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22/29)

#05_3

[제리, 자랑스런 내 제자에게.

나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요새 날이 차니 따뜻하게 입고 다니려무나. 벌써 여긴 기침소리가 역병처럼 돌고 있다. 젊은 놈들이 몸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는 건지… 쯧쯧.

무튼 그날은 정신이 없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단다. 그렇게 급히 돌아가게 되어 미안하구나.

(중략)

그나저나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게 있어 편지를 보낸다. 그-- 마탑주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니? 너와 아는 사이가 맞지, 그렇지?]

마탑주라는 글자 앞에 ‘그 인간’이라고 썼다가 그 위에 선을 몇 개 덧대어 글자를 급히 가린 자국이 보였다. 마탑주를 그 인간이라고 칭하는 사람을, 자신 이외에 처음 본 제리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숨기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헨리는 고개를 빼어 기웃거렸다.

“그냥 편지야.”

딱히 헨리에게 내용을 보여도 상관이 없어, 제리는 내용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헨리는 편지의 내용이 궁금한 건 아니었던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제리를 빤히 바라보다 창가의 안락의자에 털썩 걸터앉은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인간이 네게 무슨 짓을 했냐?]

바로 뒤에서 다시 ‘그 인간’이라고 마탑주를 칭할 거면, 왜 앞에서 그리 열심히 가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혹자는 감히 마탑주란 칭호를 입에 담기도 조심스러워하던데, 거리낌 없이 ‘그 인간’이라 칭하는 것을 보면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아니, 아는 사이인 것은 확실했으나 생각보다 가까운 관계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닌 것 같네. 스승님은 마탑 출신이니까.’

황가의 성을 버리고 다짜고짜 마탑에 당당히 걸어 들어간 붉은 눈의 괴짜 마법사, 그것이 시어스를 따라다니는 말이었다. 그는 제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에게서 마탑의 이야기를 들은 것도 고작 몇 번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된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가끔 시어스는 옛 기억에 잠겨 ‘나 때는 말이지.’ 로 회상의 운을 떼었다. 그는 마탑의 이야기가 아닌, 마탑에서 자신이 어떠한 연구를 했는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줄줄 늘어놓았었다. 마치 제리에게 ‘네 스승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란다.’ 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그래서 제리가 ‘와, 대단해요.’라고 성의 없이 대꾸하면 원하는 답을 내놓을 때까지 은근한 괴롭힘을 가했다.

‘씨…. 다시 생각하니까 짜증나.’

진짜 속마음을 이야기하라던 그가 ‘진실의 입’ 스킬을 다시 걸기 직전, 혼신의 연기로 제 스승을 찬양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제리는 갑자기 혈압이 올랐다.

[네게 멋대로 이상한 사술을 건 것은 아니겠지? 그라면 충분히 그럴만해. 점술이니 뭐니 하며 이상한 취미에 몰두해 있지.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으니 아마 여전할 테야. 

약을 써볼 곳이 없다고, 지나가던 마법사를 아무나 붙잡아다 털북숭이로 만들었었다. 그리고는 눈보라 치는 설원에다 내몰았단다. 결과적으로는 무척 따뜻하다 못해 땀이 날 정도라고는 했다만, 그만큼 지독한 사람이야. 게다가 언제 한 번은 날 좁쌀만한 크기로 줄여놓고는, 피곤하다며 이틀 내내 두 다리 뻗고 잠이나 자기도 했지…. 어찌나 성질이 나던지.]

“어쩐지.”

그런 사람 밑에서 배웠으니 스승님 성격이 그 꼴이 난 거구나! 제리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대회에서 받았던 묘약은 몰래 버리려무나. 그가 직접 만들었다니 절-대-로 믿을만한 게 못 돼. 그것도 아니라면, 내게 보내면 처리를 해줄 테니 동봉해 보내렴, 제리.]

“이미 늦었는데.”

그런 건 진즉에 얘기를 했어야지. 제리는 조그만 목소리로 시어스에게 들리지 않을 대답을 중얼거렸다. 이미 그 묘약이라면 세 개 중 두 개나 마셔버렸다.

‘그나저나 마탑주는 뭘 하는 사람일까?’

무슨 의도였는지, 처음엔 점쟁이로 접근을 해온데다 퀘스트에 얽히기도 했다. 그리고 ‘시스템’의 존재를 아는 것 같이 얘기했던 사람. 늘 그의 정체는 뿌연 안개로 감싸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별 해괴한 묘약을 주어, 10년 뒤의 일리야를 만나게도 해주었다.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은 지난 생을 살았던 자신이 생각지도 못할 만큼, 해괴한 일이 자연스레 벌어지기도 하는 곳이다. 말 그대로 ‘마법 같은’ 세상이었다.

‘마법이 실제로 있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그리 받아들이기 힘들지도 않았다. 제리는 무심결에 길게 늘어뜨려진 목걸이를, 정확히는 거기에 걸려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다 문득 생각했다. 시어스는 마탑 출신이다. 그리고 마탑주를 ‘그 인간’이라 칭하며 꽤나 가까운 사이였음을 드러냈다.

스승님이 마탑주와 아는 사이…. 그러니까.

“바본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지?”

마탑주가 두고 간 물건을,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해도 되는 것이었다!

* * *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렴.”

안면이 있는 궁정 마법사가 시어스를 불러오겠다며 제리를 등지고 유유히 걸어갔다. 미리 얘기를 해두지 않아 제리는 황궁 내부까지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제리는 바닥의 돌멩이를 가지고 툭툭, 발장난을 치며 무료하게 시간을 죽였다.

아무래도 그냥 편지만 보내기보단 직접 찾아와 전해주는 게 더 안심이 되었다. 그럴 일은 무척 희박하겠지만, 중간에 반지가 빼돌려지거나 분실될 것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일리야가 알게 되면 분명히 훔쳐갈 거야.’

장담할 수 있었다. 요즘 제리는 일리야가 반지를 호시탐탐 노리는 것을 몇 번이나 느꼈다. 이걸 가지고 뭘 하려는 건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리야가 그 노인에게 반지를 대신 돌려주고 오겠다던 것을 애써 무시했다. 그의 손에 마탑주의 반지가 들어가는 순간, 반지는 원 주인에게 돌아가기는커녕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내던져질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이건 다 줄리안이 한 말 때문이었다. 그가 한 말이 아니었다면 일리야는 이런 낡은 반지 따위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놈이 반지가 눈에 보일 때마다 ‘프러포즈를 받아 좋겠다’며 제리와 일리야를 번갈아가며 놀렸기 때문이다.

귀중품이라 기숙사에 놓고 다니기에도 불안해 매일 가지고 다니니 깐죽대는 빈도가 늘어났다. 제리는 내일도 줄리안의 발을 몰래 밟을 것을 다짐했다. 요즘 들어 자주 넘어지고 새똥까지 맞아 운이 좋지 않다는 줄리안의 일상에는, 제리가 몰래 개입하고 있었다.

그렇게 발끝으로 땅을 파며 조금 더 기다리고 있자, 등 뒤에서 시어스가 불쑥 나타나 제리를 놀래켰다.

“헉!”

숨까지 급히 들이쉬며 펄쩍 튀어 오르는 제리를 보며, 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놀릴 일도 아닌데 그는 제리의 행동을 과장스레 따라하며 즐거워했다. 그의 어깨 너머로는 시어스를 불러다준 궁정 마법사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

얼마나 싫었으면…. 제리 역시 입을 다문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놈의 장난기, 나이를 어디로 처먹는 건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느낌이다. 제리는 말없이 시어스를 불경하게 쳐다보았고, 그는 더 놀리면 삐져서 홱 돌아가 버릴 기세인 제리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화났니?”

“아뇨?”

“거짓말을 하면….”

씨발.

“조금요?”

곧바로 돌아오는 답에 그는 어깨까지 떨며 한 차례 또 웃었다.

‘또 시작이야.’

왜 웃는지를 모르겠다. 제리는 그가 웃음을 그치기를 묵묵히 기다리며 뒤에 있는 마법사와 공감의 시선을 교환했다.

“그나저나 도통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는 내 매정한 제자가 갑자기 웬 일로 찾아왔느냐?”

겨우 웃음을 그친 시어스가 웃음기를 머금고 물었다.

“아까, 스승님께서 보낸 편지를 받았거든요.”

“분명 어떠한 용건이 있을 줄 알았지. 그래서?”

“전해드릴 게 있어요.”

제리는 옷 안쪽에 들어가 있는 반지를 꺼내어, 목걸이를 풀었다. 시어스는 반지를 보자마자 입을 쩍 벌렸다. 마탑주의 것이라는 걸 바로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걸 왜 네가….”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읊조렸다.

“대회 날에 받았어요.”

“받았다고?”

“그런데 바로 사라져버려서 돌려드릴 겨를이 없어서….”

“…그걸 네게 직접 줬다고? 그분이?”

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똑부러지게 대답했다.

“전 마탑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스승님은 그분을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저 대신 좀 전해주실 수 있으세요?”

“…….”

제리는 말을 잇지 못하고 허어, 하는 소리만 내뱉는 시어스의 손을 잡아다 그 위에 반지를 살포시 올려놓았다. 시어스는 심각한 얼굴로 제리가 내미는 반지를 받아들어, 허공에서 이리저리 돌려가며 샅샅이 살폈다.

“제리.”

“네, 스승님.”

“넌 도대체 마탑주님을 어디서 알게 된 거냐?”

그에 대해 물어볼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받은 편지에서도 내내 궁금해하던 게 보였기 때문이다. 제리는 기억을 되짚어가며 막 아카데미에 입학했던 시기, 거리에 나왔다가 그를 처음 만난 이야기를 꺼냈다.

“점이라고?”

“네. 제과점 옆의 골목길에 천막이 세워져 있었어요.”

“…….”

그렇게 제리는 마탑주와의 첫만남을 이야기했다. 점이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는 것도 말하자 시어스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그게 다냐?”

“아니요… 그 뒤로도 몇 번….”

정확하지는 않지만 두어 번은 더 만났었으니까. 그리 친분이 두터운 사이는 아니지만, 두 번째 만났을 때 마탑주 역시 제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 그분이 마탑주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그렇겠지. 어느 누가… 허, 참.”

그는 허를 쯧쯧 차더니 혼잣말로 작게 읊조렸다.

“거리에서 점을 봐줬다니. 그것 참, 가지가지….”

…아는 사이는 맞지만 사이는 그리 좋지 못한 편인가? 그보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 자신보다도 그를 더 잘 알고 있어야 할 시어스가 거리에 나와 천막까지 치고 점을 봐주는 마탑주의 취미를 모르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나저나 제리, 미안하구나.”

“네?”

“나도 그를 본 건 10년만이라 대신 전해주긴 어려울 것 같단다.”

시어스는 허탈하게 웃으며 제리에게 반지를 다시 쥐어주었다. 10년…? 거의 모른다고 봐도 될 정도로 긴 세월이었다.

“나보다도 네가 그를 자주 만나는 것 같으니, 네가 전해주는 게 낫겠어.”

제리는 반지와 시어스를 번갈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마탑에…!”

마탑에 가서 전달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마저도 시어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왜요? 마탑은 한 번 나오면 못 들어가게 해요?”

“그건 아니다.”

“그럼 가서 전달해주면 되는 거잖아요. 네?”

시어스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마탑주나 되는 인간이 마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으니 문제지. 도대체 어디로 싸돌아다니던 건지, 원. …거리에서 남들 점이나 봐주며 놀고 있었다니.”

제리가 그를 몇 번이나 만났고, 그 중 한 번은 도박을 하던 것을 구해줬단 걸 들은 시어스는 무척이나 어이없어했다.

“스승님, 이해가 안 가요. 마탑주인데 왜 마탑에 안 계시는 건가요?”

“그건 나도 이십 년 가까이 늘 궁금했는데 대답을 여태 못 듣고 있구나. 다음에 만나면 그 인간에게 네가 한 번 물어봐주련?”

웃고 있었지만 말에는 뼈가 있었다. 제리는 다시 제 손으로 돌아온 반지를 그러쥐고는 눈만 깜빡였다.

“그분, 대체 뭐 하시는 분이에요?”

마탑엔 없는 날이 더 많을 정도라는데, 어떻게 계속 마법의 정점인 마탑주 자리를 꿰차고 있는지 몰랐다. 제리의 물음에, 시어스는 마탑주를 ‘그 인간’이라고 칭하며 그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오지랖이 굉장히 넓고, 남들 일에 참견하기도 좋아하며, 흥미 위주로 삶이 돌아가는 사람. 불확실한 점술에 미쳐 ‘오늘은 일을 하면 반드시 죽는 날’이라고 땡땡이를 치기 일쑤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면서도, 시어스는 마탑주의 실력만큼은 인정하는 듯해보였다. 그가 이룩한 업적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감추지 못하는 존경심이 묻어 나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제리. 그 반지는 어쩌면 돌려주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네?”

제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네게 직접 준거잖니. 한 번 준 것을 되돌려 받을 사람이 아니야.”

제리는 다시 낡은 반지를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장식은 투박하고 손가락 굵기도 맞지 않는데다 색도 마치 바랜 것 같이 조금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왜 여긴 이렇게 자신이 쓰던 물건을 주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그가 네게 그걸 줬다는 건….”

“……?”

시어스는 말끝을 흐리고는 싱긋 웃었다.

“그건 마탑주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징표란다.”

“네?”

그렇게 거창한 의미가 부여된 반지라면 더더욱이나 돌려줘야 옳았다. 애초에 그리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런 대단한 물건을 제게 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어스는 조용히 웃으며 제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지금 마탑주님께서도 목숨보다 소중하게 다루던 거다. 후에 그를 만난다면 직접 물어보려무나. 그걸 왜 제리 네게 준 건지.”

“…….”

뭐야, 씨발…. 목숨보다 소중한데 그걸 왜 나한테 줘?

‘프러포즈도 아니고 반지를 왜 줘?’

윽.

순간 줄리안의 짓궂은 헛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라, 제리는 저도 모르게 질색을 하며 몸서리를 쳤다.

* * *

반지는 결국 돌려주지 못한 채 다시 목걸이로 걸고 다녀야 했다. 일리야가 노리지 못하도록, 옷 안쪽 깊숙이 넣고 다니니 어느 순간부터 관심이 약간 끊긴 것 같기도 했다.

혹여나 거리에서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리는 종종 거리에 나가 길을 거닐기도 했다. 하지만 마탑주를 우연히 만나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점을 봐주던 천막이 서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목숨보다 소중하다던 반지를 뜬금없이 내게 왜 준 거야?’

본인을 만나 묻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마탑주인 주제에 마탑에 처박혀 있기는커녕 싸돌아다니는 게 취미인 그가, 지금은 어디에 가서 있을지가 가장 의문이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제리는 곧 일상생활로 관심을 돌렸다. ‘엔딩’까지 반 년도 채 남지 않았다. 굳이 반지 일이 아니더라도 당장 신경 쓸 일은 차고 넘쳤다. 그의 하루는 늘 바쁘게 돌아갔다.

“제리, 그게 재밌어?”

제리를 내내 힐끔거리던 헨리가 넌지시 물었다.

“그냥 읽는 거지. 재미까지야.”

“그… 늘 궁금했는데, 넌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인 거야?”

“…….”

그가 보기에도 자신은 필사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지금은 꽤 많이 여유를 찾은 건데. 제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넌 이미 수석 졸업이 확정된 거잖아.”

제리는 한참을 생각하다 역으로 물었다.

“넌 내년에 졸업하면 어떻게 할 셈이야?”

“어, 나…? 글쎄. 시렌 형이 같이 사업하자고 졸업하고 오라고 하기는 했는데, ……영 아니다 싶으면 고향에 내려가서 마법약을 만들어 팔 거야.”

“왜?”

“내가 그나마 재능 있는 게 마법약 분야니까? 그리고 솔직히, 조금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해.”

헨리가 볼을 긁으며 말을 마저 이었다.

“나는 졸업하고 나면 돈을 많이 벌 거야. 그래서 어렸을 때 날 괴롭혔던 미첼의 코가 납작해지도록,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어. 그리고 또… 내 여동생은 그림을 그리고 싶대. 내가 봐도 그 앤 좀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아직 열 살인데도 뭔가 비범하다는 게 느껴져. …그런데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잖아. 눈치 보게 하고 싶지 않아. 동생들은 부족함 없이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어.”

남들과는 달리 평범한 평민 집안에 불과한 헨리는 더듬거리며 나름 구체적인 목표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제리는 그런 헨리가 조금 부러웠다. 하고 싶은 게, 목표가 무척 명확해 곧바로 대답할 수 있는 그가 말이다.

“나도 헨리 너처럼 하고 싶은 게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

제리는 팔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헨리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의아한 눈빛이다.

“무슨 뜻이야?”

“난 좀 걱정이 많아. 남들은 유난이다 할 정도로 엄청 사소한 것도 하루 종일 생각해야 직성이 풀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반평생을 살았으니까.”

주변의 모든 것들을 그저 사물과 대상으로 생각하게 하는 환경 속에서, 제리는 남들이 제게 보이는 호의마저 설계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깊은 확신이 생겼다. 혼자 만들어낸 확신이 아니었다. 마음을 열고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인정하기 시작하니 제 안의 무언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도 하고 싶은 게 있기는 해.”

어찌 보면 사소한 바람이지만 실제로 이루어내기는 꽤나 어려운 것.

“그게 뭔데?”

“그건….”

제리는 그냥 행복하고만 싶었다. 내일도, 그리고 먼 미래까지도 크고 작은 행복이 가득 채워져 있으면 좋겠다고 매일 밤 소원했다.

“비밀이야.”

제리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씩 웃었다. 헨리는 억울한 듯 콧잔등을 씰룩이며 왜 말 안 해줘, 하고 투덜댔다. 여전히 작은 불안은 존재했지만, 이 세상에 불안 하나 짊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제리는 흘러가는 시간을 그저 허투루 보내지 않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열린 창문을 타고 넘어온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리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여기서 더 걱정해서 뭐 하겠어. 현재를 살면 되는 거지.’

* * *

“―마법학과 졸업생 대표, 제리 루트!”

제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면을 향해 걸어 나갔다.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천장이 높은 중앙 홀을 지나 단상 위로 올라가는 동안, 오만 감정이 다 들었다. 약간의 허탈감과 아쉬움, 뿌듯함, 그리고 기대감. 작년처럼 마탑주가 이 자리에 참석했다면 당장 반지도 전해줄 수 있어 좋았을 텐데, 작년만이 예외였는지 올해는 아는 얼굴들이 다였다.

제리는 검푸른 겉표지가 딱딱한 졸업장을 받아들었다. 높은 단상 위에 서서 뒤를 돌아보니 대강당 내의 사람들 대부분이 제리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물론 저들끼리 얘기에 심취해 쳐다보지 않는 사람도, 그리고 이 과정이 그리도 지루한지 대놓고 하품을 쩍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제리가 고마움을 표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를 때까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인사말을 뱉어내었다. 

어젯밤 급히 생각해낸 형식적인 연설문이었지만 나름대로 구색을 갖추고는 있는지, 부모님과 형들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리야는 붉은 눈을 또렷하게 뜬 채로 제리가 한 마디씩 할 때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그게 거슬리는지 시렌이 눈썹을 까딱거리며 일리야를 흘겨보았다.

제리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몇 번이나 참아냈다.

[졸업생 대표로서 멋진 연설을 해냈습니다. 당신은 말로써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명성 +5]

형식적인 박수갈채 소리를 들으며 제리는 아래로 걸어 내려왔다. 단상 아래로 내려온 제리는 친구들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가족들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 로베인은 곧바로 조이에게 당겨 앉으며 제리의 자리를 비워주었다.

“잘했다, 제리. 이 아버지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내 아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제리의 부모님들은 손으로 찔끔 새어나온 눈물을 훔쳤다. 만감이 교차하는 모양이었다. 제리는 그저 착한 아이처럼 말갛게 웃으며 졸업장을 품에 꼭 껴안았다.

이어지는 졸업식 절차가 모두 끝나자, 단상 밑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웅장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성당과도 같은 대공간을 멍하게 훑던 제리는, 일리야와 눈이 마주쳤다. 화려하게 늘어선 창문들 틈으로 밝은 햇살이 스며들었다. 일리야의 머리카락이 보석과도 같이 반짝였다.

[아카데미 수석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체력:190/200, 근력:105, 지능:200, 매력:100, 스트레스:10/100, 검술:1, 마법:595]

“…….”

능력치는 얼추 다 찬 것 같네. 제리는 창을 옆으로 대충 치워내곤 아인스가 건네주는 새빨간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사랑하는 내 동생, 졸업 정말 축하해.”

그는 제리보다도 환히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에 쌍둥이들은 ‘우리 때는 그런 말 해주지도 않았으면서. 제리만 동생이라는 거야, 뭐야.’라며 이간질을 하듯 다 들리게 쑥덕거렸다. 아인스는 늘 그랬듯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인파에 치이는 것은 싫어 제리는 조금 더 앉아 있는 편을 택했다. 분위기에 들떠 서로 졸업을 축하해주는 이들 틈에 얌전히 앉아 있던 일리야는, 슬그머니 일어와 제리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로베인은 일리야를 보자마자 다리를 넓게 펴고 앉아 빈 자리가 없다는 듯 비열하게 웃었다.

“형, 뭐 해?”

제리가 넌지시 물었다. 하지만 로베인이 그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 일리야는 신경도 쓰지 않고 둘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뻔뻔하게 주저앉는 일리야에, 아인스의 눈빛이 마구 떨렸고 로베인과 조이 쌍둥이들은 눈가 근육을 씰룩였다.

“자, 잠깐!”

큰 소리를 내지른 그를 돌아보았다.

“너희 이리로 와.”

아인스는 비장한 얼굴로, 로베인과 조이의 손목을 하나씩 꽉 쥔 채 일으켰다. 쌍둥이들은 동시에 ‘뭐야?’, ‘뭔데?’라며 손을 잡아 빼려 했다.

“아인스, 어딜 가니?”

“저희들 먼저 나가 있어요, 어머니. 제리 너는 ……친구들이랑 인사 좀 나누다 나와. 마지막 날이잖니?”

그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고는 급히 자리를 옮겼다.

“이거 놔!”

“형! 제리, 뭐 해? 너도 빨리 따라나와!”

똑 닮은 두 사람이 악을 내질렀지만 의지에 가득 찬 아인스의 힘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모님은 어리둥절해하다 그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

“…….”

제리는 아인스가 좀 더 좋아졌다. 부탁한 적도 없는데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훼방꾼들까지 모조리 끌고 나가주다니. 덕분에 일리야와 둘만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제리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제자리로 한 채 가족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멍해 보이는 일리야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졸업 축하해, 일리야.”

“…너도 축하해. 아깐 멋있었어. 계단에서 발을 헛디딘 것만 빼면….”

“…….”

“안 다쳐서 다행이야.”

그건 또 언제 봤담.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했는데. 제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곧 원래 하려던 말을 꺼냈다.

“우리 집이 좀 정신없지?”

“아니야, 제리. 오히려….”

그는 끝말을 흐리며 이내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짐작조차 안 갔다. 제리가 몇 번을 더 재촉하듯 묻고 나서야 일리야는 말을 마저 이었다.

“…보기 좋았어.”

제리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이런 말을 왜 망설였는지 모른다.

“내가 좋은 게 아니고?”

“그것도 맞지만… 조금 부러워져서….”

“부러워? 왜?”

제리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일리야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실수야. 그, 부럽다기보다는.”

그는 조금의 간극을 두고 말을 끊었다. 입술이 움찔거린다. 그는 곧 미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뭐가 다행인데? 우리 둘만 있을 수 있어서?”

제리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일리야는 그게 아니라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손을 뻗어,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해주며 말했다.

“제리, 네게 집이 되어주는 가족이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야.”

“…….”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일리야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볍게, 웃으며 그 말을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어 제리는 숨을 집어삼켰다.

‘…집.’

일리야에게 ‘집에 돌아가는 거야?’하고 물으면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가기 싫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일리야는 스스로, 황궁을 단 한 번도 ‘집’이라고 칭한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왜 그러느냐 물을 이유는 느끼지 못했다. 제리 자신이 일리야가 자라온 환경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들 널 많이 아끼는 것 같아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부럽다는 말은 아마도 실수로 나온 게 아닐 것이다. 정말 잠시나마 제리를, 그리고 그의 가족을 부러워한 것이다. 일리야는 혼자 있는 시간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만큼 외로움을 잘 타는 그는, 기나긴 계절 방학이 가장 싫다고 말했다.

제리에게는 물렁하게 굴지만 일리야에겐 늘 묘하게 선을 긋는 그의 스승마저, 일리야에게 집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마음껏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사람조차 일리야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

가끔 어린 시절의 일리야가 평범하게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면 어땠을지를 상상한 적이 있었다. 지금과 크게 다른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가끔 보이는 마음의 그림자 없이 늘 해사하고 사랑스럽기만 했을지 모른다. 지금보다 눈치도 훨씬 덜 볼 테고, 제게 덜 맹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난 시간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이제 와서 그의 결핍을 동정하고 안타까워하고, 지난날을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일리야.”

그의 이름마저 눈처럼 희고 맑게 느껴진다. 새삼스럽게 일리야라는 이름이 입에 감겼다.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뭐가 그리도 기분이 좋은지, 그의 입매가 올라갔다. 화려하게 만개한 장미와 같이 붉은 눈동자가 제리를 향했다.

“불렀어…?”

일리야는 싱그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가 손을 뻗어 제리의 뺨을 감쌌다. 커다란 공간에 관악기 소리가 성스럽게 울려 퍼졌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로로 기다란 창이 꼭 닫혀 있지만 내내 어깨를 움츠리고 있어야 할 만큼 찬 기운이 역력했다.

하지만 전혀 춥지 않았다. 제리의 겨울에 일리야라는 봄볕이 찾아들었다. 그래서 제리도 일리야에게 봄 같은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다. 한여름 날의 나무그늘 같은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다.

“너 돈 많아?”

“갑자기 왜?”

“우리 나중이 되면 같이 살 거잖아. 그러니까 집을 살 돈은 있어야지.”

“…응?”

제리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그리고 일리야의 손에 뺨을 비볐다.

“같이 살아, 일리야.”

“…….”

“너랑 나만.”

네 바람대로 인적 드문 숲 속의 오두막이든, 하루에도 수백 명이나 지나치는 주택가든, 경치 좋은 바닷가의 집이든…. 사실은 어디든지 좋아. 어딜 골라도 괜찮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잠깐의 침묵이 찾아들었다. 뺨을 감싼 일리야의 손이 딱딱하게 굳었다. 일리야는 감탄사조차 내뱉지 못한 채 제리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놀란 표정이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몰라. 더 자세히 말해줘.”

일리야의 눈빛이 일렁였다. 새빨간 눈동자부터 촉촉한 물기가 돌기 시작했다. 제리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싸쥔 일리야의 손에 제 손을 얹어놓았다. 그의 손을 끌어와 제 가슴에 얹어두었다. 손끝을 통해 콩콩 뛰는 심장박동이 느껴질 것이다.

“너랑 내가 가족이 되는 거야.”

“…….”

일리야는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얼어붙었다.

“시끄러울 수도 있어. 너도 알다시피 내가 잘못 키워서 형들이, 특히… 그 두 명이 철이 좀 없거든.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어.”

작게 툴툴대며 불평하던 제리는 일리야의 손에 기댄 채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네게도 가족이 되어줄 거야.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꼭 그렇게 될 거야, 일리야.”

“…….”

“날 잡으면 순식간에 네게도 형이 세 명이나 생기는 거라고.”

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어떻게 알았겠는가.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던 어린아이일 때부터 지켜봐온 일리야에게, 자신이 살다살다 이런 말을 다 하게 될 줄. 제 기준으로 봤을 때 끔찍하게도 감성적인 말을, 제 입을 통해 직접 내뱉는 미친 짓을 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하지만, 일리야.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나 또한 널 사랑하니, 이 정도 말을 해도 이상한 것은 없겠지? 분명 그럴 거다.

“내가 너의 가족이자 집이 되고 싶어.”

제리는 제 가슴에서 손을 떼어내 일리야의 심장 가까이 손을 얹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조리 전해졌다.

“같이 살자.”

“…….”

그는 말 대신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울음을 참으려는 것처럼 일리야의 입매가 일자로 꾹 다물렸다. 아랫입술도 꾹 깨물어 말려들어가 있었다. 눈가가 잘게 경련했다. 그가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오른쪽 눈가에 고인 투명한 눈물이 덩어리처럼 툭 떨어져 내렸다.

띠링.

[일리야 디페리우스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일리야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은 다름이 아닌, 행복의 덩어리였다.

* * *

제리의 생일날 아침이었다. 로베인은 아침이 되자마자 제리를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제리에게 가르쳐줄 게 있다며, 숨겨둔 샴페인 병을 꺼내어 보였다.

“……!”

제리는 몸을 벌떡 일으켜 이불을 확 걷어냈다.

“잠이 확 깨지?”

“내 거야?”

그 누구도 장난으로라도 제리에게 술 한 모금을 준 적이 없었다. 제리가 눈을 빛내자, 로베인이 크흐흐, 하는 비열한 웃음소리를 내며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는 그대로 은밀하게 쑥덕거렸다.

“기대해, 제리. 이건 아주 끝내주는….”

“로베인.”

“……?”

“어딜 그렇게 살금살금 가나 했더니. 이건 압수다.”

그의 뒤에서 불쑥 나타난 아인스가 손을 뻗어 샴페인 병을 빼앗아 들었다. 로베인은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순간적으로 표정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내놔! 그건 제리…!”

“제리는 안 된다고 했지? 술이 안 받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

이제 엄청나게 오래 전이 되어버렸지만, 전생의 제리는 술이 굉장히 센 편이었다. 적당히 취해 기분이 붕 뜨는 것도 좋았다. 자신보다 먼저 술에 취해 흐물거리는 친구들에게 ‘나약한 새끼들.’이라 혀를 차며 우쭐거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몰래 줄 생각도 하지 마. 제리에게 호흡곤란이라도 오면 넌 그날로 내게 죽은 목숨이야, 로베인.”

“형….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호흡곤란은.”

로베인이 애타게 그를 불러도 아인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리는 언제 눈을 빛냈냐는 듯 눈만 깜빡이며 아무것도 모르는 시늉을 했다.

‘시발, 간만에 술 좀 마셔보나 했는데.’

물론 아쉽기는 했지만 기회는 오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 많이 마실 생각은 없다. 호흡곤란이고 나발이고, 아직 입에는 대보지도 못 했는데 그리 어림짐작을 하는 게 더 이상하다. 딱 한 잔만, 아니면 한 모금만 마셔도 되잖아…? 제발 한 방울이라도.

“안 돼, 제리.”

아인스는 샴페인 병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막내 동생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

제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데에서 묘하게 단호한 아인스는 한숨소리에도 꿈쩍 없이 몸을 돌렸다. 로베인은 ‘형은 아카데미서부터 몰래몰래 마셨으면서, 왜 저래.’ 하고 중얼거렸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난 뒤, 제리는 저택에 돌아와 모처럼 여유로운 나날을 보냈다. 가끔 거리에 나가면 그를 알아보는 사람을 한두 명 정도 만나고는 한다. 그들 가운데는 알고 지내던 교수들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듯한 이들도 몇 있었다. 그들은 제리를 눈여겨보고 있다며 칭찬의 말을 쏟아 부었다.

이는 꽤나 민망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특히 형들이나 일리야와 함께 있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더더욱 그랬다. 꼭 이름 모를 이들이 앞으로도 기대한다거나 시간이 비면 꼭 연락을 달란 말을 건네고 돌아서면, 대단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리가 그 자리에서 뭐라고 했냐면….”

“…….”

아침 식사자리, 제리는 꾸역꾸역 빵을 입 안에 욱여넣으며 조이의 말을 애써 흘려 넘겼다. 저게 뭐라고 아인스 형이 열심히 듣는 태도를 취한다. 표정만 봐서는 대단한 일이라도 해결하는 듯 무척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할 짓도 없는 놈들 같으니…. 내 술병이나 돌려줘.’

늘 그렇듯, 제리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던 그때였다.

[18세가 되어 연령 제한이 해금되었습니다. 단어 필터링 기능이 해제됩니다.]

“……?”

제리의 턱을 타고 우유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칠칠맞게 뭐 하는 거야? 빨리 닦아.”

제리는 로베인이 내민 냅킨을 얼떨떨하게 받아들었다. 

“…….”

그런데 단어 필터링 기능이라니. 그런 게 있던가? 애초에 연령 제한이 걸려 있다는 것조차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참 전에는 목 아래로 모든 털이 싹 밀려 나간 데다가, 정기적으로 거리에 나타나곤 하는 비밀상점에서는 별 괴상하고 해괴망측한 물건을 다 보았다.

‘……물음표로 표시된 설명이 있기는 했는데….’

하지만 그딴 것으로 가려질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바니 귀. 매력이 오르며 ??가 선다.’처럼 단어를 가려두니 더 이상하게 보였다. 제리가 ‘단어 필터링’ 기능이 사라진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은 고작 몇 시간 후의 일이었다.

* * *

지금쯤 올 때가 되었는데.

제리는 창을 열고 수를 헤아리고 있었다. 겨울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휘날릴 때마다 제리는 어깨에 두른 무거운 털망토를 추스렸다. 그때, 창틈이 크게 벌어졌다. 바닥에 발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더니 일리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창문 왜 열고 있어? 감기 걸려, 제리. 춥잖아….”

그는 열린 창을 닫으며 말했다. 코끝이 빨갰다. 황궁에서 바로 이동해 온 게 아닌 것 같았다.

“생일 축하해.”

“고마워. 그런데 어디 다녀왔어?”

제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그리고 손을 들어 빨개진 일리야의 귀를 덮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귓등을 꾹꾹 누르자, 차가운 귀를 덥히는 체온에 일리야가 숨을 삼켰다. 귓바퀴를 타고 내려온 손가락이 귓불까지 만지작거렸다. 그게 그리도 간지러운지 일리야의 속눈썹이 움찔거렸다. 

“일리야, 밖에 오래 있었어? 뭐 하러?”

“…….”

옷에도 냉기가 배어 있었다.

“응? 어디 갔다 온 건데?”

일리야의 목에 손등을 가져다대었다. 기껏 선물한 목도리는 또 어디다 팽개치고 다니는 건지 목덜미까지 차가웠다. 온 몸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안 그래도 눈처럼 새하얀 그의 뒤로, 눈으로 뒤덮인 한겨울의 풍경이 펼쳐졌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떨릴 만큼 추웠다. 벽난로 앞에라도 데려가 몸을 녹이는 게 좋겠다.

“……제리, 이제 그만….”

단단한 손이 불쑥 올라와 제리의 손목을 잡았다. 귓등이 아직도 붉었다. 세상에, 손은 또 왜 이렇게 찬 거야. 오기 전에 어딜 갔다 온 건지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있다. 제리는 그의 손을 잡아 호오, 하고 입김을 불었다. 손끝이 움찔거렸다.

[일리야 디페리우스가 당신에게 발정합니다.]

“…….”

“…….”

바, 발정……?

“…….”

눈앞의 반투명한 창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빤히 들여다보던 제리는 고개를 들었다. 일리야는 당황하다 고개를 홱 돌렸다.

“오해야.”

“웃기지 마.”

“오해라니까….”

“웃기지 말라고 했지! 왜 말소리가 작아져!”

“제리, 내 말 좀….”

제리는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은 없는데? 일리야는 제 바지춤을 힐끔거리는 제리의 턱을 잡아 다시 들어 올렸다.

“……하아….”

그리고 뭘 잘했다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만지니까 그렇지. 너도 이제 성인인데 왜 모르는 척이야….”

“그게 아니라, 네가 발, 발저…!”

“너무해, 제리. 왜 내 마음 읽어?”

“내가 원해서 읽은 게 아니잖아!”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안 그러는 게 더 이상한 거지….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난 너만 보면 서.”

“…….”

그건 알고 있다. 밤마다 몰래 올라 있는 호감도는 이제 별 생각 없이 닫을 정도의 내공은 되었다는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발정’이라는 적나라한 단어에 제리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보여줄까?”

“필요 없어!”

“당장 세울 수도 있는데….”

“안 물어봤어!”

“…반응이 왜 이래? 아직 손은 대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지금 내게 손댈 거야?”

꽉 그러쥔 주먹을 보이며 묻자 일리야는 딴청을 피웠다.

“……난 아직 힘이 펄펄 넘치는 혈기왕성한 한창때인데…. 봐줘.”

“혈기왕성? 한창때? 그 말 어디서 배웠어?”

“책에서.”

“어떤 책? 또 이상한 책 봤지?”

“……생일 축하해, 제리….”

“말 돌리지 마. 이상한 책만 골라 보는 거 그만하라고!”

일리야에게는 대체 누가 사나, 하는 책을 골라서 사는 재주가 있었다. 일리야는 제리의 말에 생일을 축하한다고 계속 얼버무렸다. 빙빙 맴도는 대화를 주고받다 지친 제리는, 벽난로 근처로 일리야를 이끌었다.

“됐다, 앉아서 몸이나 녹여.”

“응.”

일리야는 그제야 희미하게 웃었다. 벽난로 앞에 그를 앉힌 제리는 떨떠름하게 일리야를 내려다보며 툭 쏘아붙였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너 은근 엉큼해. 알아?”

“몰라…. 선물이나 받아.”

그는 부끄러워하며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제리를 보지 않고 불쑥 내밀었다. 새빨간 실링으로 예쁘게 봉인된 편지 봉투였다.

“뭐야?”

“윈제드 행 기차표야.”

윈제드는 여기서부터 일주일이나 걸리는, 머나먼 북 대륙의 지명이었다. 높은 설산 아래 위치해 매일 매서운 눈 폭풍이 분다는 곳. 스쳐 가듯 그곳에만 산다는 눈 여우를 보고 싶다 말한 걸 기억하는 모양이다. 제리는 말없이 빨간 실링으로 봉인된 봉투를 바라보았다.

“언제 출발하는 건데?”

“삼 주 후에. 그때면 지금보단 날이 좀 더 풀릴 테니까….”

날이 풀리는 게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윈제드는 일 년 내내 겨울인 곳이라 언제 가도 똑같을 텐데.

“그리고 윈제드는 멀어서 너 혼자 가려면 힘들잖아. 네가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내뱉은 일리야가 뒤늦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있으면, 같이 가자고 말해봐.”

“응.”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빨리….”

일리야는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려 제리를 힐끔거렸다. 나랑 가자고 말해줘, 하는 속마음이 다 들렸다. 제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같이 여행 가자는 말을 하기가 어려운가?

“일리야, 나랑 같이 갈래?”

“나?”

“…….”

눈을 크게 뜨고 묻는 게 아주 가증스러웠다.

“그러지, 뭐….”

오늘부터 준비해야지…. 일리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선심 쓰듯 말한 것치고는 묘하게 신이 나 보였다. 꼬리라도 달려 있었으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

장작이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제리는 일리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불꽃이 타오르며 그의 얼굴에도 붉은 기가 비쳤다.

그날 밤엔 오랜만에 꿈을 꿨다. 왜 이런 꿈을 꿨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이상한 꿈이었다. 꿈속의 배경은 제리의 방이었다. 일리야가 나왔고, 제리 자신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다. 꿈에서의 일리야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채 울고 있었다.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입술만 꾹 다문 채 눈물만 뚝뚝 흘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서러워 보여 가슴이 미어졌다.

* * *

[이벤트 발생! 엔딩에 대하여.]

이른 아침, 부스스하게 눈을 뜬 제리는 눈앞에 뜬 창을 읽으며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엔딩이란 단어가 그대로 다가오지 않고 글자의 조합처럼만 느껴졌다. 엔딩, 엔딩…. 한참 그 단어를 읊조리던 제리는 순식간에 잠이 달아나버렸다.

“엔딩?!”

Quest. 엔딩에 대하여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황궁 앞의 호수로 이동해주세요. 누군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한 : 11시간 59분

성공 보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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