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93화 (593/956)

사랑은 아무나 하나(3)

-------------- 593/952 --------------

300년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숲속 한가운데서 발견된 보물상자를 손에 넣은 사람의 눈빛이 저렇지 않을까 싶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말해 봐, 말해 보라고’라는 의미를 가득 담아 단유를 쳐다보는 유진이다.

“별일 없었어. 고등학교 마치고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할 겸, 여행을 갔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쌓고 돌아와서 대학 입학. 끝.”

빨대를 물고 있던 유진은 앞에 놓인 아이스커피를 쪽 빨아 마시며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액정에 뜬 화면을 볼 수 있게끔 들고선 입을 열었다.

“3년 전, 그 어렵다던 수능에서 유일하게 만점을 받으신, 전국 1등이 돌연 대학 진학을 포기한 이유가 고작 견문을 쌓기 위해?”

석 달 전 단유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제보되었던 게시물이 액정에 떠 있었다.

“그냥 변덕이었다고 생각해.”

“변덕?”

“그때는 아직 대학을 진학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고민하기도 했고, 내가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미래를 꿈꿀 것인지 정해지지 않았던 참이라. 따지고 보면 남들 하는 고민을 나도 했던 거고, 대신 남들이 잘 고르지 않는 선택지를 골랐던 것뿐이야.”

“흠. 그렇게 말하니까, 슬쩍 이해가 갈 듯도 하고. 좋아,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나한테는 왜 연락 안 했어? 섭섭하게?”

“아까부터 계속 연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데, 내가 너한테 연락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친구잖아, 우리!”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외치는 유진에게 단유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친구라는 것에 대해 개념 정의를 하고 따질까, 아니면 그냥 네가 억지 부리는 거라는 걸 인정할래?”

“···난 네가 친구라고 생각해.”

“왜?”

잠시 단유를 지켜보더니, 곧 어깨에 힘을 풀고는 ‘무슨 일 있었냐’는 태도로 대답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자.”

손을 내젓던 유진은 단유를 흘겨보며 ‘깐깐한 녀석’이라고 중얼거렸고, 단유는 그 중얼거림을 무시하며 음료수를 마셨다. 단유의 무미건조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유진이었다.

“너 참 이상하다. 솔직히 말해 봐. 나 정도면 꽤 괜찮은 얼굴 아냐?”

“누가 뭐래?”

“그런데 왜 나한테 아무런 관심이 없어?”

“말했다시피, 난 내 공부하기도 바빠. 다른 곳에 눈 돌릴 틈이 없어.”

팔짱을 끼고 물어본다.

“혹시 취향이 남다른 건 아니지?”

“어떤 취향?”

“성적 취향.”

“그런 거라면, 남들과 똑같아.”

“어떤 ‘남’들을 말하는 거야?”

“말장난하지 말고.”

길게 한숨을 내쉰 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 너랑 정말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 고등학교 올라간 뒤, 너랑 연락이 잘 안 될 때도 그랬고. 어제 우연히 만난 뒤에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난 너랑 정말 친한 친구가 되고 싶어.”

“왜?”

“네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대학에 가는 대신 여행을 선택했다고 했듯이, 나도 내 미래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어. 특히 고등학교 올라갈 즈음에. 알다시피 그때도 난 소속사가 있었고, 늘 꿈이 배우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정말 배우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배우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어. 걱정이란 건 늘기만 하지, 줄지는 않더라고. 그럴 때 내 걱정에 대해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했어.”

“친구 없어?”

유진은 아이스커피 잔에 꽂힌 빨대를 빙빙 돌리며 대답했다.

“친구야 있지. 있는데, 너처럼 말해 줄 친구는 없었던 거 같애.”

“나처럼?”

“기억 안 나?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리고 본인이 한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당시 방송사고를 치고 난 후, 대학교를 빠져나올 때 유진을 만나 나눴던 이야기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솔직한 말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한 거야?”

“그것도 그렇지만, 당시 교육부에 한자리하시던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힐 뿐 아니라, 교육제도에 대해 비판을 가하던 너처럼 통찰력을 가진 친구는 찾기 힘들었지.”

또다시 길게 숨을 내뱉던 유진은 자세를 바꿔 단유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담긴 단유의 표정이 비쳐 보일 정도로.

“우리 엄마는 맨날 내가 부족하대. 뭘 해도 부족하고 못마땅해하시지. 좀 더 잘하라고 채찍질하는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몰아붙이셔.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확실하게 선을 그어서 이야기해주면 나도 이해하고 알아듣겠는데, 엄마는 그저 두루뭉술하게 지적만 하니까 괜히 반발심도 생기고 그랬었어. 반면에 친구들은······. 몰라, 그때는 친구들도 많이 어리게 느껴졌어. 그들이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은 다르다고 생각했고, 내가 보고 느끼며 겪는 세상의 일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넘겨짚을 줄만 알지, 내가 뭘 힘들어하고 걱정하고 고민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 아이들의 위로나 충고를 제대로 들을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아. 그래서 점점 더 외로워지고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빨대로 커피 위에 떠 있는 얼음들을 꾹꾹 누르며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유진에게 설핏 아쉬움이 보였다. 아무래도 연예계에 일찍 발을 들이면서 나름 고충을 겪은 모양이다.

그러나 단유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다 비슷해, 라는 식의 위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니까.

“하아···. 아무튼 말이야, 그럴 때마다 과연 너라면 나한테 무슨 말을 해줬을까, 생각하게 되더란 말이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고민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조언을 해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자격을 갖춘 상담가도 아닌데 무슨 조언이야.”

“잘할 거 같은데?”

“그 당시에 네가 나한테 어떤 고민을 털어놓았더라도, 난 별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못 했을 거야. 내 앞가림도 못 하는데 누구한테 충고하겠어?”

“그렇게 말하는 놈이 그때 교육부 공무원들한테 그렇게 일침을 놨던 거야?”

“일침까지는 아니지. 그저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걸 먼저 해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라고 의견을 제시했던 거야. 그분들이 그걸 너무 공격적으로 받아들이셨던 게 문제지.”

어느새 화제는 과거의 그 사건을 두고 서로의 감상을 피력하는 것으로 넘어갔고, 유진은 마치 오래된 추억을 이야기하듯 신이 난 얼굴로 대화를 주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대기실에서 갑자기 나타나 인사를 건네던 15살의 유진을 보는 것 같았다.

****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하니까 참 좋다. 그렇지?”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유진은 히죽 웃으며 단유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확실히 이런 제스처를 보면 도회적인 외모와 달리 털털한 성격이다.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 알겠지?”

“그래.”

스케줄이 있어 가야 한다는 유진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아, 맞다. 야.”

“어.”

“여자친구 있어?”

단유는 가만히 있다가 손가락으로 유진을 가리켰다.

“나? ···아니, 여자 사람 친구 말고, 사귀는 여자친구 있냐고.”

“없어.”

“오케이.”

유진은 손가락으로 OK 표시를 한 후 콧노래를 부르며 멀어져갔다.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는 것은 아냐’라고 흥얼거리는 유진의 흔들리는 뒷머리를 바라보다 단유는 고갤 들어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진 탓에 도서관에서 여유롭게 책을 보긴 힘들 것 같았다. 일단 책을 빌리고 집에 가서 조별 과제랑 오늘 받은 리포트 몇 개를 해결하리라 마음먹었다.

****

집에 갔더니, 역시나 호빵이 신나게 달려와 단유를 반겼다. 그에 대한 화답으로 거실에 떨어진 호빵의 털을 모두 수거하여 쓰레기통에 버린 후 2층의 방으로 향했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틈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 봤더니, 닫혀있던 상미의 방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방에 가방을 두고 내려와 노크했다.

“들어와.”

“바빠?”

“조금. 왜?”

“밥 먹었냐고.”

“아직.”

“밥 먹을래?”

“이번 판만 끝내고.”

“그래.”

상미는 단유와 대화를 하기 위해 잠시 꺼놨던 마이크를 켜고, ‘이번 판 끝나면 식사하고 올게요’라고 함께 하던 플레이어들에 통보했다. 그 모습을 보며 단유는 방문을 닫고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보니 얼마 전에 사놨던 반찬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셋 다 집에서 식사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보니 반찬 줄어드는 속도가 느리다. 반찬을 꺼내 식탁에 늘어놓고, 하은이 사 놓은 2인분용 곰탕을 냄비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식사 준비가 끝났을 무렵, 상미가 방을 나왔다.

“혼자 했어? 조금만 기다리지.”

“괜찮아. 먹자.”

“고마워.

곰탕 한 숟가락을 떠먹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상미다.

“맛있네. 역시 돈만 있으면 살기 편하다니까.”

상미는 정말 맛있게 식사를 했다. 보는 사람이 배부를 정도로 허겁지겁 먹는데 며칠 굶은 사람처럼 보일 정도다. 분명 아침에 함께 밥을 먹었는데 말이다.

“방송은 어때?”

어지간하면 밥 먹을 때 말을 잘 걸지 않는 단유였지만, 저렇게 먹으면 어쩐지 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질문을 던졌다.

“방송? 괜찮아.”

“시청자는 많고?”

“컴퓨터 업글을 하고 나서 송출용의 화질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 그 덕분에 시청자도 늘었고. 그래도 내 게임 실력이 갈수록 일취월장한다는 게 크지.”

“카메라는 사용해?”

잠시 멈칫하던 상미가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손캠만.”

“그게 뭔데?”

“손만 나오게 하는 거.”

“사람들이 그런 걸 보고 싶어 해?”

“아무래도 FPS장르의 게임은 컨트롤이 중요하니까, 사람들이 손의 움직임을 보고 싶어 하거든. 얼굴 보여달라는 사람도 많긴 한데, 아직은 자신이 없어서. 너한테 괜히 미안하네. 일부러 조명까지 사줬는데.”

“미안할 거까지야. 어떻게 쓰든 네 마음이지.”

상미의 식사 속도가 느려진 것을 보며 단유도 식사를 이어나갔다.

“아, 너도 한 게임 할래?”

“공부해야지.”

“야, 밥 먹고 바로 책이 봐 져? 아, 넌 되겠구나. 그래도 소화도 시킬 겸, 같이 한 게임 하자.”

괜히 말을 걸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

“중앙에서 5시 방향으로 가면 오두막이 있는데, 거기에 좀비들이 5마리 정도 있을 거야. 거기서 템 좀 맞추고, 모자라면 3시 방향으로 올라가서 늪지대 몹 좀 잡아서 템 맞추는 거로.”

“알았어.”

“그리고 상황에 따라 수시로 오더가 변할 수 있으니까, 잘 따라주기만 하면 돼. 사주경계 하다가 적이 나타나면 바로 알려주고. 오두막 지역이 파밍 하기 좋다고 소문이 나서 그쪽으로 오는 사냥꾼들 많거든.”

상미는 자기 방에서 방송과 동시에 게임을 하고, 단유는 본인의 방에서 게임을 했다. 가끔 명수가 집에 오면 셋이서 같이 게임을 하기도 해서 컴퓨터에는 이미 웬만한 게임이 다 깔려 있다. 이러려고 비싼 컴퓨터를 샀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언덕을 넘으니 길버트의 오두막이라는 지명이 나오며 아래 분지 가운데에 낡은 오두막 두 채가 서 있었다. 샷건과 권총을 갖춘 상미가 앞장서고, 단유는 그 뒤에서 볼트 액션식 저격총을 들고 따라갔다. 카우보이모자를 눌러쓴 상미의 캐릭터가 오두막 근처까지 뛰어가다 멈춰 서서 사주경계를 시작했다.

“왼쪽 나무 아래. 저격 가능?”

단유는 대답 대신 신중하게 에임을 맞추고 사격을 실시했다. 헤드샷 알림음과 함께 좀비 하나가 쓰러졌다. ‘나이스 샷’을 외친 상미가 느린 걸음으로 오두막에 다가갔다. 입구 근처를 배회하던 좀비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권총으로 좀비의 머리를 겨눴다. 세 발의 총알을 연발로 쏴서 좀비의 머리를 터뜨린 상미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떨어진 아이템을 수거했다.

“안경 나왔다. 안경 써.”

상미는 단유에게 전리품을 건네고 본격적으로 오두막을 공략했다. 작은 오두막임에도 내부는 조그만 방들이 여러 개 있어 수색에 시간이 걸렸다. 두 마리의 좀비를 더 해치우고 마지막 한 마리를 찾고 있을 때, 오두막 내부에서 바깥을 보며 경계를 하던 단유가 입을 열었다.

“150m 사냥꾼 한 팀. 저격할까, 아니면 경계할까?”

“100m 안쪽까지 기다렸다가 가능하면 교전. 만약에 아이템을 맞춘 것 같으면, 교전 없이 뒤로 빠지자.”

상미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남은 좀비를 찾기 위해 수색 속도를 높였고, 단유는 창 옆에 몸을 숨기고 다가오는 사냥꾼들을 지켜보았다. 100m 안쪽부터 50m 지점까지는 몸을 숨길 데가 별로 없다. 저들이 빠른 사냥을 위해 빨리 올 생각을 가졌다면 단유에게 기회가 있을 것이고, 조심성이 많아 몇 안 되는 구조물에 몸을 숨겨 가며 온다면 사냥을 빨리 마무리하고 떠날 수 있으니 그것도 나쁘진 않다. 오두막은 파밍도 잘 되고, 수비하기에도 제격이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 된 것이다.

“헬프, 헬프!”

뒤쪽에서 움직이던 상미에게서 구조요청이 들어왔다. 어떤 사정인지는 몰라도 빨리 가야 하는데, 적팀도 마침 100m 구획선을 넘었다. 부디 그들이 조심성 많은 팀이길 바라며 단유는 몸을 돌렸다.

“어디?”

“지하방 들어와서 오른쪽! 보스몹 잡다 실수했어.”

단유는 빠르게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저격총은 등에 걸고 권총을 꺼내 장전을 마친 뒤, 총구를 돌려 오른쪽을 보려는 찰나에 정면에서 보스몹이 달려들었다.

단유는 침착하게 두 발을 보스의 머리에 쏘고 왼쪽으로 몸을 피했다. 어두운 지하실에서 갑자기 나타난 까닭에 빠르게 반응했음에도 제대로 피하지 못해 체력의 반이 깎이는 공격을 받았다.

만약 적이 50m 안쪽으로 들어오게 되면 오두막에서 나는 총성을 듣고 포위 공격을 준비할 텐데, 라는 생각을 잠시 가지며 권총을 들었다. 그러나 쏘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몸을 굴려 보스의 공격을 피해야 했고, 덕분에 보스의 등 뒤로 몸을 옮길 수 있었다.

상미는 기절상태로 빨리 부활시키지 않으면 죽고 말 것이기에 빠르게 권총으로 머리를 겨눴다.

―탕.

앞서 상미의 공격으로 체력을 잃었던 모양인지, 이번 공격에 보스는 괴성을 지르며 죽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반짝이는 아이템이 드랍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