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7/29)

#04_3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떠보니, 앞에 앉아 있던 세 명은 벌써 수업에 간 건지 없었다. 제리는 졸린 눈을 끔뻑이다 고개를 돌려 하품을 했다. 다리를 치우다 의자에 발이 부딪쳐 체력이 깎였다. 일리야는 그 창을 눈앞에서 치워내며 말했다.

“제리, 많이 피곤하면 그냥 들어가서 쉬어.”

“많이 피곤하지만 수업은 들을 거야.”

“왜 그렇게까지 해?”

“그냥, 오랜 습관 같은 거야.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하면 좋잖아!”

주먹을 꽉 그러쥐며 활기차게 말하자, 일리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해하지 못한대도 아무렴 어때. 제리는 인벤토리에서 ‘비밀상점 물약 11번’을 꺼냈다. 이게 뭐냐고 묻는 일리야를 보며 비장의 무기라고 대꾸한 그는 뚜껑을 열었다.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는 없는 냄새가 올라왔다. 마법약이 다 그렇겠지만, 이건 냄새부터가 좀 묘했다.

“약이야?”

“…….”

제리는 일리야의 코앞에 약병을 갖다 대었다. 그는 순간 숨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콜록거렸다. 그는 코를 틀어막은 채 저걸 마셔야 하는 제리는 정말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기다려봐…. 물 좀 떠올게.”

“응, 다녀와.”

제리는 고개를 돌린 채 체력 보강제를 한 입에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물약이 꿀렁꿀렁 넘어가자, 눈앞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사랑의 묘약의 효능이 발동됩니다. 약 하루 동안 처음 본 생물을 사랑하게 됩니다.]

“……어?”

제리는 순간 굳었다. ……말도 안 돼.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몇 번이나 시스템창에 쓰인 글자를 읽어보아도 ‘사랑의 묘약’이라 쓰인 게 맞았다. 아니, 아니야. 분명 체력 보강제인 것을 똑똑히 보고 샀는데! 제리는 재빨리 창을 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제리?”

지금은 그 누구도 봐서는 안 된다. 일리야라면 더더욱 안 돼! 효력은 하루라고 했다. 그러니까 내일도 아프다고 하고 내내 누워 있는 게 좋을 듯했다. 그때까지 눈은 꼭 감고 있어야지. 제리는 약병을 손에 꼭 쥔 채 ‘응, 일리야.’하고 대답했다.

“여기 물 가져왔어….”

“난 괜찮아!”

“그런데… 눈에 뭐 들어갔어? 어디 봐, 내가….”

눈을 뜨게 되면 바로 앞에 일리야가 있을 게 뻔한데, 쉬이 눈을 뜰 수 있을 리가 없다. 제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냐! 그것보다 일리야, 나… 들어가서 좀 쉬어야겠어. 콜, 콜록! 콜록콜록!”

갑자기 목이 아프네. 그는 가짜로 기침을 해대며 아픈 척을 했다. 땀이 나지도 않았는데 식은땀이 난다며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갑자기 숨이 벅찬 척 헉헉거렸다. 

“많이 아파? 내가 데려다줄까…?”

“일리야. 아무도 못 보게 할 수 있지?”

“왜?”

“지금 못 걷겠거든. 나 좀 업고 갈래?”

당장 대답하려던 일리야는 입을 열다 말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한 가지를 제안했다.

“맨 입으로는 안 돼…. 주말에 나랑….”

“주말, 알았어! 알겠으니까 빨리!”

“……?”

원하는 것을 너무 쉽게 얻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은 질끈 감은 채, 황급히 손을 뻗는 제리에 일리야는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그의 손을 잡았다. 모두의 시야에서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일리야는 제리를 업은 채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다 왔어, 제리.”

제리는 바닥에 발을 디디며 손을 더듬어 제 침대를 찾아 앉았다. 그런데 일리야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제리는 잠시 기다린 뒤 말했다.

“고마워. 넌 이제 수업 들으러 가도 돼!”

“나 오늘은 오후 수업 없어.”

안 돼. 있어야 하는데….

“잘 생각해봐, 있을걸?”

“없어.”

“공부해, 그럼.”

“…….”

일리야는 입을 다물고 제리의 말을 무시했다. 공부는 하기 싫은 모양이지.

“……나 아파. 잘 건데 정말 안 나갈 거야?”

“응.”

“나가!”

“왜 쫓아내…?”

“나 옷 갈아입을 거야!”

제리는 침대 머리맡에 개어둔 옷을 더듬거리며 주워들었다. 일리야의 얼굴이 순간 화악 붉어졌다. 하지만 나가면 다시 못 들어오게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눈을 또륵 굴리며 고민하던 일리야는, 곧 해결책을 찾았다.

“제리, 나 눈 감고 있을게. 줄리안을 걸고 죽어도 안 본다고 맹세해….”

“줄리안을 왜 걸어?”

“그럼 시렌 가르시에도 걸게.”

“…….”

“그럼… 시어스도?”

“셋 다 줘도 안 가져.”

이러다 아는 사람 이름이 다 나올 기세였다.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먹을 것 같았다. 제리는 그냥 그에게 뭐가 잘못됐는지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아니, 됐어. 그냥 내가 화장실 가서 입고… 아야!”

“조심해.”

“으으….”

제리는 침대 모퉁이에 부딪친 다리를 문지르다 화장실을 어림짐작하며 비틀비틀 걸어갔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였다. 일리야는 제리가 많이 졸린가 보다, 하고 생각하며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그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끔 다리 힘이 풀리면 몸을 휘청거리기도 했던 걸 생각하면, 욕실에서 잘못해 발을 헛디뎌 쓰러졌는지도 모른다. 일리야는 황급히 화장실 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아 손쉽게 열렸다.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있을 거라 생각했던 제리는 멀쩡했다.

“…제리?”

그는 갈아입은 상의 단추를 하나도 잠그지 않은 채, 넋을 놓고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멋대로 들어온 일리야가 보이지도 않는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맞춘 채 굳어 있었다. 두 뺨이 장밋빛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혹시 열이 나는 건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 일리야는 그런 제리를 잠시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제리, 제리….”

제리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가슴을 움켜쥔 채 열에 달뜬 숨을 내쉬었다.

[심장박동수가 지나치게 빠릅니다. 안정을 위해 잠시 정신을 잃습니다.]

“하으….”

“……!”

제리는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눈을 감고 비틀거렸다. 품에 쏙 들어오는 몸을 가까스로 받친 일리야는 끙끙거리는 제리를 안아들고 침대로 향했다. 심장박동수…? 멀쩡하던 그가 왜 이러는 건지 일리야는 제리의 행적을 되짚어보았다. 그는 끔찍한 냄새가 나는 액체를 마신 뒤로 눈도 안 뜬 제리를 떠올려냈다.

“이게 문제인가….”

그는 제리의 손에 들린 작은 병을 빼앗아 흔들어보았다. 병 안쪽, 가장 아래 미량의 액체가 남아 있었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자 여전히 끔찍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일리야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병 아래 남아 있는 액체를 입 안에 털어 넣고 꼴깍 삼켰다.

“우윽.”

냄새보다도 맛이 더 엉망이었다. 온 입안에 쓴 맛이 감돌았다. 만든 이의 마력인 건지, 묘한 기운이 온몸에 퍼졌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었다.

“제리, 왜 이런 걸 먹어….”

제리는 몸에 좋은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입에 털어 넣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시궁창 물을 먹었으니 기분이 나빠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겠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쓴내에 충격을 받아, 심장에 무리가 가서 쓰러진 것이다.

“불쌍한 제리….”

일리야는 물로 입안을 헹구며 제리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늘 그랬듯, 폭신한 머리카락을 어루만질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제리는 눈을 떴다. 일리야는 침대 옆에 앉은 채 제리의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깼어…?”

제리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쓰러진 건 기억해?”

“나 쓰러졌어?”

쓰러진 기억은 전혀 없었다. 제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생각하다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제 상의는 아직도 단추 하나 잠그지 않은 채 풀어헤쳐져 있었다. 분명히 화장실에서 단추를 채우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천사의 형체를 보았고 심장이 멎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천사는 제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이런 건 먹지 마. 아무리 몸에 좋아도….”

제리의 눈에 사랑의 묘약이 담겨 있던 병이 들어왔다. 일리야가 그 병을 들고 있었다.

“…너무 쓰잖아. 그래서 너도 충격을 받은 거야….”

일리야의 말에 제리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바로 사랑의 맛이야, 일리야.”

“……?”

일리야는 의아한 눈으로 제리를 바라보았다.

“사랑은… 마냥 달기만 할 수는 없는 거야. 가끔은 쓰기도 하고, 매운 맛이 날 수도 있어.”

제리는 두 뺨을 붉히며 말했다. 꿈을 꾸는 듯한 표정에, 일리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헛소리 하지 마, 제리….”

제리는 일리야를 애송이 보듯 하찮게 내려다보았다.

“그건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뭘 안다고… 쯧.”

“분명히 쓰레기 맛이 났단 말이야. 난 너를 사랑하지만 네게서 시궁창 냄새가 난다 느낀 적은 없었어. 네게선 늘 봄 향기가 느껴져….”

맛이 났다고? …어떤 맛? 제리는 일리야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일리야, 너 이걸 먹었어?”

“응, 조금…?”

일리야는 병을 들어 손가락으로 지점을 가리키며 ‘이 정도.’하고 말했다.

“그런데 괜찮아?”

“그런 것 같아.”

“……조금만 먹어서 그런가?”

조금만 먹어서 일리야에게 효과가 들지 않은지도 몰랐다. 그는 평소와 똑같았다. 불량품은 아니라는 것을 상태창이 뜸으로써 확인했으니, 그냥 일리야에게는 효과가 돌지 않은 것이다.

“그게 뭔데?”

제리는 일리야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의 묘약이라고 털어놓았다.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랑의 묘약?”

“응.”

일리야는 잠시 뜸을 들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하고 말했다. 차라리 다행인 거야. 제리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잠깐만. 그럼 넌 누굴 사랑하게 된 거야?”

일리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민감하게 굴기는! 제리는 손을 내저으며 고개까지 가로저었다.

“그걸 모르겠어. 난 지금 평소와 똑같거든. 그 누구도 사랑하고 있지 않아.”

참 이상한 일이지. 분명히 약효가 돌기 시작했다는 문구까지 떴는데…. 효력이 벌써 다했나?

“그럼 다행이야.”

일리야는 눈에 띄게 안심하며 살짝 웃었다.

“잠깐만, 일리야.”

제리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딜 가는지 묻는 일리야에게는, 찬 물로 세수를 해야겠다고 핑계를 대고 화장실로 들어왔다.

“…….”

늘 보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빠듯하게 벅차오르는 충족감을 느꼈다. 그가 활짝 웃으면 거울 속의 제리도 자신을 따라 웃었다. 그동안은 왜 몰랐을까, 카르얀이나 일리야 같은, 길거리에 흔히 널린 희대의 미인 미남 상은 제 취향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차라리, 혼자 사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 거울만 보고 있어도 이렇게 시간이 잘 가는걸….

“제리.”

제 이름을 불러보자, 익숙한 목소리가 욕실 안에 울려 퍼졌다. 목소리마저 듣기 좋았다.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제리는 혀를 살짝 내어 바짝 마른 제 입술을 핥았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는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거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거울에 손을 짚었다. 거울 속의 제리와 두 손이 맞닿았다. 특유의 차가운 감촉에 그는 조금 슬퍼졌지만, 그래도 제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자체에 크나큰 행복을 느꼈다.

“…….”

그는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제 모습을 거울을 통해 비추어 보고 있었다. 눈썹을 덮은 다갈색 머리카락은 끝이 물로 조금 젖어 있었다. 총명함이 담긴 두 눈동자는 사랑스러웠으며, 동그란 코끝이 그리는 곡선은 그 어떤 예술가마저도 감탄할 것이었다. 이 세상에 둘은 없을 사랑스러움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읏….”

“제리, 뭐 해….”

문 밖에서 일리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일리야 네가 날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

“어?”

“내가 너였어도 날 좋아했을 거야. 분명히….”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잖아. 공부도 잘해, 얼굴도 천사같은데다, 성격까지 좋아. …일리야는 정말 좋겠다. 나를 좋아해서. 제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거울에 이마를 폭 기댔다. 차가운 거울에 코끝이 맞닿았다.

“제리!”

그 순간, 일리야가 문을 열고 급하게 들어왔다. 그는 거울 앞에서 뺨을 붉히며 꼭 거울 속으로 들어갈 것처럼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제리를 뒤로 끌어냈다.

“아, 안 돼.”

제리는 다급한 소리를 내며 손을 뻗었다. 일리야는 제리를 억지로 욕실 밖으로 끌어낸 뒤 화장실 문을 닫았다.

“혹시나 했는데….”

“이거 놔!”

제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일리야의 팔뚝에 손톱이 박혀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리야는 제리의 얼굴을 손으로 살포시 감싸쥐었다. 제리는 고개를 휙 저어 그 손을 떨쳐냈다. 일리야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늘 자신을 보던 다정한 눈이 아니었다. 제리의 따뜻한 눈길은 분명히, 거울 속을 향해 있었다.

“약효 언제까지야?”

“씨발, 알아서 뭐 하게!”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만일 조금만 더 늦게 들어왔더라면 제리는 거울에 입까지 맞출 기세였다.

“왜 눈 감고 있었어…. 차라리 날 보지.”

일리야는 제리의 맑은 눈동자에 자신이 담기는 것을 바라보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날 봤어야지, 제리.”

그에 제리는 마음이 조금 약해졌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사랑의 묘약을 마신 뒤 가장 먼저 본 사람도 일리야인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안. 난 약이 안 통하는 체질이라.”

체질? 일리야는 힘없이 피식 웃었다. 꼭 비웃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널 봤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야. 알겠지? 그것보다 이거 놔. 나 씻으려던….”

“삼십 분이야, 제리. 삼십 분 동안 물소리는 들리지도 않았어….”

“…….”

말도 안 돼. 그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을 리가 없는데. 일리야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넌 거울만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알아들어?”

거짓말이야.

“…이제 씻으려고 했어. 정말이야.”

“씻지 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하는 얼굴로 일리야를 노려보자, 그는 입술을 잘근 씹다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럼, 너 씻는 동안 내가 보고 있게 해주면 씻게 해줄게….”

“너 미쳤구나.”

제리가 앞이 벌어진 셔츠를 손으로 추스르며 싸늘하게 대답했다. 일리야는 쳇, 하고 혀를 차더니 말했다.

“제리 넌 왜 이럴 때만 제정신이야…?”

“당연한 거야. 내 몸은 나밖에 못 봐.”

“왜 너만 보는데?”

나도 볼래. 일리야는 답지 않게 민감하게 굴며 짜증까지 섞어 말했다. 제리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일리야.”

“아니야 제리, 잘 들어…? 너 지금 뭐가 잘못된지 모르는 것 같은데…. 넌 그 사랑의 묘약을 먹고 거울을 봤잖아.”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제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제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아무렇지도….”

“원래도 거울을 30분이나 봐? 거울에다 입을 맞춰?”

“…….”

“아니잖아, 제리. 원래는 안 그러잖아.”

제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일리야의 말이 맞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다.

“…왜 하필 너야. 네 목을 딸 수는….”

일리야가 작게 궁시렁거렸다. 제리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일리야는 놀란 제리를 보고 그제야 살짝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너, 그런 농담.”

“안 할게.”

“그래.”

설마,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를…. 그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시발, 말도 안 돼! 제리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에 휩싸여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일리야.”

“응.”

“나 이상해보였어?”

일리야가 날 얼마나 미친 놈 보듯 봤을까. 제리는 홀린 듯 거울에 입까지 맞추려던 자신을 떠올려냈다.

“엄청.”

하지만 거울을 본 순간 정신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이성이고 뭐고, 그 안의 제 얼굴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보였다.

“나 씻고 싶어.”

진심이었다. 찬 물을 맞으며 상념을 떨쳐내고 싶다. 그런데 일리야는 고개를 저었다. 매우 단호하게.

“안 그래도 너 몸 상태도 나쁜데, 또 거울 들여다보다가 쓰러지면 어떡해. 바닥이 딱딱해서 다칠 거야….”

다치는 것보다, 거울을 보면 정신이 나가는 자신이 더 싫었다. 아니, 싫지 않았다. 내가 귀여운 날 싫어할 리가 없잖아?

“아, 안 돼.”

귀엽다니. 아니야…. 제리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 자신을 자각하고 머리를 손으로 감싸쥐었다. 그는 그대로 일리야를 올려다보았다. 일리야는 혼란스러워하는 제리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내가 봐줄게.”

“…….”

눈빛이 반짝거렸다.

“내가 봐줄게, 제리…!”

“미쳤어?”

“아니. 씻고 싶다면 씻어도 돼. 그 대신에 네가 다치거나 허튼짓 하지 않게 내가 보고 있겠다는 말이야….”

진짜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더 말이 안 된다. 이대로 일리야를 돌려보낸다면 혼자 또 정신을 놓고 거울에 입을 맞추고 있다가 룸메이트들에게 그 꼴을 들키게 될 것이다. 이는 백 년치 놀림거리였다. 아니, 놀리지 않더라도 그냥 싫었다. 차라리 놀리는 게 낫지, 알면서 아무 말 하지 않는 게 더 비참하다.

“그럼 일리야 너도 같이 씻어.”

그냥 씻는 걸 보고 있게만 하는 것보다는 같이 씻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곧장 알겠다고 할 줄 알았던 일리야는 어느새 벌어진 셔츠 아래, 제리의 맨살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난 자제력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럼 보고 있는 건 괜찮냐?”

“힘들어….”

뭐가 힘든데. 제리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실소했다.

“하지만 최대한 참아볼게.”

제리 넌 아직 어리니까…. 일리야가 말했다. 제리는 코웃음을 쳤다. 정말 어린 건 일리야였다. 머리에 물만 대충 적시고 나올 거지만, 또 일리야의 말대로 자신이 거울을 들여다보느라 허비할 시간을 생각하면 그도 들어오게 하는 게 맞았다.

“…….”

“제리.”

“아, 응.”

제리는 또 넋을 놓고 거울 속 천사를 바라보다 일리야의 몸에 시야가 가로막혀 고개를 끄덕였다. 제리가 옷을 벗는 동안, 일리야는 제리의 부탁대로 뒤를 돈 채였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게 있었으니, 일리야가 뒤를 돌면 커다란 거울로 제리가 탈의하는 과정이 훤히 다 보였다.

“뒤 돌아보지 마.”

제리는 벽을 본 채로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리야는 응, 하고 대답하며 제리가 셔츠를 벗어 벽면의 수건걸이에 대충 걸어두는 것을 바라보았다. 뒤를 돌라고만 했지 눈을 감고 있으라는 말은 안 했잖아…. 일리야는 침을 꼴깍 삼켰다. 동그란 어깨가 드러났다. 하얀 어깨 위로 긴 목덜미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다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제리는 커다란 수건을 어깨에 감고 바지를 벗었다. 그 탓에 아래는 보이지 않았지만 일리야는 차라리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얀 속살이, 가장 은밀해야 할 부위가 보일 듯 보이지 않았다. 그는 꽉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제리가 뒤를 돌 때에 맞추어 그는 눈을 감았다.

제리는 수건을 살짝 펼쳐 그저 희기만 한 제 사타구니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털이 없어. 이걸 보일 수는 없지…. 제리는 수건을 허리께에 둘둘 만 채로 물을 받아둔 욕조 속에 들어갔다. 적당히 미지근한 물을 찰박이며 손장난을 치던 제리는 띠링,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20]

“…….”

“…계속 해.”

일리야는 멋쩍게 뒷목을 쓸어내리며 시선을 돌렸다. 들어와 있어도 좋다고 얘기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니 일리야에게 쓴 소리를 할 자격이 제게는 없었다. 순간 현기증이 났다. 머릿속이 뒤섞이는 불쾌한 감각. 불안정한 마력 때문이었다. 제리는 눈을 감고 현기증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최초 세례자(일리야 디페리우스)가 강력한 마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띠링, 경쾌한 소리에 제리는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새 욕조 옆에 다가와 앉은 일리야가 욕조 턱에 얹은 제 손 위에 그의 손을 포개고 있었다.

“괜찮아?”

“…….”

제리는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현기증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속눈썹에 아롱아롱 맺혔다. 일리야는 얼굴의 물기를 손가락으로 훔쳐내며 말했다.

“…내일 네 브로치를 되찾으면 괜찮아지겠지?”

“아마 그럴 거야.”

“거기다 두고 온 게 확실해?”

“다른 가게에 다 물어보고 거리도 샅샅이 다 찾아봤는데, 없었어. 그곳이 아니면….”

“찾을 수 있어야 할 텐데….”

일리야는 연신 제리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걱정했다. 걱정 받는 일에는 익숙하다. 하지만 걱정을 끼쳐 매번 미안한 것도 변하지 않는다.

“찾을 수 있을 거야.”

일리야의 걱정 어린 얼굴에 괜찮을 거라고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던 제리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장미꽃잎을 짓이겨 짜낸 즙을 그대로 담은 듯, 선명하게 붉은색. 보고 있자면 섬뜩하기도 하지만 빠져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제리는 일리야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21]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22]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23]

호감도가 오르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그건 중요치 않았다. 일리야의 눈 속에 제 모습이 담겼다. 보이는 것은 그저 형체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스템창을 치워내는 것은 일리야의 일이었다. 일리야는 제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제리에 뭔가 깨달았는지 눈을 꼭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

“제리!”

“칫.”

들켰네. 제리는 금방 고개를 돌렸다. 일리야는 제리에게 너무하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너무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짜증나. 그는 차분하게, 하지만 가감없이 제리에게 제 감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제리는 조금 억울했다. 서럽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온 건 너면서. 그래서 본 건데 왜 짜증이야…. 제리는 아직도 쿵쿵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고개를 홱 돌렸다.

“일리야, 넌 항상 이래? 날 보면 막 울렁거리고, 말도 안 나와? 이거 진짜 짜증나는데.”

“아니… 말은 나와.”

“그래, 말은 나오는구나.”

제리는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일리야도 나처럼 내 형체만 조금 보여도 막 가슴이 뛰고, 이러는 걸까? 직접 느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가슴 만져 봐도 돼?”

“뭐?”

“가슴 만져 보겠다고.”

“제리….”

일리야는 곤란한 듯 말꼬리를 늘이며 시선을 애써 피했다.

“확인할 게 있어서. 안 돼?”

“…….”

일리야는 잠시 망설이다 침을 꼴깍 삼켰다. 고개가 끄덕여지며 허락이 떨어졌다. 그는 물에 젖은 제리의 손을 끌어다 직접 제 가슴에 얹어놓았다. 제리는 심장박동이 가장 잘 느껴지는 곳을 찾아 가슴을 더듬거렸다. 일리야는 그때마다 몸을 움찔거렸지만, 그건 제리의 알 바가 아니었다.

“…….”

“…….”

콩닥콩닥, 이라기 보단 쿵쿵, 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일리야의 가슴은 제 것보다도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느, 늘 이런 건 아냐….”

신빙성이 없었다. 제리는 으응, 하고 고개를 느릿하게 깜빡이다 어색함에 고개를 돌렸다.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면 늘 이런 모양이었다. 심지어 처음에 자신은 거울을 보다 정신까지 놓았다고 했다.

‘그럼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얼굴을 보자마자 기절하게 된단 말이야?’

“……제리, 그만 만져. 변태….”

일리야의 가슴께가 물기로 축축해졌다. 손을 떼니 그 부분만 흉하게 젖어 있는 꼴이 우스웠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일리야는 늘…. 그리고 조금 미안했다. 제리가 생각하기에 누군가를 감정적으로 사랑하고 아낀다는 건 꽤나 불편하고 유쾌하지 않은 일인 것 같았다.

* * *

제리는 행복했다.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 사랑스런 두 손이 보였다. 양 손을 꼭 부여잡고 있으면 자신과 손을 잡은 기분이 들었으며, 무심코 고개를 돌려 유리창을 바라보면 그 안엔 천사가 보였다. 자고 일어나 거울을 들여다본 제리는 또다시 제 모습에 도취되어 넋을 놓았다. 거울 안의 제 모습을 손으로 쓰다듬던 그는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렌은 아침부터 왜 화장실을 독차지하느냐고 빽 소리를 질렀다.

“야, 난 네가 물에 빠져 죽은 줄 알았다.”

“닥쳐. 시끄럽잖아.”

“더 시끄럽게 해 봐?”

“귀여운 내가 봐줄게.”

세수만 대충 하고 나온 제리가 시렌을 용서했다. 정말 너그럽고 자애로웠다. 그는 성격마저 완벽했다!

“처돌았냐?”

시렌은 손가락을 머리 옆에서 빙글 돌리며 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게 험한 말을 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라는 생각에 휩싸인 제리는, 아침부터 시렌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시렌은 영문도 모른 채 다리를 부여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악! 잠 좀 깨, 제리!”

시렌이 빽 소리를 질렀다. 제리는 아무것도 아닌 시렌의 말은 가뿐히 무시했다. 그는 잠에서 덜 깬 모습조차 바람직했기 때문이다. 침대 머리맡에 일리야가 두고 간 종이학에 잠깐 정신이 돌아왔다.

‘참, 이건 묘약 효과 때문이야. 정신 차려, 제리!’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옆에서 그를 일깨워줄 일리야가 없으니 금세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자신이 자는 사이 제 방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어젠 인사도 못 하고 보냈네….’

일리야에게는 미안했지만, 정말 잠깐일 뿐이었다. 제 얼굴이 비치는 물건을 보거나 입을 열어 목소리만 들어도 헛된 생각이 싹 날아갔다. 제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운 아침을 맞았다. 이건 다 자신이 완벽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점심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들떠서 팔랑거리는 제리를,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했다. 헨리마저 오늘의 제리는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제리가 꼭 고백에 성공해 사랑을 손에 거머쥔 제 친척 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헨리는 생각했다.

“쟤 일리야랑 어제 무슨 일 있었냐?”

“전 몰라요…. 들어왔을 땐 제리가 자고 있어서.”

“창문은?”

“참, 열려 있었어요. 그거구나….”

“그래, 일리야가 왔다 간 거야.”

걔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시렌은 이제야 답을 찾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저는 이제 별로 안 궁금해요. 헨리의 말에 시렌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발로 차는 힘이 제법 강해진 제리 탓에 그의 다리에는 조그맣게 멍이 들었다. 둘이 옆에서 대놓고 수군거리는데도 제리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맞잡은 손을 얼굴 옆에 붙인 채 허공을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들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뭐가 그리도 행복한지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가지를 않았다. 제리 진짜 이상해…. 헨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깍지 낀 두 손을 내려다보며 헤벌쭉 웃고 있는데, 갑자기 제 손목을 붙잡은 손이 나타나 손쉽게 손을 떼어냈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일리야가 제 뒤에 서 있었다.

“제리.”

“참. 맞다….”

제리는 또다시 자신이 묘약 효과 때문에 이상한 짓을 한다는 것을 자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또 찰나에 불과했다. 일리야의 철통 같은 감시에도 불구하고, 그는 줄리안의 도시락을 훔쳐먹다 간지럽게 웃었다.

“왜 저래?”

줄리안은 떨떠름하게 물었다. 제리는 늘 자신과 시렌에게만은 까칠했기 때문에 저렇게 무해한 얼굴을 보는 것은 거의 처음이다시피 했다.

“입에서 사르륵 녹아내린다.”

“어, 그래…? 저 옆에서 팔더라.”

“첫사랑의… 맛이야.”

“……?”

으! 정말 궁금하지 않은 사안이었다. 제리는 아련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줄리안은 인상을 구기며 뒤로 물러났다. 제리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과일 설탕 절임을 입 안에서 녹이며 눈까지 접어 예쁘게 웃었다. 일리야는 하도 입술을 물어뜯어 아랫입술이 평소보다도 더 빨개져 있었다.

“제리, 제발….”

“아, 맞다.”

제리는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줄리안에게 ‘뭘 봐, 확 씨.’하고 쏘아붙인 뒤 고개를 홱 돌렸다.

“쟤 오늘 진짜 왜 저래? 조울증, 뭐 그런 거냐?”

줄리안은 일리야와 제리를 번갈아 보며 낯설어했다.

“쉿, 그런 게 있어.”

시렌은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말해줄게. 그가 속삭였다. 줄리안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지만, 제리가 이상해진 이유에 대해 그렇게 궁금해 하지는 않았다.

“제리. 이것도 첫사랑의 맛이야…?”

“닥쳐.”

“입에서 녹아. 첫사랑처럼?”

“으아악….”

조용히 중얼거린 일리야의 말에 제리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제가 한 말에 감탄이라도 하는 건가. 왜 저래…. 줄리안은 괜히 제리에게 시비라도 걸릴까 두려워 도시락을 손으로 감싸쥔 채 몸을 살짝 틀었다.

“일리야. 수업은?”

일리야는 계속 제 뒤를 졸졸 따라왔다. 오늘 수업을 마치고 함께 밖에 나가기로 한 것은 맞지만, 아직 그도 오후 수업을 다 마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 있는데… 빠져도 돼.”

“그 수업이 뭔데?”

“고급 검술학의 응용인데… 중요하지 않아.”

“……?”

제리가 알기로 ‘검술학’이 붙은 과목은 한 학기 중 가장 중요한 전공과목이었다.

“일리야. 너 그러다 유급한다.”

“어차피 시험만 통과하면 되는걸….”

“하긴 내가 누구 걱정을 하냐….”

일리야는 제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살 것이었다. 4황자기는 해도 일단은 명색이 황자고, 황실 마법사의 수장인 시어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마법에 있어 천재인데다, 태평한 성격이 어디다 던져두어도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제리 자신은 돈도 많고, 사랑스러운데다 공부까지 잘했다. 역시 일리야보단 내가 더 낫네. 역시 나야! 제리는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는 생각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피식 웃었다.

“수업 몇 개 남았어?”

“두 개 남았네. 그냥 내 방에서 기다려. 수업 마치면 데리러 갈게.”

“됐어. 너 또 수업 중에 허튼짓 할 것 같으니까… 같이 들어줄게.”

어차피 사람도 많아서 한 명쯤 늘어도 몰라. 일리야는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일리야는 눈길을 끄는 편이었다. 학생들은 물론,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검술학과에서는 뻔뻔하게 매 학기 시험에서 사기 행각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했고, 마법학과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마법으로 사기를 치는 일리야를 연구하지 못해 늘 아쉬워했다.

“너 인기 많다….”

일리야는 작게 속삭이며 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러다 입술이 부르트기라도 할 것 같았다. 제리는 일리야의 입을 가리키며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손짓했다. 저들은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뜬금없이 나타난 일리야를 보는 것이었다. 새까만 로브를 입은 우중충한 ‘까마귀’들 사이, 새하얀 검술학과 제복을 입은 일리야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마법생물의 생태와 습성’를 가르치는 제베르 교수가 일리야 쪽을 보며 읊조렸다. 일리야는 책상에 넙죽 엎드려 제리를 바라보았다.

“…….”

이런다고 네가 안 보일 것 같아? 제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는 포용심이 많았기 때문에 일리야를 한 번쯤은 감싸줄 수 있었다. 그는 혼란스러워하는 교수에게 어쩔 수 없었다는 듯 힘없이 웃어주었다.

하는 수 없이 제베르 교수가 눈을 돌렸다. 더운 지방에 땅굴을 파고 서식하는 모래토끼에 대한 수업이 진행되었다. 제리는 자꾸만 유리창으로 시선이 가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수업을 경청했다. 일리야도 제리를 내내 감시하다 수업 쪽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졸음이 몰려오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팔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했다. 제리는 어쩐지 일리야의 아카데미 생활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제리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모래 토끼는 사막의 강한 모래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긴 속눈썹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수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일리야는 모래바람을 이겨내야 하는 모래 토끼도 아닌데 쓸데없이 속눈썹이 길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일 때마다 함께 팔랑이는 것이 꽤나 보기 좋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래봤자 나만큼은 아니지만. 그는 다시 교단으로 고개를 돌린 채 피식 웃었다. 수업을 열심히 듣는 우등생인 나.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알아듣는 나. 제리는 멋진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근사한 필체로 종이 위에 모래 토끼의 습성과 그것에게서 얻을 수 있는 마법재료들을 메모했다. 한 폭의 예술작품이 탄생했다.

* * *

“제리.”

“아, 알겠다고.”

제리는 몰래 맞잡았던 두 손을 슬쩍 놓았다. 일리야 저가 뭐라고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가 자신을 위해 저러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심통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사랑스러운 걸 어떡해. 그는 몇 시간 뒤의 자신이 땅을 치고 후회할 생각을 당당히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서적과 공책은 인벤토리 안 가방에 쑤셔 넣고 거리로 나왔다. 몸은 무척 무거웠지만 일리야가 옆에 있어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일리야의 말에 미미한 짜증이 섞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신을 질투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사사건건 제게 시비를 걸었다. 그는 거리로 나오는 마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리보다도 제리를 잘 안다는 허언을 했다. 참 나, 어이가 없어. 제리는 코웃음을 쳤다.

“그럼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맞춰봐.”

“또 네가 멋있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틀렸어.”

“맞나보네….”

너랑 싸우고 싶지 않은데. 일리야는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러면 나중에 괴로워지는 건 너야, 제리. 일리야는 작게 속삭였다. 제리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중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었다. 생각날 때마다 계속 사랑의 묘약, 묘약, 이러면 나만 손해…하고 속으로 중얼거리지만, 제 얼굴이나 목소리에 그 생각이 싹 녹아내린다. 어쩌겠는가. 다 자신이 완벽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마차에서 내려 조금 걷다보니 비밀상점으로 향하는 골목길이 나왔다. 앞으로 스물 네 걸음. 바닥에 별이 그려진 벽돌이 나오자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왼쪽 가게.

“…….”

[안녕하세요, 비밀상점입니다. 항상 좋은 물건만 들여옵니다. 에이프런이나 동물 꼬리 등, 능력치를 높여주는 특수 아이템을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뭐야….”

비밀상점? 일리야는 낯을 가리며 제리의 어깨를 감쌌다.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체력이 후두둑 깎여나갔다. 일리야는 제가 쥔 쪽의 어깨를 살살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너그러운 제리는 또 한 번 일리야를 용서했다.

“안 들어가?”

“…….”

가만. 그러고 보니 문제가 있었다. 상점 안에는 각종 괴랄한 물건이 널려 있는데, 제리는 그것들에 손을 가져다대거나 ‘저게 뭐지?’하고 궁금해하기만 해도 상품에 대한 설명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일리야는 이제 그 설명을 읽을 수 있잖아!

만일 그가 ‘??가 선다’거나 ‘먹으면 흥분감에 밤을 새울 수 있다’는 설명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쟤라면 뭔지 궁금하다고 하며 무조건 살 거야. 그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제리는 짧은 고민 끝에 일리야의 손을 덥석 붙잡고 말했다.

“일리야 너는 여기서 기다려. 잃어버린 물건만 찾아 금방 나올 테니, 누가 불러도 어디 가면 안 돼?”

“나도 들어갈래.”

“정말 금방 나올 거야. 들어가서 아무것도 안 사고 나오면 미안하잖아.”

“그럼 사지 뭐. 전에 여기서 봤던 보들보들한 게 마음에 들었는데….”

바니 귀였다.

“따라 들어오면 주말을 같이 보낸다는 말은 취소야.”

제리는 그 말만 남기고 몸을 돌려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 게 어디 있어….”

홀로 밖에 남은 일리야는 울상을 지으며 얌전히 제리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점원은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카운터에서 제 할 일만 열심히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날 보고 아는 척도 안 할 수 있지? 대단한데? 제리는 모자들을 진열해둔 곳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며 의아해했다.

“안녕하세요. 지난 주말에 제가 잃어버린 게 있는데, 혹시 여기 있나 해서요.”

“그런 건 없습니다.”

“빨간 보석이 달린 브로치인데….”

“장신구라면 뒤에 있는 보석함을 뒤져보십쇼. 원하시는 게 그 안에 하나쯤은 있지 않겠습니까?”

“…….”

아무래도 여기서 잃어버린 것도 아닌 듯했다. 제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상점에서 빠져나왔다. 요상하게 생긴 물건들을 구경하던 일리야가 ‘찾았어?’하고 물었다. 제리는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한테 말해야겠어….”

“나 말이냐?”

“으악!”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제리는 지나치게 놀라며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그에 일리야는 ‘아, 말하려고 했는데….’하고 뒤늦게 대꾸했다. 시어스는 콩알 만해진 가슴께를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는 제 제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자신을 놀래킨 게 그리도 행복한 모양이다.

“시, 심장 떨어질 뻔했네….”

“뭘 그리 놀라고 그러느냐. 여전히 귀엽구나.”

“아, 이제 저도 알아요.”

제리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귀엽긴 해.

“…뭐라고?”

“알아요, 제가 스승님이라도 절 예뻐했을 거예요. 말도 잘 듣지, 공부도 잘하지, 제가 봐도… 읍.”

“그만 해, 제리. 나중에 후회해….”

시어스는 눈을 찌푸린 채 그가 들은 것이 맞는가 한 번 더 되짚어보는 듯했고, 일리야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제리는 입을 틀어 막힌 채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려보다 사색이 되었다.

“그, 그래. 내가 널 예뻐하는 건 맞다만….”

“…….”

자아도취에 빠져 들떴던 제리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일리야는 틀어막았던 입을 놔주었다. 그런데 계속 생각하면 할수록 제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시어스는 자신이 어린 모습을 하고 있을 때부터 자신을 지켜봐왔으니 제 성장이 얼마나 기특하겠는가. 제리는 사랑받을 만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았니?”

“스승님 안 바쁘세요?”

“인사만 하고 가려 했는데, 잠깐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단다.”

“아, 저….”

“그런데 오늘은 내가 준 마력석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나보구나. 늘 지니고 다니라고 했잖느냐.”

“…그게요.”

제리는 일리야가 먼저 입을 열까봐 슬쩍 그에게 붙어 그의 팔뚝을 슬쩍 쥐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아아, 이 스승이 꼬박 며칠 밤을 새워가며 밤낮 없이 매달렸는데. 한 번 더 만드느니 차라리….”

차라리?

“……아니다. 내가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원…. 아무튼 만들 때 수명이 깎여나가는 줄 알았단다.”

그 수명이 깎여나갔다던 거, 잃어버렸는데.

“네가 귀중한 물건을 아무 데나 내팽개치고 다닐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오늘만 두고 온 게지?”

씨발, 어쩌지. 잃어버렸는데. 진짜 잃어버렸는데….

“어릴 때에도 한 번 아파서 끙끙 앓기도 했잖니. 잊은 건 아니겠지?”

잊지는 않았는데 브로치는 잃어버렸다. 고의는 아니었다. 제리는 그의 말에 어색하게 웃다 이제 그만 진실을 얘기해야겠다 싶어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죄송해요. …잃어버렸어요!”

“그래. 들어서 알고 있었다.”

“……?”

그냥 한 번 놀려본 거란다. 시어스는 피식 웃었다. 그는 제리의 뺨을 꼬집으며 왜 잃어버렸니, 하고 장난스럽게 꾸짖었다. 제리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말했어, 제리….”

일리야가 순순히 자백했다. 이 배신자. 제리는 배신감에 휩싸였다.

“그런 건 진즉에 이야기 했어야지. 듣자하니 지난 주말에 잃어버렸다고?”

“……네.”

“수확제만 지나고 다시 만들어줄 테니 조금 더 견디고 있으렴. 4황자님께서 조금은 억누를 수 있을 게다. 네게 처음으로 세례를 내렸잖니. 뭐, 알고 한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은 안 돼요? 스승님은요?”

“난 안 된다.”

“세례가 뭐가 그리 중요한 건데요? 왜 일리야만….”

“그래서 불만이야…?”

다른 사람이 해주길 바랐어…? 일리야가 귓가에 속삭였다.

“세례는 강제로 마력 문을 열어 마력 간 상성을 맞추는 것과 다름없어서, 처음 세례를 가한 이만이 네 마력을 억누르거나 보충해 줄 수가 있지.”

“……?”

“그러니 4황자님이 네 곁에 있는 한, 크게 잘못될 일은 없을 거란다.”

제리는 고개를 돌렸다. 일리야가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일리야.”

“내가 뭘… 난 몰랐어.”

“그래서 세례가 위험한 거란다. 좋은 점도 있지만 거의 없다시피 하고… 위험성이 더 크지.”

일리야는 여전히 모른 척 시치미를 떼었다. 십 년이나 지난 일을 이제 와서 뭐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애초에 브로치를 잃어버린 자신이 잘못한 게 맞았다. 제리는 하는 수 없이 ‘네….’하고 대답했다. 

“황자님, 혹시 그 전에 제리의 마력이 폭주하겠다 싶으면, 손가락을 찔러 나온 체액… 그러니까, 피를 먹이시면 됩니다.”

제리는 그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마력이 폭주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몰라도, 일리야의 피를 빠는 제 모습은 굉장히 이상한 풍경임은 알 수 있었다. 시어스는 또 그놈의 수확제가 찾아왔다고 궁시렁거리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밤하늘에 그려질 폭죽의 모습과 동시에 피죽도 못 먹은 얼굴이 되어 피곤하다고 짜증을 낼 제 스승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마력석 브로치를 못 되찾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금방 스승님을 만나 잃어버렸단 말을 전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황족 몸에 상처를 입히는 건 크나 큰 범죄야. 넌 지금 범죄자가 되기 일보 직전이라고….”

“……?”

제리는 아직 하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미리 범죄자가 되었다. 생색이라도 내려는 건가 싶었다. 일리야는 말을 마저 덧붙였다.

“하지만 그걸로 너만 아프지 않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어. 내가 그만큼 널 아껴서 그런 거야, 제리.”

“뭐?”

“내가 널 봐준다고 한 거야.”

“너 지금 생색내?”

“응….”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나라도 날 좋아했어. 왜냐하면 난….”

[1일이 경과했습니다. 사랑의 묘약의 효능이 사라집니다.]

“귀여….”

효능이 사라졌단 말에 일리야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살짝 웃었다.

“제리, 듣고 있어. 하려던 말 마저 해…. 귀엽다고?”

“…….”

제리는 하던 말을 마저 잇지 못한 채 표정을 싹 굳혔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한 거지?

‘귀엽… 다고…….’

그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되짚어보았다. 거울 따위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자아도취에 빠진 것은 한두 번이 아니라 그냥 넘긴다고 쳐도, 그 꼴을 자신만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이게 바로 달콤한 첫사랑의 맛이라고 하자 당황하던 줄리안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보며 의아해하던 시선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머리가 차갑게 굳어갔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일리야가 그동안 수십 번도 넘게 말려주었는데도 그를 귓등으로도 안 쳐들은 자신이었다.

“다시는 그런 거 먹지 마. 응?”

“…….”

넌 나를 좀 더 격렬하게 말려줬어야지. 그랬어야지….

“제리.”

제리는 가까운 벽에다 충동적으로 머리를 박으려 했다. 안타깝게도 그 시도는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뭐 하는 거야…!”

“흐윽….”

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게 뭐야. 스승님한테도 개소리를 지껄였어. 내가 귀엽다고, 그걸 안다고 지껄였어. 당장 죽을래….

그는 방에 돌아가서도 계속 생각나는 제 행동들을 떠올리며 베개를 퍽퍽 때렸다. 순간순간 제 얼굴을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은 묘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는 했지만, 매 순간이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제 자신을 사랑스러워 했다는 것이 괴로웠다. 그는 그날 이후로 당분간 거울도 보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다. 시렌과 헨리는, 제리가 밖에 나갔다 일리야와 싸운 게 분명하다고 제리 몰래 소곤거렸다.

사랑을 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심장이 쿵쾅거리곤 했다. 하지만 늘 다디단 것만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아픔이 존재했다. 제리는 벽에다 머리를 쾅 박으면 기억이 사라질까, 하는 멍청한 고민까지 하게 되었다.

“……하아.”

제리의 머릿속에 첫사랑의 기억은, 떠올리면 무척 괴로운 상처투성이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 * *

수확제를 사흘 앞둔 날의 아침, 제리는 감기에 걸렸다. 감기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뇌가 익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이 펄펄 끓었다. 스승님이 보내주신 물약을 꼬박꼬박 먹는데도 몸 상태는 악화되기만 했다. 자신을 걱정하는 친구들을 먼저 내보낸 뒤, 제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침대에 멍하게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머리가 울리고 어지러웠다. 차라리 이대로 기절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침대 밖으로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체력이 10이나 감소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가족들이 할 걱정도 걱정이지만, 집에 간다고 해서 몸이 나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건 그냥 보통 감기가 아니었다. 마력석 브로치를 잃어버린 뒤 쌓이고 쌓인 마력이 몸살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대로 누워 있고 싶은데 졸리지는 않고, 머리가 지끈거릴수록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은 체력은 고작 10도 되지 않았다. 제리는 겨우 침대에서 내려섰다. 시야가 이지러졌다. 어지럼증이 머리를 덮쳤다. 제리는 잠시 심호흡을 하며 어지러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벽을 짚으며 화장실로 들어섰다. 그는 여전히 거울을 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내가 그랬지. 후회할 거라고….’

어젯밤 일리야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건넨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 말대로였다. 그 기억은 일부러 지우지 않는 이상 평생 남을 것 같았다. 얼굴만 봐도 수치가 올라와 아직까지 거울 속 제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거울 속 제 모습을 들여다보면 ‘하, 정말 천사처럼 생겼다…. 날 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하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죽을 것 같았다. 제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열심히 세수만 하고 나와 다시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이제 남은 체력도 얼마 되지 않았다. 제리는 이불 속에 몸을 얌전히 집어넣고 베개에 머리를 폭 기댔다. 이대로 쓰러져 어딘가에 머리를 박기보다는 그냥 얌전히 누워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면 누군가 방에 불쑥 들어와도, 그냥 자는 모습처럼 보일 테니까….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체력이 고갈되어 정신을 잃습니다.(최대체력:100)]

졸음이 몰려왔다. 제리는 눈을 감았다.

띠링, 띠링.

연신 상태창이 발생하는 소리가 귓가에서 아른거렸다. 무척이나 거슬릴 정도였다. 제리는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끔뻑, 끔뻑. 눈을 몇 번 깜빡임으로써 흐렸던 시야가 초점이 잡히자 일리야가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

“일리야?”

제리는 그저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숨결까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일리야도 마찬가지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던 일리야의 뺨이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그가 뒤로 확 물러났다.

“그런 것 아니야, 제리….”

“……?”

“오해하지 마.”

오해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아픈 네게 입 맞추고 싶단 생각은….”

말을 끊고 잠시 숨을 집어삼킨 일리야는.

“……했지만.”

…솔직했다.

“아무튼 키스는 하지도 못했어.”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으며, 그런 게 아니라 변명하는 일리야를 바라보던 제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난 네가 내게 입을 맞췄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괜히 찔려서 나서서 변명이나 하고 말이야. 얼굴이 저녁 노을처럼 불긋해진 일리야를 보고 있자니 자꾸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나왔다.

“정말이야….”

“알았어.”

“……안 믿잖아.”

“믿어.”

왜냐하면 정말 몰래 입을 맞췄으면 일리야는 도리어 뻔뻔하게 뭐가 문제냐는 듯 나왔을 테니까. 저건 정말 억울해서 하는 행동이 맞아 보였다.

“……첫 입맞춤은 장미가 화려하게 만개한 장미정원에서….”

“웃기지 마.”

일리야는 첫키스에 대한 환상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혼자 있을 때면 내내 상상에만 잠겨 있는 건지, 일리야는 바라는 것이 굉장히 구체적이고 많았다. 그는 혼자만 알고 있어도 좋을 미래를 제리에게 일일이 말해주었다. 그 모든 걸 반드시 함께 해달라는 듯이…. 

첫키스는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정원에서, 어스름한 저녁시간에 노을을 보며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말이 또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해줄 것 같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일리야는 확신하듯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난 아직 일리야를 좋아하지 않는걸. 그럴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고.

제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기절하기 직전에 비해 머리가 확연히 맑았다. 눈을 떠보니 일리야가 바로 앞에 있는 걸 보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가 제게 마력을 불어넣어 날뛰는 마력을 억누르고 잡아준 것이었다.

“창은 모두 네가 없앴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일리야는 시치미를 떼었다. 자신이 일어나기 전에 상태창들을 모두 없앤 것 같았지만, 제리에게는 지난 기록들을 모두 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지난 상태창.”

“…….”

일리야의 몸이 움찔거렸다.

[체력이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최초 세례자(일리야 디페리우스)가 강력한 마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최초 세례자(일리야 디페리우스)가 강력한 마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25]

[최초 세례자(일리야 디페리우스)가 강력한 마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26]

[최초 세례자(일리야 디페리우스)가 강력한 마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고마워. 그런데 호감도는 또 왜?”

“…….”

“일리야.”

“…몰라서 물어?”

모를 리가 없다.

“모르는 건 아니고 그냥, 웃겨서.”

부끄러운 건지 목덜미부터 얼굴까지 붉은기가 번졌다. …일리야 너, 날 정말 좋아하는구나. 당장은 일리야에게 답을 줄 수 없지만, 제게 이토록 잘해주고 가감 없이 제 마음을 내보이는 그에게 더 잘해주고 싶단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제리는 일리야가 신기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토록 좋아할 수가 있지. 그날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도 하고. 제 말 하나하나에도 얼굴이 붉어졌다 눈물까지 뚝뚝 흘리는데, 불편하지도 않나?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특별히 더 마음을 쓰는 것. 이 또한 상대방을 이해하는 과정에 들어간다. 일리야를 알아가는 것은 생각만큼 부담스럽고 힘겹지는 않았다.

“……그만 봐.”

일리야는 불퉁한 소리를 내뱉으며 시스템창을 잡아 휙 던졌다. 제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까지 내며 짧게 웃었다. 시스템창은 바닥에 세차게 부딪쳐 안개처럼 녹아 사라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아직 바깥엔 해가 쨍쨍했다.

“나 감기야. 옮으면 어떡해?”

“감기는 제리 너 같은 애들이나 걸리는 거지….”

나 같은 애들은 뭔데? 그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일리야를 바라보았다. 일리야는 별로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미안.’이라고 거짓 사과를 건넸다.

“많이 아파?”

일리야의 손이 머리카락 사이를 들어와 이마를 짚었다. 손이 차가웠다. 아니, 손이 차가운 게 아니라 아직 제게 열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아무렴 어때. 제리는 기분 좋은 시원함에 눈을 살포시 감았다.

“아프기보다는 그냥 좀… 멍해.”

“오늘 저녁에 집에 가?”

일주일에 걸친 수확제 기간, 제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편이었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아니, 내일 아침에 가려고.”

“너 혼자 갈 수 있겠어? 이 몸으로?”

“혼자 가지, 그럼 누구랑 가?”

“에이, 힘들걸…. 엄청 힘들 거야.”

힘들 거라고 하면서 눈빛을 빛내는 이유는 뭔데. 제리는 곧장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데려다주게?”

“뭐, 그래도 되고….”

일리야는 ‘데려다주고 싶어!’하고 말하는 듯한 열렬한 눈빛을 보내며 입으로는 시치미를 떼었다. 속이 다 들여다보였다. 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야는 선심 쓰듯 자신도 짐을 챙겨야 하니 내일은 더 일찍 일어나야겠다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지금 몇 시야?”

“점심시간. 그래서 데리러 왔어.”

“나 오늘 수업 못 들어.”

“알아. 점심만 먹고 다시 데려다줄게.”

“난 몰라도 너는 들어야 해. 이러다 유급하겠어.”

“…알았어.”

“기다려봐. 세수 하고…. 아, 아까 세수를 하긴 했는데 또 하는 거야. 나 씻었어.”

“그럼 오늘은 거울 봤어?”

“…….”

제리의 표정이 굳었다.

“사랑스러웠어…?”

일리야가 조심스레 물었다. 입가에 미소가 은은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입 닥쳐, 일리야.”

제리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냥 물어만 본 건데 왜 그래…?”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니니까 그렇지. 제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리야는 태연한 어조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은근히 놀렸다. 단 음식을 입에 댈 때마다 일리야가 이것도 첫사랑의 맛이라고 중얼거리면, 줄리안과 시렌은 제리의 눈치를 보다가 몰래 어깨를 떨며 웃었다. 다른 사람보다도 일리야가 놀리니 타격이 더 컸다.

“원래 첫사랑은 안 이뤄진대….”

“…….”

“힘 내…?”

씨발, 개새끼야.

“그 입 안 닥쳐?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너에겐 내가 첫사랑 아니야? 그것도 안 이뤄지게 해줘? 어?”

“장난해? 나는 힘 내라고만 했어. 시비 걸지 마, 제리….”

일리야는 표정을 싹 굳히며 꼭 제리가 먼저 시비를 건 것처럼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미친, 제리는 약이 올라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스트레스로 체력이 5만큼 깎입니다.]

일리야는 제리의 상태가 생각보다도 더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리, 놀려서 미안해.”

“…….”

그의 손은 제리의 얼굴 근처에서 머뭇거렸다. 제리는 눈을 매섭게 뜨려고 노력하며 일리야를 노려보았다. 이 모든 게 다 그 좆같은 사랑의 묘약 때문이었다. 그걸 만드는 것이 왜 금기시 되었는지, 제리는 알 것 같았다. 이후의 스트레스로 사람이 홧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으니 그런 거다. 이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일리야는 잠시 고민하다 지난 날 시어스의 말을 떠올렸다.

“맞다, 체액….”

그는 그 말을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손을 입가로 가져와 엄지손가락을 콱 깨물었다. 제리가 말릴 찰나도 없이, 찢어진 손가락에서 빨간 선혈이 철철 흘러나왔다.

“일리야, 뭐 하는 거야!”

그는 다급하게 소리치는 제리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비릿한 혈향이 느껴졌다. 입술에도 빨갛게 피가 묻어났다.

“제리, 벌려.”

일리야는 피가 멎기 전에 빨리 입을 벌리라고 재촉했다. 아무래도 제 스승이 한 말 때문에 멀쩡한 손가락을 찢은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모기도 아니고.

“고작 나 좀 나아지려고 네 피를 먹을 생각은 없… 읍.”

일리야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불쑥 집어넣었다. 상처에 제 혀가 닿자, 조금 따가운지 일리야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혀에서 철냄새가 감돌았다.

“빨아.”

“싫어.”

단호한 거절 의사에, 일리야도 지지 않았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럼 이쪽 손도 물어뜯을 거야.”

일리야는 반대쪽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제리….”

이게 어디서 불쌍한 척을 해.

“…….”

“무척… 아플 거야. 넌 내가 아팠으면 좋겠어?”

하지만 멀쩡한 살을 찢었다.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그건… 아니야.”

“그럼 어서 빨아….”

그는 다른 손에도 금방이라도 상처를 낼 것처럼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제리는 하는 수 없이 일리야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았다. 그의 손에 상처가 남는 것은 이것 하나면 족했다. 정말 내키지는 않았지만 제리는 일리야의 손목을 붙잡은 채 그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자 미지근하게 느껴지는 피가 퐁퐁 새어나왔다.

[흡혈을 통한 마력 안정화 작업 중입니다.]

창문까지 닫혀 바람소리조차 나지 않는 방 안에는 어느새 쪽쪽거리는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일리야는 제리에게로 상체를 기울여 그의 뒤통수를 다른 손으로 받쳤다. 뜨거운 숨결이 손에 닿았다. 뒤통수를 받친 손이 슬며시 올라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제리는 기계적으로 피를 빨며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일리야는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지.’

몸에 상처까지 내가면서. 아프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촘촘한 속눈썹이 들어올려지며 새빨간 핏방울보다도 더 선명한 적안이 드러났다. 섬뜩한 색이지만, 눈빛은 항상 다정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색이었다. 일리야는 매 순간 행동으로, 웃음으로, 그리고… 눈으로, 제리를 좋아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제리는 혈향이 섞인 침을 목구멍 안으로 꼴깍 삼켰다.

“…맛있어?”

“……으응.”

제리는 물고 있던 손가락을 뱉어내며 입가를 손등으로 훔쳐냈다. 맛이 있을 리가 없다. 상처는 작은데다 금세 굳어버려 빨아봤자 혈액은 얼마 나오지도 않았다. 분명히 맛이 있는 것은 아닌데… 목이 말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

일리야는 제리의 타액으로 흥건한 제 손가락을 내려다보다 그를 제 입으로 가져가 살며시 입을 맞췄다. 소리조차 나지 않을 만큼 살며시.

등줄기를 타고 묘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어쩐지 현기증이 일었다. 어지럼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을 느꼈다.

…대체 뭐지, 몸이 정말 안 좋기는 한가보다. 제리는 눈을 감은 채 눈가를 꾹꾹 누르며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자기위안을 했다. 일리야는 상처가 난 손가락을 다시 한 번 콱 깨물어 피를 냈다.

“아 해.”

“…….”

궁금해졌다.

“깊이 물고….”

너는 왜 내게, 이렇게까지 해? 왜 그렇게나 날 좋아하는 거야?

“그대로 빨아, 제리.”

그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의 시선은 질척하고 집요했다.

“이것만 먹고 나가자…. 응?”

덧붙인 말에 제리는 선혈이 동그랗게 맺힌 그의 손가락을 혀로 얽고 빨았다. 타액에 섞인 혈향은 전혀 달지 않았지만, 기분만큼은 왠지 들뜨는 듯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