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29)

#01_5

제리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편지를 날려 쓴 뒤 꼼꼼하게 포장한 잉크병까지 첨부해 아카데미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곧 시험기간이니 힘내라는 거짓말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그리고 한정품 잉크 하나는 백작에게, 그리고 백작부인에게는 하얀 손수건을 선물했다. 부부는 감동받은 눈으로 막내아들을 바라보았다. 또 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모양이다. 제리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두 사람의 몫을 안 샀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런데 하나가 남네?”

그는 시어스의 몫으로 산 잉크병을 데굴데굴 굴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려 수확제 한정 잉크인데, 그 능구렁이 스승에게 주기에는 너무 과분한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내일 또 그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혈압이 올랐다.

“버릴까.”

아니, 그러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냥 일리야한테 줘버릴까….”

하지만 일리야가 펜을 잡은 장면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제리는 고양이를 쫓거나, 고양이와 놀고 있거나, 아니면 잔디밭 아무데나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하던 일리야밖에 본 적이 없었다. 황자나 되어놓고 공부는 죽어도 하지 않는 듯했다.

카르얀, 그 괘씸한 모함꾼에게 줄 선물은 백작과 손을 잡고 가서 샀다. 검을 받으러 나왔다고 했으니, 검 손질에 필요한 도구를 사서 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백작은 카르얀에게 선물한다는 말에 가게에서 가장 고급인 물건으로 집어 들었으나, 백작이 한눈을 팔던 사이 제리는 그 물건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두고 점원에게 물었다.

‘여기서 제일 안 좋은 게 뭐예요?’

당돌한 꼬마의 말에, 점원은 활시위를 손질하다 말고 픽 웃으며 대답했다.

‘뭐? 우리 가게는 좋은 물건만 판단다, 꼬마야. 안 좋은 건 팔지 않아.’

장사꾼의 말에 제리는 그나마 초라해 보이는 손질 세트로 집어 들었다. 잉크병 다섯 개가 든 종이봉투만으로도 제리는 벅찼기에, 무기 상점에서 산 물건은 백작이 들어주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마자 호감도창이 갱신되었다. 선물을 받은 세 형제들이 더 이상 올라가지도 않는 호감도를 또 올리려 시도한 것이다. 저녁쯤 되면 답장이 올 것 같았다. 아니면 셋 중 하나가 아카데미를 탈출하려다 백작에게 전령이 날아올지도 모른다.

“제리, 아침에 쿠키를 구웠어. 입천장이 까지지 않는 아주 부드러운 쿠키란다. 양이 많으니 가지고 가서 나누어 먹으려무나.”

제리는 피를 토했던 날 이후로 황궁에서는 물조차 얻어 마시지 않았다. 때문에 백작 부인은 아이가 먹을 간식을 조금씩 들려 보내는 편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오늘은 양이 굉장히 많았다.

“네, 감사해요!”

제리는 팔을 벌린 그의 어머니를 짧게 안았다 놓았다. 하지만 이 쿠키를 나누어 줄 사람은 일리야밖에 없다. 일리야한테 많이 먹으라고 해야지. 그는 시어스가 무슨 말을 해도 부스러기 하나조차 주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마차에 올랐다.

그렇게 도착한 황궁,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고양이가 달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시어스는 아직 마중을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늘에 앉아 조금 기다리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양이의 뒤를 쫓아 불쑥 튀어나온 일리야가 제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리야, 안녕!”

“안녕, 제리….”

“이리 와봐, 오늘은 줄 게 있어.”

“…뭔데?”

일리야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다가왔다. 또 머리카락에 꽃잎이 붙어 있었다. 도대체 어디를 어떻게 기어다니길래 매일 머리에 나뭇잎이나 꽃잎을 붙이고 다니는지 알 수 없다. 하얀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내자 빨간 꽃잎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까지 해준 제리는 품 안의 봉투에서 일리야를 위해 샀던 고양이 낚싯대를 꺼냈다.

“수확제 선물이야!”

“……나?”

“응, 네 거라니까. 안 받아?”

일리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다시 제리가 내민 낚싯대를 내려다보다 합, 하고 숨을 멈췄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0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19]

‘오….’

퀘스트 보상이 아주 쏠쏠했다. 한 번에 호감도가 10이나 오르다니.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받아.”

“…이게 뭔데?”

“네 고양이에게 써봐. 앞에서 이렇게, 마구 흔들면 고양이가 아주 좋아해.”

일리야의 고양이는 이름이 고양이었다. 왜 이름을 그렇게 지었냐는 말에 일리야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냥 귀찮아서임을 제리는 금세 알아차렸다.

“그런데 제리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고양이랑… 말 해봤어?”

나도 그거 알려줘…. 일리야는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린애다운 발상이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제리는 일리야의 말을 무시한 채 씩 웃었다. 일리야는 낚싯대를 몇 번 흔들어보다 다시 제리가 들고 있는 봉투에 관심을 기울였다.

“다른 사람 줄 것도 있는 거야?”

“황태자 전하 드릴 거랑, …스승님 거.”

어제 일을 생각하면 시어스에게는 정말 주기 싫었지만, 달리 줄 사람이 없어서 가지고 온 것이다. 일리야는 떨떠름한 표정의 제리를 바라보다 물었다.

“카르얀 형님한테는 뭘 주는데…?”

“검을 손질하는 도구래. 하지만 나도 잘은 몰라.”

그냥 필요할 것 같아서 산 것뿐이야. 제리는 말을 덧붙였다. 어제 일을 생각하면 카르얀도 아주 괘씸했지만,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생각해보니 카르얀보다 시어스가 백배나 더 얄미웠다. 오늘도 자신을 놀릴 생각에 신이 나 있을 생각을 하니 몸이 더워졌다.

[스트레스가 1만큼 증가합니다.]

안 돼, 진정하자. 아직 얼굴도 안 봤는데 벌써 스트레스를 올리면 안 된다.

“으음….”

납득하는 것도, 얼버무리는 것도 아닌 이상한 탄성을 내뱉으며 일리야는 붉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고양이를 따라가는 대신에 제리의 옆에 앉아 그가 시어스를 기다리는 것을 함께 기다려주었다.

선물을 받았을 때 그리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의외로 마음에 든 모양인지 일리야는 계속 낚싯대를 흔들어댔다. 허공에 낚싯대를 휘두르니 끝에 달린 방울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딸랑. 바람에 나뭇잎이 사부작거리는 소리와 방울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 * *

“…정말 내게 주는 거냐?”

“네, 뭐….”

시어스는 예상도 못했다는 듯 잠시 굳었으나 이내 시원하게 웃으며 제리의 머리를 한 번 툭툭 쓰다듬었다.

“고맙구나.”

‘그래, 고마워해야지.’

무려 한정판인데. 제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슬쩍 들어올렸다. 시어스는 당장 오늘 서류를 결재할 때부터 써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런 사정까지는 제리의 알 바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일리야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옆에서 낚싯대를 흔들고 놀고 있었는데, 어느새 고양이를 발견해 쫓아간 건가? 하지만 일리야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또 사라지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에, 제리도 이내 신경을 껐다.

선물을 받은 이후로 갑작스레 기분이 좋아진 시어스는, 제리에게 아주 기초적인 마력 운용법을 가르치다 말고 씩 웃었다.

“제리, 이 스승이 직접 만든 수식을 하나 알려주랴?”

“뭔데요.”

제리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실없는 소리를 하는 게 틀림없었다. 시어스는 심드렁한 표정을 하는 제자를 내려다보며, 직접 보여주는 게 더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여길 보렴. 그는 제리의 시선을 손으로 모은 후, 두 손을 포개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았던 손을 다시 펼치자, 그 안에 있던 잉크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금 제 선물 버린…?”

제리가 황당한 얼굴로 묻자, 시어스는 또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곧 그의 오른손에 잉크병이 갑자기 생겨났다. 제리의 입이 쩍 벌어지자 시어스의 붉은 눈이 휘어졌다.

“뭐예요? 그거 뭐예요?”

제리는 시어스가 마법만 부렸다 하면 눈을 빛내며 설레어했다. 이러니 더 가르칠 맛이 나는 것이다.

“아주 작은 것만 아주 잠깐 보관했다 꺼낼 수 있단다. 내게는 20초가 한계였으니… 제리 네게는… 1초밖에 안 되려나?”

“…….”

왜 저 인간은 아주 조금 호감이 생기려 하면 스스로 그 기회를 내팽개치지…? 제리는 힘없이 웃으며 몰래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그래도 꽤나 유용해.”

그는 빳빳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제리에게 건넸다.

“수식이란다.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마려무나. 특별히 네게만 알려준 것이니까.”

나한테만? 제리는 뺨을 붉힌 채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리고 종이를 활짝 펼쳐보았다.

“…….”

“왜 그런 표정을 하니, 제리. 무척 간단하지 않느냐.”

종이 한 페이지를 꽉 채우다시피 한 수식을 읽으며 제리의 얼굴이 침침해졌다. 아주 기초적인 것들을 엮은 거라 쉽기는 한데… 너무 길잖아. 전혀 간단하지가 않았으나, 일단 제리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식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던 그때, 안내 창이 떠올랐다. 마법을 습득했다는 표시였다.

[인벤토리(1칸) 마법을 습득했습니다.]

“…인벤토리?”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11세 생일이 지난 이후부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직은 나이 제한이 걸려 사용할 수 없지만, 제리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굉장히 유용할 것 같았다. 물건을 마음대로 집어넣고 마음껏 꺼낼 수 있다는 말이니까. 

시어스는 심드렁하던 제리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종이를 소중히 접는 것을 보며 굉장히 뿌듯해했다. 그는 계속 수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시어스의 말에 제리가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수풀을 헤치고 일리야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제에리이.”

말꼬리가 늘어지는 일리야는 머리카락이 온통 흐트러져 하얀 꽃까지 덕지덕지 붙은 채였다. 그는 제리가 고개를 돌리자 빠르게 총총 뛰어왔다. 대체 어디를 다녀온 건지 손에는 풀물까지 들어 있었다.

“나도 줄 거 있어….”

“어?”

그는 다른 쪽 손에 들고 있던 하얀 화관을 보여주었다. 시어스는 입꼬리를 샐쭉 끌어올렸다. 4황자가 제리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처음 생긴 또래 친구이니 더욱 애틋할 것이다.

“잠시만 있어봐.”

그는 직접 화관을 제리의 머리에 얹어놓았다. 어린아이의 손으로 엮은 화관은 다소 어설펐으나 그럴듯한 모양새는 갖추고 있었다.

‘아니 내가 무슨 이 나이에 화관 같은 걸….’

쑥스럽잖아. 제리는 본인이 여섯 살로 보인다는 것을 망각한 채 무념무상으로 멍하게 앉아 있었다. 일리야는 제리의 감상을 기다리는 듯 야무지게 입술을 다문 채 제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 마음에 들어, 일리야.”

어울리고 말고를 떠나, 직접 만들어 온 마음이 예뻤다. 제리는 진심으로 활짝 웃으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응…!”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3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22]

일리야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일리야라도 기분이 좋으면 된 것이다. 고작 이걸 만들겠다고 하얀 손에는 풀물까지 들고 머리카락도 엉망인 채 나타난 걸 생각하니 좀 귀여웠다.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끝낼까?”

“스승님, 저 카르얀… 전하께 줄 선물도 있는데.”

제리는 종이봉투 안에서 네모난 물건을 꺼냈다. 쿠키도 깜빡 잊고 있었다. 봉투를 뜯어 일리야에게 안겨주자, 일리야는 쿠키와 제리를 번갈아보다 입안에 한 조각을 넣고 와작 씹었다. 반쯤 감겨 있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23]

그래, 맛있냐.

“이거 전하께 전해주세요. 제가 줬다고 꼭 말해줘야 해요. 스승님이 줬다고 거짓말하면 안 돼요.”

“뭐? 내가 왜 거짓말을….”

“스승님 거짓말쟁이잖아요.”

맞아…. 일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어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4황자를 바라보았지만 일리야는 시어스는 쳐다보지도 않고 열심히 쿠키를 오독오독 집어먹었다.

카르얀에게 줄 선물을 시어스에게 내밀자, 시어스는 그걸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로 멀뚱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안 받지? 제리의 표정이 심각해질 때 쯤,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직접 전해주지 그러냐.”

“…직접요?”

“지금쯤이면 연무장에 있을 거란다. 잠시 보고 가는 건 어떠니.”

‘진짜 귀찮게 오라가라하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지고 온 김에 빨리 주고 털어버리는 게 나았으니까. 제리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머리 위에 얹힌 화관이 머리카락에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제리는 화관을 손으로 고쳐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심히 쿠키를 집어먹고 있던 일리야가 제리의 손을 슬쩍 잡았다.

“꼭 지금 가야 해…?”

쿠키 때문이구나.

“너 혼자 다 먹어도 돼. 집에 더 많거든.”

일리야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작게 저었다. 입가에 붙은 쿠키 부스러기가 툭 떨어졌다.

“…나는 거기 못 간단 말이야. 조금만 더 있다가 가.”

“왜 못 가는데?”

“형님이 별로 안 좋아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낚싯대를 허공에 흔들었다. 방울소리가 갑자기 애처롭게 들렸다.

‘둘이 의문의 적대 관계라 그런 건가?’

하지만 일리야는 카르얀을 그렇게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꼬박꼬박 형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확실했다. 카르얀은… 잘 모르겠지만. 제리는 잠시 생각하다 시어스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시어스는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이럴 때만 모른 척을 하는 게 얄밉기 그지없었다.

“괜찮아, 일리야. 같이 가자. 금방 주고 나오기만 할 거야.”

“제리, 난….”

“일어나.”

제리는 일리야의 손을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일리야는 영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제리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시어스도 이번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린 제리에게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을 설명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두 아이를 이끌고 연무장을 향해 걸었다.

카르얀은 열심히 훈련 중인 것 같았다.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렸다. 제리는 일리야를 힐긋 바라보았다. 열 살인 카르얀은 늘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데 비해 일곱 살 일리야는 아주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원래 황태자만 저렇게 바쁘게 사는 건가?

“스승님….”

그는 일리야 몰래 시어스를 불렀다. 그리고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해 시어스가 허리를 숙이게 했다. 제리는 시어스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태자 전하는 언제부터 검술 수련을 시작했어요?”

“왜, 너도 하고 싶느냐? 욕심도 참 많지….”

“아, 아니….”

“물론 배우고자 하는 욕심은 많을수록 좋지만, 제리…. 네겐 아직 검술은….”

시어스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제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 나도 그건 안다고! 예전에도 들은 말이라고! 시어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제리의 아픈 상처를 후벼팠다.

“농담이고, 딱 너만할 때부터 시작했던 것 같구나.”

일리야가 어려서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이 때문이 아니라면…?

“……그러면, 일리야는요?”

“4황자님은 힘든 건 싫다고 관뒀다.”

“…….”

“무려 사흘 만에 도망치셨단다.”

오래 버텼지, 꽤나. 한 시간 만에 사라지실 줄 알았는데 말이다. 시어스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 한결같다.’

제리는 멍하게 앉아 낚싯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일리야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일리야는 그냥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천하 태평한 꼬마였다.

카르얀의 훈련을 방해할 수가 없었기에, 그들은 여기 앉은 채 훈련이 끝나기를 조금 기다려야 했다. 제리는 검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저 나이 때 검술 선생의 공격을 모두 맞받아친다는 건 대단하다는 건 알았다. 멀리서 보니 꼭 춤추는 것 같다. 제리는 흐뭇한 얼굴로 황태자의 재롱을 구경했다.

일리야는 딴생각을 하다가, 눈을 빛내며 연무장을 내려다보는 제리를 보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제리, 뭐 해?”

“구경.”

“왜…?”

제리는 잠시 생각하다 카르얀이 귀여워서, 라는 말을 조금 돌려 표현했다.

“어, …멋있으니까?”

“왜 멋있는데?”

귀찮지만 참아야 했다. 원래 어린아이들은 질문이 많은 법이다. 그때마다 꼬박꼬박 대답해주는 것이 어른 된 사람으로서의 도리였다.

“내가 못하는 걸 할 줄 아니까? 나는 어린이용 목도도 잘 못 휘두르거든. 형들 검술 선생님이 내게 관두라는 소리를 돌려서 하더라.”

“어떻게 돌려? 널 막 돌렸어?”

“무슨 소리야. 말을 돌렸… 아냐. 내가 아기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아무튼 이건 좀 더 크면 알게 될 거야.”

“그래서 검술은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냐니.

“관뒀어.”

그 말에 시어스가 풉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가, 제리의 시선에 고개를 돌려 모른 척을 했다.

“아….”

그제야 납득한 일리야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못하는 걸 할 줄 알아서 멋있다고…? 그는 제리의 말을 몇 번 중얼거리더니 이내 입을 닫아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훈련이 끝난 카르얀이 세 사람을 발견했다. 일리야를 보고는 조금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아주 찰나였다.

“제리, 어쩐 일이야?”

“수확제 선물이에요.”

제리는 어제 백작과 가서 함께 산 검 손질 세트를 카르얀에게 건넸다.

[카르얀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0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31]

카르얀은 제리가 건넨 선물을 받아들고는 눈매를 조용히 휘었다. 제리가 본 사람 중 어린아이인 주제에 가장 미인인 그는, 기뻐하는 것마저 카르얀답게 기뻐했다.

“고마워, 제리.”

제리는 헤헤 웃었다. 어제 자신을 소매치기라고 모함하던 카르얀을 이제 그만 용서하기로 했다. 아직 어린만큼 생각도 짧으니 그럴 수 있었다. 어른인 자신이 이해해주는 수밖에!

“그, 내내 마음에 걸렸어. 네가 화가 덜 풀린 것 같아서 말이야.”

잘 알아봤네. 제리는 무슨 말을 하는 대신에 입을 다물고 그저 웃었다. 카르얀은 제리의 화가 완전히 풀렸다고 판단했는지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일리야는 제리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

제리는 일리야를 돌아보았다. 그때, 아래에서 검술 선생으로 보이는 자가 카르얀을 불렀다. 시어스는 제리에게 잠시 기다려보라고 한 뒤 카르얀과 함께 다시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일리야는 고집스럽게 다문 입을 한 채로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형제 간에 대화가 하나도 오가지 않았다.

“일리야?”

“…….”

일리야는 대답 대신에 손에 든 낚싯대를 힘없이 흔들거렸다.

“왜 그래?”

“……형님은 형님 선물이 맞는데, 이건 고양이 거 같아서….”

“아….”

그래서 섭섭했나? 그래도 딱 보자마자 이건 일리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리는 잠시 침묵하다 소근거렸다.

“일리야, 이건 황태자 전하께는 말하지 마. 너한테는 쿠키도 줬잖아.”

“…….”

“그러니 네 선물은 두 개야. 네가 더 좋은 거라고.”

“……!”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3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26]

낚싯대를 흔드는 손길에 아까와는 다르게 신남이 묻어났다. 방울 소리가 더 세차게 들렸다. 네게는 쟤보다 더 좋은 걸 줬어. 쟤한테는 비밀로 해야 한다? 그 말은 마법의 문장이었다. 특별 취급을 받은 기분이 들고는 하지. 제리는 일리야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얼마 후, 시어스 경을 대동하고 말끔한 얼굴로 올라온 카르얀은 제리에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내가 좀 기다리기는 했지. 제리는 진실의 입 때문에 얼마 안 기다렸다는 빈말을 할 수 없어, 그저 밝게 웃었다.

“제리, 수확제 축제가 나흘째 되는 날, 혹시 시간 돼?”

카르얀이 물었다. 수확제는 성대한 행사이니만큼, 내일 모레부터 시작되어 일주일 동안 행해진다. 제리는 시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시간은 넘쳐나지만, 제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허락을 해야 놀 수 있었다. 시어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된대요.”

“그럼 그날 뱃놀이를 나가자.”

“어….”

그건 괜찮기는 한데, 아직도 소매를 잡고 놓지 않는 일리야가 신경쓰였다. 제리가 일리야를 힐끔거리자, 카르얀은 일리야도 함께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다행이야, 그렇지? 제리는 씩 웃으며 일리야를 바라보았다.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저 얼굴에 묻어나는 감정을 읽는 능력이 생긴 제리는 일리야가 굉장히 들떴음을 알아차렸다.

“아까는 말이 끊겼었네. 어제 정말 미안했어.”

에이, 아니요. 별 거 아니었어요….

[패시브 스킬(진실의 입)이 발동됩니다.]

“아, 어젠 좀….”

“…….”

“푸흑.”

시어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고, 황태자가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제리는 상황을 수습하기보다는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스, 스승님. 저 집에 가야 해요. 데려다주세요….”

제리는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들었으나, 시어스가 몸을 돌려 어깨까지 떨며 웃고 있었다. 지금 원흉이 누군데 웃어…? 저주가 해제될 날까지는 무려 4년이나 남았다. 제리는 오늘도 시어스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 * *

밤이 되면 까만 하늘에 화려한 불꽃이 수놓아지고, 낮에는 새하얀 꽃비가 내린다. 밤늦게까지 거리가 떠들썩했고, 사람들은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며 그들의 인연과 손을 잡고 춤을 췄다. 수확제가 열리는 동안, 궁정 마법사들이 모두 축제에 동원되기 때문에 그동안은 수업도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집에서 푹 쉬려무나.’

‘…네?’

‘놀러나가도 좋고.’

그걸 수확제 전날이 되어서야 알게 된 제리는 배신감을 느꼈다. 매일 갈고닦지 않으면 실력이 녹슨다던 시어스는, 때로는 휴식도 필요한 거라며 말을 바꿨다. 그렇게 제리는 일주일 간 강제로 휴식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이토록 무료한 거였나?’

제리는 시어스에게 마법을 배우기 전의 생활을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수확제 때문에 잠시 외출한 형들은 제리를 데리고 축제에도 다녀왔다. 제리도 분위기에 취해 축제 음식을 야금야금 받아먹다가 어젯밤 배탈까지 나서 밤새 끙끙 앓았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니 상태창 가장 아래쪽에 빨간 글씨로 새겨져 있던 ‘배탈’ 글씨가 사라져 있었다. 아무리 몸이 약하다 해도 자가 치유력은 정상적인 모양이었다. 외출 시간이 다해 아카데미로 돌아간 형들에게는 자고 일어나니 괜찮다는 편지를 간단히 적어 보냈다. 걱정을 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오후 내내 침대에 엎드린 채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도련님, 친구 분이 찾아왔어요.”

“어?”

나 친구 없는데?

“제리….”

“어?”

“어머, 밑에서 기다리시면 되는데….”

그녀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은 일리야였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리야?”

제리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일리야는 보기 드물게 단정한 머리를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어떻게 왔어? 누가 데려다줬어?”

“그냥 나왔어.”

“아무도 안 잡아?”

“응… 안 보였을 거야.”

“……?”

안 보인다니? 아무튼 허락 없이 나왔다는 소리였다. 말이라도 하고 나오지…. 워낙 잘 싸돌아다니는 애라 아직까지는 없어졌다는 것도 모르려나. 제리가 대놓고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일리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면 안 돼…?”

“아니, 아냐. 마침 심심했어.”

“그럼 나가자, 제리! 지금 나가면 불꽃놀이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도 몰라….”

“응? 나가자고?”

어제도 나갔다 와서 오늘도 나가면 피곤할 것 같은데. 그리고 내일은 황궁에도 가야 하고….

“제리 또 아파…?”

“…….”

“……많이 아파?”

일리야는 시무룩해보였다. 여기까지 온 일리야를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잠시 생각하던 제리는 “그럼 조금만.”이라고 약속을 했다. 너무 지쳐 걸어서 돌아오지 못할 것을 대비해 시종 한 명까지 대동하고 거리로 나왔다.

광장에는 가판대가 여러 개 들어섰고,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손에는 잡히지 않는 마법 꽃비까지 내렸다. 일리야는 제리가 마법적이고 시각적인 자극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손을 뻗어 꽃잎을 잡으려 하는 제리를 멍하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제리는 꽃비를 고작 마법이란 이유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마법사들의 갈린 체력과 영혼이었다. 시어스가 수확제 전날 혀까지 차며 ‘또 영혼까지 갈리겠군.’이라 중얼거리던 것을 들은 후라, 더 즐거웠다.

‘내일 뱃놀이를 할 때 스승님도 나오시려나?’

영혼까지 갈려 핼쑥한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었다. 제리는 순수함을 가장한 얼굴로 그를 마음껏 비웃어줄 것을 다짐했다. 제리가 입을 가린 채 키득거리자, 일리야도 덩달아 즐거운 듯 눈이 가늘어졌다.

한편, 어린아이끼리 나온 것은 제리와 일리야뿐이었다. 광장에, 그리고 건물 옥상에 앉은 사람들이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기다렸다. 제리는 어제 형들이 사다주었던 축제 음식들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을 사와 시종과 일리야의 손에 쥐어주었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27]

선물을 하나 할 때마다 호감도가 꼬박꼬박 오르면서, 겉으로는 태가 하나도 나지 않는 게 나름 귀여웠다. 감정 표현을 하는 게 쑥스러운 모양이다. 일리야는 제리가 손에 쥐어준 작은 과자조각을 한 입에 쏙 넣으려다 제리에게 저지당했다.

“일리야, 그거 그냥 먹는 거 아니야.”

“……?”

일리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쿠키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먹는 게 아니면 왜 사온 건지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두 아이를 지켜보던 시종이 작게 웃으며 아이들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도련님들, 이건 내일 운을 점쳐주는 도구예요. 가장 쉽게 접할 수 있고, 또 재미로 사보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죠. 자, 어디 도련님도 해보세요.”

“…….”

내가 샀는데 생색은 왜 네가 내는 거지?

“운?”

일리야가 작게 되물었다. 시종은 직접 보여주기 위해 쿠키의 양쪽을 잡고 반으로 갈랐다. 그러자 안에서 하얀 쪽지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딸려 나왔다. 그는 쪽지에 쓰인 문구를 읽어주었다.

“이봐, 뭘 기대한 거야…? 이건 그냥 쿠키라…고…….”

“…….”

하필 뽑아도 그런 걸 뽑다니. 제리가 대놓고 측은하다는 표정을 짓자, 시종이 머쓱하게 얼굴을 긁으며 쪽지를 구겨 주머니 속에 쏙 감췄다.

“……보통은 좋은 말이 더 많아요. 행운을 빌어준다든가, 뭐, 그런?”

제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제 제 쿠키에서는 ‘특별한 누군가가 나타날 것입니다.’라는 쪽지가 나왔다. 형들의 것에서도 운을 빌어주는 문구가 나왔고 말이다. ‘그냥 쿠키라고.’라는 말은 처음 봤다. 제리가 연신 키득거리자, 시종은 얼굴까지 새빨개져 이제 도련님들도 따라 해보라며 말을 돌렸다.

바삭, 일리야는 무심한 표정으로 쿠키를 부러뜨렸다. 제리는 그의 것에서는 무슨 말이 나왔을지 궁금해 일리야에게 조금 더 붙어 앉았다.

[시간이 다 해결해 줄 테니, 인내를 가지세요.]

“인내…?”

뜻을 이해할 수 없는지 일리야가 고개를 들어 제리를 바라보았다. 제리는 작게 웃으며 일리야가 이해하기 쉽게 조금 풀어 설명해주었다.

“참고 기다리라는 뜻이야.”

“……왜?”

“그건 네가 나중에 크면 다 알게 돼.”

제리는 짐짓 어른스럽게 으름장을 놓았다. 시종이 고개를 돌려 웃음을 참았고, 일리야는 멍한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으으음, 으으으음…….”

일리야는 제 것에서 나온 쪽지의 내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차피 신빙성도 없고, 재미로 하는 건데 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지. 하긴, 일리야는 정말 참을성이 없지.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는 성격이잖아. 제리는 작게 키득거렸다.

“네 건?”

“응?”

“네 것도 볼래….”

“아… 그래.”

제리는 쿠키를 반으로 갈랐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종이를 읽은 뒤 제리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조심해!]

“…….”

제리는 주위를 슬쩍 한 번 돌아보았다. 썩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원래 포춘쿠키는 재미로 사보는 것인 만큼 신빙성이 없었다.

“…….”

하지만 괜히 기분만 나빠졌다. 제리는 일리야가 내용을 보지 않게 종이를 손에 넣고 꽉 쥐었다.

“도련님, 뭐가 나왔어요?”

“…잘못 넣었나봐.”

그래도 축제인데, 이왕이면 좋은 말만 넣어주지. 괜히 사람 기분 찝찝해지게 이런 쪽지를 넣다니….

“도련님, 뭐가 잘못됐어요?”

“불꽃놀이 빨리 했으면 좋겠다! 어제 진짜 예뻤는데!”

제리는 밝게 웃으며 구긴 쪽지를 옆에다 슬쩍 버렸다.

“…….”

일리야는 계속 눈치를 보다 제리가 버린 종이를 주워 몰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얘기를 나누던 사이, 꽃비가 그치고 해가 완전히 넘어갔다. 조금 더 기다리자, 완벽하게 어두워진 하늘에 마법사들의 영혼과 황궁의 예산이 펑펑 터졌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제리는 넋을 놓고 다른 사람들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28]

“……?”

제리는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일리야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에는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29]

일리야?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30]

“…….”

펑! 귀를 울리는 소리를 내며 터진 폭죽이 하늘에 아름답게 수놓아질 때마다, 일리야의 호감도가 조금씩 올라갔다. 잠시 침묵하던 제리는 다시 밤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밤공기에 매캐한 화약 냄새가 실려 왔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31]

뭐가 그렇게 좋은데.

하지만 이마저도 평화로워 제리는 슬쩍 웃고 말았다. 괜히 요상해졌던 기분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다리를 달랑달랑 흔드는 일리야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으니,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 * *

다음날 오후, 황실에서 보낸 마차가 저택 앞에 도착했다. 그저 마차만 보낸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시어스가 타고 있었다. 시어스는 영혼까지 갈린 사람치고는 굉장히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하고 묻자, ‘뭐가 말이냐?’라고 답하는 시어스에 제리는 아주 크게 실망해 한숨까지 푹 내쉬었다. 시어스의 영혼은 아주 멀쩡했다.

“제리, 바다를 본 적이 있니?”

“……바다요?”

이 근처에는 바다가 없었다. 그러니 태어나서 수도를 한 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다는 제리라면, 보지 못했을 게 뻔했다. 시어스도 그럴 것을 생각하고 꺼낸 말일 테고. 하지만 사실 그는, 이 몸에 들어오기 전 바다를 본 적도 있었고, 시어스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유람선에 타본 적도 있었다.

“왜요?”

진실의 입이 활개를 치기 전에, 제리는 시어스에게 갑자기 바다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물었다. 다행히 시어스는 이상함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바다만큼 커다란 연못이 있단다.”

“……?”

지금 내가 바다를 알 나이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사기를 치려는 거다.

“거기서 뱃놀이를 하는 거야.”

‘이 인간이…. 또 내가 어리다고 거짓말 치고 있네.’

사기꾼이야. 제리는 그의 말이 순 거짓말임을 확신했다. 이러니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가 없는 거다.

“네, 네.”

심드렁한 제리의 반응에 시어스는 이게 아닌데, 라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리는 시어스의 손을 잡고 처음 보는 길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황궁 안은 너무 넓어,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도 도무지 적응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아마 하루 종일 고양이를 쫓아 뛰어다닌다던 일리야조차 모든 곳을 가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어스는 해가 지기 전에 배를 띄워야 한다며 발걸음을 재촉했고,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 걷던 제리는 체력이 3이나 깎이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숨을 헐떡이는 제리를 이제야 발견했는지,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안아주련?”

“아니요?”

이미 도착했는데 무슨 소용이람. 깎인 체력은 시어스를 원망한다고 해서 되돌아오지 않는다. 

‘힘든 걸 알면 진작 안고 걸었어야지.’

그나저나 여기까지는 와볼 일도, 그럴만한 체력도 없어 황궁 안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호수라고 해도 될 정도로 커다랗고 아름다운 연못이었다. 이미 먼저 와 배를 띄우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기에, 여기서 뱃놀이를 다 하는 걸까. 잠시 생각했지만 시어스에게 물어볼 정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황궁에서 일하거나 여기 사는 사람들이겠거니 했다.

연못이 잠시 좁아지는 곳에는 아치형의 다리까지 놓여 있었다. 다리에도 수확제를 기념하는 등불이 걸려 있었다. 연못은 어린아이에게는 매우 큰 것이 맞았지만, 바다에 견줄 정도는 아니었다.

‘사기꾼….’

눈을 흘기며 째려보는 제리에, 시어스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

“눈빛이 또 불손해졌구나, 제리.”

“…….”

제리는 황급히 눈을 피했다. 이번에도 생각을 읽힌 건 아니겠지? 

“그렇게나 힘들었니? 미처 몰라 이 스승이 미안하구나.”

“코, 콜록….”

“이제는 대답조차 않는 거냐? 또 덥다고 해보렴.”

“……추워요.”

가을이니까요…. 제리는 말을 어물거리다 더 할 말을 찾지 못해 급하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이젠 춥다고 하는 거냐?”

옷을 더 껴입어야겠구나. 그래야 더워지지 않겠니. 시어스는 그런 제리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때, 풀숲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일리야가 튀어나왔다.

“…….”

“일리야!”

다니라고 만들어둔 길로는 다니지 않고 항상 이상한 곳에서 튀어나오고는 한다. 왜 거기서 나와? 멍하게 눈을 깜빡이는 일리야를 보며, 제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리, 안녕….”

“응, 안녕.”

야옹.

흰 고양이도 인사를 건네듯 작은 입을 벌려 짧게 울었다. 고양이는 또 일리야에게 강제로 끌어 안겨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설마, 그것도 같이 배에 타려는 건가?

“황자님, 고양이는 못 탑니다.”

애웅.

“…….”

일리야의 의도를 알아챈 시어스의 단호한 말에,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의 품에서 바둥대던 고양이가 폴짝 뛰어내렸다. 고양이는 왔던 길을 따라 달려가 버렸다. 외로이 남은 일리야의 옷에는 하얀 털이 잔뜩 묻어 있었다.

곧 황태자까지 도착하고, 시어스는 미리 준비해둔 배에 아이들을 먼저 태웠다. 배를 젓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배가 연못 한가운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제리는 시어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어스가 배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물에 손을 슬쩍 집어넣어, 물거품까지 만들어냈다. 제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스승님, 저도 그거 할 수 있어요?”

“그럼. 20년 후에 한 번 해보자꾸나.”

“…….”

개새끼가, 말을 하질 말든가.

“농담이었다. 나중엔 할 수 있겠지. 한, 10년 후?”

제리는 제 스승의 말을 무시했다. 지금 입을 열면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야, 제리도 할 수 있어.”

일리야가 무심하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하지만 네가 뭘 알아. 시어스가 20년이라고 했으면 20년인 것이다. 누가 뭐래도 여기서 마법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시어스니 말이다.

“봐.”

일리야는 똑같이 물에 두 손을 퐁당 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스가 했던 것과 똑같이 물거품을 만들었다. 오히려 일리야가 만든 것이 더 컸다.

“대단해!”

제리의 말에 일리야의 어깨가 눈에 띄게 으쓱거렸다. 

‘그럼… 정말 나도 할 수 있나?’

제리는 눈치를 보다 물에 손가락만 슬쩍 담가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카르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

아쉽지만 아직 실력이 안 되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제리는 손에 묻은 물기를 시어스의 옷에 슬쩍 닦으며 작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정말이야 제리, 할 수 있어.”

“20년 후에?”

황태자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개새끼가 하나 더 늘었다. 제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어스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옆을 지나가는 배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찬가지로 손을 살짝 흔들어 인사를 건네자, 가만히 있던 일리야도 망설이다 말고 소심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

왜 하필 해질 무렵에 배를 띄운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 멀리, 궁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붉은 노을이 온 하늘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바람이 살랑이며 사람들의 머리를 흔들었다. 와, 하는 탄성소리가 터져 나온 것도 같았다. 제리는 주위가 적막에 잠기는 것을 느꼈다.

그 여유를 즐기던 것도 잠시였다. 바람이 순간 세차게 불어, 제리가 눌러쓰고 있던 모자가 뒤로 날아갔다. 무심코 그를 잡기 위해 손을 뻗은 제리는 몸의 절반 이상이 배 바깥쪽으로 튀어나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

제리의 몸이 기우뚱 넘어가고, 세 사람의 눈이 커다래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차가운 물이 온 몸을 감쌌다.

[조심해!]

왜 하필 지금에서야 어제 쿠키에서 나왔던 쪽지가 생각이 나는 걸까.

[이벤트 발생! 나쁜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나쁜 기억?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제리의 것임이 분명한 기억이 머릿속에 쏟아 들어져 왔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4살의 제리가 느꼈던 공포와 무력감, 그리고 죽음을 예감하는 순간까지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무언가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위로 끌어올리는 느낌이 들었다.

[일시적 혼란 상태에 빠집니다.]

제리의 기억은 상태 변화를 알리는 창을 마지막으로 뚝 끊겼다.

* * *

밀짚모자를 손에 꼭 쥔 채 끌어올려진 제리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다른 배에 탄 이들도 아이를 걱정하는 듯, ‘어떻게 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진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건져 올려진 제리는 예상과는 다르게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물을 많이 먹은 것 같지는 않은데, 제리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 순간, 시어스는 제리가 상상 이상으로 몸이 약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몇 년 전, 백작 저의 연못이 메워졌다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만약 제리에게 이미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기억이 있었더라면? 아주 짧기는 했지만 방금 전의 경험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내는 매개가 될 수도 있었다.

“…….”

일리야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제리에게 안정화 마법을 걸었다. 시어스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대던 제리는 그제야 숨을 제대로 들이쉬고 내쉬기 시작했다.

“제리, 정신이 드니?”

“…….”

“제리!”

물기를 머금은 갈색 눈이 일그러지더니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어엉 울음을 터뜨렸다. 불손하기 짝이 없는 그의 제자가 온전한 어린아이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뱃놀이는 급하게 중단되었다. 아이를 급하게 의원에게 보여도 별 소용은 없었다.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으니까. 

아이가 황궁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번에는 물에 빠져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된 백작은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제리를 그의 방에 눕힌 시어스는, 내일 아침에 아이의 상태를 보기 위해 다시 한 번 찾아올 것이라 말하고 저택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제리는 사흘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축제는 다 끝났다. 제리가 물에 빠진 지 나흘째 되는 날, 가까스로 눈을 떴다.

“나흘…이요?”

백작부인은 제리의 손가락을 하나 접어주며 숫자 4를 만들어주었다. 그가 나흘이 얼마만큼인지 모르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애써 웃어 보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만큼 잤단다.’하고 말하다 말고 울음을 집어삼켰다. 아이 앞에서 우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애매한 얼굴로, 그녀는 ‘네가 잘 잤다면 엄마는 괜찮아.’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전 괜찮아요.”

정말이었다. 그는 물이 무섭지 않았다. 연못에 빠졌던 것은 자신이 아닌 네 살 ‘제리’의 기억이었다. 모두의 걱정 어린 시선들 사이, 제리는 혼자만 태평한 태도를 보였다. 그나저나 나흘 만에 깨어나다니. 그만큼 오래 잘 수 있었다는 게 신비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깨어났구나. 다행이야!”

“제리, 괜찮느….”

“……!”

뭐지, 너무 무서워. 머리가 아파.

“제리!”

[관련된 것들에 극심한 공포를 느낍니다. 보호기제로 정신을 잃습니다.]

그는 스승인 시어스의 얼굴을 보기가 무섭게 혼절해 쓰러져버리고는 했다. 심지어 카르얀에게도 그랬다. 함께 있던 이들의 얼굴만 봐도 몸이 굳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해보아도,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제리, 아파…?”

[관련된 것들에 극심한 공포를 느낍니다. 보호기제로 정신을 잃습니다.]

제리를 걱정해 몰래 찾아온 일리야를 보고도 마찬가지였으며, 심지어는 마차에 붙은 황가의 문양만 보고도 몸을 벌벌 떨었다.

눈앞에서 그것들이 치워지고 나면 만사 태평한 어린아이로 돌아왔지만, 밖에 나가기만 해도 널린 게 황가의 문양이었고, 분수대를 보고 어깨를 딱딱하게 굳히던 제리를 보면 백작부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 아이가 괴로워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마음이 아팠다.

부부는 고심 끝에, 아이가 괜찮아질 때까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활하게 할 것을 결정했다.

* * *

제리가 눈을 뜬 곳은, 수도에서부터 말을 달려 3시간 거리에 세운 루트 가의 별장이었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사람이 가득한 거리가 나왔던 백작 저와는 영 딴판이었다. 별장 근처에는 온통 울창한 숲밖에 없었다. 휴가로 산림욕을 즐기기 위해 지어진 집인 듯했다.

제리는 이곳에 백작부인과 몇몇 시종들과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고작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리야를 보고 자신이 뒷걸음질을 치자, 그가 숨을 집어삼키던 장면은 아직까지도 자꾸 마음에 걸렸다.

[체력:8/20, 근력:25, 지능:70, 매력:10, 스트레스:80/100, 검술:1, 마법:25]

[‘물에 대한 트라우마’ : 기억에 관련된 것들에 극심한 공포를 느낍니다.

상태 해제까지 잔여시간 : 5년 3개월 7시간 32분]

스탯창 아래에는 트라우마 상태가 새겨졌다. 제리는 몸이 들어갈 정도로 많이 고인 물웅덩이만 보면 몸이 굳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황가에 대한 물건에 무의식중으로 덜덜 떨고는 했다. 사실 별로 무섭지도 않은데, 상태창에 새겨진 글자 따위에 제가 휘둘린다고 생각하니 열도 받았다.

잔여 시간이 무엇을 뜻하나 헤아려보던 제리는, 트라우마가 열한 살 생일이 되는 날에 해제된다는 것도 알아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편지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어스가 백작에게 보낸 편지를 읽을 수 있었다. 제리는 그날 바로, 시어스에게 자신은 괜찮음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다음날이 되자 시종을 통해서가 아닌, 창문을 열자 편지가 방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마법 같은 광경에 제리는 박수를 짝짝 쳐댔다.

[괘씸한 제자 놈에게.

제리, 네 스승님이다. 괜찮다는 말은 거짓말이구나. 그렇지?]

“좀 믿어요….”

제리는 이쯤되면 시어스가 제 말을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부터 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정말 괜찮은데….

[잘 지내고는 있는 거냐? 게으름을 피우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엄한 척하는 목소리가 다 들리는 것 같았다.

처음 보내온 편지와 함께, 시어스는 혼자서라도 심심할 때 공부하라며 아카데미의 1학년생들이 사용하는 초급 마법 교본을 보내주었다. 분명 새 책이어야 할 교본은 처음에 받았을 때부터 중간의 페이지가 서른 장 정도 누락되어 있었는데, 가장 앞의 목차를 통해 그게 물에 관련된 마법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제리는 답장에 그에 대한 내용은 써넣지 않았다. 시어스와 공부할 때보다 효율은 덜했지만 심심함을 달래는 것에는 제격이었다.

[네가 물에 빠진 다음 날 아침… 왜인지 모르게 연못의 물이 모두 말랐단다. 그 많던 물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원….]

제리는 사기꾼 기질을 지닌 그의 스승이 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이 정도 힘을 가진 자는 황궁 안에 한 명도 없을 텐데 말이다. 다른 마법사 놈들은 영 쭉정이들뿐이라. 혹 마탑이라면 모를까…. 그나저나 내가 네게 별 얘길 다 하는구나.]

그러고보니 시어스가 마탑 출신이라고 한 것을 어렴풋이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마탑이 무언지 백작에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상 가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너무 어린 것 같구나. 분명 축제에 기력을 쪽쪽 빨린 놈들이 여럿 모여 장난을 친 지도 모르지. 힘을 합하면 가능하려나?]

문장을 읽어 내릴수록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스승은 밑도 끝도 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은 뒤, 항상 ‘농담이었단다.’라며 오해를 풀어주고 대화를 끝냈으니 말이다. 그러면 정말 그 많던 물이 순식간에 다 말라버렸다고?

장난으로 연못 물을 다 말리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히 제정신은 아닐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격에 굉장한 결함이 있는 사람일 것 같았다. 그리고 제리는 다 마른 연못도 한 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4황자께서는 여전히 고양이나 쫓아다니느라 바쁘시단다. 하지만 묘하게 풀이 죽었으니 황자님께도 편지 한 통만 보내주지 않겠니? 참, 전하께서도 널 많이 보고 싶어하셨다. …(중략) 돌아올 때면 언제든 연락하거라.]

스승의 편지를 교본 사이에 끼워놓은 제리는 일리야에게도 괜찮음을 말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고양이는 괜찮냐며 그가 아끼는 고양이의 안부까지 물었다.

하지만 며칠 밤을 기다려도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 * *

제리는 초급 교습서를 독학으로 모두 떼었다. 그러다 간혹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으면 시어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시어스는 착실하게 수식까지 적어 답장을 해주었다. 

[…그런데 제리, 넌 나를 질문만 하면 답이 튀어나오는 것으로 아는 거냐? 매정하기 짝이 없구나. 이 스승, 조금 섭섭하단다.]

정말 궁금한 개념만 딱 적어 보냈더니 언제 한 번은 돌아온 답이 저러했다. 전에는 괜히 없는 말솜씨로 쥐어짜 문장을 지어내지 말고 간단히 용건만 전하라더니…. 

[고맙습니다, 덕분에 완벽하게 이해가 됐어요.

P.S 그런데 스승님 정말 불만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전에는 말이 너무 많다면서요? 저더러 뭐 어쩌라는 거죠? 딱 말해주세요. 앞으로는 안부도 같이 물어드려요? -제리가-]

불만사항에 대한 답을 보내자, 환기를 위해 조금 열어둔 창을 통해 편지가 날아와 제리의 뺨에 착 달라붙었다.

[그래.]

“…….”

보내는 이도, 안부인사도, 그리고 쓴 사람도 없이 ‘그래’라고만 적힌 단답형 편지를 받고 나서야, 제리는 그동안 제 스승이 느꼈을 기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뺨까지 맞아 그런가, 기분이 조금 나빠진 것이다.

그 뒤로는 불필요한 인사치레도, 부족한 말솜씨도 발휘해 긴 편지를 보냈더니 시어스의 불만이 사라졌다. 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부족한 말솜씨 운운하지를 말든가. 정말 비위 맞추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제리가 열 살이 되던 날의 아침, 그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거울 앞에 서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했다.

“나는 황태자다…!”

문가에서 제리가 입을 외투를 가지고 왔던 시종 조슈아가 흠칫 하고 어깨를 떨었다. 그는 넷째 도련님의 꿈을 진심을 다해 응원하고 싶었지만, 황태자는 다시 태어나도 될까 말까 했다. 그는 제리의 꿈이 벌써부터 좌절될 예정에 처했음을 알고는 그를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진짜 사라졌다.”

패시브 스킬이 발동되지 않았다.

만세! 그는 드디어 진실의 입 저주가 풀렸음을 기뻐하며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형 사랑해!”

아인스가 놀란 얼굴로 숨을 집어삼켰다.

[아인스 루트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100]

[현 나이에서는 호감도 100이 최대치라 더 이상 오르지 않습니다.]

“제, 제리. 형도 사랑해.”

와! 정말 거짓말이 되잖아? 제리는 당분간 마음껏 거짓말을 하며 돌아다닐 것을 결심했다.

“그나저나 생일 축하해. 눈이 많이 쌓였더라. 봤니?”

“눈?”

“밤새 펑펑 내렸어.”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제리를 따라 별장에 내려와 있는 첫째형 아인스가 넌지시 말해주었다. 별장 근처에 눈이 내린 것은 굉장히 간만이었다.

털 망토를 어깨에 걸친 채로 밤새 쌓였을 눈을 밟으러 나가던 그는 우편함에 삐죽 튀어나온 채로 꽂혀 있는 편지를 발견했다.

“누가 보냈지?”

수신인도 쓰이지 않고, 우표조차 안 붙은 편지였다.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누가 넣고 갔지? 제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편지봉투를 조심스레 뜯어 편지지를 꺼냈다.

[제리. 아직도 안 괜찮아?]

“…….”

처음 보는 필체,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없이. 고작 한 줄밖에 되지 않는 편지를 제리는 읽고 또 읽었다.

‘분명히… 일리야야.’

무려 4년이나 지나 온 답장이었다. 처음 편지를 보낸 이의 주소지가 백작 저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제리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제리는 오늘로 열 살이 되었다. 그보다 한 살 많을 일리야는 열한 살일 것이다. 4년 전 아주 짧은 인연을 맺었을 뿐인데, 일리야가 아직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 나잇대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져, 일 년 전에 있었던 일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는 하니까.

제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누구인지 기억해?’라는 답을 보냈다. 그러자 다음날 오후가 되어 그에게 도착한 소포에는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책의 첫 페이지에는 ‘편지 보내지 마. 여기에 네가 하고 싶은 말을 써.’라고 적혀 있었다.

“…….”

일리야가 4년 만에 제게 일기장을 선물했다. 제리는 단 한 번도 일기를 써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일리야가 준 거니까…. 선물을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펜을 들어 첫 번째 빈 페이지에 일기를 써내려갔다.

[1일째.

오늘 날씨 : 눈이 많이 왔음.

일기 써보는 건 처음인데 벌써부터 쓰기 싫다…. 설마 일리야가 날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2일째.

오늘 날씨 : 추웠음.

그래서 감기 걸림. 일기 이렇게 쓰는 거 맞나?]

[3일째.

오늘 날씨 : 맑고 추웠음.

맨날 날씨 얘기밖에 안 하는 것 같아. 그치만 매일매일이 똑같아서 어쩔 수가 없다.(진짜로) ……그런데 왜 편지를 하지 말라는 거지? 4년 만에 답장 보낸 건 너였잖아 일리야. 생각하니까 어이없네.]

4일째가 되는 날, 일기를 쓰려고 책을 연 제리는 까무러치게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아야….”

꼬리뼈 부분을 손바닥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제리는 손에 쥔 일기장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제리에게.

일리야야. 미안… 일기를 쓴다길래 그냥 보고만 있었어. 이 책으로 대화를 할 수 있으니까 쓰지 말라고 한 거거든…. 하지만 계속 일기 써도 돼. 하고 싶은 말 있을 때 내 이름만 적어….]

그동안 제 일기를 일리야가 봤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더 쓰기 전에 일리야가 이 사실을 알려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제리야. 이제는 일기 안 써. 보고 있으면 말을 해줬어야지!]

잉크가 다 마르기도 전, 그 아래에 일리야의 필체로 글씨가 새겨졌다. 이건 무슨 마법이지? 제리는 내일 아침이 밝자마자 제 스승에게 이를 물어볼 것을 다짐했다.

[일리야야. 이제부터는 말할게. 보고있어.]

[이 책은 어디서 샀어? 무슨 마법인 거야?]

[제리도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야. 참, 보고 있어.]

[그런 건 매번 말하지 않아도 돼.]

“…….”

[…그렇다고 해서 말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야, 일리야.]

자러 가기 전까지도 열심히 펜을 놀리는 제리를 바라보며, 시종 조슈아는 넷째 도련님이 매우 큰 사람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따금씩 픽픽 쓰러지는 것만 고치면 더 좋을 텐데.

다음 날, 제리는 시어스에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동시에 글을 쓸 수 있는 마법 책에는 어떤 수식이 쓰이는 거냐며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엉뚱한 꿈을 꾼 제자에게.

제리, 무슨 소리냐? 그런 게 있으면 내가 먼저 네게 선물했을 거란다. 마력 소모도 이만저만이 아닐 테다. 정말 수명을 갈아 넣지 않고서야 그런 물건을 어떻게 만들겠냐. 그런 건 나도 못한단다. 그건 그렇고…(중략)]

“……?”

이상했다. 그래서 일리야에게 직접 이 책에 대해 물었더니, 직접 만들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시어스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고, 있어도 천 년에 한 번 나올 천재일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그때, 제리의 머릿속에 4년 전 황궁의 연못이 깨끗하게 말라버렸다던 사건이 생각났다.

[일리야, 혹시 연못에 물 전부 없앤 것도 너야?]

사흘 간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일리야의 이름을 한 페이지 가득 써넣어도 묵묵부답이었다. 제리는 범인이 일리야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무심코 일기장을 열어보았더니 날려 쓴 듯한 글씨로 일리야가 제리에게 묻고 있었다.

[제리… 언제 와?]

아직 트라우마 상태가 해제되지 않았다. 내년 겨울, 제리의 생일이 돌아오면 상태가 풀릴 것이다. 일 년도 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일리야는 이미 열두 살이라 아카데미에 들어갔을 텐데. 쌍둥이들에게 들어서, 카르얀은 여전히 아카데미 내에서도 잘났음을 익히 전해 듣고 있었다.

[아직 몸상태가 별로야. 아마 내후년에는 아카데미에서 보게 되지 않을까? 일리야는 어떤 곳으로 지원할 거야?]

이런 물건을 만들 정도면 당연히 마법학과겠지? 제리는 제가 묻고서도 너무 당연한 답이 돌아올 걸 예상하며 피식피식 웃었다.

[검술학과.]

“…왜?”

제리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제리는 그가 마법학과에 가야 하는 이유를 몇 십 개나 대며 일리야를 설득하려 했지만, 일리야는 확고했다. 몸 움직이는 게 싫어서 관뒀다지 않았나? 이를 또 시어스에게 묻자, 시어스는 ‘말하지 않았나? 네가 떠나고 나서 다시 배우기 시작했단다.’라며 능청을 떨었다. 제리는 일리야의 재능에 대해 통탄하며, ‘중급 마법 교습서 1’의 밝은 불을 일으키는 마법을 시도했다.

[Miss! 잘 해내지 못했습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Miss! 잘 해내지 못했습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반딧불이 정도의 불빛 소환하기’ 마법을 터득했습니다.]

제리는 열 번쯤 시도하고 나서야 겨우 성공해 마법을 터득했다. 허덕이는 체력을 더는 허비하지 않기 위해 그는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뻐근한 몸에 4년 전에 비하면 조금 길어진 팔다리를 쭉 펴다, 머리맡에 손을 잘못 부딪쳤다.

“……아.”

본능적으로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침대에서 기절하는 게 다행인 건가….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체력이 고갈되어 정신을 잃습니다.(최대체력:40)]

제리의 의식이 멀어졌다. 키도 조금 컸고, 이제는 모기 잡는 정도로는 쓰러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체력이 매우 좋아진 것도 아니었다. 

* * *

고작 연락을 주고받을 친구가 생긴 것뿐인데 제리의 단조롭던 일상은 조금 즐거워졌다. 시어스와도 꾸준히 편지를 했지만, 스승과 편지를 하는 것보다는 어린 친구와 하루 일과에 대한 잡담을 나누는 게 배는 더 즐거웠다.

일리야의 고양이는 아직도 건강하게 궁을 휘젓고 다니고, 최근에는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새끼 네 마리까지 낳았다고 한다. 귀엽냐고 물어봤더니 ‘그건 잘 모르겠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분명히 무덤덤한 얼굴로 예뻐하고 있을 것을 제리는 알았다. 새끼고양이들을 보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트라우마 상태가 해제되는 것도 아니니 참아야만 했다.

쌍둥이 형을 통해 카르얀에게도 (시종들이) 직접 담은 딸기청을 보내주었다. 온 집안 식구들 모두가 먹고도 남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직접 담은 딸기청이라니, 고마워. 카르얀은 하루빨리 건강해진 제리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초콜릿 쿠키를 보내주었다. 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과점의 것이었다. 아침 일찍 가서 줄을 서지 않으면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쿠키를 선물해줘 고맙다는 말과 함께, 클로버를 납작하게 눌러 만든 책갈피를 보냈더니, 이번에는 스카프와 함께 답장이 도착했다.

[직접 만든 책갈피라니, 고마워.]

‘뭘 자꾸 보내는 거야…!’

아직 어려 그런지 적당히 할 줄을 모른다. 제리는 그 답례로 오렌지를 얇게 저며 (시종들이)만든 간식을 함께 보냈다.

“제리, 이번에는 인형이 왔는데?”

[직접 만든 간식 고마워. 잘 먹을게.]

“…….”

기어이 끝을 보자는 건가. 제리는 카르얀에게 또 무엇을 선물해야 할지 하루 종일 고민했다. 그렇게 카르얀과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카르얀은 검술이나 마법학과 같은 특수한 과가 아닌, 일반학과로 들어가 열심히 학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조그만 종이 조각에 담은 이야기들을 제리는 몇 번이나 읽었다. 그는 편지와 형들의 입을 통해 수도의 소식을 주워들으며, 어찌 보면 무료할 수도 있는 일상을 보냈다.

그렇게 평화로운 숲 속의 고요한 별장에서, 또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물에 대한 트라우마’ 상태가 해제되었습니다.]

드디어 생일날이 되어, 상태창이 뜨자마자 제리는 다시 저택에 돌아가도 된다고 아인스를 찾아가 말했다. 하지만 하루아침 만에 자기가 괜찮아졌다고 하는 어린 동생의 말을 그가 순순히 믿을 리가 없었다. 제리가 내내 괴로워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던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백작부인은 더했다.

뭐, 예상하지 못한 결과는 아니었다. 제리는 별장에서 생각보다 조금 더 머무르게 되었다.

“제리, 잘 있었어?”

“안녕, 형.”

“그새 또 컸네?”

그런가? 컸다는 말에 제리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요즘 거울을 볼 때마다 스스로도 느끼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은 또 느낌이 달랐다. 로베인은 오랜만에 보는 제리의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미소 지었다. 내년이면 제국법 기준으로 성인인 열여덟 살이 된다고 이제 제법 어른 태가 나는 쌍둥이들은….

“형이 목마 태워줄까?”

“…아니?”

“그래, 태워줄게! 읏차….”

“……휴.”

여전히 너무 귀찮았다. 어린아이일 때나 귀찮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원래 말이 많은 것이었다. 망할 꼬맹이들…. 조이는 제법 묵직해졌을 제리를 별 어려움도 없이 안아들었다. 제리도 속으로는 투덜거렸으나 매우 익숙하게 그에게 몸을 기댔다.

숲으로 산책을 나가면 늘 돌아올 때쯤엔 체력이 다 떨어진다. 그래서 열한 살이나 먹었지만 여전히 아인스에게 업히거나 안긴 채로 돌아오곤 했다. 때문에 제리는 형들이나 시종들이 자신을 덥석덥석 들어 올리는 행동에는 이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익숙했다.

제리는 내년에 들어가게 될 아카데미에 관심이 매우 많았다. 백작은 무리해서 들어가지 말고 일 년은 더 쉬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하루빨리 열두 살이 될 날만을 기다려왔던 제리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아무튼, 제리는 틈만 나면 아인스를 보채 아카데미에 대한 정보를 캐냈다.

“참,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들 중에 대단한 놈이 있어.”

불쏘시개로 벽난로를 들쑤시던 로베인이 말을 꺼냈다. 늘 그의 말은 영양가가 없어 흘려듣곤 했던 제리지만, 아카데미 이야기를 해준다면 들어줄 가치는 있었다.

“누군데?”

“누구라는 건 나도 듣지 못해서 잘 모르는데, 신입생 중에 검에 푸른색 검기를 두를 수 있는 아이가 있대. 교수님들은 벌써 축제야. 몇 십 년 만에 엄청난 학생을 배출하는 게 아니냐고 말이야.”

“아하.”

…그런데 검기가 뭐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제리에게 아인스가 대답했다. 그는, 검기란 검에 의지를 둘러 조금 더 강해지는 거라고 쉽게 풀어 설명해, 검술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제리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엄청 세다는 거지? 제리의 물음에, 검기를 두를 수 있을 정도면 굳이 아카데미에 들어올 필요가 없는 천재라고 아인스는 덧붙였다.

“와….”

제리는 감탄을 하면서도 조금 아쉬웠다. 만약 일리야가 마법학과에 들어갔으면 거기도 난리가 났을 텐데. 일리야도 엄청난 천재니까 말이다. 궁정 마법사인 시어스조차 불가능하다 한 것을 어린 나이에 만들어낸….

제리는 일리야의 재능을 다시 한 번 안타까워하며 형들의 말을 경청했다.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에 흥이 난 쌍둥이들은 기숙사에서 새벽에 몰래 탈출하는 법을 알려주었고, 아인스는 그 방법의 허점을 지적해주었다. 그렇게 어린 제리에게 벌써부터 일탈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아들들을 본 백작부인은 당장 달려와 제리의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아들들을 꾸짖었다.

‘그런다고 해서 이미 들은 게 안 들은 걸로 되지는 않는데….’

형들은 동생에게 이상한 것을 알려준다고 엄청 혼났다. 그동안 수 개의 경고장을 받은 아이들이었기에, 순수한 제리에게 나쁜 물을 들이지는 않을지 걱정이 된 것이다.

‘잘됐다.’

제리는 꾸지람을 듣는 형들을 힐끔 올려다보다 몰래 킥 웃었다. 순간적으로 그를 본 조이가 제 눈을 믿지 못하는 듯 손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하지만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온 제리 탓에, 조이는 그날 밤 피곤하다는 이유로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 *

[일리야, 나 제리야. 친구는 많이 사겼어?]

[조금?]

일리야도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조금 걱정했는데 친구도 생겼다니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곱게 키운 아들이 사회로 한 걸음 내딛는 것을 직접 보는 기분이었다. 제리는 열심히 하라는 말을 전했고, 일리야는 늘 그렇듯 알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다음 외출 때 나온 쌍둥이들이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전에 해줬던 이야기와 이어지는 것이었다.

“제리! 너 4황자랑 친구지?”

“…일리야가 왜?”

설마 형들 입에서 일리야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카르얀의 이야기도 제리가 먼저 물어야만 ‘아, 걘 잘 지내던데. 이번에도 수석이래.’라고 둘러댔던 이들이기에 더 불안했다. 걔가 무슨 사고를 쳤나? 설마 벌써 기숙사를 이탈했다거나….

“걔 때문에 교수님들이 혈압약을 다 털어 먹었어!”

로베인의 말에 조이는 벌써부터 킬킬거렸다. 제리는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다, 로베인의 팔을 붙잡고 빨리 말해달라고 그를 보챘다.

“얼마 전에 사기극이 들통났거든.”

“……그게 일리야랑 무슨 상관이야?”

“그래, 사기 친 애 이름이 일리야야.”

뭔 소리야. 일리야가 사기를 쳤다고? 이어지는 형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제리의 표정은 요상하게 바뀌어갔다.

‘설마, 일리야가? 일리야가 왜…. 그 착한 애가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일리야는 머리색부터, 말투, 그리고 덤덤한 성격까지 제리의 친구인 일리야와도 꼭 맞았기에, 더 이상 그게 제 친구 일리야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검술학과에서는 신입생들의 반을 나눌 때 서로 대련을 시키는데, 일리야 4황자가 가장 처음 아이들의 기선제압을 한다는 이유로 검기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지레 겁을 먹은 신입생들은 그와의 대련을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일리야는 가장 상급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교수들은 역시 황족이라 다르다며 일리야를 치켜세웠다.(하지만 쌍둥이들이 보기에는 일리야는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다고 한다.)

그는 검술에는 재능이 없었고, 실력을 속여도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검기가 그저 환상 마법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 교수진들은 자신의 손으로 뛰어난 학생을 배출하겠다는 꿈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들키는 순간에도 일리야는 표정에는 미동도 없이, 가짜 검기를 두른 칼을 바닥에 질질 끌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교수들은 혈압약을 우적우적 씹어 먹었고, 학생들은 무슨 저런 놈이 다 있냐며 충격을 받았다. 차라리 마법학과로 특별 편입을 시켜주겠다는 말을 일리야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의 열정만은 높이 샀지만 다시 말하건대 일리야는 검술에는 전혀 재능이 없었다.

“…제리, 왜 그런 친구를….”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아카데미 새벽 탈출에 성공한 최초의 인물로 유명했던 아인스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할 말이 아니라, 쌍둥이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첫째형을 바라보았다.

“…….”

제리는 하루 종일 충격에 멍해 있었다. 고양이나 쫓던 어린 친구가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그는 일리야의 순수하고 멍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 비통함에 잠겼다. 그리고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사기 기질이 뛰어난 시어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혹시 스승님이 일리야에게 이상한 걸 가르치셨나요…?]

하지만 시어스는 헛소리 하거나 게으름 피우지 말고 빨리 중급 교습서나 다 떼라고 답장했다. 일리야에게 직접 물어보려던 제리는 종이 위에 펜을 가져다 대기 직전 멈칫했다.

‘일리야가 벌써 사춘기가 왔나?’

열두 살, …조금 이르지만 그럴 수 있다. 차라리 매우 늦게 오는 것보다 하루 빨리 혼란 시기를 겪고 넘어가는 것이 낫다. 사춘기 때문에 남들에게 잘나 보이고 싶어서 그랬을까. 혹은 잘 보이고 싶은 여자 친구가 있었다거나?

“으음….”

사춘기 청소년은 그냥 피해가는 게 답이었다. 자극하면 할수록 아이는 예민하게 반응할 테니까…. 가끔은 제 어린 친구의 부끄러운 점을 숨겨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모른 척 해주자.”

일리야를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나게 하기 위해, 제리는 이 일에 대해서 함구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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