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op off(8)
-------------- 804/952 --------------
“거, 내가 실수를 했군.”
별로 미안해하지 않는, 떨떠름한 어투로 변명을 한 사내는 반대쪽 품을 더듬어 명함 지갑을 꺼내고는 거기서 고급스러워 보이는 명함 한 장을 집어 단유에게 내밀었다. 받아서 보니 ‘정광식’이라는 이름이 크게 찍혀 있고 그 옆에는 ‘대표’라는 직함이 새겨져 있었다.
‘음?’
명함에는 회사의 이름도 적혀 있었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엔터테인먼트사 사명이었다. 어디였지, 호기심을 가질 찰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제 감이 조금 오는가?”
무슨 감을 말하는 거지, 라는 생각에 시선을 들어 올리니 우습지도 않게 입꼬리를 올린 채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데, 마치 성공한 사업가란 이런 모습이다, 라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모습이었다. 정말 우습지도 않게 말이다.
“뭐 이제 나에 대해서도 알 만큼 알게 되었으니, 다시 계산기를 두드려 볼 참인가? 만약 원한다면 내 기꺼이 지갑을 더 열 수도 있네. ‘그’ 증언을 ‘그대로’ 해주기만 한다면 말이야.”
특정 단어에 강세를 주며 단유를 압박하려나 본데, 그게 먹힐 리가 없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이런 돈 원하지 않습니다.”
“이봐, 현실적으로 생각해. 고작 말 한 마디하고 이런 돈 벌기가 어디 쉬운 줄 아는가? 대학은 나왔는가? 대학까지 나온 이가 이렇게 경제 관념이 없다면 문젠데. 아니면 설마 어줍잖게 이상(理想) 타령을 하려는 건 아니지? 만약 그렇다면 좀 더 고민하길 바라. 현실은 영화가 아니니까.”
“돈을 받는 게 현실적이라는 것인가요?”
“아니지. 어떤 선택이 현실적으로 자네에게 유리한 일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란 소리지. 이 돈을 받지 않는다? 글쎄. 만약 자네가 돈 대신 다른 이득을 원한다면 말해 보게. 혹시 이쪽 업계로 나갈 생각이라도 있는가? 그러고 보니 자네 얼굴 정도면···나쁘지 않아. 그래, 자네 정도면 회사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줄 용의도 있네. 혹시 그걸 원하나?”
점점 더 상대의 눈빛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단유였다.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하고 여기까지 왔던 자신의 행동이 어리석게 여겨질 정도였다.
“아니요.”
“그럼 뭔가?”
“돈도 필요 없고, 제가 어떻게 증언할 지에 대한 조언도 필요 없습니다. 이미 전 증언을 마쳤고, 그 증언에 대해 가감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답답하군, 정말.”
단유는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앉게.”
그의 얼굴에도 불쾌하다는 심정이 끈적한 기름막처럼 떠올라 붙었다.
“더 대화를 이어나갈 이유가 없네요. 서로의 입장을 확인했고, 협상의 여지는 없어 보이잖아요? 억지로 계속해 봐야 대표님도 답답하실 테고, 저도 그리 편한 자리가 아니니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앉으라니까.”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뒤에 앉아 귀만 쫑긋대던 여자들이 돌아볼 정도였다.
“목소리 높이지 마세요. 전 그쪽 직원도 아닙니다.”
“어른이 이야기하는데···.”
단유는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며 예의를 지켜줄 성의도
“저 역시 성인입니다. 저보다 어른이시니 지금껏 불쾌해도 참았습니다만, 더는 제가 견디기 힘들군요. 한 마디만 드리죠. 그 사건, 분명 대표님의 아내분께 위험했을 수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리 급히 ‘도망’을 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설령 도망을 친다 하셔도 음주를 하신 상태에서 차를 몰고 달아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허, 이 사람이!”
“아주머니는 음주운전을 하셨고, 그에 합당한 처벌이 받으셔야 할 겁니다.”
단유가 등을 돌리자 광식은 그를 세우기 위해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언성이 높아졌던 시점에서 카페 내 몇 안 되는 손님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던 상황이라, 소리는 지르지 못하고 꽉 쥔 주먹만 부들거렸다. 그리고 그가 카페 문을 나선 후에야 광식은 분노를 잠시 가라앉힐 수 있었고, 이대로 그를 보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벌떡 일어나 단유의 뒤를 쫓으려 하는데, 출입문을 나서기 전에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멈칫한 광식이 고개를 돌리니 나른한 인상의 앞치마를 두른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요?”
“계산이요.”
광식의 얼굴이 붉어졌다.
계산을 서둘러 마치고 나왔지만 단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자식이 어디로 간 거야?’
그 시간, 그가 찾고 있던 단유는 거리로 나서는 대신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참에서 마법을 사용하여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괜찮겠지?’
단유는 손에 들린 명함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이미 그와 대화를 나누던 시점에서 명함에 적힌 엔터테인먼트사가 유진이 소속된 회사라는 사실을 기억해낸 단유였다. 그가 일산에서 보자고 했던 이유가 유진의 스케줄과 연관 있을 거란 것도 유추할 수 있었고, 때문에 어쩌면 유진이 정광식 대표의 신경질 또는 갑질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대표씩이나 되는 이가 소속 연예인에게 함부로 할까 싶었다. 이왕이면 아무 일 없길 바라지만.
하지만 지난밤 그녀가 단유에게 털어놓았던 고민들을 되짚어보면 마냥 아무 일 없겠거니 낙관만 할 수도 없었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지만, 혹시, 어쩌면 드러나지 않은 관계로 인해 묘하게 얽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0%는 아니다.
보이는 것은 남들보다 잘 보지만,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는 없는 법이다.
****
한참 촬영이 진행 중인 스튜디오. 보랏빛의 단색 배경을 뒤로 하고 유진은 각가지 소품들과 함께 촬영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니저는 촬영 전반을 통제하고 있는 PD의 뒤에서 그가 바라보는 모니터를 어깨 너머로 훔쳐보며 유진이 잘 하고 있는지 계속 체크하는 중이었다.
“오빠.”
매니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스타일리스트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불안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기, 대표님이···.”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의 정광식 대표가 매니저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젓는 대표를 보고 매니저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야, 이 새끼야.”
정강이 부분을 구두코로 맞은 매니저가 신음이 터져 나오지 않게 아랫입술을 잔뜩 깨물며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뭘 죄송했는지 알고 이야기하는 거야?”
다시 한번 정강이에 작렬하는 둔탁하고 묵직한 구두코의 습격에 결국 얇은 신음을 뱉으며 쓰러졌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라고, 새꺄.”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이렇게 뿔이 난 걸까 싶지만,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대표였다.
“이 새끼야, 꼭 대표인 내가 현장까지 와서 확인을 해야 돼? 어떻게 진행되는지 네가 알아서 꼬박꼬박 중간보고를 해야 할 거 아냐? 응?”
“···죄송합니다.”
실은 전혀 죄송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언제부터 중간보고라는 걸 했다고 이럴까? 그저 트집 잡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몽니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패악질이나 다름없었다.
‘바보 새끼.’
대표를 향한 욕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잘릴까 두려워 아무 말 못 하고 신음을 삼키는 자신에게 하는 욕이었다.
“너 언제 정신 차릴래? 응? 그러니까 내가 널 팀장으로 못 올리는 거야. 알아, 새꺄?”
막말과 폭력.
“도대체 지금까지 뭘 배운 거야? 응? 돼지 새끼도 너보다 낫겠다. 맨날 회삿돈으로 배 채울 생각만 하지? 그치? 씨발, 내가 언제까지 널 봐줘야 하는 거야? 일 제대로 못 하겠으면 그냥 집에 가, 이 새꺄.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폐 끼치지 말고!”
이가 갈리는 심정인데, 정말로 이를 갈지 못하겠다. 혹시라도 이를 가는 모습이 보였다간 또 어떤 트집을 잡힐지 모르니까. 문득 집에 있는 아내 생각이 났다. 작년 가을 식을 올린 아내는 현재 출산 휴직을 내고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정말 보잘 것 없는 직업을 가진 자신을 믿고 사랑해서 프로포즈까지 받아준 사랑스러운 아내와,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면 이 정도 수모는 견뎌야 했다. 아니 더 심한 수모도 견뎌야 했다. 가장이니까.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그런데 대표의 말을 듣고 있자니, 차라리 여기 일은 때려 치우는 게 낫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처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아내에게. 아내와 아이를 위해서라면 막연히 실장이 되길 기다리기보다 다른 직장을 구하는 게 폐를 덜 끼치는 결정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
광식의 행동이 전혀 이해 못 할 부분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 회사의 대표이며, 특히 엔터테인먼트라는 대중의 이목을 끄는 직종의 관계자로서 처신에 주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내의 일이기에,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움직인 것이라 추측하면 그의 행동을 마냥 불쾌하게만 여길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사람의 행동이든,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전혀 이해 못 할 일은 없다. 그리고 그런 사고과정을 통해 상대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좀 더 원만한, 서로 존중할 수 있는 정도의 결론을 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록 돈으로 포섭하려 하고, 증언을 조작하려 한 것은 법에도 어긋나고 도의적으로도 문제시 될 수 있는 문제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아니니.
‘아직 서투르구나.’
단유는 감정적으로 판단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한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할 시간을 가졌다.
****
“그만하세요!”
찰지게 매니저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던 광식의 손이 허공 중에 멈췄다. 돌아보니 촬영 중 세팅했던 머리를 그대로 하고 나타난 유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네가 신경 쓸 일 아냐.”
“제 매니저예요.”
“내 직원이다.”
“대표님 직원이라고 함부로 하실 수 없으신 거 아니에요?”
“정신 차려. 이 새끼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누가 가장 손해일 거 같아. 나? 아냐. 너야, 너. 연기자인 네가 이놈이 저지른 실수를 뒤집어써야 한다고. 알아?”
“오빠는 오늘 실수 한 거 단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어느 때보다 더 잘 챙겨줬고, 현장 스태프들한테도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니 실수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모르면 그냥 가만히 있어. 네가 모르는 게 있으니까. 넌 빨리 들어가서 촬영이나 해.”
“제 매니저를 무슨 노예 취급하듯 하시는데, 어떻게 제가 마음 편히 일을 해요? 대표면, 대표답게 연기자를 서포팅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사람 마음을 어지럽히는 게 대표로서 할 행동인가요?”
“이놈이나, 저놈이나······ 아주 입만 살았어, 입만.”
“이만 가주세요.”
“뭐?”
“대표님 때문에 불안해서 일 못 하겠으니까, 이만 가달라고요. 걱정 마세요. 일은 제대로 할 테니까.”
“어디서 함부로 가라마라야? 네가 대표야? 대표냐고? 만만해? 만만해보여?”
“때리시게요?”
“아우, 정말.”
“깡패같이 굴지 마요.”
“뭐? 깡패?”
“네. 깡패요. 사람을 저렇게 때려놓고선 아닌 척이라도 하시게요?”
“이게 정말······.”
정말 욱 했는지, 광식의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끝내 내려오지 못한 까닭은, 아무리 화가 났기로서니 현장에서, 많은 스태프들이 있는 자리에서, 소속 연예인을 혼낼 순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짧은’ 유진은 그저 자신을 향해 앙칼진 목소리로 따지기만 할 뿐이었고, 지금 세 사람, 아니 뒤에서 훔쳐보는 스타일리스트까지 포함하면 네 사람만 스튜디오 바깥, 건물 뒤쪽의 주차장에 몰려 있었으니 다른 이들의 시선은 크게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대표, 광식은 유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멍청하게 행동하지 마라. 오래 이 바닥에 있고 싶으면.”
“협박죄로 고소할 거예요.”
“고소는 무슨. 하고 싶어? 하고 싶으면 해. 안 막을 테니까. 대신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각오를 단단히 하던지, 아니면 곧장 안으로 들어가서 돌아보지 마. 알겠어?”
“······.”
“어디 한 번 해보라고?”
“······.”
유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쓰러져 있는 매니저, 자신을 향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흔들던 매니저 때문에 가만히 참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