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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742화 (742/956)

귀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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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불꼬불한 골목을 한참 걸어 마침내 도달한 곳은 작은 마당을 가진, 별 특색이 없는 2층 목재 건물이었다. 그늘진 오른쪽 외벽에는 실뱀처럼 가는 담쟁이덩굴 몇 가닥이 용케 2층까지 닿아 있었고, 기다란 판자를 여러 겹 덧대어 붙인 지붕 한구석에는 엉성한 새집 하나가 위태롭게 달려있었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보이지 않았고, 겉에서 보기에 아직 완성이 덜 된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빈집이에요. 어미새는 집을 완성할 재료를 찾기 위해 새벽부터 숲과 이곳을 왔다 갔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중이고.”

단유가 시선을 내리니 머리에 두건을 두른 젊은 여자가 바구니를 품에 안은 채 단유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조만간 며칠 내로 어미 새가 저기에 자리 잡고 알을 낳겠죠. 가을엔 적적하진 않을 거 같아요.”

여인은 마당 앞 텃밭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두건을 벗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모은 뒤, 두건을 길게 늘려 머리를 묶는 끈처럼 활용했다.

“일찍 오셨네요.”

여인의 말에 대답한 건 테로스였다.

“그런가요?”

“좀 더 두고 보자 시더니?”

테로스가 단유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죠.”

그 대답에 여인이 싱긋 웃었다.

“이런. 이 세상에 저 분보다 위험한 사람은 없을 텐데.”

테로스가 얼굴을 굳히며 여인의 말이 사실인지, 농담인지 가늠하려 했지만 여인은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들어오세요. 차라도 대접해 드리죠. 마침 호숫가에 갔다가 좋은 허브를 구했거든요. 향이 좋을 거예요.”

여인은 다시 바구니를 집어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지.”

테로스의 권유에 단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역시 어둑한 편이었지만 습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고, 오래된 나무에서 나는 냄새도 덜한 편이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갔던 여인이 집에 난 나무 창을 모두 열어젖히며 환기를 시킨 탓일 수도 있겠다.

“문은 닫지 않아도 되요. 그리고 거기 앉아서 기다릴래요? 금방 차를 가지고 나올게요.”

거실 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을 가리키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단유는 테로스 옆자리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저 분은 누구예요?”

“누구겠나?”

“어제 말씀하실 때, 그 예언자란 분이 아주 오래 전부터 예언을 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 아주 오래 전부터. 들리는 이야기로는 저분이 말을 트는 순간부터 예언을 했다고 하더군. 그 첫 예언이 뭐였는지 아는가? 바로 자신의 부모님이 언제 돌아가실지에 대한 것이었다고 해. 무섭지 않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테로스의 이야기를 흘려들은 단유는 고개를 돌려 열려있는 문 너머 펼쳐진 마당을 바라보았다. 여관의 마당보단 좁지만 잘 정돈된 느낌의 마당이었다. 오가는 사람들에게 밟혀 좀먹은 것 마냥 맨바닥을 드러낸 곳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울타리 대신 색색의 꽃들이 경계선을 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세심하게 가꿔진 티가 나는 정원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정원 너머, 왔다 갔다 서성이던 일단의 무리들이 힐끔거리며 집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순히 호기심에 바라본다기보다는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금방이라도 짓쳐들어올 것처럼 경계하는 눈빛들이었다. 아마도 테로스가 말했던 예언자를 따르는 무리들이 아닐까 싶었다.

“여기요.”

테이블 위에 하얀 김이 모락 나는 차가 올라 왔는데, 놀란 것은 목재 컵이 아니라 흙으로 구운 도자기 컵이었다. 유약을 발라 색을 낸 그런 컵은 아니어서 투박하긴 했으나 확실히 이 세계에서 보기 힘들었던, 아니 본 적이 없던 유형의 것이었다. 항아리로 쓰는 정도의 큰 토기는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차’를 마시기 위한 용도의 작은 잔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조그만 찻잔을 바라보는 단유에게 여인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괜찮죠? 슈우가 특별히 만들어 준 거예요. 차를 마시기에 참 좋더라고요.”

단유는 싱그러운 향을 내는 잔을 들어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머금었다. 따뜻하고 상쾌한 느낌이 입안을 가득 채워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날이 선선해질 때 마시면 더 좋겠지만, 지금도 나쁘진 않을 거예요. 혹시 뜨거운 걸 싫어하나요?”

“아니요, 오랜만에 마시니 좋은 걸요.”

“자네, 이걸 예전에 마셔본 적이 있어?”

테로스가 놀랍다는 듯 단유를 돌아보았다.

“네.”

“어디서? 난 이곳에 오기 전엔 이런 걸 마셔본 적이 없는데. 설마 호라엘 말고도 이런 차를 만들어 먹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단유가 여인을 바라보자, 여인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이런 소개가 늦었네요. 전 호라엘이라고 해요.”

“전 루치드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소개가 끝난 뒤, 테로스가 다시 끼어들었다.

“정말 수상한 사내로군.”

“그만해요, 테로스. 실례에요.”

“호라엘, 당신이 말하지 않았다면 난 절대 이자를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을 거요.”

“테로스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는데, 그중에 이렇게 허브로 차를 마시는 사람이 없으려고요.”

“난 한 번도 보지 못했어.”

“테로스, 테로스가 보고 경험하는 것은 이 세상의 조그만 일부분이라니까요. 그러니 이제 그만 이 성을 나가서 돌아다녀 보는 건 어때요?”

“아직 떠날 수 없다는 걸 호라엘이 더 잘 알잖아? 아직 이곳에서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어.”

“못 말리겠어요.”

고개를 저으며 웃음 짓던 호라엘이 다시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입에는 잘 맞나요?”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단유는 잔을 내려놓고 호라엘을 바라보았다.

“왜 당신을 불렀는지 궁금한 건가요?”

“네.”

호라엘이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하지 않으니, 테로스가 슬쩍 물었다.

“자리 비켜줄까?”

“고마워요.”

“나 참.”

그냥 한 번 물어본 것 뿐인데, 이렇게 단칼에 잘라낼 줄은 몰랐다는 듯 테로스가 투덜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단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심하라고. 수상한 점이 많은 녀석이니.”

“괜찮아요.”

“자네, 자네도 허튼 짓은 말라고. 자넬 지켜보는 눈들이 많다는 거, 알지?”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켜 보이는 테로스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딱히 겁먹은 듯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그저 덤덤할 뿐인 단유의 표정이 의뭉스럽다는 듯 테로스는 턱을 벅벅 긁으며 불편함을 표시한 뒤 돌아섰다.

밖으로 나온 테로스에게 사람들이 다가갔다.

“왜 그냥 나와?”

“나가 있으라니 나왔지.”

“호라엘과 저 녀석만 두고? 위험하지 않을까?”

“호라엘이 괜찮다는걸.”

“전에 호라엘이 타국에서 온 웬 시종 놈들에게 납치당할 뻔한 적 있던 거 잊었나?”

“됐어. 그런 놈처럼 보이진 않아.”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아?”

“수상한 점이 많긴 해도, 위험한 놈처럼 보이진 않네.”

테로스는 입구 너머로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있는 단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때 단유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호라엘이 이쪽을 바라보며 손을 가볍게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자긴 괜찮다는 뜻이리라.

“일단 여기서 자리를 지키자고.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당장 뛰어들어갈 수 있게.”

바깥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 호라엘이 단유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이렇게 해야 저분들이 안심하거든요.”

“상관없어요.”

지구 식으로 말하면, 상당한 골수팬을 거느린 연예인 같은 모습이다. 그럼 테로스는 매니저쯤 되려나?

“음,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작은 잔을 매만지는 호라엘은 노란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지구에 있을 때 대중매체에서 흔히 보았던 전형적인 외국인의 모습과 유사했다. 얼굴 앞으로 흘러내린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수줍은 미소를 짓는 표정만 보면 ‘예언자’라기 보다는 그냥 흔한 시골 동네 처녀 같은 인상이기도 했다. 혹은 처음 소개팅에 나와 낯을 가리는 순수한 여자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고. 물론 겉으로 보이는 면이 그렇다는 말이고, 단유의 눈에는 그녀가 보이는 것 이상의 세월을 보냈음을 알 수 있었다.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뭔가요?”

단유는 마시던 잔 위를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며 물었다. 호라엘의 푸른 눈동자가 단유를 바라보니 눈에서 폭사된 빛이 단유를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당신이 이곳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어요.”

“보다니, 어디서요?”

“여기서요.”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며 대답한 호라엘이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전 미래를 볼 수 있어요. 처음엔 그게 미래인 줄 몰라서 많이 혼란스러워하기도 했었죠. 이를테면, 살아있는 누군가와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사람의 죽은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거죠. 그가 죽은 배경과 죽은 모습을 마치 곁에서 지켜보는 것마냥 바라보게 되면 순간 제가 어디에 있었던 건지 잊을 정도죠.”

단유는 스치듯 들었던 그녀의 첫 예언에 대한 테로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제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을 보기도 해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상한 적도 없는 곳을 보게 될 때의 그 기이함은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한 번은 거대한 전장을 본 적이 있어요. 자욱한 안개가 가득한 전장. 그곳을 메운 안개는 단순히 새벽녘에 끼는 안개가 아니었어요. 죽은 이들이 뿌린 피가 흩뿌려지며 대기를 채운 붉은 안개였죠. 그리고 그곳에서 악을 지르며 잘린 팔 다리를 부여잡고 우는 사람들, 흉기에 찍혀 얼굴이 갈라진 시체들, 내장을 모두 꺼낸 채로 바닥에서 버둥대는 말들과 피에 젖은 진흙을 손톱으로 긁으며 아픔을 참아내려는 병사들이 보이죠. 전 숨이 멎는 느낌이었어요.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자칫 마음대로 숨을 뱉었다간 저를 본 누군가가 칼을 들어 벨 거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그곳에 가득한 안개는 단순히 안개가 아니라 적의와 악의가 가득한 곳이죠.”

그때의 생생한 느낌을 잊지 못했던지 그녀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전 다시 이곳으로 오게 돼요. 그렇게 되면 한동안 혼란스러움에 몸을 떨어야 했죠. 제가 과연 이곳에 계속 머물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잠시 제가 봤던 그 현장으로 옮겨 갔었던 것인지. 어린 시절의 전 그런 혼돈을 극복할 방법을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줄곧 여기 이 성에서 살았고, 멀리 나갈 생각은 엄두조차 못 냈죠. 자칫 잘못하면 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거든요.”

그녀가 천천히 집을 돌아보는 시선을 따라 단유도 집 안을 살폈다. 확실히 오래된 집이긴 했으나 군데군데 수리가 되어 무너질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다행히 운이 좋아서인지 절 도와주는 사람이 많이 생겼어요. 그분들이 이렇게 보살펴 준 덕택에 무사히 살아가는 것이죠.”

그리고 ‘그분’들은 지금도 노심초사하며 밖에서,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중이시다.

“가끔은 전혀 모르던 사람, 저와 전혀 상관없는 일들을 보기도 해요. 아침에 호숫가에 나가 허브를 찾다가 보기도 하고, 꽃을 가꾸기 위해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보기도 하죠. 그리고 그렇게 본 것들은 대부분 아주 먼 미래의 일이거나 혹은 제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일들이죠. 문제는 저의 의지로 볼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죠. 제가 보려고 노력해서 볼 수 있는 것들은 사실 제한이 많은 편인데, 의도하지 않고 보는 것들은 제가 원하지 않는 것들까지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녀의 예언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그리 궁금한 내용이 아니었다. 당장 단유가 사용할 수 있는, 혹은 앞으로 활용할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었고, 그건 그저 그녀만의 문제였다.

“그 날, 전 아침에 딴 허브를 마시며 안정을 취하던 중이었어요. 허브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좋다는 것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이기도 해요. 거대한 폭음을 들었어요. 고개를 돌려보니 거대한 성문이 손짓 한 번에 폭발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것이 보였죠. 그건 꽤 놀라운 장면이었어요. 그리고 주검들이 즐비했던 그곳을 차분히 걸어가는 당신의 모습 역시 인상적이었고.”

별로 놀랍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꼭 그 상황을 봤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나 자신이 했던 어떤 일을 보았겠거니 했으니까. 다만 그럼에도 단유가 쉽게 입을 열지 않는 것은 역시 그녀가 과연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는, 그래요. 그냥 어딘가의 마법사겠거니 했어요.”

그 말에는 단유도 조금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저 말고도, 다른 마법사도 본 적이 있다는 건가요?”

“그럼요. 설마 이 세상에 마법사가 당신뿐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만, 그래도 어디에 있는지 모를 마법사를 그녀가 보았다고 하니 진심으로 묻고 싶어졌다. 자신을 왜 불렀는지는 차치하고 당장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런데 루치드, 당신은 다른 마법사들, 아니 존재하는 모든 이들과 달랐어요.”

단유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당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궁금했어요. 도대체, 당신은···.”

단유는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말 사람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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