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_2
“쯧쯧. 안 그래도 미친 놈이 더 미쳐버렸네? 그동안 좀 괜찮아졌다 싶더니….”
“나 말하는 거야?”
“그래, 너. 그렇게 많은 수업을 들으면서도 수석을 유지하는 게 놀라울 정도다!”
하기야, 이 정도로 미치지 않고서야 그 성적을 받는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제리의 시간표를 내려다보며 시렌이 혀를 찼다. …난 네가 더 이해 안 가. 수업만 제대로 들어도 ‘끔찍함’으로 가득한 성적표는 받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제리는 코웃음을 치며 혼잣말처럼 시렌의 욕을 읊조렸다. 시렌은 펄펄 날뛰며 성적 비하발언은 하지 말라며 역정을 냈다.
“저어…. 내가 보기에도 이건 좀 아냐, 제리…….”
“…….”
다짜고짜 미쳤다고 삿대질을 하는 시렌과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걱정해주는 헨리에게는 차마 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리는 그냥 침묵을 택했다. 세 과목만 빼도 괜찮은 시간표가 될 것 같다는 말도 그냥 흘려들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제리는 올해 이 시간표를 소화하기로 마음먹었다. 1학년 1학기 때 이후로 이렇게 촘촘한 시간표는 처음이었다.
“그래, 씨발. 네가 죽지 내가 죽냐? 들어라, 들어!”
시렌은 어깨를 으쓱 하며 맞은 편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만약 나더러 저 시간표대로 수업을 들으라고 하면 차라리 죽을래.”
헨리가 조그맣게 읊조렸다. 물론 힘들 테지만 소화가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졸업할 때까지 이렇게 듣지 않으면 마법 수치가 500이 넘는 것은 불가능해.’
궁정 마법사 엔딩까지는 체력과 근력을 조금 올리면 된다지만, 마탑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마법 수치를 500 이상으로 올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죽기 살기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야, 너 이건 왜 듣냐?”
시렌은 제리의 시간표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칸에는 ‘기초 체력 단련’이라고 적혀 있었다.
“……같이 듣자.”
보통 검술학과 1, 2학년 학생들이나 일반학과 학생들이 학점을 채우기 위해 듣는 수업이었다. 제리는 체력과 근력이 필요 능력치보다 현저하게 떨어지니, 혹시라도 시간표에 운동을 하는 과목을 채워 넣는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다.
“미쳤냐? 내가 왜?”
“같이 듣자. 너 어차피 그때 시간 비잖아.”
“난 그때 들어와서 잘 건데? 혼자 들어. 혼자 듣는 거 잘하잖아?”
저학년들 틈에서 혼자 듣기 쪽팔리니까 그렇지…. 시렌은 혼자 튼튼해지라고 하며 멋대로 튼튼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 노래 가사를 지어 흥얼거렸다. 제리는 작은 기대를 품고 헨리를 돌아보았지만 헨리도 휴게실 벽에 걸려 있는 밤하늘을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날씨가 좋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창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
그렇게 싫은가. 제리는 휴게실을 돌아다니며 체력 단련 수업을 같이 들을 사람을 모색했지만, 검술학과 대상 수업이란 말에 다들 질색하기 마련이었다. 여전히 검술학과와 마법학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는 오랜 전통이었기에, 다들 이유 없이 상대 학과를 혐오했다. 서로 재수 없게 구는 꼴을 보면 좋지 않은 사이가 납득이 가긴 했다.
“윽, 난 싫어…. 차라리 네 친구한테 물어보든가.”
“다 물어봤어. 쟤넨 다 싫대.”
“나도 싫어! 옆 건물 가서도 물어봐.”
그는 맞은편의 검술학과 기숙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학과끼리 사이가 어떻냐와는 별개로 제리의 가장 친한 친구는 일리야였다. 스물 두 번째 거절을 들으며 제리는 처음으로 일리야의 생각을 해냈다. 혹시 일리야가 그날 시간이 빈다면…!
[일리야, 너 어디야?]
제리는 방으로 올라가 일리야와 대화할 수 있는 책을 펼쳐 글자를 적어넣었다.
[기숙사. 왜?]
[나도야!]
제리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4층, 일리야가 쓰는 방을 눈으로 찾아 올려다 보자, 일리야도 맞은편에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눈이 마주치자 일리야는 손을 들어 인사하듯 느리게 흔들어 보였다. 제리는 왼쪽 손에다 책을 펼쳐들고 글씨를 써넣었다.
[너 금요일 2교시에 뭐 있어?]
[내일?]
[아니, 매주 금요일!! 혹시 그때 시간표 비면 나랑 수업 하나 같이 들을래?]
일리야는 책을 내려다보다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어 제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손을 들어 글씨를 써넣었다.
[뺄 수 있는지 물어볼게.]
그리고 그는 곧바로 창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제리는 그날 저녁이 되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일리야가 빼려 했던 과목의 이름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휴게실에서 일리야의 이름이 나올 정도면 이미 한바탕 소문이 돌았다는 뜻이었다.
그는 필수 전공 과목인 고급 방어술도 듣지 않을 수 있는지 여기저기 묻고 다녔다. 그래서 학기가 시작하기 전부터 또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벌써부터 이번 학기가 불안하다며 교수들이 분통을 터뜨렸던 모양이다. 제리는 괜스레 그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졌다.
[제리, 일리야야.]
“…….”
[안 된대….]
“…알아.”
제리는 실소를 터뜨리며 일리야는 듣지 못할 대답을 중얼거렸다. 당연히 안 되지! 상식적으로 한 학기 중 가장 중요한 전공 과목을 어떻게 빼. 가끔 보면 일리야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자주 했다.
[괜찮아. 그냥 혼자 들을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리는 바로 시간표를 확정해 학기 신청을 넣었다. 어차피 한참 어린아이들과 수업을 함께 듣는다는 것은 같으니 괜찮을 것이다.
* * *
올해도 작년과 같이 일리야와 점심시간을 함께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올해는 무투회 대기실에서 만났던 줄리안도 함께였다. 일리야에게 새 친구가 생겼다는 생각에 제리는 그의 존재가 꽤나 달가웠다. 하지만 헨리는 낯을 가려 쭈뼛댔고, 시렌은 줄리안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성격이 비슷해 시렌과는 꽤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동족혐오인지 기숙사에서 시렌은 내내 줄리안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볕에 탄 피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짧은 머리가 까슬할 것 같아서 보기 안 좋다, 심지어는 나이를 내세우며 ‘따지자면 내가 더 형인데 말이야.’라며 불평을 해댔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단순한 성격만큼, 이틀 만에 음식에 대해 토론을 하다 식성이 맞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급격하게 친해졌다.
“밥 먹는데 좀 자제하지?”
줄리안은 샌드위치를 입에 문 채로 일리야와 제리가 맞잡은 손을 힐끔대며 읊조렸다.
“어쩌라고.”
네가 내 체력에 대해 뭘 알아. 제리의 일침에 줄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리야는 별 대꾸를 하지 않고 제리의 체력을 회복시켰다.
[체력이 모두 회복됩니다.]
“고마워.”
“뭘….”
일리야는 멍하게 대답하며 제리의 입가에 묻은 빵조각을 털어내 주었다. 줄리안은 저 풍경을 좀 보라며, 이상하지 않냐고 중얼거렸다. 헨리는 눈치를 보다 글쎄요, 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시렌은 하루 이틀 볼 풍경이 아니니 그냥 익숙해지는 게 나을 거라고 거들먹거리며 줄리안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조언을 해주었다.
“참, 너 검술학과 과목 듣는 건 잘돼 가냐?”
시렌은 대화의 상대를 제리로 돌려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제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제리, 힘들지는 않아?”
일리야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도 그 수업이 어떤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할 만하던데?”
감각 수치를 0으로 내려둬서 그런지, 숨이 차는 것도 못 느끼겠고 몸이 아프지도 않았다. 이렇게나 편할 줄이야! 그리고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 위주로 그리 강도가 강하게 진행되는 수업이 아니라 제리가 따라가기에도 부담이 없었다.
“정말?”
“그리고 많이 힘들면 중간에 그냥 쉴 수도 있어서 괜찮아!”
최대 체력이 쑥쑥 올라가는 것을 보면 뿌듯하기까지 했다. 아직 학기가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최대체력이 벌써 8이나 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들을 것을 그랬나보다. 다른 수업들보다도 제리에게 있어 가장 유익하고 필요한 수업이었다. 저학년 학생들은 숨쉬기 운동 수준인 이 수업을 들으며,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하는 5학년 제리를 이상하게 여기곤 했지만 말이다.
“봐봐. 제리 너, 왜 일리야가 물어보니까 대답해줘?”
“뭐래.”
“봐, 이상하다니까! 너네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러니까 뭐가.”
줄리안이 분통을 터뜨리며 일리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일리야는 으, 소리를 내며 줄리안의 손을 떨쳐버리고 벌레 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다들 봤지? 줄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얻어맞은 손등을 보여주며 네 사람을 돌아보았다. 누구도 공감해주지 않아 줄리안은 혼자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에 휩싸여 답답하게 가슴을 쳤다.
“일리야 너, 제리 좋아하는 거 아냐?”
“당연히 좋아해.”
일리야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줄리안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지자, 시렌은 상상은 거기서 멈추라고 하며 그의 생각을 잘라버렸다.
“포기해. 네가 생각하는 것 아니야. 나도 한 때 하루 정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
“아니라고?”
“절대, 저얼대, 아니야.”
“그걸 어떻게 장담해?”
“그냥 아니라고 생각해. 그래야 네 정신건강에 좋으니까. 그리고 제리 루트, 쟤는 원래 좀 이상해. 처음부터 돌아버린 놈이야.”
시렌은 머리 옆에 손가락으로 원을 빙글 그리며 낄낄 웃었다. 제리는 빵 껍질을 시렌에게 던지며 헛소리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줄리안은 제리가 일리야에게 무슨 말을 해도 이상하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시렌은 이미 제가 다 겪어본 것들이라며 흠흠거리며 제리가 원래 저런 놈이라는 것을 어필했다.
“그런데 시렌 형은요, 올해 졸업하면 뭐 할 거예요?”
“너랑 사업할 건데?”
“……저랑요?”
너 돈 많이 벌고 싶다며? 시렌은 멍청한 표정을 짓는 헨리의 머리를 잡고 강제로 끄덕이게 했다. 헨리는 ‘전 한다고 한 적 없는데….’라며 웅얼거렸지만 썩 싫어보이지는 않았다.
“뭐야, 벌써 졸업 걱정을 해?”
“뭐, 씨발. 난 올해 졸업하니까 해야지. 그리고 형이라고 불러라.”
“제일 어린 제리도 다 반말 하는데 내가 왜 해?”
줄리안이 코웃음을 치며 제리를 힐긋 바라보았다. 제리는 입 안에 욱여넣은 빵을 겨우 씹어 넘기고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내 핑계 대지 마. 너네 둘 다 나한테 먼저 반말 했었잖아?”
“하기야, 쟨 위아래로 네 살까지는 다 친구라고 하기는 했지.”
줄리안은 처음부터 제게 반말을 내뱉었다며 무투회 날 있었던 일을 일러바치기 시작했다. 제리가 얼마나 못됐는지 함께 공감해달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리야는 그 얘기에 관심도 없어 보였고, 헨리는 옥수수를 뜯어먹느라 바빴으며, 시렌은 그 말에 토를 다느라 바빴다. 제리도 줄리안의 말을 무시하며 상태창을 불러와 공략에 부족한 수치가 무엇인지 계산해보았다.
[체력:88/88, 근력:32, 지능:110, 매력:60, 스트레스:30/100, 검술:1, 마법:383]
‘궁정 마법사 엔딩까지는 체력이랑 근력만 올리면 되겠네.’
늦어도 다음 학기까지는 체력 100에 근력 50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마탑 엔딩이었다.
[직업]마탑의 수습 마법사
…
*조건
아카데미 재학 중, 수석이나 차석의 성적을 유지한다.
고학년이 된 후, 수확제 기간 마법대회에서 1등을 달성한다.
*필요 능력치
체력 200 이상, 근력 100 이상, 매력 100 이상, 마법 500 이상 600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