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_1
띠링.
종소리와 같은 짧은 효과음에 단정한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손끝이 간헐적으로 움찔거렸다. 미세한 움직임이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커졌을 때, 그의 입에서 으으, 하는 작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시야가 흐렸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허억.”
그는 살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폐를 가득 채우는 공기에 눈을 번쩍 떴다.
‘뭐지, 나… 왜 멀쩡해?’
분명 죽은 줄 알았는데. 아니, 자동차 파편이 배를 반쯤 갈라놓았으니 틀림없이 죽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건 말도 안 돼. 그는 병원치곤 두툼한 이불 속으로 배를 더듬어보았다. 상처 하나 없이 소름이 끼치도록 멀쩡했다. 뱃가죽을 봉합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 이건 꿈인가? 아니면, 드라마에서나 보던 10년 뒤에 깨어나는 전개라든가….
“…도련님?”
“응?”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들며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제리 도련님!”
“……?”
…누구세요? 나를 알아? 어떻게? 그는 멀뚱히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상에! 도, 도련님! 도련님이!”
낯선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렸다. 챙, 쨍그랑! 새하얀 찻잔과 그를 받치고 있던 금속으로 된 선반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시끄럽게 소리치는 낯선 남자보다도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방 안의 풍경이었다.
웬만한 1인실보다도 훨씬 큰 방 안은 온통 고풍스러운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금색과 차분한 우드톤의 가구들이 어우러져 적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매일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듯 모든 것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벽 한쪽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뭐야. 저런 게 왜 병원에 있어….’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는 입을 작게 벌린 채 굳었다. 왠지 등줄기를 스쳐가는 느낌이 쎄했다.
“주인님! 마님! 막내 도련님께서! 도련님께서 깨어나셨어요!”
남자는 헐레벌떡 뒤돌아 뛰쳐나갔다. 그 역시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가 병원일 리 없다는 것에, 그는 손목까지 걸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의사나 간호사가 저런 거추장스러운 복장을 입고 있겠으며, 큰 사고를 당하고 일어났는데 방 안 어디에도 의료기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팔뚝에도 링겔 선 하나 꽂혀 있지 않았다.
병실치고는 방이 너무나도 고급스러웠다. 왠지 무겁게 느껴지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좀 더 훑어보니, 이곳은 꼭 중세시대의 드라마 세트장과도 같았다.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창 너머로 푸르게 우거진 나뭇잎이 보였다. 그 사이를 뚫고 내리쬐는 햇빛이 화사했다.
‘여기가 어디야…?’
그는 이런 이국적인 공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속으로 얼떨떨하게 중얼거리며 무심코 내려다본 손은 제 것 같지 않게 조그맣고 앙증맞았다. 자칫 잘못하면 금방 부러질 것 같은 조그만 손가락은 제 것이 맞았고.
“……진짜 뭐야?”
지나치게 짧았다. 대여섯 살 정도 되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손을 움직이는 대로 손가락이 잘만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
‘아, 꿈인가?’
무슨 이런 꿈을 다 꾼담.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았다.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부드러운 뺨을 살짝 꼬집자, 꿈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띠링.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체력이 고갈되어 정신을 잃습니다.(최대체력:1)]
“…어?”
머릿속에 그대로 울려 퍼지는 듯한 희미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사람의 형체를 한 것은 없었다.
그 순간, 현기증이 찾아왔다. 겨우 상체만 일으켰던 몸이 옆으로 기우뚱 넘어갔다. 귓가에서 아른거리는 이명과 함께, 푹신한 침대에 머리가 닿는 순간, 방을 향해 달려오던 사람들의 급박한 표정을 눈에 담았다.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 * *
다시 눈을 떠보니 이번에는 제 주위에 수 명의 사람들이 존재했다. 아까 전 자신을 보고 소리치다 도망간 사람도 저 뒤쪽에서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눈을 깜빡여보았다.
“…….”
여전히 아까와 똑같은 침대, 그리고 똑같은 방이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같은 꿈을 연달아 꿀 리가 없다. 이렇게 생생한 꿈은 꿔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꿈은 아닌 것 같았다.
“제, 제리….”
중년의 부인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그를 불렀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제 이름이 한제림은 맞는데요…. 누구세요….’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곤란한 표정을 짓는 그를, 사람들은 절절하게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때문에 그도 무슨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고, 수 개의 시선들 때문에 조금 움츠러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자신을 ‘제리’라고 불렀던 중년의 여성이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리, 엄마 기억하니……?”
“…….”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그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저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날 부르지 않아. ‘한제림!’ 하고 잔소리를 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아른거리는데….
“엄마, 엄마라고 불러보렴, 제발…….”
“……?”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제리는 숨만 쌕쌕 내쉬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서러움이 몰려왔는지, 얼굴을 감싸쥔 채 서글픈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남편인 듯 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 감싸 안았다. 그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매우 슬픈 표정을 지으며, “제리, 놀라지 말렴.”하고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했는데, 한국인이 아닌 게 분명할 그들이 하는 말이, 매우 자연스럽게 들린다. 외국어라고는 하지도 못했는데 어째서 이 말은 알아들을 수 있는지, 그는 그게 의문이었다. 침을 꼴깍 삼킨 뒤, 조심스레 입을 떼어 물었다.
“누구세요?”
그런데 제 목에서 나오는 소리도 어린애처럼 가늘었다. 이상했다. 난 애가 아닌데…. 그는 목을 감싸쥔 채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누군가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또 누군가는 엉엉 울고, 누군가는 그저 비통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야, 다 큰 어른들이 왜 울어?’
사람들은 하나같이 외국의 중세시대 의상처럼, 지나치게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걸치고 있고.
‘……설마.’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을 친구들만 부르는 별명인 ‘제리’라고 부르며, 이국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 언어를 모조리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씨발, 설마 환생 같은 건 아니겠지. 그래, 뭐. 드라마나 소설도 아니고 그럴 리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미친 생각이야.’
도련님이라 불리는 것도 굉장히 낯설었다. 침대 머리맡에 침착하게 서 있던 여자 한 명이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건넸다. 사람 한 명 한 명을 손으로 가리키며, 그들의 이름을 기억나는 대로 모두 말해보라는 것이었다. 기억나지 않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모르는 것이었지만, 일단 하라는 대로 모두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기억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녀는 의원이었던 모양이다. 기억을 잃었다는 판정이 내려지자마자,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이불을 꼭 부여잡고 있던 두 꼬마가 목 놓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어떻게 우릴 잊어! 너무해, 제리! 쌍둥이인 모양인지 얼굴이 빨개진 채 우는 모습마저 똑같았다.
“정말 죄송한데요, 전 제리…는 맞지만….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를….”
그는 더울 정도로 두꺼운 이불을 손으로 확 걷어냈다. 그러자 두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이 아닌 짧고 깡마른 맨다리였다.
“……?”
아무리 봐도 성인의 것은 아니었다. 기껏 해야 유치원생….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어릴지 모른다.
어째서? 왜…?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 고개를 들었다.
“저기, 거, 거울 좀….”
그 말에 하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황급히 뒤돌아섰다. 그는 벽에서 커다란 거울을 통째로 떼어왔다. 남자가 친절하게 코앞까지 대령해준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비친 것은 대여섯 살 정도로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제법 귀엽고 순진하게 생겨먹은 아이였다. 깜빡. 그가 눈을 깜빡이는 대로 거울 속의 아이도 눈을 깜빡 감았다 떴다. 고개를 기울이자 똑같이 그 아이도 고개를 기울여보였다.
……아니, 씨발. 이거 진짜로….
[스트레스가 1만큼 증가합니다.]
“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듯한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간을 찌푸리자 거울 속의 어린애도 심각하게 얼굴을 구겼다. 그런 제 행동 하나하나에 주위의 사람들이 손을 움찔거렸다.
“제리, 무슨 일이라도 있니? 머리가 아파?”
“제리. 정말로 나 기억 안 나?”
“너, 나와! 제리가 귀찮아하잖아. 제리, 나더러 로베인 형이라고 해봐! 그럼 뭔가 기억날지도 모르잖아, 응?”
쌍둥이들이 침대에 찰싹 달라붙어 제 팔을 덥석 붙잡았다. 얼굴이 온통 눈물과 콧물투성이었다. 아니. 형이고 뭐고,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니라 나는 애초부터 너네를 모른다고, 이 망할 꼬맹이들아.
“아, 씨발….”
작은 입에서 나온 욕설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이 이상으로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을 잃습니다.]
이번에도 이상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갑자기 현기증이 핑 돌았다. 귀가 멍멍해지고 이명이 들려왔다. 압축기로 머리를 꽉 쥐어짜는 것 같았다. 제리라는 외침을 뒤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시야가 까맣게 암전되었다.
* * *
“제리!”
“…….”
“제리, 졸려?”
쌍둥이 1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눈을 멍하게 깜빡였다. 제리가 누구지? …아, 그래. 내가 제리지. 내가 제리야.
“뭐.”
“내가 이걸로 화관 만들어줄게. 분명 잘 어울릴 거야.”
쌍둥이 1이 꽃을 한아름 안아들고 말했다.
“저리 꺼져, 조이! 제리는 내가 데리고 나왔잖아!”
그러자 쌍둥이 2가 달려와 화를 냈다. …아니, 조이라고 부른 쪽이 형이랬으니 쌍둥이 2가 아니라 1인가. 둘을 번갈아 보던 제리는 그냥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둘 다 너무 똑같이 생겨서 얼굴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내 동생이야!”
“아냐, 내 동생이거든! 그치, 제리? 응?”
귀찮아.
“그래, 그래. 형들은 가서 놀아.”
형이라는 말에 신난 쌍둥이 1, 2가 눈을 반짝 빛냈다. 그리고 이제 누가 먼저 화관을 더 빨리 만드는지 시합을 하기 시작했다. 귀찮게 구는 쌍둥이들을 내버려둔 채, 제리는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망할 애새끼들… 귀찮아 죽겠다. 저들끼리 싸우든가 말든가.’
유독 날이 좋은 오후였다. 푸른 하늘에 새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제리가 앉아 있는 들판에서는 풋풋한 풀내음이 올라왔다. 따사로운 햇볕이 얼굴에 쏟아진다. 제리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따뜻해서 그런지 졸음이 몰려왔다.
띠링.
[30초 이내로 그늘을 찾지 않으면 ‘열사병’ 이벤트가 진행됩니다.]
제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예, 예.”
시키는 대로 해야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리는 속으로 비아냥거리며 무릎을 잡고 일어나 나무 그늘 아래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소리로만 들리던 게 일주일째가 되던 날부터는 그럴듯한 게임 창처럼 구현되어 눈앞에 떠올랐다.
첫 날 기절한 이후로 한동안은 깨어나기만 하면 엉엉 울었다. 울려고 한 것이 아닌데 정신이 들면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한순간에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착잡함과 서러움 때문이었다.
‘한제림’은 죽었을 것이다. 배가 갈라져 피가 꿀렁꿀렁 새어나오고, 폐도 뚫렸는지 숨도 쉬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살아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다음 학기 등록금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에 돌아가던 중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차선을 벗어난 화물차가 버스를 덮쳤고, 뇌까지 저릿할 정도의 통각에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의식을 잃었다.
죽고 나면 끝인 줄 알았더니, 처음부터 환생을 한 것도 아니고 다섯 살짜리 꼬마가 되어버리다니!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친구들도 그리웠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살던 곳과 전혀 다른 세계 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유서나 써둘 걸 그랬어. 엄마랑은 나중에 세계일주하자고 약속도 했는데…. 형이 탐내던 모자, 그것도 그냥 줘버릴걸. 그냥 집에서 쉴걸. 버스를 타지 말걸. 오래 걸리더라도 집까지 그냥 걸어갈 걸 그랬나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랬더라면…. 그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다 또 울컥 눈물을 터뜨렸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어 그는 온 몸에 열이 오를 때까지 울다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제 때 식사를 하지도 못했고, 잠을 자는 것은 울다 지쳐 잠에 들었을 때뿐이었다.
한제림으로 스물 세 해나 살았으면서 어린애 몸에 들어왔다고 정말 애처럼 눈물도 많아진 모양이었다.
일주일을 내내 끙끙 앓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이제 그만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어차피 울고 떼를 써 봐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닐 것이고, 어차피 계속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하루빨리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순간, 최초의 ‘상태창’이 그의 앞에 떠올랐다.
[반갑습니다. 카이엔 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리.]
“…….”
제국? 한참 그 창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자신이 ‘제리’가 되었음을 그럭저럭 받아들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제가 들어온 이 세계는 평범한 곳은 아닌 모양이었다.
제리가 더 이상 울지 않고 덤덤해지자, 사람들은 제리에게 조심스레 접근하기 시작했다. 내내 자지러지게 울다 갑자기 차분해진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시종들도 있었다.
“정말, 정말 괜찮으신 거지요?”
“괜찮아, 정말.”
쌍둥이 중 하나인 로베인의 말에 따르면, 제리는 무려 1년 동안이나 깨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물에 빠진 것치고는 너무 오래 깨어나지 않았으니 다들 걱정을 한 모양이었고 말이다.
그 무엇도 기억하지 못하는 제리를 위해, 시종은 쌍둥이들 위로도 형이 하나 더 있다고 친절히 알려주기까지 했다. 쌍둥이들과는 여섯 살 터울에, 제리가 된 자신과는 열두 살이나 차이가 난다.
‘그 아인스라는 놈은 열일곱 살이니 쌍둥이들처럼 귀찮지는 않겠지.’
…부디 그러기를 바랐다. 제리는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두가 자신을 어린애처럼(실제로 어린애가 맞기는 했다.) 싸고도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 그는 하루 빨리 커버리고 싶었다. 묘하게 느껴지는 익숙함의 정체도 알 수 없었다.
“모기다.”
제리는 하얀 팔에 와서 착 달라붙는 모기를 다른 쪽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
정말 약하기 짝이 없는 몸이다. 하기야, 일 년을 누워 있었으니 말 다 했지. 멀쩡히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무척 대단한 것이었다. 다행히 첫날처럼 체력이 1 깎인다고 해서 쓰러지지는 않았다.
“상태창.”
정말 게임에서처럼, ‘스탯’이나 ‘상태창’이라고 말하면 눈앞에 창이 떠올랐다. ‘목소리야 체력 알려줘, 최대체력, 최대체력 보여줄래, 체력 보는 법’등, 수많은 실패와 도전 끝에 얻어낸 성과였다.
[체력:4/8, 근력:2, 지능:50, 매력:10, 스트레스:89/100, 검술:0, 마법:0]
처음에는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잘못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픽픽 쓰러지고는 했다. 당시 최대 체력이 1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조그만 충격에도 체력이 깎이는 상황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제리는 방 안을 열심히 걸어 다니는 훈련을 함으로써 최대체력을 8까지 끌어올렸다.
스트레스는 최대치 100이 채워지는 대로 의식을 잃는다. 제리는 늘 스트레스가 70 이하로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혼자 있게 되면 자신이 살던 곳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또, 그는 스탯창에 마법이 있는 것을 보고는 조금 놀랐다. 마법까지 있는 세계라니, 아주 막장이었다. 또 어떤 개막장 같은 일이 벌어질지, 기대가 하나도 되지 않았다. 제리는 아직은 다섯 살이었기 때문에 일단 체력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한동안 살아보기로 했다.
“…….”
당장 다섯 살이 되어보니 막막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막막했던 것은, 어린아이로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였다. 사실 난 성인인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어린애가 되었네요.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믿어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제리! 누가 만든 게 더 마음에 들어?”
“조이, 저리 꺼져! 내가 먼저 씌워줄 거야!”
“…….”
저를 향해 달려오는 두 악마의 모습에 제리는 그만 정색을 하고 말았다.
[스트레스가 1만큼 증가합니다.]
안타깝게도 스트레스를 감소시키는 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왠지 오늘도 스트레스가 쌓여 기절하고 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띠링.
이젠 익숙한 소리에 슬며시 눈을 떴다. 창밖은 어두컴컴했다. 이번엔 아침이 아니라 밤에 일어난 모양이었다. 아직까지 그의 수면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어쩔 때에는 반나절을 자기도 하고, 또 어떨 때에는 5분 만에 일어나기도 하니, 도무지 규칙성이 없었다. 제리는 반투명하게 눈앞에 뜬 창을 닫으려 손을 움직이다 처음 보는 말을 읽어냈다.
[기절 이벤트가 20회 누적되어 새로운 기능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기능?
[스탯창에서 감각 수치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물게 달가운 소리였다. 쓰러질 때마다 겪는 현기증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수치를 조절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제리는 쯧, 짧게 혀를 차고는 스탯창을 열어보았다.
“…스탯.”
[체력:3/8, 근력:2, 지능:50, 매력:10, 스트레스:70/100, 검술:0, 마법:0]
수치를 나타내는 숫자들을 쭉 내리자, 가장 아래 새로운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감각 수치 ---------○ (현재 10) ]
수치는 게이지 바로 나타나 있었다. 동그라미에 손을 올려 왼쪽으로 조금씩 옮겨보자 숫자가 하나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치를 어느 정도로 내려야 할지 가늠이 잘 가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1까지 수치를 내려버렸다.
그러자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물론 0으로 설정할 수도 있었으나, 일단 수치 1로 생활을 해보다 불편하면 그때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제리는 고개를 돌려 커다란 창을 바라보았다. 가득 차오른 보름달이 검푸른 하늘에 걸려 있었다.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시리도록 푸른 달빛이 창을 넘어 침대까지 뻗어 있었다. 피부에 닿는 이불이 사부작거린다. 그림처럼 변함없는 바깥 풍경을 내내 감상하다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읏차.”
제리는 짧은 다리를 침대 밖으로 뻗어 폴짝 뛰어내렸다. 잠도 오지 않는데 그냥 밖에 나가 신선한 공기라도 쐬고 싶었다.
[감기 이벤트가 발생하기 일보직전입니다. 체온을 유지해주십시오.]
제리는 코를 훌쩍이며 창을 닫았다. 그리고 약하기 그지없는 이 몸뚱아리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얇은 침대 시트를 죽 잡아당겨 어깨에 대충 둘러 감았다. 하얀 시트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 자신이 너무 작은 탓이었으니까.
저택의 고용인들이나 제리의 가족에게 들킨다면 분명히 방으로 다시 잡혀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제리를 필요이상으로 걱정하고 싸고도는 경향이 있었다. 하기야, 몸이 정도껏 약해야지. 아무튼 그 때문에 몰래 나가야만 한다.
‘이런 과도한 관심, 더는 받고 싶지 않은데. 너무 부담스럽다고….’
그는 배부른 소리를 하며 소리 없이 문을 연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
최소한의 등만 켜져 있는 복도 끝에서 하녀 셋이 소곤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코너를 돌아 맞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제리는 살금살금 걸어 계단을 내려왔다. 다행히 1층에도 사람은 없었다. 커다란 대문을 작은 손으로 밀어보았다.
‘아, 씨발. 근력 2….’
어떻게 된 몸이길래 이런 문도 못 여는지…. 그는 조만간 근력을 조금 더 끌어올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에 등을 기댄 채 무게를 실어 밀어보았으나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잠시 후, 제리는 지금이 늦은 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져갈 것이 많아 침입자를 경계해야 할 이 집에서 문단속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
문고리에 달린 잠금장치를 잡아 돌리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잠긴 문을 밀어대니 열리지 않던 것은 당연했던 것이다. 그렇게 문을 열어 저택을 나오자 푸른 밤의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제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밤공기가 상쾌했다.
[기분이 좋습니다. 스트레스가 10 감소합니다.]
“흐아….”
바깥 대문 근처까지 걸어온 제리는, 정원사가 이따금씩 앉아 쉬곤 하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 몸에 들어와 처음으로 느껴보는 편안함이었다.
“……좋다.”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사람도 없고, 놀아달라고 보채는 시끄러운 꼬맹이들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지켜보는 시선이 없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편할 줄이야. 제리는 앞으로도 종종 산책을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혼자서 말이다.
띠링.
‘…또 뭐야?’
간만의 여유에 취해 깜빡 졸 뻔했던 제리는 또다시 울리는 효과음에 눈을 떴다.
[이벤트 발생! 간만의 조우입니다.]
이게 뭐지? 이벤트가 발생한다면 감기 이벤트일 줄 알았는데…. 그때,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말발굽 소리 같았다. 어디서 들리는 건지 알 수 없어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히이잉!
얼마 지나지 않아 철로 된 커다란 대문 앞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말이 와서 섰다. 그리고 한 남자가 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커다란 철대문을 사이에 두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제리에게 굉장히 익숙해진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아, 씨발….”
제리는 저도 모르게 욕을 중얼거렸다. 이 집 사람들이 깨어난 제리를 처음 봤을 때의 반응과 굉장히 유사했다. 그리움에 젖은 표정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찡그린 눈썹. 그러니 저 사람도 분명히 제리를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백작과 꼭 닮아 있었다. 제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그는….
“제리!”
“으억,”
순식간에 커다란 담을 넘어 들어온 남자에게서 바람 냄새가 묻어났다. 그는 무릎을 꿇고 어린 제리를 꽉 껴안았다. 굉장히 반가운 모양이다. 하지만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숨이 막혔다. 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몸이 조여왔다.
이 사람아, 나는 신체 나이 다섯 살이라고!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으악!
[체력이 고갈되어 정신을 잃습니다.(최대체력:8)]
야 이 씨발 새끼야……! 제리는 남자의 품에서 몸을 축 늘어뜨렸다.
[공략 인물 3인을 알게 되어 새로운 기능이 생겼습니다. 호감도창에서 각 인물의 호감도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때문에 새로 뜬 시스템창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당연히 읽지 못한 채 의식을 놓았다.
* * *
“…….”
다시 눈을 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어느새 아침이 밝아 있었다. 그리고 어제의 그 남자가 침대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 남자는 제리와 같이 다갈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백작 부인을 닮아 탁한 금발을 가지고 태어난 쌍둥이들과는 또 달랐다. 어깨가 뻐근했다. 제리는 작은 손을 들어 제 어깨를 조물거리며 말했다.
“으으, 스탯.”
[체력:8/8, 근력:2, 지능:50, 매력:10, 스트레스:60/100, 검술:0, 마법:0]
[감각 수치 -○-------- (현재 1) ]
푹 자고 일어난 덕에 체력은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어제는 기절할 때에도 현기증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했다. 다 새로 생긴 기능 덕이었다. 제리는 자신의 숨통을 막아 죽음에 이르게 할 뻔한 남자의 머리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꿀밤을 맞은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제리?”
“누구세요!”
또 자신을 껴안아 질식시킬까 두려워 제리도 덩달아 소리쳤다. 당당히 목소리를 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누구뎨요.’ 처럼 들렸다. 어린애 같은 발음과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사람들은 제리가 사고 이후 굉장히 과묵해졌다며 몰래 눈물을 훔치고는 했다.
“…정말,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거니?”
남자가 운다.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진짜 모르는데 나더러 뭘 어쩌라고….’
모르는 놈이라 그런지 전혀 감흥이 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눈물이 많아 탈이었다.
“난…… 아인스야. 제리 너는 내 이름이 길다고 가끔 아인이라고 부르곤 했어….”
그렇군.
[아인스 루트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100]
[현 나이에서는 호감도 100이 최대치라 더 이상 오르지 않습니다.]
제리는 순간 눈앞을 가득 채운 시스템창을 바라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호감도?”
당혹스러운 중얼거림에 ‘띠링’ 소리와 함께 새로운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호감도] * 공략 가능한 인물만 표시됩니다.
아인스 루트 : 100
로베인 루트 : 100
조이 루트 :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