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엉망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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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계약자가 소환 스킬을 사용하자,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빛무리가 땅을 뒤흔들며 지크프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뒤흔드는 거대한 파동과 공중에 흩날려 사라지는 빛 조각들에 둘러싸여 몸을 일으켜 세운 지크프리트의 모습에 제로사이드의 파티원들은 하나같이 환호와 박수 치는 모션을 남발했다.
[NPC] [지크프리트 : 이런 개새끼가?]
하지만 화려하고 웅장한 등장과 달리 소환되어 온 지크프리트의 첫마디는 살벌한 욕설이었다.
[제로사이드 : 왜 또 지랄이야?]
하지만 제로사이드는 익숙한 듯 받아쳤다.
[NPC] [지크프리트 : 넌 지금이 소환시간으로 보여?]
[제로사이드 : 몇 시든 내가 소환하는 때가 소환시간이지]
[NPC] [지크프리트 : 이딴 식으로 할 거면 그냥 계약 파기 하지?]
[제로사이드 : 내가 너한테 갖다 바친 공물이 얼만데?]
[NPC] [지크프리트 : 앞으로 갖다 바칠 공물이 더 아까워지기 전에 파기하자고]
[제로사이드 :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어 놓고 이제서 발을 빼시겠다?]
[제로사이드 : 엿같은 소리하지 말고 사냥이나 해]
[NPC] [지크프리트 : 싫은데?]
[제로사이드 : 뭐?]
[NPC] [지크프리트 : 이젠 너랑 더 못해먹겠다 엿 같으니까 파기하자고]
[제로사이드 : 파기는 내 관할이야 난 파기할 생각 없으니까 닥치고 사냥이나 하라고]
[NPC] [지크프리트 : 네 멋대로 해 난 파기할 때까지 손 놓을 테니까]
[제로사이드 : 그럼 한 시간 동안 배회하다가 꺼지던가]
[제로사이드 : 어차피 필요한 건 네가 귀환할 때 걸리는 버프니까]
[NPC] [지크프리트 : 매달 공물 폭탄 맞고 싶어?]
[제로사이드 : 뭐?]
[제로사이드 : 이 새끼가]
[제로사이드 : 어디서 협박 질이야? 히든엔피씨 인거 아니면 볼 것도 없을 루저 새끼 주제에]
[NPC] [지크프리트 : 루저 새끼?!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여?!]
[제로사이드 : 아 그럼 정체를 까보시던가!!]
[제로사이드 : 별 볼일없는 새끼가 운 좋게 히든엔피씨 한번 됐다고 기고만장해서는 네 새끼 상판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이미지가 그려지거든 이 루저 새끼야]
[NPC] [지크프리트 : 뭐?]
[제로사이드 : 정체 못 까발리는 것만 봐도 빤하잖아? 컨도 장비도 그저 그런 내가 주는 공물로 한 달 겨우 버티는 그런 쓰레기인생이겠지]
[NPC] [지크프리트 : ?!]
[제로사이드 : 얼마나 허접 쓰레기인지 너라는 새끼가 가지게 된 지크프리트라는 직위가 더 불쌍해지려고 한다]
[NPC] [지크프리트 : 아 ㅋㅋㅋㅋㅋ 이 새끼가 진짜 ㅋㅋㅋ]
[제로사이드 : 떫냐? 그럼 상판 까고 나와라]
[NPC] [지크프리트 : ??]
[서버] [감사합니다 : 녀러분!!!!!!!!!!! 지크프리트랑 제로사이드랑 현피 뜬대요!!!!!!]
[서버] [레몬 : 뭐요?!!!!]
[서버] [아이마이 : 어디서 뜬답니까?!!]
[서버] [감사합니다 : 그것까진 잘...]
갑자기 전해진 터무니없는 소식에 서버 전체가 떠들썩했다. 끊임없이 서버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 당사자 두 명은 침묵을 고수했지만, 현피 확정은 확실한 듯했다. 애당초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이니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놀라운 소식은 아닌 듯했지만 말이다.
[질풍 : 와 유저랑 엔피씨가 현피 ㅋㅋㅋㅋㅋ]
[광인한 남자 : 딴 세상 얘기 같네]
[니지 : 그러게 우리는 평화롭기만 한데]
[KING Husband : 그나저나 길마님은 또 어디 갔어]
[세츠나 : 새삼? 자주 팅기잖아]
[질풍 : 인터넷 좀 바꾸라니까 오지게 말 안 들으셔]
[길드 마스터 무지개 요정님이 접속하였습니다.]
[KING Husband : 아~ 길마님~]
[무지개 요정 : ??]
[질풍 : 인터넷 좀 바꿔요~ 뭐 툭하면 팅겨 싸]
[무지개 요정 : 닥치렴]
[광인한 남자 : 길마님 튕겨있는 사이에 서버에 빅 이벤트가 발생했슴돠]
[무지개 요정 : ??]
[광인한 남자 : 무려! 지크프리트와 제로사이드의 현피!!!]
[무지개 요정 : 헐?]
[세츠나 : 이걸로 지크프리트 정체 밝혀질까요?ㅋㅋㅋㅋㅋ]
[니지 : 두 사람 현피보다 지크 정체가 더 궁금하긴 한데 ㅋㅋㅋ]
[질풍 : 그건 그랰ㅋㅋㅋㅋ]
[광인한 남자 : 사실 나돜ㅋㅋㅋㅋ]
[KING Husband : ㅋㅋㅋㅋ뭐가 됐든ㅋㅋ 우리하곤 관계없지 뭐]
컴퓨터를 켜고, 의자에 앉으려던 율은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책상 위에 뒀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노아님.’
그리고 액정에 떠오른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노아님.”
「율님.」
상대방을 부르는 율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상대방도 율의 이름을 불렀다.
「율님, 나 오늘은 좀 늦게 접속할 것 같은데….」
말끝을 흘리며 얘기하는 시언의 행동에 율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오늘은 본가에 좀 다녀오려고요.」
“본가요?”
「네, 늦어도 3시 이후에는 돌아올게요.」
“네.”
「괜찮으면 다녀와서, 영화 보러 안 갈래요?」
“영화요?”
「네, 율님 괜찮으면요.」
“괜찮아요! 저도 보러 가고 싶어요.”
「그럼, 이따가 데리러 갈 테니까….」
“저, 노아님.”
「네?」
“그, 영화관 앞에서 보면 안 될까요?”
「네?」
“왔다 갔다 하시기 번거롭잖아요.”
「괜찮아요.」
“제가 그러고 싶은데… 안 될까요?”
「… 왜요?」
“노아님하고… 만날 약속을 하고, 만나 보고 싶어요.”
「아… 그래요, 그럼.」
흔쾌히 수락하는 시언의 목소리는 웃음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율은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뺨을 문지르며 쭈뼛쭈뼛 답했다.
“네.”
그 뒤로 시답잖은 대화를 몇 마디 더 나누고, 통화를 종료했지만,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때, 메시지 알림음과 함께 톡이 도착했다.
-혹시 보고 싶은 영화 있나요? 말해주면 예약해놓을게요.-
시언의 메시지를 한참을 바라보던 율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모니터로 향했다. 그리고는 어느샌가 신작 개봉 영화에 대해 검색을 해보고 있었다.
집에서 나와 주차되어 있던 차의 운전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려던 시언은 울리는 메시지 알림음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율의 답신임을 확인하고는 영화를 예매하기 위해 어플을 켰다.
“…….”
율이 보고 싶다고 하던 영화의 포스터를 보는 순간, 손이 멈춰버리고 말았다. 창백한 피부의 여인이 시커멓게 파인 눈과 입을 쩍 벌리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일명 공포영화.
시언은 절로 구겨지는 미간을 유지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식의 취향도 그렇고, 영화 취향도 그렇고, 애초에 느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어쩌면 율은 자신이 생각했던 조용하고, 소심한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잡념으로 가득한 머릿속을 하나하나 정리해 가며 손으로는 착실하게 율이 지정해 준 영화의 예매를 끝마친 시언은 헛웃음만이 남은 입가를 유지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
[길드] [아네미아 : 아 뭐야? 오늘 노아오빠 늦네?]
[길드] [도련 : ?]
[길드] [질풍 : 노아 형은 왜?]
[길드] [아네미아 : 구하고 싶은 템이 있는데 노아오빠한테 같이 가달라고 하려고~]
[길드] [KING Husband : 편살 형이랑 가면 되잖아?]
[길드] [아네미아 : 뭐? 여기서 편살 오빠가 왜 나왘ㅋㅋㅋ 내가 편살 오빠랑 무슨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들이 들으면 오해해 얘~]
[길드] [복세편살 : ;;]
[길드] [광인한 남자 : 노아 형은 누나랑 무슨 사이라서 같이 가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길드] [질풍 : 백퍼 안 가줄 것 같은데...]
[길드] [아네미아 : 너희 되게 이상하다 왜 노아오빠를 그렇게 까 내리지 못해서 안달들이야?]
[길드] [광인한 남자 : ?!]
[길드] [KING Husband : 와...정말 기가 막힌 논리다..]
[길드] [질풍 :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완전체인가..]
***
시언에게 도착한 메시지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하며 집을 나선 율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 문상을 사러 갔을 때와 같이 혼자 하는 외출이었지만,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면서도 두렵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시언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집을 나와 골목의 양쪽 길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던 율은 골목길을 냅다 달렸다. 골목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도로변이라 두려운 마음도 줄어들 것이었다. 그리고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자신의 예상대로 오고 가는 적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휴….”
불안감을 잔뜩 내포하고 있던 숨을 내뱉은 율은 골목을 달려 나오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들을 손부채질로 식혔다. 그리고 몇 달 만에 홀로 느껴보는 생소한 낮의 거리와 따가운 햇볕을 느끼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30분 남짓 걸리는 영화관까지의 거리가 유난히도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부지런히 걸은 덕에 율은 어느덧 영화관의 건너편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건너편 영화관 앞에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며 서 있는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연신 시계만 바라보던 그가 곧 시선을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건널목 건너편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멀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자신을 발견한 시언이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시간 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한 시언은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건물 밖으로 나와 율을 기다렸다. 자신이 빨리 왔음에도 불구하고, 연신 시계로 가는 시선은 막지 못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기를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시언은 건널목 건너편에 있는 율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잠시간의 기다림 끝에 신호가 바뀌고, 오고 가는 인파 속에 파묻혀 율도 건널목을 건너오는 게 보였다. 하지만 바지런하게 걷던 걸음은 어느샌가 우뚝 멈췄다.
갑작스러운 율의 행동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시언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율의 행동을 보며 눈가를 부드럽게 휘었다.
율의 옆에는 걸음이 느린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굽은 허리로 지팡이를 짚고, 다른 사람보다 현저히 느리고 좁은 보폭으로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 할머니가 느린 걸음을 최대한 서두르며 길을 건너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율은 그런 할머니를 잠시 바라보더니, 걸음을 늦춰 할머니의 뒤를 따라 걸었다. 소심한 성격의 그가 생각해 낸 최대한의 배려일 터였다. 결국, 천천히 걷는 두 사람이 건널목의 7할을 건넜을 때 신호가 바뀌었지만, 클랙슨을 울리거나, 두 사람을 향해 욕설과 고성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이 건널목을 전부 건널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줄 뿐이었다.
건널목을 다 건너고, 저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할머니를 확인한 율은 후다닥 달려 시언에게 향했다. 그리고 저를 반갑게 맞이하는 시언과 함께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팝콘도 살까요?”
“제가 살게요!”
시언의 말에 율은 말릴 새도 없이 매점으로 향했다. 이것만은 자신이 사겠다는 굳은 의지로 서둘러 주문과 계산을 한 율은 뒤늦게 다가온 시언을 보며 웃어 주었다. 주문했던 팝콘과 음료가 나오자 두 사람은 상영관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상영관이 있는 층에 도착했지만,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은 상당히 적었다. 공포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영화를 다 보고, 율과 함께 지하주차장으로 향한 시언은 율에게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잔뜩 지쳐 보이는 표정에 실소가 터질 것만 같았다. 율은 공포영화를 좋아하지만, 잘 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자신의 옆에서 연신 숨을 집어삼키며 몸서리를 쳐댔다. 게다가 팝콘으로 폭죽을 터트릴 것만 같아, 결국 팝콘도 자신이 들고 있어야만 했다.
조수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율의 모습을 확인한 시언이 운전석에 올라 차를 출발시켰다. 지하주차장을 나와 매끄럽게 도로로 빠져나가게 하는 시언의 핸들링을 빤히 바라보던 율은 전방을 바라보는 시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다음에도… 저랑 영화 봐주실 거예요?”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묻는 율의 말에 시언이 잠시 시선을 돌려 율을 바라봤다.
“당연하죠.”
그리고 다시 전방으로 향하는 시언의 얼굴과 동시에 들려온 답에 율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럼, 다음에는 저랑 걸어서 오지 않으실래요?”
“걸어서요?”
“네. 노아님하고 걷고 싶어서요….”
율의 말이 의외였던 듯 잠시 놀란 얼굴로 율을 곁눈질하던 시언은 커브 길에서 부드럽게 핸들링을 하며 웃었다.
“그럴까요, 그럼?”
걸어서 올 때는 30분이 걸리던 거리도 차를 타니 10분 남짓이었다. 능숙하게 주차를 하고 운전석에서 내리는 시언의 행동에 율은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저도 얼른 조수석에서 내려섰다.
“뭔가, 같이 있기도 모호한 시간이네요.”
운전석에서 내려 자신에게 다가온 시언의 말에 율은 시간을 확인했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그러게요….”
확실히 조금 애매한 시간이었다. 왠지 모를 허무함에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던 율은 자신을 부르는 시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율님.”
“?”
“이후는 게임에서 보죠.”
“아… 네.”
잔뜩 풀 죽어 보이는 율의 모습에 시언은 조심스레 그의 손을 쥐고는 집 앞까지 이끌었다. 집 앞까지라고는 해도 몇 발자국 걷지 않아도 도착하는 거리라서 서로 손을 잡은 시간도 짧기만 했다.
“들어가요.”
도착한 집 앞 계단에서 자신을 배웅하려는 시언의 태도에 율이 다급하게 시언의 손을 잡았다.
“저…기!”
“??”
난데없는 율의 행동에 시언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율을 내려다보자, 율은 시언을 올려다보며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우물거렸다.
“시…!”
“시?”
“시…!”
뭘 말하고 싶기에 이렇게 힘들어 하나 싶었는데, 시도를 거듭할수록 율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제야 율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버린 시언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제 이름을 부르고 싶어 하던 것이었다.
터진 웃음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던 시언은 저 때문에 울상이 되어버린 율의 얼굴을 바라보다 불시에 그에게 입을 맞췄다.
“!”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율의 사고는 일순 정지해버렸다. 백지처럼 변한 머리가 다시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순간, 시언이 율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들어가, 율아.”
***
늦은 오후, 평화롭기만 하던 인벤에 하나의 게시물이 게시됐다. 게시물의 제목은 ‘초상권? 좆까라그래.’
의아한 마음에 클릭해 본 사람들의 눈에는 단출한 사진 한 장이 보였다. 약간 측면으로 뒤돌아 서 있는 남자 한 명과 그 남자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엄청난 미모를 가진 미인이 찍혀 있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사진의 밑에는 상황을 설명하는 한 줄의 글이 있었다.
제로사이드, 지크프리트 현피中 도촬.
[서버] [초코초코 : 님들!!!!!!!!인벤!!!!!!!!!]
[서버] [떡볶이 : ???]
[서버] [초코초코 : 누가 제로지크 현피 하는 거 도촬해서 올렸어여!!!!!!!!!]
[서버] [현기차 : 나도 봤음!!!! 뒷모습은 제로님이고 얼굴보이는 게 지크래요!!! 근데 지크 엄청 이쁘던데 여자임???]
[서버] [감귤 : ㄴㄴ남자래요]
[서버] [현기차 : 그 얼굴이 남자라그여?!]
[서버] [초코초코 : 지크의 정체가 궁금하셨던 분들!!! 인벤에서 얼굴확인 좀요!! 누군지 밝혀냅시다!!!]
[서버] [감귤 : 옳소!!!!!!!!!]
[길드] [세츠나 : 뭔 난리래?]
[길드] [질풍 : 나도 인벤 가볼래!!]
[길드] [광인한 남자 : 나도 궁금하다!]
[길드] [KING Husband : 호옹이!]
[길드] [니지 : 얼마나 이쁘길래 저러냐!!]
[길드] [도련 : 오?]
[길드] [집사 : 가시죠, 도련님.]
[길드] [아네미아 : 나도 가볼래]
[길드] [복세편살 : ㅇㅇ나도]
그리고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우루루 인벤으로 몰려간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은 곧, 하나같이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사진 속 지크프리트라는 미인은 분명, 얼마 전에 정모에서 만났던 자신들의 길마, 무지개 요정의 얼굴이었다.
현피의 노고를 풀 듯, 저녁 느지막하게 접속을 한 무지개 요정은 서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지크프리트의 도촬 사진이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 따위도 알 수가 없었다.
[길드 마스터 무지개 요정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광인한 남자 : 길마님!!!!!!!!!]
[도련 : 와!!!길마님!!!]
[집사 : /박수]
[니지 : 요정님!!!!!]
[질풍 : 무지개 요정이 살고 있는 무지개 언덕에 어서 오세요!!!!!!!!]
[세츠나 : 길마님!!!]
[KING Husband : 와 길마님 무서운 사람이네!!!]
[무지개 요정 : 뭐;]
[무지개 요정 : 뭔데??; 왜들이래?]
[KING Husband : 우리를 감쪽같이 속이고!!]
[광인한 남자 : 뭘~ 모르는 척을~]
[무지개 요정 : 뭐를..?;]
[질풍 : 길마님 지크프리트잖아요!!!]
[무지개 요정 : ㅁ누ㅡ스ㄴ소ㄹ;야?]
[세츠나 : 오타 나는 거봨ㅋㅋㅋ]
[니지 : 당황하셧엌ㅋㅋㅋ]
[무지개 요정 : 뭔 지크프리트? 하하; 무슨 소리 하는 건짘ㅋㅋㅋㅋ]
[도련 : 발뺌해도 소용없어요..]
[집사 : 인벤에 길마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붙었던데요]
[무지개 요정 : ...?]
[무지개 요정 : 뭣?!]
길드원들의 말에 불에 덴 듯 놀란 무지개 요정은 서둘러 게임 창을 내리고 인벤에 들어갔다. 그리고 핫 플레이스가 되어 있는 ‘초상권? 좆까라그래.’라는 게시물을 확인했다. 글을 클릭해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제로사이드의 못생긴 뒤통수와 자신의 신이 빚은 미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커다란 사진 한 장이었다.
“이, 시벌?”
절로 튀어나온 욕설과 함께 키보드워리어 마냥 자판을 두드려 대던 무지개 요정의 분주하던 손놀림이 일순 멈췄다. 이곳에 댓글을 쓰면 지크프리트가 자신인 걸 온 서버에 광고하는 꼴이었다. 결국, 한참에 걸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인 무지개 요정은 여전히 모니터 안에 떡하니 띄워져 있는 사진 때문에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슬쩍 풀었다. 사진 하나는 참 기가 막히게 잘 찍어 놨네.
아쉽게도 게시물에 달린 수천 개의 답글 행렬에 참여하지 못하고, 인벤을 끄고 나온 무지개 요정은 내렸던 게임 창을 올리며 나름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다. 실제 얼굴이 공개됐을 뿐, 저게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건 길드원들뿐이니 입단속을 조금 시켜두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복잡하고 심각할 것만 같던 문제가 간단한 해답을 끝으로 일단락 지어지는 기분에 흥얼거리며 전환된 게임 화면을 바라보던 무지개 요정은 볼썽사납게 튀어나오는 비명을 막을 수 없었다.
[서버] [홍(虹)안의 성녀⋩⊰민지⊱⋨ : 저 인벤에 지크프리트 알아요!!!]
[서버] [초코초코 : 헐?!! 민지님 레알?]
[서버] [겨울 : 대박!! 누구예요?!]
[서버] [홍(虹)안의 성녀⋩⊰민지⊱⋨ : ㅎㅎㅎㅎ~]
[서버] [노린내 : 뜸 뜰이지 말고 빨리 알려줘요!!]
[서버] [홍(虹)안의 성녀⋩⊰민지⊱⋨ : 저희길드 길마님이세요~]
[서버] [초코초코 : 길마님이요?? 길드가 어딘데요?! 길마가 누군데요!?!]
[서버] [제로사이드 : 누군데요?]
[서버] [겨울 : 헐? 제로님이다]
[서버] [초코초코 : 헐?!]
[서버] [모나미 : 와...]
[서버] [제로사이드 : 민지님 지크프리트 누구예요?]
[서버] [홍(虹)안의 성녀⋩⊰민지⊱⋨ : 저희 길마님! 요정님이요!]
[서버] [제로사이드 : 요정?]
[길드] [무지개 요정 : 안 돼!!!!!!!!!!!!!!!!!!!!!!!!!!!!!!]
[길드] [질풍 : 어;;;]
[길드] [무지개 요정 : 누가 좀 말려!!!!!!!!!]
[길드] [도련 : 와...]
[길드원 노아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원 율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서버] [홍(虹)안의 성녀⋩⊰민지⊱⋨ : 장차 제 남편 되실 거예요~ /부끄]
[서버] [제로사이드 : 설마...레인보우 힐 무지개 요정님이요?]
[길드] [무지개 요정 : 아아아아아아악!!!!!]
[길드] [노아 : 안녕....뭐야?]
[길드] [율 : 안녕하세요]
[길드] [율 : ??]
[길드] [세츠나 : 아...저게 결국 사고 치네...노아오빠 막내 안녕]
[길드] [KING Husband : 까발려져도 되는 거예요 길마님?;]
[길드] [광인한 남자 : 타이밍 오졌다...]
[길드] [무지개 요정 : 니ㅏ니ㅏㅓ라ㄴㄹ아다ㅔㅏ아ㅓ라ㅓㅇ니ㅓ]
[길드] [노아 : 뭔 일이에요?]
[길드] [율 : 무슨 일 있었어요?]
접속하고 펼쳐진 난데없는 상황들에 이해가 가질 않던 시언과 율은 쉼터에 모여든 길드원들이 설명해주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노아 : 길마님이 지크프리트?]
[KING Husband : 그렇다나봐]
[무지개 요정 : 저 망할 중2병들이 내 발목까지 잡는구나 시부라류ㅠㅠㅠㅠ!!]
[율 : 우와...근데 길마님 멋져요]
[무지개 요정 : ㅠㅠㅠㅠ응? 증말?]
[율 : 네]
[무지개 요정 : 흫흐~ 사랑한다 내 새끼♥(〃 ´з` 〃 )♥]
[노아 : ...]
[KING Husband : 그나저나 우리길드 진짜 장난 아니네...]
[광인한 남자 : 그러게...히든의 집결지도 아니고..]
[질풍 : 내가 초라해 보인다...]
[도련 : 그런데 길마님은 지크인거 왜 숨긴 거예요?]
[세츠나 : 그러게 무슨 이유라도 있었어요?]
[니지 : 보통은 자기가 히든 엔피씨인거 안 숨기잖아요]
[무지개 요정 : 그냥...오픈했을 때의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서..]
[질풍 : ...]
[도련 : 시답잖구만..]
[KING Husband : 나이 값 좀 해요.....]
[무지개 요정 : ...]
[무지개 요정 : 너희는 왜 나에 대한 존경이란 걸 찾아볼 수 없는 걸까..]
[세츠나 : 그런 것보다! 현피는 어떻게 됐어요?]
[무지개 요정 : 그런 것....]
[광인한 남자 : 맞아요!!현피!! 누가 이겼어요?!]
[질풍 : 설마 국보급 외모인데 제로한테 맞고 오신 건 아니죠?!]
[무지개 요정 : 국보급.../부끄]
[질풍 : /경멸]
[무지개 요정 : ...]
[KING Husband : 썰 좀 풀어주세요]
[무지개 요정 : 현피랄 것도 없었는데..]
[니지 : ???]
[세츠나 : 왜요?]
[무지개 요정 : 몰라 제로 그 새끼가 날 보자마자 내 외모에 충격을 먹었는지 한참을 멍 때리다 그냥 가버렸거든]
[광인한 남자 : 확실히..함부로 주먹을 올릴 수 없는 외모긴 하지..]
[질풍 : 그럼 사진을 찍은 건 누구예요?]
[무지개 요정 : 그걸 모르겠네...분명 제로새끼는 혼자 온 것 같았는데..]
[제로사이드 : 새끼가 뭡니까? 새끼가]
길드원들과 대화 중이던 무지개 요정은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낯설지만 익숙한 아이디에 또 한 번 볼썽사나운 비명을 꽥 질렀다.
[무지개 요정 : 뭐야?!]
[질풍 : 헐;]
[노아 : ?]
[도련 : 어?]
그리고 무지개 요정을 포함한 모두를 놀라게 한 제로사이드는 성큼성큼 쉼터 안으로 걸어 들어와 무지개 요정의 앞에 섰다.
[제로사이드 : 안 그래도 인벤 건 때문에 왔어요]
[무지개 요정 : 뭐? 인벤?]
[제로사이드 : 네 제가 현피 나갈 때 장소를 꽃잔한테만 얘기 했었는데 그게 슬쩍 새어나간 모양이에요]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그런데 좀 극성스러운 몇 명이 쫓아와서 사진을 찍었나 봐요 게다가 사진을 인벤에 올린 것 같고요]
[제로사이드 : 그 부분은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
[무지개 요정 : 잠깐!!!!]
[제로사이드 : ??]
[무지개 요정 : 너 약 쳐먹었어? 왜 갑자기 존대를 해?]
[제로사이드 : ㅡㅡ]
[제로사이드 : 아나 진짜...]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저만 요정님한테 싸가지 없었던 건 아니잖아요]
[무지개 요정 : 뭐?]
[제로사이드 : 요정님도 저 못지않게 저한테 싸가지 없으셨거든요 처음 계약 맺었을 때부터!]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그쪽은 내가 누군지 아니까 싫어했던 거라고 쳐도! 난 그쪽이 누군지도 몰랐는데 대놓고 싫어하는 반응을 보이면 누가 좋게 대할 수 있겠어요?]
[무지개 요정 : 내가 언제 그랬어? 난 네가 소환시간을 제대로 안 지켜서..]
[제로사이드 : 아 그건 일부러였어요 엿 먹어보라고]
[무지개 요정 : 뭐?!]
[제로사이드 : 요정님은 소환 때문에라고 하시는데 분명 처음 계약 맺었을 때부터 저 싫어하셨어요]
[무지개 요정 : 내가 언제?!]
[제로사이드 : 머스킷에서 있었던 일들 때문에 그러셨던 거겠죠]
[무지개 요정 : 뭐? 내가 그렇게 속 좁은 사람 같아?]
[도련 : 잠깐 잠깐만요!!]
길드원들이 병풍이라도 되는 듯 신경도 쓰지 않고 둘만의 대화를 이어가며 언쟁을 벌이던 무지개 요정과 제로사이드 사이에 다급한 도련의 채팅이 끼어들었다. 그 덕에 대화의 흐름이 끊겨, 길드원들이 질문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KING Husband : 뭔데요? 두 사람 계약 이전에 서로 알던 사이?]
[세츠나 : 머스킷은 왜 나와요??]
[니지 : 뭐가 어떻게 된 건데요?]
[질풍 : 어떻게 아는 사이??]
[광인한 남자 : 머스킷하고 우리는 접점이라고는 없었잖아요??]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
[제로사이드 : 길드원들은 모르나보네요?]
[제로사이드 : 요정님 머스킷 출신인거?]
의외로 허심탄회하게 답을 준 건 제로사이드였다.
[질풍 : 에엑?!]
[광인한 남자 : 레알?!!]
[니지 : 진짜요??]
[세츠나 : 세상 맙소사..]
[KING Husband : 헐 대박사건]
[도련 : 헐...]
[집사 : 흥미롭네요.]
[율 : 와...]
[노아 : ...]
[도련 : 그런데..길마님이 제로님 싫어하는 이유는..?]
[무지개 요정 : 그건..]
[제로사이드 : 대우가 달랐던 것 때문이겠죠]
[KING Husband : ??]
[질풍 : ?!]
[제로사이드 : 요정님이랑 저 비슷한 시기에 히든 스킬을 열었거든요]
[세츠나 : 그런데요..?]
[제로사이드 : 그 당시 머스킷 길마님은 타산적이고 속물적인 사람이라 렙도 장비도 더 나은 저한테 부 길마 자리를 주셨고 요정님은 무시하셨어요]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그래서 요정님은 길드를 나가서 새로운 길드를 직접 만들었고 전 이후에 머스킷 길마자리를 양도 받았죠]
[니지 : 길마님 속 좁앗!]
[무지개 요정 : 뭣?!]
[질풍 : 어디 가서 우리 길마님이라고 하지 말아요]
[세츠나 : 얼굴한테 사과해요]
[KING Husband : 그건 전 길마를 탓할 일이잖아요..]
[광인한 남자 : 제로님은 잘못 없으신 거 아녜요?]
[제로사이드 : 제 탓도 아예 없다고는 못해요 당시 상황에 심취해서 저도 요정님을 무시했으니까요]
[제로사이드 : 그래도 지금은 요정님 길드 나간게 다행이라고 생각되네요]
[무지개 요정 : 뭐?]
[제로사이드 : 머스킷 보다 더 좋은 길드 만드셨잖아요]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아무튼 오늘 인벤 건은 죄송하게 됐어요 게시물도 삭제했고 글 올린 길드원들은 강퇴 조치했어요 그래도 초상권 침해한건 맞으니까 신고하시려면 해주세요]
[무지개 요정 : 됐어...이미 팔린 얼굴...]
[제로사이드 : ?]
[무지개 요정 : 그만 가라...솔직히 그냥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계약도 파기해주면 좋고]
[제로사이드 : 싫어요]
[무지개 요정 : 뭐?]
[제로사이드 : 요정님한테 반했거든요]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첫눈에 반했다고요]
이날 제로사이드의 폭탄 발언에 길드원들은 충격에 빠졌지만, 제일 충격을 받은 사람은 아무래도 무지개 요정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제로사이드의 고백 이후 말없이 로그아웃해 버렸으니 말이다.
무지개 요정이 나가버리고 난 후, 제로사이드는 남아 있던 길드원들에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쉼터를 떠났다. 연이어 줄줄이 터지는 사건들에 사고가 따라가지 못해 피곤해진 길드원들은 좀 쉬어야겠다며 너도나도 접속을 종료했지만, 노아와 함께 덩그러니 쉼터에 남아 있던 율은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공개해버린 제로사이드의 행동이 그저 부럽기만 했다.
침대에 앉아 노아가 보낸 톡을 하염없이 보고 있던 율은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길드에 자신들의 사이를 알린다면 더욱 곤란해지는 건 누굴까? 자신일까? 아니면 시언일까?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시언은 자신에게 뭐라고 말해줄까? 난감해하며 얼굴을 찌푸릴까? 아니면 평소처럼 괜찮다며 웃어 줄까?
율은 거칠게 머리를 흔들며 상념을 떨쳐냈다. 자신의 심정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데, 시언의 반응을 유추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쥐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시언의 톡을 바라봤다.
-율아, 오늘은 10시쯤 데리러 갈게.-
핸드폰을 들여다본 율은 연이어 시간을 확인했다. 9시 30분. 아직 그가 자신을 데리러 오려면 30분 남짓이 남아 있었다. 왠지 평소보다 시간이 더 더디게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1분 1초 지나가는 시간을 전부 세어보던 율의 귓가에 딩동, 하고 울리는 현관 벨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율은 다급하게 현관으로 향했다.
찰칵, 하고 잠금쇠 풀리는 소리와 함께 벌컥 열리는 문을 바라보던 시언은 문 안쪽에서 튕기듯 나오는 율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손을 뻗었다.
“넘어져…!”
결국, 주체 못 한 속도감에 시언의 팔에 엉기며 저지당한 율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반가워했다.
예상 못 한 방식과 모습으로 자신을 반기는 율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린 시언은 제 팔에 여전히 엉겨 있는 율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시언이 내민 건 핸드폰이었다.
“…?”
난데없이 내밀어지는 핸드폰에 의아해진 율이 시언을 올려다보자 시언은 평소와 다름없이 웃으며 핸드폰을 율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앞으론 이거 쓰자.”
“네?”
“지금 쓰고 있는 거, 아직 그놈들한테 연락 오잖아?”
“아.”
“지금 쓰고 있는 핸드폰은 나한테 주고, 이젠 이거 써.”
반강제로 자신의 핸드폰을 뺏어가고, 새 핸드폰을 쥐여 주는 시언의 행동에 율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자신의 핸드폰을 빼앗기고 말았다.
[길드원 율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 [율 : 안녕하세요]
[길드] [질풍 : 하잉~]
[길드] [복세편살 : 안녕~]
[길드] [광인한 남자 : 굿모닝!]
[길드] [KING Husband : ㅎ2ㅎ2]
[길드] [도련 : 어서와~]
[길드] [집사 : 어서와, 막내.]
[길드] [무지개 요정 : 내 새끼 왔누~]
[길드] [율 : 네 ㅋㅋ]
길드원들과 살갑게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 타박타박하는 정갈한 발소리가 복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율의 옆으로 다가온 시언이 자리에 앉아 게임에 접속했다.
[컴패니언 노아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원 노아님이 접속하였습니다.]
[노아 : 하이]
그리고 던져진 인사에 길드원들이 와글와글 인사말들을 건넸다.
[질풍 : 하잉!]
[광인한 남자 : 오늘도 율이랑 거의 동시접속이네?]
[KING Husband : 뭔가 있어..두 사람 뭔가 있어..]
[노아 : 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언의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에 왠지 초조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던 율은 뭔가를 결심한 듯, 흘끗흘끗 노아를 곁눈질하며 머뭇머뭇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율 : 형..]
“…?”
그리고 율이 띄운 채팅 한마디에 시언이 시선을 돌려 율을 바라봤다. 하지만 율은 시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모니터만 뚫어지라 바라봤다. 하지만 목에서 귀까지 붉게 달아오른 모습은 숨기지 못했다.
그런 율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시언은 기분 좋은 듯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고, 자신의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리고 머금었던 커피를 뿜어낼 뻔했다.
[무지개 요정 : 왜에~]
[질풍 : 응?]
[광인한 남자 : 왱?]
[KING Husband : 막내 왜?]
[도련 : 불렀어??]
[집사 : ??]
[복세편살 : 응?]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한 시언의 귓가에 “으아….” 하는 앓는 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좀 전까진 빨갛게 익은 얼굴을 하고 있던 율이 이번에는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선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형.’이라고 지칭하기엔 형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꼼수가르뎅 : 그런데 왜 노아님하고 율님은 항상 같이 사냥을 다니는 거예요?]
[노아 : ?]
[율 : ?]
[꼼수가르뎅 : 꼭 둘이서 같이 사냥을 갈 필요는 없는 거 아녜요?]
[큐컴버 : 맞아요 우리도 그냥 프리 말고 아크비숍이랑 사냥가보고 싶단 말이에요]
[KING Husband : 그걸 따지기 전에 너희는 저 두 사람하고 렙도 안 맞잖냐?]
[큐컴버 : 아니 꼭 우리가 아니라요...]
[꼼수가르뎅 : 네;]
[꼼수가르뎅 : 그...]
[꼼수가르뎅 : 저희 같은 격수들이 아크비숍이랑 사냥가보고 싶은 만큼 프리들도.. 퓨리나이트랑 사냥가보고 싶지 않겠어요?!]
드물게 모든 길드원이 쉼터에 모여 있던 한가한 오후, 대뜸 노아와 율, 두 사람을 겨냥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불만은 제기한 건 지난번 길드원 모집으로 들어온 신입 두 명. 그리고 두 사람을 부추긴 게 누구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도련 : 스킬자체가 서로에게 최적화 되어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하고 사냥을 가야할 이유가 있나?]
[집사 : 그러게 말입니다.]
[노아 : 아니 길드에 좋은 격수야 많으니까 율이가 누구하고 사냥을 가건 상관은 없겠는데 우리 길드에 내 성에 차는 프리는 율이 밖에 없는데?]
[율 : ㅎ;]
[세츠나 : 나 디스당한거야...?]
[노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노아 : 넌 솔직히 부담스러워]
[세츠나 : -ㅛ-?]
[니지 : 인정]
[질풍 : 인정]
[광인한 남자 : 인정]
[KING Husband : 인정]
[세츠나 : 시방 나 돌려 깎기 하는겨?]
[노아 : 뭐랄까..너의 성에 차는 격수가 있을까 싶다..]
[세츠나 : 인정]
[니지 : 뭐옄ㅋㅋㅋ너무햌ㅋㅋㅋㅋ]
순식간에 대화의 주제가 바뀌어버리는 상황에 아무 말도 없이 얌전하게 앉아만 있던 아네미아가 다급해진 듯 불시에 대화를 끊고 들어왔다.
[아네미아 : 그러지 말고 다른 사람들하고도 사냥 다녀보면 좋잖아요!]
[율 : 왕광풍 형들이랑은 많이 다녀봤는데요..]
[아네미아 : 노아오빤 아니잖아요?]
[율 : ;;]
[노아 : 율이랑 안갈 바엔 솔플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아네미아 : 그러지 말고...쟤들도 아크비숍하고 사냥해보고 싶다고 하니까..]
[노아 : 난 싫은데요?]
[아네미아 : 그럼 율님만 이라도...]
[노아 : 그게 싫다니까?]
[아네미아 : ??]
[노아 : 내 컴패니언이야 ㅋㅋㅋ 왜 다른 사람한테 적선하듯 내어줘야 하는 건데요?]
[노아 :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둘이라니? 율이 개고생할거 불 보듯 뻔한데?]
[아네미아 : 쟤들 내가 데리고 다녀서 컨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노아 : 퍽이나?]
[아네미아 : !?]
[무지개 요정 : 시끄럽다 임마들아]
[제로사이드 : 보기 좋은데요 왜?]
[무지개 요정 : 넌 왜 자꾸 오고 지랄이야?]
[제로사이드 : 형 보러]
[무지개 요정 : 내가 왜 네 형이야?! 언제 봤다고 형이야!]
[제로사이드 : 그럼 누나할래요?]
[무지개 요정 : 어메..시벌..]
제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속 긁는 소리만 늘어놓는 제로를 피해서 아예 시야를 돌려 버린 무지개 요정은 길드원들을 향해 나긋하게 말했다.
[무지개 요정 : 난 저 암 덩어리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싸우지들 말고...몸으로 부딪쳐 보고 오련?]
[제로사이드 : 형도 저랑 몸으로 부딪쳐 보지 않을래요?]
[무지개 요정 : ?!]
제로의 내일 없는 돌진으로 넋이 나간 무지개 요정이 말을 잃은 사이, 다른 길드원들은 곧 심기가 불편해질 무지개 요정을 피해 다들 쉼터를 벗어나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들 삽시간에 흩어지고 정적만 남은 쉼터에 제로사이드와 둘만 남은 무지개 요정은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듯 쉼터로 달려 들어오는 한 캐릭터를 바라보며 낮은 신음과 함께 제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홍(虹)안의 성녀⋩⊰민지⊱⋨ : 길마님~]
[제로사이드 : ??]
신나서 외쳐 부른 채팅에 대답해 준 건 무지개 요정이 아니었다. 정적을 유지하는 무지개 요정 대신 의문이 가득 담긴 물음표를 띄운 제로를 보며 민지도 덩달아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홍(虹)안의 성녀⋩⊰민지⊱⋨ : 웅? 이 사람 누구에여?]
[제로사이드 : 아이디 꼬라지 하고는...너야 말로 뭔데?]
[홍(虹)안의 성녀⋩⊰민지⊱⋨ : 저는 우리 길마님 애인 될 사람이에여~/ㅅ/]
[제로사이드 : ?!]
[무지개 요정 : 넌...이제 우리길드원도 아닌데.. 왜 자꾸 오는 거야?]
[홍(虹)안의 성녀⋩⊰민지⊱⋨ : 그러니까 다시 넣어주세요~ 다시 넣어주시면 문제 없잖아여~]
[무지개 요정 : 그건 재고할 생각이 없다고..]
[홍(虹)안의 성녀⋩⊰민지⊱⋨ : 재고가 뭐에여?]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형 이 골빈 애는 뭐예요?]
[홍(虹)안의 성녀⋩⊰민지⊱⋨ : 골빈 애여?]
[제로사이드 : 설마...진짜 형 애인은 아니죠?ㅋㅋㅋㅋ]
[무지개 요정 : 끔찍한 소리..]
[홍(虹)안의 성녀⋩⊰민지⊱⋨ : 히잉...왜여ㅠㅠㅠ]
[제로사이드 : 다행이네?ㅋㅋㅋㅋ 나 순간 형 수준까지 의심할 뻔했잖아요]
[무지개 요정 : 제발 둘 다 꺼져주렴...]
[무지개 요정 : 제로 넌 너네 쉼터가고...민지 너는 네 남친 무리한테 가라..]
[제로사이드 : 싫어요]
[홍(虹)안의 성녀⋩⊰민지⊱⋨ : 싫어여]
[무지개 요정 : ...]
[홍(虹)안의 성녀⋩⊰민지⊱⋨ : 그리고 김차운 이제 제 남친아니에여~ 헤어졌어여~ 그 세 명은 다른 길드 들어갔그여~]
[무지개 요정 : 다른...길드?]
[홍(虹)안의 성녀⋩⊰민지⊱⋨ : 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