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82화 (882/956)

어느 별에서 왔니(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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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화 재밌는 거 뭐 있냐?”

“갑자기 왠 영화?”

“근래 극장에 가본 적이 없어서. 내가 영화를 엄청 좋아하거든? 혼자서도 팝콘 하나 들고 가서 영화 볼 정도로 좋아했단 말이야. 근데 입사 후로 통 시간이 안 나네.”

“지금 회사 디스한 거?”

“몰라. 아무튼 다음 주말에는 반드시 영화 보러 가야겠다는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혹시 요즘 볼 만한 영화 있어?”

“나도 너랑 같은 처진데 뭘 물어? 그리고 정 보고 싶으면 오늘 행사 끝나고 보러 가면 되지.”

“끝나고 피곤하지 않을까?”

“피곤하긴 뭐가 피곤해? 그냥 걷기만 하면 되는데. 여기 둘레길 경치도 좋겠다, 설렁설렁 산책하듯 걷는 것도 휴식인데.”

“넌 이런 데 좋아하는구나?”

“응. 걷는 걸 좋아해서. 특히 이런 경치 구경하며 걷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오늘은 나오길 잘했다 싶은데?”

“이야, 긍정적인 마인드. 최고네, 최고야.”

“당연하지. 게다가 오늘 이것도 특별 수당 지급한대잖아? 돈도 받고 휴식도 취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거기다 봉사활동까지 겸하니까 일석삼조네.”

“부럽네, 부러워.”

“너도 불평만 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이런 좋은 날씨에, 이런 좋은 경치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

“좋은 날씨? 추워서 코끝이 떨어질 거 같다.”

“겨울이니까 당연히 춥지. 그래도 저기 봐.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강이 너무 멋지지 않아?”

“몰라. 그 정도까지 감성적인 사람은 아니어서.”

“그런 감성도 없이 영화는 어떻게 보니?”

“나 그래서 멜로는 안 보잖아. 영화는 역시 블록버스터 아니겠어?”

“블록버스터 보려면 여름까지 기다려야겠는데?”

“굳이 블록버스터가 아니더라도, 액션이나, 스릴러 이런 거 있잖아? 그런 거 보면 되지.”

“참 가늠이 안 되는 감성이네.”

“넌 어떤 영화 좋아하는데?”

“나? 나는 뭐 특별히 가리는 건 없는데.”

“너도 영화 좋아해?”

“웬만해서 영화 싫어하는 사람이 있나?”

“그래? 그럼 나랑 같이 영화보러 갈래?”

“뭐야? 갑자기 예고도 없이 훅 들어와? 혹시 데이트 신청?”

“데이트는 무슨. 그냥 같은 직장 동료로서 영화 같이 보자는 건데.”

“너, 혼자 보러 가는 거 좋아한다며?”

“왜 사람 말을 곡해해? 혼자서도 보러 간다는 거지, 혼자 보는 걸 좋아한다는 말은 아냐. 그래서 같이 갈래?”

“아무래도 용건이 그거였던 모양인데? 그 때문에 사설이 그렇게 길었던 거야?”

“그런 건 그냥 모른 척 가슴에 담아두는 법이야. 굳이 찔러봐야 해?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오늘 너 하는 거 봐서.”

“참 까다롭네. 내가 무슨 연애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영화 같이 볼 거냐고 물은 건데.”

“그렇게 까칠하게 나오면 내 대답이 어떻게 나올까?”

“경치 좋다야. 우와, 저기 빛나는 강물 좀 봐! 사진 찍어야겠다.”

“으이구.”

“사진 찍어줄까?”

“됐어. 사람들 다 쳐다봐.”

“쳐다보긴. 다들 걷기 바빠 보이는구만.”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들을까, 자기들끼리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였지만, 누구보다 가까이 붙어서 걸음을 맞춰나가는 모습이 뒤따라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리 없다.

“둘이 사겨요?”

“썸만 타나 봐요.”

“그래요? 그런데 평소에도 저렇게 티를 내나요?”

“말도 마세요.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줄 아나 본데, 지금 소문이 쫙 나서요, 다른 부서 사람들도 다 알 걸요? 모른척 시치미떼는 표정이 하도 가관이라 사람들도 그냥 모른 척 해주고는 있어요. 실장님도 모른 척 해주세요.”

“부서가 다르니까 만날 일도 많지 않아서 아는 척 하려 해도 할 일이 없을 것 같긴 한데···.”

“어쩌면 제1호 사내 커플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에요.”

“1호?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그냥 그렇다는 거죠. 뭐, 모르죠. 혹시 사람들 눈에 안 띄게, 몰래 사귀고 있는 커플이 있을지도 모르고. 회사에서 딱히 사내 연애를 막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회사가 참 자유분방한 편이에요. 그쵸?”

“신생치고 일이 좀 많다는 게 문제지, 사내 분위기는 꽤 여유로운 편이니까. 아, 근데요. 혹시 연습생들 사이에는 그런 일 없겠죠?”

매니저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그러면 큰일 나죠.”

딱히 연습생들에게 연애 금지령을 내리진 않았지만, 암묵적으로는 데뷔할 때까지, 혹은 그 이후까지도 연애 혹은 그에 준하는 친밀한 관계를 만들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회사에서 10시간 이상을 레슨에 투자하고 있는 지금, 이성에게 눈 돌릴 여유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지만, 또 모른다. 매니저 본인도 그 나이를 거쳐 왔기에, 그리고 그 나이대 아이들을 숱하게 관리해 봤기에, 그들이 얼마나 이성을 갈망(?)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좀 독해야죠. 정말 자기 목표를 위해서 한길로만 매진하는 모습을 보면, 절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고요. 이 대리님도 가까이서 보시면 알 걸요? 정말 요즘 아이들은 저렇게 열심히 사는구나, 하고요. 도리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될 정도니까.”

매니저는 자신이 관리하는 연습생들이 그럴 리 없다는 취지로 답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없기를 속으로 바랐다.

뒤에서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연습생들은 부지런히 걷는 중이었다. 회사의 로고가 박힌 두툼한 패딩을 걸치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모자를 푹 눌러썼지만, 한껏 꾸며진 외모가 어디 갈까? 주변에서 흘깃거리는 시선이 줄곧 이어졌다. 그러나 그런 시선에 아직 익숙치 않은 아이들은 괜히 자기들끼리 하하호호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외출이 즐거운 영향도 없진 않았다.

언제나 마룻바닥 위에서 힘겨운 움직임을 반복하던 길쭉하고 늘씬한 다리들이 흙길 위에서 그렇게 경쾌할 수 없다.

“언니, 공기가 너무 좋은 거 같지 않아요?”

“나무가 이렇게 많은데 당연히 공기가 좋지.”

“자주 이런 데 오면 좋겠다. 스트레스가 저절로 풀리는 거 같애.”

“어디서 봤는데, 나무의 푸른색이 심신 안정에 그렇게 좋대더라.”

“그럼 우리 연습실도 푸른색으로 칠하면 좋지 않을까요?”

“그러면 푸른색이 싫어질지도 몰라.”

“아? 그런가?”

별말 아닌데도 까르르 웃음이 터지고 입이 벌어지고 광대가 올라간다.

“저기 쓰레기.”

“말만 하지 말고 가서 주워.”

“네!”

길옆으로 난 수북한 잡초 속에 나뒹구는 구겨진 음료수 팩을 주워 들고 있던 비닐 봉지에 넣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아이들. 환경 미화라지만 쓰레기가 그렇게 많이 보이지는 않고, 게다가 참석한 사람들이 워낙 많아 이미 앞서 걷던 선두권에서 한번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쓰레기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때문에 거의 대부분은 그냥 걷기만 하면 되니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아이고, 왜 벌써 힘들지?”

“언니, 너무 체력이 약한 거 아니에요?”

“야! 너도 내 나이 돼 봐라. 안 힘든가.”

“전매 특허야, 전매 특허. 툭하면 내 나이 돼 봐라, 야. 그거 말고 다른 레퍼토리는 없어요?”

“이제 내가 만만하다, 이거지? 너는 나이 안 먹을 거 같지?”

“언니, 솔직히 언니도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데 그런 말 하는 건 너무 이르지 않아요?”

“그러니까, 네가 내 나이 돼 봐라, 이거야. 나도 10대 때는 날아다녔어. 정말로. 20대가 되는 순간 갑자기 몸이 낡는 기분을, 네가 알아?”

“언니 말만 들으면 무서워서 어디 나이 먹겠어요?”

“먹기 싫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게 나이다, 이거야.”

“그렇게 힘들어서 연습은 어떻게 한 대?”

“그래서 내가 진도가 제일 느린 이유지.”

말도 안 되는 지윤의 핑계에 같이 걷던 연습생들이 또 한 번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저만치서 걷던 남자 연습생 몇몇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아보기도 했다.

“저기 쟤 있잖아? 키 큰 애. 쟤가 너랑 나이 같다며?”

“저랑요? 저보다 많은 줄 알았는데?”

“너랑 같다더라. 고3. 얼굴이랑 몸만 보면 거의 20대 중반인줄 알았는데, 며칠 전에 우연히 들었거든? 쟤도 급식이라고 하더라고.”

“가수반인가?”

“응. 가수 지망이라더라.”

아무리 두 집단을 분리한다 해도, 결국 한 회사 내에서 움직이다보니 어떻게든 서로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니 남자 연습생들은 모처럼 마주친 여자 연습생에 대한 이야기를, 여자 연습생은 남자 연습생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이어간다.

하지만 매니저의 작은 우려처럼 두 집단 사이에 뭔가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없었다. 호기심은 있지만 호감이 생기기엔 서로가 너무 멀었던 탓이다. 더구나 여자 연습생들의 호기심은 남자 연습생에게만 몰려 있지 않았다.

“우리 이사님 체육복 잘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까요? 제 말이.”

“난, 그래도 정장이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원래 남자는 슈트빨이라는 말이 있잖아? 근데 우리 이사님은 슈트빨이 아니라 그냥 멋있는 사람이었던 거야.”

“우리 이거 끝나고 이사님한테 저녁 사달라고 할까요?”

“에이, 오늘은 어렵지. 실장님도 계시고 다른 직원분들도 계신대.”

“그래도 말은 해 봐야죠. 전에 그랬잖아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너 그러다 내일 실장님이 체중계 들고 오면 어쩌려고?”

“그때는 그때고, 오늘은 오늘이죠. 게다가 모처럼 나왔는데, 그냥 들어가긴 아깝잖아요?”

“그럴까?”

서로의 얼굴에 비슷한 미소가 함께 그려진다.

한편, 무리 지어 걷는 아이들과 약간의 거릴 두고 걷는 두 소녀가 있었다. 길가를 살피며 혹시라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쓰레기는 없는지 살피는 아름과, 그녀의 옆에서 총총걸음을 옮기며 쉴 새 없이 떠드는 시화였다.

“벌써 겨울이라니 시간 되게 빠른 거 같지 않아요? 얼마 전에 여름이었던 거 같은데. 그쵸?”

“연습실에만 있다 보니 시간 가는 걸 잘 모르게 되는 거 같아.”

“그쵸? 그러니까 이렇게 자주 나올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아요.”

“아마 그래서 회사에서도 우리 이렇게 나오게 한 거겠지.”

“그런 건가? 역시 우리 회사가 짱이네. 근데 언니, 저기 시은 언니 팬클럽 있잖아요? 되게 멋있지 않아요? 자기들끼리 봉사활동도 다니고. 우리도 나중에 데뷔하면 우리 팬클럽 생길까요?”

“생기지 않을까?”

“만약에 우리 팬클럽 생기면 우리 팬클럽도 이런 거 많이 하겠죠? 그러면 우리도 같이 나와서 다 같이 함께 하면 좋겠어요. 팬들이랑 같이 봉사 활동하면 되게 기분 좋을 거 같아.”

“스케줄이 있으면 같이 나오기 힘들지 않을까? 시은 선배님처럼.”

“나라면 스케줄 취소하고 여기 올 거 같아요. 돈보다 팬이 더 중요하지 않아요?”

“스케줄을 다니는 이유가 그저 돈 때문이겠니? 이런 저런 활동을 해야 팬도 늘고 팬클럽의 이런 활동도 의미가 있는거지. 거꾸로 연예인이 아무런 활동도 안하고 있으면 팬클럽도 연예인을 지지할 이유가 없어지는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전 팬들이랑 함께 하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요.”

“그게 네 맘대로 되겠니? 스케줄은 회사에서 정하는 건데, 네 마음대로 취소시켰다간 큰일날 걸?”

“저도 알아요. 그냥 마음이 그렇다는거죠. 아, 부럽다. 빨리 데뷔하고 싶어.”

“훗, 결국은 데뷔하고 싶다는 거네.”

“언니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마찬가지지.”

“우리 B반 전부 데뷔해서 다 같이 한 무대 서는 날이 오겠죠? 그럼 되게 뿌듯할 텐데.”

아름은 발을 구르는 시화가 귀여워 모자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그때,

“시화야!”

부르는 소리에 시화가 고개를 돌렸다. 슬기가 시화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잠깐 와볼래?”

“네!”

시화는 해맑게 웃으며 총총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슬기에게로 뛰어가는 사이, 슬기와 아름의 시선이 잠깐 교차했다. 슬기는 아무 감정없이 눈동자를 돌려 시화에게로 향하고, 아름 역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길가의 수풀로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을 주의깊게 살피는 이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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