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퍼 (Reoffer) 외전
| 목 차 |
1. 워크숍
2. 기일
3. 흔적
4. 물결
1. 워크숍
“나언 씨 먼저 갈게요! 너무 늦지 말아요.”
모니터를 바라보던 나언의 눈이 김기영 대리를 향했다. 그는 사무실에 마지막으로 남은 나언을 향해 손을 흔들며 나갔다. 나언은 엉거주춤 일어나 인사를 하며 흘긋 시계를 살폈다. 금요일 오후 여섯 시 사십 분. 웬만해선 야근을 하지 않으려는 금요일이라 사무실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고요한 사무실에 우두커니 앉아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나언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보안 때문에 집에 가지고 갈 수 없는 문서를 얼른 정리해 두고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주말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 집중하던 중.
“가자.”
“…….”
“가자니까.”
서늘한 손이 열 오른 목덜미에 닿았다. 고개를 쭉 빼고 엉성하게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나언을 조용히 구경하던 기원이 나언의 가는 목을 감싸 쥐고 부드럽게 주물렀다. 집중하느라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한 나언이 어깨를 약간 움츠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을 줄이야. 원래는 기원의 퇴근을 기다리며 업무를 마저 정리하려던 것이었는데, 도리어 기원이 먼저 정리하고 내려오게 됐다. 나언이 멋쩍게 웃으며 컴퓨터를 껐다.
금요일은 항상 도로가 꽉 막혔다. 나언과 기원은 그 속에서 끊어질 듯 끊이지 않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회사에서 들었던 잔잔한 뉴스거리와 새로 생긴 음식점이 맛이 어떻다든가 하는 소소한 주제였다. 고요한 차 안에 크지 않은 둘의 목소리가 차곡차곡 쌓였다.
도로에서 멍청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기원이지만, 오늘 역시 속도를 줄이고 불필요한 차선 변경도 하지 않았다. 운전이 거칠어질 때마다 앞 유리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나언이 하던 말을 멈추기 때문이었는데, 기원은 출근한 뒤 있었던 일을 재잘대는 나언의 목소리를 끊고 싶지 않았다.
기원의 차는 대형 마트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주차를 마치자 안전벨트를 푼 나언이 먼저 내렸다. 마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동전을 넣고 바로 카트부터 밀기 시작하는 나언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살짝 고양되어 있었다. 금요일 퇴근 후 마트에 들러 장을 보는 것은 언제부턴지 모르게 생긴 그들의 루틴이었다.
원래는 장 보는 것과 요리 모두 사람을 써서 해결했었다. 몇 번 이벤트성으로 나언과 기원이 요리를 하긴 했지만 사람을 쓰는 것보다 맛과 시간 대비 여러모로 효율이 떨어졌다.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춰 사용인들이 집으로 오면 기원은 나언을 깨워 함께 운동을 나갔다. 러닝이나 헬스장에 갔다가 돌아오면 아침은 되어 있었고, 사용인들은 기원과 나언이 출근한 뒤 집을 청소하고 고양이들을 돌본 후, 저녁 준비를 모두 해 놓고 퇴근했다. 기원과 나언은 거의 조리된 저녁 식사를 간단하게 데우거나 익혀 먹었다.
그러한 루틴이 반복되던 중, 어느 늦은 밤이었다. 우연히 버라이어티 요리 방송을 함께 시청하다가 얼큰한 버섯전골을 끓이는 걸 본 나언이 맛있겠다는 혼잣말을 흘렸고, 기원은 해 먹자고 답했다. 그렇게 급하게 재료를 사기 위해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나언은 그날 밤늦게 장을 보고 요리를 해 먹은 게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그다음 주쯤 기원에게 어렵사리 말을 붙였다.
-저기…. 바빠요?
-별로요.
-그럼 마트 갈래요?
-왜요, 뭐가 없어요?
-아뇨, 요리를 좀 해 먹고 싶어서요.
-…….
‘뭘 하고 싶다.’, ‘뭐가 먹고 싶다.’ 둘 다 나언에게선 절대로 흔치 않은 요구였다. 조금 벅차오른 기원이 나언의 말을 곱씹는 사이, 나언은 그새 눈치를 보고 냉장고 문을 슬쩍 닫으며 중얼거렸다.
-너무 늦었나……. 아무래도 다들 번거롭겠죠.
지난번 예고 없이 계열사 마트를 갔다가 점장이 기원에게 달려왔기에 괜히 신경이 쓰였던 탓이다.
소파에 묻었던 몸을 번쩍 일으킨 기원은 한 팔로 나언을 붙잡고 바로 키를 챙겼다. 그날부터 기원은 금요일 퇴근길마다 마트에 가자는 말을 먼저 꺼냈고 나언은 그걸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기원은 지난번 점장이 자신을 찾았을 때 나언이 심하게 당황했던 것을 떠올린 후 아무도 쇼핑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처하라 일렀다.
오늘의 나언의 목표는 밀푀유나베였다. 웬만한 재료가 서브 주방의 냉장고들에 칸칸이 정리되어 있었으나 기원은 그걸 굳이 나언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나언은 장을 보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것이기에 전부 새로 사게 할 생각이었다.
역시나 나언은 꼼꼼하게 적어 온 휴대 전화 메모 앱을 보며 재료를 하나씩 카트에 담았다. 나언이 두 종류의 버섯 중 무엇을 살까 고민하다 하나를 내려놓자, 기원은 뒤에서 그걸 마저 담았다. 나언은 ‘괜찮은데’라고 말하면서도 꿋꿋이 카트를 밀었다. 둘 다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언의 걸음은 달걀 앞에서 멈췄다. 며칠 차이 나지도 않는데 유통 기한을 본다며 박스를 뒤적이는데, 뒤에서 보던 기원은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하얀 손이 왼쪽, 오른쪽을 향하다 신중하게 하나를 들어 카트에 담았다.
“이제 재료 다 샀어요.”
“그래요. 뭐 더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오늘 장보기도 꽤나 만족스러운 듯, 더 살 것을 떠올리는 뺨이 조금 붉게 상기되어 있다. 요리용 재료를 산 이후로는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를 담았다. 기원이 와인을 고민하던 사이 잠깐 옆으로 걸어간 나언은 파운드케이크와 앙버터 스콘을 가져왔다. 아침에 식욕이 많이 없을 때 우유를 곁들여 식사 대용으로 먹기도 하고 회사에 가져가서 사람들과 나누어 먹기도 했다. 카트에 슬쩍 빵 무더기를 놓고는 제 쪽을 흘긋 살피는 나언의 기색을 느낀 기원이 옅게 웃었다. 이 마트를 달라고 해도 쥐여 주고 싶은 마음을 왜 모를까 싶었다.
기원과 나언 모두 요리에 능숙하진 않아서, 홈 바에 설치된 거치대에 태블릿을 놓고 한 단계씩 함께 요리했다. 재료를 손질하다 출출해지면 생채소를 하나씩 나눠 먹고, 잠시 딴짓도 하다가 다시 요리를 이어 나갔다.
“진짜 괜찮은데요?”
간을 한 번에 잘 맞추지 못한 나언이지만 이번에는 소스 맛이 딱 맞는 모양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원에게 양념장을 섞은 젓가락을 쭉 내밀었다. 혀끝을 찍은 기원은 살짝 밍밍하다 여겼지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아무것도 모른 채 소스를 식탁에 가져다 놓는 나언의 뒤통수가 꽤나 자신만만해 보였다.
겹겹이 쌓인 고기와 쌈 채소가 육수와 함께 보글보글 끓었다. 기원이 그걸 식탁 가운데에 놓자 나언이 얼른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먹읍시다.”
“잘 먹겠습니다.”
묶어 놓고 억지로 먹이고 싶을 만큼 양이 적고 입이 짧은 나언은 이제야 겨우 먹는 양이 조금 늘었는데, 다행히도 직접 만든 요리를 먹을 때는 조금 더 먹으려 애썼다. 입에 고기와 배추를 양껏 넣고 우물대는 모습을 보며 기원은 시원한 맥주를 한 입 들이켰다.
“…….”
“…뭐 묻었어요?”
나언이 열심히 씹다 말고 손등으로 입 주변을 꾹꾹 눌러 댔다. 기원은 잔을 살짝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무언가를 기분 좋게 먹는 모습이 짜증이 나도록 예뻤다. 열에 익어 붉은 뺨이 당황에 조금 더 빨갛게 물들었다.
“맛있어요?”
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나언을 보며 기원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나언은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맥주를 벌컥벌컥 넘겼다.
***
금요일의 요리 루틴이 제법 길게 이어지던 무렵. 12월 첫 주 금요일은 장을 못 보게 됐다. 나언의 부서에 워크숍 일정이 잡혔기 때문이다.
분기별로 호텔에서 진행하는 당일 발표회가 아니라, 크고 좋은 리조트를 잡아 진행하는 연말 워크숍이라고 했다. 계획했던 연말 행사를 무사히 치르기 위해 부서의 단합을 도모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상품이 걸린 레크리에이션 게임은 물론 호텔 뷔페도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나언은 최 주임에게 들은 워크숍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렇구나.”
목요일 저녁, 벌써 짐 가방을 꺼낸 나언이 옷을 차곡차곡 쌓아 넣었다. 기원은 나언이 조곤조곤 말하는 것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언 스스로는 죽어도 티는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기원은 알 수 있었다. 나언은 지금 들떴다.
“걱정도 돼요. 제가 게임 같은 거 잘 못하거든요. 대학을 오래 못 다녀서 그런가….”
잘 자른 키위를 나언의 입에 넣어 주던 기원의 손끝이 멈칫했다. 정작 나언은 별스럽지 않게 키위를 깨물어 씹었다. 휴학은 제가 한 쓰레기 짓과 관련이 없는 일이지만, 기원은 나언의 인생이 꼬인 부분에 대해서 일단 제 탓을 하고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도 신경 안 쓰겠죠?”
기원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나언이 혼잣말로 대답을 하며 슬쩍 웃었다. 잔잔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본 기원이 그제야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나언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가슴 한편에서 웅크리고 있던 불안이 가셨다.
가방을 꽉 닫은 나언이 바다에게 깃털 낚싯대를 흔들며 옅게 웃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그런 나언을 살피던 기원이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며 얄궂게 말을 걸었다.
“외박하려니까 좋나 봐요.”
“무슨…….”
“아주 신이 났네.”
기원의 짓궂은 농담도 이젠 제법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기원과 나언은 남은 과일을 나눠 먹었다. 유독 씻는 것도 오래 걸린 나언은 그날 저녁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푹 잠들지 못했다.
차가운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파고드는 겨울 아침은 생각보다 쌀쌀했다. 회사 건너편 대로변에 모범택시가 천천히 정차했다. 두툼한 겨울 점퍼에 편한 청바지 차림의 나언이 횡단보도에 내려섰다. 조금 걸어 들어가니 회사 앞에서 정차 중인 대형 버스들이 보였다. 나언은 짐 가방을 가볍게 고쳐 들고 목뒤를 주무르며 버스에 올랐다. 자신의 부서명이 적힌 버스에 오르자 내부는 히터 덕분에 적당히 따스했다.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하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자리가 많아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차가 출발하고 도로에 진입하자 어느덧 익숙했던 회사의 풍경이 조금씩 뒤로 사라졌다. 제법 낯선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언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 주위를 멍하게 살폈다.
어제는 잠을 설쳤다. 그 탓에 눈이 조금 붓고 머리가 멍했다. 기원이 저에게 ‘신이 났다’라고 말하기 전에는 자기가 전혀 그런 기분인지 몰랐다. 그저 가슴이 조금 울렁대고 발끝이 찌릿했다. 그게 설렘과 비슷한 감정이었다니. 나언이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기쁘지 않냐고 물으면 그런 건 아니었다. 워크숍이라니, 즐거웠고 새로웠다. 집에서만 지내던 자신이 회사에 다니게 되었고, 이제 회사에도 어느 정도 적응하고 워크숍이라는 것도 경험해 본다. 물론 나언은 사람이 너무 많은 장소를 싫어하고, 경쟁을 즐기는 편도 아니지만 친한 사람들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이건 아마도 삐걱거리던 삶이 정상 궤도로 들어서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어제 새벽,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나언의 낯은 그 이후 조금 예민해졌다. 옅은 멀미 기운을 느낀 나언이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언은 선잠이 들었다.
“우와.”
“저기 리조트 보여? 진짜 신축인가 봐.”
꾸벅꾸벅 졸던 나언이 부스스 눈을 떴다. 조금 긴 버스 여정에 지쳤던 사람들도 창밖으로 펼쳐진 파란 바다를 발견하곤 조금씩 큰 목소리를 냈다. 곧게 뻗은 해안 도로 끝에 워크숍 동안 묵을 리조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언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철썩이는 파도를 한참 바라봤다.
바다에 왔다. 큰 눈으로 일렁이는 물결을 찬찬히 담던 나언이 조심스레 손을 올려 차창에 갖다 대 보았다.
싱숭생숭했던 기분도 버스에서 내려서자 조금 나아졌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리조트의 크기가 엄청났다. 나언은 고개를 젖혀 리조트를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 역시나 자는 사이 도착한 메시지가 보였다. 참으로 한결같은 사람이다. 나언은 한숨과 함께 작게 웃음을 터뜨린 뒤, 카메라를 켰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리조트와 바다가 동시에 잘 나오는 각도를 찾은 뒤 풍경을 사진에 담아 기원에게 전송했다.
「[오후 2:12] 잘 도착했어요. 멀미 때문에 잤어요.」
나언은 주머니에 휴대 전화를 넣고 리조트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가 안내에 따라 방을 배정받았다. 배정된 방을 확인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약하게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어 나언 씨, 우리 같은 방.”
“아 정말요?”
같은 부서 김기영 대리였다. 김기영 대리와는 부서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은 적이 몇 번 있어 나름 친한 사이였다. 큰 키에 밝은 갈색으로 염색을 한 김기영 대리가 나언을 보며 키를 흔들었다. 자신은 이제야 같은 방 팀원을 확인하려 게시판 앞에 줄을 섰는데, 김기영 대리는 벌써 키까지 야무지게 챙겨 왔다. 어리둥절한 나언을 보며 김기영 대리가 환하게 웃었다.
“어제 메신저로 알림 왔었잖아요.”
“아 놓쳤나 봐요.”
“가요, 저쪽으로 가면 엘리베이터 있어요.”
나언과 김기영 대리는 배정받은 방으로 갔다. 발코니에서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깔끔한 방이었다. 나언이 조금 들뜬 얼굴로 방 이곳저곳을 살피는 사이 김기영 대리는 마시던 커피를 쭉 들이켜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식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있네요. 배고픈데.”
“아, 출출하시면 뭐 좀 드실래요?”
“오, 뭐가 있어요?”
나언은 얼마 전 장을 봤을 때 샀던 앙버터 스콘을 주섬주섬 꺼내 내밀었다. 둘은 스콘을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김기영 대리는 최지은 주임 못지않게 나언에게 친절한 사람이었다. 자리도 가깝기도 하고, 나이 차이도 크게 나지 않았다. 게다가 김기영 대리에겐 동생이 한 명 있는데 나언과 동갑이라 김 대리가 더욱 나언을 친근하게 대하는 경향도 있었다.
“와 이거 맛있네요. 어디서 샀어요?”
“아 에스플러스 마트요.”
“어. 우리 집 쪽 에스플러스에는 이런 맛있는 빵집 없는데. 어디 매장이에요?”
“어 여기쯤이요.”
나언이 지도 앱을 보여 주며 설명했다. 스콘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출퇴근 이야기, 사는 곳 이야기로 넘어갔다. 물 흐르듯 이어진 대화에 나언도 긴장 때문에 눅눅해졌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오 나언 씨 압구정 근처에 사는구나. 꽤 가깝네요. 다음에 술 한잔 어때요?”
“…네.”
대답과 동시에 서늘한 낯을 한 동거인이 한 명 떠올랐지만 나언은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여기서 안 된다고 하기도 뭣했다.
“4번 출구 쪽으로 쭉 내려오면 등심이 엄청 유명한 데가 있는데….”
회사 사람과 이렇게 사적인 이야기를 한 건 처음이었다. 둘은 부지런히 짐을 풀고 각자 휴식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나언은 바다 쪽으로 향한 소파에 앉아 턱을 괬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 전화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기원이었다.
“여보세요?”
[숙소 들어갔어요?]
“네. 엄청 좋아요.”
숙소는 어떻냐고 물어보려던 기원은 나언의 맑은 대답에 소리 없이 입매를 끌어 올렸다. 어깨에 전화를 끼우고 담뱃갑을 흔든 기원은 얇은 담배를 잇새에 물었다. 나언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열심히 말을 이어 나갔다.
“리조트가 정말 커요. 여기 방에서 바다도 넓게 보이고요.”
[그렇구나.]
“아, 보여 드릴까요?”
뚝 끊긴 전화를 보던 기원이 연기를 흘리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몇 초 뒤 영상 통화로 걸려 온 전화의 화면 안에는 맑고 푸른 바다가 꽉 들어차 있었다.
[예쁘죠?]
작은 설렘이 묻은 간지러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의 기원에게 닿았다. 발코니까지 뛰어가느라 아직 숨이 덜 갈무리된 가쁜 호흡까지 고스란히 들렸다. 잠시 미소를 짓고 바다를 응시하던 기원이 턱을 살짝 들며 입을 열었다.
“화면 돌려 봐요.”
[예?]
“카메라 전환, 눌러 봐요.”
조금 뒤 잠깐의 딜레이가 걸린 후 나언의 얼굴이 아래에서 위로 들어찼다. 볼이 찐빵처럼 보이는 각도 탓에 나언의 길게 말린 속눈썹이 잘 보였다. 몇 번 맑은 눈을 깜빡이던 나언이 휴대 전화를 고쳐 들어 얼굴이 정상적인 각도로 나오게끔 화면을 조정했다.
“네, 예쁘네요.”
바다가 예쁘냐는 물음에 조금 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나언은 그런 기원의 낯간지러운 태연함이 부끄러운지 아무런 대꾸 없이 슬금슬금 몸을 돌려 기어코 제 뒤로 바다가 보이게끔 만들었다.
[…….]
나언의 얼굴 뒤로 하얀 파도가 둥글게 부서졌다. 비스듬하게 스며든 햇살을 머금은 물결은 보석처럼 반짝이며 나언의 주위에서 빛났다.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나언이 편안해 보였다.
그 짧은 사이, 바다를 두고 나언과 영상 통화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백주언의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걸었던 전화. 그 어떤 신뢰와 삶에 대한 의지가 남아 있지 않던 나언의 눈에 선연하게 차오르던 원망의 눈물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절망에 주저앉은 나언을 억지로 일으켜 제 곁으로 끌어왔던 그때의 바다는 지옥 그 자체였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과거는 이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잠겨 들듯 빠르게 덮쳐 올 수 있었다. 그래서 기원은 나언과의 지금이 여전히 무거웠다.
기원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바다와 나언이 함께 있는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고요함이 현실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되뇌며.
[나언 씨-! 내려가요.]
돌연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트렸다. 남자의 말소리에 깜짝 놀란 나언도 어깨를 끌어 올리며 뒤를 돌았다. 기원은 나언이 인사도 없이 후다닥 전화를 종료하는 모습을 봤다.
「저에제가랴해여 [오후 3:15]」
‘저 이제 가야 해요.’라고 읽히기는 하는 다급한 문자를 보며 기원이 연기를 흘렸다.
「즐거운 시간 보내요. 맛있는 거 좀 많이 먹고.」
목소리로 전하고 싶었던 내용을 꾹꾹 눌러쓰며 기원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워크숍이 진행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원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자는 곳과 먹는 것의 퀄리티 체크였다.
‘이런 데서 재울 순 없지.’
대형 펜션으로 잡혀 있던 숙소도 기원이 직접 자사의 신축 리조트로 변경했고, 뷔페도 기원이 자사의 호텔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음식들로 퀄리티를 조정했다. 이번 연말 워크숍에 참여하는 경영 지원부와 기획 마케팅부 모두 규모가 워낙 크긴 했지만, 임직원이나 사장단이 아닌 단순 사원 워크숍의 질적인 부분에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중간에서 조익현 비서실장이 난감했었다.
“그래. 분명 잘 놀다 오라고 한 짓이긴 한데.”
저와 통화 중에 전화를 다급하게 끊고 다른 남자를 따라 쭐레쭐레 뛰어갈 뒤통수를 생각하니 왜 뒷골이 뻐근해져 오는지 모르겠다.
“아… 씨발.”
이제 와 곱씹어 보니 다른 남자와 단둘이서 호텔급의 방을 함께 쓴다. 게다가 말 거는 꼴을 보니 데면데면한 사이도 아닌 것처럼 보였고. 저렇게 같이 다니다 숙소에서 오붓한 저녁 시간을 보내며 술이나 한잔 나눠 먹을 수도 있겠다.
생각이 짧았다. 구린 펜션을 잡아 단체로 구겨 넣은 다음 이불도 부족한 구석에 껴서 한숨도 못 자게 만들었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는 추잡한 생각을 하면서도 기원의 낯은 새하얗게 정돈된 상태였다. 옅게 일렁이는 서늘한 눈동자가 일정 테이블을 훑었다.
홀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김기영 대리와 함께 얼른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간 나언이 낯익은 부서 사람들에게 꾸벅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빈 의자를 찾아 앉았다. 나언은 심적으로 조금이나마 가까운 최지은 주임 옆에 앉았고, 김기영 대리는 나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간식과 마실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꽃 장식까지 놓인 화려한 테이블을 슥 둘러본 나언은 음료에 빨대를 꽂아 목을 축였다. 부드럽고 고급스럽게 마감된 짙은 차콜색 카펫 위로 나언의 운동화가 규칙적으로 흔들댔다.
[세원 호텔 연말 워크숍을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정갈한 박수 소리와 함께 단상을 제외한 곳의 조명이 꺼졌다. 간단한 식 이후에 레크리에이션이 시작된다고 했다. 임원의 격려 인사 후, 부서별 발표가 시작됐다. 각 부서별 연말 결산과 소규모 팀별로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피드백을 공유하고 내년 계획을 이야기하는 형식적인 절차였다. 하지만 나언은 괜히 혀로 아랫입술을 축이며 발표자를 흘긋댔다.
‘내가 정리한 자료…!’
팀원들과 분량을 나누어 제작하긴 했지만, 저 프레젠테이션 자료 중 일부는 나언이 직접 정리한 도표가 몇 페이지 첨부되어 있었다. 나언은 제가 발표하는 것도 아닌데도 귀를 쫑긋 세운 채 긴장했다.
발표는 생각한 것보다 길어졌다. 처음에야 긴장한 얼굴로 열심히 듣던 나언도, 나중에는 테이블 위의 간식거리를 조금씩 축내고 옆자리 사람들과 잡담도 나눴다. 조금 지루해질 무렵 부서별 발표가 끝났다. 나언이 티 나지 않게 하품을 삼키며 촉촉해진 눈을 깜빡였다.
“…….”
그때 단상 뒤쪽의 휘장 너머가 다소 분주해졌다. 제일 앞줄의 편한 의자에 앉아 식을 지켜보던 임원단 몇 명도 귓속말을 듣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홀 앞으로 걸어갔고, 경호 인력 몇 명도 빠른 걸음으로 단상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 사원 여러분 잠시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 사회자가 단상에 올라와 마이크를 잡은 채 입을 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눈치채기 시작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단상으로 모였다. 사회자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어 나갔다.
[세원 호텔 최기원 사장님께서 워크숍 격려차 본 리조트로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잠시 말씀 듣고 식을 이어 가겠습니다.]
동시에 주위 사람들이 ‘사장님?’, ‘최기원?’이라며 수군대는 소리가 작게 퍼졌다. 단상 아래로 분주하게 내려온 임원단은 자리에서 일어서 박수를 쳤다.
그리고 단상의 오른쪽 끝에서 매우 익숙한 사람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꽤 너른 보폭에 쭉 뻗은 다리, 조명을 받아 매끈하게 빛나는 구두코부터 너무나 낯익은 실루엣. 단상의 한가운데에 선 그가 임원진이 건넨 마이크를 잡아 작은 목소리로 테스트를 했다. 살짝 보이는 옆얼굴이 조명의 그림자를 받아 더욱 입체적으로 빛났다.
[안녕하세요, 최기원입니다.]
“……!”
최기원이 단상 위에서 아래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원들도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교환했다. 깜짝 놀란 건 나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아침에 별 일정 없다며 부스스한 머리로 차를 내려 먹는 걸 봤는데, 여기서 이렇게 마주할 줄이야.
[먼저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귀한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처에 출장이 있어 머무르던 중 연말 워크숍 소식을 듣고 잠시 들렀습니다. 리조트는 괜찮은가요?]
분위기를 풀기 위해 건넨 기원의 가벼운 질문에 몇몇이 아부성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곧이어 박수가 홀 전체를 가득 메웠다. 나언 역시 떨떠름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최지은 주임은 그런 나언을 티 나지 않게 살짝 살핀 후 박수를 이어 쳤다.
‘출장 있다는 말 안 했는데.’
사소한 일정이라도 나언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 없기에, 나언은 기원의 방문이 조금은 미심쩍었다. 하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조명 아래에서 검다 못해 푸른 기가 살짝 도는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기원이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유려하게 말을 시작했다.
[이번 달 오픈한 리조트이기에 우리 세원 호텔 사원들이 먼저 시설을 이용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 숙소를 이곳으로 정했습니다.]
물론 조익현 비서실장이 머리를 짜내 적어 내린 핑곗거리를 기원은 영혼 하나 담지 않고 그대로 읊는 중이었지만, 나언의 뒤쪽에선 ‘호오.’ 하는 듯한 작은 감탄사가 흘렀다.
[여러분 덕분에 호텔에 주력하던 세원이 리조트까지 사업을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제주의 리조트에 이어 이곳 동해, 그리고 내년 말 남해 청미에도 리조트가 오픈할 예정입니다.]
남해 청미는 나언이 기원에게서 떠나 지냈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가 계신 바로 그곳이었다. 나언은 단상 위에서 연설하는 기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이 아는 최기원과는 또 전혀 다른 사람 같다. 단색 슈트에 매치한 오묘한 색의 넥타이는 화려한 기원의 얼굴과 잘 어울렸다. 물론 기원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와 일적으로 직접 마주친 적이 없어 크게 체감하지 못했는데, 이 커다란 리조트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여유롭게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그가 새삼 커다랗게 느껴졌다.
저렇게 전문적이고 지적인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서 있지만 어젯밤만 해도…. 피곤할 것 같아 넌지시 거절하는 제 가슴팍에 이마를 묻고 고개를 비비적거렸고, 이성을 잃으면 귀를 붉힌 채로 제 머리카락을 세게 붙잡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언이 혼자 어깨를 퍼뜩 떨며 고개를 잘게 저었다. 후다닥 뜯어 놓은 음료를 들이켜며 단상을 바라봤다. 이쯤 되면 성욕에 눈이 먼 인간 말종 변태는 최기원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이 올라 붉어진 귓가에서 아득하게 멀어졌던 기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기원은 단상 가운데에 서서 앉아 있는 사원들을 찬찬히 훑었다.
[제가 여기까지 오는 것이 과연 사원 여러분께도 좋은 일일까, 고심했지만.]
평소처럼 생기 없는 서늘한 낯이 홀 전체를 차분하게 살폈다. 고개를 돌리던 기원이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옅게 미소를 지었다.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기원의 회색 눈동자는 정확하게 나언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한 채였다. 사람들은 기원의 말을 간지러운 농담이라 여기곤 박수를 치며 웃어 댔다. 겨우 열을 식혔던 나언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싶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기원은 활짝 웃었다. 그린 듯한 미소에 정신없이 웃던 사원들은 물론 임원까지 작게 술렁였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아니 파란 피를 흘릴 것 같은 최기원이 이런 곳에서 저런 농담을 하며 웃기까지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최지은 주임은 괜히 자기가 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이를 꽉 깨물었다. ‘웩’ 같은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
그때 나언의 바로 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원 두 명이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얼굴 봐. 연예인이냐.”
“개존잘.”
“도대체 누구랑 결혼할까.”
“나랑.”
나언은 기원을 주제로 한 잡담을 굳이 듣고 싶지 않았지만, 자리가 가까워서인지 자연스레 귀가 기울여졌다. 한참 기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던 중, 누군가 불쑥 새로운 주제를 던지며 속닥거렸다.
“최기원 형 있었잖아. 생각보다 안 닮지 않았어?”
“최지원? 아니야 닮았어. 눈은 좀 다른데 입매가 비슷해. 약간 하관 쪽.”
“엄마가 다를걸?”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던 나언의 눈빛이 미묘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연설을 이어 가는 기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소모적인 대화에만 귀를 기울이게 됐다. 등 뒤의 두 여자는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형이 이맘때 교통사고로 죽었잖아.”
“맞아. 진짜 속보 떴을 때 곱창 먹다가 개놀랬는데. 안타깝다.”
“뭐 유산 그런 거 때문에 일부러 사고 내고 그런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요새 그런 짓 하면 다 밝혀질걸?”
지원의 죽음은 딱 저 정도 수준의 가십거리였다. 시간이 꽤 흐른 만큼, 사람들은 자극적인 뜬소문을 가볍게 화두에 올리곤 했는데, 가끔 뜨는 인터넷 기사의 댓글이나 유튜브의 영상 섬네일에서 저런 질 낮은 내용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에야 눈물이 핑 돌 만큼 가슴이 아렸지만, 요즘에는 못 본 척 그런 글을 요령껏 피해 다니게 됐다.
하지만 조금은 무뎌졌다고 한들, 가감 없이 떠드는 육성이 고스란히 파고드는 지금은 평정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희게 질린 나언의 손끝이 약간씩 떨리기 시작했다. 지원의 죽음에 대해 거짓 기사를 섞어 한창 토론을 하던 둘은 다시 연설을 시작하는 최기원의 쪽으로 화두를 돌렸다.
“자꾸 여기 보는 것 같지 않아?”
“그치, 나만 느끼는 것 아니지? 뭐야 뭐야. 누구 몰래 만나는 사람 있는 거 아니냐고.”
농담 식으로 던진 말에 나언의 가슴이 다시금 긴장으로 콱 조여들었다. 뒤에 앉은 사원 두 명의 자의식 과잉이 아니었다. 기원은 홀 기준 왼쪽으로 치우쳐 앉은 나언의 쪽으로 지나치게 자주 시선을 두었다. 그럴 때마다 솜털을 곤두세운 채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나언뿐만 아니라 최지은 주임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지은 주임은 기원이 했던 협박성 말을 떠올렸다.
-나는 전국에 알리고 싶은데 얘가 싫어하는 거라.
최지은 주임은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는 나언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사람들의 선 넘는 대화에도 슬슬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어떡해, 나 진짜 더어럽게 엮이고 싶다.”
“입술 미쳤나 봐.”
“저 목소리로 나한테 막 집착한다고 생각해 봐. 개섹시할 듯.”
“성깔 보면 좀 무서울 것 같은데.”
“그런가. 그래도 나 때문에 운다고 생각해 보라고.”
“미쳤어!”
더럽게 엮여도 보고, 집착도 무서울 정도로 받아 보고, 믿기지 않겠지만 우는 모습까지 본 전적이 있는 나언은 속이 갑갑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낄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나빴다. 기원을 두고 엮이고 싶다느니, 얼굴을 부분 부분 뜯어 살피며 잘생겼다느니 섹시하다느니 말을 하는 건 실례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 실례가 기원을 향한 건지, 기원과 만나고 있는 자신을 향한 건지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아 화장실을 가는 척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최기원이 말을 하는 중간이라 분위기가 지나치게 엄숙했다. 여기서 일어났다간 이쪽만 뚫어지게 보고 있는 최기원이 자신이 나가 버리는 걸 그대로 볼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중, 옆에서 최지은 주임이 몸을 가까이하며 작은 박스를 흔들었다.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가볍게 말을 걸어왔다.
“나언 씨, 이거 먹을래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최 주임 몫의 마카롱 박스였다. 이미 나언은 자기 몫인 3개를 다 먹은 상태였다. 마찬가지로 뒤에 앉은 사원들의 대화를 가시방석에 앉은 채로 듣고 있던 최지은 주임이 눈치껏 리본을 풀어 마카롱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엄청 맛있죠?”
고개를 끄덕인 나언이 손을 뻗어 분홍색 마카롱을 받아 들었다.
“우리 호텔 마카롱이 진짜 유명해요. 포장도 엄청 예뻐서 선물로도 인기 있고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최지은 주임은 마카롱 끝을 조심스레 베어 무는 나언을 보곤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는 눈으로 뒤의 사원들을 바라봤다.
“죄송하지만 조금만 목소리 낮춰 주시겠어요? 사장님 말씀이 잘 안 들려서요.”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컸다며 서로를 타박하던 두 사원이 조용해졌다. 나언은 마카롱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입 안에서는 적당히 달콤한 마카롱이 부드럽게 퍼지고, 거슬리던 대화가 들리지 않으니 세차게 뛰던 심장도 조금씩 평온해졌다. 나언은 조금 붉어진 눈으로 단상 위의 기원을 바라봤다. 기원은 어느새 나언의 쪽에서 시선을 돌리고 홀 중앙 부근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세원 호텔의 도전과 성장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힘쓰는 사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그러면 이틀간 행복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나언도 손에 든 마카롱을 얼른 입 안에 넣고 오물대며 박수를 쳤다. 단상에서 내려와 무대 뒤로 사라지는 기원의 너른 등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약한 아쉬움을 느꼈다.
***
발표회가 마무리된 후, 사원들은 실내의 다른 홀로 이동했다. 원래는 외부의 너른 잔디밭에서 게임을 하려 했지만 지금은 겨울이기에 실내의 다른 홀을 활용한다고 했다. 두 번째로 들어간 홀 역시 헉 소리가 날 만큼 웅장했다. 게임을 위해 테이블과 불필요한 기기들을 모두 치워 놓아서인지, 앞의 홀보다 훨씬 넓어 보이기도 했다. 마이크를 든 진행 요원들이 사람들을 부서별로 모이도록 안내하며 색깔 조끼를 나누어 줬다.
팀원의 조끼를 받아 오기 위해 나언이 진행 요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커다란 눈이 단상 위쪽의 의자에 고정됐다.
분명 연설을 마치고 내려갔던 기원이 레크리에이션까지 따라와서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원 덕분에 적당히 빠지고 귀가하려 했던 임원진까지 줄줄이 발목이 묶여 사원들이 게임 하는 모습을 구경하게 되었다. 나언은 워크숍이 처음이기에 이게 이상한 일이란 걸 깨닫지 못했지만, 임원단은 어리둥절한 기색을 감추느라 진땀을 흘렸다.
“…….”
“…….”
찰나의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나언을 응시하던 회색 눈동자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는 사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멀뚱멀뚱 서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갸름한 얼굴을 확인한 기원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나언 역시 서둘러 시선을 거두었다. 귀에 열이 오른 걸 느끼며 조끼 무더기를 받아 들곤 제 자리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밥이나 얼른 주지, 하며 투덜댔지만, 나언은 긴장한 얼굴로 팀별로 정해진 조끼에 머리를 끼워 넣었다. 팀 게임을 하며 민폐만 끼치지 말자, 혼자 몇 번이고 다짐하는 나언의 얼굴이 제법 결연해졌다.
행사 전문 엠씨가 게임 시작을 알렸다. 하늘색 조끼를 맞춰 입은 기획 마케팅부 팀원들과 줄을 맞춰 선 나언이 힘껏 박수를 쳤다. 엠씨가 아이스 브레이킹용 난센스 게임 몇 가지를 진행하자 실내 분위기가 적당히 달아올랐다.
[자 다음 난센스 퀴즈 상품은 샴페인입니다.]
처음에는 상품권에서 시작된 상품이 점점 고급화되어 갔다. 기원이 워크숍을 방문할 때 선물로 가지고 온 와인과 샴페인이 게임의 상품으로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데면데면하게 굴던 사람들도 상품을 보자 점점 흥분해서 달려들었다.
[추장보다 높은 사람은?]
엠씨가 던진 난센스 문제에 사람들이 웅성댔다. 그새 휴대 전화로 검색해 보려던 팀은 반칙으로 참여 기회가 박탈됐다.
“정답! 부족장!”
[땡! 경영 지원부 2팀은 기회 없습니다!]
나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꽤나 유명한 퀴즈였다. 그리고 나언이 이를 알고 있는 이유는 주언이 입원했던 때, 저에게 이 퀴즈를 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 추장보다 높은 건 뭐게?
-몰라? 왕?
주언의 수학 문제집에 점수를 매겨 주고 있던 터라 나언이 은근히 성의 없게 대답했었다. 주언은 그때 발로 이불을 팡팡 밀며 생각 좀 하고 대답하라고 했었다. 나언이 결국 살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어, 어….’ 하며 기억을 더듬던 나언은 주언이 정답으로 알려 줬던 말을 떠올렸다.
-정답은 고추장이야. 추장보다 높으니까.
-뭐? 푸하하.
“…이거 고추장인데.”
“네?”
갑작스레 떠오른 추억에 젖어 멍하게 중얼거린 나언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은 김기영 대리가 고개를 돌렸다. 나언은 기영을 보며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하려다 가까이 있는 다른 팀원을 의식해 그의 귀에 귓속말을 했다.
“이거 답 고추장이에요. 추장보다 높으니까 고(高)추장.”
“와! 나언 씨 얼른 정답 말해요, 얼른!”
김기영 대리가 나언의 팔을 붙잡아 올리려 했지만 나언이 고개를 저으며 눈썹을 끌어 내렸다. 나서긴 조금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사람들이 모두 보는 데서 정답을 말하고 상품을 가지러 가야 하다니. 게다가 단상에는 최기원이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저걸 외치고 기원의 앞까지 걸어가 상품을 받아 오는 건 어딘지 모르게 수치스러웠다.
쩔쩔매는 나언이 답답한 듯, 김기영 대리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얼른, 이러다 다른 팀이 맞춰요. 저 샴페인 진짜 맛있는데.”
거의 나언을 껴안다시피 한 채로 팔을 올려 보려던 김기영 대리가 결국 ‘에잇! 내 거예요 그럼!’ 하며 자신의 손을 번쩍 들었다.
[기획 마케팅부 1팀! 키 크신 남자분이요?]
“정답! 고추장! ‘높을 고’에 추장!”
[오 빠르게 정답이 나왔습니다!]
“아싸!”
김기영 대리가 입이 귀에 걸린 채로 후다닥 뛰어나가 샴페인 한 병을 받아 들었다. 김기영 대리는 나언 쪽을 향해 리본이 묶여 있는 샴페인 박스를 흔들었고, 나언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김 대리를 향해 박수를 쳐 주었다.
“…….”
그런데 시선 끝에 걸린 기원의 낯이 묘하게 싸늘해 보인다. 원래 차가운 인상이지만, 심기가 불편해지면 조금 있던 온기조차 전부 사라져 버리는 저 건조한 얼굴. 함께 살게 된 이후 저렇게 무서운 표정을 마주한 적이 없기에 나언은 잠시 그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다 아차 싶어 눈을 끔뻑이며 시선을 옮겼다.
“이야, 나언 씨 덕분에 탔어요.”
“어머 진짜요?”
부서 사람들이 김기영 대리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자 그가 너스레를 떨며 나언을 언급했다. 팀원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나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나언 씨 어떻게 알아요? 뭔가 저런 거 잘 모를 거 같은데.”
동생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기에 나언은 어물쩍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본격적인 팀 대전이 시작되자 게임은 한층 더 치열해졌다. 세워 둔 콘을 건드리지 않고 커다란 공 굴리기도 하고, 이인삼각 달리기도 했다. 나언은 다양한 도구를 이용한 간이 탁구 경기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숟가락이 채로 배정되며 처참하게 졌다. 나언은 상품을 따지 못했지만 그래도 가슴이 조금 말랑해졌다.
[마지막 경기는 짝 피구입니다. 팀별로 2명씩 짝을 지어 코트 안으로 들어와 주세요. 남자와 여자는 따로 경기할 예정입니다.]
엠씨의 설명을 들은 여자 팀원은 다른 쪽 코트로 이동했고, 남자 팀원은 짝을 나누기 시작했다. 귀찮으니 방 배정을 따라 나누자는 의견이 우세해 나언은 김기영 대리와 같은 팀이 됐다.
“나언 씨가 더 작으니까 제가 막을게요. 나언 씨는 잽싸게 피하세요.”
“네!”
탁구에서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던 나언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기영 대리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제 조끼의 허리춤을 붙잡은 나언의 손을 끌어와 배 앞으로 깍지를 끼게 했다.
“짝이 떨어져도 탈락이라니까 꽉 붙잡아요.”
“네, 네!”
거듭 대답한 나언이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자 짝 피구가 시작됐다. 남자들끼리 경기를 해서 그런가 공의 속도와 세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퍽, 퍽 수박 터지는 소리가 나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사람들이 우수수 탈락했다. 공을 피하다가 짝과 떨어진 사람도 있고, 공에 세게 맞아 나동그라진 팀도 있었다. 나언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열심히 피했다. 저걸 맞았다간 시퍼런 멍이 들 것 같았다. 다행히 김기영 대리가 팔이 긴 편이라 공을 잘 쳐 내 주었다. 나언은 그의 등 뒤에 붙어 최대한 공이 닿지 않는 곳을 찾으며 열심히 몸을 숨겼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버티던 중, 엄청난 강속구의 공이 김기영 대리 쪽으로 날아왔다. 나언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김 대리가 손바닥으로 공을 팍 쳐 냈는데, 그 공이 금을 넘어 수비진으로 넘어갔다. 수비하던 상대 팀원이 잽싸게 공을 들어 등을 내보이고 있는 나언의 쪽을 향해 던졌다. 제 실수를 깨달은 김 대리가 급하게 몸을 돌렸다.
겨우 공은 피했지만, 나언이 쿠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갑작스럽게 몸이 돌아간 탓에 중심을 잃은 것이다. 동시에 휘슬 소리가 울렸다. 넘어지며 기영의 허리를 놓친 탓에 탈락 처리가 된 것이다.
“괜찮아요?”
김기영 대리가 눈썹을 팔자로 만들며 손을 뻗었다. 살짝 넘어져서 아프지 않았기에 나언은 괜찮다며 그의 손을 잡고 코트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언이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가며 볼멘소리를 했다.
“아.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그래도 우리 최후의 4인까지 갔잖아요.”
김기영 대리의 쿨한 위로에 나언 역시 슬쩍 웃고 말았다. 나언은 스스로 승부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은근히 이런 게임을 할 때 속에서 열이 나고 결과에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걸 보니 승부사 기질이 조금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엉덩이에 묻었어요.”
“아…….”
뒤에서 걸어오던 기영이 나언의 엉덩이를 툭툭 털어 줬다. 고개를 돌려 살피니 아까 넘어지며 먼지 같은 검은 때가 바지에 묻었다. 나언은 제가 털겠다고 한 뒤 손바닥으로 엉덩이 부근을 마저 털어 냈다.
김기영 대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던 나언의 걸음이 굳었다. 의자에 앉아 나언을 내려다보고 있던 기원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기원은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천천히 뺨을 쓸어내렸다. 그는 꼬았던 긴 다리를 느긋하게 풀며 꽤 오랫동안 나언을 응시했는데, 그 순간 나언은 가슴이 쿵 떨어질 것 같은 낯선 감정을 느꼈다.
한때 그를 보며 너무나 당연하게 느꼈던 감정, 두려움이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그때는 그저 그가 싫고 어렵기만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그의 폭력적인 집착과 애욕 탓에 그의 존재 자체가 두려워졌었다. 이제는 시간이 흐른 탓에 너무 아득해져 낯설다고도 표현 가능한 두려운 감정이, 저 찰나의 표정 하나 때문에 순식간에 몸집을 키웠다.
“…….”
“…….”
나언이 큰 눈을 불안하게 떨며 조심스레 기원의 낯빛을 살폈다. 하지만 기원은 아무런 말없이 그렇게 한참 나언을 삐딱하게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넥타이 매듭을 살짝 고친 그는 나언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나언은 그가 자리를 뜨고 나서도 한참 동안 빈 의자를 바라봤다. 발밑이 쑥 꺼진 것처럼 힘이 빠져나가고, 속이 미약하게 메스꺼울 정도였다.
***
저녁 자리는 무르익었다. 뷔페 역시 끝내주게 맛있었고, 짝 피구에서 같은 부서 여자 팀이 당당하게 우승해서 고급 와인까지 상품으로 타 온 것이다. 사람들은 잔뜩 담아 온 뷔페 음식에 샴페인과 와인을 곁들이며 워크숍 저녁을 즐겼다.
“이번 워크숍 진짜 최곤 거 같아요.”
“방 봤어요? 엄청 좋던데.”
“이번에 회사가 돈 좀 썼나 봐요. 그죠?”
사람들도 모두 만족한 듯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나언도 살짝 미소 지으며 주스를 들이켰다. 주량이 세지 않다는 걸 부서 사람들도 거의 알기에, 첫 잔만 조금씩 목을 축이듯 마시곤 뒤에는 생과일주스를 주로 마셨다. 나언은 지금 이 자리가 즐거우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편이 울렁였다. 아까 잠깐 마주쳤던 기원의 표정이 자꾸 가슴에 걸렸기 때문이다.
「[오후 6:14] 이제 저녁 먹어요.」
「[오후 6:37] 집으로 돌아가셨어요?」
나언은 답이 없는 문자함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하지만 기원에게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컵을 든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아랫입술을 깨문 나언이 무언가 한 문장을 더 찍어 보려 했지만 그만뒀다.
‘치….’
여기에 온다고 미리 말하지 않은 것도, 와 놓고선 무섭게 쳐다보다 가 버릴 건 뭐람. 무언가 찝찝하고 약간은 서러운 마음 때문일까, 나언은 차려진 많은 음식을 눈앞에 둔 채 위만 꾹꾹 누르고 말았다.
한껏 술기운이 올라 후끈해진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나언은 조용히 의자를 빼서 일어났다. 대각선에 앉아 있던 김기영 대리가 눈썹을 끌어 올리며 나언에게 물었다.
“나언 씨 벌써 들어가요?”
“아, 네. 좀 피곤해서요.”
살짝 웃는 나언의 얼굴이 정말 힘이 없어 보여, 김기영 대리는 얼른 올라가서 쉬라고 말했다.
“가서 좀 더 마시고 놀게 푹 쉬고 있어요. 여분 키 있죠?”
“네. 조금 이따 뵐게요.”
오늘 같은 방을 쓰고 같은 팀을 해서인지 부쩍 그가 가깝게 굴었다. 나언 역시 예의 미소를 짓고는 홀을 나왔다. 하지만 걸음이 축축 처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방에 도착했을 때는 커다란 눈망울이 푹 가라앉은 울적한 얼굴이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무언가 울린 듯한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란 나언의 얼굴에 약한 생기가 돌았다. 조금 성급한 손길로 잠금 화면을 해제했다.
「[WEB 발신]
▶흑임자 떡 입고
▶귤청 SET 주문 시 무.료.배.송.(현금가)
문의> 02-XXXX-XXXX」
나언이 눈을 내리깔며 휴대 전화를 침대 옆 콘솔에 뒤집어 놓았다. 지난번에 딱 한 번 주문했던 떡집에서도 이 시간에 문자를 주는데 최기원에게선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나언은 작은 한숨과 함께 옷을 하나씩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머리가 복잡할 땐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나면 마음이 노곤하게 풀리기라도 할 것이다. 마침 반짝거리는 커다란 욕조가 있어 나언은 물을 반 이상 받고 조심스레 들어갔다.
먼 곳까지 왔다가 다시 서울로 가려면 운전을 꽤나 해야 할 텐데. 늦은 시각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는 그가 걱정이 되기도 하면서, 도대체 왜 이토록 날 서게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어려웠다. 더는 그의 눈치를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의 기분을 읽고 분위기를 살피며 우울해하는 건 지독한 버릇이 되었나 보다.
“이제 이런 짓 좀 안 하고 싶은데.”
최기원이 변했다는 건 안다. 그가 제 성질을 죽이고 자신에게 맞추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도 알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이성적으로 애쓰는 부분이지, 그의 본성이 달라지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나언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를 어려워하지 않으려고, 편하게 대하려 애쓴다. 새벽에 마주친 그의 얼굴에서 안쓰러움과 고단함 대신 안정을 얻으려고, 그의 부드러운 모습을 먼저 떠올리고 따뜻한 눈빛을 먼저 그리려 애썼다.
하지만 이렇게 그가 과거의 모습을 찰나라도 보일 때면 나언은 그간 했던 노력을 단번에 거스르고 5년 전의 나약한 상태로 되돌아가고 만다.
물속에서 몸을 말아 무릎을 껴안은 나언이 왼손을 들었다. 하얀 손목 위 눈썹 칼로 그었던 상처는 흉터 하나 없이 아물었다. 다만, 유리 조각으로 그었던 깊은 상처는 여전히 다른 피부색을 띠고 있었다. 많이 아팠던 것은 아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만 진짜, 그만….”
무릎 위에 턱을 얹은 나언이 작게 중얼댔다. 젖은 눈을 감고 일렁이는 가슴을 안정시키기 위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상념에 젖지 않도록 머리를 비우려 노력했다. 따뜻한 물속에서 재활 치료를 하며 배웠던 손가락 스트레칭도 하고 코를 잡은 채로 등을 미끄러뜨려 깊게 잠수도 해 봤다. 그렇게 귀와 뺨이 빨갛게 익을 정도로 몸을 담그고 나오니 가슴을 옥죄던 긴장이 조금 가시며 전신이 흐물흐물해졌다.
나언은 스킨, 로션을 꼼꼼히 바르고, 챙겨 온 추리닝을 입은 채로 침대에 파묻혔다. 잠자리가 바뀌어 한숨도 못 잘까 봐 수면제를 챙겨 온 나언은 그걸 먹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 익어 버린 몸 덕분에 곧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콘솔을 향해 무심코 손을 뻗은 나언이 휴대 전화를 들었다. 동시에 밀려 있던 팝업이 한꺼번에 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언의 눈이 당혹에 물들었다.
“어….”
열두 통이 쌓인 부재중 전화 목록을 확인하기도 전에 다시 전화가 울렸다. 나언은 다급하게 통화 버튼을 누르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보세요?”
[어디예요?]
“…방이요.”
[뭐 하느라 전화를 안 받아요.]
열두 통의 전화를 연달아 한 사람의 목소리라 믿기 힘들 정도로, 왜 전화를 받지 않냐 묻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부드럽고 나긋했다. 나언이 잠시 머뭇대자 기원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김기영 대리랑 같이 있어요?]
“아, 아뇨. 저 혼-,”
그리고 동시에 현관 쪽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나언이 몸을 일으키며 현관으로 나갔다. 그는 기원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잠시만요, 누가 방에 찾아와서요.”
[열어 줘요, 내가 보냈으니까.]
역시나 평소와 같이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흩어진다. 나언이 홀린 듯 문을 열자, 덩치가 큰 경호원이 나언에게 인사를 하며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지, 지금 뭐 하는….”
나언이 당황하여 뒤로 따라붙었으나, 경호원은 쫓아오는 나언을 무시하고 구둣발을 한 채 방 안까지 깊숙이 들어갔다. 그는 마치 무언가 없어진 걸 찾는 듯 거실과 침실 2개를 꼼꼼하게 살폈다. 그가 마지막으로 열어젖혔던 옷장을 닫은 후 방을 나갈 때까지 수화기 너머도 고요한 침묵이 일었다.
잠시 뒤 기원이 말했다. 고른 숨소리 사이, 살짝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혼자 있는 것 맞네요. 난 또 김기영이랑 있느라 내 전화를 좆같이 재끼나 했지.]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처럼 나긋한 목소리와 달리 내용에는 상스러운 욕이 잔뜩 섞였다. 놀란 나언이 눈을 크게 뜬 채 굳었다. 너무 놀라서 전화를 쥔 손이 옅게 떨렸다. 더듬더듬 뱉는 단어는 제대로 된 문장이 되지 못해 흩어졌다.
“지금, 그거 확인하려고… 저 경호원을….”
[지하 3층 Z1 구역으로 내려와요. 얼굴 보고 얘기하게.]
그리고 전화가 뚝 끊어졌다. 가만히 서서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파악하던 나언의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뜨끈한 물에 풀어냈던 화와 서운함이 두 배로 몰려왔다. 외투를 챙기는 것도 잊은 나언이 운동화를 신고 곧장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심장이 곧 터져 버릴 것처럼 세차게 두근거렸다.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도 나언은 가만히 서 있질 못했다. 어린아이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자아내는 기원에게 속을 뻔했지만, 역시나 그건 모두 연기였다. 기원은 지금 한계까지 화가 치민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왜 이러는 것인지 연유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인상을 찌푸린 나언은 눈에 익은 기원의 검은색 세단 앞머리가 보이자마자 이를 악물고 보폭을 넓혔다. 조수석 문을 열어젖히자 기원이 제 쪽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와 눈을 맞췄다.
막상 차에 올라타 얼굴을 마주하니 응축된 수만 가지 감정이 한 번에 목울대로 치솟았다. 따지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어떤 말을 꺼내든 눈물부터 날 것 같아 입술만 깨물고 앉았다. 기원은 들쭉날쭉한 나언의 숨소리를 인내심 있게 들으며 침묵을 유지했다. 조금 뒤 나언이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이래요.”
어두운 주차장의 차 안에서, 기원의 서늘한 눈동자가 나언에게로 천천히 움직였다.
여전히 미미한 웃음기를 띤 기원이었지만 그의 회색 눈동자는 평소와 달리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묘한 기시감에 두려움이 슬그머니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지만, 나언도 지지 않고 기원의 눈을 응시했다. 그러나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자꾸 미끄러져 내리는 시선은 점차 불안해졌고, 차게 식은 손끝은 잘게 떨렸다. 나언은 추리닝 소매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감췄다.
“왜 화를 내는지 이해가 잘… 안 가요.”
억눌린 목소리를 자그맣게 뱉어 내는 나언의 입술을 바라보던 기원의 한쪽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랐다. 비웃는 얼굴이지만 전혀 장난기가 없어 시린 듯한 표정이었다.
기원이 느리게 손을 뻗었다. 나언은 피하려 했지만, 등 뒤가 문으로 막혀 있어 고개를 뒤로 빼는 게 전부였다. 기원의 커다란 손이 나언의 약한 뺨을 꾹 쥔 채 운전석 쪽으로 끌어당겼다. 잡을 때와 달리 당기는 손길에는 배려가 전혀 없었다.
“으윽….”
코앞으로 당긴 작은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기원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냥 집에 있을래?”
“…?”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나언이 넌 집에 박혀 있는 게 어울려서.”
너무나 다정하고 사근거려서, 절대 협박처럼 들리지 않을 간지러운 목소리. 하지만 나언은 그의 표현이 문자 그대로 진심 어린 협박이라는 걸 알았다. 웃고 있는 기원의 얼굴이 너무나 위험해 보여서 나언은 굳어 버렸다. 최기원은 수가 틀리면 정말 사람을 가둬 놓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그의 얼굴이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기원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결국 나언의 입에선 어그러진 신음이 새어 흘렀다.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는 볼이 뚫릴 것처럼 아파 눈물이 핑 돌았다. 나언은 기원의 한 손을 두 손으로 밀어 댔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놔요. 아, 파요….”
“여태 그런 식으로 회사에 다녔어요?”
그런 식이라니. 나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그런 식’이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기원은 나언의 볼을 엄지와 검지로 둥그렇게 굴리며 대답했다.
“개같이 흘려 대면서.”
작게 속삭이듯 말을 마친 기원이 나언의 눈, 코, 입을 천천히 훑은 뒤 다시 새까만 눈동자로 시선을 옮겨 왔다. 나언은 예상치도 못한 저급한 표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원은 여전히 비스듬한 웃음기를 매단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원의 기색을 살피는 커다란 눈이 성급히 차오른 눈물 탓에 점점 발갛게 물들어 갔다.
하, 하고 담백한 한숨을 흘린 기원이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 꼴 보려고 회사에 보냈나 싶고.”
‘그 꼴?’
이유를 따져 묻는 것이 맞는 순서임에도 버릇처럼 제 행동을 되짚어 보던 나언은 그제야 기원이 어떤 부분을 거슬려 하는지 깨달았다. 김기영 대리를 언급했던 것과 그와 함께 게임을 한 직후 그가 홀을 떠나 버리는 모습까지. 기원은 기영과 제가 붙어 다녔던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으, 그냥, 대리님은 단순히….”
해명을 하면서도 진한 서러움이 밀려들며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 회사에 보내 준다고 해 놓고, 이런 사회생활조차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면 본인 만족으로 세워 놓은 마네킹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 어떤 것보다 그가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방적이고 이해되지 않는 감정으로 사람을 옥죄고, 수가 틀리면 아프게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 내려고 하는 모습. 과거와 달리 인내하는 척은 하고 있지만, 그는 그저 그런 척 연기만 할 뿐 잔인한 속내는 전혀 감출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혼자 있는 방에 경호원을 올려 보내는 행동까지 하지 않았겠는가.
5년 전 나언이 너무나 외면하고 싶었던 기원의 모습이 언뜻 보일 때마다, 기원에게 차올랐던 반발심이 차곡차곡 깎여 가며 5년 전의 무력한 자신이 되어 갔다. 결국 애써 변명을 해 보려던 나언은 머뭇대다 말을 그만둔 채 붙들고 있던 기원의 손목을 툭 놓고 말았다.
“…….”
젖은 머리카락 아래의 검은 눈동자. 짧지만 분명히 스쳤던 감정이 점차 흐려졌다. 하얀 낯에서 반항기가 사그라들고, 눈동자가 바닥을 향해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 순간 단단했던 기원의 표정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툭, 투둑.
동시에 기원의 손목 위로 차가운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기원은 눈을 질끈 감으며 욕이 튀어나오려 하는 걸 가까스로 인내했다. 씨발, 변명이라도 좀 해 볼 것이지 저렇게 다 포기한 듯 울어 버릴 건 뭐란 말인가. 일렁이던 분노에 얼음장 같은 물이 쏟아진 기분에 결국 기원의 손끝에서도 힘이 빠졌다.
손을 떼어 내고도 나언은 고개를 들지 않고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손을 들어 닦으려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치지도 않는 눈물이 턱 아래에 고였다가 회색 추리닝 위로 떨어졌다. 나언은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 얼어 있었다. 나언의 숨이 점점 불규칙적으로 흩어져 갔다.
나언이 숨을 제대로 쉬는지 보기 위해 손을 뻗어 얼굴을 들어 올리려 한 순간, 나언은 어깨를 흠칫 떨며 기원의 손을 피했다. 하얗게 질린 낯 위로 주르륵 눈물이 재차 흘렀다. 기원이 무심코 뻗었던 손을 움츠렸다.
“때리려는 거 아니야.”
기원을 손을 내리며 나직하게 일렀다. 나언은 기원의 설명에도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끝내 기원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손등으로 얼굴을 슥 닦을 뿐이었다. 기원은 넥타이 매듭을 헐겁게 고치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으며 날뛰던 분노가 자취를 감춰 버렸다.
똑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겪었었다. 물론 그때의 나언은 술에 절어서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기원은 오늘, 그날과 비슷한 무력감을 경험했다.
기세 좋게 차 문을 열어젖히고 저를 똑바로 바라보기에 무어라 변명을 하거나, 왈칵 화라도 낼 줄 알았다. 그리고 내심 그러길 바랐다. 하지만 나언의 반응은 전혀 다른 색깔을 보였다. 나언은 대거리를 포기한 채 공포에 젖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표정을 떠올리는 순간 명치 아래가 콱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기원이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과거 기원은 상대를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진실이든 아니든 자백을 받아 낸 뒤 제가 원하는 대로 휘두를 명분을 만들고 봤다. 그게 제 방식이었고 제가 알고 있는 연애였다.
하지만 이제 나언에게는 그게 불가했다. 나언에게 기원의 폭력적인 모습이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인 것처럼, 기원에게도 나언의 과거가 두려운 존재가 된 것이다.
씨발, 기원이 손으로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잠깐 함께 지냈다고 나언이 조금 단단해졌을 것이라 여기다니. 방심이자 자만이었고 위험한 실수였다. 자신이 참고 인내하며 나언을 대하는 것처럼, 나언 역시 과거의 모습을 제 안에 가둔 채 제 곁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기원이 무거운 한숨을 뱉으며 나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백나언.”
나직한 목소리로 나언의 이름을 올렸다. 천천히 손을 뻗어 갸름한 턱 아래를 쓸어 주자, 이번에는 나언이 몸을 굳힐지언정 뒤로 피하진 않았다. 기원은 젖은 뺨의 눈물을 닦아 주고 얼굴을 감싸 올렸다.
“……네.”
나언이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울음 섞인 호흡을 갈무리하며 애써 눈을 맞춰 오는 나언 역시 안정을 찾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중이었다.
나언은 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원의 낯에 누그러진 기색이 들어찬 걸 보자마자 희미한 안도감이 들며 눈이 더 뜨겁게 달아올라 버렸다. 유약한 자신이 너무나 볼품없이 느껴졌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데.”
그리고 자신을 어르는 기원의 목소리가 조금은 다정하게 느껴진 탓일까, 결국 저도 모르게 서운함을 실은 대답이 불쑥 흘렀다.
“…대체 경호원은 왜 보냈어요.”
엉망진창으로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기원이 한쪽 눈을 찌푸리며 멈칫했다. 아까만 해도 나언이 거짓말을 하는 걸까 싶어 이성이 흐려졌었고, 자신이 통화를 끊지 않고 있으니 괜찮겠거니 싶었는데. 나언은 그 일이 유독 서러웠던 모양이다. 금방이라도 오열할 것 같은 얼굴을 겨우 가다듬으며 뱉은 말이 저거라니.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기원이 턱에 선이 가도록 어금니를 짓씹었다.
“경호원…은. 생각이 짧았어요.”
물론 기원 딴에는 진심을 담아 한 사과였지만 나언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서러움에 짙게 젖은 숨을 식식 뱉더니, 참아 왔던 억울함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최기원 씨도 똑같아요.”
“?”
뒤늦게 안정을 찾기 시작하며 약한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한 모양이다. 나언의 원망 어린 목소리를 들은 기원이 한쪽 눈썹을 살짝 끌어 올렸다. 나언은 기원이 제 반응을 흥미로워한다는 것도 모른 채로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 물론 울음이 섞여 들어 웅얼대는 것처럼 들리긴 했지만.
“똑같이 흘리고 다닌다고요…”
“내가 흘리고 다닌다고.”
의문스러워하는 기원에게 대답할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입을 닫은 나언이 소매 아래에서 손톱 옆의 살을 계속 뜯었다. 기원은 그런 나언의 손을 붙들어 가볍게 떼어 냈다. 가만히 두면 또 피를 볼 때까지 살을 헤집어 놓을 것 같았다.
“단상 위에서 그렇게 웃고, 막 보고 싶었다고 말하니까 여자 직원분들이…, 최기원 씨를….”
“나를 뭐.”
“연애 상대로 이러쿵저러쿵….”
그야 최기원 씨는 여자를 만났었으니까. 나언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변명을 굳이 덧붙였는데, 기원으로선 그게 더 어이없었다. 지난번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지나가는 말로 남자는 처음이라 말했던가, 나언은 듣는 척도 안 하는 것 같았는데 그걸 저렇게 의식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기원이 아무런 대꾸를 않자 가라앉은 목소리가 덕지덕지 붙어 왔다.
“막 섹시하다고 그랬어요. 희롱도 했다고요. 더럽게, 더러운….”
제일 가슴을 홧홧하게 만들었던 직원들의 희롱. 정확한 표현이 기억이 나지 않아 나언이 더듬대는 사이 기원이 틈새를 놓치지 않고 장난스레 말꼬리를 물었다.
“내가 더러워요?”
“아니, 최기원 씨랑 더러운 관계가 되고 싶다고 그랬다고요…! 그걸 듣는 나도, 아니 저도, 똑같이 화나고….”
“…….”
“아무튼 제가 그냥 게임 열심히 한 게 흘리고 다니는 거면 최기원 씨도 똑같아요…. 똑같이 흘린 거라고요….”
나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 문장 끝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힘없이 사그라져 버렸다. 이렇게 화가 나거나 억울할 때면 하고 싶은 말은 가득한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표현은 횡설수설 얽혀 버린다. 조리 있게 따지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한 나언이 작은 한숨을 뱉으며 제 이마를 세게 문질렀다. 눈물이 차올라 흐려졌던 시야는, 볼 위로 눈물이 뚝뚝 흐르고 나서야 조금 맑아졌다.
그런 나언을 빤히 바라보던 기원의 어둑한 눈빛에 웃음기가 살짝 스몄다.
사실 오늘 기원에게 거슬렸던 건 김기영 하나가 아니었다. 나언이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홀 안을 돌아다닐 때마다 은근슬쩍 따라붙는 묘한 시선들도 싫었다. 빚어 놓은 것처럼 잘생긴 놈이라 움직임이 크지 않은데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잖아도 신경이 곤두섰는데, 최지은 주임이 건넨 마카롱을 동아줄 쥐듯 붙든 것도 -자신이 준 음식은 부담스러운 티를 팍팍 내다가 무감한 얼굴로 삼키는 경우가 많았다- 심히 거슬렸다. 애써 참아 누르던 초조함과 분노는 김기영이 나언을 껴안듯이 붙들어 팔을 끌어 올리는 것에서 한 번, 그리고 김기영의 허리를 붙잡고 다니는 걸 보고 나선 주체하기가 버거울 정도가 됐다. 더 보고 있다간 단상에서 내려가 다짜고짜 김기영의 뺨을 칠 것만 같아, 차라리 자리를 뜬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뻔히 보고 있음에도 타인과의 스킨십에 최소한의 자각조차 없는 백나언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켜켜이 쌓였던 모든 감정이 나언의 서툰 투정에 모두 눈 녹듯이 녹아 버렸다. 저런 식의 비논리적인 질투도 할 수 있는 놈이라니. 예상외의 말과 행동이 미친 듯이 사랑스러웠다.
결국 기원이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성마른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언 역시 제가 따지고 든 부분이 실상 어이없는 질투라는 걸 잘 알기에 기원의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이미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고요하던 기원이 보인 반응이 웃음이라는 걸 인지하는 순간, 나언은 수치스러움에 눈썹 사이를 와락 구겼다.
“…웃겨요?”
씩씩대던 나언이 차의 문고리를 잡아챘다. 하지만 기원의 손이 훨씬 빨랐다. 나언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긴 기원이 고개를 기울이며 나언에게 입을 맞췄다.
“…읍!”
깜짝 놀란 나언이 몸을 푸드덕대자 기원이 품 안으로 나언을 가두며 끌어안았다.
“읏, 왜 갑자기, 으…읏.”
“혀 씹혀요, 입 좀 닫아.”
아직 분기가 가시지 않은 나언이 어깨를 밀어 댔다. 기원은 가소로울 만큼 약한 힘에 밀리는 척 몸을 물리며 나언의 눈을 바라봤다.
“알겠어요. 내가 흘리고 다녀서 미안해요.”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는 걸 보며 나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엎드려 절받기 사과 따위 필요 없다고 따져 보려 하던 찰나, 기원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나언의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봤다.
“그리고 아까 무서웠으면 미안해요.”
방금 전의 목소리와 달리 장난기가 사라진 담백한 사과에 찌푸렸던 눈썹 사이가 천천히 펴졌다. 나언이 눈을 깜빡이며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기원은 긴 손가락으로 나언의 손을 마주 잡고 천천히 흔들었다. 여기 보라고 떼쓰는 어린애처럼. 붉은 입술을 꾹꾹 씹어 대던 나언이 결국 조심스럽게 눈을 맞췄다. 펑펑 우느라 평소보다 발갛게 부은 눈이 기원을 천천히 담았다.
깜빡, 깜빡. 눈을 깜빡일 때마다 젖은 속눈썹이 빛을 반사했고 나언은 코를 한 번 작게 훌쩍인 뒤 기원을 슬쩍 노려봤다.
“앞으로는 그렇게 못되게 하, 지 마, 읏….”
그러나 그와 동시에 기원의 반대편 손이 거리낌 없이 허리춤으로 들어왔고 제법 단호했던 나언의 목소리도 어물어물 흩어져 버렸다.
“아, 잠시만, 여기 사람들….”
기원은 나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조수석 의자를 눕히듯 젖혔다. 당황한 탓에 피가 몰린 작은 귀와 하얀 뺨에 여러 번 입을 맞추며 조수석으로 넘어갔다. 나언은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그의 화가 누그러지고 또 성욕을 느꼈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 거침없이 퍼부어지는 키스 속에서 겨우 숨만 뻐끔뻐끔 내쉬었다.
뜨거운 혀가 입술을 가르고 나언의 입 속을 마음껏 헤집었다. 원래 기원은 스킨십이 거친 편이었다. 그러나 갈무리되지 못한 여러 감정의 여파일까,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집착적이고 여유가 없었다.
점점 나언의 호흡이 엉켜 가는 것을 느낀 기원이 겹쳤던 입술을 떼어 내고, 무게를 실어 나언을 짓누르던 몸도 조금 일으켰다. 가쁘게 숨을 쉬던 나언이 게슴츠레한 눈을 떠 겨우 기원에게 시선을 붙였다.
“하, 아, 하아….”
겨우 키스로도 바들대는 연인이 안타까웠지만, 아까부터 나언의 우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기원은 점점 한계에 내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소 성급한 손길이 나언의 바지와 속옷을 단번에 붙잡아 끌어 내렸다. 허벅지까지 바지가 끌려 내려간 순간, 겨우 이성을 붙든 나언이 기원의 손을 잡았다.
“여, 여기서요?”
“…….”
“최기원 씨?”
나언의 물음을 무시하고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머금으려던 기원이, 두 번의 부름 끝에 나언과 눈을 맞췄다.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먹색이 된 서늘한 눈동자가 여유를 잃고 들끓고 있었다.
나언에게 비정상적으로 발정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서, 더욱이 펑펑 울고 난 얼굴에 휘둘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백나언이 ‘지금 하려면 무릎 꿇고 빌어’라고 말한다면 정말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입 벌려 봐요.”
울 만큼 놀라고, 밀어 내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릴 정도로 당황해 놓고선 벌리란다고 맞닿은 입술을 망설이며 벌리는 순종적인 모습을 보며 기원은 새로운 색깔의 쾌감에 젖어 들었다. 나언이 이렇게 미련하게 굴 때면 미칠 것 같았다. 바보같이 착해서, 특히 순해 빠진 눈동자가 암담할 정도로 예뻐서 인내하기 어려운 흥분이 이성을 흩트려 놓았다.
기원의 검지와 중지가 나언의 젖은 입 속을 부드럽게 건드렸다. 금세 손가락이 젖어 들고, 나언이 인지하지 못한 사이 점점 더 깊게 미끄러진 손가락이 혀뿌리 안쪽까지 건드렸다. 나언이 배를 뒤틀며 약한 헛구역질을 하는 순간 능숙하게 손을 빼내어 다시 입 안을 뭉근하게 휘젓는 손가락은, 마치 키스를 하는 혀처럼 묘한 감촉을 띠고 있었다. 제 손 위로 흩어지는 나언의 숨소리도 점점 열기에 무너져 갔다.
“……흐, 으.”
그리고 기원은 한 손으로 허벅지에 걸려 있던 나언의 바지와 속옷을 마저 벗겨 냈다. 아까와 달리 큰 저항 없이 운동화까지 벗겨 낼 수 있었다. 힘이 풀린 마른 다리가 시트 위에 늘어졌다. 기원은 나언의 입 속에 처박혀 있던 손가락을 빼내 나언의 아래로 가져갔다. 입 안이 빈 순간 기다렸다는 듯 혀가 들어섰고, 타액에 젖어 축축해진 손가락은 망설임 없이 뒤를 비집고 들어섰다.
기원은 맞붙였던 입술을 떼어 냈다. 서로의 코끝이 닿은 상태로 기원은 나언의 표정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나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끙끙 앓았다. 적신 손가락이긴 했지만 젤 없이 이물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래는, 단단한 마디에 걸릴 때마다 툭, 툭 걸리는 느낌이 선연했다. 그럴 때마다 나언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애써 누르듯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기원의 어깨를 더 세게 붙들어 쥐었다.
“흐, 으, 아…. 읍.”
예민한 곳을 찌르는 손가락의 성감과 누군가 여기를 볼 것만 같은 불안함이 번갈아 몰아쳤다. 슈트의 단추 하나 끄르지 않고 넥타이까지 맨 기원의 아래에서 자신만 헐벗고 헐떡이는 것이 수치스러우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 때쯤이면 내벽을 꽉 채울 만큼 들어선 굵은 손가락이 헉 소리가 날 만큼 깊은 곳을 꾸욱 찌르고 나갔다. 결국 나언은 시트에 뒤통수를 비비적대며 앓는 소리를 터뜨렸다. 도저히 참아지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느끼는 곳을 짓누를 때마다 단단하게 솟구친 나언의 성기가 배꼽 아래에서 꺼덕였다. 이미 피가 몰려 올라붙은 붉은 성기 끝에는 울컥 쏟아진 프리컴이 맺혀, 나언이 입은 회색 추리닝 상의에 축축한 액을 잔뜩 묻혀 놓았다. 나언은 기원의 손가락이 애매한 곳을 찌르면 자각하지 못한 채 움찔대며 허리를 옅게 들썩였는데, 본능적으로 하는 나언의 허리 짓이 기원에게는 몹시 야하게 느껴졌다. 탄식 어린 숨을 뱉어 낸 기원이 혀로 입술을 축이며 손가락을 빼내자 나언은 성기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마른 허벅지를 잘게 떨었다.
기원은 허리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려 속옷 속에서 뜨거워진 성기를 꺼냈다. 손가락이 빠져나가자마자 다시 꾹 다물린 좁은 구멍에 귀두를 맞추자, 나언이 본능적으로 다리를 모으며 기원의 어깨를 밀었다. 풀어 준 수고가 무색하게 긴장을 머금고 다시 조여든 구멍을 벌리며 두꺼운 귀두가 천천히 나언을 가르고 들어찼다.
“으, 흐윽…, 아….”
“하…….”
젤이 없어 뻑뻑하긴 하지만, 새로운 장소가 주는 쾌감과 고통이 분명히 섞여 있는 나언의 신음에 기원은 거침없이 허리 짓을 시작했다. 좋지만 아픔이 더 크게 느껴져서 나언이 다리를 버둥거리자, 기원은 나언의 무릎 뒤로 손을 넣어 다리를 끌어 올렸다. 나언의 허리가 더 높이 들리며 등이 조수석에 푹 파묻혔다. 누운 나언의 몸이 가려질 정도로 덮치는 자세가 된 기원은 살짝 들린 엉덩이 사이로 제 것을 더욱 편하게 박아 넣었다.
“으, 흐읏, 아, 아아!”
처음에야 조금 참아 보려던 신음도 이젠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시트에 구겨지듯 처박힌 나언의 위로 기원이 거칠게 허리 짓을 할 때마다 살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퍽퍽 거세게 울렸다.
깔끔하게 올렸던 기원의 검은 머리가 이마 위로 흩어지고, 히터를 틀어 놓은 좁은 차 안은 점점 더워졌다.
“으, 흑, 으읏, 흐으으.”
자세를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도 나언에게는 버거웠다. 계속 같은 지점을 짓이기고 뭉개는 탓에 신음은 목을 긁는 울음소리와 닮아 갔고, 거기에 핀트가 더 나가 버린 기원은 무릎 뒤 허벅지를 손으로 더 내리누른 채 굵은 성기를 뿌리 끝까지 쑤셨다.
울음이 섞인 신음이 너무 커져, 이젠 바깥까지 들릴 것 같았다. 기원은 나언의 윗옷을 끌어 올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쑤셔 넣었다. 입 안에 들어서는 까끌까끌한 감촉에 나언이 젖은 눈동자로 기원을 올려다봤다.
“물어.”
습한 목소리가 내린 명령에 입술을 벌린 나언이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옷을 물었다. 무언가라도 쥐고, 뜯고, 매달려야 버틸 것 같은 나언은 잇새로 두꺼운 옷감을 꽉 물고 신음을 마구 내질렀다.
기원의 어깨를 붙잡은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어쩔 줄을 몰라 파르르 떨리는 손이 아래로 미끄러지는 순간 기원은 가는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껴 넣었다. 모양새만 깍지를 꼈다 뿐이지, 시트에 처박듯 마른 손목을 고정한 기원은 아래에서 위로 허리를 거세게 쳐올렸다.
“…!”
순간 깍지를 낀 나언의 손이 꽉 움츠러들었다. 동시에 땀과 흘러내린 프리컴으로 번들거리던 마른 배 위로 뜨거운 것이 확 번졌다. 예상치 못한 이른 사정에 나언의 눈이 크게 뜨이며 허리가 붕 떴다. 뒤늦게 발끝부터 허벅지까지 파르르 떨던 나언은 마저 배출하지 못한 하얀 액을 울컥울컥 쏟았다.
그럴 때마다 힘이 들어간 매끄러운 내벽이 굵은 성기 주변을 꽉 조였다. 원래 나언의 사정이 훨씬 이른 편이었기에 기원은 그가 사정감을 충분히 느끼도록 잠깐 기다려 주었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질투와 쾌감에 눈이 먼 기원은 나언의 절정을 무시하고 폭력적인 삽입을 퍼부었다.
“으, 허억, 으…읍, 윽!”
호흡이 제멋대로 엉킨 나언의 신음이 투둑 툭 끊어졌다. 기원이 미간을 살짝 일그러트리며 이를 악문 신음을 뱉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힘없이 벌어진 마른 다리 사이로 빠듯하게 벌어진 옅은 색의 구멍, 그리고 그 아래를 드나드는 번들대는 제 성기까지 한눈에 보였다.
“후…….”
퍽퍽 몇 번 더 허리 짓을 하던 최기원은 성기를 급하게 뺀 후 한쪽 무릎을 세워 나언의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조금 부족한 거리는 나언의 머리칼을 쥐어 당겨 제 귀두 쪽으로 끌고 왔다. 나언의 눈가에 맞춘 붉은 선단에서 하얀 액이 주륵 흘러나왔다.
양이 많아 뭉근한 액이 젖은 속눈썹과 광대, 뺨을 타고 느리게 흘러내렸다. 얼굴을 적신 미지근한 액에서 기원의 향이 진하게 풍겨 왔다. 아직 사정의 기운이 가시지 않아 헐떡이는 나언은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기원의 정액을 흠뻑 뒤집어썼다.
머리카락을 놓은 기원이 엄지로 나언의 볼을 쓸었다. 뺨에 묻은 액을 문지르듯 덧바른 기원이 그대로 손을 내려 열기가 식지 않은 구멍 주변에 액을 마저 묻혔다. 미끈대는 손가락은 찢어지지는 않았지만 뜨겁게 부어오른 구멍 주위를 살살 문지르다, 조금씩 구멍 안까지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제… 그, 만…… 끝.”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감한 나언이 이제 끝난 거라며 입을 벙긋댔다. 하지만 기원은 나언이 거부의 의사를 온전히 보이기 전에 입술을 제 입술로 막으며 천천히 자세를 바꾸었다. 혀를 얽는 사이 어느새 조수석에 앉은 기원이 나언을 끌어안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아래에 누운 기원이 제 위에 올라탄 나언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힘들어요?”
색색, 떨리는 숨만 간신히 뱉던 나언은 희멀건 액을 얼굴에 묻힌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도 아프고, 이런 곳에서 하니 마음이 불안해 온전히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그 때문인지 아래도 더 빡빡한 것 같아 유독 그의 성기가 버겁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언의 끄덕임에 안타까운 듯 눈썹을 끌어 내린 기원이 장골에 맞닿은 작은 엉덩이를 부드럽게 토닥여 줬다.
기원은 말랑한 살을 톡톡 두드리다가, 몇 번 장난스레 쥐고 놓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살을 주무르는 손길이 점점 야릇하게 변했고, 고요한 차에는 점차 살이 치덕대는 소리가 가득 찼다. 정액이 묻어 있는 나언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잘 참아 봐요.”
그대로 손을 미끄러뜨린 기원은 단단한 성기 끝을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앞으로 쓰러진 나언이 제 어깨에 이마를 푹 박은 채 흐느끼는 소리를 내자, 기원은 너른 품으로 나언을 꽉 끌어안아 줬다. 하얀 팔이 미약한 힘으로 제 등을 끌어안는 순간, 기원의 눈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
나언은 잠긴 목소리로 잠시 바람을 쐬고 싶다고 말했다. 나언을 꼬드겨 호텔로 끌고 갈 계획까지 세웠던 기원은 그 기진맥진한 목소리에 결국 바닷가 가까이로 차를 몰았다. 인적이 드문 길가에 차를 정차하고 창문을 내리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차 안으로 훅 들어왔다.
뒷좌석의 수납공간에서 두꺼운 검은 담요를 꺼낸 기원이 나언의 무릎 위를 덮어 주었다. 춥지 않냐는 기원의 물음에 나언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손은 꾸물꾸물 담요 아래로 집어넣었다. 열린 차창으로 고개를 돌린 나언이 짙은 밤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람을 따라 머리카락이 옅게 흩날리고, 뾰족한 코끝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어두운 바닷가를 배경으로 나언의 주변만 환하게 빛난다는 착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걸을래요?”
바깥을 빤히 보는 눈이 꼭 걷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 제가 추울까 봐 선뜻 말을 못 꺼내는 것 같아 물었다. 역시나 냉큼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인다. 기원이 희미하게 웃으며 차에서 내리자 나언도 담요를 끌어안은 채로 따라 내렸다. 바닷가를 따라 난 작은 오솔길 끝, 낡은 벤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둘은 그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운치 있는 커다란 상록수 아래에서 느린 걸음을 떼던 중, 나언이 잠시 걸음을 멈칫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기원이 손가락으로 긁어내 주고, 물티슈로까지 닦아 주었는데도 속옷 위로 미지근한 액체가 흘러 고이는 감각이 선연했던 탓이다. 나언은 차 안이라 완벽하게 뒤처리를 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며 티 내지 않고 걸음을 옮겼지만, 기원은 일부러 전부 빼 주지 않은 것이었다. 나언이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면 정액 냄새나 양껏 풍기며 돌아가게 하고 싶었다.
벤치에 앉은 나언이 담요를 펴 기원의 무릎까지 함께 덮었다. 꼼꼼하게 무릎을 덮은 나언이 검은 물결을 응시했다. 생각이 많은 무거운 눈이었다. 기원은 나언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바닷바람이 풀 길 사이를 비스듬히 쓸어 주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무렵. 나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기영 대리님이랑 있었던 일이 불쾌했다면, 그건 제가 무지각했던 탓이에요. 대리님한테는 어떠한 감정도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부서지는 파도를 보던 회색의 눈동자가 나언에게 닿았다. 나언은 여전히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진 갸름한 얼굴을 보자 기원의 가슴이 저릿해졌다. 이러려고, 이런 표정을 보려고 여기까지 보낸 것이 아니다. 워크숍을 간다며 들떠 순진하게 굴었던 모습을 떠올린 순간, 기원은 제가 나언의 시간을 망쳐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일은 내가 심했어요.”
기원의 말에 잠시 볼을 우물대던 나언이 눈을 살짝 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부드러운 담요의 검은 털을 고양이 쓰다듬듯 만지작대던 나언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제 누군가를 사랑할 일… 없어요.”
“…….”
“그런 거 더는 안 하고 싶어요.”
더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기원은 질투를 느낄 이유도, 걱정할 거리도 없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잊었으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가슴 속에 그런 감정을 느끼는 부분이 있었다면, 아마 되돌릴 수 없는 상태까지 부서졌을 것이고, 그건 회복되지 못한 채로 그대로 굳어 버렸을 것이다.
“나는요?”
귓가에 닿은 목소리에 나언이 눈을 크게 뜨며 기원을 바라봤다. 설마 기원이 이런 구차한 질문을 할 거라 생각지도 못했는지 당황한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것이다. 기원은 충동적인 질문을 뱉고 나서도 나언의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아니, 차마 그러지 못하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가라앉은 얼굴로 담배 연기를 흘리는 옆모습을 바라보던 나언도 시선을 바다 쪽으로 거두었다.
“온전하지 않아요.”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긴 나언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최기원 씨가 고마운 날도 있고, 애틋한 날도 있어요. 그러다 어떤 날은 가슴이 뛰기도 해요.”
불쾌한 꿈에 자다 깼을 때 그가 말없이 자신을 끌어안아 주는 새벽, 씻고 나온 머리칼을 말려 주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 오후, 온몸에 바다, 파, 도의 털을 묻힌 채로 고양이 사료 구매에 신중을 가하는 아침. 주로 그럴 때 나언은 사랑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잠시 숨을 고른 나언이 입술을 뗐다.
“많은 날은 원망스러워요. 때때로 오늘처럼 무서운 날이 올까 두렵기도 하고요.”
제법 단단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처연한 나언의 목소리가 파도와 함께 부서졌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나언의 말을 곱씹던 기원이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역시 나언과 비슷한 표정으로 바다를 응시했다.
시간이 흐른 만큼 짧아진 담배가 모래 위로 떨어졌다. 기원은 쓴웃음을 삼키며 담요 아래에서 나언의 손을 끌어와 당겼다. 식어 가는 손가락을 훑어 올라온 손이 말랑한 손바닥을 지나, 울퉁불퉁한 흉을 남긴 손목에 닿았다. 기원은 오랜 과거를 더듬듯 제 연인을 아무 말 없이 간지럽게 쓰다듬었다.
나언이 제게 느끼는 감정이 혼란과 비슷한 것이라는 판단은 이미 하고 있었다.
저와의 삶에 조금 익숙해진 나언이 내는 고른 숨소리를 안다. 하지만 나언에게 닿은 대부분의 밤이 편안한 꿈이 아니라 끔찍한 악몽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회사 이야기를 할 때면 나언 주위의 공기가 말랑하게 풀어져 있다가도, 가끔은 낯설 정도로 예민한 눈동자가 조심스레 시선을 피할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은 백주언의 유품이 들어 있는 상자의 위치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거나 먹는 양이 지나치게 줄었다.
나언이 온전치 못한 원인은 전부 자신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정도면 충분해요.”
나언의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낀 기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차가워진 나언의 손을 몇 번 더 주물러 주자, 힘이 빠져 있던 차가운 손가락 끝이 조심스레 기원의 손등에 맞닿았다.
“고마워요, 이해해 줘서….”
끝내 고맙다는 말까지 작게 중얼대는 유순한 성정에 기원은 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기원은 나언의 머리를 당겨 제 어깨에 기대게끔 했다. 순순히 무게를 건넨 나언이 조금은 편해진 목소리로 웅얼댔다.
“이런 말을 털어놓아도 이제 혼나지 않겠다는 믿음도 있어요. 그러니까 최기원 씨도 저를 믿어 주세요.”
바다는 그런 힘이 있었다. 죽음을 결심할 용기를 주기도 했으며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지친 하루 끝, 속마음을 흘려보내 줄 고요한 물길이 되어 주었다.
오늘, 둘 사이에 어지러운 감정이 남아 있다면 지금만큼은 파도에 쓸려 저 먼 곳까지 간 것 같다. 나언은 미미한 안정을 느끼며 단단한 어깨에 기대 잠시 눈을 감고 쉬었다. 고개를 튼 기원이 제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는 느낌이 들었다.
나언은 그날 새벽 숙소로 돌아갔다. 이미 곯아떨어져 있던 김기영 대리는 아침이 되어서야 나언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발코니에 기대 바다를 구경하던 나언이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자, 김기영은 숙취에 퉁퉁 부은 얼굴로 ‘어제 어디 갔었어요?’라고 물어 왔다. 잠시 바람을 쐬고 왔다는 말에 김기영 대리는 의심 없이 배를 긁적이며 자리를 떴다. 그에게선 아직까지 술 냄새가 짙게 났다.
2주 후 평일 오후. 나언은 김기영 대리가 건넨 반투명한 봉투 하나를 받았다. 비닐 겉면에 붙은 작은 포스트잇에는 ‘<기획·마케팅부 사원 백나언>’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뭐냐는 나언의 질문에 김기영 대리가 고른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워크숍에서 사진사가 찍은 사진이래요. 받아 오는 김에 나언 씨 것도 가져왔어요.”
“아,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나언이 봉투를 벌려 속을 들여다봤다. 그 속엔 나언이 담긴 사진 몇 장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나언이 사진을 꺼내 한 장씩 넘겨 보았다.
긴장한 얼굴로 단상을 바라보는 모습, 조끼를 받고 걸어오는 모습, 최지은 주임과 이야기를 나누는 찰나와 짝 피구를 하는 모습, 음료를 들이켜는 모습들이 선명한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제 얼굴에 맺힌 초점이 신기한 듯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언의 손이 점차 느려졌다. 한 장씩 넘기며 책상 위로 사진이 차곡차곡 쌓일 때마다 입가에 매달려 있던 웃음기가 점차 희미해져 갔다.
“…….”
탁탁.
겹친 사진을 정갈하게 정리한 나언이 봉투 속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책상 서랍을 열고 제일 안쪽에 봉투를 집어넣은 나언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 낯은 무감한 상태였다. 가라앉은 나언의 눈은 모니터 위의 글자를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