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_3
씨발, 이건 뭔가 잘못됐어.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아 해봐, 제리….”
일리야는 주전부리를 집어 제리에게 내밀었다. 제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싫…!”
그 새를 노린 일리야가 입에다 쿠키 조각을 물려주었다. 제리는 눈에 힘을 주고 이딴 건 원한 적 없음을 어필해보려 했으나 혀에서 느껴지는 단 맛에 눈이 점차 커졌다.
“……음, 으음!”
맛있네?
“하나 더 먹어.”
냠냠.
방금 전까지 싫다는 말을 하려던 것은 맞았으나, 입 안에 들어온 이상 뱉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짜 맛있네. 일리야는 바쁘게 오물거리는 입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고, 아마 그가 느끼고 있을 감정은 뿌듯함일 것이다. 제리는 그를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냠냠.
‘어쩐다…. 일리야더러 네 마음을 다 알고 있으니….’
냠냠냠냠.
‘앞으로 아무것도 챙겨주지 말라고 하는 수도 없고.’
“맛있어?”
“…….”
“많이 먹어.”
그나저나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제리는 볼을 씰룩이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일리야가 입에 넣어주는 쿠키를 다섯 번쯤 받아먹었을 때 제리는 가까스로 한숨을 내쉬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일리야는 분명 제게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리야를 보니, 지금까지 눈치 채지 못했던 게 이상할 정도로 그는 제게 지나치게 말랑하게 굴었다.
일리야가 나를 좋아해. 직접 그의 입을 통해 듣지 않아도 그것만큼은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멋대로 호감도를 6이나 올렸던 것도 다 한밤중에 내 생각을 하면서…….
씨발! 씨발! 씨발! 개빡쳐!
쾅.
[체력이 2만큼 깎입니다.]
“까, 깜짝이야.”
야무지게 그러쥔 두 주먹과 테이블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헨리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 눈을 깜빡거렸고, 채소가 줄리안의 턱을 타고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제리는 언제 테이블을 내리쳤냐는 듯 뻔뻔하게 손을 내렸다.
“놀랐어? 미안.”
“…….”
“모기가 있었어.”
제리는 손을 탁탁 터는 시늉을 하며 순진하게 웃었다.
“모기를…?”
그걸 왜 주먹으로 잡느냐고 말하는 듯한 의심스런 눈초리들이 제리를 향했으나, 제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고민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저건 일리야의 진짜 감정이 아니야.’
형들도, 카르얀도 그러했듯 일리야도 아무 이유 없이 제게 호감을 느끼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하기야 일리야도 첫 만남 때부터 눈만 마주쳐도 호감도를 올리고는 했으니, 그때 진즉에 바로잡아뒀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뭘 바꾸려고 해봤자 정말 바뀌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래.’
시렌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은 공략 대상에 여전히 들어 있었고, 스토리 라인도 바뀌는 듯하면서 결국 제 궤도를 찾아 가이드북에 쓰인 대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이러면 안 돼. 정말 안 되는데…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봐도 결국 거미줄에 걸린 채 점점 더 몸이 옥죄어만 가는 것 같다.
“…….”
사실은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가, 배드 엔딩을 보는 수가 있었다. 그때도 그랬잖아, 일리야가 날 가둬버린다는 망언을 했었어. 제리는 잠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는 삶을 약 10년이나 살아오고 있었다.
‘…씨발,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이딴 좆같은 상황의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였지?’
속으로 투덜거리느라 제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일리야는 그런 제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제리의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체력이 모두 회복됩니다.]
“감기가 아직 안 나았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상태창의 이상 상태 문구는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아니? 다 나았어!”
“다행이긴 한데….”
[체력이 모두 회복됩니다.]
일리야는 꼭 한 번만 해도 될 것을 굳이 두 번, 세 번 반복해 체력을 회복시켜주었다.
“그럼 졸려? 아까부터 너 좀 멍한 것 같아…. 조금 자도 돼, 제리. 내가 깨워줄게.”
자라니, 여기서 잤다가 또 차에 치이는 꿈을 꾸면 어떻게 하라고. 제리는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쟤 요즘 잠 잘 안 자. 애새끼도 아니고 나쁜 꿈이 무서워서 못 주무신답니다!”
시렌이 제리를 대변하듯 툭 내뱉은 말에 일리야가 고개를 돌려 시렌을 바라보았다.
“나쁜 꿈…?”
눈은 동그랗게 뜬 채로, 난생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어투였다. 그의 시선은 다시 제리에게로 돌아왔다. 당장 해명하라는 눈빛에 제리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아, 아냐.”
시렌 넌 나중에 보자. 죽었어.
“제리, 왜 얘기 안 했어…? 설마 그래서 어젯밤에도….”
아니나 다를까 어제 일찍 잔 덕에 꿈을 두 번이나 연달아 꿨었다. 일리야의 걱정이 어린 듯한 목소리에 제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별 거 아니야! 걱정할 만한 게 아니니까.”
…일리야 네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없고.
“뭐래, 매일 같은 꿈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죽는다며?”
“…….”
“너 어제도 죽는 꿈 꿔서 깼잖아!”
“…….”
그 입 닥쳐.
“새벽에 갑자기 소리 질러서 우리 잠 깨운 적도 몇 번 있으면서, 왜 이제 와서 괜찮은 척하냐?”
일리야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저놈의 주둥이. 물에 빠져도 나불대는 입만 둥둥 뜰 놈. 저 가벼운 주둥이를 언젠간 반드시 꼬매 버릴 것이다. 제리는 이를 악문 채로 대답했다.
“내가 꿈에서 죽는 건 길몽이라고 백 번도 넘게 말했잖아.”
시렌 더러 들으라고 한 말인데 대답은 옆에서 튀어나왔다. 시무룩한 목소리로 일리야가 중얼거렸다.
“백 번…?”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설마 정말 백 번이나 말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왜 나한테는 한 번도 말 안 했어…?”
“…….”
“제리이….”
일리야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쳐졌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지? 제리는 입을 다문 채 시렌을 찌릿 노려보았다. 그러자 헨리가 눈치를 보다 말고 시렌의 입을 턱 하고 틀어막았다. 내가 막았어! 하고 눈을 빛내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시렌은 어렵지 않게 헨리의 두 손을 제압하고 제리를 비웃었다.
“길몽 좋아하시네! 제리 너 은근히 논리적인 척,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멍청한 미신도 우리 중에 제일 잘 믿더라.”
“백 번….”
일리야는 백 번이나 말을 했으면서 제게는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게 그리도 충격인지, 여전히 백 번이라는 말을 읊조리고 있었다.
“백 번은 아냐, 일리야.”
“…….”
제리의 변명마저도 와닿지 않는지, 일리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기세였다.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비밀로 할 만한 내용도 아니니까.
“사실은….”
제리는 일리야에게도 ‘꿈’에 대해 말해주었다. 매일 밤 잠에 들면, 악몽을 꾼다고. 자동차라고 하면 이들이 알아먹을 리가 없으니, 적당히 마차 같은 데에 치여서 죽는 꿈을 꾼다고 말했다. 룸메이트들처럼 ‘헉, 그렇구나. 안됐네.’하는 반응을 보일 줄 알았던 일리야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그날 일이야?”
그날 일이라니?
“내가 몰래 집에 데려다 준 날….”
일리야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제리는 아,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런가?”
그 마차가 제리를 칠 뻔한 뒤로 꿈을 꾸는 거니까 어찌 보면 그게 기억을 다시 살아나게 한 원인이라 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마차가 아니라 ‘버스’사고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제리,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미안하다니. 아니야, 오히려 고맙지.”
일리야가 아니었으면 피하지도 못하고 치여 죽을 뻔했는데. 오히려 수없이 고맙다고 말해도 부족했다. 일리야는 제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으면서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채 미안하다고 한 번 더 말했다. 제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응…?”
일리야는 어리둥절하게 제 머리를 쓰다듬는 제리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안쓰러워 보여 습관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제리의 손가락에, 구름처럼 하얗고 깃털마냥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얽혔다. 결이 고와 만지는 감촉도 좋았다.
“일리야.”
“응.”
“일리야….”
그의 이름을 제 입으로 내뱉을수록 점점 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제리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런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리야의 눈이 살며시 감겼다. 햇볕 아래서 일광욕을 하며 조는 고양이 같았다.
어제는 쓰러지면서 일리야의 꿈에 나오는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일리야도 따지고 보면 시스템에 의해 조종당하는 일종의 피해자였다. 그래서 그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저 안쓰러울 뿐….
‘네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
그는 아직 충동에도 약하고 여러 면으로 미숙한 청소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내 꿈 꾸지 마!’라고 한다면, 일리야는 슬퍼할까? 그리고 그렇게 섭섭해하는 것은 과연, 일리야의 진짜 감정이 맞을까.
“…일리야.”
너와 친구가 되었던 것도, 친해질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응, 제리.”
감겼던 일리야의 눈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붉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지며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기분이 무척 좋아보였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174]
마음껏 만지라는 듯, 일리야의 머리가 제리 쪽으로 조금 기울어졌다. 제리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리며 한숨을 집어삼켰다. 저 호감도마저 네 뜻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제리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쉽게 사는 호감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불쌍한 일리야. 그 꿈도, 내게 느끼는 네 감정도 모두 네 것이 아니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리야.
……너는 날 좋아하지 않아.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우선 제리의 문제였다. 자신은 일리야를 친구로서만 좋아했다. 갑자기 자신이 일리야를 사랑하게 될 가능성은, 지나가다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볼 가능성과 맞먹는다.
그리고 일리야의 문제. 그에게 배드 엔딩만 두 개가 존재한다는 것도 그 이유에 한 몫 했다. 일리야 루트를 탄다면, 제리만 불행해질 뿐만 아니라 그 역시도 불행해지게 하는 지름길이었다. 일리야는 제리를 가둬놓고 제리보다도 더 괴로워할 것 같았다.
또 한 가지는, 별것 아니긴 하지만 친구들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진다는 것.
“다 만졌어?”
“응.”
일리야는 제 머리를 쓰다듬던 제리의 손을 내려다보며 간지럽게 웃었다. 입맛이 썼다. 너무 늦어지면 일리야는 더 혼란스러워 할 뿐이다.
그를 위해서라도, 그의 감정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일깨워줘야 했다. 깨달음을 얻은 일리야가 후에 자신을 피할지, 아예 모르는 척을 할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일리야, 나를 있는 힘껏 밀어내. 자각해. 네 것이 아닌 감정을 모두 버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 * *
줄리안은 숨을 죽였다. 제리 루트가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머리카락을 묘하게 만지작거릴 때부터 뭔가 감이 왔다. 아니, 사실 그 전부터 간간이 느끼고 있던 게 있었는데, 오늘은 그게 평소보다 더했을 뿐이었다.
‘왜 저래….’
심지어 오늘은 제리마저 일리야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일리야의 이름을 곱씹으며 야시꾸리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둘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두 사람을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시선을 돌리던 줄리안은, 표정이 썩어 있는 시렌 가르시에와 눈이 마주쳤다.
“…….”
“…….”
둘은 순식간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 눈빛으로 대화했다. 야, 너도…? 그래, 나도…. 헨리는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일리야가 제리와 함께 먼저 일어났다. 일리야는 괜찮다고 하는 제리를 굳이 데려다주겠다고 하며 그를 쫄래쫄래 따라 나섰다. 제리도 필요 없다고 하며 일리야를 단호하게 내치지 않고, 묘한 눈빛을 보내며 일리야의 동행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이번만큼은 백 퍼센트다!’
줄리안은 입이 근질거려, 두 사람에게 빨리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시렌은 둘을 따라 나서려던 헨리를 붙잡고 못 가게 막았다. 헨리는 어리둥절해 했으나 시렌은 요지부동이었다.
“형, 전 왜요…?”
“네게 말할 게 있어.”
시렌 대신에 줄리안이 비장하게 중얼거렸다. 시렌이 그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두 사람이 이상했다. 아까도 눈빛을 주고받으며 흐뭇하게 웃고는 하더니…. 지금도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듯한 눈빛 신호를 주고받고 있었다. 오늘따라 더 이상하다. 원래도 이상한 사람들이지만. 헨리는 맹한 눈을 깜빡이다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둘이 사귀어요?”
“그래, 그거야!”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줄 알았더니, 제법인데? 시렌이 턱을 치켜들며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헨리의 입이 쩍 벌어졌다.
“…….”
이럴 수가! 시렌 형과 줄리안 형이 사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헨리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점심시간을 함께하는 것 이외에 둘이 만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 시렌은 헨리와 함께 실험실에 가거나 기숙사로 돌아간다. 도대체 언제 만나서 언제 연애를 시작한 거지? 무엇보다 둘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헨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대체 언제부터요…?”
“그야 모르지!”
시렌이 명쾌하게 대답했고, 줄리안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또 훈훈한 눈빛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니 사랑스러운 눈빛인 것 같기도, 두 사람이 정말 사귀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형들이 사귄 날을 모르면 누가 알아요…?’
하지만 두 사람 다 모른다고 하니 헨리가 할 말은 없었다. 어차피 둘 사이의 일이니 말이다. 그렇게 헨리는 턱 끝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집어삼켰다.
“넌 나한테 맨날 죽어도 아니라고만 하더니, 역시 내 말이 맞잖아!”
줄리안이 핀잔을 주듯 말했다. 시렌 형이, 좀 지나치게 빼는 구석이 없잖아 있지…. 헨리는 시렌을 힐긋 바라보았다.
“나도 어젯밤 일이 아니었다면…!”
시렌은 흥분한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부끄럼을 타는 것 같기도 했다.
“어제요…? 밤…?”
헨리는 떨떠름하게 눈을 찡그리며 어제 일과를 떠올려보았다.
아침에 일어나 기숙사를 나가는 시렌의 곁에는 헨리가 함께였으며,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둘이 만나, 함께 실험실에 갔었다. 그러니 줄리안을 만날 틈이 전혀 없었을 것 같은데….
‘……설마 한밤중에 빠져나가서 밀회를…?’
헨리는 시렌을 불안한 눈으로 힐긋거렸다.
“어젯밤에.”
시렌이 약간 붉어진 얼굴로 큼큼, 헛기침을 했다. 헨리는 떨떠름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까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정말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렌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속삭였다.
“일리야가 자는 제리한테 키스하는 걸 봤다니까, 내가.”
“뭐?”
“네에?! 제리도요?”
“쉿!”
시렌에 의해 입을 틀어 막힌 채 헨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제리랑 일리야 형도 사귄다고? 말도 안 돼! 아무 것도 몰랐던 헨리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제리도 영….”
줄리안은 두 사람이 걸어간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씨발, 내가 그 좆도 싸가지 없는 제리 새끼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제 좀 사람 만들어뒀더니 그걸 채가네. 시렌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헨리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입에서 떼어내고 의문을 제기했다.
“…저어, 시렌 형이 제리를 키운 것 같지는….”
시렌이 헨리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씩 웃었다.
“마저 지껄여봐.”
“……아니에요.”
헨리는 어깨를 꽉 쥐듯 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에게는 제리와 일리야보다는 시렌과 줄리안 사이의 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었다. 둘은 아까 전에 둘 사이가 어땠느니 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줄리안 형은 저렇게 입도 성격도 더러운 시렌 형을 왜 거두어줬지…. 줄리안도 성격이 나빠서 서로 통한 건가? ……내가 모르던 사이 형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헨리는 속으로 착잡한 마음을 곱씹으며 시선을 땅으로 향했다. 그리고 땅이 꺼질 듯 푹푹 한숨만 지었다.
* * *
우선, 가이드북에서 가장 노선을 벗어난 한 사람을 골라보자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시렌이었다. 제리는 우선 시렌과의 첫 만남으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보기로 했다. 기숙사에 들어와 처음 만났을 때, 시렌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창문을 연 제리에게 다짜고짜 욕을 했었고, 제리도 그에 지지 않았다. 그러니 서로에 대한 첫인상은 피차 좋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내 생각이고.’
의외로 시렌은 그 첫만남을 다른 쪽으로 기억할 수도 있으니, 물어보는 게 빠를 것 같았다.
“네 첫인상?”
“구체적일수록 좋아!”
“……어제는 이상형을 묻더니.”
시렌은 영 시원찮은 얼굴로 떨떠름해하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리 루트.”
“응?”
“너 지금… 나도 꼬시냐.”
“…….”
제리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히고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헨리마저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시렌을 돌아보았다.
“쯧쯧, 난 네게 관심이 없어서.”
시렌은 고개를 작게 저으며 혀를 찼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 순간 제리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씨발놈아!”
“뭐, 뭐야, 씨발.”
제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시렌에게 덤벼들었다. 헨리는 웬일로 말리지 않고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둘의 싸움을 편안하게 지켜보았다. 주먹질을 한 것도 제리고, 일방적으로 우세해 보이는 것도 제리였으나 먼저 지친 것도 그였다. 시렌은 전혀 아프지 않은 얼굴로 퉁명스럽게 꺼지라고 말하며 제리를 밀어냈다. 결국 제리는 체력만 10이나 깎인 뒤 널브러졌다.
“넌 진짜 뭔가 문제가 있다.”
시렌이 혀를 차며 구겨진 옷을 털었다.
“시렌 네가 먼저 시비걸었잖아!”
“내가 뭘?”
한바탕 말싸움이 또 시작되었다.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 * *
황궁 입구를 통과하는 문에서 폭약이 터졌다는 소식에 온 거리가 술렁거렸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가까이 서 있던 병사 두 명은 중상을 입었고, 인부들이나 근처의 사용인들도 파편에 조금 다친 모양이었다. 폭약을 터뜨린 이는 황실에 찻잎을 납입하는 상인이었다. 몰래 황실을 개탄하는 벽신문을 붙였던 사람도 그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제국은 곪아 터졌다!
환부를 도려내야만 새 살이 돋는다. 그러니 우리는 백성의 피를 빨아 배를 불리는 귀족 놈들과 그들의 뒤를 봐주는 황실을 뒤엎어야 한다!
무능한 황제를, 진정한 제국의 주인인 백성의 힘으로 몰아내자. 백성의 힘으로, 새로운 제국을 이룩하자.]
벽신문은 금방 떼어졌지만 이들이 바라는 것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제리의 귀까지 흘러들어왔다. 사람이 둘 이상 모이기만 하면 그들은 ‘반란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소곤거렸다.
쓸데없이 여러 번 부과되는 세금의 개편과 몇 백 년이나 된 낡은 법의 개혁이 그에 해당되었다. 황궁 담벼락에 폭탄을 터뜨리거나 다짜고짜 디페리우스의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고 소리치는 등 의견을 표명하는 극단적인 방식과는 관계없이,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현 대 황제는 확실히 무능하다. 가이드북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이 몇 번 있었다. 카르얀 디페리우스의 루트를 타고, 엔딩을 볼 때에 여러 번 나오는 서술이었다. 그리고 엔딩 씬에서는 이와 같은 적나라한 서술도 있었다.
[…카르얀 디페리우스는 무능한 전 대 황제들이 벌려둔 일을 정리하고, 백성들이 내는 소리를 반영해 낡은 법을 개편한다. …그는 후대에 길이 남을 성군이자, 둘도 없을 애처가였던 황제로 불리게 되며 제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어수선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제리는 이에 대해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일리야 루트를 타지 않는다면 반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애초에 반란을 일으키는 주체가 앤더슨 가이다. 그들은 일리야를 앞세워, ‘황족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함’이라며 반란군을 끌어 모은다. 심지어 이건 제리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몇 년이나 앞당겨졌어?’
벌써부터 황궁에 폭약을 터뜨리고, 온 거리가 술렁거릴 정도로 소란스러운 것은 좋지 못한 징조였다. 하지만 일리야가 앤더슨과 접촉하지는 않았을 텐데. 일리야는 제 입으로 앤더슨 후작가에서 편지가 와서 일리야에게 유학을 제의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가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복잡하네.”
어쩐다. 제리는 착잡하게 중얼거리며 턱을 괴었다. 하지만 당장 제리가 나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를 지켜보며 어떻게 하면 제게 가장 이득이 될지 간을 보는 수밖에.
막연하게 그 사건을 흘려듣고 넘기려던 제리가 그의 스승인 시어스마저 그날 폭약이 터지던 사고에 휘말렸다는 것을 듣게 된 것은 주말 외출 신청이 마감된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 * *
시어스의 집은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크고 작은 파편에 근육이 파열되었다고 들었다. ‘폭약이 터져 사람들이 여럿 다쳤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별 생각 없이 안됐다는 생각만 들었다. 어차피 그렇게 될 예정이던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아는 사람이 그 사고에 휘말려 다쳤다는 것을 들으니 갑자기 그 일이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스승님!”
“……제리?”
그래 나다!
“제리 네가 왜….”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벌컥 문을 연 시어스는, 굉장히 의외라는 듯 생경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야 괜찮으시냐고 편지를 보내면 ‘그럼. 당연히 괜찮지.’하며 능청스러운 답장을 보내올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걱정이 되어서 두 눈으로 그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이건 일종의 병문안인 셈이었다.
“…일단 들어오려무나.”
“네!”
제리는 사양하지 않고 냉큼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시어스의 집 안은 의외로 단정했다. 물건이 이리저리 늘어져 있거나 굉장히 어지러울 것 같았는데 말이다. 아니, 어찌 보면 단정하기보다는 생활감이 전혀 없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사용인 하나 없이 정말 한 사람만 살기 좋은 크기의 소박한 집이었다. 하기야, 대부분의 시간을 황궁 안에서 보내는데다 딸린 가족도 없으니 큰 집을 가져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편한 옷을 입고 있는 시어스의 팔뚝에 하얀 붕대가 돌돌 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 붕대에 빨간 핏물이 배어나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덩어리진 핏덩이….
“딸기잼이란다.”
…가 아니고 딸기잼이었다. 그가 손으로 붕대 위를 닦아내자 붉은 기는 금세 사라졌다.
“제리, 여긴 알려준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았느냐? 아카데미는 어쩌고….”
“몰래 빠져나왔어요.”
“몰래?”
“네, 몰래.”
다 아인스 형 덕이었다. 마굿간에서 말을 훔쳐 타고 달아나자, 뒤에서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잡히지 않았으니 괜찮았다. 그리고 당장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게, 내일은 어차피 주말이었다. 조금 혼나더라도 당장 탈출에 성공했으니 된 일이다. 달리는 말 때문에 엉덩이가 들썩일 때마다 체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닌지 조마조마했지만 그건 몇 번에 불과했다.
“별 거 아니에요.”
“…….”
시어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몰래 아카데미를 빠져나왔다 말하는 제자를 황당하게 내려다보았다.
“참, 그리고 주소는요….”
제리는 품속에서 작년에 시어스에게서 왔던 편지를 꺼내어들었다. 당분간 휴가를 가지게 되었으니 편지를 보내도 당장 못 볼 수도 있다는 통보식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른 편지들과는 다르게, 이것 하나는 발신지가 이 주소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제리는 이 주소가 황궁 바깥의 시어스의 집일 거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아마 맞아떨어졌던 것 같다.
“…이런.”
그는 편지봉투에 정직하게 쓰여 있는 주소를 보고 난처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내일 당장 이사를 가야겠구나.”
자신이 보냈던 편지봉투를 받아 든 시어스는 평온한 표정으로 헛소리를 했다.
‘뻥치시네.’
그게 농담임을 알기에 제리는 대꾸도 하지 않고 순진하게 웃었다.
“문안 선물은 어디 있니?”
시어스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선물? 급하게 오느라 선물은커녕 몸만 달랑 온 셈이었다. 제리는 그의 말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하는 수없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나가서 사올까요?”
시무룩하게까지 들리는 말에 시어스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제리는 부러 불쌍한 척 어깨를 늘어뜨리며 다녀오겠다고 중얼거렸다. 시어스는 그런 제리를 급히 잡아 세우며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나이 먹고 어린 제자의 주머니를 털 생각은 없다고 중얼거리는 것은 덤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인벤토리에 사탕 한 봉지를 넣어둔 기억이 있었다.
“스승님, 이거라도 드실래요?”
제리가 허공에서 물건을 빼내자 시어스가 몸을 흠칫거렸다. 그는 눈을 깜빡이다 제리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거, 내가 알려준 마법이 맞느냐?”
“…….”
인벤토리 말하는 건가? 그러고보니, 처음 이 유용한 마법의 수식을 적어 제게 준 것은 시어스였다. 덕분에 제리는 무거운 짐을 들고다닐 필요도 없는 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아… 네.”
직접 만든 마법이라더니, 금세 알아보는 게 신기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집에 들어올 때만 해도 손에 아무것도 안 들고 있지 않았니?”
“네. 그냥 안에 넣어둔 건데….”
이렇게요. 제리는 손에 들린 사탕봉지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시어스는 그를 잠시 지켜보다가, 30초쯤 지났을 때 눈살을 찌푸리며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수식을 변형했니?”
“변형? 아니요. 스승님이 알려주셨던 그대로인데요.”
“그건 언제부터 보관하고 있었지?”
“오늘 아침부터요. 왜요?”
“그렇게 오래? 어째서?”
“…네?”
자신을 추궁하듯이 질문을 퍼붓는 시어스가 이상했다. 인벤토리를 사용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났으니, 당연히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이상할 리가 없었다. 하도 오래 전 기억이라, 당시의 시어스가 그 수식을 건네며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어?”
그 순간, 머릿속에서 그의 것이 분명한 음성이 재생되었다.
‘아주 작은 것만 아주 잠깐 보관했다 꺼낼 수 있단다. 내게는 20초가 한계였으니… 제리 네게는… 1초밖에 안 되려나?’
20초라니. 물건 크기에 시간까지 제약이 걸려 있었는데 그동안 제리는 그에 대해 전혀 몰랐다. 아무리 커다란 물건이든, 얼마나 보관하든 제리에게는 아무런 부담이 가지도 않았다.
“제리, 다시 집어넣어 보렴.”
“…….”
“오오, 이것도 가능하겠니?”
“…….”
시어스는 그 뒤로도 제리에게 계속 이것도 집어넣어 보라며 그의 손에 물건을 하나씩 쥐어주었다. 아무리 커다란 물건이라도 쉽게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빼내는 것을 본 시어스의 눈이 반짝거렸다.
“대단해. 대단하구나, 제리!”
그런가…. 제리는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눈만 깜빡였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한 번 습득하는 것까지가 어렵지, 배우고 난 마법을 더 이상 실패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을 보면 컨디션에 따라 성공했던 마법을 실패하거나 수식을 조합하는 법을 잊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어렵지 않아. 나한텐 이게 게임이라 그런가….’
그 마법을 사용해야지, 하면 곧바로 머릿속에서 수식이 조합되고 그를 사용할 수 있었다. 제리에게는 그게 숨 쉬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교수들은 이변 없이 매일 안정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제리를 매우 기특해했고 말이다.
“제리, 이 장식장은 너무 크겠니?”
“…해볼게요.”
“오, 물건이 들어가 있어도 되는구나. 그래, 여기로 옮기면 된다. 그리고 이 책장은….”
제리는 인벤토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같은 가구라도 안에 든 물건의 유무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빈 장식장과 그냥 장식장으로 분류된다는 것이 달랐다. 제게는 인벤토리가 게임창처럼 보이지만, 시어스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니 굳이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제리.”
‘뭐! 씨발, 작작 좀 시켜!’
“피곤하니?”
“……조금요.”
괜히 거짓말을 했다가 시어스가 또 진실의 입을 시전해 그를 괴롭게 만드는 수가 있었다. 제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시어스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채 ‘덥지는 않나보구나, 제리.’라 말하며 빙글거렸다.
그렇게 잠시 쉰 제리는 또다시 일으켜져 가구를 옮기며 실험을 당해야 했다. 몰래 병문안을 왔다가 졸지에 시어스의 연구대상이 되어버렸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많이 다친 것은 아닐까 해 걱정했는데, 이 인간은 무척, 무우우우척 멀쩡했다.
‘아까 팔에 묻은 게 딸기잼이라고 했을 때부터 도망쳤어야 했어!’
제리는 더 이상 심통난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시어스를 째려보았다. 싫증이 날 정도로 한참 동안 물건을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삐딱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던 제리가 고개를 들었다.
“왔나보구나. 잠시 기다리렴.”
누구지, 이 시간에?
제리는 멀뚱히 시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밖에서 들어온 사람은 카르얀이었다. 그는 거실 한복판에 앉아 있는 제리를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제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어 꾸벅 인사를 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
“됐어, 일어나. 그런 건 네게 안 어울린대도.”
“아, 넵.”
예상한 바였다. 제리는 사양하지 않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덤덤한 눈으로 카르얀을 올려다보자,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황태자로 대우해주려 해도 별로 내키지 않아하는 이상한 놈. 어릴 때에는 무언가 자세나 인사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 자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형들에게 자세는 아주 완벽하다는 말을 수십 번이나 듣고 나서야, 제리는 그 말이 진짜임을 인정했다.
문제는 카르얀에게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냥 그가 제게 예를 갖춘 인사나 극존칭을 듣고 싶지 않아하는 것이다. 하기야 정강이를 맞거나 제리가 자신을 조금 막 대하는 것 같은 낌새를 보이면 호감도를 올리고는 했었다.
‘카르얀, 넌 진짜 조심해라….’
혹여 카르얀의 ‘날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기질에 대한 소문이라도 난다면, 매일 그에게 관심을 받기 위한 사람들에 의해 뺨을 몇 대씩 얻어맞을지도 모르니까. 미래의 카르얀을 걱정하던 제리는 어떠한 생각을 하나 한 뒤 눈을 깜빡였다.
‘혹시 카르얀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무례했기 때문에 봐주는 건 아닐까.’
그게 나였기 때문에. 아무런 노력 없이 쉽게 얻고는 했던 호감도를 생각해보면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시어스의 말에 제리는 하던 생각을 떨쳐내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가 제리를 부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
시어스는 제리가 아니라 카르얀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난 또, 속마음을 읽혀서 스승님이 나더러 자의식 과잉이라고 꾸짖는 줄 알았지.’
“제리는….”
시어스의 표정이 영 떨떠름했다. 제리는 저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저건 어린 날의 자신이 아카데미를 탈출했던 아인스를 보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었지, 하는 눈빛 말이다.
“아, 왜요. 어차피 내일 되면 다시 돌아갈 거예요.”
“…내일 돌아간다고?”
당연하지.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제리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오늘만 여기서 재워주세요, 스승님.”
“…….”
“네? 재워주세요. 네? 네?”
카르얀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제리는 시어스가 절대 거절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늦은 밤에 제리를 혼자 아카데미로 돌려보낼 만큼 그는 매정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루트 백작저로 보낼 생각이었을 것이다.
“몰래 가출해놓고 너무 당당한 것 아니냐, 제리….”
당당하지 못할 건 없지. 어차피 아카데미에서도 처음 있는 일은 아닐 테니 아인스 때만큼 당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탈출하는 학생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게 잘못 아닌가. 제리는 눈을 슬그머니 내리깔고 우물쭈물, 기어가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저는 그냥… 스승님이 너무 걱정돼서 그랬어요.”
시어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린 제자의 걱정스런 말에 마음이 녹아내린 그는 제리를 향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래, 고맙단다. 하지만 제리, 보면 알잖니. 난 정말 괜찮….”
“그래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절 쫓아내실 거예요?”
“…….”
“정말로요?”
“아니….”
“절 그렇게 노예처럼 부려먹으시고…?”
“노예?”
웃겨 죽으려던 카르얀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시어스는 두 손을 내저으며 언제 그랬냐며 제리를 다그쳤고, 제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집어삼키며 카르얀의 뒤에 슬쩍 숨었다. 시어스는 그게 아니라, 오랜만에 만난 제리의 실력을 보려던 것이었다며 변명을 하다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스승님도 너무했다 싶죠?’
날 너무 부려먹었잖아. 시어스는 제리에게 무거운 가구를 이리저리 옮기게 만들었다. 처음엔 그냥 연구인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조금 지나고 보니 가구 배치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시어스는 손도 대지 않고 제리에게 몇 마디 말을 거는 것만으로 손쉽게 가구를 옮긴 것이다. 그러니 자고 가는 것쯤이야 당연히 허락해주겠지! 제리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다잡으며 시어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그는 자포자기한 듯 허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리는 환하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허락하지 않아도 눌러앉아 있을 생각이었다.
* * *
시어스는 제리를 빈 방에다 넣어두고 잠시 카르얀과 할 말이 있다며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아까 전에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제리에게 문을 열어준 것도, 그가 카르얀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내 앞에선 말을 못하는 걸까. 카르얀은 그냥 병문안을 온 게 아니었단 말인가? 얼마나 오래 얘기를 하려고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지. 제리는 폭신한 침대에 앉아 눈을 깜빡이다 천장을 보고 누웠다.
띠링!
[오늘의 일일 퀘스트 발생!]
그때 일일 퀘스트가 발생했다는 창이 떠올랐다. 일일 퀘스트는 웬만해서는 실패 패널티가 없었다.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은 제리의 자유에 달린 일이었기 때문에, 성공 보상이 매우 좋지 않다면 잘하지 않고 넘어가는 편이었다.
Quest. (일일) 왜 나 빼고 비밀얘기 해?
당신은 비밀스런 대화에서 배제되었습니다.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정말 너무하는군요! 지금이야말로 본때를 보여줄 때입니다. 모조리 엿들어 주세요.
성공 보상 : 소정의 정보 획득
실패 시 : [이벤트]2차 테러 진행, [퀘스트]히든 퀘스트 ‘두 번째 테러범을 찾아서’ 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