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반지의 주인 (25/29)

#02. 반지의 주인

저들은 도대체 뭘 찾고 있는 걸까?

숙소 앞이 특히 많기는 했지만, 마을 곳곳에 수상한 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제리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여행자들도 그리고 가게 안의 상인들까지 무슨 일인지 궁금한지 회색 후드의 사람들을 힐끔거렸다.

일리야는, 허벅지 안쪽이 욱신거려 느려진 제리의 걸음에 맞춰 걷고 있었다. 그는 다들 신경 쓰는 수상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저 앞을 응시하는 제리만이 존재했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어젯밤에는 닫혀 있었던 책방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수상한 사람들이 또 한 번 우르르 튀어나왔다. 이 한적한 도시에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번에 투입된 것 같았다. 감옥에서 도망친 범죄자라도 있는 걸까. 그건 그것대로 조금 무서운데……. 제리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또 허탕을 쳤다며 혀를 내두르고는 다른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리, 안 들어가?”

일리야는 먼저 책방 문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목적지 앞까지 와서 들어가지 않고 고민 중인 게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긴, 저 태평한 애가 내 고민을 이해할 리가 없지. 제리는 씩 웃으며 말했다.

“들어가자.”

문이 활짝 열렸다. 안은 생각과는 다르게 굉장히 어두웠다. 명색이 책방인데 글자 하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계세요?”

제리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디뎠다. 그가 문턱을 넘는 그 순간, 벽에 달린 등불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부터 시작된 빛은, 번지듯 옆의 등불로 옮겨붙었다. 그리고 이내 3층 높이쯤 되는 책방이 오렌지색의 빛으로 가득 찼다.

이런 건 처음 봐. 웬만해선 별말 없는 일리야까지 와,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밖에서 봤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규모의 서고였다. 천장까지 가득 들어찬 책꽂이에는 빈틈 하나 없이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큼큼한 종이 냄새가 코끝에서 아른거렸다.

“주인님?”

“……?”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저 끝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주인님!”

제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제리의 뒤에는 일리야만 멀뚱히 서 있었다. 일리야도 저 아이를 아는 눈치는 아니었다. 주인님이라니……. 제리는 어리둥절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고, 남자아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등불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이의 뺨이 붉어진 것 같았다.

“저 애, 네 노예야……?”

“미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제리는 노예를 둔 적이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제국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된 지 어언 몇백 년이 넘었는데, 무슨…….

[이벤트 구역에…….]

순간 놀란 일리야가 제리를 덥석 껴안았다. 그러자 글자가 하나씩 새겨지던 시스템창이 흔적도 없이 확 하고 흩어져 사라졌다. 제리는 이벤트 구역이란 것보다도 일리야의 반응에 더 놀라 어깨를 흠칫 떨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껴안았지? 일리야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 순간, 어느새 아이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가오는 소리도, 기척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말이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얜 할 줄 아는 말이 주인님이라는 말밖에 없는 걸까. 제리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곤란하단 표정을 내보였다.

“시키실 거라도 있으세요?”

“그냥 돌아보고 싶은데…….”

“주인님, 그럼 찾으시는 거는요?”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마. 사람 착각했어. 그리고 찾는 것도 딱히 없어.”

남자아이는 제리의 말에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다 배시시 웃었다.

“네, 알겠어요, 주인님!”

아이는 뒤를 돌아 저 너머로 총총거리며 사라졌다. 이런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을 테지만, 아이는 사람답지 않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새까만 눈 속에서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잠깐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사이에도, 눈이 마주쳤다기보다는 그냥 몸의 한 부분을 의미 없이 응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눈빛이…… 죽어 있다고 해야 하나. 시체를 본 적은 없지만 죽은 사람의 눈같이 묘하게 생기가 없었다.

“사람 아니야.”

“어?”

“사람이 아니라고…….”

일리야가 등 뒤에서 오싹하게 속삭였다. 제 생각을 읽은 것도 아닐 텐데, 절묘한 타이밍에 아이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하다니. 제리는 숨을 급히 집어삼켰다. 사람이 아니면…… 유령……?

“추워? 왜 떨어?”

“추운 건 아니고…… 그런데 너, 무거워.”

일리야는 여전히 무게를 실어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래서 전혀 춥지는 않았다. 제리는 가까운 책꽂이에서 아무 책이나 하나 뽑아 들었다.

<시간축의 비틀림에 대한 연구, 첫 번째>

더럽게 재미없어 보였다. 책 내용도 별것 없이, 첫 장부터 끝까지 깨알 같은 마법 수식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다시 책꽂이에 그것을 꽂아 둔 제리는 고개를 돌려 일리야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제게서 떨어지지 않고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떨어지라니까.”

“그냥 이러고 있어. 사람도 아닌 저게 무슨 방법을 써서 널 빼앗아 갈지 모르니까.”

그는 아이가 지나간 통로를 흘깃 바라보며 속삭였다. 저 너머에서 고개만 반쯤 내민 채 그들을 지켜보던 아이가, 씩 웃으며 다시 책꽂이 너머로 몸을 숨겼다.

“방금 그…… 유령…….”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 그럼 어떻게 움직이지? 좀비 같은 건가? 제리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순간 희게 질린 얼굴을 내려다보며, 일리야가 희미하게 웃었다.

“유령이라니. 그건 유령 같은 거 아니야, 제리. 어린애도 아니고…… 유령을 믿어?”

“…….”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영혼은 있다. 왜냐하면 자신 역시, 전생의 영혼으로 이승을 돌아다녀 본 기억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유령도 있겠지. 이 근처에는 높은 설산도 있고, 일 년 내내 겨울이니까 얼어 죽은 사람도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유령도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시어스에게 들은 기억이 있어. 그때 너도 함께 있었는데. 기억 안 나?”

“전혀.”

제리는 고개를 저었다.

“마력은 느껴지지만 살아 있지 않아.”

“……?”

“정령이잖아.”

“정령?”

정령이란 오랜 세월이 지난 사물에 깃들어 있거나, 정령계에서 계약을 맺어야만 인계로 나올 수 있는 존재였다. 웬만한 마력으로는 그 계약을 맺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정령학도 거의 죽어 가는 추세에 있는 학문이었다.

“딱 한 계통의 마력만 강하게 느껴졌어.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없잖아.”

“그렇지.”

마력을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아주 조금씩은 가지고 사니까. 그러니 단 한 가지 마력만 느껴지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령이라면 가능하다.

“무슨 정령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아니야.”

“…….”

그 정령이 왜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거지. 제리는 의문을 가득 담고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다시 자신을 훔쳐보던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눈을 피하지도 않고 개구지게 웃었다. 계속 주위를 맴도는 걸 보면 할 말이 있는지도 몰랐다.

“일리야, 잠시만.”

제리는 일리야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겨우 빠져나왔다. 그냥 저 애를 잡아다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왜 자신을 ‘주인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지. 할 말이라도 있는지. 그리고…….

“잠깐……!”

[이벤트 구역에 들어오셨습니다.]

이벤트 구역? 아직도 뭐가 남아 있어?

등 뒤를 지키고 서 있던 일리야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이벤트 구역과 현실의 공간이 분리된 것 같았다. 아직 내게 남아 있는 이벤트가 있는 건가. 제리는 속으로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저 너머에서 기웃거리던 아이는, 이내 제리를 향해 총총 뛰어왔다. 그리고 제리 앞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주인님!”

또였다. 제리는 의문을 담아 물었다.

“내가 왜 주인님이야?”

“주인님이니까요. 그 반지를 가지고 있으면 주인님이에요.”

제리는 왼손 엄지손가락에 단단히 끼어 있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마탑주가 떠넘기고 튀었던 반지였다. 책방 간판에 당당히 새겨져 있던 마탑의 문양. 그리고 마탑의 반지.

아무래도 여긴 마탑과 관련된 공간임이 틀림없었다.

“넌 뭐야?”

“여길 관리하는 책정령이에요. 나는 주인님 허락 없이 문을 넘어가면 사라져요. 이 공간도 내가 없으면 모두 사라지구요.”

작은 손가락이 문턱을 가리켰다. 책정령이라 그런 걸까. 아이는 이 책방을 벗어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제 문을 열어 드릴 수 없었어요. 이곳은 해가 떴을 때에만 열리거든요! 내가 그렇게 정했어요.”

“그렇구나.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렸던 거지?”

“네!”

아이는 이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두 손을 모아 환하게 웃었다. 고개의 움직임에, 어깨에 닿는 까만 중단발이 살랑 흔들렸다.

“전 주인님이 만약 자길 찾으면 이걸 전해 주라고 하셨어요.”

그는 제리에게 네모난 모양으로 접힌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전 주인이 누군데?”

“전 주인님은 전 주인님인데요?”

이미 알고 있잖아요. 아이는 거기까지 말하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송곳니가 유독 뾰족하다 느낀 찰나, 시스템창이 다시 떠오르며 같은 공간 두 개가 겹쳐지듯 보였다. 묘하게 반짝거리는 안개가 주위를 감쌌다. 안개가 몸을 가볍게 한 번 훑고 흩어진 순간이었다.

[이벤트 구역에서 벗어나셨습니다.]

덥석. 일리야의 팔이 순식간에 제리를 옥죄듯 껴안았다.

[체력이 1만큼 깎입니다.]

“으악.”

“어디 갔었어?”

무척 짧은 시간이었다. 안이 온통 엉망이 되었다. 일리야가 이 안을 이 잡듯 뒤진 모양이다. 책장이 비틀려 있는 곳도 있었고, 책 몇 권이 삐져나와 바닥에 떨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앞머리가 땀에 젖어 조금 뭉쳐 있었다. 숨도 조금 거칠었다.

“숨 좀 골라. 그 애, 책정령이래.”

지금은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리는 일리야의 예상이 맞았음을 그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걔랑 얘기했어? 어디서?”

“난 쭉 여기에 있었어.”

“……여기에 있었다고?”

“응. 어제 왔다가 돌아간 것도 알고 있더라. 나한테 전해 줄 게 있었대.”

“……그런 말 하려고 말도 없이 사라진 거야?”

“꼭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 나도 갑자기 네가 안 보일 줄은 몰랐지. ……그래도 금방 왔잖아? 아무 일도 없었어.”

제리는 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거짓말도 아니었다. 이벤트 구역이라는 말이 일리야가 붙잡아 뜨려다 말았으니, 잠시 떨어지면 다시 발생하리라는 것은 짐작했다. 하지만 이벤트 구역으로 들어가면 그 모습이 일리야에게까지 보이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아무래도 일리야에게는 제 말이 그리 가볍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눈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목울대가 한 번 꿀렁 움직였다. 꼭, 울음이라도 집어삼키는 것처럼.

“일리야, 화났어?”

“…….”

혹시나 해서 물은 말에 대답이 없었다. 제리는 다시 한번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갑자기 사라져서 화가 났느냐고. 일리야는 화가 났다고 대답하는 대신에, 감정이 잔잔하게 내리깔린 눈을 돌려 시선을 피했다. 화를 낸 것도, 짜증을 부린 것도 아니고 고작 고개만 슬쩍 돌린 아주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제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하기 곤란해서 수줍어하며 시선을 피한 적은 있어도 이런 대화를 하다 눈을 피한 적은 없었다. 나랑 이야기하기 싫은 건가? 정말 그만큼 화가 많이 난 걸까?

제리는 고개를 들어 올린 채 아무 말이 없는 일리야를 바라보았다. 꽉 끌어안은 탓에 일리야에게 찰싹 달라붙은 자세였다. 누군가가 들어와 이 광경을 본다면 흠칫할 정도로, 너무 가까웠다.

“놀랐어? 내가 갑자기 사라져서?”

일리야는 입을 다물고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러면?”

“……무서웠어.”

비슷한데 미묘하게 다른 말이었다.

말을 꺼내기가 그리도 어려운지, 일리야는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눈을 꼭 감고 말을 이어 갔다.

“제리, 나는 네가 무서워.”

“뭐?”

“너 말곤 무서울 것도 없어, 나는. 제리 네가 가끔 정신 못 차리고 아파하는 것도 무섭고…… 내게 질려서 싫어지면 어쩌나 고민도 돼.”

“갑자기 네가 왜 질려? 말이 돼?”

“……가볍게 말하지 마. 난 하루 종일 네 생각만 하는데,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일리야는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리는 웃음기를 얼굴에서 모조리 몰아내고 그의 말을 머릿속에서 곱씹어 보았다.

‘내가 너를 싫어하게 될까 봐 무섭다고?’

……뭐, 그럴 수는 있다.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미움받을까 봐 두려워하니까. 사람이라면 늘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일리야가 말한 것과 이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말을 해 줘야 알지.”

내가 너에 대해서 뭘 아느냐고 불평하기 전에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그걸 얘기해 줘야 알지.

겉으로 다 보일 정도로 크게 티가 나지도 않았고,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말해 보라고 부추기면 모른 척하고 넘겨 버리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네 마음을 어떻게 읽겠느냐고. 마음속으로 할퀴어진 상처를 혼자서 감싸고 있는데, 어떻게 눈치를 채.

그 상처를 정말 자신이 줬는지, 아니면 혼자 고민을 삭이다 만든 상처인지는 일리야만이 알 테지만.

“일리야.”

“…….”

일리야는 눈을 들어 제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숨기지 마. 그냥 네 마음속에 있는 걸 가감 없이 다 말해도 돼.”

“…….”

“네가 가끔 날 너무 어린아이처럼 취급하는데…… 내가 늘 말했잖아.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른이거든.”

“…….”

“그래, 믿지 마라. 그래도 다 말해도 좋다는 건 진심이야. 괜히 혼자 삭이다 상처받지 말고 섭섭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바로 말해. 나도 그럴게.”

일리야는 아무 말도 없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물만 흐르지 않았지, 이미 그의 눈가는 붉게 달아올랐다. 감추어 두었던 감정이 표정에 드러났다. 그는 의외로 이런 점에서 솔직해지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뭐가 그리 서러운지. 그게 가장 궁금했다.

“말해 줘. 너랑 싸우기 싫단 말이야.”

“싸워……?”

“말로 해서 해결이 안 되면 싸울 거야.”

저 예쁜 머리카락을 다 쥐어뜯어 놔서라도 모조리 토해 내게 만들 작정이었다. 일리야는 비장한 표정의 제리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때였다.

와그작.

“……?”

책꽂이 위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부스럭, 와작.

어린애 모습의 책정령이 책꽂이 맨 위에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주전부리를 베어 물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인사라도 해 주는 것 같았다.

“안녕!”

“…….”

“이런 것도 오랜만에 보니까 재밌네. 요새 되게 심심했거든요. 마저 하세요, 주인님! 나는 없는 사람으로 쳐도 돼요. 참, 나는 사람이 아니고 정령이잖아!”

아이는 농담을 하고서는 혼자 좋아라 배를 잡고 낄낄 웃었다. 지금 하려는 말은 어린 책정령이 들을 만한 내용이 아닌데 말이다.

“…….”

그렇게 생각한 순간, 책정령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원인일 일리야가 손을 내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저 끝에 묶어 놨어. 우리 둘만 얘기하고 싶어서.”

“이제 말해 줄 거야?”

“해야지. 안 그러면 나랑 싸우겠다는데…….”

그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올리며 느리게 말했다.

“……제리 상태를 보여 줘.”

그리고 제리의 상태창을 불러왔다. 불투명한 시스템창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제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감각 수치를 1로 내린 것을 들킬까 조마조마했지만, 일리야는 그를 미처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제리에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이건 왜?”

일리야는 한참 시스템창을 빤히 응시하다 말했다.

“제리.”

“응.”

“……이건 불공평해.”

제리는 순간 든 의문에 고개를 기울였다.

“왜?”

설마 일리야도 상태창이 가지고 싶은 건가. 그것은 곤란했다. 이건 주고 싶다고 해서 냉큼 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곤란해하는 제리의 얼굴에, 일리야는 상태창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내 이름은 없잖아. 전부 다 지웠잖아. 그래서…… 나에 관련된 건 하나도 알려 주지 않는다며.”

“응.”

제리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엔딩을 볼 예정이었던 날, 눈앞에 수십 차례 ‘시스템 오류 발생’이라는 글자가 떠오른 뒤 호감도 시스템이 파괴되었다. 그래서 일리야의 이름도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건 왜 아직도 네 옆에 있어?”

“…….”

하지만 그게 다였다. 호감도 관련 요소만 사라졌을 뿐, 시스템은 여전히 제리의 곁에 남아 있었다. 가끔 소소한 일일 퀘스트가 발생해 작은 행운을 안겨 주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이제는 거의 일상과도 같아서 크게 신경이 쓰이거나 거슬리는 것도 없었다.

“그게 거슬려?”

“너무 싫어, 제리.”

“……왜?”

좋아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왜냐하면 일리야는…… 고작 마력의 응집체에 불과한 이게 멋대로 속내를 파악하려 든다고 꽤나 불쾌해했었다. 이제 와서 싫다는 것이, 제리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점이 있는 것은 괜찮아. 어차피 넌 천천히 다 알려 줄 테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보다 너에 대해 먼저 아는 것은 싫어.”

이건 사람이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마력으로 똘똘 뭉친 시스템창인데. 일리야도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닐 터였다.

“내가 그 정도 참견은 해도 되는 거잖아…….”

“…….”

“제리.”

내가 너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 일리야는 처량하게 고개를 푹 떨구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일리야는 시스템창에 질투를 하고 있었다.

“이게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는 거 알잖아. 그래도 싫어?”

“알지만…… 싫어.”

마탑주는 그의 ‘여행’이 끝나면, 모든 것을 거두어 가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 말뜻은 즉, 시스템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모두 그에게 달렸다는 말이었다. 자신이 원치 않는다고 해서, 당장 이 시스템을 모두 없애 버릴 수는 없었다.

“안 보이게 만들 방법을 찾아보자.”

“……어?”

“나도 이게 마음에 들지는 않아. 건방지거든.”

“…….”

일리야는 덤덤하게 제리를 바라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정말 괜찮아? ……내게 실망하지 않았어?”

“무슨 실망?”

“솔직하게 말해도 돼…….”

실망할 짓을 했어야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제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실망 같은 건 안 했어. 왜 그런 생각을 해?”

“…….”

“넌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어, 일리야.”

일리야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긴장이라도 했는지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제리, 넌…… 누구든 네게 집착하거나 구속하는 게 싫다고 했잖아.”

“그래서 네가 날 아무것도 못 하게 탑에다 가뒀어?”

“아직은…….”

“아직이라니. 그럼 언젠간 그러고 싶어?”

“잘…… 모르겠어, 제리.”

그는 물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제리도 덩달아 생각이 많아졌다. 시스템의 존재가 기분이 나빴던 일리야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을 만들어 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당연히 싫었다. 좋을 리가 없다. 자유를 거세당하고 발목이 꺾여 평생 한곳에만 갇혀 사는 상황을 그 누가 좋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전만큼 막연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그는 제 앞에서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쩔쩔매는 남자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싫어할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일리야는 속마음을 감추지 못해 있는 대로 다 드러내 보이는 편이었다. 졸음도. 슬픔이나 서운함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절대 감추지 않았다.

“일리야.”

그렇기에 제리는 일리야를 믿었다.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나는 괜찮아. 화 안 났어. 아무 말 안 하고 혼자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아.”

“…….”

“그리고 이 정도는 집착도 아냐, 멍청아.”

“……이 정도는 괜찮아?”

“엄청.”

그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이내 별빛 부스러기를 담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맑은 눈동자에 수많은 감정이 담겨 일렁거렸다. 그리고 가장 가운데 제리를 담으니 다른 건 더 담을 수 없을 만큼 꽉 찼다.

일리야는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 다시 평소의 표정을 되찾았다. 끝이 올라간 눈꼬리가 흥분감에 움찔거렸다. 축 처지고 서운해서 우울해하던 모습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일리야는 제리를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탓인지 자꾸만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감동받았어? 이제 그만 인정해. 난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듬직하고 어른스럽지?”

“…….”

일리야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의 표정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내가 그랬잖아. 진짜 어린 건 너라고.”

“아, 응.”

그때, 짝짝짝 소리가 들리며 위에서 종이 쪼가리가 눈송이처럼 팔랑팔랑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리야가 묶어 놨다고 했던 책정령이었다. 어떤 재주로 빠져나온 건지, 이번에도 같은 자리에 나타나 종이를 쫙쫙 찢어 머리 위로 흩뿌리고 있었다.

“재밌냐?”

제리의 물음에 아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배시시 웃었다.

“재밌다! 더 싸워요, 주인님.”

“제리한테 주인님이라고 하지 마.”

“넵. 알겠습니다, 안주인님!”

발랄한 정령의 말에 일리야는 순간 말을 잃었다. 제리도 황당하단 얼굴로 미친 책정령을 바라보았다.

아, 백 년 전에는 여기서 치정 싸움으로 주먹질도 했었는데! 재밌었어! 책정령은 과거를 회상하며 황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령이 그딴 식으로 말해도 돼?”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정령이거든요? 재밌었으니 재밌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제리한테…….”

“네넵, 안주인님!”

책정령이 귀를 후비며 대충 웅얼거렸다. 일리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령은 한 번도 안 건드려 봤는데.”

“때릴 거예요? 나도 인간한텐 안 맞아 봤는데.”

제리는 어린애 모습의 정령과 기 싸움을 하는 일리야를 한심한 듯 바라보았다. 한참 눈싸움을 하던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정령은 곧 서로에게서 관심을 꺼 버렸다.

“……가자, 제리. 저건 무시해.”

일리야는 제리를 잡아 돌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이네. 이번에는 안 돌아갈 것 같아.”

급하게 문가로 다가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어린 인간의 외관을 하고 있는 책정령이 턱을 괴며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는 솔직한 정령이라 거짓말은 안 한단 말이야. 마법사들이 물어보면 답해 줄 수밖에 없어.”

정령의 중얼거림은 너무 작아 다정하게 붙어 있는 두 사람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싸늘한 바람이 일며 문이 쾅 닫혔다.

“조만간 잡혀가겠네!”

내가 다 말할 거니까. 아이는 해맑게 웃었다. 서고 안의 모든 등불이 동시에 훅 꺼지고, 짙은 어둠이 공간을 덮쳤다. 책정령이 뭉그적거리고 있던 자리도 어느새 무엇도 없이 텅 비었다.

[반지에 대한 실마리를 남겼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뒤를 쫓기 시작합니다.]

* * *

책정령에게서 건네받은 쪽지를 쓴 사람은 마탑주인 듯했다. 봉투를 봉한 밀랍에는 마탑의 인장이 꾹 눌려 찍혀 있었다.

조심히 봉투를 뜯자 나온 빳빳한 종이 위에는, 날카로운 필체로 ‘얌전히 끌려가게.’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제리, 이거 무슨 뜻이야?”

“나도 몰라. 그 할아버지랑은 친하지도 않은데 왜 장난질이지…….”

그 쭈글쭈글한 영감탱이. 노망이 난 게 틀림없었다. 다 늙은 게 뭐만 하면 히죽거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네가 왜 끌려가……. 그렇게 안 둬.”

“응응, 고마워.”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마탑주가 제리에게 이 쪽지를 전해 주기 위해 그보다도 먼저 그곳에 들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추적하는 수상한 무리의 사람들은 아마도 마탑에서 나온 사람들일 것이었다.

“……네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거기 갈 것은 어떻게 알고 이런 걸 남긴 거야? 일리야는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혹시 숨겨진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쓸데없이 봉투 안까지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거 해서 뭐 해?”

“저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먼저 찾아야 할 것 아니야…….”

“…….”

일리야는 쪽지를 쓴 게 아마도 마탑주일 거란 말을 듣자마자 조급해져 허둥지둥했다. 그를 찾아내 협박이라도 할 기세였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제리는 불가능 쪽에 표를 던졌다. 마탑주가 작정하고 숨는데 그를 찾아낼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스승님의 입을 통해 들은 것으로도 그의 성향을 알 수 있었다.

‘도망에 신이 들린 남자라고 그랬지. 그런 사람을 무슨 수로 잡는다는 거야.’

밤이 다 되어 가는데도 바깥을 분주하게 나다니는 저자들마저도, 하루 종일 혼란스러워 보였다. 저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하루 종일 도시를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데도 꼬리조차 밟히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제리!”

몸을 살짝 일으킨 것뿐인데 일리야가 조급하게 소리쳤다.

“헉!”

“어디 가?”

그런 일리야의 반응에 오히려 제리가 더 놀랐다. 심장이 콩알만 하게 쪼그라들어 세차게 콩콩 뛰었다. 갑자기 왜 소리를 질러! 그는 처진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대답했다.

“옷 갈아입을 거야! 놀랐잖아!”

“미안. ……옷은 그냥 여기서 입어…….”

“여기서?”

그 말에 일리야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일리야는 내내 제리가 어디로 다시 사라질까 두려운지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그 탓에 제리는 외투 소매를 그에게 꽉 붙잡힌 채 걸어야 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자신이 일리야에게 불안감을 안겨 준 것 같아 참새 눈물만큼 미안해졌다.

“씻고 나서 갈아입을 거야. 여기서 씻을 수는 없잖아?”

“내가 깨끗하게 해 줄게.”

“그거랑은 기분이 조금 달라.”

마법으로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씻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온몸을 물에 적시고 먼지를 씻어 내리는 게 훨씬 더 마음이 편했다.

“그럼 같이 씻자.”

“……돌았냐?”

그러다 또 어젯밤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내일은 정말 못 걸을지도 모른다. 제리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했다.

“난 안 돌았어, 제리…….”

“일리야, 나 어디 안 가. 그리고 여긴 아무도 없잖아? 뜨거운 물에 몸만 조금 풀고 나올게.”

“그래도…… 안 보이면 불안해.”

“문 조금 열고 있을게. 네가 부르면 바로 대답할 수 있게.”

“…….”

“많이 걱정되면 슬쩍 들어와서 봐도 돼.”

“응.”

“그렇다고 해서 계속 보면 가만 안 둬.”

일리야는 내키지 않아 했지만, 제리의 고집에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리는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두고 욕실 안으로 들어와,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일리야의 불안이 안쓰러워져 손끝을 멈칫했다.

“…….”

제리는 일리야가 보이는 집착이 안쓰러우면서도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사실은 조금 기뻤어.’

그래서 더 문제였다. 일리야는 정말 싫고 불안해서 저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자신이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아, 몰라…….”

제리는 고개를 홰홰 저으며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물에 몸을 담그니 피로가 싹 씻겨 나가듯 녹아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조금 쉬고 나면 내일은 몸 상태가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러면 빵집 주인이 가 보라고 추천했던 시장에도 가 봐야지. 그리고 뒤쪽 산등성이의 온천도.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눈여우가 가끔 사람들 앞에도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일 년 내내 녹지 않는 눈밭에 작은 발자국을 남기면서. 그러니 운이 아주 좋으면 그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우야, 여우야~.”

제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끝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그때, 문밖에서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발을 끌고 그 앞으로 다가서는 소리. 달칵, 문이 열렸다.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지만 귀를 기울여 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 별안간 시스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비밀 상점~ 출장 서비스~입니다. 항상 좋은 물건만 들여옵니다. 에이프런이나 동물 꼬리 등, 능력치를 높여 주는 특수 아이템을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비밀 상점?”

그게 왜 여길 와. 제리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벤트 발생! 비밀 상점, 첫 구매를 부탁해.]

Quest. 비밀 상점, 첫 구매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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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없는 게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밤을 즐겁게 만들어 줄 도구도, 잠깐 다른 사람이 되어 볼 기회도,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을 반나절간 사랑의 포로로 만드는 묘약도 가지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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