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29)

#01_2

루트 백작가의 시종으로 일하는 조슈아는 이 집의 막내 도련님이 꽤나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조슈아…!”

제리 루트, 귀여운 이름을 가진 아이는 지난 주 생일을 맞아 이제 겨우 여섯 살이 되었다. 아이는 조슈아의 어린 남동생과 비슷한 나이였다. 물론 아무데나 던져놔도 잘 놀 것 같은 제 동생보다 훨씬 작고 왜소하기는 했으나, 원체 약한 몸을 지니고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었다.

“네, 도련님. 부르셨어요?”

다소 무례하지만, 그는 제리를 볼 때마다 남동생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그 아이보다는 예의도 바르고 순하지만 말이다.

“그거 이리 줘.”

“……또요?”

“형들 가져다 줄 거지?”

“도련님, 제가.”

“아니야. 어차피 형들도 제리가 오는 걸 더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가져다줄게.”

나이 대에 비해 제법 또랑또랑한(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발음으로 제리가 손을 내밀었다. 아이의 고집은 도무지 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건네어주지 않더라도 끝까지 졸졸 따라올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조슈아는, 지금쯤 검술 수업을 받고 있을 쌍둥이에게 가져다줄 마른수건을 제리에게 넘겼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응.”

“전부 드실 수 있겠어요?”

“당연하지!”

폭신한 수건을 겨우 안은 제리가 조슈아를 올려다보았다. 수건에 가려 시야만 겨우 확보한 채였다. 동그란 눈이 순진하게 끔뻑거렸다.

“추우니까 금방 들어오셔야 해요.”

“알았어.”

“가다가 어딘가 아프시면 참지 말고 곧장 누군가를 부르시고요.”

“어.”

“또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뭐? 내가 어린애…가 맞구나.”

“네?”

“아니야. 갔다 올게.”

해맑게 대답하며 눈을 접어 웃는 제리는 그 나이대 아이답게 제법 사랑스러웠다. 제리는 수건을 꽉 움켜쥐고 휙 돌아섰다. 햇볕 아래서는 금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가 살랑 흔들려 새하얀 이마가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연한 갈색을 띠는 눈동자에는 왜인지 모르게 총기가 깃들어 있었다.

제리는 요즘, 조슈아 말고도 다른 시종이나 시녀들이 하는 일을 돕고는 유유히 사라진다고 한다. 누군가는 ‘근력이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니 그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한동안은 그림책에 그토록 열중하더니, 아이의 새로운 취미이겠거니 했다. 처음에야 곤란했지, 지금은 제리가 기웃거리면 시종들이 먼저 나서 무슨 일이냐고 묻고는 했다.

이맘때 아이들은 배려할 줄을 모른다. 이기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아직 어리기 때문에 본인만 생각하기에도 벅차다는 말이었다.

기특하긴 하다만, 조슈아는 제리가 보통 아이와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그게 죽을 고비를 넘겨서인지는 모르지만, 유독 어른스러운 면이 아이에게는 있었다. 가끔은 쌍둥이 도련님들보다도 더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조슈아는 그런 막내 도련님이 참 안쓰러웠다.

조슈아가 처음 이 저택에 일꾼으로 들어왔던 날, 제리 루트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시종과 시녀들은 아이가 어째서 깨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하여 몰래 수군거렸다.

‘사실 이미 죽은 바나 다름없지. 심장이 한 번 멎었다잖아.’

‘쉿, 누가 듣겠어. 말 조심해.’

‘원체 몸이 약한 아이니까. 딱하게 되었지 뭐야….’

물에 빠져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아이는 벌써 두 달째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몸 상태는 멀쩡한데도 의식만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저택 안에는 늘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그것도 막내아들이 깨어나지 않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도 만일 동생이 제리처럼 아프게 된다면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을 확신했다. 그렇게 조슈아가 이곳에서 일한 지 약 일 년이 지나고 나서야, 아이는 눈을 떴다.

유독 무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주인님! 마님! 막내 도련님께서! 도련님께서 깨어나셨어요!’

아이가 깨어났다는 말에 온 저택이 소란스러워졌다. 레브란어 수업을 받고 있던 쌍둥이 도련님들이 가장 먼저 달려왔고, 그 다음으로는 백작 부부가, 그리고 곧 연락을 받고 달려온 주치의까지 모여 침대를 둘러쌌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제리가 다시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속눈썹이 움찔거리더니, 눈꺼풀이 들리고 갈색 눈동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오, 아가….’

‘제리…….’

하지만 모두의 염원과는 다르게, 처진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떨리고 있었다. 제리는 불안함이 역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세요?’ 라고…. 그 순간, 백작 일가의 표정을 조슈아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절망, 슬픔, 하지만 약간의 안도감이 섞인 표정이었다.

제리는 아는 사람, 기본적인 상식, 심지어는 어설프게나마 읽고 쓸 줄 알았던 글자까지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이가 무사히 깨어나 준 것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했다.

역시 듣던 대로 제리 루트는 몸이 약했다. 그냥 약한 것도 아니고, 약해 빠졌다. 잘 걸어간다 싶더니 갑자기 픽 쓰러지고, 언제 한 번은 계단에서 의식을 잃으려던 것을 늘 곁에 붙어 있던 시종이 가까스로 낚아챈 적도 있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시종들은 모두 토끼눈이 되어 굳은 채로 한동안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깨어나고 처음 며칠은 아무것도 안 하고 서럽게 울기만 하더니, 그래도 얼마 지나자 활력을 되찾은 듯해 안심이 되었다.

의원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깨어난 아이가 늘 긴장상태인 것 같으니, 당분간은 유심히 지켜보라는 말만 남겼다. 그 걱정이 무색하게 제리는 곧 기운을 차렸다. 가끔 멍한 모습을 보이고, 눈물을 삼키듯 코를 훌쩍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한때였다. 아이는 쌍둥이 도련님들의 손에 이끌려 피크닉을 나가기도 하고, 아카데미를 탈출한 첫째 도련님에게는 그림책을 한아름 선물 받더니 그에 집중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상냥하고 귀여운 넷째 도련님이 이제는 건강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다고, 조슈아는 늘 생각했다.

* * *

체력은 제리가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대로 조금씩 올랐고, 얼마 전 근력을 올리는 법도 찾아냈다. 심부름을 하거나 시종들이 물건 옮기는 것을 도우면 근력이 오른다. 그렇게 제리는 열심히 능력치를 끌어올리느라 바쁜 일상을 보냈다.

최근에는 제국 통용어를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이지만, 성인의 머리를 가진 제리는 금세 제국어를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아직 서툴지만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고 칭찬도 들었다.

‘제리, 아직 어린데도 벌써 이걸 다 외우다니! 꼭 여덟 살 같구나!’ 라는 칭찬에 제리는 마음 놓고 기뻐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는 성인이었으니까 여덟 살 같다는 말은 상냥한 욕 같았다. 아무튼, 그렇게 하루의 공부를 마치고 나면 지능이 조금 오른다.

“스탯!”

[체력:10/10, 근력:15, 지능:60, 매력:10, 스트레스:10/100, 검술:0, 마법:0]

그동안 변화한 수치는 딱 세 가지뿐이었다. 체력, 근력, 그리고 지능. 이 중에서는 체력을 올리는 게 가장 힘들었다. 기껏 올려놔도 밤늦게까지 책을 보거나 딴 짓을 하다가 잘 시간을 넘기면 최대체력이 떨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매력은 굳이 올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무슨 짓을 해도 변동이 없었다.

체력보다도 더 올리고 싶은 수치가 있었다면, 마법이었다.

제리는 마법은 어떤 것일지 늘 궁금했다. 그 때문에 별 관심도 없는 동화책이 새로 나오는 족족 사들였으니 말이다. 수치가 있는 걸 보면 언젠가는 배울 수 있는 것 같은데, 백작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아직 그가 어리기 때문에 무리라는 말만 돌아왔다. 검술도 마찬가지였다.

제리는 글자도 모르면서 마법이 너무 신기하다는 이유 하에 동화책을 늘 끼고 살았다. 형들은 그런 그가 어린애 같다며 웃고는 했다. 작게나마 저택 한구석에 마련된 연무장에서, 둘은 검술 선생의 지도하에 작은 목도를 맞부딪치고 있었다. 그들은 수업에 집중도 하지 못한 채 틈틈이 제리를 향해 시선을 보내왔다.

‘어린애같다고? 까불고 있어. 진짜 어린애가 누군데….’

그는 그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할 말을 속으로 읊조리며, 시선을 갈구하는 쌍둥이 형들에게 손을 대충 흔들어주었다.

[로베인 루트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100]

[현 나이에서는 호감도 100이 최대치라 더 이상 오르지 않습니다.]

[조이 루트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100]

[현 나이에서는 호감도 100이 최대치라 더 이상 오르지 않습니다.]

“……쯧.”

애들이란….

하루에도 몇 번씩 호감도창을 띄워대는 탓에 이제는 ‘띠링’하는 소리가 별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듣고 놀라서 깨는 일도 줄어들었고 말이다.

다만, ‘??’라는 이름으로 호감도창에 자리 잡은 이가 누구일지는 늘 궁금했다. 처음 아인스와 나갔던 날 이후로 그 아이를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함께 나온 시종에게 조금 기다리라고 하고, 일부러 광장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본 적도 있었다.

사춘기 전에는 여아가 남아보다 키가 크기도 하니, 아마 ‘??’도 여자애일 것이라고 머릿속에서 멋대로 결론을 내린 채였다. 호감도창에서 유일하게 혼자만 이름도 모르는데다 여자아이니, 계속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제리가 ‘??’의 정체를 알게 되는 날은 이로부터 몇 달이 지난 어느 봄날이었다.

* * *

온 세상을 뒤덮었던 새하얀 눈이 녹아내리고 날이 어느 정도 풀렸다. 꽁꽁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니 연둣빛 새싹이 수줍게 고개를 들었다. 거리를 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한결 얇아졌다. 제리는 이제 외투를 입지 않고 밖에 나가도 감기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리는 봄이 그렇게 달갑지 만은 않았다. 오히려 빨리 다시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리는 겨울이 아닌 그의 일곱 살 생일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무렵이 되면 백작이 마탑에서 일하다 은퇴한 마법사를 선생으로 붙여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리가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였다. 평균적으로 일곱 살이 되면 아이가 마력을 운용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별하는데,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아인스도, 조이도, 로베인마저 마법에는 전혀 재능이 없었다. 그러니 제리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백작은 그 사실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좋으니, 아이가 꿈을 가질수록 좋았다.

“제리, 벌써 그걸 다 읽었니?”

“네.”

백작은 산더미 같은 동화책 틈에서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막내아들을 보며 활짝 웃었다.

“걱정할 게 없겠어. 책을 이리도 좋아하니 말이다. 허허, 우리 제리는 벌써 열 살 같구나!”

“……열 살.”

백작은 제리가 학구열이 뛰어나다며 매우 자랑스러워했으나, 사실을 따지자면 제리는 그가 접해보지 못한 마법 이외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었다. 

최대체력은 15에서 더 위로 올라갈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매일 아침마다 커다란 정원을 두 바퀴 산책하는데도 그랬다.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당연히 격렬한 운동은 하기 힘들었다. 일상이 너무 무료한 나머지 매일 그늘 아래에 앉아 형들을 구경하는 제리를, 검술 선생님은 검에 관심이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한번 해보겠니?”

그는 제리에게 큰 기대를 품고 어린이용 목검 하나를 쥐여 주었으나 역시나….

[Miss! 잘 해내지 못했습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검을 제대로 휘둘렀습니다.]

[Miss! 잘 해내지 못했습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

이쯤에서 관둘까. 제리는 제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스스로 검을 휘두르는 것을 그만두었다. 요즘은 좀 덜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의 특기는 아무데서나 쓰러지기였기 때문이다.

“으음…. 으으음…….”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대놓고 말할 용기는 없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제리 군은 아직 어려…… 아직은… 검을 다루는 것에…… 무리가 있겠군요…?”

“응!”

그래도 나름대로 돌려 말해주는 친절함이 조금 감동적이라고 해야 할까? 제리는 아무것도 못 알아들은 척 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뭔가 찝찝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검술 선생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이곳 사람들은 참 표정이 다채로워 좋았다. 감정을 알아보기가 쉬우니 말이다.

고작 30번을 휘둘렀을 뿐인데 검에 문외한인 제리조차 알 수 있었다. 제게는 검에 대한 재능이 전혀 없다고 말이다.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검에 몸이 휘둘리는 것 같았다. 어린이용 목검이니 제일 가벼운 것일 텐데도 팔이 후들거렸다.

그래도 나름 성과는 있었는데, 검술 능력수치가 1만큼 올랐다. 근력을 조금 더 올리고 나중에 다시 시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로베인은 후들거리는 팔을 주무르는 제리를 보고 그를 업어들었다.

“제리, 조금만 참아.”

참긴 뭘 참아. 고작 열두 살짜리 꼬맹이한테 걱정 받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도 아니라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나 안 아파, 형.”

감각 수치를 1로 설정해둬서 웬만해선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도 팔이 조금 뻐근할 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고 말이다. 목에 팔을 감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방긋 웃는 제리가 영 걱정스럽다는 듯 로베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읏차.”

“응?”

어느새 앞에 나타난 아인스가 로베인에게서 제리를 빼앗아 안아들었다. 제리는 영문도 모른 채 첫째 형의 품으로 옮겨져, 시야가 좀 더 높아졌다. 아카데미 방학 기간이라 저택에 남아 있는 그는 제리와 눈을 마주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리, 잘 놀았니?”

놀았다기보다는 팔만 혹사당했는데….

“……응!”

하지만 요즘 부쩍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러면 안 돼. 조금 더 어린애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다. 괜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제리는 쓸데없는 말은 혼자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정리를 끝낸 조이도, 로베인과 제리의 뒤를 따라 뛰어왔다. 그렇게 얼떨결에 사형제가 한데 모였다.

제리의 팔이 못 쓰게 되었다는 로베인의 과장에, 아인스는 표정에 미동조차 없었으나 자연스레 제리를 방으로 데려다 눕힐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심심한 것을 죽는 것보다 끔찍하게 여기는 제리는 무척 싫어할 테지만 말이다.

별채를 지나 본관으로 들어가기 전, 백작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리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왜 안에서 얘길 안 하고 저기서 만나고 있지? 저건 누구야?’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웬만해선 이 저택에 낯선 이가 찾는 일이 없었는데 말이다. 마찬가지로 제리의 의아한 시선이 닿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쌍둥이들은 “아버지!”라며 백작을 부르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아인스도 제리를 땅에 내려준 뒤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인사하렴. 시어스 경이란다.”

제리를 뺀 셋이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시어스 경이 뭔데?’

저 사람의 이름인가. 제리는 멀뚱히 눈을 뜬 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와 눈을 마주하는데 갑자기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사람의 것 같지 않게 눈이 새빨갰다. 저런 색을 가진 눈은 처음 봐서, 팔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로베인 루트, …조이 루트.”

남자는 누가 로베인인지, 조이인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소름끼치게도 정확한 인물에게 차례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곧 제리에게로 옮겨왔다. 붉은 눈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 둘 이외에…… 또래 아이가 하나 더 있었군요?”

시어스 경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며 제리를 바라보았다. 또래 아이라니,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자신을 보고 하는 말이니 그 ‘또래 아이’는 제리를 가리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경, 아직 제리는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아….”

“네 이름이 제리냐?”

백작의 말을 끊고 제리에게 질문을 건넸다. 갑자기 짜증이 확 치고 올라왔다. 왜 사람 말을 중간에 끊어, 기분 나쁘게…. 그래도 백작이 ‘제리’의 아버지라고 해서 낯선 남자보다는 조금 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짜고짜 반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 내가 제리다. 그래서 어쩔래? 

“네에! 제리!”

제리는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그는 느낌이 좋지 않은 상대의 앞에서라고 해서 반감을 보일 정도로 어리지 않았다. 무해하게 보여야 했다. 최대한 무해한 어린애처럼 보여야….

“이런.”

그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거리더니,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피식 웃었다.

“화가 났다면 미안하다, 제리. 날 용서하려무나.”

“……응?”

제리는 웃는 얼굴 그대로 쩍 굳었다. 시어스는 웃는 얼굴 그대로 뻣뻣하게 굳은 제리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다 알고 있다는 듯 말이다.

‘말도 안 돼. …분명 내 표정은 완벽했을 텐데.’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속내를 들킨 적이 없었다. 그만큼 제리의 연기는 완벽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가 혼란에 허우적거리건 말건, 시어스는 제리를 내려다보며 백작에게 통보하듯 말을 건넸다.

“그럼, 하워드 경, 다음 주말에 마차를 보내겠습니다.”

“그, 그게.”

“웬만해서는 세 아이를 모두 보내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렇지, 제리?”

누구신데 그걸 저한테 물으시죠. 제리는 삐딱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경. 제리는 아직 어립니다.”

“절대 강요가 아닙니다. 아이의 몸이 약하다고 했던가요? 당일 제리의 몸 상태가 괜찮다면 보내주시지요.”

안 돼, 어딘지는 모르지만 저 아저씨에게 보내지 마! 불길하단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백작은 왜인지 모르게 시어스에게 약한 태도를 보였다. 제리는 눈에 힘을 준 채 두 어른을 번갈아 보았다. 혼란스러워하는 제리를 안심시키려는 듯, 시어스 경이 제리의 머리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주말에 보자꾸나, 제리.”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머릿속이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청량감에 조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어스를 바라보자, 시어스는 또 픽 웃었다. 그렇게 시어스 경이 등을 돌려 저택의 대문을 빠져나간 뒤, 제리는 백작을 조르듯 다리를 붙잡고 물었다.

“아버지, 저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게 궁금하니, 제리?”

“응. 눈이 빨갰어!”

산토끼 같아! 제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손짓을 풍부하게 섞어 말했다. 스스로도 징그러워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날 만큼, 무척 연극적으로. 어린애답게 행동해 보였다. 그러자 백작도, 그리고 형들도 모두 제리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다들 껌뻑 속아 넘어가는 게 우습지도 않았다.

그래, 이래야 맞는 건데, 화가 났냐고 물었어. 제 속내를 금세 파악한 그 남자가 제리는 왠지 꺼림칙했다. 꼭 마음을 읽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시어스 뉴어라고, 궁정 마법사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사람이지.”

마법사…? 제리의 다갈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큰 관심을 보이는 태도에 백작은 옅게 웃었다. 아이는 마법에 관련된 얘기라면 사족을 못 쓰곤 했으니 당연히 시어스가 마법사라고 한다면 관심을 가질 걸 예상하고 있었다.

“신기하니, 제리?”

“네…!”

하지만 여전히 어린 아들에 대한 걱정은 버리지 못한 듯 눈에 수심이 어려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말벗을 구한다고 하는구나.”

그런 자리에 제리 네가 가도 좋을지…. 백작이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리는 이쯤에서 자리를 피해주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아인스의 소매를 잡아당기자, 아인스가 제리를 안아들었다.

마법사라니. 그것도 궁정마법사라면 무척 대단한 사람인 게 틀림없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제리는 제 방으로 돌아와 책꽂이에 꽂힌 수많은 마법책 중, ‘마법사와 너구리’를 꺼내어 침대 위에 펼쳐놓았다. 당당한 자세의 마법사가 손을 휘두르자 하늘에 총총 박혀 있던 별무리가 번져나와 제리의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희미하게 반짝거리며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냈다. 책 속의 너구리가 반짝이는 별빛을 잡기 위해 폴짝 뛰었다.

“마법이라니….”

시간이 지나도 지루해지지 않았다. 늘 새롭고 신비할 뿐이었다. 동화책을 덮자 제리를 휘감고 있던 별무리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날 주말에 보자고 그랬지?’

제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기로 마음먹었다. 분명 백작은 어린 제리가 중요한 자리에서 실수라도 할까봐 염려하는 것 같았다. 제리는 그날 아주 완벽하게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일 자신이 있었다.

물론, 어린아이 기준에서 말이다.

눈이 막 뽑아낸 피처럼 새빨갛던 궁정마법사. 조금 섬뜩하고 꺼려지는 사람이긴 했지만, 평소 마법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제리의 궁금증을 해소할 좋은 기회였다.

* * *

“우윽.”

제리는 입을 틀어막은 채 마차 문에 난 작은 창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도대체 생전 없던 멀미가 갑자기 왜 생기느냐고! 몸이 바뀌어 그런가?’

그는 차라리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려 여기서부터 걸어가겠다고 생떼를 부리고 싶었다. 그가 온전한 어린아이였다면 분명 그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리, 괜찮아?”

조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

제리는 입을 틀어막은 채 대답했다.

“아직 괜찮나봐.”

조이는 로베인에게 속닥거렸다. 제리는 제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그를 향해 황당한 눈빛을 보냈다.

‘안 괜찮아! 안 괜찮다고 말했잖아! 니들 보기엔 내가 괜찮아 보이냐?’

든 것도 없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조금만 참자, 제리.”

“…….”

제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은 놈들이었다. 그들은 말을 걸면 멀미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귀찮게 자꾸 말을 걸어댔다. 제리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토할 것 같으니 얼굴에 맞고 싶은 게 아니면 얼굴들 치워, 먼 산 봐야 하니까….’

창백한 얼굴의 막내 동생을 걱정하는 쌍둥이 형들조차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감각 수치가 그도 모르는 사이 올라간 것은 아닌지, 조용히 스탯창을 불러내 확인도 해보았다. 0까지 내려도 보았으나, 울렁거림은 이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다시 수치를 1로 끌어올린 제리는 그저 눈물을 집어삼키며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덜컹!

마차가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가는지 몸뚱이가 마구 흔들렸다. 승차감이 최악이었다. 명색이 황궁에서 온 마차인데, 그게 이 정도면 다른 운송수단은….

‘차라리 걸어가다 지쳐 죽을래.’

제리는 두 번 다시 마차를 타고 싶지 않았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엉덩이가 한 번 들썩일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체력도 1씩 깎였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씨발….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체력이 고갈되어 정신을 잃습니다.(최대체력:15)]

“으흐어어….”

제리는 힘없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마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기절!’ 이번 기절은 제리에게 있어 두 번째로 황당한 기절이었다. 첫 번째로 황당했던 것은 ‘아인스에게 너무 세게 끌어 안겨 기절’이었다.

“그래, 제리. 차라리 누워 있어.”

‘누운 게 아니라 기절하는 거라고!’

로베인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로 제리의 의식이 멀어져갔다. 로베인은 그저 제리가 지친 거라고만 생각했는지 그의 어깨를 간헐적으로 토닥여주기만 했다. 

* * *

깜빡.

“…….”

“…….”

눈을 떠보니 코앞에 시어스 경의 얼굴이 있었다. 빨간 눈과 마주치자 시어스는 슬쩍 웃어보였다. 그에게 안긴 채 주위를 둘러보니 황궁의 시종들인지,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제리는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래, 제리.”

그는 피식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 내 이름을 기억하네?’

의외였다. 별것도 아닌 꼬마라 금방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시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자신을 구경하듯 바라보는 제리를 보며 연신 피식피식 웃어댔다. 제리는 잠시 후 주위를 둘러보다 물었다.

“형들은요?”

“먼저 갔다. 네 걱정을 하더구나.”

“…….”

먼저 갔다니, 도착했으면 깨우지….

“저어….”

시어스는 일어난 제리를 굳이 땅에 내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무언가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 제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차피 황태자 나부랭이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제리의 목적은 이 남자에게 있었으니.

“경은 마법사신가요?”

때문에 그는 본론부터 얘기를 꺼냈다.

“네 아버지께 들었나보군. 왜, 내게 관심이 있느냐?”

아니? 너 말고 마법이요.

“음, …네에.”

“거짓말이로구나.”

마법사인 그에게 관심이 있는 거라 볼 수도 있으니, 따지자면 큰 거짓말도 아니었다.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얼굴은 속내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저 나이까지 먹어서 이만한 꼬맹이랑 기싸움이 하고 싶은 건가? 고작 여섯 살짜리가 하는 거짓말이 얼마나 나쁘다고….

“사실 경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제리는 무해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시어스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제리는 침을 꼴깍 삼키며 생각했다. 마법사란 속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 건가…?

“제리도 경처럼 마법사가 될 수 있나요?”

마법사인 당신은 알 것 아니야. ‘제리’에게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 제리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시어스는 그런 제리를 능글맞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글쎄. 네게 달렸지.”

“제가 원하면 경처럼 될 수 있다는 건가요?”

“글쎄다….”

제대로 대답 해, 씨발놈아. 나 마법 배울 수 있냐니까?

“이런, 또 화가 났느냐?”

“…아니요?”

어떻게 알았지. 눈치가 빠른 건지, 남자의 비밀을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끝까지 잡아떼면 그게 진실이 되는 법이다. 제리는 더 밝게 웃으며 시치미를 떼었다.

“나 화 안 났는데!”

박박 우기면 그게 사실이 된다. 적어도 어린아이인 제리에게는 그럴 것이다.

“제리 루트, 벌써부터 거짓말을 하는 습관은 좋지 않단다.”

거짓말하면 뭐 어쩔건데?

“아직 어리잖니. 버릇된단다.”

시어스는 그렇게 말하며 제리의 미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머리를 툭 하고 밀쳤다.

“…….”

뭐야, 씨발놈아. 방금 너 내 머리 쳤냐?

“제리, 화났니?”

“응.”

……뭐지, 방금?

“그렇구나.”

“…….”

뭐, 뭐야…! 왜 입이 멋대로!

“무례하겐 굴지언정 내게 거짓말은 하지 말아라. 이쪽이 더 아이답고 귀엽구나.”

시어스는 피식 웃으며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제리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분명히. 그런데 갑자기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것도 마법인가? 

[패시브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명: 진실의 입

효과 : 제리 루트는 모든 말에 ‘진실’이라 생각하는 답을 한다. 거짓을 고할 수 없게 된다.

효력 기간 : 제리 루트가 10살 생일을 맞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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