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1) 나락
미닫이문을 열고 섣불리 아스팔트 위를 내디딘 나언이 잘게 뒷걸음질을 쳤다. 예고 없이 비가 내렸다.
장마는 끝났다고 했는데. 덜 잠근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는 것처럼 간헐적으로 내리는 비였다. 빗방울이 크지도, 무겁지도 않았지만 우산은 써야 할 정도다. 나언이 입구 옆 작은 통에서 우산 하나를 꺼내 펼쳤다.
가게 뒤편의 쓰레기장에서 바닷가 쪽으로 옴폭하게 들어간 수풀 아래. 조심스럽게 물이 든 그릇과 사료 그릇을 내려놓자, 박스 안에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손바닥 아래로 걸어온 고양이가 자그만 얼굴을 비비는 순간, 나언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고양이의 눈 옆에서부터 뺨까지 길게 찢어진 상처를 발견한 탓이다.
나언은 제 손에 폭 안겨 오는 고양이를 약하게 부여잡고, 상처를 꼼꼼하게 살폈다. 생채기와 그 주변 털에 아직 덜 마른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안 아파? 언제 다쳤어.”
혼잣말처럼 묻는 질문 끝, 나언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쳐졌다. 날카로운 발톱에 긁힌 걸 보니, 주변을 맴돌던 고양이와 다툼이 있었던 듯했다. 아프지도 않나, 고양이는 꼬리를 바짝 세운 채로 손아귀에 더 깊이 파고들 뿐이다. 작은 머리통부터 꼬리 아래 엉덩이까지 쓰다듬은 나언은 작게 한숨을 뱉으며 엉덩이를 톡톡톡 두드렸다.
“상대가 안 되는데 왜 자꾸 덤벼.”
나언의 물음에도 ‘애옹’ 하는 소리를 낸 고양이는 뒤늦게 사료 그릇에 코를 박고 알갱이를 씹어 먹었다. 조그만 몸으로 새끼들까지 돌보고 있으니 예민한 것은 이해한다만. 벌써 몇 번째 덤볐다가 다친 건지 모르겠다. 나언은 쪼그려 앉은 채,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어미 고양이를 응시했다.
가게에서 내놓은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뜯어 놓는 길고양이를 보고, 조금씩 캔을 뜯어 주던 것이 이 주 전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길냥이 가족은 밥을 몇 번 챙겨 준 나언을 덥석 믿고 무작정 터를 꾸렸다.
문제는 주변에 오고 가는 다른 고양이 무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언이 가져다 놓은 사료 때문에 자꾸만 다툼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조그맣고 마른 녀석은 상처를 달고 나타났다. 악다구니는 있는지 굴러들어 온 돌 주제에 밀려나지 않고 있지만. 쪼끄마한 몸에 상처를 달고 올 때면 가슴이 철렁였다.
금세 밥그릇이 텅 비었다. 주위에 어슬렁거리는 놈들을 대비해 넉넉하게 담았는데, 나눠 먹기 싫은 모양이다. 그득그득 혼자 다 먹어 내는 고양이를 보자 결국 피식, 웃음이 샜다. 힘내서 먹는 걸 보니 어떻게든 살아남을 아이였다. 배가 불러 나른해진 고양이는 비를 피해 상자 안쪽으로 편하게 자리를 잡고 반쯤 드러누웠다.
상자 안에서 어미를 기다리던 고등어 무늬를 빼어 닮은 새끼 고양이 두 마리도 어미 품으로 다가가 몸을 바짝 붙였다. 분명 처음엔 세 마리였는데 하나는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처음에는 이 주먹만 한 아기들 때문인지 선뜻 나언을 향한 경계를 풀지 않았는데, 이제는 공동 육아라도 하는 듯 엉덩이까지 쭉 내밀고 두드려 주길 바란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울 순 없는 나언은 엉덩이를 빠르게 토닥여 줬다.
시간이 갈수록 빗줄기가 꽤 굵어졌다. 수풀 아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비가 내렸다간 종이 상자가 젖을 것 같다. 잠시 고민하던 나언은 쓰고 있던 검은 우산을 수풀에 걸쳤다. 제가 가져다 놓은 라면 상자 대신, 시내에 나가 번듯한 플라스틱 상자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나언이 움직일 때마다 솜털이 부숭하게 난 녀석들이 고개를 빼고 나언의 동태를 살폈다. 태평한 것은 상처를 달고 있는 어미뿐이다. 나언이 손바닥을 들어 인사한 후, 조금 빠른 걸음으로 뒤돌았다. 어느새 머리카락과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가게 쪽으로 가까이 오자마자 익숙한 차체가 보였다. 남해의 조그만 시골에선 너무나 튀는 외제 스포츠카. 잠시 고양이에게 다녀오던 사이 기원이 도착한 모양이다.
“…….”
눈이 마주치자, 비에 젖은 나언을 발견한 기원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등장한 탓이다. 보폭을 넓혀 성큼성큼 걸어온 기원이 우산을 기울여 나언에게 씌워 줬다.
“굳이 왜 비를 맞고 다니지?”
말하기 직전, 얼굴을 비스듬히 돌려 연기를 흘렸으나 모두 뱉지 못해 입술 새로 희뿌연 연기가 번졌다. 동그란 우산 아래로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은은한 물비린내가 났다. 매캐한 담배 냄새까지 섞이자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향기가 났다. 왜 이러고 다니냐는 최기원의 질문에 나언은 그냥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고양이다 소나기다 뭐다 설명하기 뭣했다.
잠깐 사이 더 거세진 빗줄기 때문에 나언의 뺨과 팔뚝으론 맺힌 빗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몸도 조금 추웠다. 하얗게 뜬 뺨과, 점차 보랏빛으로 얼어 가는 나언의 입술 색을 흘긋 살핀 기원이 우산을 나언의 손 쪽으로 내밀었다. 얼결에 우산대를 받아 들자, 재킷을 벗은 기원이 그걸 나언의 어깨에 둘러 줬다. 섬세하지 못한 손길이 닿을 때마다 마른 몸이 맥없이 휘청였다.
코앞이 가게라 그냥 들어가면 되는데. 젖은 몸에 비싼 외투가 닿는 것이 괜히 찝찝해 옷을 벗어 들려 하자, 기원이 먼저 성큼성큼 가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원의 머리카락과 검은 반팔 티셔츠 위로도 후드득 빗줄기가 쏟아졌다. 눈을 크게 뜬 나언이 허둥지둥 기원과 걸음을 맞췄다. 열심히 팔을 뻗으니 겨우 세 걸음 정도 우산을 씌워 줄 수 있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기원이 보이지 않는다. 얌전히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기원에게 수건이라도 건네주려 하나를 집어 들고 나왔는데 2층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채 1층으로 내려가자, 기원은 이미 식탁에 앉아 할아버지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배알도 좋네.’
이상한 부분에서 붙임성이 좋은 기원은 시간이 날 때마다 남해를 향했다.
처음 이곳에 오고 약 사흘 뒤. 두 번째로 기원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언은 큰 눈을 더 크게 떴을지언정 처음처럼 당황해 얼을 타진 않았다. 세 번째엔 저녁 늦게 도착한 기원에게 자연스레 방을 내 줬고, 처음으로 할아버지도 만났다.
지원이 형과 주언이까지. 기원은 자신의 사람에게 늘 날 서게 굴었었기에, 행여 할아버지와 아주머니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면 당장 내쫓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기원은 의외로 모나지 않게 굴었다. 물론 행동이 어른 앞에서도 묘하게 예의에 어긋난, 느른한 태를 품고 있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어른들께 호의적이었다.
기원도 충분히 알고 있다. 이 부녀가 나언에게 유일하게 남은 ‘섬’ 같은 사람들이라고. 나언은 이 사람들에게 적을 두고 살아 보려 애쓰는 중이기에 제 성질대로 할 순 없었다. 그들이 묻는 말에 성실히 답했고, 답하기 애매할 땐 모호하게 웃고 말았다.
“어 나언이 왔나. 와서 얼른 먹어라.”
수건을 쥔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나언을 할아버지가 먼저 발견했다. 할아버지의 알은체에 기원도 고개를 돌려 나언을 바라봤다. 머리카락이 간질거리게 닿는 귓바퀴가 뜨거운 물에 푹 익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샤워를 하고 곧장 온 나언에게서 물기 어린 단내가 물씬 풍겼다. 급하게 씻었는지, 다 닦지 못한 물기가 머리카락에서 어깨로 뚝뚝 떨어졌다.
“여기, 수건이요. 옷 닦아요.”
기원은 나언에게 수건을 건네받아 젖은 머리와 어깨를 대충 털었다. 그렇게 할아버지, 아주머니와 함께 저녁을 먹던 중 할아버지가 불쑥 입을 열었다.
“니 나언이 친구 맞나.”
도망간 나언을 데리러 온 기원을 바닷가에서 마주한 적 있는 할아버지였다. 나언이 기원을 어려워하는 기색을 눈치챈 할아버지가 기원을 곱지 않은 눈초리로 살폈다. 기원은 할아버지를 빤히 바라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요.”
이내 서늘한 눈동자가 나언을 훑는다. 숟가락을 움켜쥐고 움직임을 멈춘 나언을 살핀 기원은, 시원한 입매를 길게 찢으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중입니다. 보시다시피.”
“하이고. 점마가 괴롭히는 거 아이가.”
“할아버지, 점마…라니요….”
이번에는 난처한 질문이 나언에게로 떨어진다. 기원은 그 대답 또한 궁금한지, 다시 한번 스륵 눈동자를 굴려 나언을 쳐다봤다. 대충 손을 저은 나언은 결국 당황해 사레가 들고 말았다. 목이 시뻘게질 정도로 쿨럭대는 나언에게 아주머니는 웃으며 물을 떠다 줬다. 나언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식탁 위의 공기는 급격하게 어색해졌고, 어정쩡한 식사 자리에서 애꿎은 빗소리만 처량하게 울렸다.
“아, 이번에 가습기랑 제습기도 고마워요.”
아주머니의 감사 치레에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가습기와 제습기는 최근에 기원이 아주머니의 집에 설치한 가전이었다. 장마를 치른 이후, 나언의 방에 조금씩 번져 가는 곰팡이 자국을 유심히 바라보던 기원이 비 예보를 보자마자 주문을 넣었다.
회사 일이 바쁠 때는 굳이 자지 않고 나언만 잠깐 본 후 서울로 올라가기도 했고. 어떤 날은 꽤 오랫동안 머물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아주머니의 집과 나언의 방에는 기원이 가져다 놓은 변화가 생겨났다.
에어컨과 공기 청정기, 스타일러 등 새 가전이 방마다 설치된다거나, 나언의 방을 가득 채울 만한 침대가 들어선다던가. 어느 날은 기원이 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인부들이 들이닥쳐 화장실 전체를 리모델링했다.
나언은 자꾸만 제 공간에 침투하는 기원이 불편했다. 제대로 선을 긋지 않으면 기원이 언제건 과거처럼 자신을 제멋대로 휘두를 것만 같아 두렵기도 했다.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한 채 대리석 마감이 된 화장실을 응시하는 나언에게, 아주머니가 조심스레 다가왔었다.
-이런 거 받기만 해도 되는 거가?
-……예?
비용적인 부분은 당연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 차에, 아주머니의 질문에 짐짓 당황했다.
-걱정 마세요. 그 사람 돈 많아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 자꾸 오는 남자. 세원 그룹에 최기원 아니가. 최지원이 동생.
아랫입술을 말아 문 나언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까만 눈동자는 조금 흔들렸지만, 나언은 건조한 목소리로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 사람 맞다고. 은근한 궁금함과 걱정을 숨긴 아주머니가 목뒤를 주물대며 멋쩍게 웃었다.
-나언이랑 그런 사람이랑 친하다니까 참말로 신기하네.
-안 친해요. 그냥 아는 사이예요.
-그래. 어쨌든 고맙다고 꼭 전해 줘.
아주머니의 반응은 거기서 끝이었다. 가타부타 아는 체 말아 달라 하지 않아도, 아주머니는 어디 가서 말씀하고 다닐 성정이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며 합리적인 의심을 확인한 아주머니는 기원에게조차 전혀 알은체하지 않았다. 세원 그룹의 최기원과 나언이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건지 솔직하게 조금은 궁금했지만, 굳이 나서서 말하지 않는 나언의 상황 또한 존중하기로 했다.
“다 먹고 편하게 쉬다 가요.”
비 오는 저녁, 밤눈이 어두운 할아버지를 배웅하기 위해 아주머니가 먼저 일어났다. 가게 문이 닫히자 정말로 숨 막히는 정적만이 남았다. 둘만 덩그러니 앉은 식탁 위에서 기원은 마저 제 몫의 밥을 꿋꿋하게 먹었다. 젖었던 기원의 머리카락은 금세 말랐고, 빗줄기는 조금 더 거세졌다. 밥은 거의 뜨질 않고 물끄러미 창밖만 살피는 나언을 따라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 기원이 불쑥 물었다.
“밖에 뭐 있어요?”
“…….”
“정신을 못 차리네.”
그제야 뒤늦게 커다란 눈이 저를 향했다. 무언가 말할 듯 말 듯 망설임이 가득한 물기 있는 눈동자에 기원은 재차 속이 꼬여 들었다.
불편하다. 사람을 앞에 두고 자꾸만 바깥을 흘긋대는 나언의 시선은, 언제건 최지원을 향해 있던 나언의 공허한 눈빛을 떠올리게 했다. 가게 안에서만 맴돌았던 나언이 비에 흠뻑 젖은 채 외출했던 것도. 어디 갔었냐는 질문에 말을 아낀 것도. 나언에게 물을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아는 지금 상황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탁탁. 단정한 손톱이 식탁 위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시계의 초침 같기도 하고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 같기도 한 또박또박한 소리에 나언의 표정 역시 점차 초조해졌다.
3년이 지난 지금. 기원과 자신의 관계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언이의 병원비와 아버지의 빚. 그 모든 속박을 대신 거둬 준 기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했던 시기와, 스스로 손목을 그어 가며 관계를 끊어 내 버린 지금과는 다르다. 부러 몸을 낮출 필요도, 비위를 맞춰야 할 이유도 없지만 나언은 이상하게 자꾸만 입술이 바짝 말라 갔다. 나언만 읽을 수 있는 기원의 예민해진 표정. 그 기색을 읽자마자 가슴 한편이 묘하게 조여 왔다.
학습된 공포 역시 공포였다. 조금이라도 심기가 불편해지면 금세 감정이 휘발되어 버리는 차가운 회색의 눈동자. 그 서늘한 눈이 자신을 빤히 응시해 올 때면, 심장 어딘가가 불안하게 아득해지며 발끝에서 힘이 탁 풀리려 한다. 숟가락을 쥐고 있는 손안에 식은땀이 차올랐다.
경직되어 가는 하얀 뺨과 깜빡일 때마다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기다란 속눈썹, 잘근대며 씹는 통에 점점 붉어지는 입술과 뾰족한 턱 끝을 훑은 기원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 잠깐 기원의 얼굴을 살핀 커다란 눈이 도르륵 굴러 다시 땅바닥을 향했다.
“…….”
“…….”
그저 잠자코 나언의 답을 기다리는 것인데도, 유약한 녀석이 무서워하고 있다. 다 알지만, 굳이 분위기를 풀어 주고 싶지 않았다. 저를 밀어내고 무시하는 건 괜찮지만. 감추고 숨기는 건 싫다. 식탁 위에서 곱지 않은 침묵이 길어지자 나언이 입술을 달싹였다. 불안에 잠긴 목소리가 식탁에 작게 흩어졌다.
“……고양이요. 비 맞을까 봐.”
“…….”
“조금 다쳤는데, 혹시 비 맞고 더 아플까 봐 걱정돼서요.”
고양이.
켜켜이 번져 가던 음침한 상상이 싹둑 잘려 나가며 고양이 한 마리가 기원의 머릿속을 타박타박 가로질렀다. 허무한 느낌과 함께 뒤늦게 나언의 표정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어딘지 모르게 색이 빠진 얼굴이 허공을 멍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기원은 발밑이 쑥 꺼지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다그치려는 건 아니었어요.”
“…네.”
고분고분 대답을 하면서도 나언의 눈은 정처 없이 가게 어딘가를 부유했다. 겁주려는 의도가 없는 말에도 지레 겁을 먹고, 과거를 떠올리며 혼자 움츠러드는 건 모두 제 탓이라 생각하자 속이 조금 부대껴 왔다. 얼마 먹지도 않은 밥이 모두 올라올 것 같은 불쾌한 느낌에 물을 들이켜 토기를 가라앉혔다.
“고양이 보러 갈래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한 기원의 질문에 나언이 물컵을 내려놓았다. 잠시 머뭇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나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라리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기원은 우산을 씌워 주고, 나언은 쭈그리고 앉아 상자 안의 고양이를 눈으로 살폈다. 나언의 발소리를 듣고 상자 안에서 고개를 든 고양이는, 기원이 낯선 모양인지 도통 상자 밖으로는 나오질 않았다.
“여기에 우산 놓고 오느라 다 젖었던 거예요?”
“…네.”
기원은 나언이 어설프게 꾸려 놓은 박스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놀아 주고 있어요.”
기원이 나언에게 제 우산을 건넸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기원을 바라보자, 기원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 벌써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우릉, 하는 엔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외길 너머로 빠르게 질주하는 스포츠카를 바라본 나언이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무릎에 턱을 괬다.
20분 정도가 흘렀을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나언이 몸을 일으켰다. 기원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키가 작은 남자와 함께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완전한 초면이다. 나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기원을 바라보고, 기원은 남자를 향해 턱짓으로 고양이가 놀고 있는 박스를 가리켰다.
“가서 치료해요.”
“아, 예.”
기원과 나눠 쓰고 있던 우산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남자를 향해 나언이 다가갔고, 나언이 기원에게 우산을 씌워 주자 남자가 고개를 꾸벅하곤 자리를 비켰다.
“누구예요?”
“수의사요.”
“아는 분이에요…?”
“아니, 처음 봤는데.”
처음 보는 수의사를 여기까지 어떻게 데리고 온 건지. 나언이 뺨을 한 번 쓸고 수의사의 뒷모습을 살폈다. 왠지 모르게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어깨에 초록색 우산을 끼우고, 한 손으로는 작은 구급 키트를 든 수의사가 고양이 곁에 조심스레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외부인의 등장에 어미 고양이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예민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도 수의사는 짜 먹는 간식으로 가볍게 고양이를 유혹했고, 금세 경계를 푼 고양이의 얼굴 상처에 소독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사이, 기원은 플라스틱 이사 박스 재질의 커다란 상자를 뚝딱 조립해 고양이 집을 만들었다. 작은 종이봉투 안에는 번듯한 밥그릇과 물그릇도 들어 있었다. 커다란 몸을 구겨 앉은 채 생수를 돌려 까 물을 채우고, 고양이 밥까지 콸콸 쏟아붓는 기원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기원이 상자 안에서 경계 중인 고양이 두 마리를 새집에 넣어 주자, 고양이들은 담요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자리를 잡았다. 기원은 사은품으로 받은 고양이 낚시 장난감을 무성의하게 흔들었다. 아까부터 뺨이 따갑도록 시선을 던지는 나언 대신, 새끼 고양이 두 마리에 시선을 고정한 기원이 물었다.
“왜요.”
“……전 최기원 씨를 잘 모르겠어요.”
“네 마음에 들어 보겠다고 별짓 다 하는 새끼지 뭐.”
기원이 분홍 깃털이 달린 낚싯대를 흔들대며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기원의 쪽으로 우산을 기울이고 있던 나언이 고개를 푹 숙였다.
“풉.”
나언 본인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헛웃음이 터졌다. 흔들리던 낚싯대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기원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언을 바라봤다. 눈을 접은 나언의 입술 끝에 희미하게 매달린 미소에 기원의 시선이 고정됐다.
그렇게 잠시 굳은 기원이 몸을 일으켜 나언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기원의 솔직한 대답에 웃음을 터뜨린 나언이 애매하게 걸린 웃음기를 정돈하며 기원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당해 놓고 뭘 모르겠다는 멍청한 소리를 하는 거야.”
기원이 손가락으로 나언의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놨다. 한쪽 눈을 찌푸린 나언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사이 처치를 끝낸 수의사가 어색하게 다가와 말을 붙여 왔다.
“고양이 치료 끝났습니다. 상처 부위가 넓어도 깊지는 않네요. 여기 소독약 있으니까 잘 아물 때까지 몇 번 더 발라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시간 되면 중성화도 해 주시면 좋겠네요. 저희 병원은 여기입니다.”
“아, 네.”
나언에게 건네진 명함을 기원이 가로채듯 대신 받았다. 수의사는 고개를 꾸벅이며 빠르게 길을 벗어났고, 어두운 밤길을 거슬러야 하는 수의사가 걱정된 나언은 계속 그의 뒤꽁무니를 살피며 ‘태워 드려야 하는 거 아닐까요?’ 따위의 걱정을 했다. 눈을 한 번 굴린 기원은 비행기로 동남아를 왕복으로 다녀올 돈을 줬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퉁명스러운 답을 남겼다.
기원의 우산 아래에서 나란히 걸으며, 어둑한 조명만이 남은 가게를 향했다. 그가 2층으로 향하는 것이 조금은 자연스러워졌다.
아까까지 뒤집혀 거북하기만 했던 속이 모두 가라앉고, 불안하게만 들렸던 빗소리도 고요하게만 느껴졌다.
최기원이란 그런 존재였다. 본능은 그를 여전히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하지만 그의 서툰 시도가, 그럴 리 없는 그가 애써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어떻게든 저를 놓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며 썩히는 시간이 자꾸만 본능을 억누르게 하고 과거를 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표면적으로만 안정적인, 모호한 관계 속에서 어느덧 가을에 접어들었다.
***
짜고 후덥지근했던 바닷바람에 서늘한 기색이 곁들 무렵. 방파제 주변에 점점 못 보던 차량들이 줄지어 드나들기 시작했다. 커다란 승합차에선 편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는데, 그들은 가끔 나언이 일하는 식당에 와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단체 손님이라 분주한 와중에도 오랜만에 듣는 서울 말투에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됐다. 엿들으려 한 건 아니지만 곧 여기서 영화를 촬영한다는 정보를 얻게 됐다.
본격적인 촬영에 가까워질수록 나언은 촬영팀과 더 자주 마주쳤다. 가까운 바다를 주요 촬영지로 삼았는지, 바닷가 주변을 카메라로 찍고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기도 했다. 가게는 주로 한산했기에 가게 앞 벤치에 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촬영팀에는 제 또래의 남자들도 많이 보였다.
의자에 앉아 파도를 멍하게 바라보는데, 도로 가까이에서 촬영팀 두 명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안 나오니까 위에서 따로 따야죠.”
“아, 일을 두 번 해야 하네. 저쪽 방향은 그냥 숲인가?”
“촬영 허가가 될까요?”
무언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젊은 남자 하나와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인상을 쓰고 이야기를 나눈다. 눈 위로 차광막을 만들어 여기저기를 가늠하더니 허리춤에 손을 얹고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
오랜만에 보는 열중해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 활기차고 의욕적인 풍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왠지 가슴이 뻐근해졌다.
저릿한 왼손을 몇 번 쥐었다 펴며 나언은 시간을 죽였다. 선선해진 공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마른 숨을 들이켠 나언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입가가 버석하게 올랐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죽지 않고 하루를 버티는 것에만 몰두했던 지난날이었기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한적한 곳에 정착할 수 있었던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하지만 또래의 열정과 갈망을 목도하니 이상하게 입 안이 텁텁해졌다. 어렸을 적엔 아픈 주언이 탓, 그 이후엔 삶을 망가뜨린 최기원의 탓. 늘 남 탓만 하며 제 몫을 못 해내는 스스로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크게 슬픈 것도, 조급한 것도 아니지만 괜히 속이 답답하다.
“하고 싶은 거.”
나언이 중얼대며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이 아주 느린 속도로 오른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왼손을 들어 검지로 구름의 동그란 부분을 살살 문지르듯 흔들어 봤다.
옛날부터 딱히 하고 싶은 것은 없었다. 그저 막연히 크고 나면 아무 곳이나 취업해서 월급 잘 나오는 회사에 취직하지 않았을까.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으니 어느 곳에서든 붙여 주면 열심히 일할 생각이었다. 병원비랑 생활비를 써도 조금 남을 정도로 돈을 많이 주는 회사에 들어가는 것. 그것 하나면 가슴 속에 시름 한 점 없을 것 같았던 나날들이 있었다.
손을 내리며 흉이 남은 손목을 훑었다. 크게 다친 이후,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았고, 약물을 한 번에 너무 많이 삼켜 간과 내장도 꽤나 상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몸은 제 상태로 돌아오지 못했다. 게다가 최기원과 지냈던 기간 동안 좋았던 머리도 많이 멍청해졌다. 우울의 끝을 달리며 스스로를 좀먹던 시간 이후 남은 건 비루한 몸뚱이 하나였다.
“그만 생각하자.”
결국 우울하게 마무리 지어진 망상을 가위 자르듯 덮어 버린 나언이 눈을 감아 버렸다. 선선한 공기가 눈 앞머리를 간지럽혔다. 시원하다, 여유롭고. 나언이 몸에 힘을 빼고 조금 더 눈을 꾹 감고 길게 심호흡했다. 발밑이 쑥 빠져드는 것 같은 비참한 우울에게서 벗어나는 나언만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얼마 가지 않아 생겼다.
나언이 평소처럼 일을 마치고, 가득 담은 고양이 밥그릇과 생수병을 들고 가게 뒤편으로 갔을 때였다. 이제 나언의 냄새와 발소리를 기억한 고양이들이 반기러 와야 하는 순간. 낯선 공허함과 함께 엎어진 밥그릇과 흩어진 사료 알이 먼저 보였다.
“야옹아?”
어둑한 저녁 시간이었다. 빛이 잘 스미지 않는 곳이니 아직 녀석들이 나언을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양이를 불러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야옹아 밥 먹자.”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힘이 빠졌다. 무언가 이상한 걸 느끼고 기원이 사다 놓은 고양이 집 쪽으로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수풀 아래에 번듯하게 놓여 있던 고양이 집이 저 멀리 치워져 –좋게 말해 ‘치웠다’지, 거의 반쯤은 던진 듯한 모양새였다– 있고, 고양이들은 꼬리 끝도 보이질 않았다. 나언이 치워져 있는 고양이 집을 끌어와 바로 세우고, 밥그릇과 물그릇을 내려놓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순간, 저 멀리서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렸다.
“뭐 하세요!”
나언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자, 제 또래의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나언은 그를 알아봤다. 가게에 자주 왔던 촬영팀 중 제일 젊은 남자. 선선한 가을바람에도 볼이 익고 구레나룻에 땀방울을 매단 남자는 나언을 향해 도끼눈을 떴다.
“영화 촬영 중인데 마음대로 들어오면 어떡해요. 저기 삼각대 안 보여요?”
그제야 나언이 튼튼한 삼각대를 지나쳐 온 걸 알게 됐다. 카메라 렌즈를 바라본 나언은 제 동선이 그대로 카메라 구석에 걸리는 위치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마중 나오지 않는 고양이들을 신경 쓰느라 면밀히 살피지 못했다. 버럭버럭 화를 내는 상대를 보니 제가 민폐를 끼쳤다는 건 알겠는데, 이상하게 불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기 고양이들 못 봤어요?”
그래서 나언도 얼굴을 굳히고 반문했다. 죄송하다는 말 대신, 날 선 질문을 던지자 남자의 우악스러운 기색이 조금 누그러지더니 이내 황당하다는 듯 미간이 왈칵 찌푸려졌다.
“고양이요? 못 봤는데요?”
그건 정말인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대충 고양이의 위치를 훑는다.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길고양이지만, 제가 거의 한 달 가까이 챙겨 오던 녀석들이었다. 주먹만 했던 새끼 고양이들도 어느새 몸집이 조금 커졌고, 다쳤던 어미 고양이도 상처가 아물어 가며 안정을 찾았었다.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리가 없었다.
남자와 나언이 그렇게 잠시 고양이를 찾는데, 멀리서 조금 더 나이 든 촬영 스태프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새끼야 뭐 해!”
나언이 수풀을 살피며 숙였던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자, 중년 남성이 젊은 남자를 다짜고짜 혼내고 있었다.
“겨우 여기 앵글 따는데 시간을 이렇게 쓰면 어떡하냐고.”
“죄송합니다, 감독님. 아니, 저분이 고양이를 찾아서요.”
“고양이?”
그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나언에게로 벌건 시선이 떨어졌다. 나언이 주눅이 든 남자 스태프 대신, 감독을 향해 말했다.
“여기 살던 고양이들이 없어져서요. 어제까진 분명-,”
“그쪽이 키우는 고양이예요?”
“네? 아니,”
자꾸만 나언의 말을 끊더니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모자를 고쳐 썼다.
“여기 허가 다 받고 지금 촬영하는 거거든요?”
“아니, 여기에 원래 살던 고양이들이….”
“여기 들어올 때 봤는데, 걔들 길고양이잖아요. 보아하니 길고양이 밥 챙기는 분인가 본데, 여기는 다 정식 허가받고 찍는 거니까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됩니다.”
나언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제가 키우는 건 아니지만 한 달 가까이 여기서 살았던 고양이들이에요. 함부로 내쫓으시면-,”
“아, 무슨 길고양이를 내쫓았대. 하…. 저희 지금 촬영 일정 개 빡빡한데 그쪽 때문에 펑크 나면 책임질 거예요? 방해 그만하고 가시라니까.”
감독이라는 남자의 언성이 조금 더 높아졌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나언은 여기서 더 대거리하기보단, 고양이를 찾아 나서는 것이 낫겠다 판단했다. 마른세수를 하는 나언을 세워 두고, 감독은 귀찮은 듯한 말투로 남자 스태프를 나무랐다.
“야, 무시해. 무슨 고양이 새끼 가지고. 얼른 찍고 합류해. 저것도 치우고.”
“저기, 이제 좀 가 주세요.”
남자가 나언이 내려놓은 밥그릇과 집을 다시 거둬서 치우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나언은 남자가 치운 그릇을 다시 챙겨 들고 바닷가 쪽 숲길을 향해 걸었다. 그쪽으로 가면 안 된다는 스태프의 말을 무시하고 고양이가 갈 만한 길목을 찾으려는데, 뒤에서 우악스러운 손길이 나언을 낚아챘다.
“아, 촬영 중이라니까!”
와장창 소리와 함께 나언이 들고 있던 밥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언의 왼손을 잡아챈 감독이 나언을 질질 끌어당겨, 원래 왔던 길목까지 끌고 갔다. 그러잖아도 마른 편인 나언에 비해 키도 크고, 살집도 있는 남자였다. 나언은 손목을 빼내려 안간힘 썼지만, 속수무책으로 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 윽… 이거 놔요!”
하지만 그는 붙잡은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사방이 어두운 와중, 덩치가 큰 남성에게 끌려가는 순간, 잊고 지내려 노력하던 어두운 기억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바르작대던 나언의 기색도 순식간에 꺾이고, 그저 꾹 다문 입술 새로 작은 신음을 흘리며 맥없이 끌려가기만 했다.
“아오 씨발 진짜.”
나언을 인적 드문 골목까지 끌고 간 남자가 손목을 거칠게 놨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언이 거의 쓰러질 듯 비틀댔고, 벽을 짚고 겨우 휘청이는 몸을 고정했다. 나언은 손목을 부여잡고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덜덜 떨리는 턱과, 잘게 흩어지려 하는 호흡을 애써 감추며 나언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70명이 넘는 스태프가 날밤 까는 중이니까 좋게 말할 때 가시라고요. 네?”
말을 씹어뱉은 감독은 바닥에 침을 뱉고 냉정히 뒤돌았다. 그 상태로 굳어 있던 나언은 길 너머로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벽에 등을 대고 쭈그려 앉았다. 무릎 사이에 이마를 묻고, 늘 하던 것처럼 깊게 심호흡했다. 저린 통증이 치미는 손목은 오른손으로 붙든 채 오한이 든 것처럼 떨리는 몸이 가라앉길 잠자코 기다렸다.
고양이에 대한 걱정과 사람들에 대한 분노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금 나언을 위협하는 것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완연한 두려움과 숨이 멎을 것같이 목이 막혀 오는 불안함이다. 이런 류의 마찰은 3년간 남해에서 지내며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다툼 정도였지만, 나언의 입장에서는 정신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후, 으….”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애써 또렷하게 유지하려고 하지만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터져 흐르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발끝을 좀먹는 추락감과 싸우던 도중, 코끝으로 익숙한 향이 번졌다.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싸한 체취. 그리고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언을 일깨웠다.
“한참 찾았네.”
몸을 낮춰 앉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손가락 끝이 턱을 들어 올렸다. 하얗게 질린 나언의 얼굴을 달빛으로 확인한 기원은 천천히 상태를 살폈다. 좌우로 흔들리는 동공과 피가 날 것처럼 질끈 깨문 입술에서 무언가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기원의 눈빛에 날이 섰다.
“백나언?”
“…….”
“어디 아파?”
고개를 겨우 저은 나언이 얼굴을 다시 떨어뜨렸다. 기원은 나언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몸을 일으켰다. 휘청인 나언이 기원의 팔뚝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기원의 눈이 제멋대로 경련하는 왼손을 향했다.
“…….”
악몽에 쫓겨 품으로 파고드는 나언이 아닌, 깨어 있는 나언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나언과의 재회 이후 처음 마주하는 모습이었다. 절대 잊지 못했던 모습 그대로, 나언은 3년 전의 상처를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왜, 도대체 왜.
이러다 다시 예전처럼 나언이 자취라도 감춘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파르르 떠는 나언을 바라보자 속이 엉망으로 휘저어지며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목을 긁어내리고, 정신을 놓고 바깥을 응시하고, 끝내 손목을 긋고 수십 개의 알약을 게워 내던 몸이 그려 낸 잔상이 기원의 머릿속을 자꾸만 어지럽혔다. 애써 평정을 찾으려 애쓰며 기원은 경련하는 마른 손목을 붙들었다.
“왜 이래?”
“…….”
“손, 아픈 거야?”
울 것 같은 눈을 한 나언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다는 말을 듣자마자 나언을 그대로 안아 든 기원이 나언을 차에 태웠다. 시트의 온도를 올리고, 히터를 튼 기원은 두터운 담요를 꺼내 나언의 어깨에 둘렀다. 이제 겨우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한 나언을 두고, 기원은 내비게이션에 가까운 병원을 검색했다.
그때 뼈가 불거진 마른 손이 기원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잡으나 마나 한 약한 악력에도 기원은 움직임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니 나언이 식은땀에 젖은 채 입술을 뗐다.
“괘, 괜찮아요.”
“뭐가 괜찮은데.”
“그냥, 조금 있으면 나아요.”
감독의 폭력적인 모습이 트리거가 되어 재발한 거지만, 예전에는 하루걸러 하루 겪어야 했던 트라우마의 발작 증세였다. 슬프게도 익숙한 감각이었고, 이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괜한 일로 병원까지 가고 싶지 않았고, 자신도 충분히 알고 있는 몸 상태를 굳이 의사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기원은 악문 잇새로, 화를 꾹꾹 짓누른 말을 씹어뱉었다.
“뭘 조금 있으면 나아. 미련한 소리 하지 마.”
욕만 하지 않았을 뿐, 위협이나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한 기원은 기어를 변속하고 핸들을 꺾으려 했다. 순간 나언의 손이 한 번 더 세게 기원을 붙잡았다.
“싫, 다니까요.”
울기 직전으로 부풀어 오른 검은 눈동자에 원망스러운 기색이 깃들기 시작했다. 결국 기원이 눈을 굴리며 이를 악물었다. 턱의 근육이 꿈틀댈 만큼, 기원은 바닥에 있는 인내심까지 최대한 긁어모으며 핸들을 꾹 쥐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가죽이 마찰하는 소리 사이로 나언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집에, 집에 갈래요….”
결국 기원이 길게 한숨을 뱉었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차창을 바라보다, 눈을 한 번 느리게 감았다 떴다. 차 안은 완연한 침묵이었다.
조그만 걸 성질대로 주무르지도 못하고, 아파 뒤질 것처럼 보이는데도 내버려 두라는 개소리를 하니 짜증이 치민다. 비실비실한 놈이 늦게까지 가게 일에 매달리는 걸 볼 때도 당장 목덜미를 부여잡고 강제로 입원시켜 요양을 시키고 싶었는데, 간단한 진료조차 마다하고 있으니. 참는 자신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언의 입에서 ‘싫다’는 의사 표현이 뱉어진 이상, 기원에겐 강제할 힘이 없었다. 결국 기원의 차는 가게 앞에 거칠게 정차했다.
계단을 오르는 것도 팔뚝을 붙잡아 부축을 해야 겨우 올곧게 걸었다. 이미 어둑하게 불이 내린 1층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간 나언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침대 구석으로 가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버렸다. 기원은 그런 나언을 위해 불을 끄고, 2층의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지금은 녀석도 지친 듯하니, 내일 어떻게든 설득해서 병원을 데리고 가야겠다 생각했다.
기원은 그렇게 밤새 소파에 앉아 방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언의 호흡이 조금이라도 거칠어지는 순간 당장 곁으로 가 품을 내어 줄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나언의 현실이 지나치게 힘들어서일까, 나언은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졌다. 기원은 그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가슴에 치미는 답답함을 가라앉혔다.
다음 날 새벽처럼 일어난 나언은 화장실을 향하다 소파에 기대어 졸고 있는 기원을 발견했다.
“…….”
기원에게 악몽에 떠는 나언이 익숙하다면, 반대로 이런 기원의 모습은 나언에게 익숙했다. 밤새 소파에 기대어 선잠을 자는 최기원. 어제는 너무 정신이 없어 기원까지 신경 쓰지 못했는데, 아픈 저를 달래서 여기까지 데려와 준 이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수와 양치를 한 뒤 투명한 물기를 매단 나언은, 졸고 있는 기원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
기원은 나언의 작은 인기척에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쭈그리고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하얀 얼굴을 마주하자 나언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밤새 여기서 잤어요…?”
“몸은 어때요?”
잠긴 목소리로 묻는 말에 나언이 괜찮다 답하며 입꼬리를 조금 끌어 올렸다. 그제야 기원이 손으로 눈가를 살짝 비비며 목을 좌우로 꺾었다. 피곤할 때면 늘 하던 버릇이었다. 그런 기원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언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 잠깐 나가려고요.”
“어디 가는데요?”
“고양이 찾으러 가요.”
기원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없어졌어요?”
가볍게 물었지만 기원 역시 놀랐다. 꽤나 마음을 다해 돌보는 것 같더니, 역시나 나언의 표정이 미묘하게 우울해졌다.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방으로 간 나언은, 가벼운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왔다. 조그만 머리통이 모자에 거의 사라질 듯 가려졌다.
“같이 가요.”
나가려는 나언을 멈춰 세우자 나언이 1층으로 가는 계단에 발을 걸치며 대꾸했다.
“괜찮아요. 좀 더 주무-,”
“제발 한 번에 말 좀 듣지. 나도 많이 참고 있는데.”
기원이 나언의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툭 치며 말했다. 나언은 작은 한숨과 함께 눈을 끔뻑였다.
새벽 공기가 선선했다. 기원이 먼저 성큼성큼 걸어 고양이 집 쪽으로 걸어갔다. 앞서 걷는 기원을 보며, 아직 영화 촬영을 하고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카메라는 없었다. 기원은 저 멀리 날아가 버린 고양이 집을 발견하곤 고개를 살짝 갸웃댔다.
30분 정도 뒤졌을까, 고양이는 수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미 고양이는 나언과 기원을 발견하고서도 쉬이 가까이 오질 않았다. 나언은 최대한 몸을 낮추고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다가가면 도망갈까, 원하는 만큼 다가가기보단 멀리 떨어져 고양이에게 물었다.
“야옹아, 배고프지 않아?”
큰 눈을 들어 이리저리 주위를 살핀 고양이가 제 주변에 꼭 붙어 있는 새끼들을 살폈다. 나언은 입술을 꾹 깨물고 한 번 더 물었다.
“여기 위험해. 집에 갈래?”
기원은 그런 나언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봤다. 나언이 제법 절박한 건 알겠지만, 기원의 입장에선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려 했다. 나언에게선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였다. 고양이와 최선을 다해 의사소통하려는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말이다.
다행히 경계를 점차 누그러뜨린 고양이가 나언에게로 종종 뛰어왔다. 어미가 뛰어가니, 새끼들도 조금 떨어져 도도도 뛰어왔다. 나언이 얼른 몸을 굽혀 제 품으로 들어온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최기원 씨. 손이 없어서 그런데 저기 고양이 집 좀 챙겨 주세요.”
고양이 세 마리를 품에 안아 든 나언이 턱짓으로 쓰러진 고양이 집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신이 없는지, 자연스레 부탁이란 걸 하는 모습을 보며 기원은 묘한 만족감에 휩싸였다. 처음으로 나언을 귀찮게 하는 고양이들이 예뻐 보인다. 애들 케어하는 부모 흉내 내는 기분도 들고.
나언은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집을 주워 드는 기원을 바라보며, 웬일로 기원이 고양이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분명 귀여운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말이다.
고양이 집은 가게 바로 옆에 설치됐다. 집 안에 들이는 문제는 아주머니와도 상의해야 했기에 나언에게는 그게 최선이었다. 허겁지겁 물과 밥을 먹고 집 안에 들어가 잠이 든 고양이들을 바라보던 나언이 작게 한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기원에게 나언이 쭈뼛대다 말을 붙였다.
“고마워요. 같이 찾아 줘서.”
“뭘.”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나언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아침 해 드릴게요, 같이 먹어요.”
이른 시간이어서 대충 볶음밥이라도 해서 먹으려 했다. 기원의 것까지 하겠다는데 상대에게서 답이 떨어지지 않았다. 담배를 비벼 끈 기원이 볼 안쪽을 혀로 밀며 말했다.
“기다렸다가 아주머니가 해 주는 거 먹지?”
그 넌지시 한 거절에 나언은 처음으로 제 요리 실력이 별로라는 것을 눈치챘다. 종종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찬거리를 만들어 주면, 꾸역꾸역 빈 그릇을 만들기에 꽤 괜찮은 줄 알았는데. 나언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갔다. 기원은 살짝 처진 마른 어깨를 보며 조금 미안했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어쩌겠는가, 심하게 맛없는걸.
***
점심때가 되니 가게가 매우 바빠졌다. 평소처럼 묵묵히 일하는 나언의 표정이 조금 딱딱했다. 일이 힘들거나 더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가게를 가득 메운 손님은 분명, 고양이로 마찰을 일으켰던 그 영화팀이었다.
가게가 매우 협소하기에 영화팀 전체는 아닌 것 같고, 여기 주변 촬영을 하러 온 그 문제의 팀만 회식을 하는 듯했다. 아직 하얗게 해가 뜬 대낮임에도 벌써 테이블마다 소주가 두 병씩 깔렸다. 시끌시끌한 손님들은 추가 반찬이나 사이드 메뉴를 많이 주문했다.
나언은 그중 어린 남자 스태프와 무례한 감독을 단번에 알아봤고, 반면 그들은 술이 올라 그런지 나언을 알아보진 못했다. 아직 그릇을 옮길 때면 틀어 잡혔던 손목이 시큰거렸지만, 나언은 불쾌한 티를 내지 않았다. 어느덧 몰아쳤던 바쁨이 가시고 조금 숨을 돌리던 중 테이블 하나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여기 소주 하나 추가요.”
나언이 대답과 함께 소주 하나를 꺼내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취한 감독이 술을 내려놓는 나언을 보더니 눈썹을 끌어 올렸다.
“어? 고양이?”
참 눈치도 빠르다. 나언은 맛있게 드세요, 하며 뒤돌았다. 테이블 너머로 ‘고양이요?’ 하며 되묻는 말이 들려온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감독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투덜대는 것이 고스란히 들렸다. 가게가 좁은 탓이었다.
“어제 날밤 까고 테이프 날린 거. 그 고양이로 지랄한 새끼. 그게 쟤라고.”
“아 어제 현용이 테이프요?”
그 젊은 남자 스태프 이름이 현용인 모양이다. 나언은 다 들리지만 애써 듣지 못한 척 외면했다. 술이 오른 사람과 대거리를 하고 싶지도 않았고, 싸움이 생겼다간 괜히 아주머니 앞에서 못 볼 꼴만 보여 주는 셈이었다.
“남해 좁다더니 존나 좁네.”
가십거리처럼 몇 마디 저렴한 욕을 더 보탠 그들은 다시 다른 이야기를 화두에 올렸다. 다행히 별문제 없이 식사를 마친 영화팀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먹은 자리를 치우니 술병이 어마어마하게 나왔다. 빈 술병을 꽂는 플라스틱 박스에 더는 자리가 없어, 나언이 분리수거장으로 가기 위해 박스를 챙겨 들었다. 가득 든 병에서 짤강대는 소리가 났다.
“나언아 무거운데 그냥 둬라!”
설거지를 하는 아주머니께서 주방 안쪽에서 크게 소리쳤지만, 나언은 안 무겁다고 대답하며 가게를 나갔다. 그런데 발로 미닫이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순간, 나언은 눈을 크게 떴다.
위협적인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털을 바짝 세우고 몸을 웅크린 채, 언제라도 튀어 나갈 듯 자세를 취하고 있는 어미 고양이는 무언가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로 저를 둘러싼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방금 밥을 먹고 나간 감독 테이블에 앉아 있던 촬영팀 일행이었다.
“씨발 존나게 시끄럽네요.”
“현용이도 오죽했으면 내쫓았겠냐고.”
“고양이는 정이 안 가요. 저것 봐. 가만히 있어도 지랄이잖아.”
감독과 주거니 받거니 고양이 욕을 하던 남자 하나가 담배 든 손을 고양이에게 휘적대며 위협했다. 귀를 접은 고양이는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기세로 몸을 움찔대며 날카롭게 울었다.
“야야 물겠다? 확 잡아다 끓여 버릴라.”
엉덩이를 들썩대는 고양이를 향해 남자가 발을 올리고, 동시에 고양이도 뛰어나가려고 하는 순간 나언도 생각 없이 그 사이로 뛰어들게 됐다.
“야! 미쳤어?”
누군가에게 이렇게 싫은 소리를 크게 한 적이 있었을까. 나언은 들고 있던 박스를 내팽개치고 남자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모르겠다. 저놈의 고양이들이 도대체 뭔지. 그냥 몇 주간 밥 좀 챙겨 줬더니 금세 경계를 풀고 털썩 자리 잡고 기대 오는 어리석음이 가여워서일까, 아니면 그 처절한 마음을 알겠어서일까. 한계에 내몰린 상태에서 받은 사소한 호의에 쉽게 마음을 열었던 고양이들에게, 더는 잔인한 현실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면서도 개중에 성한 것은 어린 자식에게 양보하고 마는 모습을 보며 충동적으로 사료를 사 어미 쪽에 잔뜩 쏟아부은 것이 시작이었다. 어미 고양이를 향해 네가 무슨 마음인지 알지만, 같이 먹고, 같이 살라고. 너를 먼저 포기하지 말라고 중얼댔었다.
와장창.
소주병 박스가 바닥에 떨어지며 유리 깨지는 소리가 진동했다. 깜짝 놀란 새끼 고양이들은 집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고, 공격적인 태세를 보이며 스태프들에게 달려들려던 어미 고양이도 놀라 주춤댔다.
“뭐야 씨발.”
놀라고 당황스러워 욕을 뱉은 남자 스태프가 나언의 팔을 거칠게 떼어 냈다. 나언도 열이 받아 귀와 목덜미를 발갛게 물들인 채로 소리쳤다.
“고양이 괴롭히지 말고 가세요!”
“너 아까 ‘야’라고 그랬냐? 이 고딩 새끼 같은 게.”
키는 얼추 비슷하지만, 몸집은 조금 더 큰 남자가 눈을 부라리며 나언을 향해 윽박질렀다. 지척에서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혀 꼬인 소리에 나언 역시 냉소적인 말투로 받아쳤다.
“반말할 만하니까 했다, 왜. 가만히 있는 애들한테 시비 걸지 말고 꺼지라고.”
“시비? 시비는 이 고양이 새끼들이 걸었는데? 네가 키우는 거면 관리나 잘해.”
그러고는 다시 다리를 들어 고양이를 위협하려 한다. 나언이 이를 꽉 깨물고 남자의 어깨를 강하게 밀었고, 휘청대며 밀려난 남자는 지금 쳤냐며 나언에게 성큼 다가와 나언의 가슴팍을 세게 떠밀었다. 동시에 어미 고양이가 스태프를 향해 더욱 위협적인 소리를 뱉었다.
“형님 그만하세요! 가요, 가요!”
“놔, 아니 저 새끼가 손님 무서운 줄 모르고.”
“…….”
술에 취해 흥분한 사람은 이성적인 사고가 전혀 되지 않는 듯, 주위에서 말려도 개의치 않았다. 거기에 이미 나언 역시 침착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개싸움이 되기 직전인,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성을 잃은 남자가 다시 한번 나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세게 밀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저 위협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거센 힘으로 떠밀었고, 나언은 곧장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윽!”
“아이고 나언아!”
그리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 뛰어나온 아주머니는 그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했다. 그리고 아주머니의 비명은 단순히 나언이 넘어진 것 때문이 아니었다.
“아…….”
나언이 손을 털자 손바닥을 찔렀던 유리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핏방울이 후드득 손목을 타고 흘렀다. 제가 집어 던진 소주병 잔해 위를 짚는 바람에 손바닥이 길게 베인 것이다. 피까지 날 줄은 몰랐던 상대 남자들도 놀라 몸을 굳혔고, 아주머니는 한달음에 달려와 나언을 일으켜 세우며 우는 소리를 냈다.
“괜찮나! 우야노, 우야노.”
“아……. 괜찮아요.”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꺼!”
나언도 놀랐는지 숨소리가 덜덜 떨렸다. 넘어지는 순간 치미는 소름 끼치는 통증이 손바닥을 가르자, 익숙한 느낌에 심장이 철렁인 탓이다. 하필 왼손이었고 손목 인근을 베였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예전 기억에 숨이 턱 하니 막혀 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른 정신을 붙잡고 상처를 살폈다. 손목이 아니라 손바닥 아래였고, 상처는 깊지 않았다.
“피가……. 아주머니, 휴지 좀 갖다 주세요.”
“그래, 그래…. 좀만 참아라 응?”
아주머니가 가게로 뛰어가고, 나언은 길게 찢어진 손바닥을 다른 손으로 누르며 한쪽 눈을 찌푸렸다. 하필 또 왼손이었다. 나언을 떠민 남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뚝 서 애꿎게 머리만 쓸어 넘겼다.
소란스러운 상황에 먼저 촬영지를 향했던 스태프들도 길을 거슬러 돌아왔다. 나언을 둘러싼 사람들이 웅성댔다. 그러잖아도 피 때문에 놀란 가슴에 사람들이 쑥덕대는 소리까지 들려오니 현기증이 몰려오려 했다.
“그……. 저, 이렇게까지 될 줄 모르고 죄송,”
저를 떠민 남자가 상황을 모면하고자 먼저 사과를 건네던 찰나, 가게 앞에 요란한 소음을 내는 외제차가 삐딱하게 정차했다. 그 순간 나언의 낯에 당황스러움이 급격하게 번져 나갔다. 피가 흥건한 손을 제 가슴팍으로 끌어당겨 숨기며 나언은 자신과 다퉜던 스태프를 향해 빠르게 속삭였다.
“됐으니까 다들 가세요.”
“예? 아니,”
“저 괜찮으니까 그냥 가세요, 얼른요.”
스태프들은 갑자기 가라는 말을 뱉는 나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위에서 우물쭈물했다. 답답함에 나언의 미간이 왈칵 찌푸려졌고, 결국 그사이 대충 주차한 차에서 내린 기원이 성큼성큼 걸어 나언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 해요? 마실 거 사 왔는데.”
그리고 기원이 나언을 마주한 순간, 서늘한 시선이 피 묻은 손에 닿았다.
***
평소 남해에 오면 늘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나언이 일을 마칠 때까지 기원은 주로 차에서 기다렸다. 가끔 졸음이 몰려오면 눈을 붙이기도 했고, 나언이 많이 바쁠 땐 바다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가끔 업무차 서울에서 연락이 닿으면 노트북으로 일을 해결하기도 했고.
오늘은 일하는 나언을 기다리는 동안 잠깐 드라이브 겸 카페에 들러 커피를 샀다. 아무도 없는 카페에 앉아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나언과 아주머니가 마실 만한 음료까지 산 후 다시 가게를 향했다.
백나언에 관한 것 말고는 전부 지루하고 좆같았다. 요즘엔 모든 걸 다 처분하고 그냥 남해에 내려와서 살까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그저 충동이 아니었다. 조금만 눈을 감고 있으면 구체적으로 어느 곳에 어떤 집을 지어 어떻게 살아갈지를 계획하고 있었다.
남해에 나언을 처박아 두고 어떻게 3년을 참았는지. 그동안의 설움을 보상받고 싶은 듯, 기원은 나언의 작은 흔적과 순간의 마주침에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차에 앉아 물끄러미 나언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반쯤 열린 문으로 하얀 얼굴이 오른쪽으로 왔다, 왼쪽으로 갔다를 반복했다. 그걸 TV처럼 들여다보며 나언이 모습을 비추기만 기다렸다. 미련한 짓이건만, 그게 유일한 낙인 걸 어쩌겠는가.
다만 나언과 차창 너머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마다, 나언은 꼭 난감해하며 부담스러운 티를 냈기에 기원이 눈치껏 여기저기를 들른 후 다시 가게를 찾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나언을 마주하다니. 잃어버린 강아지가 마중 나온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창문 너머로 동그란 뒤통수와 살짝 보이는 뺨을 본 순간 기원의 딱딱했던 입꼬리가 느슨해졌다. 그래서 대충 차를 멈추고 음료를 들고 내려섰다.
“뭐 해요? 마실 거 사 왔는데.”
기원은 정말 나언이 뭐 하나 궁금했을 뿐이다. 조그만 가게에 처박혀 일만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말랑했던 기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마치 혼잣말을 읊조리는 것처럼 기원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손에 피.”
“손목 아니고 손바닥이에요. 살짝 긁힌-,”
포장해 온 음료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언이 말을 채 뱉기도 전에 기원이 다친 손을 끌어당긴 후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상처 위를 꾹 눌렀다. 원래 하얀 얼굴의 기원이지만 지금은 핏기 하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회색 눈동자가 나언의 상처를 꼼꼼히 훑어 내렸다. 나언의 말대로 깊진 않지만 벌어진 살 아래에서 피는 계속 흘렀다.
기원은 나언의 말을 끊어 내고 물었다.
“어쩌다?”
나언과 나언을 떠밀었던 스태프들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분명 차분하게 물은 것임에도 기원이 등장한 이후,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만큼 묘하게 뒤틀린 기원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티가 났다. 특히나 기원을 잘 아는 나언으로선 그가 짓고 있는 가면 같은 얼굴이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기원이 미쳐 날뛰기 직전의 광증 어린 낯을 감춘 기이한 상태. 나언은 그를 달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했다.
“넘, 어져서….”
“나언아! 여기 수건으로 눌리라.”
아주머니가 혼란 속에 끼어들었다. 그러다 기원을 발견했고, 이미 울상이 된 얼굴에 원망이 잔뜩 묻은 채로 말했다.
“저놈의 새끼들, 경찰에 신고해야지. 이게 무슨 행팹니꺼!”
아주머니의 말을 듣자마자 기원이 고개를 들어 멍청하게 서 있는 스태프를 쳐다봤다. 길고 서늘한 눈동자가 그들을 빤히 응시했다. 무어라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기원의 따가운 시선을 그대로 받던 남자가 더듬대며 변명을 뱉었다.
“시, 시비는 저쪽이 먼저….”
“됐어요. 사과도 하셨고, 일 더 키우지 마요….”
“다물고 있어. 도움 안 되니까.”
기원이 나언에게 차갑게 속삭였다. 일이 잘못됐다. 발밑이 쑥 꺼지는 기분을 느끼며 나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괜찮은 척하려 했지만, 자꾸만 어깨가 으슬으슬 떨려 온다.
“아…….”
나언의 손을 너무 세게 잡았던 모양이다. 신음을 듣고서야 겨우 젖은 손수건을 떼어 내자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수건으로 나언의 상처를 깨끗하게 닦았다.
“얼른 신고를….”
“아니요, 아주머니. 병원 다녀와서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어느덧 차분하고 멀끔한 표정을 되찾은 기원이 아주머니를 안심시켰다.
“놀라셨을 텐데 들어가 계세요. 여긴 제가 사람 불러서 치우겠습니다.”
신고를 하려던 아주머니를 말린 기원은 나언을 차에 태웠다. 나언은 차창 너머로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기원을 보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절망스러웠다, 차라리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을 봤으면 좋으련만. 기원은 담배를 잇새에 끼우고 스태프에게 걸어가 제 명함을 전달했다. 명함에 각인된 이름과 직함을 확인한 스태프들이 잠시 넋이 나갔다가 낭패 어린 시선을 교환했다.
손바닥이 홧홧하게 아렸고, 넘어지며 잘못 짚은 손목은 지끈댔다. 결국 시트에 뒷머리를 기댄 나언은 눈을 감아 버렸다.
가까운 병원의 응급실을 향했다. 서울에 비하면 꽤나 조악한 환경이었다. 대기가 길어지며 어느 순간 피도 멎었다. 얼마 뒤 나언을 맞이한 응급실 의사는 손바닥의 상처를 소독하고 능숙한 손길로 꿰매 줬다. 치료를 받으면서도 손목을 가로지르는 붉은 흉터가 부끄러워 자꾸만 시선이 땅 아래를 향했다. 다행히 의사는 적당히 모른 체해 줬다.
“손목도 부었네요. 잘못 짚으셨나 봅니다.”
“…네.”
“크게 다친 이후 줄곧 상태가 안 좋습니다. 사고 이후로 경련이나 저릿한 통증도 있고요. 이 근처에 더 전문적으로 보는 병원은 없습니까?”
나언의 간단한 대답이 끝나자마자 기원이 속사포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의사는 눈썹을 끌어 내리며 다소 사무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안타깝지만 여긴 병원 시설이 안 좋습니다. 사고 이후 경련이나 통증은 분명 신경계 손상이 동반됐을 겁니다. 더 큰 후유증이 오기 전에 큰 병원에서 진료받으시는 걸 추천드리겠습니다. 치료는 끝났어요.”
거즈와 붕대까지 감아 준 의사는 자리를 떴다. 수납을 마치고 진통제까지 탄 기원과 나언은 나란히 차에 올라탔다. 잠시 기원의 기분을 살핀 나언이 자그맣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뭐가요.”
나른한 대답과 함께 기원이 시동을 걸자 뼛속까지 울리는 엔진 느낌이 전해졌다. 아직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기원을 향해 나언이 조심스레 말했다.
“아주머니 앞에서 잘 참아 줘서요.”
“…….”
“그냥 싸운 거예요. 막 보복한다거나… 괴롭히진, 마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고.”
기원이 가볍게 화두를 돌렸다.
“서울에 가요. 손목 더는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
“자면서도 몇 번을 끌어안고 끙끙대는지 알아요? 밤새 그 지랄을 해 놓고 내가 잘 자길 바라는 건 웃기지 않나?”
“……그랬나요. 죄송합,”
“죄송? 지금 나한테 사과하는 겁니까? 누구 때문에 그은 건데?”
“…….”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내가 그걸 바라는 것 같아?”
치밀어 오르는 화, 이건 분명히 기원 스스로에게 나는 것이었다. 거칠게 운전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나언에게 차분하게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서울 가요. 가서 재활도 다시 받고요.”
나언은 대답 대신 빠르게 뒤로 사라지는 풍경을 멍하게 바라봤다. 복잡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어려워서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가게로 돌아오자 아주머니께서 1층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상처에 비해 과하게 감긴 붕대를 보며 안타까운 소리를 내는 아주머니에게 나언이 정말 괜찮다고 손사래 쳤다. 저녁 마감을 서둘러 일찍 하고, 아주머니는 저녁거리를 풍성하게 차렸다.
싸움에 휘말리며 아침, 점심 모두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 군침이 돌았다. 수육과 김치, 시원한 냉국이 놓인 상에 아주머니와 기원, 나언이 둘러앉았다.
“나언이 니 아까 무슨 일로 그래 싸웠노. 통 안 그러던 애가.”
나언이 일방적으로 당했다고만 생각했던 기원이 고개를 들어 나언을 살폈다. 나언은 제법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아…. 고양이를 괴롭히고 있어서요. 어제도 촬영하면서 고양이들을 내쫓은 것 같더라고요. 무슨 악감정이 있는지. 이유 없이 괴롭히는 거 보니까 갑자기 화가 나서…….”
‘이유 없이 괴롭힌 전적’이 화려한 기원은 목에 걸릴 뻔한 음식을 물을 삼켜 겨우 넘겼다. 뭐 어쨌든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고 제법 달려들었던 것 같아 기특했다. 기원은 고해 성사를 끝낸 나언이 묵묵히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예전에는 늘 약한 위를 붙잡고, 금세라도 게워 낼 것 같은 얼굴로 밥을 깨작였었다. 오기로 그걸 누르자 끝내 그릇을 비우고 비틀대더니 바닥에 모든 것을 토해 냈었다. 그걸 맨손으로 다시 그러모으고, 죄송하다고 고개를 조아리고. 겁에 질려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던 나언에게 어떻게 했더라.
“……맛이 별론가?”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기원이 겨우 젖었던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나언 역시 걱정과 의문이 깃든 눈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저를 빙글 고쳐 쥔 기원은 얼른 고기를 한 점 떠 입에서 씹었다.
“그럴 리가요.”
기원의 산뜻한 대답에 나언의 표정이 조금 풀리는 걸 확인했다.
원래 같으면 저녁을 먹고 서울로 올라가려 했던 기원은 나언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나언이 먼저 들어간 뒤 따라 들어가 방문을 닫자, 나언은 개어 뒀던 이불을 펴기 위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주무시고 가요?”
“백나언 씨. 서울 가요.”
나언은 그런 기원을 외면하며 접어 뒀던 기원 몫의 이불과 베개를 꺼냈다. 손도 성치 않으면서 애써 이불을 바닥에 까는 나언의 팔뚝을 끌어다 당겨 눈을 보게 만들었다.
“여기서 정말 잘 지내면, 정말 나 만나기 전처럼 잘 지내면 그냥 두려 했어요.”
“…….”
“그런데 아니잖아요. 손은 점점 상태 나빠지고, 나언 씨는 밤새 악몽에 시달려요.”
“그런 적 없,”
“책임지고 돌려놓게 해 줘요, 망가뜨린 거 전부.”
나언이 원망 어린 눈으로 기원을 올려다봤다.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입술을 짓씹기만 하다 작게 숨을 헐떡였다. 과하게 올라오려는 감정을 짓눌렀지만 목소리 끝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그러게, 왜 그랬어요.”
“…….”
“왜 망가뜨리고 뺏었어요.”
“…….”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거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서, 못 하겠다고요.”
결국 나언의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남해, 좋다. 목숨을 살려 줬던 이들에게 한 번 더 은혜를 입는다 생각하고, 나언은 여기에서 평생 지내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하지만 줄곧 가슴에 먹먹한 기운은 스며 있었다.
어느덧 손이 아픈 반병신이 되어 나이만 먹어 가고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이 딱히 필요 없는 조그만 가게에 숙식 근로자로 굴러들어 와 과한 용돈을 받으며 기생 중이었다. 언제까지 아주머니에게 민폐를 끼칠 수 없는 노릇이고, 저도 제 살길 찾아 떠나야 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렴풋하게도 가늠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 누구보다 스스로가 제일 괴롭게 체감 중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갈 수 없는 이유. 바로 눈앞의 남자 때문이다. 서울로 가면, 당장 먹고살 수 없는 자신이 기대야 하는 건 최기원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3년 전, 처절하게 겪었었다. 만약 그와 다시 함께 지내게 됐을 때, 제대로 된 삶을 정말 찾아 나갈 수 있을까. 다시 예전처럼 글도 모르고 숫자도 헤아리지 못하는 머저리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또 스스로 한 선택에 못 견뎌 그를 원망하고 탓하다 포기해 버리면 어떡하지.
“진짜, …무섭다고요.”
나언의 말에 기원이 우두커니 선 채 붉게 핏발이 선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나언의 어깨를 붙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난 너를 두고 무책임하게 죽지 않아.”
“…….”
“네가 죽는다면 따라갈 거고.”
“…….”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때, 내가 맞출게.”
기원이 웃었다. 그러더니 아프게 쥐었던 어깨를 놓고 손목의 시계를 풀었다. 그러곤 나언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봐.”
손목에 까만 눈동자가 닿는 순간, 나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기원의 손목은 여러 겹의 자해 흉터로 울퉁불퉁하게 변해 있었다.
“힘들어서 그은 건 아니야. 궁금했거든.”
“무, 무슨.”
“이건 네가 얼마나 아팠을지.”
기원의 손가락이 제일 아래의 상처를 짚었다.
“이건 파우더룸에 앉아 있던 네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
“이건, 네가 어떤 마음으로 마지막 시도를 했을지.”
마지막은 가장 길고 두꺼운 분홍색 상처를 짚었다. 점점 나언의 숨이 가빠졌다. 3년간 기원이 걷던 나락은, 자신의 것과 비슷한 색채를 띤 흉터를 남겼다. ‘내가 맞출게.’라는 담백한 말의 증거는 겹겹이 손목을 수놓은 처절한 상처들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궁금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나를 믿을지.”
기원은 선반 앞으로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나언은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 언뜻 허탈하게 웃는 것 같은 입매를 봤다. 기원은 방을 두리번대다 연필꽂이에 꽂힌 가위를 꺼내 들었다.
뭐라 말릴 새도 없었다. 차가운 금속이 기원의 손목으로 향하는 것과 동시에 경악한 나언이 기원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기원의 팔뚝을 부여잡고 손을 끌어내려 했지만, 기원의 힘에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이미 가위 끝이 손목에 박혀 들기 시작했다.
“하지, 하지 마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여차하면 그대로 살갗을 찢어발길 것처럼 단단했다. 나언이 죽을 것처럼 매달리며 기원을 향해 소리쳤다.
“무서우면 같이 가자. 같이 병원에 가고, 재활도 받고.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흐, 윽. 그만, 하라고….”
나언의 울음 섞인 호흡이 조금씩 가빠지며 기원을 붙든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손을 늘어뜨린 나언이 몇 걸음 뒷걸음질을 하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이마를 묻은 뒤, 점점 가빠 오는 숨을 겨우 나눠 쉬었다. 손이 파르르 떨리고 피가 돌지 못한 얼굴은 점점 파랗게 질렸다. 나언은 손을 들어 귀를 막고 눈을 꾹 감았다.
붕대 때문에 불편한 손까지 무리하게 써서, 결국 꿰맨 상처가 다시 터지며 거즈 사이로 핏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기원은 손목에 가위 끝을 박아 넣은 채로 쓰러진 나언을 바라봤다.
“하지 마요, 흐, 으, 진짜, 하, 흑, 하지, 마…….”
푹. 꽂았던 가위를 떼어 내자 아릿한 통증과 함께 선혈이 흘러내렸다. 꽤 깊게 박아 넣겠다고 생각했는데도, 나언이 팔을 붙잡은 통에 날이 깊게 들어가지 못했다. 얼마나 세게, 독하게 마음을 먹고 살을 찢어 놨어야 그렇게 흥건하게 피를 흘리고 심장이 멎는 건지. 정작 겨우 이런 얕은 상처 하나에도 숨을 꼴딱대며 울부짖는 약한 나언이 더욱 안쓰러웠다.
기원이 가위를 툭 던지고 나언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체취에 겨우 고개를 든 나언은 어기적어기적 기어 기원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댔다.
“아,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흐, 윽…….”
“괜찮아. 숨 쉬어.”
밤새 악몽을 겪었다던 기원의 말이 맞는 걸까. 그의 품에 파고드는 것 하나만으로 이상하게 찢어질 것 같은 심장 박동이 점차 느려졌다. 금세 잠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몸이 나른해졌다. 나언은 그러지 말라는 말만을 중얼대며 눈을 감고 흐느꼈다.
기원은 제 품에서 아이처럼 우는 나언의 귓바퀴에 부드럽게 입술을 붙였다. 미안하다고, 알겠다고 속삭이며 열이 오른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미 우린 돌이킬 수 없다.
이상하게도 그 숨 막히는 결론이 지금은 크게 두렵지 않았다.
나락으로 함께 몸을 던져 줄 준비가 된 이는 언제나 제 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