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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End 1: 집착의 탑(외존 2) (27/29)

Bad End 1: 집착의 탑

그는 끔찍한 악몽 속을 헤매고 있었다. 내내 비몽사몽한 채로 캄캄한 꿈속을 걷다가 문득 깨어나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리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햇빛조차 잘 들지 않는 이곳에서는 높은 곳에 나 있는 손바닥 만한 창만으로 낮과 밤을 구분해야만 했다. 어떤 때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일어나기도 하고, 가끔은 빛이 새어 들어올 때 눈을 뜨기도 했다.

“…….”

아직도 악몽 속이구나.

같은 곳에서 눈을 뜬 제리는 자포자기하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이 아니었다면 시체로 보였을 만큼 그의 낯빛은 창백했다.

기억은 열일곱에 멈춰 있었다. 그 때로부터 몇 주, 아니면 몇 달이 더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며칠 내내 잠들어 있을 때도 있었으며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무거웠다.

구름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손가락만 까딱하면 눈앞에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쩍 갈라졌다. 미지근한 뇌수가 튀어 얼굴을 흠뻑 뒤덮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런 장면에 전혀 면역이 없던 제리는 당연하다는 듯 혼절했고, 정신이 들고 보니 이곳에 있었다.

‘애쓰지 마. 네게 이제 돌아갈 곳은 없어.’

일리야는 제리를 세뇌시키듯 매일 밤 그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를 이곳에 감금한 남자가 바로 그였다.

일리야는 치밀했다. 이 탑은 마법이 작용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벽은 도구를 써서도 부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했고, 높은 벽을 타고 올라가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기도 힘들었다. 제리의 발목에 단단한 사슬이 차여 있었기 때문이다.

‘일리야….’

제리는 목 안으로 어쩐지 그리운 이름을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떨궜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리야는 자신을 보석함 속의 수많은 장신구처럼 이곳에 가두어두고, 이따금씩 상태만을 확인하러 들렸다. 가끔은 깨어났을 때 제 옆에 있었고, 또 가끔은 지금처럼 자리를 비운 채였다.

혼란스러웠다. 일리야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와 형들, 그리고 궁정 마법사인 시어스 경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앞으로도 죽어나갈 것이다. 일리야는 그동안 제리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을 이런 곳에다 가둬두고 밖에서는 무슨 짓을 벌이는 건지도…. 가끔 일리야에게서 채 다 지우지 못한 피냄새가 났다.

제리도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짓은 다 해보았다. 좁은 방 안을 샅샅이 뒤져 마력이 흐르는 곳이 없는지 살피고, 식사를 넣어주던 사람을 힘껏 밀쳐내고 도망쳐 보려고도 했다. 일리야에게 시위하듯 일주일이나 식사를 입에도 대지 않기도 했다. 그가 돌아오기만 하면 저주의 말을 퍼붓고, 애원하고, 또 화를 냈다.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일을 저질렀던 일리야는 그저 무던하게만 보였다. 제리가 식사를 거르면 억지로라도 입을 벌려 입안에 빵을 욱여넣었고, 주먹으로 온몸을 때리는 제리를 너그러이 용서했다. 자신이 사람을 밀치고 도망을 시도했던 날에는 조금 화가 난 듯 보였지만 그는 제게 언성을 높이거나 손을 올리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저 뺨을 살짝 매만지며 눈살을 찌푸렸을 뿐. 그 대신 애꿎은 사람들만 죽어 나갔다.

제리의 세 번째 도망 시도가 실패한 날에는 결국 발목이 부러졌다. 정신을 잃고 깨어난 이후 열이 올라 며칠을 앓았는데, 자신이 깨어날 때마다 일리야는 옆에서 이마의 땀을 닦아내주고 있었다.

‘깔끔하게 부러뜨렸으니 금방 아물 거야.’

다정한 어조로 하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그 탓에 빨갛게 부어오른 발목을 안쓰럽게 내려다보는 시선이 징그러웠다.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은 건네지 않았다. 이후 부러졌던 뼈가 붙고 깨끗하게 아물었지만 그 자리에는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사슬이 차였다. 그날부터 제리는 목소리를 잃었다. 아무리 외쳐도 돌아오지 않는 답에 지쳤는지도 모른다.

‘일리야, 어째서야?’

제리는 자신이 이곳에 갇히게 된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일리야는 제리의 말에 명쾌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으며,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식사를 넣어주던 사용인이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제리의 몸 위로 올라탔던 날, 제리는 또 핏물을 뒤집어쓰는 끔찍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그날 제리는 진심으로 화를 내는 일리야를 처음 보았다. 이 탑에 가둬지고 난 이후, 그는 제리의 앞에서 흉한 꼴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일리야는 제리를 강간하려 했던 남자를 수도 없이 난도질했다. 일부러 쉽게 죽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바란다면 단번에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말이다. 남자의 피부가 회처럼 뜨이고 눈알이 터져 나갔다. 힘줄이 끊어졌으며 상처는 다시 아물고 찢어지기를 반복했다. 그토록 많은 피를 흘리고도 남자는 숨이 간신히 붙어 있는 채로 질질 끌려 내려갔다.

‘미안해, 제리. 많이 놀랐지…?’

제리는 자신의 허리를 꼭 껴안고 미안하단 말을 반복하는 일리야를 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일리야는 남자의 최후에 대해서는 들려주지 않았다. 그저 깨어난 제리의 등을 토닥였다. 제리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으레 그러했듯 그 남자는 죽었을 것이므로.

‘괜찮아….’

‘…….’

‘이제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는 자꾸만 괜찮단 말을 늘어놓았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아직까지도 눈동자가 마구 떨렸다. 동요하고 있는 것은 제리 자신이 아니라 일리야였다. 괜찮지 않은 것도 어쩌면…….

제리는 하얀 손을 들어 일리야의 뺨을 희미하게 스쳤다. 일리야의 시선이 제리를 향했다. 아무 감정 없이 흔들거리던 눈동자에 애틋함이 담겼다.

일리야의 행동에서 전혀 당위성을 찾을 수 없었던 제리는 그날 무언가를 깨닫고 말았다. 일리야가 자신을 왜 이곳에 감금시켰는지, 그 이유를 찾은 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이해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는 더더욱 잠에 몰두했다.

* * *

예상과는 다르게 일리야는 강제로 그의 몸을 취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원래도 말수가 많지 않았던 그는 제리가 깨어나도 안부만을 물었지, 그에게 제대로 된 말을 해주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두 사람이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대화 소재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제리는 늘 혼자였다.

이 방 안에서 남자가 죽어나간 날 이후로 그는 일리야 외의 사람을 만날 수도 없게 되었다. 오직 일리야만이 이 방을 드나들었다. 식사를 가져다주는 이도, 몸을 씻고 닦아주는 이도 일리야였다. 대화는 일방적이었으며 제리는 점점 망가지고 있었다. 혼란이 가중되고 기억이 왜곡되고 희미해진다. 그렇게 어제 한 일도 기억나지 않는 사태에 이르고 눈앞에 그의 형제들까지 아른거리고 나서야 제리는 자신이 조금 미쳤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제리, 나는….”

일리야의 목소리를 들으며 제리는 눈을 꼭 감았다. 지긋지긋하지만 동시에 그리움을 자극하는 목소리였다. 말갛게 웃으며 제 이름을 부르던 일리야. 그 때마다 제리도 그를 돌아보며 ‘응, 일리야.’ 하고 대답했다.

전부 꿈이었으면 좋겠어.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일리야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옥죄는 듯 아팠다. 제 모든 것을 앗아간 사람이 그가 누구보다도 믿고 아꼈던 친구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서.

“제리.”

일리야는 힘없이 늘어져 있던 제리를 일으켜 앉혔다. 제리의 다리가 질질 끌려오며 차가운 쇠사슬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마른 어깨가 움찔거렸다. 일리야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제리가 사슬 소리에만큼은 반응한다는 것을, 일리야는 알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나가고 싶어?”

“…….”

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리야는 그런 제리의 뺨을 쓰다듬으며 밀어를 속삭이듯 나직하게 읊조렸다.

“내가 다 없앴어. 그러니 지금 나가면 넌 아무것도 없어.”

“…….”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거야….”

너무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아 말을 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건지도 몰랐다. 그저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네게는 이제 내가 전부야. 제리, 내가 유일해….”

일리야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리며 진동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귓가에서 맴돌다 흩어지는 목소리는 제리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게 무엇이든 제리는 늘 옛 기억 속을 유영했다.

어제는 지금보다 더 앳된 모습의 일리야가 꿈에 나왔다. 푸르고 청량했던 시절의 어린 일리야는 제게 말을 붙일 때마다 손끝을 꿈질거리고는 했다. 열두 살, 마법용품점에서의 우연한 첫 만남. 그리고 오며 가며 마주칠 때마다 어색해하던 일리야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한여름의 무더위에도 그저 쉼없이 반짝거리기만 했던 시간. 다시 돌이킬 수 없기에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제리.”

일리야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올 때마다 아름답고 즐거웠던 그 시절의 추억마저 해치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제리, 제리, 하고 자신을 불렀던 제리의 어린 친구는 이런 끔찍한 짓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서 더더욱.

어쩌면 도피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이 늘어난 것도 같은 이유인지도. 잠시나마 악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과거를 유영하고 있자면 희미하지만 가슴속에 활력이 돌았으니까.

“제발 대답해….”

일리야가 상처받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는 제리의 손을 들어 제 목덜미로 가져왔다. 손바닥 아래로 쿵쿵거리며 뛰는 맥박 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일리야는 제리의 손등을 덮은 채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눈을 감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의 목숨이 손 아래에 놓여 있다. 쿵쿵거리는 맥박이 손바닥을 통해 선명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죽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섬뜩한 생각은 구름처럼 불어나 머릿속을 새까맣게 채웠으나 금세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힘 때문만이 아니었다. 일리야는 이대로 자신이 목을 조른대도 가만히 있을 테지만 제리는 자신이 사람을 죽일 수 없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얀 손은 다시 침대 위로 곤두박질쳤다. 일리야의 시선은 힘없이 내려앉은 손에 한참 머물렀다. 시선은 제리의 몸을 핥듯이 집요하게 내려와 빨갛게 부어오른 발목까지 내려왔다.

“아프지?”

커다란 손이 절그럭거리는 사슬을 치우고 부어오른 발목을 어루만졌다. 시원한 느낌이 잠시나마 부기를 가라앉혔다.

“널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네가 여길 자꾸 나가려고 하잖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제리는 고개를 돌렸다. 깊은 한숨 소리가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일리야는 제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내가… 그렇게 싫어?”

한참 뒤에야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물었다. 제리는 여전히 텅 빈 얼굴로 일리야를 멍하게 응시했다.

……아직 꿈이야.

꿈속이라 생각하면 그나마 버틸만했다. 유독 길고 집요한 악몽을 꾸는 거라고.

“나는 네가 죽을 때까지 여기서 내보내 줄 마음이 없어.”

그는 제리의 뺨을 잡아 저를 보게 했다.

“끝내고 싶은 거라면 말해. 나를 죽이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

“안 돼, 죽을 때까지 넌 내게서 못 벗어나….”

죽기 전에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말이 꼭 고백처럼 들렸다. 제리는 피식 웃었다.

그날부터 일리야는 제리가 깨어날 때마다 옆에 있었다.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을 때도 있었고, 침대 옆에 앉아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항상 제리를 향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붉은 눈동자에, 오직 생기를 잃고 말라 버린 제리가 담겼다. 그의 시선에서 제리는 이제 그 무엇도 느낄 수가 없었다. 자신을 향하던 경외심도, 애정도, 이따금씩 느껴지는 집요한 느낌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제리. 이대로라면 너 정말 죽어….”

죽어야만 놓아주겠다던 말과 모순되는 소리였다. 그 말과 동시에 제리의 손에 억지로 쥐어진 것은 새하얀 단검이었다.

“늘 말했잖아. 끝내고 싶으면 날 죽이면 돼.”

“…….”

제리의 눈이 속박된 발목을 향했다. 일리야는 제리의 손을 잡아 제 가슴으로 가져갔다. 쿵쿵 뛰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아래, 안주머니에 무언가 딱딱하고 작은 물체가 느껴진다.

“자, 열쇠는 여기에 있어.”

시선이 허공에서 뒤얽혔다.

“결심이 서면 날 죽이고 도망치면 돼.”

“…….”

한동안 정적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이제 일리야에게는 어떠한 감정의 잔재도 남지 않았다. 그를 향했던 증오도, 원망도, 슬픔도 남지 않았다. 기억이 오락가락하지만 늘상 그러했다. 꿈이니까 괜찮다. 모두 버린 지 오래였다. 다른 것들과 억지로 단절된 지도 오래였다.

한참 뒤, 제리는 말라붙은 입술을 열었다.

“……일리야.”

목소리라기보다는 바람 소리 같은 말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웬만해서는 들을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일리야는 숨을 급히 집어삼키며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는 급히 ‘응.’ 하고 대답했다.

제리는 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제 손짓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일리야가 우스웠다. 결국 제 목숨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것은 일리야지만, 그 역시 제게 무참히 휘둘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제리는 천천히 손을 일리야에게 내밀었다. 간만에 제 말에 반응하는 제리에, 일리야는 크게 동요했다. 손을 달라는 듯한 손짓에, 그는 망설이지도 않고 제리에게 제 손을 얹어놓았다. 제 것과는 전혀 상반된, 단단하고 남자다운 손등이 보인다. 제리는 일리야의 손을 뒤집어 잡았다. 그의 손바닥 위에 희멀건 검지 손가락이 톡 하고 닿았다. 일리야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한 번 움직였다.

‘일리야.’

천천히 움직이는 손가락이 일리야의 이름을 써넣었다. 일리야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제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마저 할 말을 써내려갔다.

‘너는 후회해?’

일리야는 잠시 생각하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눈동자가 이미 다 말해주고 있는걸. 본인의 감정을 스스로도 모르는 일리야가 가엾고 역겨웠다.

‘나한테 왜 그랬어?’

일리야는 제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수없이 속삭였다. 수많은 나날이 지나갈수록 그 사실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 당장 다리에 자유가 생기더라도, 출입구를 열 힘이 생기더라도 제리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갈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이었다.

제리는 일리야가 쥐여준 단검의 검집을 뽑았다. 예리한 검날이 촛불의 붉은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제리는 검을 잡아 일리야의 가슴 위로 꾹 누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일리야 너만 모르고 있어.”

일리야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감격하면서도 웃지는 않았다. 그는 제게 검날을 들이댄 제리를 밀어내지도 않고 무던하게 대답했다.

“내가 뭘 모르는데?”

“…….”

아마 모른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는 거겠지. 제리는 일리아의 가슴을 꾹 짓누르고 있던 검을 거두고 그대로 손을 돌려 제 목 중앙을 향했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지만 일리야가 더 빨랐다. 그는 손을 뻗어 검을 가로챘다. 날카로운 검날을 맨손으로 쥔 일리야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안 돼!”

“……왜?”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안 될 이유는 없었다.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네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제리는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멀뚱히 있는 일리야를 노려보았다. 검날에 깊게 베인 손에서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새빨간 선혈이 뚝뚝 흘러내렸다. 피비린내가 코를 뚫고 들어왔다. 익숙한 냄새였다. 제리는 찡그려진 일리야의 표정에서 또 한 번의 확신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는 제게 죽음을 구걸했지만, 정작 제리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에는 민감하게 굴었다.

복수를 할 마음은 다 버렸다. 복수도 제정신인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자신이 그런 마음을 품고 있어봐야 독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자신이 죽음으로써 괴로워할 일리야를 생각하면 아주 조금은 후련해질지도 모른다. 일리야는 넋이 나간 것처럼 피식피식 웃어대는 제리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제리… 너는.”

그는 스스로도 제리를 갈망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내 거잖아.”

틀렸어.

나는 네 것이었던 적이 없다. 날 속박한 것은 일리야 너지만, 사실 네가 나에게 묶여있는 거였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제리는 피로 젖은 검 손잡이를 놓고서 희미하게 웃었다. 두 팔을 뻗었다. 그는 일리야의 목을 살포시 감싸 안고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

일리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까슬하게 껍질이 일어난 입술이 맞닿아 있었다. 숨결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일리야가 숨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맞닿은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탑의 조그만 골방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기만 했다. 고요 속의 입맞춤에서 혈향이 풍겼다.

일리야는 잠깐 혼란스러워하다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제리는 반항하거나 그를 밀어내는 대신에 조그맣게 입술을 벌렸다. 허락의 뜻이었다. 분명히 부드러울 거라 생각했던 입맞춤은 거칠고 사나웠다. 일리야는 혀뿌리가 빠져나갈 것처럼 혀를 빨고 입안 곳곳 닿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샅샅이 혀로 쓸어내렸다.

제리는 이따금씩 잠든 제 뺨에 내려앉는 입맞춤을 눈치 채고 있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을 때 제 얼굴에 흩뿌려지던 뜨겁고 비린 액체가 무엇인지도 짐작하고 있었다.

난 다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일리야, 너만 아직도 모른다니.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일이야.

쿵쿵, 일리야의 심장이 여느 때보다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제리에게 탐닉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제리는 옆으로 슬쩍 손을 뻗어 일리야가 던지듯 내려놓았던 검을 다시 잡아 들었다. 다행히 일리야는 그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정신없이 첫 입맞춤에 몰두하고 있었다.

제리는 검 손잡이를 꼭 쥐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가 없었다.

어째서 마지막 순간에 입을 맞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은… 일리야가 무섭다. 그래서 죽어서라도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옛 기억에 대한 그리움도 공존했다. 사실은, 제게 존재하는 일리야에 대한 기억이 다 올바른 것이라는 보장이 없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모든 기억이 뒤섞여 엉망이 되었으니까.

푸욱-.

일리야의 혈액이 묻어 있던 검날이 복부를 찔렀다.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제리는 젖먹던 힘까지 끄집어내 단검을 돌려 빼고는 좀 더 옆을 찔렀다. 벌어진 상처에서 핏덩어리가 꿀렁이며 새어나왔다. 일리야는 뒤늦게 제리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들었지만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은 이만한 출혈에도 허덕일 정도였다.

코끝에 역겨운 혈향이 스쳤다. 시야가 까맣게 멀어졌다. 소름끼치는 이명이 들림과 동시에 의식도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서서히 밤이 찾아오듯 제리는 고요 속에 잠겼고, 마지막까지 제 이름을 부르는 일리야의 음성이 가슴에 먹먹하게 남았다.

‘일리야. 나를 좋아하고 있잖아.’

좋아한다는 말. 어쩌면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그 말을 기다린 것일지도 모른다. 비틀린 방식으로 표현되지만 않았더라도 관계는 다른 결말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제리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일리야.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기며 돌이킬 수 없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실은 일리야보다도 자신이 먼저 그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다 지나와 깨달은 뒤 생각해 보니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더 납득할 수 없었던 거야.

제리는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일리야는 제리를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뼛속까지 깊이 파고드는 공허를 느꼈다. 품 안의 몸이 공기처럼 가벼웠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더는…….

“제리, 그러지 마….”

마지막 숨이 빠져나가며 시곗바늘이 천천히 되돌려진다. 또다시 질서는 어그러졌고, 정령들은 한숨지었다.

그제야 그도 길었던 꿈에서 깨어나며 생각했다.

아, 이건 악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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