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66화 (766/956)

플레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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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차를 끌고 인평시 외곽, 보육원이 있던 장소로 향했다. 사실 갈까말까 가장 고민하던 장소였지만, 순수하게 어떻게 변했을지 호기심이 들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외곽도로에서 보육원으로 접어드는 길에 오른 뒤 차를 세우고 내렸다.

“와아.”

가만히 지켜보던 명수가 잠시 후 힘빠진 목소리로 탄성을 뱉었다. 두 사람이 바라보는 곳에 기억 속 보육원은 없었다. 자물쇠가 걸린 철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모두 철거되고 터만 남은 광경이었다. 그 뒤로 보이는 산은 어릴 때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자주 올랐던 산이 분명했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건물이 없으니 생소하게 느껴졌다.

철문 옆에 늘 걸려있던 보육원 팻말도 사라지고 없어, 모르는 이들이 보면 철거된 폐공장지역으로 착각할 법도 한 모습이었다.

“단유야.”

“응.”

“뭐라 설명은 못하겠는데 괜히 눈물 나려 하네.”

“섭섭해?”

“섭섭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모르겠다. 나도 내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설명을 못 하겠어.”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돌아섰다.

두 사람이 나왔던 학교도 가 보고, 단체 관람했었던 극장가도 가봤다. 그곳은 옛 기억과 크게 변화가 없었다. 단지 외벽 도장을 새로 해서 깔끔해 보인다는 점이 다를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느낌은 사뭇 달랐다.

윤정이 일했던 레스토랑도 가봤지만, 그곳은 이미 다른 가게로 업종이 바뀌어 있었기에 윤정에 대한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익숙하거나 혹은 생소한 거리 풍경을 눈에 담으며 돌아다니다 곧 서울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가는 길에 명수가 중얼거리듯 소회를 밝혔다.

“뭔가 극적인 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허탈하네. 추억이란 거 정말 별거 없다.”

“아마 우리가 그런 추억을 되새길 정도로 나이를 먹지 않아서가 아닐까? 고작 10년인데.”

“그런가. 10년도 긴 세월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10년 별로 안 길다.”

그러나 단유는 명수가 느끼는 허전함의 원인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빈촌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느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추억이 담긴 골목과 추억이 담긴 집. 그러나 그곳에 사람이 없으니 결국 반쪽짜리 추억에 불과했다. 추억을 회상하며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추억은 좀 더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그마저도 이제 단유에겐 의미가 없어졌지만 말이다.

****

서울의 하늘에 눈이 내렸다가 그치고, 비가 내렸다가 그쳤다.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이 황사로 인해 흐리게만 보이다가, 비 온 다음 날에 잠시 청명한 자태를 드러냈다. 서울을 둘러싼 높고 푸른 산에 녹음이 짙게 드리웠다가 붉고 노란 색으로 잠시 가려지고 이내 하얀 눈으로 속을 감추길 반복했다.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매캐한 공기는 여전했고, 높게 솟은 빌딩들은 번쩍거렸으며, 버스와 자동차들을 쉴 틈 없이 24시간 도로를 가득 채우고 달렸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아침에 집을 나섰다가 고주망태가 되어 늦은 어둠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무표정한 얼굴과 삶에 찌든 얼굴들이 지하철 안에서 마주하고, 노을이 빛나는 한강 철교 위를 달린다.

명수는 재계약을 했다. 다른 구단으로 가지 않을까 했는데, 유나이티드에서 높은 금액으로 명수와의 재계약을 체결해냈다. 해외에서 명수에게 관심을 보이는 구단이 없진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명수의 경력이 짧고 국내 리그에 대한 의심 때문에 명수가 가진 본연의 경기력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반면에 국내 리그 구단 중에는 명수를 탐내는 곳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는 유나이티드가 비교적 높은 몸값을 제시했다. ‘비교적’이라 함은 유나이티드보다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한 구단도 있다는 말인데, 바로 FC 서울이었다. 여기서 명수의 선택이 팬들의 환호성을 받았다.

“라이벌 팀으로 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팬들은 명수를 차세대 프랜차이즈 스타로 손색이 없다며 환호했다.

동시에 명수는 계획한 대로 인평시에 유소년 클럽을 만들었다. 인평시장과 함께 협약서를 들고 찍은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특히 명수의 클럽이 인평시 내의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위한 복지 혜택까지 내걸어 많은 이목을 끌었다. 축구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육성하는 것과 동시에 인평시 내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돕는 복지 활동까지 겸한다는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 정도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자금 조달이 필요할 텐데 가능하겠냐는 물음에 명수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친구가 돈이 많아요.”

이후 명수는 집에 돌아와 단유에게 헤드락을 당해야 했다.

하은은 몇 년이 지나도록 바쁘게 하루를 보냈다. 학원 운영 초기에는 경험 부족과 시행 착오 등으로 바빴다면, 지금은 학원 원장이며 동시에 선생님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사업 확장을 위한 탐색 등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위로 오를수록 더 자유가 없어지는 것 같아.”

한 손으로 종아리를 주무르며 한 손으로는 맥주캔을 홀짝이는 하은을 보며 단유가 말했다.

“선생님이 너무 욕심을 내서 그래요.”

“하다보면 욕심을 안 낼 수가 없더라.”

현상 유지라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원업이라는 게 일종의 레드오션이라 수많은 경쟁자들이 존재하는 영역이었다. 조금이라도 부진하다면 곧 다른 경쟁 학원에 밀려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더 좋은 선생님을 초빙하고 더 많은 학생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수업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거기다 하은이 운영하는 학원의 특징은 타 학원에 비해 저렴한 수강료였다. 목적은 분명했다. 어려운 환경의 학생들도 수강할 수 있도록 혜택을 주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학원의 이익은 적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 초빙한 선생님들의 연봉은 높으니 더더욱 수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부분은 만능 해결사인 단유가 있으니 ‘당분간’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단유에게 의지할 수 없으니, 하은 나름대로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노력중이었다.

게다가 또 하나의 문제는 학원료가 싸다 보니 선입견이 생기는 문제가 있었다. 학부모나 학생들 중에는 학원비가 싸니까 질적으로도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시간이 좀 흐르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이기도 했지만, 하은은 나름대로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바로 학원의 확장. 이른바 박리다매 식으로 학생 한 명당 수강료는 낮추되 더 많은 학생들을 모집함으로서 이익을 올리고 동시에 학원의 명성을 높이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었다.

아직 그 효과는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몇 년간 더 고생을 하면 하은이 계획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희망하는 중이었다.

“이걸 희망고문이라고 하지 않나요?”

“두고 봐라. 너한테 빌린 돈 모조리 갚아 줄 테니.”

“빌려준 거 아닌데요?”

“난 빌린 거야.”

주위 사람들 중에 가장 일상의 변화가 적은 이라면 단연코 단유였지만, 상미 역시도 크게 변화가 없는 삶을 사는 중이었다. 여전히 인터넷 방송을 하면서 조금씩 팬들을 늘려가고 있는 상미는 성실함과 나름의 유머코드로 충실한 매니아층을 확보하고 있었다. 여전히 단유네 집에 같이 살고 있지만, 단유나 하은이나 다들 집에 붙어 있는 시간보다 나가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마치 하우스 매니저라도 된 것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 봐야 호빵과 패티를 돌보거나 로봇 청소기로 거실을 돌리는 수준이었지만, 빈집으로 두는 것보단 나았다.

오래 방송일을 하다 보니 광고가 들어오기도 했는데, 그런 것들이 상미의 통장을 불룩하게 채워주었다. 따로 단유에게 집값을 내주진 않았지만, 빈 냉장고를 채우거나 개 사료 등을 사는 일에 적극적인 상미였다.

“근데 니들 결혼 안 하냐?”

“결혼해서 빨리 나가라고요?”

“그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니들 너무 연애 기간이 긴 거 아냐?”

“길면 뭐해요? 서로 만날 시간이 부족한데.”

“연애만 길게 하다 헤어지는 커플 많이 봤다.”

“제 결혼보다 선생님 결혼이 먼저 아닌가요? 선생님은 연애 안 해요?”

“어째, 우리 둘이 이야기하면 항상 이런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거지?”

“별수 있나요?”

굳이 언급하지 않지만 두 사람 모두 ‘노처녀’란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야, 이런 칙칙한 이야기하지 말고, 모처럼 휴일인데 우리 다 같이 나가서 영화나 볼까? 너 바쁘니?”

“아뇨. 저도 오늘은 휴방일이라서 괜찮네요.”

“그럼 단유랑 같이 영화나 보러 갈까?”

“단유도요?”

“쟤, 우리가 안 데려가면 절대 문화생활 같은 건 못할 성격이잖니?”

“하긴. 쟤도 겉만 멀쩡하지 문제가 많은 녀석이에요.”

“저기요. 저 바로 옆에 있거든요? 다 들리거든요?”

“어? 너 옆에 있었니? 왜 이렇게 존재감이 없대? 너 있는 줄도 몰랐다야.”

“하아.”

단유는 한숨을 토해내며 머리를 저었다. 두 사람 다 워낙 기가 센 여자들이라 같이 있다 보면 항상 밀릴 수밖에 없었다.

“요새 볼만한 영화 있나?”

“아, 며칠 전에 유진이가 자기 영화 보러 오라고 했었는데.”

“걔 영화 나왔어?”

하은이 묻고 이어 상미가 의심스럽다는 듯 단유를 바라보았다.

“걔도 이제 잘 나가는 배운데 계속 너한테 연락하나 보다?”

처음의 영화가 히트를 친 후, 그 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탓에 주연까지는 어렵지만 괜찮은 조연 역으로 자주 모습을 보이는 유진을 떠올리며 단유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학 동기니까.”

“같은 과도 아니면서 동기는. 아무튼 잘 됐네. 선생님, 나가죠.”

“그러자.”

2시간 후,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소파와 한 몸이 된 듯 늘어진 단유의 멱살을 끌고 집을 나섰다.

****

오랜만에 찾은 극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무래도 휴일이라 사람들이 많은 찾은 영향도 있고, 이번에 개봉한 영화가 입소문을 많이 타서 직접 보러 온 관객도 많았다.

여름방학을 맞아 가족오락용 영화가 봇물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모처럼 평단의 호평을 받은 스릴러물이 나왔다. 그리고 이 스릴러물은 청소년 관람불가였음에도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며 여름 극장가를 이끌고 있었다.

“우와, 이렇게 보니까 유진이 또 다르게 보이네.”

극장에 비치된 팜플렛을 보며 상미가 감탄했다. 이제 갓 20대 중반을 넘긴 유진의 이번 영화에서의 역할은 20대 후반의 미혼모 역할. 그녀가 과연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 사람들은 그녀가 보인 절절한 연기에 손뼉을 쳤다. 물론 그녀가 얽힌 에피소드는 영화 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여자 주인공과 얽히면서 톡톡히 감초 역할을 해냈다.

표를 끊고 기다리는 동안 세 사람은 극장 건물의 아래층에 위치한 커피숍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한쪽 벽에 설치된 TV에서 뉴스 속보를 전하고 있었다.

“어, 또 어디 불났나 보네.”

“요즘 왜 이렇게 화재 사고가 많이 나지?”

“몇 년 전에는 더 심했어. 한 달에 화재 사고만 세 번이 났던 적도 있었잖아.”

“그때 한 번은 소방관이 죽었었지, 아마?”

“예전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나면 하늘을 탓하기 보다 나랏님을 탓했대잖아? 그래서 전에 화재 사고가 줄을 이으며 날 때는 대통령이 나라를 잘못 운영한 탓이라고 욕들 많이 했었는데.”

“무식해서 그래. 불 난 게 무슨 대통령 탓이야. 난 그런 무속 신앙에 기대서 이말 저말 하는 사람들 보면 이해가 안 가더라.”

뉴스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커플의 이야기는 어느새 정치권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전환되었다. 사내는 자신의 확고한 정치적 소견을 밝히며 자신의 유식함을 뽐내려 했고, 여자는 사내의 이야기에 적당히 맞춰주면서 화제를 바꾸고 싶어하는 모습이었다.

하은과 상미도 뉴스를 보고는 걱정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도 재래 시장 있는 쪽 아닌가?”

“상인들 피해가 많겠어요.”

“항상 없는 사람들만 손해 보지. 이번에는 좀 제대로 된 보상책을 내주면 좋겠는데.”

“화재 보험을 들어놓은 사람이 아니면 아마 힘들지 않을까요.”

“보험을 들었다고 해도 어디 그게 쉽게 회복되겠니? 평생을 일군 가게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는 건데.”

“피해자 지원 모금 캠페인이 있으면 얼마라도 보태야죠.”

“그래야지.”

“어, 시간 됐네요. 이제 올라가죠? 단유야.”

“응.”

세 사람은 검은 연기와 붉은 속보 자막으로 가득 찬 모니터를 뒤로 하고 커피숍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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