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폭풍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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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선물해준 쥬얼 플룸은 매력적인 외형 외에도, 율이 조금씩 움직이기만 해도 깃털 사이사이에서 빛의 가루가 쏟아져 내리며 흩날리는 이펙트를 가지고 있었다. 전에 보지 못한 투구의 화려함에 민지가 대뜸 오버하며 야단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월광의 마녀∑민지♕ : 우왕~ 율님 그 모자는 뭐에영?? 또 노아님이 주셧어영?]
[율 : 네? 네..]
[월광의 마녀∑민지♕ : 왕...넘나 부럽다...모자 진짜 이뿌당..]
[월광의 마녀∑민지♕ : 노아님 저도 모자 사주심 안대영?]
[노아 : ?]
[노아 : 내가 그쪽한테 모자를 왜 사줍니까?]
[월광의 마녀∑민지♕ : 이잉...저도 사주세영ㅠㅠㅠ]
[월광의 마녀∑민지♕ : 아니면 율님이 얼굴에 끼고 있는 거 저한테 주라고 하심 안대영?]
[노아 : ??]
[월광의 마녀∑민지♕ : 율님이 한 거보다 제가 한 게 더 이쁠 것 같아영~!]
[노아 : 돈 벌어서 사세요]
[월광의 마녀∑민지♕ : 돈 없어여ㅠㅠㅠ]
[노아 : 없으면 못사는 거지]
[월광의 마녀∑민지♕ : 그럼 율님이 낀 모자 저 주세여!]
[노아 : 뻔뻔한 건가? 개념이 없는 건가? 아니 둘 다인가?]
[월광의 마녀∑민지♕ : ㅇㅅㅇ?]
[노아 : 지능이 오늘내일하면 게임을 쳐하지 말고, 병원을 가지?]
[눈감아♡김민지 : 노아님!!]
[눈감아♡김민지 :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그리고 누가 봐도 우리 민지가 하는게 훨씬 더 낳을 것 같은데요?]
[노아 : 낳긴 뭘 낳아? 그렇게 갖고 싶으면 둘이서 템을 낳으면 되겠네.]
[노아 : 두 사람 지능과 수준을 합치면 S급 레어 템도 순산할 판인 것 같은데.]
[월광의 마녀∑민지♕ : 우웅?]
[눈감아♡김민지 : 뭔 소리에요...?]
[노아 : ...]
이해력까지 모자란 그들이었다.
***
머스킷과의 스왑이 끝나는 날, 레인보우 힐 길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아침 일찍 접속해서 노아를 기다렸다. 소문에는 머스킷 티어 길드원들과 친해진 노아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긴장했던 마음이 무색하게도, 노아는 접속하자마자 신속하게 머스킷을 탈퇴하고, 레인보우 힐의 쉼터에 돌아왔다. 엠블럼 없는 단출한 아이디가 반갑게까지 느껴졌다.
너무나 간단명료한 그의 행동에 허무할 만치 쉽게 긴장이 풀려버린 길드원들은 너도나도 그간 들어왔던 소문들과 자신들이 전전긍긍했던 얘기들을 웃으며 노아에게 풀어놨다.
[노아 : 제가 머스킷에 왜 남아요?!]
[무지개 요정 : 아니 소문이..]
[노아 : 아무리 그래도 그런 뜬소문을 믿었어요??]
[질풍 : 형이 하루종일 머스킷 사람들하고 사냥을 한다니까..]
[노아 : 그 사람들하고 사냥을 한 게 아니라 쥬얼 플룸 재료 구하려고 노가다를 뛰러 다니는데 너도 나도 돕겠다고 몰려와서 멋대로 도와준거야]
[질풍 : 아...]
[광인한 남자 : 쉼터에 와도 우리랑 얘기도 별로 안하고 서둘러 가버렸었잖아!]
[노아 : 노가다 해야 하니까]
[광인한 남자 : 아...]
[세츠나 : 전화번호를 교환했다는 건??]
[노아 : 머스킷에 짜증나는 놈이 하나 있었거든. 툭하면 시비에 깐족거리는 놈이? 처음엔 무시했었는데 내가 무시하니까 더 기고만장해서 지랄을 하길래 몇 번 받아쳤더니 현피를 뜨자면서 번호를 까라고 난리를 부려서 깐거야]
[질풍 : 헐..]
[도련 : 어디든 또라이는 있네...]
[KING Husband : 그래서? 현피뜸?!]
[노아 : 번호 까니까 바쁘다면서 안 들어오던데]
[도련 : 졸렬하기 까지..]
[무지개 요정 : 그랬던 거구만..]
[질풍 : 정말 소문이란 게 남의 입을 거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구나..]
[노아 : 솔직히 머스킷이 지원이랑 환경은 좋더라고요 몇명만 빼면 길드 분위기 자체도 나쁘지 않고 길드를 이전해도 딱히 나쁠 건 없겠다라는 생각은 했었어요.]
[무지개 요정 : ???]
[도련 : ??]
[노아 : 그렇지만 나쁘지 않은 정도지 좋은 건 아니잖아요 딱히 좋지도 않은데 제가 거기 붙어 있어야 할 이유가 뭐예요]
[광인한 남자 : 그러네 여기엔 율님도 있고]
[노아 : 스왑을 하면서 이 길드 저 길드 옮겨 다녀 보니까 저희 길드가 정말 좋은 길드였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요]
[무지개 요정 : 오? ㅋㅋㅋㅋ]
[도련 : ㅋㅋㅋㅋㅋ]
[도련 : 그래서 그런데 노아야]
[노아 : ?]
[도련 : 네가 머스킷에 가 있는 동안 길마님이랑 상의를 좀 한 게 있는데...]
[노아 : 뭘요?]
[도련 : 이제부턴 네가 부 길마를 하면 어떨까 싶어서]
[노아 : 네?]
[광인한 남자 : ?]
[세츠나 : ?!]
[질풍 : ??]
[KING Husband : 헐?]
[율 : ?]
[무지개 요정 : 강요하는 건 아니야 네가 싫다면 계속 도련이가 부 길마 자리에 남겠지만 도련이는 네가 부 길마자리를 받기를 바라는 것 같더라]
[도련 : 솔직히 이제 내가 부 길마 자리에 있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진 거 같아]
[도련 : 그리고 너도 부 길마라는 직위를 갖게 되면 내외로 네 체면이나 길드의 체면도 좀 설 것 같기도 하고]
[도련 : 길마님은 강요하는 건 아니라고 하시지만 난 솔직히 강요하고 싶다]
[질풍 : 근데 노아 형이 부 길마 되면 우리 노아 형한테 존대해야 하는 거잖아요...]
[광인한 남자 : 거리감 느껴질 것 같은데..]
[도련 : 그 부분도 노아 좋을 대로 결정해도 된다고 길마님이 그러셨어]
[세츠나 : 그럼 노아오빠가 부 길마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는데..]
[KING Husband : 난 찬성 노아 형 강단도 있고 파급력도 좋고 길드가 좀 더 탄탄해질 것 같아]
[노아 : 음...]
[노아 : 율님은요? 어떻게 생각해요?]
[율 : 네?]
[율 : 어.. 저도 찬성하고 싶어요]
[노아 : ...]
[도련 : 역시 좀 그래?]
[노아 : 아니요 할게요]
노아가 레인보우 힐에 돌아와 부 길마가 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직위만 부 길마가 됐을 뿐이지, 평소와 다른 점은 별로 없어서 매번 똑같은 일상 속에서 수요일날 업데이트된 이벤트가 길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길드] [질풍 : 주신의 상자다!!!]
[길드] [광인한 남자 : 난 벌써 까봄]
[길드] [질풍 : 헐? 뭐 건짐?!]
[길드] [광인한 남자 : 무기 7제련권이랑 코스튬 몇 개]
[길드] [질풍 : 헐 7제련권이 어디야..]
[길드] [광인한 남자 : 지를 것도 없어서 팔려고ㅋㅋ]
레페르토르에서 수시로 하는 주신의 상자라는 이벤트는 ‘주신의 상자’라는 캐시 아이템에서 지정된 이벤트 물품이 랜덤으로 나오는 가챠 이벤트였다.
[길드] [광인한 남자 : 목록 살펴보니까 이번 대박은 9제련권이랑 아차 템 정도던데]
[길드] [질풍 : 코스튬도 이쁜 거 많아 보이더라]
[길드] [광인한 남자 : 넌 안 삼?]
[길드] [질풍 : 나도 묶음 샀음 ㅋㅋㅋ]
[길드] [광인한 남자 : ㅋㅋㅋㅋㅋㅋㅋ]
[노아 : 율님은 상자 안 사나요?]
접속한 후, 율을 데리고 바로 사냥터로 나온 노아는 쉼터에서 나누는 질풍과 광인한 남자의 대화를 보며 율에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노아의 물음에 율은 당황한 듯 버벅거렸다.
[율 : 네?]
[율 : 아..저는..]
[율 : ...그...]
[율 : 노아님은 안 사세요?]
[노아 : 이따 저녁에 사려고요]
[율 : 저녁에요?]
[노아 : 난 오전에 뭘 하면 잘 안 되는 징크스가 있어서요 ㅋㅋ]
[노아 : 이왕이면 방어구 제련권이나 나왔으면 좋겠네요 율님 쥬얼 플룸 좀 지르게]
[율 : 네?]
[노아 : 쥬얼 플룸도 제련 도에 따라서 옵션이 달라지잖아요]
[율 : 아..]
[노아 : 적어도 7은 띄워놔야 쓸 만할 거예요]
[노아 : 좀 사서 까보다가 안 나오면 제련권을 사서 지르죠 뭐]
[율 : 비싸지 않을까요..제련권..]
[노아 : 7짜리는 저렴해요]
[율 : 얼마쯤 할까요...? 제가 모아놓은 돈이 별로 없어서...]
[노아 : ??]
[율 : 쥬얼 플룸 만들어서 주시기까지 했는데 제련권까지 손 벌릴 수가..]
[노아 : ㅋㅋㅋㅋㅋ 우선은 상자 먼저 까보고 안 나오면 그때 생각해보죠]
[율 : 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된 노아와 율, 두 사람의 사냥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두 사람은 일정 시간은 사냥하고, 또 일정 시간은 스페라무스 쿨에 맞춰서 보스 파티에 지원하기도 했다. 렙벨 업과 아이템 파밍, 돈 벌기를 동시에 하는 셈이었다.
온종일 쉴 새 없이 달린 덕에 지친 몸을 끌고 쉼터에 돌아오자, 이미 삼삼오오 모여 있는 쉼터의 길드원들이 반갑게 맞아줬다.
[도련 : 여태 사냥한 거야??]
[노아 : 사냥도 하고 보탐도 뛰고]
[질풍 : 노아 형 돌아오고 나서 율님 렙업 속도가 장난 아니야..]
[율 : ㅋㅋㅋ]
[집사 : 보는 제가 다 뿌듯하네요.]
[광인한 남자 : 전에는 축 처져서 사냥 가자고 권해도 거절하기만 하시더니 ㅋㅋㅋ]
[KING Husband : 우리랑 노아 형이랑 같겠냐...]
[율 : 네?! 그런 거 아니에요..!]
[KING Husband : 오? 그러면 율님이 생각할 때 길드에서 율님하고 제일 친한 사람은 누구예요?!]
[율 : 네??]
뜬금없는 KING Husband의 질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율과 달리 다른 모두는 은근한 긴장을 한 채 율의 대답을 기다렸다.
[율 : 저...]
[율 : 어....]
[율 : ....풍이..님?]
[질풍 : 아임 위너!!!!!!!!!!!]
[질풍 : 크~ 내가 이렇게 율님을 잘 키웠어요~]
[노아 : ...]
[광인한 남자 : ...]
[KING Husband : ...]
[도련 : ...]
[집사 : ^^?]
[질풍 : :D]
[도련 : 그럼 제일 편한 사람은 누구예요? 그것도 역시 풍이?]
[율 : 어...]
[율 : 노아...님이요]
[질풍 : 엑?!]
[노아 : 내가 이렇게 율님을 잘 키웠어요~]
[광인한 남자 : 뭐얔ㅋㅋㅋㅋ]
[KING Husband : 잌ㅋㅋㅋㅋㅋㅋㅋㅋ]
[도련 : 미쳨ㅋㅋㅋㅋㅋ]
[질풍 : 그럼 제일 좋은 사람은 누구예요!!!!!!!!!!!!]
[율 : 네?!]
[율 : ;;;]
[KING Husband : 그만해라 이 질척남아 ㅋㅋㅋ]
[광인한 남자 : 어휴 끈질긴 남자는 인기 없어]
[도련 : 율님 괴롭히냐? ㅋㅋㅋㅋ]
[노아 : 인기투표 하냐고 ㅋㅋㅋㅋ]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 하나에 웃고 떠드는 길드원들 사이에서 율은 웃을 수 없었다. 그리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화면 안의 한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뿐이었다.
노아 일행이 웃고 떠드는 사이, 중2병 4인방이 쉼터에 돌아왔다. 그들은 제일 큰 평상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노아 일행 때문인지, 조금 주춤거리며 구석의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들의 등장과 함께 잠시 끊어졌던 노아 일행의 대화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계속 이어졌다.
[노아 : 아..제련권 어지간히 안 나오네]
[광인한 남자 : 맞아 다들 무기 제련권은 그럭저럭 나오는데 방어구 제련권은 안 나오던 다고들 하더라]
[노아 : 아차 템이라도 나오면 팔아서 그냥 사 버릴 텐데]
[노아 : 몇 묶음 째야 벌써]
[광인한 남자 : 율님은 상자 안 까요?]
[율 : 저는...]
[노아 : 캐시 충전할 방법이 없으셔]
[KING Husband : 현금 있으면 문상사와요ㅋㅋㅋ]
[율 : 문상이요?]
[KING Husband : 네 편의점가면 팔잖아요]
[율 : 문상...]
KING Husband의 말에 율은 고민에 빠졌다. 현금은 있다. 학교를 그만둔 후에도 부모님은 빼놓지 않고 용돈을 주셨으니까. 솔직히 제련권을 뽑기 위해 계속해서 상자 묶음을 구매하는 노아에게 면목이 없을 정도로 미안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제련권은 자신이 구하고 싶지만, 문제는 율이 자퇴한 후 단 한 번도 밖을 나가 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율은 화면 속의 노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키보드 위로 올렸다.
[율 : 문상...사올게요]
[KING Husband : 오올~]
[노아 : 너무 늦었어요 살 거면 내일 아침에 가요]
[광인한 남자 : 에이~ 이제 12시 좀 지났구만~]
[도련 : 과잉보호야~]
[질풍 : 아니...진짜 너무 늦었는데;]
[광인한 남자 : 12시가 뭐가 늦엌ㅋㅋㅋ 건장한 남자에겐 활력이 솟아나는 시간이다!]
[율 : 괜찮아요 얼른 다녀올게요]
[노아 : 편의점이 가까워요?]
[율 : 10분 정도요..]
[노아 : 그냥 내일 아침에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율 : 그게...저도 상자 사보고 싶기도 하고...이 이상은 노아님께 죄송하기도 하고..]
[노아 : 뭐가요?]
[율 : 제련권 때문에 계속 상자 사시는 거잖아요..]
[노아 : 뭐 어때서요]
[율 : 만들어주시기까지 했는데...제련 권까지 손 벌리고 있기는 싫어요...]
[율 : 나올지 안 나올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보탬이라도 되면 좋잖아요..]
[노아 : 그럼 나도 오늘은 그만 살 테니까 율님도 내일 아침에 문상 사러 가요]
[율 : ...]
[노아 : 율님?]
[율 : 지금 다녀올래요]
[노아 : 너무 늦었다니까요]
[광인한 남자 : 저기..두 분...실랑이 할 시간에 다녀오고 말겠는데요?]
[율 : 다녀올게요]
[노아 : 율님!]
[노아 : 율님?]
[노아 : ....]
[도련 : 가셨는가본데?]
[질풍 : ;;;]
구석의 평상에 앉아서 노아 일행의 대화를 지켜보던 중2병들은 하나같이 떨떠름한 반응을 했다.
[파티] [흑염룡 : 신파를 찍고 자빠졌다]
[파티] [눈감아♡김민지 : 늦었으니까 내일가용~~ 시벌ㅋㅋㅋ]
[파티] [월광의 마녀∑민지♕ : 웅~ 나도 지금 문상 사러 가면 걱정해줄꼬에요? 오빠야~?]
[파티] [눈감아♡김민지 : 떽! 이런 시간에 어딜 가!]
[파티] [월광의 마녀∑민지♕ : 꺄핳 박력 있어~ 멋있엉~♡]
[파티] [블㉣┥⊆✡КⅰП9 : 나도 문상이나 사러 갈까]
[파티] [흑염룡 : 돈 있어?]
[파티] [블㉣┥⊆✡КⅰП9 : 만원]
[파티] [흑염룡 : 좋겠다...]
[파티] [블㉣┥⊆✡КⅰП9 : ㅋㅋ편의점 다녀옴]
[파티] [눈감아♡김민지 : ㅇㅇ]
[파티] [월광의 마녀∑민지♕ : 다녀와용~]
부모님이 주무시고 있는 집을 몰래 빠져나온 율은 현관문을 열자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공기와 분위기에 눈을 크게 떴다. 근 몇 달 만에 마주한 집 밖은 어딘지 생소하게 느껴졌다. 처음, 온몸으로 맞아보는 새벽 공기가 겁나기도 하고, 들뜨기도 해서, 율은 눈에 익은 거리를 처음 보는 것처럼 천천히 걸었다.
건널목 너머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편의점이 보였다. 율은 건널목 앞에 서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면 느껴 볼 일이 없었을 새벽 공기와 늦은 시간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 그리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아니, 나갈 수 없었던 자신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집 밖으로 이끌어준 사람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절로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띠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바뀌는 신호등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누군가 율의 목덜미를 잡아채지만 않았으면.
우악스럽게 뒤에서 당겨대는 힘에 율이 휘청이며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무언가에 등이 닿으며 넘어지지 않았고, 자신을 지탱해 준 무언가에 기대어 겨우 균형을 잡은 율이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야~ 존나 오랜만이네, 응? 권율?”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몇 개월간 잊고 지냈던 악몽이 다시금 현실이 되어 되돌아왔다.
율은 놀라 희게 질린 낯으로 새된 비명을 입안으로 삼켰다. 제 목덜미의 옷깃을 쥐고 있는 성원의 손을 쥐어뜯듯이 뜯어낸 율은 뒤도 볼 것 없이 그대로 건널목을 도망치듯 달렸다. 하지만 절반도 가지 못해 뒤따라온 성원에게 그대로 머리채를 잡혀 끌려갔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율의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율은 바닥에 부딪힌 충격과 복부를 얻어맞은 타격감에 숨이 쉬어지지 않아 바닥에 구른 채 복부를 쥐고 헐떡였다. 그런 율의 몸 위로 몇 번의 발길질이 더 이어졌다. 고통에 다물어지지 않는 잇새로 새 된 숨과 타액이 새어 나왔다. 성원은 한참을 더 발을 놀리다, 제 발아래 바르작거리는 율의 모습을 보고, 만족한 듯 웃으며 그 앞에 몸을 낮춰 앉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렇게 대놓고 도망을 가면 돼? 또 대답을 안 하네? 왜 항상 몇 번 밟히면 대답을 안 하지?”
성원은 유감스럽다는 듯 말하며 율의 머리채를 잡아 얼굴을 들어 올렸다.
“매번 매를 벌어, 너는.”
그리고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율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내가 대답은 재깍재깍하라고 하지 않았냐? 네가 몇 달 손맛을 안 보더니, 학습 효과가 떨어진 모양이네.”
성원은 말을 이어가며 연이어 율의 뺨을 때렸다. 율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져 갈수록 성원의 얼굴은 희열로 일그러져 갔다.
“으… 읏, 그만… 해!!”
결국, 참다못한 율이 몸을 뒤틀어 성원의 손을 뿌리쳤다. 생각지 못한 격한 몸부림에 짐짓 놀란 성원이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자, 온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시 한번 복부에 날아든 발길질에 비명을 지르며, 복부를 쥐고 주저앉았다.
“왜 그래? 아파?”
복부를 쥐고 바닥에 몸을 웅크린 율이 거칠게 숨을 헐떡이자, 성원은 걱정된다는 듯 다가와 둥글게 말린 율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런 성원의 손길에 소름이 돋은 율이 제 등에 닿아있는 성원의 손을 뿌리치고 엉금엉금 기어 그에게서 벗어났다. 제 손을 쳐내고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도망을 치려는 율의 모습에 성원은 화가 나기보단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친, 장군님~ 바닥을 기어가시면 어찌합니까? 체통이 말이 아니십니다~”
성원이 허리까지 젖혀가며 낄낄거리고 웃는 틈을 타 율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얻어맞은 복부에 통증이 심해서 몸을 제대로 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구부정한 자세로 통증이 가시지 않은 복부를 움켜쥔 채 달렸다. 웃음을 멈춘 성원은 저만치 멀어져 있는 율의 뒷모습에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뒤따라왔다.
“야!!!”
성난 목소리에 위축된 율이 잠시 주춤거린 탓에 바짝 뒤쫓아 온 성원이 율의 팔을 낚아채 바닥으로 내던졌다. 성원보다 상대적으로 체구도 작고, 마른 율은 저항도 없이 그대로 끌려와 바닥을 굴렀다. 바닥에 누워 헐떡이는 율의 얼굴은 땀과 눈물, 모래 먼지로 범벅이 되어 엉망이었다.
“너 말이야, 너무 한 거 아니냐? 전화해도~ 톡을 해도~ 안 받고 말이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맨입으로 가면 안 되지? 응? 형님이 돈이 좀 필요해서 그런데, 간만에 조공 좀 해라.”
“…….”
“??”
“없…어.”
“뭐?”
“없다고….”
“없다고 말하면 다야? 없으면 만들어 와, 새끼야.”
사납게 일갈하며 주먹을 들어 올리는 성원의 행동에 율이 할 수 있는 건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리는 것밖에 없었다.
***
[질풍 : 율님 왜 안와...]
[노아 : ...]
율이 문상을 사러 간다며 나간 지 40분이 지났다. 노아가 물었을 때 10분이 걸린다던 편의점이었다. 왕복으로 좀 느릿느릿 다녀온다고 해도 30분 내엔 돌아왔어야 할 율이 4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고 있었다. 처음부터 전전긍긍하던 질풍, 노아와 달리 안일하게 생각하던 다른 이들도 슬슬 걱정되는 듯했다.
[도련 : 좀 늦는데...]
[광인한 남자 :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KING Husband : 노아 형 말대로 아침에 가라고 할 걸 그랬나;;]
[질풍 : 율님 핸드폰도 없어서 연락이 안 되니까 더 불안해ㅠ]
질풍의 말에 노아는 조용히 앉아 있는 율의 캐릭터를 바라봤다. 파일럿 없는 빈껍데기 같은 그래픽이 움직여 주길 바랐지만, 여전히 그는 아무런 말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길드원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민지들도 돌아오지 않는 킹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파티] [흑염룡 : 이 자식 왜 안 오냐?]
[파티] [월광의 마녀∑민지♕ : 웅...동네 양아치한테 삥 뜯기고 있나?ㅠ]
[파티] [흑염룡 : 동네양아치는 그자식이 동네 양아치짘ㅋㅋㅋㅋ]
[파티] [눈감아♡김민지 : 걔 집근처 편의점 없어져서 좀 멀리 갔을걸]
[파티] [흑염룡 : 아 그래?]
[파티] [눈감아♡김민지 : ㅇㅇ]
[길드] [KING Husband : 길마님 혹시 율님 연락처 같은 거 없으시죠?]
[길드] [무지개 요정 : 응? 없는데?]
[길드] [무지개 요정 : 만약 알고 있다면,나보다는 노아한테 물어야 하는 거 아냐?]
[길드] [노아 : 저도 몰라서요]
[길드] [무지개 요정 : 근데 번호는 갑자기 왜? 율이 너희랑 같이 있는 거잖아?]
[길드] [광인한 남자 : 그게...아까 문상을 사러간다고 갔는데 여태안와서요]
[길드] [무지개 요정 : 문상? 이 시간에 문상을 사러 보냈다고?!]
[길드] [광인한 남자 : 네? 네]
[길드] [무지개 요정 : 이 시간에 애를 왜보내!!!]
[길드] [광인한 남자 : 네???]
[길드] [도련 : 왜 화를;;]
[길드] [KING Husband : 그렇게 유난스러운 일도 아니잖아요;;]
[길드] [무지개 요정 : 아니! 율이는...]
[길드] [KING Husband : ?]
[길드] [노아 : 그만하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길드] [질풍 : 그래요; 다들 진정하시고;;]
[길드] [무지개 요정 : 정확히 언제 갔는데??]
[길드] [노아 : 40분쯤 전에요]
[길드] [무지개 요정 : 뭐?!]
***
“헉… 헉….”
성원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그리고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제 발아래 미동도 없이 축 처져 있는 율을 노려봤다.
“씨발 새끼가, 왜 힘을 빼게 만들어.”
성원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욕설과 함께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율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짝다리를 짚고 서서 율에게서 뺏은 돈을 세기 시작했다. 3만 원. 성원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돈을 챙겨 주머니에 넣다가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율을 흘끗 내려다봤다. 숨은 내뱉는 것 같은데, 심각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어서 슬쩍 불안해진 성원이 율의 허벅지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성원의 예기치 못한 폭력에 기절하듯 쓰러져 있던 율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자, 성원은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야~ 네가 학교를 자퇴하니까, 딱 한 가지는 좋네.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 가리지 않고 맘대로 팰 수 있는 거. 돈도 주고~ 스트레스도 풀게 해주고~ 난 진짜 네가 좋아. 알아?”
성원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 쓰러져있는 율을 버려둔 채, 유유히 사라져 갔다. 성원이 가버리고 난 후에야 긴장이 풀린 율은 깊게 삼켰던 숨을 힘겹게 내뱉었다. 잔뜩 위축됐던 몸이 이완되며 오한이 온 듯 온몸이 벌벌 떨렸다. 그리고 두려움과 한심함에 점철된 눈물이 둑 터지듯 밀려 나왔다. 그렇게 율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꼼짝 못 한 채, 소리 죽여 서럽게 울었다.
[무지개 요정 : 벌써 두 시간이 넘었다...]
[질풍 : 진짜 무슨 일 생겼나 봐요 어떡해요 ㅠㅠㅠ]
[광인한 남자 : ;;;;]
[KING Husband : 왜 안 오셔 ㅠㅠㅠ]
[도련 : 미치겠네;;]
[질풍 : 신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ㅠ]
[무지개 요정 : 뭐로 신고를 해야 하는 건데?]
[질풍 : 어....]
잔뜩 날이 서 있는 분위기가 서로의 눈치를 보게 했다. 질풍은 그중에서도 계속 말이 없는 노아가 걱정이었다. 왠지 엄청나게 화가 난 듯 보여서.
결국, 3시간 가까이 돼서도 돌아오지 않는 율의 부재에 모두의 불안함은 극에 달했다. 질풍은 신고해야겠다며 난리를 부렸고, KING Husband, 광인한 남자, 도련은 자신들의 탓이라며 벌서기 모션으로 손을 들고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무지개 요정과 노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이어지길 수분.
[율 : 저 왔어요...]
목이 빠지라 기다렸던 율의 채팅이 올라왔다. 왕광풍과 도련은 동시에 /헉 이모티콘을 띄웠고, 왜 늦게 온 건지 이유를 묻는 채팅이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올라온 건 다름 아닌 노아의 채팅이었다.
[노아 : 왜 이렇게 늦었어요?]
[노아 : 핸드폰도 없어서 연락도 안 되는 사람이 3시간이 넘게]
[노아 : 어디서 뭘 하다 이제 와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말투처럼 보였지만, 노아의 채팅을 보는 사람 모두 그가 적잖이 화가 났다고 느꼈다. 도저히 자신들이 끼어들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아, 다들 채팅을 포기하고, 캐릭터 머리 위로 /땀, /뻘뻘 등을 남발하기만 했다.
[율 : 죄송해요...]
[노아 : 죄송하긴 해요?]
[율 : 죄송해요...]
[노아 : 그러니까 아침에 가라고 했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서 이 사단을 만들어요?]
[노아 : 3시간이나 이 시간에 대체 어디서 뭘 했어요]
[율 : ...]
[노아 : 대답도 하기 싫어요?]
[율 : 죄송해요...]
[노아 : 이럴 줄 알았으면 쥬얼 플룸이고 뭐고 안 만들어 주는 게 나았을 뻔했네요]
[율 : 죄송..해요...]
[노아 : 내일 날 밝으면 당장 가서 핸드폰부터 사와요]
[율 : ...]
[컴패니언 노아님이 로그아웃하였습니다.]
[길드원 노아님이 로그아웃하였습니다.]
[질풍 : 율님;;괜찮아요?]
[무지개 요정 : 율아..]
[광인한 남자 : 저기..율님;]
[KING Husband : 미안해요 괜히 우리가 부추겨서;]
[도련 : 율님...]
[율 : 죄송해요...]
[길드원 율님이 로그아웃하였습니다.]
율은 게임을 끄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 채, 책상 위로 몸을 한껏 웅크렸다. 그런 율의 등과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제 손등 위로 눈물들이 연신 떨어져 내렸다. 여기저기 얻어맞아 터지고 부어오른 얼굴로 억누른 울음을 터트린 율은, 혹시라도 부모님이 잠에서 깰까 맘껏 소리도 내지 못하고, 끅끅거리며 연신 죄송해요, 죄송해요, 하며 울었다.
[파티] [눈감아♡김민지 : 야 근데 이 새끼 왜 안 오냐?]
[파티] [흑염룡 : 길 잃었나?]
[파티] [월광의 마녀∑민지♕ : 성원오빠 미아 된거얌?ㅋㅋㅋ]
[파티] [눈감아♡김민지 : ㅋㅋㅋㅋㅋㅋ찾으러 가야하나?]
[파티] [흑염룡 : 어 성원이한테 전화 옴ㅇㅇ]
***
여기저기 얻어맞아 절뚝이는 걸음으로 힘겹게 걷고 있는 율의 뒤를 누군가가 몰래 뒤따랐다. 율은 곧 자신의 집인 듯한 담이 없는 단독주택으로 들어섰고,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 율이 들어간 주택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우체통에 쓰여 있는 주소를 사진 찍었다. 그리고 한참을 그곳에 서 있던 인영은 곧,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골목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무저갱 같은 골목의 어둠 속으로 음습한 웃음소리가 꼬리를 늘어뜨리듯 이어졌다.
***
율은 간밤에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얻어맞은 몸이 시간이 지날수록 온몸을 쥐어짜듯이 아파 왔고, 동시에 고열에 시달렸다. 하지만 부모님께 들킬까 봐 부모님이 출근하실 때까지 침대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도 하지 못했다.
“율아~ 엄마 간다?”
방 밖에서 들리는 모친의 목소리는 율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지만, 기다려도 대답해 주지 않는 율을 뒤로한 채 현관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모친이 출근한 후, 텅 빈 집안에서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율은 온몸이 비명을 질러대는 듯한 고통에 잠시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차차 잦아지는 고통을 참으며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일어나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이번엔 성원에게 발로 차인 허벅지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또 한 번 끙, 하는 소리와 함께 고통을 삼킨 율은 절뚝절뚝 걸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길드원 율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이른 시간이라 텅 비어 있는 쉼터가 율을 반겼다. 길드 창을 열어 접속해 있는 인원이 있나 확인을 했지만, 자신 혼자뿐이었다. 율은 평상 한쪽에 캐릭터를 앉혀 놓고,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서랍 깊숙이 처박혀 있던 핸드폰을 끄집어냈다. 한참을 손안에 쥐어진 핸드폰을 바라만 보던 율이 천천히 전원 버튼을 눌렀다.
“...?”
켜지지 않는 게 아무래도 배터리가 방전된 듯했다. 율은 핸드폰을 꺼낸 서랍을 좀 더 뒤져 충전기를 꺼냈다. 핸드폰에 충전기를 연결하고,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르자, 부팅화면이 액정에 떠올랐다. 아마도 핸드폰이 켜지면 부재중 전화와 문자, 톡 등이 쌓여있을 것이다. 하지만 율은 그것들을 확인해 볼 용기가 없었다.
율은 힘들어 보이는 얼굴로 핸드폰을 뒤집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 오른 열 때문에 눈가가 후끈후끈하고, 잠을 자지 못해 정신이 몽롱했다. 찬물로 세수라도 하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다시 책상에 앉은 율은 노아가 접속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자, 피곤함에 눈이 끔뻑끔뻑 감겼다. 그리고 찬물로 잠시 식혀뒀던 열기가 다시금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노아를 만나고 난 후엔 쉬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노아를 기다리고 있자, 노아보다 먼저 광인한 남자와 복세편살이 접속해 들어왔다. 율은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광인한 남자는 간밤의 일이 신경 쓰이는지 쉼터에서 율의 근처를 맴돌았지만, 율은 그와 대화를 나눌 기력이 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쉬고 싶을 뿐이었다.
[컴패니언 노아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원 노아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예정보다 빠른 노아의 접속 알림에 등받이에 기대 누워있다시피 한 율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확인하자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노아는 접속해 들어와서는 쉼터에 있는 율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성큼성큼 걸어와 율의 옆에 앉았다. 그리곤 채팅방을 띄웠다.
<들어와요.>
대뜸 띄워지는 채팅방이 의아했지만 율은 서둘러 채팅방에 들어갔다.
[채팅방에 율님이 입장하였습니다.]
[채팅방을 비공개로 전환합니다.]
그리고 율이 들어가자마자 노아는 채팅방을 비공개로 전환했다. 영문을 모르는 광인한 남자는 멀뚱히 쉼터에서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 채팅방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노아 : 이른 시간인데 핸드폰은 사 왔어요?]
[율 : 저... 아니..요]
[노아 : ??]
[율 : 죄송해요 저...핸드폰 있었..어요..]
[노아 : 뭐?]
[노아 : 지금 장난해요?]
[율 : 핸드..폰을 켜면...계속 연락이 와요...]
[노아 : ?]
[율 : 그래서...무서워서 켤 수가 없었어요]
[율 : 죄송해요...일부러 거짓말 한 건 아니에요..정말 죄송해요...]
[노아 : ...]
[노아 : 그럼 간밤엔 3시간 동안이나 뭘 했어요?]
[율 : ...]
[율 : 노아님..정말 죄송한데...그 얘기는 다음에 하면 안...될까요?]
[노아 : 왜요?]
[율 : 제가..너무 힘들어서...오늘은 그냥 쉬고 싶어요...]
[노아 : 간밤에 있던 일 때문에 힘든 거예요?]
[율 : ...]
[노아 : ...무슨 일이 있었어요?]
[율 : 다음에...얘기 해드릴게요...]
[율 : 죄송해요...]
율은 죄송하다는 말을 끝으로 노아에게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고, 게임을 종료했다.
[채팅방에서 율님이 퇴장하였습니다.]
[컴패니언 율님이 로그아웃하였습니다.]
[길드원 율님이 로그아웃하였습니다.]
그리고 율의 로그아웃 알림을 본 광인한 남자가 채팅방을 없애는 노아에게 허겁지겁 물었다.
[광인한 남자 : 어? 율님 왜 나가??]
[광인한 남자 : 둘이 무슨 얘기 한 거야???]
[광인한 남자 : 율님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래??]
노아는 쏟아지는 질문에 이 사태를 어떻게 무마해야 하나를 잠시 고민했다.
[무지개 요정 : 교통사고??]
[노아 : 네]
[KING Husband : 그럼 차에 살짝 치여서 응급실에 다녀온 거야??]
[노아 : 그렇대]
[광인한 남자 : 근데 어젠 왜 아무 말도 없으셨던 거래?]
[노아 : 내가 많이 화나 보여서 얘기할 수가 없으셨대]
[질풍 : 아 다행이다 ㅠㅠㅠ 난 무슨 큰일난줄 알았잖아]
[도련 : 교통사고도 큰일 아니냐...]
[질풍 : !]
대충 얼버무린 자신의 거짓말에 자기들끼리 대화를 풀어가는 길드원들을 바라보며, 노아는 한숨을 돌린 듯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컴퓨터를 끄고, 힘겹게 침대에 누운 율은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렸다. 오래지 않아 책상 위에 엎어 놓은 핸드폰에 한 개의 톡이 도착했지만, 잠들어 버린 율은 알 수가 없었다.
기절하듯 잠들어 있던 율이 깨어난 건 늦은 오후가 되어서였다. 부스럭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잠든 사이 굳어버린 몸이 더욱 뻐근하게 느껴져서 한참을 앓다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어둑해진 방 안을 둘러보며 시간을 확인하자 아직 부모님이 퇴근하실 때까지 여유가 있었다. 율은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불을 켜고 들어가 거울 앞에 서자, 엉망인 얼굴이 드러났다. 총천연색들의 멍들이 얼굴에 그림을 그려놓은 듯 흉하게 번져 있었다. 게다가 피딱지가 들러붙은 입술과 퉁퉁 부어 있는 얼굴 때문에 율은 급하게 찬물로 세수를 하고, 부엌으로 가 위생봉투에 얼음을 가득 담았다. 그다음엔 거실의 수납장에서 해열제와 연고 등을 챙겨서 방으로 돌아왔다.
***
율의 집이 보이는 골목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세 명은 어두웠던 집에 불이 켜지는 걸 보며 숨을 죽였다.
“누가 들어갔냐?”
“아니, 아무도 안 들어갔어.”
“집에 사람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전날 성원에게 연락을 받은 현석은 성원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권율을 만났다는 것, 그리고 간만에 주먹을 풀고, 율에게서 돈을 뺏었다는 것,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현석은 혼자만 재미를 봤냐며 성원을 비난했고, 성원은 의기양양하게 율의 집을 알아냈다고 알려왔다.
결국, 두 사람은 차운까지 불러내 사정을 알리고, 작당하여 율의 집까지 찾아왔다. 세 사람은 이른 저녁부터 율의 집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건 율이 혼자 있는 시간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야, 3만 원이나 뺏었으면, 삼등분 하자고!”
그 와중에 전날 성원이 율에게서 뺏은 금액을 전해 들은 차운은, 계속해서 돈을 나눠 갖자며 성화를 부렸다.
“나, 민지한테 상자 사줘야 한다고!!”
“3만 원을 나누면 누구 코에 붙여, 새끼야.”
그런 차운의 언행에 성원도 짜증이 나는지 슬슬 목소리를 높였다. 목청을 높여가며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의 실랑이가 소란을 불러오자, 현석이 급하게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며 갈라놓았다.
“그만해라, 또 뜯으면 되는 걸 왜 쌈질하려고 그러냐.”
“…….”
“…….”
현석의 말에 서로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 쭈뼛쭈뼛 떨어져 나갔다.
“이제 3만 원 정도는 문제도 아닐 텐데, 좋게좋게 가자, 응?”
금방이라도 치고받을 듯이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허무하게 식어버렸다. 두 사람의 저급한 말싸움을 중재시킨 현석이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 율의 집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 중년 여성이 율의 집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야, 야!! 저기 봐!”
그 모습에 현석은 골목 안으로 몸을 숨기며 낮은 목소리로 두 사람을 불렀다. 현석의 행동에 서로 뚱해 있던 두 사람도 덩달아 현석의 등 뒤로 몸을 숨기며 율의 집으로 들어가는 여성을 바라봤다.
“엄마인가??”
“지금 몇 시냐?”
성원의 질문에 현석이 서둘러 시계를 확인했다.
“7시.”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고 난 후, 온 집안의 불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로 30분쯤이 지났을 때, 승용차 한 대가 율의 집 마당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승용차에서 내린 중년 남성이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 골목에 숨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 명은 곧, 서로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인 후, 낄낄거리며 골목을 빠져나가 사라졌다.
이것저것 챙겨 방으로 돌아온 율은 너무나 익숙하게 얼굴에 난 상처들을 치료했다. 그래 봤자, 상처 부위에 약을 바르고 부어오른 곳에 얼음찜질하는 것이 다지만 말이다. 한참을 얼굴에 얼음찜질하던 율이 입고 있던 상의를 들쳐 제 상체를 바라봤다.
몸통 여기저기에 타박상과 생채기들이 즐비했다. 그중 복부에 몰려 있는 멍 자국이 보기에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율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걷어 올렸던 옷을 끌어 내렸다. 그리고 이번엔 바지를 내려 허벅지를 살폈다. 하지만 허벅지 뒤쪽을 얻어맞은 탓에 육안으로는 상처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살을 조금 쓸어 올려 살펴볼까도 했지만, 손도 댈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서 포기하고 다시 바지를 추켜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몸에 난 상처는 일부러 드러내놓지 않으면 보이지 않으니 걱정할 건 없었다.
문제는 얼굴 가득 드러난 부기와 멍 자국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제일 눈에 띄는 얼굴은 될 수 있으면 때리지 않아서 따돌림을 당한다는 사실을 숨기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간밤에는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부위를 가리지 않고 얻어맞은 통에 얼굴에 난 상처가 난감한 율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부기를 조금이라도 빼기 위해 쉬지 않고 얼음찜질을 하던 율은 문득, 책상 위에 엎어놓은 채로 내버려 둔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머뭇거리며 핸드폰을 바라보던 율은 주춤주춤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핸드폰을 들어 올려 화면을 켰다.
부재중 통화 39통. 확인하지 않은 문자가 104통. 확인하지 않은 톡이 367개. 표시들을 지우기 위해 상태 바를 내리자, 처음 보는 이름의, 친구 추가가 되어 있지 않은 누군가의 톡이 보였다.
-간밤의 일은 율님이 가벼운 교통사고가 났던 거라고 길드원들한테 둘러댔어요. 혹시라도 누가 물으면 그렇게 답해요.-
율은 도착한 길지 않은 메시지를 한참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쭈뼛쭈뼛 답장을 써 보냈다.
-노아님이세요?-
-네.-
메시지를 보내자, 그의 성격답게 즉답이 도착했다. 그리고 연이어 또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핸드폰 번호 하나와 함께 –저장해요.- 라는 메시지가. 율은 서둘러 해당 번호를 ‘노아님.’이라는 이름으로 저장을 하고, 노아와 나눈 짧은 대화를 몇 번이고 읽었다.
***
딩동, 하고 울리는 현관 벨 소리에 율이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지난밤 노아와 나눈 짧은 대화를 읽고 또 읽는데,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모친이 돌아온 듯해서, 율은 얼른 켜뒀던 방 불을 끄고, 방문을 잠근 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었다. 그리고 아마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멍한 정신으로 침대에 앉아 잠들기 전까지의 일들을 생각하는데, 또 한 번 딩동, 하고 현관 벨이 울렸다. 누가 찾아온 건가 싶어 시간을 확인하는데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율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놀라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딛자, 허벅지를 찡하고 타고 올라오는 격통에 몸을 숙이고 신음을 삼켰다.
그러는 사이, 다시 한번 딩동, 하고 현관 벨이 울렸다. 율은 고통을 다스릴 시간도 없이 숙였던 몸을 펴고선 절뚝절뚝 방을 나섰다. 거실로 나와 급하게 인터폰을 집어 들자, 비치는 화면 안엔 웬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남성이 보였다.
“누구세요?”
잠결에 잔뜩 갈라진 잠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제 목소리에 놀란 율이 목을 가다듬는 사이, 수화기 너머에서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목소리가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 안 계세요?」
“안… 계시는데요? 누구세요?”
「아… 안 계세요?」
“네.”
「존나 잘됐네.」
“?”
쾅-
화면 속의 남자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몰라 멀뚱히 서 있던 율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굉음에 놀라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쾅, 쾅!
연속으로 들려오는 굉음은 자신의 집 현관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놀란 율이 서둘러 현관문 쪽으로 다가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고함을 치듯 들려왔다.
“열어, 새끼야!”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율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권율! 문 열어!”
쾅!
고함과 함께 현관문이 부서질 듯이 흔들렸다. 한 명의 목소리인 듯했던 고함은 곧 세 명의 목소리가 되었다. 율은 시야가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걸 느꼈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지고, 무언가 목구멍에 틀어박힌 듯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제 목을 부여잡고 입을 크게 벌려 봐도 쌕쌕거리는 거친 숨소리만 새어 나오고, 온몸에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정신과 함께 몸의 감각도 추락하듯 잠식해 가는데, 또 한 번 쾅! 하는 소리와 까무룩 꺼져가던 정신과 감각이 단번에 현실로 내팽개쳐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엔 이미 울컥울컥 차오는 눈물이 공포를 이기지 못해 얼굴을 흠뻑 적시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주저앉아 위축된 몸뚱이는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려왔다. 그냥 두면 새 된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제 입을 제 손으로 틀어막으며, 주저앉아 뒷걸음질 치던 율은 손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불에 댄 듯 놀라며 손에 쥔 무언가를 집어 던졌다.
멀지 않은 곳에 힘없이 나동그라져 떨어진 것은, 쥐고 있는 줄도 몰랐던 자신의 핸드폰이었다. 지잉- 지잉- 하고 끊임없이 진동을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바라보던 율은 핸드폰 액정 화면에 떠오른 이름 하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노아님.’
노아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눈물로 범벅된 시야인데도 왜인지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노아의 이름은 뚜렷하리만치 잘 보였다. 주저앉아 핸드폰을 바라보던 율은 허겁지겁 기어 집어 던졌던 핸드폰을 다시 주워들었다. 그리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노이즈 뒤에 처음 듣는 남성의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율님.」
“노, 노아니….”
쾅-!
“히익.”
「율님?」
“문 안 열어? 이 새끼야!”
“부수기 전에 열어라~”
“권율,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노, 노아님… 노아님.”
「무슨 일 있어요?」
쾅-!
[길드원 노아님이 접속하였습니다.]
노아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게임에 접속했다. 항상 자신보다 조금 일찍 접속하는 율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신보다 먼저 게임에 접속해 있을 거로 생각했던 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전날 율의 행동을 생각하며 많이 피곤했던 건가? 하는 정도의 의문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10시가 넘어가고, 그의 접속시간이 지연될수록 의문은 걱정이 되어 갔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노아는 키보드 옆에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고, 주저할 것 없이 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지 않은 통화 연결 음이 멈추고, 전화가 연결되자 노아는 “율님.” 하고 상대방을 불렀다. 그의 부름에 상대방은 짧은 텀을 두고 자신의 부름에 답했다.
「노, 노아니….」
「쾅-!」
「히익.」
하지만 율의 대답은 끝맺지 못했다. 대신,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굉음과 함께 새 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율님?”
의아한 마음에 다시 한번 율을 불렀지만, 대답해 온 건 율이 아닌 핸드폰 너머의 확실하지 않은 고함들이었다.
「문… 열어… 끼야!」
「부… 전에… 어라~」
「… 율, 안… 있는… 다 알…!」
불쾌하리만치 귓가를 자극하는 소음들에 노아는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노, 노아님… 노아님.」
그리고 더듬더듬 자신을 불러오는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 율의 목소리에 노아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핸드폰 너머에 있는 자신은 묻는 것 말고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노아는 한 번 더 율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쾅-!」
그리고 노아의 물음과 동시에 다시 한번 굉음이 핸드폰 속에서 터져 나왔다. 신경을 긁는 듯한 큰 소리에 노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핸드폰을 귓가에서 슬쩍 떼어냈다. 동시에 핸드폰 너머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도와, 도와… 주세요.」
잔뜩 억눌린 채 겨우겨우 내뱉는 말. 율이 울며 쥐어짜 냈을 한마디에 노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주인 잃은 빈자리와 그 반동으로 빙그르르 돌고 있는 의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우선, 전화 끊고, 주소 써서 보내요.」
“네? 네.”
노아의 말에 자신의 대답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통화는 끊어졌다. 율은 서둘러 노아에게 자신의 집 주소를 톡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자꾸만 떨리는 손끝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 한참을 애먹고서야 그에게 주소를 보내줄 수 있었다. 그리고 톡을 보낸 지 5분쯤 지났을 때, 답장이 도착했다.
-30분쯤 뒤에 도착해요.-
간결한 답장이지만 율은 노아가 보내준 문자가 동아줄이라도 되듯 핸드폰을 두 손에 꼭 쥐고, 지옥 같을 30분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노아에게 마지막 문자를 받고 20분이 조금 지났을 때, 집 앞으로 요란한 브레이크 음과 함께 집 밖에 진을 치고 있던 3명의 비명과 고함이 들려왔다. 놀란 율이 거실 창으로 마당을 내다보자, 마당에 절반쯤 진입해서 멈춰 있는 흰색 SUV 한 대와 그 차의 범퍼 바로 코앞에서 넘어져 소리를 지르고 있는 성원의 모습이 보였다.
“야, 이 개새끼야! 운전을 이따위로 하고 지랄이야!”
차에 치일 뻔한 위험천만한 상황을 겨우 모면한 성원은 눈앞에 버티고 선 흰 차의 운전자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자신의 성화에도 운전자가 차 밖으로 나오지 않자, 더욱 화가 난 성원은 벌떡 일어나 차의 범퍼를 발로 차기 시작했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차체가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차의 주인은 여전히 내리지 않았다. 그에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난 성원은 보닛을 주먹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나와! 이 새끼야!”
발광하는 성원의 모습에 그제야 차 문이 열리고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성원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차에서 내려 조금은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차 문을 세게 닫고는 큰 보폭으로 성원이 서 있는 차의 앞 범퍼 쪽으로 향했다. 그런 남자의 모습에 성원은 보란 듯 남자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존나, 운전도 개떡같이 하고 자빠졌어. 야, 사과 안 하냐?!”
그런 성원의 모습에 남자는 누군가와 계속 통화를 이어가며 흘끗, 성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무심해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성원이 다시 한번 차의 범퍼를 발로 찼고, 이번엔 상당한 소리와 함께 앞 범퍼 일부가 미세하게 찌그러지고 말았다. 성원은 자신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기양양한 듯 남자를 바라봤다.
“잠시, 이쪽 먼저 해결하고 들어갈게요.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남자도 그제야 계속 이어가던 통화를 끊고, 성원을 바라봤다. 자신보다 커다란 남자의 서늘한 시선에 성원이 조금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지지 않고 남자를 똑바로 주시했다. 남자는 그런 성원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남자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얼마 되지 않아 보험 차량과 보험사 직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남자는 도착한 보험사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는 해결하라는 말을 남긴 채 현관으로 향했다. 남자가 큰 보폭과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자, 현관 앞 계단에 진을 치고 있던 현석과 차운이 서둘러 자리를 비키며 계단을 내려갔다.
남자를 피하듯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는 두 사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남자는 그대로 현관 벨을 눌렀고, 인터폰을 통한 상대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나예요, 열어요.”
***
율의 집 주소를 받은 시언은 서둘러 액셀을 밟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30분쯤 걸릴 줄 알았던 거리를 20분이 조금 넘게 걸려서 도착해 있었다. 골목을 들어와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집 앞으로 차를 몰자, 담 없는 단독주택이 보였다. 그리고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듯한 좁은 마당에 진을 치고 있는 3명의 남학생이 보였다.
시언은 망설일 것 없이 액셀을 밟아 마당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난데없는 상황에 3명의 남학생은 혼비백산해 고함과 비명을 질러댔고, 동시에 시언이 급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멈춰 세웠다. 요란한 브레이크 음과 함께 심하게 덜컹거리며 멈춘 차의 범퍼 앞엔 사색이 된 한 명이 주저앉아 있었고, 나머지 두 명은 놀란 듯 현관 앞 계단에 뛰어 올라가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잠깐의 침묵 뒤에, 차에 치일 뻔한 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시언은 놈이 그러든 말든 핸드폰을 들어 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지 않은 신호음이 지나고,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가 더듬더듬 전화를 받았다.
「노, 노아님….」
“율님, 도착했어요.”
시언이 율과 통화를 하는 도중, 치일 뻔한 놈이 벌떡 일어나 범퍼를 발로 차는 게 보였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율과 통화를 계속하던 시언은 놈이 발광하듯 보닛을 주먹으로 쳐대자, 그제야 차에서 내려 앞 범퍼 쪽으로 다가갔다.
“존나, 운전도 개떡같이 하고 자빠졌어. 야, 사과 안 하냐?!”
비아냥거리듯 버럭 지른 소리에 핸드폰 너머에 있던 율이 오히려 겁을 집어먹었다.
「노, 노아님… 위험하신….」
“괜찮아요.”
율을 진정시키려는 듯 조금은 부드럽게 답하며 놈을 흘끗 흘겨보자, 놈은 더욱 화를 내며 범퍼를 다시 한번 발로 찼다. 그리고 이번엔 범퍼도 견디지 못했는지 상당한 소리와 함께 미세하게 찌그러지고 말았다. 그 모습에 잠시 당황했던 것처럼 보였던 놈은 시언이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이내, 표정을 갈무리해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잠시, 이쪽 먼저 해결하고 들어갈게요. 기다리고 있어요.”
전화를 끊은 시언은 다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보험사 직원에게 처리를 맡기고는 현관 앞으로 다가가 벨을 눌렀다.
“나예요, 열어요.”
자신인 걸 알렸는데도 현관문이 열리는 데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주춤주춤 열리는 문에 짜증이 난 시언이 단번에 문을 잡아 열어버리자, 문고리를 잡고 있던 율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문과 함께 딸려 나왔다가 후다닥 도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시언은 그런 율을 보며 황당한 얼굴을 했다.
우물쭈물한 그의 행동도 행동이지만, 보기에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엉망인 얼굴에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시언은 잠시 현관 앞에서 율을 바라보다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섰다.
거리낌 없이 집안으로 들어서는 시언의 모습에 율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그런데 뒷걸음질 치는 것도 절뚝거리는 통에 시언의 시선이 이번엔 율의 다리로 향했다. 한참을 자신의 다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시언의 침묵에 율이 쭈뼛쭈뼛 그를 불렀다.
“노아님….”
그리고 율의 부름에 시선을 들어 율을 마주한 시언은 덤덤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병원부터 가죠.”
시언은 나가기 무섭다며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율에게 대충 씻고 나오라며 욕실에 밀어 넣고, 거실 창을 통해 마당을 내다봤다. 마당에 절반만 걸친 채 서 있는 자신의 차 앞에서 보험사 직원과 남학생이 뭔가 실랑이를 벌이는 게 보였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율을 기다렸다.
율이 욕실에 들어가고, 오래지 않아 욕실 문이 열렸다. 대충 씻고 나오라던 자신의 말대로 세수와 양치만 하고 나온 율이 욕실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또 쭈뼛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시언은 망설임 없이 율에게 다가가 그를 끌고 집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현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율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서워요… 못 가겠어요….”
“나 있잖아요. 괜찮아요.”
결국, 노아에게 끌려 나오듯 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율은 동시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세 명의 시선에 소리 없는 비명을 입안으로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나마도 절뚝거리고 걷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기까지 해서 넘어질 듯 위태롭게 계단을 내려가자, 앞서 걷던 시언이 속도를 줄이며 비틀비틀 계단을 내려오는 율을 잡아주었다.
율이 계단을 다 내려오자, 시언은 앞서 걸으며 자신의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런 시언을 놓칠세라 율은 시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따라 걸었다. 차 쪽으로 다가갈수록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들이 따가워지는 것 같은 느낌에 율은 눈앞에 보이는 시언의 옷자락이라도 쥐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권율! 드디어 낯짝을 보네?”
조용히 숨죽이던 분위기 속에 차운이 대뜸 큰소리를 내며 율에게 다가왔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차운의 행동에 율이 불에 댄 듯 놀라며 저도 모르게 시언의 옷자락을 쥐고 끌어당겼다.
“억!”
율이 시언의 옷자락을 쥐고 눈을 질끈 감는 사이, 지척에서 누군가의 억눌린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연이어 머리 위에서 “쯧.” 하는 혀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시언의 혀 차는 소리에 어깨를 한껏 움츠린 채 슬그머니 눈을 뜬 율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차운의 모습을 보았다. 놀란 율이 당황한 듯 시언을 올려다보자, 시언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율에게 다가오는 차운을 발로 차서 바닥을 구르게 만든 시언의 행동에 성원도 현석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사이 시언은 율을 차의 보조석에 태우고는 능숙하게 차를 돌려 골목을 빠져나갔다.
마당의 절반을 차지하고 서 있던 차가 빠져나가고, 떠나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는 보험사 직원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말없이 운전하는 시언의 옆에 앉아 있던 율은 좁은 공간에 그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숨 막히게 어색하고 불편해서 창 쪽에 바짝 붙어 앉아서는 제 무릎만 보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이어질수록 좌불안석인 율에게 시언이 넌지시 물었다.
“아까 그놈들한테 맞은 거예요?”
“네?”
갑작스러운 시언의 물음에 놀란 율이 저도 모르게 시언을 바라봤지만, 시언은 율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덤덤하게 전방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 조금 민망해진 율이 삐걱삐걱 시선을 거두자, 다시 한번 시언의 말이 이어졌다.
“얼굴이요.”
“아….”
“…….”
“…….”
“율님 왕따시켰던 놈들이에요…?”
“…….”
무심한 듯하지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게 느껴지는 질문에 율이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시언이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저번에는 화내서 미안해요.”
“네?”
“…….”
“아니요… 괜찮, 괜찮아요.”
***
흰 가운을 입은 중년 남성이 병실을 나와 병실 문 앞에 서 있는 시언의 옆에 섰다.
“자네가 팼나?”
그리고 대뜸 물어오는 질문에 시언은 기가 찬 얼굴로 남성을 내려다봤다.
“미쳤습니까?”
“아니… 난 또 자네가 뭔가 배알이 뒤틀려서 흠씬 패놓고, 데려온 줄 알았지.”
“제가 그 정도로 망나니로 보이십니까?”
“뭐, 자네가 때린 게 아니라면 다행이긴 한데….”
“좀 어떻던가요?”
“얼굴에 울혈이나 부기가 심하긴 한데, 부러지거나 금 간 곳은 없더군.”
“그런가요.”
“얼굴보다는 복부와 허벅지에 타박상이 더 문제야.”
“예?”
“상당히 아팠을 텐데….”
“?”
“몰랐나?”
“뭔 수로 압니까? 벗겨보지도 않았는데.”
“벗겨 볼 생각이었나?!”
“무슨 소립니까…?”
“크흠, 그런데, 자네가 때린 게 아니라도 누군가에게 맞은 건 맞는 것 같은데, 경찰에 신고는 했나?”
남성의 말에 시언은 율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경찰에 신고했으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 일도 없었을 테고, 신고했다면 자신이 도착하기까지 걸린 30분 가까운 시간 동안 경찰이 출동을 안 했을 리도 없을 테니까.
“아니요.”
“?”
“아마도 가해자들도 미성년자일 겁니다. 게다가 그놈들한테 맞았다는 증거도 딱히 없으니… 뭐, 증거는 찾는다면 나오긴 하겠지만, 어차피 솜방망이 처벌만 받고 끝일 텐데요.”
“흐음… 그래도 경찰에는 알리는 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허허… 자네하고는 무슨 관계인 아이이길래?”
“… 뭐… 있습니다. 그런 거.”
“아무튼, 수액을 좀 놓고 있으니 다 맞으면 데려가게.”
“…….”
“그나저나, 자네, 요새 회장님은 찾아뵙나?”
“아직 살아 있습니까?”
“… 패륜아가 따로 없구먼.”
“알 만하신 분이.”
“자네나, 큰집 남매나… 한가 놈들은 다 똑같은 놈들이구먼.”
“집안 내력 아닙니까?”
“… 나이도 나이인 분이시네. 손주들이 종종 찾아가면 좋아하실 터인데.”
“선생님 덕분에 정정하신 거 다 압니다.”
“허허.”
“시간 날 때 한번 찾아뵙기로 하죠.”
“백수가 시간 날 때가 어딨나? 결국, 안 찾아뵙겠다는 게지?”
“…….”
“쯧쯧….”
“…….”
“난 그만 가봐야겠네. 수액은 다 맞는 데 50분 정도 걸릴 테니, 꼭 다 맞으면 데려가게.”
“예….”
신신당부하고 자신을 지나쳐 걸어가는 남성에게 가볍게 묵례를 한 시언이 율이 있는 병실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남성이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 시언을 불렀다.
“참, 시언아, 잊고 있었는데.”
“네?”
자신의 말에 되묻는 시언에게 남성은 자신의 손목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저 아이 손목에 절상 흔적이 있더군.”
“예?”
“자해했던 것 같네.”
짐짓 심각하게 말해주고, 되돌아 가버리는 남성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언이 고개를 돌려 병실 문을 바라봤다. 미미하게 찌푸려지기 시작한 미간은 어느샌가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병실에 들어선 시언은 침대에 누워 링거를 꽂고 있는 율의 옆으로 가 앉았다. 시언이 다가와 앉자,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율이 눈을 돌려 시언을 바라봤다.
“저….”
“?”
“저, 이거 왜 맞는 거예요…?”
우물쭈물 묻는 말에 시언은 율의 팔에 연결된 링거를 바라봤다. 그리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움직여 율의 손목에 새겨진 절상으로 향했다. 너무나 선명하게 남겨져 있는 흉터에 율이 눈치채지 못하게 눈살을 찌푸렸던 시언은 이내 덤덤해진 표정으로 율을 바라봤다.
“빨리 나으라고 하는 거예요.”
“아….”
“50분쯤 걸린다니까 얌전하게 누워 있어요.”
“저기….”
“?”
“근데… 병실이….”
율의 말에 시언이 시선을 돌려 병실 안을 둘러봤다. 문제 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평범한 병실의 모습에 “왜요?” 하고 묻자, 율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1인실… 비싸잖아요….”
“…….”
여기저기 거즈와 반창고가 잔뜩 올라붙은 얼굴을 하고선 너무나 현실적인 소리만 하는 율의 모습에 시언은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리를 숙여 큭큭 거리며 웃는 시언의 모습에 당황한 율이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자, 억지로 웃음을 삼키며 허리를 편 시언이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수액도, 1인실도 다 나한테 돈 뜯어내려는 수작이니 율님은 신경 쓰지 말아요,”
하지만 시언의 말은 율을 안심시키기는커녕 더욱 걱정을 부추긴 것 같았다.
“제, 제가 다 갚을게요….”
잔뜩 울상을 하고, 세상 무너진 듯 말하는 율의 모습에 시언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 후로 율이 수액을 다 맞을 때까지, 둘 사이엔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지만, 시언의 시선은 자꾸만 율의 손목으로 향했다.
수액을 다 맞고, 병원을 나가기 위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두 사람은 시언의 차를 찾아 조용한 주차장을 걸었다. 오래 걷지 않아 홀로 돋보이는 시언의 흰색 차량이 보였고, 시언은 조금 빠른 보폭으로 걸어가 보조석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잡고 율을 바라보는 시언의 행동에 율이 멈칫하며 어찌할 줄 몰라 하자, 시언이 의아한 얼굴로 율을 바라봤다.
“왜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율의 당황한 모습에 시언이 묻자, 율은 그제야 우물쭈물 다가와 보조석에 올랐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개미만 한 목소리로 건넨 인사에 시언은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도 운전석에 올랐다.
도로로 매끄럽게 빠져나온 시언의 차량은 곧, 도심의 한복판으로 섞여들었다. 운전에 몰두하는 듯 말없이 전방을 주시하는 시언 탓에 차량 내부엔 조용하게 진동하는 차의 엔진 소리만 울려 퍼졌다. 율은 이어지는 침묵이 어색한지 연신 창밖만을 바라봤다.
“쯧.”
운전에 집중하던 시언이 갑자기 혀를 차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차체가 격하게 흔들리며 율의 몸이 튕겨 나갈 듯이 반동했다. 놀란 율이 전방을 바라보자, 옆에서 앞서 달리던 차 한 대가 깜빡이도 켜지 않고 차선에 끼어드는 게 보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율이 억눌린 숨을 뱉으며 제 가슴 위로 둘린 안전벨트를 쥐었다.
“괜찮아요?”
동시에 조심스럽게 묻는 말이 들려와 율은 시언을 바라봤다.
“네… 괜찮아요.”
괜찮다고 했지만, 시언의 시선은 끝내 율을 한번 훑어 내렸다. 기어이 제 눈으로 무사를 확인한 시언은 그제야 안심한 듯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시선에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율은 옆이 아닌 시언과 같은 전방을 바라봤다. 그러길 잠시, 시선은 차츰 움직여 핸들을 쥐고 있는 시언의 손에 멈췄다. 능숙하게 하는 핸들링을 잠시 구경하듯 바라보던 율은 손에서 팔로, 팔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시언의 옆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집에서는 경황이 없이 제대로 보지 못했던 시언의 얼굴을 병실에서 제대로 봤을 때, 상당한 미남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누워서 보는 얼굴하고 바로 옆에서 보는 얼굴은 또 다른 느낌을 주게 했다.
쌍꺼풀 없이 서늘하고, 길게 잘 빠진 눈과. 미간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날 선 콧대, 얇은 입술에 조금 말려 올라간 입꼬리. 지금 방향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왼쪽 눈 아래에 있던 눈물점. 큼직큼직한 이목구비가 전체적으로 시원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무표정하게 있을 땐 선이 도드라지며 조금 화가 난 듯 보이는….
“율님.”
그리고 듣기 좋은, 조금은 낮은 목소리.
“율님?”
“율님?”
멍하니 시언의 얼굴을 바라보던 율은 자신을 부르는 시언의 목소리를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재차 부르는 목소리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때는 시언이 짐짓 당황한 얼굴로 자신과 전방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율님, 침 떨어지겠어요.”
“힉.”
여전히 사태를 파악 못 한 듯 멍하니 시언을 바라보던 율은 시언의 말에 놀라 급하게 제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물론, 뭔가 묻어날 리가 만무했다.
“…….”
깨끗한 제 손등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있는 율을 보며 시언은 고개를 반대로 꺾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제야 사태파악이 된 율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창 쪽으로 꺾어 감췄다. 열기가 오른 얼굴을 식히려 애쓰는 율의 등 뒤로 웃음기 머금은 시언의 말이 들려왔다.
“밥 먹으러 갈까요, 율님?”
한 건물의 주차장으로 들어선 시언의 차가 적당한 자리에 주차를 했다. 시동을 끄고 내리는 시언의 모습을 바라보던 율이 부랴부랴 저도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왠지 이번에도 시언이 문을 열어주면 민망할 것 같아서였다. 허둥지둥 차에서 내리는 율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언은 차 문을 잠그고 율의 옆으로 다가왔다.
“지금 율님한테는 트인 공간은 불편할 것 같아서, 내 맘대로 정했어요.”
시언은 말을 이어 가며 율의 얼굴을 가리켰다. 시언의 손짓에 율이 제 얼굴을 더듬더듬 만졌다. 얼굴 여기저기에 올라붙은 거즈와 반창고들이 잔뜩 만져졌다.
“아….”
“맛은 나쁘지 않은 곳이니까, 일단 들어가죠.”
“네.”
율의 대답을 들은 시언은 앞서 걸으며 율을 이끌었다. 시언의 등 뒤를 졸졸 따라가며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의 입장에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나오는 게 보였다. 왼쪽 가슴에 달린 명찰에 매니저라고 되어 있었다. 매니저는 시언과 짧은 대화를 나눈 후, 두 사람을 어디론가 안내했다.
그렇게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사람이 20명은 들어가 앉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연회실이었다. 놀라 벙쪄 있는 율과 달리 너무나 익숙하게 늘어진 테이블의 중간쯤으로 다가간 시언은 의자 하나를 잡아 빼며 율을 불렀다.
“앉아요, 율님.”
“네? 네….”
이번엔 당황하고, 우물쭈물할 새도 없었다. 율은 시언의 말대로 얼른 자리에 앉았고, 율이 자리에 앉자, 시언도 율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 두 사람의 앞으로 메뉴판이 하나씩 전달됐다. 시언이 익숙한 듯 메뉴판을 펼치며 율에게 물었다.
“딱히 좋아하는 메뉴라도 있나요?”
“네? 아뇨… 저기….”
시언의 물음에 율이 급하게 메뉴판을 펼쳐봤지만, 생전 처음 보는 요리들의 이름만이 늘어져 있었다. 사진을 봐도 당최 어떤 요리인지 알 수가 없어서 율은 당황한 얼굴로 메뉴판과 시언의 얼굴만 번갈아 봤다.
“그럼, 그냥 내가 알아서 시킬까요?”
율의 당황한 시선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시언이 별일 아니라는 듯 되물었다.
“네, 네! 그래 주시면….”
되묻는 시언의 말에 율이 급하게 대답했다. 무심한 듯 섬세한 시언의 배려에 율은 당황하여 쿵쾅대는 가슴을 필사적으로 진정시켜야만 했다.
시언과 매니저가 주문이라는 행위를 가장한 수다를 떠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주문행렬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례차례 음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둘이 먹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 끝도 없이 테이블 위에 늘어져 갔다.
“맛있게 드세요.”
음식들을 전부 세팅하고 난 후, 매니저는 생글생글 웃으며 연회실을 떠났고, 시언과 둘만 남은 율은 음식의 가짓수를 살펴보다 멍한 얼굴로 시언을 바라봤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괜찮다 싶은 건 전부 시켰어요.”
“어….”
“많이 먹어요?”
“네?”
율의 얼떨떨해 보이는 반응에 시언이 짐짓 놀란 얼굴로 되물으며, 다시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맘에 드는 요리가 없나요?”
시언의 행동에 불에 댄 듯 놀란 율은 급하게 두 손을 내저으며 서둘러 젓가락을 들었다.
시언은 율이 식사하는 모습을 조금 놀란 듯 바라봤다. 깡마른 몸이나, 행동거지를 생각하면 밥도 깨작깨작 먹을 줄 알았는데, 꽤나 복스럽게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있었다. 잘 먹는데 왜 저리 말랐나, 하고 생각을 이어 가다, 이내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뭘 먹든 맘이 편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시언은 밥을 먹는 율의 앞에서 더 권하거나, 만류하지 않고, 율이 제 배를 다 채울 때까지 간간이 말동무해 가며 천천히 기다려 주었다.
***
병원에 갔다가 식사를 하고 율의 집으로 돌아온 시언은 조금 좁다 싶은 집 마당에 능숙하게 주차를 했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는 시언을 따라 율도 차에서 내리며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의 기척은 없는 듯해서 안심한 얼굴로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율의 곁으로 시언이 다가왔다.
“부모님 언제 오세요?”
갑작스러운 시언의 질문에 율이 시선을 올려 시언을 바라봤다.
“아… 7시쯤이요.”
“흠….”
“?”
“4시간 정도 남았네요.”
“네.”
“우선 들어가죠.”
“네?”
“?”
“들어…오시려고요?”
“율님 혼자 두는 게 불안해서요.”
“아….”
“부모님 오실 때까지 같이 있죠.”
“네, 네.”
시언과 함께 집으로 들어온 율은 방으로 가야 하나, 거실에 있어야 하나를 고민하다 결국 거실로 시언을 이끌었다. 왠지 방에 단둘이 있게 되면 어색한 분위기가 진화되어 껄끄러워질 것만 같았다.
율이 이끄는 대로 거실에 자리 잡은 시언은 들고 있던 율의 약봉지를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리고 이것저것 잔소리를 시작했다.
“거즈랑 반창고는 형식만 챙기자고 붙여놓은 걸 테니 거추장스러우면 떼어내도 괜찮을 거예요. 멍이랑 부기 빼는 연고는 수시로 발라주고요. 약도 잊지 말고 챙겨 먹어요.”
“네.”
“아니, 지금 약 한 봉지 먹고 와요.”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시언의 기세에 눌린 율이 약봉지를 들고 얼른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약봉지를 뜯는 소리와 물을 따르는 소리가 이어지고, 물을 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의 행동을 예상하며 주방 쪽을 바라보고 있던 시언은 후다닥 주방에서 나오는 율을 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내가 가면 오늘은 접속하지 말고, 그냥 자요.”
“네?”
“아니면 그냥 지금 잘래요? 난 대충 시간 보내다 7시 전에 갈게요.”
“아니에요!”
“?”
“안 졸려요! 노아님 가시면… 잘게요.”
“? 그래요.”
그 후로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컴패니언이나 스킬에 대한 것, 길드에 대한 것, 사냥에 대한 것, 율이 맞춰야 할 장비들의 종류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율도 점차 편안하게 몸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그럼, 복귀 유저셨던 거예요?”
“네, 2년 전인가 소서러 잠깐 키우다가 접고, 이번에 복귀한 거예요.”
“아… 그럼 녹스가…?”
“네, 맞아요.”
“아….”
“암튼 복귀하고, 히든 코드까지 따게 되고, 운 좋았죠.”
“그럼, 그때도 레인보우 힐에…?”
“아, 아뇨. 그때는 다른 길드에. 지금은 없어졌더라고요.”
“네….”
“율님은 신규였죠?”
“네.”
율과 끊이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중간중간 시언의 시선은 한 번씩 아래를 향했다. 시언의 시선이 자신을 벗어날 때마다 율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시언의 시선이 너무나 길게 자신을 벗어나 아래를 향하고 있자, 율의 시선 또한 절로 시언의 시선을 따라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엔 자신의 손목이 있었다. 흉한 흉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채로. 놀란 율이 그대로 손을 빼서 제 등 뒤로 감췄다. 사색이 된 당황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율에게 시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그놈들이 그런 거예요?”
예상 못 한 질문에 율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그리고 이어서 흔들리기 시작한 눈동자가 점점 숙어지는 고개와 머리카락에 가려 사라졌다.
“아니…요.”
“직접… 한 거예요?”
“…….”
“…….”
“죄송해요….”
“…….”
율의 집을 나서던 시언은 자신을 배웅하려는 듯 따라 나오려는 율을 만류했다. 푹 쉬고, 내일 보자는 말을 남기고는 율을 집안으로 들여보낸 시언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는 마당에서 차를 빼냈다. 그리고 골목 한편에 차를 세웠다. 누군가를 기다리듯 골목 끝을 주시하던 시언은 골목을 걸어와 율의 집으로 들어가는 중년 여성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차를 움직여 미끄러지듯 골목을 빠져나갔다.
***
“씨발, 좆 됐어.”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내가 그 차가 외제 차인 줄 알았냐고!”
「수리비 많이 나옴?」
“많이? 많이 나왔냐고? 범퍼 하나 가는 데 200 가까이 든다더라!”
「헐?!」
“씨발… 꼰대가 알아서 나 존나 깨졌다고!”
「200… 씨발….」
“교체 말고, 수리로 하면 5~60이라는데, 차주 쪽에서 무조건 교체한다고 염병을 해서!”
「근데, 대체 그 새끼 누구야? 권율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어?」
“내가 어떻게 알아!”
「우선 게임 들어와. 들어와서 자세하게 얘기해 봐.」
“못 들어가. 씨발, 나 외출 금지에 용돈도 끊기고, 컴퓨터도 금지됐어.”
「헐….」
“내가 씨발, 권율 그 새끼 가만 안 둬.”
「그러게. 결국, 다 그 새끼 때문인 거잖아.」
“내가 그 새끼한테 200 뜯어내고 만다.”
「근데 외출 금지라며.」
“씨발, 낮에는 내가 어디서 뭘 하든 지들이 어떻게 알 거야. 꼰대 퇴근하기 전에만 들어오면 되는 거지.”
「갈 때 나도 불러라. 내가 차운이도 데리고 갈게.」
“알았어.”
***
[컴패니언 율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원 율님이 접속하였습니다.]
[노아 : 어서 와요]
[율 : 안녕하세요]
다음 날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접속한 율은 자신보다 먼저 접속해 있는 노아의 인사를 받고는 당황해했지만, 금세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넸다.
[노아 : 푹 잤나요?]
[율 : 네..너무 잔 것 같아요]
[노아 : ㅋㅋㅋ 약도 먹었어요?]
[율 : 네 먹고 바르고 다 했어요]
[노아 : 잘 했어요 착하네요]
[율 : ㅋㅋㅋ]
[율 : 그런데 노아님 되게 일찍 접속하셨네요?]
[노아 : 아 아침에 차를 센터에 맡기고 왔거든요]
[율 : 센터...요?]
[노아 : 네 아 율님 잠시 만요]
[율 : 네? 네...]
노아가 잠수를 타고, 5분쯤 지났을 때. “우편물이 도착하였습니다.”라는 시스템 음성이 들려왔다. 율이 의아한 마음에 우편함을 열려는 순간.
“우편물이 도착하였습니다.”
“우편물이 도착하였습니다.”
“우편물이 도착하였습니다.”
“우편물이 도착하였습니다.”
“우편물이 도착하였습니다.”
“우편물이 도착하였습니다.”
“우편물이 도착하였습니다.”
“우편물이 도착하였습니다.”
“우편물이 도착하였습니다.”
연달아 우편물이 줄줄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율은 순간, 자신이 렉에 걸린 줄 알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스템 음성에 기겁하며 우편함을 열자 10개의 우편물이 도착해 있었다.
보낸 이 : 노아
주신의 상자 묶음
라고 쓰여 있는 우편이 총 10개. 그 말인즉슨, 3만 원 상당 주신의 상자 묶음이 총 10개가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황당함에 입을 벌리고 있던 율은 보낸 이를 확인했다. 노아에게서 발송된 우편이었다.
[노아 : 잘 받았어요?]
그리고 동시에 노아의 채팅이 올라왔다.
[율 : 이게 다 뭐예요 노아님?!]
[노아 : 나 율님 덕분에 돈 굳었거든요]
[율 : 네??]
[노아 : 율님 덕분에 범퍼 공짜로 갈았어요 율님한테 빚진 거나 마찬가지니까 내 성의라고 생각하고 받아둬요]
[율 : 그건 제 덕이 아닌..]
[노아 : 율님 덕이죠]
[노아 : 범퍼값 다 갚을 거예요 빚지고는 못살거든요 난]
[율 : 아닌 것 같은....데..]
[노아 : 궁금하니까 빨리 까 봐요]
노아의 성화에 율은 더 반박할 수도 없었고, 버티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도 상자를 까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결국, 율은 못 이긴 척 노아가 보내준 우편물을 모두 받았다. 주신의 상자 묶음은 12개의 상자가 들어 있는 세트라서 다 합하니 총 120개의 상자를 받은 셈이었다.
노아가 보내준 100개가 넘는 상자들은 까는 데만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랜덤으로 나오는 아이템들이 궁금해서 율은 꽤 즐겁게 상자들을 깔 수 있었다. 결국, 30분이라는 시간에 걸려서 상자를 모두 깐 율은 수십 개의 의상 아이템과 수 개의 장비 아이템과 7 제련권, 그리고 2개의 아차 아이템과 염원하던 9 방어구 제련권을 얻을 수 있었다.
[율 : 방어구 9제련권 나왔어요!]
[노아 : 아차 템은 없나요?]
[율 : 2개 나왔어요]
[노아 : 우선 아차 템부터 까 봐요]
[율 : 네]
노아의 말대로 아차 아이템을 열어본 율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아차 아이템은 두 개 모두 의상 아이템으로 하나는 리본 테일 머플러라는 투구 하단 아이템이었고, 하나는 나리의 기품이라는 의상이었다.
[리본 테일 머플러]
- 아차, 실수다!
GM들이 실수로 만들어 넣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템.
장착 – 투구 하단.
성별 – 남성 전용.
[나리의 기품]
- 아차, 실수다!
GM들이 사극 드라마를 보고 감명받아 만든 사대부 나리들이 입을 법한, 시대를 잘못 타고난 아이템. 펄럭이는 도포 자락이 매력적.
장착 - 의상.
성별 – 남성 전용.
[율 : 어...리본 테일 머플러랑 나리의 기품? 나왔어요 투구랑 의상이에요]
[노아 : 뭔지 모르겠네요 입어 봐요]
노아의 말에 율이 우선 리본 테일 머플러를 장착했다.
[율 : ...]
[노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목과 입가를 살짝 감싸고, 목 뒤쪽으로 예쁘게 리본 매듭지어져 꼬리를 늘어뜨린 붉은색 머플러. 거기에 끼고 있는 발그레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려서 율은 말을 잃고, 자신의 캐릭터를 황당하게 바라봤다. 노아는 이미 숨이 넘어갈 듯했고 말이다.
[율 : 저 이거 안할래요...]
[노아 : 왜요?ㅋㅋㅋㅋㅋㅋㅋ]
[율 : 이상해요...]
[노아 : 안 이상해요 ㅋㅋㅋㅋ 잘 어울려요 ㅋㅋㅋㅋㅋㅋㅋ]
[율 : ...]
[노아 : 의상은 뭐예요?ㅋㅋㅋㅋ]
[율 : ...]
웃으며 묻는 노아의 말에 조금 뚱해진 율이 말없이 의상 아이템을 장착했다.
흰색 도포 자락에 푸른색 쾌자, 흰 바탕에 검은색 무늬가 들어간 태사혜. 그리고 허리선을 잡아주는 진 푸른색의 세조대가 우아하게 떨어져 내렸다.
[노아 : 음...]
[율 : ...]
하지만 웬일인지 노아의 반응이 떨떠름했다.
[노아 : 멋지긴 한데...율님하고는 안 어울려요]
[노아 : 발그레나 머플러랑도 되게 언밸런스 한 것 같고요]
노아의 말에 율은 자신의 캐릭터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누군가가 입으면 참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율 : 저기..그럼 노아님]
[노아 : ?]
[율 : 이 옷...다른 사람 줘도 되나요?]
[노아 : 안 입으실 거면 팔지 그래요? 아차 템이라 꽤 비싸게 팔릴 텐데]
[율 : 아...]
[노아 : 뭐 율님 템이니까 율님 좋을 대로 해요 ㅋㅋㅋ]
[율 : 그래도...되나요?]
[노아 : 돼요 ㅋㅋㅋ]
[율 : 감사합니다ㅋㅋ]
[노아 : ㅋㅋㅋㅋ]
[도련 : 날 준다고요?!]
[율 : 네]
[도련 : 아차 템은 팔면 몇천에서 몇억은 할 텐데요??]
[노아 : 율님이 주고 싶다고 하시니까 그냥 받아 ㅋㅋ]
[도련 : 아니...]
[율 : 도련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도련 : 어...그럼..]
[도련 : 잘...받을게요...?]
[율 : 네 ㅋㅋㅋ]
[노아 : ㅋㅋㅋㅋㅋㅋ]
도련은 율이 걸어오는 거래를 수락해 나리의 기품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아이템을 장착하자, 우아하게 기품 있는 사대부의 자태가 드러났다. 율과 노아, 도련, 모두 만족한 듯 훈훈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도련의 직업은 암살자 계열의 슬레이어란 걸 다들 잊고 있는 듯했다.
[길드원 집사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집사 : 안녕하십니까, 여러ㅂ...]
[집사 : 도련니임!!!!!!!!]
[도련 : ?]
[율 : ??]
[노아 : ?]
[집사 : 아니, 도련님!!!!!!이 무슨 완벽한 자태!!!]
[집사 : 도련님!! 진정한 도련님이 되셨습니다!!!!]
[집사 : 아름다우십니다!!!!! 도련니임!!!!!!]
[도련 : ;;]
접속하자마자 도련의 모습을 보며 감격에 빠져 난리를 부리던 집사는 도련에게 어울리는 투구를 찾겠다며 도련을 끌고 글록시니아로 가버렸다. 폭풍같이 휩쓸고 가버린 두 사람 덕에 율과 노아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쉼터에 남겨졌다.
도련과 집사 덕에 말없이 쉼터에 앉아 있기를 잠시, 율은 노아에게 거래를 걸었다. 노아는 자신에게 거래를 걸어오는 율을 의아해하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한 벌의 의상 아이템이 거래 창에 올라왔다.
[노아 : ?]
[율 : 저...이거 노아님한테 어울릴 것 같아요]
[노아 : 그래요?]
[율 : 네...]
왠지 조심스러운 율의 반응에 노아는 거래를 완료하고 율이 건네준 의상을 입었다. 슬림핏의 검은색 정장 바지와 구두, 상체의 라인을 정확하게 드러내며 떨어지는 흰색 와이셔츠 그리고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소매와, 조금 언밸런스하게 착용하고 있는 검은색 가죽장갑. 아이템의 이름은 잠입 수사. 하지만 가죽장갑 때문에 얼핏 조폭 같아 보이기도 했다.
[율 : 그...어제...오셨을 때 입고 계셨던 옷하고 비슷해서요..]
[노아 : 아]
[율 : 괜찮으시면 입어주세요]
[노아 : 네 잘 입을게요 ㅋㅋ]
***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각. 성원은 텅 빈 집안을 쉽게 빠져나왔다. 빠른 보폭으로 걸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려던 그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성원은 다시 한번 율에게 찾아갈 심산이었다. 전날 통화에서 현석은 자신을 불러 달라고 했지만, 당장 돈 한 푼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율에게 뜯어낼 돈을 현석과 나눠 가지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인 것 같았다. 우선 한탕은 혼자 뛰고, 그다음부터는 현석과 차운을 데리고 오자고 생각하며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20분 남짓 걸려 도착한 율의 집 앞 골목을 서성이던 성원은 의아한 얼굴로 한곳을 바라봤다. 율의 집 앞 한편에 검은 정장을 입은 장신의 남자 두 명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뭐 하는 사람들인가 싶어 잠시 지켜봤지만,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는 것 같아서 성원은 성큼성큼 걸어 율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성원의 걸음은 얼마 가지 못하고 제 앞을 막아선 검은 정장의 남성 두 명에게 가로막혔다.
“뭐예요?”
황당함에 묻는 성원의 질문에 남자들은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말없이 계속 마당으로 들어서려는 성원을 제지하는 남자들의 행동에 성원이 화가 난 듯 남자들을 밀쳐내려 몸부림을 쳤다.
“뭔데!”
하지만 격한 성원의 몸짓에 남자들은 오히려 성원을 더욱 강하게 제압하며 바닥으로 패대기를 쳤다. 그리고 벌레 보는 듯한 눈으로 성원을 내려다봤다.
“당신들 뭔데! 저기 내 집이야!”
그런 남자들의 행동에 성원이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며 소리를 질렀고, 남자들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바닥에 넘어져 있는 성원을 발로 툭툭 차며, 꺼지라는 듯 골목 쪽을 향해 턱짓했다.
하지만 성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율의 집으로 향했고, 남자들은 그런 성원을 막는 걸 수차례 반복했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점점 험악하게 변해가는 남자들의 행동과 표정에 성원도 분위기 파악을 한 듯 슬금슬금 물러났고, 잔뜩 안달 난 표정으로 율의 집을 쏘아보다 후다닥 골목을 빠져나갔다.
성원이 달려 사라진 율의 집 앞에서 구겨진 옷매무새와 머리 등을 정리하던 남자들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한창 율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시언은 핸드폰으로 걸려오는 한 통의 전화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다.
「말씀하신 대로 찾아왔었습니다.」
“문제없이 해결했습니까?”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워놓은 시언은 통화를 하면서 손은 쉬지 않고 키보드를 치고 있었다.
「예, 손은 대지 않았습니다.」
“잘하셨네요. 근데, 몇 명이나 왔던가요?”
「혼자 왔습니다.」
“음…. 아무튼, 집 안에 있는 사람은 신경 쓸 일 없도록 해주세요.”
「예.」
상대방의 대답을 끝으로 시언은 전화를 끊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율 : 그...어제...오셨을 때 입고 계셨던 옷하고 비슷해서요..]
율의 말에 시언은 어제 자신이 입고 있던 옷에 대해 떠올렸다. 검은 슬랙스 바지에 흰 셔츠, 그리고 검은색 슬립온. 확실히 율이 건네준 의상 템과 비슷한 부분이 많긴 한 것 같았다.
[노아 : 아]
[율 : 괜찮으시면 입어주세요]
[노아 : 네 잘 입을게요 ㅋㅋ]
웃으면서 답한 시언은 금세 얼굴을 굳히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모니터 속의 율의 캐릭터를 조용히 바라봤다. 전날 봤던 율의 손목에 남아 있던 흉터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
[노아 : 율님 주시 부탁해요]
[율 : 네]
노아와 율은 파티를 구해서 보탐을 와 있었다. 두 사람은 자주 보탐을 뛰러 다니곤 했는데, 율의 스페라무스 스킬 덕분인지 항상 파티는 잘 구해지는 편이었다. 보스 방에 도착해서 재정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노아가 율에게 언제나 하는 부탁을 해왔고, 율도 익숙한 듯 별말 없이 수긍했다.
파티가 잡으러 온 보스는 호귀라는 이름의 보스로 복잡한 패턴에 큰 체력, 짧은 타임 어택을 가지고 있는 최상위급 보스로 공략하기가 까다롭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 호귀는 공격패턴이 바뀌는 페이즈마다 절멸기를 쓰는데, 이 절멸기를 피하기 위해서는 한 명의 주시자가 보스 방 곳곳에 흩뿌려지는 5개의 호귀 구슬을 회수해야만 한다.
그동안 호귀는 주시자에게 원거리 공격을 쏘아대는데, 나머지 파티원들은 그 공격을 끊어줘야만 한다. 그리고 호귀 구슬을 회수하는 주시자의 역할은 언제나 율의 몫이었다. 율은 애초에 공격이 불가하므로 율이 빠져도 딜 로스가 없기 때문이었다.
[노아 : 주시 끝나면 바로 스페라무스 써주시고요]
[율 : 네]
[파티] [노아 : 주시는 율님이 봅니다 다른 분들은 율님이 구슬 먹기 전에 구슬 건드리지 않게 조심해주세요]
[파티] [여유 : 넹]
[파티] [치즈케이크 : 네넵]
[파티] [진건 : ㅇㅇ]
[파티] [에너자이저 : ㄱㄱ]
노아의 전달이 끝나고, 파티원들이 모두 준비가 된 듯한 모습에 율이 마지막으로 버프를 돌렸다.
(베네딕 티오)
(베네치피움)
(아우덴티아)
(클레멘티스)
(인 라피뎀)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아에게 오라티오를 걸자, 다들 산발적으로 호귀를 향해 튀어 나갔다. 호귀의 복잡하지만, 일정한 패턴에 맞춰 다들 치고 빠지고, 저항하고, 회피하는 와중에 율은 호귀의 광역기 범위에 들지 않는 거리에서 계속해서 보조 스킬들을 사용했다.
(플로레스 니비움)
율의 근처에서 시작해 휘몰아치기 시작한 눈의 꽃들은 산발적으로 흩날리며 파티원들을 감싸고, 빠르게 그들의 체력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스페스)
(옵타티오)
그리고 럭의 가중치를 올려주는 스킬과 함께 호귀에게 1회 공격의 데미지를 두 배로 받는 스킬을 걸자, 연이어 노아의 스킬이 직격했다.
(디 블라우에 플라메)
스페스 스킬의 효과 덕분인지 노아의 스킬은 굉장한 타격음과 함께 크리티컬이 떠올랐고, 상상을 초월하는 데미지에 파티원들의 손이 일순간 멈췄다. 하지만 노아의 데미지 덕분에 1페이즈를 넘어서서 절멸기를 준비하는 호귀의 모션에 다들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호귀의 분노가 담긴 구슬이 운용을 시작합니다.]
보스의 상태 알림이 뜨고, 율이 주시를 받기 위해 호귀 구슬을 먹으러 뛰어갔다. 그런데 에너자이저가 반대편에서 호귀 구슬을 먼저 먹어버렸다.
호귀 구슬을 제일 처음 먹은 사람이 주시자가 되어서 남은 호귀 구슬을 전부 먹어야 절멸기가 발동되지 않는데, 거의 동시에 에너자이저와 율이 호귀 구슬을 먹는 바람에 주시가 무너지며 바로 절멸기가 발동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전부 바닥에 눕는 사태가 발생해버렸다.
[파티] [율 : 제가 주신데요;]
[파티] [노아 : 주시는 율님이 보신다고 처음에 말씀드렸는데?]
[파티] [에너자이저 : 죄송해요;ㅁ;]
[파티] [진건 : 리트해요;]
[파티] [여유 : 이 무슨...]
[파티] [치즈케이크 : 자이저님 집중요]
[파티] [에너자이저 : ;ㅁ;]
결국, 리트라이해서 다시 보스 방에 도착한 노아의 파티는 다시 재정비하고 보스를 잡기 시작했다. 순조롭게 1페이즈를 넘기고, 절멸기 캐스팅이 시작되며 호귀 구슬이 나타났고, 이번엔 방해 없이 율이 주시를 끝내고 돌아와서, 스페라무스를 사용했다.
두 명의 성령과 노래하는 율의 노래가 물결처럼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스킬의 효과로 모든 파티원들 주변에 빛의 조각 같은 배리어들이 둘러졌다. 다들 율의 스킬에 놀라워하며 호귀에게 극딜을 넣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 에너자이저가 갑작스럽게 행동을 멈추고, 빈껍데기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결국, 에너자이저가 낳은 딜 로스로 아슬아슬하게 타임 어택에 걸린 파티는 또다시 절멸기를 맞고 전멸해 버렸다.
[파티] [노아 : 자이저님 뭐합니까?]
[파티] [에너자이저 : 헐 죄송해요! 전화가 와서..]
[파티] [진건 : ...]
[파티] [여유 : 아나...]
[파티] [치즈케이크 : 제발 집중 좀요]
[파티] [에너자이저 : 넵!]
[파티] [율 : 이제 스페라무스는 못써드려요;]
[파티] [에너자이저 : 헐?! 왜요!!!]
[파티] [진건 : 자이저님 때문이잖아요 ㅡㅡ]
[파티] [에너자이저 : ???]
[파티장] [노아 : 리트갑니다]
결국, 노아의 파티는 그 뒤로도 2번의 리트라이를 한 후에야 호귀를 잡을 수 있었다. 리트라이의 이유는 전부 에너자이저였다. 아슬아슬하게 타임 어택을 남기고 호귀를 처치한 파티원들은 모두 에너자이저에게 야유를 퍼부었고, 에너자이저 역시 적반하장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파티를 탈퇴해 버렸다.
그런데 에너자이저가 탈퇴하고 나서 확인해 본 전리품 상자엔 드랍형 S급 레어 아이템인 매의 날개옷이 있었다. 까다로운 공략을 자랑하는 호귀를 잡는 대표적인 이유이기도 한 아이템이 드랍되자, 다들 흥분을 숨기지 못했다.
[파티] [여유 : 헐 대박!!!!]
[파티] [진건 : 헐!!!!!!]
[파티] [치즈케이크 : 우왕!!!!]
[파티] [율 : 와...]
[파티] [노아 : 입찰하실 분?]
노아의 말에 흥분해서 날뛰던 파티원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파티] [치즈케이크 : 팔아서 n분해요 ㅋㅋㅋ]
[파티] [노아 : 파티 중엔 사실 분 없으신 거고요?]
[파티] [여유 : 못 사요 ㅠㅠㅠ]
[파티] [진건 : 나온 데에 의의를 둡니다 ㅠㅠ]
[파티] [노아 : 그럼 제가 삽니다 경매 창 띄울게요 돈 받아가세요]
노아의 말을 끝으로 파티원들 모두에게 경매 창이 떠올랐다. 노아가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입찰을 하고, 나머지 파티원들이 입찰 포기를 누르자, 노아가 제시한 입찰금이 모두에게 분할되어 지급되었다.
[파티] [진건 : 감사합니다!]
[파티] [여유 : 목돈이다!!]
[파티] [치즈케이크 : 다음에도 불러주세요!!]
[파티] [율 : 수고하셨습니다]
[파티] [노아 : 수고하셨어요]
파티를 해산하고, 노아와 함께 쉼터로 돌아온 율은 조금 전에 먹은 매의 날개옷이라는 아이템이 궁금해졌다.
[율 : 노아님 매의 날개옷이 뭐예요?]
[노아 : 매의 날개옷이요?]
[율 : 네 처음 들어 보는 거라서..]
[노아 : 아 ㅋㅋ]
율의 말에 노아는 율에게 거래를 걸었다. 율이 거래를 수락하자 거래 창에 매의 날개옷이 올라왔다. 율은 거래 창에 올라온 매의 날개옷을 눌러 정보 창을 열었다.
매의 날개옷.
여신 프레이야의 보물.
무 속성 공격에 대한 내성 45%
장착 - 걸칠 것.
정보를 열람하던 율은 매의 날개옷 내성 수치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봐왔던 이뮨 계열 장비의 내성은 높아 봐야 30%가 최고치였었다. 그런데 매의 날개옷 내성 수치는 무려 45%. 왜 드랍형 S급 레어 아이템인지, 노아가 왜 그런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입찰을 넣은 건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율 : 와...엄청 좋은 템이네요;]
[노아 : ㅋㅋ거래 받아요]
[율 : ??]
[노아 : 받아요]
[율 : 네??]
[노아 : 율님 주려고 입찰한 거예요 받아요]
[율 : 네?!..못받아요;]
[노아 : 왜요?]
[율 : 노아님 쓰시려고 사신 거 아니에요?]
[노아 : 아니에요]
[율 : 노아님 쓰세요...]
[노아 : 난 다른 거 입고 있어요 율님 주려고 입찰한 건데요?]
[율 : 그럼 다시 되파시면..]
[노아 : 그럼 난 율님한테 빚진 거 언제 갚나요?]
[율 : 네?!]
[노아 : 말했잖아요 빚지고는 못산다고]
말을 끝낸 노아는 매의 날개옷을 냅다 바닥에 드랍했다. 노아의 행동이 어리둥절한 듯 떨어져 있는 매의 날개옷을 바라보는 율에게 노아가 설명하듯 말했다.
[노아 : 저거 10초면 증발해요]
[율 : 네?!!]
[노아 : 율님이 안 주우면 영영 사라진다니까요??]
[율 : ;;;]
노아의 반협박 같은 말에 율은 당황하며 얼른 매의 날개옷을 주워들었다.
[노아 : ㅋㅋㅋㅋ 잘했어요 이제 입으면 되겠네]
[율 : 돌려드릴게요]
[노아 : 안 받을 거예요 바닥에 던져도 난 안 주울 거니까 안 입을 거면 그냥 버리든가 율님이 되팔든가 해요]
[율 : ...]
[노아 : 돈 있어도 물량이 없어서 구하기 힘든 거니까 이왕이면 되팔지 말고 입어요]
노아의 말에 율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큰 금액을 지급하고 산 거라 섣불리 감사하다고 받을 수도, 그렇다고 되팔 수도, 더욱이 버릴 수도 없었다. 그저 부담스럽기만 한 아이템을 입지도, 어쩌지도 못하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노아 : 그나저나 슬슬 배고픈 것 같아요]
[율 : 네? 네...]
[노아 : 율님은 어떤가요?]
[율 : 네? 저는 아직...]
[노아 : 그래요? 그럼 나 30분 안에 올 테니까 기다려 줄래요?]
[율 : 네... 맛있게 먹고 오세요]
[노아 : 네]
노아가 밥을 먹으러 가고, 30분이 다 되어갈 때쯤, 갑작스럽게 핸드폰이 울렸다. 침대 위에 던져뒀던 핸드폰의 갑작스러운 벨 소리에 화들짝 놀란 율이 후다닥 달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이름은 ‘노아님.’ 율은 의아하고도 반가운 마음에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율님, 나와요.」
전화를 받자 대뜸 나오라는 시언의 말에 의아했던 율이 거실로 나와 마당을 바라보자, 시언의 차가 마당에 주차되어 있는 게 보였다. 급한 마음에 허겁지겁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현관 앞에 서 있던 시언이 자신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밥 먹으러 갈까요?”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언의 차에 납치되듯 태워진 율은 얼떨떨한 기분에 운전하는 시언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그런 율의 시선을 느꼈는지 전방을 바라보던 시언이 흘끗 율을 바라봐왔다.
“얼굴 괜찮아졌네요.”
“네? 아….”
시언의 말에 율은 자신의 얼굴을 더듬더듬 만졌다. 연고를 열심히 발라서 그런지 부기는 거의 빠지고, 멍 자국도 옅어졌다.
“네… 노아님 덕분에.”
“그런가요?”
“네….”
잠시 말끝을 흘리며 말을 끌던 율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이제…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아, 차를 센터에 넣어놔서 못 왔어요.”
범퍼를 간다고 했잖아요? 라며 덧붙이는 시언의 답이 너무나 간단명료해서 율이 허망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자, 흘끗 율을 바라본 시언이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며, 웃음기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율님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죠.”
“저는 대충 아무거나….”
“대충 아무거나 먹으니까 말랐잖아요.”
“어….”
“? 왜요?”
“저희 엄마랑 똑같은 말….”
“?”
율이 더듬더듬 내뱉은 말에 시언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율을 바라봤다. 조금 당황한 듯한 시언의 반응에 율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런 율의 웃는 모습에, 시언은 잠시 전방을 보는 것도 잊고, 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웃고 있는 율이 눈치채지 못하게, 금세 표정을 갈무리해서 다시 전방을 바라봤다.
“뭐, 좋아하는 거 있나요?”
노아의 물음에 웃고 있던 율의 얼굴이 평상시로 돌아왔다.
“아….”
시언은 고민하듯 우물쭈물하는 율의 얼굴을 연신 흘끗거렸다. 왠지, 웃음을 거둔 얼굴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고기 좋아해요.”
정말 안 어울리는 메뉴 선택에 이번엔 시언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율이 좋아한다던 고기를 먹고, 율의 집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나란히 차에서 내렸다. 율은 자신과 같이 차에서 내리는 시언의 모습에 그가 또 자신의 집에서 머물다 가는 건가 하는 기대를 했지만, 시언은 율을 현관 앞까지 배웅을 할 뿐이었다.
“들어가요.”
“어….”
“??”
“아니에요….”
왠지 시무룩해 보이는 율의 반응에 시언은 의아해하며 말을 덧붙였다.
“좀 이따 게임에서 봐요.”
“아, 네.”
그리고 이어진 시언의 말에 율이 퍼뜩 고개를 들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으며 답했다. 왠지 그런 율의 반응이 강아지 같다고 시언은 생각했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좋아하는 율의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던 시언은 율을 집 안에 들여보내고, 현관 앞 계단을 내려와 누군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 율의 집에서 사선에 있는 골목 안에서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두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모습에 시언이 가볍게 묵례를 하자, 그들도 덩달아 묵례를 하며 시언에게 다가왔다.
“별일 없었습니까?”
“예.”
“그 이후로는 어떻습니까?”
“첫날 혼자 찾아왔던 이후로는 오지 않았습니다.”
“흠….”
“…….”
“아무튼, 이후에도 찾아오면 같은 방법으로 쫓아내 주십시오. 손은 절대 대지 마시고요.”
“예.”
남자들과 짧은 대화를 나눈 시언은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능숙한 움직임으로 율의 집 앞마당을 빠져나가 골목길을 달려 사라졌다.
한참을 무언가를 생각하며 운전을 하던 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가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하얗고, 작고, 몽실몽실한 것. 그런 강아지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 이름이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사념에 빠져 위험천만한 드라이브를 즐기던 시언이 뭔가가 생각난 듯 괴고 있던 머리를 떼어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포메라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