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8/29)

#02_2

“……냐?”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눈을 떠보니 침대에 누운 채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시렌과 헨리가 달라붙어 제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보는 얼굴이 저 재수없는 새끼라니. 제리는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제리, 괜찮아?”

“걷어차인 건 난데 왜 네가 쓰러지냐? 연기하는 줄 알았네.”

“말하지 마. 머리 울리니까. 몇 시야? 입학식은?”

헨리는 멋쩍게 뒷목을 쓸어내리며 주근깨가 가득한 콧잔등을 씰룩거렸다.

“시간 이미 지났어. 그, …입학식은 원래 안 가도 되는 거래.”

“……누가 그래?”

“시렌 형이….”

헨리가 옆을 흘깃 바라보며 우물거렸다.

“입학식? 촌스럽게 그런 걸 누가 가냐? 원래 그런 건 좀 빠져줘야 재밌는 거야.”

시렌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씩 웃어보였다. 거짓말. 하지만 학교 행사이자, 신입생으로서 첫 걸음을 내딛는 행사인데 가지 않아도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교수진들도 다 입학식 때 소개하는 것일 텐데…. 제리는 조금 실망스러웠으나 제가 쓰러진 탓에 가지 못한 거니 지금 와서 어찌 할 수는 없었다.

“너 무슨 지병 같은 거라도 있냐?”

“지병….”

그냥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것도 지병이라고 하던가? 제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거, 옮는 건 아니지?”

그러면 지금이라도 당장 창밖으로 던져버릴 거다. 시렌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제리를 흘겨보았다. 제리는 아니라고 대답하면서도, 옮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시렌에게 제일 먼저 옮겨버릴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냥 몸이 조금 약해서 그래.”

“웃기지 마. 시도 때도 없이 쓰러지는 게 조금 약한 거냐?”

“…그냥 약해서 그래.”

“그냥 약한 정도가 아닌데?”

이게 내 말에 자꾸 토를 다네. 제리는 될 대로 되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 말을 다시 정정했다.

“많이 약해서 그렇다. 됐어? 가끔 쓰러지고… 심하면 피도 토하고… 그래, 나는.”

처음 만난 날부터 쓰러지는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입학식도 결국 못 가게 됐고…. 제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헨리는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도 어릴 때에는 몸이 약했지만 시금치를 먹고 튼튼해졌다고 제 자랑을 했다. 시렌은 그에 가르시에 상단에서 시금치 가루로 만든 알약을 취급하고 있으니 원한다면 물건을 들여오겠다고 제 집안 자랑을 했다.

“……그럼 조금만.”

시금치든, 시금치로 만든 약이든 체력 수치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속는 셈 치고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라면 다시 시렌에게 버리면 되고, 효과가 있다면 고맙다고 대충 한마디 던져주면 되겠지.

입학식에 참석하지 않은 제리를 찾아온 쌍둥이 형들이 마법학과 기숙사 앞에서 소란을 피운 것은 몇 시간 뒤의 일이었다. 그들은 제리의 이름을 부르짖다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까마귀들’에게 두 팔을 붙잡힌 채 끌려 나가야만 했다.

* * *

제리는 신입생의 패기로 듣고 싶은 과목을 모두 시간표에 빽빽하게 채웠다. 뒤늦게 제리가 짠 시간표를 확인한 시렌은 처음 대들 때부터 알아봤지만 보기 드문 또라이라며 혀를 내둘렀고, 형들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제리, 이건 몸이 두 개라도 힘들어.’

‘형은 해봤어?’

‘아니? 이걸 왜 해봐? 미치지 않….’

‘입 닥쳐, 로베인. 제리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안 해봤으니까 모르는 거잖아. 내가 해볼게.’

‘……제리, 미쳤니?’

‘조이 형, 괜찮아. 난 다 들을 수 있어.’

제리는 시어스에게서 배울 수 없었던 종류의 학문들이 즐비한 아카데미에 이미 눈이 멀어 있었다. 결국 모두의 설득 끝에 점심시간 전후로 쉬는 시간을 배치해뒀더니, 그나마 사람이 들을 만한 시간표가 되었다.

‘필수 기초마력만 아니었다면 약초학까지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제리는 1교시 시작시간인 아침 9시부터 저녁 4시까지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다.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면 체력이 한 자리 수만큼만 남아 기진맥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리는 행복했다. 매일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고, 그리고 시간이 빈다면 창가에 앉아 햇빛을 쬐기만 하던 지루한 일상에 비교하면 꿈같은 일이었다.

“제리, 어디 가게?”

“난 찾아보고 싶은 책이 있어서! 먼저 가 있어. 책만 빌려서 갈게!”

제리는 최근 들어 사람의 기억을 읽는다거나, 생각을 단편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정신마법이 있다는 소리를 상급생들의 대화에서 주워들었다. 그들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 정도로 친하지는 않아 정확히 무슨 마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마법을 배우면 제 스승인 시어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다. 제리는 아직 복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제게 진실의 입 저주를 걸어, 여기서도 거짓말을 할 수가 없으니 골치가 아팠다.

“응, 갔다 와….”

제리는 몸을 돌려 후다닥 달려 나갔다. 헨리는 그를 배웅하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생각을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법학과 학생들이 거진 다 미쳐 있다지만, 제리는 그 정도가 조금 심한 것 같아.

황립 아카데미 학생들은 거진 다 귀족이었다. 그들과는 다르게 헨리 가드너는 평범한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때문에 귀족들의 고개가 얼마나 빳빳한지, 평민을 얼마나 무시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백여 년 전, 상단을 운영해 번 막대한 돈으로 귀족 지위를 샀다던 가르시에 가의 시렌 역시, 은연중에 계급을 드러내는 태도를 보이고는 했다. 하지만 섭섭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날 때부터 귀족이었으며, 출발점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헨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가진 거라곤 하나도 없는 헨리도 스스럼없이 대했다. 가드너라는 헨리의 성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고향에서 과일 농사를 짓는다는 말에 혹시 사과나무도 있냐며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 직접 사과를 따봤다는 말에는 아직 어린데 기특하다며 애늙은이 같은 소리도 했다.

제리와 있을 때면 귀족가의 자제가 아닌 그저 몸이 조금 약한 또래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이한 애야.”

헨리는 덥수룩한 붉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마법은 돈이 된다. 물약을 제조해 팔든, 마법물품을 발명해 가게를 열든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때문에 마력을 타고난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 비싼 학비마저 감당하며 헨리는 수도의 아카데미로 올라왔다. 하지만 제리만큼 마법이란 학문에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옷자락을 휘날리며 정신없이 달려가는 제리를 보며 헨리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 * *

백작저의 서재는 비교도 되지 않을 규모의 서고에 제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용하고 넓은 홀에는 학생들이 모여앉아 과제를 하고 있었고, 천장까지 닿을 높이의 책장들에는 수많은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책 냄새가 서고를 은은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커다란 곳에서 원하는 정보만 얻어낸다는 것은 그리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정신마법 계열의 도서를 찾으려면….

“아, 찾았다.”

제리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각 분야별로 구역을 나누어뒀는데, 마법서를 보관한 서고는 가장 안쪽에 있었다. 제리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법서 구역에 발을 디뎠을 때, 머릿속에 ‘띠링’하고 익숙한 이벤트 발생음이 울렸다.

[이벤트 발생! ‘가이드북’]

“응? 가이드북?”

제리는 무심코 중얼거렸다가, 제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것을 깨닫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곧이어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Quest. 가이드북~공략 인물에 대하여~

아카데미 입학을 축하드립니다. 어떤 학문을 선택했든 당신은 반드시 잘해낼 수 있을 겁니다. 아카데미 도서관에는 각 인물 공략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템이 책의 형태로 숨겨져 있습니다. 공략 인물은 총 6인으로, 아이템 마지막 페이지에는 엔딩 타이틀 맛보기까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기한 : 황립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까지

성공 보상 : [아이템]가이드북, [능력치]마법+5

실패 시 : 실패 패널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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