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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불면 (20/28)

외전 1. 불면

잊고 싶었지만 잊을 수도 없었다. 되찾은 기억은 깨진 파편이 되어 문득문득 나언의 삶을 침범했다. 모르고 밟아 베이기도 하고, 알면서 더 꾹 쥐어 결국 피를 보고야 하는 마음으로 그 기억을 곱씹기도 했다.

그와 처음으로 만난 지 만으로 4년이 흐르고, 어느새 5년 차에 접어들었다. 흐려질 것은 흐려지고, 덧그려진 것은 조금 더 거북한 기억이 되었다. 잊기 힘들 것이라는 기원의 말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은은하고 희미하게 기원의 기억과도 함께 살아야 했다.

만나고 오면 차라리 나을까 싶었는데, 웬걸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나언은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하며 깔린 요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거기까지 갔는지 모르겠다. 충동과는 거리가 먼 스스로가 저지른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생각하자 속이 갑갑해졌다. 긴 한숨을 뱉은 나언은 그대로 이마를 무릎에 묻고 눈을 감았다. 그냥 주언이한테나 갔다 올 걸 그랬나. 괜히 얼굴을 마주하자 가슴이 다시 따끔거리며 아파 왔다.

처음 자신을 보고 굳어 갔던 하얀 뺨, 그리고 맥없이 흔들리던 동공을 더듬으며 나언은 입술을 깨물었다. 손가락으로 낡은 이불을 꾹꾹 누르며, 가물가물해지려 하는 조우를 다시 떠올렸다.

충동적으로 찾았고, 시간을 내 달라는 기원의 말에 나언은 잠시 머뭇대다 고개를 끄덕였다. 후덥지근하게 목 끝을 괴롭혔던 더위는 시원한 자가용과, 적당한 온도로 유지되는 아파트에 머무는 사이 자취를 감췄다. 빨갛게 달아올랐던 나언의 귓불과 목덜미도 하얗게 식어 갔다.

주인이 찾지 않았던 보금자리는 여전히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오랫동안 비어 있어도 여전히 새것 같은 공간에 조심스럽게 자리 잡았다. 나언이 들르지 않던 사이 벽에 걸린 그림이나, 선반 위의 오브제 따위를 분기마다 바꾸었으나 정작 이곳을 한 번도 찾지 않은 나언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제 것이라고도, 또 편하게도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어색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나언은, 기원이 홈 바에서 능숙하게 마실 것을 준비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기원 역시 제 등에 따라붙는 시선을 느꼈으나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고,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음에도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며 테이블 위로 고인 물의 흔적에 시선을 고정한 나언은, 숨소리를 죽인 채 손톱 거스러미만 뜯었다. 기원은 나언의 버릇이 여전하다고 생각했다.

-마셔요.

기원의 권유에 그제야 검은 눈동자가 커피로 향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낯선 시선에 약간의 불안과 경계심이 깃들었다.

-뭐 안 탔는데.

딴에는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에 분위기가 더 딱딱해졌다. 기원도 말을 뱉자마자 예전에 했던 짓을 떠올렸다. 무슨 오기인지, 입매를 조금 굳힌 나언은 잔을 들어 커피를 조금 들이켜고 내려놨다.

기원은 마주한 나언을 살펴봤다. 봄꽃처럼 금세 사라져 버린 나언. 그 이후 같은 계절을 맞이할 때마다 상상으로 그리던 모습과 지금 나언의 모습을 겹쳐 보며 기원은 지금 이 순간이 망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거듭 곱씹었다.

나언은 여전했다. 목덜미의 흉은 매우 옅어졌으나, 그래도 눈여겨본다면 색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뜻 보이는 손목의 깊은 흉터도, 그리고 여전히 죽은 듯이 작게 숨을 내쉬고 자신을 원망하는 눈을 하고 또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런 사랑스러운 모습도 그대로.

조금은 후련한 기원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와 줘서 고마워요.

기원의 인사를 듣고도 한참을 가만히 있던 나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기원을 바라봤다. 석고상처럼 감정이 티 나지 않는 단단한 얼굴을 마주하며, 나언도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저는 잘 지냈어요.

나언은 준비했던 말을 뱉었다. 대화에 어울리지도 않고, 진실도 아닌 문장이었으나 다른 모든 것보다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잘 지냈다고. 나는 아픈 것 하나 없이 4년을 잘 지내 왔다고.

지옥 같은 나날들이었고, 죽었다 살아난 이후 망가진 몸 때문에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삶이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선 늘 약하고 어리석었다. 목소리 끝이 조금 떨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꽤나 단단한 척을 한 것 같다.

나언의 또박또박한 말투에 입매를 끌어 올린 기원은, 미소를 매단 채 나언을 지그시 응시했다. 나언은 잠시 기원을 바라보다 시선의 따가움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또 그렇게 침묵이 이어졌다. 다소 느린 동작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긴 기원은 담배를 꺼내 잇새에 물었다. 여전히 정수리만 보이고 앉아 있는 나언을 바라보며 기원이 말했다.

-난 계속 참았어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기원은 한숨과 함께 연기를 뱉었다. 나언이 사라지고 흘렀던 긴 시간이 담긴 문장이었다.

-항상 찾고 싶고, 놀라게 하고 싶고, 곁으로 데려오고 싶었어요. 물론 그 순간마다…. 끝내 참았고.

햇수로 4년 차를 맞았고, 꼬박 3년이 넘게 인내했다. 흐린 연기 속에서 나언이 고개를 들어 올리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연기와 함께 사라지던 숱한 망상과 달리, 지금 나언의 형상은 점점 또렷해진다. 기원의 입가에는 다시 웃음기가 묻기 시작했다.

-만지고 싶고, 안고 싶은 지금도 꽤 잘 참고 있고.

농담처럼 섞여 든 질 낮은 말에도 나언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다. 그 유순한 눈매를 보며, 기원은 방심하다 하얀 목덜미가 뜯겨 나가곤 했던 미련한 토끼 한 마리를 떠올렸다.

-백나언이 싫어하는 짓 안 하려면 계속 참아야지.

히죽 웃은 기원이 아직 많이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이제 습관이 됐네.

잘 지냈다던 나언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 돌아오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던 기원에게, 나언의 지금은 그저 기적이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 나언을 윽박지를 수도, 다음을 강요할 수도 없었다.

나언은 기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떠올리려 했으나, 어쩐지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아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기원이 타 준 음료는 손도 대지 않고, 침묵이 팔 할인 시간을 흘려보냈다. 호기롭게 찾아든 것은 나언이었지만, 질문은 기원만 했다. 뭐 하면서 지내냐는 기원의 질문에 음식점에서 일을 돕는 중이라 답했고, 어디 아픈 곳은 없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폭력과 증오, 우울과 망상이 전부였던 둘에게 주어진 일상의 시간은 다소 어색하고 버거웠다. 불편한 기색이 번져 가는 나언의 상태를 확인한 기원이 먼저 일어섰다.

-늦었어요. 데려다줄게요.

기원이 차 키를 들고 일어서는데도,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상념에 빠져 머뭇대던 나언이 한참 가만히 있다 입을 열었다.

-우린 뭘까요?

조그맣게 던져 놓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가만히 있는다. 기원은 나언의 머리를 열어 생각을 샅샅이 살피고 싶은 충동을 재차 인내했다. 기원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문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습관이라니까.

“…….”

어둑한 방 안에서 고개를 숙인 나언은, 기원과의 만남을 곱씹으며 무릎을 안고 있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줬다.

낮에 봤던 아파트와는 사뭇 다른 아주 작고 어두운 공간. 여름이면 눅눅한 공기가 장판을 타고 올라와 발이 찐득하게 달라붙는 이 좁은 방이, 그 깨끗하고 너른 아파트보다 훨씬 편안했다.

“습관…….”

나언은 반쯤 가라앉은 목소리로 기원이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그의 말이 맞았다. 최기원은 습관 같은 놈이다. 그것도 아주, 아주아주 나쁜 습관.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도 그건 잠시뿐. 일상 속에 스며들어 툭툭 튀어나와 하루를 흩트려 놓는 습관. 고쳐지지 않는 나쁜 습관은 한결같이 나언을 괴롭혔다.

그런데도 나언은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기원을 마주하고 하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그 역시, 잘 지내지 않았다는 것을. 묘하게 차오르는 안도감에 나언은 풀썩 몸을 뉘었다. 찝찝하면서도 억울한 밤. 이런 날에는 언제나처럼 악몽이 뒤따랐다. 나언은 밤새 피비린내 나는 꿈에서 허덕여야 했다.

***

장마가 끝나고 나자 날이 조금 선선해졌다. 관광객들이 조금 늘어나는 시기였다. 이런 때면 나언의 마음은 늘 이율배반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2년째 신세를 지고 있는 제 몫을 하려면 손님으로 붐비길 바라면서도, 아직 사람을 대면하기 버겁고 일에 서툰 상태를 생각하면 바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후자의 경우를 떠올리면 금세 자책하고 말았다.

오전부터 꽤 바빴다. 실수할까 마음 졸였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일이었고, 성수기에 접어들며 아주머니께서 함께 일해 주셔서 무난하게 넘겼다. 에어컨이 시원찮은 가게에 훈기가 가득했다. 쉽게 땀을 흘리지 않는 나언의 머릿밑도 꽤나 축축해졌다.

종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이 열렸다. 버릇처럼 ‘어서 오세요.’ 하는 말을 외친 나언은 문 아래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는 인영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비서 없이 가게로 들어온 기원이 아무렇지 않은 척 테이블에 앉았다.

돼지 국밥집에 자리 잡고 앉은 그 자체가 위화감 덩어리였다. 나언은 찌푸려지려는 표정을 얼른 정돈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왜, 왜 여기…….”

“뭘, 밥 먹으러 왔죠.”

여상한 기원의 말투에도 나언이 몸을 굳히고 서서 주문을 받을 생각이 없자, 기원은 주방에 있는 아주머니께 국밥 한 그릇을 주문했다. 나언은 의아한 낯으로 자신을 살피는 아주머니를 의식하고 얼른 물과 컵을 꺼내 와 기원의 앞에 내려놨다.

반팔 티셔츠에 면바지 차림이라 평소보다 편한 모습이긴 해도, 그는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역시나 밥 먹으러 왔다던 기원은 국밥이 다 식을 때까지 물 한 잔도 따라 마시지 않았다. 기원은 턱을 괴고 앉아 삼십 분간 나언이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남겼네.”

기원의 자리를 정리하는 아주머니가 그릇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행여 음식에서 돼지 냄새가 나나 싶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아주머니를 보자, 나언은 울컥 짜증이 일었다.

“…아주머니, 잠시만요.”

나언은 앞치마를 풀어 의자에 걸쳐 두고, 계산한 후 나가는 기원을 뒤쫓아 나갔다. 기원은 가게 앞에 주차한 차에 기대어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여름 끝자락의 선선한 바람이 기원의 머리카락을 얕게 흔들었다. 기원은 나언을 발견하고 눈썹을 끌어 올렸다. 기원에게 바짝 붙으려다 말고 한 걸음 물러선 나언이 그를 올려다봤다.

“뭐 하세요, 지금….”

“나언 씨 보러 왔는데.”

“그럴 거면 음식은 왜 시켰어요. 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손님 아니면 상종도 안 해 줬을 거고. 다 먹었으면 가라고 했을 거잖아요.”

남기니까 뚱해져서 쫓아 나오고선, 따지는 것조차 웅얼대며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언 역시 참으로 예상대로였다. 기원이 고개를 돌려 연기를 뱉으며 슬쩍 웃었다. 가게에 들어오기 전, 열린 창문으로 나언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핏자국이 엉겨 붙은 목덜미가 아닌, 땀에 젖은 뒷덜미가 제법 건강해 보였다. 늘 흐른 눈물에 짓이겨져 언제나 붉게 물들었던 눈꼬리도 예뻤지만, 후끈한 열기 때문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는 편이 나았다.

묻는 말에 대답 못 하고 더듬거리던 옛날과는 달리, 제법 옳은 소리를 하고자 하는 것도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기원은 나언을 한참 바라봤다. 무언가 더 말하려던 나언은 기원의 눈치를 살피다 대충 말을 줄였다.

“아무튼…. 그러지 마세요.”

그대로 뒤돌아 가게로 들어간 나언은 걸어 둔 앞치마를 다시 매고, 행주로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기원은 바다를 바라보며 담배를 마저 피웠다. 여기를 다시 찾기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나언과 저 사이에서 최악의 시간을 고르라면 아마 여기쯤이었을 것이다.

나언이 죽기로 결심한 때. 백주언의 상태가 나빠지고, 나언의 망상과 자해가 심해지던 무렵. 겉으로는 잘 지내는 척 굴었지만, 기원은 나언의 눈이 썩어 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상태가 좋았다. 맹목적인 순종과 반항 없는 몸짓이 기꺼웠고.

그러나 그때 저물어 가던 나언을 보듬어 주지 않았기에 결국 나언은 여기까지 도망쳤었다. 바다를 앞에 두고 울분에 차 엉엉 악을 지르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덜 고생스러웠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바닷가에서 끌려온 이후 나언의 상태는 심각해졌었다.

생각이 차츰 흘러간다. 액자를 깨고, 벌벌 떨고, 유리 조각을 훔쳐 홀로 손목을 긋고 그득그득 약을 집어삼켰던 것까지를 떠올리던 기원이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짓이겼다.

고개를 돌려 가게 안의 모습을 살피자 한산한 테이블에 앉아 땅콩 하나를 까는 나언이 보였다. 알맹이를 꺼내 입에 넣고 씹을 때마다 볼이 움직였다. 과거의 나언은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위태로웠지만, 그 태가 어디 가진 않는다.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기운이 묻어 있는 모습이 조금은 애처로웠다.

***

마감이 끝났다.

꽉 찬 쓰레기봉투를 꾹 밟은 후 단단하게 묶었다. 꽤 묵직한 봉투를 들어 올리는 순간, 왼 손목이 찌릿하며 아려 왔다. 툭, 무거운 소리를 내며 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좋은 병원에서 꽤나 오래 재활 훈련을 받았기에 그나마 이 정도라도 움직이는 것이었다.

자해 상처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날카로운 유리가 신경과 힘줄을 손상시켜 재활에 애써도 완벽한 복구가 어려웠다. 그나마도 도망을 치느라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며 치미는 통증은 약해졌지만, 무거운 것을 들거나 격하게 움직인 날에는 한참 끙끙대야 할 정도로 손목이 저렸다.

눈가를 잘게 찌푸린 나언은 손목을 두 번 털고 다시 봉투를 쥐었다. 가게 뒤편의 쓰레기장에 봉투를 놓고 나오는 길에 눈에 익은 차체를 발견하고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

낮에 봤던 기원의 차가 여전히 같은 위치에 서 있었다. 저러고 다시 서울로 간 줄 알았는데, 아직 떠나지 않았나 싶다. 혹시나 해 차로 가까이 다가가니, 진한 선팅 너머로 인영이 언뜻 보였다. 나언은 잠시 망설이다 차창을 두 번 두드렸다.

차 문이 열리고, 긴 다리가 땅을 디뎠다. 아까와 똑같은 차림의 기원이 나언에게 다가왔다. 나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번졌다. 낮에 잠깐 그가 가게에 들른 이후 여덟 시간이나 지났다. 설마 여기 계속 있었던 걸까. 예전에 비해 막무가내인 모습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그는 일방적이었다.

“저, 혹시 여기 계속 있었어요…?”

대답 대신 기원이 목을 좌우로 꺾자, 목에서 으득 하는 뼈 소리가 났다. 나언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멋쩍은 표정으로 손가락을 꿈질댔다. 저 멋대로 기다린 것인데도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착한 모습을 보며 기원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겨우 저거에 미안해한다니. 죽은 듯 깨어나지 않던 것도 6개월을 기다렸다. 속눈썹 하나가 흔들릴까, 옅게 오르내리는 가슴이 그대로 멈추지 않을까 하는 작은 변화를 미친 듯이 살피며 기약 없는 만남과 헤어짐을 동시에 준비하던 때도 있었다.

그거에 비하면 이 정도 기다림은 아무렇지도 않다. 아니, 오히려 나언을 기다리는 동안 흘러가는 시간을 가늠하기도 어려울 만큼 나언의 모습에 취해 있었다. 꽤나 오랜만에 보는 생기 있는 움직임이었고, 낯선 집에 갇혀 시들어 가던 때와 비교하면 기적과 같은 순간도 몇 있었다.

손님도 없는 가게에서 이리저리 할 일을 먼저 찾아내 움직였다. 저녁이라고 아주머니가 가져온 음식도 나름 열심히 먹는데, 워낙 입이 짧아서인지 들인 시간에 비해 먹은 양은 성인 주먹만큼도 안 되어 보였다. 그래도 무언가를 입에 넣고 씹고 편하게 넘기는 모습이 기특해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그러다 저녁엔 주로 티브이 앞에서 농땡이를 피웠고, 손님이 끊긴 후엔 불을 어둡게 하고 청소를 시작했다. 꽤 묵직해 보이는 쓰레기봉투를 낑낑 들고 나오더니 떨어뜨리고, 특유의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손목을 툴툴 털었다.

다만 여전히 손목을 아파하는 모습에 기원의 눈도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기원은 그렇게 차 안에서 턱을 괸 채 나언을 비스듬히 살폈고, 나언은 때마침 부는 밤바람을 맞으며 잠시 머리를 식혔다. 그러다 차를 발견하고 주춤 움직임을 멈춘 나언의 멍한 낯이 난처한 얼굴로 변했다. 유리 앞까지 걸어와 안을 슬쩍 들여다보는 눈은 어둠에 물들어 먹처럼 까맸다.

그 태와 광경 하나하나에 지루할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기원은 서늘하게 찢어진 눈을 살짝 접어 웃으며 마주 서 있는 나언을 향해 가볍게 물었다.

“퇴근했어요?”

“네. 끝났어요.”

할 말은 없고, 그렇다고 기원을 내치지도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나언이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큰 눈으로 기원을 슬쩍 올려다보며 조그맣게 물었다.

“왜 안 가세요?”

“늦어서요.”

“아…. 늦어서.”

역시나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화법에 나언은 기원의 말을 괜히 중얼거리다 끝내 입을 닫았다. 생각이 길어졌다. 밤이 늦었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고. 하지만 그건 기원의 사정이니 이대로 모른 척 뒤돌면 되는 건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찝찝한 상황. 어두운 밤에 서울까지 운전을 해야 하는 기원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잊고 있던 지원이 형의 사고도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나언아, 뭔 일 있나?”

그때 어색한 침묵을 가르고 멀리서부터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언이 들어오지 않아 1층으로 내려갔더니, 내일 자신이 버리겠다고 한 쓰레기를 굳이 나언이 버리러 나간 것을 확인한 것이다. 손목이 약한 것을 알기에 서둘러 따라 나온 뒤에야 나언이 낮에 봤던 손님과 마주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개를 돌려 아주머니를 살핀 나언이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기원을 두고 아주머니가 계신 가게 문 앞까지 털레털레 뛰어갔다. 진지한 얼굴로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기원에게로 쭈뼛대며 다가왔다. 숨이 가쁜지 옅게 흩어지는 숨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렸다.

“그…….”

기원을 슬쩍 쳐다보더니 손을 들어 뒤편의 조그만 가게를 엄지로 가리켰다.

“주무시고 가실래요?”

아주머니가 돌아가기에 늦었다고…. 들릴 듯 말 듯 중얼대는 걸 보며, 기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께 고맙다는 말도 남겼다. 그렇게 다시 기원의 앞으로 팔팔 끓인 국밥 한 그릇이 놓였고, 이번에는 그 그릇을 남기지 않고 비워 냈다.

***

아주머니는 빈 그릇을 치우더니 둘이서 이야기 더 나누라고 하고 자리를 피해 줬다. 기원에 관해 이것저것 묻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주머니는 푹 쉬라는 말만 하실 뿐이었다. 예전, 죽을 결심을 하고 넋이 나가 있었을 때도 아주머니는 자신을 묵묵히 위로해 줄 뿐 자세한 이유나 감정을 묻지 않았었다. 나언은 아주머니의 그런 무심한 다정함이 참 좋았다. 아주머니가 2층으로 올라간 후, 나언은 여전히 식탁에서 일어나지 않는 기원에게 물었다.

“…뭐 더 드실래요?”

“술 한잔해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언이 술을 담아 두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기원이 좋아하는 와인이나 위스키 같은 종류는 없었다. 나언은 차가운 맥주와 소주 하나를 꺼내 들고, 잔도 두 개 챙겨 쟁반에 담았다.

하나씩 조심스레 테이블에 내려놓은 나언이 다시 의자를 당겨 앉았다. 기원은 나언이 순순히 곁을 허락하고 자리를 내어 주는 게 참 물러 보였다. 복수는커녕, 매몰차게 돌려보내지도 못하는 저 착한 미련, 그게 늘 스스로의 운명을 망쳐 놓는 걸 모르는 나언이 순진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놈에게 지나치게 굴었으니, 아프고 괴로웠겠다는 걸 재차 인정했다.

“…….”

술만 휑뎅그렁 놓인 테이블을 보던 나언이 잰걸음으로 주방으로 건너갔다. 냉장고를 열어 안을 살피다 우유와 계란을 꺼냈다. 기름을 두른 팬에 계란을 대충 둥글려 볶고, 우유를 조금 더 넣어 다시 끓여 왔다. 걸쭉한 스크램블드에그는 나언이 꺼내 놓은 소주나 맥주와는 어울리지 않는 안주였지만, 기원은 별말 없이 술병을 돌려 까 잔에 나눠 담았다.

멋쩍게 잔을 만지작대던 나언이 소주를 한 입 마시고 얼른 스크램블드에그를 한 입 퍼 입에 넣었다. 기원도 한 잔을 마신 후 숟가락으로 안주를 떠 넣었다. 소금이고 뭐고 전혀 간을 하지 않아 삼삼하기만 한 요리였으나, 못 먹을 정돈 아니었다.

“손목. 치료받는 게 낫겠는데.”

침묵 속에서 수저질만 오가던 중, 기원이 불쑥 생각했던 것을 뱉었다. 3년 전 퇴원했을 때에도 나언은 물리 치료를 더 받아야 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병원에서 도망친 나언이 알아서 치료를 챙겨 받았을 리는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무거운 냄비를 나르고, 손목이 시큰해지도록 일을 하고, 통증은 예의 무딘 얼굴로 몇 번 털어 넘기고 말았을 것이다.

기원의 말에 나언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손목을 가로지르는 선명한 자상을 보며 술기운에 몽롱해진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예전의 잔상이 빠르게 떠올랐다. 약 기운에 취해 손목을 내리그었던 건 자신이었다. 업보이기에 이 정도 통증은 그러려니 하고 지내고 있었다.

“괜찮아요.”

작게 대꾸하곤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나언의 표정을 읽은 기원도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기원은 맛없는 스크램블드에그를 한 냄비 다 먹었다. 기원이 팬에 남은 마지막 한 입을 숟가락으로 퍼먹을 때, 나언은 저도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먼저 일어난 기원이 냄비에 잔과 수저를 담고 망설임 없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제, 제가 할게요.”

그러나 기원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바로 물을 틀어 그릇을 적셨다. 아주머니의 키에 맞춰진 주방은 모든 게 다 작았다. 나언에게도 협소한 공간인데 특히나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훨씬 더 큰 기원에게는 더 불편할 것이다.

기원이 허리를 살짝 굽히고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보며 나언은 얼른 커다란 등 뒤로 따라붙었다. 등 뒤에서 그냥 두라고 말했지만, 기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설거지를 끝내고 식기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나언은 저를 지나쳐 먼저 주방을 나가는 기원을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기원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닦으며 나언이 나오길 기다렸다.

기원은 나언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자그만 식당이던 1층과는 달리, 2층은 일반 가정집으로 꾸려져 있었다. 토테미즘을 믿는 것 같은 잡다한 잡동사니가 많은 조잡한 집이었다. 매끄러운 나무 타일을 밟으며 집 안으로 들어가자, 반쯤 열린 나무 문 틈으로 작은 방이 보였다.

칠이 벗겨진 황금색 문고리를 잡은 나언이 빠른 걸음으로 방에 들어가 바닥에 뒹구는 옷을 주워 옷장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코드를 뽑아 둔 선풍기를 연결하자, 털털대는 소리를 내며 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낡은 선풍기는 한여름의 눅눅한 공기를 밀어내는 게 전부일 뿐 딱히 제 역할은 하지 못했다.

나언은 민망한 표정을 애써 감췄으나 조그만 귓가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최대한 태연한 척 서랍을 열어 칫솔을 꺼내 기원에게 내밀었다.

“화장실에 클렌징 폼 있고요, 이건 새 칫솔…. 수건은 화장실 선반에 있어요.”

화장실에 가 세수와 양치를 한 기원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배턴 터치를 하듯 나언이 화장실로 가자, 기원은 조그만 방에 홀로 남게 됐다. 한번 고개를 돌리면 눈에 전부 담기는 작은 공간은 나언을 닮아 청결했다. 손끝이 야무지지 못하지만 기본적으로 깔끔한 성격을 닮은 방이었다. 옷가지가 조금 흐트러진 것 말고는 먼지 하나 없었다. 물건을 제자리에 두진 못해도 틈틈이 쓸고 닦는 것은 했던 모양이다.

낡은 방의 이곳저곳에서 나언의 흔적이 있나 살펴보던 기원의 시선이 선반 위에서 멈췄다.

나무 선반 위에는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2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은 흔한 얼굴이었고, 눈썰미가 좋은 기원은 사진 속 젊은 남자가 아주머니의 콧대와 입매를 닮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뜨거운 물에 세수를 해 볼이 빨갛게 익은 나언이 뒤늦게 방에 들어왔다. 기원이 선반 앞에 서서 액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걸 보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나언은 기원이 어렴풋이 예측했던 것과 비슷한 설명을 했다.

“아……. 여기 아주머니 아들 방이에요. 돌아가셨대요. 예전에.”

나언조차도 작년, 제사를 준비하며 들은 이야기였다. 자신 또래의 아들이 있다고는 들었었지만, 그 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위태로웠던 자신을 발견하고 조금이라도 더 살도록 붙들었던 것이 어쩌면 흔한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사고로?”

“아뇨. 힘든 일이 있었나 봐요.”

견디지 못해 죽기를 결심하는 과정을 겪어 본 나언과, 그것을 고스란히 지켜본 기원은 잠시 같은 시기를 생각했다. 나언의 담담한 설명에 기원은 말을 아낀 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사정이야 안타깝지만, 솔직히 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좁은 방에서 낯선 남자의 사진을 발견했을 때, 건강하지 못한 사고방식은 금세 나언과 저 남자가 함께 방을 나눠 쓰는 엄한 생각으로 흘러갔었다. 이런 망상까지 들켰다간, 나언이 두 번 다시 자신을 보지 않을 테지만, 뭐 어쩌겠는가, 속으로만 생각했을 뿐. 기원은 눈썹을 끌어 올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언은, 은근히 가라앉은 기원의 눈치를 살피며 로션을 짜 얼굴에 문질렀다.

“불 끌게요….”

이미 바닥엔 기원 몫의 침구가 가지런히 꺼내져 있었다. 침대도 뭣도 없는 커다랗고 널찍한 요 위에, 짝이 맞지 않는 베개와 이불이 하나씩 더 놓였다. 나언이 불을 끄고, 기원은 두 개의 이불 중 나언의 체취가 조금 더 짙게 느껴지는 쪽에 편하게 누웠다. 나언은 하필 기원이 제 이불에 자리 잡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티를 내지 못하고 그 옆에 조심스레 몸을 뉘었다. 기원에게서 등을 보인 채, 몸을 살짝 웅크려 조금 더 거리를 벌렸다.

“…….”

실은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어쩌다 최기원이 가게에서 저녁을 먹고 제 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있는지. 아까 어색함에 연속으로 들이켠 소주가 아니었다면 아마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만큼 마음이 이상했다.

그래. 이상하다, 기원과 저는 참으로 이상하다. 무뎌질 법도 한데, 여전히 썩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의 주변에서 쳇바퀴를 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동질감과 허무함이 나언의 작은 가슴 속에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기원은 점점 편안해지는 나언의 숨소리를 잠자코 들었다. 죽은 듯 웅크린 나언은 잠에 빠진 후에도 몇 번씩 몸을 뒤척였다. 완전히 깨지는 않으면서도, 어딘가 불편해 깊게 잠들지 못한 듯 보였다. 그러기를 몇 시간, 결국 나언은 손으로 이불을 꾹 쥔 채 기원의 쪽을 향해 눕게 되었다.

눈을 느리게 깜박인 기원도 나언의 쪽으로 완전히 돌아누웠다. 팔뚝을 겹쳐 그 위에 뺨을 대고, 나언의 동그란 입술과, 뾰족한 코, 도톰한 입술의 곡선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

견물생심. 갈수록 욕심이 났다. 참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왔던 기원의 삶은 나언을 만나고 나서 쌓인 징벌을 받듯 바뀌어 버렸다. 기다리다 얼굴을 보니 말을 섞고 싶고, 목소리를 들으니 만지고 싶다. 당장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희고 작은 얼굴은,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 할수록 더욱 하얗고 선명하게 보였다.

눈을 감고 죽은 듯이 자는 인영. 시간이 무색할 만큼 흘렀지만, 그 유약한 태는 똑같다. 기원은 자는 나언을 한참 동안 응시하며, 혼수상태였던 나언을 새벽녘 내내 바라보던 날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나언을 그리다 취기를 빌려 잠시 눈을 붙인 기원은 작게 헐떡이는 소리에 미간을 옅게 찌푸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이상한 기색을 깨닫고 퍼뜩 몸을 일으켰다.

“……흐, 윽.”

나언이 흐느끼고 있었다. 몸을 파르르 떨며 몸을 둥글게 말고 이불을 끌어안은 나언은 잠결에 칭얼대는 소리와 섞인 울음소리를 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잇새로 새어 나오는 울음이 조용한 방 안을 자그맣게 울렸다. 어둠을 품은 기원의 눈동자가 점점 어둡게 가라앉았다.

-저는 잘 지내요.

나언이 꼭꼭 씹는 듯한 발음으로 했던 말이었다. 단정한 표정으로 뱉은 말을 물론 믿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기원은 나언의 추락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기원과 떨어져 지낸 3년. 나언은 그 시간 동안 과거의 아픔을 조각내 조금씩 삼켜 왔으나 사라지기엔 너무나 선명한 상처였다. 그리고 끝내 낫지 못한 상처는 어둡고 조용한 밤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벌어져 피를 흘려 댔다.

기원은 나언에게 다가갔다. 나언이 구명줄처럼 쥐고 있는 이불을 빼낸 후 비스듬히 누워 나언의 머리 아래를 받치고, 등을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악몽에 짓눌린 나언은 얼굴을 단단한 가슴팍에 묻으며 더 깊이 안겨 왔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어깨를 그러쥐고 마른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렇게 괴로움에 못 견뎌 매달려 오는 나언을 보며, 기원의 서늘한 표정에 묘한 기색이 스며들었다.

“쉬…. 그래.”

못된 성격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언이 저 때문에 상처받았던 과거 때문에 처절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그 악몽에 힘겨워도 안겨 들 품이 자신뿐인 그 고립이 좋았다. 어떤 방법이든, 의식 속이든 무의식 속이든 아직 기원은 잊히지 않았다.

“그래, 괜찮아.”

악몽에 짓이겨진 나언의 사고로는, 지금 제가 쥐고 매달리는 무언가가 실재하는 사람인지, 꿈속의 기원인지, 낡은 이불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저 저를 보듬어 줄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할 뿐.

어디선가 맡아 본 싸한 향기와 단단한 품속에서 일렁이던 벌레와 피 냄새, 구역질 나던 감각이 조금씩 무뎌졌다. 쪼그라든 폐부에서 새어 나오던 불규칙한 숨소리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눈물에 젖어 무거워진 눈동자는 결국 떨어지지 않은 채 더 깊은 수면으로 나언을 끌어당겼다.

나언이 밤마다 새로이 겪는 고통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음습하고 진득했다. 끊이지 않는 악몽에 허덕이다 눈을 뜨면, 밤새 괴롭혔던 꿈의 내용은 휘발되고 빠르게 뛰는 심장과 전신을 뒤덮은 불쾌한 식은땀만 남을 뿐이었다.

그렇게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새벽빛이 비스듬히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원은 제 품에서 땀을 잔뜩 흘린 채 잠에 빠져든 나언을 끌어안았다가, 뺨에 입술을 묻어도 봤다. 꾹 닫힌 눈꺼풀과 살짝 벌어진 입술, 코 아래에서 흩어지는 온기가 사랑스러웠다.

나언은 평소보다 조금 더 답답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제가 기원의 팔 아래에서 웅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퍼뜩 몸을 물렸다. 깜짝 놀라 큰 눈으로 기원을 올려다보자, 기원은 이미 깨어 있었는지 밝은 회색의 눈동자로 그런 나언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잘 잤어요?”

기원의 물음에 나언이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곤 몸을 일으켜 앉았다. 뒤늦게 현기증이 일며 탈력감이 몰려들었다. 불면은 오래 이어진 고질병이었다. 언제나 푹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기에, 이 정도의 불쾌감은 익숙했다. 그나마 어제는 조금 마신 소주 덕분에 완전히 깨지 않고 아침을 맞이했다. 나언은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멋쩍은 대답을 남겼다.

“…네.”

“저도요.”

마찬가지라는 답을 남긴 기원이 웃었다. 남해에 온 후 나언이 처음으로 마주한 기원의 밝은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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