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_1
아침이 밝기 무섭게 제리는 지도와 함께 ‘일리야랑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이상한 걸 봤어요.’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시어스에게 보냈다. 그리고 사흘 뒤 도착한 편지에는 고맙다는 세 글자만이 적혀 있었다. 그 먼 거리에 있는 장소를 어떻게 발견했느냐고 캐물으면 어쩌지, 하며 마음을 졸였었는데 의외로 깔끔하게 알겠다고만 하니 조금은 허무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어스에게 답장을 받은 그날 저녁, 제리가 발견한 사실에 대한 신문이 발행되었다.
한동안 세상은 더 떠들썩해졌다. 귀족을 끌어내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것의 뒤에, 무려 후작이 서 있었다는 사실은 이야깃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그것이 그저 사람들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깨달았다.
황족이나 귀족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용도로 사병을 키우는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앤더슨 후작 가는 인적이 없는 남부 지방의 땅을 사들여 그곳에서 사병을 키우고 있었고, 하루아침에 그곳으로 닥친 황실 기사단으로 인해 뜻은 펼쳐보지도 못한 채 일망타진되었다.
들려오는 소식 가운데, 반역 죄로 재판을 기다리던 중 감옥에서 마법사 하나가 영문을 알 수 없이 숨이 끊어졌다는 말이 있었다. 감옥에서는 밤새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싸늘한 주검이 된 마법사의 몸 속 장기는 토막이 난 것처럼 짓이겨 끊어져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통증을 호소한다는 것 이외에 그는 아주 멀쩡했었는데, 왜 몸속이 그렇게 엉망이 되어 비참한 꼴을 맞았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의원은 누군가 손을 쓴 것 같다고 중얼거렸지만, 죄인의 최후에 그리 큰 신경을 기울일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곧 신경을 껐다. 누군가 치우기도 전에 마법사의 시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시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충격 때문에 죽은 것 같았다. 하기야 감도 1로도 잠시도 견디기 힘들 만큼 아팠는데, 그 사람은 얼마나 더 했겠어. 그 통증은 진통제도 전혀 듣지 않았다.
조금 더 버텨줬으면 좋았을 텐데. 적어도 한 달은 아팠어야지. 제리는 그게 퍽 아쉬웠다.
“야,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줄리안이 물었다. 그에 시렌이 씩 웃으며 목 앞에 손바닥을 가져가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헨리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헨리는 어젯밤에도, 시렌이 도서관에서 빌려온 제국 법전을 읊으며 후작 가의 최후에 대해 예상할 때 저런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들어도 이런 일에는 도무지 면역이 생기지 않는 모양이다.
“제리랑 절교한 일리야, 입에 뭐 묻었다.”
“응.”
저 씨발새끼가.
“그리고 일리야랑 절교한 제리, 나 거기 물 좀 주라.”
“야,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깐족거리던 줄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제리가 힘껏 던진 물병을 한 손으로 가뿐히 받아냈다. 일리야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푸스스 웃었다.
넌 왜 쳐 웃지?
제리가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노려보자 일리야는 언제 웃었냐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돌아와 시치미를 떼었다.
일리야가 절교 선언을 한 다음날부터 시렌은 일리야와 제리의 이름 앞에 ‘절교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줄리안마저 재밌겠다며 그를 따라했고, 헨리마저 눈치를 보다 이렇게 불러야 하는 거냐며 ‘절교한 제리’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제리는 한 시간 만에 스트레스를 20만큼 받고 이마를 감싸 쥐었다.
“너넨 우리가 절교한 게 아무렇지도 않아?”
제리는 짜증스런 말투로 강하게 말했다. 시렌이 피식 웃었다. 친구라면 조금은 심각성을 느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함께 다니는 친구들이 그냥 싸운 것도 아니고 절교를 했다는데, 평소와 똑같이 구는 건 정상이 아니었다.
“제리, 아 해….”
“너도 하지 마!”
제리는 일리야의 손을 쳐내며 소리쳤다. 그러자 시렌과 줄리안이 배를 잡고 테이블에 쓰러져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상한 건 일리야도 마찬가지다. 아니, 일리야가 가장 이상했다! 다음 날에도 평소처럼 자신을 대할 거면 절교라는 말은 왜 했단 말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리야, 어제 한 말은 취소하는 거지?’라고 물었다가 개무시를 당했다.
‘…생각할수록 짜증나네.’
[스트레스가 1만큼 증가합니다.]
“이봐, 제리.”
“뭐, 씨발.”
며칠 사이에 욕이 부쩍 늘었다. 입 밖으로 내뱉는 욕이 늘어날수록 시렌이 즐거워했고, 그러면 또 기분이 나빠졌다.
“미안한데 하나도 걱정이 안 돼. 너네 하는 꼴을 봐라.”
줄리안이 한참을 깔깔대며 웃다가 찔끔 새어나온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저 말도 수십 번 들어서 이유는 굳이 묻지도 않았다. 일리야가 자신을 평소 그대로 대하니 저들로서는 절교라는 말이 그냥 장난처럼 들릴 것이다.
‘쟤네한테 일리야가 날 좋아한다고 착각해서 저 지랄을 하는 거라고 말할 수도 없고!’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니 좋겠다. 친구 외에 다른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겠지? 제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리야에게 한 번 더 확실히 제 의사를 말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흐지부지 넘어가는 것은 일리야에게도 할 짓이 아니었다.
“너, 나와.”
제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잡으라고 내민 손이 아닌데, 일리야는 순순히 제리를 따라 일어나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체력이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어디 가?”
“…고마운데, 앞으로는 내 손 함부로 잡지 마.”
“알았어.”
그러면서 잡은 손은 아직도 놓지 않았다.
“말로만 알았다고 하는 거잖아. 놔라.”
“으응…….”
“모른 척하지 마!”
제리의 꾸지람에 일리야는 눈을 끔뻑거리다 그 말마저 무시해버렸다. 저 좋을 것만 듣는 일리야 탓에 혈압이 또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야, 야! 짜증나니까 다른 데 가서 싸워.”
“안 그래도 그럴 거거든?”
어차피 친구들 앞에서 할 만한 말이 아니니 자리를 옮겨야 했다. 제리는 홱 돌아서 쿵쿵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멀어지자 시렌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씨발, 살다보니 별 꼴을 다 보네.”
남의 사랑 싸움 같은 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 그가 중얼거리는 말에 헨리가 고개를 소심하게 끄덕였다.
* * *
제리는 한참을 걸어와 듣는 사람이 없는 나무 아래 벤치에 주저앉았다. 그 옆에 얌전히 따라 앉은 일리야는 이제 말해보라는 듯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제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선언하듯 말했다.
“이것까진 말 안 하려 했는데 난 남자 안 좋아해.”
“그럼 누굴 좋아하는데?”
“누구도.”
“다행이네….”
다행일 일은 아니었다. 제리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핀잔을 놓았다.
“그래도 남잘 좋아하게 될 일은 없을 거야.”
“그럼 나도 싫어…?”
“싫지는 않지만, 넌 나한테 그냥 친구야.”
그 말에, 일리야는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래서 절교했잖아…. 나한테 친구라고 하지 마.”
그 놈의 절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제리는 얼굴을 감싼 채 심호흡을 하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일리야, 잘 생각해봐. 너도 날 그, ……하는 게 아니라니까?”
“정말 그런 것 같아?”
“물론이지.”
일리야보다는 자신이 더 잘 안다. 일리야는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거다. 제리에게는 시스템과 미래를 알 수 있는 가이드북이 있었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가 있었다. 일리야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시스템에 의해 ‘제리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되어, 강제로 제게 이끌리게 되는 것이다.
“네가 나보다 날 더 잘 알아? 왜 아는 척해, 제리….”
왜 몰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배는 더 잘 알아. 제리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는 일리야가 언제 제게 호감도를 올리는지도 알았다. 그리고 손끝만 스쳐도 그의 얼굴이 빨개지며 ‘일리야 디페리우스가 설레어합니다.’라는 문구가 뜨기 때문에, 알고 싶지 않아도 주입당하듯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일리야가 알려주지 않은 것까지 모조리 알고 있으면 말 다 한 것 아닌가?
“…알아! 아니까 이런 말을 하지!”
[스트레스가 1만큼 증가합니다.]
“응.”
또 무시당했다.
“아, 짜증나!”
가슴이 답답했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 일리야가 원래 이렇게 말을 안 듣는 애가 아니었는데, 얘를 어쩌면 좋지? 속이 터져 죽기 일보 직전인 제리의 손을 슬쩍 잡으며 일리야가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제리 네가 남자를 안 좋아하는 게 무슨 상관이야…. 넌 그냥, 나만 싫어하지 않으면 돼.”
“웃기지 마. 넌 남자 아니야?”
“…….”
일리야는 그냥 희미하게 웃었다. 제게 곤란한 질문이라고 또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에 다시 한 번 제 마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말을 돌렸다.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난 정말 널 좋아하는 게 맞아. 내가 농담할 성격이 아니란 건 너도 알잖아….”
“…….”
“내가 어떻게 하면 믿어줄 건데…?”
“……그건 내가 좀 더 방법을 생각해볼게.”
하루 빨리 직업 엔딩을 타든가 해야지…. 아무래도 일리야는 졸업하고 나서도 자신이 있을 아카데미에 눌러앉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조기 졸업이라도 알아봐야 하는 건가?
“이제 생각 다 했어?”
생각해 본다고 말한 지 1분도 안 지났다. 제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빨리 생각 못해.”
“그럼 언제…….”
“넌 나중에 무릎 꿇고 착각이었다고 싹싹 빌 준비나 해.”
“그럴 일 없어….”
“과연 그럴까.”
변하지 않는 감정은 없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발생한 감정은, 마찬가지로 하루아침에 아무 이유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제리는 조금 두고 보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제리의 예상이 맞다면 일리야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제 마음을 고백할 생각을 했는지, 제리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리야. 그날 나한테 왜 좋아한다고 말했어?”
어차피 좋은 대답을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만약 내가 놀라서 피했다면 어떻게 했으려고. 알고 있었으니 그리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까지 생각하지 못할 만큼 일리야가 바보는 아니었다.
“난 그냥 널 좋아해서 좋아한다고 말한 건데, 왜 그렇게 말했냐고 하면….”
“야.”
“그냥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어….”
일리야는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날 밤의 광경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새록새록했다.
엉덩이가 얼얼할 정도로 덜컹거리는데다 먼지 냄새까지 나던 비좁은 짐마차 안, 조금만 고개를 틀면 입술이 맞닿을 것 같이 가까운 거리.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좋아한다며 고백해왔던 목소리…. 어제 자기 전까지도 귓가에 그 목소리가 아른거려 죽는 줄 알았다.
…큰일이다. 이러다 내가 잠든 틈에 몰래 방에 들어와 입을 맞추고 도망칠 수도 있겠어.
“일리야. 그날 내 허락도 없이 키스하려 했지?”
“……아냐, 못했어.”
“앞으로도 하지 마.”
그래도 입을 맞추기 전에 깨어나서 다행이었다. 딱히 첫키스를 운운하며 입술의 순결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입맞춤까지 했으면 일리야는 더 정신을 못 차렸을 테니 말이다.
“날 왜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그것부터가 착각일 테니까, 그 착각을 정정해주면 일리야도 제 마음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일리야가 갑자기 뺨을 붉혔다.
“넌 아직 어려서 말 못해.”
“……언제 말해줄 건데.”
“네가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지면 그때 해줄게….”
“내년?”
“나보다 나이가 더 많아져야 한다니까…. 나도 나이는 먹어, 제리.”
죽어도 말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 새끼가.”
제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이내 꽉 쥔 주먹을 힘없이 풀었다. 일리야가 저렇게 미친 건 다 제 탓이었다.
‘조금만 덜 잘해줄걸 그랬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일리야는 고개를 숙여 한숨을 푹푹 내쉬는 제리와 굳이 시선을 맞춘 채로 말했다.
“당장 너도 날 사랑해 달라고는 말 안 해. 그냥 내가 널 혼자 좋아하겠는데 네가 그걸 왜 말려? 무슨 권리로…?”
“……그래, 해라, 해.”
제리는 눈썹을 찡그리며 포기한 듯 힘없이 대답했다.
“정말?”
허탈한 제리와는 정 반대로, 일리야는 낯빛이 폈다. 그는 화색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마음대로 해. 앞으로도 난 널 그냥 친구처럼 대할 거야. 나중에 땅 치고 후회하는 건 너지, 나겠어?
“정말 계속 좋아해도 돼…?”
“알아서 해.”
하지 말라고 해도 못 들은 척할 거면서. 제 허락을 받는 척하는 게 가소로워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좋아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 좋아하겠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대신 내 허락 없이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춘다거나, 고백하는 건 금지야. 알겠어?”
일리야와 눈을 맞추며 조건 하나하나마다 끄덕임을 받아냈다. 열심히 대답하는 것 치고는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고마워, 제리….”
“고맙긴 뭘. 말 걸지 마라.”
“응! 응….”
“말 걸지 말라고.”
짜증나. 제리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일리야는 그 어조는 신경 쓰지도 않고 허락을 받았다는 것에만 기분이 들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제리, 들었어?”
“뭘?”
“이거!”
헨리는 꾸깃꾸깃한 종이를 제리의 눈앞에 불쑥 내밀었다. 종이 위에는 앤더슨 가가 반역죄로 멸문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결국 그렇게 됐구나. 제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헨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구는 제리를 바라보며 자신보다 한 발 앞서 소식을 주워들었다고 생각했다. 시렌이 방으로 들어오자, 헨리는 제리에게 줬던 종이를 뺏어들고 그에게 내밀었다.
“뭐어?!”
시렌은 목이 나갈 것처럼 큰 소리로 소리쳤다. 헨리는 그제야 뿌듯한 얼굴로 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무리의 마법사들과 무기들, 그리고 사병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물증이 나왔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하루아침 만에 모든 것을 발각당한 후작은, 야반도주를 하려다 붙잡혔다.
직접 일에 연관된 앤더슨 후작과 그의 아들 레이븐 앤더슨은 목이 떨어져나갔고, 후작 일가는 귀족 지위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속이 썩 시원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제게 저주로 가한 고통과 반란에 대한 불안감으로 잠 못 이루게 한 것을 생각하면 너무 쉬운 죽음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그렇지?”
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앤더슨 가가 얽혀 반란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죽는 결말은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이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조금 낯설었지만, 그래도 제리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사는 것이 우선이었다.
* * *
이걸 가져갈까 말까.
제리는 일리야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일기장을 펼쳐 넘겨보며 고민에 잠겼다. 가장 첫 페이지로 넘겨보니 제리가 쓴 일기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몇 장 뒤로 넘어가니 열 세 살의 일리야가 열두 살의 제리에게 써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리에게.]
어린 일리야의 글씨체였다. 정확한 이유를 정의할 수는 없으나 어쩐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는 이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때문인지 조금 그리운 것 같기도 했다. 제리는 글자 위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다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두꺼운 일기장은 벌써 절반 이상 빼곡한 글씨로 채워져 있었다. 페이지 귀퉁이에는 일리야가 그린 고양이 그림이나 제리가 아무 이유 없이 그린 구름 그림이 자리 잡기도 했다. 할 말이 많아 하루에 한 장을 다 쓰는 날도 있었고, 아예 한 글자 대화도 나누지 않은 날도 있었다. 가장 주고받은 대화가 많았을 때에는 서로 얼굴을 보지 못했던 열두 살 때였다.
뒤쪽으로 넘어갈수록 제리와 일리야는 조금씩 나이를 먹어갔다. 제리의 글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했다면, 일리야의 글씨체는 점점 갈수록 정갈해진 편이었다. 처음과 끝의 글씨를 비교해보니 그 차이가 더더욱 극명했다.
[나 일리야야. 벌써 집에 간 거야? 방학 잘 보내.]
“…….”
이건 어젯밤에 기록된 글씨였다.
“제리, 어디야? 짐은 아직이니?”
아인스의 목소리였다. 아래층에서 소리를 친 건지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희미했다.
“금방 내려갈게!”
오늘은 방학 첫날이자 일리야에게 일방적으로 절교 선언을 당한 지 32일째가 되는 날이다. 성적을 받기가 무섭게 제대로 인사도 건네지 않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온 탓에, 일기장으로 인사를 한 모양이다. 이만 일기장을 덮으려던 제리는 잠시 멈칫했다.
[지금 놀러가도 돼?]
제리는 눈을 끔뻑거렸다. 글씨가 지금 막 새겨지기 시작했다. 지금? 제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일리야는 보지도 못할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는 책상 위를 눈으로 훑어 만년필을 찾아냈다. 그리고 급하게 그 뚜껑을 열어 일리야의 글씨 아래에 제 글씨를 써넣었다. 서걱서걱, 펜촉이 종이 위를 긁으며 나는 소리가 다급했다.
[안 돼. 나 지금 바다 가!]
[나도 갈래.]
이 근방에는 바다가 없었다. 있는 거라곤 황궁 근처의 작은 호수뿐이었다. 그러니 바다를 보러 간다는 말은 멀리까지 간다는 얘기임을 모르지도 않을 텐데, 무작정 자신도 간다고 하는 게 어이가 없어 잠시 손의 움직임이 멈췄다.
멀어서 안 된다고 하면 괜찮으니 따라간다는 말이 나올 게 뻔했다. 일리야는 이런 구석에서 묘하게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곤 했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일리야가 낄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말해주는 게 훨씬 나았다.
[안 돼, 가족여행이야.]
[언제 오는데?]
휴양 개념으로 아버지도 휴가를 내고 가는 거라 2주 이상 걸릴지도 모르는 일정이었다.
[우리 개학하고 보자.]
제리는 언제 오는지 알려주기보다는 개학 후에 보자고 딱 잘라 말했다. 방학 중에 일리야를 만나 함께 놀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일리야에게 더 이상의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학기 중에도 그를 그냥 친구처럼 대했고, 일리야가 은근히 손을 잡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습관처럼 팔짱을 끼고 다녔다. 일리야의 얼굴을 못 보는 방학 동안, 그가 다시 한 번 마음정리를 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일리야는 무슨 생각 중인지, 곧장 어떤 대답을 주지는 않았다. 아래층에서 제리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답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역시 이건 두고 가는 게 좋겠어. 제리는 일기장을 탁 덮은 뒤 책상 위에 놓고 계단을 내려갔다. 꽉 덮인 일기장 속 종이에 제리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새로운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방 정리를 위해 들어온 시종은 제리가 아무렇게나 팽개쳐둔 만년필의 뚜껑을 닫으며 책상을 가지런히 정돈했다. 각종 마법 서적과 수식을 끄적여둔 종이가 한곳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 사이에 제리의 일기장은 없었다.
* * *
마차에서 내내 멀미를 하다 잠시 눈을 붙였다 깼더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부스스하게 일어나 마차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눈앞에 광대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아름다운 해수면에 햇빛이 부서지며 반짝거리는 모습에 제리가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자, 백작이 그의 어깨를 감싸며 허허 웃었다.
“제리는 바다가 처음이지?”
따지자면 처음은 아니었다. 이젠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친구들과 여름 방학 때마다 바다나 계곡으로 놀러가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굉장히 오랜만인 것은 맞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진 물을 바라보며 제리는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닷물은 짜니까 목마르다고 해서 저 물을 먹으면 안 된다.”
“그건 아는데….”
수도에서도 목이 마르다고 호수 물을 퍼마시거나 분수대에 가서 얼굴을 처박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날 무슨 강아지로 생각하는 건가. 백작의 염려에 제리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넓은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제리를 보며 백작은 뿌듯하게 웃었다.
“제리!”
로베인과 조이가 갑자기 달려들어 제리의 신발을 벗겨 손에 들었다. 쌍둥이들의 습격에 신발이 벗겨진 채 양 팔을 하나씩 붙잡힌 제리는 불안하게 그들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뭐야?”
제리는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곧장 제리를 끌고 백사장으로 내달렸다. 뜨겁게 데워진 모래가 발바닥에 닿을 때마다 체력이 1씩 깎여나갔다. 졸지에 질질 끌려간 제리는 바닷물에 가까이 다가가는 쌍둥이 형들이 어쩐지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개구지게 웃었다.
“으아악!”
그리고 동시에 제리를 번쩍 들어 물에 휙 내던졌다. 철퍽! 하는 물소리와 함께 온 몸이 쫄딱 젖은 제리는 급히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야!”
갈색 머리가 물에 젖어 축 늘어졌다. 고개를 저어 머리에 묻은 물을 털어내자, 조이가 강아지 같다며 배를 잡고 웃었다. 로베인도 마찬가지였다. 똑 닮은 둘의 장난기에 희생되어 물에 내던져진 자신을 보며 아인스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
안 뛰어오냐? 자세히 보니 그마저도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제리는 깊디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어때, 물은 시원해?”
로베인이 물었다.
“…궁금해?”
제리는 살벌하게 웃으며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바닷물을 쓸어내렸다. 입술에서 짠맛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말대로 바닷물은 정말 짰다. 이걸 이런 식으로 체험시켜주다니. 고마워서 죽을 지경이다.
“난 아직 별로 안 궁금해. 흠, 난 가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와야겠다.”
“조이 형.”
“제리 너도 일단 나와. 가서 씻고 옷 갈아입고 다시 나오자.”
로베인이 키득거리며 손짓했다.
“…바닷물.”
제리는 손을 오목하게 오므려 바닷물을 조금 떠내어보았다. 바닷물은 손 틈 사이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바닷물도 물이다. 조금 퍼내도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널린 게 물이었다. 제리는 어릴 때의 나쁜 경험 때문인지 물 마법과의 상성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학과 수석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상성이 좋지 않아도 기본은 한다는 말이다.
“옷이 물에 젖으면 그게 수영복이지, 뭐….”
굳이 수영복으로 갈아입지 않아도. 제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저학년 때 배운 물 계열 마법을 떠올렸다. 물 계열은 까다로워. 마력 소모량도 크고. 하지만 한 번 익힌 마법은 게임에서의 스킬처럼 뇌리에 각인되어 실패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었다.
[70%….]
“제리, 나오라니까?”
[90%….]
“제리?”
[완료되었습니다! 방대한 양의 물을 모았습니다. 이동시킬 지점을 설정해주세요.]
다 됐다. 제리는 바닷물에 담갔던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 위로 제리의 키만큼 커다랗고, 구체 모양의 물방울이 만들어졌다. 물방울은 마력에 갇힌 채 흔들리며 꼭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거렸다. 그걸 본 로베인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설정된 지점에 물이 이동됩니다.]
“제, 제맄!”
촤아악! 시원한 소리와 함께 쌍둥이 형들의 머리 위로 바닷물이 쏟아져 내렸다. 제 이름을 부르던 조이는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물벼락을 얻어맞았다. 산책하듯 천천히 다가오던 아인스가 제 자리에 굳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쌍둥이들도 날벼락처럼 물을 얻어맞아 깜짝 놀라 쫄딱 젖은 채 그 자리에 굳었다. 똑같이 생긴 얼굴이 똑같은 표정으로 놀라서 어버버거렸다. 제리는 그게 퍽 우스웠다.
“그러게 누가 말도 안 하고 사람을 던지래.”
제리는 그대로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물에 젖은 발바닥과 발등에 흰 모래가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털어내도 다시 달라붙고, 또 털어내면 또 달라붙는 것을 반복했기에 제리는 그냥 모래 양말을 신고 저벅저벅 걸었다.
“형, 어때. 물은 시원해?”
“…….”
“…….”
그는 로베인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으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 또 붙잡혀 물에 던져지는 복수라도 당할까, 아인스에게로 후다닥 달려갔다.
“잘했어. 복수는 원래 바로바로 해야 하는 거야. 참으면 병이 되거든.”
넌 잠시도 참지 않는구나. 아인스가 젖은 머리를 넘겨주며 칭찬의 말을 건넸다. 제리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해변을 따라 걷던 중, 왜 아인스 형만 젖지 않았냐며 조이가 아인스를 물 쪽으로 휙 밀었다. 바닷물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엉덩이 부위만 젖은 모양이 굉장히 볼썽사나웠다. 아인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냥 스스로 물속에 들어가 머리까지 푹 담그고 나왔다.
온 몸이 젖은 채 터덜터덜 걸어오는 아들들을 보며 백작 부부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젖은 옷을 갈아입어주세요. 저체온증에 걸리기 10분 전입니다.]
“…….”
제리는 눈앞에 뜬 시스템창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찝찝한 것은 애써 무시했다. 욕실 안에 아인스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리더러 뒤따라 들어오라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냉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씻으려면 옷을 벗어야 한다. 아인스는 제리의 형임과 동시에 ‘공략 인물’에 포함되었고, 벗은 모습을 보고 루트 진행 창을 띄우면 또 혈압이 오를 것 같았다. 정작 아인스는 별 생각이 없다고 한대도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밑, 밑에 털도 없어서….’
……보여주기 쪽팔려.
지금까지 제리의 민둥한 하반신은 룸메이트들조차 본 적이 없었고, 화장실에 갈 때에도 반드시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 갔다. 시렌은 제리더러 지나치게 깔끔을 떤다며 핀잔을 주었지만,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게 두는 편이 나았다.
없어진 건 고작 몸의 털뿐이었지만 다들 있는 것이 제게만 없다는 건 다소 견디기 힘들었다. 두드러지는 걸 꺼리는 건 아니지만, 털의 유무로 튄다는 것은 정말 끔찍했다. 만일 시렌에게 들켰다가는 죽기 직전까지. 아니, 어쩌면 죽은 뒤까지도 놀림을 당할 게 뻔하다.
하여간 지금껏 무척 조심해서, 그래서 들키지 않을 수 있던 건데. 제리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추워서 이가 닥닥 부딪쳤다. 그렇게 웅크린 채 한참을 고민하던 제리의 눈앞에 상태창이 한 번 더 떠올랐다.
[젖은 옷을 갈아입어주세요. 저체온증에 걸리기 1분 전입니다.]
숫자가 카운트 다운되기 시작했다. 59, 58, 57초…. 하필 빨간 글자라 그런지 괜히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제리, 아직 거기 있니? 물 다 받았어!”
아인스의 목소리였다. 문에 가로막힌 목소리가 조금 울렸다. 지금 욕실에 들어가 옷을 벗고 욕조에 몸을 담그면 다 해결될 일이다. 기껏 바다로 놀러와 첫날부터 저체온증에 걸리면 제리만 손해였다. 몸이 약해 금세 낫지도 않을뿐더러, 어머니는 제리가 열만 조금 나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게 뻔했다.
“…….”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들어가게 될 거, 고민은 왜 했는지 모른다. 제리는 굳게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고 벌떡 일어났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문이 열렸다. 따뜻하고 습한 수증기가 순식간에 제리의 몸을 감쌌다.
“밖에서 뭐 했어?”
“명상!”
그는 헛소리를 하며 등으로 문을 밀어 닫았다. 결연한 얼굴로 상의를 훌렁 벗는 제리를 보며 아인스가 피식 웃었다.
“형이랑 목욕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아니! 아닌데?”
제리는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인스 입가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젖은 옷을 아무 데나 던져둔 제리는 몰래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10, 9, 8초…. 시간은 제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허리 끈을 풀고 바지를 내렸다. 다행인 것은, 아인스가 제리의 탈의 과정을 굳이 빤히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커다란 욕조 안에 들어가 제리와 같은 색의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있었다. 저대로 눈을 꼭 감고 자신이 욕조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이쪽을 바라보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세상은 제리의 편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다리를 번쩍 들어 욕조에 다리를 걸쳐놓았을 때 아인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
“…….”
퐁당! 제리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그대로 코 아래까지 물에 잠긴 채로 머리를 데굴데굴 굴렸다.
봤겠지? 봤겠지? 봤겠지?
…안 봤을 리가 없잖아. 시선이 아래를 향한 것을 자신도 똑똑히 느꼈다. 이럴 줄 알았어. 들킬 줄 알았다고! 제리는 속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괴로워했다. 수치심이 온몸을 잠식했다. 물 속에 조금 더 들어가며 숨을 내쉬자 보글보글 작은 물거품이 올라왔다.
“제리.”
아인스가 조심스레 제 이름을 불렀다. 드디어 올 게 왔다. 제리는 시선을 돌려 괜히 바닥의 타일을 바라보았다.
“혹시 그, ……뽑았니?”
뭐?
“아팠겠다.”
“형, 미쳤어? 뽑다니! 그런 거 아니야!”
제리는 물 밖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밀었어? 안 다쳐서 다행….”
“그것도 아냐!”
제리는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강한 부정을 하는 제리를 묘하게 바라보던 아인스는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왜….”
“…….”
왜 자꾸 묻는 거야. 짜증나게.
“아냐. 아니다, 제리. 조금 늦긴 하지만… 괜찮아. 언젠간 나겠지.”
아니야. 평생 다시 나지 않을 거야. 그건 내가 안다.
“괜찮아, 뭐 어때. 응?”
아인스는 축 처진 제리를 보며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
죽지는 않지만 쪽팔린다고. 평생 남들 앞에선 바지도 못 내릴 것 아니야….
역시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 제리가 생각한 그대로였다. 쌍둥이 형들에게 들키면 엄청나게 놀림당할 것 같았고 말이다. 아인스는 열심히 제리를 위로했지만 그에게 별로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있는 사람한테 위로의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그가 말을 하면 할수록 제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인스는 아무 말 없이 심통 난 표정만 하는 제리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털이 있건 없건 난 널 사랑할 거야. 그게 없다고 해서 네가 제리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
…사랑?
“그러니 크게 신경 쓰지 마.”
“아인스 형.”
“응?”
그러고 보니 왜 루트 선택하는 창이 뜨지를 않지? 제리는 조심스레 아인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다정한 눈으로 제리를 바라보며 말해보라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형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
“말했잖아, 털 따위 없어도 된다니까.”
“……그 말은 이제 그만해.”
이게 아닌데. 원래는 시도 때도 없이, 내가 손만 들어도, 내가 입만 열어도 시스템창을 띄워댔잖아.
“형, 방금 나 보고 무슨 생각했어?”
“어, 어?”
당황하는 걸 보니 이상한 생각을 한 건 맞나보다. 제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한 번 떠보기로 했다.
“다 알거든.”
“……미안해.”
내게 미안할 생각이라면… 이상한 생각을 했단 소리야?
“고작 이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는 게 귀여워서 그랬어.”
이상한 생각이 아니었다. 제리는 헛기침을 하며 그의 말을 슬쩍 부정했다.
“…이건 사소하지 않아. 형은 내 마음 몰라.”
“알았어, 미안해.”
진짜 이상해. 왜 창이 안 뜨냐고.
“호감도….”
제리는 슬그머니 호감도창을 불러왔다. 아인스의 호감도는 이미 최대치에 다다라 있었다. 물론 시스템창이 안 뜨는 게 싫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았다. 앞으로도 쭉 이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대체 왜 이러는 건지 그 이유를 알아야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를 적용시켜 평온을 얻을 것이 아닌가. 휴양지에 왔다고 시스템창마저 쉬는 건가? 아니면 아인스에게 문제가 생긴 건가….
“제리 넌 내가 제일 아끼는 동생이야.”
아인스는 짜증이 난 제리를 달래듯 상냥한 어조로 속삭였다.
“쌍둥이 놈들에겐 비밀로 해.”
“그런 말 안 해도 이미 형들도 알걸.”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차이가 나는데. 쌍둥이들은 자신보다도 아인스를 놀려먹는 걸 훨씬 더 즐겼다.
“하긴.”
아인스도 그를 모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목을 울려 자그맣게 웃었다.
아인스가 자신을 사랑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당연하다 생각되기보다는 기분이 좋아졌다. 애정 어린 말을 듣는 게 처음도 아니지만 괜히 마음이 녹아내렸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피로가 풀렸다. 그래서인지 모른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데 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나도 형들 중엔 아인스 형이 제일 ……편해.”
다른 형들처럼 내게 짓궂은 장난도 안 치고. 진짜, 진짜로 형 같아서.
그래서 편해. 그래서 좋아. 그래서 더 간절한 거야. 계속 날 동생으로만 봐줬으면 해서.
[아인스 루트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200]
[현 나이에서는 호감도 200이 최대치라 더 이상 오르지 않습니다.]
고개를 들어 아인스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는 열에 달뜬 얼굴로 환히 웃었다. 정말 기쁜 듯, 행복을 담은 표정이었다.
“제리, 형이 정말 사랑해.”
“…나, 나도.”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제리는 작게 중얼거리며 민망하게 고개를 돌렸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아인스의 말을 받아치기만 한 것뿐인데 굉장히 쑥스러웠다.
[아인스 루트의 호감도가 삭제됩니다.]
……어?
[더 이상 아인스 루트에 대한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아인스의 이름이, 호감도창에서 삭제되었다.
* * *
왜지? 내가 뭘 했다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물음표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호감도가 삭제되었다고 해서 아인스의 태도가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혹시 사랑한다는 말 때문인가 해서, 목욕을 마친 뒤 짐을 정리하고 있던 로베인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에게 사랑한다고 중얼거렸다가, 어디 아프냐는 소리를 들었다.
“한 번 더 말해봐.”
즐거움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열쇠는 아닌 모양이었다. 제리는 여덟 번째로 뜬 호감도창을 닫으며 대꾸했다.
“어디 아파서 못해.”
“화 났어?”
“아니? 아파서 화도 못 내.”
“에이… 화 났네, 화 내지 마. 응? 미안해, 제리.”
미안하다는 사람이 저렇게 대놓고 웃기다는 표정을 지어도 되는 거야? 제리는 ‘아, 응.’하고 대충 대꾸하곤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게 뭐지. ……제리, 이거 네 거야?”
짐가방을 뒤지던 로베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지에 네 이름이 적혀 있던데? 오늘 날씨 눈이 많이 왔음. 일기 써보는 건 처음인데 벌써부터 쓰기 싫….”
“그거 내 거야!”
제리는 급히 그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들었다. 굉장히 익숙한 모양새에 제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히 책상 위에 놓고 왔는데, 이게 왜 짐가방 안에 있지?
“너 일기 써?”
“……그게 뭐.”
“나도 한 번만 읽어보자. 내일 돌려줄게.”
“싫어! 남의 일기를 왜 읽어?”
제리는 일기장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로베인을 등지고 돌아섰다. 그는 방을 나오며 일기장을 펼쳐 가장 뒷장으로 넘겨보았다.
[일리야, 우리 개학하고 보자.]
아침에 써넣은 글씨였다. 그리고 그 아래 새로운 글이 쓰여 있었다.
[나는… 방학이 너무 싫어, 제리.]
제리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쓴웃음을 지었다. 일리야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번 방학 때는 만나줄 생각이 없기도 했고, 이미 집에서 멀리 와버렸는걸.
[혹시 깜빡했어? 책을 놓고 갔잖아. 제리는 덜렁이야…. 이건 내가 챙겨줄 테니 걱정 마. -일리야가-]
“…일부러 놓고 간 건데.”
그나저나 놓고 간 줄은 어떻게 알았대. 제리는 일기장을 덮고 표지를 손가락으로 괜히 쓸어보았다. 그대로 놓고 왔으면 모를까, 이렇게 제 손에 일기장이 들어온 이상 답장을 안 할 수도 없었다. 제리는 아버지에게 만년필을 빌려 창가에 앉았다.
[도착했어, 일리야! 여긴 날씨가 좋아. 바다도 예쁘고….]
그리고 바닷물은 짰어. 제리는 잠시 망설이다 바닷물의 맛을 말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 위에 선을 찍찍 그었다.
[그나저나 이거 놓고 간 건 어떻게 알았어?]
잠시 기다리자 그 아래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비밀인데.]
“…….”
제리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래, 말하지 마. 사실 나도 별로 안 궁금했어!]
그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글자를 평소보다 꾹꾹 눌러 적고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책상을 쾅 치고 일어났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제리는 창가에 일기장을 그대로 방치한 뒤 돌아섰다. 조금 열린 창틈으로 바람이 휙 불어오자 종이가 팔랑 날렸다.
[난 궁금해. 일기건 편지건 뭐든 좋으니 여기다 써줘. 알겠지?]
제리의 글 아래 일리야의 글씨가 새겨졌다. 얼마 뒤, 해변을 향해 걸어가는 형제들의 모습이 창 너머로 보였다. 희미한 대화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전해졌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는 붉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경계를 멍하게 바라보던 제리는 그가 앉아 있던 창가를 힐긋 뒤돌아보았다. 왠지 이 풍경을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바람결에 팔랑거렸다.
* * *
[빛나는 오색 조개 껍데기를 획득하셨습니다.]
이렇게 귀한 재료가 흔히 널려 있다니. 제리는 신이 나서 바구니에다 조개 껍데기를 담았다. 반쯤 차오른 작은 바구니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합성 재료] 빛나는 오색 조개 껍데기
힘이 매우 강한 오색 조개의 껍데기. 아주 낮은 확률로 진귀한 진주를 품고 있기도 한다. 껍데기는 가루를 내어 사용하거나 공예 재료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