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마탑 (26/29)

#03. 마탑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성가신 게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마탑주라고 답할 것이었다. 그는 사람 성질을 벅벅 긁고 도망치는 데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쾅!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

높이 쌓아 올린 성냥개비가 문이 일으킨 바람에 의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숨까지 참아 가며 집중하고 있던 여자는 망연하게 숨을 내쉬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뭐야?”

이마에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힌 청년이 숨을 고르며 소리쳤다.

“탑주님께서 또……!”

“……또 튀었니? 그 망할 인간이.”

성냥개비 탑의 명복을 빌어 줄 겨를도 없었다. 배라미라고 불린 여자는 이를 갈며 벌떡 일어났다.

그 인간을 집무실에 넣어 둔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 청년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들이 꼭대기 층에 위치한 공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보글보글 끓던 작은 솥이 넘쳐 나 연보라색 액체가 책상 위의 서류를 흥건하게 적신 지 오래였다.

배라미는 정체 모를 마법약으로 엉망이 된 책상 위를 말끔하게 치워 버린 뒤 물었다.

“언제부터 자리를 비우셨지?”

“그게, 아무 소리도 나지 않기에 들어와 봤더니…….”

그 말은, 언제 어떤 방법을 써서 도망쳤는지 전혀 모른다는 소리였다. 잘 지키라고 세워 뒀더니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메모를 남기셨습니다.”

“메모? 보여 줘 봐.”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들의 탑주는 말도 없이 반년 정도 자취를 감추는 일이 허다했지만, 단 한 번도 머무는 곳을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배라미에게 한 면이 대충 찢어진 종이를 내밀었다.

[자네들의 탑주는 곧 윈제드로 떠난다네~]

“…….”

미친 분.

그녀의 손 안에 쥐인 종이가 구깃구깃하게 구겨졌다. 벌써 일흔여섯 번째 탈주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자신들을 잔뜩 도발하는 말까지 남기고 떠나지 않았는가. 이것은 일종의 도전장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를 가만히 둬서는 안 된다.

정확히 이틀 뒤, 노인을 찾는다는 벽보가 온 도시에 붙었다. 배라미는 그에 자신이 일평생 모아 온 전 재산을 걸 정도로 약이 올라 있었다.

* * *

“…….”

적용 반경이 그렇게 넓지는 않은지, 마법사들의 바로 옆에 다가가지만 않으면 수정구는 반응하지 않는 듯했다. 다만 저들에게 얼굴을 다 보여 버렸기 때문에 여전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휴, 지나갔어.”

일리야의 마법이 두 사람의 기척을 감췄다. 마법사들이 바쁘게 두 사람의 앞을 스쳐 지나갔고, 벽에 꼭 달라붙어 있던 제리는 그제야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책방 앞은 여전히 경비가 삼엄했다. 문 앞에 한 명 그리고 근처를 서성거리는 마법사가 둘. 그걸 보면 안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포진해 있을지 어느 정도 예상은 갔다.

“제리, 그냥 내가 다 기절시킬게.”

일리야는 그의 허리까지 오는 나무 막대기를 바닥에서 주워 들었다. 이게 왜 여기에 놓여 있지……. 제리는 막대기를 질질 끌며 몇 번 손에서 그것을 고쳐 잡는 일리야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상대가 마법사다 보니…… 물리적인 방법을 사용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리야는 검술 250이잖아.’

제리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일리야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씩 웃었다.

“나만 믿어, 제리. 나, 마검사야.”

그가 나긋하게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자부심이었다.

“아냐, 가지 말아 봐.”

너는 마검사가 아니라 마법사야. 제리는 팔을 들어 검술 250을 막아 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어?”

책방 문 앞에 꼿꼿한 자세로 서 있던 사람의 수정구가 붉게 빛났다.

“아무도 없는데 이게 왜 이러지?”

마법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잠깐의 간극을 두고…….

“여기다!”

번쩍! 조금 떨어져 있는 사람의 수정구도 붉은빛을 띠었다. 제리는 근처 골목의 공기를 움직여 발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나도록 만들었다. 그에 깜빡 속아 넘어간 그들은 동시에 반대쪽을 향해 우르르 뛰어가기 시작했다. 한 시간짜리 환상 마법을 걸어 두었으니 당분간은 열심히 뛰느라 바쁠 것이다. 그는 환상 마법에 있어서는 교수들마저 감탄할 만큼 일가견이 있었다.

“들어가자.”

“…….”

검술 250…… 아니, 일리야는 멍한 얼굴로 막대기를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는 제리의 뒤를 졸졸 따라 책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바로 앞에 서 있던 책정령과 마주쳤다.

“쉿!”

반가운 얼굴로 입을 열려는 책정령에게 묵언 마법을 걸어 버린 제리는, 입이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손짓하는 아이의 어깨를 쥐고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입구 쪽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제리는 고개를 수그린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물어볼 게 있어.”

“……!”

“너, 혹시 마법진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

“마탑의 좌표가 찍혀 있는 거야. 몰라?”

“……!”

책정령이 꾹 닫힌 입술을 우물거리며 손짓 발짓을 해 보였다. ……제리, 네가 말을 못 하게 했잖아. 일리야가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제야 제리는 그에게 걸려 있던 묵언 마법을 거뒀다.

“알아?”

“오우.”

“무슨 소리야.”

“안다는 뜻이에요, 주인님.”

그러니까, 그 주인님이라는 호칭은 조금…….

“그냥 제리라고 불러도 돼.”

“……제리…….”

일리야는 그걸 왜 말해 주냐는 듯 불만스레 제 이름을 불렀다.

“얜 일리야야.”

“오우.”

책정령은 장난처럼 대답하고는, 이내 “넵, 주인님. 그리고 안주인님!” 하고 덧붙여 말했다. 이름을 알려 준 보람이 전혀 없게 만드는 정령이었다.

“그럼 주인님도 날 네펜데르라고 불러요. 전 주인님은 날 ‘이보게’라고 불렀는데 엄청 짜증 났거든요!”

이만한 어린 정령에게 이보게, 라니. 그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아는 노인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네펜데르 님, 거기 누구 있습니까? 잭? 너냐?”

“네? 저는 아니에요.”

말소리가 들렸는지, 저 너머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네펜데르는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쭉 빼고 답했다.

“응, 있어! 주인님이 왔는데?”

“……붙잡아 두십시오!”

그걸 곧이곧대로 대답할 줄 몰랐던 제리는 화들짝 놀랐다.

“너……!”

“참. 마탑으로 이동하는 마법진은 종탑 뒤쪽 산등성이에 있어요. 따뜻한 물이 솟아나는 곳이에요.”

일리야는 제리의 손을 덥석 잡아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온천이야, 제리.

“네펜데르, 우리가 어디 가는지는 말하지 마!”

혹시나 해서 한 말에 네펜데르는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주인님, 그거 명령인가요?”

“그래!”

그 말만을 남기고, 두 사람은 이동 마법을 사용해 가까운 골목으로 사라져 버렸다. 네펜데르의 말을 듣고 뒤늦게 달려 나온 이들은, 문이 이제 막 닫히며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확인하고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가신단 말씀은 없었습니까?”

“있었어! 그런데 말은 못 하게 됐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 이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기 위해 문을 열고 튀어 나갔다. 네펜데르는 제리의 이름을 입 안에서 몇 번 굴려 보다가 히, 하고 웃었다.

* * *

쉬지도 않고 이동 마법을 사용해 가며 산등성이의 온천 여관에 도착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막상 건물 외곽에서 마법진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조금의 힌트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제리는 풀숲까지 뒤져 가며 마법진이 새겨진 장소나 물건을 찾기에 바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얀 함박눈까지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콜록.

일리야가 자신 몰래 기침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사시사철 겨울인 이곳에서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은 어려울 것이었다. 일리야까지 감기에 걸린다면 답도 없는 병자들의 여행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제리는 일리야의 손을 이끌고 여관 문을 열어젖혔다. 소박할 거라 생각했던 내부는 꽤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제야 오셨소?”

여관 주인은 꼭 사람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제리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고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방 열쇠를 건네주고는 다시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들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어 보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외관을 마법으로 덧씌워 다른 용모로 보이게 하니 마음이 더 놓였다. 책정령 네펜데르가 자신들의 행방을 일러바치지 않았는지 뒤를 쫓아오는 이들도 없었다. 

“이상하게 사람이 하나도 없네. 눈이 올 걸 다 알고 있었나? 길이라도 잃을까 봐 걱정이 됐던 거지.”

“그러게…….”

눈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방 안에서 몸을 녹이던 두 사람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온천에 나가 보기로 합의를 봤다. 건물 끄트머리의 문을 열어젖히자 찬바람이 가차 없이 얼굴을 때렸다.

그들의 앞에 펼쳐진 것은 새하얀 설원 틈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는 커다란 샘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뜨거워서 발가락 하나 담그기도 주춤했었는데, 막상 들어가니 금세 익숙해졌다.

뜨거운 물이 몸을 감쌌다. 소복하게 내리는 눈이 머리카락 위에도 쌓이고 코끝에도 톡 내려앉아 사르륵 녹아내렸다. 영문도 모르고 쫓기는 주제에 너무 태평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생각은 이미 뒷전이 되었다.

“응?”

근처에 앉아 있던 일리야가 바로 옆에 다가와 제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추워서…….”라며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짓말을 했다. 나쁜 거짓말도 아니니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일리야.”

일리야는 제 말에 대답하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빨리 반지를 돌려줘 버리고 느긋하게 돌아다니고 싶어. 나, 이거 필요 없어.”

“응.”

“넌 마탑주를 찾으면 어쩔 거야?”

무슨 말을 꺼내야겠단 생각은 여태 하지 못했는지, 일리야는 잠시 고민하다 제리의 말에 나긋하게 대답했다.

“제리 너를 온전히 돌려달라고 말할 거야.”

의외였다. 일리야는 생김새와는 다르게 의외로 자신 이외의 사람들에게 다소 과격한 행동을 보이고는 했으니까. 온순하고 느릿하게 행동하면서도 자신이 얽힌 일에는 조금도 참지 않았다. 시스템창을 집어 던지거나 때려 가며 괴롭혔던 것처럼, 그에게도 다짜고짜 마법부터 날릴까 봐 제리는 그게 조금 걱정이었다.

‘아무리 마탑주라도 노인이잖아.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해야지.’

조금만 아파도 에구구, 하는 소리를 내뱉을 것 같은 그 쭈그렁 늙은이에게 일리야가 과격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그건 말이 안 돼, 일리야. 돌려주려면 내가 원래부터 네 것이었어야 하는 거잖아.”

농담처럼 웃으며 속삭인 말에 일리야는 곰곰이 생각하다 희미하게 웃었다. 싸늘함이 아주 잠깐 그의 얼굴을 스쳤다.

“제리, 너 내게 수도 없이 안겼잖아. 매번 좋다고 울었으면서…….”

“갑자기 뭐야? 닥쳐.”

“……입으로 내 것도 빨아 줬으면서…….”

“아, 씨발. 기억 안 나!”

“그런데…… 아직도 내 것은 되지 못했나 봐.”

제리는 열이 오르는 이마를 감싸 쥐며 심호흡을 했다. 저, 저, 개새끼. 내가 언젠간 가만히 안 둔다! 

“제리, 이래도?”

쪽. 일리야는 제리의 손등을 잡아 올려 짧게 입을 맞추며 다시 한번 물었다. 따뜻한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지자 간지러움이 흔적처럼 남았다. 제리는 코웃음을 쳤다.

“고작 이걸로 날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

“……야, 허리 더듬지 마라. 손 떼,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널 다 가질 수 있는데?”

미소가 싹 가시고 진지한 얼굴로, 일리야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는 지난 밤 자신이 제리의 목덜미에 남겼던 빨간 자국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힘이 강하게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다소 집요하게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제리는 일리야의 얼굴에 물을 튀기며 대꾸했다.

“사람은 갖는 거 아니야.”

“…….”

일리야는 더더욱 심각해졌다. 사람은 갖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 뇌리에 박혀 빙빙 돌았다. 하지만…… 그는 제리를 가지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손아귀에 넣고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제리를 이해하고 존중했다. 그를 사랑하기에 그가 좋아하는 면모만을 보이고 싶었다.

자신은 제리만 있으면 다 괜찮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진대도 마냥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제리는 자신과 달랐다. 그는 밝은 곳에 있어야만 더욱 빛난다.

“왜 또 그래. 삐졌어?”

겨우 욕을 집어삼킨 제리는 일리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깜짝 놀란 일리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리를 바라보았다.

“…….”

“아니, 뭘 이런 걸로 삐지고 그래. 네가 먼저 개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내가 널 그런 말이나 하라고 가르쳤어? 어?”

“…….”

“일리야, 왜 아무 말도 안 해?”

진짜 삐졌나? 제리의 손이 일리야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 토닥거렸다.

“…….”

일리야는 그 감촉을 선명하게 느끼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하얗고 촉촉한 손이 뺨을 감싼 순간, 잡다한 생각이 모조리 휘발되어 날아갔다. 자신의 눈앞에는 제리가 있었다. 그의 손이 제게 닿아 있는데 다른 생각을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제리…….”

일리야는 멍하게 제리를 바라보다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네가 나를 가져.”

“…….”

제리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놀라움인지 황당함인지, 일리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놀랐든 놀라지 않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리야는 오랜만에 제 말이 정말 논리 정연하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가 이런 생각을 해냈다는 것이 대견하고 뿌듯해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나는 다 줄게. 그럴 수 있어. ……제리, 네가 나를 가지면 되잖아…….”

네가 내게 네 전부를 줄 수 없다면 그 대신 제리……, 네가 나를 가지면 되는 거잖아.

제리는 상냥하다. 일리야는 그런 제리의 성격을 족쇄 삼는 것이 정말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번 가진 것이라면 끝까지 책임을 질 것이다. 결국 자신이 제리를 갖지는 못하더라도 제리는 평생 자신을 책임져야 했다.

“제리…… 싫어?”

“뭐, 뭐야, 갑자기. 싫……은 건 아니고. 너, 또 땅굴 파지 마.”

“…….”

“이상한 표정 짓지 마! 눈꼬리 올려!”

“싫지 않은 거라면 좋은 거야…….”

“…….”

“……싫어?”

“아, 알았어. 좋아. 좋다고 치자!”

분명히 좋다고 했어, 제리.

“좋아해, 제리…….”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는대도 너는 날 못 놔. 

* * *

일리야가 아까 뭘 잘못 먹었나? 추위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게 된 건가? 귀여워서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자신을 가지라느니, 좋아한다느니 하는 예쁜 소리들을 해 대서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가려는 것을 꾹꾹 참았다.

그냥 오랜만에(사실을 따지자면 몇 시간밖에 안 되었다.) 일리야가 삐져서 좀 달래 주려고 한 건데. 일리야가 그걸 진지하게 받아치는 바람에 제리만 아주 좋았다.

톡톡.

“……?”

일리야는 제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다 이제는 마구 흐트러뜨리는 손길에 어리둥절해했다. 얘를 어떻게 하면 좋아. 머리를 쓰다듬던 제리의 손길이, 차갑게 얼어붙은 귀를 녹이듯 살포시 감싸고, 이내 조금 더 내려와 두 뺨을 감쌌을 때까지도…… 그는 바보같이 눈만 깜빡였다.

쪽!

제리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들어 입을 맞췄다. 그 순간 일리야의 무표정한 얼굴이 순차적으로 화아악 달아올라 오랜만에 빨간색 사람이 되는 것을, 제리는 볼 수 있었다.

“일리야.”

“아, 잠깐만.”

일리야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팩 돌렸다. 그의 말마따나 ‘할 거 다 한 사이’가 되었는데 왜 새삼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다. 머리카락부터 시작해 어디 하나 희지 않은 곳이 없는데, 아예 손등까지 빨갛게 물들이고 수줍어하고 있었다.

손을 잡아 내리려는데 힘을 풀지 않아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일리야, 일리야, 하고 이름을 몇 번 부르자 가까스로 손 틈 사이로 드러난 눈과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제리는 일리야의 손등에도 쪽쪽 입을 맞췄다.

“…….”

그러자 아예 손등까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일리야의 손이 서서히 내려갔다. 그는 살짝 울상이 되어 투덜거렸다.

“예고 좀 해. 깜짝 놀랐잖아…….”

“예고를 했으면 지금 이런 얼굴도 못 봤겠지.”

“…….”

“가리지 마. 좋아서 그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일리야가 좋은 것도 있었지만,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일리야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곧 떨리는 눈을 살포시 감은 채 입을 맞출 것 같았다.

“제……맄!”

간질간질한 분위기 속, 제 이름을 부르려던 일리야의 머리 위에 커다란 눈 한 무더기가 끼얹어졌다. 제리는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맹세컨대 자신이 한 짓이 아니었다. 그는 두 손을 번쩍 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리야는 뒤를 돌아보았다. 제리 역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고, 제리는 그곳에서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야생 눈여우의 실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헉 소리가 나올 만큼 앙증맞은 외관에 제리는 숨을 집어삼켰다.

깊은 설원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발달된 탄탄한 다리와, 봉긋한 주둥이 사이로 나와 날름거리는 빨간 혀까지도 귀엽게만 느껴졌다.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새하얀 풍경 속에서 검은 콩 같은 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눈여우가 보송보송하게 보이는 발을 바닥에 퍽 하고 파묻었다.

파사삭, 퍽!

“…….”

눈여우는 또다시 일리야에게 눈 뭉치를 던졌다. 일리야는 이번에도 가만히 있다가 얼굴로 그것을 모조리 받아 냈다. 얼굴을 타고 눈 더미들이 파사삭 흩어지며 온천물에 닿아 모조리 녹아 버렸다. 빨개졌던 얼굴은 어느새 원래 색을 되찾았다. 눈여우는 캥캥거리며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왜 저러는 거더라. 배웠는데…….’

제리는 머릿속에 욱여넣듯이 외웠던 ‘눈여우의 습성과 행태’를 떠올려 냈다. 그동안에도 눈여우는 일리야를 향해 뒷발질을 해 눈을 와다다다 쏟아부었다. 일리야도 이번에는 다 맞아 주지 않았다.

‘암컷 눈여우는 구애할 때 뒷발로 수컷에게 눈을 뿌리며 장난을 칩니다.’

갑자기 교수님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구애 행위……. 제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고, 그 말에 일리야는 “뭐?” 하며 고개를 돌리다 눈여우의 장난에 또 한 번 눈 무더기를 뒤집어써야 했다.

“……아. 저게 진짜.”

눈여우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캥캥거리며 폴짝폴짝 뛰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도전하려는지 잔뜩 쌓인 눈 더미에 발을 집어넣었고, 일리야를 향해 파바박 발길질을 해 대며 눈 더미들을 날렸다. 일리야가 동시에 허공에 손을 뻗었다.

‘수컷 눈여우가 같은 장난을 돌려준다면, 그것은 짝짓기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입니다.’

“안 돼!”

하지만 말릴 틈이 충분하지 않았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일리야는 눈여우가 날린 눈 더미들을 그대로 받아쳐 냈고, 눈여우는 일리야가 되받아친 새하얀 눈에 뾰족한 귀 끝까지 잔뜩 뒤덮여 버렸다.

“…….”

큰일이다! 제리는 황급하게 일리야의 손을 잡아 객실의 좌표를 떠올렸다.

캥, 캥!

구애에 성공해 잔뜩 신이 난 눈여우가 신이 나서 폴짝 뛰어나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캥, 캥캥!

갑자기 사라진 구애 상대에 눈여우는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며 당황해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천물까지 다가와 물에 발을 폭 담가 보고 화들짝 놀라 재빨리 후퇴하기도 했다.

그것은 내내 여운이 남는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이내 귀까지 축 처져 다른 곳으로 터덜터덜 이동했다.

* * *

야생 눈여우를 본 사람은 많아도, 사람에게 구애하는 눈여우를 코앞에서 본 사람은 무척 드물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보기 드문 광경을 선물해 준 일리야는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내 웃어서 배가 당겼다.

“살다 살다 눈여우에게 구애받는 사람은 또 처음이야.”

머리카락이 눈처럼 하얘서 그런가? 네가 동족으로 보였나 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 주며 한 말에, 일리야는 변명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거 아닐 거야.”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 거겠지.”

“네가 여우야……? 왜 아는 척해, 제리…….”

“또 헛소리하지.”

괜히 민망하니까 또 저런 소리를 한다. 그는 할 말이 없으면 아는 척하지 말란 말을 했다. 일리야도 모르는 그의 말 습관이었다. 제리는 피식 웃으며 말을 돌렸다.

“눈이 그치면 온천을 다시 돌아보자. 도대체 마법진을 어디다 숨겨 둔 건지 모르겠네.”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은데…….”

“내일은 그치겠지. ……자, 이 정도면 됐다.”

“고마워.”

일리야의 머리카락이 어느 정도 말랐다 싶었을 때, 제리는 베개가 하나 더 있는지 보겠다며 옷장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어?”

옷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뭐야, 찾았어!”

“……뭘?”

“마법진!”

그리고 텅 빈 옷장 바닥에서 은은하게 반짝이는 마법진과, 마법진을 발동시키기 위한 마력석을 발견했다. 마탑 놈들은 다 이상한 사람들밖에 없는 것 같았다. 왜 온천 여관의 옷장 안에다 마법진을 설치해 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찾은 김에 지금 갔다 오자!”

“응.”

일리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제리가 뻗은 손을 잡았다. 눈부신 푸른빛이 두 사람을 감싸는 것과 동시에, 방 안은 누구도 남지 않고 텅 비게 되었다.

* * *

마탑은 어느 국가나 권력에도 속하지 않는다. 오직 마법이라는 학문을 깊이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협회. 그것이 마탑이었다.

마탑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그것을 직접 본 적이 있느냐 묻는다면 다들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만큼, 마탑의 위치는 아무나 알 수 없게 꽁꽁 숨겨져 있다. 마탑 출신의 마법사가 아니라면 그것의 위치도, 심지어는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알지 못한다.

제리 역시 마탑 출신 마법사인 시어스에게 어렴풋이 들어서 그를 토대로 상상만 했지, 마탑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짙은 회색을 띠는 커다란 벽돌이 차곡차곡 쌓여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아 올라가는, 말 그대로 ‘탑’이었다.

“……?”

그런데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처음 보는 건물인데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지, 제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마어마한 규모의 탑이 주는 위압감에 제리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퀘스트 내용에 따르면…….’

꼭대기 층의 집무실. 그곳에서 ‘마탑주의 행복’을 찾으면 된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높은 건물 안에 사람이 하나도 없을 리가 없다. 그들을 따돌리고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핑핑 돌았다.

‘이번에야말로 이 반지를 돌려준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제리는 결연하게 주먹을 꽉 쥐고는 출입구를 찾기 위해 탑에다 손을 가져다 대었다.

[환영합니다!]

“깜, 깜짝이야.”

순간적으로 손바닥을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전해졌다. 머릿속까지 시원하게 쓸고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쿠구궁, 제리의 손바닥이 닿았던 곳의 벽돌이 마찰음을 내며 안쪽으로 눌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한 사람만 겨우 드나들 수 있을 법한 문이 하나 생겨났다.

“너 먼저 들어가.”

“…….”

혹시 자신이 먼저 들어가고 나면 문이 닫힐세라, 제리는 일리야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가 문을 열어 먼저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제리도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고, 문은 가차 없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문이 있었던 자리는 다시 두꺼운 벽돌로 채워졌다.

“응? 왜?”

“……아냐.”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일리야는 조금 불안해져 제리의 소매를 슬쩍 잡았다.

무척 좁은 통로는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는 원형 계단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중간의 뻥 뚫린 부분을 통해 위를 올려다보는데, 정말 끝도 없이 아득했다.

띠링.

[‘반지의 주인’ 효과가 적용 중입니다. 아이템에 내재된 스킬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주저 없이 확인 버튼을 누르자, 수십 개의 스킬이 동시에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템 스킬] 수직 상승!

올라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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