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어른은 아이의 거울
•
•
글리오라 오로를 처치한 뒤,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은 다음으로 오크 엠페러를 잡으러 글록시니아에서 비프로스트를 이용해 오크 군집 필드로 이동했다.
[무지개 요정 : 아까 그 스킬은 이제 못 쓰는 거지?]
[율 : 네 쿨타임이...]
[질풍 : 아까비...]
[광인한 남자 : 다 좋은데 쿨타임 너무 살인적이야;]
[노아 : 그나저나 오엠 빨리 찾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보탐 온 파티가 몇 개 있는 것 같은데...]
[도련 : ㅇㅇ]
[무지개 요정 : ㄱㄱ]
무지개 요정의 말에 모두 비프로스트 조각을 사용해 필드의 곳곳으로 이동했다. 중간중간 사냥 중인 파티들이나, 자신들처럼 무한 텔포를 하며 오크 엠페러를 찾는 보스 파티를 심심치 않게 지나쳐가며 수색하는 도중 광인한 남자의 길드 말이 올라왔다.
[길드] [광인한 남자 : 이미 잡고 있네..9시]
[길드] [질풍 : 아 진짜?]
[길드] [니지 : 에이...]
하나같이 유감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길드원들은 약속이라도 하듯 9시로 몰려들었다. 이미 그 주변엔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 말고도 두세 개의 파티가 진을 치고 있었다. 아마도 현재 우선권을 가진 파티가 전멸할 경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길드] [세츠나 : 우리도 기다리나요?]
[길드] [무지개 요정 : ㅇㅇ대기]
[길드] [노아 : 율님 버프 좀 다시 주세요]
기다리는 동안 노아의 요청에 율의 보조 버프들이 줄을 지어 이어졌다. 스킬을 사용하면 12명의 파티원 머리 위에 같은 버프이펙트가 동시에 떠오르는 생소한 광경에 주변에 있던 파티들의 이목이 쏠렸다.
자신들을 향한 웅성거림과 시선이 빠르게 퍼져가는 가운데,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던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이 하나같이 전투 자세를 취하며 빠르게 스킬들을 시전했다. 동시에 오크 엠페러를 잡고 있던 파티가 전멸했고, 오크 엠페러가 광인한 남자를 타깃팅 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 광인한 남자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을 때, 광인한 남자의 옆에 서 있던 노아가 스킬을 사용했다.
(티라노스)
스킬을 사용하자, 광인한 남자를 향해 달려오던 오크 엠페러가 타깃을 바꿔 노아에게 달려왔다. 티라노스는 아마 프로보크와 같은 효능을 가진 도발 스킬인 것 같았다. 하지만 보스에게 통하지 않는 프로보크와 달리 티라노스는 보스에게도 유효한 듯 보였다.
순식간에 뒤바뀌는 어글자 때문에 당황한 듯 보이는 주변 파티들과 다르지 않게 정신없기는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미리 시전 해놓은 범위 스킬들은 타깃을 잃었고, 즉시 스킬들은 허공을 가르기 일쑤였다.
하지만 길드원들은 곧 태세를 가다듬고 노아에게 가세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보조와 공격이 산발적으로 빗발치는 가운데, 오크 엠페러의 공격이 노아를 직격했다.
아직 새로운 스킬에 익숙하지 않은 노아는 공격을 적절하게 피하지 못했고, 한 번에 피가 30% 정도가 깎여버렸다. 자신의 체력을 생각하면 힐을 적어도 4번을 넣어야 차는 양이었다. 노아의 성격상 얌전히 힐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가볍게 혀를 차며 단축키를 눌러 포션을 먹었다.
(볼렌테 데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만이 넘는 힐 양이 노아에게 쏟아져 내렸다. 후방에 서 있던 율의 스킬인 듯했다. 열심히 오크 엠페러에게 공격을 가하던 모두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맹공이 시작됐다. 그 와중에 노아는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다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오크 엠페러 주위로 넓게 붉은 원이 그려졌다. 보스의 광역기 표시였다. 방어 스킬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저항 스킬을 사용해야 하는 타이밍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처할 틈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광역기가 터져 나왔다. 들고 있던 언월도를 미치광이처럼 사방으로 휘둘러대는 공격에 범위 안에 있던 길드원들이 속수무책으로 얻어맞고 튕겨 나가거나, 다운되거나, 스턴에 걸렸다.
(비아트리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율이 사용한 스킬의 이펙트가 동시에 떠올랐다. 대상자의 상태 이상을 치료하고, 일정 시간 바이탈을 높여주는 스킬이었다.
(플로레스 니비움)
거기에 연달아 사용한 스킬은 율의 주변에 휘날리는 눈꽃을 소환했다. 눈꽃은 사방팔방 휘날리며 눈꽃에 닿은 파티원들의 체력을 빠르게 회복시켰다. 흐트러졌던 태세가 율에 의해 정상으로 돌아오고, 보고 있던 구경꾼들도 탄식을 자아냈다.
(뒤나미스)
(카타스트로페)
(퀴리오스)
그리고 율에 이어, 노아도 스킬을 줄지어 사용했다. 무기의 공격력을 올려주는 뒤나미스를 시작으로 노아의 등 뒤로 검들이 부채처럼 펼쳐지더니 일제히 오크 엠페러를 향해 종횡무진 돌진했다. 그의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궁기도 칼날들 틈에 섞여 들어가 오크 엠페러를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도 노아는 오크 엠페러에게 지속해서 공격을 받아 피가 줄고 있었지만, 율은 11명이나 되는 파티원들을 포괄적으로 보조하느라 노아에게 전력으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노아는 또다시 포션을 사용했다. 그리고 동시에 세츠나의 힐이 들어왔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노아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지개 요정 : 광역기 온다! 저항!]
하지만 무지개 요정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크 엠페러의 앞으로 직사각형의 범위 표시가 길게 뻗어 나왔다. 다들 저항기를 두르거나, 저항 타이밍을 재며 대기를 했다. 곧이어 오엠의 언월도가 범위 표시에 맞춰 길게 앞으로 뻗어 나오며 공격을 가했다.
원거리나 보조계는 공격 범위에서 아예 벗어나 있었고, 격수들은 저항기를 사용해 피하기 바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오크 엠페러의 범위 정면에서 버티고 서 있던 노아가 스킬을 사용하며 그대로 오크 엠페러의 공격을 받았다.
(엑소시아)
노아에게 직격한 후, 노아를 타격했던 데미지는 그대로 증폭되어 오크 엠페러에게 되돌려졌다. 결국, 자신의 공격을 되돌려 받은 오크 엠페러는 그대로 다운이 되었고, 모든 걸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은 그의 무식해 보이기까지 하는 스킬에 탄식을 흘려보냈다.
(볼렌테 데오)
(인 라피뎀)
하지만 오크 엠페러에게 받은 데미지는 율의 스킬로 순식간에 회복이 되었고, 파티원들 주변에 녹색 벌집 같은 배리어가 동시에 둘렸다.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퍼부어지는 공격과 더불어 사방팔방을 휘젓고 뛰어다니며 오크 엠페러를 공격하는 궁기까지. 한참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 노아는 갑작스럽게 타깃팅이 분리되며 화면의 초점이 흐려지는 현상에 놀라 손을 멈췄다. 연이어 화면 중앙에 비활성화되어 있던 (루프 나흐 디어) 스킬의 아이콘이 활성화되어 떠올랐다. 노아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스킬을 사용하자, 노아에겐 보이지 않는 화면 뒤쪽에서 무언가가 얻어맞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놀란 노아가 화면을 돌려 뒤를 돌아보자, 분리되었던 타깃팅은 율에게 공격을 가하는 오크 한 마리를 겨냥하고 있었고, 루프 나흐 디어로 소환된 두 개의 빛의 구체가 그 오크를 공격하고 있었다. 서로가 적잖이 놀란 듯 멍하니 서 있던 두 사람은 화면에 가득 차오르는 이펙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콰트로 볼텍스)
(아도라무스 떼 도미네)
무지개 요정과 세츠나, 두 사람의 히든 스킬이 작렬하고, 오크 엠페러는 그대로 쓰러져 전리품만을 남겼다.
[무지개 요정 : 완전 일사천리구만!]
[노아 : 인원이 많은 덕도 있는 것 같아요]
[도련 : 근데 노아랑 율님 진짜 장난 없다...]
[세츠나 : 율님 장비만 제대로 맞추면 둘이서도 보탐 다니겠는데?]
[질풍 : 율님!! 나도 피 많이 차는 힐 해줘요!!]
[율 : 아...그거 컴패니언 스킬이라 노아님한테만 쓸 수 있어요;]
[질풍 : 헐...]
[노아 : 그랬어요?]
[율 : 네]
[무지개 요정 : 그런 것보다 다음엔 뭘 잡을까?]
[노아 : 그 전에 잠시만요]
[무지개 요정 : 응?]
무지개 요정의 의문에도 답하지 않은 채 노아는 잠시 말도, 행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행동에 짧은 침묵이 일었다.
[노아 : 저 포션이 안 먹혀요]
포인세티아 주막으로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조금 전까지 보스 타임을 뛰고 있던 멤버 그대로였다.
[무지개 요정 : 어떻게 된 거야?]
[노아 : 잘 모르겠네요]
포션이 안 먹힌다던 노아는 재시작도 해보고, 재접속도 해봤지만, 상태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제야 상태의 심각성을 느낀 모두는 보스 타임을 접고 쉼터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노아 : 혹시 나만 이러는 거예요?]
노아의 물음에 다들 포션을 먹어봤지만 다들 정상적으로 먹히는 걸 확인했다.
[무지개 요정 : 너만 그런 것 같은데...]
[노아 : 이게 지금 저만 걸린 오류 같은 건 아니죠...?]
[도련 : 설마...퓨리나이트 특성 같은 건...]
[노아 : ...]
도련의 말에 노아는 며칠 전 헤임달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완벽한 모습으론 거듭날 수 없다던 말과 서로를 위한 희생의 형태로 자신의 중요한 것들을 하나씩 대가로 바쳐야 한다고 했던 말. 노아는 다급하게 율을 불렀다.
[노아 : 율님]
[율 : 네?]
[노아 : 우리 퀘스트 할 때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서 한 명씩 대가를 치렀잖아요?]
[율 : ...아]
[노아 : 지금 내가 포션 못 먹는 게 그거랑 연관이 있는 것 같거든요? 율님은 뭐 변한 거 없나요?]
[율 : 어...잘 모르겠는데;;]
[무지개 요정 : 뭔 소리야? 대가라니?]
[도련 : 퀘스트 할 때 뭔 일이 있었던 거야?]
갑작스러운 노아의 말에 길드원들의 질문 세례가 시작됐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정과 퀘스트할 때 있었던 일들을 모두 전해 들은 길드원들은 모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질풍 : 아니...아무리 대가라고 해도; 기사가 포션을 못 먹으면;;]
[KING Husband : 율님 대가는 뭐야 그럼?]
[광인한 남자 : 뭔가 허를 찌르는 대가일 것 같은데...]
[무지개 요정 : 율이 뭐 짐작 가는 거 없어?]
[율 : 네...]
[도련 : 율님은 대가 치른 후에 스킬 초기화 됐었다고 했죠?]
[율 : 네]
[도련 : 뭔가 스킬하고 연관이 있는 걸까요?]
[무지개 요정 : 기존스킬은 다 사라졌잖아?]
[도련 : 그..그렇죠;]
[노아 : 아...설마.]
[무지개 요정 : ?]
[율 : ?]
[노아 : 율님 혹시 스킬 중에 공격스킬 있나 확인해 볼래요?]
[율 : 공격스킬이요?]
[노아 : 네 얼른요]
노아의 말에 율은 스킬을 확인하는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던 모두에게 청천벽력 같은 답이 돌아왔다.
[율 : 저...공격스킬이 하나도 없어요;]
[노아 : ...]
[무지개 요정 : 헐...]
[도련 : 이게 뭐야...]
[질풍 : 이래서... 컴패니언이었던 거였어?]
전직 후, 두 사람이 가진 직업의 특성에 대한 짐작은 수요일 업데이트를 통한 직업 정보가 뜨며 더욱 명확해졌다. 퓨리나이트는 스크롤을 포함한 모든 회복용 아이템 사용 불가. 아크비숍은 물리 공격을 포함한 모든 공격계 스킬 사용 불가.
***
율은 잠수를 하는 듯한 무지개 요정과 나란히 길드의 쉼터에 앉아 있었다. 노아는 업데이트 정보를 확인하는 건지, 접속하는 시간이 좀 늦어지고 있었다. 노아를 기다리며 멍하니 쉼터에 앉아 있던 율에게 귓속말 알림음이 들려왔다.
[귓속말] [꽃잔 : 안녕하세요]
[귓속말] [율 : ? 누구..세요?]
[귓속말] [꽃잔 : 아...저는 머스킷티어의 부 길마 꽃잔이라고 합니다]
[귓속말] [율 : 아...안녕하세요;]
[귓속말] [꽃잔 : 율님한테 귓드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율님을 저희 길드로 스카웃하고 싶어서예요]
[귓속말] [율 : 네??]
[귓속말] [꽃잔 : 요즘 노아님하고 율님 얘기로 서버가 떠들썩한 거 아시죠?]
[귓속말] [율 : 아뇨...]
[귓속말] [꽃잔 : 아....]
[귓속말] [꽃잔 : 음...저희 글록시니아 동맹은 지금 레인보우 힐에 두 명의 히든 클래스랑 두 명의 히든 스킬 보유자가 공존하는 게 불공평하다는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거든요.]
[귓속말] [율 : ??]
[귓속말] [꽃잔 : 차후에 그쪽 길마님께도 연락을 할 테지만 그런 것보다 저희는 율님을 스카웃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어서요...]
[귓속말] [율 : 왜 저를;;]
[귓속말] [꽃잔 : 지금 인벤에 노아님이랑 율님 스킬 영상 돌아다니는 거 모르셨어요?;;]
[귓속말] [율 : 네?]
[귓속말] [꽃잔 : 아...모르셨구나.. 지금 그거 때문에 서버가 난리가 났는데;]
[귓속말] [꽃잔 : 율님이 저희 길드로 넘어오시면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한에서 모든 지원을 해드리려고 하고 있어요.]
[귓속말] [율 : 네?? 아뇨.. 저는;]
[귓속말] [꽃잔 : 에잉ㅠㅠㅠ거절하지 마시구요]
[귓속말] [율 : ;;]
[귓속말] [꽃잔 : 혼자 오시기 뭐하시면 노아님하고 같이 오셔도 괜찮아요!]
[귓속말] [율 : 저 잠시 만요...]
[귓속말] [꽃잔 : ??]
[율 : 길마님....]
[율 : ...길마님? ㅠㅠㅠ]
[율 : ㅠㅠㅠㅠ]
[길드] [율 : 저...도련님]
[길드] [도련 : 네?]
[길드] [율 : 지금... 쉼터..와주실 수 있으세요?]
[길드] [도련 : 아..저 지금 팟중인데;;]
[길드] [율 : 아;;;]
[길드] [도련 :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길드] [율 : 아...아니에요;]
[무지개 요정 : ?? 왜 불렀어?]
[율 : 길마님!!ㅠㅠ]
[무지개 요정 : 왜? 왜??ㅠㅠㅠ]
[율 : 저...머스킷 티어에 꽃잔이라는 사람한테 귓이 왔는데요..]
[무지개 요정 : 꽃잔? 걔가 왜?]
[율 : 저더러 머스킷 티어로 오라는데;;]
[무지개 요정 : ?!!!?!?!?!?!]
[율 : 어떡해요...?ㅠㅠ]
[무지개 요정 : ....좆까라 그래!!!]
[율 : 네?!]
[무지개 요정 : 어디서 개수작을 부려!!!]
[무지개 요정 : 제로 이 개새끼를 그냥!!!]
율의 말을 들은 무지개 요정은 벌떡 일어나 쉼터를 달려 나갔다. 어디를 가는지는 몰라도, 홀로 남겨져 어쩔 줄 몰라 하는 율에게 또다시 꽃잔의 귓속말이 시작됐다.
[귓속말] [꽃잔 : 율님, 율님?]
[귓속말] [꽃잔 : 생각해 보셨어요? 율님이 결정하시기 힘드시면 저희가 무지개 요정님하고 조율해서 율님 길드 이전 도와드릴게요]
[귓속말] [꽃잔 : 듣고 계세요? 율님?]
계속되는 꽃잔의 귓속말에 율은 이 말을 해야 하는지, 해도 되는지를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짧지 않았다. 율은 무지개 요정이 시킨 대로 짧지만 단호한 거절의 한마디를 써 보냈다.
[귓속말] [율 : 좆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