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인생은 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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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석에 앉아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낸 시언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내비게이션을 찍었다. 그리고 도착 예정 시간과 현재 시각을 비교해 보고 있는데, 누군가 조수석 창문을 두드렸다. 조용한 차내에 울리는 낯선 소음에 시언이 시선을 돌리자, 창문 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율이 보였다.
차창을 사이에 두고 멀뚱히 저를 보고만 있는 율에게 타라는 듯 손짓을 하자, 율은 기다렸다는 듯 그제야 조수석에 올랐다. 율이 조수석에 오르자, 시언은 글러브 박스에서 검은색 케이스를 꺼내 율에게 건넸다.
“뭐예요?”
대뜸 내민 케이스를 받을 생각도 못 하고 멀뚱히 바라보며 묻자, 시언은 율의 손에 케이스를 쥐여 주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말없이 운전에 집중하는 시언과 케이스를 번갈아 보던 율은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 안에는 시계가 하나 들어 있었다. 율은 시선을 돌려 시언을 바라봤지만, 시언은 운전에 집중하며 여전히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 저기… 노아님?”
그 탓에 잠시 눈치를 보던 율이 조심스럽게 시언을 부르자 시언이 율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차고 있어요.”
“네?”
“손목, 보이고 싶지 않잖아요.”
시언의 말에 케이스를 들고 있는 율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리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손목의 상처를 바라봤다. 남들을 만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손목의 상처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율은 시언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하며 케이스에서 시계를 꺼내 오른쪽 손목에 찼다.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네요….”
사방을 꽉 메운 차들과 함께 굼벵이같이 나아가는 속도에 시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약속 시각은 2시. 토요일이라지만 일부러 번잡해질 시간을 피해서 시간을 정한 것이었는데, 예기치 못한 정체에 시언과 율은 도로 위에 발이 묶여 있었다. 연신 창밖을 살펴보던 율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많이 막히네요….”
“조금 더 여유를 두고 출발할 걸 그랬네요.”
결국, 한참을 도로 위에 발이 묶인 두 사람은 예정 시간에서 10분 정도를 늦고 말았다. 늦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부드럽게 주차장에 안착한 시언의 차는 알맞은 자리를 골라 주차를 했고,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서야 급하게 걸음을 재촉했다.
무지개 요정이 정모 장소로 고른 곳은 특이하게도 나름 유명한 음식점. 그 안에 갖춰진 연회실이었다. 처음에 정모 장소를 전달받은 길드원들은 길마님 반 육십 잔치하냐며 반발이 거셌지만, ‘개망나니 같은 너희들을 길거리에 풀어놓을 수 없다.’는 강력한 의사 표시로 반발을 억누른 무지개 요정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이 식당으로 들어서자, 식당 입구의 스탠드형 안내판에 정갈한 글씨로 [무지개 언덕, 요정님의 반 육십 축하연]이라고 쓰여 있는 안내문이 있었다. 우뚝 멈춰 서서 안내판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식당 종업원이 몇 분이냐며 다가왔고, 두 사람은 말없이 안내문을 손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친절한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연회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웃음을 참으며 멀어져 가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다 연회실 문을 바라봤다.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소란스러움이 문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대체 안에 몇 명이 있기에 이런 소음이 나는 것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시언과 율은 서로를 바라보다 연회실 문을 열었다. 꽉꽉 채워놨던 소음이 터지듯 흘러나왔다.
시끄러운 와중에 문이 열리는 소리는 귀신같이 주워들은 건지 그렇게 시끄럽던 소음이 한순간 잦아들었다. 그리고 문 안으로 들어서는 율에게 수많은 시선이 꽂혀 들었다. 율은 저를 바라보는 다수의 시선에 잠시 주춤했지만, 곧 숨을 크게 들이쉬며 연회실에 앉아 있는 모두의 얼굴을 둘러봤다.
하지만 입구의 반대편,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세 명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그곳엔 의기양양한 얼굴로 앉아서 율을 비웃고 있는 성원, 차운, 현석이 있었다. 그들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제대로 걸렸다는 얼굴을 한 채 율을 바라봤다.
자신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희게 질린 낯빛으로 뒷걸음질 치는 율의 모습을 봤을 때는 통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뒷걸음질 치던 율이 누군가에 의해 가로막힌 듯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도망가려는 행동을 저지당했을 때, 세 사람의 시선도 율의 뒤에 버티고선 누군가에게 향했다.
“왜 그래요?”
율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시언은 앞서 들어갔던 율이 뒷걸음질 치며 제게 부딪히자 의아한 듯 율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율은 멈추지 않고, 뒤돌아 연회실을 나가려 했다. 짐짓 당황한 시언이 율의 어깨를 잡아 그의 행동을 저지하고 왜 그러냐 묻자, 율은 잔뜩 떨리는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들자, 자신들의 정면, 며칠 동안 익숙하게 보아왔던 세 명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 역시 경악으로 굳어진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시언은 침착하게 온을 진정시키고,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조용했던 분위기가 두 사람의 정체에 대해 달궈지기 시작했다.
시언이 옆에 있지만, 율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저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세 명 때문에 좀처럼 시선을 들 수가 없었다. 식은땀까지 잔뜩 흘리며 불안한 듯 테이블 아래에서 제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제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기울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혹시 율님이에요?”
난데없이 거리를 좁혀오며 묻는 남자의 행동에 율은 더욱 긴장하며 아예 시언 쪽으로 몸을 기울여 앉았다. 그런 율의 행동에 덩달아 놀란 남자는 기울였던 몸을 서둘러 일으키며 자신이 해가 없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으아, 미안해요. 율님, 많이 놀랐어요?”
자신보다 더 당황한 듯한 상대방의 빠른 사과에 율은 쭈뼛쭈뼛 시선을 들었다. 눈앞의 남자는 부드러운 이목구비의 약간 앳돼 보이는 호감형 얼굴이었다. 조심스럽게 저를 훑어보는 율의 행동에 남자는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 풍이에요.”
생각지도 못한 소개에 율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시언에게 밀착했던 몸을 풍 쪽으로 기울였다.
“풍님이요?”
“네! 그쪽… 율님 맞아요?”
“어, 네.”
질풍의 질문에 긍정을 말하는 답이 들려오자, 숨죽이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이들의 입에서 엄청난 소음들이 터져 나왔다.
“에엑? 율님 맞아요?”
이건 KING Husband.
“액면가로 보면 되게 어린 것 같은데?”
당황한 듯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말하는 이건 광인한 남자.
“헐? 허얼!”
테이블 위를 기어서 다가올 것만 같은 기세로 말하는 이건 니지.
“풉, 컥, 콜록.”
마시던 물을 내뿜으며 사레에 들려 말을 잇지 못하는 이건 세츠나.
“맙소사, 율님?”
그리고 덤덤한 듯 놀란 듯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의 도련.
모두의 관심이 율을 거치고,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시언에게 향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말문을 연 건 질풍이었다.
“설마… 옆에는 노아 형이야?”
“응.”
그리고 또다시 왁, 하고 소란이 일었다. 그 와중에 성원 일행만이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하고 좌불안석이 되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길마님은?”
한창 요란하던 분위기가 진정되고, 주변을 둘러보던 시언이 의아한 듯 물었다. 시언의 질문에 다들 미간을 와작 찌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모두의 입에서는 같은 답이 전해져 왔다.
“아직.”
“그래? 아직 안 온 사람 더 있나?”
답을 들은 시언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질문을 더 던졌다. 시언의 질문에 모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미아 누나랑 편살 형님.”
“집사도 아직.”
그리고 KING Husband와 도련이 나란히 답을 주는 상황에 찰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들 열리는 문을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헤 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의 뒤에서 후광이 비쳤다. 눈이 부셔서 시야를 가려야 할 것 같은 거룩함. 오목조목 따져볼 것 없이 그냥 한마디로 설명이 가능한 외모였다.
‘신이 빚은 외모’
장신의 남자는 미남이라기보다 미인 같은 얼굴로 모두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연회실로 들어왔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에 익숙한 듯 업신여기는 미소를 지은 남자는 녹아내릴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지개 요정이 살고 있는 무지개 언덕으로 오셔요~”
외모 하나로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남자는 자신의 등장에 찬물을 뿌린 듯 조용해진 실내를 둘러보며 빈자리에 앉았다. 그의 행동, 표정 하나하나가 너무 우아하고, 선을 그린 듯 유려해서 모두는 그가 바로 ‘무지개 요정’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차마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비명을 지르며 외치고 싶은 한 가지 사실을 속으로 삼켰다.
‘진짜 요정같이 생겼….’
자신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시선들을 마주 보며 모두의 얼굴을 대충 둘러본 무지개 요정은 드문드문 보이는 빈자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다 모인 거야?”
“아뇨.”
무지개 요정의 질문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을 하지 못하는데, 유일하게 그의 외모에 현혹되지 않은 시언이 모두를 대신해 답했다.
시언의 답에 무지개 요정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언에게 향했다. 그리고 조금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대충 훑어볼 땐 몰랐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도 못 하게 잘생긴 미남 하나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제야 무지개 요정은 미남의, 그리고 모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다들, 자기소개 좀?”
무지개 요정의 말에 모두 차례차례 홀린 듯 자신의 소개를 시작했다. 그리고 차례를 돌아 마지막에야 자신을 소개한 미남의 정체가 노아란 것과 그 옆에 쭈뼛쭈뼛 앉아 있는 소동물을 연상케 하는 아이가 율이란 사실에 극도로 흥분한 무지개 요정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다가온 무지개 요정은 율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질풍을 내쫓고는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반항하며 한마디를 했을 질풍이겠지만, 실제로 마주하게 된, 신이 빚은 미모를 가진 무지개 요정의 기세에 눌려 한마디도 못 하고, 조용히 노아의 옆자리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율이랑 노아라고?!”
질풍의 의도치 않은 배려로 율의 옆자리를 차지하게 된 무지개 요정은 조금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풍기는 율에게 더욱 바짝 붙어 앉으며 한껏 들뜬 목소리로 물었고, 긍정을 표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의 답변 같은 행동에 “우쭈쭈, 내 새끼!”라며 율이를 끌어안고, 쓰다듬고 난리를 부렸다. 하지만 그런 무지개 요정의 행동에 다른 이들이 의문점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요!”
“?”
시작은 KING Husband의 중재를 동반한 질문이었다.
“길마님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뭐를?”
“아니, 율님 연령대가….”
차마 다 묻지 못하고, 말끝을 흘리는 KING Husband를 대신해 광인한 남자가 말을 이어가듯 질문했다.
“액면가만 동안인지, 아니면 진짜 저 얼굴에 맞는 나이대인지부터 물어야 하는 것 아녜요?”
“어린 거 맞아, 율님 18살이야.”
하지만 의혹을 가득 담은 질문에 답을 내준 건 무지개 요정이 아닌 율의 옆에 앉아 있던 시언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순 무지개 요정에게서 시언에게, 그리고 율에게 징검다리 건너듯 이어졌다.
곧이어 실내를 터트릴 것만 같은 고함과 비명이 쩌렁쩌렁 울렸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모두 나름의 놀라움을 표출하고는 우르르 시언과 율에게 질문들을 쏟아냈다.
“노아 형은 알고 있었어?”
“18살?”
“백수라고 했잖아요!”
“우리 속인 거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속수무책으로 쏟아져 내리는 질문들 속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어떤 답도 해주지 못하던 율은 끝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난 알고 있었는데?”
그런 율의 옆에서 태연하게 말하는 무지개 요정의 말에 일제히 그에게 시선이 몰리며, 실내엔 다시 찬물을 뿌린 듯한 침묵이 찾아왔다.
“나도 알고 있었는데….”
그리고 이번엔 시언의 옆에 앉아 있던 질풍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동시에 무지개 요정에게 향해있던 시선이 일제히 질풍에게 향했다.
“노아 형이나 길마님이 알고 있었다는 건… 그래, 이해해….”
“근데 풍이 넌 왜 알고 있어…?”
황당함을 담은 질문이 연이어 질풍에게 던져졌다. 질풍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KING Husband와 광인한 남자를 번갈아 보다 난감한 듯 웃었다.
“어쩌다 보니….”
김빠지는 질풍의 답에 KING Husband와 광인한 남자는 뭔가를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물어도 원하는 답은 질풍에게선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 KING Husband와 광인한 남자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세츠나의 질문이 던져졌다.
“그럼, 왜 숨긴 거예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세츠나의 말에 시언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데없는 시언의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율에게서 시언에게 옮겨갔다.
“이제 더 숨길 것도 없으니, 모일 사람 다 모이면 얘기하도록 하자.”
그리고 시언의 말에 모두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껏 옥죄어있던 분위기를 풀어 내렸다. 긴장으로 팽팽해졌던 공기가 느슨해지며 다들 편하게 대화들을 시작했고,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에 잔뜩 움츠렸던 율의 몸도 조금씩 평정을 되찾았다.
“아직 안 온 거 누구누구야?”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는 와중에 여전한 빈자리들에 무지개 요정이 슬쩍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그리고 그제야 다른 이들도 잊고 있었다는 얼굴로 빈자리들을 둘러봤다.
“아, 미아 누나랑 편살 형님, 집사님이 아직이에요.”
“그래?”
질풍의 답에 다시 한번 빈자리들을 눈으로 훑던 무지개 요정은 지각 예정인 사람들과 비어 있는 자리의 숫자가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중2병 3인방의 옆자리 하나가 가방만을 놓아둔 채 비어있는 걸 눈치채고는 3인방에게 물었다.
“거기, 네 옆자리는 누구야?”
갑작스러운 무지개 요정의 지목과 질문에 화들짝 놀란 차운이 한껏 상기된 얼굴로 이상한 손짓을 섞어가며 더듬더듬 말했다.
“어, 저… 여기 미, 민지요.”
“어디 갔는데?”
“어, 그… 아까 오자마자 화장실에….”
안절부절못하며 답하던 차운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차운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언이 핸드폰을 꺼내 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에 무지개 요정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시언에게 향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시언은 일순 자신에게 시선이 몰리며 끊겨버린 대화를 사과하듯 손을 내밀어 보이고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연회실을 나갔다.
율은 자신을 두고 자리를 비운 시언의 부재가 불안한 듯 그가 나간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고 있기를 잠시, 다시 찰칵하고 문이 열리며 상체만 내민 시언이 율을 바라보며 말했다.
“율님, 나 잠시 주차장에 좀 내려갔다 올게요.”
“네?”
“왜, 무슨 일 있어?”
시언의 말에 놀라 되묻기만 하는 율을 대신해 무지개 요정이 넌지시 물었고, 시언은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율에게서 무지개 요정에게 시선을 옮겼다.
“네, 누가 제 차를 긁었다네요.”
“저런? 얼른 다녀와.”
“네. 금방 올게요, 율님.”
“아, 저, 저도 같이….”
그리고 자신을 두고 가려는 시언의 행동에 율이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냥 여기 있어요. 길마님이랑 풍이 있잖아요.”
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제지하는 시언의 말에 율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
“금방 올게요.”
자신을 내버려 둔 채 닫히는 문을 보며 율은 불안하게 뛰는 가슴을 안고 바짝 붙어 앉은 시언의 빈자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시언은 소리가 울리는 공간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찢어질 듯한 고함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운전을 왜 이따위로 하는 건데!!”
“미, 미안해….”
“안 그래도 늦었는데, 왜 시간을 더 허비하게 만들어?!”
“미안해….”
그리고 카랑카랑한 여성의 목소리에 연신 사과를 하는 잔뜩 주눅 든 남성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시언은 자신의 차가 주차된 구역으로 걸으며 소음이 가까워져 간다는 걸 느꼈다.
“난 먼저 갈 테니까, 오빠는 알아서 해결하고 와!!”
“어?!”
악에 받친 듯 내지른 여성의 고함과 함께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시언도 코너를 돌아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제야 자신의 차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남녀를 볼 수 있었다. 먼저 가려는 듯 걸음을 옮기던 여성은 걸어오는 시언을 보고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자신들에게 걸어오는 시언을 뚫어지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언은 그런 여성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스쳐지나 자신의 차와 그 앞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남성에게 향했다.
일행인 여성의 행동에 당황해하던 남자는 시언이 다가오자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허리를 숙여 사과하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
시언은 제 앞에서 허리를 숙여 사과하는 수더분한 남자의 행동을 내려다보며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차체를 살펴보기 위해 남자의 사과를 무시하고,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시언의 눈에 들어온 건 긁혀 있는 제 차가 아니라, 심하게 가까이 붙어서 주차되어 있는 남자의 차였다. 황당함에 헛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행동에 남자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운전미숙으로 실수를 한 걸 수도 있고, 여자를 태우고 있다는 자만심에 외제 차라도 몸을 사리지 않는다는 보여주기식 과욕을 부린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의 차가 맞닿아 선명하게 긁혀 있는 자국은 숨길 수 없는 실수의 증거가 되어 남아 있었다.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견적을 재보던 시언의 뒤로 빠르게 다가오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어머, 죄송해요~ 제 일행이 운전이 미숙해서요.”
교태와 애교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제게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는 일행인 남성에게 고함을 치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는 영 딴판이었다. 차체의 긁힌 자국을 살펴보고 있던 시언은 등 뒤에서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에 몸을 틀어 여성을 바라봤다. 시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여성은 상기된 얼굴로 시언에게 더욱 바짝 붙어왔다.
“원하시는 대로 보상해드릴게요!”
그리고 연이은 여성의 말에 일행인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후다닥 입을 열었다.
“보, 보험…!”
“됐습니다.”
하지만 남자의 말을 자르며 답하는 시언의 말에 남자와 여자, 둘 다 의아한 얼굴로 시언을 바라봤다.
“심하진 않은 것 같으니, 제가 그냥 처리하죠.”
“어… 가, 감사합니다!”
시언의 말에 남자는 진심으로 안도하며 수차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더 말을 섞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시언은 낮은 한숨을 흘리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자신을 붙잡는 여성의 행동만 없었다면.
“어머, 너무 좋으신 분이시네요. 저, 성의라고 하긴 뭐하지만, 감사의 의미로 밥이라도 한 끼….”
“됐습니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 보고자 했지만, 단칼에 잘라내고 걸음을 옮기는 시언의 행동에 여성은 시언을 더 잡지 못했다. 그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시언이 가버리고 난 후, 의도치 않게 침묵을 고수하는 율을 두고, 연회실 안에도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하지만 이내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율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재빠르게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연회실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시언이 아니었다.
제법 예쁘장한 얼굴을 한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제게 쏠리는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팔랑팔랑 뛰어 차운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는 새치름하게 자기소개했다.
“민지예용~”
그녀의 등장은 잠깐의 흥미를 끌었을 뿐,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로운 인물이 들어왔음에도 바뀌지 않는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는지, 니지가 인공호흡과도 같은 대화를 시도했다.
“근데, 노아 오빠 백수라기엔 너무 멀끔한 외모 아냐?”
“멀끔한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다행히 그녀의 처절했던 시도는 도련의 토스를 받으며 죽어가는 분위기에 조금씩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솔직히, 백수! 하면 며칠 안 감은 더벅머리에 무릎 나온 추리닝 같은 거 생각하잖아.”
“난… 우리 길드 남자들 외모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거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백수의 이미지를 피력하고 나선 KING Husband와 연이은 세츠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번 무지개 요정에게 향했다.
순식간에 짜기라도 한 듯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에 무지개 요정이 싱긋이 웃어 주자, 모두는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고 테이블 위에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연회실 안, 무지개 요정의 주위는 눈부신 광명이 비추는 듯했다.
하나둘씩 쓰러져 가는 길드원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무지개 요정은 유일하게 쓰러지지 않고, 홉뜬 눈으로 멍하니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여전히 새치름하게 눈가를 좁히고 무지개 요정을 빤히 바라보던 민지는 서둘러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저기…?”
시력이 나빴던 건지, 안경을 끼고 나서야 무지개 요정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꺅꺅 소리를 질렀다.
“꺄악! 어머! 어떡해! 너무 예뻐요! 꺄악!”
“으응…?”
“저기, 저기! 누구세요?”
“어? 나… 길마인데….”
“길마님이요? 어머, 어떡해! 길마님 너무 멋있고, 예뻐요!”
“어… 그, 그래?”
“진짜 요정님 같아요!”
“어, 응… 고맙다….”
민지에 의해서 다시금 분위기가 어색해져 가고 있었다. 무지개 요정의 광명에 테이블 위에 쓰러졌던 니지도 이건 도저히 회생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눈물을 머금던 찰나에 찰칵, 하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요…?”
낮게 울리는 듣기 좋은 목소리에 테이블 위에 쓰러져 있던 모두는 고개만을 벌떡 들어 연회실 문을 바라봤다. 참 괴기스러운 장면에 연회실로 들어서던 시언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걸음을 떼어 율의 옆에 앉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됐어?”
시언이 자리에 앉자 무지개 요정이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고, 시언은 율의 안색을 살피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냥 살짝 긁힌 거라서, 원만하게 해결하고 왔어요.”
“다행이네.”
“네.”
그리고 시언의 등장으로 다시금 회생하기 시작한 분위기에 민지가 또다시 시언의 외모를 보고는 꺅꺅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모두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소란을 떨어대는 민지와 그런 민지를 말리기 급급한 차운. 관전하듯 두 사람을 바라보던 연회실 안에 또 한 번 찰칵,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하게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고, 어딘지 심기가 불편한 듯 잔뜩 얼굴을 찡그린 예쁘장하고 아담한 여성과 그 뒤를 안절부절못하며 쫓아 들어오는 수더분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성은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실내를 둘러보다 빈자리를 찾아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남자가 허둥지둥 쫓았다. 여성은 남자가 빼주는 의자에 착석하고선 자신의 탐스러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려다 우뚝,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연회실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 중에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보였다. 조금 전 주차장에서 만났던 말로 다 할 수 없는 외모를 가진 남자.
그 남자가 감흥 없는 눈으로 자신과 자신의 옆에 앉고 있는 복세편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만남에 아네미아의 입꼬리가 숨길 수 없을 만큼 휘어 올라갔다. 이렇게까지 인연이 닿는 건 운명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아네미아는 떨리고 벅찬 마음으로 남자의 정체를 묻기 위해 표정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저….”
하지만 아네미아의 목소리는 찰칵, 하고 열리는 문소리에 묻혔다. 아무도 그녀를, 그녀가 하려던 말을 신경 쓰지 않는 듯 시선과 관심이 몽땅 열린 문으로 쏠렸고, 미아 역시도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시언의 시선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절로 문으로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선 건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던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종업원인 듯 보이는 그는 웨건에 밑반찬을 잔뜩 담고는 연회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연신 정중하고 친절한 말투로 양해를 구하며 테이블 위에 반찬들을 세팅해 갔다. 그리고 세팅이 끝난 그가 다시 정중하고 친절한 말투로 웃으며 웨건에 끌고 연회실을 나서려는 듯 문을 열었다.
아무도 서빙을 끝낸 종업원에겐 관심을 주지 않는다. 연회실 안의 길드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종업원인 듯 보이던 남자는 웨건을 밖에 서 있는 다른 종업원에게 넘기고는 문을 닫고 들어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난데없는 남자의 행동에 모두 얼떨떨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그러자 남자는 모두를 둘러보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집사입니다.”
“풉-!”
정중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가 밝히는 자기소개에 물 잔을 기울이던 도련이 마시던 물을 그대로 뿜어냈다. 그리고 도련의 입에서 분사된 물방울들은 화려하게 공중을 수놓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KING Husband의 얼굴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다.
갑작스러운 집사의 등장에 놀란 길드원들은 감정을 만끽할 새도 없이 누군가의 천연 미스트를 얼굴로 받아낸 KING Husband에게 안타까움과 유감스러움을 내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촉촉한 얼굴과는 다르게 한껏 굳어 있는 KING Husband에게 집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냅킨을 건네주며 도련 대신 사과를 했다. 그러나 도련은 집사가 그러거나 말거나 제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다급하게 물었다.
“네가 집사라고?”
“네.”
“여기서 일해?”
“아니요, 도련님을 만날 준비를 한 것뿐입니다.”
“준비?”
“예.”
군더더기 없는 집사의 대답에 얼이 빠진 도련을 대신해 이번엔 무지개 요정이 질문을 던졌다.
“준비할 게 뭐가 있어?”
“도련님을 뵙는 자리니까요. 열과 성을 다해야죠.”
“열과 성을 다한 것 치고는 꽤 늦은 것 같은데?”
“아… 한 시간쯤 전부터 와 있긴 했습니다만, 이런저런 준비와 타이밍을 재느라 많이 늦어버리고 말았네요… 죄송합니다. 도련님.”
그리고 허를 찌르는 무지개 요정의 말에 금세 시무룩해진 집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련에게 허리를 굽히며 사죄를 올렸고, 도련은 불에 댄 듯 놀라며 마구 손사래를 쳤다.
“하지 마, 하지 마! 너, 너무 캐릭터에 심취했잖아!”
도련의 말에 숙이고 있던 집사의 고개가 들렸다. 그리고는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심취한 건 도련님인데요.”
이어진 집사의 말에 도련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창피함인지 부끄러움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집사의 등장으로 유지되어 오던 도련의 포커페이스가 단번에 무너졌다는 것.
“닥치고 앉아!”
“예….”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듯 버럭 내질러진 도련의 외침에 집사는 한껏 풀이 죽은 채,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연회실 안엔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지만, 곧 다급한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저기…!”
쥐 죽은 듯 조용한 공간에 홀로 튀어나온 목소리는 당연하게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아네미아는 일순 자신에게 몰려버리는 시선에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근데, 나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소개 좀 해주면 안 될까?”
“아, 나도.”
“저도.”
그리고 그런 아네미아의 말에 동조하듯 복세편살과 집사가 끼어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아네미아와 복세편살 두 사람에게 편승해 길드원들의 소개를 종용하는 집사에게 의문을 품은 광인한 남자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집사님?”
“네?”
“누가 누군지 모르는데 도련님이 도련님인지는 어떻게 알았어요?”
광인한 남자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집사를 향했다.
“…?”
하지만 집사는 오히려 황당하다는 얼굴로 모두를 둘러봤다.
“제가 도련님을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모두의 의문은 깊어져만 갔다.
“자태와 행동거지, 말투, 그리고 남다른 아우라까지. 딱, 보는 순간 알았습니다.”
눈까지 감고 황홀하다는 듯 말을 이어 가는 집사의 행동에 모두의 마음속엔 차마 외치지 못하는 한마디가 폭풍우처럼 몰아쳤다.
그러니까 어떻게!
혼란이 아우성치는 침묵 속에 홀로 여유롭게 앉아 있는 집사만이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 사실은 톡 프로필 사진을 본 것뿐이라는 걸.
“뭐, 소란은 그쯤하고….”
아비규환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를 중재시키며, 무지개 요정은 세 사람에게 길드원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긴 노아랑 율이.”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있는 모두를 차례차례 소개한 무지개 요정이 마지막으로 시언과 율을 소개하자, 다른 길드원들을 소개할 때도 온통 정신은 시언에게 팔려 있던 아네미아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노, 노아 오빠라고요…?”
충격에 빠진 듯 더듬더듬 되묻는 그녀의 시선은 시언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시언은 아네미아에게 눈길 한번을 주지 않았다.
“아이, 그런 것보다! 다 모였으니까 이제 율님에 대한 얘기 좀 해봐요!”
모두의 소개가 끝나자 광인한 남자의 목소리가 우레처럼 터져 나왔다. 동시에 너도나도 눈을 빛내며 율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대화의 주제가 바뀌고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질문들이 튀어나오는 가운데, 좌불안석인 율에게 시언이 귓속말을 했다. 무언가를 말하며 양해를 구하듯 율의 안색을 살피고, 율은 머뭇거리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러면 시언은 또다시 무언가를 귓속말로 속삭이고, 율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그렇게 둘만의 대화를 나누던 시언과 율은 주변의 시선이 온통 자신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걸 느끼고는 바짝 붙어 있던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 율이 아닌 시언이 입을 열었다.
시언이 말해주는 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연회실 안에는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왕따?!”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같은 것을 되묻는 행동에 시언, 무지개 요정, 질풍은 절로 시선을 옮겨 율의 안색을 살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지만, 왠지 표면적으로 느껴지는 율의 분위기는 꽤 덤덤한 것 같아서 시언은 안심한 듯 긴 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지금은 자퇴해서 학교도 안 가고 있는 거고?”
“아니 대체 얼마나 애를 괴롭혔으면 자퇴까지 해?!”
세 사람이 율의 안색을 살피는 사이, 분에 겨운 KING Husband와 세츠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분에 겨워 씩씩거리는 두 사람의 행동에 시언은 재차 율을 바라봤다. 여전히 푹 숙인 고개에 시언은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나도 처음에 율님이 왕따를 당해서 학교를 자퇴했다고 직접 말해 줬을 때는 심각한 걸 몰랐는데….”
“… 뭐야?”
“뭐가 또 있어?”
의미심장하게 시작하는 시언의 이야기에 이번엔 그들의 양옆에 앉아 있는 무지개 요정과 질풍마저 불안한 눈으로 시언을 바라봤다.
“네, 그때. 새벽에 율님이 문상 사러 갔던 날.”
모두의 기억에 분명 그날은 문상을 사러 가겠다며 새벽에 나간 율이 3시간 가까이 연락이 끊겼었던 때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 가벼운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있었다는 얘기를 시언을 통해 듣게 됐었다.
하지만 시언이 고쳐 얘기해 주는 진실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참혹했다. 율이 홀로 감당했다고 생각하니 무섭고, 가슴이 아파서 다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언이 얘기를 하면 할수록 시언과 율의 정면에 앉아 있는 중2병들의 안색은 점점 더 창백하게 변해갔다. 시언은 그런 중2병들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그 이후에 율과 자신이 만나게 된 계기, 가해자들이 끊임없이 율을 찾아와 괴롭히려 한 것 등 끊이지 않는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놨다.
시언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숙연해지는 분위기 속에 율의 옆에 앉아 있던 무지개 요정이 잔뜩 움츠려 있는 율의 어깨를 잡아 돌려 제 품에 안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십과 타인의 온기에 놀란 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말았다. 그제야 미처 못 봤던 모두의 얼굴이 무지개 요정의 어깨 너머로 보였다.
율에게 타인의 시선이라는 건 폭력과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 다니던 땐, 자신에게 향했던 시선들의 대부분이 경멸과 증오, 혐오, 비아냥거림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다정한 눈빛을 보내주는 사람은 언제나 제한되어 있었다. 자신을 도와줄 거라 믿었던 선생님도, 경찰도 그들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오로지 부모님뿐이라고 생각했던 다정한 사람의 목록에 한시언이라는 사람이 추가되었고, 이제는….
“이제 괜찮아.”
끌어안은 온기를 고스란히 전해주던 무지개 요정이 한참 사념에 빠져 있던 율의 등을 토닥이며 읊조리듯 말했다. 그 말에 무지개 요정의 어깨 너머로 다른 길드원들을 바라보던 율은 눈가를 잔뜩 찌푸리며 무지개 요정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를 억누른 흐느낌 소리와 떨려오는 어깨가 안쓰러워서 무지개 요정도 덩달아 미간을 잔뜩 구길 수밖에 없었다.
“흐엉…! 율님!”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율에게 다가온 질풍이 무지개 요정에게 안겨 있는 율의 등을 감싸 안으며 울음을 터트렸고, 그걸 시작으로 길드원들이 너도나도 율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율을 달래며 위로하기 급급했다.
하지만 훈훈했던 분위기도 잠시, 날카롭게 울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모두의 행동이 일순 멈췄다.
“뭐야, 촌스럽게. 따돌림당한 게 자랑이야?”
아네미아는 팔짱을 끼고 앉아, 율의 주변에 모여 있는 길드원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미아야!”
복세편살이 서둘러 아네미아를 다그쳤지만, 아네미아는 오히려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율님 벙어리예요? 자기 일이면 직접 말하지 그래요?”
“미아야, 그만해!”
“뭘 그만해? 내가 틀린 말 했어? 노아 오빠가 무슨 대변인도 아니고, 웃기지도 않아.”
“미아….”
“학교 그만두고, 집구석에 처박혀서 게임이나 하는 게 쪽팔리지도 않나? 나 같으면 정모도 못 나오겠네. 아니, 얼마나 철판을 깔았으면 그 주제에 게임을 하고, 정모를 나올 생각을 해?”
아네미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끝내는 비웃듯이 “안 그래요? 노아 오빠?” 하고 물으며 시언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네미아는 더 웃을 수 없었다. 무표정하게 아네미아를 바라보는 시언과 율의 주변에 모여 있는 길드원들 모두 차갑게 식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시선들 속에 날이 선 말이 아네미아에게 날아들었다.
“넌 대가리가 빈 게 자랑이냐?”
“…뭐?”
“공감 능력 없어? 아니, 지능이 없냐?”
“뭐?”
“분위기 파악 못 해? 썅년 짓을 할 거면 분위기 봐가면서 해. 지금 여기서 너한테 공감해 주는 사람 없어.”
살벌하게 자신을 쏘아붙이는 세츠나의 말에 아네미아는 어안이 벙벙한 듯 연신 “뭐?”라고 되묻기만 했다.
“너야말로 지금 그 정신머리로 정모에 나올 군번이야? 자체 필터링 안 돼? 아~ 지능이 없어서 필터링이 안 되나?”
“…….”
“부탁하는데, 제발 생각 좀 하면서 살자. 추접스럽다.”
세츠나의 말에 아네미아는 부들부들 떨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내가 왜 저런 말을 들어야 해?!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리고 어떻게 내가 저런 말을 듣는데 아무도 세츠한테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
악을 써대는 아네미아의 말에도 길드원들은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아네미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 몸서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네미아는 또 한 번 소리를 빽 질렀다.
“난 갈래요! 여기 못 있겠어요!”
“가라.”
“…네?”
아마, 그녀는 누군가는 자신을 잡아 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축객령을 내리는 무지개 요정의 행동에 황당하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무슨….”
찰칵-
그리고는 무어라 말을 하려는 아네미아의 말을 자르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놀란 아네미아가 문 쪽을 바라보니 문을 열어 둔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언의 모습이 보였다. 시언은 턱짓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나가라고 말하는 시언의 행동에 아네미아는 제 입술을 짓이겨 물고 연회실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한 번 노려봤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실을 빠져나갔고, 복세편살이 허겁지겁 그 뒤를 따르자, 시언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문을 닫아 버렸다.
물을 흐리던 미꾸라지 한 마리를 내쫓고, 잠시 험한 말들이 오고 갔지만, 분위기는 다시 율을 중심으로 이어져 갔다.
“그나저나, 율이 괴롭힌 새끼들 잡아 족치고 싶네.”
“맞아요! 악랄한 새끼들….”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저 몸을 때려!”
“진짜 눈앞에 있으면 묵사발을 만들어주고 싶다.”
“잘됐네?”
각자 한마디씩 율이가 당한 괴롭힘에 대해 울분을 터트려 대던 그들은 대뜸 끼어 들어온 시언의 말에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시언은 모두의 시선에 답하듯 여유롭게 웃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있거든. 가해자 새끼들.”
시언의 말에 연회실 안엔 일순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돌았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시언에게서 중2병 3인방에게로 향했지만,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시언의 말을 무턱대고 믿지 못하는 듯했다.
긴가민가한 상황 속에서 아슬아슬한 눈치 게임이 서로를 휩쓸고 지나가고, 긴장된 분위기만이 감도는 가운데, 무지개 요정이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시언에게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무지개 요정의 물음에 중2병들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던 시언이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둬 무지개 요정을 바라봤다.
“말 그대로요.”
하지만 간결하게 답해주는 시언의 말에 무지개 요정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중2병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무지개 요정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닿자 3인방은 서둘러 시언의 말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예요? 우, 우린 저 율이란 사람 몰라요!”
“마, 맞아요! 오늘 처음 봤다고요!”
“생사람 잡지 마세요, 노아님!”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그들의 언행에 무지개 요정의 시선은 이내 그들을 벗어나 다시 시언에게 향했다. 하지만 시언의 시선은 무지개 요정이 아닌 3인방에게 향해 있었다. 눈과 미간을 더할 나위 없이 찌푸린 채.
대치하듯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시언과 3인방의 심상찮은 분위기에 율을 둘러싸고 있던 길드원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웅성거림이 번졌다.
“노아, 널 믿지 못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덜컥 믿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무지개 요정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확한 확증 없이 시언의 말만 믿기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긴 했다.
“그, 그렇죠? 노아님 정말 너무 하시는 거 아녜요?”
“저희한테 왜 그러세요?”
“이상한 트집 잡아서 저희를 길드에서 쫓아내려고 그러시는 거죠?”
그리고 무지개 요정의 말에 편승하며 기회라도 잡은 듯 시언을 몰아붙이는 3인방의 행동에 율은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시언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세 사람을 무시한 채 율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율의 핸드폰을 받아 무지개 요정에게 건넸다.
“…?”
시언의 영문 모를 행동에 무지개 요정이 얼굴로 묻자, 그는 시선을 내려 무지개 요정의 손에 들린 율의 핸드폰을 바라봤다.
“톡이랑 문자, 확인해 보세요.”
시언의 말에 분위기에 편승해 가려던 3인방의 고개가 빠르게 무지개 요정에게 향했다. 정확하게는 무지개 요정의 손에 들린 율의 핸드폰으로. 잠시 고민하던 무지개 요정은 율을 바라보며 “내가 좀 봐도 될까?” 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의 물음에 율이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자, 무지개 요정은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잠금 하나 없이 깔끔하게 나오는 바탕화면에 슬쩍 미간을 찌푸린 무지개 요정은 톡과 문자를 하나하나 확인해 가기 시작했다.
스크롤을 내리는 무지개 요정의 손놀림은 어쩔 땐 느리고, 어쩔 땐 빨랐다. 한동안 멈춰 있기도 했다. 하지만 액정의 무언가를 읽어 내리는 표정은 갈수록 차갑게 식어만 갔다.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해가는 무지개 요정의 분위기에 조급해진 3인방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실내를 울렸다.
그들의 행동은 모두의 이목을 끌 만했다. 단 한 명, 무지개 요정을 빼고. 순식간에 자신들에게 쏠리는 시선에 잠시 주춤거린 그들은 잔뜩 사색이 된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뱉으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저, 저희는 그만 갈래요.”
“네. 기, 기분 나빠서 가야겠어요.”
“불쾌해요!”
“닥치고, 앉아 있어.”
하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해 스산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율의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무지개 요정이 잔뜩 뒤틀린 입으로 짓씹듯이 뱉은 말에 3인방은 못 박힌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예사롭지 않은 무지개 요정의 분위기에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의 눈치만 보고 있기를 한참, 드디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어낸 무지개 요정이 3인방과 시언, 율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내려 율의 핸드폰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의 알 수 없는 행동에서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았을 때, 조용한 실내에 요란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정확하게 성원의 주머니 안에서 들렸고, 동시에 율의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은 무지개 요정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짧은 욕설을 뱉으며, 3인방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빠른 걸음으로 3인방에게 다가가는 무지개 요정의 모습에 다른 길드원들은 그가 테이블 위에 던져둔 율의 핸드폰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다 같이 율의 핸드폰을 둘러 보다, 무지개 요정과 똑같이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던지듯이 내려놓고는 3인방에게 달려들었다.
누군가는 멱살을 잡고, 누군가는 헤드락을 걸고, 누군가는 물을 흩뿌리고, 누군가는 빌지를 챙겨 가 매타작을 했다. 욕설과 고함, 비명이 난무하고, 엉망으로 뒤엉켜 난동을 부리다 넘어져, 테이블 위에 있던 그릇들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며 죄 깨지고, 테이블보가 벗겨져 바닥을 굴러다녔다. 연회실 안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
“거, 알만하실 분들이 이러시면 됩니까?”
죄 뜯기고, 얻어터진 얼굴로 훌쩍거리며 앉아 있는 3인방을 가리키며 말한 경찰의 날이 선 물음에 3인방의 옆에 앉아 있던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은 하나같이 세모눈을 뜨고 3인방을 노려봤다.
“어허!”
그런 길드원들의 행동에 경찰은 서류철을 책상에 내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연회실 안에서 대 난동을 부린 그들은 결국 음식점 주인의 신고로 사이좋게 정모 장소를 경찰서로 옮긴 후였다. 일렬로 주르륵 앉아 한 명의 경찰에게 훈계를 듣는 와중에도 길드원들은 3인방을 노려보기 바빴다.
말을 해도 듣지 않는 길드원들의 행태에 경찰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른쪽 분부터 이름!”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내질러진 고함에 제일 오른쪽에 앉아 있던 무지개 요정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홍채원.”
무지개 요정을 선두로 차례차례 인적사항을 밝히며 조서를 작성하는 길드원들을 바라보며, 율은 연신 안절부절못했다. 자신과 시언은 직접적인 폭력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발단은 자신이었다.
결국, 자신이 모두에게 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 율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시언은 낮은 한숨을 흘리며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시언이 보낸 이 메시지는 정말 여러 의미로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조서를 작성하면서도 경찰을 등에 업은 3인방들과 크고 작은 실랑이를 벌이던 길드원들은 결국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경찰의 고함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성인끼리의 폭력 문제도 심각한 문제인데, 성인이 미성년자를 패면 어찌합니까! 정신 못 차려요? 이 학생들이 당신들 고소하면 빼도 박도 못 해!
경찰의 고함이 길드원들을 질책하고 있을 때, 누군가 경찰서 내로 들어왔다. 동시에 경찰서의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모두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숨까지 멈추고, 경찰서로 걸어 들어온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끄럽기만 하던 실내가 음소거라도 한 듯 침묵하자 길드원들도, 3인방도, 길드원들을 혼내던 경찰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나긋나긋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오는 어우동이 있었다.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전모에 저고리 없이 말기로 가슴을 가린 어우동은 풍성하게 부풀린 치맛자락을 붙들고 기품 있게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걸을 때마다 들려오는 하이힐 소리만은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녀의 등장으로 찬물을 뿌리듯 사그라졌던 소음은 더욱 큰 웅성거림으로 탈바꿈했다. 시선과 속삭임이 그녀에게 연신 따라붙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지 유려한 턱선을 치켜들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이고, 오셨어요?”
그녀가 등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서 안쪽에서 누군가가 굽실거리며 뛰어나와 그녀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안내를 받아 경찰서 안쪽 어딘가로 사라지는 그녀의 옷자락을 쫓던 실내의 모두는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미처 표현하지 못한 심정을 얼굴로 나타냈다.
하지만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존재의 궁금증은 길게 가지 않았고, 실내는 다시금 그녀를 배제한 웅성거림으로 채워졌다. 그런 경찰서의 한쪽에선 결국, 3인방이 길드원들을 고소하겠다고 나서며 서로 간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심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서 시언만이 홀로 감흥 없는 지루한 얼굴로 연신 손목에 찬 시계만 확인할 뿐이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설전을 벌이는 길드원들과 3인방 사이를 중재하던 경찰은 자신에게 달려온 동료가 심각한 얼굴로 속삭여 준 무언가를 듣다가 화들짝 놀라며 아예 등을 돌리고 서서는 한참을 동료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났을 때, 길드원들을 타박하며 언성을 높여대던 경찰은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하고 인상 좋은 사람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길드원들에게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가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
얼떨떨한 얼굴로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경찰서를 나온 길드원들과 그 모습을 지켜보는 3인방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한시언.”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여전히 경찰서 앞에 서 있는 길드원들 사이로 누군가를 지목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자신을 부른 게 아님에도 모두의 시선은 목소리의 근원지로 향했고, 뒤돌아 상대방을 확인하려는 모두의 눈에 우아한 몸짓으로 경찰서에서 걸어 나오는 어우동이 보였다.
“호람 누나.”
그리고 연이어 그녀를 지칭하는 말과 그녀에게 다가가는 시언의 행동에 다들 경악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네가 이런 데를 다 드나들고, 어떻게 된 거야?”
“별일 아니야. 그런데 난 형한테 연락했던 것 같은데….”
“걔가 이런데 신경 쓰겠니?”
“…하긴.”
“아무튼, 난 일하다 나온 거라 다시 들어가 봐야 해.”
“응, 고마워.”
“고맙긴, 너무 요란하게 놀지만 마라. 할아버지 걱정하신다.”
“응.”
시언의 말에 그녀는 가벼운 눈웃음을 지으며 시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기품 있는 걸음으로 곧 주차장 한쪽에 주차된 차의 뒷좌석에 올랐고, 그녀가 탑승하고 얼마 되지 않아 차는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시언이 시선을 돌리자,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들이 보였다.
“누, 누구셔…?”
그리고 그들을 대표하듯 무지개 요정이 더듬더듬 물었다.
“아, 친척 누나요.”
“어우동인데…?”
“일하다 나와서 그럴 거예요.”
“일하는데 어우동을…?”
“좀 특이하게 입는 걸 좋아해서요.”
시언의 간결한 대답에 모두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무슨 일을 하기에 어우동을?
“근데… 우리는 어떻게 풀려난 거야?”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물음 대신 무지개 요정은 다른 한 가지 의문을 해결하려 했다.
“죄가 없으니까 풀려났겠죠?”
짐짓 심각하게 물었던 무지개 요정의 말에 근심 하나 없는 얼굴로 해사하게 웃으며 답하는 시언의 행동에 모두는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그나저나, 오늘 정모는 더 진행하긴 힘들 것 같네요.”
“아….”
“오늘은 그만 해산하죠.”
모두가 정신이 나가 있는 사이, 시언이 멋대로 상황을 종료시켜 버렸고, 모두는 넋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율님, 가요.”
시언은 무리 속에 덩달아 멀뚱히 서 있는 율을 챙겨서 경찰서를 벗어났다. 떠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길드원들도 몇 마디를 서로 주고받더니 각자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산하는 길드원들을 경찰서 안에서 훔쳐보던 3인방은 그제야 안심한 듯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
노아와 율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노아는 말없이 운전에만 집중했고, 율도 드물게 그런 노아에게 신경을 쓰지 않은 채,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부드러운 핸들링으로 좁은 골목을 지나 능숙하게 차를 주차한 시언은 여전히 창밖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율을 말없이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율님, 무슨 생각 해요?”
시언의 물음에도 율은 미동도 없이 계속 창밖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언이 다시 한번 “율님.” 하고 부르자, 율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시언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여러 번….”
“?”
“걔들이 죗값을 치르는 상상을 여러 번 했었어요.”
“…….”
“그래서… 아까 노아님이, 걔들이 가해자들이란 걸 밝혀주셨을 때는 통쾌하기도 했고요.”
“…….”
“타인의 손을 빌리더라도 복수하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또 모두에게 폐만 끼쳤어요.”
“…….”
“노아님한테, 길드원분들한테 모든 걸 맡기고, 한 발짝 뒤에서 겁쟁이처럼 바라보기만 했네요.”
“…….”
“미아님 말씀이 옳을지도 몰라요. 결국, 스스로 해결한 건 하나도 없고… 그래서 이렇게 뒤숭숭한 기분이 드나 봐요.”
“그럼, 율님은 아직도 그 자식들을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네?”
“슬픈가요? 직접 해결하지 못한 게?”
“?”
“왕따를 당한 것, 학교를 그만둔 것, 정모에서 그 자식들을 직접 처리하지 못한 것, 그로 인해 모두에게 피해를 준 것. 모두 후회하고 있나요?”
“노아…님?”
“아직도 그런 쓸데없는 데, 감정을 소비하는 건가요?”
“네?”
“돌이킬 수 없는 것에 슬퍼하지 말아요. 감정이 아깝잖아요. 나는 율님이 허투루 낭비하는 그 감정들조차 어디로 향하게 될지 질투가 나요. 그 자식들이건 길드원들이건.”
“무슨…?”
“어디 하나 한 방울도 남김없이 오롯이 나에게만 향했으면 좋겠어요.”
“… 네?”
“나에 관한 것만 슬퍼하고, 나에 관한 것만 후회하고, 나에 관한 것만 생각해 줄 순 없나요?”
“노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