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4. 서로에게 다가가는 한 걸음 (14/31)

CONTENTS

14. 서로에게 다가가는 한 걸음

15. 인생은 실전

16. 마음과 마음

17. 엉망진창

18. 역풍(1)

19. 오즈

14. 서로에게 다가가는 한 걸음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질문 속에 익숙한 이름이 들려서 율은 눈을 크게 뜨고 시언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율의 반응에 시언의 한쪽 눈가가 움찔거렸다.

“어떻게…?”

“진짜 있어요? 김차운?”

“…….”

“있어요?”

“네….”

“…….”

“근데, 그 이름은 어떻게…?”

“… 율님 핸드폰을 봤어요.”

“네?”

시언의 말에 율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미안해요, 화내도 괜찮아요.”

“…….”

“율님?”

시언의 부름에도 율은 시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화가 났다. 시언에게라기보다는 자신에게. 그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던 부분을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일방적으로 보여 버렸는데, 그에게 화가 난다기보다는 그가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부터 드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한심한 생각으로 점철되어 가라앉아 가는 기분에 상대방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율에게 한 번 더 시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지 말고, 나한테 화내요.”

시언의 말에 벗어나 있던 율의 시선이 삐걱삐걱 시언에게 되돌아왔다. 상황을 외면하고 싶어 본능적으로 피하려는 눈동자를 다잡아 시언과 마주했지만, 저를 빤히 보고 있는 눈빛에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런 율의 행동에 시언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율ㄴ….”

“화나요….”

“네?”

“노아님보다, 저한테 화가 나요.”

“…?”

“제가 너무 한심해서.”

“율님.”

“죄송해요.”

“율님, 율님. 잠시만요.”

결국, 대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율의 사과였다. 시언은 다급하게 율을 부르며 그가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율님이 사과할 상황이 아니잖아요?”

“네?”

“내가 율님한테 잘못을 한 거지, 율님이 나한테 잘못을 한 게 아니잖아요? 지금 상황에서 율님이 나한테 죄송하다고 하면 내 입장은 뭐가 되겠어요?”

“아… 죄송….”

심기가 불편한 듯 몰아붙이는 시언의 기세에 율은 저도 모르게 위축되어 입에 배어버린 한마디를 뱉어냈다. 하지만 율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말을 자르듯 치고 들어온 시언의 말에 반 토막이 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론 그 말 하지 말아요.”

시언에 의해서 끝맺지 못한 말이 입안에서 허무하게 감돌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의도치 않게 침묵을 유지한 율은 자신의 말을 빼앗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언에게 더듬더듬 난감한 기분을 전했다.

“그….”

“?”

“사과하지 말라는… 건가요?”

“할 필요 없어요. 율님이 뭘 하든, 어떤 잘못을 하든 앞으로 나한텐 사과하지 말아요.”

너무나 확고하고, 간단한 답을 주는 시언의 말에 율은 어느새 고개를 들어 시언을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얼굴엔 당혹스러움과 놀라움이 가득했지만,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율에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고, 자신을 옭아매기도 했던, 유일한 말을 시언에게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슴속 한구석에 자리했던 응어리의 수많은 매듭 중 하나가 풀려 떨어져 나간 것만 같았다.

마주한 시선은 한참 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시선에 담긴 묘한 기류가 알게 모르게 짙어지려는 때, 딩동, 하고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율에게 끈덕지게 붙어 있던 시언의 시선이 단박에 떨어져 나갔다.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켜 빠른 걸음으로 1층으로 내려가 버리는 시언의 등을 바라보던 율은 홀로 남은 공간에 철철 흘러 넘쳐버린 자신의 감정들을 바쁘게 주워 담아야만 했다.

“누구….”

언짢은 기분으로 현관문을 벌컥 연 시언은 불쾌한 듯 구겨지는 미간을 숨길 생각도 없이 상대방을 맞이했다.

홀로 복층에 남아 있던 율은 1층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설마 성원 일행이 시언의 집까지 쫓아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두려움보단 걱정이 앞서 걸음을 재촉해 1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심해지는 소란스러움에 몸을 움츠리던 율의 귓가에 잔뜩 성이 난 시언의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아, 이 미친놈아!”

“와! 뭐 뀐 놈이 성낸다더니!”

그리고 시언의 목소리에 이어 생소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자신이 우려했던 이들이 찾아온 건 아닌 듯했다. 율은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와 거실을 훑어봤다. 곧, 현관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두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찾아온 날 문전박대하기냐!”

“내가 오라 그랬냐! 네 멋대로 온 거 아냐?”

“주소는 네가 보내 준….”

“? 저건 누구야?”

남자의 손짓에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본 시언은 1층 계단 앞에 엉거주춤 서 있는 율의 모습을 보고는 짐짓 놀란 얼굴로 율에게 다가왔다.

“왜 내려왔어요?”

“성원이 애들이 온 줄 알고요…. 걱정돼서….”

“성원이? 아까 그놈들이요?”

“네….”

“내 걱정했어요?”

“네….”

율의 답이 시언이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흘렸다. 낮게 흐르는 웃음소리에 율이 시선을 들어 시언을 바라보려는데, 둘 사이를 가로지르듯 던져진 질문 하나에 시언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버렸다.

“뭐야? 너 애 숨겨놨었어??”

***

“아~ 게임? 난 또 저놈이 애라도 숨겨놓은 줄 알았죠~”

시언, 율과 마주 앉은 남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전해 듣고는 조금 아쉽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그쪽 분 성함이?!”

“네? 저… 권율…이요.”

“율?”

“네.”

“나 참~ 들어봐요, 율 씨~”

이름을 묻더니 대뜸 율 씨라고 부르며 운을 떼는 남자의 행동에 시언이 기가 막힌 듯 남자를 바라봤다. 하지만 남자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열심히 말을 이었다.

“한시언, 저놈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친구인 나한테 한마디도 없이 하루아침에 이사했지 뭡니까? 이게 이해가 돼요? 난 평소처럼 찾아갔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 불쑥 튀어나오는 거예요! 난 나름 죽마고우라고 생각하고 지냈는데, 저 나쁜 놈은 소리 소문 없이 이사나 가버리고, 전화해서 따졌더니 꺼지라고, 너랑 상관없다면서 쓴소리만 늘어놓고!”

남자는 말을 하면서 과장된 몸짓으로 우는 흉내를 내며 시언과 율의 눈치를 살폈고, 그런 남자의 행동에 시언은 한심하단 얼굴로 “가라.”라고 한마디 내뱉었다.

“저 봐요!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율 씨도 저런 놈하고 친하게 지내지 말아요!”

남자의 말에 시언은 “율 씨….”라며 마뜩잖은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시언의 심기 불편해 보이는 모습은 신경도 쓰지 않는 남자는 오로지 율의 반응만을 바라는 듯 율에게 신경을 집중했고,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보던 율은 더듬더듬 남자에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율의 관심은 남자가 말하는 시언의 이름이었다. 맨 처음 톡이 왔을 때, 본 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 노아라는 이름으로 저장했기 때문에 거의 뇌리에서 지워진 이름이었다.

“한시언… 노아님 이름이었죠?”

“팩트가 그거?”

동문서답하는 율의 답에 남자가 답답한 듯 꽤액, 하고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화들짝 놀란 율은 시언의 팔을 붙잡으며 바짝 붙어 앉았고, 시언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아니, 율 씨!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네?”

“가라.”

“야, 나 온 지 10분도 안 됐다!”

“그러니까 가라고.”

“밥 먹고 가면 안 되냐?”

“너 줄 밥 없다. 가라.”

“시켜주면 안 되냐?”

“돈 없다. 가라.”

“염ㅂ….”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매몰찬 시언의 말에 육두문자를 쏘아내려던 남자는 시언의 옆에 앉아 있는 율을 신경 쓰는 듯 말끝을 흘렸다.

“나… 정말 가냐?”

“정말 가라.”

“…….”

마지막까지 매몰찬 시언의 태도에 남자는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개새끼야’라고 말하고는 삐졌다는 티를 내듯 쿵쾅거리며 가버렸다. 예정에 없던 한 사람이 불시에 들이닥쳐 불시에 가버렸을 뿐인데, 집 안이 휑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말없이 앉아 있던 두 사람 사이에 나지막이 시언을 부르는 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노아님.”

“네?”

“친구분… 화나신 것 같은데….”

율의 말에 시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

[무지개 요정 : 그럼 이번 주말에 모이는 걸로 하자]

[노아 : 주말에요?]

[무지개 요정 : 응 워낙 즉흥적으로 결정된 거라 못 오는 사람은 어쩔 수 없으니 올 수 있는 사람만이라도 오는걸로]

[질풍 : 드디어!!!!]

[세츠나 : 난 길마님 얼굴이 제일 궁금함]

[광인한 남자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지개 요정 : 말해두지만 난 세기의 미남임]

[KING Husband : 세기의 아재 아님?]

[니지 : 미칰ㅋㅋㅋㅋㅋㅋ]

[무지개 요정 : 이것들이...]

[집사 : 도련님, 오실 수 있으신가요?]

[도련 : ㅇㅇ 갈수 있어요]

[집사 : ㅠㅠㅠㅠㅠ 이 감동 금할 길이 없습니다. 드디어 도련님을 영접하게 된다니요ㅠㅠㅠ]

[아네미아 : 나도 갈수 있어요]

[복세편살 : 저도요 기대되네요ㅎ]

[블㉣┥⊆✡КⅰП9 : 저도 미아누님이랑 편살형님 보러 갈거예요ㅋㅋ]

[눈감아♡김민지 : 두 분이 오시면 당연히 가야죠!]

[월광의 마녀∑민지♕ : 울 오빠야 가면 나도 갈꼬야!]

[눈감아♡김민지 : 크~ 역시 내 마누라~]

[흑염룡 : 너희 둘 때문에 가기 싫다]

[무지개 요정 : 시간하고 장소는 따로 단톡에 공지 할 테니까 단톡에 없는 사람은 초대 보내게 번호나 톡아이디 말해줘]

[질풍 : 율님 없지 않아요?]

[무지개 요정 : 어 그러게 율이 아직도 핸드폰 없나?]

[율 : 저! 핸드폰 있어요]

[무지개 요정 : 오?!]

[질풍 : 번호 알려줘요 율님!!!]

[광인한 남자 : 오 나도!!]

[세츠나 : 나도 알려줘요 ㅋㅋㅋ]

[KING Husband : 나도 나도!]

[니지 : 미투!!]

떠들썩해진 분위기에 율은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너도나도 신나게 그 번호를 저장하는 와중에, 채팅으로 올라온 율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의 번호를 유심히 바라보던 차운은 그 번호가 어딘지 익숙했다.

긴가민가한 마음에 핸드폰을 집어 들어 주소록을 뒤져보던 그는 주소록을 내리던 손을 멈추고는 제 핸드폰 화면과 모니터 화면을 번갈아 바라봤다. 자신의 핸드폰 속, 권율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번호와 모니터 속 율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이 가진 번호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일치하고 있었다.

“하-!”

황당함에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이없다는 듯 모니터를 바라보던 차운은 어느새 잔뜩 찌푸려진 얼굴로 키보드를 두들겨댔다.

[눈감아♡김민지 : 정모! 정말 기대되네요! ㅋㅋㅋ]

“율님, 정모 갈 거죠?”

길드원들과 대화를 끝내고, 시언은 제 옆에 앉은 율에게 물었다.

“네, 가고 싶어요.”

“?”

자신의 질문에 선뜻 긍정을 표하는 율의 답에 시언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런 시언의 반응에 율은 민망한 듯 웃었고,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시언은 서둘러 사과를 했다.

“아… 미안해요, 난 율님이 당연하게 거절할 줄 알았거든요.”

“혼자였으면 못 갔을 거예요….”

“그런가요.”

율의 말은 자신이 함께 있기에 갈 수 있다는 말로도 들렸다. 시언은 의외로 자신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율의 모습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

“뭐?”

대화하던 성원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방이 해준 얘기가 너무 터무니없었기 때문에.

“길드에 율이, 그 권율이라고?”

“그래, 이번에 그 새끼가 전번 깠잖아. 어디서 많이 본 번호인 것 같아서 찾아봤더니, 권율. 그 새끼 맞더라.”

차운의 말에 성원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이 개새끼가….”

“와… 학교도 그만두고, 뭘 하나 했더니 겜질이나 하고 있고, 팔자 좋았네?”

동시에 비아냥거리듯 들려온 현석의 말에 성원이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의 말에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절로 구겨지는 얼굴을 갈무리하지 않고, 여전히 씩씩거리던 성원은 차운과 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지러 가자.”

“안 돼.”

하지만 차운은 단번에 성원의 말을 거부했다.

“뭐?”

“지금 가봤자, 어차피 그 조폭이 붙어 있을 게 뻔하잖아.”

“그럼 어쩌자고?”

“정모가 있잖아.”

“어?”

“이번 정모에 나오지 않을까?”

“아!”

“정모까지 조폭이 따라오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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