아침을 나눠 먹은 평범한 오전에 나언은 아무런 기척 없이 멀리 도망쳤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역시나 웃는 얼굴에 허무하게 속아 넘어갔다. 그런데 더는 화가 나지 않았다. 차마 화를 낼 수조차 없을 만큼, 오늘 나언의 거짓말은 너무나 강인하고 확실했다.
언제나처럼 멍청하고 어설펐던 나언이 아니었다. 뺨 한 대에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 만큼 겁도 많은 주제에 이토록 깊게 손목을 그었고 그것도 모자라 약까지 삼켰다. 반복된 실패가 안긴 황망함이 컸던 것일까. 거듭된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확실하게 죽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기원은 커다란 손으로 깊게 벌어진 손목을 눌렀다. 차가운 손목을 덮어 누르는 순간 다시 미지근한 피가 울컥 솟으며 기원의 손가락 사이로 새어 흘렀다. 더는 지혈이 무의미했다. 결국 기원은 나언을 품에 안은 채 화장실을 나섰다. 눈치 빠른 경호원이 기원보다 앞서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고 기다렸다.
나언을 끌어안은 기원에게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 무감한 얼굴은 시체 같은 나언을 뚫어져라 응시할 뿐이었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