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29)

#05_2

첫 경기를 앞두고 마법학과의 학장이 일어나 선언했다.

“오늘은 매우 특별한 날입니다!”

음성 확성 마법을 사용하자, 그녀의 힘 있는 목소리가 먼 곳까지 널리 울려 퍼졌다. 소리가 너무 커 고막이 얼얼할 정도였다. 제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눈썹 위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따가운 햇빛 때문에 교수들이 앉아 있는 자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

“오늘 경기의 영예로운 우승자에게는 상금 300골드뿐만 아니라 여기 나와 주신 마탑주께서 직접 제작하셨다는… 예?”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마탑주가 손짓을 했다. 그는 학장의 귓가에 어떤 말을 속닥거렸다. 마탑주라는 사람은, 시렌의 졸업식 때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내보일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얼굴은커녕, 머리부터 발끝까지 커다란 로브로 둘러싼 탓에 맨살 부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아, 네…. 일주일 밤낮을 꼬박 새워 제작…?”

그는 또 말을 끊고 속삭였다.

“……네, 밤을 새워 무척 힘들게 제작하셨다는… ‘신비의 묘약’을 함께 수여할 예정입니다.”

제 노고를 그렇게나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제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눈이 너무 아파서 더 이상 위를 올려다보는 것은 그만둬야겠다 생각한 탓이었다.

두 명의 심판이 표시된 위치로 가서 서라고 손짓했다. 제리는 앞으로 걸어가 커다란 석판의 위에 선 채로 뒤를 돌았다. 경기장의 맞은편에 선 아드리안 맥핀은 시작되자마자 공격을 할 기세였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제리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리 역시 왼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대비했다. 그는 방어진을 최대한 간략화해 쉽게 구동할 수 있었다. 잔뜩 흥분한 관중들의 함성이 잦아들자, 심판이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긴장감이 경기장 내를 감돌았다. 그가 들어 올린 손이 아래로 확 내리꽂힘과 동시에, 뿌우- 하는 커다란 나팔소리가 울렸다.

‘상대가 그 제리 루트라고 해도 고작 아카데미 학부생 6학년이잖아. 수준은 다 고만고만할 거야. …그러니 내게도 조금쯤은, 승산이 있지 않을까!’

의기양양하게 화염 마법의 수식을 외우며 제리를 향해 달려오던 아드리안 맥핀은,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 힘에 발목을 잡혀 허공으로 딸려 올라갔다.

“으, 으아악!”

몸이 거꾸로 뒤집힌 채 한없이 하늘 높이 올라가던 그는, 경기장 높이의 세 배쯤 되는 곳에서 멈췄다. 당황한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은 제리가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에 따라 아드리안의 몸 역시 마구 흔들렸다.

그는 가까스로 외우던 수식을 마무리했지만 그가 만들어낸 불덩어리는 제리에게 닿기도 전에 소멸되었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아… 팔 아파.”

제리가 어깨를 주무르며 손을 내리자 몸이 아래를 향해 솟구쳐 내렸다. 바닥에 몸이 닿기 직전, 다시 손을 위로 올린 제리에 의해 다시 아드리안은 하늘로 번쩍 솟아올랐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드리안 맥핀은 함께 다니는 친구들보다 범위가 조금 짧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참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리 루트는 교수들이 경이롭다고 할 정도로 유독 마법 가동 범위가 넓은 놈이었다. 그는 말을 하거나 진을 그리지 않고도 그 까다로운 연속 연계마법을 성공해내는데다, 복잡한 수식을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정리해 마력을 조합해내는 것에 도가 텄다. 심지어 무려 마법학과 수석인데!

애초에 그를 얕본 적도 없었으나, 높은 곳일수록 바람이 더 세차게 분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체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살려줘!

제리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아드리안은 허공에서 하염없이 팔랑거렸다. 관객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팔랑거리는 아드리안의 몸을 따라 도리질을 치듯 움직였다. 아드리안은 속이 울렁거려 입가를 감싸쥐고 헛구역질을 했다. 함부로 무효화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뚝 떨어져 딱딱한 바닥에 몸을 부딪쳐 어딘가 크게 다칠 게 틀림없을 테니까.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아드리안은 정신이 혼미해보였다. 

“……독한 놈.”

제게 손도 못 대게 할 거라더니, 정말 조금의 틈조차 주지 않았다. 가장 먼저 제리의 마법을 몸소 체험해보았던 시렌은 제가 더 울렁거린다는 듯, 제리를 향해 환호하는 관객석에서 혼자만 팔짱을 끼고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하, 항복! 종이인형처럼 허공에서 마구 날아다니며 가까스로 버티던 아드리안은 큰 소리로 외쳤다. 첫 경기부터 이럴 줄 몰라 넋을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심판은, 뒤늦게 손을 들어 올려 제리를 향했다.

경기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렁찬 나팔소리가 울렸다.

땅에 발을 디딘 아드리안은, 털썩 쓰러져 바닥을 짚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제리의 이름이 대진표 선을 타고 올라가 한 자리 위에 위치했다.

“휴우….”

일방적인 시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손에 땀을 쥐고 보던 일리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였다. 반면, 내내 미동도 없이 꼿꼿한 자세로 시합을 지켜보던 시어스는 제 제자의 성장과 마법 응용력에 티가 나지 않게 뿌듯해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법인걸.”

그는 턱을 들어올린 채로 중얼거렸다. 그때 일리야가 벌떡 일어나 통로를 향해 바삐 걸어 나갔다.

“황자님?”

그는 시어스의 어리둥절한 목소리에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 가십니까?”

“제리….”

그는 그 말만 내뱉고는 계단을 바쁘게 뛰어 내려갔다. 하지만 일리야는 십 분도 되지 않아 ‘시합 도중 경기 참가자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실망해 축 늘어진 어깨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시어스는 그런 일리야를 보고 조금 의아해했으나, 곧 다음 경기가 시작하는 나팔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 * *

“너… 두고 보자!”

“……?”

‘두, 두고 봐!’와 ‘으이익, 두고 보자!’에 이어 벌써 세 번째였다. 놈은 흙먼지로 엉망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버럭 소리쳤다. 그리고 뒤돌아 도도도 뛰어갔다. …아드리안도 그렇고, 왜 다들 퇴장하기 직전에 두고 보라는 말을 하는 걸까.

아슬아슬하게 근접전을 펼쳤다면 모를까, 압도적인 실력으로 조금의 틈조차 내주지 않고 쉽게 경기에서 이긴 것은 제리였다. 꾸준히 방어마법을 구동하고 있던 터라, 기습적으로 상대가 공격을 해왔어도 침착하게 잘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 두고 보라는 말을 들을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제리는 이쯤 되면 자신을 빼고 다들 입을 모아 약속이라도 한 건지가 궁금해졌다.

[마력을 너무 많이 소진하셨습니다. 지칠 것 같습니다…. 체력이 감소하는 속도가 10% 증가합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외부인을 만나는 게 금지되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일리야를 만나 체력을 채우고 돌아왔다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관객석에 앉아 있는 일리야와 눈이 마주치면, 그는 금방이라도 제리를 향해 달려올 듯 몸을 들썩이곤 했다. 아직은 몸이 크게 무겁지 않았지만 조금 졸린 것 같기도 하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실에 돌아온 것은 제리가 결승에서 만나게 될 거라 예상했던 이가 맞았다.

“축하해.”

눈이 마주쳐서 살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우윽, 전 선배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로니 에이든은 이겨서 돌아온 주제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눈물을 집어삼켰다. 그는 제리보다 한 살이 어렸다. 유독 자주 마주치고, 수업을 들을 때마다 은근히 주위에서 맴돈다 싶던 아이였는데, 그는 오늘 대기실에서 제리를 마주치기가 무섭게 덜덜 떨었다. 그래서 제리는 자신이 로니 에이든에게 나쁜 짓이라도 한 게 아닌가 잠시 고민도 했었다.

‘저는, 저, 제 이름은.’

자꾸 말을 더듬길래 ‘알아. 로니 에이든이지?’하고 말해주자 그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굴었다. 로니는 땅에 머리가 닿을까 싶을 만큼 고개를 꾸벅 숙이며 존경한다고 소리쳤다. 존경이라니. 온 시선이 몰리는 것에 제리는 질색하는 얼굴로 로니를 일으켰었다. 깡패 두목이 된 기분이었다.

“호, 혹시 제 경기 보셨나요?”

그는 또 숨조차 제대로 못 쉬며 소리쳤다. 귀가 다 따가웠다.

“피곤해서 방금 전은 못 봤고, 예선이라면 끝에 조금 봤어. 대단하던데?”

제리가 상대방에게 공격당하기 전에 상대의 공격을 전면 차단하고 항복하기를 받아내는 편이었다면, 로니 에이든은 날카로운 공격으로 상대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 승리하는 편이었다. 로니 에이든의 예선전은 거의 막바지가 되어서야 볼 수 있었는데, 그의 상대는 팔이 부러져 실려 나갔다.

“어흐흐흑.”

로니는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선배에게 대단하단 말을 듣다니 저 이제 정말 죽어도 돼요. 무슨 말만 해도 대단하다고 그를 추켜세우고 호들갑을 떠는 행동에, 제리는 괴로운 기억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모습은 사랑의 묘약을 먹었던 제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로니는 존경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기억이 되살아나니 벽에 머리카락을 쿵쿵 박고 싶었다.

“하지만 봐주지는 않을 거예요!”

최선을 다하는 게 선배에 대한 예의니까요. 그는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제리는 큰일인걸, 하고 중얼거리며 애써 웃었다.

“선배는 겸손하신 것도 너무 대단해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완벽하실 수 있는 거죠? 저도 꼭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응.”

겸손이 아니라, 정말 체력이 동나가고 있어서 그런 건데.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말에 괜히 쑥스러워졌다. 제리는 말을 아끼며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제리는 이름이 불리기도 전에 몸을 일으켰고, 거울을 보며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던 로니 역시 고개를 돌렸다. 갈림길에 서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로니는 호전적인 눈으로 씩 웃었다.

로니 에이든의 전투 방식은 꽤나 거칠다. 자칫 잘못하면 바로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버릴 거다.

“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도 열심히 해. 제리는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로니 에이든 역시 눈을 빛내며 ‘저도 안 져요.’하며 등을 돌렸다. 두 사람은 뒤를 돌아 각기 다른 출구로 빠져나왔다. 와아아!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한껏 달아오른 경기장이 함성으로 가득 찼다.

“마법학과 6학년생 제리 루트와 마법학과 5학년의 로니 에이든입니다!”

학장은 확성 마법을 사용해 두 사람을 소개했다. 마탑주 님께서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하고 고개를 돌려 속닥이는 말까지 크게 울려 퍼졌다.

“…예?”

그는 또 직접 말하지 않고 그녀의 귓가에 속닥였다. 수줍음이 많거나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모양이다.

“……예? 아, 예. …그, 지루하지 않게… 해달라십니다.”

학장마저 조금 머쓱한 듯했다. 마탑주는 커다란 의자에 등을 기대어 눕듯이 앉았다. 지루하지 않게 해달라니. 그러면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싸운 자신과 다른 학생들은 뭐가 된단 말인가?

아무리 마탑주라도 그렇지, 아카데미에서 어떤 수준을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실수인 척 위원석에다 커다란 물 폭탄이라도 내려야 그제야 흥미롭다고 할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지루하지 않을 경기가 될지, 제리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석판 위에 올라섰다. 결승전이니만큼 이전의 경기보다도 더 긴장되었다. 로니 에이든은 특히나 위험하다. 예선 상대는 팔이 부러져 실려 나갔고, 두 번째 상대는 다리에 큰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어떻게 되었는지도 듣지 못했는데, 아까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핏방울들을 경기장 한가운데 바닥에서 보았다.

맞은편 관중석에 제리! 하며 제 이름을 부르던 가족들이 보였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스승님과 일리야가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시렌과 헨리, 그리고 줄리안이 자신을 응원하고 있었다.

“…….”

그래서 질 수 없었다. 응원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이 아니었다. 여기서 이겨야 단서를 얻을 수 있었고, 그래야만 제리는 저 사람들의 곁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

딸랑, 하는 방울소리가 울렸다. 제리는 일리야가 빌려준 부적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로니는 곧바로 물리 공격 마법을 사용해올 것이다. 로니 에이든의 이름은 ‘고대 마법 공격술’을 담당하는 교수 입에서 몇 번 들었다. 로니는 그의 애제자였다. 그는 곧, 허투루 볼 상대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제리는 보호마법을 몸에 여러 겹 겹쳐 둘렀다. 체력이 꾸준히 깎여나갔다. 마지막으로, 저주를 변형해 직접 만든 마법 수식을 작게 읊조렸다. 제리는 과거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던 오랜 저주서들을 모두 긁어모으다시피 했다. 그 결과 제리는, 저주가 시전자에게로 되돌아가는 ‘역저주’의 원리를 이용할 방법을 찾아냈다.

방어 마법도 여러 겹 둘렀고, 그 사이에 저주를 변형한 마법을 끼워넣었다. 로니가 제리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대는 순간, 그가 시전해왔던 모든 마법이 역풍처럼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자.’

다른 사람에 비해 체력도 현저히 부족한데다 마력을 많이 소진해 체력이 평소보다도 더 빠르게 감소할 것이다. 허점이 보이는 순간, 로니는 그를 파고들어올 것이었다. 이전 경기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방법을 찾아 경기를 끝내야 했다.

비록 그리 재미있는 경기가 되지 못하더라도, 일단 이기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제리는 고개를 들어 학장 옆에 앉아 있는 마탑주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푹 눌러쓴 모자를 조금 걷어냈다. 턱에서부터 코 아래까지가 햇빛 아래 드러났다. 손을 들어올려 거뭇한 턱수염을 어루만지던 그와 …왠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삐뚜름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제리는 무언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뿌우-

제리의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튀기 직전, 나팔 소리가 울렸다. 로니의 시선은 제리를 똑바로 향해 있었다. 땅이 점차 진동하더니, 그의 발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리는 옆으로 구르듯 피하며 땅에다 손을 짚었다.

‘아드리안에게 썼던 방법은 안 되겠어.’

로니는 제리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마법 가동 범위가 넓었다. 정면으로 붙을 때 제리는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게 뭐야?”

구경꾼들이 웅성거렸다. 바닥에서부터 평평한 벽 몇 개가 솟아올랐다. 제리가 땅에서 손을 떼어내자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라가던 벽들이 높이를 더해가는 것을 멈췄다. 벽은 제리와 로니의 사이를 가로막았고, 두 사람 사이의 길은 미로처럼 복잡해졌다.

로니는 들뜬 숨을 집어삼키며 자신과 제리 사이를 가로막은 벽을 터뜨렸다. 벽 두 개가 뿌연 흙먼지를 만들며 무너져내렸다.

“저기 있나보네.”

가까운 벽 뒤에 몸을 숨긴 제리는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곳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그는 헨리가 생각해냈고 시렌이 가장 괴로웠다고 평가한 마법을 사용했다. 로니 주변의 공기를 소멸시켜, 점차 숨이 막히게 하는 것이었다.

[로니 에이든의 주위가 일정 시간(3분)동안 진공 상태로 바뀝니다.]

손에 사람 머리만큼 커다랗고 검붉게 일렁이는 마력을 모으던 로니는 위로 한 뼘 가량 둥실 떠올랐다. 그 주변에 반투명한 막이 쳐져 동그란 구 모양을 만들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가 뻗은 손은 진공 상태의 구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

그는 숨이 막히는지 황급히 막 모으던 마력을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코와 입을 가로막은 채 버둥거렸다.

“그거야, 제리!”

숨이 막히는 괴로움을 몸소 체험해본 시렌이 주먹을 머리 위로 쳐들며 소리쳤다. 해결책을 찾으려는 듯 허공에 손을 더듬거리는 로니를 보고 ‘빨리 나와, 이 머저리야!’라며 그를 응원하는 사람도 많았다. 양 측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로니 에이든은 산소 부족으로 얼굴이 온통 빨개진 채 잠시 생각하다, 손가락을 들어 반대편 손바닥에 진을 그렸다.

[로니 에이든이 대기 동결화 마법을 깨뜨렸습니다.]

[시전자 제리 루트의 대기 동결화 마법이 해제됩니다. 마법 반동 데미지로 체력이 2만큼 깎입니다.]

“후아, 선배….”

내내 숨을 참고 있던 그는 다시 땅에 발을 디딘 후에야 숨을 내쉬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한 거야? 로니 에이든이 숨막힘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항복할 거라 생각했던 시렌은 발을 동동 구르며 경악했다.

제리도 그가 벗어날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대처가 빨랐지만 잠깐의 시간을 벌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로니는 제리를 찾아 미로처럼 얽힌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갔다. 저 멀리서부터 큰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기세에 제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부수면서 길을 뚫을 줄은 몰랐지.’

당연히 미로처럼 만들어둔 벽 사이를 달릴 줄 알았는데 말이다.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곳을 피해 달리던 제리는, 어느 순간 로니 에이든과 마주쳤다. 그는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로니 에이든의 정신계 마법을 가로막았습니다. 방어 장벽(정신계)이 파괴됩니다.]

로니의 정신계 공격이 보호 마법에 튕겨져 나갔다. 제리는 남은 체력을 확인해보다 굳게 결심했다. 길게 끌면 끌수록 불리한 건 제리였다. 이제 망설일 수가 없었다.

바로 위쪽의 벽이 부서져내렸다. 미처 그를 피하지 못해, 잔해에 어깨를 세게 얻어맞은 제리는 반대쪽 손으로 다친 어깨를 감싸쥐었다.

[체력이 7만큼 깎입니다.]

그래도 머리에 맞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자칫 잘못했으면 머리가 깨질 뻔했을지도 모른다.

“선배…. 죄송해요.”

잔여 체력은 5. 이제부터는 숨만 쉬어도 순차적으로 체력이 깎여나갈 것이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여유로운 태도로 손에 이글거리는 화염마법을 두른 채 제리를 향해 달려오던 로니는, 갑자기 눈앞에 생겨난 커다란 생물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사람 한 명쯤은 거뜬히 날려버릴 것 같이 커다란 앞발을 내딛었다. 쿵 소리와 함께 앞발이 내려앉은 곳에서 희뿌연 먼지가 날렸다.

“소, 소환술? 그건 분명히 금지된…!”

로니 에이든은 순간 여유가 무너진 얼굴로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칠흑처럼 새까만 몸뚱아리를 가진 베스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발을 들어올려 로니 에이든을 향해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부웅,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웅장하게 들렸다. 로니는 당황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5학년생이라면 몽센 교수의 ‘마법생물의 생태와 습성’을 들었을 것이다. 수업을 제대로 들었거나, 참고 도서인 <맹수 대백과, 사냥편>을 읽어보았으면 모를 수가 없는 동물이었다. ‘베스’는 거대한 표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숲을 지나다 희박한 확률로 굶주린 베스를 마주치면 괜히 도망치려 하지 말고 가만히 잡아먹힐 준비나 하라는 서술도 있었다. 베스의 날카롭게 찢어진 눈이 로니를 향했다.

“그게 널 물어도 나는 책임 못 져.”

“물… 물어요?”

“물 수도 있다는 거지. 미안한데 난 소환은 몰라도, 그걸 사라지게 하는 법은 아직 안 배웠거든.”

제리의 말에 로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거, 거짓말 하지 마세요! 그의 외침에 제리는 곤란한 표정으로 다친 어깨를 감싸쥔 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베스의 아가리에서 물처럼 투명한 침이 뚝 떨어져내렸다. 로니의 눈동자가 공포로 가득 차올랐다.

“정말 미안해. 급한 마음에 하필이면 베스를….”

제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땅을 짚었다. 쿠구궁 소리와 함께 돌로 된 벽이 올라와 베스와 제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선, 선배! 제리 선배! 로니는 제리가 소환해두고 자신만 자리를 피한다고 생각한 건지,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로니는 뒤로 천천히 물러나다 그가 부순 벽의 잔해에 걸려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쿵 넘어졌다.

“…….”

제리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눈앞의 창을 옆으로 밀어 없애버렸다. 그리고 그는, 로니가 ‘소환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에 효과를 더했다.

[환상마법을 중첩하여 사용하셨습니다. 한동안 체력이 3% 더 빠르게 감소합니다.]

과장을 더해 집채만큼 커다란 생물이 로니 에이든을 향해 달려들며 아가리를 벌렸다. 으르릉, 목을 울리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위에서 경기를 내려다보며 환호성을 내뱉던 사람들마저 흠칫 놀랐다.

빨리 항복해, 로니. 제리는 속으로 읊조렸다. 이젠 로니가 얼마나 겁을 집어먹고, 언제 판단능력을 상실하느냐에 달렸다.

“으악!”

로니는 겁을 집어먹고 뒤로 마구 물러났다. 제리가 만들어낸 ‘베스’의 환영은 여유롭게 로니의 위에 올라탔다. 로니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그것은 그를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묽은 침이 그의 얼굴에 툭 하고 떨어졌다.

자, 잡아먹힐 거야. 흉포한 마법생물을 태어나서 처음 보는 로니는 얼굴이 새하얘진 채, 항복이라는 말을 제대로 내뱉지도 못했다.

경기를 지켜보던 마법학과 교수들은 서로를 힐끔거리며 ‘소환술은 아닌데….’하며 헷갈려했다. 환상마법이라면 눈에만 보이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로니 에이든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냥 환상마법은 아닌 듯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제리는 침을 꼴깍 삼키며 높은 곳에 있는 심판을 올려다보았다. 어렵게 구한 영상구에서 ‘베스’가 움직이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생물의 습성에 대해 공부했다. 그 덕분에 로니를 깜빡 속아 넘어가게 할 만큼 완벽한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조금 현실성을 더하기 위해, 몰래 다른 마법들까지 사용했을 뿐이다. 베스의 울음소리나 뚝 떨어져내리는 침의 촉감까지 더하니 환상은 꼭 진짜처럼 보였다.

높은 계단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두 사람의 경기를 지켜보던 심판은, 로니가 ‘하, 항…!’ 라며 더듬거린 말을 뒤늦게야 알아듣고 제리를 향해 재빨리 팔을 뻗었다. 우승자가 결정되자 우렁찬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겼어!’

제리는 숨을 급히 집어삼키며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동시에 제리의 환상 마법이 해제되자, 잡아먹힐 거라고 생각해 강화마법을 두른 주먹으로 베스를 후드려 패던 로니 에이든이 눈물 젖은 눈을 깜빡였다.

“뭐, 지….”

침을 질질 흘리며 제게 올라타 있던 베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갑자기 사라지다니, 소환술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럼 이건….

“…….”

제리 선배는.

“……!”

대단해! 로니 에이든은 소매로 눈물을 거칠게 문질러 닦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감격에 젖어 그와 제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주먹으로 때려 부쉈다.

“어…?”

제리는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잔해를 피하려 몸을 옆으로 던지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뒷덜미를 잡혀 뒤로 끌려갔다. 그 덕에 머리에 커다란 돌덩이가 내리꽂히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쿵, 바닥이 패일 정도로 커다란 돌이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제리는 아찔해졌다.

뒤를 돌아보자 일리야가 관중석에서 제리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자신을 뒤로 끌어당긴 것은 아무래도 일리야였던 모양이다. 원래 그의 자리도 아니었는지, 한 사람의 자리에 남자 두 명이 구겨지듯 겹쳐져 있었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시어스가 묘한 얼굴로 제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

참, 스승님은 아직 우리 사이를 모르시지. 제리는 눈을 빛내며 자신을 껴안으려 달려드는 로니는 보지도 못한 채 시어스에게 뭐라 말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제리 선…!”

[보호마법이 작동됩니다. 시전자가 가장 최근에 사용한 마법이 그대로 돌아갑니다.]

“뱈!”

로니는 가장 최근에 돌로 된 벽을 때려 부수기 위해 사용했던 마법을 그대로 얻어맞고 순식간에 눈을 감고 뒤로 쿵 자빠졌다.

“…….”

출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들것을 들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얜 경기도 다 끝났는데, 왜 하필 지금 내 몸에 손을 대서…. 제리는, 행복한 얼굴로 자빠져 있는 로니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의 우승자, 제리 루트!”

학장의 힘 있는 외침에 박수가 제리를 향했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경기는 끝났으니 이제는 괜찮겠지. 일리야는 더는 지켜보지 않았다. 그는 관중석을 손으로 짚고 뛰어넘어 제리를 향해 총총 달려갔다. 누가 보고 있건 말건, 그는 제리의 옆까지 달려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체력이 모두 회복됩니다.]

제리의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달린 탓에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제리는 고맙다는 말 대신에 그를 향해 살짝 웃어주었다.

“…우승자…만! 단상으로 올라오세요.”

난데없이 경기장에 난입한 일리야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학장은 제리만 올라올 것을 강조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어깨를 쥐었던 손에 힘이 풀어졌다. 일리야는 제리를 놓고, 이만 가보라며 학장 및 위원석을 힐긋 쳐다보았다.

“일리야. 잠깐 몸 좀 숨겨볼래?”

“…왜?”

“정말 잠깐이면 돼. 네게만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 건데… 안 돼?”

“…….”

네게만. 쓸데없이 그 말에 꽂힌 일리야는 ‘나에게만….’이라는 말을 입안에서 몇 번 굴려보다 제리의 말대로 기척을 숨겼다. 경기장 한가운데 있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두 사람에, 어디로 사라진 거냐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제리는 주머니에서 일리야의 부적을 꺼냈다.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원형 경기장에 빈자리를 찾아볼 수도 없을만큼 들어찬 사람은 보이지도, 그들의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제리의 시선 안에는 오직 일리야만이 가득 들어찼다.

“제리. 뭘 하려고?”

제리는 두 손을 뻗어 일리야의 뒷목을 둘러 안았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려 분홍빛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 담백한 소리와 함께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자 일리야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러려고!”

“…….”

일리야는 입매를 일자로 다물고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다.

“내가 이겼어, 일리야.”

“응, 하나도 안 놓치고 다 지켜봤어…. 멋있어, 제리.”

“네 덕이라고는 하지 않을게. 내가 잘해서 이긴 거야.”

“응, 알아. 정말 잘했어.”

무슨 농담을 못한다. 물론 내가 맞는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걸 또 이렇게 쉽게 인정해버리니…. 제리는 우승자의 부재에 혼란스러워하는 교수석을 잠시 흘깃거리다 다시 일리야를 보고 말했다.

“있잖아, 내가 어디서 본 건데… 우승자에게 키스를 받으면 한 해 내내 행복한 일만 있을 거래.”

“…….”

“난 일리야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지금, 행복해? 그의 물음에 일리야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일리야 디페리우스가 매우 행복해합니다.]

“응….”

일리야가 행복해해서 제리 역시 기분이 들떴다. 나도 행복한 것 같아, 일리야.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135]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136]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137]

[일리야 디페리우스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현재 호감도 138]

“제, 제리, 이건….”

“응, 알아.”

내가 그렇게 좋아? 제리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굳이 감추지 않고 피식피식 웃었다.

“…….”

분홍색이 된 일리야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제리의 얼굴을 가리는 시스템창을 집어던져버렸다. 일리야에게 몇 대 얻어맞고,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 호감도창에 제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일리야 디페리우스가 당신에게 ??합니다.]

“뭐야?”

“빨리 크기나 해, 제리….”

일리야는 새빨개진 얼굴로 제리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가 제리에게서 손을 떼어내자, 사라졌던 두 사람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 * *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승자가 사라졌다는 것에 사람들은 웅성거렸고, 아무도 영문을 알 수가 없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위원석에 앉아 있던 교수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으로 마탑주를 힐끔거렸다. 잠시 급한 일이 있었나봅니다. 금방 다시 돌아올 겁니다. 그럴 학생이 아니니까요. 그들은 확신 없는 말을 슬쩍 건넸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며 중얼거리는 이도 있었다.

다행히 몇 분 되지 않아 두 사람이 폐허가 된 경기장 한가운데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사라진 막내 동생에, 당장 경기장으로 달려 내려갈 것처럼 굴던 쌍둥이들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백작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너네 아무 말도 하지 마. 무슨 말할지 다 아니까.”

“…….”

“…….”

시렌의 중얼거림에 헨리와 줄리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빨개진 일리야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제리,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다들 자리로 올라오세요.”

학장이 커다란 천을 걷어내자, 위원석 앞에 세 개의 자리가 생겨났다. 3등을 했던 이는 팔에는 부목을 대고, 다리는 절뚝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이렇게 만든, 오늘의 준우승자인 로니 에이든은 경기가 끝나고 제리에게 손을 대버려 기절한지라 올라올 수가 없었다.

“다녀와….”

일리야는 제 자리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제리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경기에 참여하지도 않고 무작정 경기장에 침입한 그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일리야는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녀올게.”

제리는 뒤돌아서 단상 위로 올라섰다.

“무척 훌륭한 경기였습니다. 그리고 학부생답지 않은 실력이라 조금 놀라웠습니다.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군요.”

일리야가 그토록 기피해 못지않은 검술학과의, 턱수염이 수북한 교수가 제리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의 투박한 손을 쥐자 새로운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퀘스트 보상 획득, 체력+50]

그는 땅이 움푹 패이고 돌이 부서진 잔해로 엉망인 경기장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돌을 툭툭 차다가 그와 눈이 마주친 일리야가 고개를 홱 돌려버리자, 그는 껄껄 웃었다. 

“특히 몸을 쓰는 방법을 교육받지 못했을 텐데도 전체적으로 경기장을 활용하는 기술이 탁월하더군요. 앞으로도 증진하시기 바랍니다.”

[퀘스트 보상 획득, 근력+50]

왜 이리 보상이 좋지. 찜찜한데 일단 기분은 좋았다. 뭔가 힘이 강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가 뒤로 비켜나고 마법학과 학장이 제리를 향해 짤랑이는 주머니를 내밀었다. 

“올해는 특히 더 흥미로운 시합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승자인 제리 루트. 당신은 상당한 노력가라 늘 좋게 보고 있었습니다. 영예로운 우승을 축하드려요.”

[퀘스트 보상 획득, 마법+50]

[상금 300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윽.”

제리는 제법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들며 순간 비틀거렸다. 이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다. 그는 두 팔로 주머니를 끌어안듯이 들어야 했다.

“그리고 특별히 시간을 내어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마탑주님께서, 우승자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내내 입을 다문 채 구부정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만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내 손에서 데굴데굴 굴리고 있던 약병들이 그가 일어남에 따라 함께 찰랑거렸다. 그는 손을 들었다. 푹 눌러쓰고 있던 검은 로브를 걷어내며 제리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주름진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동시에 제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 저 사람은….

“또 만나는군.”

그에 학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리와 마탑주를 번갈아보았다. 다른 교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고작 아카데미 학부생에 불과한 제리 루트가 마탑주를, 그리고 마탑주 역시 제리를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일리야가 멋대로 뛰쳐 내려간 덕에, 관중석에 홀로 남아 제 제자를 기특하게 바라보고 있던 시어스마저 화들짝 놀랐다.

[명성치가 생성됩니다. 명성+5. 아카데미 내를 거닐다 보면 가끔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깁니다!]

“아, 이런.”

그의 목소리가 관중석 먼 곳까지 퍼져나갔다. 그는 곤란한 듯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오랜만이군, 젊은이.”

그는 놀라서 말도 안 나오는 제리를 보며 킬킬 웃었다.

“내 다음에 보자고 하지 않았는가.”

제리는 아직까지도 어안이 벙벙했다. 그냥 점쟁이에 불과한 노인이, 한순간 머릿속에서 마탑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마탑주나 되는 사람이 왜 거리에서 사람들 점이나 봐주고 있는 거지? 할 짓이 그리도 없나?

“걱정 말게…. 지금 하는 얘기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걸세. 저들의 눈엔 자네와 내가 말없이 서 있는 것으로만 보일 테니 말일세.”

그래서인지 다들 어리둥절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떠오른 건데, 아직 퀘스트 보상이 하나 남아 있었다.

‘로그아웃’에 대한 단서.

제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단서를 이 점쟁이. …아니, 마탑주가 제공해줄 모양이었다. 제리는 달싹이던 입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저한테 해주실 말씀이 있으신 거죠?”

“그게 아니라면 왜 번거롭게 공간을 분리시켰겠는가. 시간이 얼마 없다네.”

곧 눈치를 챌지도 모르니 빨리 하겠네. 그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키득거리며, 입구를 줄로 엮은 약병 세 개를 내밀었다. 제리는 인벤토리 안에다 무거운 금화 주머니를 집어넣고, 그가 내미는 약병들을 받아들었다. 유리로 된 병 표면이 서로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내었다.

[신비의 묘약×3을 획득하셨습니다.]

‘신비의 묘약’이라는 이름 이외에, 별다른 효과가 표시되지는 않았다. 이게 뭐지. 제리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직접 만든 묘약일세. 이건 나라 하나를 통째로 준대도, 이 세상 어디를 가서도 구하지 못할 걸세.”

“…무슨 묘약이요?”

사랑의 묘약 이후로, 묘약의 묘자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났다. 또 거울을 보고 날 사랑하게 되는 것은 싫어.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데…. 제리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약병을 내려다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맑은 액체가 병 안에서 찰랑거렸다.

그는 제리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그저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었다.

“자네는 늘 생각이 너무 많았지. 그래서 괴로운 날도 많았을 거야.”

“…….”

“그래도 많이 변했군. 아주 좋아. 좋은 변화야. 이번에야말로 꼭….”

“네?”

제리의 되물음에, 마탑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닐세. 그것보다 자네, 미래가 궁금하지 않은가?”

미래가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제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혹시 ‘로그아웃’이 뭔지 아세요?”

로그아웃이 대체 뭘 뜻하는지가 궁금해 잠시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제리의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했다.

“으응? 해괴한 이름이군. 멍멍 개 이름인가?”

“멍멍 개…….”

“고양이? 뱀? 아니, 말하지 말아보게. ……도마뱀인가?”

“아뇨.”

“흐음, 뭐든 간에 동물 이름은 최대한 간결하고 부르기 쉽게 짓는 게 좋다네.”

모르는 게 분명하다.

“…….”

보상 내역에 이 묘약은 없던 건데. 아무래도 이걸 통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게 있는 것 같다. 승리 보상으로 받은 물건이니까. 틀림없을 거야.

“참, 자네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제리는 익숙한 말에 고개를 들었다. 몇 년 전에 한 대화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미래의 뒤에는 또 다른 미래가 있는 거라네.’

‘전 다 끝나면 결국 어떻게 되는데요?’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겠지.’

그래서 그때는 있어야 할 곳이 여기에 떨어지기 전 살던 곳이라 생각했다. 애초에 ‘한제림’이던 그가 태어난 곳이 거기였으니까. 그래서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죽음을 통해 돌아갈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느낌이 사뭇 다르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어서일까. 아니면 제게도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일까.

“제가 정해도 되는 건가요?”

왠지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다른 사람도, 건방진 시스템도 아니라 제리 자신이 정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속 여기 머무르기를 바란다면. 그렇다면.

“간절히 바란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그는 확실한 긍정 대신에 애매하게 돌려 말하며 히죽 웃었다. 제리는 잘그락거리는 약병의 표면을 매만지다 그것을 꼭 그러쥐었다. 간절히 바란다면….

“뭐가 뭔지 전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바라는 건 있어요.”

나는 앞으로도 계속 여기에 있고 싶어. 나에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앞으로도 계속 생겨날 테니까. 제리는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모조리 다 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리야는 제리 자신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애와 앞으로도 함께해주고 싶었다. 일리야 혼자만 두고 불쑥 사라질 수는 없었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네. 바라는 것도 많고, 욕심이 아주 많아.”

그는 그게 바로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읊조렸다.

“간절한 소망이 인간의 전부를 이룬다고 봐도 허언이 아니라네. 인간은 늘 꿈을 꿔. 그래서인가. 기묘하게도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허다하지.”

소망. 어쩌면 그게 바로 마법을 구성하는 원천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흘러가듯 중얼거렸다. 그가 손가락을 또다시 튕기자, 수많은 소음들과 목소리가 귓가에 쏟아 들어져 왔다.

왜인지 숨통이 트였다. 제리는 입을 벌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탑주님…?”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기만 하던 두 사람을 걱정스레 지켜보던 학장이 말을 걸었다. 마탑주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웃었다.

“그 묘약은 유용하게 쓰게. 아니, 확신이 있다면 꼭 쓰지 않아도 좋아.”

그는 엮은 약병을 들고 있는 제리의 손을 덥석 쥐었다. 손이 까슬까슬했다. 그냥 손을 쥐는 것만이 아니라, 그는 제리의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늘 그랬듯, 모든 것은 자네가 하는 바에 달렸어.”

얼마 남지 않았다네. 그는 바람같이 희미하게 중얼거리고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꼭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마지막으로 제리를 힐끔거렸다.

“……?”

마탑주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그가 내내 손에 끼고 있던 투박한 반지였다. 

* * *

[신비한 묘약. 아주 신비한 묘약이다.]

제리는 혼자 남은 기숙사 방에서 병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템 감정 마법을 사용해보아도 ‘아주 신비한 묘약이다.’라는 설명만 뜰 뿐, 구체적인 효능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게 대체 뭐지.

‘그 묘약은 유용하게 쓰게. 아니, 확신이 있다면 꼭 쓰지 않아도 좋아.’

결국 어디에 쓰이는 묘약인지, 마시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듣지도 못했다. 확신이 있다면 쓰지 않아도 좋다니. 어떤 것에 대한 확신을 말하는 거지? 이걸 마시면, 로그아웃이 뭔지에 대해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병 입구를 막고 있는 마개를 뽑았다. 퐁 소리와 함께 뽑혀져 나온 마개를 아무렇게나 옆에다 내려둔 제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헨리가 들어올 시간이 아니었고, 일리야 역시 전공 수업을 듣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만일 ‘사랑의 묘약’과 같이 다른 사람을 본다는 조건 하에 발동되는 것이라도 당장은 괜찮을 거다.

각종 기묘한 재료를 넣어 만드는 물약이 늘 그렇듯, 제리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끔찍한 맛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무슨 재료를 썼지?”

쓴 맛을 덜게 해주는 재료는 있어도, 냄새는 숨기지 못한다. 이토록 아무 향도 나지 않다니.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건지가 조금 궁금해졌다. 마탑주라 그런지 고작 물약 하나마저도 기똥차게 만드는구나. 제리는 병을 들어 입구에 입을 대었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물약을 꿀꺽 삼켰다.

“…물 아냐?”

아무 향도 나지 않을 때 의심을 해봤어야 했는데. 꼭 무엇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물처럼, 맛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효능도 들지 않는 것 같은….

[1시간 동안 신비한 묘약의 효능이 발동됩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여행? 무슨 여행? 문장을 모두 읽어 내린 직후, 제리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는 햇볕이 잘 드는 책상의 위에 철퍼덕 엎어졌다. 잠시 후 시스템창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자취를 감추었다. 제리의 등이 간헐적으로 오르내렸다. 겉보기에는 그저 얕은 잠에 든 것 같은 모양새였다.

* * *

그가 깨어난 곳은, 기숙사 안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장소였다.

“여기가 어디야?”

제리는 눈을 뜨자마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좁은 방이었다. 동그란 원 모양의 방 안, 한가운데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높은 곳에 달린 창에서 햇볕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너무 작아, 차라리 없느니만 못했다.

“……?”

몸을 일으키자 덮여 있던 얇은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마치 맨살이 쓸리는 듯한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내려다보자마자 제리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왜 아무것도….’

그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속옷 한 장조차도 말이다. 그의 아래는 여전히 털 하나 없이 매끈했다. 그나저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그 묘약을 먹고 잠들었을 뿐인데, 생전 보지도 못한 곳에 와 있었다. 제리는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올려 어깨에 둘렀다.

“…설마 나, 엄청 오래 잔 건가?”

그래서 여긴… 병실이라거나. 제리는 불안감에 입술을 씹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니, 병실일 리가 없다. 어느 병실이 볕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단 말인가. 심지어는 방 어디에도 문이 달려 있지 않았다.

제리는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딛었다. 잠든 사이에 누군가에게 납치라도 당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제리는 단편적인 정보조차 지금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는 손에 강화마법을 두르고 벽에 다가서 숨을 들이쉬었다.

퍽! 벽을 강하게 내려쳤다. 하지만 웬만한 돌이라도 깨어지는 마법을 사용했는데도 벽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웬만한 마법을 다 사용해 벽을 부수려 해봐도 소용없었다. 제리는 뒤로 물러나 침대에 걸터앉으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뭐야. 나 정말 갇힌 거야? 방 모양은 왜 둥글고? 왜 이렇게 좁아? 왜….’

보통은 방 모양을 둥글게 만들 리가 없을 것이다. 아예 건물 평면이 동그란 모양이 아닌 이상. 마치 탑과 같은…. ……탑? 그 순간 제리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내용이 하나 있었다.

(1) 배드엔딩 1 : 집착의 탑

일리야는 끝까지 감정을 자각하지 못하고 제리를 탑에 가둔다. 방해하는 자들은 레이븐 앤더슨에 의해 목이 잘려 내걸린다. 제리는 손바닥만한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그리워하며 말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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