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_3
‘……여긴 또 어디지.’
또 길을 잃었다. 고양이를 본 게 굉장히 오랜만이라, 살랑거리는 꼬리만 보고 무작정 따라가다 보니 또 처음 보는 곳에 와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왜 이렇게 경계심이 없는 거야….’
처음 보는 외부인이 이렇게 돌아다니는데 아무도 저지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제리는 혀를 끌끌 찼다.
“나비야.”
그는 고양이가 눈에 들어오자 다시 손을 내밀고 쭈그려 앉아, 고양이가 먼저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야옹.
새하얀 고양이는 그를 경계하는 듯하더니 손의 냄새를 맡고 곧 손바닥에 머리를 부볐다. 제리가 올해 들어 겪었던 일 중, 이 순간이 두 번째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첫 번째는 열두 살이 된 쌍둥이들이 아카데미에 입학해 유배를 떠나던 순간이었다.) 그는 아예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손가락으로 고양이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나비, 너 여기 사니?”
냐아.
“…대답한 거야?”
애옹.
“귀여워! 야옹?”
애우우웅.
“…얘도 참 경계심이 없네? 누가 먹이 주면서 키우는 건가?”
흰 고양이가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제리에게 몸을 붙이고 땅바닥에 누웠다. 고양이는 참 말이 많았다. 그것은 제리가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대답하듯 야옹야옹 울어댔다. 비록 인간과 동물이라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제리는 고양이를 나비라고 부르며 헤벌쭉하게 웃었다. 한참을 고양이와 놀아주고 있던 제리의 앞에 조그만 그림자가 졌다.
“걔 이름… 나비 아닌데?”
“응?”
낯선 목소리에 제리는 고개를 들었다. 제 또래로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머리가 반짝거려.’
바람에 머리카락이 팔랑거릴 때마다 꼭 햇빛이 반사되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도 흔한 것은 아닌지, 아이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둥실둥실 떠가는 구름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은 여기저기가 뻗쳐있어 무척 푹신해보였다. 아이는 붉은 눈을 깜빡이며 제리를 관찰하듯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곧 제리의 앞에 털썩 쪼그려 앉았다.
“나비 아니야….”
아이는 고양이와 눈을 맞췄다. 아이가 손을 뻗자 고양이가 그 손에 얼굴을 부볐다. 고롱고롱 소리를 들으며 제리는 계속 고양이의 몸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나비가 아니면 뭔데?”
“음… 내 동생이야.”
“…….”
제리는 고개를 들어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하얀 머리카락이 고양이 털색과 비슷하긴 했다. 조금 멍해보이지만 눈매가 고양이 같기도 했고.
그나저나 여긴 붉은 눈이 좀 흔한가?
“왜 그렇게 쳐다봐?”
“…으음.”
그, 그래. 마법도 있는 세계에 동물로 변하는 것쯤이야. 시어스 경은 내 생각도 읽는데 뭐. …정말 동생인가보군.
“네 동생이 귀여워서. 너랑 닮았다.”
“…….”
아이의 눈이 정말 호기심 어린 고양이의 것처럼 조금 커졌다. 그렇다면 이 애도 고양이로 변할 수 있는 걸까?
“나비라고 불러서 미안해. 동생은 이름이 뭐야?”
“뻥이야. …그걸 믿네? 처음 봐.”
“……어?”
“이건 그냥 고양이야…. 야옹.”
애오옹.
고양이가 그에 대답하듯 짧게 울었다. 웃음기 없이 진지하게 말하니 당연히 속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짓는 제리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1]
넌 또 누구냐.
“…….”
“…….”
이젠 개나소나 다 공략 대상이네. 또 남자애야? 내 인생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제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데 너 누구야?”
“나?”
“왜 나는 널 처음 보지…? 너 여기 사는 거 아니지? 누구 따라온 거야? 몰래 들어온 거는 설마… 아니지…? 그러면 벌을 받을 거야….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혹시 길을 잃었어? 그러면… 내가 데려다줄까? 어디로 가야 해?”
느리지만 숨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질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씩 말해줘.”
“넌 누구야?”
“나는 제리 루트야. 이름이 제리고 성이 루트야. 그리고… 길 잃은 거 맞아.”
“루트? 그러면 카르얀 형님 친구인 건가…?”
그런데 왜 이렇게 작지? 아이는 특유의 느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작다는 말은 무시해 넘겼다.
“데려다준다고 했지? 나 길 잃었으니까 데려다줘.”
“으음… 그런데 난 거기… 못 들어가는데….”
들어가면 안 돼…. 아이는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췄다.
“…그래?”
카르얀은 황태자고, 그가 있는 곳은 황태자궁이니 이토록 어린 시종은 그 안까지 들어가는 게 금지일 수도 있었다. 제리는 거기까지 결론을 내린 후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가 카르얀을 형님이라고 말했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였다.
“그럼 근처까지만. 응?”
“…그래. 마침 나도… 시간 많으니까.”
아이는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제리가 고양이의 몸통이 길어지는 것을 보며 신기해하자 “안아볼래?”라며 고양이를 내밀었다. 제리는 고개를 저었다. 만일 고양이가 놀라 제리를 할퀴기라도 한다면, 제리의 몸은 상처를 치명상이라고 인식해 과다출혈로 사망까지 이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제리라면 그게 가능했다.
“저기. 얘 무거워….”
아이가 칭얼거렸다. 고양이도 그가 귀찮은지 야옹야옹 하고 몸을 뒤틀어댔다.
“그냥 제리라고 불러. 고양이는 놔주고.”
아이가 얌전히 그의 말대로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자, 흰 고양이는 야옹 하고 짧게 울더니 그들이 왔던 길을 따라 달려나갔다.
[‘??’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2]
갑자기 호감도가 왜 올랐지? 제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제리.”
“응?”
“제리….”
그는 제리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자꾸 제리의 이름을 중얼거리더니, 아몬드형의 눈을 똑바로 뜬 채 제리와 시선을 맞췄다.
“난… 일리야 디페리우스야.”
“……디페리우스?”
디페리우스는 왕가의 성이었다. 카르얀의 성도 디페리우스였고, 황제도 디페리우스다. 황제 아래로는 황태자까지 포함해 황자가 총 다섯 명, 황녀가 두 명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리야도 그 중 하나인 거겠지…?
“제리도 그냥 일리야라고 불러. 내 이름이니까….”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이름이 등록되었습니다. 호감도창에서 각 인물의 호감도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이런 것도 새로 친구를 사귄 거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그런데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고양이가 자기 동생이라고 속이던 애가 공략 대상에 오르다니…. 생각에 잠긴 제리가 말을 걸지 않으면 일리야도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한동안 두 아이는 나란히 걸어가기만 했다.
“제리. 난 여기까지밖에 못 와.”
“아, 응. 고마워!”
“내 이름도….”
“고마워, 일리야.”
그나저나 시종인 줄 알았더니 황자였다니…. 그러면 다른 황자들도 황태자 궁까지는 들어갈 수 없는 건가?
제리는 쳐진 눈을 휘어 웃으며 일리야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일리야 덕에 오늘은 전처럼 많이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덕분에 체력도 크게 깎이지 않았고 말이다.
“…이제 앞으로 쭉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제리도 그건 할 수 있지…?”
“그럼.”
“……정말…?”
일리야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당연하지!”
꼬맹이가 별 걱정을 다 하네. 제리는 안심하라는 듯 활짝 웃으며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
제리는 조용히 손을 내렸다. 두 번 쳤다고 정직하게 체력이 두 번이나 깎여나갔다. 그래도 제리의 말에 걱정이 조금 가셨는지 일리야의 표정이 좀 풀어졌다.
“또 놀러와, 제리….”
일리야는 손을 흔들며 뒤돌아섰다. 바람에 순수한 은백색을 띠는 머리카락이 팔랑팔랑 날리는 걸 보니, 정말 흰 고양이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거짓말이라고 끝까지 말을 안 해줬다면 정말 고양이의 형인 줄 알고 시어스 경에게도 동물로 변해달라고 부탁할 뻔했다.
그가 알려준 대로 정면을 보고 쭉 걸어가자 시어스 경의 뒷모습이 보였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제리를 발견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로 다가와 까만 옷에 묻은 고양이 털을 털어주었다.
‘언제 이렇게 묻었지?’
제리도 옷을 털어보았으나 손에도 고양이 털이 붙어 있었는지 별 성과는 없었다. 시어스는 제법 상냥한 손길로 제리의 옷을 대충 털어주었다. 체력이 깎이지 않아 다행이다.
“잠시 볼 일 보고 온 사이 어딜 갔나 했더니…. 고양이를 따라갔나 보구나?”
“…그래도 다시 찾아왔어요. 이번엔 길 잃은 거….”
아니라고 하면 또 진실의 입 스킬이 발동된다고 하겠지…? 제리는 말을 슬쩍 돌렸다.
“……덥다.”
사실 날씨 이외에는 말을 돌릴 방법이 딱히 없었기에 매번 덥다고 하는 건데, 시어스는 그런 제리가 웃긴지 덥다는 말만 들으면 키득거렸다.
“덥느냐.”
그걸 또 왜 묻냐. 제리는 힘없이 시선을 돌렸다.
“안 그래도 곧 찾으러 나갈 생각이었다.”
“…….”
“기특하게도 혼자 잘 찾아왔구나, 제리.”
제리는 애써 시어스의 눈을 피했다. 그와 말하다보면 금세 속내를 간파당해 정말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그건 실로 불쾌한 감각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한쪽 손으로는 뒷짐을 지고, 한쪽 손은 가슴께로 굽혀 올려 고개만 숙었다. 이건 지난 주말, 예법 선생에게 새로 배운 인사법이었다. 그는 제리가 지금껏 황족에 대한 예법도 모르고 황궁에 드나들었다는 것을 알고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제리. 하나도 안 어울리니 그냥 와서 앉아.”
“…….”
카르얀이 작게 웃으며 빈자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먼저 와 있던 영식들도 고개를 돌리며 슬쩍 웃었고, 시어스는 대놓고 어깨까지 떨며 뒤돌아 서 웃었다.
‘웃어…? 뭐가 웃기냐, 씨발놈들아…. 내가 우스워?’
시어스와 눈이 마주치면 또 그는 “화났니?”라며 제리의 신경을 박박 긁어댈 것이었다. 제리는 집에 돌아가 거울을 보고 완벽한 자세를 익힐 것을 다짐했다. 그 누구도 딴지를 걸지 못하도록 말이다.
[카르얀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1]
“……?”
카르얀이 제게 호감도를 올렸다는 사실에 놀라, 고개를 돌려 카르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표정에 미동도 없이 케펠 가 영식이 과장스럽게 손을 펼쳐가며 재롱을 떠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
…아, 설마. 제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보통 이 모임에서 제리는 말없이 앉아 있는 쪽이었다. 분명 처음 그의 호감도가 올랐을 때에는 진실의 입이 발동되어 ‘나는 기절을 제일 잘해요!’라고 지껄였을 때였다. 그리고 지금은 아마 인사법 때문에 호감도가 오른 것 같은데….
‘얘 설마 내가 재롱…을 떨면 호감도가 오르나?’
이상한 놈일세…. 그렇게 치면 영식들에 대한 그의 호감도는 벌써 첫날 100 이상을 찍었을 것이다. 제리는 황당함에 카르얀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다 구경했어?”라는 말에 뻣뻣하게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도 입 닥치고 있어야겠다.’
제리는 입을 꾹 다문 채 굳게 결심했다. 쓸데없이 호감도가 오르지 않게 말을 아끼는 게 좋겠다.
* * *
“맥박이 불규칙하군요. 조금 느리네요.”
주치의는 제리를 꼼꼼하게 검진한 뒤 얼굴을 찌푸리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백작부인은 그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거냐며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
“아, 이상할 정도는 아닙니다. 이런 증상은 보통 독극물에 노출되면….”
“독, 독이요?”
그녀는 의원이 말하던 도중 지레 겁을 집어삼키며 제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리는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겁이 나나. 부모가 되어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 그리고 독에 노출되었다면 제리의 몸이 버틸 리가 없다. 진작에 죽었으면 죽었지….
그리고 게임 시스템이 있으니 독극물을 섭취할 일도 없을 것이다. 체내에 무언가 들어왔다는 알림이 뜰 테니까. 갈증이나 허기에 관련된 이벤트도 종종 발생하는 걸 보면 확신할 수 있었다.
“진정하세요. 아이는 멀쩡합니다. 맥박…만 빼고는 모두 괜찮아요. 중독증세도 전혀 없고요.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걸 수도 있습니다.”
그냥 돌팔이인가? 제리는 잠에서 깬 지 반나절은 더 되었다. 형들도 없는데 밖에 나갈 이유가 없어 그냥 누워서 책을 읽고 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백작부인은 의원의 말에 한결 안심이 된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제리는 멍하게 눈만 깜빡였다. 가끔 제리의 가족들이 제리에게 보여주는 애정을 느낄 때마다, 아프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마음이 여린 백작부인은 제리가 쓰러질 때마다 눈물을 보이고는 하니까. 백작도 눈에 띄게 안타까워하는 게 느껴졌다. 제리는 차츰 건강을 되찾는 듯했다. 체력 수치는 어째서인지 제자리걸음이었지만 말이다.
“안녕하세요, 경.”
“……그래, 안녕 제리.”
그리고 요즘 시어스는 제리를 보면 굉장히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그에게 왜 그러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기고는 한다. 찝찝하게…. 그가 이마에 손을 가져다댔다. 곧 시원한 느낌이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간다.
“이거 뭐예요? 시원해.”
“말하면 아느냐?”
“…….”
알 수도 있지. 똑같은 말을 해도 재수 없게 말하는 재주가 있는 자였다. 제리는 토라진 듯 입을 다물었다. 시어스는 제리에게 화가 났냐고 히죽거리며 물었다. 제리는 날씨가 좋다고 중얼거렸다.
어느덧 늦여름에 접어들었다. 잘 관리된 황궁의 정원은 푸르렀고 또 아름다웠다. 시어스가 제리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제리는 부러 그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또 생각이 읽힐 테니까….
‘나도 마법 배우면 시어스 경 생각부터 읽어야지. 속을 읽히는 게 얼마나 좆같은 일인지 알려줄 거야.’
“뭘 그렇게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니, 제리.”
“…….”
‘그 땐 제발 봐달라고 애원해도 안 봐준다. 두고 봐.’
정말 가만 안 둘 거니까. 제리는 시어스의 손을 잡고 슬쩍 잡아당겼다. 그러자 시어스가 제리를 안아 올렸다. 그는 평소와는 다른 길로 걸어가고 있었다. 돌아가려는 건 아닌 것 같고, 오늘은 태양궁 이외의 장소에서 만날 모양이었다.
수풀에서 불쑥 튀어나온 고양이가 시어스의 앞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제리는 조금 흠칫했는데, 시어스는 놀라지도 않고 발걸음을 멈췄다.
‘…이 인간을 당황하게 할 수나 있을까.’
뱀 같은 사람이다. 미묘한 얼굴로 생각하던 제리는 익숙한 얼굴에 ‘어?’하고 아는 척을 했다. 고양이의 뒤를 쫓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던 일리야가 고개를 들었다.
“제리?”
그에 똑같이 “응, 일리야.”하고 대답을 했더니 시어스가 둘을 번갈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와 제리 루트가 서로 친분이 있을 거란 생각은 못한 모양이었다.
“제리, 다리 다쳤어…?”
“아니.”
안겨 있는 것이 다리를 다쳐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나보다. 제리는 다리를 까딱 움직여보았다.
“……황자님.”
“…다친 거 아니라고?”
“또 도망을 치셨습니까?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왜… 안 걸어 다녀? 안 다쳤다며.”
“4황자님, 어서 돌아가십시오.”
“제리도 나랑 고양이 잡으러 갈래? 오늘은 목걸이도 달아줄 거야…. 이거 봐.”
와, 대단해. 다 무시하잖아? 제리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일리야는 시어스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며 제리에게만 꾸준히 말을 걸었다. 시어스는 한쪽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제리는 일리야가 갑자기 좋아질 것 같았다.
“제리,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
경은 왜 맨날 내 생각만 읽냐고요…. 제리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씰룩 움직였다. 제리는 시어스의 팔을 잡아 내려달라고 손짓했다. 시어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빨리 가야 하니 짧게 얘기를 끝내라고 말했다. 사실 할 얘기는 없었지만….
“가자, 제리.”
일리야가 제리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은 제리의 것보다 조금 뜨거웠다. 열심히 뛰어다녀 그런지 이마에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미안, 선약이 있어서. 난 그냥 네 머리에 꽃잎이 붙어 있어서 내린 거야.”
제리는 하얀 머리카락에 붙은 빨간 꽃잎을 털어내 주었다. 아까부터 이게 계속 신경 쓰였는데, 시어스 경은 애 머리에 뭐가 묻어 있다고 얘기도 안 해주고….
“…그럼 나랑 안 가?”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으나 어깨가 조금 축 처진 것 같았다. 제리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 일리야. 다음엔 둘이서만 놀자.”
“…정말?”
그냥 한 말에 정말이냐는 말이 돌아오자 제리는 조금 당황했다. 애초에 그가 황궁에 들어올 수 있는 건, 황태자 카르얀의 부름 때문이었다. 일리야와 놀 시간이 나기는 할까.
“응, 둘이서만.”
시간이 나면 잠깐 놀아주지 뭐.
“나… 갈게!”
경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곳에 계속 붙잡혀 있으면 조금 곤란한 모양이었다. 제리는 시어스에게 안긴 채 손을 흔들었다. 일리야는 말없이 붉은 눈을 깜빡거렸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3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5]
한 번에 3씩 오르기도 하는구나. 일리야는 정을 좀 잘 주는 편인 것 같았다. 이름만 불러주면 호감도가 쑥쑥 오르니 말이다.
“…언제 또 4황자와 친구가 되었느냐?”
일리야가 그의 말투만큼이나 느린 걸음을 옮겨 사라진 고양이를 찾아 나서고 나자, 시어스가 넌지시 물었다.
“4황자요?”
그 4황자? 제리는 눈을 깜빡이며 시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일리야는 그냥 좀 멍한 꼬마일 뿐이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시어스는 한동안 그런 제리의 머리통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흥미롭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일리야가 4황자라고?’
제리는 일리야가 황자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가 카르얀이 견제한다는 그 4황자라니…. 제리가 볼 때에는 일리야도, 그리고 카르얀도 그냥 어린애에
불과했다. 심지어 카르얀보다 더 어린 일리야는 더 아기 같았다. 그런 아이들끼리 서로 견제하고 가문 싸움까지 한다니, 소꿉장난 같아 우습다. 하지만 제리는 이를 굳이 티내지 않았다. 어른스러운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어스에게 끌려온 곳은 평소 만나던 곳이 아니라 연무장이었다. 그곳에서 카르얀은 영식들과 함께 검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앉아 있으면 간식이 나올 거다.”
“…전 앉아만 있어요?”
“그래.”
“심심한데요.”
“그럼 가서 검을 배워보겠느냐?”
“아뇨.”
난 저런 거 못해. 1분도 안 돼서 기절할걸?
“그럼요… 제가 굳이 안 와도 되는 자리 아니었나요?”
어차피 내게 구경만 시킬 거면, 굳이 멀미까지 하면서 올 필요가 없었잖아…. 괜히 속만 뒤집혔네. 제리는 우물쭈물거리며 중얼거렸다. 시어스는 제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다, 제리.”
“……?”
“그건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란다.”
시어스 경은 제리의 물음에 꼬박꼬박 답은 해주지만, 늘 뒤돌아 생각해보면 제대로 된 답변은 하나도 없었다. 항상 능글맞기 그지없었다. 제리는 곧 시녀들이 내어온 쿠키를 와작이며 아이들이 막대기를 가지고 노는 것을 흐뭇하게 구경했다.
‘진짜 더럽게 재미없네.’
이런 거나 보려고 여기까지 불려왔다니. 간식이라도 열심히 먹어야지. 날아가는 나비에게 시선을 한 번 주고, 또 소꿉장난 하는 꼴을 한 번 내려다보다가 기지개도 한 번 켜고.
“으음….”
준비된 간식을 혼자 다 먹어 배도 부른데 날씨까지 좋으니 절로 나른해졌다. 제리는 반쯤 감긴 눈을 끔뻑거렸다. 저들끼리 잘 놀던 카르얀과 떨거지들이 수건에 땀을 닦으며 제리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리는 의자에서 내려와 카르얀에게 인사를 건네려 했다. 그때, 멀미가 이는 것처럼 눈앞이 이지러졌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응…?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뭐, 뭐…?”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음성에 제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어스는 조금 놀란 눈으로 제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그가 발걸음을 바쁘게 옮겨 제리에게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시어스가 두 명, 아니, 세 명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내 뿌옇게 변했다. 삐-하는 이명도 들렸다. 제리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마력이 증폭됩니다. 체내의 독극물을 배출합니다.]
“콜록….”
눈앞이 흐려져 바로 앞에 뜬 창도 보이지 않았다. 제리는 본능적으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짧게 기침을 했다. 무언가 섞여 나와 손바닥에 잔뜩 묻어났다. 남은 것들은 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흰 옷에 검붉은 얼룩이 묻어났다.
이건…… 설마, 피?
[체력이 고갈되어 정신을 잃습니다.(최대체력:15)]
영문도 모른 채 체력이 순식간에 모두 깎였다. 눈이 감겼다. 난 그냥 앉아서 잘 쉰 것밖에 없었는데…?
[공기 중의 마력을 감지할 수 있게 됩니다. 축하드립니다! ‘마법’을 학습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씨발!”
아니, 미쳤냐! 오늘은 체력 엄청 많이 남아 있었는데, 장난하냐고!
“제리!”
“제리?”
그런 그를 겨우 받아낸 시어스 경의 다급한 목소리와 카르얀의 어리둥절한 음성을 뒤로하고 시야가 암전되었다.
* * *
“제리, 정신 차려봐라. 제리!”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상스러운 욕을 중얼거리고 픽 쓰러진 아이 몸은 시체처럼 차가웠다. 진작 알아차리지 못한 게 놀라울 정도였다. 제리는 시어스의 품에 축 늘어진 채 연신 검은 피를 토해냈다. 손도 못 쓸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시어스는 놀란 영식들에게 손짓해 집에 돌아가라고 명했다. 그리고 그는 제리를 안아들었다. 제리의 주위에서 맴돌던 마력이 불안하게 날뛰고 있었다. 제리는 의식이 없는 중에도 계속 피를 토해냈다. 시어스의 새하얀 의복이 빨갛게 물들었으나, 상관없었다. 제리의 맥박이 지나치게 느렸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말이다.
“숙부님, 그 애는….”
“전하, 호칭에 유의하십시오. 누군가 듣습니다.”
카르얀은 차분히 입을 다물었다. 시어스의 붉은 눈동자는 미약하게 숨을 내쉬는 제리에게로 향해 있었다. 황실 의원에게 제리를 보이는 동안 시어스는 카르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력은 늘 아이를 보호하듯 제리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제리는 시어스가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시어스는 제리 주위의 마력으로 그의 기분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제리가 심기가 불편하면 그 힘 역시 축 가라앉았고, 기뻐할 때면 활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 중심에 선 아이는 제게 무슨 힘이 있는지 자각조차 못하는 것 같았다.
의원은 날이 선 분위기 속에서 진찰을 끝낸 뒤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그는 시어스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말끔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말끔히 처리했다는 건가?”
“아닙니다, 저로서는 더 손 쓸 부분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마 체내의 독을 다 토해내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분은 그냥 기력이 다해 잠든 겁니다.”
독.
시어스의 눈빛이 새카맣게 내려앉았다. 카르얀 역시 생각이 많아보였다. 의원은 의심스런 눈초리에, 다시 한 번 확인하듯 아이의 몸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에서 하얀 빛이 터져 나오며 제리의 몸을 찬찬히 훑으며 올라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무언가 외력이 가해진 듯합니다. 몸이 스스로 토해낸 게 아니라… 마력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의원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리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마력이 빠르게 날뛰었다. 제리가 기분이 좋을 때 보이는 현상이었다. 혹여나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건가 했는데, 아이의 표정에는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설마 이 아이를 감싸고 있는 마력이….’
꼭 자신이 그랬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시어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마력에는 자기의지가 없다. 주인의 의지를 담아야 움직이는 것이 마력이니까….
‘경, 그것도 마법인가요?’
제리가 바람에 휘청거리는 나뭇잎을 경이롭게 쳐다보며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마법이 아닌, 그저 바람일 뿐이라 피식 웃었더니 약이 오른 듯 통통한 뺨이 씰룩거렸다. 제리는 타고난 마력은 풍부한 듯하지만, 아직 제대로 그걸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어린아이였다.
“도대체 얼마나 치명적인 독극물이었기에….”
카르얀은 제 궁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중얼거렸다.
루트 가의 막내아이는 가끔 재미있는 면모를 보이는 꼬마였다. 어린아이답게 제 감정에 솔직한 것도 웃겼고, 가끔 그의 숙부인 시어스에게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것을 보면, 조금 즐거웠다.
왜 하필 이런 어린애가 휘말리게 된 거지? 그는 눈앞에서 사람이, 그것도 무척 어린아이가 피까지 토하며 쓰러지는 꼴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오늘의 간식은 급히 제리만을 위해 내어온 것이라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카르얀은 우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의원은 잠시 눈치를 보다 말을 해둬야 할 것 같아 조그만 목소리로 “…저어.”하고 끼어들었다.
“독은 아주 극소량…이었습니다. 매일 꾸준히 오 년은 복용해야 효능이 서서히 나타나는 독초를 사용한 것 같은데…… 참새 새끼도 이 정도 독을 섭취한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참새 새끼라니, 표현이 과하군.”
시어스가 목을 긁는 소리를 내며 불만스럽게 읊조렸다. 의원은 목을 수그린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역정을 내는 시어스는 정말 비위를 맞추기 힘든 사람이었다. 의원은 두 차례에 걸친 전신 진찰로 마력을 다 소진해 힘이 빠진 몸을 겨우 이끌고 자리를 벗어났다.
시어스는 제리가 독을 토해내어 다행이라고 생각이 되면서도, 그에게 가해진 ‘외력’의 정체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했다.
“숙부님.”
“전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어차피 여긴 저희밖에 없지 않습니까. 네?”
“…….”
새하얀 머리칼이 눈에 띈다는 것도 모르는지, 창 밖에서 고양이를 안은 채 몰래 기웃거리는 4황자도 있었으나, 굳이 그를 지적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차피 4황자 일리야는 아무 생각도 없는 어린애일 뿐이다. 문제는 일리야 뒤의 배후세력이었다.
카이엔 제국은 태양신 옌의 비호 아래 세워진 나라였다. 1대 황제가 바로 옌 디페리우스다. 여성체의 모습을 하고 내려온 태양신 옌은 주위의 소수민족을 통합해 나라를 만들었고, 그의 핏줄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대대로 제국의 모든 황제들은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적안은 자연스레 후계의 자격을 뜻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 대에서는 적안을 가진 이가 단 둘밖에 없었다. 현 황태자인 카르얀 디페리우스와 4황자 일리야 디페리우스. 카르얀보다 세 해 늦게 태어난 4황자가 적안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말에 온 황궁이 떠들썩해졌다.
황비는 4황자를 낳은 뒤의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밝혀졌다. 아직 아이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닥친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자살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리야 4황자 또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 모든 공격은 일리야를 비껴갔고, 그는 무사히 일곱 살의 생일을 맞을 수 있었다.
아이의 뒤를 봐주는 가문은 루트 가, 레이나스 가, 앤더슨 가, 그리고 케펠 가로 총 네 개였다. 황태자 카르얀에 대한 살해 시도도 잊을 만하면 행해지고는 했다. 시어스는 그 배후에 4황자 뒤에 있는 가문이 얽혀 있을 것을 짐작했다. 특히 그는 루트 가를 의심했다. 백작은 평소에도 다양한 약재에 관심을 가지고, 또 직접 그것을 구하러 외국까지 나간다는 말이 자자했다.
그래서 말동무라는 것을 핑계로 네 가문의 아이들을 억지로 얽어두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시어스가 틀렸다. 아이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썩 좋은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제리 루트에게는 죄가 없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다소 어른스럽기는 했지만 아이는 그저 아이였다.
“전하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황태자인 카르얀도, 제법 어른스럽긴 하지만 아직 어렸다. 벌써부터 너무 많은 것을 아는 것은 좋지 않았다.
“숙부님, 역시 이번에도 4황자 쪽입니까? 루트가 아니라면 대체 어떤….”
“전하, 황궁에는 벽에도 귀가 달려 있습니다.”
시어스는 빈틈조차 주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제리가 보고 싶은 건지, 창 밖에서 일리야가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그에 고양이도 덩달아 흔들리며 야옹야옹 구슬프게 울었다. 소란에 제리가 깰지도 몰랐다. 시어스는 창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손짓만으로 커튼을 닫아버렸다.
뒤늦게 루트 가로 보낸 전언을 듣고 달려온 백작은 소매에 핏자국이 선명히 난 채 누워 있는 제리를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이고, 제리…. 백작은 황족의 앞에서 예의를 차리는 것도 망각한 채 망연자실한 얼굴로 제리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그는 부모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일 황태자 시해 시도의 배후에 루트 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아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시어스의 과실이 컸다. 시어스는 숙연하게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제리 루트는 원체 몸이 약한 아이라고 했다.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만 했다. 아픈 티를 내지도 않고, 늘 활기차기에 몸이 약하다는 것을 가끔 잊어버렸다. 지금은 그저 잠든 것이라는 의원의 말에, 백작은 조금 안도한 듯하면서도 가슴이 미어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제리는 아비의 품에 안겨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황실의 문양이 붙은 마차가 출발했다. 카르얀은 착잡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다음 주부터는 제리를 부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무슨 일 났어요?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워?”
“글쎄요, 어린아이가 독을 먹었다는데….”
“황태자 전하의 말벗 중에…. 왜, 그 있잖아요. 제일 작고 예의바른 애.”
높은 사람이 없는 자리라고 시종들이 작은 목소리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를 잃었는지, 모두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마차가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야옹-.
“쉿…….”
장미 덤불 아래 앉은 일리야는 새하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새빨간 눈을 깜빡거렸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었다.
* * *
정신이 들기가 무섭게 띠링, 띠링 하는 효과음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제리는 제 방에 누워 있었다.
‘꽤 오래 잔건가?’
목이 조금 아팠다. 그는 눈앞의 수많은 창들을 무시한 채 작은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안내창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기절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카르얀의 호감도가 무려 15까지 올라있었다.
‘무의식중에 내가 무슨 잠꼬대라도 했나. 아니면 피까지 토하던 내가 너무 불쌍해서 그랬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호감도는 끄떡없던 애였는데…. 하지만 기절한 사이 일어난 카르얀의 심리변화를, 제리가 알아차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리는 떨떠름하게 호감도창을 모두 닫았다.
시종이 제리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백작 부부에게 전했고, 그들은 쏜살같이 달려와 제리에게 질문을 수십 개 퍼부으며 몸 상태를 걱정했다. 백작 부인은 또 눈물을 보였다. 제리는 아직도 그녀가 낯설었으나, 자신을 걱정해 눈물을 쏟아내는 것을 그냥 두고 지켜볼 만큼 매정하지는 못했다.
‘앞으론 준다고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아야겠어.’
황궁에서 나오는 음식이나 디저트들은 모두 입에서 녹아내릴 것처럼 달고 맛있었다. 처음 먹어보는 디저트도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독이 들어 있었다고 생각하니 더는 먹고 싶지 않아질 것 같았다.
다행히 그가 쓰러진 것은 어제로, 한나절 이상을 잠든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며 제리는 멍하게 생각했다.
‘카르얀이나 시어스 경도… 놀랐으려나.’
다시 불려갈 때에는 좀 더 건강해져서 가야지. 다들 걱정했겠어. 능구렁이 같은 시어스 경은 모르겠지만, 카르얀은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열 살짜리니까 분명 놀랐을 것이다. 그 어린애가 언제 피토하는 사람을 봤겠어…?
아침 식사를 한 뒤 정원에 나가보려 했던 제리는, 지금 시간대에는 해가 너무 쨍쨍해 위험하다는 이유로 1층에서 창을 통해서만 정원을 바라보아야 했다.
‘살다 살다 해가 위험하다고 산책을 못 나가네.’
아직도 낯설었다. 하필이면 왜 이렇게 약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제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창틀에 앉은 햇살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나 진짜 심심한데…. 나가고 싶은데….’
차라리 아카데미로 유배를 떠난 형들이 돌아와서 조금만 놀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어린애들마저 절실할 만큼, 제리는 할 짓이 없어 너무나도 심심했다. 창틀에 턱을 얹은 채 속으로 투덜거리던 그의 눈에 황실 마차가 들어왔다. 제리는 기댄 채 엎드려 있던 몸을 급하게 일으켜 창밖을 바라보았다.
‘뭐야…. 나 벌써 불려가는 건가?’
한 대가 아니었다. 하나, 둘, 셋…? 뭐 하러 세 대나…. 마차들이 다가오는 소리에 백작도 나와 보았다. 제리는 마차가 건물 앞까지 다가와 멈춰서기 전까지 초조한 가슴을 끌어안은 채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마차는 제리를 데려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마차에서 내린 황실 시종들이 수많은 물건들을 꺼내어 저택 안으로 날랐다.
“이쪽은 기력 회복에 좋은 지베른 뿌리 차고, 이건 도련님께서 초콜릿 쿠키를 좋아하신다고 하셔서. 그리고 이쪽은 혈액 양을 보충해주는…….”
시종이 바쁘게 입을 나불거리며 각 물품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얼떨떨하게 선물의 산을 훑어보던 백작부인이 제리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이게 다 뭐라니…? 그런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제리는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이 많은 게 모두 제리를 위한 선물이었다.
“모두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
금수저 꼬맹이라 그런지 돈이 썩어 넘치나보네. 다른 건 몰라도 쿠키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저 통을 열면 안쪽에 움직이는 사진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제리는 그 사진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어머. 이게 다….”
계단 옆에 서 있던 시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참, 그리고 당분간은 입궁할 필요도 없을 거란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신난다!
“제리….”
백작 부인이 제리가 안쓰럽다는 듯 머리카락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제리는 기뻐하는 내색 대신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연기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실 마차가 덜컹거리며 저택을 빠져나갔다.
과자나 단 것들, 건강에 좋은 차, 건강 식품, 봉제인형 등…. 돈이 많은 걸 자랑이라도 하는 건지 상자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산처럼 쌓인 것들을 정리하려면 시종들이 조금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닫혀 있던 대문이 끼이익 하고 좁은 틈을 만들었다.
“어?”
제리는 소리가 들린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을 마주쳤다.
“…….”
“…….”
뻔뻔하게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인 일리야는 저택을 슥 한 번 둘러보았다. 빨간 눈이 끔뻑거리는 것을 다들 말없이 지켜만 보았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루트 백작이었다.
“……황자님?”
“응.”
“…….”
응이 아니라, 너 왜 여기에 있냐는 거잖아….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일리야가 고개를 돌려 제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을 건네지도 않고 백작의 뒤에 숨어 있던 제리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멋대로 남의 집에 쳐들어왔으면 용건이라도 말해야 할 텐데.
“황자님, 여긴 어쩌다….”
“…….”
일리야는 대답 대신에 제리만 멀뚱히 바라보았다. 수줍음을 타는 건가? 제리는 어쩔 수 없이 일리야에게로 후다닥 달려가 그의 소매를 슬쩍 잡았다. 아직 어린애라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조차 버거운 모양이었다. 제리는 백작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 친구예요!”
“친구?”
백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친구…?”
‘…아니, 너는 왜 되묻는데?’
제리는 일리야를 황당한 듯 돌아보았다. 일리야는 아몬드형의 눈을 깜빡이며 제리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니 알겠다. 일리야는 지금 놀란 것이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3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8]
“제리. 우리 친구야?”
얜 대체 뭘까. 제리는 4황자를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별것도 안 했는데 호감도가 오르지를 않나, 황궁에서는 또 어떻게 빠져나온 건지, 무작정 대문을 열고 들어오지를 않나. 그리고 애초에 친구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면 왜 찾아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나아, 제리랑 한 약속 지키러 왔어.”
“……아.”
제리는 어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미안, 일리야. 다음엔 둘이서만 놀자.’
“…….”
미안한데 그 약속한 지 하루도 안 지났어….
어린아이답게 참을성이 부족한 모양이다. 나도 그 땐 그랬지. 제리는 일리야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 이맘 때 아이들은 다 귀여우니까.
일리야는 눈을 멍하게 깜빡이다, 제 소매를 잡은 제리의 하얀 손을 내려다보았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9]
또 올랐네. 참 정이 많은 아이였다. 둘이서만 놀자는 말에 집까지 찾아오는 걸 보면 대담한 것 같기도 했고.
“나가서 놀래? 고양이는 안 가져왔지만….”
일리야는 문 쪽으로 몸을 약간 틀었다. 하지만 아직 제리가 바깥에 나가기에는 햇볕이 강했다.
“아니. 나 지금 나가면 안 된대.”
“왜…?”
“나 아프거든. 올라가자.”
제리는 쌍둥이 형들과 놀아주던 경험을 떠올려, 일리야와도 조금 놀아주다가 보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일리야도 마법 동화책을 좋아하면 좋겠다. 얜 황자라서 그런 건 수도 없이 봤으려나? 난 봐도봐도 신기하던데.
“…….”
일리야는 여전히 생각을 알 수 없는 담담한 얼굴로 제리에게 질질 끌려갔다. 두 아이는 금세 2층으로 올라가버렸다. 잠시의 침묵 끝에 백작은 혼란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일단 4황자가 사라져서 난리가 났을 황궁에 기별을 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