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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End 2: 상실 (28/29)

Bad End 2: 상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린다.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맑고 투명한 소리였다. 그러나 문 앞에 일렬로 서 있던 이들은 왜인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방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인기척이 들렸다. 시종들에게 한시라도 한눈을 파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딸랑.

또 한 번 울리는 종소리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남자가 후다닥 발걸음을 옮겨 복도 끝으로 달려갔다. 남은 이들은 심호흡을 하고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방 한가운데에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다. 호화로운 가구들이 서로 잘 어우러졌다. 빛이 선처럼 길게 늘어졌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정확히 침대 한가운데를 비추고 있었다. 가구들의 모서리는 혹여나 사람이 부딪쳐 다치지 않도록 둥글게 마감처리가 되어 있었고, 책꽂이에도 가지각색의 책들이 가지런하게 꽂혀 있다. 벽을 바라보게 배치된 책상 위에도 수많은 물건들이 놓여 있었지만, 그것들 중 날이 서고 뾰족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 방의 모든 사람들은, 침대 한가운데 앉아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기울이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목이 칼칼한 것처럼 손을 들어 목을 감쌌다. 그러자 가장 먼저 방에 들어간 시종이 투명한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그가 내민 물을 얌전히 받아 마신 뒤, 입가를 닦은 남자가 물었다.

“누구세요?”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들은 오늘 남자를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그저 고개를 떨군 채 모르겠단 말을 반복하는 것만이 그들이 가장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이었다.

시선을 오래 마주쳐서는 안 된다. 이름을 알려줘서도 안 되며, 최대한 기억에 남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자가 아무리 답답해하더라도, ‘그 사람’이 오기 전까지 멋대로 입을 놀렸다가는 목이 나가떨어질 각오를 해야 했다.

남자는 새하얀 셔츠만을 입고 있었다. 풍성하게 주름이 잡힌 소매가 손등의 절반을 덮었다. 어깨선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남자는 손을 들어 셔츠를 끌어올리며 ‘뭐가 이렇게 커.’ 하고 중얼거렸다.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고개만 수그린 채 각각의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그가 하얀 다리를 이불 밖으로 내어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을 때쯤, 문 앞에 그림자가 졌다.

“제리, 잘 잤어?”

화창한 날씨만큼 맑은 미소를 띤 채 새하얀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긴 다리가 쭉 뻗어나가며 우아한 자태를 그려냈다. 침대 위의 남자가 흘러내리는 옷을 손으로 단단히 쥔 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제리? 그게 내 이름?”

“……제리?”

“그런데 넌 누구야?”

시종들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늘 그랬듯 인기척을 죽이며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갔다.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그들은 방을 빠져나와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하네…. 나 진짜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너 누구야……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어…… 요.”

뒤늦게 존칭을 붙인 제리는 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는지 미심쩍어 눈살을 찌푸렸다. 기억이 억지로 가려진 것처럼, 생각을 하려고 주의를 기울여보면 머릿속이 희뿌연 안개로 가득 차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말 높일 필요 없어. 그냥 편하게 대해줘….”

조곤조곤 귓가에 속삭여지는 말은 느리고 나른했지만 동시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일리야라고 소개했다. 일리야. 그 이름을 머릿속에서 중얼거려 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끙끙거리는 제리의 옆에 앉아 그를 토닥이며, 일리야가 말했다.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걸로 됐어.”

부드러운 입술이 제리의 입꼬리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제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일리야의 눈이 접혀 희미하게 웃었다.

“무리하지 마. 또 쓰러질라.”

“방금… 뭐냐…?”

“괜찮아, 제리. 기억은 지금부터 천천히 만들어가면 돼.”

새가 모이를 쪼듯, 제리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춘 일리야는 놀란 제리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제리는 손을 들어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일리야의 말을 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제리는 그와 함께 아카데미를 다녔던 친구였으며, 서로 마음이 통해 이제는 연인사이로 발전했다고 했다.

“연인이라고?”

“내가 먼저 좋아한다고 했어. 사랑해, 제리. 아주 많이 좋아해….”

“그럼 나도 널?”

“응, 너도 그렇게 말했지.”

“내가 왜?”

“너도 나를 사랑하니까.”

일리야는 제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다. 그의 손길은 따뜻하고 어딘가 집요한 면이 있었다.

“그걸로 된 거야. 나도 널 사랑하고 너도 날 사랑하니까, 더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

우리 둘만 있으면 돼. 일리야는 제리의 귀를 살짝 물었다 놓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제리는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듯 찜찜함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난 괜찮아. 나는 그냥 네가 내 옆에 있어줘서 기뻐.”

그런가. 정말 기억이 없어도 괜찮을까.

“……일리야.”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입에 올렸다.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했는데, 달라진 건 없었다. 일리야는 그에 더없이 수줍게 웃으며 제리의 손을 꼭 잡았다.

“응, 제리. 그게 내 이름이야.”

“…….”

정말, 괜찮을까.

“나가볼래? 오랜만에 깨어났으니 함께 할 게 많아….”

“뭘 하는데?”

“가보면 알아.”

“귀찮은데… 그냥 말해주면 안 돼?”

“깨어났으니 조금은 움직여야지…. 자, 내 손 잡고 일어나.”

일리야는 제리의 손을 잡고 그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을 도왔다. 그의 시선은 제리를 한시도 벗어나지 않고 그를 감시하듯 관찰했다. 옷을 갈아입고 건물을 나서던 제리는 모든 게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드넓은 정원이 새하얀 건물 앞에 널리 펼쳐져 있었다.

일리야의 서늘한 시선이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제리를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던 시종은 급히 고개를 푹 수그렸다. 동정 따위는 사치였다. 제 목숨을 지키는 일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말이다.

일리야는 제리의 손을 잡고 그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뒤로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잘 관리된 달그림자 궁이 서 있었다. 장미덤불 사이를 지나 점이 되어 작게 보일 때쯤이 되어서야 시종들은 고개를 들었다.

시종들 중 한 명이 혀를 찼다.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없던 정도 들게 되어 있었다. 이제 저 남자는 잔혹한 황제에게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죽음이 저들을 갈라놓지 않는 한, 영원히.

* * *

일리야란 이름의 남자는 제게 정말 상냥했다. 그는 제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렸으며, 제리가 먼저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원하는 것을 제공했다. 제리는 이곳에서 깨어난 이래로 일리야를 곁에서 떼어둘 수가 없었다.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에 들 때까지, 일리야는 자신을 옆에 꼭 붙여두었다.

“또 생각 중이야…?”

등 뒤의 일리야가 뒷목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애무에 어깨를 움찔거리자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욕조에 가득 찬 물이 가슴 높이에서 찰랑거렸다. 

“야, 있잖아. 내가 머리를 다쳤다고 했지?”

“응, 과일 껍질을 밟고 미끄러져서.”

“…….”

“머리를 바닥에 박았어.”

“…알아.”

“제리는 금붕어야? 아는데 왜 물어봐…?”

“닥쳐.”

“응…….”

별 같잖은 이유가 다 있었다. 그딴 것만으로 평생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다니. 제리는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 손을 들어 뺨을 식혔다.

“일리야 넌 정말 괜찮아?”

“뭐가?”

“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냐고.”

“……?”

일리야는 대답 대신에 제리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쪽쪽거리며 입을 맞췄다. 반지가 끼워져 있는 약지 손가락은 집요하게 빨기까지 했다. 간지러움에 손을 살짝 잡아당기자 목을 울려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네가 좋아했던 건 예전의 나잖아.”

“으음….”

“그런데 난 지금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고… 그런데도 넌 내가 좋은거야?”

일리야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제리고 지금의 너도 제리잖아…. 기억은 만들어가면 돼. 전에도 말했지만, 난 네가 내 옆에만 있으면 아무 상관없어.”

몸 곳곳을 간지럽히던 일리야의 손가락은 가슴에서 내려와 배를 더듬더니, 이내 가랑이 사이의 성기로 옮겨왔다.

“쫌!”

“만지기만 할게. 응?”

“내가 금붕어냐! 이게 몇 번째야!”

“네 번째.”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아무튼 손 치워, 나는 안 믿어!”

오늘만 세 번이나 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 제리는 일리야의 손을 잡아 던졌다. 일리야는 조그맣게 웃더니 아예 허벅지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제리를 안아 올렸다. 수면이 출렁거리며 가슴까지 차올랐던 물이 욕조 밖으로 넘쳐나갔다.

“아…! 흐윽!”

일리야의 무릎 위에 앉혀질 거라 예상했던 것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언제 그렇게 단단하게 발기한 건지, 한껏 부푼 성기가 좁은 구멍에 맞춰져 불쑥 파고들었다. 간신히 좁아졌던 길이 다시 트였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게 펴진 접합부를 매만지며 일리야는 제리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제리는 갑작스런 침범에 숨까지 멈춘 채로 헐떡였다. 눈꼬리에 맺혔던 눈물이 뚝 떨어져 욕조의 물에 더해졌다.

예고도 없는 삽입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일리야는 소리 없이 웃으며 제리의 허리를 잡았다. 앞으로 도망가려 해봐도 욕조 안이라 금세 끌려오기 마련이었다. 크고 단단한 성기가 쑥 뽑아져나갔다 다시 파고들었다. 금세 아랫배가 간질거리며 열이 피어올랐다. 눈가가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배가 꽉 찬 것 같았다.

“읏, 개새끼야….”

이게 몇 번째야. 제리가 욕을 중얼거렸다. 일리야는 제리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핥으며 눈가에 입을 맞추고 귀를 빨았다. 힘이 없는 몸은 성기가 깊이 찔러 넣어질 때마다 파드득 떨리며 흐느낀다.

“어떻게 해도 해도 작아지지를 않아!”

“그래서 너도 좋아하잖아….”

“아윽!”

뿌리까지 파고든 순간 제리의 허리가 젖혀지며 아랫배가 경련했다. 안이 움찔거리며 성기를 조였고 벌어진 입에서는 묽은 타액이 흘러내렸으나 바짝 일어선 분홍빛 성기는 멀쩡하기만 했다. 일리야는 제리의 떨림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며 제리의 몸을 쓰다듬었다. 

“방금 너 뒤로만 갔어, 제리….”

“…….”

쌕쌕거리는 숨소리에 억울함이 물씬 섞여나왔다. 제리는 입술을 꽉 깨문채 숨을 가다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리야가 다시 제리의 허리를 쥐었다.

“일리야!”

“으응, 제리. 사랑해….”

“…….”

“너는?”

“나는…… 몰라. 씨, 이딴 식으로, 흣, 마음 드러내지, 흑!”

커다란 성기가 깊은 곳을 쿡 찌르며 파고들었다. 제리는 일리야의 허벅지를 손으로 짚고 그가 움직이는 대로 서툴게 응했다. 쾌감이 밀려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입술이 맞닿았다. 숨결이 섞이고 물이 차츰 식어갔다. 찰박이는 물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채웠다.

“제리, 제리….”

항상 그랬듯, 일리야는 상냥한 듯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거칠어졌다. 제리가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쾌감이 휘몰아쳤다. 뇌까지 녹아버릴 것 같은 쾌감에 그에게서 벗어나려 허리를 들어도, 금세 끌려와 깊은 곳까지 쑤셔지기 일쑤였다. 물이 넘쳐 반은 욕조 밖으로 흘러나왔다. 일리야는 쾌감에 발버둥치는 제리를 간단히 제압하고 가장 안쪽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안을 꽉 메우던 성기가 빠져나가자 구멍이 움츠러들었다. 뜨거운 정액이 꿀렁거리며 흘러나온다. 제리는 이상한 감각에 신음하며 일리야의 몸에 등을 기댔다.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행위였다.

구멍 사이로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부푼 구멍을 손가락 두 개가 가위질을 하듯 벌리자 제리는 숨을 집어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일리야, 이젠….”

“안에 있는 건 다 빼고 자야지.”

일리야는 안을 긁어내듯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다, 이내 제리의 어깨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그를 일으켰다.

“제리, 거기 잡고 엉덩이 들어.”

도를 넘은 요구에 제리는 고개를 저었다. 당황한 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하지만 이대로는 잘 안 보여서 못하겠어….”

“안 돼! 왜 한 번 시작하면 끝이 안 나는 거야! 너 진짜 나한테 이러면 안 돼!”

“그럼 난 누구랑 해?”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나 오늘은 그냥 이대로 잘래.”

“그럼 네가 내일 아플 거야. 제리가 아프면 내 마음이 아픈데….”

눈썹을 휘며 중얼거리는 말에 제리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 제리.”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하면 되잖아!”

일리야는 잠시 생각하더니 “좋아.” 하고 말했다.

“그럼 엎드려. 내가 보면서 도와줄게.”

“…어?”

“빨리. 너 졸리잖아. 벌써 눈이 반쯤 감겼어….”

일리야는 제리를 엎드리게 하고, 그의 손을 엉덩이 사이로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둔덕을 잡고 친절히 벌려주기까지 한다. 정말 안에 그가 싸지른 것을 모조리 빼내지 않고는 잠을 재우지 않을 기세였다.

“어서.”

보채는 말에, 제리는 온몸이 새빨개진 채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일리야는 그가 약속했던 대로 제리를 성심성의껏 도왔다. 손가락이 내벽에 남은 정액을 긁어내렸다. 미처 다 빠져나오지 못했던 정액이 뭉쳐 울컥 쏟아져 나왔다. 하얀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내려와 물을 더럽혔다. 다리가 오므려들려는 것을 일리야는 몇 번이나 저지했다.

“이대로라면 내일까지도 안 끝나겠어… 제리.”

수치심에 머리가 온통 절여져 제리는 울먹이기까지 했다. 일리야는 제리를 대신해 그의 구멍에 제 것을 찔러 넣었다. 손가락이라기엔 지나치게 굵었다. 단단한 몸이 제리의 등을 덮으며 또다시 움직임이 시작된다. 그는 그럴듯한 핑계만 대고 제리의 안에 두 번이나 더 싸질렀다.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일리야가 배를 톡톡 두드리는 것만으로 말끔하게 사라졌다. 제리는 허무함에 헛웃음을 지으며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일리야는 살짝 미소 지으며 제리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제리, 사랑해. 그의 목소리가 정신을 놓는 순간까지도 귓가에 아른거렸다.

* * *

일리야가 서류를 처리하는 동안 제리는 옆에서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을 읽는 것만으로 무료함을 달래야만 했다. 이런 생활에도 한계라는 것은 있었다.

“오늘은 밖에 나가보고 싶어.”

제 부탁이라면 다 들어주는 일리야에게 그 말을 전했다. 그러자 일리야는 이번에는 알겠다는 말 대신에 다른 주제로 돌려버리고는 했다. 몇 번 정도 같은 말을 꺼내보았지만, 다른 부탁이라면 금세 들어주곤 했던 그는, 제리의 말을 하나도 듣지 못한 것처럼 무시해 버렸다.

이따금씩, 키의 두 배만큼이나 높게 쌓인 담벼락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치는 소리가 들렸다. 일리야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도 말을 섞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궁 안의 사람들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려고조차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제리를 피해 다녔다. 제리는 자신이 저 사람들에게 무언가 커다란 잘못을 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황궁 안에서의 생활은 편하기는 했으나 뭔가 텅 비어 있었다. 이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황궁에도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의 제 삶은 어떠했을까. 아카데미에 들어가 일리야를 만난 거라면, 그 전에 제게 있었던 가족들은? 친구 같은 건 없었을까?

“일리야, 외출하게 해줘.”

일리야가 입술을 떼어냈을 때 제리가 말했다. 일리야는 이번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제리의 목덜미를 잘근거리며 옷자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단추가 하나씩 풀려나가며 셔츠가 벌어졌다. 일리야는 마지막 단추까지 끌러내고 옷을 벗기려 했다. 제리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놔! 왜 못 나가게 하는 거야?”

“자꾸 왜 그래….”

일리야는 제리의 손에 얻어맞은 어깨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너는 몸이 약해서 위험해.”

“그렇게 불안하다면 너도 같이 나가면 되잖아!”

“필요한 게 있어서 그래?”

“말했잖아.”

“뭐가 필요해?”

“필요한 건 없어! 그냥 나갈 수 있게 해줘.”

일리야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밖은 위험해….”

“그럼 너랑 같이 나가면 되잖아!”

“제리,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해.”

“야!”

비슷한 대화가 빙빙 돌았다. 일리야는 필요한 게 없다면서 밖에 나가보고 싶다는 제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제리 역시 뭐가 그렇게 위험한지 알 수가 없었다.

“나가게 해달라고! 그냥 나한테 신경을 꺼!”

일리야는 잠시 생각했다. 누운 채로 자신을 밀쳐내는 제리의 손을 잡아 침대 위로 꽉 눌렀다.

“제리. 나 몰래 누굴 만났어?”

그럴 겨를은 없었다.

“아무 계기도 없이 나가고 싶다는 건 말이 안 돼. 몰래 누군가가 네게 말을 건 거야. 그렇지?”

제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일리야가 옆에 있는데 몰래 누굴 만날 수 있을 리가 없다.

“누구야? 얼굴을 기억해…?”

그 사실을 일리야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어쩐지 그는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제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알았어. 나가는 건 됐으니 아무나 말상대를 하나만 붙여줘.”

“…….”

“나 심심해.”

어쩐지 일리야는 자신이 외출을 하는 것보다도, 다른 사람과 말을 섞는 것 자체에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딱 맞아 떨어졌다.

“내가 있잖아.”

“너만 있으면 된다는 건 너무 이기적이야.”

“그건 네 생각이지….”

제 손을 잡아 침대 위로 짓누르고 있던 일리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옥죄는 듯 아팠다. 일리야의 붉은 눈빛이 식었다.

“제리.”

늘 따뜻함이 담겨 있던 시선이 날카로웠다. 그는 손을 들어 제리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동그란 이마가 드러난다.

“작은 머리로 나 말고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있어?”

“뭐?”

“그럴 거면 차라리…….”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부드러운 입술이 제리의 이마에 살포시 맞닿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랬잖아.”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졌다. 기억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더 짙어진다. 일리야는 제리를 조심스레 안아 올려 소파에 앉혀두었다.

“앞으로는 내 생각만 해, 제리…. 이번엔 기억에는 손대지 않았어….”

“…….”

제리는 자신이 방금 전까지 무슨 요구를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인형처럼 멍하게 눈만 깜빡이며 자리를 지켰다.

* * *

 “……어?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의식이 돌아온 것은 그날 밤, 방심한 일리야가 아주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일리야도, 주변을 지키는 시종들도 없었다.

“잠깐 나갔다 들어오면 모르겠지?”

제리는 옷깃을 여미고 창문 너머로 뛰어내려 풀숲에 숨어 기어갔다. 미리 봐뒀던 통로까지는 멀지 않았다. 황궁을 지키는 사람들은 많지만, 담벼락 아래 나 있던 조그만 개구멍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늘어났다. 늘 고개만 숙인 채 제리와 일리야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자신을 찾아다녔다.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일리야가 금세 자신을 찾아내 데리고 가면 어쩌나, 제리는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동쪽의 개구멍까지 가는데 제리를 붙잡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의 마력석이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개구멍을 기어 마침내 담벼락을 빠져나오고 나니, 커다란 호수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푸른 달빛이 수면에 비추어 반짝거렸다.

제리는 얼마 가지도 않고 호숫가에 앉아 한참 반짝거리는 수면을 구경했다. 반지의 마력석이 반짝거릴 때마다 물방울이 동그랗게 부풀어올랐다. 물방울은 하늘을 향해 둥실둥실 떠가기도 했고, 물로 만든 토끼가 수면 위를 폴짝거리다 촤아악 소리를 내며 다시 흩어지기도 했다. 제리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마법적인 일들이 그의 손끝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호수로 들어오는 조그만 오솔길에 그림자가 졌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일리야가 제리를 향해 걸어왔다. 뒤를 돌아본 제리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변명을 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일리……!”

일리야는 제리의 눈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덮으며 수식을 외웠다. 입을 벌린 채 무의식적으로 발휘되던 마법을 바라보던 제리는 의식을 잃고 일리야의 품으로 쓰러져 안겼다.

목이 반쯤 베여 쓰러진 문지기 세 명을 지나쳐 황궁 깊숙한 곳의 달그림자 궁까지 걸어 들어온 일리야는, 제리를 침대 위에 눕혔다. 반나절만에 제리가 의식을 차리는 것은 그의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일리야는 좀 더 강화된 기억마법을 제리에게 걸어두었다. 이틀 뒤, 제리는 다시 눈을 떴다. 하지만 그는 일리야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다.

일리야는 일이 단단히 틀어진 것을 직감했지만, 이미 제리와 그의 관계는 어긋난 지 오래였다. 이제 와서 건강한 관계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일리야는 자포자기한 듯 눈을 꼭 감은 제리를 끌어안았다. 마른 몸이 힘을 빼고 일리야에게 몸을 기댔다. 제리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가 일리야에게 웃어줄 일은 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리야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사랑해, 제리.”

“…….”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 이대로라도 좋아. 반병신이 된 너라도 내 것이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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