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마음이 시작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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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테인의 성장을 위해 틈틈이 재료를 구하러 다니던 노아는 재료 중 일부가 스플라이싱 숲에서만 나오는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알고 율에게 부탁해, 함께 스플라이싱 숲으로 향했다.
[노아 : 그러고 보니 요즘에도 새벽부터 공사를 하고 그러나요?]
[율 : 네? 아 아니요]
[율 : 요즘엔 거의 10시쯤? 부터 하는 것 같아요]
[노아 : 다행이네요]
[율 : 네ㅋㅋ]
율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스플라이싱의 초입에 도착한 노아는 몇 가지 장비를 율에게 건네줬다. 아직 장비를 다 맞추지 못한 율은 방어보단 인트나 마공을 올려주는 장비 위주로 입고 있었는데, 스플라이싱 숲에선 아무래도 방어가 더 중요하다 보니 노아가 건네주는 장비를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노아가 건네준 장비들은 모두 프리 전용 아이템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노아가 보조 아이템으로 가지고 있을 것 같진 않은 아이템들이었다.
[율 : 쉼터가면 돌려드릴게요]
[노아 : 안 돌려줘도 돼요 그냥 입어요]
[율 : ...]
[노아 : 율님 무기랑 투구 때문에 마공은 더 필요 없을 거예요 프리 템 중에서 방어 위주 레어템으로 사온거니까 이젠 그것들 입으면 될 거에요]
[율 : 자꾸 주시기만 하면 제가 너무...]
[노아 : 빚 갚는 거라고 했잖아요 부담 갖지 말아요]
[율 : 그래도요..]
[노아 : 율님이 그것들 안 받아주면 제가 부담스러워져요]
[율 : ...]
[노아 : 갈까요?]
[율 : ...네]
스플라이싱 숲에 들어선 노아는 확실히 전직 전보다는 사냥이 수월하다는 걸 느꼈다. 율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때와 비교하면 방어력도, 공격력도 월등히 높아졌다. 아마도 율이 만들어 주는 만나만 있으면 혼자서 솔로 플레이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선두에 서서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처리하며 걷던 노아는 항상 제 옆이나 앞에서 걷던 궁기가 뒤쪽으로 빠져서 율을 보호하듯 그의 옆에서 걷는 걸 보며,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두 사람은 한참을 필드를 건너고, 맵을 헤매길 반복하며 이젠 위치조차 짐작할 수 없는 숲의 깊숙한 곳까지 발을 들였다. 잔뜩 우거진 수풀과 비대하게 자라 땅 위로 꿈틀거리듯 솟아오른 나무뿌리들을 타 넘으며 걷던 두 사람은 숲의 더욱 안쪽, 빛 한 점 들지 않는 암흑 속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발이 묶이고 말았다.
앞뒤와 위아래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나아갈 방법을 생각하던 노아는 눈앞에서 스킬을 사용하는 율과 율의 주위로 몰려드는 빛무리를 보았다.
(루케테)
율의 주위를 잔상을 남기며 도는 빛을 발산하는 무기체가 율과 노아의 주변을 밝혔다. 율의 컴패니언인 노아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던 스킬이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빛의 선 같은 무기체가 율의 주변을 돌며 빛을 발하는 모습이 조금 몽환적으로 보여서 노아는 잠시 율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노아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그저 그 빛에 의지해 계속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맵의 끝도, 몬스터들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무겁게 가라앉히는 어둠만이 있을 뿐. 율은 조금씩 불안해져 가는 마음을 앞서 걷고 있는 노아의 등과, 제 옆을 걷고 있는 궁기를 바라보며 조금씩 진정시켰다.
[노아 : 율님 괜찮아요?]
빛의 범위가 넓지 않아 조심조심 걷던 노아가 갑자기 멈추더니, 자신에게 물었다. 그에 율도 걸음을 멈추고, 잔뜩 긴장했던 몸을 풀며 답했다.
[율 : 네]
[노아 : 아무래도 좀 위험한 곳으로 와버린 것 같은데 그만하고 마을갈까요?]
[율 : 노아님 재료 아직 못 구하셨잖아요]
[노아 : 나중에 다시 구하죠 뭐]
[율 : ...조금만 더 가보면 안 될까요?]
[노아 : 괜찮겠어요?]
[율 : 네...노아님 계시니까 괜찮아요]
[노아 : ...]
[노아 : 그래요]
율의 말에 짧은 침묵을 이어가던 노아가 뒤를 돌며 답했다. 그리고 다시 캐릭터를 움직였다. 그 뒤를 궁기와 함께 따라 걷던 율은 눈앞에서 순식간에 어둠에 녹아 사라지는 노아의 등을 보았다.
노아가 흔적을 감추고, 놀란 율의 옆에서 노아가 사라진 곳을 빤히 바라보던 궁기가 귀를 바짝 세우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무언가를 파악하듯 행동하던 궁기가 갑자기 쏘아져 나가듯 달렸다. 그리고 노아처럼 흔적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 버린 둘의 모습에 당황한 율이 제자리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얼른 마우스를 움직여 둘의 뒤를 쫓듯 서둘러 캐릭터를 움직였다.
분명 어둠 속으로 사라진 둘의 뒤를 쫓아 몇 걸음 걷지 않았을 터였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음이 빠르게 커지며 다가왔다. 그 소리는 다가올수록 명확해져 갔다. 바람 소리. 율은 자신의 주변을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암전되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휘몰아치던 바람 소리가 멎고, 왠지 소복한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암전됐던 화면이 전환되며, 눈앞에 펼쳐진 전경에 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사박사박 내리는 눈송이들이 머리 위로, 눈앞으로, 바닥으로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발밑은 발이 옴폭 빠질 만큼 소복이 쌓인 눈들이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노아 : 율님]
온통 하얗기만 한 세상 속에서 멍하니 화면을 바라던 율은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이름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자신에게 다가오는 노아에게 덩달아 다가갔다. 노아의 옆엔 꼬리를 바짝 세우고 다가오는 궁기의 모습도 보였다.
[율 : 노아님]
[노아 : 다행이네요 궁기만 오고 율님은 안와서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율 : 저도 갑자기 사라지셔서 깜짝 놀랐어요...]
[노아 : 아마 그 필드의 일정 지역에 숨겨진 워프가 있었나 봐요]
[율 : 아...]
[율 : 근데...여긴 어딜까요?]
율은 노아에게 물으며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봤다. 온통 넓기만 한 흰 공간엔 그 어떤 것도 없이 하염없이 내리는 눈과 자신과 노아뿐이었다.
[노아 : 숨겨진 지역이나 오픈예정 지역? 뭐 그런 거 아닐까요]
[율 : 그런 걸까요]
[노아 : 그나저나 여기선 파티말이나 길드말도 안되고 귀환스킬도 안 되는 것 같아요]
[율 : 네?]
[노아 : 갑자기 날리고 좀 놀라서 율님하고 대화해보려고 했는데 전체채팅 말고는 다 안 되더라고요]
[율 : 그럼 어쩌죠?]
[노아 : 돌아가려면 워프를 열어야 할 것 같아요]
노아의 말에 율은 서둘러 워프포탈 스킬을 사용했다.
[율 : ?]
[노아 : ??]
하지만 스킬은 시전되지 않았다. 혹시 젬스톤이 없나? 싶어서 인벤토리를 열어 봤지만 젬스톤은 충분히 있었다.
[율 : 워프가 안돼요;]
[노아 : ;;]
[율 : 버그일까요?]
[노아 : 저도 잘 모르겠네요... 진입하면 안 되는 곳에 와서 끼인 걸 수도요..]
[율 : 아...]
[노아 :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좀 돌아다녀 보죠 나가는 워프가 따로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율 : 네]
말을 끝내고 앞서 걷기 시작한 노아의 뒤를 얼른 따라 걷던 율은 제 옆에서 걷던 궁기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바라봤다. 궁기는 주변을 살피듯 잠시 제자리에서 날갯짓을 몇 번 하더니 어디론가 빠르게 날아가 버렸고, 단둘이 남아버린 노아와 율 사이엔 사방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 일정하게 들리는 눈 밟는 소리만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어느새 머리 위와 어깨에 위에 소복이 쌓인 눈만큼 길게 찍어온 두 사람의 발자국이 하얗게 빛나는 필드 위에 끊임없이 찍혀 있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던 텅 빈 설원 같은 필드였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홍성목이나 호랑가시나무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밝던 하늘도 점점 어두워져 어느새 한밤중인 것처럼 주변이 어두워졌다.
세상에 둘만 동떨어진 듯, 하염없이 내리는 눈들과 어두워지는 하늘, 기분 좋게 울리는 눈 밟는 소리. 주변에 화려하게 피어난 붉은 홍성목과 호랑가시나무 열매들. 왠지 한겨울의 이벤트를 생각나게 하는 조합들이었다. 어느새 필드를 벗어나는 것도 잊고, 주변을 구경하기 바쁜 두 사람 사이로 동물의 포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익숙한 울음소리에 두 사람이 하늘을 바라보자, 궁기가 커다란 날개를 펄럭거리며 땅으로 내려앉았다. 완전히 바닥에 착지한 궁기는 날개를 갈무리해 접었고, 그 날개는 몸통 옆에 그려진 무늬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다가온 궁기는 뭔가에 안달이 난 듯 앞발로 노아의 팔을 툭툭 치며 뒤돌아 어딘가를 연신 턱으로 가리켰다.
[노아 : ?]
[율 : ?]
그리고 그런 궁기의 행동을 의아해하던 두 사람은 눈 밟는 소리와 발자국을 남기며 궁기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궁기의 안내를 받아 걷기를 잠시, 얼어붙은 흰색 장벽이 서 있는 필드의 끝에 도달했다. 높게 치솟은 장벽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두 사람과 달리 궁기는 앞발로 장벽을 마구 긁어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두 사람이 장벽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자 화면이 전환되며, 이벤트 영상이 재생됐다.
장벽을 긁어대던 궁기가 뒤로 바짝 다가온 노아와 율을 흘끗 바라보고는 그르렁거렸다. 왠지 잔뜩 흥분한 궁기의 모습에 노아는 장벽으로 다가서며 궁기를 장벽에서 떼어 놓았고, 율은 그런 궁기의 턱이나 미간을 긁어주며 그를 진정시켰다. 율의 손길에 기분 좋은 듯 몇 번 더 그르렁거리며 목을 울리던 궁기는 율의 손과 무릎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며 율의 주변을 돌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노아는 다시 장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잔뜩 얼어붙어 매끈한 얼음 속에 갇힌 흰색 장벽이 차가운 기운을 뿜고 있었다. 가만히 장벽을 살펴보던 노아는 천천히 장벽을 감싼 얼음벽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구구궁- 하며 땅 울림이 울렸다. 잔잔하던 대기가 흔들리며 사박사박 내리던 눈들이 휘몰아치듯 공중을 휘감았다.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센 눈보라가 두 사람을 덮쳤고, 발밑이 요동치듯 흔들리며 무언가가 장벽 아래에서 땅과 눈을 뚫고 솟아올랐다. 그것들은 장벽을 감싸듯 얼어 있는 얼음벽을 뚫으며 벽면에 덩굴을 치듯 타고 올랐고, 장벽에서 갈라져 떨어지는 얼음벽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쌓여 갔다.
한참을 요란하던 땅 울림과 눈보라가 멎고, 겨우 눈을 뜬 노아와 율이 본 것은, 어느새 깨끗하게 얼음벽이 떨어져 나간 흰색 장벽을 화려하게 타고 오른 홍성목들이었다. 붉고, 푸른색으로 장벽을 휘감은 홍성목들은 장벽의 한쪽에 커다란 아치형 입구를 만들기도 했는데, 입구의 위쪽엔 호랑가시나무 열매와 홍성목, 색색의 방울과 리본들로 꾸며진 리스 장식이 달려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어슬렁어슬렁 아치형 입구로 향하는 궁기의 행동에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궁기의 뒤를 따르듯 아치형 입구로 향했다. 동시에 이벤트 영상이 끝나며 게임화면으로 전환됐다.
[히든 지역.]
[눈 내리는 마을. 할리.]
화면 중앙에 떠오른 알림 메시지 함께 마을의 전경이 두 사람의 눈에 가득 차올랐다. 마을에 진입하자 제일 먼저 보인 건, 마을 중앙에 우뚝 서 있는.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한 화이트 트리였다. 새하얗게 빛나는 트리엔 심플한 장식들과 색색별 방울 전구가 감싸듯이 둘려 있을 뿐이었지만, 트리 자체가 웅장하고 눈부셔서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해 보였다.
마을 안엔 동화에서 나올 법한 집들이 마을의 전경을 채우듯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그 집의 지붕들엔 하나같이 두껍게 쌓인 눈들이 이불을 덮듯 덮여 있었다. 그리고 마을 여기저기엔 홍성목과 호랑가시나무들이 즐비했다.
또한, 마을 전체에 크고 작은 트리들이 수십 개는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 트리 아래엔 정성스레 포장한 선물들이 두어 개씩은 놓여 있었고, 집마다 문에는 화려한 리스 장식이 걸려 있었다.
마을 중앙엔 호랑가시나무 열매를 조각한 타일이 빼곡히 깔려 있고, 중앙에 설치된 거대한 트리 아래에도 수십 개의 포장된 선물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을 안엔 일정한 간격으로 청아한 종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그 종소리는 눈 내리는 밤하늘과 고요하기만 한 마을의 분위기에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눈이 쌓이는 만큼 고요함을 머금은 마을 안엔 오로지 노아와 율, 두 사람뿐이었다. 주변의 경치에 멍해 있던 두 사람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짤랑짤랑하는 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멀지 않은 곳에서 목에 방울을 건 순록 한 마리가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순록을 발견한 궁기가 오두방정을 떨며 순록을 향해 달려갔고, 궁기를 발견한 순록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아났다. 그런 순록의 뒤를 따라 궁기도 어느샌가 모습을 감췄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신나 보이는 궁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율은 화면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어디를 보나 보이는 건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하는 마을의 전경뿐이었다.
[노아 :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율 : 네...]
[율 : 예뻐요]
[노아 : 그래요?]
율의 말에 노아도 화면을 돌려 마을의 전경을 둘러봤다. 그런 두 사람 사이로, 먼 듯, 가까운 듯 들리는 종소리가 고요하고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마을 전체에 색색별로 빛나던 방울 전구들의 일제히 깜빡거리며 빛을 더하기 시작했다. 마을 전체가 반짝반짝했다.
[율 : 두근두근거려요]
율과 함께 마을의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노아는 한 건물 앞에 걸려 있는 팻말을 보며 의아해했다. 팻말의 마크는 분명 도구상점이었다. 꺼릴 것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노아의 뒤를 따라 율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엔 마을 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엔피씨가 한 명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노아가 말을 걸자, 상품목록이 펼쳐졌다. 그리고 거기엔 노아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레바테인의 성장 재료 중 하나가 있었다. 율 같았으면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구매한 노아가 황당하다는 투로 말했다.
[노아 : 이게 드랍되는 재료가 아니었나 보네요]
[율 : 네?]
[노아 : 아무래도 컴패니언에서 레바테인 성장재료 그리고 이 마을까지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율 : 그런...]
[노아 : 대체 이 게임의 히든 목록은 어디까지 있는 걸까요...]
[율 : 그러게요]
도구상점을 벗어나지 않고 히든 목록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 사이로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눈 내리는 마을 외곽의 부유 섬이 떠오릅니다.]
[율 : ?]
[노아 : 저건 또 무슨...]
화면 중앙에 떠오르는 알림 메시지에 두 사람은 또다시 어리둥절했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동시에 걸음을 옮겨 마을의 외곽으로 향했다.
마을의 외곽이란 곳이 정확히 어디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어 장벽 근처로 다가가 마을의 가장자리를 한 바퀴 빙 돌던 두 사람은 캐릭터 하나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인 부유 섬들이 줄줄이 하늘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까마득하게 멀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어둠이 깔린 하늘 위에 조금 어슴푸레 빛나는 무언가가 땅에서부터 이어진 부유 섬들의 끝에 떠 있었다.
[노아 : 이 작은 섬들을 밟고 위로 올라가야 하는 건가 본데요?]
말과 함께 움직인 노아가 부유 섬을 밟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율은 언제 돌아왔는지 뒤에서 저를 코로 밀어붙이는 궁기의 행동에 놀라며 더듬더듬 노아를 따라 부유 섬을 오르기 시작했다.
부유 섬을 오를수록 하염없이 높아지는 높이에, 실제가 아닌데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간간이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와 눈앞을 가리듯이 내리는 눈송이들 때문에 정말 아찔한 순간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을 지탱해 주는 궁기에 의지해서 율은 겨우 부유 섬의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었다.
꼭대기에 도달해 발을 디딘 율이 처음 본 것은 부유 섬에 중앙에 자라나 있는 한 그루의 거대한 나무였다. 특이한 점은 나무의 줄기, 잎사귀, 꽃 모두 눈이 덮인 것만 같은 흰색이라는 것. 그 나무에 전체적으로 장식된 주황색 전구들이 각자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아래에서 봤을 때 보였던 희미한 불빛의 정체인 것 같았다.
나무의 앞엔 얼음으로 조각해 만든 듯한 투명한 아치형 벤치가 있었다. 벤치의 등받이 부분엔 호랑가시나무 열매와 홍성목 모양이 조각되어 장식되어 있고, 벤치의 아치엔 등나무 꽃이 잔뜩 늘어져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나무에서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는 잎과 꽃들이 벤치의 아래에 눈과 함께 쌓여 갔다.
좁은 공간에 알차게 들어가 꾸며져 있는 부유 섬의 모습을 바라보던 노아와 율은 천천히 걸어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그러자, 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율 : 와...]
절로 터지는 감탄과 함께 멍하니 마을을 내려다보는 율의 눈에 마을을 빛내는 수많은 불빛이 별처럼 박혀 들어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작은 마을은 집마다 밝힌 조명과 마을 곳곳에 설치된 트리에서 나오는 방울 전구의 색색 불빛, 그리고 마을 중앙에 설치된 거대한 트리가 마을을 전체적으로 밝혀주고 있었다.
거기에 소복소복 내리는 함박눈이 정말 동화의 한 장면 같아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노아와 함께할 수 있어서, 율의 가슴은 왠지 모를 두근거림으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마을의 절경만을 담고 있는 화면을 바라보던 율은 문득, 노아의 모습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심조심 화면을 돌리자, 아슬아슬하게 노아의 모습을 화면 끝자락에 담을 수 있었다.
자신이 줬던 의상 아이템을 입고 앉아 있는 노아의 옆모습은, 현실 노아와 같이 왼쪽 눈 아래에 눈물점이 찍혀 있었다. 왠지 캐릭터가 아닌 현실 노아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실, 할리마을의 부유 섬은 커플들을 위한 특수한 애니메이션 효과가 적용되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유저 두 사람이 부유 섬 등나무 의자에 앉게 되면 볼 수 있었다.
노아와 나란히 앉아 할리마을의 전경을 보던 율의 눈에 팔랑거리며 떨어진 꽃잎 하나가 노아의 속눈썹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 게 보였다. 노아는 속눈썹을 떨며 살짝 눈을 감았고, 곧이어 눈송이들을 휩쓸고 불어닥친 바람이 노아의 검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며 속눈썹에 앉았던 꽃잎과 함께 저 멀리 날려 사라졌다.
그 모습에 율은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할리마을에 도착한 후, 느꼈던 두근거림이 어느덧 가슴 한쪽을 짓누르는 아픔이 되어 있었다. 그간 영문도 모르고, 의아하게만 생각하던 자신의 마음이 흩날려 사라지는 꽃잎을 따라 의혹을 벗고 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진실. 노아가 보고 싶었던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는 질풍의 물음에 노아를 바라봤던 것도, 노아만 곁에 있으면 어딜 가든, 무슨 일이 있든 안심이 되었던 것도. 자신에게 찾아오던 노아가 반갑고, 헤어지던 순간이 아쉬웠던 것도. 모두 자신이 노아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
노아는 제 옆에 앉아 멍하니 마을의 절경을 내려다보는 율의 옆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왠지, 처음 그와 만났을 때부터, 현재 지금 자신의 옆에 앉아 있기까지의 일들이 차례차례 생각이 났다. 맨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그냥 좀 웃긴 엔피씨구나 싶었다.
두 번째 보았을 때는 중2병다운 이상한 아이디를 한 세 놈에게 욕을 얻어먹고 있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지나쳤는데, 며칠 뒤에 그 중2병다운 놈들이 길드에 들어온다기에 길길이 날뛰며 반대했던 기억이 있다.
세 번째 만났을 때는 안 그래도 원하지 않은 쩔파티에 불려 나와 불쾌한 가운데, 잔뜩 중독되어 알짱거리기에, 보기 싫다는 이유로 다른 필드로 쫓아냈었다. 그 이후에 흙미밥에게 욕을 먹고 있는 걸 무시할까, 하다가 자주 마주치는 것도 시답잖은 인연이라 생각해 도와줬을 뿐인데, 히든 코드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길드에 가입을 시킨 후, 그의 컴패니언이 되어 히든 클래스 전직을 하고….
실수로 나이를 밝혔다고, 접속 거부를 하며 일주일가량 접속하지 않을 때는 정말 뒷조사라도 해서 집으로 쳐들어갈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고작 게임 때문에 그런 짓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쉽긴 하지만 아이템 좋고 컨트롤 좋은 프리들을 두셋 데리고 다니면 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제 발로 되돌아온 그가 직접 털어놓은 자신의 사정엔 조금 놀랐었다. 그 이후엔 왈도가 그에게 하는 행동에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났었다. 자신도 함부로 하지 않는데, 저가 뭐라고….
그리고 우연히 질풍이 팔고 있는 코이프를 발견해, 그에게 씌워볼 심산으로 사들였는데, 그게 쥬얼 플룸을 만들기 위한 재료였다는 걸 알고, 쥬얼 플룸을 만들어주었다.
울음이 담긴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겨우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그를 내버려 둘 수가 없어 그의 집까지 찾아갔었다. 그리고 보게 된 그의 모습에 절로 쌍욕이 터져 나올 뻔했다. 병원도 데려가고, 밥도 사 먹였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경호원을 고용해 배치하고, 차를 센터에서 찾아오는 즉시 수시로 찾아갔다.
그리고 지금은?
과정 없이 결과를 생각해 봤을 땐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정을 딛고, 차분히 되짚어 보다 보니 착실히 쌓여 진행되어 간 마음이 서서히 드러났다.
자신이 피해만 보는 게 아니면 누가 뭘 어쩌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권율이라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신경이 쓰였고, 신경을 쓰는 만큼 자신은 피해를 보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신경을 쓴다는 것은 마음을 쓰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소중하게 쌓아온 그간의 감정들이, 어느덧 이만큼이나 커져 마음이라는 형태가 되어 율에게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 노아와 율이 아닌, 한시언과 권율로서 서로의 옆에 앉아 있었다.
[노아 : 그만 내려갈까요?]
한참을 사념에 빠져 있던 율은 대뜸 물어오는 노아의 대답에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율 : 네?]
[노아 : 마을에 돌아갈 방법도 알아봐야 하잖아요]
[율 : 아...저기..]
[율 : 여기...다시 올 수 있을까요?]
[노아 : 히든 지역을 오픈시킨 거니 다시 올 수 있을 거예요]
[율 : 네]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부유 섬을 내려간 두 사람은 다시 마을 중앙으로 향했다.
그런데 좀 전과는 다르게 중앙의 화이트 트리 옆에 3단 눈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눈사람에게 다가간 두 사람에게 갑자기 대화 탭이 열리며 대화가 시작됐다.
[눈사람 : 꽤 늦었다. 눈?]
[노아, 율 : ??]
[눈사람 : 나, 꽤 오래 기다렸다. 눈?]
[노아, 율 : 우리를?]
[눈사람 : 나, 몸통 세 개다. 눈?]
[노아, 율 : ?]
[눈사람 : 중간에 없어지면 더 가까워진다. 눈?]
[노아, 율 : ???]
[눈사람 : 없애주면 더 가까워진다. 눈?]
그리고 대화 탭이 닫혔다. 어리둥절한 두 사람이 눈사람의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몸통을 클릭하자, 선택지가 떠올랐다.
[가운데 몸통을 제거해 주시겠습니까?]
[YES] [NO]
가만히 생각하던 두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YES]를 선택했다. 그러자 다시 대화 탭이 열렸다.
[눈사람 : 고맙다. 눈?]
[노아, 율 : 응.]
[눈사람 : 두 사람도 더 가까워지고 싶냐, 눈?]
[노아, 율 : ?]
[눈사람 : 가까워지게 해준다. 눈?]
그리고는 다시 대화 탭이 닫혔다.
동시에 [컴패니언 스킬 ‘에이히루어’를 습득하였습니다.]라는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노아 : ???]
[율 : 에이히루어?]
영문을 알 수 없는 알림에 두 사람이 스킬 창을 열어 스킬을 확인했다. 정말 에이히루어라는 스킬이 생겨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노아가 스킬을 사용하자 두 개의 선택지가 떠올랐다.
[노아]
[율]
자신들의 아이디가 선택지로 떠오르고, 의아한 마음에 자신의 아이디를 선택했다. 그러자 눈앞에 서 있던 율이 순간이동을 하듯 자신의 바로 옆 셀에 와 있었다.
[율 : ??????]
[노아 : ??]
어리둥절한 상황에 노아가 조금 움직여 율과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다시 스킬을 사용해, 이번엔 율을 선택했다. 그러자 이번엔 자신의 캐릭터가 순간이동을 해서, 율의 옆 셀에 와 있었다.
[노아 : ...]
[율 : 뭐예요 이게?]
[노아 : 컴패니언 소환스킬 같은데요?]
[노아 : 이건 꽤 유용할 것 같네요]
[율 : 그러게요]
스킬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문득 트리 옆 눈사람을 바라봤다. 하지만 눈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노아 : 대체 여길 어떻게 나가야 할까요...]
[노아 : 율님 워프 한번만 더 써 봐주실래요?]
[율 : 네]
노아의 부탁에 율이 다시 한번 워프포탈을 사용했지만, 여전히 시전이 되질 않았다.
[율 : 여전히 안 돼요...]
[노아 : 아...]
[노아 : 마을을 좀 더 돌아다녀 보죠]
[율 : 네]
워프와 귀환 스킬을 포기한 채, 마을을 좀 더 돌아다녀 보기로 한 두 사람은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봤지만, 마을에 엔피씨 자체가 없었다. 혹시나 마을에 하나밖에 없던 엔피씨가 단서를 주지 않을까 싶어 도구상점에도 가봤지만, 여전히 상품 목록만 뜰뿐이었다.
결국, 헤매고, 헤매던 두 사람은 다시 마을의 입구까지 오게 되었고, 입구의 아치형 문 옆에 서 있는 눈사람을 보게 되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나? 하는 마음에 의아한 두 사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눈사람 : 돌아갈 거냐, 눈?]
[YES] [NO]
[노아 : 얘가 보내주나 보네요]
[율 : 그런가 봐요]
[노아 : 가요 율님]
[율 : 네]
율의 대답에 노아는 미련 없이 다른 마을로 이동을 했다. 노아가 가버리고, 텅 비어버린 할리마을에 혼자 남아버린 율은 화면을 돌려 한 번 더 마을의 전경을 바라봤다. 잊지 못할 곳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는 올 수 없는, 오지 못할 곳이 될 것도 같았다. 전하지 못할 마음을 소복이 쌓인 눈 아래 고이 묻어두고 가게 될 테니까.
노아와 율이 오픈시킨 히든 마을 할리는 게임 내 엄청난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보통 유저들이라면 도달하기도 힘든 위치에 있는 마을이었지만, 오픈 기념으로 글록시니아에 눈사람을 배치해 할리마을로 가는 비프로스트를 일주일간 연결해 준 덕도 있었다.
그리고 할리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선 소량의 입장료를 내야 했는데, 그 입장료는 전액 노아와 율, 두 사람에게 배급되었다.
한가로운 오후의 포인세티아 주막에 모여앉아 있는 레인보우 힐 길드원 중 유난히 축 처져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질풍 : /한숨]
[광인한 남자 : 네가 딱 부러지게 거절을 못 하니까 그런 거잖아]
[KING Husband : 어쩌자고 그런 선택을 했냐]
[질풍 : 그럼 어떡해...]
[광인한 남자 : 애초에 사냥을 권했다고 그걸 따라가?]
[KING Husband : 나한테도 권하던데]
[질풍 : 뭐?]
[광인한 남자 : 사실 나도]
[질풍 : 뭣?!]
[KING Husband : 쿨 하게 거절했지만]
[광인한 남자 : 난 걍 씹음ㅋㅋ]
[KING Husband : 잌ㅋㅋㅋㅋ]
[질풍 : 형들한테도 미아누나가 사냥 권했었어?!]
[KING Husband : 응 근데 미쳤다고 그 누나랑 사냥을 가냐 무슨 꼴 당할지 눈에 뻔한데]
[광인한 남자 : 솔플하는 게 낫지]
[질풍 : 아...]
[KING Husband : 아니 권하는 입장이면서 뭐가 그리 잘났는지 되게 아랫사람 부리듯이 내가 너랑 사냥 가줄게~ 라는 뉘앙스인거야]
[KING Husband : 그래서 칼같이 자르니까 씩씩거리면서 가더라]
[광인한 남자 : 헐? 나한텐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KING Husband : 응?]
[광인한 남자 : 나한테는 그냥 사냥 안 갈래? 이 정도였는데?]
[KING Husband : 잉?]
[KING Husband : 풍이는???]
[질풍 : 어..나한테는....부탁조였는데;]
[광인한 남자 : 부탁조?!!]
[KING Husband : 뭐야? 학습해간거야 지금?]
얘기인즉슨, 아네미아가 질풍에게 사냥을 권했고, 그에 따라나선 질풍이 꽤나 지독한 사냥을 끝내고 돌아왔다는 것. 그 이후로도 아네미아는 몇 번인가 더 질풍에게 사냥을 권했고, 거절하지 못한 질풍은 맥없이 끌려다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네미아는 질풍뿐만 아니라 KING Husband와 광인한 남자에게도 사냥을 권했었고, 두 사람은 매몰차게 그녀를 내쳐버린 것.
결국, KING Husband와 광인한 남자에게 거절을 당한 아네미아는 학습을 한 건지 저자세로 질풍이에게 부탁을 하듯 사냥을 권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름 길드에서 오래 보아온 누나라서 질풍은 거절하지 못했고, 그녀에게 며칠간 끌려다녔다는 것 같았다.
[질풍 : 미아누나가 오늘도 같이 사냥가자고 했어...어떡해?]
[광인한 남자 : 어이구...]
[KING Husband : 그냥 거절해 뭘 고민하고 있어]
[질풍 : 지난번에 가기 싫다고 에둘러 말했더니 화냈단 말야ㅠㅠㅠ]
[광인한 남자 : 화내라 그랰ㅋㅋ]
[KING Husband : 뭘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주냐?ㅋㅋㅋ]
[질풍 : 무섭단 말야ㅠㅠㅠ]
[길드원 세츠나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세츠나 : 헬로우 에브리원]
왕광풍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길드원 접속 알림과 함께 세츠나가 접속해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쉼터에 보이는 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 세츠나에게 세 명의 시선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광인한 남자 : 오!!! 여기 좋은 비책이 왔다!!!]
[KING Husband : 완벽한 방어벽이다!!!]
[세츠나 : ??]
접속하자마자 대뜸 환호하며 희한한 소리만 늘어놓는 두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후, 세츠나는 말이 없었다. 그런 세츠나의 캐릭터를 바라보던 왕광풍은 왠지,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의 캐릭터가 인상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츠나 : 넌 참...홍시남이야]
그리고 짧은 침묵 끝에 세츠나의 채팅이 올라왔다.
[광인한 남자 : 홍시남?]
[KING Husband : 그게 뭐야?]
[질풍 : 홍시남? 홍시? 홍시는 달잖아ㅇㅅㅇ]
[질풍 : 나 달달해???]
[질풍 : 달달한 남자?! /질질]
세츠나가 한 말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서로 중구난방의 대화를 이어 가던 왕광풍 사이로 칼바람이 부는 듯한 세츠나의 채팅이 세 사람의 대화를 칼로 자르듯 올라왔다.
[세츠나 : 물러 터졌다고 자식아]
[질풍 : ;;;]
[광인한 남자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KING Husband : 좋은 말을 기대한 거 자체가 에바얔ㅋㅋㅋㅋㅋㅋ]
***
잠결에 들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에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정신이 수면 위로 떠 오르듯 급부상했다. 뿌옇기만 하던 정신이 또렷해지며 소음의 정체가 좀 더 뚜렷해졌다. 자기 전 베개 옆에 두었던 자신의 핸드폰.
율은 몽롱한 정신에 전화보단 먼저 시간을 확인했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난 후, 단잠을 깨워버린 소음을 내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노아님’
잠이 번쩍 깨는 기분이었다.
율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채 떠지지 않은 눈을 부릅떴다.
“여, 여보세요.”
「… 율님, 내가 깨웠나요?」
잠결에 잔뜩 잠긴 목소리를 들려줘 버린 탓인지, 상대방은 짧은 침묵 끝에 조금 미안한 듯 입을 열었다.
“아… 괜찮아요.”
「미안해요,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네?”
「지금 아니면 얘기할 시간이 없어서요.」
“네?”
「율님, 나 오늘은 게임 못 들어갈 것 같아요.」
“아….”
「정신이 없어서 통화를 길게 못 하겠네요. 그만 끊을게요.」
“…….”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네? 네….”
「나중에 봐요.」
“네….”
율의 대답을 끝으로 미련 없이 통화가 종료됐다. 율은 핸드폰 너머 사라져 버린 상대방에게 묻고 싶었던 한마디를 그제야 물을 수 있었다.
“왜요….”
[길드원 율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율 : 안녕하세요]
접속하자마자 쉼터에 보인 건 왕광풍과 세츠나였다. 율이 인사를 건네자, 네 사람이 반갑게 율을 맞아줬다.
[세츠나 : 하잉]
[질풍 : 율님 하요!]
[광인한 남자 : ㅎ2ㅎ2]
[KING Husband : 헬로~]
율과 인사를 나눈 네 사람은 다시 원래의 목적인 수다로 빠르게 태세전환을 했다.
[세츠나 : 그래서 나더러 뭘 어떻게 해 달라고?]
[KING Husband : 풍이한테서 미아누나 좀 쳐내줰ㅋㅋ]
[세츠나 : 아니 직접 거절하면 되잖아?]
[광인한 남자 : 미아누나가 무서워서 못하겠댘ㅋㅋㅋ]
[세츠나 : ?????]
[질풍 : 막 찌릿 거리고 짜증 거린단 말이야...]
[세츠나 : 캐릭터가 널 잡아먹니?]
[질풍 : 잡아먹을 것 같단 말이야ㅠㅠ]
[세츠나 : /짜증]
[세츠나 : 그나저나 걔는 왜 갑자기 너랑 사냥을 가려고 하는 건데?]
[질풍 : 어...]
[질풍 : 나도 잘...]
[광인한 남자 : 중2병들이 미아누나 성에 다 안차나보짘ㅋㅋㅋ]
[KING Husband : 그 누나 꼼수랑 오이도 달고 다니지 않았나?]
[세츠나 : 뭔 꿍꿍이래...]
[길드원 아네미아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질풍 : 히익!!]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녀에 관해 얘기를 나누던 중 타이밍 좋게 떠오르는 아네미아의 접속 알림에 질풍이 기겁했다.
[아네미아 : 안녕들]
아네미아는 쉼터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들을 훑어보듯 잠시 말이 없더니 성의 없는 인사를 툭 던졌다.
[율 : 안녕하세요]
[세츠나 : ㅇㅇ]
[광인한 남자 : ㅎ2]
[KING Husband : ㅎㅇ]
[질풍 : 안녕...]
성의 없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아네미아는 상호 간에 오고 간 성의 없는 인사에 조금 기분이 상했는지, 머리 위로 /짜증 이모티콘을 띄우고는 질풍의 옆에 앉았다. 질풍의 머리 위에는 /뻘뻘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아네미아 : 풍아~ 사냥가자~]
[질풍 : 으응???]
[아네미아 : 오늘은 어디로 갈까?]
[질풍 : 저기;; 누나...]
[아네미아 : ??]
[질풍 : 미안한데...저기..]
[아네미아 : 뭐?]
[세츠나 : 풍이는 오늘 부캐 키울 거야]
[질풍 : ?????]
[아네미아 : 뭐??]
[세츠나 : 내가 너 부캐로 프리하나 만들자고 했잖아]
[질풍 : 으응...?]
[질풍 : 응! 그렇지! 나 세츠누나랑 부캐 키워야 돼!!]
[아네미아 : 어제는 그런 말 없었잖아 ㅡㅡ?]
[세츠나 : 오늘 결정한 거니까]
[아네미아 : 약속은 내가 먼저니까 나랑 먼저 사냥하고 나서 해]
[세츠나 : 풍이 넌 가서 캐릭터 만들어와]
[질풍 : 응!!]
[길드원 질풍님이 로그아웃하였습니다.]
[아네미아 : 뭐하자는 거야 ㅡㅡ]
[세츠나 : 뭐가?]
[아네미아 : 분명히 내가 먼저 선약을 했다고 했잖아]
[세츠나 : 선택한 건 풍이잖아 풍이가 부캐를 키우겠다는데 왜 나한테 난리람?]
[아네미아 : ...]
[아네미아 : 너 어장하니?]
[세츠나 : ?????????????]
[세츠나 : 미친?ㅋㅋㅋㅋㅋㅋ]
[광인한 남자 : 뭐얔ㅋㅋ 뜬금포 오진다?]
[KING Husband : 미쳐땈ㅋㅋㅋㅋㅋㅋㅋ]
[아네미아 : 나랑 먼저 선약을 한 건데 네가 중간에 갑자기 가로채려고 하잖아]
[아네미아 : 풍이가 나랑 사냥하는 게 싫어? 너... 풍이 좋아해?!]
[세츠나 : 와...존나 어그로가 신선하네? 산지직송인줄]
[아네미아 : ...]
[KING Husband : ㅋㅋㅋㅋ산지직송ㅋㅋㅋㅋ이 누나 또 미쳤넼ㅋㅋㅋ]
[세츠나 : 얼척없는 오해도 받고 나 풍이한테 사례비 좀 받아야 할 듯?]
[광인한 남자 : 잌ㅋㅋㅋ 풍이 그냥 미아누나랑 사냥 가는 게 나았을 뻔ㅋㅋㅋㅋ]
아네미아의 어이없는 망발에 모두의 멘탈이 황당함을 넘어 초연해지기 시작했는지,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런 쉼터에 웬 노비스 한 명이 해맑게 뛰어 들어왔다. 노비스는 직업을 갖기 전, 무직 상태의 캐릭터를 뜻한다.
[홍시남 : 세츠누나~ 나왔어~]
질풍의 부 캐릭터인 듯한 노비스의 황당한 아이디에 일순 모두의 행동이 멈췄다.
[세츠나 : 저 미친...]
[홍시남 : ??]
[세츠나 : 아이디 존나 맘에 들어!]
[홍시남 : ㅇㅅㅇ!]
[광인한 남자 : 뭐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KING Husband : 이 누나 미쳤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질풍의 아이디 하나에 초토화가 된 쉼터에는 아네미아에게 관심 두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아네미아는 저들끼리 신난 왕광풍과 세츠나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쉼터를 벗어나 어디론가 가버렸을 뿐이었다.
임기응변으로 만들어낸 노비스지만, 질풍이 정말로 프리스트를 키우겠다며 나서는 통에 세츠나들이 질풍을 돕겠다고 쉼터를 떠나고, 홀로 쉼터에 남아 있던 율은 조용히 게임을 로그아웃했다.
게임을 끈 율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하며 무료하게 보낸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고 있는 와중에 딩동, 하고 현관 벨이 울렸다. 그 소리에 움찔거리며 엉거주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율은 연이어 울리는 핸드폰에 화들짝 놀라며 후다닥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노아님’
액정에 떠오른 이름에 반가워하며 통화 버튼을 누르자, 이제는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님, 나와요.」
노아의 말에 어리둥절한 율이 후다닥 달려 현관문을 열자, 현관문 너머에 서 있던 노아가 열리는 현관문 안쪽의 율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밥 먹으러 갈까요?”
현관문 밖에서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시언의 모습에 놀란 건지 멍한 얼굴로 서 있기만 하던 율의 손을 시언이 잡아끌었다.
“가요.”
“네?”
손을 잡아끄는 시언의 행동에 얼떨결에 집 밖으로 나선 율은 의아한 얼굴로 집 마당을 바라봤다. 시언이 왔으면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어야 할 텐데 텅 빈 마당 어디에도 시언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골목에 세운 건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봐도 시언의 차처럼 보이는 차는 없었다.
“저, 노아님….”
시언의 손에 이끌려 걸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율이 조심스럽게 시언을 부르자 시언이 고개를 돌려 율을 보며 답했다.
“네?”
“오늘은… 차… 안 가져오셨나 봐요?”
“아.”
율의 물음에 시언은 짧은 감탄사와 함께 걸음을 멈췄다. 그런 시언을 따라 율도 걸음을 멈추게 됐다. 시언은 율을 보고 웃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
시언의 행동에 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언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
자신의 옆집 마당 안에 시언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어… 왜 저기…?”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율이 의아한 얼굴로 시언을 돌아보며 더듬더듬 묻자, 시언은 다시 한번 웃으며 율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율이 시언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옆집이었다.
노아의 손에 이끌려 음식이 차려져 있는 식탁 앞에 앉은 율은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옆집 마당에 주차되어 있는 시언의 차를 보고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시언에게 이끌려 옆집까지 들어와 식탁 앞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노, 노아님.”
“?”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부르는 율의 목소리에 인덕션에 올려뒀던 음식을 가지고 오던 시언이 율을 바라보며 표정으로 물었다.
“저…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면….”
말은 하면서도 불안한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율의 행동에 시언이 식탁에 음식을 내려놓으며, 율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 집이에요.”
“…?”
“?”
“네?”
“내 집이니까, 편하게 있어요.”
“네?”
시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황당한 표정으로 연신 되묻는 율의 행동에 시언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중저음 목소리의 울림이 듣기 좋게 실내에 울렸다.
“오늘 이사 왔어요.”
“?”
“나, 지금 집들이하는 거예요.”
자신의 말에 입을 떡 벌리고 바라봐 오는 율의 얼굴을 보던 시언이 다시 한번 웃었다. 그리고 율에게 식사를 권하며, 조금 이른 둘만의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시언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율의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확실히 깡마른 몸에 비교해 먹성은 좋았다. 그것도 좋아하는 몇 가지만 골라 먹는 게 아니고, 전체적으로 고르게 먹고 있었다.
몸이 많이 말라서 볼품없어 보일 뿐, 전체적으로 떨어지는 외모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관적인 생각일지 몰라도, 자신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몇 달 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아 피부는 하얗다 못해 조금 창백하지만, 키와 비교하면 길쭉길쭉한 팔다리, 눈 밑에 그늘이 좀 지긴 했어도 커다란 눈, 멍하니 있을 땐 살짝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빠끔히 보이는 앞니. 몇 번 보여주지 않았지만, 활짝 웃을 때 움푹 들어가던 볼우물. 그리고 모양 좋게 자리한 동그란 두상.
아마도 살집이 조금만 더 붙으면 생기 없고, 무말랭이 같은 피골이 상접한 인상은 금세 사라질 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율의 모습을 바꾸고 싶은 욕심은 율을 위해서라기보단 자신이 관여하지 못했던 곳에서 타인에 의해 변해 버렸을 모습을 씻어내고 싶을 뿐일지도 모른다.
식사가 끝난 후, 제가 먹은 식기들을 한데 모아 자리에서 일어나는 율의 모습을 시언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런 시언의 시선을 느꼈는지 율은 쭈뼛쭈뼛 말을 이었다.
“제가 치울게요.”
“?”
하지만 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표정으로 되묻는 시언의 얼굴에 율이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얻어먹었잖아요… 치우는 건 제가….”
“그냥 둬도 돼요.”
“그래도….”
“내일 사람이 와서 치울 거니까 그냥 둬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시언이 율이 손에 들고 있는 그릇들을 들어서 식탁에 내려놓은 후, 멍하게 서 있는 율을 거실로 데리고 나갔다.
시언에 의해 거의 끌려 나오듯 주방에서 나와 소파에 앉게 된 율은 자신을 두고 다시 주방에 들어가는 시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어색함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시언이 자신의 집에 오거나, 자신을 데리고 나가서 밥을 먹고 들어온 적은 몇 번 있어도, 자신이 시언의 집에 와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거기다 할리마을에서 마음을 자각해 버린 이후로 시언과 현실에서 다시 만난 건 처음이라, 뭘 어째야 할지도 몰랐다.
할리마을의 소복이 쌓인 눈 아래 묻어두고 왔다고 애써 생각했던 마음이 뜨거운 여름 햇살에 녹아 드러날 것만 같았다.
“율님.”
그런 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는 율에게 다가온 시언이 율의 앞에 음료수 캔을 놓으며 율의 옆에 앉았다.
“부모님이 아침 몇 시에 출근하세요?”
“네?”
“?”
“아… 두 분 다 8시면 출근하세요.”
“그럼 아침 8시부터 밤 7시까지 혼자 있는 거네요?”
“네.”
“흐음….”
율의 답을 들은 시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시 율을 바라볼 뿐이었다.
***
쉼터에 들어서던 무지개 요정은 한쪽 평상에 혼자 앉아 있는 질풍의 모습을 보며, 그의 옆에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
[무지개 요정 : 노아 오늘 안 오나?]
[질풍 : 네 노아 형 오늘 못 들어온다고 했어요]
[무지개 요정 : 이런...]
[질풍 : 왜요?]
[무지개 요정 : 정모건 때문에 상의 좀 하려고 했더니...]
[질풍 : 오?! 오!!!]
[무지개 요정 : 내일 얘기해야겠네]
[질풍 : 정모!!!!!]
[질풍 : 정!!!모!!!!!!]
[무지개 요정 : 닥치렴]
***
창문에 쳐놓은 커튼 덕분에 아침인지, 밤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어두운 방 안에서 한 꼬물꼬물 몸을 일으킨 율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베개 밑에 넣어둔 핸드폰을 찾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고, 상태 바를 내리자, 익숙한 인물이 보낸 톡이 보였다.
그 외에도 부재중 전화나, 톡, 문자 등이 와 있었지만, 율은 확인하지 않았다. 오직 한 명에게서 온 톡만을 확인했다.
- 율님, 9시에 데리러 갈게요.-
“…?”
잠결에 잘못 본 줄만 알았다. 그리고 분명히 한글로 쓰여 있는데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연이어 확인한 시간을 보고는 이해할 틈도 없이 다급하게 일어나 욕실로 달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8시 50분이었다.
급하게 머리를 감고, 세수와 양치를 한 후, 다시 방으로 달려 들어온 율이 머리를 말리려는 순간, 딩동, 하고 현관 벨이 울렸다. 다급한 마음에 시간을 확인해 보니 9시 정각이었다. 율은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옷을 꿰어 입고 후다닥 현관으로 향했다.
철컥거리는 잠금쇠 풀리는 소리가 분주하게 울리더니, 찰칵, 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다급하게 열리는 현관문 안쪽에서 잔뜩 젖은 머리를 한 율이 불쑥 튀어나왔다.
“…….”
그 모습에 율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시언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노아님.”
자신을 올려다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율에게 굳었던 표정을 풀며 웃어 준 시언은 나오려는 율의 어깨를 쥐고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도로 들여보냈다. 얼결에 시언에게 밀려 집안으로 다시 들어온 율은 저의 뒤를 따라 들어오며 현관문을 닫는 시언을 돌아봤다. 시언은 율과 시선을 맞춰 오며 젖은 머리를 매만졌다.
“여름 감기도 무시할 게 못 돼요.”
“네?”
“머리는 말리고 나오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율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얼굴을 타고 내려와 율의 볼을 감싸 쥐고 쓸며 떨어져 나갔다. 시언의 손길이 떨어지고, 율은 후다닥 몸을 돌려 제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쾅, 하고 조금 큰소리를 내며 닫히는 방문과 함께 방안에 달려 들어온 율이 방문에 기대어 주르륵 주저앉아버렸다. 시언은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일지 몰라도, 잔뜩 의식한 율의 얼굴은 터질 듯이 새빨갛게 익어 익었다.
쾅, 하고 닫혀버리는 율의 방문을 바라보던 시언이 비틀거리며 현관문에 등을 기댔다. 조금 전, 제어할 틈도 없이 튀어 나간 자신의 손에 저도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대책 없이 손 가는 대로 행동이 튀어 나갈 줄은 몰랐다.
이건 자제력이 없었다기보단, 무의식에 가까웠다. 정말 자신의 몸이 뇌를 거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 꼴. 시언은 현관에 등을 기댄 채, 자책하듯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전히 손안에 남아 있는 율의 감촉이 잊히질 않았다. 제어할 수 없는 열기가 머리를 통하지 않고 온몸으로 발산되는 기분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율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시언을 연신 흘끔거렸다. 하지만 시언은 율을 차에 태우고 운전을 시작하면서부터 단 한 번도 율을 바라봐 주지 않았다. 그저 잔뜩 굳은 표정으로 화가 난 듯 차를 몰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아침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밥을 먹고, 시언이 다시 율을 집에 데려다줄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엔 이렇다 할 대화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언은 율과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쳐 주지 않았다.
시언의 집에 주차된 차에서 내려 율의 집 앞까지 배웅한 시언은 율이 집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몸을 돌려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뒤통수에 따끔하게 박히는 율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시언은 우선 율에게서 벗어나는 게 급했다. 그래서 제 뒤에 선 율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지도 못한 채, 급하게 자리를 벗어나고 말았다.
율을 데려다주고, 자신의 집에 돌아온 시언은 그대로 소파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사실, 오늘은 율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그의 부모님이 퇴근하실 때까지 데리고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 한 방에 모든 계획이 무너져 버렸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한심한 남자였나 싶었다.
소파에 누워 이마에 얹어놓은 자신의 팔 덕분에 천장의 절반이 가려져 보였다. 답답한 자신의 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통 자신이 연애했던 기억을 되짚어보면 누군가가 먼저 고백을 해왔던 일이 대다수였다. 그럼 자신은 외모, 재력, 등을 따지고 골라 마음에 드는 상대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먼저 선택하고, 다가가야 한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남자라는 것도. 자신은 남자를 사귀어 본 적은 없지만, 동성애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율이 미성년자라는 것엔 조금 마음이 쓰이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그도 성인이 될 테니까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그가 남자라는 사실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가 남자라는 사실이 자신의 도덕성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백날 율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가 받아주지 않으면 동성연애고, 미성년자고,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안 그래도 겁 많고, 주눅 들어 있는 그를 어떻게 구슬려야 손에 들어올지가 더 큰 문제였다. 섣불리 다가갔다가는 그대로 도망을 칠 게 뻔했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유영하던 시언은 딩동, 하고 울리는 현관 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
누구지? 하는 마음에 상체를 일으켜 현관문을 바라보던 시언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서서히 열리는 현관문 건너편엔 고개를 잔뜩 숙이고 서 있는 율이 있었다.
“…율님?”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소리를 내 그의 이름을 부르자, 저의 부름에 율의 양어깨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드는 율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율님?”
그런 율의 얼굴에 당황한 시언이 한 번 더 율을 부르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시언의 손은 율에게 닿기 직전 가까스로 멈췄다. 무의식중에 또 그를 만질 뻔했다는 생각에 속으로 자책하며 손을 거뒀다. 저에게 닿지 않는 시언의 손끝을 바라보던 율은 잔뜩 흐려진 얼굴로 두 눈을 꽉 감았다. 동시에 참지 못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율님?”
갑작스러운 율의 행동에 놀란 시언이 거두었던 손을 다시 뻗었다. 하지만 율은 그대로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고,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율을 잡지 못한 시언의 손이 허공에 맴돌았다. 시언은 눈살을 찌푸리며 율이 물러난 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율의 어깨를 쥐었다.
“왜 그래요?”
율의 어깨를 쥔 시언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걱정이 담긴 그 목소리 뒤엔 상냥함과 다정함이 잔뜩 묻어나서 율은 눈물 때문에 흐려진 눈으로 시언을 올려다봤다.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울음을 억누른 목소리는 숨을 삼키며 힘겹게 이어졌다. 저를 올려다보던 얼굴도 어느새 한껏 숙인 채였다. 다짜고짜 묻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율의 양 볼을 감싸 쥐며 들어 올렸다. 훤히 드러난 얼굴은 두려움과 서러움으로 점철되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무슨 소리예요? 율님이 잘못할 게 뭐가 있어요.”
“화나신 거… 아니에요?”
“네? 화 안 났어요. 율님 잘못한 것도 없고요.”
“그런데 아까는 왜….”
“아….”
율의 말에 시언은 말을 잃었다. 자신의 감정만 생각하느라 율을 배려해 주지 못했다. 오롯이 율에 대한, 율에게 향하는 감정에 대한 것이었는데, 자신만을 생각하느라 그 주체가 되는 율을 배제해버린 셈이었다. 당황해 버린 자신을 감추느라 차갑고 무뚝뚝하게 대한 자신의 행동을 율에게 지적받은 기분이었다.
“아니에요, 율님 잘못한 거 없어요. 정말이에요.”
시언은 서둘러 부정하며 온을 끌어안고 달래듯 등을 두드려주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나빴네요.”
“…….”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런 거였어요. 율님한테 화낸 거 아니에요.”
“…….”
“미안해요, 내가 애같이 굴었네요.”
시언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율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제 품에 안긴 율에게서 미세한 잔 떨림이 잦아드는 걸 느끼던 시언은 자신의 옆구리 쪽이 조금 죄어드는 걸 느꼈다.
슬쩍 내려다보니 율이 자신의 옷깃을 쥐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자, 율이 움찔거리며 더듬더듬 손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시언은 그런 율의 손을 다시 제 옆구리에 붙여주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해요.”
햇살에 가려진 골목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시언과 율,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인영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엔 악의가 가득해서, 당장이라도 두 사람에게 해코지할 것만 같았다.
죽일 듯이 노려보던 시선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이윽고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등밖에 보이지 않는 상대방을 노려보던 눈빛엔 악의 말고도 다른 감정이 조금씩 섞여 있었다.
***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율은 커튼 사이로 점점 밝아오는 새벽녘을 바라보며, 퉁퉁 부어버린 눈을 비비고, 뒤척였다. 수마는 쏟아지는데, 차마 잠들 수가 없어서 선잠이 들고, 깨고를 반복하며 날을 지새웠다. 자꾸만 떠오르는 전날 아침의 일이 얼굴에 열을 몰고 올라와서 잠들 수 없게 만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노아가 저에게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자신을 바라봐 주던 상냥한 눈빛은 저를 향하지 않았고, 다정하게 대해주던 언동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으니까. 뭔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 탓에 노아가 화가 난 것이라고.
자신을 두고 미련 없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서러운 마음이 복받쳐 올라,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노아를 잃고 싶지 않아서 무작정 그의 집에 찾아갔다.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하기 위해서.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기까지 자신을 부추겨 줄 용기가 정말 수백 번은 필요했다. 그리고 초인종을 누른 후엔 그에게 완벽한 거절을 당하기 전에 돌아가는 게, 도망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십 번은 떠올랐다.
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동안 현관문이 열렸고, 자신은 눈앞에 직면한 두려움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고개를 떨어뜨려 버렸다. 하지만 노아는 갑자기 찾아온 자신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울음을 터트린 자신에게 오히려 사과하고, 자신의 탓이라며 자책하고, 자신을 달래주었다.
이유도 모르고 미움받던 때는 모든 일을 자신의 탓이라고 왜곡하고, 덮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율의 마음 한편에 노아가 던져 넣은 돌멩이 하나가 작은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워 있기를 잠시, 방 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아침을 여는 부산스러운 분위기가 율의 방 안까지 전해져 들어왔다. 아마도 부모님이 출근 준비를 하시는 것 같았다. 왠지 그 소음에 귀 기울이게 되어 한참을 기척을 쫓았다.
곧 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 밖을 나가 주방으로 향했다. 아침 식사를 위해 밥을 푸던 모친은 방 밖으로 나오는 율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엄마, 나도 밥… 같이 먹을래.”
그리고 우물쭈물 이어진 율의 말에 모친은 정말 기쁜 듯 웃으며, 율에게 머슴밥을 선사했다. 그리고 모친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율의 모습을 욕실에서 나오던 부친이 보고는 부산을 떨며 달려왔다. 식탁에 둘러앉은 세 식구는 연신 맛있는 반찬들을 율의 앞으로 밀어 넣으며 단란한 아침을 시작했다.
“많이 먹어, 아들.”
“맛있게 먹어, 아들.”
그리고 다정하게 건네 오는 말들에 율도 웃으며 답했다.
“잘 먹겠습니다.”
아침을 먹은 후, 부모님을 배웅하고, 씻고, 방으로 돌아온 율은 조금 이른 시간을 확인하며 컴퓨터를 켰다. 게임을 켜놓고 잠수를 탈까, 하다가 간만에 글록시니아에 가판대 구경을 할까 싶어서 게임에 접속했다.
[길드원 율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쉼터엔 아무도 없었다. 길드 창을 열어보니 접속한 인원도 자신 혼자뿐이었다. 율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캐릭터를 움직여 글록시니아로 향했다.
글록시니아 중앙거리를 걸으며 이런저런 가판대를 구경하던 율의 눈에 익숙하지 않은 코스튬 하나가 보였다. 아마도 이번 주신의 상자 이벤트에서 나오는 아이템인 것 같았다. 미리 보기로 입어 보기도 하고, 상세보기로 아이템 정보를 열람해 보던 율은 나중에서야 눈에 들어온 가격을 보곤 기함을 하며 가판대를 나왔다.
그리고 다시 중앙거리를 오르내리며, 가판대를 구경하던 율은 저도 모르게 시간을 계속 확인했다. 9시쯤이 넘어가자, 광인한 남자와 복세편살이 접속해 들어왔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중앙거리를 다니던 율은 문득, 젬스톤이 얼마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 팸플릿으로 젬스톤을 검색해 제일 싸게 올라온 걸 몇백 개쯤 사서 창고에 넣었다.
그리고 왠지 든든해진 기분으로 쇼핑을 마치고, 포인세티아 주막으로 향했다. 텅 비어 있는 주막에 돌아와 평상에 앉아 노아가 올 때까지 잠수를 타려던 율은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알림 소리에 후다닥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베개 옆에 두어뒀던 핸드폰을 집어 들자, 익숙한 상대방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율님, 나 오늘 좀 늦게 들어갈 것 같아요.-
“…….”
노아가 보내온 메시지를 빤히 바라보던 율은 커튼이 쳐져 있어 밖이 보이지 않는 자신의 방 창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왜요…?”
그리고 하고 싶던 말을 연신 중얼거리다, 천천히 답장을 보냈다.
-왜요?-
혹시나 주제넘은 질문을 한 건 아닐까, 어제 일도 있었는데 귀찮아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하던 율은 손안에서 짧게 울리는 알림 소리에 후다닥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식재료가 떨어져서 사러 가려고요.-
“아….”
너무나 간단명료하게 이유를 알려주는 노아의 답신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연이어 메시지가 도착했다.
-같이 갈래요?-
시언의 권유에 쭈뼛쭈뼛 현관문 밖을 나서자 자신의 집 앞 계단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노아가 보였다. 그리고 그의 앞엔 골목을 온통 차지하고 서 있는 흰색 차량이 있었다.
“노아님.”
자신을 부르는 율의 목소리에 시언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웃어 주었다. 그 모습에 율의 마음속에 일던 파도가 조금 더 강하게 일었다.
“갈까요?”
다정하게 묻는 물음 하나에 가슴이 벅차올라서, 율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시언을 바라볼 뿐. 그런 율의 모습에 시언이 웃으며 계단을 올라와 율의 손을 이끌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나요?”
마트에 도착해 카트를 밀며 매대를 돌던 시언은 제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율에게 넌지시 물었다. 시언의 물음에 머리만 바삐 움직여 주변을 기웃거리던 율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양 말고 말해요.”
자신의 물음에도 연신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동자를 하고서 아니라며 딱 잘라 부인하는 율의 모습에 시언은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괜찮아요!”
결국, 끝까지 사양하는 율을 대신해 시언은 쉴 새 없이 고기를 카트에 담았다. 카트 안에 수북이 쌓여 가는 고기의 산을 보며 입을 헤 벌리고 있던 율은 문득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요리는… 직접 하시는 거예요?”
“네? 아, 아뇨.”
“?”
“재료만 대충 사다 놓으면, 홈매니저가 알아서 해주세요.”
“홈매니저요?”
“일하시는 분이에요.”
“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매니저한테 말해 놓을까요?”
“네? 아니에요, 민폐잖아요….”
여전히 묘한 곳에서 고집을 부리는 모습에 결국, 시언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집 앞에 도착해 능숙한 핸들링으로 주차를 마친 시언은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그의 행동을 따라 율도 후다닥 차에서 내려 시언을 바라봤다. 시언은 트렁크를 열어 짐들을 꺼내 들고 있었다.
“저… 노아님.”
그리고 우물쭈물 자신을 부르는 율의 목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
“저는… 이만 가볼게요.”
자신의 집을 가리키며, 나지막하게 뱉는 율의 말에 시언이 말없이 율을 빤히 바라봤다. 어딘지 부담스러운 시선에 율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 서둘러 몸을 돌렸다.
“율님.”
하지만 저를 부르는 시언의 목소리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율은 급하게 몸을 돌린 덕에 몸에 급제동이 걸린 것처럼 덜컥거리다가 삐걱삐걱 뒤돌아 되물었다.
“…네?”
“음….”
“…?”
“괜찮으면… 들렀다가 점심 먹고 가요.”
“아….”
자신의 말에 어정쩡한 자세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율을 두고, 시언은 성큼성큼 걸어 집 문을 열었다. 그리고 뒤돌아 다시 한번 율을 불렀다.
“들어와요.”
그리고는 율의 답을 듣지도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미 거절의 말을 건넬 타이밍을 잃은 율은 주춤주춤 시언을 따라 집 안으로 향했다.
율을 두고, 집 안으로 들어선 시언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인기척을 확인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한 아름 안고 있는 짐들을 식탁에 내려놓은 뒤, 정리하기 위해 물건들을 꺼내는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언은 의아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미 집안에 들어가 버린 시언의 뒤를 따라 후다닥 집안으로 들어선 율은 보이지 않는 시언의 모습을 찾아 주방으로 들어섰다. 주방에는 등을 돌리고 선 시언이 식탁 위에 짐들을 내려놓고,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사 온 식재료들을 정리하려는 모양이었다. 율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다가가며 시언을 불렀다.
“노아님.”
그리고 그를 부르는 순간.
“꺼져.”
귀찮은 듯 단번에 뱉어내는 감정을 담지 않은 말이 들려왔다. 서둘러 시언에게 다가가던 율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둘만이 있는 공간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시언이 한 말은 자신에게 한 말일 터였다.
율은 그 자리에서 더는 시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저 주춤주춤 발끝을 움찔거리다,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주방을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 했다. 율이 뒤를 도는 순간, 잡아 오는 손길이 없었다면.
순식간에 손목을 채어 잡힌 율은 휘청거리며 뒤를 돌았다. 등을 보인 채, 식탁 앞에 서 있던 시언이 어느샌가 비스듬히 몸을 돌려 율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놀란 율이 시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시언이 쥐고 있는 제 손목으로 시선을 내리자, 억세게 쥐고 있던 힘이 조금 풀렸다.
조금 느슨해진 감각을 느끼며 율이 다시 시선을 올려 시언의 얼굴을 바라보자, 시언은 다른 손으로 쥐고, 통화 중이던 제 핸드폰을 귓가에서 떨어뜨려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웃었다.
“아….”
그 모습에 율의 입에선 안심을 담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힘이 빠져 억울함을 담은 눈빛으로 시언을 바라봐 주자, 시언이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율을 끌어와 의자에 앉혔다. 다정한 얼굴로 다정하게 웃어 주는 와중에도 입에서는 연신 “어쩌라고.” “너랑 상관없어.” “꺼지라고.” 등등 격한 언사가 튀어나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시언에게 끌려와 의자에 앉게 된 율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시언의 모습을 흘끗흘끗 바라봤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꾸만 시선이 맞닿아서 연신 당황하던 율은 끝내 귀까지 붉게 익은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런 율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시언은 육성으로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꾹꾹 눌러 참았다. 율이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시선이 마주쳤던 것은 자신이 율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던 탓이었는데, 율은 오히려 저가 더 당황하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렇게 있기를 수 분. 머리 위에서 드문드문 울리던 시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의아한 마음에 율이 쭈뼛쭈뼛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번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손가락을 연신 놀리는 시언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엔 메시지를 보내는 건가, 싶은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는데, 핸드폰 액정에서 시선을 뗀 시언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하지만 율이 놀랄 겨를도 없이, 다가온 시언의 커다란 손이 율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물었다.
“점심까진 시간이 좀 남았는데, 게임이라도 할래요?”
함께 게임을 하자는 시언의 권유에 시언을 따라 2층으로 올라온 율은 2층의 구조를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내부만 수리했어요. 외관도 손보면 좋긴 했을 텐데….”
그런 율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말을 잇던 시언은 자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눈으로 내부를 구경하기 바쁜 율의 모습에 헛숨을 터트렸다.
시언의 집은 총 2층이었는데, 1층은 평범하게 주방과 거실이 있고, 2층은 복층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2층엔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는 오픈형 침실이었고, 2층에서 이어진 복층엔 컴퓨터와 노트북 등 전자기기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복층엔 슬라이딩 창을 전면으로 배치해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옥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
여기저기를 구경하느라 넋이 빠진 율을 겨우 컴퓨터 앞에 앉힌 시언은 율과 나란히 게임에 접속했다.
[길드원 노아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컴패니언 율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원 율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사냥하기엔 중간에 흐름이 끊길 것 같고… 보탐이나 몇 번 돌까요?”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파티 구하는 것도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까, 길드원들한테 충원 요청해볼게요.”
“네.”
[노아 : 저희 보탐 가는데 같이 가실 분?]
[니지 : 나]
[질풍 : 나!!]
[아네미아 : 나랑 편살오빠도 껴줘요]
[복세편살 : ;;]
“저, 이….”
그리고 충원 요청에 끼어 들어온 아네미아의 지원에 시언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말을 삼키고, 시선을 옮겨 율을 바라봤다.
“율님, 저 두 사람 어쩔까요?”
“네? 아….”
“?”
“그냥… 같이 가요.”
“그래요.”
여섯 명이 파티를 맺어 온 던전은 거울 던전이었다. 거울 던전은 던전 내 모든 몬스터와 보스들이 던전에 진입한 플레이어의 모습을 본뜨게 된다. 게다가 몬스터들의 기본 AI가 높고, 보스 몬스터의 패턴이 복잡해서 꽤 까다로운 클리어 조건을 가진 던전이기도 했다.
이 던전은 진입하는 순간 캐릭터의 모습이 스캔되어 몬스터들이 생성되기 때문에 진입 이후에는 처음과는 다른 의상 아이템을 장착하는 게 기본 룰이었다.
[노아 : 의상 바꾸죠]
시언의 말에 다들 일사불란하게 의상 아이템을 바꿔 끼기 시작했다.
[질풍 : 잌ㅋㅋㅋㅋㅋㅋㅋ니지누나 그게 뭐얔ㅋㅋ]
갑자기 박장대소하는 질풍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니지에게 향했다. 니지의 머리 위엔 횃대가 하나 고정되어 있고, 그 위엔 노란 새 한 마리가 꾸벅꾸벅 졸며 앉아 있었다.
[니지 : 훗 이거 무려 아차템이다!!]
[질풍 : 헐?ㅋㅋㅋㅋㅋㅋ 별ㅋㅋㅋㅋㅋㅋ]
[니지 : 부러워해도 소용없어~]
[질풍 : 진짜 1도 안 부럽닼ㅋㅋㅋㅋㅋㅋㅋ]
[니지 : /흥]
[노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차템이 안 부럽긴 처음]
[율 : 귀여운데요 ㅋㅋㅋ]
[니지 : 크~ 역시 율님!]
[아네미아 : 너 같은 것만 끼고 다니니]
[복세편살 : 특이하긴 하네]
[니지 : /흥]
니지는 이 이후, 질풍과 노아, 아네미아를 닮은 몬스터들만 죽어라 패고 다녔다. 아네미아의 발컨은 여전했지만, 율의 전체 스킬이 그걸 전부 커버했기에 시언의 파티는 별 어려움 없이 보스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언은 보스 방의 공략보다는 아까부터 옆에 앉아서 연신 하품을 해대는 율의 행동이 더 신경 쓰였다.
“율님, 졸린가요?”
“네?”
그리고 또 한 번 하품하며 졸린 듯 눈을 비비는 율의 행동에 시언이 불쑥 물었다. 그에 놀란 율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며 되물었다.
“…….”
그 모습에 시언은 얼른 사냥을 끝내고, 율을 좀 재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보스 방에 들어서자, 자욱이 깔린 안개 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일렁일렁하며 걸어 다니고 있었다. 과연 누구의 모습을 본떴을지 모두의 이목이 쏠리는 가운데,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보스 방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보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명백히 아네미아였다.
보스의 모습을 확인한 그들 사이엔 잠시간의 침묵이 일었다. 하지만 시언의 스킬을 시작으로 너도나도 스킬을 시전하며,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노아의 주변으로 부채꼴처럼 펼쳐진 무수한 검들이 종횡무진 보스인 도플갱어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 검들과 함께 궁기가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고, 질풍의 에로우 레인이 도플갱어 위로 빗발쳐 쏟아져 내렸다. 니지는 페너트레이트를 시작으로 스파이럴, 이그니션 인텐스로 이어지는 연계기를 끊임없이 넣고 있었다.
복세편살도 나름 이런저런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지만, 아네미아는 캐릭터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닿지도 않는 보스의 공격을 피하는 시늉만 해대고 있을 뿐이었다.
(콘템플라티오)
그러는 와중에 율이 스킬을 시전했고, 이어서 노아가 루아흐를, 그리고 율이 프뉴마를 썼다. 이제 게이지가 다 차기만을 기다렸다가 스페라무스를 쓰기만 하면 되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율의 스페라무스는 발동되지 않았다. 놀란 시언이 옆을 바라보자, 율이 눈을 반쯤 감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보였다. 화면 안의 율의 캐릭터 위에 떠 있는 게이지는 이미 다 차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율님!”
놀란 시언이 급히 율을 깨웠고, 그에 놀란 율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스페라무스의 발동을 기다리고 있던 게이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
“?”
아마도 게이지가 다 차고 나서 발동되기까지의 시간제한이 있었던 듯했다. 화면을 바라보며 얼빠진 소리를 내는 시언과, 사태를 파악하지 못해 어벙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시야에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스페라무스 스킬의 캔슬로 얼이 빠진 두 사람이 잠시 손을 놓고 있는 사이, 금세 수세에 몰려버린 파티원들이 궁극기를 맞아 그로기에 빠졌다. 직면한 사태에 모두가 침묵하던 그 순간, 니지의 머리 위에 있던 노란 새의 눈이 마름모꼴로 붉게 변했다. 그리고 헬륨가스를 마신 듯한 목소리로 “롹앤롤!!!”을 외쳤다.
그리고는 리듬을 타며 횃대가 부러질 듯 몸을 앞뒤로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로기에 빠져 있던 니지의 캐릭터가 좀비처럼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다 일으킨 니지가 제 자리에서 끈 떨어진 인형처럼 흔들거리고 있자, 머리 위에 있던 새가 여전히 몸을 격하게 앞뒤로 흔들어 대며 헤비메탈을 시작했다. 노래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헬륨가스를 마신 듯했지만 말이다.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니지의 두 눈은 노란 새와 마찬가지로 마름모꼴로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들고 있던 검을 번쩍 들어 올려 공중에서 원을 그리듯 몇 바퀴를 돌리더니 그대로 도플갱어를 향해 달려 나갔다. 물론 혼자 돌격해봤자, 결과는 뻔했다.
니지, 그녀가 아차 아이템으로 뽑아낸 것은 ‘노래하는 새’라는 아이템. 일정한 확률로 그로기 상태를 벗어나게 해주는 단순한 옵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과정이 이리 충격적일 줄은 누구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결국, 홀로 그로기를 벗어났지만, 허무하게 다시 그로기 상태에 빠진 니지를 포함해 모두 보스의 전멸기에 전투 불능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리트라이를 하자는 아네미아의 말에 시언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모두에게 양해를 구하고 율과 함께 마을에 돌아왔다.
“죄송해요….”
여전히 반쯤 감긴 눈으로 사과를 해오는 율의 행동에 시언은 그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워 2층으로 내려갔다.
“많이 졸린 것 같은데, 눈 좀 붙여요.”
“네? 저기… 그냥 집에 가서….”
“졸려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내 침대 더러운가요?”
“네?”
“아, 내가 누웠던 자리라 싫은 건가?”
“네?”
“율님 내가 싫은가 봐요, 내가 누웠던 침대에는 눕고 싶지 않아 하는 거 보니….”
“아니에요!”
“그럼 그냥 자요.”
“어….”
대답을 유도하듯 밀어붙인 대화에 율이 거세게 부정하고 나서자, 시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불까지 들춰내며, 잘 것을 종용했다. 짐짓 당황하던 율은 반박할 수 없게 만드는 시언의 말과 안락해 보이는 흰 시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쭈뼛쭈뼛 시언의 침대에 몸을 묻고 말았다.
***
[질풍 : 누나 완전 빙의 수준이었다니까]
[니지 : 뭐 이딴 템이 다 있어!!]
[질풍 : 아차 템은 진짜 평범한 게 없는 것 같아..]
[니지 : 주옥같아!!]
[아네미아 : 그런데 너희]
[니지 : ?]
[질풍 : ??]
[아네미아 : 율님 컨트롤 때문에 우리 보탐 망하고 온 건데 짜증안나...?]
[니지 : 왜 짜증이나?]
[질풍 :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아네미아 : 그게 실수라고 누가 그래?]
[질풍 : ??]
[아네미아 : 누가 봐도 그게 본 실력인거잖아]
[니지 : 실수 맞아]
[질풍 : 실수야]
[아네미아 : 왜 그렇게 장담하니...?]
[니지 : 노아오빠가 암말도 안했잖아]
[질풍 : 응]
[아네미아 : ??]
[질풍 : 노아 형 성격에 그게 실수가 아니었으면 길길이 날뛰었을 거 아냐]
[니지 : 다른 데도 아니고 보스 방인데]
[아네미아 : 참나...]
[질풍 : 그러고 보면 노아 형 성격이 되게 깐깐한 거 같은데 여자 친구한테도 깐깐하게 굴려나?]
[니지 : 여자 친구가 있는지가 먼저 아니냐?]
[아네미아 : 있겠니?]
[니지 : ?]
[질풍 : ??]
[아네미아 : 방구석에서 만날 게임만 하는 백수한테 여자 친구는 무슨]
***
자신의 침대에 몸을 묻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는 율을 묘하게 바라보던 시언은 조심히 걸음을 옮겨 1층으로 향했다. 우선, 율이 깼을 때 먹일 수 있을 만한 간단한 요리라도 해놓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간단한 요리를 해두고, 다시 2층으로 올라온 시언은 침대 맡으로 다가갔다. 곤히 잠들어 있는 율의 얼굴이 보이자, 또다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턱을 괴고 율을 빤히 바라보던 시언은 천천히 율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율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두어 번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손길은 천천히 움직여 그의 뺨으로 향했다. 푸석푸석하고 혈색 없어 보이는 피부는 보기완 달리 꽤 좋은 감촉을 느끼게 했다. 손안에서 쓸리는 기분 좋은 감촉에 시언은 저도 모르게 오랫동안 율의 뺨을 쓰다듬었다.
“니….”
“율… ᄂ….”
단잠에 빠져 있던 율은 지척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소음을 주워들었다. 그 소리는 점점 크고 뚜렷하게 들려와서 율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투정 부리듯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낮은 웃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율님.”
반쯤 깨어버린 정신에 한 번 더 명확하게 들려온 목소리는 정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제야 느릿느릿 눈을 뜬 율은 뿌옇게 흐려진 시야의 초점이 맞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는 점차 또렷해지는 방 안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
잠결에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어 모로 누운 채 고개를 들려던 율은 제 눈앞으로 뻗어있는 팔 하나를 보았다.
“깼어요?”
그리고 등 뒤에서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의아한 마음에 제 눈앞으로 뻗어있는 팔을 따라 시선을 돌려가자, 제 뒤에서 팔을 뻗어 침대를 짚은 자세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시언의 얼굴이 보였다.
“?”
뭐지? 하는 기분이 들었다. 왜 노아님이 있지, 여긴 어디지, 오늘은 며칠이더라, 지금 몇 시지, 하는 생각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멍한 얼굴에 혼란이 스미고, 방황하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순간, 율을 내려다보던 시언의 얼굴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율ㄴ….”
“으악!!!”
불시에 다가오는 얼굴에 놀란 율이 볼썽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시언의 어깨를 밀어내고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더할 나위 없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율의 행동에 밀려났다기보다, 밀려준 시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율의 얼굴을 바라보다, 조금 찌푸린 얼굴로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율님, 내려올래요?”
그러고는 율을 두고 1층으로 내려가 버렸고, 율은 그제야 이곳이 시언의 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기억 안 나나요?”
“네….”
“점심 먹으려고 깨웠는데, 율님 안 일어나더라고요.”
“아….”
“그래서 더 두다가 저녁은 먹어야겠다, 싶어서 깨웠는데….”
“…….”
“일어나자마자 사람을 보고 비명을 지르고 밀어낼 줄이야… 상처받았어요.”
“아니… 그, 그런 게 아니라….”
식탁에 마주 앉은 시언이 꺼내는 이야기에 율은 진땀을 뺐다. 잠에서 깬 자신의 눈앞에 시언이 있는 것에 놀라긴 했지만, 그를 밀어낸 이유는 얼굴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율은 난감하기만 했다. 말 못 할 생각을 해버렸다고 말해버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 죄송해요.”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이 한마디뿐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하는 율의 행동에 시언은 잠깐의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짐짓 심각한 투로 툭, 질문을 던졌다.
“정말은 나 싫어하는 거 아녜요?”
“네?”
불시에 던져진 시언의 질문에 율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식탁의 건너편으로 건너갈 듯한 기세로 미간을 좁힌 채 소리쳤다.
“아니에요!”
“?”
생각지도 못한 율의 불같은 기세에 깜짝 놀란 시언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율을 바라봤다.
“저, 노아님 안 싫어해요, 진짜예요! 아까는 그냥… 너무 놀라서! 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요!”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해명하려는 율의 행동에 시언은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솔직히 평소 자신을 대하는 율의 모습을 보면 그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건 지나가는 개가 봐도 알 일이었다. 아까 2층에서 있었던 일만 해도 잠에서 막 깬 율의 모습이 생소하고 신기해서 얼굴을 들이민 제가 나빴던 거지 율이 잘못을 한 건 아니었다. 물론 그의 반응에 좀 흠칫하긴 했지만.
혹시나 제 행동을 율이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싶은 마음에 농을 좀 섞어서 본심을 숨겨본 것뿐인데, 이렇게 격하게 반응해 올 줄은 몰랐다.
“아… 알았어요.”
얼떨떨하게 답하는 시언은 율의 우려와는 다르게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밥 먹죠.”
그리고는 안절부절못하는 율에게 식사를 권하며 둘만의 조금은 소란스러운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끝내고, 율을 집까지 배웅하던 시언은 제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는 율의 이름을 불렀다.
“율님.”
“네?”
자신의 부름에 놀라 뒤돌아보는 율의 모습에 시언은 조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일도 올래요?”
“네?”
“내일도 나한테 와요.”
“어….”
“율님 혼자 있다가 또 그놈들이 찾아오면 어떡해요.”
“그건….”
“9시에 데리러 올게요.”
“네?”
“내일 봐요.”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 뒤돌아서 가버리는 시언을 멍하니 바라보던 율은 느릿느릿 뒤돌아 집으로 향했다. 할리마을에 마음을 숨긴 게 하등 소용이 없는 기분이었다. 시언을 볼 때마다, 제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 불쑥불쑥 튀어나오니 말이다.
사실은 시언의 권유는 거절해야 했다. 같이 있을수록 마음은 커져만 갈 테니까. 그런데도, 율은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시언의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욕심이 났다. 그저, 마음만 들키지 않으면 되지 않으려나, 하는 안일한 생각까지 머릿속을 차지하고 맴돌았다.
“들키지만 않으면… 전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집에 되돌아온 시언은 거실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이어 고개를 젖히고, 상념에 빠졌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생각났다. 잠들어 있던 율에게 점심을 먹이기 위해 깨웠지만, 그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난감함에 율의 옆에 앉아버린 시언은 베개 옆에 놓인 율의 핸드폰을 발견했다. 별생각 없이 집어 들어 화면을 켜자, 바로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잠금도 걸어놓지 않는 조심성 없는 행동에 혀를 차며, 잠들어 있는 율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고 앉은 시언은 문자, 통화, 톡 등을 들어가 보았다. 핸드폰 화면 보이지 않았지만, 부재중 전화와 읽지 않은 톡과 메시지가 수십, 수백 통씩 쌓여있었다. 이게 다 뭔가 싶어 하나하나 확인을 해보는 시언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저장되지 않은 이름의 부재중 통화들과 문자들, 그리고 수백 개의 협박, 욕설을 담은 톡들, 그런 톡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시언은 김차운이라는 이름의 상대방이 보낸 톡들을 보며 손을 멈췄다. 계성원, 최현석이라는 이름의 상대방이 보낸 톡들과는 다르게, 내용 대부분이 성적으로 희롱하거나, 음담패설 같은 내용뿐이었다. 도가 지나칠 정도로 눈살이 찌푸려질 내용이 다분해서,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시언의 얼굴은 어느새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점은 율이 이 톡들을 확인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시언은 세 명을 모두 차단하고, 대화방을 없애려다 손을 멈췄다. 잘 차려진 증거물들을 굳이 없앨 필요가 없었다.
***
9시가 다가와서 율을 데리러 가기 위해 준비를 하던 시언은 딩동, 하고 울리는 현관 벨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누구냐고 물으며 문을 벌컥 열자, 문밖에는 긴장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율이 있었다.
“…?”
생각지도 못한 방문에 놀란 시언이 멍하니 율을 바라보기만 하자, 율은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제가… 너무 빨리 왔나요?”
“아, 아니요, 데리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들어…가도 되나요?”
“들어와요.”
자신이 데리러 가기도 전에 스스로 찾아온 율의 행동에 적잖이 놀랐던 시언이 마지막에는 웃으며 길을 터주자, 율은 그제야 안심한 듯 표정을 풀며 걸음을 옮겼다.
“아침은 먹었어요?”
“네. 노아님은요?”
“저도 먹었어요.”
“네.”
시언은 2층으로 율을 안내하며 먼저 계단을 올랐다. 사실은 율과 함께 아침을 먹을 생각이었기에 아직 식전이긴 했지만, 그걸 말해버리면 율은 또 자신에게 미안해하며, 죄송하다고 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미리 켜둔 컴퓨터에 율을 앉히고, 시언도 옆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익숙한 벨 소리가 울려왔다. 동시에 율의 시선이 시언에게 꽂혀 들었다. 시언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발신인을 한번 확인하고는 율에게 말했다.
“통화 좀 하고 올게요. 먼저 접속해요.”
“네.”
율의 대답을 들은 시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슬라이딩 창을 열고 옥상으로 나왔다. 그런 시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율은 이내 시선을 돌려 모니터를 바라봤다.
옥상으로 나오자, 에어컨 덕분에 시원했던 실내와 달리 아직 오전인데도 뜨거운 햇볕이 온몸으로 감쌌다. 숨이 막힐 듯한 열기에 눈살을 잔뜩 찌푸린 시언은 옥상의 난간 부분에 앉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그리고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머리를 쓸어 넘기며 통화를 시작했다.
근 10분째, 통화하러 나간 시언은 아직도 옥상에서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간간이 창밖을 내다보던 율의 눈에 더운 듯 손부채질을 하며 연신 입을 움직이는 시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통화하는 도중 이마를 짚기도 하고, 머리를 연신 쓸어 올리기도 하고, 목을 좌우로 움직여대기도 했다. 그러는 중간중간 저를 바라보는 율과 눈이 마주치면 웃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길 수 분, 쉼터에 앉아 길드원들과 수다를 떨던 율은 갑작스럽게 울리는 자신의 핸드폰 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노아님’
그리고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봤다. 여전히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있는 시언은 율을 향해 손짓했다. 자신을 부르는 듯한 그의 행동에 율이 의아한 얼굴로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전면 창을 열었다.
집 안은 방음이 잘됐었는지, 문을 열자마자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그 소리들은 율에겐 너무나 익숙한 소리여서, 율은 금세 창백해진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율의 모습을 보던 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율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이리 와요.”
그리고는 굳어 있는 율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
9시가 좀 넘은 시각. 율의 집 앞에 또다시 찾아온 성원 일행은 여느 때와 같이 무턱대고 집 문을 두드리며 율을 불러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치고, 현관문을 발로 차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뭐야, 씨발? 없는 거 아냐?”
“없겠냐? 안에 처박혀서 벌벌 떨고 있는 거겠지.”
“또 안에서 그 조폭 새끼 기어 나오는 거 아냐?”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성원의 말에 차운과 현석이 차례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성원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답했다.
“조폭 새끼? 나오라 해. 이번엔 내가 정말 신고할 테니까.”
“그래, 신고 못 할 것도 없잖아.”
“맞아. 조폭 새끼 콩밥 먹여주자!!”
그런 성원의 말에 차운과 현석이 얼씨구나 맞장구를 쳤다. 저들끼리 신나서 의기투합하는 세 사람의 모습에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터졌다.
“…?”
“뭐야?”
“누가 웃어?”
명백하게 비웃는 웃음소리가 세 명의 신경을 건드렸는지, 세 명은 연신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주변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질 않았다. 조용한 골목 사이로 휑한 바람이 지나가고, 다시 한번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집중하고 있던 덕에 소리의 출처를 알아챈 세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바로 옆집의 옥상 난간에 앉아 있는 조폭이 자신들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었다.
“저….”
“뭐…?”
“?”
황당함에 옥상을 손가락질하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세 명의 모습을 내려다보면 조폭은 시선을 뒤로 한번 돌리더니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돌아온 조폭은 혼자가 아닌 율과 함께였다. 조폭의 손에 이끌려 난간으로 다가온 율이 밑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자신들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후다닥 모습을 감췄고, 그런 율의 모습을 보며 웃던 조폭은 다시 한번 자신들을 내려다보며 비웃고는 율을 따라 모습을 감췄다.
“…….”
“…….”
“…….”
조폭과 율의 어이없는 행동에 굳어버린 세 명은 몸과 함께 사고도 굳어 버린 느낌이었다.
“저 둘이 왜 옆집에 있어? 우리, 집 잘못 찾아왔나?”
“아닌데… 여기 맞지 않아?”
“…….”
혼란에 빠진 성원과 현석이 더듬더듬 말을 잇는 사이, 차운은 이를 악물고, 옆집 옥상을 노려볼 뿐이었다.
율의 손을 끌고 옥상 난간을 향해가는 시언의 행동에 끌려가듯 따라온 율의 눈에 보인 건 자신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익숙한 세 명의 얼굴이었다.
“힉.”
새된 비명이 잇새로 새어 나오고 시언에게 잡혀 있던 제 손목을 뿌리치듯 빼낸 율이 후다닥 뒤를 돌아 집 안으로 도망쳤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율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향했다.
“율님.”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낮은 목소리에 잔뜩 겁먹은 눈을 한 율이 삐걱삐걱 시선을 돌렸다. 복층 난간 옆에 움츠리고 앉아, 연신 옥상 난간 쪽을 살피는 율의 시선을 몸으로 가로막으며 다가온 시언이 율의 곁에 앉았다.
“율님.”
낮게 울리는 기분 좋은 목소리가 재차 율의 이름을 불렀다.
“여기는 괜찮아요, 안전해요.”
“…….”
달래듯 안심시키는 말에 율은 조금 흔들리는, 의심하는 듯한 눈으로 시언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감정을 담은 율의 눈빛에 짐짓 놀란 시언이 표정을 갈무리하며 미소 지었다.
“나 믿잖아요?”
“…….”
“저놈들은 여기 못 와요.”
“…….”
자신의 말에도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는 율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시언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조금은 난감한 얼굴로 율을 불렀다.
“그런데, 율님.”
“… 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도 되나요?”
“뭔…데요?”
조심조심 물어오는 시언의 말에 율도 더듬더듬 답했다. 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시언은 잠시 아랫입술을 물고, 시선을 내리더니, 이내 시선을 들고 입을 열었다.
“지금, 저 세 명 중에… 김차운이란 놈이 있나요?”
발행일: 2018년 10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