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23/29)

#05_4

커다란 병원에 들어온 그는 비척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람과 반쯤만 사람인 것, 그리고 사람이 아닌 것들이 가득했다.

“이봐, 뭐 찾아?”

로비에서 멍하게 서 있던 그에게, 오지랖 넓은 영혼이 얼쩡거리다 말을 붙였다.

“누구세요?”

“나? 귀신이지!”

“…….”

“이야, 너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내가 여기서만 십 년을 있었거든? 웬만한 놈들보다 내게 물어보는 게 더 빠를 거다. 그러니 당장 뭐든 물어봐! 어디서 왔냐? 새로 들어온 놈인가?”

남자는 쨍알쨍알, 말이 많았다. 멍한 정신이 이제야 조금 드는 것 같았다.

“어제 버스 사고가 났다고… 했는데.”

“아하, 그거 알지, 알지. 장례식장이냐? 따라와!”

영혼이 된 채, 다른 영혼에게 손목을 붙잡힌다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체온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꼭 시체 같았다. 그는 팔랑거리며 다른 동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제리를 안내하며, 살아 있는 사람을 확 스쳐 지나가면 사람이 순간적으로 오한이 돋아한다는 ‘귀신으로서 꼭 알아야 할 지식’까지 알려주었다.

“영기가 강해지면 나중엔 산 사람한테 발도 걸 수 있고 때릴 수도 있어.”

“…….”

“너무 자주하면 겁을 집어먹고 무당을 불러서 문제지만, 선만 잘 지키면 그 재미가 은근히 쏠쏠하다니까?”

“…….”

“네가 여기 계속 남아 있을 거라면 참고가 될 거야. 그런데 보니까 안 그럴 것 같네.”

제리는 그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지하 1층의 장례식장 복도 끝, 팔에 완장을 차고 표정 없이 서 있는 그의 형이 보였다.

“저게 너네 가족이냐?”

제리는 발걸음을 멈춰섰다. 잊을 수 없었다. 제리로 살면서도 단 한순간도 잊고 산 적이 없었다. 늘 제게 장난만 치던 한제현의 얼굴은, 우울에 젖어 있었다.

“…형.”

“어어, 울지 마. 잡귀 꼬인다. 그럼 진짜 귀찮아질 거야.”

제리는 가까스로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웬만해선 남아 있지 말고 떠나라며, 처음 만났던 영혼들이 한 말을 그대로 하고는 뒤돌아 돌아갔다.

저 앞에 보이는 형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사람들을 피해갈 힘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들을 관통해 지나가자, 순간적으로 등줄기가 곤두서는 느낌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故 한제림 님>

기분이 이상했다. 한참 제 이름 앞에 붙은 글자를 들여다보던 그는 몸을 돌려 빈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십 송이의 국화꽃들 사이, 스무 살이 되자마자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찍었던 여권사진이 걸려 있었다. 십 년이나 지나서 보는 제 얼굴이었다. 순간 그리운 감각이 마음을 적셨다.

“저건 못 나온 사진인데….”

차라리 고등학교 때 졸업사진을 쓰지. 그는 실없는 소리를 하며 쓰게 웃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보자마자 멍청해 보인다며 놀렸던 사진이었다. 어색하게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린아이의 영혼 말대로, 제 장례식을 보는 것은 다시는 못해볼 경험이었다.

친구들도, 친척들도,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의 사장도 다녀갔다.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사람들이 우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접객실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한 채 밥을 훔쳐 먹던 이름 모를 영혼들은, 이곳의 주인인 제리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다 투덜거리며 옆 빈소로 자리를 옮겼다.

“제림아….”

“왜 자꾸 불러.”

“엄마는 어떡해, 엄마는… 너 없이 어떡해.”

“울지 마. 난 다 묻고 살았는데… 엄마도 내 생각 많이 하지 마.”

꼬박꼬박 답을 해도 그녀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조문객들을 담담히 맞는 듯했던 한제현도 화장실에 가 세수를 하는 동안 눈물을 쏟아냈다.

“흐으….”

“야, 한제현.”

“…….”

“질질 짜기나 하고.”

이렇게 부르면 평소엔 형이라고 부르라고 머리부터 쥐어박았잖아. 그런데 왜 지금은 아무 말도 안 해. 제리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한제현이 휴지에 코를 푸는 소리가 화장실에 울려 퍼졌다.

“제림아, 보고 싶어.”

“…나도 보고 싶었어, 형.”

“하아….”

“아, 울지 말라고.”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었다. 어릴 때에는 그리움에 혼절할 때까지 엉엉 울었고, 가끔 생각날 때면 그들을 가슴에 묻었다. 그렇게 해야만 제리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는 내내 전해지지 않는 말을 전했다. 가족들의 감정에 동화되어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고, 내내 괴롭히기만 했으면서 자신과 친했던 척 가증을 떠는 알바 매니저에게 욕을 하며 머리를 퍽퍽 때렸고, 착잡해하는 친구들 틈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에 끼어드는 시늉도 했다.

그리고 이틀째 되던 날, 새하얀 빛으로 된 문이 생겨났다. 제리는 곧바로 직감했다. 저기로 가면 더는 이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사랑하는 엄마 아빠와 원수같이 싸웠지만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형, 그리고 다시는 가질 수 없을 둘도 없는 친구들까지….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상실을 딛고 일어선다. 저들은 이따금씩 제 생각이 날 때마다 눈시울이 시큰해질 것이다. 하지만 곧 무뎌지겠지. 결코 잊는 것이 아니다.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죽은 자는 산 자와 함께할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머무르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제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등지고 환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따뜻한 빛이 온몸을 감싸자 곧 졸음이 몰려왔다.

* * *

편안하고 포근했다. 그에게 순간적으로 밝은 빛이 쏟아진다. 숨이 확 트였다.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각에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제 의지가 아니었다.

수많은 ‘제리’의 기억이 쏟아졌다.

눈보라가 치는 겨울이었다. 유독 추운 날, 예정일보다도 일찍 태어난 아이는 세상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숨을 쉬지 않았다. 여럿이 달려들어 가까스로 목숨을 붙여놓은 백작 가의 막내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내 잠을 자고 무럭무럭 자라던 아이는, 날이 좋은 날 문득 눈을 떴다. 말간 다갈색의 눈동자에 그의 가족들이 가득 담겼다.

“네 이름은 제리야.”

제리의 시야에 앳된 아이가 들어온다. 아인스는 어깨를 딱딱하게 경직시킨 채 긴장한 얼굴로 읊조렸다. 동생에게 이름을 붙여주느라 무척 긴장한 첫째아들을 보며 침대에 누워 있던 백작부인이 간지럽게 웃었다.

“안녕, 제리?”

그녀는 작은 손에 손가락을 얹어놓으며 속삭였다. 제리는 부리 같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신기하게 눈을 끔뻑였다. 아인스의 어깨를 감싼 백작이 따뜻하게 웃는다.

“건강하게만 자라주렴, 제리.”

제리는 눈을 깜빡였다. 제리, 제리, 제리. 늘 수도 없이 불렸던 이름이 크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야. 너 언제 걸을 거야?”

빨리 커서 놀자. 내가 업어줄게. 고작 여섯 살인 조이가 앙증맞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물었다. 로베인이 옆에서 침대 난간을 잡은 채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이. 아직 아기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걸으려면 아직 멀었어. 짐짓 어른스러운 시늉을 하며 아직 볼이 통통한 아인스가 속삭였다. 쌍둥이들은 형이 또 자신들을 괴롭힌다며 백작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얄밉게 혀를 내밀어 보이는 것은 덤이었다.

제리는 잔병치레가 잦았고 몸이 약했다. 조금만 달려도 숨이 찼고, 가벼운 감기에만 걸려도 열이 펄펄 끓어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래도 아이는 무척 밝았고, 형들을 잘 따랐다. 아인스는 처음 생겨본 ‘진정한 내 동생’이라며 제리를 대놓고 편애했다. 쌍둥이들은 제리를 질투하기는커녕 동생을 독차지하지 말라며 아인스를 골탕먹였다.

그러던 제리가 네 살이 되던 해, 제리는 모처럼 좋은 날씨에 쌍둥이들의 손을 잡고 놀러 나갔다 연못에 빠지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사에 의해 구해지기는 했으나, 제리는 그 이후로 일 년이나 침대에 누워 죽은 듯이 잠만 잤고, 백작저엔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건강하게만 자라주렴, 제리.’

겉돈다고 생각했던 것도 한순간에 불과했고, 어느 순간부터 너무 당연하게 자신을 제리와 동일시해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나, 어느 백작가의 사랑이 넘치는 다정한 부부 사이에서 다시 태어났다.

나는… 누구지?

‘네 이름은 제리야.’

그는 단 한 순간도 제리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모든 기억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모두 제리, 자신의 기억이었다.

‘나는….’

문득 눈이 뜨였다. 기나긴 꿈을 꾼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붉은 눈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기도 했으며, 촉촉하게 젖은 여린 장미 꽃잎 같기도 했다.

“…….”

“…….”

올해 생일날에 꿨던 꿈과 같았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야는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려댔다.

슬퍼하는 것은 분명한데…. 호감도도, 그리고 감정 변화를 뜻하는 시스템창도 발생하지 않았다.

“일리야.”

“……제리.”

“일리야, 울지 마.”

여전히 열이 끓는지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일리야는 대답 대신에 눈물로 흥건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깨어나지 않을까봐, 걱정했어…. 그때처럼 또 물에 빠져서…. 혹시 깨어나서 날 무서워하면 어쩌나 해서.”

“괜찮아, 나 이제 일어났잖아. 울지 마. 응?”

“…….”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하나도 안 보인단 말이야. 늘 보기 싫어도 보였는데 지금은……. 이제 없어졌나봐. 그래서 불안하고 무서워.”

일리야는 제리의 말에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비벼 닦았다.

타인을 이해하고 무언가를 잘해보려 힘을 들이는 것은 귀찮고 번거롭기만 하다. 그래서 제 것과 다른 종류의 불안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고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제리에게만큼은 달랐다. 그의 불안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제리는 일리야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그래서 그는 제리의 불안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웠다.

“…좋아해.”

일리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제리. 내가 매번 말해줄게…. 질리도록 말해줄 테니 다 괜찮아질 거야….”

제리는 손을 들어 일리야의 눈물을 훔쳐냈다. 눈물을 닦아준 보람도 없이 금세 눈가가 젖었다. 응, 응. 질리도록…. 일리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리의 손에 고개를 부볐다. 제리는 잠시 생각하다 미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제리, 잘 거야…?”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졸려.”

“일어날 거지?”

불안이 미미하게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응. 조금만 자고 일어날게. 아주 조금만 더….”

힘없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일리야가 냉큼 그 끝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일리야는 그제야 조금 안도한 듯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더 자, 제리.”

계속 옆에 있을게. 푹 자고 일어나도 돼. 그는 제리의 가슴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제리는 느리게 깜빡이던 눈을 꼭 감았다. 졸음이 몰려왔다. 깊은 잠에 들 때까지 일리야가 간헐적으로 가슴을 토닥거렸다.

모든 게 제 자리를 찾았다. 다 괜찮아진 거야. 그래서… 오늘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다녀왔군.”

창가에서 빙글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는 가끔 꾸곤 하는 꿈속의 풍경이 펼쳐졌다. 이건 꿈이구나.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넨 누구인가?”

보라색 원이 통통 튀어 다니는 바깥과 제리의 방 사이의 경계에 걸터앉은 마탑주가 제리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바람이 훅 불어 닥쳐 제리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몰라서 묻는 거예요?”

“대답이나 하게. 누구냐니깐?”

“제리예요.”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그는 특유의 히죽거리는 웃음을 얼굴에 띤 채 말을 이었다.

“이제 원하는 것은 얻었나?”

“아니요!”

제리는 이번에도 명쾌하게 대답했다. 마탑주는 목을 울려 키득거렸다.

“아직 부족한 모양이지? 욕심도 많군.”

제리는 그저 웃었다. 마탑주는 그에 더 짙은 미소를 내보이며 낄낄 웃었다.

“아직도 돌아가고 싶은가?”

“아니요.”

한제림으로 살던 때로도, 엄청나게 어렸던 때로도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남들처럼. 그냥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거 좋군.”

“그런데 왜 엔딩을 못 본다는 거예요? 이러면 ‘해피엔딩’ 아닌가?”

“미련하군. 삶에 끝이 어디 있나? 끝을 지어야 그 분기점이 생기는거지.”

“……?”

“아차. 이걸 이야기하지 않았나보군.”

그는 잊은 게 있다는 듯 손뼉을 한번 짝, 하고 쳤다. 그동안은 틀어질까 겁이 나서 미처 말을 못 했지. 하고 덧붙인 것은 덤이었다.

“엔딩은 분기점이네. 되돌아온 시점이야.”

“분기점…?”

“항상 처음으로 되돌아갔던 거야. 자네는.”

“…….”

더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시간이 되돌아갔다는 거라면… 말이 되지 않았다.

“항상 자넨 열아홉을 넘기지 못하고 처음으로 되돌아갔네. 자네의 의지로든,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의지로든.”

“…….”

돌아온 시점이 엔딩? 그가 하고있는 말이 내 얘기가 맞나? …왜 돌아왔지?

“자세히 알 것은 없네. 그 기억까지 온전히 가지고 갔다간 머리만 더 복잡해져. 앞으로 있을 일만 생각하게!”

뭔 소리야, 노망났나.

“이번에야말로 끝이군.”

그는 후련하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끝은 없다면서요.”

“토 달지 말게.”

“……아니.”

자기가 그렇게 말해놓고서. 이건 엔딩이 아니라고 했으니 끝도 없는 거, 맞잖아? 제리는 억울해졌다.

“말하지 않아도 잘하는 것 같긴 했다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언 하나만 남기고 가겠네.”

“어딜 가세요? 돌아가시는 거예요? 마탑에?”

“…마아타압? 미쳤는가?”

그는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눈을 찌푸렸다.

“여행 말일세, 여행. 그동안은 신경쓸 게 많아서 제대로 놀러다니지를 못했어!”

“……?”

식당에서 도박하다가 붙잡혀있던 걸 구해준 기억이 있는데. 그건 놀러다닌 게 아니었단 말이야?

“미천한 놈들을 돌보느라 뭐 하나 제대로 구경하는 법이 없었지. 마법엔 영 젬병인놈들이 사람 찾는 기술은 어찌나 그렇게 좋던지. 나 하나 없다고 뭘 그리 호들갑인지 모르겠으니, 원….”

남자가 혀를 차며 불평했다. 제리가 장담컨대, 저 말을 스승님께 그대로 들려준다면 그가 아마 뒷목을 잡을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마탑주는 마탑에 붙어 있는 날이 거의 없이 자유로이 밖을 나다닌다고 했으니 말이다.

“아니, 그건 원래도….”

“앞으로 잘 부탁하네. 자네라면 괜찮아. 이미 듬직한 조력자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조력자? 일리야를 말하는 건가? 제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리, 안 자고 있는 거 다 알아!’

어디선가 환청이 들려왔다. 조이 형 목소리인 것 같은데…. 제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무엇도 보이지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깼다며! 다 들었어!’

띠링.

[시끄러운 소리가 잠을 방해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때였다. 간만에 듣는 듯한 효과음과 함께 시스템창이 떠오른다. 제리의 눈이 동그래지자, 마탑주는 이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다는 듯 낄낄 웃었다.

“그래도 아직은 안심할 수가 없다네.”

‘제리가 자. 시끄럽게 하지 마.’

“……!”

이번에는 일리야 목소리였다. 일리야도 옆에 있는건가? 어디에? 제리는 동그래진 눈을 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남자는 그런 제리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에게도 이번에는 돌아갈 방법을 찾지 말고, 지금 있는 곳에서 행복할 방법이나 찾으라고 전해주면 좋겠군.”

“누구요? 일리야?”

“하기야, 말해도 무슨 말인지는 모를테지.”

“일리야가 그렇게 바보는 아니거든요.”

제리는 불만스럽게 덧붙였다. 남자는 그런 제리를 한심한 듯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무튼, 내 여행이 마무리되는 날, 남은 것들마저 자네에게서 거두어갈 거라네. 그러니 슬슬 없는 것에도 익숙해져두는 게 좋을 테야.”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시스템창이 사라졌다.

“당장은 아니니 안심하게나.”

호숫가에서 그가 제 몸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때 뭔가를 빼내어가서 그런지는 몰라도, 잘 느껴지지 않던 타인의 마력을 제리는 감지할 수 있었다. 시스템의 근원은 마탑주에게 있었다. 아마도.

그럼 그 붉은 덩어리는 시스템을 구성하던 마력의 일부인 건가? 속으로 생각하며 손을 만지작거리다, 그는 뭔가 이질적인 느낌에 고개를 숙였다.

“맞다, 이거.”

그의 엄지손가락에는 여전히 굵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꿈속에서 돌려줘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리는 반지를 빼기 위해 손가락을 쥐었다.

휴, 그때는 꼼짝없이 저 노인네가 내게 연심을 품은 줄 알았지 뭐야!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지!

“……왜 이래? 왜 안 빠지지?”

그런데 반지는 손가락에 꼭 달라붙은 것처럼 빠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리는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마탑주는 그런 제리를 향해 해답을 내려주었다.

“이제 자네 물건일세.”

“아니에요. 이거 제 스승님한테 들었는데, 마탑 반지라면서요. 제가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니에요.”

“그 뺀질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가져가세요.”

“아니, 다음 주인이 정해진 게야. 자네 걸세.”

“아닌데요.”

“맞네.”

“아닌데요!”

“맞네!”

끙끙거리며 반지를 빼내려 노력해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내겐 필요 없어.”

제리는 망연하게 반지와 마탑주를 번갈아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떠넘기는 건 아니고요?”

“허허. 후련하구먼….”

“저한테 버린거죠.”

그는 딱히 부정하지는 않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리가 어이없다는 듯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반지의 주인 자격을 넘겨받았습니다. (부가칭호:주인님)]

“…….”

자격까지야. 말만 거창했다.

“참, 돌려줄 것도 있다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시스템창이 하나 더 떠올랐다.

[마력의 일부를 돌려받습니다. 마법+5000]

그는 턱을 쓸며 고개를 기울였다.

“흐응. 가만 있자, 이게 다였던가….”

시끄러운 환청이 귓가에서 아른거렸다.

‘제리, 자는 척하는 거 맞지! 이것 좀 놔!’

‘휴… 자꾸 시끄럽게 하면 내쫓아야 하는데….’

‘멋대로 내 동생 방에 쳐들어온 게 누군데!’

‘…으음, 무엄하다.’

‘황족이면 다냐! 우리 제리를 이렇게 만든 게 네놈이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 네놈은 사기꾼이잖아!’

일리야와 형들의 목소리였다. 방 천장과 꿈 속 풍경이 번갈아가며 겹쳐져보였다. 소란스런 소리에 마탑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건 생각나는 대로 전해주겠네. 찾는 사람이 있으니 이만 안심시켜주게나.”

“…….”

“그럼 나도 바빠서….”

놈들이 찾으러 오기 전에 떠나야 하니 말일세.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제리의 눈이 뜨였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시야는, 눈을 몇 번 감았다 뜨자 선명하게 들어왔다.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어, 제리는 침대에 얌전히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조이와 로베인을 허공에 마법으로 띄우고 있는 일리야가 보였다. 쌍둥이들은 악을 지르며 버둥대고 있었다.

“……너 뭐 해?”

“헉.”

제리의 물음에 화들짝 놀란 일리야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뒤돌아본 일리야와 눈이 마주쳤고, 그에 두 사람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일리야에 의해 다시 허공으로 올라갔다. 내려줘! 두 사람이 입을 모아 소리를 질렀다.

“…제리, 깼어?”

“응. 누가 시끄럽게 해서.”

“미안해. 내가 금방 내보낼게…?”

그는 창문 잠금쇠를 풀어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대로 형들을 창 밖에 내보내려는 것 같았다.

네가 창문으로 몰래 드나든다고 해도, 거긴 원래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가 아니야, 일리야. 제리는 턱 끝까지 올라온 말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말했다.

“시끄러운 건 너도 포함되거든? 그냥 내려놔. 당장 창문 닫고.”

“…….”

“일리야.”

“졸리다며. 더 자야 하는데 네 형들이 시끄럽게 했잖아…. 그래서 내보내려는 건데?”

“지금 내 말대로 해주면 나중에 소원 하나 들어줄게.”

“응.”

그 말과 동시에, 공중에 둥둥 떠 있던 두 사람은 다시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제리, 저놈이 네게 뭔가 했지? 너, 너 어제 하루 종일 깨어나지도 않았어!”

“어제야?”

별로 많이 안 잤네. 이곳에서의 13년이 저곳에서는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시간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오래 자지 않았다면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걱정을 덜 끼쳤을 테니까.

“왜 아무 말을 못해!”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복잡할 테니 하지 않아도 되었다. 마탑주와 마력, 그리고 시스템과 엔딩. 이건 일리야와 제리, 둘만 알고 있으면 된다. 둘만의 비밀이었다.

“그냥 발을 헛디뎌서 호수에 빠진 거야.”

“뭐?”

“내가 넘어져서. 때마침 일리야가 구해줬어. 그러니까 일리야한테 뭐라고 하지 마.”

“…….”

“…….”

나불대던 두 사람의 입이 다물렸다. 그들은 무덤덤하게 눈을 깜빡이는 일리야를 힐끔거리다 뒤늦게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입이 댓발 나와 있는걸 보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잖아, 제리. 너는….”

일리야가 제리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제리는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입술을 들이밀어 쪽 소리를 내며 짧은 키스를 건넸다. 입술에 와 닿는 말랑한 감촉에 일리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으아악!”

둘의 애정행각에 전혀 면역이 없는 쌍둥이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로베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고, 조이는 맙소사, 하고 중얼거렸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새삼스럽게…. 제리는 형들의 앞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일리야의 목을 끌어안았다. 일리야도 얼떨결에 제리의 등을 감싸 그를 마주 안았다.

코끝에 스치는 상쾌한 향을 느끼며 그를 꼭 안고 있으니 마음이 뭉클해진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일리야.”

“뭐가…?”

“그냥, 다.”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내가 제리고, 네가 일리야라 다행이야.

바다처럼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일리야 너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리고 너를 사랑할 수 있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일리야.

* * *

제리에게.

“…….”

아니야.

“…….”

나의 제리에게…?

“이것도 아냐….”

뭔가 약하다. 고릉거리는 고양이의 머리를 긁어주며 한참 인상적인 인사말을 생각하던 일리야는, 마음을 고이 접어 종이에 또박또박 새겨 넣었다.

[사랑하는 제리에게.]

그가 쓸 수 있는 한 가장 단정하고 예쁜 필체였다. 그대로 일리야는 제리에게 할 말을 써 내려갔다. 펜촉이 종이에 긁히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너의 일리야가. 짧고 간결한 말로 편지의 끚맺음을 한 일리야는, 종이에 제리를 닮은 싱그러운 풀내음을 가득 묻혔다.

할 말을 곧장 써넣어도 될 테지만, 편지에 담긴 내용을 당장 제리에게 알리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감이 있었으며, 그냥 제리에게 마음을 담은 편지를 한 통 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주 조금의 기다림은 제리와 자신의 관계를 더 낭만적인 모양으로 포장해 줄 것이다. 빨간 실링으로 봉투를 단단히 봉한 일리야는 의자에서 일어나 편지 봉투를 시어스에게 전했다.

“진심이십니까?”

시어스는 백작저의 주소와 제리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가 하려는 짓이 영 내키지 않는 듯, 눈동자에 수심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일이고, 무를 생각도 없었다. 일리야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냥 일리야라고 불러. 이젠 말을 높일 필요도 없잖아.”

“그래도 아직은 황자십니다.”

“내 말은…, 곧이라는 소리였어.”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늦지 않았으니까요.”

늦지 않았다. 그 말에 일리야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와준다면서.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거야…?”

야옹. 고양이가 그 말이 맞다는 듯 일리야의 손에 고개를 부비며 짧게 울었다. 일리야는 요즘 들어 부쩍 움직임이 적어진 하얀 고양이의 털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는 시어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아. 하루아침에 결정한 게 아니니까….”

“…….”

시어스는 그의 말에 또 복잡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일리야는 그에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시어스가 느끼는 감정을 알지 못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게 동정이든 동질감이든, 그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시어스 뉴어. 황제폐하의 동생. 궁정 마법사. 그리고, 제리의 스승님.

그게 다였다. 일리야는 자신과 시어스의 사이에서 더 이상의 연결고리는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도와주지 않을 거라면 방해는 하지 마.”

“황자님. 내내 황궁에서만 살다 당장 나가시려면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별로…. 어차피 언젠간 나가야 하잖아.”

일리야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시어스가 하는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황태자인 카르얀은 이미 정사를 돌보고 있었다. 그는, 황궁에서 살 수 있는 날도 몇 년 남지 않았을 거란 말이었다.

“그래도 웬만해서는 때가 되어 나가시는 게 나을 겁니다. 이름을 가지고 궁을 나가는 것과 그냥 나가는 것은 다릅니다.”

“……알아.”

“아니요, 모르십니다.”

시어스는 제 경험을 떠올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한 때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그는, 마탑에서 마법이란 학문을 더 깊이 배우기 위해 디페리우스의 성을 버리고 궁을 나와 어머니의 성인 ‘뉴어’를 사용했다.

그는 늘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황족으로만 살아왔던 터라 몰랐던 것이 많았다. 그리 가볍게만 볼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황가를 등지고 난 뒤, 제게서 등을 돌리는 친구들도 있었고, 가끔은 제 선택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마탑은 황자님꼐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대단한 곳도 아닙니다. 게다가 앤더슨 가는 멸문했고….”

시어스는 잠시 망설이다 이어 말했다.

“황자님께는 이곳이 집이지 않습니까.”

일리야의 시선이 비스듬히 들려 시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얼굴이다.

“그러니 재고해보십시오.”

그는, 일리야가 디페리우스로 계속 살아가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고싶은 일이 확실치도 않으면서, 무작정 제리를 따라 마탑에 들어간다고 성을 버린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는, 늘 일리야에게 조금의 미안함을 느꼈다. 마음 놓고 아이를 예뻐해 줄 수가 없어서. 그의 외로움의 일부에는 자신 또한 조금의 기여를 했기 때문이었다.

일리야는 잠시 생각하는 듯 보이다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집?”

약간의 경멸감이 눈빛을 스쳤다. 냉소적인 목소리였다.

“난… 이곳을 단 한 번도 집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예?”

그 말은 시어스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한 말이었다. 시어스가 디페리우스의 이름을 내려놓고 가장 힘겨웠던 것은 집과 형제들을 저버렸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집은 돌아가야 하는 곳이잖아? 제리도 그렇고, 다른 애들은… 모두 집에 간다는 말을 할 때 편안하단 표정이었어. 당장 나와 있어도 다시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그게 집이잖아.”

까만 잉크가 묻은 손가락을 만지며 일리야가 말했다. 너무 담담한 말투에 시어스는 대답 할 의지조차 들지 않았다.

“……난 지겨워. 전혀 편하지 않았어. 단 한 순간도.”

“…….”

“나라고 상처받지 않는 건 아니었어….”

시어스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입을 꾹 다문 채 이어지는 말을 들을 뿐이다.

“나가고 싶어. 내게 디페리우스는 아무 의미도 없어. 의미가 없으니 당연히 미련도 없고.”

그의 말에 시어스는 생각이 복잡해진 듯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가 성을 버렸던 이유와는 많이 다른 이유였다. 꿈을 위해서도. 젊은이의 치기도 아니라, 숨을 쉬기 위함이었다.

“18년이야…. 이 정도면 됐잖아?”

느릿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일리야가 말했다.

“나는 제리의 옆에 있고 싶어, 시어스. 내가 돌아갈 곳은 그 애밖에 없어.”

제리를 ‘그 애’라고 칭하는 일리야의 얼굴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온기가 묻어났다. 순간, 제리와 일리야 사이에 돌던 묘한 분위기가 시어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

시어스는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되바라진 제자인 제리와, 4황자 일리야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그것도 당사자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그냥 ‘일리야’로도 충분해….”

엄마가 지어준 이름이고, 제리가 나를 그렇게 부르니까…. 일리야는 제 이름을 부르는 제리의 입술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일리야!’

제리 덕분에 자신이 계속 ‘일리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일리야를 황자라는 틀 안에 가둬두지 않았다. 그에게 자신은 그냥, 일리야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짓이라는 것은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리야에게는 그의 인생을 바꿀,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도와줄 거야, 말 거야? 마음이 변했어?”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는 수 없었다. 자신은 늘 이 아이들에게 져주는 입장이었으니까. 시어스는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바뀔 이름도 있어야지요.”

“필요 없어.”

그냥 일리야로도 충분하다니까. 심드렁하게 일리야가 말했다. 하지만 시어스는 한 발 더 나아가 좋은 제안을 건넸다.

“제 슬하로 들어오십시오. 황자전하께선 일리야 뉴어가 되시는 겁니다.”

“……일리야 뉴어?”

일리야는 그 이름을 몇 번 중얼거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싫은데….”

“예? 왜요?”

“어감이 마음에 안 들어.”

아무튼 별로야. 일리야는 작게 중얼거렸다. 시어스는 허허,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쨌거나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겠어. 폐하의 허락만 떨어지면….”

“…….”

“내 고양이랑 보석들만 챙겨서 나갈게.”

문을 두고 습관처럼 창을 열어 나가는 일리야의 뒤를 따라 고양이가 사뿐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과 미련이 전혀 없었다. 시어스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얼굴로 굳어있다가, 이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고작 고양이와 보석이다. 그것들 이외에는 가지고 나갈 것이 없을만큼….

일리야의 마음은 이미 이 궁 안을 뜬 지 오래였다.

* * *

뭔가 이상해! 말도 안 돼!

일리야를 보지 못한 지 벌써 이 주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던 때는 제리의 앞으로 물약이 든 상자가 잔뜩 도착했을 때였다.

[만들었어. 마력 통제에 도움이 될 거야. 당분간 못 만나니까 매일 한 병씩 마셔. 미안.]

동봉된 카드에 쓰인 글씨는 일리야의 필체가 확실했다. 마개를 열자, 일리야의 마력이 진하게 느껴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갑자기 왜….”

제리는 곧장 외투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성문 앞에서 만날 수 없으니 돌아가란 소리를 듣고 돌아서야 했다. 심지어는 스승님마저 제리를 만나주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으니, 일리야에게 말을 걸 방도는 일기장밖에 없었다.

[혹시 무슨 일 있어?]

“…….”

하지만 그마저도 답이 오지 않아 그에게 안좋은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고 내내 걱정했다.

“호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중얼거려봤지만, 이미 사라진 호감도창은 뜨지 않았다. 제리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렇게라도 시스템 창을 통해서 일리야의 이름을 본다면 좀 걱정을 덜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갈수록 걱정이 커져만 갔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사흘 전, 연락이 없었던 일리야에 대한 소식이 제리의 귀에 들어왔다.

‘4황자, 일리야 디페리우스가 황족의 계보에서 제명당하다.’

그는 그 일리야가 자신이 아는 일리야가 맞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제리에게 묻는 형들에게 제리 역시 해줄 말이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게 있었다는 사실에 다소 충격을 받아 한동안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랑하는 제리에게.]

그리고 그날 저녁, 제리의 이름으로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봉투를 열어 빳빳한 편지지를 펼치자, 상쾌한 숲 향기가 퍼져 나왔다.

[안녕, 제리. 일리야야. 잘 있었어?

지금쯤이면 소식 들었을 거야.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하지만 말했으면 말렸을 테니까. 예전부터 오래 생각하고 저지른 일이니까 많이 놀라지는 마….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전혀 힘들지 않아. 도움을 줄 사람도 있거든. 네가 아는 사람이지만 비밀로 해달래. 아무튼 처음도 아니니까 아마… 오래 걸리지도 않을걸.

보고 싶어. 일이 정리 되는대로 바로 찾아갈게. 노크 할 테니 문 열어줘야 해.

p.s/같이 가자는 말, 아직 유효하지?

-너의 일리야가.]

“같이 가다니…. 아마 여행을 말하는 거겠지.”

연락은 씹고, 여행은 가고 싶은가 보지?

개새끼. 제리는 망연하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리야 너 뭐 하자는 거야]

[죽는다.]

[언제 올 건데? 보고 있으면 여기에 점 하나라도 찍어봐. → ]

[일리야…, 정말 그렇게 바빠?]

[너 읽고 있지! 다 알아.]

어떤 말을 일기장에 써넣어 봐도 일리야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 개새끼야… 이번 주잖아.”

같이 여행가자며, 나랑. 제리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내게 진작 상의를 하지 않았어? 왜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거야. 그리고… 도대체 뭘 하느라 잠깐 연락도 못할 만큼 바쁜 거냐고.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전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황궁에 쳐들어갈 수도 없잖아….”

나는 감옥 체질이 아니란 말이야. 제리는 실없는 말을 읊조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무엇보다도, 일리야의 얼굴이 무척 보고 싶었다.

* * *

똑똑. 똑똑똑.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무언가 두드려지는 소리가 났다.

“……으응.”

시끄러워…. 잠에 허우적대던 제리는 그 소리를 피해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곧 사라져야 할 소음은 점점 빈도를 더해갔다.

똑똑똑! …똑똑똑똑!

곧 강풍에도 멀쩡하던 창문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야. 제리는 부스스하게 일어나 창가를 노려보았다. 창 너머로 보이는 가득 차오른 달은 오늘따라 더 둥글고 밝았다.

…똑똑.

흔들리던 창이 얌전해지고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바람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잠이 모조리 달아났다. 급히 몸을 일으킨 제리는 창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곧 창틈을 타고 작은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제리…,”

기다리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깼으면 문 좀 열어줘.”

제리는 그 말에 실내용 슬리퍼도 신지 않고 맨발로 창가를 향했다. 찬 감각이 발바닥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하얀 이불은 잔뜩 흐트러진 채 침대 밖으로 반쯤 흘러내렸다.

철컥, 잠금쇠를 풀고 창틈에다 꽂아둔 쇠막대기를 빼내고 나자, 문이 끽 소리를 내며 열렸다.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일리야가 달빛에 비쳐 푸르게 보였다. 그는 무작정 제리를 향해 뛰어들어 어깨를 꼭 껴안았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찬 공기가 제리를 덮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리야를 밀어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리….”

“……뭐.”

얼굴을 보자마자 왜 연락이 없었냐고 화부터 내려고 했는데…. 이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 그럴 수가 없잖아. 제리는 한숨을 내뱉으며 일리야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일리야.”

“응.”

“일리야 맞지?”

“응, 제리…. 나야.”

“정말 일리야야?”

“응.”

연신 제 이름을 부르는 제리에 일리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제리 역시 화사하게 웃으며 그의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죽고 싶냐?”

“…….”

일리야의 미소가 순식간에 굳었다.

“죽고 싶냐고 물었잖아, 일리야.”

대답 안 해? 그 말에 넓은 어깨가 움찔거렸다. 일리야는 입술을 달싹이다 시무룩해져 작게 중얼거렸다.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

“정말…?”

나는…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순진한 눈망울을 깜빡이는 일리야에게, 난 하나도 보고 싶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진짜 보고 싶었던 게 맞기도 하고… 지금 화를 내어봤자 바뀌는 것도 하나도 없으니까.

제리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보고 싶기는 했어. 그 말에 일리야는 안도의 숨을 뱉어냈다.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을 닫고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제리는 일리야를 향해 물었다.

“일은 잘 해결됐어?”

“곧 끝나.”

“아직? 끝나고 온다며. 그동안 연락이 없기에 손이라도 부러진 줄 알았어.”

“난 멀쩡해…. 걱정해줘서 고마워.”

“걱정 아냐. 뭐라고 한 건데?”

“……그래도 고마워.”

“넌 뭐가 그렇게 다 고맙대.”

“잠 깨워서 미안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일리야는 숨을 작게 들이쉬곤 말했다.

“이름 뒤에 뉴어가 붙으면 어떨 것 같아?”

“네 이름?”

“응.”

“……일리야 뉴어?”

뭔가 이상한데. 머릿속으로 그 이름을 읊조려보다, 너무 익숙한 성에 제리는 멈칫했다. 뉴어…. 뉴어는 스승님의 성이었다. 그런데 그게 일리야 이름 뒤에 왜 붙어? 제리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스승님 아들?”

제리의 물음에 일리야는 묘하게 축 처져서 말했다.

“별로지.”

“어.”

제리는 가감 없이 대답했다. 그에 실망하지도 않고 일리야 역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것 같았어….”

그는 물어보길 잘했다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성이 별로라는 게 아니고, 너와 내 사이에 스승님이 끼는 게 좀 달갑지가 않아서.’

그 인간이라면 평생을 놀려먹고도 남았다. 벌써부터 치가 다 떨린다. 제리는 그 말은 목구멍 너머로 집어삼키고 물었다.

“그런대 왜 나한텐 얘기도 안 했어? 중요한 결정이잖아.”

“…….”

“그리고 어차피 일리야 너는 내가 말려도 했을 거잖아. 고집만 엄청 세가지고…. 그래도 미리 얘기라도 해줘야 내가 걱정을 안 하지.”

“미안. 빨리 해결하고 너랑 같이 가려고….”

“어딜?”

“나도 마탑….”

뺨을 붉히며 우물쭈물거리는 일리야에, 제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것 때문에 계보에서 파여? 어이가 없네.”

“…….”

잘못을 탓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일리야의 선택이고, 일리야의 인생이었으니까.

“내가 너 때문에 늙는다, 늙어.”

“제리 네가 늙어봤자지….”

“야.”

“…….”

이게 다 시어스 때문이었다. 그런 전례가 있으니 일리야가 이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거다.

“화는 안 내?”

제리는 고개를 저었다. 얼굴을 마주하니 화 낼 생각이 사르륵 녹아버렸다. 그리고 연락이 안 된 것 빼고는 그리 짜증나는 것도 없었다.

“제리, 나는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

“……!”

이럴 줄 알았다. 일리야에게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제리는 진지하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딘데, 거기가?”

“나도 몰라….”

잘못 생각했다. 일리야에게는 생각이 없었나보다.

“아무튼 네 곁이면 다 좋아. …아무 데나 괜찮으니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야?”

이름을 갈아치우지 않아도 제리는 늘 일리야의 곁에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일리야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를 이해하려 드는 것은 조금 어려웠다.

“그깟 성 따위 내겐 아무런 가치도 없었어. 애초에 아예 없었더라도 난 괜찮았을 거야.”

그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 때문에 사람들 입에 일리야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제리는 싫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성이 꼭 있어야 해?”

“그건 아닌데 시어스가 자꾸 있어야 한다고 보채서 물어보러 온 거지….”

“……꼭 있어야 한다고?”

“응. 꼭…이라고는 했는데….”

“…….”

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제리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내 걸로는 안 돼?”

좀 빠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어차피 일리야의 가족이 되어주기로 했다, 미리 이름으로 일리야를 묶어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제리는 마력 때문이라도 일리야가 평생 필요했다. 시기를 좀 앞당긴다고 생각하면 되었다.

“표정이 왜 그래.”

그런데 곧장 좋다고 할 줄 알았던 일리야는 떨떠름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싫어?”

“그럼 난 너랑 형제가 되는 거야…?”

“…….”

“그건 좀….”

“무슨 헛소리야. 배우자가 있잖아.”

헉, 일리야가 숨을 급히 집어삼켰다. 남자끼리도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제리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거 청혼이야?”

“그런가.”

하기야 성을 나눠쓰자고 말한 게 청혼이 아니면 뭐겠는가. 제리는 무덤덤하게 대답하며 일리야를 올려다보았다. 저 새빨개진 귓등을 만지면 손가락에 꽃물이 묻어날 것 같았다.

“아마 반지도 없이… 이딴 멋없는 프러포즈를 받은 건 내가 처음일 거야.”

“…이딴?”

“지나가는 사람 백 명을 잡고 물어봐도 다들 입을 모아 내 말이 맞다고 할걸. 역대 최악의 프러포즈로 손꼽힐지도 몰라….”

“…최악? 불만이야?”

제리의 살벌한 말에 일리야는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리는 움직임마저 다 보일 만큼 격렬하게.

“하나도 불만 없어. 좋아….”

좋아해, 제리. 일리야는 행복에 젖은 눈을 접어 활짝 웃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덩달아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일단 이리 와.”

“……?”

제리는 일리야를 잡아 침대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다 잠들었을 시간이다. 방안도 온통 어둡고, 졸려서 자꾸 눈이 감기니까…. 아직 찬기운이 빠지지 않은 겉옷을 벗겨 아무 데나 걸쳐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제리?”

“너무 늦었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헉.”

“싫어도 자고 가.”

“…정말 괜찮겠어?”

“……?”

“난, 난 좋아. 하지만 나중에 무르는 건 안 돼. 한 번 시작하면….”

“……뭘 시작해?”

“지금 벗을까?”

이걸 확.

제리는 눈을 빛내며 묻는 일리야를 올려다보며 코를 찡그렸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오늘은 진짜 잠만 자고 가는거야.”

“……잠만?”

“그래.”

“……왜?”

“피곤해.”

“…….”

“일리야, 대답해야지.”

“응….”

그는 시무룩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제리 혼자 누우면 굴러다닐 수 있을 만큼 널찍한 침대가 일리야까지 올라오니 꽉 차는 것 같았다. 일리야는 목까지 올라온 단추를 하나하나 풀며 잘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제리는 바닥에 흘러내린 이불을 주워 올리다 멈칫했다.

“…….”

숨을 멈춘채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벽난로가 타는 소리와 일리야의 숨소리만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제리는 고개를 들어 창가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푸른 달빛이 이불 위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제 손에 쥐어진 것은 새하얀 이불이었다. 꼭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듯한.

“…제리?”

제리는 이불 끝을 쥐고 커다랗게 휘둘렀다. 새하얀 이불이 넓게 펴지며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살포시 덮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일리야가 숨을 집어삼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웃음이 나왔다. 서로가 내뱉는 숨결까지도 고스란히 다 느껴질 만큼, 가깝고도 은밀한 이불 속 세계였다.

손끝에서 마법으로 희미한 빛을 일으키자, 얼굴 형체만이 간신히 보였다. 잘 정리되어 단정한 머리 위에 새하얀 천이 덮여 있다. 붉은 꽃잎처럼 선명한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여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리?”

그의 목소리에 가슴이 콩콩 뛰었다. 우습게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당장 시간이 멈춰도 좋았다. 결국 멈춘 시간 속에 갇혀도 함께일테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제리의 감정에 동화되기라도 한건지, 일리야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움직임마저 모조리 선명하게 느껴진다. 제리는 일리야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리야는 한 술 더 떠, 은근슬쩍 손깍지까지 끼었다.

“앞으로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이게 맞나? 제리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을 뒤져, 뻔하디뻔한 멘트를 꺼냈다. 화려한 장식이나 일리야를 닮은 꽃다발도, 그리고 축하해주는 사람들도 없었지만… 괜찮았다.

“그 어떤 고난이 다가오더라도. 언제나 한결같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할 것을…… 일리야, 빨리 맹세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자 상황파악을 마친 일리야가 재빨리 대답했다.

“…맹세할게.”

“좋습니다. 당신은 제리 루트를 평생의 배우자로 맞이하시겠습니까?”

짐짓 엄숙한 척 결혼식 주례를 흉내내어 속삭이자, 일리야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착실히 대답했다.

“…네에. 그런데 이건 왜? 누가 들어?”

일리야는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제리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아냐. 결혼식 날 머리 위에 쓰는 베일 같잖아. 하얗고. 이거 몰라?”

“…….”

“세상에, 몰라?”

“아냐. 예전에 동화책에서 본 것 같아. …아, 오해하지 마, 지금은 안 보니까. 그나저나 이건 엄청 옛날 전통인데…. 요즘은 베일 잘 안 써.”

“알아. 기분만 내는 건데. 싫어?”

“…내가 언제 싫대?”

좋아서 죽을 것 같아. 일리야가 희미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나한테도 해줘.”

“제리, 나랑 결혼해줘…. 온 세상을 다 줄게.”

“필요없어. 네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똑같이 해달라니까.”

“똑같이? 네가 했던 것처럼?”

“응.”

“…당신은, 일리야 디페…… 아니지.”

일리야는 부끄러운 듯 행복한 듯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제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리는… 일리야 루트를 선택하시겠습니까?”

“……!”

그 말에 지금은 사라진 인물 루트 선택창이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런 식으로 선택지를 택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물론 대답은 하나밖에 없지만. 제리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리?”

“좋아.”

마법보다도 더 마법 같은 이 순간이 절대 깨어지지 않도록, 제리는 눈을 살포시 감고 일리야의 뺨에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일리야.”

어설프고 아무것도 갖춘 게 없는 둘만의 언약식. 실력 있는 화가가 혼을 담아 그린 것처럼 아름답고 완벽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더 소중했다. 오직 둘만이서 만들어낸 소중한 순간이었으므로.

“난 이미 행복해…. 제리, 네가 내 옆에 있잖아.”

일리야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그는 자신을 일리야로서 사랑해주는 제리를 사랑한다.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은 정말 일리야답게 존재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손만 잡고 있어도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서로의 선택과 결핍이 만나 운명을 바꿨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미래. 아니, 현재였다. 일리야는 고개를 숙였다. 입술 위에 깃털같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숨결이 섞였다. 심장에 빠듯하게 차오르는 이 감각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랑이었다.

“제리….”

“알아.”

붉어진 귓등과 떨리는 눈빛, 그리고 세차게 뛰는 심장까지. 모든 것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일리야의 뺨에서 꽃향기가 났다. 그를 닮은 새빨간 장미꽃이었다. 온종일 그 향에 취해있고 싶었다.

“나도 좋아해, 일리야.”

커다란 창을 넘어 푸르스름한 달빛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창살의 모양이 새하얀 침대 위에 그대로 새겨졌다.

유난히 밝은 달빛 아래, 고요한 맹세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둘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틈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단단히 깍지를 낀 채로.

-루트를 거부하는 방법,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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