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윈제드
“세상에나. 현상금을 이렇게나 많이 건다고? 대체 뭐 하는 작자들이야? 정말 주기는 하는 건가?”
남자는 목덜미를 긁으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벽보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일행들은 심드렁한 눈으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명색이 마탑인데 설마 주지 않으려구?”
“에라, 이놈 하나만 찾는다면 몇 년은 펑펑 쓰며 놀고먹어도 남아돌겠구만.”
“자네는 넙데데한 얼굴 크기만큼 꿈도 크구먼.”
“뭐?!”
“그런데 아래는 왜 그런가.”
그는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피식 웃었다. 그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남자가 주먹을 날렸다. 두 사람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누가 더 잘났니 하며 아웅다웅 다투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었는데 싸움을 거는구먼.”
“……작은 건 사실이지 않나.”
“암. 컸으면 처음부터 화를 내지도 않았을 걸세.”
남은 이들은 익숙한 풍경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하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나저나 찾는다는 보장이라도 있다면 수색대라도 만들어 밤낮없이 찾아다녀야 할 판이야. 마음 같아서는 벌써 짐을 꾸려 나갔다고.”
“만일 이게 살인마면 어쩌려고 그러나? 목숨 값이 더 나가, 이 사람들아. 돈은 공짜로 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헛된 마음 품지 말고 잡담할 시간에 일이나 열심히 하게.”
한동안 황실 계보에서 제명당한 황족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거리에는, 다른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새해 축제까지 겹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어느 날. 백작저에는 기별도 없이 불청객이 하나 찾아왔다.
“제리!”
남자는 막 내려앉아 뽀얀 눈처럼 새하얀 백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마를 반쯤 덮은 머리카락이 귀찮은지 손을 들어 그를 쓸어 올렸다. 열린 문 너머로 비치는 햇살이 꼭 후광처럼 보여 아앗, 하고 눈을 가리는 시종도 있었다. 다짜고짜 제리의 이름을 외치며 대문을 활짝 열고 들어온 남자는, 붉은 눈을 굴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제리 없나요? 여기 사는데…….”
“…….”
“…….”
시종들은 제각기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곳에서 일한 지 꽤 오래된 이들도 많았기에, 그들은 나른한 말투로 제리를 찾는 저 남자를 알고 있었다.
“도련님은 아직 방에 계십니다.”
“아직도 자나……?”
그는 들고 온 짐 가방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짐 가방은 어린아이 하나쯤은 들어갈 만큼 커다랬다. 보통 저런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막내 도련님 친구분이셔.”
“가출이라도 하신 모양이지?”
시종들은 속닥거리며 눈치껏 빈방 하나를 청소하기 위해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몇은 일리야의 짐 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손님방에 들어와 짐 가방의 지퍼를 연 순간이었다.
야옹!
“헉.”
“깜짝이야!”
“에…… 에취!”
새하얀 고양이 여섯 마리가 순식간에 퐁퐁퐁 튀어나왔다. 시종들의 절반이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이게 다 뭐야?”
고양이들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흩어졌고, 그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고는 작은 가방 안을 들여다보며 신기해했다. 저것들이 다 들어갈 만큼의 공간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들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손을 가방 안으로 집어넣으니, 어깨까지 불쑥 들어가는 것에 다들 깜짝 놀랐다.
“이것도 마법인가?”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어…….”
일리야가 들고 온 가방에는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었다. 시종들에게도 마법은 그리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막내 도련님인 제리가 마법사인 데다, 거리의 마법 상점에 가서도 금화 몇 닢이면 이런 가방 하나쯤 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력을 다루는 직업은 희귀했으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마법을 경험하게 되면 매번 놀라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얀 고양이는 낯선 장소가 무섭지도 않은지 팔자 좋게 소파 아래와 팔걸이. 그리고 선반까지 각자 원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벌써부터 우아하게 앉아 조는 고양이도 있었고, 시녀들과 눈을 맞추며 커다랗고 파란 눈을 끔뻑거리는 고양이도 있었다.
“야옹아, 나오렴. 먼지투성이가 되고 싶어서 그러니?”
물론 침대 아래에 들어가 위협하듯 캭캭거리는 놈도 있었다. 똑같이 생긴 것들이 성격은 제각기 달랐다.
“황자님……?”
“아시잖아요……. 이젠 황족 아닌데요.”
“…….”
“그러니까 앞으로는 일리야 루트라고 불러 주세요.”
그 말에 모두가 뻣뻣하게 굳어 고개를 들었다.
“루트? 방금 루트라고 하셨습니까?”
황자님 입에서 그 소리가 왜 나옵니까? 그런 얼굴로 백작이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네에. 참, 제리는 아직……?”
간만에 대문으로 당당히 들어온 일리야는, 백작의 면전에 대고 뜻밖의 발언을 해 정적을 불러왔다.
“세상에…….”
백작 부인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으며, 백작은 혼이 나간 것처럼 입까지 쩍 벌렸다. 아니, 이 공간 안에서 태연한 것은 일리야밖에 없었다. 다들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소리 없이 경악했다.
한편,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댄 채 평화롭게 책을 읽던 제리를, 누군가가 찾았다. 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것은, 숨까지 헐떡대며 양 뺨이 붉게 물든 시녀였다.
“도련님, 손님이 찾아왔어요!”
“손님? 나한테?”
“네!”
저택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리야를 처음 본 그녀는, 내내 들뜬 채였다. 동화책 속에서나 보던 ‘왕자님’이 그대로 현실에 튀어나온다면 그런 모습일까? 그녀는 엄지를 슬쩍 치켜들며 속닥거렸다.
“엄청 잘생긴 분이셨어요.”
“아, 응…….”
“아니, 제가 이 나이 먹도록 살면서 그런 얼굴은 꿈에서도 본 적이 없다니까요!”
“넌 그렇게 나이를 많이 먹은 것도 아니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재미없게 농담도 못 알아들으셔.”
“…….”
나도 농담이었는데……. 제리는 그 말은 속으로 집어삼키고 물었다.
“아직 아침이잖아. 이 시간에 날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야?”
“네? 몰라요!”
“뭐?”
“그런데 조금, 뭐라고 해야 할까, 졸려 보이셨는데…….”
“졸려 보였다고?”
“네, 눈이 이렇게 반쯤 감겨서…….”
……에이, 설마.
그녀는 의심의 싹을 틔운 제리를 바라보며 손을 위로 쭉 뻗었다.
“키는 이만하고 머리카락은 눈처럼 하얀 분이셨어요.”
“……!”
제리는 이불을 확 걷어 내고 벌떡 일어났다.
‘일리야잖아! 왜 답지 않게 당당히 문을 통해 들어왔지?’
늘 창문을 두드리며 무단 침입을 하는 일리야가, 이번에는 무슨 바람이 불어 하지도 않던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며칠 전에도 제 자신이 보고 싶어졌다며 창문을 무작정 두들겨 잠깐 얼굴을 비치고 갔었다.
그래서인지 집 안의 누군가가 ‘일리야가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주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허둥지둥 방에서 나온 제리는, 계단 난간을 붙잡고 아래층을 급히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순수한 백발을 가진 남자와, 자신의 부모님. 그리고 집안의 시종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제리는 계단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그들의 시선들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모두가 자신을 주시했다. 그 시선이 주는 위압감에 잠시 발걸음이 멈췄다.
‘왜 다 나를 쳐다보지?’
그는 수많은 시선들에 다소 당황하면서도 일리야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일리야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그가 눈을 접어 웃었다.
“제리, 잘 잤어?”
“어. 안녕.”
잘 잤냐고 묻기엔 좀 늦은 시간이지만, 일리야는 원래도 게을러서 늦잠을 자는 편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이 시간이 아침인 것이다.
제리는 계단을 총총 걸어 내려와 일리야 곁에 가서 섰다. 그는 제리가 옆에 다가오자 목소리를 조금 낮춰 물었다.
“제리, 며칠 전에 실수로 내 옷 두고 갔는데…… 혹시 봤어?”
“무슨 옷?”
“그거 있잖아. 내가 아끼는 옷인데…….”
제리는 제 방 안 풍경을 떠올렸다. 며칠 전이라면 방에서 나가지 않고 잠깐 봤던 터라 그가 두고 간 게 있다면 곧장 알아챘을 것이다. 심지어 제 것이 아닌 옷이라면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글쎄, 잘 모르겠는데.”
새로 생긴 물건도 없고, 없어진 것도 없었다.
“옷은 못 봤어. 네가 다른 데서 잃어버린 것 아냐?”
“아니야…….”
“잘 생각해 봐. 어디다 벗어 둔 건지.”
“그럴 리 없어. 옷은 네 앞에서만 벗…….”
미친 새끼야, 바로 앞에 부모님이 계시는데 무슨 소리야!
제리는 차마 그들 앞에서 욕을 하지는 못하고 눈에 힘을 주어 일리야를 힘껏 노려보았다.
“왜 때려…….”
일리야는 발로 까인 정강이를 내려다보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나름대로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바로 뒤에 서 있던 사람에게는 들렸던 모양이다. 창틀의 먼지를 닦아 내는 시늉을 하며 대화를 엿듣던 시종 조슈아가 눈치를 봤다.
“저어, 그건 제가 치워 뒀어요, 도련님.”
“…….”
“도련님께는 하도 커 보이기에 첫째 도련님 옷인 줄 알았지 뭐예요. 지금 가져다드릴까요?”
일리야의 시선이 제리를 향해 내려왔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것 봐. 왜 의심해, 제리.”
“미안.”
섭섭해하는 일리야를 한 마디 말로 달랜 제리는 조슈아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럼 부탁해, 조슈아. 내 방에 갖다 놔 줄래?”
“네, 도련님.”
조슈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그가 이 저택에서 일한 지도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조슈아는 저택의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지켜봐 왔다. 아이들은 다들 날이 갈수록 쑥쑥 커 갔다. 다른 도련님들은 딱히 봐주지 않아도 스스로 잘 먹고 잘 자고 잘 자랐으나, 이 집의 막내만은 달랐다. 다들 잠시 한눈을 팔면 크게 다치거나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막내 도련님에게는 더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인지 저택의 시종들은 모두 제리를 멋대로 아들이나 손자, 혹은 동생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도련님들 중 가장 애틋한 제리 도련님께 어느덧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 조슈아는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대견하고, 또 아쉬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조슈아뿐만이 아닌지, 손을 뒤로해 은근슬쩍 제리의 손을 잡는 일리야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시녀들도 있었다.
그 소중한 사람의 성별은 그리고 그의 옷이 왜 제리의 방에 있었는가는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백작은 내내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제리, 어떻게 결혼을 이 부모에게 말도 없이 할 수가 있니?”
“……네?”
뭐라는 거야? 결혼이라니?
일리야가 바뀐 이름을 밝히며 수줍게 자기소개를 했다는 것을 모르는 제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도 참! 우리 제리가 사람들 눈에 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죠. 둘만 단출하게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애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말아요. 상처받겠어요.”
그녀는 백작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소곤거렸다. 제리를 힐긋거리며 눈치를 보는 것은 덤이었다.
뭐야……. 상처를 받아? 내가?
“그래도 난 너무나 서운해서……. 애가 성인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말도 없이….”
“여보! 세상이 바뀌었어요. 요새 젊은 애들은 원체 빨라서 우리가 이해를 해 줘야 해요.”
그녀는 제리와 일리야를 번갈아 보더니 다 이해한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체 뭐가 빠르지.’
제리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큼큼. 일리야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짜고짜 갓난애를 안아 들고 제 새끼라며 부모 뒤통수를 치는 것보단 우리 제리가 훨씬 낫죠. 안 그래요?”
“그야 그렇지만…… 여보.”
“더 이상 토 달지 말아요!”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결혼이라니. 세상이 바뀌었다니? 일리야가 무슨 말을 한 게 틀림없었다.
“…….”
까딱까딱, 제리의 손짓에 일리야가 고개를 살짝 숙여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방금 전에 시선을 돌리는 것을 다 봤는데,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범인은 일리야가 확실했다.
“너, 무슨 말 했어.”
“내가 뭘?”
“좋은 말로 할 때 고백해.”
“응, 제리. 좋아해…….”
곧장 튀어나온 고백에 제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일리야, 죽고 싶냐?”
“…….”
오늘까지만 살래? 그가 귓가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인 말에, 일리야가 침을 꼴깍 삼켰다.
“난 안 죽을래, 제리……. 너랑 오래오래 살 거야.”
“그것도 네 대답에 달렸어.”
“그냥 나는 내 이름을 말한 것뿐인데.”
“이름?”
“으응….”
“네 이름은 일리야잖아.”
그 말에 일리야는 수줍게 웃으며 그게 아니야, 라고 말했다.
이제 일리야가 아니라니, 그럼 내 앞에 서 있는 건 누구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제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리는 바보야.”
제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벌써 잊은 거야……? 일리야 루트잖아, 나.”
“……?”
그게 무슨. 제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부모님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들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세상에. 그걸 이야기했단 말이야? 꽉 그러쥔 주먹이 이내 풀렸다.
“네가 그래도 좋다며. 제리 네가 붙여 준 이름인데…….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
“…….”
제리는 자신의 아버지인 백작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자신과 같은 갈색의 눈동자가 촉촉해 보였다. 제발 아니라고, 부디 오해였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
“…….”
이름이 바뀐 것은 맞았다. 때문에 오해는 아니라 할 말이 없었다.
‘씨발, 망했네…….’
꼭 달라붙은 입술이 움직이지 않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멋쩍게 웃었다. 안면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이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하지만 결혼을 한 건 아닌데…….’
그런데 아버지가 너무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어 제리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 오해를 풀어야 했다. 그런데 일리야도 덩달아 멀뚱히 눈만 깜빡거렸다. 당장 해명할 사람은 일리야뿐인데 말이다.
제리는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곤 그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네가 어떻게 좀 해 봐.”
“…….”
일리야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모님의 대화가 잠시 비는 틈을 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모든 걸 다 바쳐 제리를 행복하게 해 줄…….”
개새끼가…….
“아야야……, 왜 또 때려?”
“…….”
그게 아니라 오해를 풀어 달라는 건데, 거기서 오해할 말을 더 얹으면 어떻게 해.
‘아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스트레스가 1만큼 증가합니다.]
망할. 제리는 답답한 마음에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에 일리야가 시스템창을 밀어내며 ‘머리 아파?’ 하고 물었고,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던 백작마저 걱정 어린 눈길로 바뀌어 제리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일단 어디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날 저녁이 되자, 제리의 방에는 편지 한 장만이 남았다.
[형들에게.
나 여행 가. 부모님껜 예전에 말씀드렸어. 그런데 형들한텐 말하는 걸 깜빡했지 뭐야. 음…… 정신이 없어서 말할 틈이 없었잖아. 아무튼 얼굴은 보고 가고 싶었는데 그러면 늦을 것 같아 먼저 떠날게. 우리는 야간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어. 윈제드행이고 객실 번호는 따로 알려 주지 않아도 되지? 따라올 것도 아니니까. 돌아올 때쯤 되어 다시 편지할게.
참, 일리야와 함께 가니까 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이제 체력도 많이 좋아졌고…….
거짓말 조금 보태서……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선물 사 올게.
다녀올게요!
P.S 지금 나와도 이미 늦었어. 배웅 오지 마.
-급하게 짐 챙겨 나가는 제리가-]
헐레벌떡 외투를 걸치며 계단을 내려오는 로베인의 손에는 쪽지가 쥐어져 있었다. 제리가 집을 나서기 전에 급하게 휘갈겨 적는 것을 보았다. 백작 부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가 봐도 늦었단다.”
이미 너희 빼고는 배웅도 다녀왔는걸. 그녀는 홍차 향을 맡으며 웃었다.
“정말 늦었어요?”
“한참 늦었지.”
그에 여전히 똑 닮은 두 사람이 징징대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어머니, 어떻게 그 둘만 보내실 수 있어요!”
“맞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 그래도 두 사람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소문의 그 일리야가 ‘루트’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충분히 놀랐다.
“로베인, 조이. 나는 황…… 아니, 일리야를 믿은 게 아니라 제리를 믿은 거란다. 그 애는 혼자서도 잘할 거야. 몸이 약하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우리가 품고 있을 수는 없잖니.”
그녀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아인스도 여유롭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어머니 말이 맞아.”
“맞긴 뭐가 맞아.”
아인스는 조이의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미간을 찌푸리며 그들을 꾸짖었다.
“제리도 이제 다 컸잖아. 너희가 어린애야? 이런 것 가지고 호들갑 좀 떨지 마.”
“다 커? 웃기시네. 제리는 아직 어려. 그런 애를 어떻게 혼자 여행을 보내!”
“열여덟이면 다 컸지.”
“형이나 잘해. 컵 거꾸로 들었거든?”
“…….”
“드디어 우리 형이 미쳤군.”
저것 봐, 로베인. 이제 호들갑은 누가 떨고 있는 거지? 조이가 그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
아인스는 내용물이 들지 않은 작은 컵을 거꾸로 든 채, 컵의 바닥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는 태연하게 컵을 컵 받침에 내려놓으며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입가를 닦았다. 그에 백작 부인의 표정이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바뀌었다.
쌍둥이들은 아인스의 옆에 털썩 주저앉고는 너무한다며 섭섭함이 역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 보는 눈이 있는 제리가 좋아하는 사람이니 나쁜 놈은 아닐 테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확신이 없었다. 평생 가도 제리는 자신들에게 있어 소중한 동생이기에, 과하다 싶게 걱정을 하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형, 다리는 또 왜 떨어?”
로베인이 덜덜 떨리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물었다. 진동의 근원은 아인스였다. 조이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사실은 형도 제리가 걱정되는 거지?”
“……당연히 걱정은 되지.”
아인스는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일리야가 두고 간 하얀 고양이가 폴짝 뛰어올라 아인스의 허벅지에 자리를 잡았다. 입을 쩍 벌리며 기지개를 한 번 켠 고양이는 나른하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
[사람을 찾습니다.
*나이:불명
*사유:비밀
*보상:50만 골드. 추후 협의 가능
*숨만 붙어 있게 한다면 뭘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긴급합니다! 잡아만 주십시오.]
여기까지 오면서 열 번도 넘게 보았던 내용이었다.
“일리야, 이것 좀 봐. 객실 안에도 붙어 있어!”
얼마나 간절하게 찾길래 여기저기 아무 데나 다 붙어 있을까. 제리는 흥미로운 눈으로 기차 안에도 붙어 있는 종이를 들여다보며 키득거렸다. 종이를 붙일 수 있는 곳이면 도배하듯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오면서도 몇 차례나 저 그림을 봐야 했다. 누가 그린 건지, 특징 하나는 잘 살려서 그렸다고 생각했다. 종이 안에 크게 들어찬 얼굴은 마탑주의 것이었다.
“그런데 마탑 수배는 이번이 처음이지?”
“몰라.”
“처음일 거야. 내가 처음 보는 거니까.”
여행을 떠난다더니, 이번엔 마탑에 무슨 말을 남기고 도망친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물건을 훔쳐서 튄 건가? 그동안 가만히 있던 마탑에서 이렇게 보상금까지 내걸 정도면 무슨 짓을 하고 나온 건 맞을 텐데…….
“난 모른다니까…….”
묘하게 축 처진 말투에 제리는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일리야가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화났어?”
“화 안 났어. ……그래도 나랑 있는데 다른 사람 생각 하지 마, 제리.”
“알았어.”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게 싫은 모양이다. 일리야의 나직한 말에 제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탑이든 마탑주든,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볼 일이고, 지금은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의 초입이니 그저 들뜬 기분을 즐기면 된다.
“안이 꽤 넓네. 꼭 방 같아.”
“기차야.”
“……그건 나도 알아.”
일리야는 ‘아는데 왜 저러지?’ 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나, 이런 기차는 처음 타 봐.”
커다란 액자 같은 기차 창문 밖으로 화창한 날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꼭 그림 같았다.
“처음……? 나도 기차는 처음이야, 제리.”
“그렇겠지.”
늘 제 주위를 스토커처럼 빙빙 맴돌던 일리야가 혼자서만 기차를 탈 일이 어디 있었겠는가.
“왜 이렇게 들떴어?”
“기분이 좋아서.”
“나도 좋아……. 제리 너도 나랑 여행 가는 게 좋은 거지?”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이상한 대답이야. 그건 긍정이야?”
당연히 좋지. 굳이 대답을 들어야만 알겠어?
그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창틀에 손을 얹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맑은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어린아이 키만 한 황금빛 겨울 갈대가 휘청거렸다. 하얀 눈은 여전히 녹지 않아 땅의 군데군데를 뒤덮고 있었다.
[기분이 좋습니다. 스트레스가 10 감소합니다.]
기대가 됐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경험을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창 바깥 풍경을 구경하던 와중,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보채야 할 일리야가 아까부터 조용하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새 잠들었나?’
제리는 창에서 멀어져 침대에 걸터앉은 일리야를 향해 돌아섰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착각인지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은 것도 같았다.
* * *
적당히 건조한 공기가 피부를 감쌌다. 일리야는 눈을 살며시 뜨고 고개를 돌렸다. 얇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하얀 베개 위에 펼쳐지듯 흐트러져 있었다. 체력을 회복시켜 주며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어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였다. 제리는 소리도 없이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일리야는 그런 제리를 내려다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리의 상태를 보여 줘.”
그는 제리의 미간에 손가락을 살포시 가져다 대며 그가 가끔 하곤 했던 말을 그대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력으로 된 희뿌연 형체가 눈앞에 드러났다.
체력:200/200, 근력:105, 지능:200, 매력:100, 스트레스:10/100, 검술:1, 마법:5600
명성치:10 (0.5%의 확률로 가끔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깁니다.)
감각 수치 -○-------- (현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