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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Offer (18/28)

16. Offer

기원은 잠든 나언을 내려다봤다.

눈가에 아직 마르지 않은 물기가 달려 있다. 코끝도 붉고 귀뺨도 상기된 것이, 안쓰럽게도 울고 나면 흔적이 오래가는 얼굴이었다. 최근 들어 악몽을 꾸는 간격이 꽤 벌어져 괜찮아진 상태였는데, 혼비백산해 일어난 채로 애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덜컥했다. 단 한 번의 꿈으로 나언은 순식간에 예전으로 돌아갔다.

강간을 당했다며 운다. 아프다고 괴롭다고 말하면서도 밤인 걸 깨닫고는 점점 목소리를 죽여 갔고 종내에는 끕, 하며 숨을 참는 소리만 내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기원은 천장을 노려보며 힘없는 한숨을 뱉었다. 벌레는 나언의 환각이기라도 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강간은, 상흔으로 남은 그 기억은 진짜였다.

기원이 자각하지 못한 사이, 제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최대한 표정을 숨기고 나언의 등을 쓸어 줬다. 다른 할 말이 없었다. 꿈이라는 거짓말에 나언은 겨우 진정을 하고, 자신을 보며 다시 주섬주섬 누웠다.

눈물에 부푼 눈을 감고, 억지로 잠에 들려 애쓰는 모습을 보며 기원은 마른세수를 했다. 저렇게 난리를 쳐 놓고, 다음 날이면 추태를 부렸다며 눈을 내리깔고 부끄러워할 것이다. 좆같다. 모든 게 너무나 좆같아서 견디기 힘들었다.

끊임없이 과거를 영사기처럼 보여 주는 악몽은 나언만 겪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찾아온 악몽은 기원 역시 괴롭게 만들었다.

어둑한 꿈은 화장실의 불빛과 하수구로 흘러 들어가던 붉은 피로 시작했다. 그곳에 널브러진 나언은 필연처럼 죽음에 이르렀다. 참으로 다양하게도 죽었다. 이미 싸늘하게 식어 버린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린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병원에 도착한 순간 심정지가 와 머리 위로 하얀색 천이 덮이기도 했다.

한 번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나언의 뜻대로 삶이 흘러가길 바라서일까. 기원은 마침내 죽고야 만 나언을 보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가슴이 찢어지지만 그래, 차라리 너는 후련하겠지라며 자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잠에서 깬 순간, 어둑한 병실에서 불안이 순식간에 몸집을 키웠다.

보호자용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기원은 슬리퍼에 발을 끼우고 나언의 침대로 갔다. 얼마 자지 못해 눈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이젠 일상이 된 현기증 때문에 병실 바닥이 제멋대로 우그러져도, 기원의 형형한 눈은 누워 있는 나언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나언은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고 누워 있다. 숨소리 하나 크게 내지 않고, 몸부림도 치지 않은 채, 그저 처음에 누웠던 올곧은 자세 그대로 깊게 자고 있었다.

이럴 때면 헷갈려 미칠 것 같다. 지금 나언이 자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죽은 채로 늘어진 시신을 내가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나언의 환각처럼 정말 시체가 썩는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분명 밥을 먹고, 세수하고 뽀얀 얼굴에 로션까지 듬뿍 바른 후 자는 걸 봤음에도 꿈과 현실이 오묘하게 섞이며 속이 메스꺼워졌다.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대고 소리를 들어 봐도, 더 거세게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섞여 들었다. 그러면 결국 곤히 잠든 몸에 손을 대게 된다.

꾹 말려 있는 손가락 사이에 일부러 제 손을 집어넣고, 온기가 머문 손바닥을 느낀다. 코 아래를 맴도는 나언의 작은 숨결을 만져 보며 나언이 잠시 몸을 뒤척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래도 헷갈리는 날이면 결국 잘 자고 있는 나언을 흔들어 깨우기도 했다.

부스스 눈을 뜨고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나언은, 가엾게도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그저 잠에 얽혀 몽롱한 눈에는 어떻게든 기원을 이해해 보고자 하는 혼란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 착한 얼굴이 보기 싫은 날에는 자는 것을 포기했다. 졸듯이 자다 깰 때마다 불안에 가슴이 철렁이는 고통을 조용히 견뎌야 했다.

살아만 달라며 애원했었다. 하지만 나언이 눈을 뜨고 나니 욕심이 났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나언의 절망이, 기원에게는 기회였다. 도움 없이는 먹는 것도,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나언의 마음은 쥐고 흔들기 딱 좋을 만큼 말랑해져 있었다.

아픈 나언은 쉽게 의지했고, 몇 개월 사이 서서히 마음을 기댔다. 하지만 그건 연애 감정도, 그와 유사한 감정도 아니었다. 그저 도의적인 고마움, 계산 없는 착한 성격에서 비롯되는 인간적 호감 정도였다.

하지만 나언도 어렴풋이 눈치채 갔다. 최지원의 동생이 1년 가까이 곁을 지키고 간호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걸. 커다란 눈이 이따금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고, 아직 서툴면서 혼자 씻겠다며 욕실 문을 닫았다. 최지원의 기일에 맞춰 시름시름 아파 가는 걸 필사적으로 숨겼다.

그건 나언이 나아 가는 과정이었고, 기억을 찾았을 때 느낄 참담함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 기제였다. 기원은 그런 나언을 보며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

4월의 초입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른해지기 직전 복도부터 제법 소란스러운 기색이 비치더니 이내 병실 문이 열렸다. 나언은 문틈 새의 얼굴을 보고 눈썹을 끌어 올리며 옅게 웃었다.

정신과, 정형외과, 재활 의학과 교수진이 잠시 나언의 병실에 모였다. 한 것도 없는데 칭찬만 잔뜩 받은 나언의 얼굴은 다소 상기되어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오늘 나언은 퇴원 날짜를 정했다. 입원한 지 꼬박 1년이 흘러서였다.

모두가 병실을 떠나자 귀가 살짝 먹먹해질 정도로 조용해졌다. 나언은 침대에 앉은 채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2주 뒤의 퇴원 날짜를 보고서도 그렇게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병원 밖은 한 꺼풀 너머의 다른 세상으로 보였다. 그간 아픈 자신을 위해 모든 사람이 애쓰고 노력하는 삶에 익숙해진 것일까. 다 나았다며 축하해 주는 사람들에겐 감사할 일이었지만, 막상 바깥으로 나가게 될 나언은 막막하기만 했다.

‘염치없긴.’

볼을 살짝 부풀린 나언이 애써 고개를 저었다. 빌빌대던 체력도, ‘박살’ 났다는 말까지 들었던 간, 위장도 많이 회복됐다. 문제의 왼손도 가끔 경련이 찾아오긴 하지만 어느 정도 의지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이 정도면 소일거리라도 구할 수 있을 것이고, 보증금이 없는 작은 고시원에서 지내며 작게나마 저축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로 스물일곱 살이 됐다.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기에 여섯이라 우기고 싶은 스물일곱.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나이만 잔뜩 먹은 기분이었지만, 늘 운이 좋지 않은 인생이었다. 그러니 죽다가 살아난 이 정도 운이면 충분했다.

무언가를 하려 발버둥 치면 오히려 아프게 됐다. 예를 들면 주언이 때문에 처음 휴학계를 낸 날은 많이 울었다. 하지만 그 짓도 여러 번 하니 이내 덤덤해졌다. 희망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었다. 주언이를 책임지는 것에 익숙해지며 보통의 삶을 되찾기를 기대하지 않았기에 여태껏 잘 버텼던 것 같다.

그러니 퇴원 이후에 거창한 것을 할 기대는 애초에 접었다. 아픈 아이가 아니라 나를 챙겨야 한다는 것도 책임감이 덜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조금 더러운 곳에서 지내도, 좋지 않은 재료로 만든 인스턴트로 한 끼를 때우더라도 괜찮으니까.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싶었다.

흐드러진 벚꽃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나언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 나언의 등에 대고 기원이 말했다.

“무슨 생각 해?”

“아…….”

말끝을 늘이는 나언을 보며 기원이 다리를 꼬았다. 고개를 살짝 꺾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기원의 눈빛을 본 순간, 나언은 데자뷔처럼 어디선가 겪어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벚꽃이 화사하게 흩날리는 봄날, 서늘한 목소리로 건네진 다정한 질문. 하지만 알 수 없는 찝찝한 기분 때문에 나언의 말이 어설프게 꼬였다.

“나가서……. 뭐 하고 살지, 하는, 그냥 그런….”

나언의 계획에 자신은 당연히 없는 것을 보면서도 기원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직도 창살을 떼지 않은, 도어 록이 거꾸로 달린 나언의 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곳에 나언을 처박아 두고 지내고 싶은 생각은 여전했지만 이제 그럴 순 없었다.

바로 그 방에 딸린 화장실에서 나언이 스스로 손목을 긋고 약을 먹었던 순간이 함께하니까. 거긴 그 순간부터 시간이 멈췄으니까.

“그냥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무성의하고 느른한 대답에 나언이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별로 하고 싶은 것 없는 인생이란 걸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우문우답이 만든 어색한 상황을, 새로운 주제를 꺼낸 기원의 목소리가 환기했다.

“벚꽃 구경 가요.”

“…….”

“나랑 가기로 했었는데, 약속 안 지켰잖아.”

나언이 돌아보자 기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나언을 바라봤다. 그런 기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언의 얼굴에 언뜻 난처한 기색이 비쳤다. 그러다 뒤늦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곤 고개를 끄덕인다.

4월의 약속. 아직 떠오르지 않은 기억 속에 있는 마지막 조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영양제를 미리 맞고, 편한 옷과 운동화 차림을 했다. 차를 오래 타는 것은 처음이기에 미리 멀미약도 처방받았다. 나언은 틈틈이 손을 쥐었다 펴며 저린 손끝을 달랬다. 아무래도 병원 밖을 벗어나는 건 좋았다. 다행히도 날씨가 딱 좋았다.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나언은 기원의 차에 올라탔다.

올해 들어 바깥을 나갈 때마다 기원은 주언의 납골당을 꼭 들렀다. 가자는 부탁을 선뜻 하지 못하는 나언의 상태를 알기에 외출할 때마다 무조건 들렀더니, 이제 외출할 때만 되면 젤리를 하나씩 사서 병실에 들어왔다. 처음 주언의 납골당 안에 오래된 젤리가 들어 있는 걸 보고, 나언은 울면서 웃었다. 이거 주언이가 되게 좋아했던 거라고.

안전벨트 하는 것도 까먹고 젤리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나언에게 벨트를 대신 매어 줬다. 그러자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퍼뜩 움직임을 멈췄다. 어떻게든 사소한 불편함을 티 내고야 마는 나언이 밉지만 이젠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

주언이에게 다녀온 후, 차는 교외를 향했다. 작은 호수와 함께 벚꽃과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핀 풍경에 나언은 좀처럼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치기 이전에도 늘 저렇게 무언가에 시선이 팔리곤 했었다. 주차를 마친 기원이 조금 기다려 주고 나서야 나언은 천천히 상념에서 빠져나와 벨트를 풀었다.

기원의 사유지인 이곳은 일부 개방해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도 조성해 뒀지만, 호수의 남쪽으로는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가끔 머리가 복잡할 때 들르던 곳이다. 나언이 아픈 뒤로는 처음 찾았다.

가까운 곳에는 기원의 작업실도 있었다. 나언이 제일 크게 망가져 버린 곳. 여기까지 오면서도 나언은 기시감을 느끼지 못했는지, 그저 풍경에 넋이 나가 있었다.

그럴 만큼 아름다운 곳이긴 했다. 바람이 불자 꽃잎이 비처럼 우수수 쏟아졌다. 겨우 매달려 붙어 있던 제일 약한 꽃잎이 아래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며 나언은 눈을 조금 크게 뜨고 풍경을 담뿍 담았다.

그렇게 한참 서 있던 나언이 조금 지친 모양인지, 가까운 벤치에 먼저 앉았다. 기원도 옆에 앉자 잠시 몸을 굳혔다가, 이내 발로 흙을 애꿎게 뭉갰다.

“제 기억이 계속 돌아오지 않는데. 지치지 않아요?”

올려다보는 커다란 눈에 축축한 시선이 걸렸다. 기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순간에도 자신보다 기원을 걱정하고 드는 유순한 성정을 마주하자 심기가 뒤틀리려 했다.

동시에 유리 파편처럼 선명한 1년 전의 나언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울다 지쳐 멍해진 얼굴은 정원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나언은 그때와 비슷한 얼굴이지만 분명 달랐다. 별스럽게 지금의 나언이 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원래 저런 놈이었었지 싶은 담담한 깨달음뿐. 그러나 이제 손을 올릴 순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화가 나지도 않았다.

“별로.”

무덤덤한 대답을 남겼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는지, 나언은 다시 호숫가로 말간 얼굴을 돌렸다. 그늘 아래에 부는 바람은 제법 서늘했다. 머리카락이 차분한 머리카락을 흩뜨리고 지나가자 나언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이름을 부르면 쳐다본다.

바람을 느낀다.

봄볕에 귓불이 익는다.

그 사소한 행동에 나언이 살아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아니, 이제 화가 나더라도 화를 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기원은 나언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열을 쟀다. 찬 바람을 꽤 맞았더니 코끝이 빨개져선 계속 코 먹는 소리를 낸 탓이다. 다행히도 볕이 따스했던 때문에 늘 달고 다니는 미열 외에는 별다른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차 안에 히터를 틀자 공기가 금세 훈훈해졌고, 나언은 몸을 늘어뜨린 채 노곤함과 필사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차는 병원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갔다. 길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나언의 눈동자가 바빠졌다. 직장인들로 붐비는 지하철역에서 차로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네모난 빌딩이 많았다. 저쪽의 식당을 가는 걸까 하는 나언의 의문은 휙휙 풍경이 스칠 때마다 번번이 틀렸고, 방향을 가늠하기도 힘들 때쯤 기원의 차는 고층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조금은 거칠게 주차를 마친 기원은, 무언가 이상해 안전벨트를 쥐고 있는 나언의 손을 휙 떼어 내고 벨트를 풀었다. 샤락, 하며 말려 올라가는 벨트를 얼떨떨하게 보고 있는 나언의 하얀 뺨을 기원이 약하게 두드렸다.

“내려요.”

유독 낮은 기원의 목소리가 주차장을 울렸다. 느긋한 걸음 옆으로 나언의 불안한 걸음이 달라붙었다. 왜 이런 곳에 오는 것인지 묻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침묵을 깨기 힘들었다. 나언은 당혹에 살짝 하얗게 질린 채 그저 기원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엘리베이터에는 숫자가 가득했다. 어마어마한 높이를 엘리베이터 버튼으로 한 번 더 실감한 나언은, 기원의 긴 손가락이 중층을 꾹 누르는 걸 바라봤다.

‘집으로 가는 건가.’

귀가 멍해진 순간 엘리베이터가 중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복도가 나왔고, 그 길이와는 달리 정작 현관문은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검은색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기원은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고리를 열고 들어서자 눈앞으로 깨끗한 집이 펼쳐졌다.

생활한 흔적이 전혀 없어 마치 새집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든 가구가 다 들어서 있어 언제든 들어와 살아도 될 만큼 꾸며져 있었다. 최대한 흔하고, 눈에 띄지 않는 무난한 취향에 맞춰 인테리어를 한 것으로 보였으나 툭툭 눈에 걸리는 액자나 오브제, 가구들이 결코 범상치 않았다.

의식을 찾은 후 반년간 그와 함께하며, 나언은 기원의 직업에 대해 어렴풋이 눈치챘었다. 순백의 도화지 같은 집에 그의 숨길 수 없는 취향이 하나둘 보일 때마다, 이 공간을 기원이 마련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결국 먼지 하나 없는 복도 끝에서 차마 발을 더 들이지 못한 나언이 멈춰 서고, 먼저 걸어 들어가던 기원이 한발 늦게 멈춰 뒤를 돌아봤다.

“여기, 왜….”

나언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기원에게 물었다. 기원은 대답 대신 나언의 손을 가볍게 잡고 끌어당겼다. 나언은 그대로 거실 소파까지 끌려왔고, 푹신한 의자에 털썩 앉게 되자마자 옅게 헐떡였다. 기원의 속도를 맞춰 걷기엔 너무나 큰 집이었다.

나언은 기원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언이 숨을 고르는 사이 조용히 기다리던 기원은 본론을 천천히 꺼냈다.

“나언 씨도 많이 궁금할 거예요. 기억을 잃은 사이 있었던 일.”

나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히 기원에게 예전 일을 물었으나 기원은 별다른 대답을 들려주진 않았다. 근 1년간 함께 지내며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말을 먼저 꺼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평소처럼 여유 있고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그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묘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 때문에 죽으려고 했어요.”

놀란 나언이 고개를 들었다. 기원을 쳐다봤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늘한 그의 얼굴은 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나 때문에 나언 씨 인생이 시궁창이 됐거든요. 그래서 못 견뎌 했어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나언이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멀쩡한 손가락 굳은살을 뜯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손목을 가로지르는 이 옅은 흉터가. 기억을 잃은 사이에 생겼다던 몸의 수많은 흉터가 마주 앉아 있는 이 사람의 탓이라는 거였다.

전혀 모르겠다. 그래서 혼란스럽다. 사근사근하진 않아도 못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가끔은 호의가 불편하게 와닿을 정도였으니까. 엄지 옆에 결국 붉은 피가 몽글하게 맺힌다. 그 주변을 꾹 누른 나언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물었다. 아주 조심스럽고 겁을 먹은 목소리였다.

“그러면 그때…. 최기원 씨는 뭘 했어요?”

기원이 대답이 없자, 나언은 우물쭈물하다 멍청한 부언을 덧붙였다.

“그냥……. 지금처럼 대해 줬으면……. 그런 짓은 안 했을 것 같아서.”

그리고 나언의 작은 목소리에 처음으로 기원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마치 나언이 처음으로 도망간 것을 알게 되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기원은 재차 인정했다. 졌다, 영원히 이길 수 없다고.

잘못 판단했고 관계를 썩게 한 건 자신이었다. 그러나 모르겠다. 과연 시간을 되돌려 처음 만난 날로 돌아갔을 때. 나는 같은 말로 너를 위협했을까. 무릎을 꿇리고 자존심을 거세해 발을 핥게 했을까. 머리를 쓸어 넘긴 기원은 잠시 유리창 너머의 서울을 바라봤다. 창문 위로 그간 나언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났다.

한겨울, 처음으로 나언을 강간했다. 자주 아픈 것으로 윽박질렀더니 바닥에 토한 것을 애처롭게 긁어모았었다. 물이 가득 찬 세면대에 머리가 거꾸로 박힌 채 발을 동동 굴렀었다. 글자도 숫자도 잊어 가는 나언이, 조금 더 부서지길 바라며 웃음기 묻은 말로 거짓을 속삭였다.

“뭘 했냐고요? 나언 씨가 망가져 가는 거 구경했어요.”

어리석은 대답이었으나 가혹한 진실이었다. 쓰레기 같은 대답에도 표현적인 거부감만 느낄 뿐, 전혀 상처받는 표정을 짓지 않는 나언을 보며 기원은 다시 한번 나언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더는 나언의 곁을 지킬 이유가 없었다. 예전처럼 빚을 끌어다 나언의 발을 묶어도, 그저 이유 없는 폭력으로 짓눌러 기세를 꺾어도 될 일이지만 이제 기원은 그럴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놓고 나서도, 나언은 흩날리는 벚꽃 잎 아래에서 죽은 이의 이름을 불러 댔다. 다정한 손길에 흐리게 웃다가도 문을 닫고 손목을 긋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게 엉망이 된 백나언이 선택한 결말이었고, 그 끝을 알기에 반복할 수 없었다.

다시는 나언과 마주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다. 겨우 뛰고 있는 심장이 언제 멈출지 모를 때. 너무나 많은 피를 수혈받아, 의식을 차린다고 해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지만 힘들게 돌아와, 지금 우리는 마주하고 있다. 나언은 가끔 웃었고 은근하게 강했고 기어이 사람을 후회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나언이 이긴 것이다. 저 순해 빠진, 약한 놈이 자신을 이겨 먹었다.

나언의 사고가 있던 날로부터 1년이 흘렀다. 지금까지가 지지부진한 오늘이라면, 나언의 내일까지는 건드리지 않아야 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지내는 나언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빛이 생긴 눈으로는 어떤 세상을 보는지. 직접 보진 못하더라도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두는 것이, 나언의 청춘을 뺏은 값을 치르는 방법이었다.

기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열패감을 느낀 탓에 희미한 짜증이 올라오려 했다. 다소 거친 걸음으로 원목 수납장으로 다가갔고, 거기서 나언 몫의 물건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 뒀다.

툭툭 떨어지는 통장, 카드, 아파트 카드 키와 종이 뭉치를 바라보다 이내 자신의 얼굴이 담긴 신분증을 보곤 눈이 커졌다. 신분증으로 손을 뻗어 든 나언이 깜짝 놀랐다. 아주 옛날 아버지가 집을 나가기 전에 살던 작은 빌라가 아닌, 아까 들어오며 적혀 있던 아파트의 이름이 주소 칸에 적혀 있었다.

“쓰지 않아도 좋아요. 내 이기심으로 주는 겁니다.”

기원이 다시 소파에 앉았다.

“쓰기 싫으면 파란색 통장에 있는 돈 써요. 나언 씨 예전에 살던 곳 처분을 내가 했거든요. 그건 나언 씨 보증금입니다.”

기원의 말대로 파란 통장을 열자 초라한 액수가 덜렁 들어 있었다. 그 아래에 있는 다른 은행의 통장은 차마 들출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굳어 있는 나언을 묵묵히 지켜보던 기원이 말을 건넸다.

“기억이 돌아오게 되면 아마 날 잊긴 힘들 겁니다.”

“…….”

“차라리 지금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괴로울 거고.”

기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너무나 조용해서, 그 찰나가 나언에겐 너무나 크게 와닿았다.

“한 가지만 부탁할게요. 뭘 해도 좋으니까 죽진 마요.”

“…….”

“다 내 탓이니까 살아서 원망하라고.”

원망하라는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말간 얼굴을 보며 결국 기원이 웃었다.

이상하게도 처음 나언의 사진을 봤던 날이 기억났다. 이 모든 일의 발화점. 세차게 쏟아진 비처럼 다가온 나언은 아주 선명했고, 그 물기는 절대 마르지 않았다.

“운이 지독하게 나빠서, 내가 나언 씨를 좋아했나 봐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법한 작은 한숨을 내쉰 기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언의 물건들은 잘 챙겨 서랍장에 넣고, 아파트의 카드 키는 나언을 향해 내밀었다.

카드를 받아 든 손끝은 마른 피가 묻어 있었고, 하얗고 유순한 얼굴은 그저 주는 것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운이 좋지 않았다. 그건 기원 자신도, 나언에게도 모두 들어맞는 적당한 표현이었다. 우연히 그 자리에 네가 있어서, 준비 없이 쏟아진 비를 맞아 버린 건 너나 나나 똑같다고.

“아, 혹시나 해서 말할게요.”

“…….”

“나언 씨 냄새 안 나요.”

아무리 달큼한 바디 워시를 들이부어도, 나언의 체취는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세게 쥐면 부러질 것 같은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켜면, 사람의 가슴까지 저릿하게 만드는 순하고 은은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과거를 더듬다 이죽 웃는 얼굴을 멍하게 올려다보는 커다란 눈을 보며, 기원은 차마 마지막 말을 뱉지 못했다.

우리의 운이 아주 좋지 않은 날. 마치 소나기처럼 다시 조우하게 되면 좋겠다고.

다시, 다시.

***

나언과 기원 모두 그날의 외출을 잊은 것처럼 지냈다. 평소처럼 밥을 먹고, 마지막까지 예정된 재활과 상담을 성실하게 치렀다. 나언은 외출 이후 한 번의 악몽을 겪었고, 기원은 어느 시간에도 잠들지 않았다. 나언은 기원의 손을 잡는 대신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고, 그런 나언의 둥근 인영을 응시하며 기원은 밤을 샜다.

그리고 퇴원을 이틀 앞둔 날. 기원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가히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입원 이후 처음으로 나언의 꿈을 꾸지 않고 푹 잤다. 1년 동안 깊이 잠들지 못했던 것을 보상받듯 아주 선명하고 깊은 바다에 끊임없이 잠겨 드는 편안한 어둠 속에 몸을 내맡겼다.

“…….”

그래서 개운했다. 눈을 뜨는 아침이 상쾌했고, 코 밑으로는 그럴 리 없는 봄의 향이 치밀어 올랐다. 뇌에 낀 부연 장막 없이 오롯하게 맑은 시선으로 아침을 맞이한 기원은, 버릇처럼 나언이 있을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벚꽃 잎과 새로 돋아난 연둣빛의 잎사귀가 어지럽게 피어난 창문 너머로 햇살이 예쁘게 흩어지는 아침이었다. 그리고 기원의 느릿한 걸음이 점차 보폭을 줄였다.

나언의 병상은 비어 있었다.

모두 버리고 입원한 나언이었기에, 떠나는 날조차 흘레 벗은 병원복 하나만을 남겼다. 평소 늘 손을 뻗던 운동화를 신고, 가벼운 옷차림을 한 채 병원에서 뛰어나가는 약한 모습이 그려졌다. 굳은 표정을 풀고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병실을 둘러본 기원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지난 1년이 백일몽처럼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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