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2) 저온 화상 (22/28)

외전 2. (2) 저온 화상

마음먹고 나니, 아주머니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쉬웠다. 손목 치료와 학업 재개. 그 두 가지 이유로 서울을 다시 가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을 보였던 아주머니께서도 끝에는 나언을 응원했다. 조금은 먹먹한 분위기 속에서 나언은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을 남겼다.

할아버지와 아주머니가 배웅하러 가게 앞에 서 계셨다.

“밥 잘 챙겨 먹어라. 응?”

“네, 자주 올게요.”

반찬거리를 가득 싼 분홍색 보따리가 트렁크에 실렸다. 기사님이 문을 열어 주고, 조수석에는 비서님, 뒷좌석에는 나언과 기원이 나란히 올랐다. 나언은 어미 고양이와 새끼 두 마리가 함께 들어 있는 커다란 이동장을 껴안은 채로 아주머니께 손을 흔들었다.

비서님은 나언에게 여정을 간단히 설명했다. 가까운 공항까지는 차를 타고 이동하고, 기원과 나언은 서울까지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눈가가 붉어진 채로 코를 자꾸 들이켜는 나언을 보며 기원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할아버지랑 아주머니 서울에 모시고 싶으면 말해요. 그대로 옮겨 줄 테니까.”

“아뇨…. 제가 자주 오면 돼요.”

어찌 그들의 삶의 터전까지 제 입맛대로 바꾸겠는가. 기원의 이기적인 사고방식에는 아마 평생 적응하기 힘드리라 생각하며, 나언은 점점 멀어져 가는 남해를 눈에 담았다.

***

완연한 가을이 찾아왔다. 나언은 기원이 마련해 준 아파트에 살기로 했다. 당연히 혼자 지내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함께 지내자는 제안을 꺼낸 건 나언이였다.

“어차피 매일 오실 거잖아요.”

“…….”

“기름도 아깝고… 방은 많으니까….”

몇 개 없는 짐을 방으로 들고 가며 나언이 중얼댔다. 은근히 심드렁한 대답에 기원도 기가 차 헛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아니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작은 머리통이 짐을 정리하느라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닐 때마다 검은 머리카락이 간지럽게 흔들렸다. 어미 고양이는 가장 햇살이 잘 들어오는 러그 한가운데에 편하게 앉았고, 새끼 둘은 바삐 오가는 나언을 따라다니느라 분주했다.

“어미는 ‘바다’라고 지었어요. 새끼 중에 얘는 ‘파’고, 얘는 ‘도’예요. 파는 코가 분홍색이고 도는 코에 점이 있어요. 코 잘 보면 구분할 수 있어요.”

짐 정리를 마친 나언이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점점 편해지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긴장이 묻어 불안하게 깜빡이던 눈도 유순하게 늘어졌고, 반기가 가득했던 분위기도 조금 온기가 깃든다. 그렇게 하루, 이틀. 1분이라도 더 많이 마주하다 보면 조금씩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사랑하진 않아도, 그저 이렇게 함께라면.

기원은 나언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위가 박혀 들었던 상처를 더듬었다. 이제는 조금 큰 밴드 하나로도 충분히 덮이는 상처에는 칼날 모양 그대로 딱지가 앉았다. 이번에도 부러 치료받지 않았고 흉한 모양 그대로 흉터가 남기를 바랐다.

반면 나언은 손목을 정밀하게 진단한 후 본격적으로 치료를 시작했다. 불규칙적으로 느껴지는 통증은 역시나 신경 손상 때문이었다. 물리 치료를 받으며 동시에 특정 자세를 취하지 못하는 손가락의 근육을 되돌리기 위한 재활 치료도 병행했다.

나언의 서울 생활은 다행히도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기원이 불러 주는 사용인들이 음식과 청소를 맡아서 해 줬다. 그저 정해진 시간에 재활 치료를 받고, 운동 스케줄이 잡히면 아파트 헬스장으로 내려가 운동을 했다. 때맞춰 고양이 밥을 챙겨 주고 새끼들과 힘껏 놀아 주면 그만인 여유로운 하루. 걱정했던 것과 달리 시간은 꽤나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리고 기원은 일주일 중 사나흘 정도만 출근하고 대부분 나언과 함께 집에 있었다. 별다른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각자의 방에서 시간을 죽이면서도, 밥은 꼬박꼬박 함께 먹었다. 가끔 컨디션이 나쁠 때, 나언이 잘 먹어 내지 못하면 기원은 부드러운 죽이나 수프를 금세 만들었다. 언제나 나언을 챙겨 먹이는 것에 진심인 그가 가장 세심하게 챙기는 것이었다.

오늘도 무언가를 잔뜩 먹은 나언은 너무 배가 불러 침대에 앉아 멍하게 바다를 쓰다듬고 있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더니 기원이 그릇을 보여 줬다. 탐스러운 복숭아가 그릇에 어슷하게 썰려 있었다.

“와서 먹어요.”

사용인들이 돌아간 모양인지, 집은 기묘할 정도로 조용했다. 기원이 소파 테이블 위에 과일을 올리고, 선반에서 퍼즐 하나를 꺼내 와서 바닥에 쏟았다.

유아용이 아닌, 어른이 하는 번듯한 1,000피스짜리 퍼즐이었다. 기원은 복숭아 하나를 포크로 찍어 나언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엄청 어려운 건데, 같이 해요.”

기원과 함께 맞추는 퍼즐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목뒤를 주물대던 나언은 조심스레 기원을 따라 러그 위에 앉았다. 아주 작고 복잡하게 생긴 조각 중 하나를 들어 손가락 안에서 굴렸다. 차마 내려놓진 못하고, 달큼한 복숭아만 사각사각 갉아 먹었다.

“어려운 거 맞아요. 이건 나도 헷갈리거든.”

아무래도 같은 과거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나언이 단 기운이 묻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만 있자, 기원은 퍼즐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그림을 펼쳐 들었다. 나언도 본 적 있는 유명한 그림이었다.

“고흐, 꽃 피는 아몬드 나무.”

“……아몬드.”

괜히 뒷말을 따라 중얼대는 나언이 귀여워 입매를 끌어 올린 기원은 종이를 든 채로 등을 대고 누웠다. 그림을 올려다보며 나언에게 이 퍼즐을 산 이유를 설명했다.

“봄에 피는 꽃나무예요. 고흐가 동생에게 출산 선물로 줬다고 하는데,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의미라고 하네요.”

인생의 새로운 시작.

나언은 현재 상태를 아직 그렇게 멋들어진 순간이라 평가하지 않았지만, 기원은 나언이 서울로 올라온 것이 꽤나 큰 전환점이자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저나, 나언에게나 모두.

“같이 완성해요.”

빙글 몸을 돌려 배를 대고 누운 기원이 본격적으로 퍼즐 맞추기를 시작했다. 그림을 보고, 대충 조각을 놓고. 또 비슷한 것이 있으면 꽂아 보고 틀리면 빼냈다.

나언은 퍼즐에 열중하는 기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세팅하지 않아 이마를 가린 검은 머리카락과, 갸름한 턱, 그 사이에 우뚝 솟은 날카로운 콧날. 턱을 괸 채 열중하는 모습에 시선이 자연스레 끌릴 정도로 잘 빚어진 얼굴이었다. 행여 지원이 형과 닮은 점을 찾을까 봐, 예쁜 얼굴에 흔들릴까 봐 마주하지 못했던 기원의 생김새가 이제야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

제 형과 그렇게 오래 만나는 걸 봤는데도. 그런데도 왜 저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그건 아무래도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할 듯하다.

“나 그만 구경하고, 퍼즐 해요.”

나언이 허둥지둥 시선을 내려 제 발 앞에 있는 조각 하나를 들었다. 기원은 새빨갛게 물든 나언의 귀와 뺨을 흘긋 바라보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나언은 얼른 퍼즐과 그림을 번갈아 보고 그럴듯한 곳에 퍼즐을 푹 끼워 넣었다.

“어…….”

그런데 안 맞는 것 같다. 묘하게 연결되지 않는 나뭇가지 그림을 바라보던 나언이 다시 조각을 빼냈다. 기원이 했던 것처럼.

그러더니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기원은 고개를 들어 나언을 바라봤다. 조각 하나를 손으로 만지고, 또 매만지며 나언이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땐 이게 왜 이렇게 서러웠는지 모르겠어요.”

“…….”

“틀리는 게 두렵고, 잘못될까 봐 너무 겁났어요.”

“…….”

“다시 하면 되는데, 천천히.”

그렇죠, 라고 물으며 나언이 물끄러미 기원을 내려다봤다. 고양이들도 모두 숨죽이고 깊은 잠에 들 만큼 고요하고 나른한 저녁. 기원은 잠시 표정을 굳히고 편안함에 이른 나언을 바라봤다. 불시에 눈이 마주치고, 거실에는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럼요.”

짧은 대답을 남기며 기원이 똑바로 앉았다. 나언의 손을 끌어당겨 손을 겹친 채로 퍼즐을 꽂았다. 아까와 달리 매끄럽게 그림이 연결됐다. 나언이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 순간, 기원은 손을 놓지 않고 나언을 한 번 더 당겼다.

겨우 맞췄던 퍼즐이 나언의 무릎 때문에 흩어졌다. 그대로 아래로 쏟아지려 하는 가벼운 몸뚱이를 받쳐 주며, 기원은 나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마른 어깨가 긴장에 딱딱하게 굳었다. 손바닥이 기원의 가슴을 살짝 밀어내려 한다. 기원은 그 손에 제 손가락을 얽은 후 끌어 내리며 입술을 더 깊이 머금었다.

“…….”

“…….”

당혹에 눈을 크게 뜬 나언은 미간을 옅게 찌푸린 채로 눈을 감은 기원을 바라봤다. 이내 나언 역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물린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파고들었다. 나언은 기원의 품에 엎어지듯 쓰러진 채로 기원의 키스를 받았다.

너무나 요란한 기원의 심장 소리에 나언은 왠지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시큰한 감정이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그 누구보다 나의 불행을 원했던 이. 나에게 어떠한 감정이라도 받아 내길 원해, 원망이라도 기껍게 받아들였던 사람. 하지만 그가 봄처럼 따스하게 다가왔다면 나는 그에게 마음을 열었을까.

아니, 결단코 아니었다. 형의 죽음과, 주언이의 아픔, 아버지의 빚. 모든 불행에 켜켜이 떠밀렸기에, 최기원을 동아줄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우린 서로에게 너무나 버거웠고 난 엉망이 된 채로 벼랑 끝으로 떠밀렸었다. 스스로 마지막을 택하고 싶을 만큼 그가 원망스러웠고 여전히 그는 나에게 힘들면서도 미운 존재다.

하지만 이젠 그 불행조차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올 뿐이다. 그와 눈을 맞추고, 살을 맞대고 혀를 섞는 순간이 더는 날카로운 겨울바람 같던 상처가 아니다. 그저 안온하고 은은한 봄처럼 조금씩 스며들어 머리끝까지 잠기게 하는 최기원의 온도는, 낮지만 분명 나를 데이게 만든다.

내가 과거의 고통에 힘겨워할수록 그는 말없이 깊이 나를 끌어안을 뿐이며, 그곳엔 진한 흉터가 새로 자리 잡는다. 나를 끌어 올리는 대신, 바다 깊고 어두운 구석까지 함께 내려올 준비를 마친 그에게선 조금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얼마나 시간이 흐르든 여전히 곁을 지키고 있는 그는, 예전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여전히 나를 사랑하지만 증오하진 않는다. 여전히 이기적이지만 그 명분은 전부 나다. 내가 힘들어하며 안겨 드는 것을 바라면서도, 내가 고통에 몸부림치면 함께 괴로워한다.

그 크고 분명한 간극에 기대어 과거의 불행이 조금씩 어렴풋해지길 기다리다 보면, 최기원의 온도에 맞닿은 수많은 과거와 혼란한 감정들이 엉겨 붙어 한 덩어리로 얽혀 버린다. 이젠 마음껏 잘라 낼 수조차 없을 만큼 엉겨 붙어, 끊어 내기엔 너무나 복잡한 모양새로 가슴에 자리를 잡아 버렸다.

“…….”

“…….”

숨이 찬지, 살짝 헐떡이는 나언의 등을 커다란 손이 잘게 두드렸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기원의 긴 손가락이 나언의 뺨을 옆으로 쓸었다. 번진 눈물 위로 다시 새로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버거운 호흡 사이로, 기원의 더운 숨도 섞여 들었다.

서울 야경의 흐릿한 불빛이 어둑한 거실에 반짝였다.

***

“하고 싶은 일은 없어요?”

아침을 먹던 중 기원이 물었다.

마치 날씨를 묻는 듯 한없이 가벼운 질문에 잠시 나언이 굳었다. 하고 싶은 일…? 나언에겐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도 전혀 답을 찾지 못해 언제나 희뿌옇고 매캐하기만 한 화제.

정확히 말하면 일은 하고 싶지만, 하고 싶은 일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어불성설이지만 나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고 싶은 건 없어요.”

“어렸을 때 꿈이 뭐였는데요?”

“…….”

“뭐가 되고 싶다, 이런 거.”

소고기가 잔뜩 들어 있는 뜨끈한 미역국에 밥숟갈을 푹 담갔다 뺀 나언이 밥을 크게 한 입 넣고 우물댔다. 기원에게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도 과거의 자신과 생각은 비슷했다. 볼을 씰룩대며 열심히 씹고 꿀떡 넘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최고다.

“…대기업에서 월급 많이 받는 회사원이요.”

“…….”

“가끔 인센티브 나오면 주언이 병원비로 쓰고, 남은 돈으로 맛있는 것도 사 먹을 정도로 많이 버는 회사원…. 그러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소박하네.”

소박하다고 말하는 기원이 미울 만큼, 나언에게는 간절했었고, 지금도 간절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진 못하더라도 비슷하게 흉내는 내고 살 줄 알았다. 살다 보니 너무나 기구한 팔자, 원망해 봤자 크게 달라질 것 없기에 자책은 그쯤 하기로 했다.

그 후로도 기원은 마치 간을 보는 사람처럼 종종 나언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예전에 교수에게 일대일로 배웠던 공부는 어땠냐는 질문에 나언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그때 배웠던 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 당시 나언의 멘탈은 그야말로 진창이었다. 머리에 유의미한 것이 남았을 리 없었다.

그러면 다시 경제학 공부를 시작하고 싶냐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고 싶다 하더라도 대학 공부를 이어 가기엔 나이가 다소 많은 것 같았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휘적대다 늦지 않았을까요, 하는 조그만 목소리에서 기원은 일말의 미련을 찾아냈다.

오늘은 운동 스케줄만 있는 날이었다.

“들어가십쇼, 회원님!”

예전, 잠깐 기원의 집에서 일대일 PT를 도맡았던 강사님은 여전히 쾌활하고 자비가 없었다. 다리 근육이 모조리 파괴된 것 같은 격통을 느끼며 나언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비틀대며 복도를 지났고, 도어 록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갔다. 하체 운동을 했는데, 손이 왜 떨리는지 모르겠다.

“어……?”

기원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는 것을 봤는데, 몇 시간 지났다고 돌아온 걸까.

“왔어요?”

“네, 일찍 오셨네요.”

기원은 부들부들 겨우 걷는 나언을 보더니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언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 천천히 방으로 갔다.

“씻고 나와요, 나가서 데이트 좀 하게.”

입맞춤 한 번 한 이후로, 저런 낯간지러운 소리도 은근하게 시작했다. 나언은 늘 그렇듯 대꾸하지 않고 방으로 갔다. 땀이 난 몸을 따스한 물로 씻어 내리며 뭘 입고 나갈지 고민했다. 문득, 이런 일상의 고민을 시작한 스스로가 믿기지 않아 나언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입매를 끌어 올렸다.

기원의 운전은 역시나 거칠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천천히 가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기원은 청담 한복판의 테일러 숍 앞에서 정차했다. 익숙하게 차 키를 맡기고, 속이 울렁대 기진맥진한 나언과 함께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언은 어느새 줄자에 몸을 맡긴 상태였다. 사이즈를 꼼꼼하게 체크한 직원은 몇 가지 옷감을 나언의 어깨 주변에 가져다 대며 색상을 체크했다. 질문은 많지 않았다. 나언 스스로도 모르는 취향을 직원과 기원의 상의로 결정했다.

말리려 몇 번이고 끼어들려 했지만 기원은 나언이 입을 달싹댈 때마다 검지를 입술 위에 올리고 조용히 하란 모션을 취했다. 점점 옵션을 적은 종이가 쌓여 갈수록 나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전부 맞춤 정장이었기에 손에 든 것은 없는데, 기원은 그 테일러 숍에서 나언이 말한 평범한 대기업 직장인의 연봉에 가까운 돈을 결제했다. 가격을 듣자 등에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이런 말 하면 기원이 싫어하겠지만, 그는 한때 주언이 젤리 하나 사는 것으로도 인간 이하의 요구를 하고 사람을 시달리게 했던 전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좋아서 사 주는 거겠지만, 나언에겐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과한 선물이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나언이 눈썹을 끌어 내렸다. 자주 입지도 않는 스타일의 옷이 비싸기까지 하니 부담이 밀려온 탓이다.

“왜 갑자기 정장을 사요…?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면접 복장 좀 사 봤어요.”

“면접이요?”

기원이 핸들을 돌리며 씨익 웃었다. 나언은 눈을 끔뻑였다. 의문을 실은 차는 근교의 카페를 향해 질주했다. 텅텅 빈 주차장을 지나 안으로 들어오니, 마치 기원이 통째로 빌린 듯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흐드러지게 돋아난 주홍빛 잎사귀가 한눈에 보이는 통유리 창가에 마주 앉은 둘은 아무런 말 없이 시원한 음료를 홀짝였다. 목을 축인 기원은 테이블 위에 작은 책자를 올렸다.

‘세원 호텔….’

글자를 읽어 내리는 나언의 눈에 당혹이 번졌다.

“때마침 자리가 하나 비어서요. 신입 채용을 좀 하려고요.”

“……호텔이요?”

“미술은 재미없다면서요. 내 비서로 두고 부리긴 백나언 씨가 싫을 테고. 호텔이면 뭐, 나언 씨랑 출장 핑계로 여행 가기도 좋고, 남해에 리조트도 하나 지을 거라 아주머니 자주 뵙기도 좋잖아요. 여기 직원 할인도 되는-,”

“잠시만요, 리조트 결국 짓기로 했어요…?”

나언의 경악 어린 질문에 기원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커피를 들이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남해에 리조트를 짓는 건, 그야말로 기원의 객기였다. 발단은 지난달에 벌어졌던 한 영화 촬영팀과의 마찰이었다.

나언이 아무 짓 하지 말라고 했건만,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나언이 모르게 일을 진행하려 했으나, 뉴스에 난 기사를 보고 나언이 눈을 크게 떴다. 시작은 주연으로 캐스팅됐던 배우의 불륜 열애설. 그리고 연이어 영화감독의 스태프 갑질 논란과 함께 성추문 의혹까지 연속으로 매스컴을 탔다.

처음엔 그저 우연이라 생각했다. 치미는 비판 여론에도 꿋꿋하게 영화 촬영을 강행하자, 기원은 촬영을 하고 있는 남해의 부지를 딱 집어 매입한 후 리조트 건설을 강행했다. 관광객이 많지 않다는 사측의 우려에도 기원은 손해는 사비로 책임지겠으니 진행하라는 말로 일갈했다.

더군다나 바닷가와 가까운 곳이기에 지자체와 몇 번의 협의를 거듭하고 나서야 겨우 건설 일자를 조율했다. 협의를 진행하면서도 홍보 및 도민 이용객에 대한 파격적 지원 등 자질구레한 조건이 붙었다. 모든 것을 수락한 기원이 꺼낸 조건은 단 하나.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공사에 착수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결국 막대한 홍보와 관광객 유치를 고려한 지자체는 기원의 편에 섰다. 영화 팀에게는 통보 아닌 통보식으로 촬영 허가 판정이 번복됐다. 그제야 나언은 앞선 모든 일들이 기원의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난 그냥 나언 씨랑 리조트 가려고 짓는 건데.”

“…거짓말 마요.”

나언의 뾰로통한 대답에 기원이 결국 아랫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언을 떠밀었던 남자가 지금 뺑소니 사고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는 건, 끝내 비밀로 남기기로 했다.

한편 나언은 괜히 머리가 아파져 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아무튼, 기원의 개인적인 복수전을 차치하고서라도 갑작스레 입사 면접을 본다는 것은 다소 생뚱맞은 소리였다.

하지만 기원은 모든 것을 고려해 나언의 자리를 만들었다. 본인이 낙하산이라 느낀다면 분명 자괴감에 눈치를 보며 힘들어할 스타일이다. 적당히 시키는 일을 할 수 있으면서도 야무진 부원이 많아 나언이 어물쩍 묻어가기도 좋은 부서. 요즘 기원이 주력하는 호텔 마케팅 부서이기에 자주 오갈 수 있으면서도, 비서처럼 너무 붙어 있지는 않아 낙하산 의심은 사지 않을 자리. 중도에 그만두긴 했지만, 나언이 다녔던 대학교의 전공도 조금은 고려했다.

“돈 많이 주는 대기업 다니고 싶다면서요.”

“…….”

“한번 다녀 봐요. 별로면 또 다른 거 찾아보고.”

“그래도 제힘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냥 붙여 주는 거 아니에요. 나언 씨 힘으로 면접 준비해서 합격해야죠. 난 그 기회만 주는 거고.”

기원의 설명에 나언의 낯빛이 금세 긴장으로 물들었다. 기원은 나언의 커다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학교고 취업이고. 나 때문에 못 하게 된 거니까. 이럴 땐 나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알겠다고 하면 됩니다.”

기원이 손가락으로 책자를 밀어 나언의 쪽으로 더 가까이 건넸다. 결국 나언은 책자를 들었다. 세원 그룹의 전체적인 홍보 문구와 함께 호텔 부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들어 있는 책이었다.

그저 훑어보겠다는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어 내리던 눈은 순식간에 책자 전체를 찬찬히 살피게 됐다. 기원은 조용히 책을 읽는 나언을 지켜봤다.

햇살이 번져 들어오며 유순한 콧날 옆으로 그림자가 졌다. 글씨를 따라 움직이는 눈동자는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맑게 빛났고, 긴 속눈썹 아래로 드리운 그림자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산들대며 흔들렸다. 살짝 붉어진 뺨이 미세하게 솟아올랐고 단내가 풍기는 도톰한 입술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그저 꿈을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도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이해하지도 못하는 미술 서적의 글씨를 따라 쓰던 나언의 생기 없는 낯을 떠올린 기원은, 가슴을 차가운 칼로 도려내는 듯한 후회로 인해 속이 불편해졌다.

그로부터 며칠 후, 여전히 미완성인 퍼즐 앞에서 파, 도와 뒹굴대던 나언은 옆에서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기원에게 물었다.

“저 면접은 언제 봐요?”

재활과 운동 등 스케줄을 계속 나가면서 틈틈이 면접 준비를 하는데 정작 면접 날짜에 대한 건 어떤 언질도 없었다. 나언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안경을 벗은 기원이 되물었다.

“언제가 좋은데요?”

“예……? 그런 걸 보통 제가… 정하나요?”

“그렇진 않지만, 어차피 우리 둘이 보는 건데.”

단둘이 보는 면접이라니. 나언은 순간 맥이 빠졌다. 하지만 그 기회조차 과분했기에 얼른 표정을 정돈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원이 피식 웃으며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준비되면 말해요, 당장이라도 볼 테니까.”

“아… 당장은 좀 그래요.”

“뭘 얼마나 더 준비하려고.”

이미 기원이 준 책자는 덕지덕지 붙인 포스트잇과 형광펜의 향연으로 매우 낡아져 있었다. 얼마 전에는 태블릿을 빌려 가더니 한참 돌려주지 않았다. 소셜 미디어 영상 시청 기록을 보니, 모두 ‘실전 면접 TIP!’, ‘면접, 이것만 준비하면 프리 패스라구요.’, ‘면접 VLOG’ 이딴 영상 몇십 개를 연달아 시청했었다.

볼 뽀뽀에 신입 채용, 입술 뽀뽀에 경력 채용, 횟수에 따라 연봉과 인센을 조정해 주는 파렴치한 면접을 계획했던 기원은 잠시 심호흡을 해야 했다. 상대는 생각보다 무해하고 진심이었다.

그렇게 며칠 뒤, 쭈뼛대며 눈치를 보던 나언이 아침을 먹으며 비장하게 면접을 화두에 올렸다. 이제 면접 보고 싶다며 포크를 만지작댔다. 기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그날 회사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집에 머물렀다.

“면접은 오전 열한 시.”

기원의 통보에 나언의 뺨에 긴장한 기색이 확 번진다. 기원은 은은한 미소를 매단 채 나언에게 말했다.

“가서 옷 갈아입고 내 방으로 와요.”

“…방이요?”

“왜요?”

“아, 아니에요.”

집에서 본다는 것에 한 번 더 바람이 빠졌다. 그렇지만 나언은 어차피 둘이 보는 면접, 장소를 새로 잡는 것 또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왜 정장은 차려입어야 하는지 의문이 깃들었다. 그럼에도 나언은 제 몸에 꼭 맞게 재단된 검은 슈트를 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었다. 맨발도 예의에 어긋나니 쥐색 양말까지 골라 신었다.

제가 정리한 예상 질문에 대한 답을 몇 번이나 되뇌며 말하기 연습을 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고양이를 끌어안은 채로 두근대는 마음을 가라앉힌 후, 조용히 기원의 방으로 달려갔다.

똑똑.

노크를 하고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장소만 집일 뿐이지, 정말 면접장 같은 느낌이 들며 괜히 심장이 조여들었다. 작게 숨을 뱉은 나언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전히 편한 옷을 입은 기원이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 기원은 자신이 앉아 있는 소파에 가까이 놓인 1인용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나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기원과 마주 앉았다. 이건 아침을 먹고 과일을 나눠 먹는 거실의 풍경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입고 있는 정장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뭐 해요? 자기소개 안 하고.”

하지만 기원의 다소 차가운 질문에 나언이 얼른 허리를 펴고 제대로 앉았다. 역시 장소만 그렇지, 이건 제대로 된 면접인 모양이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세원 호텔 기획·마케팅부에 지원하게 된 백나언입니다.”

그리고 나언이 자기소개를 한 순간, 기원이 눈을 크게 뜨며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웃음을 참는 것 같은 묘한 표정에 또 제가 실수한 것이 있나 되돌아보게 됐다.

“무, 무슨 문제라도….”

“아니요. 지원자분, 사장님이라고 한 번 더 불러 보세요.”

“사, 사장님…?”

“응, 합격.”

나언이 미간을 왈칵 찌푸렸다. 순 장난 아닌가…! 나언의 급격한 표정 변화에 결국 기원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가리며 시원하게 웃었다. 나언이 기원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 내렸다.

“장난이면 그만두세요…….”

“미안, 당연히 농담이죠. 자, 시작할까요?”

나언이 자는 사이 들춰 봤던 A4 용지에 줄줄이 쓰였던 구린 예상 질문만 골라 질문했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나언은 귀뺨을 복숭아색으로 물들인 채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공부 머리는 좀 있더니, 진부한 질문에 비해 답은 나름 논리와 통찰이 있다. 다만 예쁜 얼굴로 정장을 입고 조곤조곤 말하는 통에 내용은 전혀 귀담아 들리지 않는 게 문제였다. 기원은 미디어 아트를 감상하는 태도로 입을 벙긋대는 나언을 구경했다.

“끄, 끝인데요.”

“아, 네. 잘 들었어요.”

기원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질문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요.”

“저를 뽑아 주신다면 후회 없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웃음기가 깃들었던 회색 눈동자가 조금 어두워졌다. 나언이 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망가지지 않았다면 저런 목소리와 얼굴로 사회로의 첫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기원은 손가락으로 소파 손잡이를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정말요? 저 되게 일 힘들게 시키는데. 괜찮겠어요?”

“네. 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대던 나언이 주먹을 꾹 쥔 채 기원을 응시했다. 까만 눈동자에 커튼 너머로 전해진 햇살이 반짝이며 들어찼다.

“면접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면접 팁에서는 절대 하지 말라고 했던 말이었다. 다만, 나언은 꼭 하고 싶었다. 면접을 준비하는 며칠간은 정말 청춘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설렘이 있었다. 비록 집에서 하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지만 이런 구색만으로도 나언은 긴장을 느끼고 부푼 미래를 그려 볼 수 있었다. 정말 기원의 마음이 변해 모두 없던 일로 하자 그래도, 나언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요, 나가 봐요.”

나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까지 하더니 방을 나갔다. 아직까지 긴장이 묻어 있는 걸음걸이로 천천히 걸어간 나언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기원은 그대로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봤다. 정적이 내린 방 안에서 기원은 그렇게 한참 동안 천장만 빤히 노려봤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착잡하고, 스스로가 죽일 듯이 혐오스러워졌다.

다음 날 오전. 고양이 낚싯대로 바다와 열심히 놀던 나언은 합격 통보를 받았다. 집으로 배달 온 꽃바구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구니 한편에 꽂혀 있는 노란 메모지에는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좋은 소식을 담고 온 보라색 아이리스 꽃을 안아 든 나언은 광대가 함빡 솟을 만큼 입매를 예쁘게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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