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역풍(4) (25/31)

23. 역풍(4)

[길드] [무지개 요정 : 상황이 그런데 혼자 도망을 가?!]

[길드] [제로사이드 : 아니; 저도 너무 당황스러워서;]

[길드] [집사 : 도련님.]

[길드] [무지개 요정 : 너만 당황했어?!]

[길드] [집사 : 도련님.]

[길드] [제로사이드 : 아니;]

[길드] [무지개 요정 : 그래놓고 게임은 참 잘도 기어들어 왔네?!]

[길드] [제로사이드 : 저도 먹고살아야죠..]

[길드] [집사 : 잘못했습니다, 도련님.]

[길드] [무지개 요정 : 살긴 뭘 살어? 걍 죽어!!]

[길드] [집사 : 용서해주세요...]

[길드] [제로사이드 : 아니; 죽으라니;]

[길드] [집사 : 도련님..]

[길드] [무지개 요정 : 집사 시끄러!! 아까부터 도련은 왜 자꾸 불러싸!!!]

[길드] [제로사이드 : 아니 왜 엄한 사람한테까지 화풀이하고 그래요;]

[길드] [집사 : 도련님;ㅁ;]

[길드] [집사 : 도련니뮤ㅠㅠㅠ]

[길드] [집사 : 잘못했어요..]

[길드] [무지개 요정 : 화풀이?! 그럼 네가 내 앞에 딱 와서 화풀이를 당하던가!!]

[길드] [제로사이드 : 나도 나름 억울한 일인데 왜 다 내 잘못인 것 마냥;]

[길드] [무지개 요정 : 억울?! 네가 억울할 게 뭐 있어!!]

[길드] [제로사이드 :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 억울합니다!!!]

[길드] [집사 : 도련님ㅠ 대답 좀 해주세요ㅠ]

쉼터에 앉아 길드 대화를 지켜보던 세츠나와 질풍의 머리 위로 /땀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세츠나 : 저 사람들 왜 저래?]

[질풍 : 그러게; 뭔 일 있었나?]

[길드] [무지개 요정 : 뭐 임마?! 그딴 게 억울해?!!이 눈 째진 새끼가]

[길드] [제로사이드 : 뭐?!]

[길드] [집사 : 도련님.]

[길드] [집사 : 도련님.]

[길드] [무지개 요정 : 왜!!]

[길드] [제로사이드 : 이 깔창요정!!]

[길드] [무지개 요정 : 뭣?!]

[길드] [집사 : 도련님 ㅠㅠ 제발요.]

[길드] [제로사이드 : 아주 신발 속에 하이힐 급의 깔창이 모셔져 있더만!]

[길드] [무지개 요정 : ?!?!?!?!!?]

[길드] [무지개 요정 : 야 닥쳐!!]

[길드] [집사 : 도련님..]

[길드] [집사 : 도련님ㅠㅠㅠㅠ]

[길드] [무지개 요정 : 시끄러 집사!!! 앵무새야 뭐야?!]

[길드] [제로사이드 : 도련님 대답 좀 해줘요 좀!!]

[세츠나 : 난리도 저런 난리는 없구먼..]

[질풍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질풍 : 아 그나저나 나 저번에 사냥하다가 중2병들 봤는데]

[세츠나 : ?]

[질풍 : 미아 누나네 길드 들어가 있더라?]

[세츠나 : 미친?ㅡㅡ]

[세츠나 : 아주 쌍으로 정신을 못 차렸구만?]

[세츠나 : 그 길드가 아직 굴러가고 있다는 것도 의문이다]

[질풍 : 실질적인 길마는 거의 편살 형이라나 봐]

[세츠나 : 헐?]

[질풍 : 아는 사람이 흥미 본위로 그 길드에 드가서 길드 사정 같은 거 종종 전해주는데 미아 누나한테 길마라고 부르는 사람은 미아 누나 끄나풀들 외엔 없대]

[세츠나 : 가지가지 하는구나]

[질풍 : 그 길드 사람들도 미아 누나 발컨 질색팔색한대]

[길드] [무지개 요정 : 이 원수 같은 이십칠즈!!!]

[길드] [제로사이드 : ;;]

[길드] [노아 : 갑자기 머리채를...]

[길드] [도련 : 저는 왜요...]

[길드] [집사 : 도련님ㅠㅠㅠㅠㅠ]

무지개 요정이 말하는 이십칠즈는 길드 내, 27살 동갑내기 3명인 노아, 제로사이드, 도련을 뜻한다. 왕광풍을 잇는 길드 내 신규 유닛이었다.

***

[제로사이드 : 소환할게요?]

[무지개 요정 : ㅇㅇ]

(역린)

무지개 요정의 허락에 제로사이드가 스킬을 사용하자 무지개 요정의 접속이 종료되고,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빛무리와 함께 땅을 뒤흔들며 지크프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로사이드 : 뭔가 새로운 기분이네요]

[NPC] [지크프리트 : 그러게]

[율 : 와...]

[질풍 : 오...]

[KING Husband : 자! 이제 우리를 위해 개처럼 사냥을 해주세요]

[NPC] [지크프리트 : 쟤 파탈]

[제로사이드 : ㅇㅇ]

[KING Husband : 암쏘쏘리!!!벗알라뷰!!!!]

[노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광인한 남자 : 뭐하냨ㅋㅋㅋㅋㅋㅋ]

제로사이드가 소환한 지크프리트와 함께 사냥할 생각에 들떠 있던 길드원들은 필드 중앙에서 정비를 끝내고, 두 사람을 따라나서려 했다.

[제로사이드 : 나머지 분들은 그냥 여기 앉아서 노시면 돼요]

[제로사이드 : 간간히 우리 돌아오면 율님이 버프만 주세요]

[율 : 네?]

[노아 : 우리 아무것도 안 해도 돼?]

[NPC] [지크프리트 : 1시간 동안만 나 자신한테 특수버프가 있으므로 내가 잡으면 경험치가 더 들어오거든]

[NPC] [지크프리트 : 내 소환 끝나고 귀환 버프 걸리면 그때부터 닥사하면 돼]

[제로사이드 : 여러 사람이 잡고 돌아다니다 보면 리젠 시간 동안 필드가 비게 되니까 몹 찾아다니는 시간이랑 동선을 줄이려면 형하고 나만 돌아다니는 게 더 효율적이야]

[질풍 : 와...이래서 제로님 버스 타나보다]

[제로사이드 : 원래 예약이 꽉 차 있는데 오늘 시간 내려고 고생 좀 했어요]

[광인한 남자 : 대박...상냥해..]

[율 : 감사합니다ㅋㅋ]

[제로사이드 : 채원이 형이 다른 놈들은 몰라도 율님은 꼭 해줘야 한다고 해서]

[NPC] [지크프리트 : 내 새끼만 챙기면 됨]

[KING Husband : 우리도 아껴줘요!!]

[NPC] [지크프리트 : ㄲㅈ]

[노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고, 사냥을 위해 필드로 나선 두 사람은 양방향으로 갈라졌다. 각자 반대편 필드의 끝으로 이동을 해서 지크프리트는 몬스터를 잡으며 중앙으로 돌아오고, 제로사이드는 몬스터를 몰고 중앙으로 돌아와서 지크프리트가 잡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율이 버프를 새로 걸어주면, 다시 갈라지는 식의 사냥을 했다.

그런 두 사람의 이동 경로를 미니맵으로 종종 확인하면서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은 필드에 앉아 수다의 꽃을 피웠다.

[질풍 : 그나저나 롭이어가 사역수가 됐는데 외형은 특별한 게 없네?]

질풍의 말에 모두는 멀지 않은 곳에서 지크프리트가 잡은 몬스터들이 떨군 전리품을 주워 먹고 다니는 롭이어를 바라봤다. 열심히 전리품을 독식하던 롭이어는 궁기가 다가와 다른 전리품을 주워 먹자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어 뒷발로 궁기의 얼굴을 냅다 갈겼다.

그리고 나자빠진 궁기가 고통스러워하든 말든 떨어진 전리품을 독식하고 율에게 돌아왔다. 그 황당한 행태에 다들 말이 잃은 사이 율의 채팅이 올라왔다.

[율 : 조폭 토끼예요….]

[노아 : ?!]

[질풍 : 좈ㅋㅋㅋㅋㅋ퐄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광인한 남자 : 미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KING Husband : 궁기 불쌍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율의 말에 길드원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 몸을 일으킨 궁기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시언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노아 : 그나저나 풍이 말대로 롭이어는 평범하네]

[율 : 아...운영자님이 외형 변경권 줬어요]

[노아 : 롭이어??]

[율 : 네 ㅋㅋ]

[광인한 남자 : 근데 왜 안 써?!]

[율 : 네? 이대로도...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질풍 : 아니지!! 쓰라고 준 거는 써야지!!]

[KING Husband : 맞아!! 유니크하게 바뀔 것 같은데!!]

[노아 : 나도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긴 한데..]

[율 : 그럼 쓸까요?]

[노아 : ?]

[노아 : ㅋㅋㅋㅋㅋㅋ]

[질풍 : 율이도 노아 형만 편애해...]

[광인한 남자 : 우리는 기댈 곳이 ㅇ벗구나...]

[KING Husband : 내가 메시아가 되어주마]

[질풍 : /경멸]

[KING Husband : ...]

[율 : /땀]

[노아 : ㅋㅋㅋㅋㅋ 외변권 써보자 신경 써서 주신 걸 텐데]

[율 : 네]

시언의 말에 율은 인벤토리를 열어 롭이어 외형 변경권을 사용했다. 변경권을 사용하자 롭이어 주변으로 빛무리가 모여들더니 롭이어의 몸 주변에서 팽창되듯 터지며 타올랐다. 그리고 외형이 변경된 롭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며 길드원들은 분노에 아우성칠 수밖에 없었다.

[질풍 : 흙미밥 이 개새끼!!!!]

[광인한 남자 : 갈아버려!!!!!!!]

[KING Husband : 이 새낄 어디 가서 찾냐!!!!!!!!]

새로운 외형의 롭이어는 온통 흰색 털에 목을 감싼 리본 테일 머플러와 양 볼을 붉게 물들인 발그레를 한 모습이었다.

새로운 롭이어의 외형에 분노하며 난리를 치던 그들은 율의 버프를 받기 위해 되돌아온 무지개 요정이 롭이어를 발견하고는 분노의 사자후를 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길길이 날뛰던 무지개 요정은 소환시간 줄어든다며 나중에 화내라는 제로사이드에 말에 다시 필드로 끌려나갔고, 나머지는 다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게 수다를 떨던 질풍의 눈에 필드 멀리서 무리 지어 걸어오는 인영들이 보였다.

[질풍 : 어...]

[노아 : ?]

[KING Husband : ?]

[질풍 : 저거...미아누나네 아냐?]

질풍의 말에 모두는 급하게 시야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질풍의 말대로 멀리서 무리 지어 걸어오는 퀸 길드원들과 그사이에 껴 있는 아네미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단연 눈살 찌푸리게 하는 아이디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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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아♡김민지

흑염룡

[아네미아 : 아 ...뭐야..]

[아네미아 : 재수 없어]

지척에 다가온 아네미아는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을 발견하더니, 대뜸 비아냥거렸다. 그 행태에 모두의 눈썹이 비죽이 솟아올랐다.

[KING Husband: 지랄염병]

[광인한 남자 : 염병천병]

[질풍 : 천병만병]

[아네미아 : ㅡㅡ?]

[아네미아 : 나한테 하는 소리니?]

[노아 : 어디서 개가 짖네]

[아네미아 : 뭐라고요?!]

[꼼수가르뎅 : 님들 말들 너무 함부로 하시는 거 아니에요?]

[큐컴버 : 왜 갑자기 시비를 걸고 그러세요?]

[KING Husband : 시비?! 니들은 눈깔이 옹이구멍이냐?]

[광인한 남자 : 누가 봐도 먼저 털린 건 우린데?]

[큐컴버 : 미아 누님이 별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질풍 : ㅇㅇ 그러게 너도 참 재수 없고]

[질풍 : 정말 재수 털린다]

[질풍 : 더럽게 재수 없어]

[질풍 : 살다 살다 너같이 재수 없는 놈 처음 봐]

[질풍 : 큐컴버 세계 최강 극혐 재수]

[질풍 : 오이 존나 썰어 먹어]

[노아 : 미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큐컴버 : ...왜...왜 시비를 걸고 그래요!]

[광인한 남자 : ㅋㅋㅋㅋㅋㅋㅋㅋ두말하는 주둥이 보솤ㅋㅋㅋㅋ]

[KING Husband : 내로남불이라더닠ㅋㅋㅋㅋㅋㅋㅋㅋㅋ]

[꼼수가르뎅 : 그쪽 분들 정말 재수 없네요]

[광인한 남자 : ㅇㅇ]

[질풍 : ㄱㅅ]

[KING Husband : 인정]

[큐컴버 : 이런 분들인 줄은 몰랐네요ㅡㅡ]

[질풍 : 뉘예~뉘예~ 알게쯉니다~]

[광인한 남자 : 알았으면 꺼져 ㅋㅋㅋㅋㅋㅋㅋ]

[꼼수가르뎅 : 저희가 왜 가야 하는데요?]

[큐컴버 : 저희도 사냥하러 온 거거든요?]

[큐컴버 : 아니면 여기 뭐 전세 냈어요?ㅋㅋ]

[KING Husband : 응~ 전세 냈어요~]

[질풍 : 내 후년까지 계약했어요~]

[광인한 남자 : 내 후년에 오세요~]

[아네미아 : 저 길드는 또라이들만 모아놨나ㅡㅡ]

[노아 : 우리 길드 제일 또라이는 길드를 새로 파서 나간 거로 아는데]

[질풍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KING Husband : 기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광인한 남자 : 그때 물갈이 제대로 해서 우리는 1급 청정수가 되었지]

[노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네미아 : 사냥도 안 하고 수다만 떨 거면 마을에 가던가 왜 여기서 난리야ㅡㅡ]

[질풍 : 우리 존나게 사냥 중인 건데?]

[KING Husband : 경치가 폭발 중인데?]

[광인한 남자 : 그쪽하고 우리하고는 사냥하는 클라스가 이렇게 다르지!]

[꼼수가르뎅 : 뭔 헛소리에요?ㅋㅋㅋㅋ]

[큐컴버 : 미쳤나봄ㅋㅋㅋㅋ]

[질풍 : 말뜻을 못 알아듣네? 레베루가 달라요 몰라?!]

[노아 : 그리고 여기는 그쪽들 렙에 버거운 사냥터 아닌가?]

[아네미아 : 이 인원이면 충분하거든요ㅡㅡ]

[노아 : 아~ 질보단 양?]

[노아 : 근데 막상 뜯어보면 양도 별로 안 될 것 같은데?]

[질풍 : 질소 포장?]

[KING Husband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광인한 남자 : 존낰ㅋㅋ파티원의 안전을 위해 질소를 추가하였습니다]

[질풍 : 질소 포장해도 박살 날 건 다 박살 나던데~]

[노아 : 몹들한테 줘터지고 부활해서 가는 것보다 지금 제 발로 가는 게 덜 치욕적일 텐데?]

[아네미아 : 웃기지도 않아ㅡㅡ 그쪽들이나 줘터지고 부활해서 가지 그래요?]

[노아 : 우리는 누구랑 달리 끝내주는 프리가 있어서 괜찮음]

[질풍 : ㅇㄱㄹㅇㅂㅂㅂㄱ]

[아네미아 : 헛소리 그만하고 사냥하는 데 방해되니까 앉아서 놀 거면 마을이나 가라고요ㅡㅡ]

아네미아의 짜증이 가득 배인 채팅이 올라오고, 길드원들도 반박할 말을 하기 위해 채팅을 치고 있을 때, 가만히 있던 율의 캐릭터 위로 레벨업 이펙트가 떠올랐다.

[아네미아 : ??]

갑작스러운 율의 렙업에 놀란 아네미아와 퀸 길드원들 사이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디 하나가 끼어 들어왔다.

[NPC] [지크프리트 : 이건 또 뭐야?!]

생소한 아이디를 보며 미아 일행은 당황한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도 길드 말이나 파티 말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렇게 수상한 침묵을 고수하는 그들 사이로 또 하나의 아이디가 불쑥 끼어들었다.

[제로사이드 : 어? 무지개 길드에 까이는 걸 즐기시는 미아님이네]

[아네미아 : ㅡㅡ?]

지크프리트의 말에는 반응 없던 아네미아가 제로의 말에는 반응을 보였다.

[아네미아 : 그쪽은 저번부터 징하게 끼어드시네요]

[제로사이드 : 이제 끼어들 자격은 되지 않나?]

[아네미아 : ?]

제로의 말에 아네미아는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제로사이드의 아이디 앞에 붙어있는 레인보우 힐 길드의 엠블럼을 발견하고는 기함했다.

[아네미아 : 미쳤네...]

[제로사이드 : ?]

[아네미아 : 설마 길드를 옮길 줄이야..]

[아네미아 : 제정신 아니네요]

[제로사이드 : 너무 제정신인데?]

[NPC] [지크프리트 : 그딴 것보다 저 중2병들이 왜 있어?]

[아네미아 : ?]

[아네미아 : 쟤들이 왜요?]

[NPC] [지크프리트 : 저것들이 내 길드에서 왜 쫓겨난 지 몰라?]

[아네미아 : 난 정모 자리에서 쫓겨난 지라 잘 모르겠는데요?!]

[아네미아 : 그리고 내 길드에요ㅡㅡ 내가 누굴 받아주건 말건 요정 씨가 뭐라 할 건 아니죠]

[아네미아 : 주제넘게 참견 좀 하지 말아줄래요?]

[KING Husband : 개노답]

[제로사이드 : 주제 넘겤ㅋㅋㅋㅋㅋㅋㅋ]

[제로사이드 : 넘을 주제도 없어 보이는구만 ㅋㅋㅋ]

[아네미아 : ㅡㅡ]

[NPC] [지크프리트 : 아 그래 좆같은 너희 길드가 오물을 처먹든 싸든 내 알 바 아니긴 하지]

[NPC] [지크프리트 : 그래도 우리 앞에 오물들 모습은 보이지 말지?]

[NPC] [지크프리트 : 왜 급도 안 되는 것들이 여기까지 기어 와서 사람 승질을 건드려?]

[아네미아 : 급이 되는지 안 되는지 그쪽이 어떻게 알아요?]

[NPC] [지크프리트 : 편살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어디서 오합지졸들 떼로 몰고 와서는]

[질풍 : 양치기 소녀인가]

[제로사이드 : 그냥 두죠 어차피 한 탐도 못 버티고 단체로 마을갈 삘인데]

[노아 : 아니면 한 마리도 못 잡아보고 울면서 가거나]

시언의 말에 평화롭게 앉아 있던 길드원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그림니르의 비가)

KING Husband가 연주를 시작하자, 흰색으로 빛나는 장판이 KING Husband의 주변으로 펼쳐졌다. 스킬의 효과로 공격이 막힌 미아 일행은 또다시 두 눈 멀쩡히 뜨고 몬스터들을 빼앗겨야 했다.

[큐컴버 : 스샷찍었어요 신고할 겁니다]

[질풍 : ㅇㅇ]

[노아 : 스틸로는 채금이 다임]

[꼼수가르뎅 : ㅡㅡ]

[광인한 남자 : 어차피 우리가 안 잡아주면 님들 올 다이임 ㅋㅋㅋㅋㅋ]

[KING Husband : 존나 보디가드인데 말이지]

아네미아 일행은 현재 있는 필드에서 각개전투를 펼칠 역량이 되지 않는다. 그 탓에 몰려다니며 한 마리 한 마리를 잡아야만 했는데, 각개전투를 펼치지 않으니 율 일행이 들러붙어서 몬스터들을 전부 스틸 해 가고 있었다.

[아네미아 :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 좀!]

[질풍 : 아니 겁나 소듕하게 지켜드리고 있는 건데 왜 진심을 몰라쥬지..]

[광인한 남자 : 광이는 슬퍼;ㅁ;]

스틸당한 몬스터를 두고 말싸움을 벌이는 그들 사이를 롭이어가 돌아다니며 전리품을 주워 먹고 있었다.

[아네미아 : 네까짓 것들이 지키긴 뭘 지켜!!]

[KING Husband : 누나는 기억력이 참 안 좋은가 봐 저번에 해저신전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어 놓고도 그렇게 우리랑 부대끼고 싶은가?]

[KING Husband : 혹시 약간 그런 성향이 있어? 괴롭힐 당하길 좋아하는?]

[아네미아 : 개 같은 소리 그만해라]

[KING Husband : 아 진짜... 같이 욕해줄 수도 없고...]

[아네미아 : 신사 코스프레 하니?ㅋㅋㅋㅋㅋ]

[아네미아 : 내숭 떨지 말고 욕해 누가 말리니?]

[KING Husband : ... 세츠 누나라도 불러와야 하나..]

[아네미아 : ?]

[아네미아 : ㅋㅋㅋㅋㅋㅋ너흰 세츠 없이는 욕도 못하니?ㅋㅋㅋ 걔한테 허락 맡고 욕해?ㅋㅋㅋㅋㅋ]

[질풍 : 응!]

[광인한 남자 : 야ㅐ잌ㅋㅋㅋ]

[KING Husband : 도랏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왕광풍이 웃고 떠드는 사이, 근처에 리젠된 몬스터 한 마리가 아네미아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아네미아 일행은 또 스틸을 당할까 봐 부랴부랴 몬스터에게 달려들었지만 율 일행은 어째선지 스틸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그들을 지켜만 볼뿐이었다.

아네미아 일행은 총 6명이었지만 몸을 설 만한 캐릭터가 없었다. 딱히 탱이 없더라도 장비가 좋은 사람이 몸을 서면 되는 일이었지만, 장비가 좋은 사람도 없었다.

몬스터 한 마리를 잡지 못해 6명이 고군분투했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시언은 대뜸 몬스터들을 도발하는 티라노스 스킬을 사용했고, 인식범위 밖에 있던 몬스터들이 전부 시언을 인식하며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몬스터들이 지척에 다가오자 율 일행은 전부 비프로스트의 조각을 사용해 필드의 곳곳으로 날라버렸다.

한참 뒤 그들이 다시 같은 자리에 되돌아왔을 때, 어디에서도 아네미아 일행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길드] [질풍 : 지금 미아 누나네 길드 난리 났다던데!]

[길드] [세츠나 : ?]

[길드] [노아 : ?]

[길드] [무지개 요정 : ??]

[길드] [질풍 : 화이트 홀에서 편살 형 영입해서 퀸 길드 흡수하려고 한다나 봐]

[길드] [광인한 남자 : 헐?]

[길드] [KING Husband : 뭔 소리야?]

[길드] [질풍 : 그것 때문에 미아 누나랑 편살 형 따르던 사람들이랑 패 갈려서 쌈질한다고 하더라고!]

[길드] [질풍 : 미아 누나는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이다보니까 아예 길드 여론이 화이트 홀로 흡수될 거 아니면 미아 누나를 길드에서 쫓아내자는 쪽으로 쏠리는가 보더라]

[길드] [도련 : 와... 어지간하면 길마를 쫓아내자는 말은 안 나올 텐데]

[길드] [집사 : 도련님.]

[길드] [도련 : 길드 운영을 어떻게 해왔기에]

[길드] [집사 : 도련님.]

[길드] [노아 : 근데 갑자기 화이트 홀에서 왜 퀸을 흡수하기로 한 거래?]

[길드] [질풍 : 글쎄..]

[길드] [무지개 요정 : 제로 너는 뭐 아는 거 없어?]

[길드] [제로사이드 : 별로?]

[길드] [무지개 요정 : 진짜 없어?]

[길드] [제로사이드 : 나 왜 취조당함?ㅋㅋㅋ]

[길드] [무지개 요정 : 없어?]

[길드] [제로사이드 : ;;]

[길드] [제로사이드 : 그냥 나는 이제 힘이 없으니까 화이트홀한테 넌지시 부탁만 했을 뿐이에요]

[길드] [광인한 남자 : 반하것다..]

[길드] [질풍 : 다정해..]

[길드] [KING Husband : 왕광풍의 반열에 들어오실래요?]

[길드] [제로사이드 : 와? 넣어주시는 거예요?ㅋㅋㅋㅋ]

[길드] [질풍 : ?!]

[길드] [질풍 : 거절을 하지 않다니?!]

[길드] [광인한 남자 : 반했다!!!!!!]

[길드] [노아 : 확실히 퀸 길드의 진짜 실세는 편살 님이라고 했으니까..]

[길드] [도련 : 요즘 편살 형이랑 미아 누나랑 같이 어울리는 모습도 못 봤던 것 같은데]

[길드] [집사 : 도련님...]

[길드] [질풍 : 아 그거]

[길드] [질풍 : 편살 형이 다른 길드원들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200 찍었었는데 미아 누나가 그거 갖고 꼬투리 잡고 난리 부리면서 렙다 시키라고 했다나 봐;]

[길드] [노아 : 렙다?]

[길드] [광인한 남자 : 제정신 아니네 진짜]

[길드] [KING Husband : 하진 않았겠지...?]

[길드] [질풍 : 했대...렙 다운 포션 사서 썼다고..]

[길드] [무지개 요정 : 미친놈..]

[길드] [도련 : ;;]

[길드] [집사 : 도련님ㅠ]

[길드] [율 : 렙 다운 포션 캐시템 아니에요?;]

[길드] [노아 : 맞아 만원인가? 그럴걸]

[길드] [KING Husband : 호구인증제대로네]

[길드] [질풍 : 근데 그 이후로...편살 형이 미아 누나 대하는 게 달라졌다고 그러던데;]

[길드] [광인한 남자 : 정 떨어졌나 보지?]

[길드] [도련 : 콩깍지가 만원에 벗겨졌거나]

[길드] [집사 : 도련님ㅠㅜ]

[길드] [질풍 : 그래서 지금 편살 형이 화이트 홀로 넘어갈 확률이 높다고 하더라고 퀸 길드 공중분해 될 거라고...]

[길드] [무지개 요정 : 있을 때 잘할 것이지 ㅉㅉ]

[길드] [제로사이드 : 그러게요]

며칠 뒤 결국, 복세편살이 화이트 홀로 넘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복세편살을 따르던 길드원들도 몽땅 길드를 탈퇴해 화이트 홀로 향했고, 퀸 길드에 남은 건 길마인 아네미아와 그녀의 떨거지들, 가입 이래 접속을 하지 않던 잠수 캐릭터들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조용하다 싶던 아네미아는 어느 날부터 서버 말로 복세편살과 화이트 홀을 싸잡아 욕을 하며 대놓고 저격하기 시작했다.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복세편살이 사냥을 가는 던전이나 필드를 귀신같이 알아내서 쫓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무시로 일관하는 복세편살의 행동과 그녀를 적대시하는 화이트 홀의 견제에 이도 저도 할 수 없게 된 그녀는 갑작스럽게 저격의 대상을 변경했다.

-레인보우 힐 길드의 정체. [작성자 : 아네미아]-

나는 레인보우 힐 길드에 꽤 오래 몸담았던 원년멤버였음. 하지만 하루아침에 탈퇴 권고를 받았고, 억울했지만 친했던 길드원들 몇을 데리고 나와 신생 길드를 만들게 됐었음. 하지만 그 길드마저 화이트 홀에서 주력 길드원들을 빼내어 가는 바람에 몰락의 위기에 처해있음.

나는 이 모든 일의 시초가 된 레인보우 힐 길드의 실체를 밝혀주려고 함.

우선 길마인 무지개 요정은 정말 능력도 없고 줏대도 없는 얼굴만 봐줄 만한 허수아비 같은 사람임. 카리스마도 없고, 하나의 단체를 이끌어 갈 만한 재목은 아님. 근데 히든 스킬도 있고, 히든 엔피씨니까 겉보기식으로 계속 길마자리에 앉혀놓는 것임.

도련은 그냥 아이디가 특이해서 부길마가 됐던 공기 같은 놈.

노아는 레인보우 힐의 숨겨진 실세임. 히든클래스가 되고 나서 원래 부 길마였던 도련을 밀어내고, 부길마가 되었음. 재력과 능력을 사용해서 길마를 조종하여 나를 쫓아냈음. 기본적으로 정말 싸가지가 없음.

세츠나는 친목질의 요충지임. 길드 내 파벌을 만들어서 어장 질을 하고, 여왕벌 짓을 일삼고 있는데, 길드원들 대부분이 그 어장에 걸려서 헤벌레 하고 있음. (내가 볼 땐 넷카마인 것 같음)

왕광풍이 그 대표적인 일벌들임.

니지는 세츠나의 대표적 끄나풀임 어딜 가든 그녀와 함께하는 존재로 그녀의 만행을 돕고 콩고물을 받아먹음. 제2의 여왕벌이 될 가능성이 있음.

율....이 사람은 정말 질이 제일 안 좋음. 게다가 게이임. 매일 노아에게 꼬리를 치고, 노아 옆에만 붙어있음. 노아는 이 사람 정말 질색팔색하는데 히든클래스로 얽혀서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님. 기본적으로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징그러움.

대략 레인보우 힐 길드의 실세들 정체는 이러함. 다들 저 길드의 포장된 모습만 보고 접근하지 말길 바람. 나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오길 원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폭로하는 거임.

아네미아의 글로 서버에 큰 논란이 일었다. 그런데 댓글의 여론이 퍼붓는 비난의 방향은 레인보우 힐 길드가 아닌 대부분 아네미아였다.

[길드] [세츠나 : 내가 넷카마...]

[길드] [니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넷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캌ㅋㅋㅋㅋㅋㅋㅋㅋ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세츠나 : 닥치렴..끄나풀아...]

[길드] [질풍 : 우리는 설명이 왜 저거뿐이야..]

[길드] [KING Husband : 우리는 자아가 없느냐고...한데 묶지 말라고..]

[길드] [광인한 남자 : 오늘부로 왕광풍을 해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길드] [도련 : 아이디가 특이한 거라도 알아줘서 다행인가..]

[길드] [집사 : 도련님ㅠㅠㅠ]

[길드] [무지개 요정 : 내 새끼한테 저게 무슨 짓이야!!!!!!]

[길드] [율 : ;;]

[길드] [제로사이드 : 본인 욕은 괜찮은가 봐요?]

[길드] [무지개 요정 : 내 욕이 문제가 아니잖아!! 감히 내 새끼를 저딴 식으로!!!]

[길드] [세츠나 : 게이나 넷카마나....]

[길드] [니지 : 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세츠나 : 저 육시랄 년............]

[길드] [도련 : 육시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집사 : 도련님....]

[길드] [질풍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광인한 남자 : 그나저나 누가 집사 좀 말려줘라...]

[길드] [집사 : 도련님ㅠ]

아네미아가 올린 글에 길드원들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보였다. 그냥 반응을 즐기는 정도. 하지만 율은 웃을 수 없었다. 모두에게 자신과 시언의 관계를 들켜버린 것 같아서, 그리고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는 시언이 걱정되어서.

결국, 아네미아가 올린 글은 한순간의 헤프닝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녀가 올린 글은 어느덧 유머 글로 변모했는데, 이유인즉슨 대다수의 유저들이 그 글을 믿지 않았고, 무엇보다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의 반응들이 한몫했다. 화를 내기보다는 웃고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오히려 비난의 폭격을 받은 아네미아는 어느 날부터 게임에 접속하지 않게 됐다. 다들 그녀가 창피함에 게임을 접은 줄로만 알았다.

[KING Husband : 근데 미아 누나 말야]

[광인한 남자 : ?]

[KING Husband : 떠도는 말론 영정을 당했다던데?]

[질풍 : 잉??]

[제로사이드 : ?]

[율 : ??]

[무지개 요정 : 뭔말이냐?]

[KING Husband :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퀸길드에서 은연중에 나온 말이라는 썰이..]

[KING Husband : 영정 당했대]

[무지개 요정 : 왜??]

[KING Husband : 모르죠;]

[광인한 남자 : 저번에 인벤에 올린 글 때문인가??]

[질풍 : 그런 걸로 왜 영정을 당해;]

[무지개 요정 : 제로! 아는 거 없어?!]

[제로사이드 : ?!]

[제로사이드 : 없는데...]

[무지개 요정 : 진짜 없어?!]

[제로사이드 : 이번엔 진짜 없어요; 저도 황당한데;]

[무지개 요정 : 진짜야?!]

[제로사이드 : 진짜에요 제가 유저 하나 영정 시킬 능력이 있다고 보세요?;]

[노아 : 뭔가 또 있었나 보죠]

[세츠나 : 다신 볼일 없겠구만? 육시랄 년!]

[니지 : 맘에 담아두고 있엌ㅋㅋㅋㅋㅋㅋ]

[도련 : 암튼 골칫거리 치워서 좋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집사 : 도련님...]

[율 : ㅋㅋㅋㅋㅋㅋ]

아네미아의 영정 소식을 접한 길드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시언은 깍지를 끼고 기지개를 켜며 나른한 듯 의자에 기댔다.

‘율님이 남자나 후리고 다니는 게이라고 인벤에 올릴 거예요. 정말 사귀는 사이라면 율님한테 피해가 가는 건 피하고 싶지 않으세요?’

언젠가 아네미아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시언은 다시 모니터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 속에 길드원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 율의 캐릭터를 바라보던 시언은 실소를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후회한다니까.”

[길드] [욕정벌레 : 근데, 그 미아라는 분이 부계를 파서 와가지고 흙미밥? 그 사람처럼 뒤통수를 치면 어쩌나요??]

[길드] [무지개 요정 : 미아는 그 정도 잔머리는 없을걸?]

[길드] [노아 : 애초에 히든스킬을 열었던 본계가 블락당한거라 의욕상실일 듯]

[길드] [제로사이드 : 나 같아도 이 계정 블락당하면 다시는 겜안함...]

[길드] [질풍 : 게다가 편살 형한테도 버림받았잖아]

[길드] [광인한 남자 : 아주 왈도랑 쌍으로 주접이었어]

[길드] [KING Husband : 그러겤ㅋㅋㅋ인벤에 똥 싸지르고 사라지는 것까지 똑같네]

[길드] [도련 : 다른 게 있다면 왈도는 빡이쳤지만 미아는 개그였다는 점?ㅋㅋㅋㅋ]

[길드] [집사 : 도련님...]

***

시언의 집에서 시언과 게임을 하던 율은 적당한 시간이 되자 시언의 배웅을 받으며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짧디짧은 거리를 손을 잡고 걷는 두 사람의 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느릿느릿했다.

“미아님이… 인벤에 올렸던 글이요.”

자신의 옆에서 들려오는 율의 목소리에 시언은 시선을 내려 율을 바라봤다.

“괜찮을까요? 누가 의심이라도 하면….”

“그건….”

“?”

“이미 세츠의 넷카마 설에 묻힌 것 같은데….”

자신의 말에 당황한 듯 굳어버린 율의 반응을 보며 시언은 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괜찮아, 아무도 신경 안 써. 걱정 안 해도 돼.”

[길드원 세츠나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 [세츠나 : 헬로우 에브리원~]

[길드] [니지 : 언니 하잉~]

[길드] [질풍 : 오셨슴까 형님]

[길드] [KING Husband : 행님 늦으셨씀다 행님]

[길드] [광인한 남자 : 성전환은 언제 하실 생각이십니꽈 형님]

[길드] [세츠나 : ...]

[길드] [제로사이드 : 뭐얔ㅋㅋㅋㅋㅋ]

[길드] [무지개 요정 : 늬들 그러다 맞는다..]

[길드] [레이몬드현식 :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율 : 누나한테 왜 그래요ㅠㅠ]

[길드] [노아 : 미친놈들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도련 : 제 정신이냐곸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집사 : 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길드] [욕정벌레 : 어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무지개 요정 : 굴다리 밑으로 소환되면 어쩌려고..]

[길드] [제로사이드 : 언제 적 유머예요?]

[길드] [광인한 남자 : 가끔씩 길마님이 안타까움..]

[길드] [KING Husband : 세월이 무색하지요...]

[길드] [질풍 : 구시대의 유물!]

[길드] [무지개 요정 : 뭣?!]

[길드] [무지개 요정 : 구시대의 잔재들 주제에!!]

[길드] [세츠나 : 시끄러워요ㅡㅡ]

[길드] [무지개 요정 : ;ㅁ;]

[길드] [무지개 요정 : 미안합니다...]

[길드] [제로사이드 : ;;]

[길드] [세츠나 : 내 기필코 다시 정모를 하면 저것들을 여자로 만들어주고 말리]

[길드] [질풍 : ?!?!?!]

[길드] [KING Husband : /헉]

[길드] [광인한 남자 : ;;;]

[길드] [니지 : 뽕알제거 (/ω\*)]

[길드] [율 : 서로 성전환하시는 거예요?ㅋㅋㅋ]

[길드] [세츠나 : ?!]

[길드] [세츠나 : 원해?]

[길드] [율 : 네??]

[길드] [세츠나 : 우리 막내가 원한다면야..]

[길드] [율 : 아? 아니에욬ㅋㅋㅋㅋ]

[길드] [율 : 어..근데 왕광풍 형들은 몰라도 세츠누나는 남캐 하면 멋있을 것 같긴 해요 ㅋㅋㅋ]

[길드] [세츠나 : 성전환권을 사야 하나요...]

[길드] [니지 : 정신차렼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노아 : 그러다 넷카마 설이 정설이 된다ㅋㅋㅋㅋㅋㅋ]

[길드] [세츠나 : 헛...]

[길드] [욕정벌레 : 세츠님 성전환하면 저랑 결혼해용!!]

[길드] [세츠나 : ...]

[길드] [세츠나 : 천 년의 욕정이 식는다...]

***

한 편의점 안에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3명이 테이블에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시발 진짜 게임 접어야 하나.”

의자에 앉아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던 성원이 툭 내뱉은 말에 현석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거들고 나섰다.

“더 들어갈 수 있는 길드도 없고, 뭐 되는 게 없어.”

“그나마 여기저기 쫓겨나다가 겨우 미아 누님네 정착하나 했더니만….”

“그 시발 무지갠지, 기지갠지 애초에 거기 들어가는 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존나 악연도 아니고…… 야, 김차운 너는 왜 아까부터 말이 없냐?”

그들은 대화를 이어가다 멍하니 앉아만 있는 차운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응?”

그제야 차운은 반응을 보이며 놀란 듯 되물었고, 두 사람은 그런 차운을 더욱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왜 넋이 빠져 있어, 너는?”

“게임 접을 생각에 심란하냐?”

“어… 응.”

연이은 두 사람의 질문에도 대충대충 얼버무리듯 답한 차운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차운의 행동에 두 사람의 황당한 시선도 절로 딸려 올라왔다.

“뭐야?”

“어디 가?”

“나… 오늘은 먼저 가볼게.”

“뭐? 야!”

“어딜 가는데!”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간다는 말만 남기고 편의점을 나서는 차운의 뒤로 성원과 현석의 고함이 들려왔지만, 차운은 개의치 않는 듯 빠르게 발을 놀려 길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차운이 가버리고 편의점에 남은 두 사람은 황당한 듯 짧은 욕설을 내뱉었지만, 이내 관심을 거두고, 게임 얘기를 계속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준비를 끝낸 율은 시언이 자신을 데리러 올 10시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하염없이 시계를 바라보고 있어도 30분은 맘먹은 대로 훌쩍 지나가 주지 않아서 그냥 자신이 시언의 집으로 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 딩동, 하고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거의 반사적으로 방에서 나온 율은 단숨에 현관으로 달려가 여느 때처럼 상대방을 확인하지도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열린 현관문 밖에 서 있는 건 시언이 아니었다. 문고리를 쥔 채 놀란 얼굴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율을 따라 상대방인 차운도 예고 없이 벌컥 열린 문에 당황했는지 사태파악을 못 하는 얼굴로 열린 문과 율을 번갈아 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궈….”

그러다 차운이 율의 이름을 부르며 한걸음 다가왔고,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율은 잡고 있던 문고리를 냅다 당겨 현관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차운이 현관문과 문틀을 붙잡고 버티며 문을 닫지 못하게 했고, 채 닫히지 못한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는 차운의 행동에 놀란 율이 문고리를 쥐고 당기던 한 손을 풀어 차운의 어깨를 밀어냈다.

“나가!”

긴장한 듯 잔뜩 갈라서 터져 나오는 고함과 자신의 어깨를 밀치는 율의 행동에 차운은 대번에 미간을 구기며 현관문을 뜯어낼 듯이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차운을 밀어내느라 한 손으로 문을 잡고 있던 탓에 손쉽게 차운의 침입을 허락해 버린 율은 열린 문 안으로 들어와 버린 차운의 등 뒤로 천천히 닫히는 현관문을 바라보며 잔뜩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권율….”

율은 제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차운의 행동에 마치 등 뒤가 막힌 듯 움찔대며 멈춰 서고 말았다. 두려움에 떨리는 무릎이 당장에라도 꺾일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이 이상 그를 집 안에 들어오게 할 수는 없었다. 율은 고개를 억지로 세워 차운과 눈을 마주했다. 질척한 시선과 마주하자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나가….”

있는 대로 떨리며 형편없이 터져 나온 목소리가 한 번 더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지만, 차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율에게 손을 뻗었다. 그가 뻗은 손이 율의 팔에 닿자 율은 불에 댄 듯 놀라며 팔을 털어냈다.

“나가!”

한 번 더 악을 쓰듯 내지른 말에 차운이 혀를 차며 단숨에 거리를 좁혀와 율의 양팔을 쥐었다. 맨살에 닿는 그의 체온에 온몸에 소름이 일었다. 본능적으로 몸부림쳐 빠져나오려는 율의 몸짓에 차운은 손에 더욱 힘을 가하며 억지로 그를 바닥에 앉혔다.

“얘기 좀 해.”

“뭐?”

“얘기만 해. 아무것도 안 할게, 제발 얘기만 좀 해.”

“할 얘기 없어, 당장 나가.”

“얘기만 좀 하자고 하잖아!”

차운은 반복해서 저를 쫓아내려는 율의 행동에 참지 못한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놀란 율이 움찔거리며 몸을 움츠리자, 차운도 놀랐는지 서둘러 손을 떼어냈다.

“그… 네가 얌전히 있으면 나도 화낼 일 없잖아? 말 들어.”

“…….”

“얘기만, 얘기만 좀 해.”

“할 얘기 없어, 제발 나….”

수차례 구슬려 봤지만, 제 이야기를 들을 생각조차 없는지, 앵무새처럼 연신 나가라는 말만 하는 율의 행동에 차운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감정을 다스려볼 새도 없이 율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두 사람 사이를 요란하게 울렸다. 얻어맞은 충격에 굳어버린 율을 두고 씩씩거리던 차운은 곧 율의 멱살을 쥐어 끌어당겼다.

“좆같은 새끼야,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내가 널 패겠다고 했어? 죽이겠다고 했어? 그냥 얘기만 좀 하자는 거 아냐, 신사적으로, 응?”

짓씹듯이 말을 내뱉은 차운은 멱살을 쥔 채 율을 일으켜 세우며 무언가를 찾듯 두리번거렸다.

“네 방 어디야.”

차운의 말에 굳어 있던 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두 눈에 황당함이라는 감정이 섞여들었다. 차운이 율의 방을 찾듯 집 안쪽으로 율을 끌고 들어가자, 율은 필사적으로 차운의 손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죽을힘을 다해 몸부림치기 시작한 율의 행동에 놀란 차운이 율을 말려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짐짓 당황했던 차운의 대처는 율을 옭아매듯 끌어안는 것이었다. 차운의 품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자, 율은 발작하듯 소리를 질러댔다.

“이거 놔! 내 집에서 나가! 당장 나가라고!”

결국, 율과 몸싸움을 하던 차운은 제 성에 못 이겨 율을 바닥으로 패대기쳐버렸다.

“읏….”

밀쳐지며 바닥에 부딪힌 충격으로 신음을 삼키던 율은 손끝에 느껴지는 문턱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신발장이 보였다. 아마도 밀쳐진 몸이 현관 앞으로 넘어진 듯했다.

율은 고민하지 않고, 그대로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현관 문고리를 쥐려고 했다. 하지만 뒤에서 급하게 따라온 차운이 율의 발목을 쥐고 끌어당긴 탓에 손끝에서 문고리가 스칠 뿐이었다.

“이 새끼가 진짜.”

잔뜩 열이 오른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대로 율의 몸을 돌려 눕힌 차운이 율의 배 위에 걸터앉아 율의 양손을 무릎으로 찍어 눌렀다.

“?”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당황한 율이 몸을 비틀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 차운은 율의 머리카락을 억세게 그러쥐었다.

“그래… 처음부터 복잡할 거 없이 이랬어야 했어.”

“윽, 뭐 하는….”

“그 새끼하고는 이미 붙어먹었냐?”

“뭐?”

“씨발….”

차운은 한 손으로 급하게 제 바지 버클을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진작 네 입에 내 걸 물려봤어야 했었는데.”

“?”

차운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던 율의 시야에 차운의 바지 지퍼 사이로 튕기듯 튀어나온 흉한 무언가가 자신의 가슴 위에 얹어지는 것이 보였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눈을 떼지 못하는 율의 귓가로 거칠어진 숨소리가 내려앉았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어… 처음부터….”

차운은 율의 머리채를 잡아 상체를 끌어 올렸다. 동시에 율의 배 위에 앉아 있던 자신의 몸을 무릎걸음으로 일으켜 세웠다.

“아아악!”

덕분에 차운의 무릎 아래 깔려 있던 율의 손이 짓이겨졌고, 율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눈앞에 보이는 혐오스러운 광경과 손에서 느껴지는 생경한 고통에 몸부림치던 율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세워 차운의 허리를 찍어 올렸다.

“으억!”

불시에 생각지도 못한 공격을 당한 차운이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다. 그 덕분에 한쪽 무릎 미끄러지며 율의 손을 풀어주게 되었고, 율은 손의 고통을 삭일 새도 없이 차운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정통으로 들어갔는지 뻑, 하는 울림소리와 함께 차운이 제 얼굴을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했다. 그사이 율은 어떻게든 차운에게서 벗어나 보려 했지만, 자신의 다른 손을 짓누르고 있는 무릎과 자신을 깔고 앉은 몸뚱이를 치워주지 않는 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욱… 우욱….”

고통에 찬 신음을 삼키며 제 얼굴에서 손을 떼어낸 차운은 양손 가득 차 있는 피에 대번에 미간을 구겼다. 율에게 정통으로 얻어맞은 통에 코피가 터진 것이었다.

“이 개새끼가….”

무섭도록 음산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율이 차운을 바라봤다. 자신의 주먹에 코를 얻어맞았는지 멈추지 않고 흐르는 피가 인중과 입술, 턱을 타고 흐르며 자신의 배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힉! 비ㅋ….”

끔찍하리만치 징그러운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밀어내고,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는 전부 나오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얼굴의 차운이 죽일 듯이 율의 목을 졸라대기 시작했기 때문에.

“컥… 흣….”

억눌린 숨소리가 간당간당한 숨구멍을 통해 간헐적으로 새어 나왔다. 율은 그나마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차운의 어깨와 머리, 팔등을 때리며 제 목을 조르는 손을 뜯어 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초점을 잃어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차운의 얼굴에 광적인 희열이 서리는 것을 보며 절망하던 율의 귓가에 찰칵, 하고 무언가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해져 가는 정신으로 겨우겨우 눈동자를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현관 앞,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우뚝 서 있는 시언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계단에서 내려오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던 시언은 조금 이른 듯한 시간임을 확인하고도 대수롭지 않게 현관을 나섰다. 전날, 율을 배웅할 때와는 다른,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율의 집으로 향한 시언은 현관 벨을 누르기 위해 손을 뻗었다.

“?”

하지만 현관문 안쪽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음에 손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집에 가족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언은 미련 없이 손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율에게 연락을 해보고 다시 오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가려던 시언은 다시 한번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에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그리고 뒤돌아 현관문을 빤히 바라봤다. 대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샌가 몸은 현관문 앞으로 다가가 현관 문고리를 쥐고 있었다.

평소라면 잠겨 있었을 문이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저항 없이 열렸다. 열리는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들리던 소음이 정확하게 꽂혀 들어왔다.

어딘가 억눌린, 고통에 차 헐떡이는 숨소리. 활짝 열린 현관문 사이로 정면을 직시하던 시언은 들려오는 소음을 따라가듯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

눈앞에 벌어져 있는 광경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있는 현실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감각.

하지만 자신에게 닿는 꺼져가는 율의 눈동자가, 그의 목을 조르고 있는 타인의 손이. 그의 배 위에 올라타 있는 이가 내놓고 있는 흉한 물건이. 차례차례 믿지 않을 수 않는 현실로 다가왔다.

“시… 어….”

그리고 억눌린 숨 속에서 가까스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시언은 그대로 손을 뻗어 차운의 머리칼을 쥐고 두피를 뜯어낼 듯이 끌어 올렸다.

“으아악!”

부지불식간에 들어 올려진 몸과 그 덕에 머리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격통에 차운은 비명을 지르며 율을 조르던 손을 풀고, 제 머리를 틀어쥐고 있는 시언의 손을 쥐었다. 율에게서 떨어져 나온 차운이 저에게 매달리자, 시언은 그대로 차운을 집 밖으로 끌어냈다.

차운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율은 숨이 넘어갈 듯 숨을 쉬며, 격하게 기침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힘겨운 듯 기침을 뱉어내는 율을 보며 차운을 끌고 가려던 시언의 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차운이 제 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기 시작하자, 미간을 잔뜩 구긴 시언은 율을 홀로 남겨두고, 현관문을 닫았다.

“문 잠가.”

라는 말과 함께.

제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는 시언에게서 벗어나고자 시언의 손을 쥐어뜯고, 할퀴고, 몸부림치던 차운은 꿈쩍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시언의 행동에 덜컥 겁이 났다.

“사, 살려주…!”

본능적으로 호소했다. 아무나 자신의 고함을 듣고 나와서 도와주길 바라는 마음에. 하지만 소리를 지르는 도중 시언의 큰 손에 의해 입이 틀어 막혔고, 자신을 무감각하게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움찔거리는 사이, 그대로 시언의 집으로 끌려들어 갔다.

집안에 들어선 후, 몸부림치는 차운을 바닥에 던져버린 시언은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길지 않은 통화 연결 음이 끝나고,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웬일이냐? 네가 먼저 전화를 다….」

“송장 치우고 싶지 않으면 당장 튀어와.”

「뭐? 야, 한시ㅇ….」

상대방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통화를 종료한 시언은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는 핸드폰에 놀란 듯 움찔거린 차운은 저도 모르게 시언이 내던진 핸드폰을 바라봤지만, 지척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무서우리만치 굳어버린 얼굴로 손목에 찬 시계를 풀어 던지며 구둣발로 집안에 들어서는 시언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그 행동이 뜻하는 바를 알지 못해 멍하니 시언을 바라보기만 하던 차운은 코앞까지 다가와 저를 바라보는 시언의 눈빛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겁먹은 자신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차운은 오히려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나, 나한테 손끝 하나라도 댔다간 경찰을 부를 거야!”

손끝 하나. 그 말에 시언의 무감각했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며 그대로 차운에게 구둣발이 날아들었다.

“허억… 헉….”

바닥에 바르작거리던 몸뚱이가 가쁜 숨을 내쉬며 들썩거렸다. 숨을 쉬기 위해 벌린 입에선 타액이 섞인 핏물을 질질 흘러내렸고, 바닥은 온통 그가 흘려댄 분비물로 가득했다. 고통스러운 듯 벌벌 떨며 몸을 웅크리고 있는 차운의 옆구리로 재차 시언의 구둣발이 가차 없이 꽂혀 들었다.

“으악…! 악!”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던 차운은 필사적으로 엉금엉금 기어 시언의 발치에 매달렸다.

“제발… 그만….”

“…….”

“잘못… 잘못했어요.”

자신의 발을 붙들고 있는 차운의 손과 몸이 벌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정심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깨끗하게 비워진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 건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분노뿐이었다.

율의 집 현관에서 봤던 두 사람의 모습이 머릿속을 하염없이 빙글빙글 돌며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죽을 것 같아요… 너무 아파요. 제발… 그만….”

자신의 발에 매달려 울며불며 아프다고 말하는 차운의 행동에 시언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차운이 잡은 제 발을 빼내며 그대로 차운의 얼굴을 걷어차자, 뭔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욱… 우욱….”

무언가가 잘못되었는지,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떨어대는 차운을 내려다보던 시언은 그의 앞에 몸을 굽혀 앉았다.

“죽을 것 같아?”

“흐윽… 사, 살려주세요… 살려….”

몸을 둥글게 말고 피범벅이 된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있는 차운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던 시언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구둣발로 채인 통에 코가 부러졌는지, 콧대가 어그러져 있었다. 엉망이 된 차운의 얼굴을 감흥 없이 바라보던 시언은 고저 없는 톤으로 말했다.

“살려줘?”

초연하게 묻는 말에 차운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필사적인 차운의 행동에 시언은 혀를 차며 그의 얼굴을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끄아악!”

부러진 코가 바닥에 뭉개지며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목이 쉬라고 비명을 질러대던 차운의 바지춤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바지춤을 적시고, 거실 바닥으로 흘러나오는 액체에 시언이 대번에 미간을 구겼다.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쓸어 올린 후, 몸을 일으키며 쥐고 있던 차운의 머리칼을 거칠게 잡아당기자, 바르작거리던 그가 시언의 손에 매달리며 외쳤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하지만 차운이 뭐라고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시언은 괘념치 않는 듯 그의 머리칼을 쥔 채 질질 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나 시언은 몇 걸음 가지 못해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시언의 손에 잡힌 머리카락이 뽑히든 말든 억지로 시언의 손에서 벗어난 차운이 급하게 엉덩이 걸음으로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황당한 상황에 제 손안에 가득 잡혀 있는 차운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시언은 성큼성큼 걸어가 차운에게 주먹을 날렸다. 불시에 얻어맞은 통에 신음 한번 내보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나자빠진 차운의 멱살을 끌어당긴 시언이 다시 주먹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차운이 터트린 기침으로 피와 타액이 얼굴이 튀자, 시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며 눈살을 찌푸렸고, 차운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오히려 시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불시에 차운에게 얻어맞은 시언이 비틀거리며 멱살을 놓아주자 차운은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넌… 대체 뭐야 새끼야!!”

차운이 피와 타액을 질질 흘리며 악을 쓰자, 시언도 얻어맞은 얼굴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서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는 시언의 행동에 차운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내… 내가…! 내가, 먼저였어….”

그리고 알 수 없는 말들을 비명처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악에 받친 듯 율의 집을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먼저였어! 왜… 왜 너 같은 게 끼어든 거야! 어째서!”

차운의 말에 시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목을 긁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대체 율이한테 뭘 원하는 거야?”

조용하게 일갈하는 시언의 질문에 차운은 천천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괴로운 듯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무것도… 난 아무것도 원하는 거 없어….”

“뭐?”

“권율이 혼자 고립된 거… 그거면 충분했어.”

“?”

“아, 아무도 권율을 좋아할 수 없게… 바라볼 수도 없게, 계속 고립된 거로 충분했다고!”

“미친 새끼가.”

눈물까지 뚝뚝 흘려대며 제 가슴을 부여잡고 외치는 차운의 말에 시언이 짧은 욕설을 내뱉으며 그의 복부에 발을 날렸다. 저항도 방어도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차운은 바닥을 구르며 울음을 터트렸다.

“악! 콜록, 콜록. 흐윽… 흐… 보기만… 바라보기만 한 게 뭐가 나빠… 독점하고 싶었던 게 뭐가 나빠!”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눈물, 콧물, 피를 쏟아내며 서럽고 억울하다는 듯 악을 쓰며 말하는 차운의 행동에 시언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무섭게 굳었다.

“독점?”

“네가 다 망쳤어…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나뿐이었는데!”

“그래서? 너 좋자고, 애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어?”

악을 쓰던 차운은 매섭게 묻는 시언의 말에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하더니 슬그머니 제 입술을 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언은 퓨즈가 나가는 느낌이었다.

율이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없게, 다른 사람이 율을 좋아할 수 없게, 왕따라는 허울을 씌워 일부러 고립시킨 것이었다. 괴롭힘을 못 이긴 율이 스스로 자해를 시도할 정도로 악랄하게. 시언은 손을 뻗어 주변에 잡히는 무언가를 손에 쥐고 그를 향해 내리치려 했다.

“한시언!”

요란하게 열리는 문소리와 함께 쿵쾅거리며 다가온 발소리의 주인이 일갈하듯 시언을 부르며 그를 막지 않았다면 말이다.

자신의 행동을 제어한 상대방에 의해 씨근덕거리던 시언은 저를 붙잡고 있는 이를 신경질적으로 돌아봤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언젠가 율과도 한 번 만난 적 있던 자신의 친구 장선호였다. 상대방을 확인한 시언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조금 누그러진 기세로 이를 짓씹듯 중얼거렸다.

“좀 더 늦게 오지 그랬냐….”

시언의 말에 선호의 미간이 와작 구겨졌다.

“송장 치우기 싫어서 빨리 왔다 새끼야!”

귓가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한껏 미간을 찌푸린 시언은 여전히 저를 붙들고 있는 선호의 몸을 털어냈고, 선호도 별다른 저항 없이 손쉽게 떨어져 나갔다.

“와… 이 미친놈이 무슨 짓을 한 거야….”

선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차운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하지만 시언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유리 공예품을 툭 떨어뜨렸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는 공예품을 바라보던 선호가 황당하다는 듯 “저 미친놈이 저게 얼마짜린데….”라고 중얼거렸다.

선호가 공예품에 정신이 팔린 사이, 불시에 차운에게 다가온 시언은 신발 뒷굽으로 차운의 손등을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던 차운이 정신을 잃은 듯 그대로 푹 고꾸라졌다.

“야!”

그 모습에 선호가 당황한 듯 재빨리 다가왔지만, 시언은 멍하니 정신을 잃은 차운을 내려다보다 홀린 듯 현관으로 향하며 선호에게 한마디를 툭 던질 뿐이었다.

“네가 정리 좀 해.”

자신의 말에 아우성치는 선호를 뒤로하고 서둘러 율의 집으로 향한 시언은 현관문을 두드리며 벨을 눌렀다. 하지만 안쪽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

초조하고 의아한 마음에 시언은 다시 한번 벨을 누르고 문을 여러 번 두드렸지만, 역시나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율아, 율아!”

아예 그의 이름을 부르며 거칠게 문을 두드렸지만, 묵묵부답은 여전했다. 결국, 조급해진 시언이 문이라도 부수고 들어갈 요량으로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데, 문고리가 돌아가며 현관문이 열렸다. 문은 애초에 잠겨 있지 않았다. 손쉽게 열려버린 현관문을 바라보던 시언은 퍼뜩 고개를 들고 집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율아…!”

고함을 치듯 율을 찾던 시언의 눈에 거실 한쪽에 멍하니 앉아 있는 율의 모습이 보였다. 멍해 보이는 눈과 조금 부어올라 있는 뺨, 졸린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목과 티셔츠의 전면에 묻어 있는 핏자국.

미처 살피지 못했던 그의 처연한 모습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를 두고 가는 게 아니었다. 분노에 사로잡혔어도 김차운을 우선시했으면 안 됐다. 자신의 감정보다 율의 안위를 우선시해야 했다, 라는 생각이 우후죽순 솟아올랐다.

“…율아.”

시언은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불러일으키는 율의 멍한 눈을 바라보다 더듬더듬 그를 불렀다.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는 시언의 목소리에 율이 삐걱삐걱 시선을 들었다. 멍하던 눈에 점차 초점이 돌아오며 놀란 듯 시언을 똑바로 바라봐왔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언은 어딘지 엉망으로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은 피와 땀에 절어 잔뜩 구겨져 있고, 항상 단정했던 머리도 흐트러져 있었다. 핏자국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얼굴은 불안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잔뜩 굳어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양손에도 얼룩덜룩하게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멍하던 눈이 초점을 되찾으며 똑바로 자신을 마주 봐오는 모습에 시언은 율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불시에 맞닿아 오는 온기에 차게 식어 있던 율의 몸이 움찔거렸다.

“율아, 율아….”

애타게 자신을 부르며 어깨를 꽉 끌어안아 준, 시언의 행동에 율은 영문도 모르고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느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형… 읏….”

시언을 부르려던 율은 형편없이 떨리며 갈라져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랐다. 그리고 손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을 삼키며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율의 행동에 시언이 놀란 듯 몸을 떼어냈고, 곧 퉁퉁 부어 있는 율의 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손등을 온통 뒤덮고 있는 멍 자국과 구부릴 수도 없을 만큼 부어올라 있는 손을 심각하게 살피던 시언은 다른 곳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붉게 물들어 부어 있는 뺨과 목에 흉하게 남아 있는 손자국에 절로 눈가가 찌푸려졌다.

‘아, 아무도 권율을 좋아할 수 없게… 바라볼 수도 없게, 계속 고립된 거로 충분했다고!’

문득 김차운의 말이 떠올랐다. 지독한 욕심과 밑도 끝도 없는 독점욕이 낳은 결과가 율의 손목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시언은 율의 손목의 절상을 천천히 엄지손가락으로 훑었다. 율이 어깨를 떨며 움찔거렸지만, 시언의 손은 한참 동안 율의 손목에 머물러 있었다.

“형….”

말없이 자신의 상처 자리를 살피는 시언의 행동에 율이 나지막이 시언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부름에 반응하듯 손을 멈춘 시언이 천천히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내리며 이마를 기댔다.

“시언….”

갑작스러운 시언의 행동에 율은 한 번 더 시언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부름은 끝맺지 못했다. 율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시언의 어깨가 잘게 떨려왔다. 갑작스러운 시언의 행동에 율은 적잖이 당황한 듯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리다, 이내 시언의 등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 오히려 시언을 위로하듯 그의 등을 토닥였다.

시언은 막연하게 그를 만나지 못했을 과거나, 그가 없는 미래를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졌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 온몸을 잠식하고, 동시에 몸이 잘게 떨려왔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감각에 정신이 아찔하게 멀어지려는데, 등 뒤로 타인의 온기가 닿았다. 그리고 곧 그 온기는 자신을 위로하듯 등을 토닥여주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율의 손길을 느끼며 시언은 잔뜩 찌푸려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율아.”

다정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율이 시선을 돌려 상대방을 바라봤다. 불러주는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하기만 한데, 마주 봐오는 시선에는 근심이 한가득했다.

율의 집에서 한참 율을 부둥켜안고 있던 시언은 율의 상처가 생각난 듯 급하게 율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끔찍한 일을 당한 율을 집에 혼자 두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참이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조금 걱정을 하긴 했지만, 열린 문 안에는 김차운도, 친구인 장선호도 보이지 않았다. 거실도 여느 때와 다름없을 정도로 말끔하게 정리가 된 후였다.

2층 자신의 침대에 율을 앉혀 놓고, 얼음주머니를 만들어온 시언은 멀거니 복층을 올려다보고 있는 율을 넌지시 불렀다. 그러자 금세 새카만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자신을 마주 봐오는 시선에 낮은 한숨을 흘리며 다가온 시언은 율의 붕대 감긴 손에 얼음찜질을 시작했다.

“뼈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지만 당분간 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잖아.”

“…네.”

“그리고 율아.”

“?”

“앞으로 문은… 함부로 열지 않도록 하자.”

시언의 말에 율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시언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시언은 얼음찜질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차운과 있었던 일은 순전히 자신이 조심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데도 은연중에는 다 덮어두고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싶었던지라, 자신을 탓하듯 그 문제를 부각하는 시언에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사과하던 율은 시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시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워서 그래.”

“네?”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시언의 말에 율은 멍하니 시언의 얼굴을 바라봤다. 끝맺지 못한 말을 삼키며 여전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언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져 있었다. 잠시 그런 시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율은 손을 들어 시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갑작스러운 율의 행동에 시언은 놀란 듯 어깨를 떨며 고개를 들었다. 시언의 고개가 들리자, 율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시언과 시선을 맞췄다.

율은 여전히 시언의 뺨을 어루만지며 배시시 웃었다. 불시에 웃어주는 율의 행동에 시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에 힘이 풀리며 율의 손을 쥐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자, 율은 자신의 손을 빼내서 시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시언의 얼굴을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시언의 얼굴을 틈도 없을 정도로 제 가슴에 밀착시켜 안은 율은 달래기라도 하려는 심산인지 천천히 시언의 등을 토닥이고 쓰다듬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견디기 힘든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율은 시언을 위로하고 있었다. 율의 가슴에서 작게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와 그의 따듯한 체온을 느끼던 시언은 등을 쓰다듬는 그 작은 손길에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을 받았다.

***

“마실 것 좀 가져올게.”

“네.”

그 일 이후, 율은 묘하게 시언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으려 했다. 잠깐잠깐 자리를 비우려 하는 것도 화들짝 놀라며 가는 곳을 물어오는 통에 이제는 율이 묻기도 전에 자동으로 어디를 갔다 온다며 먼저 말하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 율과 영화를 보던 시언은 갑자기 제 배 위로 떡 하니 올라오는 무게감에 슬쩍 눈을 내려 무게감의 정체를 확인했다.

“…….”

율의 팔이 보란 듯이 제 배 위에 얹혀 있었다. 뭔 일인가 싶어 눈동자를 굴려보니 어느샌가 잠들어 버린 율이 제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저에게 팔을 올려놓고 있었다. 말없이 잠들어 있는 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시언은 영화 소리에 그가 깰까 봐 볼륨을 줄이고, 조심히 모로 누워 잠든 그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낮 동안은 손을 쓰지 못하는 율의 수발을 들던 시언은 밤이 되면 게임에 접속했다. 길드원들에겐 율이 손을 다쳐서 게임을 할 수 없다고 진즉 말해둔 터였다. 다들 자신의 말에 놀라며 율의 안위를 물어왔지만, 세상이라도 무너진 듯 깽판 수준으로 난리를 피워대는 무지개 요정의 행태에 다들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언이 게임에 접속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율에게 코스튬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다. 재료를 직접 구하러 다니다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글록시니아에서 구매하며 돌아다녔다. 그래도 시중에 풀리는 양이 터무니없이 적어서 구하기가 만만치 않지만 말이다.

결국, 3일에 걸쳐 재료를 다 구하고, 의상점에 가서 코스튬을 제작한 시언은 염색을 위한 조언을 듣기 위해 세츠나와 니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세츠나 : 그게 파란색이야?!]

[노아 : ??;]

[노아 : 파란색 맞잖아?;]

[세츠나 : 누가 그렇게 쨍한 파란색을 하자 그랬어?!]

[니지 : 그러니까 파란색 말고 민트로 하자니까?!]

[노아 : 민트?]

[세츠나 : 파란색이어야 한다고!!!]

[노아 : 파란..]

그리고 두 여자의 등쌀에 말라죽을 판이었다.

[니지 : 민트가 더 이쁘다고!!!]

[세츠나 : 막내하고의 상성을 생각해라!!]

[니지 : 퍼렁둥이도 아니고 죄다 파랗고 하얗고 뭐냐고!]

[세츠나 : 파랗고 하얀데 뜬금없이 민트가 더 이상하지]

[세츠나 : 이미 초커에서 포인트는 잡았잖아 여기서 색이 더 가미되면 균형이 무너진다고!]

[니지 : 그러니까 파란색 말고 민트를 넣으면 되잖아!]

[세츠나 : 막내 머리색이랑 안 어울리잖아!]

[니지 : 그럼 막내 머리색도 바꿔!]

[세츠나 : 네가 외변권이라도 사줄래?!]

의상실 한복판에서 민트냐, 파랑이냐를 두고 썰전을 벌이는 두 사람의 맹렬하고 살벌한 기세에 시언은 진심으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길드] [노아 : 길마님]

[길드] [무지개 요정 : ??]

[길드] [노아 : 살려주세요..]

[길드원 율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원 노아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 [노아 : 왔어?]

[길드] [율 : 안녕하세요ㅋㅋ]

[길드] [무지개 요정 : 헐?! 내쌔끼!!!!!!!!]

[길드] [질풍 : 오!!! 막내다!!!]

[길드] [제로사이드 : 오 헬로!]

[길드] [아타락시아 : 어솨요~]

[길드] [광인한 남자 : 막내 하이!!]

[길드] [세츠나 : 헉; 이제 손은 괜찮아?]

[길드] [율 : 넼ㅋ 이제 다 나았어요!]

[길드] [무지개 요정 : 다해유ㅠㅠㅠ내새끼ㅠ퓨ㅠㅠ]

오래간만에 만난 길드원들과 회포를 풀며 신나 있는 율을 보며 시언은 말없이 거래를 걸었다. 갑작스럽게 걸려오는 거래 창에 율은 의아한 듯 수락을 눌렀고, 곧 거래 창에 올라온 물품 하나에 더욱 의아해졌다.

[노아 : 받아]

[율 : ?]

[노아 : 너 주려고 만들었어]

덤덤하게 거래 승낙을 종용하는 시언의 행동에 율은 익숙한 듯 거래를 승낙했다. 시언에게서 건네받은 아이템은 코스튬이었다. 그동안 율은 이렇다 할 코스튬 없이 기본 직업복을 입고 다녔었다. 애초에 히든 클래스의 직업복이라 값비싼 코스튬보다 화려하고, 직업군의 특성상 웅장한 맛도 있었기 때문에 딱히 다른 코스튬을 착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노아 : 입어봐ㅋㅋㅋ 그거 만드느라 정말..]

시언은 세츠나와 니지에게 시달리던 과거가 생각이라도 난 듯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시언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율은 시언의 말대로 인벤토리를 열어 코스튬을 장착했다. 그리고 장착한 순간 코스튬은 귀속 아이템으로 바뀌었다.

차이니즈 칼라와 화려한 레이스가 장식된 소매 끝이 넓은 흰색 블라우스에 뷔스티에 형식의 하늘색 베스트. 흰색 반바지와 종아리에 차고 있는 검은색 가터링에 연결된 흰색 삭스와 하늘색 앵클부츠. 그리고 베스트 뒤쪽으로 연결되어 늘어진 하늘색 트레인 장식.

세츠나와 니지가 열심히 시언에게 추천하던 세 번째 코스튬. 라비앙로즈였다.

율이 코스튬을 입자, 귀신같이 알고 찾아온 길드원들이 쉼터로 몰려들면서 북새통을 이뤘다. 다들 율이 입은 코스튬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기 바빴다. 거기에 흰 사슴까지 꺼내보라며 성화를 부리는 통에 얼결에 흰 사슴까지 꺼내놓자 정말 말 그대로 유니크가 따로 없었다.

머리에 장식된 쥬얼 플룸에서 목에 장식된 로즈 초커, 그리고 코스튬 라비앙로즈. 남들이 볼 땐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값을 자랑하는 아이템들이었다.

하지만 율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코스튬은 제작에만 다른 아이템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금액이 소비되었다는 사실을.

율에게 코스튬을 건네주고, 길드원들과 소란스러운 한때를 보내던 시언은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고 발신자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야, 근데 이 새끼 뭔데?」

전화를 받자 주어 없이 대뜸 물어오는 질문에 시언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어디다 던져놨냐?”

「어디긴, 병원이지? 사람을 넝마로 만들어 놨잖냐. 아주 뒤처리로 불려 다니는 통에 죽겠다.」

“…….”

「아주 골고루 주물러 줬더구먼? 코뼈 부러져, 손 부러져, 강냉이도 왕창 털려. 갈비뼈도 나가.」

“기다려, 갈게.”

「잉? 병원에?」

“어.”

「웬일이래? 나보고 정리하라더니….」

“기다려.”

「어, 어… 그래.」

선호와의 통화를 끝내고, 시언은 볼일이 있어 나갔다 온다는 채팅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

병원에 도착하자 김차운의 병실 앞에 서 있던 선호가 반갑게 시언을 맞았다.

“그나저나 저놈이랑 너랑 무슨 관계인데?”

그리고 찰싹 달라붙어 질문을 던져댔다. 시언은 귀찮다는 듯 선호의 얼굴을 밀어내며 병실로 들어섰다.

“쯧.”

병실로 들어선 시언은 차운이 있는 병실이 1인실인 걸 확인하고, 혀를 차며 선호를 노려봤다. 시언의 시선에 선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선생님이 맘대로 주신 병실이야, 내 탓 아님.”

“…….”

“네가 패놓은 상대에 대한 예우는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지랄.”

“무려 한시언한테 얻어맞은 건데.”

과장된 몸짓으로 주절거리는 선호의 행태를 못마땅한 듯 지켜보던 시언은 얼굴을 한번 구겨주곤 차운이 누워있는 침대로 향했다.

그리곤 그가 누워 있는 침대를 냅다 발로 걷어찼다. 그의 행동에 뒤에 서 있던 선호가 “성질머리하고는”이라며 중얼거렸지만 시언은 개의치 않았다.

침대가 흔들리는 충격에 잠들어 있던 차운이 화들짝 놀라 눈을 떴고, 비몽사몽 중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 두 명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대 위에서 펄쩍 뛰었다.

“무, 뭐….”

그리고 경계하듯 더듬더듬 말을 잇다 시언을 발견하고는 우뚝 행동을 멈췄다. 경계하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물드는 걸 보며 시언의 뒤에 서 있던 선호가 시언의 어깨를 짚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거 또 지리는 거 아니냐?”

명백히 조롱하는 어투인 선호의 말에 차운의 얼굴이 수치심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무언가 외치려는 순간, 시언의 손이 먼저 뻗어 나와 차운의 목을 쥐었다.

“컥…!”

자신의 목을 죄어오는 커다란 손에 차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빈틈없이 조여진 탓에 숨이 통하지 않아 몸부림치며 시언의 손을 잡아 뜯던 차운은 자신의 힘으론 역부족이란 걸 깨닫고, 시언의 뒤에 있던 선호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선호는 시언의 행동이 흥미롭다는 듯 휘파람을 불며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공기가 통하지 않아 파랗게 질려가던 차운은 숨 한 톨이라도 더 쉬어보고자 입을 크게 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언은 천천히 손에 힘을 풀고 쥐었던 목을 놓아줬다.

“쿨럭, 컥! 케흑, 쿨럭.”

꽉 막혀 있던 목에 산소가 통하자, 차운은 꼴사납게 기침을 하며 침을 질질 흘려댔다. 침대 위에서 벌레처럼 바르작대는 차운의 모습에 시언은 천천히 상체를 숙여 차운의 귓가에 속삭였다.

“죽는 게 무서워?”

“!”

놀란 차운이 눈물, 콧물, 침으로 범벅된 얼굴을 들자, 시언은 오물을 보듯 미간을 좁혔다.

“한 번만 더 권율 앞에 나타나면 무서울 정도로는 안 끝날 줄 알아.”

“헉, 쿨럭.”

“머리카락 한 올, 숨소리 한번 드러내지 마.”

“허억, 헉….”

볼일이 끝났다는 듯 몸을 일으킨 시언이 걸음을 옮기자, 선호도 시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병실을 벗어나자, 조용하던 병실 안에서 악을 쓰며 질러대는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내가 너희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리고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까지 요란하게 울리는 통에 시언의 뒤를 따라가던 선호가 불안한 듯 시언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야, 저거 좀 위험한 거 아니냐…?”

“저걸로 됐어. 충분해.”

“너… 무슨 꿍꿍이야?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네가 신경 쓸 거 없어.”

“…….”

“그리고 1인실 빼.”

“그러지 뭐.”

***

성원과 현석은 며칠 모습을 보이지 않던 차운의 연락을 받았다. 예상치 못하게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그의 말에 허겁지겁 찾아간 병원에서 넝마처럼 변해 있는 차운의 모습을 보고 기함을 하고야 말았다.

“뭐?”

“노아한테 맞은 거라고?”

며칠간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는 차운의 말에 놀란 두 사람이 되물었고, 차운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씨바. 사람을 존나게 패놓고 병원에 던져 놓더니, 며칠 안 돼서 퇴원하라며 쫓아내더라. 그래서 거기서 쫓겨나서 지금 병원에 재입원한 거야.”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초조한 듯 늘어놓는 차운의 이야기에 현석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대뜸 그 새끼한테 왜 맞은 건데??”

“…권율한테 찾아갔다가.”

잠시 머뭇거리던 차운은 더듬더듬 답을 했고, 성원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야비한 새끼네, 이거.”

“닥쳐, 시발. 안 그래도 기분 더러우니까.”

자신의 말에 살벌하게 일갈하는 차운의 반응을 웃으려 넘기려는 성원과 달리 현석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전부터 느꼈는데… 너 유독 권율한테 집착하는 것 같다…?”

예상치 못한 현석의 날카로운 질문에 차운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런 차운의 반응에 현석은 미심쩍은 눈을 했지만, 이내 이어진 성원의 질문으로 화제가 돌려진 탓에 더는 캐물을 수가 없었다.

“근데 노아한테 맞은 거면 경찰에 신고하면 되지 않냐? 이참에 콩밥 먹여.”

“그게 가능했으면 덜 억울했지.”

“?”

“?”

“엄빠가 벌써 그쪽에서 준 합의금 챙겨 먹었더라.”

“뭐?”

“대체 얼마를 준 건지는 몰라도 대놓고 굽실대기까지 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시발.”

“헐….”

“이게 말이 되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코 부러져, 손 부러져, 갈비뼈 나가, 이빨도 수두룩하게 빠지고 부러졌는데, 그걸 돈으로 퉁친다는 게?”

“너무하긴 하셨다….”

“그러게….”

“좆같아서 진짜….”

혼자 열 내며 씨근덕대는 차운을 바라보던 현석은 머리를 긁적이다 문득 궁금했다는 듯 말했다.

“근데, 노아는 대체 권율이랑 무슨 사이인 거야?”

***

“율아, 율아.”

한참 길드원들과의 수다에 몰두하던 율은 아래층에서 자신을 부르는 시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분명 조금 전에 커피를 가져오겠다며 내려갔는데, 왜 올라오지 않고 자신을 부르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내려갔다.

시언은 침대 위에 누워 저를 부르고 있었다. 난데없는 그의 행동에 의아해진 율은 침대로 다가가 시언을 내려다봤다.

“형?”

넌지시 그를 부르자 천장을 보고 있던 눈동자가 율에게로 향했다. 마주한 시선이 서로 얽히자, 시언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양손을 뻗었다. 시언의 뻗은 손이 율의 머리카락과 귓가를 스치며 지나갔고, 자신의 귓가를 간질이는 느낌에 율은 눈을 저도 모르게 질끈 감고 몸을 떨었다.

“안아 줘.”

하지만 시언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그의 행동과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내려다보는데, 시언이 푸흐흐,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뻗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아….”

율은 그제야 제 얼굴 양쪽으로 뻗어진 시언의 손이 자신을 부르는 의미라는 걸 알았다. 율은 자신을 부르듯 팔을 뻗고 웃고 있는 시언의 행동에 답하듯 덩달아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안아달라는 요구에 안기는 꼴이 되었지만, 시언은 만족한 듯 율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를 침대 위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가 편하도록 고쳐 안으며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마주 안은 채 느껴지는 심장박동과 그의 체온에 허리에 두른 팔을 조이자, 율이 제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시언은 그제야 안심한 듯 낮은 한숨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오늘도 따듯하네.”

[세츠나 : 아 레알 일하기 싫어 뒤짐! 내일 회사가 망했으면]

[광인한 남자 : 인정]

[질풍 : 광이 형은 일가서도 몰컴으로 게임하잖아]

[광인한 남자 : 나 정도 되니까 하는 거지~]

[KING Husband : 월루 쩜]

[니지 : 그래도 내일 그묘일!]

[무지개 요정 : 난 쉬는 날도 없는데]

[제로사이드 : 형한테 쉬는 날이 있으면 양심도 없는 거죠]

[무지개 요정 : -ㅛ-]

[세츠나 : 길마님은 사장이라고 했잖아요? 눈치 볼 사람도 없고 좋겠구만..]

[제로사이드 : 근무하시는 분 눈치 보시던데요?]

[니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도련 : 매일이 금토일만 반복됐으면...]

[집사 : ㅠㅠㅠㅠㅠㅠ]

[노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KING Husband : 하...노아 형이 제일 부럽다 돈 많은 백수라니]

[질풍 : 노아형이 내 미래였으면 좋겠다]

[광인한 남자 : 노하우를 물어봐ㅋㅋㅋㅋㅋㅋ]

[질풍 : 어떡하면 돈 많은 백수가 될 수 있슴니카? 센세]

[노아 : 돈이 많으면 된다]

[질풍 : ...]

[광인한 남자 : 미칰ㅋㅋㅋㅋㅋㅋㅋㅋ팩폭오졌닼ㅋㅋㅋㅋㅋㅋ]

[KING Husband : 으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율 : 너무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츠나 : 뭔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니지 : 반박할 수가 없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로사이드 : 야 너무 꿈도 희망도 없는 거 아니냨ㅋㅋㅋㅋㅋㅋㅋㅋ]

[도련 : 나 좀 부양해줘라 ㅋㅋㅋㅋㅋㅋㅋ]

[집사 : ?!]

[노아 : 내 부양을 받을 수 있는 건 율이 뿐이다ㅋㅋ]

[니지 : 뭐얔ㅋㅋㅋㅋㅋ 막내한테만 겁나 관대하넼ㅋㅋㅋ]

[세츠나 : 솔직히 말해봐 둘이 무슨 사이임?ㅋㅋㅋㅋㅋㅋ]

[노아 : 사귀는데?]

[율 : ?!]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개드립 오진닼ㅋㅋㅋㅋㅋㅋㅋㅋ]

[질풍 : 갈수록 노아형 이미지 이상해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광인한 남자 : 진정한 무지개언덕인이 되어 가는거짘ㅋㅋㅋㅋㅋㅋ]

[세츠나 : 무지개언덕인은 뭐옄ㅋㅋㅋㅋ]

[KING Husband : 우리는 이미 하나의 신인류임]

[도련 : 도랏ㅋㅋㅋㅋㅋㅋㅋㅋ]

[노아 : 나는 진지한데 왜 안 믿어주지?]

[질풍 : 백년해로하세요~]

[KING Husband : 인정!ㅋㅋㅋㅋㅋ]

[광인한 남자 : 국수는 언제 먹슴니카?]

[세츠나 : 우리 막내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할 자신 있어요?!]

[니지 : 못된 시누이다!!]

[무지개 요정 : 농이라도 용서 못해!!!!!]

[제로사이드 : 허락하마]

[무지개 요정 : ?!]

[노아 : 넌 뭐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율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질풍 : 참 노아 형 대학 당연히 나왔겠지?]

[노아 : 응?]

[노아 : 응]

[광인한 남자 : 오...어느 대학 나옴? 당연히 인 서울?]

[노아 : 아니]

[KING Husband : 헐?!]

[노아 : 외국에서 ㅋㅋ]

[율 : 와..]

[세츠나 : 헐...]

[제로사이드 : 유학파였다니..]

[니지 : 괜히 돈 많은 게 아니었어..]

[노아 : ㅋㅋㅋㅋㅋㅋ...]

[질풍 : 좋았겠다!!]

[노아 : 글쎄... 난 중학교 입학하면서 유학을 해서..좋은지 안 좋은지도 생각해볼 새도 없었고...갈지 안 갈지 결정하는 것도 내 몫은 아니었고]

[율 : 어...그럼 대학교 졸업하고 국내 들어오신 거예요?]

[노아 : 응ㅋㅋ]

[KING Husband : 그럼 귀국한 지 얼마 안 됐겠네?!]

[노아 : 4년?]

[노아 : 졸업하고 군대 핑계로 귀국해서 눌러앉았지]

[제로사이드 : 와오...군대를 가려고 귀국을 하다니]

[노아 : 난 군대가 피난처였어 ㅋㅋㅋ]

[무지개 요정 : 와우내..]

[도련 : 별세계 사람이 눈앞에 있었군..]

[집사 : 제 눈앞에도 있습니다.]

[도련 : ...]

수다의 꽃을 피우며 소란스럽던 쉼터가 썰물 빠지듯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다들 노가다나 사냥을 하러 떠났고, 쉼터에 남은 건 제로사이드와 요정 두 사람뿐이었다.

이제는 둘만 있어도 제법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대화 도중 주제가 없어 말이 끊기거나 할 말이 없어 멀뚱히 앉아만 있는 것도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딱히 불편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제로사이드 : 형]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저번에...]

[무지개 요정 : 뭐?]

[제로사이드 : 왜 나한테 술 마시자고 했어요?]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

[무지개 요정 : 그건....]

[무지개 요정 : 솔직히 말해서 난 내가 잘못한 일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닌데..]

[제로사이드 : 네?]

[무지개 요정 : 그런데.. 이상하게 너한테만은... 먼저..하기가 싫어]

[무지개 요정 : 내 쪼잔한 마음을 들켜서인 건지 아니면 너한테만은 자존심을 굽히고 싶지 않은 건지...는 잘 모르겠어]

[제로사이드 : ?]

[무지개 요정 : 그래도... 지크프리트일 때 한 일은 명백하게 내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거고.. 그 점에 관해서는....]

[무지개 요정 : 불편하달까...더부룩하달까..]

[제로사이드 : 형]

[무지개 요정 : 그러니까...이걸 뭐라고 정리해야 할지는 나도 복잡하긴 한데..]

[제로사이드 : 저한테 사과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형 말씀 하시는 게..꼭..]

[무지개 요정 : 난 아마 앞으로도 너에 관해서는 이 고집을 꺾는 일은 없을 거야..]

[제로사이드 : ...]

[무지개 요정 : 그러니까... 추궁이라도..먼저 물어줬으면 좋겠어]

[무지개 요정 : 혹시 모르지만 그날 밤 술김에 얘기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너도나도 그날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잖아]

[무지개 요정 : 혹시나 하는 기대에 편승해서는 마음 편해지지 않아]

[제로사이드 : 저한테 미안하세요?]

[무지개 요정 : 응..]

[제로사이드 : 사과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무지개 요정 : 아마도..]

[제로사이드 : 아...]

[제로사이드 : 정말 형이란 사람은..]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진짜 좋아해요!!]

[무지개 요정 : ㄲㅈㅗ]

[제로사이드 : 헐ㅋㅋㅋㅋ너무해ㅠㅠㅠㅠㅠㅠ]

***

“근데, 존나 김차운 부럽네.”

“뭐?”

차운의 병문안을 끝내고 돌아가던 길에 성원이 푸념하듯 내뱉자, 현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니,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학교 갈 일도 없고, 얼마나 좋냐?”

“그게 부럽냐? 넌 평소에도 밥 먹듯이 빠지잖아.”

“야, 일부러 안 가는 거랑 못 가서 안 가는 거랑 같냐? 게다가 합의금까지 받아 챙겼다는데.”

“미친놈.”

“이참에 우리도 노아 새끼나 좀 털어볼까?”

“뭐?”

“권율도 질려가는 참인데.”

“…….”

“어때?”

“나는… 노아는 좀… 탐탁잖은데….”

답지 않게 몸을 사리며 한발 물러서려는 현석의 태도에 성원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쫄았냐?”

“…….”

“털다가 안 되면 그냥, 몇 대 맞고, 합의금 받아서 병원에서 며칠 놀면 일석이조잖아.”

“음….”

“아니면 나 혼자 하지 뭐. 넌 손가락 빨면서 구경이나 해라.”

“…….”

“진짜 안 할 거야?”

“…할까?”

“새끼 튕기기는.”

***

[질풍 : 내기해!]

[광인한 남자 : 콜]

[KING Husband : 덤벼]

사냥을 끝내고 쉼터로 돌아온 세츠나는 평상 위에 앉아서 또 무언가 작당 모의를 하는 것 같은 왕광풍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세츠나 : 뭐 하냐 너네?]

[질풍 : 누나도 해!!]

[세츠나 : 뭘?]

[질풍 : 내기!]

[세츠나 : 껒]

[KING Husband : 꼬리를 말고 도망가시는 겁니까? 형님!!]

[광인한 남자 : 훗...나약해졌군]

[세츠나 : /짜증]

[세츠나 : 뭔데? 무슨 내긴데?!]

[질풍 : 내가 수시를 붙을지 떨어질지!!]

[세츠나 : -ㅛ-?]

[광인한 남자 : 떨어진다에 내 왼쪽 파이어에그를 걸지!]

[KING Husband : 나도 떨어진다에 내 오른쪽 파이어에그를 걸지!]

[질풍 : 아오씨 열 받아!! 누나는?!]

[세츠나 : 늬들 파이어에그 떨구면 참 재미지겠다 붙는다에 건다]

[KING Husband : 편은 갈렸고! 자 이제 뭘 걸 거야?]

[질풍 : 수시 떨어지면 재수하는 동안 게임 안 들어온다!!]

[광인한 남자 : 콜!]

[KING Husband : 누나는ㅋㅋㅋㅋ 지면 성전환 어떰?ㅋㅋㅋㅋ]

[광인한 남자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츠나 : ㅡㅡ]

[세츠나 : 콜]

[광인한 남자 : ???]

[KING Husband : !]

[세츠나 : 내가 이기면 너희의 파이어에그를 내 손으로 떼어내 주마]

[광인한 남자 : ?!]

[KING Husband : !?]

[세츠나 : 알 없는 놈들로 만들어주겠어]

[질풍 : 꺄륵!]

[세츠나 : 즐픙...스시뜰으즈믄...그믄은드...]

[질풍 : ?!?!?!?!?!]

[무지개 요정 : 뭐 그런 남세스러운 내기를 하고 그랬대;]

[도련 : 너희 그러다 정말 뜯기면 어쩌려고..]

[집사 : 도련님..]

[도련 : 닥쳐 좀!!!! 그만 불러!!!!]

[집사 : /헉]

[집사 : /엉엉]

[아타락시아 : 두 분 사이는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니지 : 언니는 뜯고도 남을 듯!]

[광인한 남자 : ...]

[KING Husband : 아무래도 우리는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 같다....]

[율 : 그러니까 왜 자꾸 누나를 놀리는...;]

[노아 : 모든 운명은 풍이한테 달렸네?]

[질풍 : 내 기필코 저 두 사람을 짝 뽕알로 만들어주고 말리!]

[제로사이드 : 뽕알...;]

[광인한 남자 : 풍느님 자비 좀..]

[KING Husband : 너 하나의 희생으로 두 남자의 뽕알을 지킬 수 있단다]

[질풍 : 나에게 수시를 떨어지라고 하는 건가?!]

[세츠나 : 뜰으즈믄 그믄은드..]

[질풍 : ;;]

[욕정벌레 : 세츠님 그런 거 만지면 더러워져요ㅠㅠㅠ]

[광인한 남자 : 더럽..]

[KING Husband : the love?]

[니지 : 닥쳐]

[KING Husband : ;ㅁ;]

[제로사이드 : 근데 세츠님은 정말 뜯으러 가실 듯한데..]

[무지개 요정 : 정말 그로테스크한 상황이 상상된다..]

[율 : 그럼 왕광형은 뭐라고 불러야 되나요]

[노아 : 그러게 형도 누나도 아닌데?]

[광인한 남자 : 난 이 내기의 무효를 주장한다!!!]

[KING Husband : 광이를 제물로 용서를 소환하고 무릎을 꿇는다!!]

[광인한 남자 : ?!]

KING Husband는 채팅을 마치고 그대로 세츠나의 앞으로 달려가 무릎 꿇기 모션을 사용해 냅다 무릎을 꿇었다.

[KING Husband : 용서해 주세요 누님!!!!!!!]

[광인한 남자 : ?!?!!?]

그리고 그런 KING Husband의 행동에 어이없어하던 광인한 남자도 냅다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광인한 남자 : 누님!! 자비를!!]

[무지개 요정 : 그래..그런 거 봐서 뭐하냐 네 눈만 버린다 세츠야;]

[제로사이드 : 차라리 다른 벌칙을 정하는 건 어때요?]

[질풍 : 다른 벌칙?]

[세츠나 : 다른 벌칙 뭐요?]

[제로사이드 : 으음...]

[도련 : 얼마 전에 커스텀 헤어에 변발 추가됐었잖아]

[세츠나 : 변발?]

[니지 : 변ㅋㅋㅋㅋㅋㅋ발ㅋㅋㅋㅋㅋㅋㅋ]

[노아 : 좋넼ㅋㅋㅋ 그거 하라고 하면 되겠네 ㅋㅋㅋㅋㅋ]

[율 : 변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츠나 : 하..]

[세츠나 : 뽕알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광인한 남자 : 누님...]

[KING Husband : 세츠님...]

[세츠나 : 그럼...풍이가 수시를 붙으면..너희는 한 달간 변발헤어 유지]

[광인한 남자 : 으엑...]

[KING Husband : 한 달;]

[세츠나 : 싫어?]

[광인한 남자 : 아님돠!]

[KING Husband : 성은이 망극함돠!!]

쉼터는 네 사람의 내기 건으로 왁자지껄하고, 소란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듯 불청객 2명이 불시에 찾아 들었다. 그들은 모두가 정신없는 틈을 타 자연스럽게 쉼터에 들어와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평상에 착석했다.

[블㉣┥⊆✡КⅰП9 : 거 오랜만입니다 들?]

난데없이 끼어 들어온 아이디에 모두의 채팅이 일순 멈췄다. 짧은 침묵이 쉼터 안에 맴돌았고, 하나둘씩 사태를 파악한 듯 채팅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지개 요정 : ??]

[도련 : ?]

[니지 : 뭐야?]

[흑염룡 : 전 식구가 찾아왔는데 왜 반겨주질 않으실까]

[세츠나 : 이 새끼들이 쳐 돌았나?]

[KING Husband :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블㉣┥⊆✡КⅰП9 : 우리가 못 올 곳에 온 건 아니잖아요?ㅋㅋㅋㅋ]

[광인한 남자 : 당장 안 꺼져?]

[제로사이드 : 누구예요?]

[블㉣┥⊆✡КⅰП9 : 너무 날 세우진 말아요~ 우리는 피해를 본 친구를 대신해서 가해자를 만나러 온 거니까~]

[무지개 요정 : 뭔 개소리야?]

[블㉣┥⊆✡КⅰП9 : 저기~ 노아님?]

[노아 : ?]

[블㉣┥⊆✡КⅰП9 : 캬~ 당당하시네 사람 패는 깡패주제에ㅋㅋㅋㅋ]

[제로사이드 : ??]

[무지개 요정 : 뭐?]

[블㉣┥⊆✡КⅰП9 : 사람 패놓고 돈 몇 푼 달랑 던져주면 다인 줄 알았나 봐요?ㅋㅋ]

[흑염룡 :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기에 ㅋㅋㅋ]

[노아 : 난 사람을 팬 기억은 없는데 이상하지]

[무지개 요정 : 무슨 소리야 이게?!]

[노아 : 얼마 전에 미친개 한 마리를 흠씬 패주고 개 주인한테 깽값은 물어준 적 있거든요]

[무지개 요정 : 미친개? 깽값?!]

[블㉣┥⊆✡КⅰП9 : 와씨..싹수 봐라 ㅋㅋㅋㅋ]

[흑염룡 : 완전 쓰레기네 ㅋㅋㅋ]

[제로사이드 : 그 개를 왜 팼는데?]

[노아 : 율이를 물어서]

[무지개 요정 : ?]

[무지개 요정 : 저 미친 새끼들이 율이한테 또 뭔 짓 했어?]

[제로사이드 : 무슨 말이에요 대체?]

[노아 : 아뇨 율이는 미친개한테 물렸다니까요?]

[무지개 요정 : 뭐??]

[노아 : 내가 분명 그 미친개한테 경고 했는데.. 오히려 시다바리들을 보냈네?]

[흑염룡 : 누가 시다바리야ㅡㅡ]

[블㉣┥⊆✡КⅰП9 :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네?ㅋㅋㅋㅋ]

[블㉣┥⊆✡КⅰП9 : 야 니 새끼가 돈이 좀 많아서 차운이는 그렇게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본데 우리는 그냥 못 넘어가지 ㅋㅋㅋㅋ]

[블㉣┥⊆✡КⅰП9 : 그 녀석을 아주 넝마로 만들어 줬더만? 경찰 신세 지기 싫으면 우리랑 면담 좀 하자?]

노골적으로 시언에게 만나자고 말하는 두 사람의 행동에 율은 모니터 화면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두 사람이 시언을 만나면 어떤 형태로든 시언에게 위해를 가할 것만 같았다.

[율 : 형;]

그리고 걱정되는 맘에 시언을 부르는 율의 행동에 시언이 아닌 성원과 현석이 반응을 보였다.

[블㉣┥⊆✡КⅰП9 : 히야~ 장군님~ 캐릭터 화려하네?]

[흑염룡 : 현실의 찌질이와는 완전 딴판인데~]

[블㉣┥⊆✡КⅰП9 : 화려한 캐릭터로 조용히 게임 하고 싶으면 아가리 닥치고 있어라?ㅋㅋㅋㅋ]

[무지개 요정 : 이 새끼들이 어디서 협박 질이야?]

[흑염룡 : 어이쿠~ 무셔라~ㄷㄷㄷ]

[KING Husband : 처 돌았나..]

[흑염룡 : 우리는 노아한테만 볼일이 있는 거라서~ 노아만 착하게~ 우리말 들어주면 권율 따윈 안중에도 없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쇼!]

[흑염룡 : 그러니까 상관없는 사람들은 좀 빠져주시죠~ 제3자 아니십니까~ 제3자]

[질풍 : 뭐?!]

[흑염룡 : 권율은 이제 우리한테는 단물 다 빠졌거든요~ 씹던 껌은 뱉어야죠~ 퉤퉤]

[블㉣┥⊆✡КⅰП9 : 어쩔래?ㅋㅋㅋ]

[노아 : 뭘 물어?]

[블㉣┥⊆✡КⅰП9 : ?]

[노아 : 아 주소라도 말해줘야 찾아올 수 있나..]

[노아 : 이미 잘 알고 있는 걸로 아는데 아니면 그새 잊었나?]

[노아 : 수준을 알만하군]

[율 : 형!!]

[블㉣┥⊆✡КⅰП9 : 미친 새끼 ㅋㅋㅋㅋ패기보소?]

[블㉣┥⊆✡КⅰП9 : 딱 기다려 새끼야]

신경을 긁듯 도발하는 시언의 말에 성원과 현석은 벼르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로그아웃했다. 두 사람이 쉼터에서 사라지자 길드원들의 질문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세츠나 : 뭔데?! 지금 이게 무슨 일인데??]

[도련 : 저 새끼들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제로사이드 : 저놈들이 누군데?!]

[무지개 요정 : 율이가 물렸다는 게 무슨 소리야 대체?!]

[질풍 : 지금 저 새끼들이 노아 형 만나러 온다는 거야??]

[니지 : 오빠 위험한 거 아니야?!]

[광인한 남자 : 설명 좀!!!]

[KING Husband :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노아 : 별일 아니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노아 : 잠깐 나갔다 올게]

[율 : 형 나가지 마세요!!]

[율 : 형!!]

[율 : ??]

[율 : 시언이 형!!]

마지막 채팅을 끝으로 자리를 뜬 건지 시언의 답은 올라오지 않았다. 아비규환에 빠진 길드원들이 채팅으로 소란을 떠는 걸 멍하니 지켜보던 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하게 방 문고리를 쥐었다.

하지만 미처 문고리를 돌릴 수 없었다.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시언이 그들과 만난다는 두려움보다 자신이 그들과 만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식은땀이 온몸을 흠뻑 적시고, 얼굴은 금세 창백하게 질렸다. 몇 번이고 떨리는 손끝으로 문고리를 돌리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두려움으로 다리가 풀리고, 그대로 방문 앞에 주저앉은 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절망감 속에 엎드리듯 몸을 웅크렸다.

1층으로 내려온 시언은 거실 창을 통해 율의 집을 흘끗 바라봤다. 아마도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차운의 일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조용히 해결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게임까지 찾아와 걸고넘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지라, 자신도 입맛이 썼다.

“쯧.”

시언은 버릇처럼 낮게 혀를 차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짧은 통화 연결 음 끝에 연결된 누군가와 꽤 긴 통화를 나눴다.

“네, 예정대로 진행해주세요.”

한참을 거실을 서성이며 통화를 하던 시언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통화를 종료하고 천천히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에어컨을 켜둔 집안과는 다른, 밤인데도 후끈한 공기가 온몸으로 부딪혀 왔다.

켜지는 센서 등과 함께 밖으로 나온 시언은 현관문을 닫고, 문에 기대서서 잠시 사념에 잠겼다. 하지만 골목 끝에 나타난 두 명의 모습에 사념을 떨치며 나른한 얼굴을 했다. 후끈하게 달라붙어 오는 밤공기마저 귀찮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어둠이 깔린 골목 그림자 속에서 건들건들 걸어 나온 두 명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언의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현관문에 기대어 서 있는 시언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게 성원과 현석의 눈에는 과하게 포장된 객기처럼 보였는지 두 사람은 시언의 앞에서 낄낄거리며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이 새끼 봐라, 이거? 꽁지 말고 도망갈 줄 알았더니 꽁지 말고 마중을 나와 있네?”

“지은 죄가 있으니 제 발 저린 거지.”

“존나 공손하기도 하지.”

웃고 떠들며 비아냥거리는 두 사람의 행동에도 시언은 지루한 듯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언이 전혀 반응하지 않자, 두 사람은 오기가 생긴 듯 더욱 비아냥거렸지만, 끝내 시큰둥한 시언의 반응에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갔다.

“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본론을 시작하려는 성원의 말에 시언은 그제야 현관에 기대어 있던 몸을 떼어내고, 눈앞의 두 사람을 내려다봤다. 어쩔 수 없는 신장 차이로 성원과 현석은 시언을 올려다봐야만 했다.

“씨바, 꺽다리도 아니고….”

그게 성원에겐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성원은 고만고만한 또래들과 다르게 180의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주변에도 자신보다 큰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키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 그가 누군가를 올려다봐야 한다는 게 덜 성숙한 마음에 상당한 타격을 불러일으켰던 모양이었다.

마음을 감출 줄도 모르고 자신을 향해 있는 힘껏 자격지심을 뽐낸 성원의 말에 시언이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였다. 성원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보는 사람이 기분 나쁠 정도로 천천히 훑던 눈동자는 곧 성원의 얼굴에서 멈췄고, 조소를 머금었다.

그런 시언의 행동이 성원의 심기를 건드릴 대로 건드렸는지, 성원은 금세 시뻘게진 얼굴로 시언에게 달려들 듯 다가왔다.

“이 씨바 새끼가!!”

“야, 야!!”

놀란 현석이 말리듯 성원을 붙잡자, 성원은 씩씩거리며 시언을 노려봤다. 한참을 그렇게 기 싸움하듯 시언을 노려보던 성원은 자신을 잡은 현석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긴말 안 할 테니, 인생 좆 되고 싶지 않으면 네 덕분에 병원에 뻗어 있는 소중한 친구를 걱정하는 우리에게 소소한 투자 좀 해라?”

성원은 장황한 헛소리를 늘어놓은 후, 자신이 대견하고 자랑스럽기라도 한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그리고 업신여기는 표정으로 시언을 바라봤다. 하지만 짜증이 가득 배인 시언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희 눈엔 내가 자선사업가로 보이나?”

“…뭐?”

“아니면 지금 나한테 구걸하는 건가?”

“뭐?”

“앵무새야?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뭐? 밖에 없어? 아니면 모자란 대가리로 돈 좀 뜯어낼 궁리 하느라 뇌세포를 다 썼나?”

“뭐?”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돈이 필요하면 구걸을 해, 무릎 꿇고.”

“허….”

“거지새끼들한테 몇 푼 쥐여 주지 못할 정도로 궁하진 않으니까 못 줄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상황파악이 안 되냐? 이 빠가사리야? 무릎 꿇고 구걸을 해라? 지금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너야.”

“어째서?”

“이 새끼 상당한 미친놈이네? 사람 하나 흠씬 두들겨 패서 병원에 입원시켜 놓은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자꾸 주둥일 놀리지?”

“더 놀릴 주둥이가 있으면 우리도 패서 입원시켜 보지 그러냐?”

말이 통하지 않는 시언이 답답한지 조용하던 현석까지 거들고 나섰다. 그런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시언은 짜증 난다는 듯 허공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두 사람에게 한발 다가왔다.

“사람 하나 패서 병원에 입원시켜 놓는 것도 참 수고스러운 일인데, 내가 왜 너희를 위해 그런 수고를 또 베풀어 줘야 하는 건데?”

“그럼 그냥 입 닥치고 우리 지갑 노릇이나 하라고.”

자신의 말에 바락바락 대드는 성원의 목소리를 듣던 시언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성원의 멱살을 쥐고 끌어당겼다.

“으엇?!”

앗, 하는 사이 벌어진 일에 성원은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단말마를 흘리며 끌려왔다. 그 모습에 현석도 화들짝 놀라며 시언에게서 성원을 떼어내려 급하게 다가왔지만, 호전적인 성원이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뭐 하는 거야 이 개새….”

“누가 최현석이야.”

덩달아 시언의 멱살을 쥐고 따져 묻던 성원은 제 말을 자르고 묻는 시언의 말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갑작스럽게 제 이름이 불린 현석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뭐, 뭐?”

알려준 적 없는 제 이름을 부르며 저를 찾는 시언의 행동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현석이 더듬더듬 되묻자, 시언의 시선이 현석을 향했다.

“네가 최현석이야?”

내리누르듯 바라보는 시선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시언의 시선이 자신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무감각한 눈동자에서 오는 온도가 소름 끼치게 차가워서 현석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어진 시언의 말에는 한여름 더위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한기가 들었다.

“아버지는 최만수, 어머니는 박경하. 외동아들이고, 세 식구 지하 전세방에서 살고.”

“?”

“아버지가 주식 쪽에 손을 대고 있던 건 아나? 얼마 전에 꽤 큰돈을 쏟아부었던데?”

“무슨…?”

“아, 역시 가족들은 몰랐나? 그럼 슬슬 연락이 올 때도 됐겠네.”

“대체 무슨 소리를….”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시언의 말들을 이해할 수 없어 연신 되묻던 현석은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울려 퍼지는 핸드폰 벨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요란한 벨 소리가 세 사람 사이로 울려 퍼졌지만, 현석은 섣불리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받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받아.”

기분 나쁠 정도의 명령조가 들려왔다. 현석은 불안한 눈으로 시언을 바라보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통화를 이어 가는 현석의 얼굴이 갈수록 창백하게 질려갔다. 결국, 길지 않은 통화를 끝낸 현석은 넋 나간 사람처럼 시언을 바라보다, 비틀비틀 골목길을 달려가 버렸다.

“야, 뭔데? 최현석!”

갑작스러운 현석의 행동에 당황한 성원이 달려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지만, 현석은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골목길을 빠져나가 사라질 뿐이었다. 황당하게 현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원은 제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동시에 멱살이 풀리며 밀쳐졌다.

휘청거리며 밀려난 성원은 신경질적인 얼굴로 시언을 노려봤지만, 시언은 꺼지라는 듯 턱짓을 해 보였다. 한낱 턱짓으로 저를 부리려 하는 행동에 울컥해 달려들려 했지만, 문득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성원은 잠시 주춤거리다, 짧은 욕지거리와 함께 바닥에 침을 뱉고는 도망치듯 골목을 떠났다.

성원과 현석이 사라진 골목 끝을 한참 주시하던 시언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어디론가 전화하며 걸음을 옮겼다. 통화 연결 음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급하게 전화를 받았고, 시언은 속삭이듯 상대방에게 말했다.

“율아, 창문 좀 열어줄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화기 너머에서 대답 대신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창문이 커튼이 걷히고, 열리는 게 보였다.

시언의 머리 바로 위에 있는 창문에서 다급하게 상체를 내민 율은 시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안도한 듯 울상을 지었다.

“형…!”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시언을 불렀고, 시언은 손을 뻗어 붉게 달아오른 율의 눈가를 쓸었다. 그리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울었어?”

“…안 울었어요.”

“착하네.”

“형은….”

“?”

“괜찮으세요?”

율이 걱정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묻자, 시언은 과장되게 양팔을 벌려 보이며 웃었다.

“그럼, 멀쩡한데?”

“…….”

“율아.”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바라보던 율이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시언이 넌지시 율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아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한 발 더 다가가 창문 위에 있는 그를 올려다보자, 자신의 얼굴로 무언가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갑작스레 제 얼굴을 적시는 액체에 놀란 시언이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 손에 묻어난 액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율을 올려다봤다.

“율아?”

“죄송….”

“율아?”

“흐으… 죄송…해요….”

고개를 한껏 숙인 율이 양어깨를 잔뜩 세운 채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모습에 놀란 시언이 재차 율의 이름을 불렀지만 율의 울음은 멈출 줄 몰랐다.

“나갈 수가 없었어요….”

“?”

“형이… 걱정되는데… 무서워서….”

“율아.”

“너무 무서워서….”

“나오려고 했어도 못 나오게 했을 거야.”

“흐윽….”

“안전한 곳에 안전하게 있어 주면 그걸로 돼.”

“그래도… 형이….”

“너는 내가 다칠까 봐 무서웠던 거지?”

“…….”

“나도 네가 다치고, 상처받을까 봐 무서워.”

“형.”

“그래서 지금 네가 울고 있는 것도… 속상하고, 무서워.”

“형… 형….”

“울지 마.”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율을 올려다보는 시언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울지 않았으면 해서 달래주려고 해도 어떤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몰랐다.

“율아.”

잠시 고민하던 시언은 양손을 뻗어 율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시언의 부름에 끅끅거리며 새어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던 율이 흐린 눈을 들어 시언을 바라봤다. 서로 바라보던 시선이 얽히고, 시언이 율의 얼굴을 끌어내리며 발돋움을 했다. 그리고 행동의 의미를 이해한 듯 율도 창틀을 쥐고 창문 밖으로 몸을 내렸다.

서러움을 억지로 참던 입술이 맞물리고, 토해내지 못하는 울음을 목 안으로 삼킨 율이 시언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달래려는 듯 다정한 키스를 나누는 와중에도 율의 눈물은 계속해서 시언의 얼굴로 떨어져 내렸다.

촉, 하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고, 뜨겁게 달궈진 숨이 터져 나왔다. 적당하게 익은 얼굴과 젖은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에 시언은 손을 뻗어 율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다정한 시언의 행동에 율은 창틀을 더욱 세게 쥐었다.

“형하고 있고 싶어요….”

예상하지 못한 율의 말에 놀란 시언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씁쓸한 듯 웃었다.

“나도 데리고 가고 싶어.”

“…….”

“그래도 안 되는 거 알잖아.”

“형….”

“보채지 마….”

말을 하던 시언은 짧은 텀을 두고 “가까스로 참고 있는데.”라며 중얼거렸다. 제대로 듣지 못한 율이 “네?”라며 되물었지만, 시언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만 들어가. 내일 보자.”

“...네.”

***

교실에 멍하니 앉아 있던 성원은 시선을 돌려 비어 있는 현석의 자리를 바라봤다. 현석과 함께 시언의 집에 찾아갔던 날 이후로 현석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며칠째 학교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유도 모른 채 이어지는 그의 부재에 시언과 있었던 일을 재차 곱씹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차운은 병원, 현석은 연락도 없이 결석, 어울려 놀던 단짝 두 명의 부재에 성원이 있을 곳은 학교와 집밖에 없는 기분이 들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 침대에 눕는다는 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인 성원은 귓가에서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떠지지 않는 눈으로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아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전해져 오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급하게 달려 나간 공원엔 잔뜩 초췌해진 현석이 있었다. 며칠 굶기라도 한 건지 양 볼은 홀쭉하게 들어가 있고, 입고 있는 옷도 꾸깃꾸깃했다. 그리고 어딘지 초조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달려오는 성원을 발견하고는 서러운 듯 울음을 터트렸다.

“뭐?!”

“나도 이게 무슨… 흐윽… 일인지…… 끅, 모르겠어….”

“…….”

“그때, 끄윽… 전화가… 아빠가 쓰러졌다는 전화가 와서… 병원에 갔는데…, 이상한 사람들이… 잔뜩 있었어… 무서운 사람들이….”

“무서운 사람들이라니?”

“그 사람들이… 흐윽…, 엄마한테… 하는 말을 들었는데…, 아빠가 사채를 끌어다가… 주식을 했다고… 근데… 그 주식이… 뭐가 어떻게 됐다는데… 흑….”

“주식이 뭐가??”

“말이… 어려워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다 날렸다는 것 같았어… 그리고 빚만 남았다고….”

“너희 아빤 왜 병원에 있는 건데…?”

“충격으로… 쓰러지셨대… 흐흑.”

“…….”

“아빠는… 못 깨어날 수도 있데… 근데…… 어, 엄마가….”

“?”

“오늘… 일어나 보니까… 엄마가 없었어… 흑…, 흐윽….”

“뭐? 해코지당하신 거야?”

“아니, 아니야… 어, 엄마… 짐이랑… 다… 없었어….”

“설마….”

“도망… 갔나 봐… 나만 버려두고… 흐엉….”

“…….”

“사, 사채업자들이… 나보고… 빚 갚으래… 학교… 못 간대….”

울며불며 자신의 사정을 늘어놓던 현석은 결국,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서러운 듯 끅끅거렸다. 듣고도 믿지 못하겠는 현석의 사정에 멍하니 있던 성원은 급하게 자신의 팔에 매달려오는 현석의 행동에 화들짝 놀랐다.

“그… 노아….”

“?”

“노아, 노아는… 뭔가 아는 것 같았어… 흐윽….”

“무슨….”

“나, 나 대신… 노아한테… 물어봐 줘… 흑… 나, 나 좀 도와주면 안 되냐고….”

“그 새끼가 무슨….”

“나, 나는! 노아는 건드리기… 시, 싫다고! 했잖아!”

“최현석?”

“네, 네가 부추겨서! 부추겨서….”

“…….”

“너 때문이야…… 흐윽… 너 때문… 흐엉….”

“야….”

“흐어엉…… 흐윽….”

성원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노아라는 인물에 대해 머리 한구석이 강하게 경고음을 울렸다. 성원은 자신에게 매달려 울고 있는 현석을 내려다보며 가슴속에서 술렁이는 묘하게 불안한 느낌을 차마 지울 수 없었다.

***

한참 게임에 집중하던 율과 시언은 딩동, 하고 울리는 현관 벨 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시언이 의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독촉하듯 한 번 더 딩동, 하고 벨 소리가 울렸다. 빠른 걸음은 아니지만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내려가는 시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시언은 열린 현관문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의 모습을 보며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계성원이었다. 며칠 전에 봤던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푹 숙인 고개와 무언가를 감내하듯 말아 쥔 두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성원의 모습을 어이없게 바라보던 시언은 밖으로 나와 현관문을 닫고 성원과 마주 섰다.

한참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시언은 성원이 먼저 무언가를 말하기를 기다려 주었지만, 성원이 계속 제 입술을 짓이기고, 말아 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시간을 끌기만 하는 모습에 낮게 혀를 찼다.

“할 말 없어?”

더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묻자, 성원은 놀란 듯 어깨를 떨며 시언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시언은 더 볼일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뒤를 돌아 현관 문고리를 쥐었다. 성원은 그제야 당황한 듯 말문을 열었다.

“저, 저기…!”

“?”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언이 뒤돌아봤다.

“호, 혹시… 현석이한테… 무슨 짓 했어… 요?”

어울리지 않게 자신에게 어색한 존댓말을 구사하는 성원의 모습이 헛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구차해 보였다.

“무슨 짓?”

“혀… 현석이네… 집이… 그….”

“집이 뭐?”

“그쪽이… 현석이네 아버지가 주식을 하는 걸 알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현석이가… 많이 힘들어해…요… 학교도 못 다니게 되어서….”

“…….”

“혹시… 그쪽이 뭔가 한 거라면….”

“내가 한 거라면?”

“하, 한 번만 용서를… 현석이 좀 도와주시면!”

“도와달라고?”

“네, 네! 사, 사과하라고 하시면 할게요. 노아…님한테 했던 일들 전부 사과드릴게요! 현석이랑 차운이랑 다 데리고 와서 사과….”

“사과해야 할 상대가 잘못되지 않았나?”

“네…?”

“나보다 먼저 너희들이 사과해야 할 사람이 있지 않으냐고.”

“…?”

한창 게임에 집중하던 율은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비어 있는 옆자리를 바라보다 몸을 일으켜 아래층을 내려다봤다. 난데없는 벨 소리에 시언이 1층으로 내려간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있었다.

도통 올라오지 않는 시언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던 율은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다시 성원 일행이 찾아온 거라면…. 하지만 잠시 후, 자신을 부르는 시언의 목소리에 1층으로 내려간 율은 현관문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한 사람의 모습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현관문을 보고 멈춰 서버린 율의 행동에 시언이 직접 다가와 율의 손을 이끌었다. 어찌할 새도 없이 시언의 손에 이끌려 성원과 마주하게 된 율은 희게 질려가는 낯빛으로 시언의 옷깃을 쥐었고, 시언은 율의 어깨를 감싸 쥐고 제 옆으로 바짝 끌어당겨 주었다.

성원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못마땅한 기색으로 율을 바라봤다. 보호하듯 율을 옆구리에 낀 시언은 시선을 내리깔며 조롱하듯 말했다.

“뭐해? 안 빌어?”

매정하게 뱉어진 시언의 말에 성원의 두 손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황당하다는 듯 시언과 율을 번갈아 바라봤다.

“제가… 왜 권율한테 사과를… 해야…?”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

“네?”

“율이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너희는 나한테 용서를 빌 기회조차 얻지 못할 거야.”

“그런 게….”

시언과의 짧은 대화 끝에 성원의 시선이 삐걱삐걱 율에게로 향했다. 잔뜩 주눅 들어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율의 모습에 울컥, 짜증이 샘솟았다.

왜 자신이 저 병신 같은 새끼한테 구차하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석을 위해, 그리고 혹시 모를 자신의 안전을 위해 지금은 거짓이라도 숙이고 들어가는 게 옳다는 판단을 내렸다.

“미안.”

“그게 사과야?”

율에게 사과를 한다는 건 성원에겐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짜증 배인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인 채, 억지로 쥐어 짜낸 목소리로 맘에도 없는 사과를 건네 봤지만, 돌아온 건 시언의 일갈이었다. 짓누르듯 내려 보는 눈동자가 자신을 억압하듯 옭아매고 있었다.

“좀 더 진심을 담아야지? 무릎도 좀 꿇고.”

시언의 말은 꼭 명령처럼 들렸다. 자존심이 상해, 용서고, 지랄이고, 나발이고, 제 앞에 선 두 사람에게 쌍욕을 퍼붓고, 당당하게 뒤돌아 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분노에 부들거리는 두 손을 더 꽉 말아 쥐고 분한 듯 잇새를 짓이겨 문 성원은 보란 듯이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꺾여버린 자존심이 부스러기처럼 바닥에 흩어져 사라졌다.

시언의 말에 냉큼 제 앞에 무릎을 꿇는 성원을 바라보던 율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시언의 옆구리에 파묻히듯 안겨 있었지만, 성원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용서…해 줘… 잘못했어….”

잔뜩 떨리는 목소리가 쥐어짜듯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간간이 들썩이는 그의 등의 오르내림과 떨리는 목소리로도 율은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그가 지금 상당히 화가 나 있다는 걸. 그리고 여전히 그는 자신에게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사람 하나 살린다는 셈 치고, 용서해 주면… 안 되겠냐…?”

“너희는….”

“?”

되는대로, 그럴싸해 보이는 말을 대충 늘어놓던 성원은 나지막이 들려오는 율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너희는 내가 그만둬 달라고 할 때… 그만뒀어?”

“뭐?”

“내가…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는?”

“…….”

“내가 용서해 달라고 했을 때도….”

“…야.”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용서를 구해?”

시언의 품에 숨듯이 안겨서 성원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율은 어느새 시언에게서 한 발 떨어져 나와 있었다. 그리고 잔뜩 지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잇고 있었다. 성원은 멍하니 율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의 입에서 뱉어진 말들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왱왱거리며 의미의 표면을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말들이 오롯이 흡수되어 이해가 되었을 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율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희가 감히 내게 용서를 구해?”였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이, 개새끼가!”

참지 못하고 버럭 내지른 욕설과 함께 몸을 벌떡 일으키자 율이 놀란 듯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성원은 빠르게 손을 뻗어 율의 멱살을 쥐고 끌어당기며 주먹을 들었다.

“내가 너한테 저자세로 나오니까, 내가 만만해지기라도 했냐? 넌 그냥 닥치고 날 용서하기만 하면 돼, 이 병신 새끼야!!”

성원의 말과 함께 뻑, 하는 타격음이 세 사람 사이에 크게 울렸다.

“으윽… 우….”

성원의 고함과 함께 저를 향해 추켜 올라간 주먹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던 율은 뻑, 하는 타격음과 함께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맞은 건 자신이 아니었다. 그걸 증명하듯 자신의 발치에 얼굴을 감싸고 굴러다니는 성원이 있었다.

***

현석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다는 말을 요즘 실감하고 있었다. 빚은 갚아야 하지만 중졸의 자신이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사채업자들이 알선해 준 일자리에 발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오후까지는 막노동판에서 몸을 깎아가며 일을 하고, 야간에는 공장에서 일해야만 했다. 학교에 갈 수 없는 건 물론이고, 하루에 잘 수 있는 시간도 3~4시간이 다였다.

그런데도 쓰러져 있는 아버지의 병원비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사채의 이자가 어마어마해서 누군가에게 하소연해 볼 시간도 없이 시간에 쫓겨 일해야만 했다.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은 있었다. 지옥 같은 날들이 시작되기 전에 잠깐의 짬을 내서 만났던 성원에게 모든 이야길 털어놓았었고, 성원이 노아를 만나 보겠다고 얘기를 해 주었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돼버린 게 노아와 연관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은연중에 솟아오른 의심은 강렬하도록 모든 매듭을 노아와 연결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출근 준비가 늦어진 현석은 서둘러 옷을 꿰어 입고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그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현석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급하게 전화를 받으며 상대방의 이름을 불렀다.

“서, 성원아!”

「…….」

“성원아?”

「미안하다….」

“뭐?”

「노아한테 얘기해봤는데… 잘 안 됐어….」

“?”

「아무래도… 이 이상 널 도울 수 없을 것 같아….」

“뭐?”

「미안….」

“야… 계성원 이 미친 새끼야!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너 때문에!”

「…….」

“지랄해 댄 건 넌데, 왜 내가 피해를 봐야 하는 건데! 책임져 새끼야! 다 네 탓이니, 네가 다 책임지라고!”

「나더러 여기서 뭘 더 어쩌라고!」

“뭐? 이 씨발 새끼가!”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

“야! 계성원, 서, 성원아!”

매정한 말을 끝으로 끊어져 버린 통화에 멍하니 전화기만 붙들고 있던 현석은 제 분을 못 이긴 듯 전화기를 내던졌다. 씩씩거리던 숨이 점점 가빠오며 바닥에 주르륵 무너져 내린 현석은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간헐적인 울음을 터트렸다.

***

어둠이 내린 길거리를 배회하던 성원은 건널목 앞에 서서 걸음을 멈췄다. 그 일 이후로 현석과는 연락을 해보지 않았고, 차운도 아직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였다. 함께 놀아줄 사람이 없으니 지루하고 무료한 생활이 반복되기만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자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차운처럼 병원 신세를 질 만큼 두들겨 맞는 일도 없고, 현석처럼 인생 말아먹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 이상 두 사람과 연관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제는 제법 선선해진 새벽 밤공기에 취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성원은 바뀌는 신호등 불빛을 확인하며 길을 건넜다. 분명. 길을 건너고 있을 뿐이었다.

극심한 통증이 왼쪽 다리를 타고 온몸을 내달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의 통증이 온몸 구석구석에서 꽃을 피우듯 피어올라서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들어 올리자, 잔뜩 부어오르고 젖은 눈가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모친의 얼굴이 보였다.

의아한 마음에 입을 열어 모친을 부르려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뭔가 목에 콱 틀어 막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무겁고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언가에 고정된 것도 같았다.

깁스한 건지 움직이지 않는 목도, 극심한 통증이 일고 있는 왼쪽 다리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손끝도, 맘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목도, 하지만 그런 자신의 옆에서 모친은 다행이라며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손끝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마주 잡아주는 온기는 느껴졌다.

느릿느릿 시선을 움직여 주변을 살펴봤다. 하얀 천장과 처음 보는 의료장치들, 그리고 자신에게 연결된 링거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장소가 파악되자, 후각이 깨어나는지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 ㅁ… 마.”

답답함에 억지로 목소리를 내보자 무언가를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그리고 모친을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에 모친이 더욱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나 발이 너무 아파.’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고작 엄마라고 부르는 것도 성대를 뜯어낼 듯이 아팠다.

“살았으면 됐다… 살았으면 됐어….”

연신 자신이 살았다는 것에만 중점을 두는듯한 모친의 말이 신경이 쓰였다. 살았으니 됐다니? 자신은 지금 이렇게 아픈데, 특히나 왼쪽 발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데.

성원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이 안 되는 것도 짜증이 나고, 온몸이 아픈 것도 짜증이 났다. 연신 살았으면 됐다며 울고 있는 모친도 짜증이 났다. 그리고 아까부터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왼쪽 발이 제일 짜증이 났다.

대체 발이 어떻게 되었기에 이렇게 아프단 말인가? 짜증과 궁금증에 뻑뻑한 목을 억지로 움직여 제 발을 내려다보던 성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

왼쪽 무릎 아래로 있어야 할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

성원이 찾아왔었던 그날, 시언은 선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거실을 서성였다.

「그나저나, 그 김차운이란 놈한테 합의금 너무 많이 준 것 같다.」

“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더라. 그쪽 부친이 은근히 연락해서 압박하는데….」

“뭐라고?”

「뭐긴 뭐겠냐? 돈 더 달라는 거지. 아들 병원비와 위자료로는 턱없이 모자라다나 뭐라나….」

“차고 넘칠 만큼 준 것 같은데?”

「그래서 알아보니까 그 돈으로 차를 샀던데? 가족들 몰래 산 모양이라, 너한테 다시 뜯어내서 채울 요량인 것 같은데….」

“…….”

「애초에 너무 큰 금액을 덥석 쥐여 주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떨떠름한 목소리에 시언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됐어, 그러라고 많이 준거니까.”

「뭐?」

“당분간 맞춰주면서 좀 쩔쩔매는 시늉만 해줘.”

「그거면 되냐?」

“응, 그거면 돼.”

***

“우웩… 우웨에에엑.”

어둠이 내린 도로 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엉망으로 갓길에 멈춰 선 차에서 다급하게 내린 한 인영이 가로수를 붙잡고 토악질을 해댔다. 눈물 콧물과 함께 게워낸 타액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내렸고, 한참을 그렇게 토악질을 해대던 그는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두 손안에 잡히는 감각이 생생했다.

헤드라이트 빛에 놀란 듯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와 그 이후에 느껴지는 묵직한 충돌. 비명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날아가 바닥에 쓰러지던 몸뚱이. 면허는 물론, 핸들 한 번 잡아 본 적 없는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두려움과 서러움이 뒤엉켜 봇물 터지듯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후회나 두려움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휘몰아치는 머릿속에는 다른 한 가지 감정이 이기적으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불과 며칠 새에 시궁창에 빠져버린 자신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구제할 수 있다는 안도감.

처음은 사채업자들의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일만 잘 풀리면 빚 일부를 차감해 주겠다고 했다. 그 말에 앞뒤 가릴 것 없이 덥석 받아들이긴 했지만, 차로 밀어버려야 할 상대방이 계성원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솔직히 망설였다.

하지만 자신을 먼저 배신한 건 계성원이었고, 그를 희생해서 자신이 빠진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올 수 있다면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결국, 자신도 계성원과 같은 이기적인 인간일 뿐이니까.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현석은 불현듯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다 그대로 차를 두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시동도 끄지 않고, 운전석 문은 휑하니 열린 채로 버려진 차는 앞 범퍼와 보닛이 엉망으로 찌그러진 채였다.

***

퇴원 준비를 위해 짐을 싸던 차운은 문득 시계를 바라봤다. 슬슬 부친이 마중을 오기로 한 시간이라 서둘러 손을 움직이는데, 갑작스럽게 핸드폰이 울렸다. 보나 마나 부친이 도착한 거겠지, 하는 생각에 차운은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응, 아빠.”

「차운아, 엄마야.」

“어?”

「미안한데 오늘 그냥 혼자 집으로 갈래?」

“어? 아빠가 마중 오기로 했잖아?”

「그게… 지금 아빠가 경찰서에 있다고 연락이 와서….」

“경찰서? 왜?”

「엄마도 잘 몰라, 지금 경찰서 가는 중이야.」

“뭔 일이래….”

「아무튼, 마중 못 가서 미안해. 택시 타고 가.」

“응,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래. 좀 이따 엄마가 다시 전화할게.」

“응.”

모친과의 통화를 끝낸 차운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짐을 싸서 병실을 나섰다. 이때만 해도 차운은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나게 될 일들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온종일 자신의 집에서 같이 게임을 하고 율을 집까지 배웅한 시언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현관 옆 화단에 몸을 숨기고 있는 한 인영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김차운.”

시언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음에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미동도 없던 차운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시언의 목소리에 움찔거리며 반응을 보이더니 천천히 몸을 숨겼던 화단에서 벗어나 시언의 앞으로 나왔다.

한껏 위축되어 보이는 몸은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는지 간헐적으로 잔 떨림이 일었다. 하지만 적개심을 가득 담은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며 시언을 주시하고 있었다. 시언은 차운의 모습을 천천히 훑으며 한발 다가섰다.

“여기를 또 용케 왔네.”

“…….”

차운의 답은 없었다. 그저 한발 다가선 시언을 경계하듯 몸을 움츠렸을 뿐. 그런 차운의 행동을 비웃던 시언은 깁스한 그의 손을 턱으로 가리켰다.

“손보다는 발을 부러뜨려놨어야 했나.”

차운은 하마터면 뒷걸음질 칠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행동을 제어하고 시언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지?”

“?”

“네가 한 거지?”

“넌 말의 문맥이란 걸 모르나? 아, 지능이 없으면 언어 구사도 힘들긴 하겠지.”

“닥쳐!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비아냥거리는 시언의 말에 차운은 협박하듯 낮게 으르렁거렸고, 시언은 조소를 머금고 차운을 내려다봤다.

“그 이전에 제대로 물어.”

“아빠… 우리 아빠 일…, 네가 꾸민 거지?”

“여전히 언어 구사가 힘든가?”

“네가 꾸민 일이 아니라면 어떻게 아빠 차에 치인 게 성원일 수가 있어!”

버럭 질러진 차운의 말에 시언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람다운 짓을 안 하고 살더니 사람 언어를 구사할 줄을 모르는군. 그래서? 네 아빠가 네 친구를 차로 치고 달아났다. 이 이야긴가?”

“그럴 리 없잖아…! 그럴 리….”

“?”

“날 패서 손쉽게 합의금을 주고, 그 돈으로 아빠는 우리 몰래 차를 사고, 그 차로 성원이를 치고 달아났다는 게 우연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냐고!”

“우연일 수도 있고, 벌을 받는 걸 수도 있겠지.”

“아빠는 아니라고 했어! 아빠가 한 게 아니라고 했….”

“필름이 끊길 정도로 취해 있던 사람이 하는 말을 확신할 수 있나?”

“어, 어떻게….”

“…….”

경악하며 묻는 차운의 목소리가 잔뜩 떨려왔다. 경찰서에 갔던 모친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는 부친이 합의금으로 저희 몰래 차를 샀다는 것, 그리고 그 차로, 어젯밤, 계성원을 쳤다는 것. 마지막으로 당일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눈앞의 남자는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의문과 의혹만이 늘어 애가 타는 자신과 달리, 시언은 무감각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역시… 너지?”

“뭐를?”

“현석이네를 그렇게 만든 것도… 성원이 다리도… 우리 아빠도… 다 너지?”

“다리가 날아갈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뭐?”

“네 친구는 계성원이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야.”

“무슨 소리야 대체….”

“덕분에 손쓸 일이 줄어서 좋긴 하다만.”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시언의 입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말들이 보이지 않던 사건의 맥락을 이어 가는 듯해서 절규하듯 소리치는 차운의 목소리도 덩달아 형편없이 떨려왔다.

하지만 그런 차운의 행동에도 시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무감각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 그 눈을 마주 보며 차운은 여러 가지 감정과 여러 가지 사념이 뒤섞여 제대로 된 사고가 어려웠다. 성원과 현석을 포함한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왜,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엉켜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수백 개의 실타래가 아무렇게나 엉켜 해결 방법 따윈 없을 것 같았지만, 예상외로 엉킨 실타래는 단 한 줄 뿐이었다. 결론은 하나, 간단하게 모든 상황을 정리할 방법, 처음부터 눈앞의 노아라는 남자만 없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차운은 천천히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시언의 눈에도 또렷하게 보이는 그건 잭나이프였다.

“그래… 너만 없으면 돼… 처음부터 너만 없었으면 됐어. 그럼 나도, 성원이도, 현석이도… 권율도, 아무런 문제 없었어.”

초점 없는 눈으로 나이프를 들고 주절주절 늘어놓던 차운은 발끝을 움직이는 시언의 행동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여태 미동도 없던 시언의 미세한 움직임에 그가 겁에 질렸을 거라 생각이라도 한 건지 광적인 얼굴에 희열이 서렸다.

하지만 시언의 표정에 차운은 나이프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언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짜증이 서린, 한심스러운 것을 바라보는 얼굴이었다.

“정말… 너희는 한 치의 예상도 벗어나 주질 않는군.”

“뭐…?”

“사람이란 게 보통 이렇게 손맛대로 잘 굴러가진 않을 텐데.”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

“찌르려고 가져온 거 아닌가?”

“…뭐?”

“근데 너무 짧은 것 같은데, 사람 죽이긴 글렀군.”

“뭐?”

“아, 나로선 다행인가?”

차운의 말은 고스란히 무시하며 영문 모를 말만 늘어놓던 시언은 성큼성큼 걸어 차운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 시언의 행동에 차운은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손을 휘둘렀다.

“뭔 개수작이야!”

차운이 휘두른 나이프는 시언의 뺨을 긋고 지나가며 붉은 선을 남겼고, 상처 자리에서 몽글몽글 새어 나온 핏방울들이 뺨을 타고 턱으로 흘러내렸다.

“히익-!”

예상치 못한 일에 차운은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곧 표정과 행동을 갈무리해서 위협하듯 칼을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주, 죽여 버릴 거야!”

“…….”

“죽…!”

“넌 못 해.”

“… 뭐?”

“이젠 이해력도 부족하나?”

“…….”

“넌 못 해.”

다시 한번 확정 지어 말하는 시언의 말에 차운은 얼굴을 한껏 구기며 잇새를 짓씹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나이프를 쥐고 돌진하듯 시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차운의 행동은 너무나 쉽게 시언에 의해 막혀 버렸다. 어렵지 않게 차운의 두 손목을 붙잡아 행동을 저지한 시언은 당황한 듯 자신과 제 손을 번갈아 바라보는 차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차운의 귓가에 속삭였다.

“넌 못 한다고 했지?”

“?”

그리고 그대로 차운의 손목을 끌어당겨 자신의 옆구리에 나이프를 찔러 넣었다.

***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보조 의자에 앉아 예쁘게 사과를 깎던 선호가 황당하다는 듯 시언의 코앞에 과도를 들이대고 흔들어 댔다. 선호는 늦은 밤에 시언이 칼에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허겁지겁 달려왔더니, 정작 당사자는 멀쩡한 모습으로 병실 침대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눈앞에서 칼날이 알짱거리자, 시언은 미간을 구기며 “치워.”라고 말했고, 선호는 다시 사과를 깎으며 말을 이었다.

“넌 참 난 놈이야. 배에 칼빵을 맞은 상태로 뭐?”

“칼빵 안 났다고.”

“그럼 네 뱃구레는 뭐야!”

“빗겨서 베인 것뿐이라고.”

“구멍이 뚫렸든, 베였든! 바로 병원으로 올 생각을 해야지. 그 상황에 그 미친놈을 경찰서에 넘기고, 네 손으로 운전까지 해서 와?”

“할 만하던데.”

한마디도 지지 않는 시언의 태도에 적잖이 화가 난 듯한 선호가 다시 한번 과도를 시언의 코앞에 대고 흔들며 외쳤다.

“그놈의 주둥아리를 확!”

“치워.”

그러나 또다시 시언의 사나운 일갈에 다시 사과를 깎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귀국해서 조용히 잘 살던 놈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원.”

가지런히 깎아 놓은 사과들을 그릇에 담아 침대에 올려놓은 선호는 주변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릇에 담긴 사과 조각을 집어 들던 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선호를 시선으로 쫓다 사과를 입에 넣으며 물었다.

“가게?”

“응, 늦었으니까. 내일 다시 오마.”

“그럼 내일 올 때, 우리 집에 들러서 내 핸드폰도 좀 가져다줘.”

“핸드폰?”

“응, 핸드폰.”

“더 필요한 건 없고?”

“어.”

“알았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병실을 나서는 선호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언은 병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옆구리를 쥐고 몸을 눕혔다.

오래 앉아 있었던 덕에 옆구리가 심하게 결려 와서 찌푸리듯 눈을 감았던 시언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감았던 눈을 떴다. 옆구리를 베고 지나가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옆구리에 찔러 넣으려 했던 차운의 칼은 아슬아슬하게 옆구리를 스치듯 베고 지나갔다. 분명 그 순간 억지로 손을 비틀던 김차운의 행동 덕이었겠지.

사실 시언은 차운의 칼로 정확하게 복부를 찌를 생각이었다. 그가 가진 칼의 길이를 봤을 때 아무리 깊게 찔러 넣어도 목숨에 지장은 없을 거라 여겼기에. 그리고 그 모습을 율에게 보여서 율에게 강하게 남아 있던 가해자 3명이 남긴 트라우마를 벗겨내고, 자신이라는 트라우마를 덧씌울 생각이었다.

복부에 남게 될 상처를 훈장 삼아 그를 옭아매고, 그 작은 머리를 자신에 대한 것으로 가득 채울 기회라고 생각했다. 평생 자신을 벗어날 수 없게. 평생 자신의 옆에만 남아있을 수 있게.

“하아….”

생각을 이어가던 시언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보조개가 파일 정도로 웃던 율의 모습과 가해자들의 공포에 떨며 울던 율의 모습이 교차하듯 떠올랐다.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곁에 머무는 율은 분명 앞으로 수많은 웃는 모습을 보여주겠지만, 억지로 자신에게 얽매여 있는 율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우는 모습만을 보여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게 김차운과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과 바람의 무게를 저울질해 본다면 분명 그 차이를 가려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제 안의 저울은 미세한 차이로 바람을 택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은 율의 웃는 모습이니까.

***

부모님이 출근하신 후, 시간을 좀 재던 율은 서둘러 집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시언의 집으로 향하던 도중 마당에 세워져 있어야 할 시언의 차가 없다는 걸 알았다.

전날 자신을 바래다준 시언은 그대로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해봤지만, 몇 번을 걸어도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시언의 부재에 대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차가 있어야 할 텅 비어 버린 좁은 마당을 서성이다 현관문 쪽으로 다가서던 율은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어~ 율 씨?”

전에 한번 봤었던 시언의 친구가 반가운 듯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 시언이 형 친구… 분?”

“네~ 친구입니당.”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율 씨는 어쩐 일?”

“네? 저기 시언이 형…….”

“시언이 찾아온 거예요?”

“네.”

“음? 율 씨는 모르나? 시언이 지금 집에 없는데?”

“네?”

“어제 병원에 입원했잖아요.”

“네?”

밤새 통증과 고열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자지 못한 시언은 뒤늦게 몰려오는 수마를 떨치기 위해 가물가물한 눈으로 의미 없이 티비 채널을 돌려대고 있었다. 자고 싶었지만, 선호에게서 핸드폰을 받아서 율에게 연락을 해둬야만 했다.

“이 새끼… 왜 안 와….”

까무룩 꺼져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있던 시언은 기계적으로 눌러대고 있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계속 누워 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잠이 들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세수라도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드르륵, 하고 병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병실로 들어서는 선호의 모습에 늦었다는 푸념을 늘어놓으려는데 “들어와요.” 하는 선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에게 하는 소린가 싶어 의아한 얼굴로 선호를 바라보고 있던 시언은 선호의 손에 이끌려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율의 모습에 경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선호의 손에 이끌려 병실에 들어선 율은 자신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시언의 모습을 보고 멈칫거렸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시언의 모습이 어딘지 낯설고, 무서웠다.

“…뭐?”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한 시언이 율을 가리키며 묻자 선호는 자랑스럽다는 듯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아, 너희 집 앞에서 만났어. 너 만나러 오셨다기에 모셔왔지.”

선호의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시언은 자신에게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율에게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율은 그제야 안심한 듯 시언에게 다가왔고, 시언은 다가온 율을 끌어안으며 선호를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넌 죽었어.’

선호는 두 손으로 꽃받침 하며 과하게 놀라는 시늉과 함께 병실을 벗어나 도망가 버렸다. 어이없는 제스처와 함께 홀랑 도망가 버리는 선호의 뒷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시언은 제 품에 말없이 안겨 있는 율을 내려다봤다.

“율아.”

조심스레 불러오는 목소리에 시언의 품에 얼굴을 박고 있던 율이 고개를 들어 시언을 바라봤지만 이내 다시 시언의 품에 얼굴을 박았다. 그리고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부터 연락도 안 되고….”

“율….”

“병원에 있다고 그래서 놀랐어요….”

“…….”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많이… 안 좋으신 거예요?”

더듬더듬 물어오는 목소리에 잔 떨림이 섞여 들였다. 시언은 제 품에 안겨 있는 율의 불안감을 없애주기라도 하듯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별거 아냐, 며칠 뒤면 퇴원할 수 있대. 핸드폰을 두고 오는 바람에… 연락 못 했어, 미안해.”

율을 달래듯 말을 이어가던 시언은 율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잔 떨림에 또 율이 울고 있는 건가 싶어 그의 어깨를 쥐고 품에서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더욱 달라붙으려던 율이 시언의 옆구리를 움켜쥐었고, 시언은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며 율에게 쓰러지듯 기댈 수밖에 없었다.

“형?”

율은 난데없이 제게 쓰러지듯 기대오는 시언을 받쳐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뭐야? 뭔 일이람!”

시언을 피해 문밖으로 도망쳤던 선호가 율의 목소리에 병실에 들어오자, 율이 발을 동동 구르며 선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한걸음에 달려온 선호가 시언을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그러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침대에 박혀 있어 인마. 뱃구레에 구멍 난 놈이.”

시언을 침대에 눕히며 쫑알쫑알 잔소리를 늘어놓는 선호의 말에 율은 놀란 듯 시언을 바라봤다. 시언은 죽일 듯한 눈으로 선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구멍…이요?”

더듬더듬 물어오는 율의 목소리에 선호를 노려보던 시언이 얼른 시선을 옮겨 율을 바라봤다. 율은 세상 무너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시언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율이 후다닥 달려들어 시언의 어깨를 잡아 침대 위에 눕혔다.

“와오.”

그리고 그 모습에 선호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대로 병실에서 내뺐다.

“꼼짝도 못 하는구먼? 율 씨가 저놈 간호 좀 해줘요!”

라고 외치며.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병실 안에 시언과 둘만 남겨진 율은 덮치듯 그의 어깨를 잡아 누르는 자신의 자세에 놀라며 후다닥 몸을 물렸다. 멀찍이 떨어져 나가는 율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언은 절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율에게 손짓했다.

“옆에… 의자 있으니까 이리 와서 앉아.”

시언의 부름에 율이 쭈뼛쭈뼛 다가와 의자에 앉자, 시언은 율에게 음료 하나를 건넸다. 율은 시언이 건네주는 음료를 받아들고는 손안에 굴리다 입을 열었다.

“배에 구멍이 났다는 건…?”

“으응?”

그리고 시작된 율의 질문에 시언이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구멍이 난 건 아니고… 그냥 좀 베였어.”

“베여요? 어쩌다가….”

“어? 음….”

“성원이… 애들하고 연관… 있는 거예요?”

“뭐?”

율이 말에 시언이 놀라 되묻자, 율은 잔뜩 굳은 얼굴로 시언을 바라봤다. 심각해 보이는 율의 얼굴에 괜히 뜨끔한 시언은 오히려 크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얼마 못 가 옆구리를 쥐고 고통에 끙끙거려야만 했다. 덕분에 잔뜩 굳었던 율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함으로 바뀌었다.

“내가 그놈들한테 당했다고 생각한 거라면 자존심 상하는데.”

“아….”

“그냥 내 부주의야.”

“부주의….”

“그나저나 여기 있어 봤자 심심하기만 할 텐데. 사람 불러줄 테니까 집에 가.”

“네?”

“응?”

“저,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여기서 할 것도 없는데….”

“있을래요….”

“…….”

“있을래.”

드물게 고집을 부리는 통에 시언은 결국, 율을 되돌려 보내지 못했다. 둘이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을 보내는가 했지만, 간밤에 잠을 자지 못했던 시언이 잠들어 버리면서 율은 하염없이 시언의 얼굴을 보고 앉아 있기만 했다.

***

“이번 일, 너희 할아버지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더라.”

마주 앉은 선호의 말에 시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덤덤해 보이는 태도에 선호는 슬쩍 눈썹 한쪽을 치켜세웠다.

“이 새끼… 너 일부러지?”

“뭐?”

“칼빵 맞은 거!”

“…….”

“이 미친놈아!”

“할아버지를 움직일 제일 확실한 방법이었으니까.”

“너, 이… 사람 인생 골로 보내려고 작정을 했냐? 아니, 보내고 싶으면 다른 방법도 많은데, 왜 하필 네 몸에 구멍을 내느냐고!”

“구멍 안 냈다고.”

“아오….”

“…….”

“아무튼, 김차운인지 뭔지 이제 세상 빛 보긴 글렀네. 뭐 하는 새낀지는 몰라도 불쌍하게 됐네. 하필이면 너를… 어휴.”

“불쌍하기는.”

“야, 이… 평생 감방에서 썩어나는 게 그나마 행복한 인생이 될 텐데 안 불쌍하냐?”

“안 불쌍해.”

“그나저나 전해 들으니까 그동안 너 아주 개망나니처럼 날뛰었더구먼?”

“뭐?”

“학교 하나 뒤집어엎고, 교장 파면시켜, 경찰서장 옷 벗겨, 사람도 하나 죽어라 패놓더니, 이젠 칼빵까지 맞고… 아, 얼마 전엔 주식도 하나 상장폐지 시켰더라?”

“별것도 아니잖아.”

“와 진짜… 한가 놈들… 답 없어. 넌 그나마 얌전하다 했더니만…, 똑같은 놈이었어.”

“형한테 이른다.”

“헐… 죄송함다.”

“그만 가라… 좀 쉬게.”

주절주절 끝없이 늘어놓는 선호의 말이 듣기 싫다는 듯 축객령을 내린 시언은 꾸물꾸물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런 시언의 행동에 입을 닷 발 내민 선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서려다 말고 물었다.

“있으라 그래도 간다. 인마! 아, 너 내일 퇴원이지?”

“응.”

“데리러 올까?”

“아니, 내가 운전해서 갈 수 있어.”

“독한 놈… 독한, 한가 놈….”

“가라, 장가 놈아.”

“청렴한 장가 놈은 간다!”

딩동, 하고 울리는 현관 벨 소리에 율은 미적미적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난밤에 길드원들과 광란의 파티를 벌인 덕에 새벽 늦게야 잠들었던 율은 떠지지 않는 눈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는 도중 또 한 번 딩동, 하고 현관 벨이 울렸다.

왠지 재촉하는 듯한 벨 소리에 부랴부랴 침대를 벗어나 거실로 나온 율은 인터폰을 들고 잔뜩 잠긴 목소리로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그리고 들려온 상대방의 목소리에 떠지지 않던 눈이 번쩍 떠졌다. 던지듯 들고 있던 인터폰을 내려놓고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자 익숙한 인영이 익숙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검은 슬랙스 바지에 흰 셔츠, 그리고 검은색 슬립온. 활짝 열린 현관 밖에서 일주일 만에 자신을 데리러 온 시언은 처음 만났던 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그립기도 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율에게 눈앞의 시언은 절대 바뀌지 않을 이정표와 같았다. 주변 무엇 하나 신경 쓰지 않고, 무작정 따라 달려도 되는 이정표 말이다.

***

“하아.”

긴 숨에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입김이 하얗게 흩어져 공중으로 사라졌다. 어느덧 달도 12월에 접어들었다. 율의 집 앞에서 율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시언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 건물들에 가로막힌 작은 시야를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언은 무언가 차가운 게 볼에 닿는 걸 느꼈다. 의아한 마음에 손을 들어 볼을 만지자 미세한 물기가 느껴졌다. 동시에 하늘을 가득히 수놓으며 무수한 눈송이들이 흩날려 떨어지기 시작했다.

“형.”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문밖을 나서던 율이 쏟아지기 시작한 눈을 바라보며 멈춰 서 있는 게 보였다. 시언은 그런 율의 손을 잡아끌며 작게 속삭였다.

“첫눈이네.”

***

“으아….”

민우와 마주 앉아 게임을 하던 채원은 앓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난데없는 채원의 행동에 민우가 의아한 듯 왜 그러냐 묻자 채원이 머리를 잔뜩 쥐어뜯으며 심란한 듯 웅얼거렸다.

“또 항의 들어왔어….”

“또?”

채원의 말에 민우는 되물으며 웃음을 터트렸고, 채원이 테이블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노려봤다.

“재밌냐?”

서슬 퍼런 채원의 눈빛에 민우는 애써 웃음을 삼키며 채원의 노트북을 툭툭 쳤고, 반사적으로 노트북을 바라보는 채원의 행동에 민우는 빠르게 채팅을 쳤다.

[제로사이드 : 응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꾸르잼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길드] [율 : 제가 안 그랬어요!]

[길드] [무지개 요정 : 항의가 들어왔다니까!]

[길드] [율 : ...]

[길드] [율 : 그 사람들이 먼저 시비 걸었단 말이에요!]

[길드] [무지개 요정 : 시비를 걸어도 그냥 무시할 수도 있는 거잖아 왜 자꾸 쌈닭처럼 달려드는 거야?]

[길드] [율 : 그래도..저 욕은 안 했잖아요!]

[길드] [무지개 요정 : 그래서 더 문제인 거라고!!ㅠㅠㅠ]

요즘 들어 무지개 요정은 심심치 않게 날아오는 유저들의 항의 우편을 받아보고 있었다. 내용 대부분은 율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왜 고객센터가 아닌 무지개 요정에게 항의하는 것이냐 하면, 신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배운 건지 율은 항상 욕설이나 인신공격 없이 교묘하게 상대방을 털어버리곤 했다. 말발에 밀린 이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무지개 요정에게 징징거리는 셈이었다.

율은 시언의 제안으로 두 달쯤 전부터 심리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꾸준한 변화를 보였다. 우선 길드원을 대하는 게 한층 편해진 느낌이었다. 아직까진 존대를 섞어 쓰긴 하지만, 길드원들의 만담 티키타카 사이에도 자연스럽게 끼어들기도 했고, 그들을 상대로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던지는 일도 많아졌다.

또한, 길드원들이나 시언에게만 의지하지 않고, 파티를 매칭 해서 사냥을 가는 일도 빈번했는데, 아무래도 직업 특성상 공격이 불가하다 보니 시답잖은 시비에 걸리는 일도 많았던 모양이었다.

[길드] [무지개 요정 : 아주 말라죽는다 내가 말라죽어!]

[길드] [율 : 왜 저한테만..]

[길드] [세츠나 : 그래도 막내가 먼저 털고 다닌 적은 없잖아요 시비 거는 쪽이 나쁜 거지 아니면 길마님은 막내가 호구처럼 당하고 다니면 좋겠어요?]

[길드] [율 : 누나ㅠㅠㅠ]

[길드] [무지개 요정 : 아니...그건...]

[길드] [율 : 이제 길마님은 제가 예쁘지 않으신 거죠?]

[길드] [무지개 요정 : ?!]

[길드] [율 : 요즘 들어 만날 혼내기만 하시고..]

[길드] [니지 : 길마님의 얄팍한 애정..]

[길드] [무지개 요정 : ?!]

[길드] [노아 : 난 율이가 저럴 때마다 막 뿌듯하던데ㅋㅋㅋ]

[길드] [제로사이드 : 동감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무지개 요정 : ?!]

[길드] [집사 : 망나니 같고 좋지 않습니까.]

[길드] [도련 : 망나닠ㅋㅋㅋㅋㅋㅋ]

[길드] [KING Husband : 인정]

[길드] [광인한 남자 : 광인한 남자로 거듭나고 있다는 증거]

[길드원 질풍님이 접속하였습니다.]

무지개 요정을 제외한 나머지가 율의 편을 들고 나서며 무지개 요정이 열세에 몰려가고 있는 도중, 질풍의 접속 알림이 떠올랐다.

[길드] [질풍 : 왕광은 당장 내 앞에 대령하라!!!!!!!!!!!!]

접속하자마자 인사는커녕, 대뜸 KING Husband와 광인한 남자를 찾는 그의 행동에 화제가 뒤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길드] [KING Husband : ??]

[길드] [광인한 남자 : 뭐여? 접속하자마자]

[길드] [질풍 : 두 죄인은 당장 외변권을 사도록 하라!!!]

[길드] [질풍 : 과인은 수시에 붙었도다!!!!!!!!!!!!!!!!!!]

[길드] [달빛 : 올~]

[길드] [세츠나 : 헐?! 헐!!!!!!!!]

[길드] [레이몬드현식 : !!]

[길드] [율 : 와! 축하해 형!]

[길드] [제로사이드 : 오!! ㅊㅋ!]

[길드] [도련 : 고생했다 ㅋㅋㅋㅋㅋ]

[길드] [츄파 : 와우내]

[길드] [아타락시아 : ㅊㅋㅊㅋ]

[길드] [니지 : 오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집사 : 파티라도 열어야겠네요.]

[길드] [노아 : 축하해 ㅋㅋ]

[길드] [욕정벌레 : 어머~ 축하해~]

[길드] [STRABABS : 고생했어!]

[길드] [질풍 : 흐흥~]

[길드원 KING Husband님이 로그아웃하였습니다.]

[길드원 광인한 남자님이 로그아웃하였습니다.]

[길드] [질풍 : ?!!?!?!?!?!?]

[길드] [세츠나 : ?!?!?!?!]

[길드] [도련 : 미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튀었엌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질풍 : 어디가!!!!!!]

[길드] [세츠나 : 저 시바새기들이 사바세계로 가고 싶나!]

[길드] [니지 : 잡앜ㅋㅋㅋㅋ잡아왘ㅋㅋㅋ]

[길드] [욕정벌레 : 전화햌ㅋㅋㅋ!!]

***

[길드 마스터 무지개 요정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 [무지개 요정 : 할로~]

게임에 접속하며 인사를 건네던 무지개 요정은 쉼터 구석에 앉아 있는 낯선 두 사람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마우스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커서와 함께 보이는 아이디에 뜨악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전날 신속하게도 질풍과 세츠나에게서 도망쳤던 KING Husband와 광인한 남자였다. 숨듯이 쉼터 구석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의 머리는 산뜻한 변발이었다.

[제로사이드 : 그러고 보니 막내도 곧 19이네]

[니지 : 어이구 울애기 언제 다 키워서 장가보내나ㅋㅋㅋ]

[노아 : 나한테 시집오면 됨ㅇㅇ]

[세츠나 : 저 오빠 또 저러넼ㅋㅋㅋㅋㅋㅋㅋㅋ]

[츄파 : 줜내 속내를 알 수가 없닼ㅋㅋㅋㅋ]

[도련 : 왜 꼭 막내가 너한테 시집을 가야 하는 거냐...네가 막내에게 시집을 가는 건 어떰?ㅋㅋㅋㅋ]

[노아 : 아?ㅋㅋㅋㅋ상관없음ㅋㅋㅋㅋㅋ]

[달빛 : 왘ㅋㅋㅋㅋㅋ쿨내난다 쿨내나 ㅋㅋㅋㅋㅋㅋ]

[질풍 : 참 사랑이다ㅋㅋㅋㅋㅋ]

[제로사이드 : 얔ㅋㅋㅋㅋ 성전환권 사주랴?ㅋㅋㅋㅋ]

[노아 : 오?]

[율 : 안 돼요!]

[율 : 시언이형은 지금이 제일 멋있는데!]

[노아 : 아ㅋㅋㅋㅋ 주면 받으려고 했는데 율이가 안 된댘ㅋㅋㅋㅋㅋㅋ]

[제로사이드 : 그럼 막내한테 사주랴?]

[노아 : 안 돼 ㅋㅋㅋ 율이도 지금이 제일 귀여움 ㅋㅋㅋㅋ]

[율 : 저도 주면 받으려고 했는데 형이 안 된대요ㅋㅋㅋ]

[제로사이드 : 이 망할 커플이...]

[세츠나 : 막내는 성전환하면 라비앙로즈 못 입잖앜ㅋㅋㅋㅋ]

[노아 : 그것도 그렇고 ㅋㅋㅋ]

[집사 : 레토르에도 동성결혼이 있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ㅋㅋ]

[제로사이드 : 오 그르게?]

[노아 : 건의라도 할까?]

[제로사이드 : 자네 우리 막내를 데려가기 위해 무엇을 준비할 수 있나?]

[노아 : 리본 테일 머플러라도 준비하겠습니다]

[무지개 요정 : 안 돼!!!!!! 이 결혼 반댈세!!]

[무지개 요정 : 엄마는 용납 못 해요!!]

[율 : 엑]

[무지개 요정 : ?!]

[제로사이드 :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니지 : 엑 이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도련 : 막내 반응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질풍 : 미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츠나 : 요즘 막내 반항기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지개 요정 : 내 새끼한테 반항기 같은 건 있을 수 없어!!!ㅠㅠ]

[도련 : 길마님이 요새 혼만 내니까 애가 비뚤어진 건 아닐까요?]

[집사 : 일리 있네요.]

[무지개 요정 : ?!]

[질풍 : 사랑으로 키워줘요 사랑으로!]

[율 : 맞아요!]

[율 : 전 아직 이렇게나 길마님을 좋아하는데!]

[무지개 요정 : !!]

[노아 : 어? 나는?]

[니지 : 누가 노아 오빠 좀 말렼ㅋㅋㅋㅋ]

[세츠나 : 마취라도 좀 시켜줘랔ㅋㅋㅋㅋㅋㅋㅋ]

따듯한 실내와는 상반된 차가운 공기에 두 사람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며칠 전 왔던 눈이 낮은 기온에 녹지 않고 얼어붙어 길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다.

자신을 바래다주는 시언의 손을 잡고, 일부러 쌓여 있는 눈들을 밟으며 걷던 율은 어느덧 도착한 집 앞 계단에서 떨어져 나가는 시언의 손끝을 멍하니 바라봤다. 조금 더 잡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들어가, 춥다.”

하지만 얼른 자신을 들여보내려는 시언의 목소리에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계단 위로 올라섰다. 한 칸, 두 칸, 올라서던 율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 시언을 바라봤다. 그리고 시언의 얼굴을 감싸 쥐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율을 바라보던 시언은 가볍게 닿고 떨어져 나가는 율의 입술과 멀어져 가며 서서히 열리는 눈꺼풀 사이에서 드러나는 율의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만을 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답을 바라셨잖아요.”

“?”

그리고 속삭이듯 들려오는 율의 목소리에 시언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그러나 이내 말 속에 담긴 뜻을 이해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길드원들과 장난스레 주고받았던 말 중, 무지개 요정을 좋아한다는 율의 말에 나는? 이라고 물었던, 그 의미 없는 물음에 율은 자신을 가득 메우고 있는 단 하나의 당연한 답을 해주려 하고 있었다.

“좋아해요, 형.”

“율….”

“정말 좋아해요.”

갑작스러운 율의 행동에 시언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채 멍하니 율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시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율은 금세 얼굴을 붉히며, 계단 위로 뛰어올라 손을 흔들며 도망치듯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율이 집 안으로 모습을 감춘 뒤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시언은 삐걱삐걱 걸음을 옮겨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한참을 밖에 서 있던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집안으로 들어서는 시언의 얼굴은 왜인지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그 옷깃은 서로 스칠 수 없는, 스치기 힘든 위치에 있는 것이라는 걸 안다. 자신이 택한, 수많은 인연의 스침 중에서 한시언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레인보우 힐이라는 길드에 가입하게 되는 인연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됐던 걸까.

만약에 자신이 레페르토르라는 게임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타나라는 서버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엔피씨 알바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어지지 않았을 그 인연은 애초에 자신에게 주어질 운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의 한구석에서 그저, 스쳐 지나갈 사소했을 것들이 정말 극히 적은 일부의 확률로 연쇄하듯 이어져 지금의 현재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자신을 데리러 오는 연인이 있고, 이제는 익숙해진, 타인과 함께하는 공간과 숨을 쉬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맞닿아 오는 체온이 지금 가진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율에게는 가슴이 벅찰 만큼 행복하고, 지켜내기에 급급한 일상이었다.

끝이 있는 관계. 시언의 노력으로 이어져 갈 수 있는 기간적 연인. 그 마지막이 당장 내일일지, 아니면 평생일지.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던 율은 슬쩍 시선을 돌려 제 옆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는 시언을 바라보다 다시 제 모니터를 바라봤다. 로딩이 끝나고, 전환된 게임 화면 안엔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는 자신의 캐릭터가 있었다.

[길드원 율님이 접속하였습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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