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0/29)

#02_4

한 시간쯤 지나자 일리야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렌마저 잠에서 깨어났다.

“아, 너, 크흠!”

시렌은 일리야를 보며 헛기침을 해댔다. 제리는 그를 꺼림칙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대체 어젯밤 헨리와 둘이서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쳤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야, 안 돌아가는 머리 쓸데없이 더 굴리지 마.”

제리는 시렌의 얼굴에 그가 허물처럼 벗어둔 양말을 집어 던졌고, 질색을 하며 시렌이 펄펄 날뛰었다. 일리야에게 맞을만한 옷은 시렌의 것밖에 없었기에, 그는 임시방편으로 그의 옷을 던져주었다.

“나 돌아왔네….”

일리야는 다시 커진 손이 신기한 듯 쥐었다 펼치기를 반복했다. 제리는 머리맡에 구겨진 셔츠의 여기저기가 뜯어져 있는 것을 보며 어린 일리야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도 제리에게 일리야는 여전히 애지만, 어제 모습과 비교해보면 그새 상당히 많이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어볼 게 있어요!”

헨리는 일리야에게 용기 내어 말을 걸었다. 언제 몸이 변화했는지,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아팠는지, 그리고 원래 몸으로 돌아온 것은 언제인지 질문을 퍼부었지만, 일리야는 ‘몰라’라든가 ‘기억 안 나’라는 성의없는 답으로 돌려주었다. 헨리는 기대했던 성과를 하나도 얻지 못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똑같은 걸 더 만들어봐야겠어!”

헨리는 비장하게 주먹을 그러쥐며 그때와 똑같은 비율로 시약을 몇 개 더 만들어봐야겠다고 재료를 사러 가자고 말했다.

“나도 갈래.”

제리도 슬쩍 손을 들었다. 그는 시약에 들어간 재료를 알아내 다시 털이 자라게 하는 치료법을 알아내고자 했다.

‘쟨 왜 따라와?’

일리야는 다시 몸이 원상태로 돌아왔으니 당연히 기숙사로 돌아갈 줄 알았건만, 그들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기 시작했다. 할 일이 없느냐 묻자, 늘 한가하단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그에게 매정하게 꺼지라고 할 수는 없으니 제리는 일리야를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금방 사서 나올게. 여기서 기다려!”

둘은 좁은 골목길을 들어가 상점 팻말도 안 붙어 있는 곳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같이 가자니까!”

제리는 가게 앞에서 그저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무슨 재료가 들어가는지 알아야 다시 원래 몸을 돌려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는 일리야와 함께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딸랑, 가게 문 위에다 걸어둔 방울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여기저기에 괴상한 마법약 재료들이 유리병에 담긴 채 선반에 놓여 있었다.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나는 느낌도 들었다. 재료들 가운데에는 아직 살아 있는 건지 움직이는 것도 있었다.

[체력이 모두 회복됩니다.]

일리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제리의 오른손을 잡고 체력을 회복시켜주었다.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자, 그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안 아프지?”

“…….”

하루 종일 오른손을 움직이지 않고 있던 것을 용케도 눈치 챈 모양이다. 하지만 일리야가 회복시켜주는 것은 체력수치뿐이지, 상태 이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제리는 억지로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치를 낮춰둔 덕에 감각이 둔해져 전혀 아프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아, 찾았다.”

“…설마 이것도 들어가?”

헨리가 들어올린 병 속에서 파충류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빙글빙글 돌았다. 또르륵 굴러가던 눈알이 제리를 향했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눈알뿐이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이건 커프크스 도마뱀의 눈알이야. 즙만 짜서 넣는 건데, 잘못 복용하면 온몸의 털이 다 빠져.”

헨리는 친절하게 재료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었다. 제리는 제게 일어난 문제의 원인이 이것에 있음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데?”

“그냥 그게 다야. 털이 다 빠져.”

“그리고?”

“그대로 영영 자라지 않는대. 예전에 마탑에서 커프크스 도마뱀에 대해 연구한 자료가 있었는데….”

제리는 신이 나서 자신이 아는 사실에 대해 늘어놓는 헨리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간에 뱉어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젊은 나이에 대머리가 될 수는 없으니까. 머리털과 눈썹을 남겨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건가. 헨리는 비율을 잘못 조절하면 일어나는 일이니 그런 실수는 하지 않는다고 하며 순하게 웃었다.

“…….”

네가 뭘 알아. 제리는 그런 그에게 비율이 잘못 조절된 걸 자신이 먹어 사타구니가 맨들맨들 해졌다고 말할 수 없어 입을 꾹 다문 채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거기 젊은이, 점 한 번 보고 가게.”

어딘가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코까지 까만 망토를 둘러쓴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제 키만한 지팡이를 들고 제리를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저요?”

일리야가 제리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제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리도 그렇게 생각했다. 괜히 수상한 자에게 이끌려 점을 봤다가 덤터기를 쓰느니, 아예 처음부터 보지 않는 쪽이 나았다. 그렇게 남자를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제리는 발걸음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책을 봤구먼, 그래. 이번에는 용케도 찾아냈어….”

“책?”

제리가 고개를 돌리자, 남자는 킬킬 웃으며 마저 말했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사서 걱정하는 성격은 여전하군.”

“…….”

왜 나를 아는 것처럼 굴지? 제리의 관심이 모조리 남자를 향했다.

“그리고 그 책. 거기에 쓰인 대로 일이 흘러갈까 두려운 게군. 그렇지 않나?”

주름진 손이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소름이 끼쳤다. 제 생각이 맞다면 남자는 가이드북을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책은 제리만이 볼 수 있었고, 제리 이외의 사람은 안이 텅 빈 공책으로 보인다고 했다. 책상 위에 실수로 놓아둔 책을 시렌이 펼쳐보고 얼마나 공부를 더 열심히 하려고 빈 공책을 또 샀냐고 윽박을 질렀었다.

“지금 함께 있군.”

“…….”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제리와 일리야를 번갈아 가리키며, 남자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제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싸게 해 줄 테니 점 한 번 보고 가게.”

“…….”

보고 갈까? 엄청 용한데?

“속지 마, 사기꾼이야….”

흔들리는 제리를 내려다보며 일리야가 속삭였다. 사기꾼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자는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제리는 남자를 그냥 지나치기는 뭔가 찝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앞에서 무슨 일인가 싶어 뒤돌아보는 시렌과 헨리에게 재미삼아 점을 한 번 보고 싶다고 말했다.

“점?”

“야, 넌 뭔 저런 걸 믿냐. 돈 낭비야!”

“제리, 사기꾼이야…. 시어스랑 닮았잖아.”

스승님이랑 닮았다고? ……전혀. 얼굴도 다 가리고 있어서 모르겠는데.

“그런데 일리야. 스승님이랑 닮으면 사기꾼이야? 스승님한테 사기꾼이라고 했다고 다 말한다.”

“그거 협박이야?”

“응.”

“제리.”

“왜 불러.”

“좀 더 분발해…? 진짜 하나도 안 무서웠어.”

“…….”

그러고보니 무척 어릴 때부터 일리야는 스승님의 말씀을 무시하곤 했었다.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자신이 하려는 말을 고집해 말하는 게 웃기기도 했었는데. 그걸 생각해보면 일리야에게 제 말은 협박이 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왜 그렇게 싫어해? 내가 낼게. 재밌을 것 같잖아. 한 번만 보고가자. 응?”

남자는 제리가 제 말에 거진 다 넘어왔다는 것을 알고는 킬킬 소리를 내며 낮게 웃었다.

“따라오게.”

그는 뒤돌아서 얇은 천막 문을 헤치고 먼저 안에 들어갔다.

“제리… 그냥 가자.”

일리야가 불안한 듯 제 소매를 잡아왔지만 제리는 마음을 되돌릴 생각이 없었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재미삼아 점 한 번 보는 건데, 뭐.

제리는 남자의 뒤를 따라 엉거주춤하게 천막에 들어갔다. 분명 자신을 걱정해 뒤따라 들어올 거라 생각했던 일리야는 들어오지 않았다.

“일리야?”

제리는 다시 뒤돌아 일리야를 데리고 들어오려 했지만, 남자가 헛기침을 하는 바람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제리를 향해 말했다.

“자네 친구는 들어올 필요가 없다네.”

“네?”

“필요한 사람만, 필요한 만큼 듣고 가는 거야. 자네 친구는 내 손님이 아니니 들어올 필요가 없다는 소리라네. 어서 와서 앉게.”

“……?”

일리야가 좀 떨떠름해 보였었는데, 점괘와 같은 불확실한 미신을 싫어하는 걸까? 설마 그렇다고 해서 따라 들어오지도 않을 줄은 몰랐다.

천막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게 막아 주위가 캄캄했으며, 불빛이라고는 책상 위에 놓인 촛불뿐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도구도 많았다. 모두 점을 치는 데 쓰이는 것이라 생각하니 절로 흥미가 들었다. 제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남자의 앞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이벤트 구역에 들어오셨습니다.]

“……?”

이벤트 구역이라니? 이런 말은 처음 보는데. 제리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남자를 홱 돌아보았다.

“보아하니 갈망하는 게 있어서 왔군. 하지만 이미 잃은 건 되돌릴 수 없다네.”

“잃은 거?”

다짜고짜 잃은 걸 되돌릴 수 없다니. 제리는 자신이 잃은 게 무엇이 있었나 생각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런 거 없는데요.”

“잘 생각해보게.”

“…….”

제리는 기억을 되짚어보다 문득 생각난 것에 표정을 굳혔다.

‘서, 설마 내 털을 말하는 건가?’

그 표정에 남자가 낄낄 웃으며 끝이 빨간색으로 칠해진 막대기들을 상자에 집어넣었다.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 게야.”

“네?”

“포기하게.”

“아, 아니, 전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어떻게…! 내…!”

씨발, 내 털!

“헛된 희망 버리게. 무슨 짓을 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리의 시선이 갈팡질팡 흔들렸다.

“……다시는?”

“다시는. 그냥 미련을 버리면 편할 걸세.”

“…….”

이젠 어디서 함부로 옷을 벗지도 못하겠다. 분명히 놀림거리가 될 테니 말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함께 목욕을 하는 것도 두 번 다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부터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어. 자네는 누구인가?”

“제리요. 제리 루트.”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신할 수 있나?”

“……?”

그냥 이름을 말한 것뿐인데 확신을 할 수 있냐니. 말이 조금 이상했다. 꼭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 같아 제리는 말을 잠시 잃었다.

“됐네.”

“…….”

왜 혼자 묻고 혼자 됐다는 건데.

“아직은 몰라도 되네. 시간은 많아. 그건 차차 알아가면 되는 걸세. 일단은 넘어가고. ….”

“…….”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군.”

그 말에 제리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시스템’창이 여기가 이벤트 구역이라고 그랬다. 게다가 아까 전, 천막 안에 들어오기 직전에, 이 남자는 꼭 가이드북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이 사람은 NPC같은 건가?’

보통 게임에서 진행을 돕는 인물이, 여기라고 없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제리에게 발생하는 시스템창은 게임의 그것이 맞아 보였으니까.

‘NPC가 맞다면 앞으로 이 세계랑 내 일들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고 있다는 소리겠지?’

만일 그렇다면 묻고 싶은 건 많았다. 어째서 몇몇 인물의 이벤트는 제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고 있는 건지. 그리고 책에 쓰인 대로 이벤트가 진행되다가 ‘엔딩’을 보고 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혹시….”

제리는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남자는 쉿, 하고 그의 말을 초장에 가로막았다.

“젊은이가 무엇을 물어봐도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네.”

“엥?”

뭐야, 물어보라는 것처럼 말해놓고. 장난해?

“너무 많이 알아가는 것은 독이 될 뿐이야. 그러니 잠자코 듣기만 하게. 그냥 듣기만 해….”

“…….”

그는 막대기들을 집어넣은 상자를 거꾸로 뒤집어 잘그락대며 흔들었다. 곧 버석한 손가락 사이로 막대기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그 막대기를 뽑아내 자세히 살피더니 말했다.

“자네가 걱정하는 일은 내년 겨울부터 일어나기 시작할걸세.”

제리가 열여섯 살이 되는 날도 겨울이었다.

‘내 생일부터 모든 게 달라진다고 했지?’

그렇다면 내년 겨울부터가 맞아. 그의 말에 신뢰가 좀 더 생겼다. 제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으음, 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 상자를 흔들어 막대기를 하나 더 꺼냈다. 그는 한참 막대기 끝을 만지작거리다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전까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정해진 대로. 또는 원하는 대로 흘러갈 테니.”

“…….”

“다만 운명을 너무 피하려고 들지 말게. 자칫 잘못하면 그 운명이 반드시 이를 드러낼 걸세.”

그걸 피하지 말라고? 자칫하면 형들이랑 근친혼에, 더 엇나간다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는데 그걸 어떻게 피하지 말라는 거야.

“만약 피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남자는 제리의 물음에 상자를 달그락거렸다. 이번에는 두 개의 막대기가 함께 나왔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교차된 모양으로 책상 위에 내려앉은 막대기를 내려다본 그는 이번엔 얼마 고민도 하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어떻게 되지는 않을 걸세. 다른 쪽으로 흘러가겠지.”

“…다른 쪽이요? 나쁜 쪽인가요?”

“다 자네 하기 나름이야.”

이런 대답은 나도 하겠다. 제리는 황당한 듯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미 많은 것들이 변화하지 않았는가. 좋은 징조야.”

변화…. 정말 이 사람이 무언가 알고있는 게 아닐까? 나에 대해서, 혹은 ‘시스템’에 대해서. 제리는 그게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렇지 않나? 미래는 정해진 게 아니야.”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얽혔다. 가이드북에는 수십 갈래의 엔딩이 있고, 능력치와 호감도를 조절해 그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엔딩’이라 불리는 그런 미래를, 과연 ‘정해진 게 아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건 말 그대로 끝을 가리키는건데 말이다.

‘끝….’

엔딩 생각을 하니 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의 말대로였다. 이미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그래서 더 불안한 것이다. 미래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고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변화할대로 변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리가 미래를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 선택에 달린거라고요?”

“그럼.”

내가 노력하는 만큼 능력치가 쌓여. 그리고 그 능력치에 따라 다른 엔딩을 볼 수도 있는거야. 제리는 결연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만일 제가 자칫해서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요?”

“모두 틀어지겠지.”

“…….”

“다치지 않을 사람이 다치고, 반드시 죽었어야 할 사람이 살아날 수도 있어. 운명이란 그런 법이라네. 한순간의 선택에 휩쓸리듯 변화하는 거야.”

“그럼 저더러 어쩌라는거에요….”

자꾸 돌려 말하듯 하니까 이해를 할 수가 없잖아. 제리는 작게 툴툴거렸다.

“다 자네에게 달렸다네. 모든 일이 다시 무용지물로 돌아갈지, 이번에야말로 정말 끝을 볼 수 있을지는 모두 자네 하기 나름이야.”

“…….”

“이번엔 잘 할 수 있겠지? 매 순간 신중하게 굴어. 그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 그게 정답일걸세.”

나는 늘 그래왔는데. 신중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나? 남자는 고민하는 제리에게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을 거듭해 말했다.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이미 충분히 조심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여기서 뭘 어떻게 더 조심하라는 거야!

“엔딩… 아니, 제 미래를 본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미래의 뒤에는 또 다른 미래가 있는 거라네.”

“또 다른 미래가 뭐예요?”

“말 그대로일세.”

“왜 자꾸 말을 하다 말아요…. 전 다 끝나면 결국 어떻게 되는데요?”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겠지.”

원래 있어야 할 곳?

“…….”

별안간 드는 생각이 있었다. 원래 있어야 할 곳? 그건… 내 원래 몸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야?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분명 그곳의 난 죽었을 텐데. 웬만해선 살아 있을 리가 없는데….

“제가 죽나요? 그러니까 제가, 그… 돌아간다는 게….”

“죽다니? 자네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이 관 속인가?”

“그건…… 모르겠어요.”

그는 피식 웃었다.

“자네는 여전히 걱정이 많군.”

“꼭 저를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착각일세. 무튼 걱정만 하는 것은 좋은 버릇이 아니야. 일이 일어나고 나서 걱정해도 늦지 않으니 말일세.”

뭐라는거야. 죽은 뒤에 걱정하면 늦잖아? 남자는 씩 미소지으며 입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만들었다.

“하지만 생각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야. 미물과 사람을 구분 짓는 것은 스스로 사고할 줄 아는 것에서 오지. 좋은 일이야, 좋은 일.”

“아, 예.”

“하지만 젊은이, 그저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행동하는 게 더 중요한 것이라네. 자네 소신에 따라. 내 말을 너무 맹신하지 말게. 재미삼아 보는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재미있었으면 되었어. 재미있었으면….”

“아, 네.”

“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말게.”

“…….”

“자네는 누구인가, 그걸 늘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해.”

내가 누구냐니. 이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뭐야. 그냥 미친 사람이라 보기에는 무언가 알고있는 것도 같고,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게 정답이라 생각되는 답을 주지도 않으니 답답하기만 할 따름이다.

“참, 내 선물을 하나 주지.”

그는 제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리는 손을 움찔 떨었지만, 제 손을 잡은 남자의 힘이 너무 강해 손을 뒤로 빼낼 수도 없었다.

[신의 점쟁이 이벤트를 통해 새로운 기능이 열렸습니다.]

[공략 인물의 격렬한 감정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선물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호감도 수치로 모두 알 수 있는걸.

“그리고 현실을 살아, 젊은이.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게 좋아. 아프다고 해서 그걸 모두 피하려 들지 말게.”

“네?”

“손톱에서 피가 나는데 전혀 모르고 있지 않나.”

제리는 오른손의 손톱 네 개 안에 새빨간 울혈이 생긴 것을 확인했다. 하나도 아니고 네 개나. …언제 다쳤지? 수치를 0으로 내려놓으니 아픈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어디를 다쳐도 어디서 어떻게 다친 건지 알 수 없다는 단점도 있었다. 하지만 평생 0으로 살아갈 것도 아니고. 오른손 저림이 풀리면 그때 다시 내려도 늦지 않다.

“현실을 살게, 현실을.”

난 이미 현실을 살고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제리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다 이내 억지로 웃었다.

“걱정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아서 할게요. 참, 복채.”

돈을 꺼내려는 제리를 저지하며 남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음에 한 번에 받지.”

“다음에? 언제요?”

남자는 주름진 손을 들어 제리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이게 좋겠어. 색이 아주 마음에 드는군.”

“아, 이건….”

“당장은 괜찮아. 시간이 조금 지나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걸 내게 주게.”

“…….”

안 되는데. 이건 스승님이 주신 건데. 잠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말라고 하셨던 건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게 몸에서 멀어지면 몸이 조금 무거워진다. 달란다고 해서 선뜻 주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또 볼 일이 생길 걸세. 그 땐 아마 자네에게 그 물건은 필요하지 않을 게야. 암, 그때 한 번에 받아가도록 하지.”

그는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내며 킬킬거렸다. 왠지 남자가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본인이 지금 필요 없다는데 굳이 돈을 억지로 내밀 필요는 없어보였다.

“네, 그럼 다음에.”

제리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뒷걸음질을 쳐 천막의 문을 헤치고 나왔다. 갑자기 눈에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제리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이벤트 구역을 벗어나셨습니다.]

역시 뭔가 있어. 이벤트 구역이란 건 뭔가 특별한 장소였다는 소리잖아.

[기묘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마법+10]

“제리!”

“어?”

별안간 일리야가 제리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갑자기 왜 이래? 제리는 그 힘에 비틀거리면서도 넘어지지는 않았다.

[일리야 디페리우스가 당신을 걱정합니다.]

“…일리야? 내 걱정했어? 왜?”

그는 대답 대신에 제리를 꼭 껴안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나 아픈 것 같아.”

“…….”

“야. 아프니까 놓으라고. 죽고싶냐?”

그의 가슴에 얼굴이 묻힌 제리가 웅얼거렸다. 일리야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제리의 체력을 몇 번이나 회복시켰다.

그렇게 걱정이 됐다면 따라 들어왔으면 됐을 텐데. 싫어서 안 들어온 거면서….

“왜 이래. 응? 너 어디 아파?”

“……제리이….”

한편, 시렌은 천막을 발로 툭툭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제리, 이거 뭐냐?”

“그 안에서 점 봤어. 왜? 너도 보게?”

“뭔 소리야. 무슨 짓을 해도 안 열리던데. 안이 막혀 있다고.”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분명…… 어?”

제리는 천막의 문을 다시 손으로 걷어내 보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어떤 공간도 없이 나무토막 같은 것으로 틀어 막혀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사람도 안에 없었다.

‘……뭐지. 이벤트 구역이라 다시 들어갈 수 없는건가?’

믿을 수 없었다. 남자가 마법사였나? 그래서 천막 문을 통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든가? 공간 내를 다른 공간으로 연결하는 마법은 어떤 책에서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제리는 조금 흥미가 일었다.

“네가 안에 있어서 태우지도 못했잖아. 이 천은 용가죽으로 만든 건지, 칼로는 뜯기지도 않더라.”

“그냥 평범해보이는데, 진짜 신기하다.”

“신기하긴. 대체 너 어디에서 나온 거야? 그 점쟁이는 뭐라든?”

“몰라. 다 이해하지는 못했어.”

“돈낭비라고 했지, 내가? 그러게 말을 들었어야지. 내 말 들어서 나쁠 거 하나도 없어!”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너 또 나 무시하지!”

제리는 옆에서 재잘거리는 시렌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모두 넘겨버렸다. 그때, 일리야는 손끝에서 불씨가 일어났다. 천막에 불이 붙으며 점차 크게 번지기 시작했다. 이상함을 느낀 제리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일리야!”

“…….”

깜짝 놀란 제리가 일리야의 이름을 불렀다. 일리야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제리의 어깨를 감쌌다. 뒤늦게 시렌이 천막 위에다 물을 퍼부어 불길을 진화해보려 했지만, 빠르게 번진 불길은 천막을 손쉽게 불태워버렸다.

“……?”

하지만 그 안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천막을 지탱하고 있던 뼈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가자, 제리….”

그건 누구였을까. 왜 날 도우려고… 조언을 주려 했던거지? 제리는 새까맣게 죽은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뒤를 계속 돌아보았다. 손톱은 한 달이나 지나고 나서야 제 색으로 돌아왔다.

* * *

15세의 수확제.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대로라면 아인스 형과 함께 있을 때 이벤트가 발생해야 했다. 함께 나가 가판대를 구경하던 제리의 물건을 소매치기가 훔쳐가고, 아인스는 그를 쫓아 제리의 물건을 찾아주는 간단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제리는 오랜만에 나가 축제를 구경하자는 첫째형의 부탁을 거절했다.

“…몸이 안 좋니, 제리?”

“그런 건 아니야, 형. 오늘은 집에만 있고 싶어서…. 나 너무 힘들어.”

사람들한테 치이는 것도 귀찮고, 내일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하니 체력을 아껴둬야 하니까…. 심드렁한 제리의 말에 아인스는 어쩔 수 없이 외출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조이와 로베인이 방에 쳐들어와 제리의 팔을 한쪽씩 잡아 일으켰다.

“…왜?”

“왜긴! 일단 걸어.”

“말 안 하면 나 안 갈 거야.”

“아니, 다시 아카데미로 들어가기 전에 불꽃놀이는 봐야 할 것 아니야.”

말하는 걸 보면 수확제 기간 동안 한 번도 불꽃놀이를 보지 못한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수도 어디에서든 하늘에 수놓아지는 아름다운 불꽃을 볼 수 있었다.

“불꽃놀이라면 어제도 봤잖아. 정원에 앉아서.”

“여기서 보는 거랑 높은 데서 보는 건 다르지!”

“……?”

높은 곳? 높은 데라고 해봤자 고작 한 층 올라가 발코니에서 보는 거라 풍경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로베인에게 이끌려 방을 나가자, 아인스가 제리의 어깨에 얇은 옷을 걸쳐주었다. 제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아인스가 엷게 웃으며 말했다.

“밤엔 추우니까. 감기라도 걸리면 고생하잖니.”

작년, 감기를 우습게 봤다가 한 달 내내 잔기침을 달고 살았던 기억이 났다. 금세 납득하고 소매에 팔을 꿰어 얌전히 옷을 입는 막내 동생을 아인스는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인스 루트가 당신을 애틋하게 생각합니다.]

“…….”

점쟁이를 만난 이후 가끔씩 떠오르는 이런 문구는 제리로 하여금 굉장한 부담감을 주었다. 애틋하게 생각… 그럴 수 있다. 다만 그게 이상한 쪽으로 발전하지 않기만을 제리는 바라고 또 바랐다.

나는 누구인가. 그에 대해 계속 생각하라고 말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생각해보고는 하는데,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제리 루트의 몸에 들어왔으니 이제는 제리인 것인가? 아니면….

‘다 자네 하기 나름이야. 이미 많은 것들이 변화하지 않았는가. 좋은 징조야.’

노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침범했다.

‘미래는 정해진 게 아니야.’

“…….”

그래, 미래는 바꾸면 되는 거야. 바꿀 수 있다고 했잖아. 이미 바뀌기 시작했다잖아. 그러니 열심히 살면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꼭 직업 엔딩을 봐야 해.’

점쟁이 노인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제리는 결의를 다짐했다.

3층의 발코니로 가는 줄 알았던 형제들은 제리를 이끌고 좀 더 안쪽을 향해 걸었다. 긴 복도를 지나, 가장 끝부분의 창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아인스가 창문 너머로 발을 디뎠다. 뭐야, 뛰어내린 거야? 제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리, 거기가 아니야.”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는 아래가 아니라 바로 옆쪽에서 들려왔다. 장식처럼 튀어나온 벽돌을 밟고 옆의 지붕으로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아인스는 지붕 끝에 아슬아슬하게 선 채 손을 내밀었다.

“자, 제리부터 넘어와. 서두르지 말고.”

“…….”

쯧쯧, 겁도 없는 놈들.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최소 골절, 잘하면 사망이라고. 제리는 이 꼴을 백작부인이 보면 화를 내다 못해 아들들의 멱살까지 잡을 것을 짐작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어머니가 없으니 괜찮을 듯했다. 그리고 혼나더라도 자신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거니 형들만 혼날 것이다.

“조심해.”

조이는 제리의 손을 꽉 잡고 창밖으로 넘어가는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아인스만큼 빠르지는 않았지만, 차근차근 천천히 벽돌을 밟아 제게 뻗어 있는 아인스의 손을 잡자, 그가 제리를 끌어당겨 지붕 위로 올려주었다. 그렇게 차례로 넘어온 네 사람은 조금 더 위로 옮겨 앉았다.

지붕에서 내려다보는 저택의 모습은 색달랐다. 제리는 어스름한 하늘을 올려다보다 아인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형, 오늘 여기 처음 올라온 것 아니지?”

“…….”

“사실 자주 오는 거 아니야? 되게 익숙해 보여서.”

제리의 말에 아인스는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보나마나 뻔했다. 오늘이 처음일 리가 없지. 어머니가 알았더라면 이 창문에 못질을 해서라도 이들이 지붕을 타는 것을 막았을 것이다. 입을 꾹 다문 아인스 대신 로베인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우리도 재작년에 형이 지붕에 누워 있는 거 보고 알았어.”

“괜히 아카데미 탈출 왕이 아니거든. 제리,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쌍둥이들이 신이 나서 낄낄거렸다. 제리는 덩달아 키득거렸다. 아인스만이 웃지 않았다. 한밤중에 벽을 타고 마굿간에서 말을 훔쳐다 집으로 달아난 아인스의 이야기는 아직도 전설처럼 전해진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가 아카데미로 돌아오기 전까지 누군가 기숙사를 몰래 탈출했다는 것을 사감이 눈치 채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이후로 아인스가 처음 사용했던 탈출법을 알게 되어 사감들이 학생들의 새벽 탈출을 예방하느라 온 방법을 다 쓰기는 했지만, 아인스는 또 다른 길을 찾아내 그들의 보안을 뚫었다. 제리는 아인스에게 약도까지 받아 모든 방법을 다 알고 있었다.

“…제리, 이건 어머니께 말하지 마.”

이번엔 정말 크게 혼날지 몰라. 떨리는 아인스의 목소리에 제리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사가 저 아래서 손을 흔들고 있었지만 그가 어머니께 이 일에 대해 얘기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인스도 그걸 아는 듯 손을 흔들어 정원사를 아는 척을 하고는 하늘을 보며 드러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사들의 영혼과 황궁의 예산이 펑펑 터졌다. 얼마 전 망할 수확제가 다시 찾아왔다며 짜증을 내던 스승님 생각이 났다. 오늘도 고생하고 계시겠지…. 제리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형들 덕에 잠시나마 고민거리를 잊을 수 있었다.

“제리, 자?”

조심스런 조이의 목소리에 제리는 눈을 살짝 떠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니. 눈만 감고 있었어.”

가을 밤, 화려한 폭죽으로 수놓아진 밤하늘의 풍경은 매우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 * *

‘저게 왜 여깄지.’

화사한 백금발을 가진 남자는 뒤통수뿐이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꼭 이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반가운 듯 눈을 휘어 웃었다.

“카르얀?”

졸업하지 않았었나. 사실은 못한 거…?

…아니, 아니다. 졸업식에도 갔었다. 분명히.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그를 아카데미 내에서 다시 보게 될 줄 몰랐던 제리는 눈을 끔뻑거리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카르얀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는 황궁 기사단 제복을 입은 호위가 둘이나 서 있었고, 이러니 당연히 근처에서 무슨 일인가 싶어 구경하던 사람도 수두룩했다.

“어쩐 일이에요?”

“어쩐 일이긴. 제리 네가 시간 나면 보러오라며.”

“엥, ……제가요?”

‘내가 언제 그랬다고? 최근 들어서는 카르얀에게 편지도 한 적이…….’

“아.”

며칠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시어스가 말을 전해주었나 보다. 수확제 첫날 거리에 나갔다가 광장에서 스승님을 우연히 만났다. 그는 제리를 보자마자 놀릴 구석을 찾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쓱 훑었고, 제리 또한 그를 기색을 눈치 채 그가 입을 놀리기 전에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다가 일리야가 무투회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말이 나왔다.

‘4황자님이?’

‘네! 스승님도 전하랑 같이 시간 나면 보러 오세요.’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훈련한 결과를 제리에게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대회에 참가를 하는 거니까. 그러니 아는 사람이 많이 보러오면 일리야도 기분 좋아할 것이다.

‘허어, 글쎄다. 네 스승은 제… 누구와는 다르게 너무 바빠서… 일단 말은 해보마.’

‘제… 누구요? 그거 저 말하는 거죠!’

‘찔리니?’

‘그게 아니라 분명 제리라고 하시려다 만 거잖아요! 제가 입모양 다 봤는데!’

‘내가 그랬느냐? 잊으렴.’

‘그걸 어떻게 잊으…….’

‘날씨가 좋구나. 그렇지?’

야.

‘이런 날 놀러 다니는 거냐? 배가 아프구나. 여기 조금 앉아 있다 가렴. 4황자님 말고 네 얘기도 좀 해보고.’

그렇게 말하며 말을 돌리길래 둘 다 바쁘다며 오지 않을 줄 알았다. 시어스와 함께 오지 않는다면 당연히 카르얀도 올 리가 없을 테니까. 카르얀이 일리야에게, 그리고 일리야가 카르얀에게 먼저 다가가 아는 척을 하는 꼴을 못 봤다. 둘의 사이가 그리 살갑지 않다는 것을 제리는 알고 있었기에 시어스를 만난 그날, 바로 기대를 버렸었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반갑지 않나봐. 조금 섭섭한데.”

“정말 올 줄 몰랐어요.”

“왜? 네가 와달라는데 내가 안 올 줄 알았어?”

그 말은 꼭 카르얀이 제 부탁이라면 모두 들어줄 것처럼 들렸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감이 그러했다는 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안 올 줄 알았어요.”

“넌 항상 지나치게 솔직해. 그래서 좋은거지만.”

“설마 저 때문에 일부러 온 거예요?”

“물론이지. 그게 아니라면 뭐 하러 시간 내서 나오겠어?”

…일리야를 보러 나올 수도 있지. 하지만 제리는 그를 입 밖으로 굳이 꺼내지는 않았다. 그가 굳이 일리야가 참가하는 대회를 보기 위해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리는 내가 오지 않으면 혼자 볼 테고.”

“아닌데요.”

“지금도 혼자 왔잖아?”

“…….”

반박의 말을 내뱉으려다 그냥 더 어른인 자신이 참기로 했다.

‘야. 내가 너보다 친구는 더 많거든. 지나가면서 인사하는 애들만 몇 십 명인데….’

듣자하니 누굴 친구 하나 없는 머저리로 보는 모양이다.

그냥 일리야만 응원하다가, 그가 1차 예선에서 떨어지면 그때 일리야를 데리고 같이 나오려고 그랬다. 잠깐 보고 말 거니 함께 관람할 친구를 데려올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카르얀은 제리가 친구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는 듯 괜찮다고 그를 어르고 달랬다.

“심심하지는 않겠네. 그렇지?”

“…….”

꼭 개를 쓰다듬듯 뒤통수를 토닥이는것에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야, 나 친구 없는 거 아니라고.

“자다가 바로 나왔구나?”

카르얀이 목을 울려 엷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네?”

“뒷머리가 다 눌렸어.”

“…….”

그야 널 만나게 될 줄 몰랐으니 그렇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고개를 마구 가로저어 그의 손길을 떨궈내자 카르얀은 아쉬운 듯 손을 내리며 미소 지었다. 남녀 할 것 없이 주위에서 힐긋거리는 게 다 느껴진다. 여전히 얼굴 하나만큼은 최고였다.

경기장에 들어가기 전, 외부에서 들어온 잡상인인지 메달 모양으로 된 초콜릿을 팔고 있는 게 보였다. 그냥 지나치려다 햇빛에 반사되어 금빛으로 반짝이는 껍질에 정신이 팔렸다.

‘어차피 일리야는 메달은 손에 넣어보지도 못할 테니까 저거라도 사주는 게 좋지 않을까?’

형인 카르얀까지 자신을 보러 왔는데 예선에서부터 지면 일리야가 더 시무룩해져 어깨가 축 늘어질 것 같았다. 그 불쌍한 어린 애가…. 그 생각에 제리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너무 편하게 나오느라 돈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카르얀. 돈 좀 있어요?”

있겠지. 명색이 황태자인데 수중에 돈 한 푼 가지고 다니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응?”

“지금 얼마 있어요?”

제일 큰 걸로 한 개만 사면 되겠지?

“…….”

“왜요. 얼마 있냐니까요? 진짜 동전 한 푼도 없나?”

카르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제리를 바라보다 실소를 터뜨렸다.

[카르얀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150]

[현 나이에서는 호감도 150이 최대치라 더 이상 오르지 않습니다.]

“……?”

갑자기 뭐지?

일리야가 호감도를 올리는 기준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쩔 때 보면 카르얀이 더했다. 고작 돈 몇 푼 빌려주는 게 그렇게 기쁜가….

“내게 시정잡배 같은 말투로 당당히 돈을 달라 요구하는 건 제리 네가 처음이야.”

“네?”

제리는 충격적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카르얀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내게 맡겨두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당당했어.”

“…….”

‘그런데 호감도를 왜 올려? 미쳤나?’

어렸을 적 제게 정강이를 발로 차이고 처음 운운하던 카르얀이 갑자기 떠올랐다. 발로 찬 것도 처음이고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도 자신이 처음이라고…. 그러고 보니 그때도 호감도를 올렸었지.

‘하긴, 원래도 좀 이상했구나.’

그는 카르얀이 미치지 않았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제리는 다시 그에게 그냥 돈을 빌리려고 한 거라고 변명을 하기 전,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되새김해보았다.

‘카르얀, 지금 돈 좀 있어요? 얼마 있어요? 진짜 동전 한 푼도 없나?’

“…….”

사람에 따라 돈을 강탈하는 부랑자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쩐지 카르얀 뒤의 호위기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쳐다보더라니.

“넌 나를 황태자로 보지도 않는 게 분명해. 늘 한결같이 당돌했지.”

“죄송….”

“사과하지 마. 무례하지는 않았으니까.”

“감사….”

“뻔뻔한 게 네 매력이잖아.”

죄책감을 심어주려는 고도의 전략인지도 모른다. 제리는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툭툭 걷어찼다.

“얼마나 필요한데? 어디에 쓸 거야?”

“…….”

그래도 돈은 빌려줄 모양이다. 이 상황이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카르얀은 연신 피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제리는 웃을 수가 없었다. 눈치없이 따라 웃으면, 그의 뒤에 서 있는 호위기사들이 자신을 가만 두지 않을 기세였기 때문이다.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게 이 지경까지 올 줄이야.

‘억울해. 나도 돈 많은데….’

제리는 앞으로 남에게 돈을 빌리지 않고 화장실을 갈 때에도 비상금을 챙겨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거 사려고요….”

카르얀의 시선은 제리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그 끝에는 열심히 호객 행위를 하며 주전부리를 파는 상인이 있었다. 그의 팔에는 사탕바구니가 걸려 있었고, 주머니에는 지팡이모양 사탕이 가득 담겨 있었으며, 목에 메달 초콜릿 수십 개를 걸고 있었다. 그 외에도 불면 소리가 나는 나팔이라든지 잡다한 물건들을 앞에다 이리저리 늘어놓은 것이 보였다.

“저 중에 어떤 게 가지고 싶은데?”

“저 아저씨가 걸고 있는 메달이요.”

카르얀은 소리를 내어 조그맣게 웃으며 제리도 아는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저거 초콜릿이야. 먹고 싶어서 그래?”

“알아요. 그리고 제 거 아니고 일리야한테 줄 거예요. 저 말고 일리야.”

제리는 카르얀이 착각할까 거듭 일리야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7학년까지 모두 참가하는 대회이니만큼 일리야가 승리할 확률은 현저히 떨어진다. 게다가 그는 검술을 두드러지게 잘하는 편도 아니랬으니까 올해는 메달을 목에 거는 것은 글렀다고 봐야 한다.

카르얀은, 일리야를 떠올리며 짠한 표정을 짓는 제리를 잠시 내려다보다 먼저 잡상인에게 다가갔다. 제리는 한눈을 팔다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는 호위기사 탓에 뒤늦게 카르얀의 뒤를 쫓아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라갔다.

“헤헤, 그럼 다 해서 이백…… 이백 칠십 쿠퍼입니다요.”

잡상인은 헤실거리며 주름진 손을 내밀었다. 기껏해야 백 쿠퍼를 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부른 금액은 생각보다 높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카르얀의 손에 들린 것들을 보고 쏙 들어가 버렸다.

“…카르얀?”

“고개 숙여봐.”

카르얀은 제리의 목에 메달 두 개를 걸어준 뒤 손을 모아 내밀게 하고는 그 위에다 작은 사탕을 와르르 쏟아부어주었다.

“……하나만 사면 되는데….”

“나머지는 네 거야.”

분명히 내가 먹고 싶어 사는 게 아니라고 말을 했는데… 일리야를 핑계로 둘러댄 거라 착각한 모양이었다. 카르얀은 제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아직 어리구나?’ 하고 빙글거리며 웃었다.

돌았나. 지금 누가 누구 앞에서 어리다는 말을…. 

“아니, 카르얀. 저는 필요가 없는데요, 정말로.”

“정말?”

“네. 손목 걸고요.”

“……손목을?”

“두개 다 걸게요.”

제리의 비장한 말에 카르얀의 눈빛이 떨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시선을 다잡고는 여유를 되찾았다.

“제리. 그래서?”

“그래서라뇨. 다시 가져가세….”

“내가 이미 준 걸 다시 빼앗을 사람으로 보여?”

“…….”

빼앗지는 않겠지. 왜냐하면 카르얀이 군것질을 하는 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일단 사놓고 내게 떠넘긴 건 아니고?

“돈은 이따가 갚을게요.”

“갚을 필요 없어.”

“네!”

그럼 안 갚아야지. 깔끔하게 대답한 제리를 향한 호위무사들의 눈빛에 황당함이 담겨있었다.

남의 돈으로 친구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금 날강도 같지만 돈을 쓴 카르얀이 상관없다면 상관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카르얀에게는 써도 남아도는 게 돈일텐데, 뭐.

“그나저나 제리. 간식은 다 떨어졌어?”

“아뇨! …많아요. 너무 많아요. 이제 그만 먹고 싶어요.”

제리는 카르얀이 이번엔 어떤 것을 보내어 올지 두려워 미리 강하게 부정했다. 카르얀은 그 반응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래? 단 걸 좋아하지 않았어?”

“…….”

그래! 좋아하기는 해. 하지만 아직도 기숙사 방에 한가득 남아 있었다.

“그럼 뭐가 좋아? 네 나이 땐 많이 먹어야 자라는 거야.”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사람이 정도를 모르는 것도 어찌 보면 문제가 있었다. 제리는 손에 쥔 사탕에서 올라오는 단내가 이젠 아주 물릴 지경이었다.

“아껴먹지 않아도 돼.”

“…….”

안 아껴먹어도 많아. 이번 달에 네가 또 보냈잖아!

제리는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속으로 혼자 투덜거렸다.

* * *

수확제 기간 동안 아카데미에서 자체적으로 열리는 대회는 총 세 가지 분야로 이루어져 있다. 마법 분야의 마법대회, 검술 분야에서 열리는 무투회, 그리고 전 학과 학생들이 모두 참여가 가능한 상식대회이다.

땡볕 아래에서 하루 종일 경기를 구경한다는 것은 지루한 일이라 이를 구경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편이었다. 제리는 검술에 관심이 없고 형들이 참여하지도 않았기에 무투회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법 대회는 마력 측정기 앞에서 이루어진다. 때문에 참여 학생들은 그저 수치가 높게 나올만한 마법만 연사해댔고, 그러니 당연히 재미도 없었다. 첫 해 기대를 품고 구경하러 갔던 제리는 실망만 안고 돌아왔다. 시렌은 “그러게 내가 가지 말랬잖아.”하며 제리를 비웃어댔다. 때문에 제리는 수확제날에는 웬만해서 아카데미로 돌아오지 않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첫 해 보았던 마법 대회의 광경과는 현저하게 달라보였다. 구경하는 사람의 머릿수부터가 크게 차이가 났고, 타 학과 교수진들마저 군데군데 앉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이… 많네?”

카르얀도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무투회 수준도 마법 대회와 다를 바가 없어, 늘 경기장의 절반도 다 차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런데 올해 수확제 기간에는 다들 집에도 안 간 모양인지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의 머리통이 보였다. 제리는 조금 긴장했다. 사람들 틈을 지나가다 어깨라도 몇 번 맞으면 일리야의 대회는 보지도 못하고 쓰러지는 게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저 자리가 비었네. 제리, 이리 와.”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아야….”

카르얀은 제리의 손목을 꽉 그러잡고 인파를 헤치고 빈자리를 잡아 앉았다. 카르얀이 손을 놓자, 하얀 손목에 잡은 모양대로 빨갛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카르얀은 뒤늦게 제가 그랬다는 것을 알고 다소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미안해.”

아니, 하나도 안 아팠으니 괜찮아요.

[패시브 스킬(진실의 입)이 발동됩니다.]

“아팠어요. 그래서 안 괜찮아요.”

“…….”

씨발, 망했다. 제리는 제게 와 닿는 시선을 일부러 모른 척했다. 호위기사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느낄 수가 있었다. 카르얀은 조금 더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사과를 건넸다.

“……정말 미안해. 네가 몸이 약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지 뭐야.”

“네….”

“멍이 들까?”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그냥 자국이 오래 남는 편이에요.”

제리는 피부가 희어서 그런지 작은 생채기도 두드러지게 보이고 눌린 자국도 잘 없어지지 않는 편이었다. 체력이야 어차피 일리야를 만나 다시 채워달라고 하면 된다. 제리는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는 사탕의 존재를 의식하다가 일리야에게 메달을 주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경기가 끝날 즈음이면 다 녹아버릴지도 몰랐으니까.

“저 대기실에 좀 다녀올게요.”

“대기실? 일리야를 보러 가는 거야? 같이 가자.”

“카르얀은 자리 뺏기니까 앉아 있어요. 다시 잡으려면 또 시간 걸릴 것 아니에요!”

제리의 말도 일리가 있었는지, 잠시 고민하던 카르얀은 그렇다면 호위를 하나 데리고 가라며 제리의 뒤에 무뚝뚝해 보이는 호위를 하나 붙여주었다. 제리는 걸을 때마다 명치 께에서 흔들거리는 초콜릿 메달을 손에 쥔 채로 걸음을 옮겼다.

카르얀과 있을 때에는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둘을 따라오던 호위는 제리의 등 뒤에 바짝 붙어 그가 사람들에게 치이는 것을 방지해주었다. 솔직히 조금 감동받은 제리가 그를 올려다보며 존경의 눈빛을 보내자, 호위는 그대로 무시해버렸다. 황궁 기사단 입단 조건이 무뚝뚝함이라면 쌍둥이 형들은 죽었다 깨어난대도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았다.

길을 물어 내려간 출전자 대기실에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다들 덩치가 장난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번 치였을 때 체력이 1씩 감소한다면, 이들과 어깨를 부딪치면 한 번에 체력이 10 정도 깎일 것 같았다. 걸걸한 욕도 들려왔다. 생김새만큼이나 말투도 거친 사람들이 많았다. …일리야는 늘 이런 사람들 틈에서 생활하는 걸까. 그가 조금 대단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머리카락 색 때문에 일리야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준비운동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가까스로 인파를 헤치고 일리야에게로 다가가자, 말을 걸지도 않았는데 그가 눈을 번쩍 떴다.

“…….”

그는 눈을 뜨자마자 앞에 제리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듯 얼빠진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호위를 한 번 힐끔 쳐다보다 다시 제리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제리, 나 보러 왔구나….”

“뭐야. 반응 왜 그래? 네가 오라며?”

“…응.”

일리야는 조금 기뻐보였다. 웬만한 일로는 표정에 미동도 없는 애가 눈을 살짝 휘어 웃었다. 덤덤하던 얼굴에 약간 화색이 도니 훨씬 더 사람다웠다. 가끔은 아무 일이 없어도 일리야가 웃고 다녔으면 했다. 매일 세상만사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심드렁한 표정은 좀 집어치우고 말이다.

[일리야 디페리우스가 ???합니다.]

격렬한 감정을 표시하는 문구였다. 하지만 대체 무슨 감정이기에 물음표로 뜨는지 알 수 없었다. 기뻐하는 거면 기뻐한다고 하면 되지, 왜 물음표로 뜨지? 오류인가?

“일리야, 얜 누구야? 친구?”

피부가 까만 사람이 일리야의 뒤에서 불쑥 나타나 물었다. 일리야가 그 말에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는 제리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이름이 뭐야? 넌 몇 학년~?”

애새끼 다루듯 실실 웃으며 말꼬리를 올리는 남자에, 제리의 주먹이 부들 떨렸다.

‘너 뭐라고 했냐. 내가 너보다 나이 많아, 새끼야.’

“응, 안녕! 난 4학년인데. 너는?”

웃는 낯짝에 침을 못 뱉는다는 말은 그냥 있는 말이 아니었다. 제리는 어릴 때부터 이를 행해왔기에 감정을 숨기고 웃는 것에는 익숙했다. 순수하게 웃으며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제리에 남자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각진 턱을 쓰다듬었다.

“어라, 반말을 하네. 얘야, 난 5학년이란다.”

“난 위아래로 네 살까지는 말 놓거든! 일리야랑 친구면 나랑도 친구잖아. 그치, 일리야?”

일리야를 돌아보며 한 말에 일리야가 조그맣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제리.”

“…….”

제 편을 들어줄 줄 알았던 일리야가 완곡하게 부정을 하자, 제리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일리야는 늘 제게 호의적이라 이번에도 맞다고 해줄 줄 알았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 편 들어줘야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배신감 어린 얼굴로 일리야를 바라보자, 까만 친구가 낄낄 웃었다. 하지만 이어진 일리야의 말에 둘의 상황은 뒤바뀌게 되었다.

“줄리안. 내 친구한테 말 걸지 마. 반말도 하지 마. 제리는 내 친구지 네 친구가 아니잖아.”

바로 그거야!

“뭐어? 그럼 내가 저 꼬맹이한테 존댓말이라도 쓰라는 말이야?”

“응. …아, 아니다. 말 걸지 마.”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여기서 웃어버리면 모든 걸 망치게 되는 셈이었다.

“야, 일리야!”

“불렀어…?”

“그래, 불렀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네 친구가 내 친구지, 너 이러면 나 섭섭해!”

“으응….”

“그게 다냐? 나 섭섭하다고!”

일리야는 이제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봤냐. 일리야는 내 편이라고. 제리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러면 내가 반말해도 불만 없겠네. 일리야 친구가 네 친구면 이제 우리도 친구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 줄리안이라 불린 놈은 입을 쩍 벌린 채 제리를 심각하게 내려다보았다.

“난 제리 루트야! 제리라고 부르지 마.”

“나는 줄리안 지… 뭐라고?”

“줄리안이구나.”

제리는 뻣뻣하게 굳은 줄리안의 손을 덥석 잡고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줄리안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허어, 하며 이상한 탄식만 내뱉어댔다.

‘뭐, 왜? 어쩌라고. 뭘 봐.’

제리는 속마음이 탄로나지 않도록 계속 웃었다. 일리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질 때까지 말이다. 싸늘함까지 감돌던 표정은 제리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눈 녹듯이 금세 사라졌다.

“참, 일리야. 이거 받아.”

제리는 목에 걸린 메달 중 그나마 모양이 괜찮은 것을 일리야에게 내밀었다. 일리야는 그것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걸어달라는 소리인가보다. 제리는 일리야의 목에 직접 조잡한 끈으로 엮은 메달을 걸어주었다. 작위적인 금색이 조명에 비추어 반짝거렸다.

“이거 주려고 온 거야. 별 건 아니고, 앞에서 샀어.”

나 말고 카르얀이.

“메달 따오라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뒤만 돌아보아도 검보다는 제리 키의 절반만한 쇠망치를 뱅뱅 돌릴 것 같은 사람이 넘쳐나는데, 저들을 다 이기고 메달을 따오라는 것은 일리야에게 있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냥 네가 만족할 만큼만 해. 이기고 지는 건 크게 연연하지 말고.”

“…….”

선물 받은 게 그렇게 기쁜지 일리야는 금색 메달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저렇게 계속 만지면 녹을 텐데. 설마 초콜릿인 걸 모르는 건가 싶었던 제리는 조심스럽게 제 목에 걸린 다른 메달 초콜릿의 포장지를 까 보이며 경고했다.

“일리야, 그거 계속 만지면 녹아. …봐, 안엔 초콜릿이란 말이야.”

“아….”

일리야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메달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일리야의 입술이 유한 곡선을 그렸다. 이번에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일리야가 웃고 있어.

[일리야 디페리우스가 ???합니다.]

…또 오류인가? 조만간 또 이벤트가 발생하거나 하겠군.

“고마워, 제리. 열심히 할게.”

“이따 봐. 참, 카르얀도 와 있어.”

“알아.”

일리야는 제리 대신에 그 뒤의 호위기사를 힐긋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리는 초콜릿을 와작 베어 물며 뒤돌아섰다. 제리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일리야는 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 *

이 수많은 인파가 무엇을 보기 위해 몰렸는지는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알 수 있었다. 곳곳에서 일리야의 이름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카르얀 때문에 이쪽을 힐끔거리는 눈길도 있었지만 기사들과 시선을 마주하면 움찔대며 시선을 피했다.

알아, 기사단 제복을 입고 있는데 무뚝뚝하고 얼굴도 무섭게 생겼지. 제리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충분히 공감했다. 존재감을 숨기는 마법이라도 걸어주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의 주역은 검술학과 학생들이니만큼, 무투회가 시작된 후로는 더 이상의 시선이 몰리지 않았다.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가자로 지원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예선을 치루는 과정은 정말 지루했다. 더군다나 검술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제리에게는 모든 과정이 다 비슷해보였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선다. 검을 쥐고 달려든다. 챙챙 부딪친다. 한쪽이 나가떨어지거나 항복한다.

‘특별할 것도 없는데 이게 뭐가 재밌다고 일리야는….’

고학년 경기라 애들다운 미숙함도 눈에 띄지 않아 귀엽지도 않았다. 그저 하품만 나왔다. 제리와 마찬가지로 아주 심드렁해보이던 관중들은, 예선전의 끄트머리에서 일리야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활력을 되찾았다. 아니, 애초에 목적이 일리야를 보기 위함인 것처럼 오직 그때만 활기가 돌아왔다. 약간 헝클어진 백색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일리야와 또 다른 남자가 마주보고 섰고,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전 경기와 별 다를 바가 없었지만 싸우고 있는 상대가 일리야라는 게 중요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뜨거운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관중들은 일리야의 공격을 상대가 막아냈을 때에는 저들이 더 아쉬운 것처럼 탄식을 터뜨리고, 근접전 끝에 심판이 일리야의 손을 들어주자 귀가 먹먹할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다. 일리야는 관중석을 잠시 둘러보다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는지 곧 다음 경기를 위해 다시 대기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말도 안 돼…. 스승님이 일리야의 검술은 카르얀 마법실력보다 더 엉망이라고 했는데….”

정말 이길 줄 몰랐다. 일리야가 예선전에서 떨어질 줄 알았던 제리는 의외의 접전에 내내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지켜보았다. 눈에 두드러질 만큼 일리야가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예선전은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키운 모양이었다.

“그때의 일리야는 검 쥐는 방법도 제대로 몰랐어. 어릴 때였으니 그랬다고 생각해.”

“아.”

하긴, 지금은 그때로부터 거의 10년은 지났으니까. 실력이 늘지 않는 게 이상한 거다. 시어스도 이 경기를 같이 봤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어떤 부분이 어떻게 달라졌다는 것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제리는 그게 조금 아쉬웠다.

카르얀은 학생들이 검을 휘두르는 자세가 어떠한지, 그리고 저런 자세로 공격이 들어가면 어디가 취약해지는지 옆에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카르얀의 말대로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은 학생들은 경기가 길어질수록 취약점을 드러냈고, 카르얀이 이길 것 같다고 예상한 이들이 모두 본선에 올라갔다.

“와, 정말 저 사람이 이겼네요.”

“지금까지 나온 사람들 중 제일 나아. 결승까지도 기대해봐도 될 걸?”

“오….”

제리의 존경스럽다는 눈빛에 카르얀은 뿌듯하게 웃었다. 돗자리를 깔아도 될 것 같은데? 카르얀만 있으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여기에도 검투사들의 싸움 결과를 두고 내기를 하는 문화가 있다면…. 제리는 카르얀과 승부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고 그로 인해 떼돈을 버는 상상을 해보았다. 결국 그 상상은 둘이 경기장 밖으로 내던져져 ‘다시는 오지 마!’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카르얀, 그럼 일리야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카르얀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결승까지 가는 것은 힘들겠지?”

역시나 사람들이 일리야의 실력에 열광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제리가 보기에도 일리야보다 움직임이 날렵하고 깔끔한 사람은 많아보였다.

“……그러면 다음번에 떨어질까요?”

“까다로운 상대만 만나지 않는다면 본선까지는 쉽게 통과할 거야.”

잠시 후, 본선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일리야는, 카르얀이 결승에 오를 거라 예상했던 상대와 맞붙게 되었다. 제리는 일리야의 맞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나오자마자, 고개를 돌려 카르얀의 이름을 불렀다.

“카르얀.”

어때, 일리야가 이길 것 같아?

“……슬슬 일어날 채비를 해도 되겠어.”

“…….”

가망이 없단 소리였다. 이번 경기로 일리야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큰 이변이 없는 한 그렇겠지. 예선전 동안 카르얀이 가장 기본기가 탄탄하다고 말한 사람과 맞붙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도 예선 통과한 것만으로 충분히 잘했어, 일리야.’

제리는 카르얀이 사준 사탕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경기 시작 전 관중석을 돌아보던 일리야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은 아주 찰나였으나 분명히 일리야가 자신을 보고 희미하게 웃은 것 같았다.

[이벤트 발생! ‘너와 있으면 즐겁다는 생각이 들어.’]

“…어.”

익숙한 이벤트 명에 제리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지금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이건 내년 봄에 있을 카르얀과의 이벤트 명이었다.

설마. 올해 수확제에는 아인스와의 이벤트 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맞았다. 심지어 그마저도 집에서 나가지 않고 형들과 지붕 위에서 불꽃놀이를 함께 보는 것으로 이벤트 진행을 피했다는 말이다.

“가이드북….”

제리는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인벤토리에서 가이드북이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카르얀은 제리가 꺼낸 것을 슬쩍 돌아보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백지로 보이니 그가 보든 말든 제리는 상관이 없었다. 그는 무릎 위에 작은 책을 펼치고 눈으로 대강 종이 위를 훑어보다 방금 전에 뜬 이벤트 이름과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찾았다.’

‘16세 봄, 황궁 앞 호수, 카르얀 디페리우스’

황궁 앞을 거닐던 제리는 우연히 시어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제리가 시어스에게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냐고 묻는다. ‘일이 있어 나온 것이 아닙니까? 공자께서도 볼 일을 보러 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시어스는 제리의 물음이 그리 달갑지 않다는 듯 말을 얼버무린다. 그때, 시어스와 볼 일이 있어 뒤를 따라 나오던 카르얀과 만난다. 카르얀은 시어스를 돌려보내고 제리에게 ‘오랜만에 보니 더 반가운 것 같다.’고 하며 근처 호수로 향한다.

카르얀은 호수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빛무리와 제리를 번갈아보며 미소짓는다.

‘날씨가 참 좋아. 햇볕도 쨍쨍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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