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_4
“으음, 고양이는 자꾸 도망쳐서… 그 대신에 털이라도 조금 가져왔어.”
“아… 응.”
필요 없으니 너나 가져.
“소중히 간직해…?”
일리야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당부했다.
“…….”
이걸 소중히 간직하라고…? 제리는 진실의 입 저주 때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문 채, 일리야가 고양이 털을 뭉쳐 만든 작은 공을 받아들었다. 정말 부드러운 쓰레기였다. 털공 표면을 손가락으로 슬쩍 만져보자 일리야의 눈이 나른한 고양이처럼 가늘어졌다.
그래서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제리 역시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이렇게 털을 뭉쳐 만든 공까지 가지고 다닐 만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그는 일리야를 향해 예의상 웃어주었다.
“읏차.”
제리는 가장 효과가 화려한 동화책들을 몇 개 뽑아들어 따뜻한 햇볕이 드는 창가에 내려놓았다. 하도 창가에 엎드려 책을 읽다시피 하니, 아예 그곳에 폭신한 러그도 깔아두었다. 일리야는 제리를 따라 그 위에 조심스레 앉았다.
“제리, 뭐 하는 거야…?”
책을 펼치는 제리를 보며 일리야가 물었다. 뭘 하냐니, 놀아주려는 건데…. 일리야는 밖에서 고양이를 찾아 뛰어노는 것만이 놀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더워서 밖에 나가면 안 돼.”
“그러면 제리 또 누워 있어?”
“…….”
“피도 났잖아…….”
아팠어? 일리야는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제리는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걸 언제 본 거지?’
카르얀뿐만 아니라 일리야도 굉장히 놀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리는 용사가 용을 물리치는 다소 폭력적인 동화책을 슬쩍 빼 옆으로 밀어놓았다. 피는 나오지 않지만 용이 괴로워하는 표정이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아니고, 좀 어지러울 뿐이야. …아, 이거 재밌어.”
글을 읽지 못할 때에도 종종 펼쳐보곤 했던 책이었다. ‘흰 고양이와 마녀의 모험’은 고양이와 마녀가 모험을 떠나 딸기 샌드위치에 필요한 재료를 모아오는 내용이었는데,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마녀가 마법을 부리는 장면이 굉장히 화려하고 고양이가 귀여웠다.
제리는 작은 쿠션에 등을 기댄 채 일리야에게 옆에 와 앉으라고 손짓했다. 일리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제리의 말대로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시녀 둘이 방문 근처에 선 채로 둘을 걱정스럽다는 듯 지켜보았다. 일리야는 심드렁한 얼굴로 제리가 들고 있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꼬마 마녀 로베리스와 하얀 고양이 댄은 집, 짚….”
“깊은.”
“……깊은 숲 속에서.”
제리는 제국어에서 지와 기를 가끔 헷갈리고는 했다. 따지자면 이 세계에 없는 언어까지 할 줄 아는 자신이 대단한 건데, 그걸 알아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본적인 글자를 잘못 읽어 그걸 꼬맹이한테 지적까지 받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제리는 좀 더 집중해 글자를 또박또박 읽었다. 일리야는 책 위를 걸어 다니는 작은 고양이에게 손을 가져다대었다. 하지만 만져지는 것은 아니라, 그대로 물체를 통과했다. 고양이를 좋아하나봐. 제리는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왜 웃어…?”
“그냥! 딸기 샌드위치를 먹고 싶어. 고양이 댄이 말했습니다. 마녀는 친구인 댄에게 샌드위치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페이지를 넘기자 밤하늘이 둘의 주위를 감쌌다. 일리야는 눈살을 작게 찌푸렸고, 제리는 늘 그렇듯 넋을 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댄이 언제 친구가 된 거야…? 고양이는?”
“고양이가 댄이야.”
“…으응?”
“바보. 듣고는 있는 거야?”
“…….”
일리야는 처음부터 책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오히려 움직이는 그림책을 신기해하는 제리가 더 신기하다는 듯, 그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이런 게 신기해?”
그제야 일리야가 흥미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제리가 고개를 돌렸다.
“일리야는 안 그래?”
이상한 애네. 진짜 신기한데…. 높디높은 밤하늘, 주위에 구름까지 떠다니는 경험은 평소에 쉽게 겪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제리도 마력을 다룰 줄 알잖아? 이런 건 그냥 수식의 나열일 뿐인데….”
“……내가? 아냐, 난 그런 거 못해.”
제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는 마력을 담을 수 있다는 나이인 일곱 살이 되지도 않았다. 시어스도 가끔 제리를 보며, 아직 마력을 다루기엔 어린 모양이구나, 하고 말하곤 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못해.”
“할 수 있어…….”
일리야는 고집스런 얼굴로 말했다.
‘니가 뭘 알아.’
그야, 언젠간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안 그래도 아직 나이가 안 된대서 짜증나는데. 난 사실은 어린애가 아니라고. 제리는 떨떠름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진짠데….”
일리야는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문 제리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무게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살짝 얹어둔 손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일리야 디페리우스가 마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마법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마법+10]
[최초 세례자 : 일리야 디페리우스]
‘뭐야, 이게?’
제리는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일리야가 제게 마력을 불어넣었다는 건… 일리야도 마법사라는 소리인가? 최초 세례자는 무슨 뜻이지?
“일리야. 너 몇 살이야?”
“일곱 살….”
“…….”
제리보다 한 살 많았지만, 이제 와서 형이라 부를 마음은 없었다. 원래 이 또래 아이들은 두세 살까지는 다 친구로 퉁칠 수 있는 거니까.
“일리야 황자님.”
익숙한 목소리에 제리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시어스 경이 서 있었는데, 약간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어? 시어스 경?”
제리의 중얼거림에도, 일리야는 문 쪽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는 멋대로 제리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흑단 같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시어스가 곤란하다는 듯 일리야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그를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일리야에, 시어스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얕게 내쉬었다. 그리고 제리에게 말을 걸었다.
“제리, 몸은 좀 괜찮느냐?”
“네에, 뭐….”
그땐 몰라도 지금은 괜찮았다. 제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만지작거렸다. 제리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던 일리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제리에게 말을 걸었던 시어스를 바라보았다.
“황자님.”
시어스는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일리야를 불렀다. 하지만 일리야의 표정엔 미동조차 없었다.
“몰래 궁을 빠져나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몰래 나온 거라고? 그러고보니 일리야는 혼자였다. 주위에 호위도, 시종 하나도 붙이지 않은 채 문을 열고 당당히 들어왔단 말이다.
“일리야. 너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제리가 물었다. 일리야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난 그냥 마차 타고 왔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말간 눈을 깜빡인다. 시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곧장 말의 꼬투리를 잡았다.
“몰래 타셨잖습니까.”
“몰랐던 사람이 바보인 거지….”
왜 나한테 그런담. 일리야가 제리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시어스의 미간 주름이 더 짙어졌다. 능구렁이 같은 시어스를 환장하게 만드는 사람은 일리야가 유일했다. 제리는 일리야가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벤트 발생! ‘궁정 마법사, 시어스 뉴어를 스승으로!’]
…뭐?
Quest. 궁정 마법사, 시어스 뉴어를 스승으로!
축하합니다. ‘최초 세례자’의 세례로 인해 마법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마력을 제대로 활용할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마침 눈앞에 마땅한 사람이 서 있군요. 세상에, 당신과 안면도 있는 사람입니다. 한 번 도움을 요청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성공 보상 : [관계]궁정 마법사의 제자, [능력치]마법+5
실패 시 : [상태]일주일 간 기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