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1. 요정님, 요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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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하고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카페 안으로 장신의 남자가 걸어들어 왔다. 그는 한낮의 햇살보다 빛나는 외모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 “지현 씨, 안녕.” 하고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여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바로 창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는 남자를 보며 여자도 떨떠름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사장님.”
남자의 이름은 홍채원. 지현이라는 여자가 일하고 있는 카페의 사장이자 레인보우 힐 길드의 길드 마스터인 무지개 요정이었다.
창가 자리에서 벽을 등지고 앉아 노트북을 켜고 화면에 열중하는 채원의 완벽한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지현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는 자신의 할 일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또 한 번 딸랑, 하고 울리는 종소리와 걸어 들어오는 한 남자를 향해 지현이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남자 또한 그런 지현에게 가벼운 묵례를 하고는 무언가를 찾듯 카페 내부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찾는 걸 발견한 듯 걸음을 옮겨 자리에 앉았다. 창가 자리에 쇼윈도처럼 앉아 있는 카페의 사장. 홍채원의 맞은편에.
갑작스러운 남자의 행동에 지현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솔직히 이 고즈넉한 카페는 사장의 외모만으로 운영이 된다. 손님의 99%가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고 있으니까. 하지만 누구 하나 그에게 말을 걸어보거나 그의 근처엔 다가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은연중에 그의 외모가 내뿜는 아우라가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으니까.
물론, 입만 열지 않으면 말이다. 그런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채원의 앞에 앉은 남자의 행동에 지현은 순간 남자가 채원의 지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직은 한가한 시간의 카페의 지정석에 앉아 게임에 접속하던 채원은 딸랑, 하고 울리는 종소리에도 시선을 들지 않았다. 보나 마나 자신을 보기 위해 손님을 가장한 인간들일 테니. 그냥 평소처럼 창가에 쇼윈도처럼 앉아서 게임을 즐기는 게 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손님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게임화면에 열중하던 채원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바라봤다.
“?”
그리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너!”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 제로사이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제로사이드의 등장에 놀란 채원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곧 자신의 입을 막고, 주변을 살피며 자세를 살짝 낮추고 목소리도 덩달아 낮췄다.
“네가 여기 왜 있어??”
비밀 얘기를 하듯이 상체를 낮추고 소곤소곤 얘기하는 채원의 행동에 제로사이드도 덩달아 자세를 낮추고 목소리를 낮췄다.
“커피 마시러.”
“뭐?”
“카페에 커피 마시러 오지, 뭐하러 오나요?”
그리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는 제로사이드의 행동에 채원은 기가 찬 듯 입을 쩍 벌렸다. 두 사람이 그렇게 수상한 거동으로 소곤거리며 말싸움을 벌이는데, 어느새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에 다가온 지현이 제로사이드의 앞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려놨다.
갑작스러운 지현의 행동에 테이블에 거의 엎드려 있다시피 한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지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연이어 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지현 씨~ 이놈한테 이런 걸 왜 줘! 이런 거 안 줘도 돼!”
채원의 말에 지현은 제로사이드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다 다시 채원을 바라봤다.
“미남.”
그리고는 미련 없다는 듯 휙, 뒤를 돌아 카운터로 돌아가 버렸다. 지현의 행동에 제로사이드가 멍하니 제 앞에 놓인 시키지 않은 커피를 바라보는데 앞에 앉아 있던 무지개 요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그럼 나는 왜 안 주는데!!”
“여긴 어떻게 알았어.”
무서운 얼굴로 조사하듯 묻는 채원의 얼굴을 턱을 괴고 뚱하니 바라보던 제로사이드는 제 앞에 놓인 커피를 빨대로 휘저으며 답했다.
“형 같은 외모가 어디 흔해요? 지난번 인벤 댓글에서 형 어디서 봤다는 제보가 수두룩하더구먼.”
“아오….”
마주 보고 앉아 얘기하는 두 사람의 주변으로 시선들이 따갑도록 달라붙었다. 점심시간이 지나 잔뜩 사람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는 카페 안은 안 그래도 무지개 요정에게 쏠려 있을 시선과 관심들이 제로사이드라는 인물의 추가로 더욱 열을 띄고 있었다. 호기심과 견제, 탐색의 시선 속에서 두 사람은 무던히도 끊이지 않는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제보가 수두룩한데 네가 왜 와?”
“좋아하니까 만나고 싶잖아요.”
“…그 좋아한다는 소리 좀 집어치우지.”
“왜요?”
“네 장난질에 장단 맞춰줄 생각 없으니까.”
“와… 내 일생일대의 고백이었는데.”
“시끄럽고.”
“그것도 있고… 제가 길드 들어간 것 때문에 화나셨잖아요.”
“?”
“율님 덕분에 흐지부지 넘어가긴 했지만, 형 아직 안 풀렸잖아요.”
“…….”
“괜히 손만 빌려준 노아한테까지 불똥 튀게 하면 미안하니까, 직접 해결을 할까 해서.”
“…….”
“길드 안에서 계속 치고받고 하고 있으면 길드원들도 불편해지지 않겠어요.”
“네놈이 이렇게 찾아오면 내가 불편한데?”
“다수보단 소수가 낫죠.”
“…….”
또박또박 맞받아치는 제로사이드의 말에 자신도 뭐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없는 채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결을 볼 건데?”
“음, 감정에 호소?”
“뭔 헛소리야?”
“나 레힐에서 쫓겨나면 갈 데 없어요, 게임 접어야 할걸요.”
“다시 머스킷 가면 되잖아.”
“머스킷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내가 원만하게 해결 본 건 머스킷밖에 없어요. 지금 발키리에 이어서 블루 비까지 제명이 되고, 글록 동맹 규모가 작아지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저까지 머스킷을 탈퇴해버리니까. 일부에선 날 완전히 적대시하고 있다고요.”
“…….”
“찍혔다고요.”
“화이트 홀에서 역린 사용자가 나왔다면서?”
“나와 봤자 햇병아리죠.”
“사태를 그렇게까지 만들면서 길드를 왜 나와.”
“형이 좋다고 했잖아요.”
“좋다고 꼭 같은 길드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거하고 별개로 레인보우 힐 분위기가 좋아요.”
“뭐?”
“글록 동맹이나, 머스킷이나 약간 기계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거든요.”
“?”
“심하게 틀에 맞춰져 있는 느낌?”
“머스킷도 대형 길드고, 글록 동맹도 대형 동맹이고 사람이 많다 보니까 틀에 박힌 룰로 제어할 수밖에 없잖아요.”
“…….”
“처음엔 좋았죠. 뿌듯하고, 내가 뭐라도 된 느낌이고, 괜히 으스댈 수 있고, 서버에서 알아주는 네임드고.”
자신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는 채원의 얼굴을 흘끗 쳐다본 제로사이드는 컵에든 빨대를 빼내고 커피를 마시며 얼음을 입에 물고 우물거렸다. 그리고는 숙였던 몸을 펴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런데 점점 재미가 없어지더라고요. 흥미를 잃으니까 게임을 접고 싶은데, 내 밑에 딸린 것들이 많다 보니까 맘대로 접지도 못하겠고, 그렇게 어영부영.”
“그럼 지금이라도 접으면 되잖아.”
“지금은 재밌거든요.”
“뭐?”
“형네 길드라서 재밌다고요.”
“내 길드 말고도 재밌는 길드는 얼마든지 있어.”
“그렇죠, 레인보우 힐 같은 분위기를 가진 길드가 또 없다고는 장담 못 할 테니까. 그런데 제가 게임을 계속하려면 글록 동맹의 견제를 버틸 만한 길드가 필요해요.”
“…….”
“그러니까 나 좀 거둬가 줘요, 불쌍하잖아요.”
“동정은 안 생기는데.”
“그럼 우습게 봐줘요. 형의 발닦개? 정도로.”
“발닦개라니….”
“하찮게 봐줘도 되니까 길드에 있게 해줘요.”
“…좋아.”
“오?”
“하지만 사소한 문제라도 일으키면 너랑 노아, 둘 다 퇴출이야.”
“네?”
“뭐?”
“노아를 퇴출한다니요? 그러다 율님까지 나가면 어쩌려고요?”
“!”
제로사이드의 말에 채원은 충격받은 듯한 얼굴로 굳어 버렸다. 그런 채원의 반응을 보며 제로사이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뒤 안 가리고 날뛰느라 그것까지는 생각 못 했던 듯했으니까.
***
딸랑, 하고 울리는 종소리에 지현은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했지만, 곧 걸어 들어오는 상대방을 보고는 멈칫하고 말았다. 그런 지현의 반응에 제로사이드는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채원이 앉아 있는 구석 자리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열심히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던 채원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앞에 앉는 누군가의 모습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뭐 씹은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또 왔어!”
날을 세워 묻는 채원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제로사이드는 자리에 앉아 채원처럼 노트북을 펼쳤다. 그런 제로의 행동에 채원은 또 한 번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 하냐?”
“같이 있어도 된다고 했잖아요?”
“뭔 소리야?”
“어제 받아줬잖아요.”
“길드에 받아 준 거지 누가 같이 있어도 된다고 했어?!”
“그게 그거지, 뭘.”
“야!”
“최민우.”
“뭐?”
“언제까지, 야, 너 할 거예요? 나도 이름이 있는데.”
“누가, 네 이름이 궁금하댔어?”
“형은 인형 던전 아직이죠?”
“…뭐?”
“나랑 가요.”
“…….”
***
딸랑, 하고 울리는 종소리에 지현이 출입문을 바라보자 막 카페로 들어오던 민우가 웃으며 묵례를 했다. 그 모습에 지현도 덩달아 웃으며 묵례를 하자 민우는 곧바로 창가 자리로 향했다.
이제는 그가 맞은편에 앉든 말든 상관도 안 하는 듯 채원은 뚱한 얼굴로 그를 한번 쳐다보고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 채원을 빤히 바라보던 민우도 곧 노트북을 펼치고 게임에 접속했다.
딸랑, 하고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어서 오세요.” 하는 지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항상 민우가 오던 시간대였기 때문에 확인하지 않아도 그라고 확신한 채원은 아마도 또 제 앞에 앉을 테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에 응하듯 역시나 누군가 자신의 앞에 앉았고, 낮은 한숨을 속으로 삼킨 채원은 언제나처럼 시선을 들어 그를 한번 바라봤다.
“…?”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민우가 아니었다. 종종 오던 카페의 손님. 그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뭡니까…?”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던 채원이 조금 불쾌한 기색을 띠며 묻자 웃던 얼굴이 점차 굳어갔다. 동시에 카운터에 있던 지현이 급하게 나와 남자에게 말하며 다가왔다.
“손님, 거긴 앉으시면 안 되는….”
“서, 서비스는 이… 일괄적으로….”
“네?”
하지만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 남자의 모습에 채원은 다가오는 지현에게 손을 들어 만류했다. 그리고는 남자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불편하신 점이 있으면 메이트가 도와드릴 겁니다.”
“서비스는 일괄적으로 해야지!”
“히익-!”
하지만 채원의 정중한 말에 남자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동시에 놀란 지현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남자의 고함보다는 지현의 비명에 채원이 급하게 지현을 바라봤고, 동시에 남자는 테이블 위를 가로질러 채원의 멱살을 쥐었다.
“네 얼굴 보러 오는 건데, 왜 서비스를 차별해?”
“잠, 손님!”
그 모습에 이번에는 지현이 더 놀라며 달려들어 남자를 말리고 손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지현이 남자를 떼어내기엔 역부족이었고, 채원도 당황하며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채원과 민우가 카페에 오는 시간대엔 손님이 많지 않기 때문에 카페 안엔 채원과 지현 남자 셋뿐이었다. 게다가 장사를 하면서 이런 경우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채원과 지현 둘 다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셋이 얽힌 채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매장 안에 딸랑, 하고 울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서늘하게 깔리는 목소리가 세 사람 사이를 뛰어들었다.
“무슨 상황이야, 이건?”
그리고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민우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세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우의 눈이 채원을 시작으로 그의 멱살을 쥐고 있는 남자의 손과 그런 남자의 손을 떼어내려 매달려 있는 지현까지 차례차례 훑었다. 그리고는 상황파악을 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들며 남자를 향해 말했다.
“경찰 부를까?”
민우의 말에 채원을 밀치듯 멱살을 놓은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에서 줄행랑을 쳤다. 창밖으로 허둥지둥 달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민우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채원의 맞은편에 앉았고, 지현도 카운터로 되돌아갔다.
“옷매무새 좀 만져야겠어요, 형.”
목덜미 부분을 가리키며 말하는 민우의 행동에 채원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고, 남자에게 잡혀 엉망으로 구겨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저런 놈들 많아요?”
“응?”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도중 툭 던지듯 묻는 민우의 말에 채원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처음인데….”
“흐음….”
채원의 말에 민우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노트북을 펼쳤다. 그리고 잠시 두 사람 사이는 말이 없었다. 채원은 침묵을 고수하는 민우의 모습이 어색한 듯 흘끗흘끗 그를 바라봤다. 분명 민우도 채원의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고집스레 시선을 들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커피 두 잔이 놓였다. 놀란 두 사람이 시선을 들자 커피를 내려놓은 지현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민우를 향해 긴 한숨을 내뱉더니 카운터로 돌아가 버렸다.
딸랑, 하고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채원의 시선이 출입문으로 향했다. 막 매장에 들어서며 지현에게 묵례하던 민우가 자신을 보고 있는 채원을 보곤 의외라는 얼굴로 웃었다.
“형.”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채원의 맞은편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두 사람이 게임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현이 커피를 두 잔 가져다주었고,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며 꽤 사이좋게 게임을 했다.
7시가 되자 채원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퇴근 준비를 하는 채원을 따라 민우도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란히 퇴근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지현은 조금 측은한 눈으로 멀어져 가는 채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마 그는 모를 것이다. 홍채원이라는 사람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민우와 채원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러 오기 시작했다는 걸.
민우와 나란히 걷던 채원은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며 연신 입가를 달싹거렸다. 하지만 곧 큰길가로 나와 저에게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기려는 민우를 급하게 붙들었다.
“술이라도 한잔할래?”
***
“으….”
눈도 못 뜰 만큼 피곤한 몸이 숙취에 허우적거렸다. 속이 뒤집히는 기분에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채원은 몸을 일으키려 뒤척이다 무게감 있는 무언가가 자신의 가슴을 내리누르고 있는 느낌에 끙끙거리며 눈을 떴다.
“뭐…야?”
흐릿한 시야에 초점이 맞아가자 제 가슴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그건 사람의 팔이었다. 누군가의 팔이 자신의 가슴 위에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잠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머리를 식히고,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익숙한 방 풍경. 자신의 집이었다. 그럼 이 팔은 뭐지? 나한테 팔 하나가 새싹처럼 돋아났나? 하는 생각을 하던 채원은 천천히 팔의 출처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
누워 있는 자신의 옆자리에 엎드려 잠든 채 얼굴의 절반을 베개에 묻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설마 하는 기분이 들었다.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린 머리카락을 슬쩍 치워내자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최민우였다.
“?”
혼란스러움이 폭풍우처럼 몰려와 머릿속을 휘저었다. 당최 작금의 사태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제 둘이서 술을 진탕 먹은 기억은 있다. 하지만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왜 이 녀석이 제 옆에서 자고 있는지, 전혀 기억나는 바가 없었다.
잠시 누워서 지난밤의 일을 생각해 내려 애쓰던 채원은 곧 체념한 듯 긴 한숨을 내뱉고는 자신의 가슴을 가로질러 놓인 민우의 팔을 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하체에서 전신으로 타고 오르는 격통만 없었으면.
“억-!”
저도 모르게 억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신음을 삼키던 채원의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
목소리에 대답하듯 채원이 잔뜩 찌푸린 얼굴을 돌려 민우를 바라보자, 잠시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민우가 제 옆에 누워 있는 채원을 확인하고는 기겁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 뭐?!”
“으아….”
그리고 몸을 일으킨 민우를 보고, 채원은 좌절한 듯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몸을 일으킨 민우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였다. 그리고 이불 속에서 자신의 몸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유추하건대 자신도 전라일 터였다.
“뭐, 왜… 이게….”
“으….”
당황한 듯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거리는 민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채원도 자괴감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더욱 절망스러운 건 두 사람 다 지난밤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전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