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5권) (20/29)

#05_1

며칠 뒤 아침, 수 명의 사람들이 저택을 찾았다. 선물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는데, 모두 제리에게 온 것들이었다. 끝이 없었다.

“이게 다 뭐야?”

모처럼 쉬는 날이라 집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던 아인스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제리 역시 누군가 선물을 보낸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어, 고개를 어리둥절하게 갸웃거렸다. 아인스는 나무상자를 훑어보다 카드 한 장을 발견하곤 손을 들어 카드를 떼어냈다.

“제리에게…?”

“누군데?”

상자를 두 팔로 끌어안은 채 바닥에 내려놓은 제리가 고개를 들어 아인스를 바라보았다. 아인스는 제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카드를 내려다보며 쓰여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읽었다.

“안녕 제리, 잘 잤어? 나 일리야야.”

“……!”

일리야라고? 산더미같이 쌓인 선물의 양을 봤을 때 제리는 카르얀이 또 쓸데없이 과도한 지출을 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이들을 모두 보낸 사람은 일리야였다.

일리야라니. 아인스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반면 제리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웬일로 말도 없이 내게 편지를 썼지? 그것도 선물과 같이. 제리는 히죽 웃으며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아인스는 마저 쓰여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읽어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난 약재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시어스에게 물어봐서 독성이 전혀 없거나 네게도 위험하지 않을 것들로 골랐어. 주의사항이나 사용법은 병에 붙어 있을 거야. 꼭꼭 참고해…?]

제리는 수없이 쌓인 상자를 둘러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벌써부터 일리야에게 끌려가 시달렸을 시어스의 표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렇게 많은 줄은 스승님도 몰랐을 거다.

[페테라디니눔(파란색 병이야!) 물약은 빈혈에 효과가 좋대. 그건 네 거야. 효과가 없으면 꼭 말해줘. 시판되는 것보다 세 배는 효과가 좋다고 했으니까… 별로라면 가만 안 둬. 바루이제는 너도 가지고 있어서 알지? 그것도 네 거야. 바르셀브는 한 달에 한 번씩만 먹어. 제리 네 거야. …(중략) 그리고 일론디움 가루는 폐활량에 좋대. 이게 가장 중요해. 난 제리 네가 특히 폐활량을 어떻게 좀 했으면 좋겠어.]

하나같이 모두 구하기 힘들거나 값비싼 약재들이었다. 물론 맛은 더럽게 없겠지만.

‘그나저나 이 많은 걸 나 혼자 다 먹으라고?’

제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카드에 나열된 약과 각종 약초의 이름이 이어질수록 아인스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헤실거리는 제리를 보며 미묘하게 입매를 비틀며 얼마 남지 않은 글자를 쭉 읽어내렸다.

“그리고, 내가 우연히 어떤 책에서 본 건데… 키…… 키스?!”

아인스의 언성이 높아지며 목소리 끝이 형편없이 갈라졌다. 손에도 힘이 들어가 카드 귀퉁이가 구겨졌다.

“안 돼!”

제리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 그의 손에서 일리야가 직접 썼을 카드를 가로챘다.

“으악! 구겨졌잖아!”

“제리, 그게 문제가 아니잖…!”

“뭐가 문제가 아니야! 이거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

마법으로 빳빳하게 펴는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너무 순식간에 소중한 편지가 구겨져서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구겨졌어! 구겨졌다고! 제리는 구겨진 곳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펴며 내용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내가 우연히 어떤 책에서 본 건데, 키스할 때 숨 참는 거 아니야. 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 것 같아서 참고하라고….

P.S-책… 빌려줘?

필요하면 말해.

너의 일리야로부터.]

구겨진 카드에 내내 울상이던 입꼬리가 내용을 읽을수록 점점 일자로 다물렸다.

“…….”

…망했는데? 제리는 고개를 들었다.

“키, 키… 키스…….”

아인스는 고장 난 태엽인형처럼 ‘키스’란 말을 연신 중얼거리며 제리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이런 말이 쓰여 있을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그 내용을 읽게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인스 형, 형이 생각하는 거….”

제리는 시선을 내려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었다. ‘키스할 때 숨 참는 거 아니야.’ …누가 봐도 키스를 한 이후의 밀담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잡아떼 봐도 이미 두 번째였다. 죽어도 믿지 않을 거란 말이다.

“……맞아.”

“…….”

“…씨이.”

씨발, 쪽팔려!

얼굴이 화끈거렸다. 죽어도 들킬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딴 방식으로 들킬 줄이야! 키스할 때 숨을 참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다. 자신이 바보 천치도 아니고 그걸 왜 모르겠는가.

제리의 생일날, 가벼운 입맞춤을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일리야는 조그만 틈조차 주지 않고 자신을 몰아붙였다. 가슴이 미친 듯이 콩콩 뛰었다. 맞닿은 살갗은 뜨겁고 정신도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몽롱해졌다. 점점 흐려지는 의식이, 제리는 그저 행복감과 열락에 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를 알게 된 것은 몇 시간 후였다. 제리는 제 방 침대에서 눈을 떴다.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빡이다 지난 기록을 불러와 보니 ‘호흡곤란으로 한 시간 동안 정신을 잃습니다.’라는 문구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키스하던 중에 호흡곤란으로 기절이나 하다니. 알고는 있었지만 제 몸은 생각보다 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리는 하루 종일 부끄러움에 고개조차 못 들고 이따금씩 호흡곤란이란 단어가 생각날 때마다 이를 꽉 물었다.

‘하지만 난 실전이 처음이었다고. 처음부터 잘하는 게 이상한 것 아니야?’

물론 일리야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걘 좀 이상한 놈이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 위안을 하니 기분이 조금 나았다.

“제리, 그, 일리야 그 애와….”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은 아인스가 더듬거리며 일리야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

그래도 이건 좀 쪽팔려. 혀라도 깨물어 기절하고 싶다. 도망치고 싶었다.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제리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다 이해해. 그래, 너도 이제 곧 어른이니까. 하지만….”

“…….”

“……아니다. 선물마저 뜯어보렴…. 형이, 카드 구겨서 미안해. ……난 읽던 책을, 마저, 그, 뒷내용이 궁금해서 말야….”

꽤 재밌으니 다 읽고 나면 네게도 빌려줄게. 태연하게 대답한 아인스는 뻣뻣하게 걸어가 벽난로 앞에 앉았다. 그리고 덮어두었던 책을 다시 들어 읽기 시작했다.

“…….”

그런데 책이 거꾸로 들려 있는데…. 하지만 제리는 굳이 그 사실을 아인스에게 말하지 않았다. 얼핏 봐서는 태연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묘하게 정신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리는 상자를 뒤지는 것은 관두고 살금살금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 중간쯤에서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잠깐, 전에 우리 사이를 대충은 짐작하던 아인스 형마저 이런 반응인데…. 우리가 사귄다고 친구들에게 말하면, 완전 난리 나겠는데?’

“…….”

제리는 생각에 잠겼다.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시렌은 몇 주 뒤면 아카데미를 졸업한다. 그가 졸업하고 한참 후에야 사실을 고백하면, 왜 제게는 늦게 말했느냐고 그 속 좁은 놈이 별 지랄을 다 할 것이었다. 틀림없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전달해야 친구들이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지, 오늘부터 차근차근 잘 생각해둬야 했다.

* * *

“제리!”

추위에 두 뺨이 붉게 물든 헨리가 달려왔다. 그는 제리의 앞에 멈춰 서서 작은 목소리로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내게 있는 옷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입고오기는 했는데, 붕 떠보이면 어쩌지?”

“괜찮아. 단정해 보이는데.”

그리고 그냥 아무 옷에나 학과 로브만 걸치고 와도 괜찮을 것이었다. 그 개망나니 꼴통은 우리가 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을 알아야 한다.

[꼭 제리 루트만이 열어볼 것.]

일주일 전부터 매일같이 편지가 집으로 날아들었다. 하나같이 쓸데없는 내용들이라 읽고 무시했다.

[다음 주 졸업식이다. 잊지는 않았겠지? 혹시라도 잊고 여행이라도 갔다간 가만 안 둬. 내가 가만 안 있는다고 하면 정말 가만 안 있어. 꼭 복수할 거라고! -시렌 가르시에-]

[야 왜 답장을 안 해. 죽고 싶냐? 오냐고!]

[제리!!]

마지막 편지는 무려 마탑에서 직접 만들어 유통하는 ‘시끄럽게 노래하는 편지지’였다. 불에 타지도, 찢기지도 않아, 제리는 무려 여섯 시간 동안 자신을 팔랑팔랑 쫓아다니며 제리, 제리 하고 이상한 음을 붙여 노래하는 편지를 머리 위에 달고 다녀야 했다. 귀를 막으면 더 힘찬 소리로 노래해 저택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기까지 했다. 잠에 드는 순간까지도 머릿속에서 편지의 노랫소리가 울려 머리가 아팠다. 시렌 이 미친 놈. 제리는 반드시 졸업식에 참석해, 시렌의 턱을 후려치든 정강이를 발로 차든 복수를 행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시렌은? 봤어?”

“나도 이제 와서….”

아직 못 찾았어. 헨리는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제리는 주먹을 몇 번 가볍게 그러쥐었다 놓았다. 부디 헨리가 시렌을 후려치는 자신을 보고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나저나, 일리야 형은? 너랑 같이 오는 것 아니었어?”

“……?”

그야 아카데미 안에서는 그렇겠지만, 지금은 아직 방학 중이다. 왜 만나서 올 거라는 생각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혼자 와서 좀 놀랐어. 꼭 붙어 있을 줄 알았거든.”

헨리는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

착각일 거다. 제리는 떨떠름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시선을 돌렸다.

‘설마. 헨리가 가장 먼저 눈치 챘을 리가 없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헨리가…. 방학 내내 일리야 외에는 친구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 애들에게 일리야에 관한 얘기도 당연히 꺼낸 적이 없었다. 오늘은 꼭 친구들에게 일리야와의 관계에 대해 고백을 하려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그런데 시렌 형이 졸업하고 나면 좀 허전할 것 같아.”

헨리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아침에 시끄럽게 쿵쿵거리고 마음대로 안 되면 악을 쓰고 고집을 피우는데다 제리의 간식을 야금야금 훔쳐 먹는 빈대 같은 놈이었다. 하루아침에 자신을 귀찮게 하던 짐덩어리가 하나 떨어져 나간다니, 후련하기도 했지만 헨리의 말대로 조금, 아-주 조금 허전하긴 할 것 같았다.

“뭐어, 룸메이트로서 나쁜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

제리는 헨리의 말에 차마 토를 달지는 못하겠고, 최소한으로 그에게 공감해주었다. 그때, 새까만 덩어리가 둘을 덮쳤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뭐…!”

이게 뭐야! 제리는 자신을 꽉 끌어안은 놈의 면상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쳐들었다. 졸업 가운을 걸친 채 졸업식 날이라고 머리까지 단정히 올려 고정한 시렌이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킁.”

“윽, 너 우냐?”

“나는, 너희들이…!”

갑자기 감정이 북받치기라도 한 건지 시렌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말을 마저 잇는 대신에 헨리를 한 번, 그리고 제리를 한 번 꽉 껴안았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싸가지 없는 너도 날 그렇게 좋게 생각해주다니, 조금 감동이야!”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

지금 때릴까? 제리는 주먹을 그러쥐며 고민했다. 헨리 역시 흐뭇한 얼굴로 웃고 있는 걸 보면, 감동적인 분위기가 나와야 하는 것은 맞는데 제리는 아직도 머릿속에서 제 이름을 흥얼거리는 편지의 음성을 잊을 수가 없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읏!”

도대체 오늘 무슨 날이야? 제리는 누군가에게 뒷덜미를 끌어당겨져 시렌에게서 벗어났다. 단단한 팔뚝이 제리를 품에 가두듯 상체를 껴안았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일리야였다.

[체력이 모두 회복됩니다.]

“너, 뭐 하자는 거야…?”

일리야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제리가 아닌 시렌을 바라보며 묻는 말이었다. 시렌은 급하게 감동이 식은 얼굴로 ‘어, 그래. 미안….’하고 고개를 돌렸다. 더러워서 피한다, 내가. 하고 다 들리게 투덜거리는 것은 덤이었다.

“왔어? 늦었네.”

제리는 일리야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빨리 온 거야.”

그냥 시간에 맞춰서 온 것뿐인데. 제리는 토를 다는 대신에 어깨를 으쓱했다.

“어우, 오늘은 좀 떨어져 있어라!”

일리야와 함께 온 줄리안이 둘 사이에 손을 휙휙 휘둘렀다. 둘 사이가 벌어지자 그는 ‘이제야 좀 볼만하네!’ 하고 고개를 젓다 시렌을 따라 걸어가 버렸다.

“……?”

‘오늘은’이라니.

“…….”

쟤네 뭐야. 설마 셋 다 눈치 챈 건 아니겠지? 제리는 심각한 얼굴로 세 사람을 힐끔거리다 일리야의 어깨를 툭툭 쳐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일리야가 고개를 숙여 귀를 가까이 가져다댔다.

“네가 쟤네들한테 말했어?”

“뭘…?”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거!”

갑작스런 고백에 일리야의 귓등이 붉게 달아올랐다. 눈가 근육이 잘게 경련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아, 아니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일리야 네가 날 좋아한다고 말했어?”

“제리. 난 그런 얘기 너한테밖에 안 해….”

일리야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그러면 대체 뭐야?”

쟤네 왜 저러지? 제리는 혼란을 감추지 못한 채 팔짱까지 끼고 중얼거렸다.

졸업식은 앞서 있었던 형들과 카르얀의 졸업식과 같은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가르시에 상단원들이 모두 몰려와 구경하는 탓에 좀 많이 붐빈다는 게 달랐다. 그들은 시렌과 비슷하게 요란하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시렌이 졸업장을 받을 때, 천둥과 같은 박수와 함성소리가 터져나왔다. 휘파람을 불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시렌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저, 저….’

타고나기를 관심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놈으로 태어난 것이 시렌이었다. 아예 판을 깔아주니 누구보다도 더 졸업식을 즐기고 만끽하고 있었다. 누가 들으면 대단한 연설이라도 하고 내려온 줄 알겠다. 제리는 강단에서 총총 내려오며 히죽거리는 그를 보며 허,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각 학과의 대표가 나와 한 마디씩 거드는 것을 마지막으로 학장이 일어났다. 그는 확성 마법을 이용해, 무려 이곳에 마탑주가 와 있다는 말을 했다. 그에 마법학과 쪽이 술렁거렸다. 한 마디 하라는 그의 권유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적때기 같은 옷을 뒤집어쓴 이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무슨 말을 거드는 대신에, 손을 뻗어 무어라 중얼거리는 듯했다.

“……?”

그러자 하늘에서 꽃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일리야는 그에 어떤 생각이 문득 떠오른 게 확실했다. 그는 제리의 손을 슬며시 잡아왔다. 제리는 굳이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손을 들었다. 환영 마법인지 손에 닿은 꽃잎은 스르륵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은 날 위한 날이야! 틀림없어! 시렌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착각하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매일같이 질리도록 얼굴을 볼 일은 없을 테니까.

“잘 가.”

제리는 상단원들 사이에 섞여 싱글벙글 웃고 있는 시렌을 향해 말했다. 그는 ‘그래.’라는 대답 대신에 입매를 비틀어 사납게 웃었다.

“잘 가가 아니라 나중에 봐, 겠지.”

설마 너 내 얼굴 더는 안 볼 거 아니지? 그가 말했다. 줄리안은 장난으로 ‘당연히 안 보지.’라고 말했다가 광이 나도록 닦은 구두를 시렌에게 가차없이 짓밟혔다. 헨리는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그렇게 슬픈 일은 아닌데….

“연락해. 안 하면 또 편지할 거다.”

“……!”

제리는 그제야 시렌에게 복수할 거란 다짐이 떠올랐다. 그는 참지 않고 곧장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의 턱주가리를 주먹으로 날렸다.

퍽, 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씨발, 뭐야!”

“편지 보내지 마! 특히 그 노래 부르는…!”

아, 그거. 시렌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그는 활짝 웃으며 제리의 얼굴이 사색이 될 만한 말을 지껄였다.

“기다려, 넌 죽었어.”

“…….”

말하지 말걸.

“걱정 마, 제리. 내가 중간에 빼돌려서 버려줄게….”

제리의 어깨를 감싸며 일리야가 모두에게 들리도록 속삭였다. 펑펑 울던 헨리가 울음을 그치고 훌쩍이며 제리를 바라보았다.

왠지 이때가 아니라면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제리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나, 일리야가 좋아.”

일리야의 손이 움찔거렸다.

“……? 알아.”

시렌은 팔짱을 꼈으며, 헨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훌쩍거렸다.

“그 얘길 지금 왜 해?”

누구 물어본 사람? 줄리안이 황당한 듯 물었다. 세 사람 모두 놀라지 않았다. 전혀. 오히려 제리가 그들의 태도에 더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일리야, 너 역시 말했지?”

“…….”

휴우…. 일리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일리야를 심문했다. 내가 먼저 말은 안 했는데 알고 있다는 건 알았어. 제리는 바보야…. 일리야의 말에 제리는 뒷목을 부여잡았다.

“…….”

“…….”

“…….”

시렌은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며 제리에게서 멀어졌고, 그에 줄리안과 헨리 역시 주춤주춤 게걸음으로 멀어졌다. 설마 숨긴다고 한 게 그거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 * *

[현재 1회 차 플레이 중…. 최종 엔딩까지 1년만이 남아 있습니다. 엔딩 열람 후 재 플레이 및 로그아웃이 가능합니다.]

“……?”

졸업식에 다녀온 날로부터 딱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순식간에 잠이 다 깼다. 지금껏 꿈을 걷고 있다가 순식간에 현실로 머리채를 잡혀 끌려온 느낌이었다. 물론 최종 엔딩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껏 제리가 열심히 살아온 건 모두 엔딩을 위한 과정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로그아웃?”

[지금은 로그아웃하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엔딩을 본 이후에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제리는 일어나서 가장 처음 떴던 창을 다시 앞으로 끌어왔다. 로그아웃보다 더 놀라운 말이 그 앞에 쓰여 있었다.

[엔딩 열람 후 재 플레이 및 로그아웃이 가능합니다.]

…재 플레이라니, 말도 안 돼. 그렇다면 설마 다시 다섯 살 때로 돌아가서 이만한 세월을 한 번 더 살아야 한단 말이야? 아니, 안 돼.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죽어도 안 해!

다시 돌아간다고 이만큼 열심히 살 자신도 없었으며, 처음으로 돌아가 모두가 자신을 잊은 것처럼 행동한다면 힘이 다 빠질 것 같았다. 섭섭해서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제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결연히 창을 닫았다.

[특수 아이템 ‘가이드북+1’의 효과가 적용되어, 현재 가능성이 있는 엔딩 목록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제리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예’버튼을 눌렀다. 분류는 ‘가능, 가능성 있음, 곤란, 불가’로 총 네 가지였다.

분류 ‘가능’에는 궁정 마법사 엔딩을 비롯한 각종 직업엔딩이 나열되어 있었고, ‘가능성 있음’에는 마탑의 수습 마법사 엔딩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당연히 ‘가능’이나 ‘가능성 있음’에 일리야 엔딩이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이름은 눈을 씻고 봐도 이 안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리는 곧바로 ‘불가’로 넘어갔다. 그곳엔 인물 엔딩들과 검술에 관련된 모든 직업엔딩, 그리고 각종 사망 엔딩들이 들어 있었다. 일리야의 이름은 세 번째, ‘곤란’ 탭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일리야 디페리우스 루트, 배드엔딩 1(집착의 탑): 곤란’

‘일리야 디페리우스 루트, 배드엔딩 2(상실): 곤란’

배드엔딩들뿐이라 다행이라고 생각되기는 했지만, 일리야가 변했듯 엔딩도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제리는 생각했다. 오히려 그의 이름 뒤에 ‘곤란’이란 글자가 붙는 것이 조금 불쾌하기까지 했다. 제리는 오랜만에 가이드북을 펼쳐 공략인물,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아니야. 능력치는 모두 만족했어. 완벽한데… 그리고 호감도도… 아, 호감도가 문제인가?”

제리는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현재 일리야의 호감도는 고작 55였다. 최대치인 200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절반도 안 되는 수치니까, 곤란이라는 말이 뜰 수도 있었다.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일리야는 호감도 0에서도 제리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했으니까. 제리는 책 표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잠시 고민하다, 이내 가이드북을 덮었다.

어차피 난 마탑 엔딩이 최종 목표니까 신경 쓰지 말아야지. 엔딩만 잘 보면… 어떻게든 될 거야. 제리는 애써 속으로 중얼거리며 찝찝한 마음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엔딩 열람 후 재 플레이 및 로그아웃이 가능합니다.’

“…….”

하지만 로그아웃이라는 말이, 자꾸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 * *

인간의 마음은 참 얄궂었다. 딱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인물 루트를 타는 엔딩은 무조건 기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일리야 이름이 ‘가능’탭에 들어 있지 않으니 조금 섭섭했다. 다행이기도 한데, 기분이 미묘하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올해 너랑 같이 졸업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제리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꾸했다. 이렇게 된 거, 고민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하루 빨리 능력치나 올리며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더 나았다. 거리의 광장을 가봐도,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도 관련 퀘스트가 나오는 일은 없었으니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도대체 로그아웃이, 뭘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마음이 착잡했다. 묘하게 불안하기도 했다. 그 로그아웃이 제 예상대로 ‘이 세계에서의’ 로그아웃이라면.

‘…하고 싶지 않아.’

물론 거기도 보고 싶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 이곳에서의 인연들을 모두 버리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처음이라면 모를까, 지금 제리는 그저 이들에게 정만 든 것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일리야의 루트 진행창이 뜨지 않는 등, 신경 쓰이는 것은 많았으나 그런 것들을 모두 잊게 해주는 방법은 배운 것을 반복해 익히며 상념을 떨쳐내는 것뿐이다. 그저 불안감에 모든 것을 놓고 있기엔, 제리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너무 걱정하니까. 태연함을 가장하기라도 해야 한다.

조금 허무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껏 내가 뭘 한 거지? 그토록 노력했는데, 결과적으로 그게 원치 않은 결과를 불러올지도 몰랐다. 제리가 원하는 것은 그의 안위와 주변인들의 행복, 그리고 엔딩 이후 삶의 지속성이었다. 로그아웃이 뭘 뜻하는 건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시스템과 대화라도 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었으면….

근 두 달 동안 제리가 새로 만들고 축소시킨 수식만 수십 가지가 되었다. ‘응용마법과 수식’을 가르치는 몽센 교수는, 틈이 날 때마다 졸업 후에도 함께 연구를 계속하지 않겠냐고 제리를 꼬드기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아무리 지났다 한들, 이전 세계에서 스쳐가며 보았던 대학원생들의 모습을 제리는 잊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제리는 교수의 제안을 번번이 단호하게 거절했으나 몽센 교수 역시 제리 못지않게 끈질긴 자였다.

“제리….”

“이것만 다 읽고.”

일리야는 식사 시간까지 틈을 내어 공부를 하는 제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아예 제리를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그는 자신을 쳐다봐달라는 듯 한시라도 눈을 떼지 않고 시선을 그에게로 고정했으나, 제리는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눈앞에 뜬 창을 치워내는 제리를 보고, 일리야는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왜? 제리는 고개를 들어 일리야를 어리둥절하게 올려다보았다.

“너 너무 무리했어.”

“뭐?”

일리야는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제리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기척을 숨긴 탓에 눈앞에서 순식간에 두 사람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게 뭐야?”

“응? 왜요?”

“이런 걸 왜 먹어? 너무 달아서 혀가 마비된 것 같잖아.”

“그 정도는 아니잖아요. 이것보다 훨씬 단 것도 많이 먹었으면서.”

헨리와 줄리안은 이제 두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가진 음식을 나누어먹으며 소소하고 일상적인 시간을 보냈다.

* * *

제리는 책을 손에 꼭 쥔 채로 일리야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다. 핀잔이라도 주거나 짜증을 내볼까 했는데… 어디론가 향하는 일리야가 너무 신나보여서 그러지도 못한 채, 제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일리야는 산책로를 따라 이리저리 들어가더니, 드넓은 꽃나무 그늘 아래 아무렇게나 앉았다.

“여긴 왜?”

“여기가 사람이 별로 없잖아. 너는 부끄러움이 많으니까….”

“…무슨 상관인데, 그게?”

그리고 부끄러움이 많은 것은 일리야 너면서. 제리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오늘도 자고 일어나보니 호감도가 오르내려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밤중에 일리야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일리야는 무슨 상관이냐는 제리의 말에 희미하게 웃으며 뺨을 붉혔다. 머릿속에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너, 너, 내게 무슨 짓을 하려고?!”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심지어 여긴 야외잖아. 지나가는 사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일리야에게는 딱 입맞춤까지만 허락했던 제리였다. 요즘 들어 키스할 때마다 그의 손이 허리께를 은근히 더듬는다든지, 빨거나 스치면 제리가 흠칫거리는 부분만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심지어 지난주에는 벽에 자신을 몰아붙이고는 제 다리 사이에 단단한 허벅지를 끼워 넣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스킨십의 수위가 점차 위험해진다. 느릿한 말투 탓에 방심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목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신음이 새어나왔다. 일리야는 쓸데없이 손만 빨랐다. 이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옷까지 벗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한다. 

“왜? 하면 안 돼…?”

일리야는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물었다. 당연히 안 되지! 제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손에 들린 책을 펼쳤다.

“일리야 너는 조금 자둬.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까. 그동안 난 이거나 마저 읽을게.”

“제리.”

제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시선을 책에 박자, 일리야는 집요하게 제리의 이름을 불러재꼈다. 제리, 제리, 제리이…. 신경쓰지 않으려 해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고개를 들면 지는 셈이 되어버린다. 그냥 무시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제리, 고개 안 들면 키스할 거야.”

“…….”

“기척도 안 숨겨.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봐도 나는 상관없거든…?”

하지만 제리 너는 상관있지? 넌 이런 거 부끄러워하잖아…. 일리야가 귓가에 간지럽게 속삭였다. 제리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가, 다시 정신을 다잡곤 읽히지도 않는 책을 기계적으로 읽었다. 머릿속에 내용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십, 구, 팔….”

심지어 일리야가 초까지 세고 있었다. 그리 빠르지는 않았다. 말투만큼이나 느긋하게 초가 줄어들고 있었지만 제리는 눈에 띄게 빨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일리야라면 한다고 한 일이니 반드시 할 것이다. 누군가 지나가든 말든, 무작정 입술부터 가져다 대고 볼 거라고….

결국 1초가 남았을 때, 제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을 무섭게 치켜뜨고 ‘왜!’하고 소리치며 일리야를 노려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제리가 아무리 화난 표정을 지어도 그리 무서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는 생김새의 문제였다.

드디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제리의 모습에 일리야는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약속과는 다르게 제리가 앉은 옆에 손을 짚었다.

“뭐…!”

대뜸 가까이 다가온 일리야에 제리는 뒤로 물러났으나, 그의 뒤에는 300년도 넘는 시간 동안 이 자리에 서 있었다는 꽃나무가 있었다. 세 사람이 양 팔을 펼쳐 안아도 부족할 만큼 커다란 나무였다. 제리에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제리는 임시방편으로 급히 일리야의 입을 손바닥으로 가로막으며 말했다.

“죽고 싶냐. 어리다고 봐줬더니 내가 만만하지?”

“…….”

“쪼끄만 게 어딜 벌써 덤벼들고…!”

“…괜찮아, 제리? 눈이 어떻게 됐어?”

내가 조그맣게 보이다니, 그건 아니잖아. 일리야는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는 제리에 비해 작은 곳이 하나도 없었다. 키도, 손 크기도, 심지어는 허리 굵기나 어깨 너비까지도 훨씬 우월함을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그건 타고난 신체 차이고. 아직 인생 쓴맛도 안 본 게 어딜….’

…쯧! 제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제리가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일리야는 방해가 되는 다리를 옆으로 치워버리고 몸을 더 앞으로 기울였다. 제리의 손바닥은 여전히 두 입술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

일리야는 손바닥에 쪽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입맞춤은 부드러웠으나 눈빛에서는 독점욕이 묻어났다. 그는 힘으로 손을 떼어내고 억지로 입을 맞추지도, 애타게 조르지도 않았는데도 제리의 몸은 굳었다. 여전히 제리는 스킨십에, 그리고 키스에 적응하지 못했다. 매 순간이 당황스럽기가 그지없었다. 차라리 첫키스 때가 가장 여유로웠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여기선 안 돼!”

그는 일리야의 어깨를 멀리 밀쳐내며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은 못 봐. 왜 안 되는데?”

“밖에선 싫어, 키…스까지야 괜찮지만 아무래도 여기서는 좀….”

“……!”

제리의 읊조림에 일리야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끔뻑거렸다.

“키스까지는 괜찮다고?”

“…….”

“제리… 무슨 생각한 건데?”

일리야의 반응에 제리의 머리가 차게 식었다.

이게… 아닌가?

“무슨 생각했어, 응?”

“나 아무 생각 안 했는데?”

거짓말이었다. 아무래도 죽고 싶어질 것 같았다. 아니, 벌써부터 수치심이 몰려와 숨이라도 참아 기절하고 싶었다.

“키스 말고… 또 어떤 걸 상상했어?”

“…….”

끝까지 가는 건 아니더라도 굳이 사람 없는 곳으로 끌고온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리는 표정을 굳히고 매몰차게 말했다.

“내게서 떨어져.”

“말해줘, 제리…. 내게 어디까지 허락해줄 거야?”

여기? 일리야는 작게 속삭이며 입을 가린 손바닥에 간지러운 입맞춤을 내렸다. 제리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아니면….”

허리에 팔이 감겼다.

“여기까지도 괜찮아?”

“…읏!”

거기서 그치지 않고 손가락은 상의를 슬쩍 파고들었다. 일리야의 손바닥이 등을 쓰다듬었다. 제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이러려고 온 게 맞잖아.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봐, 일주일 지났어.”

“…….”

“체력이 빨리 줄어들잖아. 나는 그래서….”

이것 때문에 자리를 옮긴 거야. 일리야는 시스템창을 던져버리며 말했다. 제리는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고작 이것 때문에?”

“응….”

일리야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며 말했다. 제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굳이 혈액을 섭취하지 않아도 되었다. 타액이든, 눈물이든 일리야에게서 나온 체액만 어떻게든 몸에 들어가면 날뛰던 마력이 안정되었으니까.

‘쪽팔려.’

제리는 얼굴에 오르는 열을 가까스로 억누르곤 태연한 척 고개를 쳐들었다.

“알겠어, 그럼 빨리 해. 곧 일어나야 하니까. 그리고 이 ……손 좀 빼고.”

일리야는 그 말에 허리를 더 세게 감았다.

“싫어.”

“손 빼!”

“너나 손 치워….”

그럼 나도 뺄게. 일리야는 손등을 슬쩍 물었다 놓으며 말했다. 그에 하는 수 없이 손을 내리자 일리야의 입술이 살포시 짓눌렸다. 일리야의 몸에서 아마도 가장 여리고 말랑할 입술이 제리의 것과 맞닿았다. 그 사이로 뜨거운 혀가 나와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체액 교환을 통한 마력 안정화 작업 중입니다.]

“으응….”

살짝 벌어진 입으로 일리야의 혀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축축한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와 치열을 가볍게 훑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일리야의 손은 빠져나가지 않고 제리의 맨살을 쓰다듬었다.

“흐응….”

새어나온 신음소리에 일리야는 그를 달래듯 등을 짧게 토닥였다. 그 손길에 안정감을 느끼다가도, 갑자기 분해졌다.

‘씨발!’

제리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눈가를 파르르 떨며 신음을 집어삼켰다. 일리야는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잘만 하는데, 왜 매번 자신만 민망한 소리가 나오는지 몰랐다. 혀가 빨릴 때마다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혹시나 해 감각수치를 몰래 다시 확인해보았으나 여전히 ‘수치 1’로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나는 왜 이러지?

“제리, 숨 쉬어.”

“흐아….”

입술이 떨어졌다. 제리가 기다렸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자 일리야는 목을 울려 자그맣게 웃었다. 작은 가슴이 몇 번 위아래로 들썩였다. 숨이 확보되기가 무섭게 일리야는 다시 입술을 겹쳤다. 시작은 산뜻하지만, 입맞춤이 길어질수록 정신이 하나도 없을 만큼 거칠어지기도 했다. 그들은 혀뿌리가 아릿할 정도로 서로에게 탐닉하고 입술을 빨기를 이어갔다.

“아, 아파.”

입 안 어딘가가 찢어졌는지 아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제리는 일리야를 밀어내곤 혀로 입 안의 여린 점막을 더듬어보았다. 일리야는 제리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하나 집어넣었다.

입 안, 살짝 찢어진 곳을 더듬던 일리야가 수식을 덧그리듯 웅얼거렸다. 그러자 손가락이 닿아 아릿한 아픔이 남았던 곳에서 씻은 듯이 감각이 사라졌다. 아니, 감각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상처가 아문 것이었다.

“배웠어.”

“…….”

어, 그래… 잘했어. 말을 해주고 싶은데 입에 여전히 손가락이 물려 있어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그러다 제리는, 입 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키며 입술을 다물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 손가락을 빨린 일리야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귀 끝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 꼴을 제리에게 들키고 말았다.

[일리야 디페리우스가 당신에게 ??합니다.]

제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야.”

너 무슨 생각한 거야.

“…….”

일리야는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어색한 웃음이었다. 일리야의 손가락을 뱉어내고 ‘너 어젯밤.’이라고 운을 떼자, 그는 못 들은 척 하며 뺨에 쪽쪽 보드라운 키스를 남겼다.

불안감과는 별개로 그 따뜻한 키스가 안도감을 주었다. 여전히 자신을 향해 쿵쿵 뛰는 그의 심장에 손을 얹으며 제리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기가 무섭게 다시 한 번 입술이 맞닿았다. 그 어떤 마법보다도 더 마법 같은 사람이 제 앞에 있었다. 

봄기운이 마주 안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제리는 눈을 감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만 있어도 좋다. 후에 어떻게 되든, 지금은 온 마음을 다해 맞부딪치는 일리야에게 충실히 마음을 돌려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모든 건 다, 괜찮아질 것이다.

* * *

“들었어? 올해부터 마법대회에 마력 측정기를 없앤대.”

“왜? 그거 없으면 어떻게 하려는 건데?”

“몰라. 그래야 더 재밌다고…. 저기 쓰여 있어.”

다들 수확제를 앞두고 마법대회 이야기뿐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누구도 마법대회에는 관심이 없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 올해 대회에는 큰 변화가 생겨 주목하는 이가 늘었다. 제리는 재밌겠다며 낄낄거리는 이름 모를 저학년을 힐끔 째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학장의 직인이 확실하게 찍혀 있는 대문짝만한 공지였다.

긴 내용이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하나였다.

‘지금까지 더럽게 재미없는 마법 대회를 보느라 아주 많이 힘들었다. 그러니 교수진과 외부인들의 흥미를 위해서 마력 측정기를 대회장에서 빼내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반기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제리는 순수하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래, 누가 싸우면 보는 재미는 있겠지! 하지만 그건 참여하는 입장이 아니니까 할 수 있는 소리고!’

물론 여태까지 마법대회가 진행되던 방식이 지극히 재미가 없다는 것은 제리도 알고 있었다. 치열한 싸움이 이루어지는 무투회와는 다르게, 마법 대회는 마력 측정기를 하나 놓고 행해진다. 그 때문에 학생들은 서로 싸울 필요 없이 그저 측정기 앞에서 마력 수치가 높게 나올만한 마법을 사용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게 왜 올해부터 바뀌냐고!’

예전처럼 한다면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었는데! 내년부터 바꿔! 제리는 분한 마음에 발을 쿵쿵 구르며 방으로 올라갔다.

마법 이론이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아카데미 안에서 제리보다 다양한 분야의 마법에 정통한 학생은 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이론뿐이었다.

“나 싸움은 자신 없단 말이야….”

제리의 한숨에 헨리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제리는 누군가와 일대일로 싸울 만큼 강해보이지 않았다.

마법 방어술도 실제로는 사용해볼 일이 없기도 했고, ‘상대방이 항복 의사를 밝힐 때까지’라는 승리 조건도 마음에 걸렸다. 그건 상대가 피떡이 되도록 공격을 얻어맞아도 항복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경기가 종료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어찌 보면 올해는 무투회보다도 마법 대회가 더 치열하고 볼만할지도 몰랐다.

그때, 익숙한 퀘스트 효과음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띠링! 경쾌한 소리에 제리는 고개를 들었다.

[이벤트 발생! ‘수확제의 꽃’]

Quest. 수확제의 꽃

직접 참여하면 더 즐거운 수확제 이벤트 4가지(무투회, 마법대회, 댄스대회, 사생대회)중, 한 종목에서 최종 우승을 거머쥐세요.

성공 보상 : [능력치]체력+50, [능력치]근력+50, [능력치]마법+50, [명성]+5, 상금 300골드, ‘로그아웃’에 대한 단서

실패 시 : [이벤트]몸살 이벤트(7일) 진행, [엔딩]일부 직업엔딩(대회 우승을 필요로 하는 직업) 폐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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