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9/29)

#02_3

헨리의 사물함은 자물쇠를 걸어두어도 다음날이면 늘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제리는 피만 보면 온몸을 덜덜 떠는 심약한 헨리에게 제 사물함을 대신 쓰라고 내어주었다. 헨리는 차라리 아무것도 없을 시렌의 사물함을 쓰겠다고 거절하다가 분개한 시렌에게 목을 잡혀 흔들렸다. 한 칸밖에 수납하지는 못하지만, 큰 가방에 모두 넣고 그를 인벤토리에 넣어버리면 되니 당분간 사물함 정도는 없어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이대로 뒀다간 시렌마저 또 싸움에 휘말릴지 모르는 일이었고, 헨리에게 치는 장난의 수위도 더 높아질지도 몰랐다. 증거를 잡는다고 해서 상황을 좀 더 지켜볼 게 아니었다.

레이븐은 생각보다 멍청한 놈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좀 치밀한 편이었다. 그래서 증거는커녕, 죄 없는 동물의 사체만 쌓여갔다. 이대로 뒀다간 오히려 더 악화되기만 할 것 같았다.

제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만 얽힌 게 아닌데 너무 안일했어. 증거만 모은다고 태평하게 있는 게 아니라 좀 더 일찍 나섰어야 했는데. 죄책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래서 제리는 직접 레이븐을 찾아가 무슨 생각인 거냐고 묻기로 했다.

제리는 연무장 근처의 쉼터에서 레이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이죽거리고 있던 그는 제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놀라지도 않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친한 사이마냥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어이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레이븐은 무어냐 묻는 친구들을 쫓아 보내고 난 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제리에게 손짓을 했다. 제리는 방음 마법부터 걸고 레이븐을 향해 걸어왔다.

“너 이제 그만 해.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다짜고짜 자신을 찾아와 당돌한 말을 지껄이는 제리를 내려다보며 레이븐은 피식 웃었다.

“뭘 말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데. 할 말은 그게 다냐?”

“도대체 내가 가까이 하면 안 되는 사람이 누군데? 둘 다 만나지 말란 개소리는 아니지?”

“글쎄.”

“카르얀이야? 왜?”

짜증이 섞인 제리의 말에 레이븐의 새파란 눈이 더 가늘어졌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래서 더 거슬려.”

내가 뭘 모르는데? 너보다 백만 배는 아는 게 더 많을걸. 제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레이븐을 노려보았다.

“경우에 따라선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어.”

“웃기지 마. 친구 좋아하시네. 나와 내 친구들에게 이딴 짓을 해놓고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이 나와?”

“그래. 그게 지금은 아니지만…. 난 그냥 앞으로의 일에 방해가 될까봐 미리 경고한 것뿐이야. 둘 중 누구를 택하든, 네 소신에 따르면 돼. 사실 난 네게 아무런 악감정도 없거든….”

“내 소신?”

레이븐은 반문하는 제리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그래, 소신.”

“…….”

정말 둘 중 하나만 택하면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듯 가벼운 어조였다. 제리는 저 말 속에 무슨 숨겨진 뜻이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네 아버지도 4황자님의 뒤를 봐주고 있잖냐. 거기서 그쳤어야지….”

“무슨 소리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만족하지 못하고 황태자에까지 발을 걸쳐두겠다는 건 너무 이기적이지 않아? 네 독단이야? 아니면 백작이 시키든?”

가문 이야기까지 나왔다. 루트 가 뿐만 아니라 앤더슨에서도 일리야의 뒤를 봐주고 있다고 했다. 그를 기준으로 황태자의 말벗이 구성된 거니 확실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리는 레이븐이 황태자를 지지하는 쪽이기에, 일리야 4황자와 가까이 지내면서 황태자와도 가까운 제리를 경계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레이븐이 악의를 감추지 못하고 내뱉은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레이븐은 카르얀의 사람이 아니었다.

“너야말로 지금 내게 이러는 거, 독단이야? 아니면 앤더슨 후작이 시켜서?”

제리가 웃으며 되받아친 말에, 레이븐도 소리 없이 눈을 휘어 웃었다. 눈빛이 날카롭고 시렸다. 제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 결정이라면?”

“월권이야. 대체 뭘 믿고 내게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정말 네 생각대로 내가 두 사람에게 모두 발을 걸치고 있는 거라면, 내가 너에 대해 얘기할 거란 생각은 안 해봤나봐.”

제리가 고자질을 할 거란 생각은 못했는지, 레이븐은 조금 머뭇거린 끝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넌 할 수 없어.”

제리는 코웃음을 쳤다. 제리가 정말 어린애에 불과했다면 아마 말을 할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레이븐이 무섭지도 않았고, 그에게 레이븐은 그냥 열여섯 먹고 제가 어른인 줄 알고 설치는 어린애일 뿐이었다.

이게 그의 독단이든 가문의 뜻에 따르는 일이든, 상대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못하고 무작정 일을 저지르고부터 본다는 것에서 그 나이다운 미숙함이 드러났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리가 거슬리는 거라면 굳이 그를 제게 티 내지 않고 조용히 처리할 수도 있었으니까.

“내가 말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한 번 볼래?”

제리는 주변에 말하지 말라고 해서 정말 겁을 잔뜩 먹어 혼자만 끙끙 앓는 꼬마가 아니었다.

‘사실 이미 형에겐 말했지만….’

아인스는 ‘앤더슨의 영식이 자꾸 내 친구들을 괴롭혀. 최근 근황 좀 몰래 알아다줘….’ 하는 제리의 말에 분개해, ‘너무 무서우면 당장 아카데미를 탈출해 형에게 달려오렴.’이란 답을 보냈다. 그리고 그 편지에는 아카데미 내 경비가 허술한 곳과 탈출 경로까지 세세하게 기재한 약도와 눈에 뿌리는 호신용 스프레이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제리는 약도를 받고난 뒤, 기숙사 사감이 왜 앓는 소리를 내며 ‘루트가 하나 더….’라고 중얼거렸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레이븐은 제리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매서운 눈으로 제리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제리는 침착하게 눈을 깜빡이며 레이븐을 마주보았다. 그는 곧 제 분에 못 이기고 씩씩거리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 더 이상 네게 손을 대지는 않을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제리의 비아냥거림에 레이븐은 잠시 망설이다 욕을 중얼거렸다. 제리는 레이븐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것에 감사했다. 지금처럼 속내를 다 드러내는 편이 훨씬 상대하기 편했다.

“내 친구들에게도 술수 부리지 마.”

“……너도 4황자에게 이상한 바람을 불어넣는 건 그만둬. 이건 경고야.”

카르얀이 아니라 일리야를 지지하는 쪽이었던가? 비록 이번 일은 그가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해도, 정치적인 사상은 제 가문의 것을 그대로 따르는 모양이다. 그런데 레이븐이 일리야와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난 그런 적 없어.”

“황태자와 친분이 있는 네가 아니었다면 4황자는 지금처럼 힘을 숨기고 있지도 않았겠지.”

“일리야가 무슨 힘이 있어.”

“네가 아니었다면 그가 하급 반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을 거야.”

그는 비범해. 다른 놈들과는 뭔가 다른 게 있다고. 레이븐은 믿어 의심치 않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뭐지? 얘 설마 일리야가 정말 실력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 마법이라면 모를까, 검술은 정말 별거 없다고 그랬어. 제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코웃음을 쳤다.

“이에 대해서는 함구해. 누군가에게 이에 대해 말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죽여 버릴 테니까.”

그는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내며 제리를 위협했다. 센 척하는 꼴이 아주 귀여웠다. 제리는 겁을 먹은 척 시선을 돌렸다. 레이븐은 이만하면 제리가 제 말을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하곤 발소리를 내며 뒤돌아 걸어가 버렸다.

‘스승님마저 일리야의 검술 실력은 영 아니라고 했는데….’

대체 무슨 근거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스승님 말이 틀릴 리가 없는데 말이다. 제리는 레이븐의 경고를 무시하고 일리야에게 사실 여부를 직접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일리야, 지난학기 성적 어땠는지 물어봐도 돼?]

[갑자기 그건 왜…?]

레이븐 얘기를 하며 이러이러해서 궁금하다고 묻는 것은 조금 위험할 것 같았다. 제리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글씨를 써넣기 시작했다.

[난 네가 훈련하는 걸 한 번도 못 봤잖아. 그래서 얼마나 잘할지 궁금해.]

만년필을 종이 위에 댄 채로 고민하는지, 종이 위로 새까만 잉크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한참 뒤, 그 옆에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보고 싶은 거야? 왜?]

[왜? 그냥 보고 싶어.]

또다시 고민의 증거로 까만 잉크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종이 위에 퍼져나갔다. 몇 분 뒤 일리야가 답을 써넣었다.

[아직 보여줄 수 없어.]

[왜?]

[검술학과의 오랜 전통이야. 다른 사람에게 훈련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 돼…. 검사로서의 수치거든.]

검사로서의 수치라고? 제리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하지만 형들은 제리가 아카데미에 입학도 하기 전부터 제 앞에서 검을 멋있게 휘두르는 모습을 보이며 누가 누가 잘하나 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건 그냥 가족이라 가능했던 일인가?

[정말 안 돼?]

[당연하지. 내게 수치를 강요하는 거야? 너무해….]

뭔진 몰라도 내가 나쁜 건가? 내가 실수한 거지? 제리는 잠시 망설이다 사과했다.

[미안.]

[괜찮아. 고학년이 되면 무투회에 나갈 수 있어. 그때는 볼 수 있게 해줄게.]

수확제 날이 되면 아카데미에서 자체적으로 열리는 대회는 고학년인 5학년부터 참여할 수 있었다. 적어도 3년은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아니, 안 봐도 돼. 성적도 못 알려줘? 내 것도 알려줄게!]

[미안 나 너무 졸려서 자러갈게…. 제리도 잘 자.]

[자러 간다고?]

“…….”

[지금 오후 네 시야. 벌써 잔다고?]

[일리야]

[일리야?]

그날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후에 형들에게 물어봤더니, 어디서 그런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왔느냐며 헛소문이니 믿지 말라고 웃어댔다.

‘역시, 아니었잖아. 훈련하는 모습 한 번 보인다고 검사의 수치라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일리야가 검술 실력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몰랐지만, 모두 레이븐의 착각일 것이다. 실력을 감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 * *

제리와 두 황자에 대한 소문은 더 이상 돌지 않았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학생들이 억지로 입막음을 당한 것이었다. 늘 벼르고 있던 쌍둥이들이 우연히 막내 동생의 험담을 하는 현장을 목격하자마자 들고 있던 물병을 신나서 나불거리던 놈의 머리 위에다 부어버렸다. 가장 고학년인데다, 검술학과기까지 해 우락부락한 친구들까지 둔 쌍둥이들은 공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시렌은 그들을 동경해 어설프게 따라하느라 마법학과 안에서 소문을 퍼뜨리던 놈들을 찾아가 ‘지난번에 휴학계 낸 놈 손목, 내가 잘라버렸어. 너도 원하냐?’라고 거짓말을 해 학장실에까지 불려갔다. 슬슬 저들을 말려야 하지 않냐는 동기의 속삭임에 제리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왜 말려. 잘하고 있는데.”

그러게 누가 뒤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니래. 다 인과응보였다.

레이븐은 약속대로 더 이상 제리와 주변인들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와는 이따금씩 교정을 거닐다 만나면 서로 눈싸움을 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제리도 여전히 카르얀과 일리야를 만나고 다니기는 했지만, 2학기가 되니 실습할 시간도 부족해 도서관은 평소보다 덜 찾게 되었다. 일리야도 점심시간이면 잠깐 와서 체력만 회복시켜주고 어디론가 바삐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요즘 네 친구 되게 열심이더라.”

“누구. 일리야?”

제리의 물음에 로베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리야의 근황을 이야기해주었다. 일리야는 제 얘기를 많이 하지 않아서 듣는 이야기마다 새로웠다. 그들은 제리가 유심히 듣는 것을 확인하자 신이 나서 기억을 더듬어 기억나는 모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얼마 전 일리야가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교수님을 세뇌하려다 그가 설치해둔 마력 탐지기에 걸리고 말았다는 이야기에서 제리는 기함을 하고 말았다.

“아니, 거기에 마력 탐지기가 왜 있는데?”

“제리, 왜 있을 것 같아?”

쌍둥이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키득거렸다. 사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것도 일리야 때문이야?”

웃는 걸 보니 정답인 듯했다. 일리야가 1학년 때 환상 마법으로 검기를 만들어낸 일을 계기로, 이후에도 이런 신입생이 나올 것을 대비해 거금을 들여 마력 탐지기를 들인 것이다.

일리야는 제리가 그 사실을 전해 들었다는 걸 알지도 못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시험을 통과했다고 말했다.

“통과했다고?!”

“응.”

“어떻게?”

또 사기를 치려고 시도했으니 당연히 재시험을 볼 줄 알았다. 그런데 용케도 시험을 통과하기는 한 모양이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놀라는 제리를 보며 일리야의 눈이 웃는 것처럼 가늘어졌다.

“나머지 절반은 재시험이래. 그런데 나는 아냐….” 

“아, 우와아….”

“…….”

“대, 대단해.”

칭찬까지 해주자 일리야는 입술을 살짝 물고서 희미하게 웃었다.

‘…근데 너 사기 치려고 했잖아.’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정당당히 시험을 치루고 그 결과 통과했으니, 굳이 그 얘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아카데미에서의 두 번째 방학을 맞았다. 곧 있으면 제리는 열세 살이었다. 제리는 두 학기의 성적표를 시어스의 앞에 내밀었다. 그는 모든 과목에서 ‘특출함’을 받아 학과의 학년 수석 자리를 차지했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시어스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그랬잖니, 제리 네겐 재능이 있다고.”

“언제요? 그런 적 없어요! 저 수업도 엄청 많이 들었….”

“그랬니? 그럼 지금 말해주마. 제리 네겐 재능이 있단다. 그만한 힘을 가지고 수석이 아니라면 그게 이상한 거지.”

“…….”

순전히 제 노력에 의거한 결과인데, 힘이나 재능을 운운하는 시어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망할. 그냥 잘했다고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솔직히 칭찬을 바랐던 제리가 그 말 이후로 부쩍 말이 없어지자, 시어스는 그제야 제리가 원하는 말을 원없이 해주었다.

“농담이다, 제리.”

“…….”

“잘했다. 모든 과목에서 특출함은 나조차도 못했던 일이야.”

“아, 네.”

“열심히 했구나? 이 정도면 추천장 없이도 마탑에 들어갈 수 있겠어. 혹시 네게 더 공부할 생각이 있다면 이 스승이 나중에 추천장을 써주마.”

“넵.”

“…혹시 화났니?”

“네.”

심드렁한 제리의 대답에 시어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거짓말이라도 하면 어디가 덧나느냐?”

“…스승님 때문에 이제 거짓말도 못하잖아요. 언제 풀어주실 건데요?”

“예전엔 참 귀여웠는데 말이야…. 이젠 스승에게 대들 줄도 알고, 많이 컸구나.”

제리는 제 말에 스승이 조금 당황할 정도로는 자신이 자랐다는 생각에 들떠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시어스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놀림을 당했다. 그동안 자신만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시어스는 이전보다 더 얄미워져, 제리의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능글맞게 입을 놀려댔다. 시어스는 화가 났냐는 말에 부들부들 떨며 목도리가 답답해서 덥다고 소리치는 제리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래야 자신의 제자답다며 다갈색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제리는 단 한 번도 수석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딱 하나, 마법약 과목만 빼면 모두 ‘특출함’을 받았다. 새로 온 마법약 교수는 기준이 매우 깐깐해 전교에서 딱 한 명만 ‘특출함’을 받았는데, 그게 헨리였다.

“마법약에서 특출함이라니, 그게 사람이야…?”

제리가 경악을 하며 중얼거리자, 칭찬에 면역이 없는 헨리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헤헤 웃었다. 시렌은 둘 다 배신자라며 ‘다소 문제 있음’으로 가득한 성적표를 구겼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둘에게 아침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은 매우 즐거웠지만, 체력 감소 문구가 아니라면 이 세계가 게임 속의 세계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발생하는 일일 퀘스트로 체력과 호감도를 올리는 것 이외에 별다른 특별한 일이 없어 조금 불안해질 정도였다.

게임 시스템이 언제 돌변해 제리의 삶의 방향을 바꿔놓을지 모르니 불안이 더 커져갔다. 때문에 제리는 가이드북을 완성하는 일에 부쩍 집착하기 시작했다. 조각이 몇 개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100개가 넘는 것 같았다.

룸메이트는 불화가 있는 학생들이 방을 바꾸기를 요청하지 않으면 그대로 유지하게 되어 있었다. 시렌은 혼자가 편하다고, 특출함을 받는 괴물들과는 더는 방을 못 쓰겠다고 툴툴거리면서도 단 한 번도 방을 바꿀 것을 요청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몇 년 간 셋은 거의 가족처럼 동고동락하며 지내야 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4학년의 여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손이 닿는 책장의 가장 윗칸에서 마지막 조각을 찾아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손에 들린 마지막 쪽지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동안의 노력은 책의 형태로 제리의 손 위에 살포시 놓였다.

[가이드북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 * *

제리는 급히 기숙사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시렌은 헨리를 끌고 외출을 다녀온다며 나간 지 오래였다. 해가 다 지고 나서나 돌아올 테니 눈치를 보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가이드북.”

그 말과 동시에 손 위에 묵직한 책이 한 권 놓였다. 겨우 이거 하나를 얻으려고 4년이나 도서관을 들락날락했다고 생각하니 좀 허무하기도 했으나, 벅차오르는 감정이 더 컸다.

빳빳한 책표지를 넘기자 가장 첫 장의 중앙에 한 문장만이 쓰여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계속 눈에 밟혀 한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멀뚱히 해당 페이지만을 내려다보았다.

전체 목차

1. 능력치

2. 아이템

3. 이벤트

4. 공략 인물

 (1) 아인스 루트

 (2) 로베인 루트

 (3) 조이 루트

 (4) 시렌 가르시에

 (5) 카르얀 디페리우스

 (6) 일리야 디페리우스

5. 엔딩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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