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역풍(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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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 그래서 어쩌자고요?]
[아네미아 : 따로 가는 건 싫다고 하시니까 차라리 다 같이 사냥가자고요]
[노아 : 우리가 왜?]
[아네미아 : 다른 길드하고는 스왑도 진행해 주셨잖아요...저희는 같은 길드원인데 그 정도도 못해주세요?]
[아네미아 : 그리고...꼼수나 오이의 컨이 노아오빠보다 율님한테 더 잘 맞을지도 모르잖아요]
[아네미아 : 또 노아오빠한테도 율님 컨보다 제 컨이 더 잘 맞을지도 모르는 거고요]
[꼼수가르뎅 : 맞아요!!]
[큐컴버 : 역시 미아누님!]
[율 : 전 그냥 노아님하고 다니는 게 좋은데..]
[아네미아 : 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가만있지 그래요?]
[율 : ;]
[아네미아 : 노아오빠~ 한번만 같이 가봐요~]
[아네미아 : 어차피 노아오빠가 그러겠다고 하면 율님도 할 게 뻔하잖아요~]
시언은 아까부터 율을 무시하고 깔보는 듯한 아네미아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속셈은 열 길 물속을 알 듯 뻔하기만 했다. 율과 그녀가 같은 파티에서 보조했던 건, 전에 갔었던 거울 던전뿐이었다.
그때 율이 잠에 취해 실수한 덕에 그녀는 아무래도 율을 깔보고 있는 듯했다. 자신이 백날 감싸주고, 율을 옹호한다고 해도 그녀는 아마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바엔 그냥 보여주고 굴복시키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아 : 어디로 가고 싶은 건데요?]
잠깐의 침묵 끝에 올라온 노아의 말에 모니터를 바라보던 아네미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꼼수가르뎅 : 통곡의 계곡가요!]
[큐컴버 : 아니야!! 이미르의 심장가요!]
[아네미아 : ㅋㅋㅋㅋ 거긴 너무 쉽잖아~ 노아오빠! 나 칸디의 롯드 필요한데 우리 링비가요!]
[노아 : 칸디의롯드?]
아네미아의 말을 되뇌던 시언은 문득 칸디의 롯드가 율의 무기 성장재료 아이템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제 옆에 앉아 있던 율에게 말을 건넸다.
“율아, 네 무기 성장 다음 단계 재료가 칸디의 롯드 아니었나?”
“아, 맞아요.”
[노아 : 가죠 롯드 구하러]
[아네미아 : !]
목적지를 정하고, 링비 섬으로 출발하려던 시언은 문득 링비 섬은 암 속성 갑옷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노아 : 그러고 보니 링비는 암속 갑옷 필수일 텐데 다들 가지고 있나요?]
[아네미아 : 그럼요~]
[꼼수가르뎅 : 옙!]
[큐컴버 : 오키!]
[율 : 저; 없어요..]
[노아 : 아,그런가?]
[아네미아 : 아 뭐야...]
[노아 : 길드원들한테 빌릴 수 있나 물어보고 없다 그러면 사오던가 아니면 링비는 다음에 가죠]
[큐컴버 : ...]
[꼼수가르뎅 : 헐...]
[길드] [노아 : 혹시 율이한테 암속 갑옷 빌려줄 수 있는 사람?]
[길드] [질풍 : 나!!!]
[길드] [질풍 : 아...내꺼 직업전용이다..]
[길드] [세츠나 : 아...내건 귀속인데;]
[길드] [KING Husband : 내건 마법사 복사 착용불가야..]
[길드] [집사 : 불충한 집사라 죄송합니다..]
[길드] [도련 : 나도 직업전용인데...]
[길드] [크로이츠 : 아 저 있어요 빌려드릴게요]
[길드] [율 : 감사합니다ㅠㅠㅠ]
[길드] [크로이츠 : 에이~ 자기! 우리사이에 뭘~]
[노아 : ...]
[율 : 크로이츠님한테 갑옷 받아올게요]
[노아 : 내가 받아올게 기다려]
[율 : 네?]
율이 답하기도 전에 귀환 스킬을 써서 마을로 가버린 노아는 크로이츠에게 갑옷을 받아서 율에게 건네주었다. 어딘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 신경 쓰였지만, 파티는 링비 섬을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던전에 들어온 이후, 노아와 율은 서로 다른 사정으로 인내심의 한계가 오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너무나도 기가 차는 떨거지 3명의 행동 때문이었다.
꼼수가르뎅과 큐컴버는 렙에 맞지 않는 던전이라는 이유로 몸을 사리며 제대로 된 딜을 넣지 않았고, 아네미아는 그런 두 사람에겐 관심도 없는 듯 노아의 뒤를 따라다니기만 했다. 하지만 아네미아의 행동이 더 문제인 건, 율이 노아에게 뭔가 버프를 걸 때마다 자신도 따라서 버프를 건다는 거였다.
율이 파티원 모두에게 올 스테이터스 증가를 시켜 주는 베네딕티오와 이동속도, 공격속도, 회피를 올려주는 베네피치움을 쓰면 꼭 다음으로 노아에게 자신의 블레싱과 퀵스텝을 걸었다.
율과 아네미아의 스킬은 기본적으로 상향되는 스텟 가중치가 다르다. 보통 율이 쓴 스킬 위에 아네미아의 스킬을 덮어씌우면 테러 수준이었지만, 다행히도 아네미아의 스킬은 율의 스킬에 덧씌워지진 않았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네미아는 율이 노아에게 무슨 스킬을 쓸 때마다 자신의 스킬들로 덧씌우듯 별 쓸모없는 스킬들을 걸곤 했다. 그게 은근히 자존심을 긁는 행위여서 율은 갈수록 아네미아의 행동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던전만 클리어하면 된다는 생각에 참고 참으며 보스 방의 코앞까지 도착했다. 보스 방을 열기 위해선 두 팀으로 찢어져서 각자 길의 끝에 있는 장치를 가동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또 한 번 언쟁이 시작됐다.
[아네미아 : 나랑 노아오빠랑 가고 나머지들이 반대쪽으로 가요]
[꼼수가르뎅 : 옙!]
[큐컴버 : 넵!]
[율 : 네?]
[노아 : 맘대로 정하지 말고 나랑 율이랑 갈 테니 셋이서 반대쪽 가요]
[아네미아 : 뭐 어때서요~]
[아네미아 : 어차피 저 때문에 온 거잖아요~ 여기~]
[노아 : ?]
[아네미아 : 율님~ 꼼수랑 오이랑 저쪽으로 가주실래요~?]
[아네미아 : 가주실거죠?]
[율 : 싫은데요]
[아네미아 : 네?!]
갑작스러운 율의 말에 아네미아가 놀란 듯 채팅을 쳐올렸다. 그리고 시언은 얼른 고개를 돌려 율을 바라봤다. 율은 시언이 자신을 보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탐탁지 않은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율 : 미아님이 저쪽으로 가세요]
[아네미아 : 어머 뭐야? 지금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율 : 아니면 제가 노아님이랑 저쪽으로 갈테니 미아님이 이쪽으로 가세요]
[아네미아 : 뭐야? 웃긴닼ㅋㅋㅋ]
[율 : 하나도 안웃겨요]
[아네미아 : 뭐야 왜그렇게 노아오빠랑 붙어 있으려고 해요? 혹시 노아오빠 좋아하기라도 해요?ㅋㅋㅋㅋㅋㅋ]
[율 : ...]
[아네미아 : 왜부정을안해요? 설마진짜야? 어머어머 왠잉ㄹ니 완전민폐닼ㅋㅋㅋㅋ 남자엨ㅋㅋ거기에 왕따갘ㅋㅋㅋ대박 징그러웤ㅋㅋ 노아오빠도 어쩌다 저런 거에 걸려가지곸ㅋㅋㅋ]
[율 : 미아님이랑 상관없잖아요]
[아네미아 : 뭐래?ㅋㅋㅋㅋ 진짜 미쳤나? 다들 오냐오냐 해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
[아네미아 : 나 다른 사람들처럼 무르지도 않고 너 예쁘게 보지도 않아 노아오빠도 너랑 컴패니언이니까 같이 다니는 것뿐이지 거기에 혼자 의미부여해서 호모 짓하면 좋니?]
[아네미아 : 키는 땅딸만하고 삐쩍 꼬라 가지고 볼품없는 게]
[율 : 그것도 미아님이랑 상관없잖아요!]
[아네미아 : 뭐라고?]
시언은 흥분하지 않고, 꽤 단호하게 채팅을 쳐내려 가는 율의 모습에 탄성을 내뱉었다. 결국, 율의 뜻대로 율과 노아는 같은 길로 향하고, 아네미아와 꼼수가르뎅, 큐컴버가 다른 길로 향했다. 각자 길 끝에 있는 장치를 움직여 보스 방의 문을 열고, 연결되는 워프포탈을 통해 보스 방으로 진입했다.
보스 방에서 다시 모인 다섯 명은 율의 버프를 받은 후, 각자의 포지션을 인지하며 동시다발로 보스인 펜릴의 그림자에게 달려들었다.
시작하자마자, 인 데오 스페라무스를 써준 율 덕분에 초반 딜은 나쁘지 않게 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스페라무스 효과가 끝나자마자, 꼼수가르뎅과 큐컴버가 무섭게 전투 불능에 빠졌다. 덕분에 오합지졸들과 비교해 호흡이 잘 맞는 노아와 율이 상황에 맞는 스킬과 저항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보스 전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창 보스에 집중하던 율은 문득 한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시언에게 집중하면서도 시야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던 율의 눈에 보스 방의 제일 구석의 구조물 뒤에 교묘하게 숨어 있는 아네미아가 보였다.
왠지 울컥하는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서 솟아올랐다. 본인이 오자고 해서 온 곳인데, 형편없는 두 사람이 죽고, 고군분투하는 자신과 시언이 보이지 않는 건지 손 하나 까딱 않고 보스 방 한구석에 숨죽이고 있는 게 눈꼴셨다.
그러는 사이, 시언의 지속적인 딜 덕분인지 보스전은 어느덧 2페이즈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르렁거리며 뒷걸음친 펜릴의 그림자가 등의 털을 한껏 세우고, 그림자의 잔재들을 뿜어냈다. 잔재들은 보통 늑대 크기의 검은 연기 같은 형상으로 펜릴의 그림자에서 뿜어져 나와 율과 노아에게 달려들었다.
동시다발로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잔재들을 보며 율이 공격당하지 않게 티라노스로 잔재들의 도발하려던 시언은 제 주변에서 사라진 율의 행방에 당황하며 시야를 마구 돌려 그의 모습을 찾았다.
동시에 잔재들이 자신을 지나쳐 어디론가 달려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시야를 돌리자, 수많은 잔재를 이끌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율의 모습이 보였다. 공격을 피해 도망을 가는 것인가 싶어 티라노스를 사용하려던 시언은 순간 손을 멈추고 말았다. 율이 달려가는 방향의 끝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아네미아가 보였다.
자신의 예상이 틀린 게 아니라면, 율은 수많은 잔재를 이끌고 아네미아에게 향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향해 잔재들을 달고 돌진하는 율의 모습에 당황한 아네미아는 서둘러 자신에게 프로텍트를 걸었다. 머지않아 율이 도착하고, 두 사람이 잔재에게 공격을 받기 시작했을 때, 시언은 자연스럽게 (에이히루어) 스킬을 사용했고, 두 개의 선택지에서 (노아)를 선택했다.
스킬을 사용하며, 아네미아와 함께 잔재의 공격을 받던 율은 그대로 노아의 옆으로 소환되어 왔고, 홀로 남아 공격을 받던 아네미아는 곧 프로텍트가 풀리며 데미지를 입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황하며 열심히 자신에게 힐을 넣었지만, 힐도 밀리며 그대로 구석에서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아네미아 : ??]
[아네미아 : 뭐하는 거야?!]
[아네미아 : 야!!!]
구석에 누워서 채팅으로 악을 쓰며 난리를 부리는 미아를 깔끔하게 무시한 시언과 율은 잔재들을 다시 흡수하고, 광역 기를 시전하는 펜릴의 그림자의 공격에 대비했다.
(리저렉션)
결국, 노아와 둘이서 보스 공략에 성공하고, 보스 방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전투 불능에 빠져 있는 파티원들을 차례차례 부활시킨 율은 여전히 자신에게 악을 써대는 미아를 무시하고, 시언에게 다가갔다.
율이 다가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리품 상자를 연 시언의 행동에 아네미아는 순간적으로 채팅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개의 보스공략 보상 중에서 자신이 바라 마지않던 칸디의 롯드가 있었기 때문에.
[꼼수가르뎅 : 어?! 누님이 갖고 싶다던 무기 아닙니까?!]
[큐컴버 : 오오!!!]
[아네미아 : 어머?!]
[아네미아 : 어머 진짜 나왔어~ 어머 어떡해~ㅋㅋㅋㅋㅋ]
[아네미아 : 어우~ 노아 오빠 우리 진짜 운 좋은가 봐요/ㅅ/]
칸디의 롯드를 확인한 후, 후다닥 시언의 곁으로 달려온 아네미아가 손뼉 치는 모션을 사용하며 은근슬쩍 교태를 부렸지만, 아네미아의 행동에도 시언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경매 창을 띄우고, 입찰금을 올렸을 뿐.
그런 시언의 행동에 아네미아는 짐짓 당황한 듯했지만, 다른 이들에게 정당하게 무깃값을 치르고, 자신에게 무기를 주려는 시언의 배려라고 착각하며 더욱 부산을 떨어댔다.
[아네미아 : 어우~ 뭘 돈까지 줘요?ㅋㅋㅋ 어차피 우리끼린데~]
[아네미아 : 쟤들은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아네미아 : 아~ 율님한테는 줘야 하려나?ㅋㅋㅋㅋ]
주절주절 떠들어대며 입찰금을 나눠 갖고, 시언이 자신에게 무기를 건네준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네미아는 아무리 기다려 봐도 거래가 걸려오지 않자 의아한 듯 시언을 불렀다.
[아네미아 : 노아 오빠?]
[노아 : ?]
[아네미아 : 저 무기 안 주세요?]
[노아 : 무슨 무기요?]
[아네미아 : 칸디의 롯드요]
[노아 : 율이 줬는데?]
[아네미아 : 네?]
[아네미아 : 그걸 왜 율님을 줘요?]
[아네미아 : 저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노아 : ?]
[아네미아 : 와? 율님 중간에 가로챈 거예요? 진짜 대박이네 가지가지 한다]
[율 : 네?]
[아네미아 : 엄연히 그거 내 거잖아요? 노아 오빠도 나 때문에 여기 일부러 온 건데]
[아네미아 : 와...왜 왕따를 당했는지 알 것 같네 어쩜 저렇게 눈치없고 욕심많고 거기다 징그럽기까지하지?]
[아네미아 : 정말 기분 나쁜 사람이네? 안 그래요 노아 오빠?]
[노아 : 뭐..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죠]
쉬지 않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아네미아의 말에 잔뜩 인상을 쓰고, 모니터를 바라보던 율은 시언의 채팅에 두 눈을 슴벅였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시언을 바라봤지만, 시언은 조금 짜증 난다는 얼굴로 모니터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왠지 뭔가에 잔뜩 싫증이 나고, 짜증이 난 듯한 얼굴이라 율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시언의 반응에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 보는데, 짧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키보드 치는 소리가 시작됐다.
[아네미아 : 어멐ㅋㅋㅋㅋㅋㅋㅋ들었어요? 율님?ㅋㅋㅋㅋㅋ 노아 오빠도 율님이 기분 나쁘다잖아욬ㅋㅋㅋㅋㅋㅋㅋㅋ]
[노아 : 애인이 그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누구라도 기분 나빠지겠지]
[아네미아 : ...네?]
[노아 : 난 한 번도 널 위해서 무기를 구하러 간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노아 : 김칫국도 적당히 처먹어야지? 사발도 모자라서 짝으로 처마시고 있으니 탈이 안 나?]
[아네미아 : 네?]
[노아 : 진짜 꼴 보기 싫어 죽겠는데 길드는 왜 안 나가고 계속 붙어있어? 길마님이 한번 권고하지 않았나 꺼지라고?]
[아네미아 : 무슨..]
[노아 : 지 수준에 맞는 것들이나 데리고 다니니, 본인이나 그 똘마니들이나 실력이 향상될 리도 만무하고, 내놔도 들여놔도 불안하니 길마님은 결단을 못 내리시는 것 같은데 내 손으로 잘라줄까?]
[노아 : 사람이 가만히 있을 때 적당히 알아서 입을 닥칠 줄 알아야지 자꾸 율이 무시하기에 실력이나 한번 제대로 봐보라고 달고 와줬더니 어디서 가당치도 않게 남의 애인한테 지랄이야?]
[노아 : 그리고 정모 이후로 나에 대한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변한 거 스스로 부끄럽지도 않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이는데?]
[길드원 아네미아님이 로그아웃하였습니다.]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시언의 말들에 아네미아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장 닥친 상황이 당황스러워 언제나처럼 황급하게 게임을 꺼버렸을 뿐. 하지만 그녀의 마음 안에 자리 잡은 건 부끄러움이 아니라 시언과 율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율을 배웅하며 그의 집 앞에 선 시언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율을 내려다봤다.
“그… 미아한테 말해 버린 거 미안해.”
“네?”
“네가 불편하다고 하면 입막음시켜 볼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불편할 거라는 생각을 전제로 해결 방법을 제시하려던 시언이었지만, 율은 예상외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응?”
“저한테 시비를 거는 건 괜찮지만… 자꾸….”
“자꾸?”
“형…한테 자꾸… 그러는 거.”
“…?”
“싫었거든요….”
확실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며 싫다고 얘기하는 율의 말에 시언은 말없이 손을 들어 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길드원들이 알게 되면 불편해지지 않겠어?”
“노아…님은 불편하세요?”
“응? 아니, 나 말고….”
“저도 괜찮아요.”
“그래?”
“네.”
“미아는… 이제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네? 아, 네.”
“들어가.”
“네, 금방 접속할게요.”
“응, 기다릴게.”
짧은 인사를 끝으로 집으로 들어가는 율을 확인한 시언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시언의 집에서 로그아웃한 후, 자신의 집에서 로그인한 율은 쉼터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시언과 함께 길드원들과 수다를 시작했다.
[질풍 : 오늘 칸디의 롯드 먹었다면서??]
[율 : 네]
[질풍 : 와...노아 형이랑 율이 은근 템운이 좋은 것 같아..]
[노아 : ㅋㅋㅋㅋㅋㅋㅋ]
[광인한 남자 : 나도 구하고 싶은 템 있는데!! 두 사람하고 같이 가면 나오는 건가?!]
[질풍 : 헐?! 그런 사고방식이?!]
[KING Husband : 뭐라!!!]
[광인한 남자 : 두 사람은 운빨을 하사하라!!!]
[KING Husband : 하사하라!!]
[질풍 : 해주세요!!!]
[노아 : 그냥 우연이야ㅋㅋㅋ]
[율 : 맞아요ㅋㅋㅋ]
[광인한 남자 : 우연이라도 좋다!!!ㅠㅠㅠㅠ]
[질풍 : 운빨의 신이 되어주세요!!]
[노아 : 같이 가는 건 상관은 없는데ㅋㅋㅋ]
[KING Husband : 당장 갑시다!!!]
[노아 : 아 오늘은 안 돼ㅋㅋㅋ]
[광인한 남자 : 잉?]
[질풍 : 왜!!]
[KING Husband : 어이하여!!]
[율 : ??]
[노아 : 암튼 오늘은 우리 둘 다 안 돼 ㅋㅋㅋ]
율도 영문을 모르는 시언의 칼 같은 거절에 왕광풍은 한참을 두 사람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하지만 시언이 좀처럼 허락을 해주지 않자, 자신들의 운빨을 믿어보자며 셋이서 노가다를 나섰다.
[율 : 노아님… 왜 안 돼요?]
[노아 : 오늘은 우리 둘 다 사정이 좀 있어ㅋㅋㅋ]
[율 : 저도요…?]
[노아 : 응 너도 ㅋㅋㅋ]
궁금한 마음에 시언에게 무슨 사정이냐고 물어도 시언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답을 해주진 않았다. 결국, 쌓여가는 의구심만 남긴 채, 쉼터에 남아 시언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데, 딩동, 하고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이미 부모님이 집에 계신 시간이라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없었다. 율이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려는데, 문밖으로 고성이 오갔다.
“…?”
잔뜩 화가 난 부친의 고함이 들려왔다. 연이어 모친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뭔가 심각한 상황인 것 같아 귀를 기울이는데, 똑똑, 하고 울리는 노크 소리와 저를 부르는 모친의 목소리가 들렸다. 율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빠르게 채팅을 남겼다.
[율 : 집에 누가 왔나 봐요. 저 잠시만 다녀올게요.]
채팅을 남겨놓고, 상대방의 답을 들을 새도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방문을 연 율은 문밖에서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모친을 볼 수 있었다.
“율아… 저기….”
“응?”
제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 모친의 행동이 의아했다.
“잠깐… 현관으로 같이 갈래?”
“현관에?”
“응, 네가 만나봐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
모친은 조심스럽게 말을 전하며 율을 이끌었다. 그런 모친의 손에 이끌려가며 율은 당최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곧 현관 앞에 도달해 죄인처럼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미간을 잔뜩 구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자퇴했던 학교의 교장과 자신의 담임이었던 선생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몇 달 동안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관심조차 없던, 아니 기억이나 할까 싶었던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은 그에 대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죄인처럼 고개를 조아리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율이 눈앞에 나타나자 눈치를 보며 서 있던 두 사람이 대뜸 무릎을 꿇었다.
“뭐 하는 겁니까!”
난데없는 두 사람의 행동에 부친이 더욱 화가 난 듯 호통을 치자, 두 사람은 이마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고,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때는 바랐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바라지 않는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율의 부모님은 기가 찬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와 뭐 하자는 거예요?”
황당한 듯 이어지던 웃음은 끝에 날이 선 듯한 모친의 목소리가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꽂혀 들었다. 가시가 돋친 말과 눈빛에 한껏 웅크리고 있던 교장이 땀을 뚝뚝 흘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면목이 없다면서 뻔뻔하게도 잘만 찾아오셨네요?”
“그, 그것이….”
“왜 오셨나요? 시답잖은 사과를 하고, 용서라도 비시려고요?”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요? 그때는 입이 한 개뿐인데도 잘만 말씀하시더니?”
“죄송합니다….”
“나가주세요.”
“용서를….”
“해드릴 생각 없습니다.”
몰아붙이는 모친의 말에 교장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끝맺지 못하고, 불쑥 끼어 들어온 부친에 의해 단절되고 말았다. 말을 다 전하지 못한 교장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조용하던 담임이 입을 열었다.
“용서를 받기 위해 온 게 아닙니다… 사죄를 드릴 염치조차 없다는 것도 압니다….”
잔뜩 주눅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담임의 말에 율의 부모님은 여전히 차갑게 식은 눈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빌러 왔습니다… 빌고… 율이에게 원래의 자리를 되찾아주고 싶습니다….”
빌러 왔다는 말에 율의 부모님은 말없이 율을 바라봤다. 하지만 율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는 얼굴로 교장과 담임을 바라보기만 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짧은 침묵이 끝나고, 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학교로… 돌아오라는 건가요?”
율의 물음에 교장과 담임은 희망에 찬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저희를 바라보는 율의 얼굴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요?”
“그, 그럼!”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그럴 때 전과 똑같이 하지 않으실 거란 보장이 있나요?”
“보장하마!!”
“그럼 왜 전에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는데요?”
“어…?”
“제가 필사적으로 선생님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유, 율아….”
“권율 학생… 한 번만 믿어주면….”
“어떻게… 믿으란 거예요? 뭘 믿으란 거예요?”
“율아….”
“학생….”
“두 분은 이미 한 번 저를 버리셨잖아요. 어떻게 제게 믿어달라고 하실 수 있어요?”
“…….”
“…….”
“두 분 스스로 제 안에 불신만을 남기셨잖아요….”
“부,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그, 그래…!”
담임과 교장의 필사적으로 호소하는 말에 율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옮겨 부모님을 바라봤다. 하지만 부모님의 시선을 저에게 닿고 있지 않았다. 우직하게 제 발 앞에 무릎 꿇은 담임과 교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오롯이 자신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듯해서 율은 가슴속에 번지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저는 부모님께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그, 그럼?”
“권율 학생!”
“저는 지금 인생에서 여러 가지의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거겠지만, 수많은 길이 나 있는 그 시행 중에….”
“학교로 돌아간다는 길은 없어요.”
“율아!”
“학생!”
“다시는 두 분을 뵙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무슨….”
“…….”
“두 분이 제게 줄 수 있는 믿음은 그것뿐이에요.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말을 마친 율은 미련 없이 뒤돌았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부모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결단을 되돌릴 생각은 없었다. 저를 바라지 않지만, 부모님은 바라는 일일 수도 있었다. 율은 제 부모님을 스쳐 지나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하지만 부모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아닌, 교장과 담임에게 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인생입니다. 이미 스스로 결정 내릴 수 있을 만큼 의젓합니다.”
부친의 목소리에 빠르게 걸어가던 율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배움의 터는 꼭 학교라는 장소로 국한되어 있지만은 않습니다. 제 아이는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살아가고 있는 장소를 골랐습니다.”
“하지만, 아버님!”
“우리 아이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자격은 당신들에겐 없을 텐데요?”
“그렇지만….”
“다, 다시 한번 생각을….”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희를 찾아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율이의 바람대로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친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친은 꿇어앉아 있는 두 사람을 지나쳐 곧장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더는 머물 수 없어진 두 사람은 결국, 터덜터덜 돌아갔고, 모친은 신경질적으로 현관에 소금을 뿌려댔다.
홀로 방에 돌아온 율은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켜져 있는 모니터 속에 존재하는 시언을 바라보며, 좀 전까지 자신의 집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비현실적이었다는 걸 느꼈다.
***
띠띠띠띠띠띠-
시언의 집 앞에 선 율은 머뭇거리며 몇 번이고 손을 쥐었다가 폈다. 그리고 머릿속에 외우고 있는 생소한 번호들을 차례차례 눌렀다.
띠리릭-
동시에 경쾌한 오픈 음과 함께 도어락이 풀렸다. 맞아주는 이 없이 홀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율의 행동에 머뭇거림이 배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밤, 도저히 게임에 집중할 수 없어, 시언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찍 게임을 껐던 율이었다. 하지만 율이 없음에도 시언은 홀로 새벽 4시까지 달린 모양이었다. 그 시간에 보낸 톡이 하나 도착해 있었으니까 말이다. 톡에는 자신이 10시까지 연락을 하지 못하면 문을 열고 들어와 달라는 말과 함께 6자리의 번호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결국, 10시가 다 되어 가도록 시언에게 연락이 없었다. 율은 시언이 가르쳐 준 번호로 도어락을 풀고 들어와 조심조심 2층으로 향했다.
타박, 타박
썰렁하리만치 고요하기만 한 실내에 자신의 발소리만이 유독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율은 걸음걸이에 신경을 쓰며 2층에 올라, 너른 방 한편에 자리한 커다란 침대로 향했다.
침대 위엔 자신이 온 줄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시언이 있었다. 깨어 있을 때와는 달리 무표정한 얼굴과 흰 베개 위에 흐트러져 있는 검은 머리카락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생소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율은 시선을 옮겨 그가 누워 있는 침대를 바라봤다.
세 사람이 굴러다녀도 될 듯한 넓은 침대인데, 왠지 시언의 행동 범위가 명백하게 보이는 듯했다. 시트도 이불도 온통 하얗기만 한 침대 위에 정확하게 반을 나눈 듯 반은 구김 하나 없이 깨끗하고, 반은 시언의 몸을 따라 이리저리 구김이 가 있었다.
“…….”
이리저리 시언의 잠든 모습과 그의 잠버릇을 유추할 수 있는 침대 위를 살펴보던 율은 구김 하나 없는 시언의 옆자리를 바라보다가 조심조심 이불을 들치고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못했을 행동인데도 왠지 잠들어 있는 시언의 옆에 누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침대의 반동이 생기지 않게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침대 안에서 자리를 잡은 율이 천장을 바라보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심조심 고개를 돌려 시언을 바라봤다.
“힉.”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이 튀어나왔다. 잠이 덜 깬, 반쯤 감긴 눈을 한 시언이 멍한 얼굴로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
갑작스럽게 눈을 뜬 시언은 눈앞에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건지 눈을 슬쩍 찌푸린 채 눈동자만 굴려 율을 훑어봤다. 동시에 율의 얼굴은 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한참을 율을 훑어보던 시언이 손을 들어 율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리고 자신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움찔거리는 율을 보며,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을 하더니 잔뜩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꿈인 줄 알았네.”
“노아님….”
그리고 당황한 듯 더듬더듬 자신을 부르는 율의 목소리에 완만하게 눈가를 휘었다.
“잘 잤어?”
“읏….”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였을 뿐이었는데, 율은 낮은 신음을 삼키며 목과 귀까지 빨갛게 물들여 버렸다. 그리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율과 함께 상체를 일으켜 세운 시언이 도망가려는 율의 팔을 잡아채서 그대로 침대 위로 끌어당겼다.
“앗.”
순식간에 시야가 빙글 돌고, 시야 가득 들어오던 천장은 어느샌가 시언의 얼굴에 가려졌다.
“왜 도망가?”
“그….”
그리고 잔뜩 가라앉아 더욱 낮은 목소리로 묻는 시언의 말에 율은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얼굴로 몰리는 열기가 눈 밑을 화끈화끈하게 했다.
홍옥 같은 얼굴로 어쩔 줄 모르고 버벅대는 율을 빤히 내려다보던 시언은 평소 같은 얼굴로 웃었다. 그리곤 한 손으로 율의 턱과 볼을 감싸고는 그대로 고개를 내려 입술을 포갰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율이 버둥거리자, 자신의 몸을 겹쳐 율의 행동을 찍어 누른 시언이 당황한 율을 달래듯 입술 위에 가벼운 키스를 몇 번이고 퍼부었다. 분위기에 휩쓸린 듯 율의 버둥거림이 점점 잦아들었다. 어설프지만 자신을 받아들이듯 천천히 눈을 감는 율을 보며 시언은 율의 윗도리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으, 아! 노아님….”
맨살에 닿는 타인의 감촉에 화들짝 놀란 율이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옷 속으로 침입해 들어간 시언의 팔을 덥석 잡았다. 본능적으로 저를 말리려는 행동에 시언은 제 팔을 잡은 율을 빤히 바라봤다. 그때 한 번 더 “노아님….” 하고 부르는 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때까지 노아라고 부를 거예요?”
“네?”
“질투 나잖아, 노아한테.”
생각지도 못한 시언의 말에 율은 자신의 귓가에 화르륵, 하고 불이 붙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얼굴이 불에 타고 있는 듯이 뜨거웠다.
“읏… 노….”
당황함에 또 한 번 익숙한 이름을 부르려던 율은 자신의 목에 얼굴을 파묻는 시언의 행동에 몸을 떨며 잔뜩 경직된 목소리로 시언을 불렀다.
“시언, 님!”
그리고 그런 율의 외침에 시언의 행동이 우뚝 멈췄다. 한참을 율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더운 숨을 내쉬던 시언은 작게 중얼거렸다.
“미치겠네….”
그리고는 빠르게 몸을 일으킨 후, 잔뜩 흐트러진 채 누워 있는 율에게 목까지 시트를 덮어 준 후,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어, 어디 가세요…?”
뒤에서 다급하게 물어오는 목소리에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시언은 뒤돌아보지 못한 채로 짧은 답을 남기고, 1층으로 향했다.
“씻고 올게.”
한껏 달아오른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평소보다 더 길었던 샤워 시간을 보내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2층으로 향하던 시언은 주방 쪽에서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것저것 식탁 위에 늘어뜨리고 있던 율은 주방으로 걸어 들어오는 시언을 발견하고는 조금은 어색하게 웃었다.
“같이 아침 먹어요.”
***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각 접속한 아네미아는 길드 말로 인사를 건네는 길드원 중에서 혹시나 그가 있을까 봐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인사를 건네는 길드원들 중에서도 그의 아이디는 보이지 않았고, 길드 창을 열어봐도 그의 접속 여부는 off였기에 안심을 하며 복세편살을 앞세워 파티를 구했다.
평소와 같은 하루였다. 평소처럼 복세편살을 무봉으로 세우고, 파티원들 사이에서 안전하게 안주하며 경험치를 받아먹는, 하지만 머릿속엔 전날 들었던 노아의 얘기만이 회오리치듯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런저런 자존심을 긁는 얘기들을 많이 들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신경이 쓰이는 건 그가 율을 두고 자신의 애인이라고 얘기한 것. 솔직히 믿지는 않았다. 믿을 만한 가치도 없는 얘기였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이 쓸데없이 많이 붙어 다니는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나 누군가 노아와 율 사이를 의심하게 되고, 그로 인해 노아가 게이라는 소문이라도 돌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머지않아 자신의 것이 될 남자인데 그런 흠집은 내고 싶지 않았다. 그와 자신은 완벽한 커플이 되어야 하니까. 그리고 그는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어 줄 가치가 있는 남자이니까.
이런저런 생각 속을 유영하던 아네미아의 눈에 저 멀리서 몬스터를 몰고 돌아오는 복세편살이 보였다. 그런 복세편살에게 힐을 넣을 생각을 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복세편살은 자신을 위해 무료로 몬스터를 몰아다 주는 봉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티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체력이 보이지 않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왠지 제가 힐을 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그에게 적선하듯 힐이나 넣어줘 볼까 하고 생각한 것뿐이었다.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의미 없이, 단 한 번의 변덕이었다. 그녀는 본진에 돌아온 편살에게 힐을 넣는 순간까지도 정말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순간,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 거대한 빛줄기가 아네미아에게 직격했다. 뭉쳐있던 빛무리가 터지며 사방팔방으로 튀어 올랐고, 동시에 귓가를 때리는 굉음과 함께 필드 전체가 뒤흔들렸다.
[히든 스킬 아도라무스 떼 도미네를 획득하였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히든 스킬이었다.
***
[아네미아님이 길드에서 탈퇴하였습니다.]
[길드] [무지개 요정 : ??]
[길드] [노아 : ?!]
[길드] [도련 : ??]
한가로운 오후, 레인보우 힐 길드원 모두를 패닉에 빠트린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예고도, 언질도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된 아네미아의 길드 탈퇴에서 시작됐다.
[꼼수가르뎅님이 길드에서 탈퇴하였습니다.]
[길드] [니지 : 뭐야??]
[길드] [질풍 : 뭔 일이래??]
[길드] [율 : ???]
[길드] [집사 : 무슨...]
[큐컴버님이 길드에서 탈퇴하였습니다.]
[길드] [세츠나 : 뭔데??]
[길드] [KING Husband : 줄줄이 비엔나야 뭐야?]
[길드] [광인한 남자 : 갑자기 왜들 저래??]
[복세편살님이 길드에서 탈퇴하였습니다.]
[길드] [츄파 : ???????????]
[길드] [달빛 : 헐?!]
[길드] [크로이츠 : ??;;]
네 명이 연달아 길드를 탈퇴하고, 남아 있는 길드원들이 황당함과 의아함으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때, 그들의 행동을 단번에 이해시켜줄 서버 채팅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서버] [아네미아 : 신생 길드 Queen에서 신입 길드원분들을 모집합니다]
[서버] [꼼수가르뎅 : 모집합니다~]
[서버] [큐컴버 : 지금 가입하시는 분들은 레벨 스펙 상관없이 받아드립니다]
[서버] [복세편살 : 상담 문의 환영합니다]
[서버] [스트로베리 : 어? 미아님이랑 편살님은 레인보우 힐 아녔어요?]
[서버] [아네미아 : 새로 길드 파서 나왔어요~ㅎㅎ]
[서버] [스트로베리 : 에? 왜요? 그 길드에 히든도 많고 좋겠던데..]
[서버] [꼼수가르뎅 : 저희도 히든보유 길드거든요!]
[서버] [스트로베리 : 네?!]
[서버] [큐컴버 : ㅋㅋㅋㅋㅋ미아누님 히든스킬 여셨어요!]
[서버] [아네미아 : ㅎㅎㅎㅎ레인보우 힐이 히든이 많긴 한데, 아무래도 한 우물에만 있기가 좀 그래서요~]
[서버] [스트로베리 : 헐....]
[서버] [아네미아 : 많이많이 지원해주세요~]
서버 채팅으로 전해지는 아네미아의 히든 스킬 획득 소식은 서버는 물론,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까지도 경악하게 만들었다. 대화를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길드 채팅이 빠르게 올라가고, 패닉에 빠진 모두가 사냥과 노가다를 접고 속속들이 쉼터로 몰려들었다.
히든스킬 보유자가 나온 것은 서버에 큰 이슈가 되는 주제였지만, 그것보다 서버 모두의 이목을 끄는 것은 히든 보유자가 또다시 레인보우 힐에서 나왔다는 점이었다.
[무지개 요정 : 아니 나가라 나가라 할 땐 죽어도 안 나가더니!!!]
[도련 : 이런 식으로 나가니까 우리가 팽 당한 기분이잖아요!!!]
[집사 : 도련님, 이지! 이지~ 쿨 다운]
[KING Husband : 뭔가..체증은 내려갔는데 빅똥을 선사받은 기분..]
[노아 : 뭐..그래도 이제 볼일 없고 신경 쓸 일 없어서 좋은 거 아닌가?]
[질풍 : 아니 근데...왠지 저 누나가 히든 스킬 얻으니까 뭔가..되게 억울...]
[니지 : 동감...]
[광인한 남자 : 하늘이시여!!!!!!]
[크로이츠 : 저으 동기들이...ㅠㅠ]
[세츠나 : 내가..저것과 동급이라니..]
[달빛 : 세츠 언니 멘붕왔엌ㅋㅋㅋㅋㅋㅋ]
[율 : ;;]
[츄파 : 나도 히든!!!!ㅠㅠㅠㅠㅠㅠ]
다들 아네미아의 히든 스킬 획득과 그녀의 길드 탈퇴의 여파로 너덜너덜해진 멘탈을 겨우 부여잡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레인보우 힐을 가만히 놔둘 리 없다는 것을.
***
긴 것 같기도 하고, 짧은 것 같기도 했던 방학이 끝났다. 누구나 방학이 끝난 후, 한풀 꺾일 더위를 예상하고 바랐지만, 여름은 우직하게 그 자리에 여전히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둘씩 자리를 채워가는 교실 안에 늘어져 있던 성원은 방학 동안 조금 변화가 있었던 학교의 사정을 주워들어 가며 조금은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첫 번째는 교장이 파면된 것. 두 번째는 자신들의 모교가 될 이 고등학교는 내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는다는 것. 세 번째는 자신들의 담임이었던 선생님의 전근.
웅성거림은 성원의 반뿐만 아니라, 학교 전체로 번져 어디에나 있을 학교의 소음에 한층 더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드르륵,
한창 시끄럽던 교실은 불시에 열리는 교실 문의 소음과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온 흰 가운을 입은 여성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여성은 그런 시선들이 대수롭지 않은 듯 출석부를 챙겨 들고 성큼성큼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와 교탁 앞에 섰다.
“너희는 지금 담임선생님이 없어서, 오늘만 내가 임시로 출석과 개학식을 진행할 거야.”
귀찮은 듯 건성건성 말하고는 출석부를 펴서 출석을 부르는 양호선생의 무료한 목소리가 교실 안에 울려 퍼졌다. 교실 여기저기서 작게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흥미가 없다는 듯 책상 위에 얼굴을 묻은 성원은 곧 길게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단잠에 빠져 있던 성원은 자신의 어깨를 쥐고 흔드는 반동에 부스스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뿌옇던 시야가 정돈되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차운과 현석의 얼굴이 보였다.
“…뭐야?”
잠결에 취한 몽롱한 정신에 자신을 깨운 사실이 짜증이 난 듯 성이 난 목소리로 물었지만, 차운과 현석은 조용히 자신들의 핸드폰 화면을 보여줄 뿐이었다.
“?”
하지만 성원은 뭐, 어쩌라고? 라는 표정으로 그들의 핸드폰과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그런 성원의 행동에 두 사람은 자신들의 핸드폰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너도 핸드폰 확인해 봐.”
“뭐?”
현석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묻는 성원의 말에 현석은 도리어 미간을 좁히고,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확인해 봐!”
“…?”
흔하지 않은 현석의 반응에 성원은 순순히 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보란 듯이 한 통의 문자가 수신되어 있었다. 의아함에 문자를 확인해 본 성원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두 사람을 올려다봤다.
“뭐야 이게?”
“전 담임이 보낸 거야.”
“그건 이름 보면 알아. 근데 왜 이런 걸 보내느냐고.”
“…우리가 어떻게 알아.”
성원의 물음에 퉁명스럽게 답하는 차운의 말을 마지막으로 세 사람은 조용히 자신들의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세 사람 모두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은 똑같은 문자를 받았다. 전 담임에게서 ‘율에게 사과해라.’라는 문자를.
***
한적한 오후, 홀로 쉼터에 앉아 있던 무지개 요정은 쉼터로 걸어 들어오는 익숙한 모습의 한 사람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로사이드 : 하이]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
[제로사이드 : 좀 반겨주죠?]
[무지개 요정 : 안 반가워]
[제로사이드 : 매정하네요]
[제로사이드 : 형]
[무지개 요정 : 왜?]
[제로사이드 : 채원이 형?]
[무지개 요정 : ?????????????????????????????????]
[무지개 요정 : 뭐야?]
[제로사이드 : ^^?]
[무지개 요정 :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어?!]
[제로사이드 : 우리 사이에~]
[무지개 요정 : 이 미친놈이?! 어떻게 알았냐고!!]
[제로사이드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지개 요정 : 웃겨?!]
[제로사이드 : 발끈하지 마요ㅋ 귀엽잖아]
[무지개 요정 : 어메 시벌]
무지개 요정은 골칫거리 같은 제로사이드의 행태에 정말 미치고 팔짝 뛸 것만 같았다. 매일매일 찾아오고 귀찮게 하는 것도 짜증이 나 죽겠는데, 대체 이름은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제로사이드 : 뭔가 이름도 딱 형스럽네요ㅋㅋㅋㅋ]
[무지개 요정 : 개명을 하던가 해야지..]
[제로사이드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신의 말에 캐릭터 모션까지 가미해 한껏 웃어버리는 제로의 면상을 갈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시야를 돌려버린 무지개 요정은 쉼터의 입구로 걸어 들어오는 또 한 명의 골칫거리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댔다.
[아네미아 : 참 언제와도 구질구질한 곳이네]
거침없이 쉼터로 걸어 들어와 자신과 제로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는 아네미아는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대뜸 자신의 할 말을 시작했다.
[아네미아 : 요정 씨 내가 이 길드에서 몇 명만 좀 스카웃 해가고 싶은데]
[아네미아 : 괜찮죠?]
[무지개 요정 : 요정씨?]
[아네미아 : 왜요?]
[아네미아 : 설마 아직도 길마님이라고 불리고 싶은 거예요?ㅋㅋㅋㅋㅋㅋ]
[아네미아 : 저 이제 그쪽이랑 동등한 입장이에요 알죠?]
[무지개 요정 : 뭐?]
[아네미아 : 히든 스킬 보유자에 한 길드의 길드마스터]
[아네미아 : 이 정도면 그쪽이랑 비교해도 손색없을 텐데요?]
[무지개 요정 : 허...]
[아네미아 : 우선 왕이랑 풍이랑 노아 오빠 데려갈게요]
[무지개 요정 : 미쳤구나?]
[아네미아 : ㅡㅡ?]
[아네미아 : 말조심 좀 하죠?]
[아네미아 : 제 길드 규모로만 따지면 며칠 새에 요정 씨 길드보다 커졌어요 이번에 글록 동맹에도 가입할 예정이구요]
[아네미아 : 제 앞에서 너무 기고만장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퀸은 곧 레인보우 힐과는 비교도 안될 대형 길드가 될 테니까요 그러니 그쪽 길드에서 썩히기에 아까운 인재들은 제가 영입하는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무지개 요정 : 뭐?]
[제로사이드 : 오만 지랄 다 떨고 있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지개 요정 : ??]
[아네미아 : ?!]
[아네미아 : 뭐라구요???]
[제로사이드 : 아니 레인보우 힐 하고는 요정님하고 해결할 문제니까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긴 한데 듣고 있자니 아주 ㅋㅋㅋㅋㅋ]
[제로사이드 : 글록 동맹 가입? 그건 누가 정했나요?]
[아네미아 : 네?]
[제로사이드 : 참 이상도 하지? 글록 동맹의 가입은 머스킷 티어 블루 비 화이트홀의 길마 세 명이 결정하는 문제인데? 난 전해 들은 게 없네?]
[아네미아 : 그건...]
[제로사이드 : 아~ 새로운 글록 동맹을 만들려는 건가?ㅋㅋㅋㅋㅋㅋㅋ]
[제로사이드 : 그리고 뭔 누구를 데려가고 싶다는 걸 왜 요정님한테 통보를 해?ㅋㅋㅋㅋ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직접 컨택해서 설득하고 데려가야지?]
[제로사이드 : 아~ 요정님이 대신 설득해주길 바라는 건가? 왜? 그쪽이 말하면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은 귓등으로도 안 듣나? 그래서 요정님한테 그러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요정님이 총맞은것도 아니곸ㅋㅋㅋㅋㅋ 멀쩡히 잘 있는 길원들을?ㅋㅋㅋㅋㅋㅋ]
[제로사이드 : 권위적으로 접근하고 싶어도 권위가 없지? 특히나 레인보우 힐에서는?]
[제로사이드 : 그래서 지금 요정님 권위에 좀 편승해보겠다는 거 아니야?]
[제로사이드 : 정말 추접스럽네?ㅋㅋㅋㅋㅋㅋ]
[제로사이드 : 그리고 뭐? 대형 길드?ㅋㅋㅋㅋㅋㅋ]
[제로사이드 : 지금 그쪽 길드에 오만 잡어들이 다 모여들어서 분탕질 치고 있는 건 글록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제로사이드 : 걸러낼 찌꺼기들 다 걸러내고 나면 뭐가 남는데?ㅋㅋㅋㅋㅋㅋ]
[제로사이드 : 있는 사람이나 잘 챙기지? 복세편살인가? 그 사람만 오지게 고생 중인 것 같던데? 뒷수습하느라?]
[아네미아 : 말씀이 너무..]
[제로사이드 : 너무 뭐? 심해? 그쪽은 개념이 심한데?]
[제로사이드 : 게다가ㅋㅋㅋㅋㅋ 그쪽이 어떻게 요정님하고 동등한 입장이야? 당신 히든 엔피씨야? 아니면 역린이라도 가지고 있어?]
[아네미아 : 저....는..히든 스킬..]
[제로사이드 : 개나 소나 다 가진 게 히든 스킬이야. 얻기가 힘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못 얻을 것도 없는 게 히든 스킬이라고 가치도 없는 희소성 하나로 어디서 요정님한테 맞먹으려고 들어?]
[제로사이드 : 권위? 희소성? 그런 게 갖고 싶어? 아니면 그런 걸 맛보고 싶어? 내가 맛보여 줄 순 있을 것 같은데?]
[아네미아 : ....?]
[제로사이드 : 글록시니아에 발 못 붙이는 걸로]
[아네미아 : ...]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제로사이드의 말에 아네미아는 단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반박할 거리도 없이 모든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글록시니아에 발 못 붙이게 하겠다.’라는 제로사이드의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닐지도 몰랐다. 당황한 아네미아는 서둘러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알량한 자존심은 남아 있었는지, 끝까지 하지 않아도 될 마지막 말은 남기고 간 그녀였다.
[아네미아 : 갈게요! 다음에 다시 오죠]
아네미아가 서둘러 쉼터를 떠나고, 다시 제로사이드와 둘만 남은 무지개 요정은 전적으로 아네미아를 몰아붙이기만 했던 제로의 행동에서 확실하게 자신을 존중하는 의사를 엿볼 수가 있었다.
지크프리트로 그와 말싸움을 벌일 때 종종 자신이 당했던 그의 독설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해 쓰인다는 사실이 조금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끼게도 해줬다. 어쩌면 그는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제로사이드 : 그래서? 우리는 언제 몸으로 부딪쳐 볼 수 있는 거에요. 형?]
전언 철회.
***
“아, 이 씨발.”
오전의 한적한 피시방 한구석에서 언성 높여 내뱉는 상스러운 욕설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몇 없던 손님들과 아까부터 세 사람을 신경 쓰던 아르바이트생이 슬쩍 그들을 바라봤지만, 교복을 입은 세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욕설과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또 잘렸어.”
“몇 번째야 대체….”
레인보우 힐에서 쫓겨난 이후, 이런저런 길드를 옮겨 다녔던 세 사람은 전부 며칠을 채우지 못하고 추방되기 일쑤였다. 영문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당하는 추방에 대해서 따져도 보고, 화도 내봤지만, 마땅히 이렇다 할 답변을 듣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자신들을 받아주려 하는 길드도 몇 없어서, 세 사람은 이대로 게임을 접어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까지 들기 시작했다.
“아, 저번에 보니까 미아 누님 길드 새로 파서 나온 것 같던데…?”
하지만 불현듯 며칠 전에 봤던 서버 채팅을 떠올린 현석의 말에 차운과 성원은 눈을 빛내며 서로를 바라봤다.
[서버] [끄오용 : 아네미아 아짐보씨요!!]
[서버] [끄오용 : 다음에도 파티 모집하는디 그대가 오면 그 파티는 죽소]
[서버] [끄오용 : 양심껏 사냥하씨요 -뇽-]
방학이 끝나고, 전체적으로 학생 수가 적은 레인보우 힐도 질풍과 달빛의 부재로 길드 분위기가 조금은 썰렁해졌다. 길드원들과 파티를 꾸려 던전을 돌던 율과 시언은 서버 채팅에 언급되는 익숙한 아이디에 손을 멈췄다.
[광인한 남자 : 와 결국 서버챗으로도 욕먹네]
[KING Husband : 요즘 미아 누나 가관도 아니라던데?]
[노아 : 왜?]
[KING Husband : 히든스킬하나 믿고 엄청 기고만장한가 봐]
[광인한 남자 : 전에는 편살형이 무봉해줘서 그다지 논란이 될 건 없었는데 요즘엔 편살형 무봉도 없이 단독으로 파티 매칭하고 그러나 보더라고]
[무지개 요정 : 아이고..]
[니지 : 솔직히 그냥 던전에서야 닥사니까 풀파로 프리 두 명 정도 껴서 가긴 하는데 인던은 풀파 정원이 줄잖아요. 근데 그 한 명 뿐인 프리가 미아 언니인 거예요...]
[노아 : 끔찍하네..]
[니지 : ㅋㅋㅋㅋㅋ 그런데 미아언니가 히든스킬 렙 올려야 한다고 보조는 안하고 쿨돌때마다 히든 스킬만 써대는 모양이라..]
[무지개 요정 : 지가 격수래니...]
[광인한 남자 : 그런데 그 누나 스킬 뎀지도 안 나와서 욕 더 먹는 것 같던데?]
[율 : 데미지가 안 나와요?]
[광인한 남자 : 응 하프 히든 스킬은 마공에 영향을 받잖아 근데 미아누나 장비는 대부분 방어 위주거든...그래서 그 누나 스킬 뎀지 보면 일반 클래스 궁보다 안 나오는 경우도 있다더라고]
[니지 : 같은 스킬인데 세츠 언니랑 뎀지 차이 엄청남ㅋㅋㅋㅋ]
[KING Husband : 맞아 ㅋㅋㅋㅋㅋㅋ]
[광인한 남자 : 아무튼 표면적으로 보이지 않던 발컨 문제가 심화하니까 슬슬 사람들이 그거 물고 늘어지는 것 같아]
[니지 : 이대로 망했으면!!]
온종일 길드원들과 어울려 보스를 잡으러 다니고, 숙련되지 않은 던전을 헤딩하고, 쉼터에서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던 율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를 시언에게 배웅받으며, 헤어지는 두 사람의 인사말은 언제나 ‘금방 접속할게요.’와 ‘기다릴게.’가 되어 있었다.
인사말을 끝으로 후다닥 집으로 들어가는 율의 모습을 확인한 시언은 천천히 걸어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텅 비어 있던 조용한 실내를 걸어 2층으로 향한 시언은 침대 옆 탁자 서랍을 열어 율이 쓰던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침대 위에 앉아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조금 기다리자 통신사 로고가 화면 안에 떠오르고, 곧 익숙한 바탕화면이 액정 가득 차올랐다.
조용히 앉아 부재중 통화와 톡 등을 확인하던 시언은 한 명과의 대화창을 확인하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율의 핸드폰을 자신이 가지게 되면서 김차운의 차단을 풀었다.
그리고 그가 율에게 어떤 톡과 문자를 보내는지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새겨보는 시언이었지만, 언제나 그가 율에게 보내는 메시지들은 하나같이 역겹고 추접스러운 말들뿐이라 매번 확인할 때마다 주둥아리를 뭉개고,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이 일게 했다.
“쯧….”
결국, 한참 율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시언은 혀를 차며 전원을 끄고는 핸드폰을 다시 탁자 서랍에 던지듯 넣고 몸을 일으켰다.
집으로 돌아와 게임에 접속한 율은 잠수를 타는 듯한 시언의 행동에 의아해하며 그를 기다렸다. 그사이 길드원들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는데, 언제 잠수를 푼 건지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하는 시언을 율은 반갑게 맞았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중, 개학한 탓에 오후까지 함께 어울리지 못한 질풍이 사냥을 가자며 제안을 했지만, 시언은 또다시 오늘은 안 된다며 율의 몫까지 거절하고 나섰다. 왠지 지난번 교장과 담임이 찾아왔을 때와 같은 상황에 율은 어렴풋이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결국, 사냥은 무산이 되고, 쉼터에 몇몇 길드원들과 앉아 수다를 떨고 있던 율의 귓가에 딩동, 하고 울리는 현관 벨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어깨가 움찔거리며 몸이 경직됐다.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신경을 곤두세워 거실에서 움직이는 부모님의 발소리와 말소리를 주워들었다. ‘누구세요?’ 하고 울리는 모친의 목소리가 들리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짧은 침묵, 그 후엔 알 수 없는 부산스러움이 느껴질 뿐이었다.
초조하게 자신을 부르러 올 모친을 기다리던 율은 자신의 방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 앞으로 향했다. 곧이어 예상했던 대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모친과 함께 현관 앞으로 나간 율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교장과 담임 이후에는 어쩌면 성원 일행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긴 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집 안에,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건 경찰 제복을 차려입은 세 명의 남자였다.
예상치 못한 이들의 방문에 당황한 듯 넋이 나가 있는 율과 율의 부모님은 곧 자신들을 소개하는 경찰의 말에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찰서장과 신고를 받고 출동했었던 경찰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연신 고개를 들지 못한 채 하염없이 사과만 하다가 율의 부모님에 의해 쫓겨나듯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을 쫓아내고, 전과같이 현관 앞에 소금을 전투적으로 뿌려대던 모친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갑자기 왜들 저러냐며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그 볼멘소리에 편승하듯 부친도 목소릴 높여 손바닥 뒤집듯 뒤집혀 버린 그들의 태도를 불같이 일갈했다.
율은 왠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시언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증에 당장 시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에게 둘러댈 말이 없었다.
“아들, 엄마 간다?”
요즘 들어 자신에게 자주 인사를 건네는 모친의 행동에 방 밖으로 나온 율은 현관 앞에서 모친을 배웅했다. 그리고 그대로 시간을 재듯 서 있던 율은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에 후다닥 집을 나와 옆집으로 향했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벨을 눌러도 민폐고, 그렇다고 맘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도 민폐란 것은 율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빨리 시언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한 번에 외워버린 시언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치고 뛰듯이 집안으로 들어서자, 부스스한 모습으로 계단에서 내려오던 시언과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율아…?”
생각지도 못한 이의 방문에 놀란 시언이 얼떨떨한 얼굴로 율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대답 없이 저를 향해 뛰어와 안기는 율의 행동에 반사적으로 두 손을 뻗었다.
달려와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등 뒤로 손을 둘러 자신을 끌어안은 율의 행동에 적잖이 놀란 시언은 율의 행동에 놀라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뭔가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겨서 도피처로 자신에게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
“율아? 왜 그래?”
잔뜩 걱정이 배인 목소리로 물었지만, 온은 오히려 몸을 밀착해 올 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시언이 재차 율을 불렀다.
“율아!”
제 품에 안겨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는 그 얼굴에 어떤 근심이 서려 있을지 조바심이 났다. 시언은 서둘러 율의 어깨를 쥐고, 자신에게 붙어 있는 율을 떼어 내려 했지만, 율은 끈질기게 자신의 옷깃을 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
“율아, 말 좀…!”
조바심은 안달로 바뀌었다. 결국, 격양된 목소리로 언성을 높이는 시언의 행동에 율은 그제야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
율의 얼굴을 확인한 시언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짧은 시간 내에 온갖 우려를 했던 자신의 예상과 달리 율은 너무나 초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제는 경찰분들이 다녀가셨어요.”
“뭐?”
대뜸 시작되는 율의 말에 시언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율은 개의치 않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는 다니던 학교의 교장 선생님하고 담임선생님이 오셨었어요.”
“율아?”
“저 사과 받은 것 같아요.”
“…….”
“모두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변했어요.”
“그래?”
“뭔가… 그분들을 변하게 한 무언가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
“시언… 형이 한 거예요?”
조심히, 조용하게 물어오는 율의 질문에 시언은 절로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개인적으로 행한 일이었다. 율이 그들의 사과를 바라고 있을지 바라고 있지 않을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추궁당하는 것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를 만나고 처음으로, 그가 자신에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있어요.”
“뭐?”
“우리 집이 갑자기 돈이 아주 많이 생겨서, 학교에서도 경찰에서도 무시 못 할 정도의 권력을 가지게 된다면… 모두가 굽실거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
“?”
“아니면… 인터넷 같은 데에 제 사연이 퍼져서 가해자들과 쉬쉬한 사람들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저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 생각.”
“?”
“하지만 무엇 하나 이루어지는 게 없어서… 힘들고, 창피하고, 초라하고,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했어요.”
조용조용 내뱉는 율의 말에 시언은 절로 율의 손목에 남아 있는 상처 자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시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율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뭔가 상상할 수 있는, 운이 좋으면 진짜 일어날 수도 있는 가능성에 빗대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봤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상상도 못 할… 운이 좋아도 일어나지 못할 일들이에요.”
“율아.”
“정말… 형이 한 거라면… 형이 해준 거라면….”
“율….”
“정말… 기쁘고… 너무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저를 경멸하실 거예요?”
자신을 올려다보며 얘기하는 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있는 그대로 말한 걸 금세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그로 인해 자신에게 경멸을 사고, 미움을 받을까 봐. 그런데도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얘기하려는 것은 이 아이의 본성일 것이라고 시언은 생각했다.
“고마워하라고 한 건 아니지만… 기뻐하라고 한 건 맞아.”
율의 마음에 답하듯 시언 또한 조용조용 읊조리듯 답을 내줬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으로 시언을 바라보던 율은 시언의 말을 들은 뒤 다시 시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동시에 등 뒤를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시언도 율을 마주 안았다. 한참을 그렇게 율과 마주 안고 있던 시언은 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사과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
시언의 물음에 율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시언은 종용하지 않고, 조용히 율이 답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고 있기를 한참, 율이 자신의 가슴팍에서 긴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아니요.”
“?”
“오히려 늦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뭐?”
“그분들이… 조금 더 빨리 저에게 사과했으면… 전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을 테고… 그럼 시언 형을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