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_4
고작 피 몇 방울을 먹은 것뿐인데 제 안에서 날뛰던 마력이 잠잠해졌다. 몸 상태도 확연히 좋아졌다.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리야 덕에 점심도 먹고 오후 수업도 들을 수 있었다.
“너 왜 여기 있어.”
“내일 제리 데려다주기로 했는데… 신경 꺼….”
그 말에 시렌은 입을 닥쳤다. 일리야는 시렌의 아래층 침대를 당당히 차지하며 제 방인 것처럼 편하게 드러누웠다. 이번에도 창문으로 들어온 건지 창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일리야, 손 줘봐.”
제리는 주머니에서 얻어온 물건을 꺼내며 손을 내밀었다. 일리야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제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건 내일 아침에 주려고 한 건데, 마침 오늘 다시 만났으니까 주는 것이었다.
“이쪽 말고, 반대쪽.”
그는 얌전히 손의 방향을 바꿨다. 제리는 손가락 붕대를 찢어진 손에다 단단히 붙였다. 혹시 상처가 벌어지면 안 되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받아온 것이었다. 앞으론 함부로 손에 상처 내지 마. 제리는 엄중한 얼굴로 말했다. 일리야는 손을 한참 내려다보더니 마음에 드는 듯 반대쪽 손으로 붕대를 붙인 엄지손가락을 자꾸 만지작거렸다.
“너넨 수확제 첫날부터 같이 나가냐? 감출 생각을 안 하네, 참 나….”
외로운 시렌은 궁시렁거리며 학과 로브를 걸치며 방을 빠져나갔다. 제리도 일리야도, 그의 말은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또다시 둘만 남았다.
“집에 돌아가면 뭐 해?”
“그냥, 아버지나 형들도 휴가 받아서 집에 오니까… 집에서 하늘 구경하거나 밖에 나가지.”
“대회 나간다며?”
‘마탑의 수습 마법사’엔딩을 위해 필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것.
“올해는 몸이 안 받쳐주네… 내년에나 나갈까봐.”
어차피 마력의 양으로 승부를 보는 거라, 상대가 일리야 같은 괴물이 아닌 이상 반드시 우승할 자신은 있었다.
“그런데 마법 대회는 왜 나가는 거야…? 잘 보일 사람이라도 있어?”
“에이, 누가 대회를 잘 보이려고 나가.”
“…….”
일리야는 입을 다물었다.
“상금도 아니야. 그냥 졸업하고 나면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나가려는 거야.”
도움이 되기만 할까, 체력과 마법만 열심히 올려 일정 수치를 넘기면 반드시 마탑에 자동으로 취직이 가능한, 그야말로 치트키였다. 자신이 마법 대회에 참가하는 그날에 마탑주도 대회를 구경하러 올 것이다. 우승을 하는 것이 그 사람의 눈에 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제리 너는 궁정 마법사가 되고 싶다고 했지?”
“…아마도?”
체력, 근력, 매력, 마법 수치. 모두 넘었다. 궁정 마법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 모두 갖춘 셈이었다. 그건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한 보험이었고, 최종적인 목표는 마탑이다.
“그럼… 나도 기사단에 들어갈게.”
일리야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이미 황태자인 카르얀이 다음 대 황제가 되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었으니, 그렇게 된다면 일리야는 반드시 황궁을 나가야만 했다. 붉은 눈, 계승권을 가진 이가 디페리우스의 성을 가지고 황궁에 남아 있는 것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일리야는 그 계승권 따위, 별로 원하지도 않는 것 같아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귀찮아지면 관두면 되는 거고….”
게다가 황실 기사단은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 때문에 그러는 거야?”
만일 내가 마탑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는 어쩌려고. 남겨질 일리야가 눈에 밟혔다. 예전엔 이런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반드시 마탑에 들어가겠다는 막연한 목표만 가지고 살았는데. 그 후에 남겨질 이들에 대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일리야는 제게 맹목적이었다. 그래서 더 걱정이었다. 그를 혼자 남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난 마탑에 들어갈 거야. 너도 함께 가자.’는 말을 하지도 못했다.
“난 졸업하고도 너랑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 좋겠어.”
일리야는 굽혀 세운 무릎 위에다 턱을 괴었다.
“같이….”
제리는 옆으로 누운 채 일리야를 따라 작게 중얼거렸다. 여름 휴가지에서 일리야가 귓가에 속삭이듯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가 꿈꾸는 미래 속에는 늘 제리가 함께 있었다. 그는 늘 제리와 함께할 미래를 소망했다.
‘만일 내게도 엔딩 이후의 삶이 주어진다면…. 여기서 쭉 살 수 있다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주제였다. 제리는 몸을 돌려 벽을 보며 드러누웠다. 앗, 하는 일리야의 탄식이 귓가에 들렸다.
“여기 보고 자….”
“싫어.”
제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돌려주며 살고 싶었다.
‘나는….’
눈을 감고 떠올려본 먼 미래, 그 속에는 모두가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세 형제들도 있었다. 친한 친구들도 있었고, 황제가 된 카르얀과 여전히 자신을 아껴주는 스승님.
그리고, 무엇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지금과 같은 모습의 일리야가 제 옆에 서 있었다.
* * *
집에 돌아오자 가장 먼저 어머니가 환히 웃으며 제리를 반겼다. 제리는 따뜻한 품에 안겨 그녀를 마주안고 다녀왔어요, 하고 속삭였다. 일리야가 탄 마차가 멀어지고 있었다. 반층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제리의 발에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밟혔다. 어느새 가을이었다.
집에 들어가자 1층의 벽난로 앞에서 장작을 들쑤시고 있는 쌍둥이들이 보였다. 벌써부터 벽난로를 태우는 거야? 제리가 물었다. 제리 네가 추위를 많이 타잖아. 너 때문에 번거롭게 이러는 거야. 로베인이 핀잔을 주듯 말하며 얼굴을 손등으로 훔쳤다. 손에 묻은 검은 재가 얼굴에 묻어났다. 제리는 입을 다물었다. 조이 역시 로베인의 얼굴을 봤지만 장난기 어린 미소를 입가에 띠고 뭔가가 묻었다는 말을 해주지는 않았다.
두꺼운 책을 읽고 있던 아인스는 책을 무릎에다 엎어 덮으며 ‘왔니?’하고 물었다. 책을 읽을 때에만 끼는 은테안경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형들에게선 벌써라고 하기도 이젠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어른스러움이 느껴졌다.
‘다 컸네. 내가 다 키운 것 같은데….’
제리는 어리고 철없었던 쌍둥이와 마찬가지로 어른스러운 척을 했지만 애송이였던 아인스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그리움에 젖었다. 그는 제 어깨를 감싸는 아인스의 팔을 내려다보며 커다란 손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응? 하고 아인스는 조금은 어리둥절해 했으나, 무사히 자라난 것에 대해 제리가 그를 기특해 한다는 것은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몸은 좀 괜찮으냐?”
아버지가 물었다. 제리는 고개를 끄덕이다 금방이라도 상태가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떠올려내 곧바로 가로저었다. 백작의 입이 놀란 사람의 것처럼 쩍 벌어졌다.
“어디 아프니?”
“감기에 걸렸어요.”
다행히 일리야 덕에 많이 나아지기는 했다만, 아직 몸이 완전히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시어스가 만들어주는 마력석, 그게 없다면 몸이 완벽하게 나아질 일은 없다고 보면 되었다.
“도련님께선 여전히 몸이 약하시군요.”
제리를 걱정해 백작이 급히 부른 주치의가 말했다. 제리는 어쩌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의원은 늘 그랬듯 제리의 맥박을 재어보고, 목이 부어 있지는 않은지 입 안을 살피고 감기약까지 처방해주었다.
시끌벅적하지만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저녁식사를 마쳤다. 당장 오늘 밤부터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로베인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지붕에 올라갈래? 바로 코앞에 어머니가 있는데 당당히 위험한 짓을 하겠다는 모습에 실소가 나왔다. 제리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그냥 방에서 쉴래.”
“그래, 그럼 내일은?”
“내일은….”
안 된다고 하면 귀찮아질 것 같은 얼굴. 제리는 급히 대답했다.
“…괜찮을 것 같아.”
“그럼 내일은 올라가는 거다?”
로베인과는 식탁 아래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방에 돌아온 제리는 단출하게 싸서 나온 가방 속에서 일기장을 꺼냈다.
[제리, 일리야야. 좀 어때?]
그리고 그 밑에 전혀 실력이 늘지 않은 솜씨로 그린 고양이 몇 마리. 이럴 줄 알았다. 황궁에 돌아가기가 무섭게 무척 심심해진 모양이었다.
[제리야. 훨씬 나아졌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일리야야. 내일이나 모레 심심해질 예정 없어?]
[없어.]
[왜… 만들어봐.]
한 페이지 가득 두 사람의 글씨가 빼곡하게 채워졌다. 제리는 일리야의 글씨 위에다 엑스자를 긋기도 하고, 손에 잉크가 묻는 것도 모른 채 종이를 들여다보며 키득거렸다. 저 멀리서 펑 소리와 함께 하늘에 폭죽이 터졌다. 침대에 엎드린 채로 제리는 커다란 창을 바라보았다.
퀭해진 시어스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키득키득 새어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사람이 생각났다. 약속이라도 한 듯, 화려한 폭죽이 터지는 동안 일기장에는 한 글자도 쓰이지 않았다. 가을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 *
“제리.”
제리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제 이름을 부른 이는 바쁘기 그지없다는 카르얀이었다. 몇 년 전부터 황위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가 바쁘든 말든 제리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그런데 그 바쁘단 사람이 왜 내 방에? 제리는 멍청하게 굳어 있다가 벌떡 일어나 예를 갖췄다.
“황태자 전하를….”
“안 어울려.”
“…….”
제리는 가슴께에 살포시 가져다 댔던 손을 다시 떨궜다. …다시 할까?
“하지 마.”
“네.”
씨발. 왜 난 인사 한 번을 제대로 못하지? 도대체 언제 어울린다고 말해줄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죽기 전까지 한 번도 못 듣겠어?
제리는 고개를 들고 카르얀을 불퉁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곱게 정돈되어 넘겨진 백금발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하얀 이마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이렇게 보니 일리야와 같은 핏줄이 맞기는 한가보다. 똑같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상당히 닮아 있었다. 일리야도 예법이 몸이 배어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제법 황족처럼 보였으니까.
‘…그나저나 정말 왜 온 거지?’
최근엔 그리 연락을 자주 주고받지도 않았는데. 제리는 카르얀이 무슨 말이라도 꺼내길 잠자코 기다렸다. 그는 멀뚱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리를 보며 나른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기다리는 용건을 슬슬 꺼냈다.
“전해줄 물건이 있어서 왔어.”
“전해주다니, 뭐를요…?”
“네 스승님이 꼭 오늘 안에 가져다줘야 한다고 해서.”
제리는 실소를 내뱉었다. 그렇게 예의, 예의 하던 제 스승이 황태자이신 카르얀에게 심부름을 시켰을 리가 없었다. 웃기지 마세요. 제리는 그에게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머리가 엉켰잖아. 누워 있었구나?”
카르얀의 손이 올라왔다. 그는 헝클어진 제리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다듬어 정돈해주었다. 제리는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제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리고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누가 찾아올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건 지금껏 일리야뿐이었으니. 일리야가 갑작스레 방문하는 건 이제 예삿일도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의 머리카락은 제 것보다도 자주 헝클어지곤 하니까 보통 머리를 정돈해주는 것은 제리의 일이었다. 그래서 조금 낯설었다. 이건 내 일인데. 내가….
“아직도 자주 아픈 거니?”
“네? 네, 뭐….”
카르얀은 한 손에 쥘 수 있는 조그만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붉은 보석이 들어 있었다. 수확제가 끝나고 나서 준다고 하지 않았나? 제리는 수확제로 갈려나갈 제 스승이 너무 무리를 한 게 아닌가 싶어 조금 걱정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런데….”
이번엔 그냥 보석뿐이었다. 둥근 모양으로 예쁘게 세공되어 있지도 않았고, 보석을 감싼 장식도 없었다. 옷에 달고 다닐 수 있는 모양이 아니었다. 카르얀은 어리둥절하게 상자채로 보석을 들어 이리저리 살피다, 이내 두 손가락으로 벌레를 집어올리듯 하는 제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제리가 혼란스러워하면 사용법을 알려주라던 시어스의 말이, 이래서였나보다.
“먹어.”
“……?”
제리는 상자와 카르얀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어리둥절함을 숨기지 못했다. 카르얀은 멀쩡한 얼굴로 이걸 먹으라고 지껄였다.
…고문인가?
“제 이는 그렇게 단단하지 않아서….”
카르얀이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농담이 아닌 모양이다. 정말 내가 뭐 잘못했나?
“그냥 삼키면 돼.”
“…….”
제대로 죽이려는 건가.
그냥 삼키기엔 너무 큰데. 목에 걸려서 정말로 죽으면 어쩌지? 제리는 건네어 받은 마력석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며 걱정했다. 누른다고 해서 어딘가 들어가거나 깨지지 않을 만큼, 보석은 딱딱했다.
“…나중에 물이랑 같이 삼킬게요.”
“그래, 약속해.”
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을 꼭 걸어 맹세한다고 중얼거렸다. 카르얀은 다시 한 번 당부하듯 말했다.
“꼭 먹어야 해. 미루면 안 된다. 어제 그거 만든다고 숙부님이 일리야랑 밤새 얼마나 고생했는데….”
뜻밖의 이름에 제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일리야는 왜요?”
드디어 일리야도 마력석 만드는 법을 배웠다거나, 그런 건가? 제리는 고개를 번쩍 들어 물었다.
“일리야는 혈액을 제공했어.”
꽤 많이 뽑았으니 꽤나 어지러웠을 거야. 카르얀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
순간, 제리의 표정이 굳었다. 고생했단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정도면 고작 몇 방울 정도는 아닐 게 분명했다. 엄지손가락에 난 작은 상처도 자꾸 신경이 쓰여, 황궁에 돌아가면 꼭 치료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의원에게 상처를 없애는 치료를 받으라 당부를 한 참이었다. 더 이상 일리야에게서 피를 받아먹을 생각도 없었다.
‘……씨발.’
제리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왜 말하지 않았지? 그럼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진짜 말 안 들어.’
카르얀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몰랐을 수도 있었다. 일리야는 제리가 알면 화를 낼 말을, 굳이 먼저 꺼내지 않았을 테니까. 피가 차게 식었다.
“제리.”
카르얀이 나직하게 제리의 이름을 불렀다. 제리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그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붉은 눈동자가 선명했다. 분명 같은 색을 띄는 눈인데,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만 보였다.
“내일 딱히 할 거 없지?”
뭔가 익숙한 상황. 제리는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책 속의 ‘대사’를 떠올려냈다.
“안 바쁘세요?”
“시간을 내볼게. 그 정도 시간도 못 낼 정도로 바쁘지는 않아.”
“…….”
제리는 잠시 생각했다. 내일 당장 할 게 없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크게 내키지는 않았다. 굳이 바쁜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 것도 별로였고, 무엇보다도… 카르얀과 둘만 있는 것은 그렇게 즐겁지 않았다. 물론 그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를 친구라 칭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역시 제리에게는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다.
‘하지만….’
“죄송해요. 선약이 있어서요.”
일주일이나 되는 수확제 축제 기간, 시간은 많고 딱히 선약은 없었다. 그냥 제리는 카르얀과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피곤하기만 할 것 같았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카르얀은 조금 섭섭해보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그럼 쉬라며 제리의 머리를 토닥였다. 제리는 마찬가지로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16세 수확제, 카르얀 디페리우스.’
올해 수확제에 예정된 이벤트 상대는 카르얀이었다. 제리는 그 사실을 이제 와서 떠올려냈다. 하지만 그가 이해해보겠다고, 노력하겠다고 약속한 상대는 일리야였다. 그래서 제리는 그 많은 시간들 중, 카르얀에게 내어줄 시간은 없었다.
‘당장 일리야를 사랑하는 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제리는 가슴 아픈 첫사랑의 기억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배웠다. 얼굴을 보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상대가 천사처럼 아름답게 보이거나, 하루 종일 그의 생각만 난다. 가끔은 가슴이 꽉 막혀 곧 죽을 것처럼 숨까지 가빠왔다.
‘그러니 사랑은 아냐.’
하지만 카르얀을 만나고 나니 조금, 아주 조금은 확실해졌다.
“…….”
제리는 검붉게 빛나는 마력석을 만지작거렸다.
……일리야가 좋아.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많이 좋은 것 같기도 해.
연인으로서라기엔 애매했다. 하지만 친구로서라기엔 더 애매하다. 만일 제게 주어진 시간이 무척 짧다고 해도, 만일 오늘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일리야였더라면, 제리는 기꺼이 시간을 냈을 것이다. 그가 남자라는 것은, 죽어도 루트를 타선 안 되는 비참한 결말을 가진 인물이란 것은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더 이상 일리야는 ‘시스템의 의지’로 인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니까. 애초에 그는 외모와 탄생배경 이외에 가이드북에 나온 사실과 뭐 하나 일치하는 구석이 없었다. 어쩌면 그 애는 처음부터…. 일리야는 직접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제리를 설득시켰다.
“카르얀!”
창문을 열고 큰 소리로 카르얀의 이름을 외쳤다. 막 마차에 오르려던 그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높고 날이 맑았다. 전형적인 가을날씨였다.
“조심해서 가요. 그리고 일리야한테…!”
죽여버릴 거라고? 아니야…. 아니면 뒤진다고? …아니, 그것도 안 돼. 제리는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가만 안 둘 거라고 전해주세요.”
“……?”
“꼭이요!”
“그래.”
카르얀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으나, 봄바람처럼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요.”
제리는 손을 흔들었다. 화려한 문양이 그려진 마차의 문이 닫혔다. 마부가 채찍을 내려치자, 말이 울음소리를 내며 발을 굴렀다. 바퀴가 덜컹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마차가 지나간 자리에, 길게 늘어진 바퀴자국과 흙먼지들이 남았다. 제리는 별것 아닌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도 사람인지라, 한 가지 일만 신경쓰기에도 벅차서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일 여유가 없었다. 황금빛 마차가 덜컹거리며 대문을 빠져나갔다. 제리는 내내 손을 흔들었다.
[카르얀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삭제됩니다.]
[더 이상 카르얀 디페리우스에 대한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제리는 창이 시간이 지나 저절로 사라지기 전까지, 창틀에 기댄 채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
그는 차갑고 딱딱한 감촉의 보석을 들어 입에 집어넣었다. 그는 입을 틀어막고 이물질을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켰다. 물로 하여금 억지로 몸속에 마력석을 밀어 넣게 했다. 식도를 긁으며 천천히 몸 속으로 들어가던 마력석이 어느 순간부터 녹아 사라지기라도 한 건지 이물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시원한 기운이 명치에서부터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
제리는 침대 머리맡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일기장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일리야를 만나야겠다. 그리고 일리야의 얼굴을 보자마자 화를 낼 것이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도 해야 했다. 그가 당황하고 쩔쩔매더라도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속마음을 숨길 필요는 더 이상 없었으니까. 제리는 일리야가 편했다. 그와 있으면 아무 생각도, 걱정도 없이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나는, 일리야가….’
일리야가 좋다. 몸을 조금 더 아끼면 더 좋을 테지만, 제리 이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턱대고 덤벼드는 그가 좋았다. 그가 제게 확신을 주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제리 역시 용기 내어 한 걸음을 내딛을 필요가 있었다.
* * *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보면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제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정원 한가운데의 계단에 걸터앉아 옷 위로 배를 만지작거렸다. 마력석을 삼킨 후 간헐적으로 익숙한 기운이 온 몸에 퍼져나갔다. 일리야가 제게 마력을 주입할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건 수확제 끝나고 만들어주신다더니….’
굳이 카르얀을 시켜 급히 가져다 준 이유도 모르겠고, 왜 일리야의 피를 넣어 만든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피가 많이 났을까. 어디에 상처를 낸 걸까. 손가락? 손바닥? 그것도 아니면, 팔뚝?
“…….”
조금 찢어진 엄지를 제리가 살짝 깨물어 피를 빨 때에도 일리야는 움찔거렸다. 그날이 마지막일 거라고 못박아 뒀는데, 멋대로 몸을 함부로 놀린 일리야를 생각해보면 짜증이 났다. …아팠을 거야. 아픈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제 스승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도 그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 순진하고 어린 일리야를 꾀어내 피를 갈취한 것이었다.
“가만 안 둬.”
가만 안 둘 사람이 늘어났다. 제리는 손에서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낙엽을 콱 쥐어 바스라뜨렸다. 낙엽 부스러기가 파스스 흩어져 내렸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그런다고 해서 순순히 피를 내어준 너도 바보야, 일리야.’
제리는 일리야를 보자마자 할 말을 머릿속으로 차곡차곡 정리했다. 우선 멱살부터 쥐고 흔들어야지. 마구 화부터 낸 다음, 왜 그랬느냐고 따져 물을 거다. 그리고 어디에 상처를 낸 건지, 지금은 괜찮은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는 나 때문에 그러지 말라고 약속을 받아내야 했다.
‘…지금쯤이면 전해들었겠지?’
돌아간 카르얀이 일리야에게 가만 안 둘 거라는 말을 전해주었더라면 지금쯤 일기장에 글이 쓰여졌을 것이다. 늦어도 오늘 밤에는 들을 수 있겠지. 제리, 무슨 말이야. 내가 뭐 잘못했어? 하고 먼저 묻을 것이다. 그리고 제 답이 아래 쓰여질 때까지 계속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제리는 제 방 침대에 놓인 일기장을 떠올려보며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하늘이 어스름해지고 있었다. 세 형제들은 벽난로 앞에서 불을 쬐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오늘은 어머니 몰래 지붕 위에 올라가 하늘을 보기로 했으니…. 제리는 엉덩이를 털고 살며시 계단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그때, 이마에 손바닥만한 낙엽이 착 달라붙지만 않았어도.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읏, 뭐야….”
제리는 낙엽을 옆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버렸다. 하지만 그 낙엽은 꼭 의지를 가진 것처럼 빙글 돌아 다시 제리의 눈앞에 알짱거렸다.
“…….”
적갈색을 띠는 낙엽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는 꼭 글자를 이루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확실히 글자였다.
[잘못했어.]
제리는 눈앞에서 팔랑거리는 낙엽을 쥐어채곤 주위를 샅샅이 돌아보았다.
“…….”
확실했다. 자신이 답을 하지 않으니 초조해진 일리야가 또 멋대로 집에 찾아온 것이다. 어떻게 채 하루를 못 견디지? 그러지 않아도 내일 만나자고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제리는 일리야가 몸을 숨길만한 장소를 찾아보았다. 그는 커다란 기둥 뒤에 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와, 일리야.”
당연하지만 일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낙엽 한 장이 더 날아왔다. 이번엔 이마에 달라붙는 대신에, 살포시 손바닥 위에 착지했다.
[왜 화가 났어?]
“…….”
제리는 글씨가 새겨진 낙엽 두 장을 겹쳐 쥐고는 실소를 지었다.
“일리야.”
어디 있는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데다 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도 모르는데 잘못했다고 하는 이유는 뭐야?”
제리는 팔짱을 끼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나와, 일리야. 내 얼굴 보고 얘기해. 이러니까 꼭 내가 혼잣말 하는 것 같잖아.”
여전히 답이 없었다. 제리는 잠시 기다려주다 곧장 말을 이었다.
“나랑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것 아니야?”
바람이 불었다. 바짝 마른 낙엽이 서로 몸을 부닥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가을임을 알렸다. 발에도 낙엽이 채였다. 제리는 신발로 낙엽을 바스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안 나오면 앞으로도 네 얘기 들을 생각 없어. 계속 숨어만 있을 거면 돌아가.”
“제리….”
“…까, 깜짝이야.”
제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낼 거라 생각했던 일리야는 제리의 바로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그는 낙엽 몇 장과 낙엽에 구멍을 뚫을 용도의 조그만 나뭇가지 하나를 커다란 손에 들고서, 무척 심각한 얼굴로 제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만 고이지 않았을 뿐이지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한 마디만 하면 터질 기세라,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멱살을 쥐고 흔들려던 제리의 기세가 한 풀 꺾였다.
“나한테 화났어?”
“…응.”
“나는 몰라. 몰라서… 그래서 물어보러 왔어.”
시무룩한 얼굴로, 일리야가 중얼거렸다. 제리는 눈을 치켜뜨곤 일리야를 마주보았다.
“나 정말 가만 안 둘 거야?”
촉촉한 붉은 눈동자가 깊은 불안감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제리는 새삼스럽게 그의 눈이 참 예쁜 색을 띠고 있다고 생각했다. 붉게 타오르는 불꽃의 색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머리는 차게 식었다. 제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 손을 내밀었다.
“……?”
일리야는 그 위에다 제 손을 얹어놓았다. 제리는 곧바로 일리야의 손을 덥석 쥐어 어디 상처가 난 곳은 없는지, 그리고 소매를 걷어 붕대가 감긴 곳은 없는지 샅샅이 살폈다. 반대편도 똑같은 과정을 거친 후에야 일리야의 손을 놓아주었다.
“다친 데 없어?”
“어?”
“다 들었으니까 모른 척 하지 마. 어딘가에는 상처를 냈으니까 피를 뽑았을 것 아니야.”
제리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일리야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는 묘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처는 이제 없어. 치료 받았으니까….”
그는 초조해보였던 아까와는 다르게 미미하게 웃었다. 아몬드형의 눈이 살짝 휘어졌다. 제리는 별 감흥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웃어?”
“…….”
“웃냐고.”
일리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눈치가 다 어디로 가버린 건지, 웃음기는 얼굴에서 가시지 않았다.
“웃고 있잖아. 분위기 파악이 안 돼?”
“미안, 그게 아니라.”
일리야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급히 끌어내리며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아니, 꼭…… 네가 날 걱정하는 것 같이 들려서….”
“걱정하는 거 맞아.”
제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 말에 일리야는 새삼스럽게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새삼스럽게 놀라? 난 항상 널 걱정해.”
제리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걱정이 되는데 어떻게 해. 그래서 마법으로 황궁에 돌아가면 된다는 일리야에게 굳이 마차까지 불러주고, 상처가 남지 않았는지 이렇게 세세하게 살피는 거잖아.
그래서 제리는 고작 이런 일에 놀라는 일리야가 더 새삼스러웠다. 일리야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제리는 기꺼이 그를 걱정했을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왜 그랬느냐며 화도 낼 거고, 고맙다는 말도 했을 것이다.
“함부로 다치지 마. 내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제리, 화났어?”
“당연하지.”
그 사람이 일리야기에 더 그랬다. 제게 말하지 않고 숨기려 했다고 생각하면 더 머리가 아팠다.
“내가 잘못했어.”
일리야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그는 은근슬쩍 제리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걱정시켜서 미안하다고 한 번 더 속삭였다. 제리는 일리야의 단단한 어깨에 손을 얹어 그를 토닥였다. 태도를 보아하니 제가 걱정할 거란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앞으로 안 하면 되지, 한 번쯤은 봐줄게. 이제부터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
선심을 쓰듯 말하는 제리에 일리야는 곧바로 대답하기 앞서 조금 머뭇거렸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할 수 없어.”
“뭐?”
“미안해.”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제리는 그를 달래듯 토닥이던 손길을 멈추고 그대로 멱살을 콱 틀어쥐었다. 말 그대로, 옷깃을 쥐기만 했다. 그를 들어올릴 만큼 제리는 힘이 강하지 못했다.
“그러면 앞으로도 이러겠단 소리야? 다치지 마! 걱정된다고 했잖아!”
“…….”
일리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리는 설마 싶던 것을 입 밖으로 내었다.
“너 설마 나한테 걱정, 아니… 관심 받는 게 너무 좋아서 또다시 멀쩡한 살을 찢는다거나….”
“제리.”
“설마 아픈 게 좋아?”
“……뭐?”
“네가 변태인 건 그렇다 쳐. 하지만…!”
“변……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제리….”
“그래?”
그럼 됐고. 제리는 급격하게 침착해졌다.
“아, 아니. 그런데 왜 그랬어? 스승님이 네게 강요했어? 자기 편하려고 네 피를 내놓으라고 협박이라도 한 거야?”
대놓고 능글거리는 구석이 있는 시어스 그 인간이 일리야에게 제 안위를 걸고 한 마디만 했더라도 일리야는 꼼짝없이 제 피를 내어줬을 것이다. 불쌍한 일리야.
“…전부터 생각한 건데.”
“아, 스승님이 그랬냐고! 그 인간이…!”
“제리는 상상력이 참 풍부해….”
“…….”
“나쁜 뜻 아냐. 그래서 좋단 소리야.”
그는 곧, 제 스승이 강요를 한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마구 열을 내던 제리는 하려던 말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입을 살며시 다물었다.
“시어스에게는 내가 먼저 말했어….”
“뭐?”
협박은 아니더라도 넌지시 일리야에게 말을 건넨 이가 제 스승일 거라고 제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일리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 상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미안해 제리.”
“네가 왜 미안해. 그것보다, ……왜?”
먼저 필요로 하지도 않았는데, 왜 기꺼이 피를 내놓았지?
“넌 이제 나랑 못 떨어져 있어. 네겐 내가 필요해….”
“아니, 일리야 네 희망사항 말고, 뭐가 미안한데?”
“다 내 욕심이었어. 하지만 네게도 나쁜 건 없을 거야. …맹세해.”
의미를 모르겠다. 제리는 일리야가 당최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일리야는 제리의 가슴에 그의 손을 얹었다. 뭐하는 거지? 제리는 제 왼쪽 가슴에 얹힌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며 눈만 깜빡였다.
“내 마력이 네 여기 담겨 있어.”
“……?”
뭐지? 프러포즈인가?
제리는 뜬금없는 고백 멘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리야가 날 좋아하는 건 잘 아는데…. 제리는 피식 웃었다.
“늘 네 안에 있을 거야. 그러니 불안정한 마력이 아무리 날뛰어도 더 이상 아플 일 없어.”
내 안에 늘 네가 있다고? 일리야… 오늘따라 정말 대담하네.
“일리야 너도 참. 아무리 내가 좋아도 그렇지.”
“뭐라는 거야, 제리….”
“알겠어, 모른 척 해줄게.”
“……? 아무튼 이제 번거롭게 챙겨다닐 필요 없어. 두 번 다시 잃어버릴 일도, 낡아서 깨질 일도 없을 거야…. 그 대신에… 이제 넌 내가 없으면 안 돼.”
제리는 코웃음을 쳤다.
“아직 그런 말은 좀 이른 것 아니야?”
“……?”
제리는 여유롭게 웃으며 계속 말해보라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일리야의 말에 제리는 자신이 단단히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전에 네가 먹은 마력석은 이제 네 몸에, 심장에 깊이 녹아들었어. 그러니 주기적으로 내가 필요할 거야. 내가 없으면 안 돼.”
“어?”
뭔 마력석?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하지만 이제 웬만한 힘의 마력석으로는 네 힘을 못 견뎌. 점점 몸이 쇠약해지기만 할 테지. 아플 거야. 내가 아니었다면 넌 날이 갈수록 힘들어질 거였어. 그것보단 그냥 주기적으로 날 만나서 마력을 받거나 피를 받아 마시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
“그래서 다치지 않겠다는 약속은 못해. 앞으로도 난 네게 피를 줘야 하니까.”
“아,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건데? 마력석?”
“오전에 네가 먹은 빨간….”
“…….”
“설마 아직 안 먹었어…?”
일리야는 걱정스레 물었다. 제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까지 고작 마력석 얘기를 했단 소린가? 난 일리야가 내게 또 고백을 늘어놓는 줄 알았는데….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제리….”
“아. 먹었어.”
“……화났어?”
“아닌데.”
“화가 났잖아.”
화가 난 게 아니라 쪽팔려서 그런다!
제리는 눈을 감고 시간을 되돌릴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늘에 빌었다. 슬며시 눈을 떠보았다.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리….”
“…….”
제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일리야가 제 속마음을 읽는 능력은 없다는 것이었다.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고마워, 일리야. 나 정말 화난 것 아니야.”
“고맙다니, 상황 파악이 안 돼? 넌 이제 나 없이 못 살아.”
“이미 저지른 일인데 뭘 어쩌겠어.”
“…….”
“그리고 그게 훨씬 편하다며.”
“그건 맞지만… 넌 괜찮아?”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대담하게 일을 저지른 주제에 이제 와서 괜찮냐 묻는 것은 일의 순서가 잘못되었다. 하지만 화가 나지 않았다. 멋대로 제 안에 마력석을 녹여 심은 것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 브로치 대신에 널 챙겨 다녀야 한단 소리잖아.”
이제 마력석이 불안정한 제 마력을 감당하기 힘드니, 일리야의 마력으로 운용되는 마력석을 제 안에 심은 것이다.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그는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진 않았다.
“…괜찮겠어?”
“난 괜찮아.”
“정말? 평생인데도…?”
평생이란 단어는 굉장히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렸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평생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너무 일렀다.
‘그리고 뭐, 평생이래도….’
나중엔 몰라도, 지금 봐서는 일리야를 옆에 끼고 살아도 크게 불편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는 거고, 당장은 그렇게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부모님껜 네가 말해.”
“응, 내가 말할게.”
일리야는 냉큼 대답했다. 어느새 주변이 어두워졌다. 곧 산책을 갔다 돌아오지 않는 자신을 찾으러 누군가 나올 것 같았다. 제리는 바람에 나부끼는 일리야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일리야.”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넌 나로도 정말 괜찮겠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묻는 것이었다. 그는 두 번 다시 이에 대한 말을 꺼낼 생각이 없었다.
“너야말로. 제리, …내가 평생 함께해도 괜찮아?”
일리야가 물었다. 물음에 물음으로 돌려주는 게 어디 있어. 제리는 피식 웃었다.
“일리야, 지금 너 고백하는 거야?”
“아닌데… 제리 너야말로 고백하는 거야…?”
“나도 아니야.”
“그러니까.”
왜일까. 고백도 아닌 말인데 가슴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제리는 일리야의 독단에 그에게 발이 묶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가뿐했다.
“스승님이 허락해서 피를 넣었지?”
“응.”
그가 제게 해가 될 일을 저지를 리가 없었다. 일리야가 무슨 말을 해서 시어스를 설득시켰는지는 몰라도, 시어스 역시 생각이 있으니 일리야를 ‘평생’ 제리의 곁에 붙여놓아도 되겠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니까 괜찮아. 내 옆에 있어.”
“후회해도 이미 늦었어.”
“알아.”
원했던 것은 하나도 받아내지 못했다. 더 이상 몸에 상처를 내지 않겠다는 약속도, 멱살을 쥐고 마구 흔들어 일리야를 겁주는 것도, 그리고 …고백도.
‘괜히 착각이나 해서.’
제리는 입술을 꾹꾹 짓씹으며 창피함을 감추려 애썼다. 그때, 일리야가 느린 어조로 자신을 불렀다.
“제리.”
응?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일리야는 제리의 입을 제 손으로 틀어막았다. 커다란 손이 얼굴의 절반을 감쌌다. 제리는 어리둥절하게 눈을 뜨고 일리야를 바라보았다. 일리야는 긴장이 역력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일리야….
제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 입을 덮은 손바닥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허락을 구하지 않은 입맞춤이었다. ……아니, 어찌 보면 입맞춤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리야는 이것만으로도 어쩔 줄을 모르겠는지, 제 손등 위에 살포시 입을 맞춘 채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가을밤 정원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만이 가득했다.
“…….”
“…….”
일리야가 좋다.
기습적인 도둑키스를 그냥 눈 감고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그가 좋았다. 그리고 어차피… 진짜 키스도 아닌데, 굳이 밀어낼 필요도 없잖아. 제리도 눈을 살며시 감았다. 입술에 닿은 일리야의 손은 따뜻했다. 한참 이대로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툭.
그때,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제리는 감았던 눈을 떴다.
“……제리?!”
“…….”
일리야의 어깨 너머로 경악하는 쌍둥이 형들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