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3) [번외] 안녕하세요 세원 호텔 기획 · 마케팅부 최지은 주임입니다.
얼마 전 부서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이름은 백나언. 나이는 서른.
한국대 대학원 출신에, 면접도 우수하게 치렀다고 한다. 사장님의 지인이라 낙하산으로 꽂혔다는 말이 자꾸 떠돌았지만, 그건 어디서 번진지 모르는 루머. 정식 채용 기간이 아닌, 비정기 채용으로 들어온 신입에게 자꾸만 무시무시한 소문이 붙었다.
중성적인 이름 탓인지 신입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분하게 의견이 갈렸고, 입사 첫날 조심스레 사무실로 걸어 들어오는 훤칠한 남자를 보고 다들 눈짓을 교환했다. 미친, 존나 잘생겼다고. 그리고 한 번 더 고개를 들어 눈을 크게 떴다. 저 얼굴이 서른이라고……?
기획 · 마케팅 부서 신입이기에 처음엔 홍보 모델이 사무실을 찾은 것으로 착각했다. 회색 정장을 빼어 입고,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넥타이를 맨 채로 걸어 들어온 신입이 제 소개를 하며 인사를 꾸벅했다. 적당하게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책상 아래로 주먹을 꾹 쥐고 허벅지를 쿡쿡 두드렸다. 뭐라도 쥐어뜯어야 이상한 추임새를 내지 않을 것 같았다.
신입은 팀장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배정받았다.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신입은 나를 보며 쭈뼛 인사를 하더니 옆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눈을 휘며 하이 톤으로 인사를 받은 나는, 한쪽 손으로 4년 사귄 남자 친구가 선물해 준 곰 인형을 뒤집었다. 배에 조그맣게 남자 친구의 이니셜이 각인되어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가리고 싶었다.
신입은 한참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회사 메신저와 공용 파일 업로드 시스템을 익혔다. 처음엔 조금 헤매더니 금방 적응하고 파일 하나도 업로드를 마쳤다. 모니터를 응시하며 클릭 몇 번을 하는데도 자꾸만 흘끔대게 되는 시선을 갈무리하느라 힘들었다.
기획팀에 신입이 왔다고 오랜만에 사장님도 사무실을 찾았다. 신입 하나 때문에 사장님이 방문하는 건 조금 이례적이었으나, 딱히 환영회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부장님의 설명에 금세 수긍했다. 우리는 사장님이 오기 전까지 열심히 사무실을 청소했다.
곧이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장님이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사원 전체가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했다.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사장님은 역시나 사원들의 인사를 받지 않았고 곧장 신입의 자리로 향했다. 아래위로 차려입은 꼭 맞는 슈트에 센스 있는 넥타이까지. 조금 차갑고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지만 그만큼 능력이 뛰어난 젊은 리더를, 우리 층 사원들 모두 긴장 어린 눈으로 살폈다.
“신입, 인사드려야지.”
신입이 긴장해 얼어 있자, 차장님이 조용히 언질을 줬다. 어깨를 퍼뜩 떨더니 바로 사장님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신입 사원 백나언입니다.”
“환영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건 됐고. 부서 사람들이 괴롭히진 않아요?”
농담인 듯 아닌 듯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사장님이 던진 질문 하나에, 우리 부서 직원 전체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눈을 크게 뜬 신입 역시 농담에 기가 죽어 말을 더듬었다.
“저 오늘 왔는데…. 그, 그럴 리가요.”
“그래요. 백나언 씨, 잘 부탁드릴게요.”
사장님이 예의 미소를 지으며 우리 부서를 둘러봤다. 큰 목소리로 대답하면서도 우리는 서로 눈치를 교환했다. 사장님이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저렇게 웃는 것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워낙 바쁜 회사라 나언 씨가 얼을 타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의외로 회사에 차분하게 적응 중이었다. 복사 용지도 스스로 채워 넣고, 간식도 잘 먹지 않으면서 탕비실 쓰레기봉투도 척척 갈았다. 행동과 말투가 크고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적재적소에서 존재감은 나타내는 사람. 왜 비정기 채용으로 그가 뽑혔는지 알 만했다.
한창 바쁜 오전 11시.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자 파티션 옆을 나언 씨가 똑똑 두드렸다.
“저 주임님…. 자리 비우셨을 때 이 행사 변경 사항에 대해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여기 적어 뒀습니다.”
“아, 네 감사해요.”
노란 포스트잇에는 또박또박 귀여운 글씨체로 질문자와 질문 내용이 요약되어 있었다.
“아 그리고 이런 경우에 제가 바로 답변드려도 되는 걸까요?”
“어, 그런데 나언 씨가 이 행사 건에 대해 알아요?”
“어제 나스에서 행사 계획 파일을 읽고 자서요.”
“와, 너무 열정 가득하면 금방 지쳐요.”
칭찬받아 마땅한 행동에도 부러 짓궂게 반응을 하니 신입이 멋쩍게 웃음을 터뜨렸다. 난 농담이라며 마주 웃어 준 뒤 나언 씨에게 설명했다.
“그러면 나언 씨 선에서 해결해도 좋죠. 대신 저에겐 상황만 알려 주고.”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을 해결한 표정의 나언 씨가 입술을 단단하게 물었다. 볼이 살짝 봉긋하게 솟아오르는 게 정말 나이와 얼굴이 매치가 안 됐다. 첫 주에는 파일 복사조차 헤매는 어리바리 그 자체였지만 그 어수룩함조차 귀여워 전혀 밉지 않았다. 일이야 덜 생긴 사람들이 이미 충분히 잘 해내고 있으니, 그저 신입은 존재만으로도 황송했는데 이제 적응 좀 했다고 일 머리까지 뽐냈다. 예뻐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나언 씨 점심 어떻게 해요? 아직이면 사 줄게요.”
회사 앞에 기가 막힌 돈가스집이 있는데, 꼭 사 주고 싶어 물었다. 그런데 내 제안에 나언 씨가 보기 드문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어… 죄송합니다, 주임님. 같이 먹을 사람이 있어서요.”
“어머 몰랐는데, 벌써 친구 사귀었어요?”
“아, 네….”
“숫기 별로 없어 보였는데, 의외네요. 잘했어요. 그럼, 맛점 하고 이따 봐요.”
아쉽지만 더 권했다간 조금 추해질 것 같았다. 적당히 인사를 하고 나오자 나언 씨도 후련한 표정으로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소 쌀쌀해진 날씨에 트렌치코트 하나만 입으니 조금 추웠다. 뜨끈한 1인 우동 세트로 배를 불린 나는, 아직 점심시간이 남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차에 올랐다. 조금 거리가 떨어진 마카롱 집에서 팀원에게 나눠 줄 마카롱과 따뜻한 커피를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신호 대기를 하던 중, 길 너머로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분명 친구랑 같이 밥을 먹는다고 하더니, 나언 씨가 사장님과 함께 초밥집으로 쑥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엔 잘못 봤나 싶었는데 절대 절대 잘못 볼 리가 없는 얼굴들이었다.
빵-!
신호가 바뀌었던 모양인지 뒤차가 얼른 출발하라고 클랙슨을 울렸다. 나는 다급하게 좌회전 차선으로 변경한 후 유턴을 했다. 나쁜 짓이라는 건 알지만, 마지막에 문을 잡아 주는 사장님이 환하게 웃고 있는 걸 보고 나는 이상한 직감에 사로잡혔다. 아주, 아주아주 불길하고도 싸한 예감에.
***
일단 초밥집에 들어는 왔는데, 자리마다 칸막이가 있고, 룸도 따로 있는 곳이라 사장님과 나언 씨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 자리에나 앉으니 물과 일회용 손수건을 가져다주는 직원이 혼자 왔냐고 물었다.
“뭐 드시겠어요?”
“아, 저… 제일 싼 거요.”
“예?”
“식사 중에 제일 싼 거요…….”
“아, 네. 알밥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구질구질하지만, 여기는 가격대가 꽤나 높은 일식집 중 하나였다. 게다가 지금은 알밥이고 나발이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말라 버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물부터 들이켰다. 아까 차창 너머로 본 장면이 잊히질 않는다.
성큼성큼 걷는 사장님을 따라 신입이 걸음을 옮겼고, 신입이 무어라 말을 하자 사장님이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사장님이 문을 열어 주더니 신입은 냉큼 그 사이를 지나가는 게 아닌가! 모든 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해 보였다.
“역시 낙하산이었어.”
일을 잘해서 뽑혔을 거라 결론 내렸던 건 온데간데없이 잊어버리고, 나는 백나언 씨가 낙하산이었다는 증거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그가 낙하산이라는 게 확실해지면 난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정말 나만 가진 히든카드로 생각하고, 나언 씨에게 열과 성을 다해 잘해 줄 것이다. 절대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할 선배로 기억된 후, 나중에 고과나 인센에서 이득을 본다면 개이득이니까. 그러기 위해선 이 모든 심증의 확실한 증거부터 찾아야 했다.
“아, 일단 화장실.”
자리에서 나와 화장실에 가려는데, 건너편에서 타박타박 걸어 나오는 나언 씨를 발견했다. 그리고 뒤이어 사장님이 걸어 나왔다. 이게 웬 떡인가.
“뭐 하러 화장실까지 같이 가요.”
“내 마음인데.”
사장님은 유치한 대꾸를 하며 나언 씨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살 흔들었다.
‘와 미친.’
친해도 그냥 친한 정도가 아닌 것 같다. 나는 후다닥 코너에 붙어 먼저 화장실 쪽으로 몸을 틀었다. 다행히 남자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친 짓임을 알면서도, 나는 앞으로의 회사 생활을 걸고 남자 화장실로 뛰어가 청소 용품 칸 안에 몸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명분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언 씨의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기 위해 용변을 해결하는 소리는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뒤이어 들린 사장님의 목소리에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손을 떼어 내게 됐다.
“자지 예쁜 것 봐.”
“아니, 왜 이걸 보냐구요… 더럽게.”
“같은 구멍에서 나오는 건데 이건 더럽고 그건 안 더러워?”
“아, 진짜…!”
“내 몸에 잘만 싸지르,”
“제발 조용히 좀 해 주세요, 진짜….”
나언 씨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애절해졌다. 손을 후딱 씻은 나언 씨가 갑자기 화장실 대변기 칸 문을 하나씩 열며 말했다.
“여기 회사랑 가깝잖아요, 생각 없이 왜 그래요 정말…!”
끼익 쾅, 끼익 쾅….
점점 제일 안쪽의 청소 도구함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청소 도구함은 잠금장치가 없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내가 들어 있는 청소 도구함으로 나언 씨가 다가오던 찰나, 갑자기 무언가 잡아채는 소리와 함께 두 명이 대변기 한 칸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내 옆 칸이었다.
“너나 생각 좀 하고 예뻤어야지.”
“무, 무슨.”
“누가 이렇게 꼴리게 입고 오래.”
“뭐, 라는… 하, 으읏. 하지 마요…….”
“이 셔츠는 버려야겠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의미로 청소 도구함 밖을 나가지 못했다. 입술이 맞닿는 소리가 들린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낙하산이… 그냥 낙하산이 아니라….’
입술을 물고 빠는 단순한 수준의 소리에서 시작해, 점점 혀를 섞는 노골적인 소리가 커져만 갔다. 키스를 뭐 이렇게 격하게 하는지…. 나언 씨를 벽에 떠밀 때마다, 내가 있는 칸까지 진동이 세게 전해졌다. 부딪힐 때마다 고통에 신음하던 나언 씨도, 끝에는 야릇한 비음을 섞어 가며 사장님에게 먼저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너무나 길고, 집요한 시간이었다. 화장실이라 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려, 나무 칸으로 가려진 너머의 상황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져 더욱 곤욕스러웠다.
낙하산인 걸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 하게 됐다. 차라리 몰랐으면 나았으려나. 괴로움에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던 중, 남자 화장실에 누군가 들어왔다. 저벅대는 발걸음 소리에 나언 씨가 다급하게 사장님을 저지했다. 조금 뒤 두 사람이 화장실을 나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알밥은 손도 대지 못하고, 그대로 계산만 끝낸 후 일식집을 떠났다. 발이 질질 끌리고, 괜히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사무실에 들어와 멍하게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는데,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헐레벌떡 들어온 나언 씨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주임님?”
“아, 네에.”
너무 어색하지 않게, 얼굴 표정에 신경 쓰며 나언 씨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흩뜨려야 했다.
나언 씨의 셔츠 칼라 아래로 보이는 울긋불긋한 자국. 분명 점심시간 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아까 들었던 소리가 귓가에 다시 재생되는 기분이었다. 나언 씨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그 뒤론 어떻게 됐냐고?
사장님은 내가 눈치챈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모른 척 중이다. 그래서 나언 씨와는 적당하면서도 친근한 거리 –사장님께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나언 씨가 서운함을 느끼지 않을 거리–를 두며 지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장님의 휴가와 나언 씨의 연차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나만 눈치챘고, 첫 부서 회식에서 나언 씨를 소주로 죽였던 대리 하나가 지방으로 발령받은 것이 충분히 보복성이라는 것도 알아챘다. 그리고 사장님이 사흘 전에 하고 온 넥타이를 나언 씨가 하고 왔을 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책상 위에 엎어져 있던 곰 인형은 다시 똑바로 세워졌다. 남의 것에 괜히 눈독 들였다가 사장님에게 잘리기 전에 정신 똑바로 차리자, 큰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