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_2
일리야에게 제리의 옷은 꼭 끼어 맞지를 않았다. 그래서 제리는 형들의 옷을 훔쳐다 일리야에게 건네주었다. 막 씻고나와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때문에 기껏 빌려온 옷의 어깨 죽지도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비켜, 제리….”
“…….”
“할 말 있어?”
“아니, 넌….”
춥지도 않아? 그 말을 하려던 제리는 그냥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일리야가 나도 아닌데, 고작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 때문에 이 여름에 춥다고 할 리가 없잖아.
“……?”
‘그냥 내버려둘까. 어차피 머리가 마르면서 옷도 함께 마를 텐데….’
일리야는 통로를 가로막은 채 고민에 잠긴 제리를 의아하게 내려다보았다.
“……일리야, 고개 숙여볼래?”
하지만 고민 끝에 제리는 일리야의 손에 들린 수건을 빼앗아들었다.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자꾸 시선이 갔기 때문이다. 손에는 수건을 든 채, 제리는 손을 위로 뻗었다. 일리야는 조금 흠칫거렸으나 제리의 행동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얌전히 고개를 조금 숙여주기까지 했다. 푹신한 수건을 머리 위에다 얹으니 일리야가 살포시 눈을 감았다.
제리는 수건을 꾹꾹 누르며 물기를 대충 제거했다. 수건을 문지를 때마다 머리카락이 사르륵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부드러운 움직임이 많이 간지러운지, 긴 속눈썹이 떨리기도 했다. 곧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뜬 일리야가 제리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머리를 말려주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제리가 그 시선을 눈치챈 것은 조금 지나서의 일이었다.
“뭘 봐?”
민망해서 툭 내뱉은 말에 일리야는 눈을 멍하게 깜빡이다 대답했다.
“제리….”
그걸 몰라서 물은 거라 생각해? 제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날 보고 있는 건 알아.”
“아는데 왜 물어본 거야?”
“내 말은, 그렇게 뚫어져라 보지 말란 소리야.”
“응.”
잘 대답한 것치고는 그는 눈을 피하지도 않은 채 여전히 제리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니까? 제리의 핀잔에 일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제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제가 먼저 포기하는 게 나았다.
“마력은 이제 좀 괜찮아? 좀 회복됐어?”
“아직….”
“그래도 내일 돌아갈 수는 있는 거지?”
“아마도?”
“그럼 다행이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리야가 마력이 없어 허덕이는 꼴을 보게 될 줄이야. 그러게 누가 이렇게 먼 곳까지 멋대로 찾아오래. 제리는 일리야가 듣지 못하도록 속으로 투덜거리며 손을 내렸다. 열심히 닦은 덕에 머리의 물기는 얼추 다 마른 것 같았다.
“…제리 너는, 내가 돌아갔으면 좋겠어?”
수건을 일리야의 손에 쥐어주려던 제리는 그 말에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깜빡이는 일리야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눈꺼풀 아래에 자리 잡은 눈은 만개한 장미꽃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묘한 섭섭함이 담겨 물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내가 귀찮아?”
제리는 순간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일리야가 오늘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방학 내내 얠 볼 생각도 없었잖아. 괜히 애매하게 말했다가 여기 눌러앉는 수가 있다.
“그게 아닌 건 너도 알잖아. 돌아가야지. 다들 걱정할 거야.”
“너도 걱정돼?”
“당연하지. 너 또 말 안 하고 나왔을 것 아니야. 그렇지?”
일리야는 대답 대신에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제 앞머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손을 뻗었다. 길고 단단해 보이는 손가락이 제리의 얼굴을 향했다. 뭘 하려는 거지? 제리는 그의 움직임을 저지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손가락은 만지면 짓무르기라도 하는 여린 꽃잎을 만지듯, 살포시 하얀 뺨을 감쌌다.
“나온다고 말은 했어.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뭐 해?”
제리는 제 뺨에 와 닿은 커다란 손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만져보고 싶었어. 내일 돌아가면 못하니까.”
“돈 내고 만져.”
“잠시만….”
일리야는 남은 한 손을 허공에 뻗더니 금화를 하나 꺼내어 제리의 손에 쥐어주었다. 제리는 손에 들린 차가운 동전을 내려다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농담처럼 했던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일 줄이야. 일리야는 돈도 줬겠다, 본격적으로 제리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주름을 펴주고 머리카락까지 만지작거렸다.
“이건 언제까지 가지고 다니는 거야?”
일리야는 제리의 옷에 붙어 있는 브로치를 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이거? 나도 몰라. 스승님이 항상 가지고 다니랬어.”
“으응….”
몇 년 전에 만났던 점쟁이 노인이 이 브로치를 탐낸 적도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마을에 나갈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NPC같아 보였는데, 도무지 뭐 하는 사람인지 아직까지도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때, 가까운 방 안에 있는 시계에서 정각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홉 시인가?”
정확히 아홉 번 울린 궤종시계는 곧 잠잠해졌다. 그리고 경쾌한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퍼지며 이벤트창이 떠올랐다.
[이벤트 발생! 빛나는 해파리의 춤.]
Quest. 빛나는 해파리의 춤
한 시간 뒤, 아름다운 빛을 내며 이동하는 해파리 무리가 해변을 지나갑니다. 보기 드문 장관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열 시 정각, 부둣가에서 발생하는 돌발 이벤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퀘스트가 자동으로 삭제됩니다.)
성공 보상 : 없음
실패 시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